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반대 & MB 비리

"MB와 임태희, 비밀접촉 팩트가 다르다"

일취월장7 2015. 2. 26. 12:11

"MB와 임태희, 비밀접촉 팩트가 다르다"

[MB의 시간과 비용] <1>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16 11:24:51

 
"기록물 자체로 가치는 있다. 그러나 읽는데 곤혹스럽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읽으며 내놓은 총평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화제다. 퇴임한지 2년 만에 이런 회고록을 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그 내용이 황당해서 그렇다. 누군가는 이를 '공상과학소설'로, 또 누군가는 이를 '공소장에 앞선 피의자 조서'로 표현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은 이 회고록이 어느정도 진실인지, 어디까지 우리가 믿을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대통령 회고록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이 회고록과 무관하게 <프레시안>은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와 함께 지난해부터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체적인 검증 작업을 벌여왔다. 그 작업을 묶어서 낸 책이 <MB의 비용>이다.  

'MB의 시간과 비용'이라는 기획은 철저하게 이명박 정부의 정책 평가를 위한 기획이다. 회고록 중 크게 논란이 된 한미 쇠고기 협상, 대북 관계, 외교 안보 문제, 4대강 사업 평가 등에 대해 전문가와 함께 조목조목 따져봤다. 많은 독자들을 대신해 <대통령의 시간>을 낱낱이 해체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히틀러 책은 재밌게라도 봤지"

프레시안 : 회고록 읽어 봤나? 

김종대 : 내 분야만 읽었다.  

프레시안 : 총평은? 어떻게 읽었는가? 

김종대 : 하나의 글을 읽는다는 게 이렇게 불편할 줄이야.(웃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런 글은 재밌게라도 봤다. 그런데 이 글은 상당히 불편했다.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불편했나? 

김종대 : 세가지 면에서 부족한 것 같았다. 첫째는 진정성. 이 글이 정말 다음 대통령에게 국가 정책을 잘할 수 있도록 하게 쓰여졌을까? 둘째는 진실성, 사실이냐 여부다. 가장 예민한 부분이 국방 안보라고 여겨지는데, 이 부분은 진실성(을 갖추지 못한) 문제가 특히 심각했다. 셋째는 적시성 부분인데, 왜 이 시점에 굳이 이런 류의 '자화자찬성' 책을 냈어야 했는가,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기록물로서 가치는 인정한다. 이것도 기록이다. 우리가 이 글을 대한민국의 자산으로 기록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는 인정한다.  

프레시안 : 이 책과 관련해 나온 평 중에, 이명박 정부의 참모들이 '안보 무능'으로 평가받게 될까봐, 본인들이 겪었던 사건의 내막을 빨리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기 변명을 하기 위해 서둘러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김종대 : 적시성에 관계된 부분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햇수로 3년이다. 그런데 정책이 아직 본 궤도에 못 올라와 있다. 남북관계가 특히 그렇다. 회고록이 나온 후에 외교 안보 관련 실세라고 불리던 김태효 전 대외전략비서관이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전 정권의 잘못을 우리가 다 바로잡았다'는 취지의 발언들을 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국민은 앞으로 정부가 섣불리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면 호통을 칠 겁니다'라고 하더라. 쉽게 말하면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관여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본 궤도에 오른 것도 없고 결실을 맺은 것도 없고 추진 중인 것도 없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뭐길래, 미리 예상하고 앞서서 견제하는 듯한 언행을 했을까. 이 부분은, 박근혜 정부가 아주 불쾌해 할 일이다. (박근혜 정부에) 굉장히 적대적인 표현들이다.  

프레시안 : 김 전 비서관의 발언은, 좀 더 나아가면 박근혜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면 국민이 호통을 치게 될 것이라는 취지로 들린다. 남북정상회담을 하지 말라는 것 같기도 하다.

김종대 : 그런 말이나 다름없지 않나? 실제 회고록 내용이 그것을(정상회담) 견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요약하면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은 다 잘못된 것이었고, 자기가 한 길을 따라오라는 것인데...이런 식으로 미리 예단하고 견제하는 것을 보면, 이 전 대통령 자신이 아직도 대통령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의아하다.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프레시안(최형락)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프레시안(최형락)  

 
 

이명박 전 대통령과 임태희 전 대통령 실장의 말, 팩트가 다르다

프레시안 : 팩트 오류가 있는 부분도 발견했나? 

김종대 : 팩트 논란이 있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게 남북정상회담 부분이다. 분명 작년에 임태희 전 비서실장이 여러차례 밝혔었다. 북한은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경제적 대가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경제적 대가를 미리 요구했다고 한다. 그것을 정상회담 계산서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완전히 결렬됐다는 것이다. 임태희가 누군가. 노동부장관을 했고,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다. 측근 중에 측근이다. 그런데 동일한 일을 두고 (임태희, 김태효) 둘이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정상회담 묘사 과정에서 한가지 의미 있는 부분은, 일이 잘 진행되면 독일식 프라이카우프(freikauf, '자유를 산다'는 의미다. 서독은 동독의 정치범을 데려올 목적으로 현금과 현물을 비밀리에 동독 측에 제공했다. 편집자)를 택할 수 있다고 한 부분이다. 즉, 나중에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임태희 전 실장이 주장한 게 바로 이것이었다. 이 전 대통령 주변의 참모들이 이것을 오해하고, 사후적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부분을 정상회담의 전제 조건이라고 대통령에게 잘못 보고했다는 게, 임 전 실장의 주장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기술 
 
 
2009년 11월 7일, 개성에서 우리 측 통일부와 북한 측 통일전선부의 실무 접촉이 있었다. 이날 회담에서 북한은 임태희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서명한 내용이라며 세 장짜리 합의서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북한이 제시한 문서에 의하면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으로 우리 측이 옥수수 10만 톤, 쌀 40만 톤, 비료 30만 톤의 식량을 비롯하여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어치를 제공하고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를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북측이 8월에 정상회담을 처음 제안한 시점부터 줄곧 요구해온 조건과 동일했다. 문서에 지원 내역과 일정을 정리해놓은 것이 마치 무슨 정형화한 '정상회담 계산서'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임 장관을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합의서를 써준 적은 없습니다. 회담이 중단된 후 통-통(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 날짜를 잡자고 하니 김양건이 그동안 어떤 내용이 논의되었는지를 확인만 해달라고 해서 확인해준 것은 있습니다. 김양건이 그대로 가면 죽는다고 해서.((<대통령의 시간> 335페이지) 
임태희 전 비서실장 인터뷰 
 
 
북핵 문제가 정상회담 의제로 올라가는 데 거의 의견 접근이 이뤄졌다. 원래는 싱가포르에서 내가 전권을 갖고 정상회담 협의를 마무리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협상 막바지에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결론을 내지 말고 최종 서명은 통일부에 넘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부장과 큰 원칙만 결정하고 실무협의는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에서 마무리하기로 이야기를 마쳤다. 내가 국회의원 신분이었다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합의를 끝냈어도 되는데 노동부장관 신분이었기에 마무리는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에서 맡는 것이 좋겠다는 정부 입장을 들었다.  
 
 
그 후 장관급회담이 아닌 실무회담이 진행됐는데 양측이 싱가포르 협의의 연장선과는 다른 요구를 하면서 결국 정상회담이 무산됐다.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이 정상회담을 대가로 5억~6억 달러를 요구했기 때문에 무산됐다는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북한이 그런 요구를 했다면 대통령이 협상을 허용할 리 만무했을 것이며 실제 김양건 부장도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이 대목에서 임 전 실장은 지금 생각해도 많이 아쉽다는 듯 연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월간중앙> 201403호 中, 2014.02.17.) 


프레시안 :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  

김종대 : 다시 정리해보자. 전제 조건은 없었다. '나중에 쌀, 비료를 지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임 전 실장의 설명을 보자. 이것은 북한의 요구다. 즉 우리가 (북한의 요구에 앞서) 북한에 요구한 게 있다는 것이다. 국군 포로, 납북자 송환이다.  (그동안) 의제로 안 받겠다고 했던 북한이, 이것을 의제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말이다. 국군 포로, 납북자 송환이 이뤄졌을 때, 후불제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행동별로 보조를 맞춰 거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프라이카우프다. (임 전 실장은) 이런 취지로 얘기했다. 심지어는 국군포로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직접 데려오는 방안까지 논의했다는 것이다. 대북 지원은 성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핵개방3000은 대북 지원 계획이다. 우리 측이 얘기한 것에 대해 성의를 보이면 우리도 추가로 성의를 보이겠다, 이 얘기다. 남북 관계에 있어서 당연한 거래다. 그런데 회고록에 나온 얘기는 무엇인가. 쌀, 비료 먼저 내놓고 옥수수 먼저 내놓으라고 하면서 정상회담에 가격을 매겨놓고 이것을 계산서로 하니까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임 전 실장은 '그런 회담이라면 내가 나갔겠느냐'고 한다. 그러니까, 너무 팩트가 안 맞는다. 어느 정도 안 맞아야지, 정 반대다.  

프레시안 : 그런데, 회고록 말대로 '북한이 계산서를 내놓는다'고 하면서 왜 비밀 접촉은 매번 했을까?

김종대 :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대가를 요구한 정상회담이 결렬되면, 반드시 북은 도발했다는 것이다. 2009년 11월 대청해전,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같은 해 11월 연평도 포격사건이 있다. 시간 순서대로 배열하면, 그 사건들에 앞서 남북회담이 결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은 항상 전제 조건 제시하고 결렬되면 포격했다고 한다. 항상 같은 식이었는데도 왜 이명박 정부는 늘 비밀 접촉을 했을까. 2009년에 싱가폴에서 비밀 접촉 했다가 결렬됐다. 2010년에, 우리 통일부와 북한 통전부가 접촉을 했는데 결렬됐다. 그 다음에 북한 보위부와 우리 국정원이 했다가 또 결렬됐고, 마지막에는 우리 측 김태효 전 비서관이 베이징에서 북측의 김양건을 만났는데, 정권 실세들까지 만났어도 결렬이 됐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나. 아무리 안보 위기가 있었다고 해도, 비밀 막후 접촉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 쪽에서 바라는 게 있으니 만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협상과 도발을 반복하는 패턴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다 알고 있었다면, 임기 내내 비밀 접촉을 했다는 것은 또 무슨 말로 받아들여야 하나. 김태효 전 비서관은 북한과 접촉한 게 다섯 번이 아니고 수십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수십번을 다 만나줬다는 것 아닌가. 이 책에서는 물론 북한이 만나달라고 애걸해서 만나줬다고 하는데, 아니, 그렇다면 그것처럼 버릇을 잘 못 들인 경우가 어디 있나. 북한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도발한 후에 또 만나자고 하니까 '엇? 또 나오네?' 하면서 만나는, 그런 패턴이 아닌가. 

프레시안 : 뒤집어 얘기하면 북한이 '도발하니까 만나주네?'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 같다.

김종대 : 그렇다. 적어도 '비밀접촉-도발' 패턴이 세 번 이상 반복된 것인데, 참 어이가 없고 한심한 일이다. 그렇게 북한을 못 다뤘다는 것이냐. 따지고 보면 역설적으로 비밀 접촉이 한반도에 위기를 초래한 것 아닌가. 그런데도 북한의 버릇을 제대로 들였다고 한다.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과연 북한과 막후 접촉을 왜 했느냐. 정황을 보면 이명박 정부가 아쉬운 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밀 접촉이 애들 장난인가. 하다 안 되면 그만인 것인가. 그러다 몇 대 두들겨 맞으면 넘어가고, 또 다시 만나고 하는 것인가. 무능력을 변명으로 포장한 것이다. 참담함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프레시안 : 중국의 원자바오 전 총리도 회고록에 끌어들여서 북한이 계속 안달이 났다고 하는 취지로 기록을 해 놓았다.   

김종대 : 이것은 모멸감이라는 키워드로 봐야 할 것이다. 회고록으로 인해 북한에 모멸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박근혜 정부와 감히 새로운 대화를 시도할 수 없도록 인격적, 정서적 도발을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감정 싸움, 모멸감으로 회고록 내용이 꽉 차 있다는 것, 사실은 굉장히 안타까운 부분이다. 

▲빌리브란트의 동방정책 비사,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비사 등을 들춰보는 이유가 있다. 큰 지도자가 어떻게 난관을 극복해 성과를 이뤘는가에 대한 서사적 흐름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회고록은 아무런 성과도 없는, 변명으로만 일관했다. ⓒ프레시안(최형락)

▲빌리브란트의 동방정책 비사,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비사 등을 들춰보는 이유가 있다. 큰 지도자가 어떻게 난관을 극복해 성과를 이뤘는가에 대한 서사적 흐름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회고록은 아무런 성과도 없는, 변명으로만 일관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왜 이렇게 기술했을까.  

김종대 :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과가 없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비하, 모멸감, 하대, 홀대가 사용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이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남북한 차이'를 '남북한 차별'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북한과 우리는 문화나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지 않으면 대화가 안 통한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은 이 '차이'를 '차별'로 전환시켰다. 거기에서 모멸감의 정체가 떠오른다. 북한으로 하여금 그것(모멸감)을 느끼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원자바오 전 총리를 끌어들이는 등, 무리수를 둬서라도 북한은 구걸하는 나라, 안되면 삐지고 이판사판인 나라라는 식으로 북한의 '비정상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비정상성은 차별 정책과 관련해 정당성을 안겨준다. 외교 관계에 있어서 다른 주체에 차별하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이 전 대통령은) 사실상 외교의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다음 정권을 향해 강조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이 책의 기술 방식이나, 어떤 태도를 보면 굉장히 앞뒤가 안 맞는 말들이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김종대 : 북한의 악마성만 드러내면 대통령이나 우리나라 위기관리 집단의 무능력이 다 합리화되나. 앞으로 북한만 탓하고 있으면, 위기 관리에 문제가 있어도 다 무마가 되는 것인가. 이런 예를 들어보자. 산에 가면 독사가 위험하다. 물리면 죽는다. 그럼 독사를 탓해야 하나,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 잘 대비해야 하나. 당연히 우리가 대비하는 게 우선이다. 상대방이 악마라도 우리가 어떻게 콘트롤해야 하는 지 고민해야 한다. 정책은 이런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산에서 독사에게 물렸다고 독사가 살기 좋게 만든 환경보호론자들을 탓해야 하나? 이것이 종북몰이고, 색깔론이다.  

빌리브란트의 동방정책 비사,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비사 등을 들춰보는 이유가 있다. 큰 지도자가 어떻게 난관을 극복해 성과를 이뤘는가에 대한 서사적 흐름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성과도 없는, 변명으로만 일관한 이명박 회고록을 보자. 크게 보면 그간 대북 정책 등은 하나의 실패다. 안보에서 실패하고 대북 정책에서 실패했다. 그렇다면 애초 가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데 왜 실패했고 얻은 교훈은 무엇인지 기술했어야 한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에 대한 성찰, 반성, 안타까움에 대한 회고록이 돼야 정상인데, 그런 면에서 이 회고록은 비정상적인 회고록이다. 나는 전문가 입장에서, 이 책이 기록물로써 소장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어디서 실패했느냐 하면, 공감에서 실패했다. 이런 책은 냈다 하면 1만 권은 기본이다. 그런데 책은 잘 안 팔리는 것 같다. 파일로 요약본이 돌았어도 그 디테일이 알고 싶어 사람들이 구매했을 것인데. 

(김종대 편집장 인터뷰 2부가 이어집니다. 편집자) 

 

 

"MB 회고록, 자기 부하들에게 부정당했다"

[MB의 시간과 비용] <2>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17 10:37:19

"기록물 자체로 가치는 있다. 그러나 읽는데 곤혹스럽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읽으며 내놓은 총평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화제다. 퇴임한 지 2년 만에 이런 회고록을 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그 내용이 황당해서 그렇다. 누군가는 이를 '공상과학소설'로, 또 누군가는 이를 '공소장에 앞선 피의자 조서'로 표현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은 이 회고록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어디까지 우리가 믿을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대통령 회고록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이 회고록과 무관하게 <프레시안>은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와 함께 지난해부터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체적인 검증 작업을 벌여왔다. 그 작업을 묶어서 낸 책이 <MB의 비용>이다.  

'MB의 시간과 비용'이라는 기획은 철저하게 이명박 정부의 정책 평가를 위한 기획이다. 회고록 중 크게 논란이 된 한미 쇠고기 협상, 대북 관계, 외교 안보 문제, 4대강 사업 평가 등에 대해 전문가와 함께 조목조목 따져봤다. 많은 독자들을 대신해 <대통령의 시간>을 낱낱이 해체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전편에 이어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과의 대화 두 번째 꼭지를 싣는다. 편집자  

MB의 시간과 비용 
 
 



북한의 도발,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의 책임이었다 

프레시안 : 천안함 부분과 관련해 이야기를 해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상황실로 가면서 '북한이 일을 저지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뇌리를 스쳤다"고 했다. 처음 보고받자마자 즉각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김종대 : 그런데 보자. 천안함 침몰이 3월 26일이었다. 그리고 3월 31일에 이 전 대통령이 백령도를 방문한다. 이 때 김성찬 당시 해군참모총장이 독도함에서 이 전 대통령을 맞이하는데 여기에서 최초로 어뢰 발언이 나온다. 그 순간 이 전 대통령 얼굴이 뻣뻣하게 굳는다. '쓸데 없는 말을 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4월 1일, 한나라당의 남미특사단이 청와대를 예방한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말을 한다. '내가 배를 만들어봐서 안다. 파도에도 배가 부러진다'고 했다. 그런데 격실이 많은 군함은 그렇지 않다. 일반 배와 달리 부러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발언이 언론에 나온다. 그리고 4월 4일 김태영 당시 국방부장관이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어뢰 가능성을 얘기하는데 황급히 청와대에서 쪽지가 날아온다.  

듣도보도 못한 파도설, 메모 해프닝, 이런 것을 보면 이 전 대통령과 청와대는 '예단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그 다음에 김태효 전 비서관이 뭐라고 인터뷰를 했느냐, 예비역 장성들이 북한 어뢰로 몰아가는데 큰일 날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중에 아니라고 밝혀지면 어떻게 할거냐라는 식으로 계속 견제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는 이미 어뢰설을 굳히고 있었다. 결국 어뢰라는 정황이 위로도 보고가 안됐고, 밖으로도 안 나갔던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게, 청와대는 기뢰설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청와대는 기뢰 전문가를 합동조사단원으로 참여시킨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보면 북한의 어뢰가 아니길 바랐던 것이 아닌가. 당시 청와대 직원을 만났는데, (어뢰를 주장했는데) 어뢰가 아니라면 국제 사회에 문제가 된다며 군이 앞서가는 것을 견제하더라.


프레시안 : 청와대의 이런 행동은 당시에 합리적으로 보였다.  

김종대 : 그렇다. 틀린 게 아니다. 다만 이 회고록에서는 증거만 없었을 뿐이지, 어뢰라는 말을 심중에 갖고도 얘기를 못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도 사실과 다른 게 아닌가.  

프레시안 :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이 전 대통령은, 천안함 사건에도 불구하고 북한 신의주 일대에 대규모 수해 피해가 발생했을 때 쌀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것이 연평도 포격으로 돌아왔다는 취지로 기술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천안함 폭침이 일어나고 6개월 뒤인 2010년 9월, 북한 신의주 일대에 대규모 수해 피해가 발생했다. 우리 정부는 수해 피해 복구를 위해 쌀 5000톤과 컵라면 300만 개 등을 북한에 지원했다.(이로써 인도적인 지원 품목마저도 군대와 엘리트 계층의 결속에 활용하는 북한 정권과의 진정한 대화는 지난한 과제임이 분명했다. 2010년 11월 23일, 북한은 연평도의 우리 해병대 기지와 민간인 마을에 해안포와 곡사포로 추정되는 포탄을 발사했다. 나는 보고를 접하고 즉각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소집했다. 상황실로 향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6.25 이후 그때까지 남한의 본토가 공격받은 전례가 없었다.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무너질 것을 각오하고 전면전을 일으킬 용기는 없다고 생각됐다. 중국조차 그런 상황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기습 공격이라 생각하고 대응 방안을 고민하며 상황실에 도착했다. (<대통령의 시간> 346페이지) 


김종대 : 이 전 대통령 회고록에는 가장 핵심적인 사실이 다 누락됐다. 3월에 천안함 사건이 벌어지고, 그 직후 5.24조치가 발표된다. 여기에서부터 문제였다. 5.24 조치의 핵심 내용을 사람들이 남북교류를 끊어버린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군사적 조치였다. 앞으로 서해에서 북한 도발을 불용하겠다는 선언이 맨 앞에 나타난다. 이를 위해서 서해에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이고, 그래서 서해에 군사대비 태세를 가일층 강화한다는 것이 1번 내용이다. 북한 선박의 우리 해역 통과 금지를 선언했다. 바다에서 다 걸어잠그겠다. 도발 용납 안한다. 이것이었다. 그런데 연평도를 왜 허용했을까가 의문시된다. 실제로 5.24조치 발표 후, 이명박 정부는 '북한이 알아들었겠지' 해놓고, 그해 6월부터 11월까지 적어도 5개월 이상 군사 훈련을 중지해버렸다. 

프레시안 :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 

김종대 : 만약 한미연합훈련을 5.24조치대로 한다면, 미군이 조지워싱턴 항공모함을 들여와야 한다. 그러면 중국이 반발해 미중 관계가 갈데까지 간다. 실제 조지워싱턴호가 들어오는 줄 알고 7월부터 중국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조지워싱턴호가 서해에 들어오면 살아있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외교부 브리핑을 하고, 환구시보는 군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중국이 실탄 사격도 했다. 이때 미중 관계가 최고로 긴장됐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11월 10일로 예정된 G20 정상회의에 후진타오 전 주석이 반드시 와야 했다. 후 전 주석이 안 오면 체면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8월에 중국에서 통보가 왔다. 만약 조지워싱턴호가 서해에 들어오면 후 전 주석은 불참하겠다고 했다. 그 때부터 서해 훈련은 자취를 다 감춘다. 조지워싱턴호를 못 들어오게 한 것도 한국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G20정상회담이 끝나면 그 때 들어오는 것으로 하자고 한다. 아주 얄팍한 계산이다. 그래서 조지워싱턴호가 당시 되돌아간다. 그런데 이 책에 보면 뭐라고 돼 있나. 원자바오를 만나서 11월 말에 (조지워싱턴호가) 들어오기로 된 것을 북한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중국도 한미연합훈련을 반대하며 11월 27일 다이빙궈 국무위원을 급히 한국에 보냈다.() 이어 다이빙궈는 한미연합훈련이 전쟁으로 확전되지 않도록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다이빙궈에게 이야기했다.  
 
 
"대통령이 되어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한미 관계가 한중 관계의 발전을 가로막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 관계이지만 미국이 동북아 국가를 공격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반대할 것입니다. 북한의 도발이 없었다면 조지워싱턴호가 서해에 들어오는 것도 반대했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시간> 283페이지)  


그래서 11월 말에 들어오기로 돼 있는데 공교룝게도 G20정상회의와 11월 말 사이에 연평도 포격이 있었다. 그래서 원자바오를 만나서 이 전 대통령이 '연평도 포격 봤지 않느냐. 그래서 우리가 할수없이 불렀다. 고로 이것은 방어적 성격이다'라는 취지로 말한다. 그런데 연평도 포격 때문에 들어온 게 아니다. 한미 두 나라 사이에서 11월 말에 들어오기로 이미 합의가 돼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도 거짓말이다. 정상적으로 들어왔는데 연평도를 핑계로 삼은 것이다.  

연평도 포격이 왜 일어났느냐. 11월까지 5개월 이상 서해에서 모든 군사 훈련을 중지했다가 호국훈련 마지막 날, 다섯달 치 실사격을 엄청나게 했다. 북한에 간 메시지는 '도발'이었다. 그래서 북한이 대응을 한 것이다. 평소와 달랐으니까. 그래서 사건이 커진 것이다. 연평도 포격이 왜 일어났느냐, 천안함 이후, 이 전 대통령이 말한대로 안했기 때문에 그랬다. 군이 마지막에 엄청난 실사격 훈련을 갑자기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호국훈련도 10월에 하던 것을 G20 정상회의 이후인 11월에 한 것이다. 그것도 대규모로 실시했다. 사실 군대는 하던대로 한 것이다. 따져보면 5.24 이후부터 11월까지 서해는 군사대비 태세가 완전히 해제돼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강화시켜서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때마침 조지워싱턴호가 들어오기로 돼 있어서 그 명분을 연평도로 바꿨고 조지워싱턴호가 오는 것에 대한 중국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이게 진실이다. 우리 군사 대비태세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이 부분을 누락했다. 

한민구 합참의장 직전 합참의장이 이상의 전 합참의장이다. 이 분의 인터뷰가 실린 지난해 <신동아>를 보면 대청해전 직후 대통령에게 전화를 받았다는 한 요인의 증언이 나온다. "승리에 대해 칭찬해주실 줄 알았는데, 대통령은 그 승리로 인해 3차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될 가능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화까지 낸 것은 아니지만, '왜 그렇게 강하게 대응했느냐'며 매우 서운해했다. 말씀을 다 한 다음에도 미진한 감정이 남았는지, 계속 혀를 차며 전화를 끊지 않았다. 전화 통화라 직접 얼굴을 뵐 수는 없었지만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될 수 있음을 무척 안타까워하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남북 접촉이 싱가포르에서 10월에 있었고, 대청해전이 11월에 있었다. 그러면서 이상의 의장이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 군사 훈련할 때 대통령도 같이 해야 한다고. 

이상의 전 합참의장 인터뷰 
 
 
"대통령 처지에서 가장 리스크가 적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적 어뢰가 천안함을 격침했다고 하면 정상회담을 추진해온 그로서는 큰 위기에 직면한다. 피로골절로 부러졌다고 하면, '같은 연수(年數)의 초계함이 작전 중인데 왜 천안함만 부러지는가'라는 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회수하지 못한 기뢰가 터졌다고 한다면 큰 부담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도 다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대가 대통령을, 국가를 책임진 사람이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wishful thinking(소망적 사고)' 쪽으로 유도했다고 본다.' 
 
 
"우리 군은 '허상(虛像)' 위에서 훈련한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보복이나 반격작전을 승인했다고 보고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통령은 그 작전을 승인해주지 않으니,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대통령이 승인해줄 것으로 치고 하는 '했다 치고 작전'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대통령과 측근들이 항시 군사훈련에서 배제되는 것이 큰 문제다. 키리졸브 등 큰 훈련에 참가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유사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지 않고 남북정상회담 같은 허황된 목표만 내세우니, 우리 군은 무력한 대응으로 이어지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신동아> 2014년 8월호) 


본인이 데리고 있던 합참의장들한테서 다 반박당하고 있다. 이런 면들을 종합해 보면 천안함, 연평도 관련 기술은 기만의 연속이다. 일부에서는 팩트가 안 맞는다. 일단은 안보를 표방해 놓고 자기의 비겁함을 북한의 악마성에 전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이 그처럼 악마라면 왜 군사대비가 그 모양인가. 우리 군사대비 태세가 잘못돼 일어난 게 원인이 절반 이상이다. 끊임없이 청와대는 군인들의 발목을 잡고, 군인들 말에 딴지를 걸고, 그리고 엉뚱한 지시를 했다. 그런 게 자기가 데리고 있던 부하들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이 전 대통령에게 얘기하고 싶다. 천안함, 연평도 부분은 차라리 쓰지 말지 그랬나? 왜 써서 매를 벌고 있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나기 1달쯤 전인 2012년 10월 18일 연평도를 방문했다.ⓒ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나기 1달쯤 전인 2012년 10월 18일 연평도를 방문했다.ⓒ연합뉴스

 
 

확전 자제 발언, 끝까지 우기는 이명박 

이명박 전 대통령 주장 
 
 
상황실 TV를 보니 실제로 그런 엉뚱한 보도(대통령 초기 메시지로 확전 자제)가 자막으로 나오고 있었다. 황당한 생각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디서 저런 소리가 나온 거죠? 하지도 않은 얘기가 왜 뉴스에 나와요? 누가 저런 말을 언론에 했어요? 지금 우리 민간인이 포격당했는데 확전을 걱정할 상황이에요?" 알고 보니 언론의 브리핑 요구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회의에 참석한 한 인사의 사견이 잘못 전달되어 언론에 나간 것이었다. 
()
나중에 보니 군에서는 확전 자제라는 말을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하라'는 뜻으로 쓰고 있었다. 물론 한반도에 전면전이 발생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그러나 영토가 공격받는 상황에서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첫 메시지로는 부적절한 내용이었다. (<대통령의 시간> 347페이지)

 

김태영 전 국방부장관의 증언  

 
 

(대통령은) 단호하지만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는 걸 겸해서 (지시)말씀했다. 도발이 있을 때 가장 적합한 조치다.(김태영 당시 국방부 장관. 연평도 포격 다음 날인 11월 24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한 자리에서 "대통령의 최초 지시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한 대답.)  


프레시안 : 연평도 포격 사건과 관련한 이 대통령의 말도 논란이 많다. 

김종대 : 연평도 사건에 대해서는 MB가 퇴임 직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전투기를 동원해 응징하려 했는데 군이 반대해서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합참의장이 지금 국방부장관인 한민구 장관이다. 나중에 청문회에서 다 얘기했지만, 본인은 전투기 출격을 반대한 적이 없다고 한다. 지시도 안 받았기 때문에 반대한 적이 없다는 거다. 대통령은 군이 반대했다고 했는데, 합참의장을 경유하지 않는 군이 대한민국에 존재하나? 그러니 이 전 대통령 발언이 나오자 장군들이 발끈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당시 화상회의로 지시를 받았는데, 대통령 지시가 '단호하되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확전 방지 발언은 그러면 이 전 대통령이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참모의 발언으로 나온다. 이 대목도 진실성이 없다. 유엔사 교전규칙 얘기는 더더욱 황당하다. 여기 보니, 본인이 확전 자제라는 말, 군에서 전면전으로 확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고 한다. 아니, 그러면 확전이 전면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여기에서 이 설명을 했다는 것은 어이없게도 확전의 뜻을 몰랐다는 것 아닌가. 348페이지를 보자. 자기 발언이 아닌데 자기 발언으로 확전 자제가 언론 보도로 나가 큰 후유증을 겪었는데, 나중에 보니, 군에서는 확전 자제라는 말을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하라는 뜻으로 쓰고 있었다고 한다. 이 얘기를 왜 할까. 횡설수설이다. 본인이 끝까지 확전 자제는 남의 일이라고 우기고 있다. 아니 합참의장이 '확전자제'라고 대통령이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는데.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  
 
 
나는 다시 한번 확고한 대응을 강조했다.  
 
 
"평상시 교전수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민간인에게 무차별 표격을 하는 상대에게는, 분명히 다시 이야기하지만 우리 영토와 국민에 대한 공격에는 교전수칙을 뛰어넘는 응징을 해야 합니다.'
 
 
한 의장은 2014년 6월 국방부장관 후보자로 국회 청문회에 나가 "당시 이 대통령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인 만큼 4~5배의 강력한 대응을 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밝혔다.() 확고한 대비책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수세적이고 소극적인 교전수칙과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의식이 문제라고 봤다. 나는 유엔군 사령부의 정전시 교전수칙을 개정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대통령의 시간> 349페이지)


프레시안 : 유엔사의 교전규칙 문제는 어떤 것인가.  

김종대 : (이 전 대통령이 쓴 단어 중에) 교전수칙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잘못된 것 같다. 오기다. 교전수칙과 교전규칙을 혼용하는데, 두 단어를 헷갈리고 있다, 당시 문제됐던 것은 유엔사 정전시 교전규칙이다. 항공기 동원은 미국의 협조를 받아야 하고, 어떤 도발이 있을 때 동일 무기로 2~3배 응징한다는 것이다. 비례성, 충분성이 명시된 것인데, 하나 더 하면 신속성이다. 이것은 확전 방지 규범이다. 동종의 무기와 동량의 응징을 표방한다. 그런데 교전수칙 얘기를 한다. 이건 교전규칙과 무관하다. 교전수칙은 일선 부대 전술 행동과 관련해 지휘관이 일일이 통제할 수 없을 때 사전에 하달한 수칙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직접 지휘를 했으니, 교전수칙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11월 24일 이 전 대통령의 지시가 나온다. 교전규칙을 개정하라고 한다. 이 얘기가 왜 나오나.  

여기에서 무지가 드러난다. 당시 논란이 된 것은 함포나 전투기를 지원할 수 없다는 데서 생겼다. 미군 통제를 받아야 되고 그렇게 되면 확전이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교전규칙보다 더 우위의 권한은 대통령의 국군 통수권이다. 교전규칙이 (확전 방지 목적으로 돼 있어) 그렇다고 해도, 대통령이 결심하면 국가 주권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 논란이 일주일간 지속됐다. 그래서 당시 월터 샤프 한미연합사령관이 11월 30일에 국방장관에게 편지를 보낸다. 한국 정부가 자꾸 우리에게 물어보고 전투기를 발진한다 만다 하는데, 우리에게 물어보지 말라. 한국 정부 고유 권한이다. 이것은 대통령에게 잔소리를 들은 한민구 당시 합참의장이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질의서를 보낸 데 대한 답변이었다. 쏠까요, 말까요, 물어보지 말고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교전규칙은 이미 사문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대통령까지 헷갈려한다. 이 책에서는 엉뚱하게 내용을 있는 그대로 쓰지 못하고 웬 교전수칙을 말하나?  

프레시안 : 교전수칙이고, 교전규칙이고 따질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김종대 : 그렇다. 원래 서북해역에 대한 우리 방어의 규범은 국지도발계획이다. 여기에 다 응징하도록 돼 있다. 거듭 말하지만 교전 규칙이나 수칙은, 평소 국가 전쟁지도본부가 현장 군사력을 통제하기 어려운 긴급한 상황에서 일일이 쏘라, 말라, 상부에 물어보지 말고 현장 지휘관이 제대로 대응하라고 사전에 준 안내 지침이다. 그런데 당시는 화상회의로 (대통령에 의한 지시가) 다 되고 있었기 때문에 교전 수칙이든 규칙이든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바둑을 두는데 상대에게 왜 변칙(대통령 직접 지휘)으로 두느냐면서 정석(교전수칙)대로 둬라, 이렇게 말할 수 있나. 그런데 이 시기에 교전규칙같은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얘기를 속 빼고 '참모가 메시지를 잘못 전달했다. 그리고 나는 단호하게 하라고 했는데 당시 장관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이 얘기만 하는 것이다. 

이게 왜 지금 필요한 얘기인가. 정작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위기 시에 대통령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국가 위기 관리 과정에서 어떤 의견들이 테이블에 오르고, 어떻게 합리적으로 걸정되는지 등에 관한 것들이다. 교전수칙 얘기는, 어른들끼리 모여 얘기하는데 중학교 참고서를 가지고 와서 논의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일선 중령들이 논의해야 할 일들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 얘기를 논의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 게다가 사실 관계도 다 누락돼 있다. 국방장관 합참의장, 대통령이 모여서 교전규칙, 수칙 따지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나. 이걸 무지하다고 해야 할지, 무능력하다고 해야 할지.  

프레시안 : 확전 자제 발언을 시인했다면, 뒤에 나오는 모든 논란이 필요 없었을텐데. 

김종대 : 스타인 브루너라는 학자가 사이버네틱스라는 모델을 개발하면서 위기 관리의 최악의 상황은 바로 '소신없는 사고'라고 말했다. 이도 저도 아닌 소신 없는 사고. 이 사람이 교전수칙 얘기하면 '어, 그렇게 해', 저 사람이 딴 얘기하면 또 '어 그렇게 해'라고 하는 것 같다. 누가 보고했느냐에 따라, 그때 그때 참모에 따라 아젠다가 바뀌는 것이다. 체계적 사고가 아니다. 지금 회고록의 연평도 포격 사건 부분은 사건의 본질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기술하고 있는 셈이다. 그마저도 참모들의 잘못된 보좌 때문으로 되어 있다. 퇴임 당시 밝힌 말에 이 회고록을 연결시켜보면 한마디로 이거다. '저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안보를 중시한다는 보수 정권에서 말이다. 나는 이렇게 황당무계한 위기 관리는 처음 봤다. 

프레시안 : 긴 시간 감사하다. (끝) 

 

 

 MB "촛불 때 죽었어봐…'글로벌 코리아' 못 외쳤지"

[MB의 시간과 비용] <3> 정의당 박원석 의원 "억하심정으로 쓴 책"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18 08:17:41

 
"기록물 자체로 가치는 있다. 그러나 읽는데 곤혹스럽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읽으며 내놓은 총평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화제다. 퇴임한 지 2년 만에 이런 회고록을 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그 내용이 황당해서 그렇다. 누군가는 이를 '공상과학소설'로, 또 누군가는 이를 '공소장에 앞선 피의자 조서'로 표현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은 이 회고록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어디까지 우리가 믿을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대통령 회고록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이 회고록과 무관하게 <프레시안>은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와 함께 지난해부터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체적인 검증 작업을 벌여왔다. 그 작업을 묶어서 낸 책이 <MB의 비용>이다.  

'MB의 시간과 비용'이라는 기획은 철저하게 이명박 정부의 정책 평가를 위한 기획이다. 회고록 중 크게 논란이 된 한미 쇠고기 협상, 대북 관계, 외교 안보 문제, 4대강 사업 평가 등에 대해 전문가와 함께 조목조목 따져봤다. 많은 독자들을 대신해 <대통령의 시간>을 낱낱이 해체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MB의 시간과 비용' 3편에서는 정의당 박원석 의원과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박 의원은 2008년 참여연대 협동사무처 처장으로 광우병국민대책위원회 공동상황실장을 지냈으며, 그해 11월 촛불집회 주도 혐의로 구속돼 5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편집자  

MB의 시간과 비용 
 
 


박원석 정의당 의원 "대통령의 시간? 자화자찬의 시간!" 


프레시안 :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 어떻게 봤나. 

박원석 :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말하지 못했던 내용을 회고록을 통해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의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의 회고록이라면, 재임 당시에 공과(功過)에 대해서 돌아보고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MB의 회고록은 초지일관 자화자찬이다. 제목을 왜 <대통령의 시간>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자아도취의 시간'이나 '자화자찬의 시간'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회고록에도 나오지만, 이 대통령은 2008년 촛불 정국 이후 "국정지지율이 20퍼센트 초반으로 떨어지며 국정 운영의 동력이 급격히 상실됐다"(126페이지). 그로 인해 5년 임기 내내 제대로 된 통치 행위를 못한 데 대한 억하심정이 있는 것 같다.  

▲ 정의당 박원석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정의당 박원석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김 본부장이 대답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와 통화하면서 이면 합의를 했습니다. 그걸로 담화 발표까지 했습니다. 2007년 9월 APEC을 계기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또 한 번 구두로 합의했습니다. 그 내용과 문서가 유출됐답니다. 특정위험부위(SRM)를 제외하고는 월령 제한 없이 전부 수입하겠다는 내용이라 합니다. 보커스는 한국 정부가 그 합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입니다."(<대통령의 시간> 229페이지) 

김종훈 새누리당 의원(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의 주장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출간되면서 과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습니다.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통상교섭본부장 직을 수행한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국민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와 관련해서 국민들께서 모르는 이면합의는 그때도 지금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런 약속도 없었나? 있었습니다. 

 
 

그 약속이 국민들께서 모르는 숨어있는 약속이었나? 아닙니다. 국민들께서 모두 아시는 약속, 바로 노무현 당시 대통령께서 2007.4.2. 대국민 담화를 통해 밝혔던 내용입니다. 지금 불거진 오해는 한미 정상 간의 동일한 통화 내용을 두고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측의 '이면합의'라는 시각상의 차이 때문으로 보입니다.(김종훈 의원이 낸 2월 2일 자 보도자료) 


프레시안 : 2008년 촛불 정국에 대해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 논란이 있을 만한 부분을 꼽자면?

박원석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와 관련해 MB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국 부시 대통령과 이면 합의를 한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당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었던 새누리당 김종훈 의원이 지난 2일 "국민들께서 모르는 이면 합의는 그때도 지금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없다"고 반박했다. 김 의원 말이 맞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했던 기자회견도 행간을 가지고 이면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 액면 그대로를 말했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 FTA 추진에 국민적 반발이 컸다. 특히 쇠고기 수입은 의약품, 자동차, 스크린 쿼터 등과 함께 미국이 제시한 4대 선결조건 중 하나였다. 2006년 3월 한국과 미국의 1차 사전준비 협의 당시 FTA보다 선결조건을 진행하는데 더 큰 후폭풍이 예상됐었다.(2006년 1월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금수조치를 해제하고 생후 30개월 미만인 쇠고기 중 뼈를 제외한 부분에 한해 수입을 재개했다. 또 한국영화의 의무 상영일수인 스크린쿼터를 현행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했다. 이를 기점으로 참여 정부가 한·미 FTA 개시를 위해 미국에 '퍼주기'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편집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PD수첩>이 방영되자 중고생들을 중심으로 인터넷에 광우병 괴담이 퍼져 나갔다. 주로 연예인 팬클럽 등을 중심으로 유포된 내용은 "광우병은 공기로도 감염된다", "화장품이나 젤라틴 성분이 들어간 생리대, 기저귀로도 전염된다", "쇠고기를 다룬 칼과 도마로 수돗물까지 오염된다" 등으로 그야말로 괴담이었다.(<대통령의 시간> 115~116페이지) 


(☞ "아이들 먼저 든 촛불, 어른들이 이어 받다") 

(☞ 한미FTA-美쇠고기 관계가 애매? 가카의 '인증샷' 보라) 


MB 회고록 중 촛불집회와 관련한 부분을 보면, 이 전 대통령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다. 미국이 2008년 5월 국제수역사무국(OIE) 총회에서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획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MB는 광우병에 대한 국민적 우려를 '괴담'이라고 치부했다. 사실 광우병(BSE)에 대해서는 전 세계적으로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영국 다음으로 광우병 환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이 미국이다.(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6월까지 "미국인이 인간광우병(vCJD)으로 사망한 사례는 지금까지 4명"이다. 영국은 1995년 최초로 발생한 이후 지금까지 177명이 인간광우병으로 사망했다. 편집자)  

30개월 이상 쇠고기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미국에서도 제기된 주장이다. 미국이 자국 내에서 판매하는 쇠고기는 30개월 이하 어린 송아지 고기다. 한·미FTA 협상 당시 일본은 뼈를 포함한 20개월 미만의 쇠고기를, 대만은 뼈를 제외한 살코기만으로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를 수입했다.(일본은 2013년 2월 생후 30개월 미만 쇠고기로 제한 월령을 확대했다. 편집자) 그러나 중국은 지금까지도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고 있다.

▲ 2008년 '100만 촛불집회'의 시작은 10대 소녀들이었다. ⓒ프레시안

▲ 2008년 '100만 촛불집회'의 시작은 10대 소녀들이었다. ⓒ프레시안  

 
 

두 번째는 추가 협상 부분이다. 국민의 요구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거였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구국의 결단을 한 것처럼 기술한 것도 어이없는 대목 중 하나다.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 
 
 
고민 끝에 추가 협상에 관한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국민에게 솔직하게 밝히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6월 19일 나는 청와대 춘추관에서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광우병 사태에 대한 입장을 다시 밝혔다. 
 
 
"국민이 원하지 않는 한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정부의 확고한 보장도 확실히 받아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미국과의 재협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가 이익을 지키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후유증이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대통령의 시간> 124페이지)


'재협상 약속'은 국 끓여 먹었나!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 위기를 노무현 전 대통령 때문인양 말하고 있다. 촛불집회 당시 나온 '한반도 대운하 반대', '공공부분 민영화 반대'와 같은 국민의 목소리를 전 정권을 비롯한 정치 세력의 개입으로 보고 있다.  

박원석 : 그렇다. 또 당시에는 '소통 부족'과 국민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뿐 아니라, 대선 공약이었던 '한반도 대운하 사업'(2008년 12월 '4대강 사업'이라고 말을 바꿈. 편집자)를 일방 추진하고, 일제고사 및 0교시와 야간 자율학습, 공공부분 민영화(MB 정부는 '공기업 선진화'라는 말을 사용. 편집자) 등을 밀어붙였다.  

이런 것이 복합돼서 통치 초반부터 국민들의 반발과 반대가 있었던 것인데, 마치 전 정권이 부추겨서 벌어진 것처럼 말했다. 참여연대만 해도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그 어떤 후원도 받지 않는 단체였다. 당시 촛불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단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인 개입이 있었던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정말 잘못된 시각이다.  

오히려 당시 야당은 촛불집회 초반에 참여하지 못했다. 사실은 끝까지 무기력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촛불집회에 나왔다가 오히려 국민에게 욕먹고 항의받는 상황이었다. 집회 후반에 가서나 개별적으로 조금씩 개입했다. 특히 전임 정부를 꾸렸던 노무현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개입했다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의 통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얘길 늘어놓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집회가 정권 퇴진 주장 양상으로 변하자 일각에서는 17대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대선 불복 세력'이 집회를 주도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대선 불복 세력이 건강을 염려하는 순수한 국민들의 뜻에 편승해 대통령과 정권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 세력들이 집회에 개입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117페이지)  
 
 
그런데 시민단체의 지지를 기반으로 탄생한 전임 정부는 시민단체와 가까운 관계를 지속했다. 정권 교체로 이 두 주체가 다시 분리돼 정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광우병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광우병 사태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많은 시민단체들이 정부보조금으로 운영됐다는 사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대통령의 시간> 129페이지)  


마지막으로, 이명박 정부가 광우병 논란의 정점에서 약속한 게 있다. 한승수 국무총리,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정운천 농림수산부 장관 등이 2008년 5월 "주변국과 미국이 한국과 동일 조건으로 쇠고기 수입 협상을 체결하지 않을 경우 재협상한다"고 밝힌 것이다.(그해 8월 한나라당은 "일본, 대만 등 우리 주변국 간 쇠고기 협상 결과가 한·미 협상 결과에 비해 개방의 폭이 축소될 경우 (그 조건과 동일하게) 재협상하도록 한다"고 야당과 합의했다. 편집자)   

2009년 11월 대만은 월령과 부위 제한 없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려다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에 부딪혔다. 이듬해 1월 대만 의회는 30개월 미만 미국산 쇠고기 중 광우병 위험이 높은 6개 부위(내장, 분쇄육, 뇌, 척수, 눈, 머리뼈 등)을 수입하지 못하도록 식품위생관리법을 수정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현재까지도 30개월 미만 소의 뇌, 눈, 머리뼈, 척수, 등배신경절, 척주, 회장원위부(소장 끝 50cm 부위)를 제외한 내장을 수입하고 있다.  


▲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졸속 타결을 풍자하는 패러디들. ⓒ디시인사이드

▲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졸속 타결을 풍자하는 패러디들. ⓒ디시인사이드

 
 

프레시안 : 2008년 7월 10일 이 전 대통령과 한나라당 지도부 오찬에서 예정된 미국산 쇠고기 스테이크가 갑자기 굴비로 교체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들도 내심 불안했던 것 아닐까? 

박원석 : 당시 청와대의 미국산 쇠고기 사용 여부가 화제가 됐다. MB가 청와대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먹겠다던 약속을 지켰는지 모르겠다.(웃음) 2008년 11월 광우병 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으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돼 6개월 정도 교도소 생활을 했다. 그때 쇠고기 국이 나오면 먹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안내 방송이 나오더라. "미국산 쇠고기를 쓰지 않는다"며 "쇠고기는 호주산이고 돼지고기는 덴마크 산"이라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조차도 못 미더워서 안 먹었다. 지금도 미국산 쇠고기를 파는 식당에 안 간다. 

오바마? 내 동생 아이가!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오바마와 형제의 정을 나누었다"(216페이지)며 둘 사이 우정을 과시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중 한·미 FTA에 반대했"(217페이지)던 오바마 미 대통령이 "이날(2009년 11월 19일) 회담을 계기로 한·미 FTA에 대한 오바마의 입장은 큰 진전을 보였다"(221페이지)고 주장했다.  

박원석 :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미국 정부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조차 모른 채 무식한 얘길 한 것이다. 부시 전 대통령 시절부터 양자 간 무역협상을 확대하는 것은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부합된 일괄된 정책이다. 약간의 기조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오바마는 자동차 공업이 발달한 동부와 북부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FTA 협상에서 '무엇을 더 강조할 것인가' 차이는 있었겠지만, 오바마가 한미 FTA에 회의적이었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미국은 회의적이었는데 우리가 서둘러서 한미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말밖에 안 된다. 스스로가 '천하의 매국노'임을 스스로 고백한 것밖에 안 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무엇보다 한·미 FTA 발효 후 대미 무역흑자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은 협상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한다. 2011년 107억 달러였던 대미 무역흑자는, FTA 발효 첫해인 2012년에는 152억 달러, 2013년에는 206억 달러로 크게 늘었다. 미 의회에서 "한·미 FTA가 미국에 불리한 조건으로 타결됐다"는 불만 섞인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도 한국에 대한 서비스 흑자가 2011년 54억 달러에서 2012년 65억 달러로 늘었다. 양국 모두가 윈윈하는 결과를 낸 것이다.(<대통령의 시간> 234페이지)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은 2012년 3월 15일 한·미 FTA 발효 후 대미 무역흑자가 크게 증가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한국의 서비스 흑자가 1년 새 10억 달러가 늘었다며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사실인가?

박원석 : 검증해야 하는 사안이다. 설사 대미 무역흑자가 상승했더라도, 한·미 FTA의 효과라고 단정하긴 쉽지 않다. 그리고 한·미 FTA처럼 이른바 개방의 폭이 높은 '고강도 FTA'의 영향이라는 것은 장기간을 두고 평가해야 한다. 농업과 자동차, 서비스 분야 등 꼼꼼하게 따져보지도 않고 쓴 것 같다. 한·미 FTA의 경제적 영향에 대해 전문가들도 평가하기엔 시기상조라는 신중론이 많다. 그런데 한·미 FTA 이후 대미 무역 흑자가 크게 늘어 한국 경제가 어떤 계기를 맞은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MB 말대로라면, 지금 한국 경제가 왜 이런가. 

* '한·미 FTA 반대 전도사'라고 불린 정태인 칼폴라니연구소 창립 준비위원은 2013년 3월 <프레시안> 칼럼에서 한·미 FTA 발효 2년의 성과를 "성공적"이라고 자평한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정부가 2012년과 2013년 대미수출 증가율이 대세계수출 증가율보다 높다는 점을 한·미 FTA의 성과로 꼽고 있다며, "발효 이전 2008년과 2009년의 대미 수출증가율이 각각 32.3%와 12.8%로, 지난 2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정부처럼 단순 수치만 놓고 얘기한다면, 한미 FTA 때문에 수출증가율이 형편없이 낮아졌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고 비난했다. 편집자


국민을 '사랑으로' 보우하사? 어디서 약을!  
김두우 전 홍보수석이 전한 에피소드 
 
 
대통령 : 이젠 내 의견을 좀 이야기하려 해요. () 다섯째는 좀 멜랑콜리해. <모든 정책의 바탕에는 사랑이 있었다>. 여기에는 친서민정책, 복지, 신고졸시대까지 넣자 이거지. 일반 회고록에 쓰지 않는 용어로 말이야. (대통령은 칠판에 계속 써나갔다.) 
 
 
강만수 : 좋은 것 같습니다. (강 전 장관의 말에 참석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통령 : () '모든 정책의 바탕에는 사랑이 있었다', 이것도 이유가 있어요. '광우병 파동이 일어났을 때 왜 강하게 밀고 나가기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힘이 있다고 때려잡는 건 군사독재 방식이지. 시위대를 전부 연행하고 구속하고, 그러다가 한두 명이라도 죽었다고 생각해봐요. 그랬으면 나는 국제사회에서 글로벌 코리아를 외칠 수 없게 됐을 거야.  
 
 
- <대통령의 시간> 부록 <오늘 대통령에게 깨졌다>(김두우 지음) 63~64페이지


프레시안 : 김두우 전 홍보수석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 회고록 제목이 <모든 정책의 바탕에는 사랑이 있었다>가 될 뻔했다. 그러면서 '촛불집회를 과잉진압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사람이 죽었더라면 '글로벌 코리아'를 외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박원석 : 이른바 '글로벌 코리아'를 외치려고 강하게 진압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사실 초반에는 MB 정부가 대응을 못했다. 더군다나 시위 주체가 시민사회단체나 재야단체가 아니라, 청소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당황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을 파악도 못했다. '재협상만은 끝내 안 하겠다'고 버티다가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니까 '사실상 재협상'이라며 물러났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하지만 2008년 5월 말, 6월 초부터 사실상 폭력 진압을 했다. 경찰은 5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 살수차와 사복 체포조를 동원해 20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연행했다. 경찰은 도로에 누운 집회 참가자를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당시 이학영 YMCA 사무총장(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경우 어깨와 갈비뼈가 골절됐다. 수많은 시민들이 부상을 입었다.(5월 31일에는 청와대 앞에서 참가자들과 경찰이 밤샘 대치를 했고, 6.10 민주항쟁 21주년이었던 6월 10일은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을 들었다. 그해 7월 31일 기준으로 1045명이 연행됐으며, 이 중 900여 명이 집시법 및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편집자) 


이런 게 폭력 진압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폭력 진압이라는 말인가. '죽은 사람'이 있어야 폭력 진압을 인정할 것인지, 거꾸로 묻고 싶다. 이듬해 1월 용산 철거민에 대해 공권력이 폭력 진압을 해, 민간인 5명과 경찰 1명 등 아까운 생명이 결국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회고록에 이 같은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 들어, 이른바 '공안 통치'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하지만 사실 '공안 통치'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됐다. 촛불집회를 겪은 후 통치 기조를 '공안 통치'로 바꿨고 임기 끝까지 계속됐다. 

프레시안 : '공안 통치' 기조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이던 신형철 전 대법관은 '촛불집회'와 관련한 재판 배당 방식을 바꾸는 등 재판에 개입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 경제정책을 비판하던 '미네르바'는 전기통신기본법으로, 'G20 포스터 쥐 그림 사건'의 대학 강사는 형법 제141조 공용물손괴죄를 적용해 처벌했다. 사실상 잠자고 있던 법을 부활시켰다. 

박원석 : 촛불집회 후,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해 지면서 위와 같은 양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책 제목으로 고려했다든 '사랑이 있었다'라는 것은,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 
 
 
9월 위기설이란 그해 5~6월의 광우병 파문이 진정되면서 곧바로 등장했다. 2008년 9월 14일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이 67억 달러인데, 외국인들이 이 채권을 모두 처분하면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미네르바'라는 네티즌이 중심이 되어 야당과 일부 언론, 심지어는 일부 학자들까지 이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당시 외환보유고가 2,400억 달러에 이르는 상황에서 67억 달러의 단기 채권으로 외환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9월 위기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 광우병 사태를 주도하던 세력 중 일부가 9월 위기설을 매개로 인터넷을 이용해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강만수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며 정부를 비난했다.(<대통령의 시간> 134~135페이지) 


'미네르바' 박대성 씨는 2009년 1월 허위 사실 유포죄로 검찰에 구속됐지만,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박 씨에 대한 구속 수사가 '정부의 심기가 불편해서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MB는 회고록에서도 박 씨가 주장한 '9월 위기설'을 괴담으로 치부하고 있다. '미네르바 같은 비전문가에게 나라 경제가 휘둘렸다'는 식이다. MB가 국민을 우매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전기통신기본법 위반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법률을 적용해 입에 재갈 물리는 식으로 구속한 것 자체가 '공안 통치'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부에 대한 정상적이고 건전한 비판조차도 수용하지 못하는 속 좁은 통치 행태를 보였다.   


(☞ 미네르바 구속, 국제적 논란거리로 확산 일로) 

(☞ '공권력의 역습'…경찰, '천안함 미네르바' 무차별 조사) 


▲ 정의당 박원석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정의당 박원석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정부 정책에 반대 의사를 밝히며 촛불을 드는 시민을 국가 전복을 꾀하는 '위협 세력'으로 보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시민들의 저항은 당연한데…. 반면, MB는 젊은 시절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것은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인식이 아닌가. 
 
 
박원석 : '국민주권'을 모르는 사람이다. 촛불집회 때 가장 많이 나왔던 구호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였다. 현대 사회에서 '통치'는 거버넌스(governance), 즉 '협치(協治)'다. 이 전 대통령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 권력자로 가져야 할 태도가 없는 사람이다. 기업가 출신 출신으로, 국회의원 생활도 얼마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비즈니스로, 딜(deal)로, 장사하겠다는 습관이 강하다. 그래서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나 '자원외교'와 같은 발상이 나온 거다. 특히 자원외교와 관련해서는 국가를 사유화하는 거대한 부정부패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MB 형인 이상득 전 의원의 아들 이지영 씨가 운영했던 금융회사가 각종 이권에 개입을 많이 했다는 의혹도 나왔지 않느냐.  
 
 
사실, 2008년 촛불 정국 마지막에 고민이 많았다. '이 세력을 어디로 귀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촛불집회의 성과는 2010년 지방선거 승리로 나타났다고 본다. 당시 무상급식 논쟁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MB 정부를 거치며 '우리가 이대로 물질적 가치에 연연하며 경쟁적으로 사는 게 행복한 삶이 아니구나. 함께 사는 삶이 더 나은 것이구나'라는 의식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부자 되자'라는 뉴타운 광풍에서 '더불어 함께 살자'로 넘어온 것이다. 이런 변화가 박근혜 정부를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좌 클릭할 수 있게 견인한 것이다. 지금 보면 지키지도 않을 공약(空約)으로, 겉모습만 화장한 거였지만…. 

프레시안 : 긴 시간 말씀 감사하다.(끝) 

 "MB, 거짓말로 4대강 강행…배후는?"

[MB의 시간과 비용] 김진애 전 의원 "MB 회고록=사기꾼의 핑계"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20 08:55:25

 
"기록물 자체로 가치는 있다. 그러나 읽는데 곤혹스럽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읽으며 내놓은 총평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화제다. 퇴임한 지 2년 만에 이런 회고록을 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그 내용이 황당해서 그렇다. 누군가는 이를 '공상과학소설'로, 또 누군가는 이를 '공소장에 앞선 피의자 조서'로 표현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은 이 회고록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어디까지 우리가 믿을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대통령 회고록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이 회고록과 무관하게 <프레시안>은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와 함께 지난해부터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체적인 검증 작업을 벌여왔다. 그 작업을 묶어서 낸 책이 <MB의 비용>이다.  

'MB의 시간과 비용'이라는 기획은 철저하게 이명박 정부의 정책 평가를 위한 기획이다. 회고록 중 크게 논란이 된 한미 쇠고기 협상, 대북 관계, 외교 안보 문제, 4대강 사업 평가 등에 대해 전문가와 함께 조목조목 따져봤다. 많은 독자들을 대신해 <대통령의 시간>을 낱낱이 해체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MB의 시간과 비용' 4편에서는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김진애 전 의원과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김 전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4대강 사업 저격수'로 활약했다. 편집자  

MB의 시간과 비용 
 
 

프레시안 :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을 평하자면? 

김진애 :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에게 도취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대통령의 시간>을 보면, 현직 대통령이 말하듯 기술하고 있다. 자아도취형 사람들은 자기비판에 민감하다. 감사원 결과나 반대 여론에 대한 기사를 열심히 읽은 것 같다. 무엇보다 물러난 지 2년밖에 안 된 시점에 전직 대통령이 회고록을 썼다는 게 가장 잘못된 일이다. 특히 '4대강 사업'(MB 정부는 '4대강 살리기'라는 말을 사용. 편집자)과 관련해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명박 전 대통령 본인의 진술을 토대로 기록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회고록이 아니라, 잘잘못을 따지는 '진술서'가 되어야 한다.  

▲ 김진애 전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김진애 전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4대강 사업'과 관련해 바로잡아야 할 부분은? 

김진애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6월 19일 이명박 대통령은 특별기자회견을 열어 "대운하 사업도 국민이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해 12월 2일 국가균형발전위원회(균발위)가 대통령에게 '4대강 살리기 추진 프로젝트'를 보고하는 형식으로, 대선공약이었던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4대강 사업'으로 둔갑시켰다. 균발위는 특히 대통령 인수위 시절부터 있었던 '한반도 대운하 TF팀'의 설계를 그대로 옮겨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2008년 12월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11조 원 규모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보고했다. 홍수와 가뭄, 오염으로 몸살을 앓는 4대강 정비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560~561페이지) 대운하 계획을 포기함에 따라 조령을 관통하는 인공 운하 공사는 필요 없어졌다. 그러나 기존 하천을 정비하는 계획은 4대강 살리기에 상당 부분 적용할 수 있었다.(<대통령의 시간> 564페이지) 
감사원 결과 및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측 보도자료
 
 
1) 감사원 '4대강 살리기 사업 설계·시공 일괄입찰 등 주요계약 집행실태' 
 
 
(담합빌미 제공) 국토부는 대운하 중단(’08.6월)이후 대운하 사업(민자)을 4대강 사업(재정)으로 변경하고도 추후 운하추진에 지장이 없도록 4대강 MP수립(’09. 6월)
 
 
- 이 과정에서 ○○○○컨소시엄으로부터 경부운하 설계자료를 제공받거나 대운하 설계팀과 4대강 준설·보 설치계획 등에 대운하 案 활용 및 반영여부 등을 협의 
 
 
* (대운하 案) 정부에서 재정으로 낙동강 하구~상주 구간에 준설·보 설치로 최소수심 6.1m를 확보하면 갑문(魚道나 둔치를 이용하여 설치)·터미널 등 운하 시설을 민자로 추진하는 계획(’08. 10월~’09. 4월)  
 
 
대운하설계팀<대운하연구회 회장(전 인수위 한반도 대운하 TF팀장) 및 ○○○○컨소시엄과 계약을 맺고 경부운하 제안서를 준비한 (주)◇◇부사장>에서 수립한 계획, ○○○○컨소시엄도 유사한 계획 마련  
 
 
2) 이미경·임내현·윤후덕·박수현 의원 공동 기자회견 '4대강 사업 국토부 비밀 내부문서 전격 공개'
 
 
○ 2008년 12월 2일 청와대 집무실에서 균형위 위원장과 6개 부처 실국장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직접 "4대강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5~6m가 되도록 굴착 할 것"을 지시했음.
 
 
○ 이후 2009년 2월 16일 미상의 장소에서는 비서실장과 국정기획 비서관등 청와대 비서관, 국토부 장·차관을 대동한 자리에서 "하상준설(최소수심)은 3~4m 수준으로 추진"할 것을 지시했음. 
 
 
○ 2009년 2월 8일 국토부 4대강살리기기획단에서 작성한 「4대강 살리기」 추진현황보고에 따르면, 4대강 사업 준설 깊이 결정시 고려사항으로 "(뱃길복원) 역사적 뱃길복원 도시내 유람선 운행구간은 선박운행이 요구되는 수심(3m내외)과 수로폭(50~100m확보)"라고 명시하고 있음.(이미경·임내현·윤후덕·박수현 의원이 낸 2013년 10월 2일 자 보도자료)  

또 하나는 '당시 세계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4대강 사업을 했다'는 건 정말 거짓말이다. 당시에는 언급도 안 된 얘기다. MB는 회고록에 "4대강 살리기 사업은 '그린 뉴딜(Green New Deal)'이라 불리면서(…) 환경 사업에 대한 재정 투자로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전략"(564페이지)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2011년 10월 국빈 방문한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의 비공개 만찬 에피소드를 소개해 정당화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우리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은 환경 개선과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국제사회의 두 가지 요구를 한꺼번에 만족시키면서 적시에 추진될 수 있었다. 실제로 4대강 살리기 사업은 한국이 세계 금융위기를 다른 OECD 국가들보다 빨리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한 해 수백 명의 인명 피해와 수조 원의 재산 피해를 내는 수해에 대한 근원적 해결방안을 마련하는 기초가 됐다.
 
 
2011년 10월 미국을 국빈 방문하여 오바마 대통령과 비공식 만찬을 가졌다. 식사 도중에 오바마는 세계 금융위기를 맞아 한국이 즉각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고 효율적인 재정 투자에 나설 수 있었는지 물었다.  
 
 
나는 오바마에게 긴 설명은 하지 않았다. 대운하 사업부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려면 우리의 정치적 문제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다행히 사업 계획의 4대강 정비 내용이 이미 선거 공약에 들어 있었고, 한국은 미국에 비해 국토가 작아 그만큼 빨리 할 수 있었다고 대답했다.(<대통령의 시간> 564~565페이지)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09년 4월 27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4대강 살리기' 합동보고대회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09년 4월 27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4대강 살리기' 합동보고대회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집중 호우 피해로 하천 정비 계획이 발표됐으나 실행되지 않았다며 "매번 하천 정비는 투자 우선순위에 밀려 방치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왕 4대강 정비 사업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며 제반 사항을 재점검하도록 지시했다"(563페이지)고 나온다. 


김진애 : '4대강 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국가적 재해예방으로 접근한 것이다. MB 정부는 이를 위해 국가재정법시행령(제13조 제2항 제6호)을 2009년 3월 25일 개정했다. '재해예방'에 해당하면 예비타당성 조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다. 이 전 대통령의 압력에 정종환 당시 국토부 장관이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건설업체 간 담합도 눈 감아 줬다.  

* 위에 언급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17일 4대강 살리기 추진본부 회의실에서 국토부 차관 주재하에 긴급회의를 가졌다. 이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9월 발주 물량이 50% 이상이 되도록 할 것", "2011년 말을 데드라인으로 하여 역공정을 세워 구체적인 진도를 확인할 것"을 주문하며 자신의 임기 1년 전인 2011년까지 4대강 사업을 끝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당시 회의 내용을 정리한 문서에서 △ "직접 시발굴 최소화되도록 정상추진 중"은 문화재 시굴·발굴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 △ "턴키공사 시 낙찰율 90%이상 시 논란이 될 수 있으므로 대비 필요"는 이미 정부 내부에서도 턴키 입찰에 대한 업체 간 담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 △ "환경영향평가 일괄 시행을 건의했다"는 4대강 살리기 기획단에서 편법적인 환경영향평가 일괄 시행을 사실상 지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집자 


프레시안 : '4대강 사업' 비용에 대해서도 이 전 대통령은 22조 원이 아니라 15조3000억 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수많은 논의를 거친 끝에 2009년 6월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15조 3000억 원의 4대강 살리기 마스터플랜을 확정했다. 일각에서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예산이 22조 2000억 원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4대강 살리기 사업과 별도로 농림수산식품부와 환경부가 계속 사업으로 진행해온 6조 9000억 원의 예산이 포함된 금액이기 때문이다.  
 
 
이와 별도로 한국수자원공사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에 8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자는 정부가 내주지만 원금은 4대강 살리기 사업 완료 후 주변 개발에 따른 수익으로 한국수자원공사가 충당하기로 했다.(<대통령의 시간> 563페이지) 


김진애 : 농림축산식품부의 저수지 토목 사업이나 환경부의 수질개선 사업처럼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사업이 있기 때문에 그 비용을 빼고 금액을 맞춘 건데, 본인은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이 전 대통령이 주재한 2008년 12월 15일 제3차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서 MB 정부는 "수량 확보, 수질 개선, 홍수 예방은 물론, 지방경제 활력 및 고용 창출, 녹색친수환경 확보를 위해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며 14조 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6개월 후, MB 정부는 총사업비 22조2000억 원의 '4대강 살리기 사업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4개였던 보가 16개로 늘어났고, 쉬쉬하던 수심이 평균 6미터로 바뀌었으며, 2억2000만 톤이던 준설량도 5억7000만 톤으로 늘어났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손문상)  

 
 

이 전 대통령이 '대운하 사업 포기 선언' 1년 만에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자신의 대선 공약을 부활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추가 투입 비용에 대해 "한국수자원공사가 8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주변 개발에 따른 수익으로 충당하기로 했다"며 가볍게 넘겼다.  

수공은 그해 9월 이사회를 열어 '4대강 살리기' 총 사업비 22조2000억 원의 36퍼센트에 해당하는 8조 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MB 정부는 이어, 국가정책조정회의(2009년 9월 25일)에서 "수공이 조달하는 원금에 대한 이자는 정부에서 전액 지원하고 원금은 친수구역 개발사업을 통해 우선 회수하되, 부족분은 사업종료 시점에서 수공의 재무 여건을 고려하여 재정지원 방안을 구체화하겠다"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투자 원금 8조 원에 대한 회수 대책은 아직까지 마련되지 않았다.   

* 수공은 '4대강 살리기'에 따른 재원을 사채 발행으로 조달했다. '4대강 사업' 수행 전(2008년 말) 2조 원이던 부채는 2013년 말에는 14조 원으로 7배 늘었으며, 부채비율 또한 20퍼센트에서 121퍼센트로 증가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총 1조 원에 가까운 이자(9180억 원)를 수공에 지원했다. 편집자 

당시 "수공이 8조 원을 회수하려면 이익률 10퍼센트라 쳐도 80조 원의 개발사업이 필요"하며 "결국 파산을 면키 위해 국고보전을 요구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개발 논리에 빠져 현실이 됐다. 대구시가 특혜성으로 수공에 제안한 에코워터폴리스 사업인 '에코델타시티'도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다.   


프레시안 : MB 정부는 '4대강 사업' 비용 마련에 있어 모래와 자갈 등 골재 판매를 얘기했었다. 그런데 회고록에서는 파낸 모래가 적었으며, 그마저도 '쓰레기였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  
 
 
강바닥에서 나온 쓰레기 총량은 286만 톤에 이르렀다. 덤프트럭 19만 대 분량으로 남산 몇 개만큼의 규모였다. 1960~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강물에 내다버린 산업 폐기물과 생활 쓰레기였다. 당시만 해도 환경보다는 가난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 과제였다. 나도 이태원 시장에서 환경미화원을 하면서 새벽마다 시장 쓰레기를 한강변에 내다 버리곤 했었다. 그같이 쌓인 쓰레기 위에 모래가 덮이고, 그 위에 다시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4대강은 엄청난 양의 쓰레기 위를 흘렀던 것이다. 그런 4대강을 있는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을 보호하는 일이 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준설 과정에서 나온 모래와 자갈을 팔아 공사비에 쓰려 계획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 참담했다. 기대 이하의 양으로 나온 모래와 자갈은 해당 지자체에 위임하여 지자체 수입으로 활용하도록 했다.(<대통령의 시간> 569페이지) 


김진애 : '말하지 않음'으로 해서 거짓말이 된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 당시 국고를 한 푼도 안 들이고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그게 22조 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국민 세금으로 모두 충당했다. 그나마도 "모래와 자갈을 팔아 공사비로 쓰려 계획했"는데 "덤프트럭 19만 대 분량"의 쓰레기가 묻혀 있어 "참담했다"며, 강에 묻힌 쓰레기는 박정희 시대 산업화·도시화의 결과라고 말했다. 전형적인 사기꾼의 핑계다.     



* '4대강 사업'으로 강바닥에서 퍼낸 준설토는 애물단지가 됐다. 지난해 10월 새누리당 김태원 의원이 국토부에서 받은 '4대강 사업 준설골재 판매현황' 자료에 따르면, 매각 대상 준설토 9715만8000 톤 가운데 4108만5000 톤(42.3%)이 팔리지 않은 채 그대로 쌓여 있다. 또 2011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준설토 관리에 들어간 비용만 2500억 원이다. 편집자 

▲ 2012년 8월 낙동강 본류에 나타난 녹조 현상(왼쪽)과 2014년 7월 낙동강 중·하류에서 발견된 큰빗이끼벌레(오른쪽). ⓒ프레시안 자료사진

▲ 2012년 8월 낙동강 본류에 나타난 녹조 현상(왼쪽)과 2014년 7월 낙동강 중·하류에서 발견된 큰빗이끼벌레(오른쪽). ⓒ프레시안 자료사진  

 
 

MB 회고록에 2013년 3월 감사원의 '대운하 위장설'에 대해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수많은 하천 관련 전문가들이 공을 들여 기획한 것"이라며 "감사원의 비전문가들이 단기간에 판단해 결론을 내릴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571페이지)라고 치부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임기 마지막에 황조근정훈장을 수여한 미국 위스콘신대학 박재광 교수의 사설을 인용해 '정치적 결과'라고 비난했다. 이 전 대통령은 녹조 현상와 큰빗이끼벌레 출몰에 대해서도 '괴담'으로 결론 내렸다. 특히 2012년 9월 그린란드에 국빈 방문했던 얘기를 전하며 "청정 지역에 녹조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코미디도 아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2014년 또다시 혹독한 가뭄이 찾아왔다. 그러나 4대강은 과거처럼 바닥을 드러내지도, 군데군데 썩은 물이 고여 악취를 풍기지도 않았다. 
 
 
이에 반대론자들은 '큰빗이끼벌레'라는 태형동물을 내세워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비난했다. 보로 인해 강물의 유속이 느려지고 오염이 된 결과 큰빗이끼벌레가 창궐한다는 주장이었다. 큰빗이끼벌레의 흉하게 생긴 모습을 통해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증폭시켰다.(578~579페이지) 
 
 
피요르드 지역을 둘러보는 도중에 나는 물이 고인 웅덩이에 녹조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4대강 살리기 공사 지역에 녹조가 발생했다고 비판이 높을 때였다. 청정 지역인 그린란드에 녹조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동행한 아우켄이 말했다. 
 
 
"원래 녹조라는 것이 일정 시간 수온이 올라가서 며칠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입니다. 기온이 낮아지면 다시 없어집니다." 
 
 
너무도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는 아우켄의 모습이 국내의 모습과 크게 대비되어 보였다. 과거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사태부터 4대강 녹조 그리고 최근 큰빗이끼벌레 사태까지, 정치적 목적으로 지나치게 과장하여 국민의 불안을 조장하는 풍조는 이제 극복되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대통령의 시간> 609페이지) 


(☞ "MB, 낙동강 녹조 현상이 하늘 탓? 4대강 탓!") 

(☞ 낙동강서도 '큰빗이끼벌레'…"4대강, 호수됐다") 


프레시안 : 요즘 시대에 이런 사람이 CEO를 하면 그 회사, 바로 망할 것 같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김진애 : MB는 사고가 70년대 개발 논리를 바탕으로, 2000년대 초 서울시장 시절과 2007년 대선 공약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세계 1차 대전 직후 시작돼 1971년 마인과 도나우를 잇는 마지막 운하 연결 공사를 거쳐 1992년에 완공된 독일 라인-마인-도나우(Rhein-Main-Donau : RMD) 운하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게 말이 되나. 2006년 1월 서울시장 당시 RMD 운하를 방문해 "운하 건설로 제2의 국운융성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었다. 전형적인 해외 사례 '벤치마킹 사기'다.  

* 하천전문가인 독일 칼스후레 공대 헬무트 베른하르트 교수는 2011년 8월 '4대강 사업' 현장인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둘러본 후 쓴 보고서('한국의 4대강 사업에 대한 견해')에서 "4대강 사업은 연쇄적인 대형 보 건설 계획으로 볼 때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전통적인 운하 건설 계획과 유사하다"며 "특히 저를 놀라게 한 것은 4대강 사업의 모델이 RMD 운하와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가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는 "4대강 사업은 지난 세기의 하천수리학이었다"며 "생태적 관심이나 필요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프로젝트"라고 혹평했다. 편집자 

'4대강 사업' 국정조사를 통해 이 전 대통령을 증인석으로 불러야 한다. 온갖 불법과 편법을 일삼으며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따져야 한다. 그리고 MB와 당시 책임자인 정종환·권도엽 전 국토부 장관, 심명필 4대강살리기추진본부장(현 대한토목학회장), 전재용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도 물어야 한다. 국민의 3분의 2가 반대하는 일이 2~3년 만에, 이렇게 빨리 된 유례가 없다. '새만금 사업'은 10년 이상 걸렸다. 시행과 중지가 반복됐다. 이게 정상이다. 어떤 사안에 반대 여론이 높다는 건 상식에 비춰 '너무 하는 것 같은데?'와 같은 머뭇거림 때문이다. 그럼에도 '4대강 사업'이 추진된 것은 대통령 한 사람의 힘 때문은 아니다. 개발 마피아를 비롯한 기득권의 먹이사슬 구조 때문이다. 이런 엄청난 빙산을 파헤쳐 내는 게 우리 몫이다.  

프레시안 : 긴 시간 말씀 감사하다.(끝) 

 

 

MB는 '외교의 신'…잘못한 건 노무현 탓?

[MB의 시간과 비용] <5> 문정인 연세대 교수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24 07:12:44

 

"기록물 자체로 가치는 있다. 그러나 읽는데 곤혹스럽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읽으며 내놓은 총평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화제다. 퇴임한 지 2년 만에 이런 회고록을 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그 내용이 황당해서 그렇다. 누군가는 이를 '공상과학소설'로, 또 누군가는 이를 '공소장에 앞선 피의자 조서'로 표현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은 이 회고록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어디까지 우리가 믿을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대통령 회고록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이 회고록과 무관하게 <프레시안>은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와 함께 지난해부터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체적인 검증 작업을 벌여왔다. 그 작업을 묶어서 낸 책이 <MB의 비용>이다.  


'MB의 시간과 비용'이라는 기획은 철저하게 이명박 정부의 정책 평가를 위한 기획이다. 회고록 중 크게 논란이 된 한미 쇠고기 협상, 대북 관계, 외교 안보 문제, 4대강 사업 평가 등에 대해 전문가와 함께 조목조목 따져봤다. 많은 독자들을 대신해 <대통령의 시간>을 낱낱이 해체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MB의 시간과 비용' 5~6편에서는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인터뷰를 소개한다. 문 교수는 미국국제정치학회 이사를 지냈고,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시대위원장,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를 역임했다. 인터뷰는 프레시안 협동조합 박인규 이사장이 진행했다. 편집자  


MB의 시간과 비용 

 
 

<1> "MB와 임태희, 비밀접촉 팩트가 다르다" 

<2> "MB 회고록, 자기 부하들에게 부정당했다" 

<3> MB "촛불 때 죽었어봐…'글로벌 코리아' 못 외쳤지" 

<4> "MB, 거짓말로 4대강 강행…배후는?"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외교의 '신'이 불편하다" 


프레시안 : <대통령의 시간>을 읽어본 총평이 어떤가? 


문정인 : 쉽게 잘 쓴 회고록이다. 역대 대통령의 자서전, 회고록과 비교하면, 대외 정책에 대해 할애한 부분이 많았다는 점, 그런 면에서는 획기적이라고 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외교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역할이 과장된 측면이 다소 있어 보인다. 회고록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전 대통령은 완전히 '외교의 신'이다. 다자외교도 그렇고 양자외교도 그렇다. 대통령의 탁월한 영도력으로 다 잘 됐다는 취지로 기술이 이어지니까, 그 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둘째, 책임 전가는 좀 안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회고록이라는 게, 본래 본인을 방어하기 위한 기제가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지만, 이를테면 '쇠고기 파동'은 노무현 탓이고, 남북 관계는 북한 탓이고 하는 식으로 기술을 해 놓았더라. 모든 것을 제 3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셋째, 과대포장의 오류도 범하는 것 같다. G20정상회의를 유치해서 '국제 규칙의 추종자 (rule follower)'에서 '룰 메이커 (rule maker)'가 되었고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식의 자찬이 많은데, 이는 문제가 있다. G20 정상회의에서 우리가 만든 '룰 (rule)' 이 어떤 게 있나. 큰 국제회의 한번 한다고 선진국이 되나. 게다가 G20정상회의가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안다. 더구나 경제적 파급 효과도 수십조 원에 달했다고 하는데, 증명할 수가 없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 자료사진 ⓒ프레시안(최형락)

▲문정인 연세대 교수 자료사진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회고록은 보통, 알려지지 않았는데 의혹이 있었던 부분에 대해 해명할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정인 : 그런데 이 책에는 의혹에 대한 해명이 없다. 대표적인 게, 2008년 일본 훗카이도 도야코에서 개최된 G8 확대정상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요미우리 신문>은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보도했다. 독도 문제의 교과서 해설서 기술과 관련해 이른바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말이었다. 그런 부분도 속 시원히 해명이 됐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없다. (<요미우리 신문>은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7월9일 홋카이도 도야코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서 후쿠다 야스오 총리로부터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다케시마를 일본땅이라고 명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뒤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다케시마는 독도의 일본식 지명이다. 편집자)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의 발언 관련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2012년 1월 10일 원자바오 총리와 회담이 있었다. 회담을 마치고 우리는 조어대 만찬장에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는 북한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오갔다.(…) 김정은도 김정일처럼 죽을 때까지 집권할 텐데, 우리에게 참고 인내할 시간이 있겠느냐는 뜻으로 나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역사의 이치가 그렇게 되겠습니까?" 
원자바오가 의미심장한 답변을 했다. 중국 지도자가 북한의 장래를 두고 '그리 오래 참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의미의 발언을 한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원자바오와 만찬을 마친 후 나는 중국이 나를 재차 국빈으로 초대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자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했다. 더불어 내가 취임한 첫 해에 국빈 초청을 했듯이, 떠나는 마지막 해에도 새해 첫 국빈으로 초청해 그간의 정리를 돈독하게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대통령의 시간> 297페이지) 


프레시안 :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 발언을 인용한 부분이 상당히 문제가 됐다.


문정인 : 2008년 5월 하순 이 대통령이 북경을 국빈 방문했는데, 당시 청와대 측 사람들이 '조선의 과거 왕부터, 대통령 할 것 없이 한중관계 2000년에 이명박 대통령처럼 중국의 지도자 후진타오에게 당당하게 얘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북한의 인권과 민생 문제를 얘기했다고 하는데, 중국 지도자의 반응은 어땠는지도 나왔으면 했다. 너무 일방의 진실만 얘기하는 것 같다. 참회는 아니라도 어려웠고 고뇌하던 이야기도 들어가야 설득력 있는 것 아닌가. 사실 정서상으로는 우리 대통령을 믿고 싶고, 믿어야 할 텐데, 그게 잘 안 된다.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의 발언들이 나오는데, 그 발언들에 대해 원자바오가 아니라고 하면 어쩔 것인가. 그 외에도 여러 기술들을 보면 아전인수적 성격이 굉장히 강해 보인다. 본인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듯한 부분도 있다. 296페이지를 보면 '역사의 이치가 그렇게 되겠습니까'라는 원자바오 전 총리의 발언이 나온다. 이게 북한의 붕괴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비핵·개방·3000, 그랜드 바겐 모두 실패했는데 성공한 정책이라고 기술한다. 이 전 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본인이 희망하는 것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흐릿하다. '희망적 기대'를 하나의 기정사실로 해석하는 경향들이 나타난다. 


모순적인 부분도 여러 군데 나온다. 이를테면 이렇다. 본인이 가장 희구한 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인데, 정작 본인이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소개하는 지도자가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등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의 보편적 가치에 충실했다고 하면 이런 지도자들과 연대가 강하다고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모순적이다. 그리고 상당히 비상식적인 게 있다. 양자 정상회담에서 제삼국의 정상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 게 국제적인 관례인데…. 그리고 본인은 북한의 '갑질' 행태를 바꾸고 싶어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본인이 '갑질하는 것으로 비친다. 잘못된 우월주의다. 이런 것은 아들 부시와 비슷하다. 북한을 실패한 국가, 불량국가로 규정하고 북한을 옳은 길로 이끌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북한에 대한 오만한 '갑질'이 아닌가. 청계천 문제 해결하는데 역지사지 태도가 크게 효과를 보았다고 주장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역지사지 태도가 없었다.   


과거 정부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본인의 큰 업적으로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의 제도화를 들고 있는데 여기서도 더 겸손해 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사실 노무현 정부 때 한국 외교통상부 주도 하에 제주도에서 한중일 3국 외무장관 회담을 했었다. 그때 (정례화를 위해) 사무국을 둔다고 해서 인천 송도와 제주도가 사무국을 유치하려고 경쟁도 했다. 정상회담 제의 자체는 이명박 대통령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 구상은 노무현 정부 때 이미 만들어 졌다. 그런 부분을 인정하고 쓰면 안 되는가. 모든 것을 자기가 했다고 해야 하는가. 미국 비자 면제 문제도 노무현 정부 당시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장관이 협상을 시작했고 진전도 보았다. 실무적인 부분에서 시간이 걸리는 것인데, 본인이 부시 전 대통령과 가까워서 됐다고 일방적으로 기술하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과거 정부에서 한 일을 인정하고 칭찬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나는 한중일 3국이 협력하여 EU나 NAFTA에 견줄 만한 경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방법론에 있어 보다 현실적이고도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 그 답이 있다고 보았다. 내가 2008년에 중일 양국에 3국 정상회의를 제안한 것은 그런 뜻이었다.(…) 또한 3국 협력사무국을 서울에 두고 상호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자고 제안했다. 내 제안이 받아들여져 3국 정상회의는 2008년부터 일본, 중국, 한국 순으로 순차적으로 5차례 개최됐다.
내 제안이 받아들여져 (2010년 10월 5일 제안) 하노이에서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렸다.(…) 나는 이 회의를 주재하며 원자바오 총리와 간 나오토 총리를 화해시키고자 노력했다...나는 가운데 서서 두 사람의 손을 잡아 끌어 서로 맞잡도록 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어떤 경우라도 한일중 정상회의가 정례적으로 열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2013년(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에서의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리지 못한데 대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 (<대통령의 시간> 412~415페이지) 


"이명박 때 한미 관계 좋았다고? 美 측은 '노무현 때가 더 좋았다'"


프레시안 : 저도 읽으면서 제일 눈에 띠었던 게 대외 관계와 관련된 기술이 거의 절반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북한 핵문제나, 한미, 한중 관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굉장히 엄중한 일인데, 그런 부분에 대한 진지한 인식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문정인 : '김대중, 노무현 정부 사람들이 북한하고 가까워서 한미동맹을 망쳤다'는 게 이 전 대통령과 측근들의 인식인 것 같다. 김태효 전 대외전략비서관이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논지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자기들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리다'는 태도는 오만이자 아집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뭐가 틀렸나. 이명박 정부가 '바로 잡았다'고 내세우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겸손해야 한다. 한 국가의 외교정책은 시대정신과 당대 국익의 반영이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의 대승적 이익을 위해 정책을 폈던 것이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정부 반대하기 위한 정책만 하려 한 것 같다. 오죽했으면 ABR(Anything But Roh, 노무현식만 빼고 다)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정치와 정책을 혼동한 그런 정권이었다. 정책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퍼포먼스 스픽스 (Performance speaks)', 즉 잘 된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데,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것 중에, 결과가 잘 된 게 있었나. 이명박 정부 마지막에 한중관계는 상당히 악화됐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하느라 그렇게 노력한 게 아닌가. 이 대통령의 일와 발언과 독도 방문 때문에 한일 관계는 깨졌다. 한미 관계도 평택 미군기지 문제가 진전이 안 되는 등, 여러 가지 상당히 불편한 게 있었다. 또 일본과의 군사비밀보호협정을 이 전 대통령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한미 관계는 더 불편하게 됐다. 그러니 워싱턴에서 '노무현 정부가 차라리 나았다'는 평이 나온 것 아닌가. '약속을 지킬 것은 지켰다'는 이유였다. 모든 외교가 망가졌다는 게, 이명박 정부 끝날 시점의 전반적인 평가였다. 이것은 팩트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에게 부담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고 하더라도 못한 것은 못했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프레시안 : 한일관계는 독도를 방문한 게 영향을 크게 미친 것 같은데, 한중 관계가 악화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문정인 : 중국 정부가 원했던 것은 한반도의 평화안정이다. 북한 비핵화가 전면에 나오긴 했지만, 한반도 평화 안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중국은 남북관계 개선을 원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한국 정부의 대 미국 의존도가 낮아져서 중국과 좋은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오히려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고,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그래서 중국이 한국을 불편하게 봤던 것이다. 정리하면 북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적대적 태도가 한중 관계 악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리고 6자회담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 고강도 한미군사훈련, 그리고 한미일 미사일 방어체계(MD) 참여 가능성 거론 등도 문제가 됐다. '발가벗은 임금님' 동화가 생각난다. 이 전 대통령은 본인이 밝힌 대로, 후진타오 12번, 원자바오 9번 등 총 21회 정상회담을 했다. 본인 재임 5년 간 한중 관계가 진화했고,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참모들이 제대로 보고했는지 의문시 된다.  


한중 정상간 만남의 상당 부분이 다자 회담 틀에서였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계속 불편한 진실을 얘기한 것으로 안다. 후진타오 주석이 이 전 대통령을 만나서 밝게 웃는 것을 거의 본적이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게 있다. 2009년 10월 초순 원자바오 전 총리가 평양을 방문 직후 북경에서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 이야기는 회고록에 안 나왔던데, 이 전 대통령이 중국에 따졌다는 것이다. '북한이 저런 식으로 2차 핵실험을 하고 도발적으로 나오는데 중국이 계속 북한을 지원, 비호하면 되느냐. 제재를 가해야 할 중국이 그것을  안 하고 있다'는 취지였다. 원자바오의 답변이 이랬다 한다. '우린 유엔안보리 결의안을 전부 준수한다. 그러나 그 결의안에 중국-북한 간 정상적 통상 관계를 금지하는 것은 없다. 그랬다면 우리는 유엔 결의안에 거부권 행사를 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중국 친구들에게 들었는데 회고록에는 이 대목이 없다. 결국 좋은 것만 골라서 얘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이건 선택적 기억이다.  


 

▲이명박 대통령(가운데)와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오른쪽) ⓒ 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가운데)와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오른쪽) ⓒ 연합뉴스  

 
 

 

북한이 정상회담 애걸? 이 전 대통령이 오히려 더 안달!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그 무렵인 2009년 10월 24일, 타이 후아힌에서 아세안+3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날 다시 만난 원자바오 총리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 원자바오는 다시 한 번 김정일의 뜻을 내게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대통령 각하를 진심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북한이 제시하는 조건이 너무 까다롭습니다. 나는 조건 없는 남북 정상회담을 바랐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왜 그런 식으로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볼 때 그 조건은 김정일 위원장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각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니 김 위원장과 연락할 기회가 되면 각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원자바오는 자신이 한 말조차 김정일에게 직접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대통령의 시간> 334~335페이지) 

 
 

(…)그 당시 북한은 '만난다'는 것보다 '만나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치 "한반도를 대표하는 북한이 남쪽 대표를 만나준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만나주는' 조건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내 말을 듣고 원자바오가 답변했다.  

 
 

"저도 2009년의 일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오자 매우 흥분해서 한국의 지난 두 분 대통령과의 회담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아무런 조건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대통령께서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 여러가지 조건을 제시했다고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김정일 위원장 밑의 사람들의 권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통령의 시간> 358페이지)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원자바오 전 총리가 중재한 것을 자세하게 다 얘기했다. '김정일이 정상회담을 바라고 있다'는 말까지 소개했다. 그렇게까지 쓰는 게 외교 관례상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문정인 :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피하는 것이 국가 이익을 위해 바람직하다. 첫째 원자바오 총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둘째 우리 대통령의 격을 낮추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의 기술은, 원자바오 전 총리가 애걸하는 듯한 느낌으로 표현이 돼 있다.


문정인 : '애걸'까지야 하겠나. 그래서 더욱 문제라는 것이다. 원자바오 총리가 남북관계 개선을 진심으로 바라는 뜻에 그런 중재 역할을 했을 터인데 거절 한 것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면 중국 정부 입장은 어떻게 되나. 그리고 여기서 모순적인 대목이 있다. 2009년 4월 초, 런던에서 2차 G20정상회의가 있었다. 그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북한하고 정상회담을 할 것처럼 얘기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3일 런던 현지에서 가진 영국 로이터, 미국 블룸버그, 프랑스 AFP 통신사와의 합동 인터뷰에서 "(대북) 특사는 우리가 필요하면 보낼 수 있다"며 "내 자신이 북한 사람들이 자립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경험과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뜻밖에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올 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북특사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전례가 있어 이 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남북 정상회담을 염두해 둔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었다. 편집자)  


그리고 이 전 대통령은 2010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 가서 BBC와 인터뷰했을 때 "연내에 정상회담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다. 당시 김은혜 대변인이 인터뷰 내용을 부인하듯 브리핑해, 사표를 냈다. (김은혜 당시 대변인은 실제 인터뷰 내용과 달리 "연내라도 안 만날 이유가 없다"고 전해 논란이 일었다. 김은혜 대변인은 '이 대통령이 피곤한 상황에서 인터뷰가 이뤄져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했고 파장이 클 수가 있어 이 대통령에게 발언의 진정한 의미를 물어본 것을 토대로 보도자료를 만들었다'고 해명했지만 결국 사표를 냈다. 편집자)


그런 것을 보면, 이 전 대통령이 2008년 취임 직후 촛불 정국으로 상당히 인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정치적 반전 카드로 정상회담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북한보다 오히려 이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더 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정황들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북한이 일방적으로 구애했다고 표현한다. 더 가관인 것은 김태효 전 비서관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상회담 얘기를 북한 측이 비밀 회담 등에서) 수십 차례 제안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상회담 개최 실패를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흘리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도 나올 법하다.  


김기남 비서 키가 180, MB는 어떻게 어깨를 쳤나? 


프레시안 : 그런 정상회담 요구들이 실제로 있었을까? 


문정인 : 글쎄, 북측에서 나온 사람이 정상회담을 운운한다는 것은, 공식 제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위급회담을 통해 만나서 문제를 풀자고 한다는 의미면 모르겠지만. 정상회담은 마지막 카드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아는 북한은, 정상회담을 맨 앞에 카드로 들고 나오지 않는다. 이 전 대통령의 아전인수식 해석이 아닌가 한다. 가령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 북한에서 조문단이 왔다. 당시 나는 김 전 대통령 장례위원으로 있으면서 방문에 관여했었다. 그때 (이명박 정부가) 말이 아니게 대했다. 그 일에 대해서도 사실을 기술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 책에는 어떤 식으로 돼 있느냐면, 본인은 안 만나려고 했는데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 등이 얘기를 해서 일반 조문객 형식으로 만났다고 돼 있다. 대체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디테일 문제가 있다. 당시에는 국가정보원의 수송 지원 기능이 없어져서, 북한 조문단의 교통편을 황당하게도 렌트카로 제공했다. 그들이 렌트카를 타다가 사고라도 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조문단이 그랜드힐튼 호텔에 묵었는데, 그들을 5층에 집어넣고 접근을 못하게 했다. 층계를 책, 걸상 등 집기로 완전 봉쇄하고, 전화 끊고, TV를 끊었다. 조문단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연금을 한 것이다. 저녁 식사 할 때 북한 측에서 '이럴 수 있느냐'고 해서 정세현 장관이 정부 측에 전달해 TV만 풀어줬다. 전화기는 불통이었고. 사람 만나는 것도 통제를 했다. 이런 상항을 북측도 감지했을 터인데 정상회담을 공식적으로 제의했을까? 김정일 위원장이 남북관계 개선을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했을 수 있을 것이다.  


 

▲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 노동당 김기남 비사와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

▲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 노동당 김기남 비사와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김기남 북한 노동당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니 큰 소리로 준비해온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 장군님께서는 대통령 각하를 만나게 되면 따뜻한 인사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김기남은 90도로 머리를 숙여 내게 인사했다. 2009년 8월 23일 청와대 본관 접견실이었다. 닷새 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북한 조문단을 접견한 자리였다.(…)나는 (북한 조문단에) 공식 절차를 거쳐 제안하라고 했다. 방문 이틀째에 북한 조문단이 현인택 통일부 장관을 통해 내게 면담을 신청해왔다. 남북 대화의 기회가 왔으니 즉각 만나야 한다는 내부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수락하지 않았다. 북한 조문단은 정식으로 우리 정부와 협의하여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불쑥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고 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만나주는 것은 북한의 착각을 더욱 견고히 할 뿐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잘못된 사고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결국 북한 조문단은 예정보다 하루 더 체류한 끝에, 예정된 각국의 조문단 면담 일정 중 하나로 나를 만나게 됐다. 청와대를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특별 대우 없이 일반 출입자와 같은 절차를 밟았다.(…) 인사가 끝나자 김기남 비서는 남북 정상회담을 언급했다.(…)대남 압박책이 먹혀들지 않고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자 결국 북한이 먼저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이다.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한 우리 정부의 원칙 있는 대북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 비서의 말을 끊고 이야기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북한 조문단에게 남북 대화가 핵 문제 등의 논의를 제외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예 알겠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정확하게 모두 전달하여 올리겠습니다."

 
김 비서가 대답했다. 나는 접견을 마치고 나가는 김 비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앞으로 좀 잘 하세요." (<대통령의 시간> 327~330페이지)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이 기술한 것 중에 2009년 8월 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조문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김기남 당시 북한 노동당 비서 등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달라.


문정인 : 북한 조문단 관련해서 장의위원이 박지원 의원, 임동원, 정세현,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그리고 나, 다섯 사람이었다. 당시 정부 담당은 정세현 전 장관이 했다. 국회와 언론은 박지원 의원이 담당하기로 했다. 원래 금요일(8월 21일) 11시 반에 현인택 당시 장관에게 정세현 전 장관이 정식으로 설명하고, 현 장관이 통일부 명의의 언론 브리핑을 하기로 했는데, 그에 앞서 10시 경 박지원 의원이 기자들에게 '북한 조문단이 온다'고 브리핑을 해버렸다. 그래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접수하지 않아 불법이라는 등) 난리가 났다. 이후 조문단이 도착했다. 통일부가 기분이 나빴는지, 원래 (일정 관리를) 정부가 하려는 것을 우리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랜드힐튼 호텔을 얻었는데, (정부에서) 그런 식으로 봉쇄하고 몽니를 부린 것이다. 금요일 저녁에 저녁 식사를 했다. 임동원, 정세현 전 장관, 백낙청 교수, 나, 그리고 김연철 교수가 같이 있었다. 북측은 올 때부터 필요하다면 하루 더 체류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미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도 표했는데, 통일부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니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 국민통합 특보를 지냈던 김덕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에게 부탁했다. 그날 밤(21일)에 나도 연락했고, 임동원 전 장관도 연락해서 다음날(22일) 조찬 때 김 의장을 오시도록 했다. 정동영, 이종석 전 장관 등과 함께 조찬을 했는데, 그때까지는 통일부 입장은 회고록에 나온 대로 '안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찬 후 노동당 김양건 부장과 원동연 부부장을 김덕룡 의장과 만나게 했다. 김 의장이 계속 묻는 게, '(김정일의) 메시지 갖고 왔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양건) 본인에 물어보라'고 해서 얘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서서 5분 정도 얘기했는데,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고, 김 의장이 바로 청와대에 전화한 것으로 안다. (정부 측에서) 이 건으로 9시 반부터 회의를 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과) 만나는 것으로 11시 경에 결정이 났다. 그 다음에 현인택 장관과 김양건 부장간 점심 세팅이 됐고, 다음날인 일요일(8월 23일) 오전 9시에 이 전 대통령과 만났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덕룡 의장이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문단이 이 전 대통령을 만나러) 갖다 와서 상당히 분위기가 좋았던 것으로 안다. 이 전 대통령이 정말 북측 사람들을 잘 대해줬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대목이 나온다. 이 전 대통령이 만남을 끝내고 나오면서 김기남 비서의 어깨를 툭 쳤다는 것이다. 김기남 비서는 키가 크다. 180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미 80세가 넘은 사람이다(1929년생). 이 전 대통령이 훨씬 연하이고 키도 작은데, 어떻게 어깨를 치면서  '좀 잘 하세요'라고 말을 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MB만 캠프데이비드 초대? 노무현은 거절했다"

[MB의 시간과 비용] <6> 문정인 연세대 교수

박세열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2.26 10:41:10

 

"기록물 자체로 가치는 있다. 그러나 읽는데 곤혹스럽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읽으며 내놓은 총평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화제다. 퇴임한 지 2년 만에 이런 회고록을 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그 내용이 황당해서 그렇다. 누군가는 이를 '공상과학소설'로, 또 누군가는 이를 '공소장에 앞선 피의자 조서'로 표현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은 이 회고록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어디까지 우리가 믿을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대통령 회고록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이 회고록과 무관하게 <프레시안>은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와 함께 지난해부터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체적인 검증 작업을 벌여왔다. 그 작업을 묶어서 낸 책이 <MB의 비용>이다.  


'MB의 시간과 비용'이라는 기획은 철저하게 이명박 정부의 정책 평가를 위한 기획이다. 회고록 중 크게 논란이 된 한미 쇠고기 협상, 대북 관계, 외교 안보 문제, 4대강 사업 평가 등에 대해 전문가와 함께 조목조목 따져봤다. 많은 독자들을 대신해 <대통령의 시간>을 낱낱이 해체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MB의 시간과 비용' 5~6편에서는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인터뷰를 소개한다. 문 교수는 미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시대위원장,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를 역임했다. 인터뷰는 <프레시안> 협동조합 박인규 이사장이 진행했다. 편집자  


MB의 시간과 비용 

 
<1> "MB와 임태희, 비밀접촉 팩트가 다르다" 

<2> "MB 회고록, 자기 부하들에게 부정당했다" 

<3> MB "촛불 때 죽었어봐…'글로벌 코리아' 못 외쳤지" 

<4> "MB, 거짓말로 4대강 강행…배후는?" 

<5> MB는 '외교의 신'…잘못한 건 노무현 탓? 


'그랜드 바겐' 구상은 DJ 때부터…그 마저도 '실패'인데 '자화자찬'


프레시안 : 이 글을 읽어보면, 이 전 대통령의 인식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는 우리가 주도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상은 '해결'을 위해 우리가 행동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인 것 같다. 


문정인 : 북핵 문제를 풀려면 무엇보다 남과 북 사이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 '북한에 대해 미국의 군사적 행동을 우리가 막아줄 수도 있다'라고 하는 인식이 북측에 있을 때, 북한은 우리를 신뢰하고 도움을 청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에게 협상의 레버리지가 생긴다. 그 레버리지를 가지고 우리가 미국도 움직이고 중국도 움직이면서 주도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은 그런 기본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도 북핵 문제를 주도하겠다?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전 대통령이 '비핵개방 3000'을 내놓았다. 이것은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등가성의 법칙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핵을 포기하면 10년 후에 3000달러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북한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 아니라도 우리가 핵을 포기하면 국제사회에서 얼마든지 돈을 끌어올 수 있다. 10년 후면 1만달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 등가성이 성립하지 않아 실패한 정책이다. 현실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북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이명박 정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물질로 생각하니까 3000달러면 이 정책이 작동할 것으로 본 것 같다. 그런데 북이 원하는 것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해소하고 체제와 국가 안보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역사적으로 볼 때 독재 권력이 스스로 변화한 예는 찾기 어렵다.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유도하는 보다 적극적인 전략이 필요했따. 아울러 한반도 평화와 직결된 북핵 및 군사 관련 논의에 대한 주도권을 우리가 찾아와야 한다.() 취임 전부터 나는 남북 관계의 이같은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는 북핵 및 안보 문제를 북한, 미국 간의 대화에만 맡겨두고 우리는 제3자처럼 물러나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봤다. (<대통령의 시간> 305페이지)

 
 

'도발-대화-합의-지원-합의 파기-재차 도발-대화 재개'로 반복되는 악순환이 지난 20년 동안 이어져 왔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2009년 6월 16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런 취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공감대를 이뤄냈다.(…) 그랜드 바겐 제안은 북핵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우리가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대통령의 시간> 319페이지)


프레시안 : 그 이후에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이 나왔다. 갑작스럽게 나왔다는 인식이 있다.


문정인 : 본인은 그랜드 바겐에 상당히 역점을 두었다고 말하는데, 이 제안은 2009년 9월 뉴욕 방문 중에 나온 것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2009년 9월 21일 미국 현지에서 미국외교협회(CFR), 코리아소사이어티(KS), 아시아소사이어티(AS) 공동주최 오찬을 통해 '차세대 한미동맹의 비전과 과제'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을 통해 "이제 6자회담을 통해 북핵 프로그램의 핵심 부분을 폐기하면서 동시에 북한에게 확실한 안전보장을 제공하고 국제지원을 본격화하는 일괄 타결, 즉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을 추진해야 한다"고 처음 밝혔다. 편집자) 청와대는 대통령이 국내나 해외에서 연설할 때 항상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 전 대통령도 그랜드 바겐을 얘기한 것 아닌가. 일회성 제안인 것 같다. 


사실 그랜드 바겐 구상의 기본 골자는 소위 김대중 정부 때 나왔던 북핵의 포괄적 해결 방법과 다를 바 없다. (이명박 정부 사람들) 본인들도 그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진짜 포괄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 보다는 우리의 제안을 북한이 안 받을 테니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의 5자가 협의를 통해 북을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 거기에 깔린 기본 의도다. 6자회담이 계속 안 되는 상황에서 나온 것인데, 사실 6자회담을 깬 것도 엄격히 말해 이명박 정부다. 실제로 당시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나 통일부에서는 그랜드 바겐의 개념을 제대로 설명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랜드 바겐이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고민해 만든 것이 아니고, 그냥 미국에 가는데 어떤 메시지가 있어야겠다고 해서 만든 것 같다.  


실제로 그랜드 바겐이라는 말이 나온 후에 커트 캠벨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이 제안을 과거 '포괄적 해결방법'과 동일시했고, '우리(미국) 하고 협의도 하지 않고 (포괄적 해결방법)그것을 제시했다. 난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한미 간에 큰 마찰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캠벨 차관보가 꼬리를 내렸던, 그런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이명박 정부가 그랜드 바겐 구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마 계속 대북 압박을 하면서 '6자회담 안하면 5자라도 만나서 하자'는 구상을 했던 것 같다.


또 하나 이명박 정부가 가장 원했던 것 중 하나는 북한 급변사태를 대비한 한··중 3국 전략대화였다. 김태효 전 비서관이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으로 안다. 결국 중국이 안 받았다. 중국 정부 측은 '북한이 붕괴하지 않았는데 무슨 얘기냐. 이것은 오히려 북한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한··중 3국 대화는 공식적인 '트랙1'에서는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트랙2'에서도 중국이 부정적이었다. 그런데도 다 잘 됐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장렌구이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교수나 덩위원 전 당교 학습시보 부편집인과 같은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대통령이 그런 사람들을 안다는 것 자체가 난 이해가 안 가는데, 286페이지 보면 그들이 '북한과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나온다. 일부 보수 언론이 이들을 띄우기도 했는데, 이들은 중국 정부나 학계의 주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중국의 주류 시각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연기하는 조치를 취했다. '우리가 북한 문제를 주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 미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무기한 연기가 됐다.  


문정인 : 전작권 환수는 이렇게 봐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작권 환수에 천작한 것은 '군사주권 회복'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북한 때문이다. 북한은 전작권을 주한미군 사령관이자 한미연합사령관이 가지고 있고, 우리가 독자적 군사행동을 하지 못한다고 보아 우리를 괴뢰군이라 부르는 것이었는데 노 전 대통령은 이러한 북의 태도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결국 우리가 아무런 자율성이 없기 때문에 북한이 우리를 무시하고 미국에 모든 평화협상을 제의하는 것 아닌가. 이번에 북한이 한미군사훈련 중지와 핵실험 중지를 맞바꾸자는 제안을 미국에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전작권 환수를 통해 북의 그런 태도를 바꾸려 했다.


만약 전작권이 우리한테 왔다고 하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북한은 우리와 얘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력군이 되고 미국이 지원군이 되는 게 전작권 환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이 그것을 알고 전작권 환수 연기를 결정했을까? 그렇게 보지 않는다. 주변에 친미 동맹파들만 다 모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북한의 위협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작권을 환수하면 북한에 잘못된 시그널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연기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것을 보면 이 전 대통령의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다. 그런 위협적인 상황이라면, 오히려 우리가 전작권을 가지고 있어야만 필요시 북한에 보복 타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작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인식을 분명하게 하면, 북한의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환수해 와도 미국이 한미동맹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부시 전 대통령에 이어 오바마 대통령과의 친분도 강조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부시 전 대통령에 이어 오바마 대통령과의 친분도 강조하고 있다. ⓒ연합뉴스

 
 

 

"MB의 회고록, 朴 대통령 대북 정책 파탄 내려고 썼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이후 북한은 '금강산 국제관광특구법'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여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 시설을 몰수하고 50년 사용 독점권을 무효화 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다른 방식으로 도발해왔다. 당시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남북 접촉의 전말을 공개하자는 내부 의견도 있었다. 만일 그랬다면 당시 남북한 간에 오간 말들이 낱낱이 밝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남북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맞았을 것이다.(<대통령의 시간> 361페이지) 


프레시안 : 361페이지를 보면 이 전 대통령도 남북 문제와 관련해 많은 것을 공개할 경우 좋지 않다는 얘기를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남북 관계는 이 회고록 때문에 안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받을 것 같다. 본인의 말대로 '파탄'의 원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자신이 유리할 때는 '남북 간에 오간 말들을 공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놓고, 자신은 후임 정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남북 간에 오간 말들을 낱낱이 공개하는 것 아닌가?


문정인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나, 회고록을 이렇게 쓰는 것이나, 남북 관계를 파탄 내려고 그런 것 아닌가. '이명박의 사람들'은 북한을 고립시키고 봉쇄하면 북한은 망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흡수통일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숨은 어젠다를 가지고 있다. 그런 숨은 어젠다를 통해 정책을 만들었고, 현재까지도 그에 따른 계산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본다.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에 '정상회담을 하지 말라'고 압박을 가하는 인상이 든다. 잘못된 일이다. 전직 대통령이면 가만히 있지, 남북 관계를 파탄 낼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닌가? 박근혜 정부는 어떻든 간에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작동시켜서 교류협력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전 정권 사람들은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재를 뿌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가 북한 붕괴론에 기반해 북한에 대해 압박을 해 나갔다고 하는데, 지금 박근혜 정부는 그러한 기조에서 달라졌을까? 어떻게 봐야 하나? 


문정인 : 지난해 8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준비위원회 1차 회의에서 내가 직접 대통령에게 물어 본 적이 있다. '대통령의 대북 정책의 기조는 무엇이냐'고. 박 대통령의 답변은 명쾌했다. "북한을 고립, 봉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국제 사회의 건전한 일원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대북 정책이다'" 


그런데 정책 운용과정에서 모순적인 모습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통일준비위만 해도 그렇다. 그 안에는 진보 성향 사람들도 있고 보수 성향 인사들도 있다. 그러다 보니 정책 자체가 모순적인 게 있다. 통일준비위의 첫 번째 목표가 남남갈등을 최소화시키면서 국민적 합의를 구축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목표는 북한과 함께 하는 통일을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통일 공공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흡수통일을 하지 않고 북한과 협의해 통일 정국을 만들어 간다는 것인데, 세 번째로 가면, 소위 핵 문제, 인권 문제에서 북한에 압박을 주는 외교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 둘은 다분히 모순적이다.  


결국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계속 유효한 정책이라고 한다면, 북한과 어떻게 하든 교류 협력을 하고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관련해 (박 대통령은) 큰 것이 아니더라도, 작은 부분들, 이를테면 이산가족 재상봉과 같은 것을 성사시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 내부에 다른 시각을 가진 이들도 있을 것이다. NSC나 청와대 요직에 있는 강성 인사들은 섣부른 교류, 협력보다는 원칙을 강조 할 것이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것인가? 


문정인 : 물론 그렇다. 현 정부는 원칙과 유연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MB정부는 사실 유연성이 없었다. 북측과 만나긴 했지만, 북한이 붕괴할 것으로 봤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그런 전제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일부 그런 가정을 하는 사람도 있고, 국책연구기관 등에서는 흡수통일을 전제로 한 보고서를 많이 내고 있는데 대통령 생각은 다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NSC나 공안 라인에 있는 이들은 원칙을 강조하는 반면, 외교안보수석, 통일비서관, 그리고 통일부 등은 유연성을 요구할 것이다. 그래서 계속 충돌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원칙이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 같다. 유연성에 힘을 실어주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 그런 변화는 없는 것 같다. 이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실수가 그것이다. 원칙은 국가 이익에 우선할 수 없다. 국가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원칙을 시기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지도자의 덕목이다.


프레시안 : 국익을 넘어서는 원칙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문정인 :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넘어선 지도자의 원칙이 어디에 있나. 그런 원칙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 그것은 이미 원칙이 아니라 아집이 된다.  


회고록에 스스로 밝힌 패착5번 기회 모두 걷어찬 MB 


프레시안 :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유투브 인터뷰를 통해 북한을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게(Collapse) 될 정권"이라고 말했다. 이런 오바마 대통령의 인식은 어떻게 나왔을까? 


문정인 : 오바마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여러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첫째는 전문 관료들에 의한 부정적 인식 부각이다. 제프 베이더(Jeff Bader) 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 다니엘 러셀(Daniel Russel)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등 대부분의 직업 관료들은 북한을 부정적으로 보아 왔고 이들의 대북 인식이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두 번째, 2009년 4월 5일 체코 프라하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역사적 연설을 하는 날 새벽에 북한이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했다. 그것 때문에 오바마가 연설문을 수정해 북한을 규탄하는 대목을 새로 집어넣었다고 한다. 북한이 부정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이 전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 인식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이 전 대통령을 만난 후 오바마가 'hopeless(희망이 없다)', 'rogue(불량)' 같은 단어 사용 빈도수가 증가한 것으로 안다. 핵과 미사일은 물론이고 천안함 사건부터, 미국 소니에 대한 사이버 테러에 이르기까지, 오바마에게 북한은 부정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것이 워싱턴의 전반적인 흐름인 것 같다. 미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북한 붕괴론을 계속 얘기하니, 워싱턴에서도 그게 주류가 돼 버린 것 같다.


▲ 영국 BBC와 인터뷰 중인 이명박 전 대통령. 당시 이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원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KTV 갈무리

▲ 영국 BBC와 인터뷰 중인 이명박 전 대통령. 당시 이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원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KTV 갈무리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에서도 정상회담을 시도한다고 하면, 북한이 뭔가를 요구할 것 아닌가. 앞으로 정상회담은 더 힘들어지지 않겠나?

 

 
 

문정인 : 정상회담과 관련, 이명박 전 대통령의 가장 큰 패착은 다섯 번 제의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외교를 잘 한다는 분이, 남북 간의 '협상'은 못하는 것인가. 그러니 그 '제안'이라는 게 실질적으로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운 거다. 둘 중에 하나다. 북측이 공식적으로 정상회담을 제안하지는 않은 것인데, 그것을 공식 제안처럼 아전인수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처음부터 정상회담에 관심이 없었다. 저쪽에서 제안해도 애초에 안 받으려 했던 것 아닌가. 둘 중 하나다. 사실 정상적인 대통령이라면 협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다섯 번 중에 단 한 번도 성과가 없었다? 북한 측에서 이 전 대통령 측에 대해 '거짓말'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프레시안 : 보수 성향의 국민들은 '그래도 이 전 대통령이 원칙을 지켰다'고 공감을 하지 않을까.


문정인 : 이건 원칙의 문제가 아니다. 정상회담을 안 할 것이면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할 의사가 있었다면 제대로 협상을 해서 성사시켜야 했다. 사실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고 통일의 가능성을 높여준다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문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태도를 취했고 그 결과 자꾸 북한에 잘못된 시그널을 보낸 것 같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이 그런 태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북측의 신뢰가 없어지면서 남북 관계는 꼬이고 군사긴장은 오히려 첨예해졌다. 지금 봐도 희한한 일이 있다. 연평도 포격이 있던 2010년 11월 23일과 며칠 후인 12월 초 북한의 류경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이 내려왔다는데, 참 이해가 안 되더라. 어떻게 류 부부장의 방남을 우리 측이 받을 수 있겠는가. 그건 원칙에 기초한 행동도 아니다. 그리고 국정원이 한 비밀 활동을 대통령이 왜 공개한 것일까. 아주 부적절하다. 직접 만난 것도 아닌데….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  

 
 

"(대북) 특사는 우리가 필요하면 보낼 수 있다", "내 자신이 북한 사람들이 자립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경험과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뜻밖에 남북 관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올 지도 모르겠다"(2009년 4월 3일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로이터, 블룸버그, AFP 통신사와의 합동 인터뷰 중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

 
"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조만간이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연내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본다", "(남북 정상이) 열린 마음으로 사전에 만나는 데 대한 조건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2010년 1월 28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있었던 BBC 인터뷰 중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  


2009년 4월 런던 발언, 2010년 1월 다보스 발언에서는 이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면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하지 말라고 훈수를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기가 못했으니까 박 대통령도 하지 말라는 이야긴가. 결국 이 전 대통령은 북한을 협상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고 악마이자 야만으로 본 것 한다. 부시와 다를 바 없다. 배타주의, 타자의 악마화. 그런 것이 보인다. 이건 원칙이 아니라 편견이고 우월주의의 발로다. 또한 싱가포르 접촉 당시에 이 전 대통령이 보고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김양건이 '이것 안 받고 가면 죽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도 김양건을 과거 몇 차례 만나 본 적이 있지만 그런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지도급이고 핵심 인사이자 외교를 잘 아는 사람이다. 이런 건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예의의 원칙을 어긴 것 아닌가 한다.     


북한을 악마화, 희화화하고, 북에 갑질을 하려고 하면 남북 관계는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혼자 못했으면 그 걸로 끝내야지 왜 박근혜 대통령까지 걸고 넘어 가려 하는 걸까. 전직 대통령이 (현 정권이) 잘 되도록 충고는 못 할망정, 판을 깨서는 안 된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미국 부시 전 대통령의 골프카트 운전대를 잡고 운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미국 부시 전 대통령의 골프카트 운전대를 잡고 운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MB가 최초로 캠프데이비드 초청 받아?…노무현은 초정 받고 거절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캠프 데이비드는 미국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워싱턴D.C.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캠프 데이비드 초청 여부로 미국의 환대 정도를 가늠하기도 했다. 한국 대통령의 캠프 데이비드 초청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의 새정부 출범에 대한 미국의 기대가 반영된 결과였다.(…) 부시의 첫인상은 친근했다. 다정한 이웃같은 모습이었다.(…) 골프 카트에서 부시와 나눈 여러가지 대화는 당시 한미 관계와 대북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현안들이었다. 그동안 실무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그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풀려나갔다.(…) 헤어진 지 30분도 안 돼 부시 부부와 우리 부부는 만찬장에서 다시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부시가 말했다.  

 
 

"이 대통령님, 원래 국가 정상끼리 만나면 종교 의식은 하지 않는게 관례입니다. 그러나 저는 식사 기도를 함께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교회에서 기도하던 모습을 보고 하는 제안 같았다. 나중에 들은 얘끼지만 부시는 기도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좋습니다. 함께 기도하지요."  
"손잡고 기도해도 괜찮겠습니까?" 

 
우리 네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 손을 잡고 기도를 드렸다. 역사상 유례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만찬을 마칠 때쯤 부시와 나는 이미 오랜 친구처럼 친밀해져 있었다. 이때부터 부시는 내게 '친구'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만찬을 마친 후 부시는 앞으로 한국을 믿고 정보를 교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날 다져진 신뢰의 결과였다. 이후 한미 양국의 정보 협력은 더욱 강화됐다. (<대통령의 시간> 190~196페이지) 


프레시안 : 상대방에 대한 예의나 객관적 현실 인식이 부재한 것 같다.


문정인 :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회고록 쓰기 전에 전임 정부에 대한 연구도 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부시 전 대통령 초청으로 캠프 데이비드에 간 부분을 읽어보라. 미국의 인정을 받아서 본인 혼자만 간 것처럼 자랑을 해 놓았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과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듯 했다. '미국이 버린 노무현, 미국이 사랑한 이명박?' 이건 웃기는 소리다. 2003년 2월 초 내가 당선자 고위사절단원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부시와 노무현의 캠프 데이비드 회동 이야기 나왔다. 그러나 노무현 당시 당선자는 그 제안에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2004년에는 부시의 텍사스 목장에 초청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실무진 수준에서 거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은 '나만 갔다'며 생색을 내고 있다. 그래서 결국 쇠고기 협상에서 재킷을 풀어줬나? 뭘 알고 말해야지. 치적을 추켜 세우는 것도 좋지만, 전임에 대한 예우도 좀 했으면 좋겠다. 


프레시안 : 조금 다른 문제이지만, 지금 남북 관계를 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정인 : 우리 대통령이 남북 관계를 성공시키려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비공식 막후 접촉을 해야 한다. 국정원의 대북 전략 기능을 빨리 복원을 시켜야 한다. 북측과 비공개 접촉을 해서 사전 의제 조율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난후 공식 회담을 개최해야 성공할 수 있다. 안 그러면 계속 평행선을 그릴 것이고 국민들은 짜증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 판을 깨는 공식 회담 뭐 때문에 하나. 그리고 작은 것 하나라도 성사 시켜야 한다. 금강산 문제 해결과 이산가족 재상봉은 연계해 볼만 한 것 아닌가. 그러면 상당한 선순환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프레시안 : 박 대통령이 정상회담에 관심이 있기는 있나.  


문정인 : 박근혜 대통령은 상당히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정상회담을 하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 돼 버렸다. 지금 일본의 아베 총리를 대하는 것 봐라. 만나서 뭔가 가시적인 것을 얻을 수 없으면 정상회담 안 할 것이다. 지금처럼 북쪽과 교감도 없는 상태에서 정상회담 가능할까?


프레시안 : 마무리를 해보자. 이 책은 처음부터 자화자찬으로 점철돼 있다. 외교 문제도, 어떤 시스템보다는 본인의 개인기, 다른 정상과의 진한 우정 등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는 식의 기술들이 전부다. 문 교수 지적한 대로 그는 거의 '외교의 신'이 돼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그래서 제가 부시 대통령에게 직접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 경제도 발전하고 국가 위상도 높아져 양국 국민간 활발한 왕래가 미국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는 개선돼야 합니다. 임기 중에 처리해주신다면 미국에 대한 한국민의 정서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자 부시는 "내 임기 중 처리되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부시의 임기는 2009년 1월 19일까지였다. VWP(비자면제프로그램)는 2008년 11월 17일붵 시행되었으니, 부시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내 요구도 들어준 셈이다. (<대통령의 시간>197페이지)


문정인 : 본인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집고 넘어가자. 솔직히 핵 안보정상회담 유치도 한국 외교부가 사전 작업 다 한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이 오바마와 가깝다고 해서 즉석에서 된 것이 아니다. 과정을 쏙 빼버린 것이다. 비자면제 프로그램 문제도, 사실 노무현 정부 시절 외교부에서 죽 진행해 왔던 것들이다. 이명박 정부 때 결실을 맺었을 뿐이다. 좋은 지도자는 밑에 있는 관리들이 만든 프로세스를 자세히 파악하고, 그것을 녹여서 결단을 내린다. 그런 과정을 써야 대통령도 올라가고 관료도 올라가는데, <대통령의 시간>을 읽으면 모든 부처는 수동적인 심부름꾼이고  대통령 혼자 다 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다른 나라와 관계에서는 외교의 신인데, 왜 북한에 대해서는 '외교 바보'가 돼 버렸는가. 김정일에 대해서는 왜 그런 능력을 발휘 못했나. 


프레시안 : DJ 회고록과 비교를 하면 어떻나? 


문정인 : DJ도 자기 칭찬이 많긴 했지만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많이 했다. 디제이 자서전에는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됐다'는 부분은 거의 없다. 당시 상황이 이랬고, 내가 이런 대화를 했다는 정도다. 자서전 2권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각국의 정상들과 대화를 할 때 나름의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아니다(NO)'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되도록 상대방 말을 많이 들어주는 것이다. 셋째, 상대방과 의견이 같은 대목에서는 꼭 '내 의견과 같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할 말은 모아두었다가 대화 사이사이에 집어넣고, 그러면서도 꼭 해야 할 말은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 회담 성공은 상대의 덕이라는 인상을 주도록 하는 것이다. 여섯째가 가장 중요한데,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다."(<김대중 자서전> 315페이지)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나온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 대통령의 외교에는 건설 수주하는 듯한 '상인의 지혜'는 있지만, '선비의 성찰과 양심'은 결여됐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긴 시간 감사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