간에 붙었다 쓸개에도 붙는 ‘지혜’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피습된 뒤 벌어진 퍼포먼스들을 보며 ‘대명천지에 무슨 이런 일이!’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한국은 미국에 일방적으로 은혜를 입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따라 유지되는 관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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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호] 승인 2015.03.31 08:37:25 |
세상에는 참 별일이 많이 벌어지지. 피식 코웃음 한번 치고 넘길 수 있는 ‘별꼴’도 많지만 가끔은 뭐라 말이 안 나올 만큼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기도 해. 그럴 때 어른들은 이렇게 말한단다.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 ‘대명천지(大明天地)’, 그러니까 어둠 한 조각 없이 밝은 세상, 그래서 부당한 일들이 일어날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야. 하지만 좀 거슬러 올라가면 이 ‘대명천지’라는 말은 엉뚱한 데에서 기원해.
충청북도 괴산에 가면 화양동구곡(華陽洞九谷)이라는 곳이 있어. 조선 중기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깊은 계곡을 따라 특색 있는 아홉 곳을 골라 ‘구곡’이라 이름 붙였는데 그 가운데 5곡에 해당하는 게 ‘첨성대’라는 곳이야. 이 첨성대 근처 계곡 벽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숭정(崇禎)은 중국의 왕조였던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연호(年號)야. 해석하면 ‘숭정 황제의 해와 달이 비춰주는 대 명나라의 땅’이라는 뜻이 된단다. 이 말은 곧 이 나라가 명나라에 속해 있으며 그 황제의 은덕 아래에 있다는 구호가 되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반란군에게 북경을 빼앗기고 목을 매 죽었고 그걸로 명나라는 끝났는데, 조선 사람들은 이 땅이 망한 나라 임금의 일월(日月)이 비추는 대명천지(大明天地)라고 생각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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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영화 <태조 이성계> 중 위화도 회군 장면. |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집권층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고 해서 명나라가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인이라고 주장했고, 그 은혜를 저버리면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냐고 우겼어. 결국 의리를 지키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새롭게 일어난 청나라의 공격을 받은 게 병자호란이었지. 임금이 직접 항복하는 망신을 당하고도 조선의 선비들은 여전히 명나라의 신하를 자처했고, 그 신념 안에서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겼지.
이를테면 만동묘 제사나 기타 행사가 열리면 인근 고을에 ‘화양묵패’라는 것이 돌았어. 만동묘에서 이러저러한 행사를 하니 재물을 내놓으라는 일종의 고지서였다. 여기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명나라 황제에) 불충한 자들로 몰려 곤욕을 치러야 했단다. 이 만동묘 제사는 대한제국이 망한 뒤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니 역시 의지의 한국인이 아닐까 싶어. 일본은 이런 모습을 두고 한국인은 사대(事大) 근성, 즉 큰 나라에 빌붙으려는 속성을 지녔다고 비웃었고 일제강점기 동안 그렇게 교육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사대주의라고 해서 다 나쁜 것만은 아니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물산을 거느린 중국 대륙을 머리에 이고 살았던 우리 조상들로서는 사대주의란 나라의 생존과 이익을 확보하는 수단 중 하나였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 중국에서 힘깨나 쓰고 있는지, 대륙이 갈려 싸운다면 어느 쪽이 이기는지, 강력한 통일 왕조가 서면 어느 정도 허리를 숙여야 우리 영토를 넘보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지, 여차하면 어떻게 싸워야 우리의 생존을 지킬 수 있을지 등등을 분주히 궁리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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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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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신동욱 공화당 총재(위)가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기원하며 석고대죄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 밖에도 부채춤, 난타 공연(맨위) 등이 벌어졌다. |
중국의 왕조에 사대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던 조선 초기의 주자학자들도 여차하면 중국과 칼을 맞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어. 조선 초기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이 버릇없이 굴자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유학자 조준은 옛 살수대첩의 터전인 청천강변에서 이렇게 시를 읊어 명나라 사신의 입을 막아버렸단다. “청천강 물 하늘에 출렁이는데, 수나라 백만 대군을 이 물에 장사지냈네. 이제는 어부나 나무꾼의 이야기로만 남아, 나그네의 작은 웃음거리도 못 되는구나.” 이 조준은 태조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하려고 할 때 ‘사대(事大)의 예’를 주장하며 반대한 인물이야. 아니 요동 정벌을 준비한 이성계부터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라면서 위화도 회군을 해버린 사람이었잖니.
역사가 보여주는 ‘사대’의 진정한 의미
이렇듯 우리 역사에서 사대(事大)란 본디 마땅히 지켜야 할 의리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 대상을 교체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선택 사항이었고, 일방적으로 은혜를 입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따라 유지되는 관계로 보는 편이 옳을 거야. 이 순서와 내용이 헛갈려버린 것이 조선 중기 이후의 ‘대명천지’고 말이야.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피습된 뒤 아빠는 문득 이 나라에 또 하나의 ‘대명천지’가 도래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어. 우리나라 주재 외교관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습격당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크게 사과해야 할 일임에 분명해. 하지만 한복을 입고 나와서 사과의 부채춤을 추지 않나, ‘리퍼트 사랑해요’ 부르짖으며 큰절을 하지 않나, 난데없는 난타 공연이 벌어지다가 무슨 발레까지 한다며 뛰어다니는 모양새에는 “대명천지에 무슨 이런 일이!”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더구나. ‘사죄’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절대안정이 필요한 환자가 쉬지 못한 것도 난감한 일이지만 현직 대통령의 제부가 ‘이런 건 왕족이 하는 거’라며 석고대죄 퍼포먼스까지 벌이는 데에는 이 땅이 ‘미국일월 대미(大美)천지’로 바뀐 건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
아빠는 우리나라가 미국과 계속 친해야 한다고 생각해. 미국은 현재 세계 최강국이고 협력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그러나 아빠는 수천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발휘해왔던 지혜를 되찾았으면 좋겠어. 강대국의 이익이 우리의 이익과 일치할 때와 일치하지 않을 때를 가리고, 간과 쓸개 사이를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며 생존을 지킬 줄 알고, 여차하면 분연히 일어서서 침략 행위에 저항할 줄도 아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거야. 여기는 대한(大韓)천지지, 대명천지나 대미천지가 아니어야 하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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