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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선의 히말라야 미스터리, '김영자 루트' 따라가나

일취월장7 2010. 8. 31. 19:25

오은선의 히말라야 미스터리, '김영자 루트' 따라가나

[프레시안 스포츠] 칸첸중가 의혹 확산이 불편한 KBS

기사입력 2010-08-31 오후 1:27:22

최초로 북극을 정복한 사람은 미국인 로버트 피어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피어리보다 훨씬 존경 받는 사람은 북극 탐험에 실패했던 노르웨이인 난센이다.

난센은 극지방 탐험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을 연 개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키썰매를 절묘하게 활용했고, 탐험 성공에 필수적인 장비의 경량화를 후대에 유산으로 남겼다. 훗날 그는 난민들에 대한 인권보호 활동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난센과는 이유가 약간 다르지만 폴란드 출신의 예지 쿠쿠츠카(1948~89)는 세계 산악인들로부터 진짜 등반가로 존경 받았다. 그는 히말라야 14좌 완등 경쟁에서 라이홀트 메스너(이탈리아)에게 졌다. 하지만 쿠쿠츠카의 등반은 남달랐다. 그는 메스너보다 더 어려운 방법으로 14좌를 완등했다. 장비는 최소화 했고, 거의 매번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다. 물론 계절을 가리지도 않았다.

'용감한 대한의 딸' 김영자의 안나푸르나 정복

쿠쿠츠카는 1987년 더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하는 겨울에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다. 문제는 그의 등반이 안나푸르나의 동계 초등(初登)이냐는 것이었다. 이미 3년 전 한국의 여성 등반가 김영자가 이 위업을 달성했지만 논란이 일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155cm의 단신이지만 지구력 면에서 타고난 등반가였던 김영자는 안나푸르나에 오르기 전 동료 산악인들에게 자신의 등반일지와 유서를 주며 "내가 돌아오지 못 하면 펴보라"고 할 만큼 비장한 각오였다.

사투 끝에 그녀가 안나푸르나에 오르자 국내 언론은 이를 앞 다퉈 보도했다. 여자가 세계 최초로 그것도 겨울에 안나푸르나를 정복했으니 해외 토픽 감이었다. '스포츠 공화국' 만들기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전두환 대통령도 축전을 보냈다. 당시 경향신문칼럼 <여적>은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 준다.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김영자(31). 그녀와 함께 정상에 올랐던 4명의 셰르파 중 2명이 숨진 것만 보아도 이번 등정의 시련을 짐작할 만하다.

에르조그가 안나푸르나를 정복한 최초의 남성이라면 김영자는 겨울의 안나푸르나를 무릎 꿇린 최초의 여성이다. 한국인으로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고상돈 이래의 장거다. 누가 여성을 약하다고 했나. 용감한 대한의 딸, 만세."

죽은 셰르파의 터부를 무시할 수 없어 카메라 회수 못 해

하지만 그녀의 정상 정복은 곧 논란에 휩싸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등반을 지켜봤던 프랑스 팀이 이의를 제기했다. 일본 등산 전문 잡지에 소개된 프랑스 팀의 의혹 제기 내용은 대략 이렇다. 정상에 정복했다고 발표했을 때 한국 등반대는 정상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을 오르고 있었다. 또 나중에 한국 등반대를 도왔던 셰르파도 진짜로 정상에 서지 못했다는 증언까지 했다.

더욱이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정상 정복 사진이 없었다. 왜 그녀는 사진을 남기지 못 한 걸까?

사연이 있었다. 그녀와 함께 등반했던 4명의 셰르파 가운데 2명이 하산 길에 사망했다. 안타깝게도 사망한 셰르파의 배낭에 정상 정복 장면을 촬영한 카메라가 있었다.

김영자는 "추락한 두 셰르파의 시체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도르지와 앙템파 셰르파는 그쪽을 보지 말라면서 나를 가로막았다. 그것은 셰르파 사이의 터부였다. 정상 사진의 중요성을 알고 그 카메라를 회수할 수도 있었으나 죽은 자의 터부를 무시하면서까지 우리의 등정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신영철 <히말라야 이야기> 중에서)

입증할 자료가 부족했던 그녀의 기록은 이렇게 오점만 남긴 채 잊혀졌다. 안나푸르나 동계 초등의 영광도 쿠쿠츠카에게로 사실상 넘어갔다. 하지만 진짜 아쉬웠던 건 전도유망한 한국의 여성 등반가 한 명이 이 사건 때문에 명예까지 잃고 산악계를 떠났다는 점이었다.

▲ '그것이 알고 싶다'는 오은선이 수원대 산악회 깃발(붉은색)을 품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SBS 화면 캡쳐

이성적인 진실 규명은 가능할까?

오은선의 칸첸중가 논란은 지난 21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방영된 뒤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새로운 의혹이 제시됐기 때문이다. 수원대 산악회 깃발 미스터리다. 오 씨가 당초 제출한 사진에는 태극기, KBS와 후원사 깃발만 등장한다. 하지만 <SBS>는 사진 전문가의 검증을 통해 그녀의 정상 정복 사진에서 품속에 숨겨져 있던 깃발이 수원대 산악회 깃발이라고 했다.

문제는 이 깃발이 지난해 5월 칸첸중가에 오른 산악인 김재수 씨에 의해 발견됐었다는 점이다. 김 씨는 "깃발을 발견한 위치손톱바위와 정상 중간 부근이며 네 개의 돌에 눌려져 있었다"고 증언했다.

결국 오은선이 정상 등정을 했다는 증거로 이 깃발을 남겨 놓았는데, 그 곳은 정상이 아니었다는 의혹이다. 히밀라야 등정 기록의 권위자 홀리 여사도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그곳이 정상이었는지) 몰랐을 수도 있다"고 했다. 셰르파가 정상이라고 한 곳에서 사진을 찍고 깃발을 증거로 남겨 놓았다는 의구심이 간접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논란이 확산되자 대한산악연맹이 나섰다. 26일 엄홍길, 박영석 등이 포함된 칸첸중가 등정자 모임을 통해 대한산악연맹은 "오은선의 등정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한 산악인은 "오은선의 칸첸중가 사진 말고 다른 것도 의심이 간다"고 까지 했다. 오은선은 "그 분들은 나를 판단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이 회의가 의혹을 줄곧 제기한 산악인들로 구성돼 공신력이 의심된다"고 역공을 폈다.

오은선은 조만간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하지만 오은선이 기자회견을 통해 새로운 입증 자료를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및 다른 산악인들의 의혹 제기에 대한 방어가 기자회견의 주를 이룰 가능성이 크다.

이성적인 진실 규명이라기보다는 산악계의 감정적인 '이전투구'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벌써부터 이런 분위기는 싹트고 있다. 칸첸중가 등정자 모임에는 오은선의 후원사 블랙야크의 라이벌 업체의 후원을 받고 있는 산악인도 있다. 이 때문에 후원사의 입김이 이 회의에 반영됐다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오은선이 청와대를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등반 사진을 설명하는 장면 ⓒSBS 화면 캡쳐

79년 만에 피어리 북극 탐험 기사 고친 <뉴욕타임스>

오은선의 기록이 흔들리면 그의 후원사 블랙야크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블랙야크 뿐 아니다. 칸첸중가 등정에 국내 언론사로는 유일하게 동행취재 했고, 14좌 완등 순간을 생중계 했던 KBS는 신뢰성흠집이 난다.

그래서 오은선 의혹이 SBS의 전파를 탄 뒤, KBS는 심기가 불편해 졌다. 칸첸중가 등반에 동행취재 했던 KBS PD가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SBS의 보도가 오보는 아니지만 시청자들에게 오 씨가 등정하지 않은 것처럼 믿게 했다"고 한 이유다.

KBS는 "저는 (2009년 5월 5일 밤) 9시쯤 캠프 4를 출발해서 지금 오후 5시 40분 정상에 섰습니다. 이상"이라는 오은선의 말에 의존해 칸첸중가 등정 내용을 방영했다.

그렇다면 KBS는 논란이 증폭되고 있는 칸첸중가 의혹을 지금처럼 관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좀 더 적극적인 보도를 통해 오은선 의혹을 검증해야 한다. 자칫 '오은선 영웅 만들기'의 나팔수에 불과했다는 비난을 뒤집어 쓸 수 있어서다.

그런 점에서 피어리의 북극 탐험과 관련된 <뉴욕타임스>의 뒤늦은 고백시사하는 바가 크다.

1988년 <뉴욕타임스>는 의혹투성이였던 '미국의 전설'에 메스를 댔다. 1909년 <뉴욕타임스>의 사설은 피어리의 북극점 도달 소식을 다뤘다. 이 사설은 당시 피어리가 전송한 내용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의 명성에 비춰 봤을 때 더 이상의 추가 증거는 불필요하다고 단정했다.

사설은 1908년 또 다른 미국인 쿡이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주장이 있다는 점도 거론했다. 그리고 애국주의적인 결론을 내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북극점은 미국 탐험가에 의해 발견됐다는 점이다."

하지만 쿡은 자신의 북극점 정복 사실을 자료로써 증명하지 못했다. 피어리의 경우도 북극점 도달에 마지막 피치를 올렸을 때 속도가 비상식적으로 빨라졌다는 점과 불규칙한 그의 이동 경로, 위치 측정 기구가 없었다는 것 등이 문제가 됐다.

<뉴욕타임스>가 88년 8월 23일, 79년 만에 기사를 고친 이유는 피어리가 제출했던 증거 자료의 문제점들이 같은 시기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기사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피어리의 탐험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가 후원했고, 뉴욕타임스는 단독 보도권을 갖고 있었다.

<뉴욕타임스>의 반성문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피어리 탐험과 직접 관련됐다는) 이유로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와 뉴욕타임스는 적절한 조사를 하지 못 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실수는 선의에서 나온 것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권위자들은 북극점에 먼저 도달했다고 주장한 사람들 중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데 동의한다."

▲ 오은선의 '정상 정복'을 대서특필한 언론들 ⓒSBS 화면 캡쳐

등반가에게 명예보다 소중한 기록은 없다

오은선의 칸첸중가 미스터리는 영원한 미제 사건으로 남기 쉽다. 그 누구도 똑 떨어지는 증거를 내놓기 힘든 상황이다. 반대로 의혹만 커지고 있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오은선의 입지는 점점 좁아진다. 끝까지 세계 여성 최초 14좌 완등 기록을 지키려다 오은선의 명예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국가간, 후원사간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는 히말라야 등반 올림픽. 그것도 여성으로는 14좌 완등 세계 최초 기록에 도전했던 오은선은 정말 칸첸중가 정상에 올랐다 해도 치밀하게 증거를 남기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다. 논란이 된 등정에 관대하지 않았던 히말라야 등반 역사를 생각하면 치명적이다.

그래서 오은선에게 칸첸중가 재등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경쟁자였던 파사반(스페인)에게 신기록을 잃더라도 명예는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다. 24년 전 김영자와 같이 한국 최고의 여성 알피니스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어서다. 그 누구에게도 명예보다 소중한 기록은 없다.

▲ ⓒKBS 화면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