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와 임태희, 비밀접촉 팩트가 다르다"
[MB의 시간과 비용] <1>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16 11:24:51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프레시안(최형락)
이명박 대통령의 기술
2009년 11월 7일, 개성에서 우리 측 통일부와 북한 측 통일전선부의 실무 접촉이 있었다. 이날 회담에서 북한은 임태희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서명한 내용이라며 세 장짜리 합의서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북한이 제시한 문서에 의하면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으로 우리 측이 옥수수 10만 톤, 쌀 40만 톤, 비료 30만 톤의 식량을 비롯하여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어치를 제공하고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를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북측이 8월에 정상회담을 처음 제안한 시점부터 줄곧 요구해온 조건과 동일했다. 문서에 지원 내역과 일정을 정리해놓은 것이 마치 무슨 정형화한 '정상회담 계산서'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임 장관을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합의서를 써준 적은 없습니다. 회담이 중단된 후 통-통(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 날짜를 잡자고 하니 김양건이 그동안 어떤 내용이 논의되었는지를 확인만 해달라고 해서 확인해준 것은 있습니다. 김양건이 그대로 가면 죽는다고 해서.(…) (<대통령의 시간> 335페이지)
임태희 전 비서실장 인터뷰
북핵 문제가 정상회담 의제로 올라가는 데 거의 의견 접근이 이뤄졌다. 원래는 싱가포르에서 내가 전권을 갖고 정상회담 협의를 마무리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협상 막바지에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결론을 내지 말고 최종 서명은 통일부에 넘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부장과 큰 원칙만 결정하고 실무협의는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에서 마무리하기로 이야기를 마쳤다. 내가 국회의원 신분이었다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합의를 끝냈어도 되는데 노동부장관 신분이었기에 마무리는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에서 맡는 것이 좋겠다는 정부 입장을 들었다.
그 후 장관급회담이 아닌 실무회담이 진행됐는데 양측이 싱가포르 협의의 연장선과는 다른 요구를 하면서 결국 정상회담이 무산됐다.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이 정상회담을 대가로 5억~6억 달러를 요구했기 때문에 무산됐다는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북한이 그런 요구를 했다면 대통령이 협상을 허용할 리 만무했을 것이며 실제 김양건 부장도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이 대목에서 임 전 실장은 지금 생각해도 많이 아쉽다는 듯 연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월간중앙> 201403호 中, 2014.02.17.)

▲빌리브란트의 동방정책 비사,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비사 등을 들춰보는 이유가 있다. 큰 지도자가 어떻게 난관을 극복해 성과를 이뤘는가에 대한 서사적 흐름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회고록은 아무런 성과도 없는, 변명으로만 일관했다. ⓒ프레시안(최형락)
"MB 회고록, 자기 부하들에게 부정당했다"
[MB의 시간과 비용] <2>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17 10:37:19
MB의 시간과 비용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천안함 폭침이 일어나고 6개월 뒤인 2010년 9월, 북한 신의주 일대에 대규모 수해 피해가 발생했다. 우리 정부는 수해 피해 복구를 위해 쌀 5000톤과 컵라면 300만 개 등을 북한에 지원했다.(…) 이로써 인도적인 지원 품목마저도 군대와 엘리트 계층의 결속에 활용하는 북한 정권과의 진정한 대화는 지난한 과제임이 분명했다. 2010년 11월 23일, 북한은 연평도의 우리 해병대 기지와 민간인 마을에 해안포와 곡사포로 추정되는 포탄을 발사했다. 나는 보고를 접하고 즉각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소집했다. 상황실로 향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6.25 이후 그때까지 남한의 본토가 공격받은 전례가 없었다.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무너질 것을 각오하고 전면전을 일으킬 용기는 없다고 생각됐다. 중국조차 그런 상황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기습 공격이라 생각하고 대응 방안을 고민하며 상황실에 도착했다. (<대통령의 시간> 346페이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중국도 한미연합훈련을 반대하며 11월 27일 다이빙궈 국무위원을 급히 한국에 보냈다.(…) 이어 다이빙궈는 한미연합훈련이 전쟁으로 확전되지 않도록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다이빙궈에게 이야기했다.
"대통령이 되어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한미 관계가 한중 관계의 발전을 가로막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 관계이지만 미국이 동북아 국가를 공격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반대할 것입니다. 북한의 도발이 없었다면 조지워싱턴호가 서해에 들어오는 것도 반대했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시간> 283페이지)
이상의 전 합참의장 인터뷰
"대통령 처지에서 가장 리스크가 적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적 어뢰가 천안함을 격침했다고 하면 정상회담을 추진해온 그로서는 큰 위기에 직면한다. 피로골절로 부러졌다고 하면, '같은 연수(年數)의 초계함이 작전 중인데 왜 천안함만 부러지는가'라는 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회수하지 못한 기뢰가 터졌다고 한다면 큰 부담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도 다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대가 대통령을, 국가를 책임진 사람이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wishful thinking(소망적 사고)' 쪽으로 유도했다고 본다.'
"우리 군은 '허상(虛像)' 위에서 훈련한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보복이나 반격작전을 승인했다고 보고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통령은 그 작전을 승인해주지 않으니,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대통령이 승인해줄 것으로 치고 하는 '했다 치고 작전'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대통령과 측근들이 항시 군사훈련에서 배제되는 것이 큰 문제다. 키리졸브 등 큰 훈련에 참가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유사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지 않고 남북정상회담 같은 허황된 목표만 내세우니, 우리 군은 무력한 대응으로 이어지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신동아> 2014년 8월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나기 1달쯤 전인 2012년 10월 18일 연평도를 방문했다.ⓒ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 주장
상황실 TV를 보니 실제로 그런 엉뚱한 보도(대통령 초기 메시지로 확전 자제)가 자막으로 나오고 있었다. 황당한 생각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디서 저런 소리가 나온 거죠? 하지도 않은 얘기가 왜 뉴스에 나와요? 누가 저런 말을 언론에 했어요? 지금 우리 민간인이 포격당했는데 확전을 걱정할 상황이에요?" 알고 보니 언론의 브리핑 요구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회의에 참석한 한 인사의 사견이 잘못 전달되어 언론에 나간 것이었다.(…)나중에 보니 군에서는 확전 자제라는 말을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하라'는 뜻으로 쓰고 있었다. 물론 한반도에 전면전이 발생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그러나 영토가 공격받는 상황에서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첫 메시지로는 부적절한 내용이었다. (<대통령의 시간> 347페이지)
김태영 전 국방부장관의 증언
(대통령은) 단호하지만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는 걸 겸해서 (지시)말씀했다. 도발이 있을 때 가장 적합한 조치다.(김태영 당시 국방부 장관. 연평도 포격 다음 날인 11월 24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한 자리에서 "대통령의 최초 지시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한 대답.)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
나는 다시 한번 확고한 대응을 강조했다.
"평상시 교전수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민간인에게 무차별 표격을 하는 상대에게는, 분명히 다시 이야기하지만 우리 영토와 국민에 대한 공격에는 교전수칙을 뛰어넘는 응징을 해야 합니다.'
한 의장은 2014년 6월 국방부장관 후보자로 국회 청문회에 나가 "당시 이 대통령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인 만큼 4~5배의 강력한 대응을 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밝혔다.(…) 확고한 대비책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수세적이고 소극적인 교전수칙과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의식이 문제라고 봤다. 나는 유엔군 사령부의 정전시 교전수칙을 개정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대통령의 시간> 349페이지)
MB "촛불 때 죽었어봐…'글로벌 코리아' 못 외쳤지"
[MB의 시간과 비용] <3> 정의당 박원석 의원 "억하심정으로 쓴 책"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18 08:17:41
MB의 시간과 비용
박원석 정의당 의원 "대통령의 시간? 자화자찬의 시간!"

▲ 정의당 박원석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김 본부장이 대답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와 통화하면서 이면 합의를 했습니다. 그걸로 담화 발표까지 했습니다. 2007년 9월 APEC을 계기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또 한 번 구두로 합의했습니다. 그 내용과 문서가 유출됐답니다. 특정위험부위(SRM)를 제외하고는 월령 제한 없이 전부 수입하겠다는 내용이라 합니다. 보커스는 한국 정부가 그 합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입니다."(<대통령의 시간> 229페이지)
김종훈 새누리당 의원(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의 주장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출간되면서 과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습니다.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통상교섭본부장 직을 수행한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국민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와 관련해서 국민들께서 모르는 이면합의는 그때도 지금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런 약속도 없었나? 있었습니다.
그 약속이 국민들께서 모르는 숨어있는 약속이었나? 아닙니다. 국민들께서 모두 아시는 약속, 바로 노무현 당시 대통령께서 2007.4.2. 대국민 담화를 통해 밝혔던 내용입니다. 지금 불거진 오해는 한미 정상 간의 동일한 통화 내용을 두고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측의 '이면합의'라는 시각상의 차이 때문으로 보입니다.(김종훈 의원이 낸 2월 2일 자 보도자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PD수첩>이 방영되자 중고생들을 중심으로 인터넷에 광우병 괴담이 퍼져 나갔다. 주로 연예인 팬클럽 등을 중심으로 유포된 내용은 "광우병은 공기로도 감염된다", "화장품이나 젤라틴 성분이 들어간 생리대, 기저귀로도 전염된다", "쇠고기를 다룬 칼과 도마로 수돗물까지 오염된다" 등으로 그야말로 괴담이었다.(<대통령의 시간> 115~116페이지)
(☞ 한미FTA-美쇠고기 관계가 애매? 가카의 '인증샷' 보라)

▲ 2008년 '100만 촛불집회'의 시작은 10대 소녀들이었다. ⓒ프레시안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
고민 끝에 추가 협상에 관한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국민에게 솔직하게 밝히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6월 19일 나는 청와대 춘추관에서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광우병 사태에 대한 입장을 다시 밝혔다.
"국민이 원하지 않는 한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정부의 확고한 보장도 확실히 받아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미국과의 재협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가 이익을 지키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후유증이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대통령의 시간> 124페이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집회가 정권 퇴진 주장 양상으로 변하자 일각에서는 17대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대선 불복 세력'이 집회를 주도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대선 불복 세력이 건강을 염려하는 순수한 국민들의 뜻에 편승해 대통령과 정권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 세력들이 집회에 개입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117페이지)
그런데 시민단체의 지지를 기반으로 탄생한 전임 정부는 시민단체와 가까운 관계를 지속했다. 정권 교체로 이 두 주체가 다시 분리돼 정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광우병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광우병 사태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많은 시민단체들이 정부보조금으로 운영됐다는 사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대통령의 시간> 129페이지)

▲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졸속 타결을 풍자하는 패러디들. ⓒ디시인사이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무엇보다 한·미 FTA 발효 후 대미 무역흑자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은 협상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한다. 2011년 107억 달러였던 대미 무역흑자는, FTA 발효 첫해인 2012년에는 152억 달러, 2013년에는 206억 달러로 크게 늘었다. 미 의회에서 "한·미 FTA가 미국에 불리한 조건으로 타결됐다"는 불만 섞인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도 한국에 대한 서비스 흑자가 2011년 54억 달러에서 2012년 65억 달러로 늘었다. 양국 모두가 윈윈하는 결과를 낸 것이다.(<대통령의 시간> 234페이지)
김두우 전 홍보수석이 전한 에피소드
대통령 : 이젠 내 의견을 좀 이야기하려 해요. (…) 다섯째는 좀 멜랑콜리해. <모든 정책의 바탕에는 사랑이 있었다>. 여기에는 친서민정책, 복지, 신고졸시대까지 넣자 이거지. 일반 회고록에 쓰지 않는 용어로 말이야. (대통령은 칠판에 계속 써나갔다.)
강만수 : 좋은 것 같습니다. (강 전 장관의 말에 참석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통령 : (…) '모든 정책의 바탕에는 사랑이 있었다', 이것도 이유가 있어요. '광우병 파동이 일어났을 때 왜 강하게 밀고 나가기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힘이 있다고 때려잡는 건 군사독재 방식이지. 시위대를 전부 연행하고 구속하고, 그러다가 한두 명이라도 죽었다고 생각해봐요. 그랬으면 나는 국제사회에서 글로벌 코리아를 외칠 수 없게 됐을 거야.
- <대통령의 시간> 부록 <오늘 대통령에게 깨졌다>(김두우 지음) 63~64페이지

ⓒ프레시안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
9월 위기설이란 그해 5~6월의 광우병 파문이 진정되면서 곧바로 등장했다. 2008년 9월 14일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이 67억 달러인데, 외국인들이 이 채권을 모두 처분하면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미네르바'라는 네티즌이 중심이 되어 야당과 일부 언론, 심지어는 일부 학자들까지 이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당시 외환보유고가 2,400억 달러에 이르는 상황에서 67억 달러의 단기 채권으로 외환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9월 위기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 광우병 사태를 주도하던 세력 중 일부가 9월 위기설을 매개로 인터넷을 이용해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강만수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며 정부를 비난했다.(<대통령의 시간> 134~135페이지)
'미네르바' 박대성 씨는 2009년 1월 허위 사실 유포죄로 검찰에 구속됐지만,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박 씨에 대한 구속 수사가 '정부의 심기가 불편해서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MB는 회고록에서도 박 씨가 주장한 '9월 위기설'을 괴담으로 치부하고 있다. '미네르바 같은 비전문가에게 나라 경제가 휘둘렸다'는 식이다. MB가 국민을 우매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전기통신기본법 위반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법률을 적용해 입에 재갈 물리는 식으로 구속한 것 자체가 '공안 통치'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부에 대한 정상적이고 건전한 비판조차도 수용하지 못하는 속 좁은 통치 행태를 보였다.
(☞ '공권력의 역습'…경찰, '천안함 미네르바' 무차별 조사)

▲ 정의당 박원석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MB, 거짓말로 4대강 강행…배후는?"
[MB의 시간과 비용] 김진애 전 의원 "MB 회고록=사기꾼의 핑계"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20 08:55:25
MB의 시간과 비용

▲ 김진애 전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2008년 12월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11조 원 규모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보고했다. 홍수와 가뭄, 오염으로 몸살을 앓는 4대강 정비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560~561페이지) 대운하 계획을 포기함에 따라 조령을 관통하는 인공 운하 공사는 필요 없어졌다. 그러나 기존 하천을 정비하는 계획은 4대강 살리기에 상당 부분 적용할 수 있었다.(<대통령의 시간> 564페이지)
감사원 결과 및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측 보도자료
1) 감사원 '4대강 살리기 사업 설계·시공 일괄입찰 등 주요계약 집행실태'
○ (담합빌미 제공) 국토부는 대운하 중단(’08.6월)이후 대운하 사업(민자)을 4대강 사업(재정)으로 변경하고도 추후 운하추진에 지장이 없도록 4대강 MP수립(’09. 6월)
- 이 과정에서 ○○○○컨소시엄으로부터 경부운하 설계자료를 제공받거나 대운하 설계팀과 4대강 준설·보 설치계획 등에 대운하 案 활용 및 반영여부 등을 협의
* (대운하 案) 정부에서 재정으로 낙동강 하구~상주 구간에 준설·보 설치로 최소수심 6.1m를 확보하면 갑문(魚道나 둔치를 이용하여 설치)·터미널 등 운하 시설을 민자로 추진하는 계획(’08. 10월~’09. 4월)
※ 대운하설계팀<대운하연구회 회장(전 인수위 한반도 대운하 TF팀장) 및 ○○○○컨소시엄과 계약을 맺고 경부운하 제안서를 준비한 (주)◇◇부사장>에서 수립한 계획, ○○○○컨소시엄도 유사한 계획 마련
2) 이미경·임내현·윤후덕·박수현 의원 공동 기자회견 '4대강 사업 국토부 비밀 내부문서 전격 공개'
○ 2008년 12월 2일 청와대 집무실에서 균형위 위원장과 6개 부처 실국장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직접 "4대강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5~6m가 되도록 굴착 할 것"을 지시했음.
○ 이후 2009년 2월 16일 미상의 장소에서는 비서실장과 국정기획 비서관등 청와대 비서관, 국토부 장·차관을 대동한 자리에서 "하상준설(최소수심)은 3~4m 수준으로 추진"할 것을 지시했음.
○ 2009년 2월 8일 국토부 4대강살리기기획단에서 작성한 「4대강 살리기」 추진현황보고에 따르면, 4대강 사업 준설 깊이 결정시 고려사항으로 "(뱃길복원) 역사적 뱃길복원 도시내 유람선 운행구간은 선박운행이 요구되는 수심(3m내외)과 수로폭(50~100m확보)"라고 명시하고 있음.(이미경·임내현·윤후덕·박수현 의원이 낸 2013년 10월 2일 자 보도자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우리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은 환경 개선과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국제사회의 두 가지 요구를 한꺼번에 만족시키면서 적시에 추진될 수 있었다. 실제로 4대강 살리기 사업은 한국이 세계 금융위기를 다른 OECD 국가들보다 빨리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한 해 수백 명의 인명 피해와 수조 원의 재산 피해를 내는 수해에 대한 근원적 해결방안을 마련하는 기초가 됐다.
2011년 10월 미국을 국빈 방문하여 오바마 대통령과 비공식 만찬을 가졌다. 식사 도중에 오바마는 세계 금융위기를 맞아 한국이 즉각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고 효율적인 재정 투자에 나설 수 있었는지 물었다.
나는 오바마에게 긴 설명은 하지 않았다. 대운하 사업부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려면 우리의 정치적 문제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다행히 사업 계획의 4대강 정비 내용이 이미 선거 공약에 들어 있었고, 한국은 미국에 비해 국토가 작아 그만큼 빨리 할 수 있었다고 대답했다.(<대통령의 시간> 564~565페이지)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09년 4월 27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4대강 살리기' 합동보고대회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집중 호우 피해로 하천 정비 계획이 발표됐으나 실행되지 않았다며 "매번 하천 정비는 투자 우선순위에 밀려 방치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왕 4대강 정비 사업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며 제반 사항을 재점검하도록 지시했다"(563페이지)고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수많은 논의를 거친 끝에 2009년 6월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15조 3000억 원의 4대강 살리기 마스터플랜을 확정했다. 일각에서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예산이 22조 2000억 원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4대강 살리기 사업과 별도로 농림수산식품부와 환경부가 계속 사업으로 진행해온 6조 9000억 원의 예산이 포함된 금액이기 때문이다.
이와 별도로 한국수자원공사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에 8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자는 정부가 내주지만 원금은 4대강 살리기 사업 완료 후 주변 개발에 따른 수익으로 한국수자원공사가 충당하기로 했다.(<대통령의 시간> 563페이지)

ⓒ프레시안(손문상)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
강바닥에서 나온 쓰레기 총량은 286만 톤에 이르렀다. 덤프트럭 19만 대 분량으로 남산 몇 개만큼의 규모였다. 1960~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강물에 내다버린 산업 폐기물과 생활 쓰레기였다. 당시만 해도 환경보다는 가난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 과제였다. 나도 이태원 시장에서 환경미화원을 하면서 새벽마다 시장 쓰레기를 한강변에 내다 버리곤 했었다. 그같이 쌓인 쓰레기 위에 모래가 덮이고, 그 위에 다시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4대강은 엄청난 양의 쓰레기 위를 흘렀던 것이다. 그런 4대강을 있는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을 보호하는 일이 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준설 과정에서 나온 모래와 자갈을 팔아 공사비에 쓰려 계획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 참담했다. 기대 이하의 양으로 나온 모래와 자갈은 해당 지자체에 위임하여 지자체 수입으로 활용하도록 했다.(<대통령의 시간> 569페이지)
김진애 : '말하지 않음'으로 해서 거짓말이 된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 당시 국고를 한 푼도 안 들이고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그게 22조 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국민 세금으로 모두 충당했다. 그나마도 "모래와 자갈을 팔아 공사비로 쓰려 계획했"는데 "덤프트럭 19만 대 분량"의 쓰레기가 묻혀 있어 "참담했다"며, 강에 묻힌 쓰레기는 박정희 시대 산업화·도시화의 결과라고 말했다. 전형적인 사기꾼의 핑계다.

▲ 2012년 8월 낙동강 본류에 나타난 녹조 현상(왼쪽)과 2014년 7월 낙동강 중·하류에서 발견된 큰빗이끼벌레(오른쪽). ⓒ프레시안 자료사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2014년 또다시 혹독한 가뭄이 찾아왔다. 그러나 4대강은 과거처럼 바닥을 드러내지도, 군데군데 썩은 물이 고여 악취를 풍기지도 않았다.
이에 반대론자들은 '큰빗이끼벌레'라는 태형동물을 내세워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비난했다. 보로 인해 강물의 유속이 느려지고 오염이 된 결과 큰빗이끼벌레가 창궐한다는 주장이었다. 큰빗이끼벌레의 흉하게 생긴 모습을 통해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증폭시켰다.(578~579페이지)
피요르드 지역을 둘러보는 도중에 나는 물이 고인 웅덩이에 녹조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4대강 살리기 공사 지역에 녹조가 발생했다고 비판이 높을 때였다. 청정 지역인 그린란드에 녹조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동행한 아우켄이 말했다.
"원래 녹조라는 것이 일정 시간 수온이 올라가서 며칠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입니다. 기온이 낮아지면 다시 없어집니다."
너무도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는 아우켄의 모습이 국내의 모습과 크게 대비되어 보였다. 과거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사태부터 4대강 녹조 그리고 최근 큰빗이끼벌레 사태까지, 정치적 목적으로 지나치게 과장하여 국민의 불안을 조장하는 풍조는 이제 극복되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대통령의 시간> 609페이지)
(☞ "MB, 낙동강 녹조 현상이 하늘 탓? 4대강 탓!")
(☞ 낙동강서도 '큰빗이끼벌레'…"4대강, 호수됐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긴 시간 말씀 감사하다.(끝)
MB는 '외교의 신'…잘못한 건 노무현 탓?
[MB의 시간과 비용] <5> 문정인 연세대 교수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24 07:12:44
"기록물 자체로 가치는 있다. 그러나 읽는데 곤혹스럽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읽으며 내놓은 총평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화제다. 퇴임한 지 2년 만에 이런 회고록을 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그 내용이 황당해서 그렇다. 누군가는 이를 '공상과학소설'로, 또 누군가는 이를 '공소장에 앞선 피의자 조서'로 표현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은 이 회고록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어디까지 우리가 믿을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대통령 회고록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이 회고록과 무관하게 <프레시안>은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와 함께 지난해부터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체적인 검증 작업을 벌여왔다. 그 작업을 묶어서 낸 책이 <MB의 비용>이다.
'MB의 시간과 비용'이라는 기획은 철저하게 이명박 정부의 정책 평가를 위한 기획이다. 회고록 중 크게 논란이 된 한미 쇠고기 협상, 대북 관계, 외교 안보 문제, 4대강 사업 평가 등에 대해 전문가와 함께 조목조목 따져봤다. 많은 독자들을 대신해 <대통령의 시간>을 낱낱이 해체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MB의 시간과 비용' 5~6편에서는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인터뷰를 소개한다. 문 교수는 미국국제정치학회 이사를 지냈고,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시대위원장,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를 역임했다. 인터뷰는 프레시안 협동조합 박인규 이사장이 진행했다. 편집자
MB의 시간과 비용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외교의 '신'이 불편하다"
프레시안 : <대통령의 시간>을 읽어본 총평이 어떤가?
문정인 : 쉽게 잘 쓴 회고록이다. 역대 대통령의 자서전, 회고록과 비교하면, 대외 정책에 대해 할애한 부분이 많았다는 점, 그런 면에서는 획기적이라고 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외교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역할이 과장된 측면이 다소 있어 보인다. 회고록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전 대통령은 완전히 '외교의 신'이다. 다자외교도 그렇고 양자외교도 그렇다. 대통령의 탁월한 영도력으로 다 잘 됐다는 취지로 기술이 이어지니까, 그 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둘째, 책임 전가는 좀 안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회고록이라는 게, 본래 본인을 방어하기 위한 기제가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지만, 이를테면 '쇠고기 파동'은 노무현 탓이고, 남북 관계는 북한 탓이고 하는 식으로 기술을 해 놓았더라. 모든 것을 제 3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셋째, 과대포장의 오류도 범하는 것 같다. G20정상회의를 유치해서 '국제 규칙의 추종자 (rule follower)'에서 '룰 메이커 (rule maker)'가 되었고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식의 자찬이 많은데, 이는 문제가 있다. G20 정상회의에서 우리가 만든 '룰 (rule)' 이 어떤 게 있나. 큰 국제회의 한번 한다고 선진국이 되나. 게다가 G20정상회의가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안다. 더구나 경제적 파급 효과도 수십조 원에 달했다고 하는데, 증명할 수가 없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 자료사진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회고록은 보통, 알려지지 않았는데 의혹이 있었던 부분에 대해 해명할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정인 : 그런데 이 책에는 의혹에 대한 해명이 없다. 대표적인 게, 2008년 일본 훗카이도 도야코에서 개최된 G8 확대정상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요미우리 신문>은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보도했다. 독도 문제의 교과서 해설서 기술과 관련해 이른바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말이었다. 그런 부분도 속 시원히 해명이 됐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없다. (<요미우리 신문>은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7월9일 홋카이도 도야코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서 후쿠다 야스오 총리로부터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다케시마를 일본땅이라고 명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뒤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다케시마는 독도의 일본식 지명이다. 편집자)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의 발언 관련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2012년 1월 10일 원자바오 총리와 회담이 있었다. 회담을 마치고 우리는 조어대 만찬장에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는 북한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오갔다.(…) 김정은도 김정일처럼 죽을 때까지 집권할 텐데, 우리에게 참고 인내할 시간이 있겠느냐는 뜻으로 나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역사의 이치가 그렇게 되겠습니까?"
원자바오가 의미심장한 답변을 했다. 중국 지도자가 북한의 장래를 두고 '그리 오래 참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의미의 발언을 한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원자바오와 만찬을 마친 후 나는 중국이 나를 재차 국빈으로 초대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자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했다. 더불어 내가 취임한 첫 해에 국빈 초청을 했듯이, 떠나는 마지막 해에도 새해 첫 국빈으로 초청해 그간의 정리를 돈독하게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대통령의 시간> 297페이지)
프레시안 :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 발언을 인용한 부분이 상당히 문제가 됐다.
문정인 : 2008년 5월 하순 이 대통령이 북경을 국빈 방문했는데, 당시 청와대 측 사람들이 '조선의 과거 왕부터, 대통령 할 것 없이 한중관계 2000년에 이명박 대통령처럼 중국의 지도자 후진타오에게 당당하게 얘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북한의 인권과 민생 문제를 얘기했다고 하는데, 중국 지도자의 반응은 어땠는지도 나왔으면 했다. 너무 일방의 진실만 얘기하는 것 같다. 참회는 아니라도 어려웠고 고뇌하던 이야기도 들어가야 설득력 있는 것 아닌가. 사실 정서상으로는 우리 대통령을 믿고 싶고, 믿어야 할 텐데, 그게 잘 안 된다.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의 발언들이 나오는데, 그 발언들에 대해 원자바오가 아니라고 하면 어쩔 것인가. 그 외에도 여러 기술들을 보면 아전인수적 성격이 굉장히 강해 보인다. 본인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듯한 부분도 있다. 296페이지를 보면 '역사의 이치가 그렇게 되겠습니까'라는 원자바오 전 총리의 발언이 나온다. 이게 북한의 붕괴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비핵·개방·3000, 그랜드 바겐 모두 실패했는데 성공한 정책이라고 기술한다. 이 전 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본인이 희망하는 것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흐릿하다. '희망적 기대'를 하나의 기정사실로 해석하는 경향들이 나타난다.
모순적인 부분도 여러 군데 나온다. 이를테면 이렇다. 본인이 가장 희구한 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인데, 정작 본인이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소개하는 지도자가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등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의 보편적 가치에 충실했다고 하면 이런 지도자들과 연대가 강하다고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모순적이다. 그리고 상당히 비상식적인 게 있다. 양자 정상회담에서 제삼국의 정상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 게 국제적인 관례인데…. 그리고 본인은 북한의 '갑질' 행태를 바꾸고 싶어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본인이 '갑질하는 것으로 비친다. 잘못된 우월주의다. 이런 것은 아들 부시와 비슷하다. 북한을 실패한 국가, 불량국가로 규정하고 북한을 옳은 길로 이끌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북한에 대한 오만한 '갑질'이 아닌가. 청계천 문제 해결하는데 역지사지 태도가 크게 효과를 보았다고 주장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역지사지 태도가 없었다.
과거 정부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본인의 큰 업적으로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의 제도화를 들고 있는데 여기서도 더 겸손해 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사실 노무현 정부 때 한국 외교통상부 주도 하에 제주도에서 한중일 3국 외무장관 회담을 했었다. 그때 (정례화를 위해) 사무국을 둔다고 해서 인천 송도와 제주도가 사무국을 유치하려고 경쟁도 했다. 정상회담 제의 자체는 이명박 대통령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 구상은 노무현 정부 때 이미 만들어 졌다. 그런 부분을 인정하고 쓰면 안 되는가. 모든 것을 자기가 했다고 해야 하는가. 미국 비자 면제 문제도 노무현 정부 당시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장관이 협상을 시작했고 진전도 보았다. 실무적인 부분에서 시간이 걸리는 것인데, 본인이 부시 전 대통령과 가까워서 됐다고 일방적으로 기술하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과거 정부에서 한 일을 인정하고 칭찬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나는 한중일 3국이 협력하여 EU나 NAFTA에 견줄 만한 경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방법론에 있어 보다 현실적이고도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 그 답이 있다고 보았다. 내가 2008년에 중일 양국에 3국 정상회의를 제안한 것은 그런 뜻이었다.(…) 또한 3국 협력사무국을 서울에 두고 상호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자고 제안했다. 내 제안이 받아들여져 3국 정상회의는 2008년부터 일본, 중국, 한국 순으로 순차적으로 5차례 개최됐다.
내 제안이 받아들여져 (2010년 10월 5일 제안) 하노이에서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렸다.(…) 나는 이 회의를 주재하며 원자바오 총리와 간 나오토 총리를 화해시키고자 노력했다...나는 가운데 서서 두 사람의 손을 잡아 끌어 서로 맞잡도록 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어떤 경우라도 한일중 정상회의가 정례적으로 열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2013년(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에서의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리지 못한데 대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 (<대통령의 시간> 412~415페이지)
"이명박 때 한미 관계 좋았다고? 美 측은 '노무현 때가 더 좋았다'"
프레시안 : 저도 읽으면서 제일 눈에 띠었던 게 대외 관계와 관련된 기술이 거의 절반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북한 핵문제나, 한미, 한중 관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굉장히 엄중한 일인데, 그런 부분에 대한 진지한 인식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문정인 : '김대중, 노무현 정부 사람들이 북한하고 가까워서 한미동맹을 망쳤다'는 게 이 전 대통령과 측근들의 인식인 것 같다. 김태효 전 대외전략비서관이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논지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자기들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리다'는 태도는 오만이자 아집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뭐가 틀렸나. 이명박 정부가 '바로 잡았다'고 내세우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겸손해야 한다. 한 국가의 외교정책은 시대정신과 당대 국익의 반영이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의 대승적 이익을 위해 정책을 폈던 것이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정부 반대하기 위한 정책만 하려 한 것 같다. 오죽했으면 ABR(Anything But Roh, 노무현식만 빼고 다)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정치와 정책을 혼동한 그런 정권이었다. 정책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퍼포먼스 스픽스 (Performance speaks)', 즉 잘 된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데,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것 중에, 결과가 잘 된 게 있었나. 이명박 정부 마지막에 한중관계는 상당히 악화됐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하느라 그렇게 노력한 게 아닌가. 이 대통령의 일와 발언과 독도 방문 때문에 한일 관계는 깨졌다. 한미 관계도 평택 미군기지 문제가 진전이 안 되는 등, 여러 가지 상당히 불편한 게 있었다. 또 일본과의 군사비밀보호협정을 이 전 대통령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한미 관계는 더 불편하게 됐다. 그러니 워싱턴에서 '노무현 정부가 차라리 나았다'는 평이 나온 것 아닌가. '약속을 지킬 것은 지켰다'는 이유였다. 모든 외교가 망가졌다는 게, 이명박 정부 끝날 시점의 전반적인 평가였다. 이것은 팩트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에게 부담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고 하더라도 못한 것은 못했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프레시안 : 한일관계는 독도를 방문한 게 영향을 크게 미친 것 같은데, 한중 관계가 악화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문정인 : 중국 정부가 원했던 것은 한반도의 평화안정이다. 북한 비핵화가 전면에 나오긴 했지만, 한반도 평화 안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중국은 남북관계 개선을 원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한국 정부의 대 미국 의존도가 낮아져서 중국과 좋은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오히려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고,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그래서 중국이 한국을 불편하게 봤던 것이다. 정리하면 북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적대적 태도가 한중 관계 악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리고 6자회담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 고강도 한미군사훈련, 그리고 한미일 미사일 방어체계(MD) 참여 가능성 거론 등도 문제가 됐다. '발가벗은 임금님' 동화가 생각난다. 이 전 대통령은 본인이 밝힌 대로, 후진타오 12번, 원자바오 9번 등 총 21회 정상회담을 했다. 본인 재임 5년 간 한중 관계가 진화했고,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참모들이 제대로 보고했는지 의문시 된다.
한중 정상간 만남의 상당 부분이 다자 회담 틀에서였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계속 불편한 진실을 얘기한 것으로 안다. 후진타오 주석이 이 전 대통령을 만나서 밝게 웃는 것을 거의 본적이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게 있다. 2009년 10월 초순 원자바오 전 총리가 평양을 방문 직후 북경에서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 이야기는 회고록에 안 나왔던데, 이 전 대통령이 중국에 따졌다는 것이다. '북한이 저런 식으로 2차 핵실험을 하고 도발적으로 나오는데 중국이 계속 북한을 지원, 비호하면 되느냐. 제재를 가해야 할 중국이 그것을 안 하고 있다'는 취지였다. 원자바오의 답변이 이랬다 한다. '우린 유엔안보리 결의안을 전부 준수한다. 그러나 그 결의안에 중국-북한 간 정상적 통상 관계를 금지하는 것은 없다. 그랬다면 우리는 유엔 결의안에 거부권 행사를 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중국 친구들에게 들었는데 회고록에는 이 대목이 없다. 결국 좋은 것만 골라서 얘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이건 선택적 기억이다.

▲이명박 대통령(가운데)와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오른쪽) ⓒ 연합뉴스
북한이 정상회담 애걸? 이 전 대통령이 오히려 더 안달!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그 무렵인 2009년 10월 24일, 타이 후아힌에서 아세안+3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날 다시 만난 원자바오 총리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 원자바오는 다시 한 번 김정일의 뜻을 내게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대통령 각하를 진심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북한이 제시하는 조건이 너무 까다롭습니다. 나는 조건 없는 남북 정상회담을 바랐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왜 그런 식으로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볼 때 그 조건은 김정일 위원장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각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니 김 위원장과 연락할 기회가 되면 각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원자바오는 자신이 한 말조차 김정일에게 직접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대통령의 시간> 334~335페이지)
(…)그 당시 북한은 '만난다'는 것보다 '만나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치 "한반도를 대표하는 북한이 남쪽 대표를 만나준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만나주는' 조건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내 말을 듣고 원자바오가 답변했다.
"저도 2009년의 일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오자 매우 흥분해서 한국의 지난 두 분 대통령과의 회담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아무런 조건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대통령께서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 여러가지 조건을 제시했다고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김정일 위원장 밑의 사람들의 권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통령의 시간> 358페이지)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원자바오 전 총리가 중재한 것을 자세하게 다 얘기했다. '김정일이 정상회담을 바라고 있다'는 말까지 소개했다. 그렇게까지 쓰는 게 외교 관례상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문정인 :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피하는 것이 국가 이익을 위해 바람직하다. 첫째 원자바오 총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둘째 우리 대통령의 격을 낮추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의 기술은, 원자바오 전 총리가 애걸하는 듯한 느낌으로 표현이 돼 있다.
문정인 : '애걸'까지야 하겠나. 그래서 더욱 문제라는 것이다. 원자바오 총리가 남북관계 개선을 진심으로 바라는 뜻에 그런 중재 역할을 했을 터인데 거절 한 것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면 중국 정부 입장은 어떻게 되나. 그리고 여기서 모순적인 대목이 있다. 2009년 4월 초, 런던에서 2차 G20정상회의가 있었다. 그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북한하고 정상회담을 할 것처럼 얘기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3일 런던 현지에서 가진 영국 로이터, 미국 블룸버그, 프랑스 AFP 통신사와의 합동 인터뷰에서 "(대북) 특사는 우리가 필요하면 보낼 수 있다"며 "내 자신이 북한 사람들이 자립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경험과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뜻밖에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올 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북특사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전례가 있어 이 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남북 정상회담을 염두해 둔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었다. 편집자)
그리고 이 전 대통령은 2010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 가서 BBC와 인터뷰했을 때 "연내에 정상회담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다. 당시 김은혜 대변인이 인터뷰 내용을 부인하듯 브리핑해, 사표를 냈다. (김은혜 당시 대변인은 실제 인터뷰 내용과 달리 "연내라도 안 만날 이유가 없다"고 전해 논란이 일었다. 김은혜 대변인은 '이 대통령이 피곤한 상황에서 인터뷰가 이뤄져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했고 파장이 클 수가 있어 이 대통령에게 발언의 진정한 의미를 물어본 것을 토대로 보도자료를 만들었다'고 해명했지만 결국 사표를 냈다. 편집자)
그런 것을 보면, 이 전 대통령이 2008년 취임 직후 촛불 정국으로 상당히 인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정치적 반전 카드로 정상회담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북한보다 오히려 이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더 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정황들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북한이 일방적으로 구애했다고 표현한다. 더 가관인 것은 김태효 전 비서관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상회담 얘기를 북한 측이 비밀 회담 등에서) 수십 차례 제안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상회담 개최 실패를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흘리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도 나올 법하다.
김기남 비서 키가 180, MB는 어떻게 어깨를 쳤나?
프레시안 : 그런 정상회담 요구들이 실제로 있었을까?
문정인 : 글쎄, 북측에서 나온 사람이 정상회담을 운운한다는 것은, 공식 제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위급회담을 통해 만나서 문제를 풀자고 한다는 의미면 모르겠지만. 정상회담은 마지막 카드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아는 북한은, 정상회담을 맨 앞에 카드로 들고 나오지 않는다. 이 전 대통령의 아전인수식 해석이 아닌가 한다. 가령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 북한에서 조문단이 왔다. 당시 나는 김 전 대통령 장례위원으로 있으면서 방문에 관여했었다. 그때 (이명박 정부가) 말이 아니게 대했다. 그 일에 대해서도 사실을 기술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 책에는 어떤 식으로 돼 있느냐면, 본인은 안 만나려고 했는데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 등이 얘기를 해서 일반 조문객 형식으로 만났다고 돼 있다. 대체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디테일 문제가 있다. 당시에는 국가정보원의 수송 지원 기능이 없어져서, 북한 조문단의 교통편을 황당하게도 렌트카로 제공했다. 그들이 렌트카를 타다가 사고라도 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조문단이 그랜드힐튼 호텔에 묵었는데, 그들을 5층에 집어넣고 접근을 못하게 했다. 층계를 책, 걸상 등 집기로 완전 봉쇄하고, 전화 끊고, TV를 끊었다. 조문단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연금을 한 것이다. 저녁 식사 할 때 북한 측에서 '이럴 수 있느냐'고 해서 정세현 장관이 정부 측에 전달해 TV만 풀어줬다. 전화기는 불통이었고. 사람 만나는 것도 통제를 했다. 이런 상항을 북측도 감지했을 터인데 정상회담을 공식적으로 제의했을까? 김정일 위원장이 남북관계 개선을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했을 수 있을 것이다.

▲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 노동당 김기남 비사와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김기남 북한 노동당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니 큰 소리로 준비해온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 장군님께서는 대통령 각하를 만나게 되면 따뜻한 인사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김기남은 90도로 머리를 숙여 내게 인사했다. 2009년 8월 23일 청와대 본관 접견실이었다. 닷새 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북한 조문단을 접견한 자리였다.(…)나는 (북한 조문단에) 공식 절차를 거쳐 제안하라고 했다. 방문 이틀째에 북한 조문단이 현인택 통일부 장관을 통해 내게 면담을 신청해왔다. 남북 대화의 기회가 왔으니 즉각 만나야 한다는 내부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수락하지 않았다. 북한 조문단은 정식으로 우리 정부와 협의하여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불쑥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고 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만나주는 것은 북한의 착각을 더욱 견고히 할 뿐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잘못된 사고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결국 북한 조문단은 예정보다 하루 더 체류한 끝에, 예정된 각국의 조문단 면담 일정 중 하나로 나를 만나게 됐다. 청와대를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특별 대우 없이 일반 출입자와 같은 절차를 밟았다.(…) 인사가 끝나자 김기남 비서는 남북 정상회담을 언급했다.(…)대남 압박책이 먹혀들지 않고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자 결국 북한이 먼저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이다.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한 우리 정부의 원칙 있는 대북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 비서의 말을 끊고 이야기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북한 조문단에게 남북 대화가 핵 문제 등의 논의를 제외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예 알겠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정확하게 모두 전달하여 올리겠습니다."
김 비서가 대답했다. 나는 접견을 마치고 나가는 김 비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앞으로 좀 잘 하세요." (<대통령의 시간> 327~330페이지)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이 기술한 것 중에 2009년 8월 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조문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김기남 당시 북한 노동당 비서 등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달라.
문정인 : 북한 조문단 관련해서 장의위원이 박지원 의원, 임동원, 정세현,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그리고 나, 다섯 사람이었다. 당시 정부 담당은 정세현 전 장관이 했다. 국회와 언론은 박지원 의원이 담당하기로 했다. 원래 금요일(8월 21일) 11시 반에 현인택 당시 장관에게 정세현 전 장관이 정식으로 설명하고, 현 장관이 통일부 명의의 언론 브리핑을 하기로 했는데, 그에 앞서 10시 경 박지원 의원이 기자들에게 '북한 조문단이 온다'고 브리핑을 해버렸다. 그래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접수하지 않아 불법이라는 등) 난리가 났다. 이후 조문단이 도착했다. 통일부가 기분이 나빴는지, 원래 (일정 관리를) 정부가 하려는 것을 우리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랜드힐튼 호텔을 얻었는데, (정부에서) 그런 식으로 봉쇄하고 몽니를 부린 것이다. 금요일 저녁에 저녁 식사를 했다. 임동원, 정세현 전 장관, 백낙청 교수, 나, 그리고 김연철 교수가 같이 있었다. 북측은 올 때부터 필요하다면 하루 더 체류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미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도 표했는데, 통일부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니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 국민통합 특보를 지냈던 김덕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에게 부탁했다. 그날 밤(21일)에 나도 연락했고, 임동원 전 장관도 연락해서 다음날(22일) 조찬 때 김 의장을 오시도록 했다. 정동영, 이종석 전 장관 등과 함께 조찬을 했는데, 그때까지는 통일부 입장은 회고록에 나온 대로 '안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찬 후 노동당 김양건 부장과 원동연 부부장을 김덕룡 의장과 만나게 했다. 김 의장이 계속 묻는 게, '(김정일의) 메시지 갖고 왔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양건) 본인에 물어보라'고 해서 얘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서서 5분 정도 얘기했는데,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고, 김 의장이 바로 청와대에 전화한 것으로 안다. (정부 측에서) 이 건으로 9시 반부터 회의를 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과) 만나는 것으로 11시 경에 결정이 났다. 그 다음에 현인택 장관과 김양건 부장간 점심 세팅이 됐고, 다음날인 일요일(8월 23일) 오전 9시에 이 전 대통령과 만났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덕룡 의장이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문단이 이 전 대통령을 만나러) 갖다 와서 상당히 분위기가 좋았던 것으로 안다. 이 전 대통령이 정말 북측 사람들을 잘 대해줬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대목이 나온다. 이 전 대통령이 만남을 끝내고 나오면서 김기남 비서의 어깨를 툭 쳤다는 것이다. 김기남 비서는 키가 크다. 180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미 80세가 넘은 사람이다(1929년생). 이 전 대통령이 훨씬 연하이고 키도 작은데, 어떻게 어깨를 치면서 '좀 잘 하세요'라고 말을 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MB만 캠프데이비드 초대? 노무현은 거절했다"
[MB의 시간과 비용] <6> 문정인 연세대 교수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26 10:41:10
"기록물 자체로 가치는 있다. 그러나 읽는데 곤혹스럽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읽으며 내놓은 총평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화제다. 퇴임한 지 2년 만에 이런 회고록을 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그 내용이 황당해서 그렇다. 누군가는 이를 '공상과학소설'로, 또 누군가는 이를 '공소장에 앞선 피의자 조서'로 표현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은 이 회고록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어디까지 우리가 믿을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대통령 회고록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이 회고록과 무관하게 <프레시안>은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와 함께 지난해부터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체적인 검증 작업을 벌여왔다. 그 작업을 묶어서 낸 책이 <MB의 비용>이다.
'MB의 시간과 비용'이라는 기획은 철저하게 이명박 정부의 정책 평가를 위한 기획이다. 회고록 중 크게 논란이 된 한미 쇠고기 협상, 대북 관계, 외교 안보 문제, 4대강 사업 평가 등에 대해 전문가와 함께 조목조목 따져봤다. 많은 독자들을 대신해 <대통령의 시간>을 낱낱이 해체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MB의 시간과 비용' 5~6편에서는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인터뷰를 소개한다. 문 교수는 미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시대위원장,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를 역임했다. 인터뷰는 <프레시안> 협동조합 박인규 이사장이 진행했다. 편집자
MB의 시간과 비용
'그랜드 바겐' 구상은 DJ 때부터…그 마저도 '실패'인데 '자화자찬'
프레시안 : 이 글을 읽어보면, 이 전 대통령의 인식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는 우리가 주도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상은 '해결'을 위해 우리가 행동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인 것 같다.
문정인 : 북핵 문제를 풀려면 무엇보다 남과 북 사이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 '북한에 대해 미국의 군사적 행동을 우리가 막아줄 수도 있다'라고 하는 인식이 북측에 있을 때, 북한은 우리를 신뢰하고 도움을 청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에게 협상의 레버리지가 생긴다. 그 레버리지를 가지고 우리가 미국도 움직이고 중국도 움직이면서 주도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은 그런 기본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도 북핵 문제를 주도하겠다?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전 대통령이 '비핵개방 3000'을 내놓았다. 이것은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등가성의 법칙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핵을 포기하면 10년 후에 3000달러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북한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 아니라도 우리가 핵을 포기하면 국제사회에서 얼마든지 돈을 끌어올 수 있다. 10년 후면 1만달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 등가성이 성립하지 않아 실패한 정책이다. 현실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북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이명박 정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물질로 생각하니까 3000달러면 이 정책이 작동할 것으로 본 것 같다. 그런데 북이 원하는 것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해소하고 체제와 국가 안보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역사적으로 볼 때 독재 권력이 스스로 변화한 예는 찾기 어렵다.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유도하는 보다 적극적인 전략이 필요했따. 아울러 한반도 평화와 직결된 북핵 및 군사 관련 논의에 대한 주도권을 우리가 찾아와야 한다.(…) 취임 전부터 나는 남북 관계의 이같은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는 북핵 및 안보 문제를 북한, 미국 간의 대화에만 맡겨두고 우리는 제3자처럼 물러나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봤다. (<대통령의 시간> 305페이지)
'도발-대화-합의-지원-합의 파기-재차 도발-대화 재개'로 반복되는 악순환이 지난 20년 동안 이어져 왔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2009년 6월 16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런 취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공감대를 이뤄냈다.(…) 그랜드 바겐 제안은 북핵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우리가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대통령의 시간> 319페이지)
프레시안 : 그 이후에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이 나왔다. 갑작스럽게 나왔다는 인식이 있다.
문정인 : 본인은 그랜드 바겐에 상당히 역점을 두었다고 말하는데, 이 제안은 2009년 9월 뉴욕 방문 중에 나온 것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2009년 9월 21일 미국 현지에서 미국외교협회(CFR), 코리아소사이어티(KS), 아시아소사이어티(AS) 공동주최 오찬을 통해 '차세대 한미동맹의 비전과 과제'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을 통해 "이제 6자회담을 통해 북핵 프로그램의 핵심 부분을 폐기하면서 동시에 북한에게 확실한 안전보장을 제공하고 국제지원을 본격화하는 일괄 타결, 즉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을 추진해야 한다"고 처음 밝혔다. 편집자) 청와대는 대통령이 국내나 해외에서 연설할 때 항상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 전 대통령도 그랜드 바겐을 얘기한 것 아닌가. 일회성 제안인 것 같다.
사실 그랜드 바겐 구상의 기본 골자는 소위 김대중 정부 때 나왔던 북핵의 포괄적 해결 방법과 다를 바 없다. (이명박 정부 사람들) 본인들도 그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진짜 포괄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 보다는 우리의 제안을 북한이 안 받을 테니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의 5자가 협의를 통해 북을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 거기에 깔린 기본 의도다. 6자회담이 계속 안 되는 상황에서 나온 것인데, 사실 6자회담을 깬 것도 엄격히 말해 이명박 정부다. 실제로 당시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나 통일부에서는 그랜드 바겐의 개념을 제대로 설명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랜드 바겐이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고민해 만든 것이 아니고, 그냥 미국에 가는데 어떤 메시지가 있어야겠다고 해서 만든 것 같다.
실제로 그랜드 바겐이라는 말이 나온 후에 커트 캠벨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이 제안을 과거 '포괄적 해결방법'과 동일시했고, '우리(미국) 하고 협의도 하지 않고 (포괄적 해결방법)그것을 제시했다. 난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한미 간에 큰 마찰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캠벨 차관보가 꼬리를 내렸던, 그런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이명박 정부가 그랜드 바겐 구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마 계속 대북 압박을 하면서 '6자회담 안하면 5자라도 만나서 하자'는 구상을 했던 것 같다.
또 하나 이명박 정부가 가장 원했던 것 중 하나는 북한 급변사태를 대비한 한·미·중 3국 전략대화였다. 김태효 전 비서관이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으로 안다. 결국 중국이 안 받았다. 중국 정부 측은 '북한이 붕괴하지 않았는데 무슨 얘기냐. 이것은 오히려 북한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한·미·중 3국 대화는 공식적인 '트랙1'에서는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트랙2'에서도 중국이 부정적이었다. 그런데도 다 잘 됐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장렌구이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교수나 덩위원 전 당교 학습시보 부편집인과 같은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대통령이 그런 사람들을 안다는 것 자체가 난 이해가 안 가는데, 286페이지 보면 그들이 '북한과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나온다. 일부 보수 언론이 이들을 띄우기도 했는데, 이들은 중국 정부나 학계의 주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중국의 주류 시각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연기하는 조치를 취했다. '우리가 북한 문제를 주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 미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무기한 연기가 됐다.
문정인 : 전작권 환수는 이렇게 봐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작권 환수에 천작한 것은 '군사주권 회복'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북한 때문이다. 북한은 전작권을 주한미군 사령관이자 한미연합사령관이 가지고 있고, 우리가 독자적 군사행동을 하지 못한다고 보아 우리를 괴뢰군이라 부르는 것이었는데 노 전 대통령은 이러한 북의 태도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결국 우리가 아무런 자율성이 없기 때문에 북한이 우리를 무시하고 미국에 모든 평화협상을 제의하는 것 아닌가. 이번에 북한이 한미군사훈련 중지와 핵실험 중지를 맞바꾸자는 제안을 미국에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전작권 환수를 통해 북의 그런 태도를 바꾸려 했다.
만약 전작권이 우리한테 왔다고 하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북한은 우리와 얘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력군이 되고 미국이 지원군이 되는 게 전작권 환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이 그것을 알고 전작권 환수 연기를 결정했을까? 그렇게 보지 않는다. 주변에 친미 동맹파들만 다 모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북한의 위협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작권을 환수하면 북한에 잘못된 시그널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연기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것을 보면 이 전 대통령의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다. 그런 위협적인 상황이라면, 오히려 우리가 전작권을 가지고 있어야만 필요시 북한에 보복 타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작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인식을 분명하게 하면, 북한의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환수해 와도 미국이 한미동맹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부시 전 대통령에 이어 오바마 대통령과의 친분도 강조하고 있다. ⓒ연합뉴스
"MB의 회고록, 朴 대통령 대북 정책 파탄 내려고 썼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이후 북한은 '금강산 국제관광특구법'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여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 시설을 몰수하고 50년 사용 독점권을 무효화 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다른 방식으로 도발해왔다. 당시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남북 접촉의 전말을 공개하자는 내부 의견도 있었다. 만일 그랬다면 당시 남북한 간에 오간 말들이 낱낱이 밝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남북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맞았을 것이다.(<대통령의 시간> 361페이지)
프레시안 : 361페이지를 보면 이 전 대통령도 남북 문제와 관련해 많은 것을 공개할 경우 좋지 않다는 얘기를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남북 관계는 이 회고록 때문에 안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받을 것 같다. 본인의 말대로 '파탄'의 원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자신이 유리할 때는 '남북 간에 오간 말들을 공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놓고, 자신은 후임 정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남북 간에 오간 말들을 낱낱이 공개하는 것 아닌가?
문정인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나, 회고록을 이렇게 쓰는 것이나, 남북 관계를 파탄 내려고 그런 것 아닌가. '이명박의 사람들'은 북한을 고립시키고 봉쇄하면 북한은 망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흡수통일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숨은 어젠다를 가지고 있다. 그런 숨은 어젠다를 통해 정책을 만들었고, 현재까지도 그에 따른 계산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본다.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에 '정상회담을 하지 말라'고 압박을 가하는 인상이 든다. 잘못된 일이다. 전직 대통령이면 가만히 있지, 남북 관계를 파탄 낼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닌가? 박근혜 정부는 어떻든 간에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작동시켜서 교류협력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전 정권 사람들은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재를 뿌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가 북한 붕괴론에 기반해 북한에 대해 압박을 해 나갔다고 하는데, 지금 박근혜 정부는 그러한 기조에서 달라졌을까? 어떻게 봐야 하나?
문정인 : 지난해 8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준비위원회 1차 회의에서 내가 직접 대통령에게 물어 본 적이 있다. '대통령의 대북 정책의 기조는 무엇이냐'고. 박 대통령의 답변은 명쾌했다. "북한을 고립, 봉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국제 사회의 건전한 일원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대북 정책이다'"
그런데 정책 운용과정에서 모순적인 모습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통일준비위만 해도 그렇다. 그 안에는 진보 성향 사람들도 있고 보수 성향 인사들도 있다. 그러다 보니 정책 자체가 모순적인 게 있다. 통일준비위의 첫 번째 목표가 남남갈등을 최소화시키면서 국민적 합의를 구축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목표는 북한과 함께 하는 통일을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통일 공공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흡수통일을 하지 않고 북한과 협의해 통일 정국을 만들어 간다는 것인데, 세 번째로 가면, 소위 핵 문제, 인권 문제에서 북한에 압박을 주는 외교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 둘은 다분히 모순적이다.
결국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계속 유효한 정책이라고 한다면, 북한과 어떻게 하든 교류 협력을 하고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관련해 (박 대통령은) 큰 것이 아니더라도, 작은 부분들, 이를테면 이산가족 재상봉과 같은 것을 성사시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 내부에 다른 시각을 가진 이들도 있을 것이다. NSC나 청와대 요직에 있는 강성 인사들은 섣부른 교류, 협력보다는 원칙을 강조 할 것이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것인가?
문정인 : 물론 그렇다. 현 정부는 원칙과 유연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MB정부는 사실 유연성이 없었다. 북측과 만나긴 했지만, 북한이 붕괴할 것으로 봤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그런 전제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일부 그런 가정을 하는 사람도 있고, 국책연구기관 등에서는 흡수통일을 전제로 한 보고서를 많이 내고 있는데 대통령 생각은 다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NSC나 공안 라인에 있는 이들은 원칙을 강조하는 반면, 외교안보수석, 통일비서관, 그리고 통일부 등은 유연성을 요구할 것이다. 그래서 계속 충돌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원칙이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 같다. 유연성에 힘을 실어주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 그런 변화는 없는 것 같다. 이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실수가 그것이다. 원칙은 국가 이익에 우선할 수 없다. 국가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원칙을 시기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지도자의 덕목이다.
프레시안 : 국익을 넘어서는 원칙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문정인 :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넘어선 지도자의 원칙이 어디에 있나. 그런 원칙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 그것은 이미 원칙이 아니라 아집이 된다.
회고록에 스스로 밝힌 패착…5번 기회 모두 걷어찬 MB
프레시안 :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유투브 인터뷰를 통해 북한을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게(Collapse) 될 정권"이라고 말했다. 이런 오바마 대통령의 인식은 어떻게 나왔을까?
문정인 : 오바마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여러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첫째는 전문 관료들에 의한 부정적 인식 부각이다. 제프 베이더(Jeff Bader) 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 다니엘 러셀(Daniel Russel)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등 대부분의 직업 관료들은 북한을 부정적으로 보아 왔고 이들의 대북 인식이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두 번째, 2009년 4월 5일 체코 프라하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역사적 연설을 하는 날 새벽에 북한이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했다. 그것 때문에 오바마가 연설문을 수정해 북한을 규탄하는 대목을 새로 집어넣었다고 한다. 북한이 부정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이 전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 인식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이 전 대통령을 만난 후 오바마가 'hopeless(희망이 없다)', 'rogue(불량)' 같은 단어 사용 빈도수가 증가한 것으로 안다. 핵과 미사일은 물론이고 천안함 사건부터, 미국 소니에 대한 사이버 테러에 이르기까지, 오바마에게 북한은 부정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것이 워싱턴의 전반적인 흐름인 것 같다. 미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북한 붕괴론을 계속 얘기하니, 워싱턴에서도 그게 주류가 돼 버린 것 같다.

▲ 영국 BBC와 인터뷰 중인 이명박 전 대통령. 당시 이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원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KTV 갈무리
문정인 : 정상회담과 관련, 이명박 전 대통령의 가장 큰 패착은 다섯 번 제의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외교를 잘 한다는 분이, 남북 간의 '협상'은 못하는 것인가. 그러니 그 '제안'이라는 게 실질적으로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운 거다. 둘 중에 하나다. 북측이 공식적으로 정상회담을 제안하지는 않은 것인데, 그것을 공식 제안처럼 아전인수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처음부터 정상회담에 관심이 없었다. 저쪽에서 제안해도 애초에 안 받으려 했던 것 아닌가. 둘 중 하나다. 사실 정상적인 대통령이라면 협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다섯 번 중에 단 한 번도 성과가 없었다? 북한 측에서 이 전 대통령 측에 대해 '거짓말'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프레시안 : 보수 성향의 국민들은 '그래도 이 전 대통령이 원칙을 지켰다'고 공감을 하지 않을까.
문정인 : 이건 원칙의 문제가 아니다. 정상회담을 안 할 것이면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할 의사가 있었다면 제대로 협상을 해서 성사시켜야 했다. 사실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고 통일의 가능성을 높여준다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문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태도를 취했고 그 결과 자꾸 북한에 잘못된 시그널을 보낸 것 같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이 그런 태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북측의 신뢰가 없어지면서 남북 관계는 꼬이고 군사긴장은 오히려 첨예해졌다. 지금 봐도 희한한 일이 있다. 연평도 포격이 있던 2010년 11월 23일과 며칠 후인 12월 초 북한의 류경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이 내려왔다는데, 참 이해가 안 되더라. 어떻게 류 부부장의 방남을 우리 측이 받을 수 있겠는가. 그건 원칙에 기초한 행동도 아니다. 그리고 국정원이 한 비밀 활동을 대통령이 왜 공개한 것일까. 아주 부적절하다. 직접 만난 것도 아닌데….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
"(대북) 특사는 우리가 필요하면 보낼 수 있다", "내 자신이 북한 사람들이 자립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경험과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뜻밖에 남북 관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올 지도 모르겠다"(2009년 4월 3일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로이터, 블룸버그, AFP 통신사와의 합동 인터뷰 중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
"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조만간이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연내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본다", "(남북 정상이) 열린 마음으로 사전에 만나는 데 대한 조건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2010년 1월 28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있었던 BBC 인터뷰 중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
2009년 4월 런던 발언, 2010년 1월 다보스 발언에서는 이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면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하지 말라고 훈수를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기가 못했으니까 박 대통령도 하지 말라는 이야긴가. 결국 이 전 대통령은 북한을 협상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고 악마이자 야만으로 본 것 한다. 부시와 다를 바 없다. 배타주의, 타자의 악마화. 그런 것이 보인다. 이건 원칙이 아니라 편견이고 우월주의의 발로다. 또한 싱가포르 접촉 당시에 이 전 대통령이 보고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김양건이 '이것 안 받고 가면 죽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도 김양건을 과거 몇 차례 만나 본 적이 있지만 그런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지도급이고 핵심 인사이자 외교를 잘 아는 사람이다. 이런 건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예의의 원칙을 어긴 것 아닌가 한다.
북한을 악마화, 희화화하고, 북에 갑질을 하려고 하면 남북 관계는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혼자 못했으면 그 걸로 끝내야지 왜 박근혜 대통령까지 걸고 넘어 가려 하는 걸까. 전직 대통령이 (현 정권이) 잘 되도록 충고는 못 할망정, 판을 깨서는 안 된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미국 부시 전 대통령의 골프카트 운전대를 잡고 운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MB가 최초로 캠프데이비드 초청 받아?…노무현은 초정 받고 거절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캠프 데이비드는 미국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워싱턴D.C.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캠프 데이비드 초청 여부로 미국의 환대 정도를 가늠하기도 했다. 한국 대통령의 캠프 데이비드 초청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의 새정부 출범에 대한 미국의 기대가 반영된 결과였다.(…) 부시의 첫인상은 친근했다. 다정한 이웃같은 모습이었다.(…) 골프 카트에서 부시와 나눈 여러가지 대화는 당시 한미 관계와 대북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현안들이었다. 그동안 실무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그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풀려나갔다.(…) 헤어진 지 30분도 안 돼 부시 부부와 우리 부부는 만찬장에서 다시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부시가 말했다.
"이 대통령님, 원래 국가 정상끼리 만나면 종교 의식은 하지 않는게 관례입니다. 그러나 저는 식사 기도를 함께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교회에서 기도하던 모습을 보고 하는 제안 같았다. 나중에 들은 얘끼지만 부시는 기도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좋습니다. 함께 기도하지요."
"손잡고 기도해도 괜찮겠습니까?"
우리 네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 손을 잡고 기도를 드렸다. 역사상 유례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만찬을 마칠 때쯤 부시와 나는 이미 오랜 친구처럼 친밀해져 있었다. 이때부터 부시는 내게 '친구'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만찬을 마친 후 부시는 앞으로 한국을 믿고 정보를 교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날 다져진 신뢰의 결과였다. 이후 한미 양국의 정보 협력은 더욱 강화됐다. (<대통령의 시간> 190~196페이지)
프레시안 : 상대방에 대한 예의나 객관적 현실 인식이 부재한 것 같다.
문정인 :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회고록 쓰기 전에 전임 정부에 대한 연구도 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부시 전 대통령 초청으로 캠프 데이비드에 간 부분을 읽어보라. 미국의 인정을 받아서 본인 혼자만 간 것처럼 자랑을 해 놓았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과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듯 했다. '미국이 버린 노무현, 미국이 사랑한 이명박?' 이건 웃기는 소리다. 2003년 2월 초 내가 당선자 고위사절단원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부시와 노무현의 캠프 데이비드 회동 이야기 나왔다. 그러나 노무현 당시 당선자는 그 제안에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2004년에는 부시의 텍사스 목장에 초청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실무진 수준에서 거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은 '나만 갔다'며 생색을 내고 있다. 그래서 결국 쇠고기 협상에서 재킷을 풀어줬나? 뭘 알고 말해야지. 치적을 추켜 세우는 것도 좋지만, 전임에 대한 예우도 좀 했으면 좋겠다.
프레시안 : 조금 다른 문제이지만, 지금 남북 관계를 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정인 : 우리 대통령이 남북 관계를 성공시키려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비공식 막후 접촉을 해야 한다. 국정원의 대북 전략 기능을 빨리 복원을 시켜야 한다. 북측과 비공개 접촉을 해서 사전 의제 조율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난후 공식 회담을 개최해야 성공할 수 있다. 안 그러면 계속 평행선을 그릴 것이고 국민들은 짜증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 판을 깨는 공식 회담 뭐 때문에 하나. 그리고 작은 것 하나라도 성사 시켜야 한다. 금강산 문제 해결과 이산가족 재상봉은 연계해 볼만 한 것 아닌가. 그러면 상당한 선순환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프레시안 : 박 대통령이 정상회담에 관심이 있기는 있나.
문정인 : 박근혜 대통령은 상당히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정상회담을 하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 돼 버렸다. 지금 일본의 아베 총리를 대하는 것 봐라. 만나서 뭔가 가시적인 것을 얻을 수 없으면 정상회담 안 할 것이다. 지금처럼 북쪽과 교감도 없는 상태에서 정상회담 가능할까?
프레시안 : 마무리를 해보자. 이 책은 처음부터 자화자찬으로 점철돼 있다. 외교 문제도, 어떤 시스템보다는 본인의 개인기, 다른 정상과의 진한 우정 등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는 식의 기술들이 전부다. 문 교수 지적한 대로 그는 거의 '외교의 신'이 돼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그래서 제가 부시 대통령에게 직접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 경제도 발전하고 국가 위상도 높아져 양국 국민간 활발한 왕래가 미국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는 개선돼야 합니다. 임기 중에 처리해주신다면 미국에 대한 한국민의 정서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자 부시는 "내 임기 중 처리되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부시의 임기는 2009년 1월 19일까지였다. VWP(비자면제프로그램)는 2008년 11월 17일붵 시행되었으니, 부시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내 요구도 들어준 셈이다. (<대통령의 시간>197페이지)
문정인 : 본인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집고 넘어가자. 솔직히 핵 안보정상회담 유치도 한국 외교부가 사전 작업 다 한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이 오바마와 가깝다고 해서 즉석에서 된 것이 아니다. 과정을 쏙 빼버린 것이다. 비자면제 프로그램 문제도, 사실 노무현 정부 시절 외교부에서 죽 진행해 왔던 것들이다. 이명박 정부 때 결실을 맺었을 뿐이다. 좋은 지도자는 밑에 있는 관리들이 만든 프로세스를 자세히 파악하고, 그것을 녹여서 결단을 내린다. 그런 과정을 써야 대통령도 올라가고 관료도 올라가는데, <대통령의 시간>을 읽으면 모든 부처는 수동적인 심부름꾼이고 대통령 혼자 다 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다른 나라와 관계에서는 외교의 신인데, 왜 북한에 대해서는 '외교 바보'가 돼 버렸는가. 김정일에 대해서는 왜 그런 능력을 발휘 못했나.
프레시안 : DJ 회고록과 비교를 하면 어떻나?
문정인 : DJ도 자기 칭찬이 많긴 했지만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많이 했다. 디제이 자서전에는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됐다'는 부분은 거의 없다. 당시 상황이 이랬고, 내가 이런 대화를 했다는 정도다. 자서전 2권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각국의 정상들과 대화를 할 때 나름의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아니다(NO)'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되도록 상대방 말을 많이 들어주는 것이다. 셋째, 상대방과 의견이 같은 대목에서는 꼭 '내 의견과 같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할 말은 모아두었다가 대화 사이사이에 집어넣고, 그러면서도 꼭 해야 할 말은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 회담 성공은 상대의 덕이라는 인상을 주도록 하는 것이다. 여섯째가 가장 중요한데,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다."(<김대중 자서전> 315페이지)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나온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 대통령의 외교에는 건설 수주하는 듯한 '상인의 지혜'는 있지만, '선비의 성찰과 양심'은 결여됐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긴 시간 감사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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