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

너덜너덜해진 나와 당신의 삶을 위하여

일취월장7 2014. 5. 9. 11:52

너덜너덜해진 나와 당신의 삶을 위하여

책 읽기는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삶과 다른 사회를 갈망하는 지렛대 구실을 하기도 한다. “치열한 무력”을 넘어, ‘우리 안에 타자의 묘소를 마련”하기 위해 나는 지금 책을 읽는다.

  조회수 : 464  |  고영직 (문학평론가)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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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호] 승인 2014.05.09  08:51:45

 

‘4월16일’ 이후 우리 일상은 파괴되었다. 그날 이후 너덜너덜해진 나와 우리들은 좀처럼 일상의 감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생존자가 귀환하기를 온 마음으로 기도했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4년 4월은 부서진 4월로 기록될 것이다.

이런 나의 마음을 위로해준 것은 책이었다.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를 읽었고,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귀환한 생존자들의 기록을 찾아 문장과 문장 사이를 눈과 손으로 더듬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장 아메리의 <죄와 속죄의 저편>, 빅토르 프랑클의 회상록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파울 첼란의 시집 <죽음의 푸가> 같은 책들이었다. 고통스러울 때는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보다 더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야 진짜 위로가 된다는 경험적 진실 때문이다. 고2 때 셋째형이 자살한 이후 막막했던 청소년 시절에 체험한 나의 별난 독서 치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그 시절 나를 구원한 것은 중국 작가 루쉰의 문장들이었다.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라는 <광인일기>의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세월호 침몰 사건은 광인의 식인(食人) 공포증이 전혀 기우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우일 그림</font></div>  
ⓒ이우일 그림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작은 용기를 줄 수 있는 우리들의 언어 목록은 빈약하다.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나와 당신은 이 점을 모르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생환한 사람들의 책을 찾아 읽는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들의 글쓰기에는 언어절(言語絶)의 참사를 겪은 사람 특유의 ‘화재 경보’로서의 육성(肉聲)을 행간에서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몸과 마음에 각인된 수용소 경험은 가혹했으나, 그들이 육성으로 전하려는 이야기는 언제나 ‘기도’처럼 들려온다. 장 아메리가 <죄와 속죄의 저편>에서 “나는 화재 경보를 울린다”라고 쓴 문장에서 여실히 알 수 있다. 어쩌면 나는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와 당신은 알고 있다. 인간이 사는 곳에서는 오직 ‘인간’만이 답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와 당신은 책을 읽고 또 읽는지도 모른다. 인간적인 ‘인간성’을 확증하는 답을 찾기 위하여!

10년 전쯤 경기도 구리에 사는 큰형님 집에 큰 화재가 난 적이 있었다. 어린 조카가 죽었고, 여덟 살짜리 조카가 화상을 입었으며, 집은 전소되었다. 사고 3년 뒤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참척의 슬픔을 겪은 큰형님네는 낯선 땅 일본으로 떠났다. 사실상의 ‘망명’이었다. 그 시절에도 나를 위로해준 것은 책이었다. 공선옥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에 나오는 ‘불탄 자리에는 무엇이 돋는가’를 읽으며 나는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 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희열을 동반했다. 프랑스 작가 에밀 아자르가 쓴 소설 <자기 앞의 생(生)>을 보며 어머니의 죽음을 마음으로 ‘애도’할 수 있었다. 애도란 “자기 안에 타자의 묘소를 마련하는 일”(자크 데리다)이라고 했던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은 1980년에 권총 자살로 죽음을 맞이한 ‘로맹 가리’의 필명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열네 살 ‘모모’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모모가 자신을 돌봐주던 유대인 ‘로자 아줌마’가 죽자 아줌마의 얼굴 화장을 고치고 향수를 뿌리는 소설 속 장면은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내 영혼이 구제받았다는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니까.

슬픔의 지리학을 넘어 분노의 정치경제학으로


나의 경우 책 읽기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책 읽기는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삶과 다른 사회를 갈망하는 꿈의 지렛대 구실을 하기도 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원인들 중의 하나로 무리한 ‘변침(變針)’이 지목되었다. 이와 관련해 정작 필요한 것은 세월호의 변침 같은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변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서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개념을 제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이다. 100년 전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향해 무모한 질주를 한 것처럼, 우리는 지금 영원한 성장의 환상에 취해 ‘엔진’을 아무도 멈추려 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기업만 있고, 나라는 없는’ 사회이다. 슬픔의 지리학을 넘어 분노의 정치경제학을 지상에 구현해야 함은 물론이다. 세월호 침몰 이후 행정·정치·기업이 보여준 속수무책의 ‘엘리트 패닉’ 상태로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고병권의 <살아가겠다>, D. H. 로렌스의 시집 <제대로 된 혁명>, 사사키 아타루의 <이 치열한 무력을>처럼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책들을 읽을 필요가 있다. ‘다른 대한민국’을 상상하고 사유하기 위해! 사사키 아타루가 책 제목으로 사용해 유명해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파울 첼란의 시적 표현 같은 개안(開眼)과 용기가 더 많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사사키 아타루는 3·11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본 사회를 진단하는 강연에서 “모든 것이 무력했다. 이 치열한 무력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게 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철학자 고병권이 “하루하루,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라고 쓴 말과 통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삶의 궤도를 조금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의 ‘변침’을 모색하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상상 행위이다. 자본주의를 ‘악마의 맷돌’(Dark Satanic Mills)에 비유한 블레이크의 표현을 보라. 영국 시인 로렌스가 시집 <제대로 된 혁명>에서 “돈을 좇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고 쓴 표현 또한 참조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아직은’ 슬퍼하고 더 슬퍼해야 한다. 나와 당신의 애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팔순의 원로 시인 신경림의 시집 <사진관집 이층>에 실린 망자(亡者) 시편들은 하나의 좋은 말이 되기에 충분하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쓰러진 것들을 위하여’)라고 술회하는 시인의 언어가 나와 당신의 유한한 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나는 지금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