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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8-14)

일취월장7 2013. 11. 22. 11:45
‘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8] 출입기자에서 비서관으로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후 박정희 “미친개는 몽둥이가…” 연설 문구 직접 작성
[제1123호] 2013년11월20일 09시33분

 

지난호에 이어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에피소드 몇 토막을 더 소개한다.

1968년 후반기 무렵 어느 날 나는 육 여사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대통령 가족들만의 자리로 단독 초대는 처음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지만 근영 근혜 학생들은 먼저 식사를 뚝딱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 내외분과 나, 셋만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단은 소박했다. 나물무침 몇 가지와 된장찌개, 생선구이, 막걸리가 전부였다. 나는 어릴 때 먹었던 비름나물 무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큰영애. 연합뉴스

“청와대 식탁에 어떻게 이런 나물이 나옵니까.”

박 대통령이 자세히 설명했다.

“내가 소학교 다닐 때다. 몇 십리 길 학교를 다녀서 오후에 집에 도착할 때에는 배가 고파 허기가 졌다. 급히 부엌으로 들어가면 밥은 없고 어머님이 이 비름나물을 된장에 무쳐 바가지에 담아 부뚜막에 놓고 들일을 나가셨다. 나는 이것을 게 눈 감추듯 맛있게 먹고 허기를 채웠다. 그때의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청와대 채전에 조금 심어 생각날 때 가끔 먹는다.”

나도 6·25 동란 이후 시골에서 된장에 무친 이 나물을 많이 먹었다. 그날 나는 대접과 고추장, 참기름을 더 부탁해 여러 나물들로 비빔밥을 만들어 맛있게 먹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는 두 분의 눈길이 부드럽게 느껴졌고 따뜻한 정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다음날 나는 이 비름나물 얘기를 기자실에 전파했고 김종신 비서관이 그의 저서에 인용했다.

1970년 초가을 무렵 나는 청와대 기자실에 있다가 육 여사의 부름을 받고 본관 영부인접견실에서 뵈었다. 이런저런 얘기도중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재학 중인 근혜 큰영애의 얘기를 한 뒤 내 의견을 물었다.

“근혜가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게 됐는데 대통령 가족 입장에서 이것을 받아야 할지 다른 학생에게 양보해야 할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

“장학금은 공부를 잘한 모범학생에게 주는 상이고 명예입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고 더욱이 다른 학생에게 양보할 성질의 것도 아닌 줄 압니다. 일단 장학금은 그대로 받도록 하시고 그 돈의 열 배쯤의 장학금을 학교에 기부 하시면 더 많은 학생들이 혜택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처리된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또 한 번은 육 여사가 근혜 근영 두 영애의 성격에 대해 말씀한 적이 있다.

“작은아이(근영)는 활달한 편이지만 큰아이(근혜)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큰아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고 마음이 놓인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어느 집의 누구는 신랑감으로 좋다더라’ 하면서 시장 아들, 장관 아들 등 서너 명을 거론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딸을 가진 보통 엄마의 모습이었다.

박근혜 큰영애의 결혼과 관련, 나는 1984년경 한 사립대학 설립자로부터 자기 아들과의 간곡한 혼담 희망 제의를 전달한 바 있다. 그러자 박근혜 큰영애는 아버님의 기념사업과 부강하고 행복한 나라 만드는 유지를 계승 실현하는데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나는 이 뜻을 그 설립자에게 전달했으며 그는 “기념사업에 자기도 힘을 보탤 수 있으면 좋겠는데…”라며 아쉬워했다.

1969년 3선개헌을 앞두고 박 대통령은 청와대기자단과 오찬을 함께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 무력도발 위협의 고조, 경제건설 등 국가보위와 부국강병을 위한 3선개헌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이 나를 지목하면서 “권 기자는 3선개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시면 되겠습니다”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1971년 말, <조선일보> 김윤환, <동양통신> 문태갑 등 선배 기자들과 함께 청와대 출입기자를 마감하고 각기 내근 데스크로 승진했다. 박 대통령은 연말연시가 끝난 1월 하순경 청와대 출입을 그만두게 된 우리들을 위하여 전별 만찬을 베풀었다. 김정염 비서실장, 김성진 대변인도 동석했다.

만찬이 끝나고 전별금과 선물로 만년필 세트를 받았다. 송별만찬을 끝내고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박 대통령이 내 어깨에 팔을 얹으면서 “이 친구, 권 기자 출세 좀 시킬 수 없나”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흘렸다. 나를 포함해 김 비서실장, 김 대변인 모두 흘려들었다. 어느 누구도 주의하여 듣지 않은 것이다.

이 때 내가 받은 전별금 봉투는 빈 봉투였다. 대통령이 봉투를 만들면서 내용물 넣는 것을 잊어버린 듯했다. 며칠 뒤 나는 새 전별금 봉투를 전해 받았는데 ‘지난번에 빈 봉투를 주어서 미안하게 되었다’라는 추신까지 들어있었다. 색다른 기념물이 생긴 셈이다.

박 대통령 전별 만찬에 앞서 나는 육영수 여사의 위로와 선물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정부에 들어와서 일하라”는 육 여사의 권유를 받았다. 나는 그 후에도 몇 차례 육 여사의 전화를 받은 바 있다.

▲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북괴군이 도끼와 곡괭이를 휘두르며 야만적인 살인난동을 벌인 현장장면. 연합뉴스

1972년 3월 5일경 신문사에서 석간 마감을 끝내고 있는데 김성진 대변인이 급히 만나자고 해 사무실로 찾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내일부터 당장 공보비서관실로 출근하여 근무하시오”라고 느닷없이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어떻게 내일부터 당장 청와대로 출근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회사에 사표처리를 해야 하고 또 공무원 임용이 되려면 신원조회 등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 하지 않겠느냐. 며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고려대와 언론계 선배로서 내가 청와대 출입기자 때 공보 비서관으로 피명, 홍보와 취재관계로 친밀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나는 청와대 출입 5년을 마감하고 내근으로 들어왔고 그는 대변인으로 승진했다.

그 무렵부터 정부는 경제부처의 시책업무 홍보 효과를 높이기 위해 대변인제를 신설하고 그 대상자를 언론계로부터 스카우트했다. 그때 김 대변인은 경제부처 대변인 자리를 나에게 제의 한바 있는데 1차 사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다른 경제부처의 대변인 자리를 권유받았으나 또 사양했다. 이번이 세 번째인 셈이다. 김 대변인의 내용 설명인즉 아래와 같다. 박 대통령과 김 대변인의 대화다.

“권숙정 기자의 자리문제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경제부처 등 몇 군데 알아보고 있습니다.”

“공보비서관 자리가 비어 있지 않는가. 그 자리로 발령 내라.”

김 대변인은 나에게 “그러니 내일 당장 출근하고 신원조회 등 임용절차는 근무하면서 하라. 회사에 대해서는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라”고 말해 나는 꼼짝없이 다음날 청와대 공보비서관(2급갑)으로 출근했다.

김 대변인은 나에게 공보비서관 제의를 하는 자리에서 “진작 대통령의 의중을 헤아렸어야 했는데….” 하면서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고 처리하게 됐다고 송구해 했다. 박 대통령은 공보비서관 한 자리가 공석 중에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 사연은 이렇다.

한 아무개 공보비서관이 강원도 파로호 근처에 땅을 가지고 있다가 이를 개발하여 방갈로 여러 채를 짓고 낚시꾼들에게 임대하는 영업을 했다. 이 일대가 군 작전지역임에 따라 군으로부터 건축허가 사전 동의를 받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군단장까지 알게 됐다. 그런데 그 김 아무개 군단장이 육사 2기, 박 대통령과 동기생이었다. 그는 서울에 출장 나왔다가 박 대통령의 골프 초대를 받고 라운딩 하던 중 전혀 고의 없이 “한 비서관의 일이 잘 되고 있습니다”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

골프를 마친 박 대통령은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무슨 일인지 사실 확인을 지시했다. 박 실장의 사실 확인 보고를 받은 박대통령은 “청와대는 돈벌이 하는 곳이 아니다. 장사를 하려면 밖에 나가서 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박 실장은 그날로 그 비서관을 면직 처리토록 했다. 청와대 비서실의 기강이 이렇게 엄정했다. 공석이 된 그 자리가 비어 있다가 내 자리로 된 것이다.

나는 공보비서관(대통령 스피치라이터) 2년 7개월 동안 대통령 연설문 작성에 고심했다. 연설문은 기승전결(起承傳結)이 맞아야하고 정확한 메시지 전달과 이를 위한 정확한 용어 선택이 요체다.

더욱이 대통령의 연설문은 정확한 메시지 외에 당시로서는 국민 계도적인 내용의 필요성이 요구됐던 시대였다. 정부 시책과 국정운영을 대통령이 앞장서 강력히 이끌고 추진했던 때였다. 연설 횟수도 많았다. 대통령의 연설은 곧 국민에 대한 교육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따라서 대통령의 연설문은 간결 정확하면서 알기 쉽고 힘이 꽉 차있어야 했다.

나는 이러한 사항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대통령 연설문은 그의 생각과 그의 할 말을 정확히 다듬어 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 수준의 생각과 그의 언어를 찾아야 했다. 이것은 지극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8·15 경축사와 육군사관학교 유시 때에는 북한에 대한 경고, 제의, 국민에 대한 촉구 등 국가 보위와 안보에 관한 대통령의 결의와 지침 등을 담았다.

유신 때는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 국력배양의 가속화’ 등이 강조 되었고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태 때에는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단호한 연설이 김일성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미친개…’라는 대목은 박 대통령이 점잖은 표현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직접 써넣은 것으로 김 대변인 이하 스피치 라이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다음호에 계속>

‘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9] 육영수 여사 서거
피격 당시 ‘영혼과 대화’에 심취… 운명의 전주곡
[제1124호] 2013년11월27일 08시50분

 

 

[일요신문] 1972년 공보비서관 피명 3개월 만에 나는 7·4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이은 남북조절위원회 남북적십자회담 등을 맞이했다. 남북적십자회담은 흥분과 환호 속에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었고 박 대통령은 박성철 부수상 등 북측 조절위원들을 청와대에서 접견했다. 남북화해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고 전쟁 위협은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이 기간 중 북한의 항공기, 전차, 대포 등 전술전력이 휴전선 일대로 남하해 전진배치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침투용 땅굴을 파고 있었다.

나는 북한학 전공학자와 국제정치학자들로 좌담회를 열고 남북관계의 추이와 전망, 국제정세 등에 관한 토의 내용을 정리,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한글타자로 작성된 A4용지 5매 내외의 이 보고서들을 밑줄을 처가면서 정독하는 한편 건의된 후속조치에 대한 지침까지 달아주셨다. 이어 8월 3일 사채동결조치인 ‘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이 내려졌다. 사채에 시달리는 기업들을 회생시키는 획기적 조치였다. 이것은 김용환 비서실장 보좌관이 극비리에 진행한 것으로 경제수석비서실도 모르게 작업을 완료했다.

▲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이 일어난 현장. 박종규 경호실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뛰쳐나왔고 경호관이 박 대통령을 연단 안쪽으로 피신시켰다. 사진제공=<조선일보>

그리고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되었다. 격동의 계절이었다. 원래 유신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3선개헌 구상 과정에서 정권연장의 한 방안으로 발상했던 것으로 당시 주(朱) 아무개 비서관으로 하여금 인도네시아 체제와 대만의 총통제를 연구하도록 했었다. 나는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주 비서관이 총통제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과 비밀리에 현지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서 유신은 △남북대화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내부체제 정비와 강력한 대북태세 강구의 필요성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야당과 선거 때마다 수십만의 군중동원에 따른 불의의 사고 위험과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행태 지양 △도약 단계로 접어드는 경제 건설과 중화학공업 건설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마무리하려는 강한 집념 △북한의 증강된 전쟁도발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주한미군 철군에 대비한 방위산업 육성과 미사일, 핵, 신무기 개발 등 자주국방태세 완비를 위한 사명의식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결단된 것이다.

나는 유신선포 이틀 전부터 준비 작업에 투입됐다. 남산 중앙정보부 인쇄공장에 가서 김영광 판기국장의 안내를 받아 인쇄 중인 유신 관계 문건을 점검, 인수해 청와대로 가져왔다. 10월 16일 유신선포를 위한 박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한편 유신선포문을 기초로 한 유신헌법 초안과 해설서 집필을 위해 헌법학자 한태연, 갈봉근과 함께 반도호텔(롯데호텔의 전신)에 투숙하여 작업을 했다. 비밀유지를 위해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한 채 프랑스 드골 헌법의 대통령 비상대권과 권력의 인격화 등 이론적 근거를 체계화했다.

나는 이틀 뒤 바깥바람에 목말라하는 이들과 함께 무교동으로 나가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밤공기를 쐬게 했다. 언론계 중견기자 몇 사람에게도 비밀리에 신문·방송용 해설서 집필을 의뢰하고 함께 반도호텔에서 지냈다.

유신 기간 동안 일부 자유의 유보, 반정부 투쟁의 격화, 정치 실종 등 갈등이 극심했으나 경제면에서는 연평균 11.2%의 고성장을 했고 특히 중화학공업은 22%의 유례없는 경이적 성장을 했다. 오늘날 세계경제 10위권 대한민국의 기반을 그때 쌓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72년 11월경부터 스피치라이터실은 ‘중화학공업 건설 선언’을 하는 박 대통령의 1973년 연두 기자회견 준비에 몰두했다. 그때만 해도 중화학공업의 개념이 생소하고 막연했다. 중화학공업 기획단장을 겸한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실로부터 자료와 내용설명 등을 들어가면서 연설문을 작성했다.

제철, 비철금속, 조선, 중기, 석유, 전자, 비료 등 총규모 100억 달러의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당시 연 수출 20억 달러 미만의 경제 여건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출주도형 경제적 자립 외에 무기 국산화와 자주국방 완성이라는 두 가지 국가목표를 지향하는 프로젝트였다.

평시에는 일반 산업체제로 원자재 및 부품생산과 수출에 주력하고 유사시에는 군수산업체제로 전환, 무기 생산으로 대처하는 ‘병진정책’이었다. ‘모든 기계는 부품 생산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무기는 부품 조립으로 완성된다’는 오원철 수석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건설을 선언한 연두기자회견 동안 나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파아랗게 펼쳐지는 환상을 보았다.

중화학공업 선언이 있고 난 뒤 3월경 박 대통령은 청와대 출입을 마치고 일본 특파원으로 부임하게 된 <합동통신> 조성천, 동아방송 최종철, <경향신문> 이용승 기자들을 위하여 축하송별 만찬을 베풀었다. 김성진 대변인, 유혁인 정무, 선우연 공보비서관, 필자 등이 배석했다.

박 대통령은 국민의 저축성과 근면성에 대해 일본 등 선진국 국민과 후진국 국민을 비교, 설명하면서 환경과 조건의 유·불리보다는 국민의 근면성 도전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풍부한 자원과 유리한 환경임에도 국민의 나태성 때문에 선진국이 못 된 나라가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자원도 빈약하고 남북대치의 악조건 하에서도 저축을 증대하고 열심히 일한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도 부강한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저축 증대를 특별히 강조했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은 각국의 국민 저축률과 국민성을 비교 분석한 책자 한 권씩을 출입기자들에게 선물했다.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병진정책이 추진되던 1977년, 나는 우리 경제가 20년 내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경제와 새마을운동, 민생문제에 대해 활력과 자신감이 넘쳤다. 핵 개발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파키스탄보다는 앞설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수석비서관들 사이에서 오갔다.

나는 스피치라이터 1년 수개월이 지났을 때 김성진 대변인과 협의하여 박찬세를 스피치라이터로 초빙했다. 그는 나와 대학 동기생으로 <고대신문>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4·19 전야 4·18 고대학생의거 격문을 썼던 뛰어난 문장가였다.

나는 공보비서관 재직 시인 1974년 대통령 가족들의 저도 여름휴가에 수행했다가 육 여사로부터 인간 영혼에 관한 여러 가지 말씀을 들었다. 영혼과의 대화 등 심령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영혼과 대화를 한다는 안(安) 아무개를 만나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후 육 여사는 서울에 돌아와 8·15 경축식장 참석 중 조총련 소속 문세광의 흉탄에 숨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집에서 TV를 통해 이 끔찍하고 엄청난 광경을 보았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뛰쳐나왔고 경호관이 박 대통령을 연단 안쪽으로 피신시켰다. 육 여사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정일권 국회의장과 양탁식 서울시장이 그 의자 밑으로 숨었다.

육 여사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박 대통령은 중단했던 경축사를 다시 계속해 끝냈다.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는 더욱 크게 울렸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리고 연설을 끝낸 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육 여사의 고무신을 주어서 들고 퇴장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여준 박 대통령의 담대, 의연한 모습은 초인적이었다. 경악과 존경을 금할 수 없었다. 숱한 사선을 넘나들면서 단련되고 내면화된 의지이고 인격이며 투철한 사생관의 발현이었으리라.

나는 사무실에서 육 여사가 가료중인 서울대학병원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원하면서 기다리던 중, 오후 4시경 갑자기 주위가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창밖을 내다보니 청와대 본관 지붕 위에 시커먼 구름이 몰려있었고 그 위로 붉게 물든 석양노을이 찬란하게 비쳤다. 황홀하고도 장엄한 광경이었다. 심령학에 관한 그분의 말씀이, 닥쳐올 앞일을 예언한 듯, 그때의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나는 육 여사 장례행렬을 따라 국립묘지까지 가면서 연도에 운집한 국민들의 슬픔과 울부짖음,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애도와 추모의 깊은 정을 보았다. 그것은 민심인 동시에 천심이었다.

나는 육 여사 묘비 건립을 하명 받았다. 충청남도지사에게 보령산 최고의 오석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비문은 <서울신문>에 게재된 모윤숙의 조시가 좋을 것 같아 대통령 재가를 받은 뒤 모(毛) 시인의 승낙을 받았다. 글씨는 육 여사와 두터운 친분을 가졌던 한글 궁체의 대가 이철경 금란여고 교장이 써주었다.

각자(刻字)는 망우리에 있는 묘비 제작의 1인자를 찾아가 부탁했는데 그의 조수가 군복무중이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국방부에 연락하여 그 조수에게 2개월간 특별휴가를 내도록하여 묘비 제작 작업을 완성토록 했다.

<다음호에 계속>

 

‘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0]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박정희, ‘항명’ 김성곤에 ‘돈이냐 권력이냐’ 최후 경고
[제1125호] 2013년12월04일 09시48분

 

[일요신문] 육영수 여사 묘비 건립 작업이 끝났을 무렵인 1974년 10월 초순 나는 김정염 비서실장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방으로 갔다. 그는 나에게 비서실장 보좌관을 하라고 말했다. 전혀 의외였다. 나는 “그런 중책을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라고 사양했다.

▲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을 초청,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김 실장은 “말조심만 하면 된다. 비서실장 보좌관의 말은 비서실장의 말로 외부에 비칠 수 있고 나아가 대통령의 의중으로도 확대 전달 될 수 있기에 무엇보다 말조심이 중요하다”며 “만약 북한에서 간첩이 내려온다면 접선 5순위에 보좌관이 포함된다. 비서실장실, 보좌관실 자체가 2급 비밀”이라며 재차 말조심을 강조했다.

그렇게 중책을 맡게 된 나는 보좌관 4년여 동안 언론계 친구, 대학 친구, 기타 외부 인사들에게 벙어리 행세를 해야 했다. 나는 이 4년 동안 점심은 잔치국수 짜장면으로 일관했다. 청와대 본관 근무자 중 부속실장, 비서실장, 의전수석비서관, 나, 그리고 본관 경호과장 등에 대해서는 청와대 본관 식당으로부터 점심식사를 배달받았다. 점심시간에도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는 뜻이다. 그 점심이 잔치국수, 짜장면이 대부분이고 간혹 짜장밥, 볶음밥이 나올 때도 있었다. 김정염 비서실장은 9년 동안 이 점심을 먹었다. 나는 가끔 김 실장이 좋아하는 일식 생선국을 외부에서 시켜드리곤 했다.

비서실장 보좌관 4년여 동안 나는 이른바 대통령 통치비자금과 비밀 문건들을 보관 관리했다. 10·26 후 남은 자금 9억 5000만 원은 박근혜 큰영애에게 전달했고 비밀문건 등은 청와대 보일러실에 던져 불태웠다는 얘기는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이 있던 무렵 나는 점차 꼬여가는 정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백두진 국회의장을 희생양으로 하여 여야 간 대화국면을 모색하는 방안을 대통령께 진언하도록 김계원 실장에게 건의했다. 김 실장의 진언을 들은 박 대통령은 그러나 “백두진 의장이 무슨 죄가 있느냐”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김 실장이 전했다.

나는 김 실장에게 민관식 국회부의장을 만나 백 의장의 자진사퇴 유도와 여야 관계호전 방안을 의논해 보도록 건의했다. 김 실장이 오케이 했다. 나는 민 부의장에게 연락하여 두 분의 만남을 약속했다. 그런데 당일이 되니 대통령의 안가 만찬이 있어서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는 또 다른 날을 잡아 약속을 했다.

당일이 되니 또 만나러 나갈 수 없는 사유가 생겼다. 역시 대통령 관계 행사 때문에 김 실장이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 사유를 기다리고 있는 민 부의장에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다음 만날 일정을 협의 조정하는 중에 10·26 사건이 일어났다. 일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국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 내가 겪고 들은 얘기를 토막별로 정리한다.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권오병이 중증 위암치료차 경희의료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나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위문금 봉투를 준비해 문병을 갔다. 박 대통령의 위로 말씀과 위문금 봉투를 전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박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산삼을 먹었더니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들 말에 의하면 산삼 한 뿌리에 900만 원을 주고 샀는데 더 사달라고 조르니 큰일이라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한 번 더 문병을 갔다. 나중에 서울중학 옆에 있던 한옥 자택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산삼 때문이 아니었는지….

△심의환 총무처 장관이 위암 투병을 할 때도 세 번 문병과 위문금을 전달한 바 있다. 삼선교 근방의 자택이 공기가 나쁘고 시끄러워 공기 좋고 조용한 성북동으로 이사했으면 하는데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달라고 하여 받아주었다. 그는 성북동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 대통령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장관 자리를 유지하도록 했고 부인에게 위문편지를 썼으나 10·26 사건으로 전달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마지막 친필서신이었다. 10·26 한참 지나서 전달됐다.

△강문봉은 박 대통령과 군 동기생으로 오랜 친구 사이었다. 반정부 전복 혐의로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실형을 살고 있었다. 박 대통령 앞으로 탄원 서신이 왔다. 내용은 결백 주장과 충성맹서였다. 그는 며칠 뒤 석방되었다. 그밖에 군 원로 반혁명 반정부 군 동료들에 대해 처벌과 별도로 그들 가족의 생계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인간적인 배려를 엿볼 수 있는 사례라 하겠다.

△1970년대 중반 국회의사당이 신축 개관된 뒤의 일이다. 정일권 국회의장이 감사의 인사를 표한 뒤 청와대 건물이 너무 낡았으니 새로 짓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국회가 서둘러 예산 반영을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에는 청와대 신축을 하지 않겠다”라고 사양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철저히 절제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청와대 건물은 일제강점기 총독관사로 지었던 목조 건물로, 낡고 협소하고 삐걱거렸다. 천정에는 쥐가 돌아다닐 정도였다. 결국 박 대통령 서거 후 8년이 지나서 신축되었다.

△야당의 거물 정치인 유진산이 사망한 뒤의 일이다. 부인이 박 대통령에게 탄원 편지를 보내왔다. 상도동 자택이 은행 경매에 넘어갈 처지인데 이를 선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사람이 죽었는데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면서 선처 조치를 했다. 유진산은 생전에 이 집을 담보로 은행융자를 받아 정치자금으로 썼는데 살아 있을 때는 별말이 없다가 사후 이자를 못 내게 되자 경매절차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왕사쿠라, 정상배’ 등으로 억울한 매도를 많이 당한 정치인이었으나 사후에는 빚만 남긴 깨끗한 정치인이었다.

△어느 날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집무실로 내려갔다. “내 대구사범 동기생 석 아무개가 폐암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중이라는데 가서 문병하고 주치의를 만나서 상태를 상세히 알아보고 오라”는 지시였다. 나는 즉시 병원으로 가서 문병하고 주치의를 만나 진료 상태와 전망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복명했다. 나는 그가 나을 때까지 진료비를 부담토록 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매달 병원에 가서 진료경과를 듣고 진료비를 정산한 뒤 그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6개월여 만에 사망했다.

▲ 항명파동 핵심 김성곤. 일요신문 DB
△19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항명파동의 주동자가 된 김성곤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콧수염을 뽑히는 수모와 심한 곤욕을 치르고 국회의원직을 사퇴,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자유당 국회의원일 때 “국회의원은 백수건달”이라는 말을 했으며 그로인해 ‘백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공화당 재정위원장인 그는 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이른바 ‘4인방’을 만들어서 반 김종필 세력을 구축, 돈과 권력을 활용해 여야를 넘나드는 폭넓은 활동으로 1960년대 한국 정치를 주름잡았다. 그는 길 총장을 포섭할 때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의 수표를 주었는데 수표를 받은 길 총장이 깜짝 놀랐다는 말이 은밀하게 떠돌았다.

1971년 6월 개각에서 김종필 국무총리 오치성 내무장관이 임명되면서 반 김종필 전선의 길재호, 김성곤, 백남억, 김진만, 4인방세력에 대한 정치적 거세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들 지역구의 경찰서장, 시장·군수를 모두 인사교체 함으로서 그들의 정치적 뿌리를 베어 버렸다. 권력을 둘러싼 양대 세력의 대회전이었다.

이에 4인방은 강력히 반발했고 1971년 10월, 급기야 박 대통령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었다. 주동자와 추종 의원들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일대 곤욕과 수모를 당했다. 1960년대를 주름잡던 이들 4인방체제는 일거에 궤멸되고 말았다.

김성곤의 항명파동의 파장이 유난히 컸던 것은 박 대통령의 직접 만류를 무시한 것 외에 그의 내각제 개헌 구상 의혹이 조기 포착됨에 따라 사태의 폭발성이 상승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최후의 만류 메시지를 김성곤에게 보내면서 “돈과 권력을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것, 어느 쪽이든 한쪽만을 택해야 한다”라는 의미심장한 경고를 했다. 이 최후 경고를 받은 김성곤은 주춤하면서 항명의 발길을 돌리려 망설였으나 추종자들의 떠밀림에 버티지 못한 채 밀려 버리고 말았다.

정계를 은퇴한 그는 미국 보스턴으로 가던 중 하와이에서 장문의 편지를 박 대통령께 보내왔다. 공화당 재정위원장 때 정치자금을 어떻게 조달하여 어떻게 썼다는 것과 경제 활동을 통해 국가에 보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김진만 후임 재정위원장에게 정확히 인계했다는 것이다. 나는 대통령께서 보시고 내려 보낸 이 편지를 모두 읽어 본 뒤 파쇄기에 넣었다.

김성곤의 정치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나는 쌍용양회 상무를 지냈던 우 아무개로부터 토지거래 양도세를 대납해 달라는 의외의 요구를 받았다. 내용인즉 우 씨가 쌍용양회 임원 재직 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남 땅을 사고 팔 때 김성곤 위원장이 자기의 인감을 편의 사용하고 양도세를 미납한 채 미루어 왔다.

10년여가 지나고 김성곤 사후 그 양도세 고지서가 자기 앞으로 나왔는데 이것은 정치자금 조달 관계로 생긴 문제니 청와대가 이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1960년대 강남 개발 당시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거래했던 일로 그가 생전에 처리했어야 했다. 청와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1] 이너서클의 암투
돈 궁했던 김형욱 “회고록 중단할게 200만 달러 달라”
[제1126호] 2013년12월11일 09시05분

 

[일요신문]

# 박종규와 홍종철의 갈등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으로 제3공화국이 발족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에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임명되었다. 대통령 경호실장에 박종규 최고회의 경호실장(소령 예편 후)이, 그리고 대통령 경호실 차장에 최고회의 위원이며 군정시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던 홍종철 대령이 각각 임명 되었다.

▲ 박정희 정권 시절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왼쪽)과 이후락 비서실장은 1960년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나 부침도 겪었다. 일요신문 DB

박종규와 홍종철 사이에선 처음부터 불협화음이 들렸고 상호 알력과 갈등이 심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종철 차장이 문공부 장관으로 전보되었다. 홍 장관은 정부의 홍보업무와 언론관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장관 취임인사차 기자실에 들렀을 때 일화다. 그때는 중앙청 기자실에서 총리실, 문공부, 외무부 관계 기사를 모두 커버할 때였다. 각 언론사에서 2~3명씩 출입했고 신문사 외에 방송사와 통신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각 기자들과 일일이 첫인사를 나눌 때였다. 통신사 기자의 차례가 되었다. “○○통신사에서 나오는 아무개입니다”라고 자기소개가 되었다. 인사를 받은 홍 장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통신사 기자가 왜 여기에 나오느냐”고 반문, 좌중을 긴장시켰다. 통신사 기자를 전기통신회사의 기술자로 착각해 일어난 해프닝이다.

제3공화국 언론정책에 대한 기자들의 집중적인 질문공세가 계속되자 홍 장관은 “살카쥬(살려 달라)”를 연발함으로서 첫 상견례를 치렀다. 각 언론사 사장을 예방하는 자리에서도 “살카쥬”를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래서 ‘살카쥬’가 그의 애칭이 되었다.

공직기강 확립과 부패방지를 위해 대통령직속으로 사정특별보좌관제가 설치되고 그 첫 번째 보좌관으로 홍 장관이 임명되었다. 외국차관 사업이 한창이었고 청와대 비서실장 이하 수석비서관들이 모두 대형 미제 승용차를 각자 요령껏 장만하여 타던 시절이었다.

홍 특보가 박종규 경호실장의 비리에 대하여 대통령에게 보고를 올렸다. 박 실장이 그 사실을 알고 홍 특보를 비서실장실로 불러 언쟁을 벌렸다. 급기야 박 실장의 권총이 발사됐고 홍 특보가 발등 부위에 부상을 당했다. 홍 특보가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두 사람 간의 불상사는 청와대 기자실에까지 퍼졌다. 그 후 치질 때문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여름 어느 날 홍종철 특보가 팔당댐 아래 미사리에서 밤낚시를 하던 중 의문의 실종 사고를 당했다. 박 경호실장이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확인불명이고 다만 그때 박 실장이 홍 특보의 시신 수색을 진두지휘하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 김형욱의 반역과 죽음

8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1969년 3선개헌 후 경질됐다. 그는 육사 8기 육군 중령으로 5·16에 가담한 바 있다.

김종필(JP) 직계였던 그는 김종필의 추천으로 정보부장이 되어 충성맹세까지 했으나 취임 후 곧바로 김종필 탄압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 그는 JP에 대한 24시간 감시를 했다. 전화 도청은 물론 집 앞 골목길에 군고구마 장사를 가장한 정보요원이 상주하여 모든 출입자를 세밀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여야를 불문하고 가혹한 정치사찰과 탄압을 자행했으며 경제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으로부터의 청구권 자금과 상업차관 도입이 한창일 때인 1960년대 정치자금 모금을 둘러싸고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장기영 부총리 등과 알력이 심했다.

부총리 사무실을 밤중에 뒤졌는가 하면 김성곤과는 내기 골프 끝에 말썽이 생기자 정보부에 보관 중인 그의 좌익 활동 기록을 보내 혼비백산케 하고 거액의 돈을 받아냈다. 야당의 김영삼에게는 초산 테러를 자행, 정국을 얼어붙게 만들기도 했다.

JP 직계인 김용태에게는 이른바 ‘복지회 사건’을 무리하게 만들어 정치적 거세를 했다. 김용태의 부인도 정보부에 끌려가서 치도곤을 치르고 낙태까지 했다. 김형욱은 3선개헌 작업이 진행 중인 어느 날 청와대 비서실장실에서 개헌에 반대 입장에 섰던 김용태에게 권총 협박을 했으며 김 의원도 위축되지 않고 쏠 테면 쏴라 하고 대들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락 실장이 만류하여 더 이상 분란이 확대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역시 개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육사 8기 동기생이며 황해도 동향 출신인 오학진 신윤창 등에게 권총을 들이대면서 협박하기도 했다.

그는 정보부장 퇴임 후 1971년 전국구 의원으로 제8대 국회에 진출했을 때 국회 구내 이발소에서 머리를 만지던 김용태를 찾아가 큰절을 하고 땅바닥에 꿇어 앉아 용서를 빌었다. 그의 신분이 국회의원이었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소외감과 보복의 공포심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당시 그는 미화 700만 달러를 미국에 옮겨놓았고 그 돈으로 몇 년 동안 호화 방탕 생활을 했다.

그는 1977년 6월 하순 미 의회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 정부에 대한 반역적인 증언을 했다. 증언에 앞서 중앙정보부와 공화당 국회의원 등이 여러 경로를 통해 국익에 반하는 증언을 만류했지만 끝내 조국과 섬기던 대통령에게 배신과 반역의 칼을 꽂았다.

그는 술과 카지노 등 방탕 생활로 돈이 궁해지자 회고록 집필을 미끼로 200만 달러를 요구하는 흥정을 걸어왔다. 회고록 원고와 200만 달러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정보부가 만류와 회유를 끈질기게 했으나 응할 듯, 응할 듯하면서 끝내 듣지 않았다.

‘절친’이던 혁명주체 동기생이 미국까지 갔으나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군의 선배이며 고향 선배인 민병권 의원이 미국 뉴욕에서 만나 회고록 출판 중지와 박 대통령의 신변안전 보장 메시지를 전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김형욱은 끝내 듣지 않고 패가망신의 길로 질주했다.

그 후 그는 정보부의 유인공작에 걸려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국제 살인 청부조직에 의해 사료 공장에서 살해 되었다는 설이 있을 뿐이다.

# 이후락의 부침

박정희 시대 18년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떨쳤던 인물은 단연 이후락이었다. 그는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 창설 멤버였다. 이승만 정권시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을 지냈고 민주당 정부 때에는 장면 총리 직속 정보분석실인 79부대(그의 군번이 79번임)를 창설, 운영했던 정보통이며 정일권과 함께 대표적인 친미 인사였다.

5·16 후 한때 구금되었다가 풀려나서 영자신문사 사장으로 잠깐 있다가 최고회의 공보실장에 발탁되어 군정 2년 동안 파란 많던 정국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변인 역할을 성공적으로 했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대통령비서실장에 취임, ‘박 대통령 입안의 혀, 박 대통령의 제갈량’으로 불리며 꾀보·모사·책사로 1960년대 권좌를 주름잡았다.

그는 말을 더듬거렸다. 이에 대한 변명으로 “각하, 저는 생각이 너무 앞서서 미처 말이 따라 나오질 못해 말을 더듬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영리 명석함을 말한 바 있다. 박 대통령도 “이후락은 내 의중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내 생각을 앞서는 생각을 한다”고 평했다.

1969년 10월, 3선개헌 후 6년여 만에 퇴임, 주일한국대사로 전보됐던 그는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후보 결정(1970년 10월)에 따라 중앙정보부장에서 1년 만에 퇴임한 김계원의 후임으로 1970년 12월 말 정보부장에 취임, 1년 만에 다시 권좌로 복귀했다.

이후락은 정보부장 취임 4개월 뒤에 실시된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와 한 달 뒤의 제8대 국회의원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어 10월 2일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 국회통과에 따른 항명주동자 길재호와 김성곤 및 그 추종 의원들을 정보부에 강제 연행, 가혹한 곤욕과 수모를 가하고 국회의원 사퇴와 정계은퇴를 강요하여 60년대 정·재계를 주름잡던 4인방 권력체제를 일거에 궤멸시켰다.

<다음호에 계속>

 

‘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2] 2인자 이후락의 몰락
박정희, ‘DJ 납치’ 격노… “털끝도 건들지 말라”

 

[제1127호] 2013년12월18일 09시24분

 

[일요신문]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방북해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 남북화해와 교류협력 증대를 내용으로 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했다.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8월 30일~9월 2일)과 서울(9월 18일~9월 20일),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회의(1차 10월 12일 판문점 자유의 집, 2차 11월 2일 평양)가 각각 개최되었다.

▲ 1973년 납치됐던 김대중이 구사일생으로 생환해 기자회견하는 모습.
1969년 말부터 세계정세는 엄혹한 동서냉전체제에서 해빙무드가 조성되면서 세계적으로 데탕트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은 군사적 도발과 위협을 한층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변화에 즈음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한반도의 전쟁 예방과 평화정착을 위한 새로운 남북관계 정립을 모색하게 된다. 이에 따라 대북관계 책임을 맡고 있는 이 부장이 1969년 말 취임하면서부터 북한 내부를 “면밀히 들여다보면서(본인의 표현임)” 남북 간 긴장완화와 화해협력 방안을 탐색한 것은 현명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이 부장은 진행 중에 있던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정홍진 정보부 국장으로 하여금 북한대표단의 실력자 김덕현(노동당 간부)에게 남북 고위급회담 개최를 제의토록 하여 긍정적 반응을 얻어냈고 이후락 대 김영주(김일성의 동생,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겸 정치위원) 회담 개최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부장은 1972년 1월 정 국장을 단신 방북케 하여 ‘이+김 회담’의 절차와 사전준비 작업에 관해 북측과 협의토록 했다. 이어 5월 2일부터 5일까지 이 부장이 직접 극비 방북해 이+김 회담과 김일성 면담을 통해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했다.

김일성과의 면담은 방북 마지막 날인 5월 4일까지 이루어지지 않다가 자정을 넘기고 5월 5일 새벽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이 부장이 이때 주머니에 넣고 있던 청산가리를 만지작거린 탓에 이것이 녹아서 낭패를 보았다는 얘기를 그가 경기도 광주 도요장(도자기 굽는 시설)에 은거할 때 지인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그 도요장에 자주 출입했던 내 친구에게서 들었다.

사실 5월 2일 오전 ‘적진’을 향한 출발에 앞서 박 대통령은 공산당을 잡는, 대한민국 정보의 총책임자인 이 부장의 신변안전 문제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주한 미국 CIA 책임자에게 방북 사실을 알리고 긴밀한 협조를 구할 수 있도록 공조체제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이 부장도 인질로 잡힐 경우 자결할 각오로 청산가리를 준비해 가지고 간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밝혔다.

당시 정부의 통일정책은 △6·25 남북전쟁의 적대관계 해소와 상호신뢰구축 △휴·정전 체제로부터 평화 정착 △가능한 분야로부터 교류협력의 증진 △남북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를 통한 통일이라는 점진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야당 당수가 된 김대중(DJ)은 정부의 통일정책과는 전혀 다른 미국·일본·중국·소련의 4대국 안보보장론, 남북한 UN 동시가입, 연방제 통일론 등을 주장하여 정부를 당혹케 했다.

남북대화의 성공적인 진전을 위해 올인하고 있던 이후락 정보부장으로서는 김일성 유일체제와 고려연방제 통일론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내부결속과 체제강화가 긴요했다. 그런 그가 10월 17일 유신을 주도했다. 계획과 세부작업을 정보부에서 했다.

남북회담은 1973년 8월 23일 북측의 대화중단 발표가 있기까지 국민과 여론은 남북대치 상항에서 곧 가시적인 그 무엇이 이루어지리라는 성급한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 기대와 흥분만큼 이후락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주변으로 각계 유명 인사들이 몰렸다. 권력서열 2인자의 위상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혔다.

성급한 후계자설도 나왔다. 이후락으로서는 지극히 조심하고 몸을 낮추어야 할 계제였다.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 유혁인 정무수석 등 대통령 참모들에 대한 우호적인 사적 만남도 몇 차례 있었다. 2인자에 후계자설까지 나오는 그에게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 1972년 이후락(왼쪽)이 북한 김일성과 악수하는 장면. 일요신문 DB
이와 관련, 김성진도 이후락이 사무실로 오라고해서 갔더니 돈을 주기에 받아가지고 돌아오면서 곰곰 생각하니 대통령께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다음날 수표 봉투를 내놓고 보고를 드렸다. 대통령께서 듣고 그냥 가져가서 쓰라고 말했다고 10·26이 훨씬 지난 어느 날 얘기한 바 있다.

이후락이 연루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숙청사건이 1973년 초 발생했다. 윤필용은 보안사령관을 거쳐 수도경비사령관 재임 중으로 박 대통령의 총애와 신뢰를 받던 군내 최고 실세였다. 그는 유신 선포 후 유정회 국회의원 선발 시 군 출신의 대거 발탁을 이 부장에게 건의했고 이를 전해들은 박 대통령은 “맡은 일이나 잘하라”고 언짢아했다는 것.

그는 이후락 정보부장을 형님이라 불렀고 친밀하게 지냈다. 유신 초 신범식 서울신문사 사장 주최 만찬에 정소영 청와대 경제수석, 김시진 비서관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의 노쇠 노망 얘기와 이후락 후계론이 설왕설래 되었는데 윤필용이 “다음에는 형님이 해야 합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달쯤 뒤 박 대통령의 뉴코리아 골프 라운딩에 참석한 신 사장이 그늘집에서 쉬는 동안 “각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습니다. 주변 측근들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추궁 끝에 신 사장은 만찬 때 있었던 대화내용을 자백했다. 박 대통령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막강한 병력과 전력을 가지고 수도서울의 경비와 청와대 외곽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군부실력자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보와 권력에 대하여 2인자 후계자설까지 도는 정보부장의 밀착관계에 대하여 권력의 속성을 꿰뚫는, 분할통제 용인할 달인인 박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 두 사람에 대한 신임은 거두어지고 거세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강찬성 보안사령관으로 하여금 윤필용 수방사령관을 숙청했다. 박 대통령의 심기를 가장 잘 헤아린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 부장을 정치적으로 견제, 압박했다. 윤필용은 1973년 4월 28일 군사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윤필용과 가까웠던 김연준 대한일보사 사장은 수재의연금 횡령 혐의로 구속됐고(후에 무혐의로 석방), 내가 재직했던 <대한일보>도 폐간됐다.

윤필용의 숙청 과정에서 이후락 정보부장도 함께 해임될 뻔했으나 두 권력기관장을 동시 해임하는 것이 정권안보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김정염 청와대 비서실장의 진언이 받아들여져 이후락은 위기를 모면했다. 윤필용은 먼 뒷날 박 대통령이 자기를 친 것은 2인자 후계자설 등이 도는 이후락에 대해 “까불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후락은 불안 초조했고 박 대통령의 신임회복에 급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무렵, 10월 유신 선포 직전 방일했던 DJ가 일본에 망명하여 미국을 오가면서 극열한 반정부 활동을 계속했다.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만들어 그 의장에 추대되었고 망명정부를 세워 그 수반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의 회담을 추진한다는 첩보가 있었다.

▲ 이후락 말년 모습.
박 대통령의 심기가 편할 수가 없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런 상황에서 정보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고 이 부장을 압박했다. 코너에 몰린 그는 8월 8일 DJ 납치를 결행했다. 최고 권력자의 신임 회복을 위한 외곬의 의지가 맹목적 충성으로 표출되었고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본인의 파멸은 물론 조총련 소속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 서거의 비극을 초래하게 됐다.

그날 공보비서실은 김성진 대변인 주재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DJ 납치 외신 전문이 들어왔다. 김 대변인이 그 쪽지를 들고 곧바로 김 비서실장에게 알렸고 이어 박 대통령께 보고됐다. 박 대통령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난감해 하면서 △일본 우익 과격분자의 소행 △재일 거류민단 과격분자 소행 △정보부 공작 △DJ 자작극, 이렇게 네 가지 가능성을 확인하도록 지시하고 어떤 경우든 DJ에게 신체적 위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부장은 자신의 지시로 진행된 DJ 납치 사건에 대해 5일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서울에 데리고 와서야 보고했다.

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정부는 김종필 국무총리(JP)를 진사(까닭을 밝히며 사과) 사절로 파견하기로 했다. 김 총리는 다나카(田中) 일본 수상을 관저로 예방하고 진사함으로써 한일 경색국면이 풀렸다. 이 과정에서 홍경모 KBS 사장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NHK 사장을 움직여 수상 관저 예방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후 이 부장은 정보부 국장의 민간인에 대한 월권 독직사건과 관련하여 박 대통령에게 직접 국문을 당하고 여러 관련자를 해직하는 사태를 겪었다. 결국 그 해(1973년) 말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락은 10대 국회의원을 지내다 10·26 사건을 맞이했다.

그는 박 대통령 서거 직후 권력공백기인 어느 날 갑자기 기자회견을 열고 JP 후계자 불가론을 주장, 정가에 큰 충격을 불러 오기도 했다. 부정부패 당사자로 지목되자 떡고물론을 주장하여 한동안 세간에 오르내렸다. 이후락의 DJ 납치와 관련하여 후일 JP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을 저질러 박 대통령도 어떻게 손 쓸 수 없게 함으로서 공동운명체화하려 했던 꾀였다고 평한 바 있다. 문공부 장관을 지낸 김성진은 권력상층부 이너서클 간의 알력과 견제 및 충성경쟁이 빚어낸 과잉충성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한편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락은 경기도 광주에 도요장을 마련하고 철저한 은둔생활을 했다. DJ의 대통령 당선 후 고향 친구이며 DJ의 측근이던 최영근을 앞세워 DJ를 예방 진사했다. 이때 이후락이 많은 재산을 헌납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DJ 재임 중 그에 대한 어떠한 처벌이나 보복 없이 이례적으로 관대하게 넘어갔음은 정치보복 근절 차원에서 다행이라 하겠다.

그의 말년 생활이 곤궁했다는 얘기를 그의 지인들로부터 들었다. 권력무상, 인생무상을 실감케 한다.

<위의 내용 중 일부는 김정염 회고록을 참조하였음…다음호에 계속>

 

‘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3] 대통령비서실장의 사표 김정염
“대통령도 풍족하면 부패” 통치자금 엄격 운용

[제1128호] 2013년12월24일 17시47분

 

[일요신문] 김정염은 일제강점기 충남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규슈에 있는 오이다고등상업학교에 유학했다. 3학년 재학 중 구마모토 예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히로시마교육대에서 훈련 중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경 폭심 2㎞지점에서 원자폭탄을 맞았다. 화상을 입고 출혈과 탈모, 고열 등 원자병에 감염됐으나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한국은행 설립 요원으로 활약했으며 도교지점과 뉴욕사무소장으로 근무했다. 미국 클라크대학 대학원에 유학했으며 훗날 동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 김정염 비서실장 재임(1969년 10월~1978년 12월) 중 경제인의 박 대통령 사적 독대 사례는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을 제외하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일요신문 DB
그는 자유당 말기 재무부 이재국장 봉직을 시작으로 1978년 말까지 평생을 경제 관료로 있으면서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3선개헌 후 1969년 10월 20일 정일권 내각은 총사퇴하기로 하고 일괄사표를 제출하였다. 1967년부터 2년간 봉직한 김정염 상공장관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뜻밖에’ 대통령비서실장 임명 통보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경제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으나 정치 등 비경제분야를 포함한 국정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국정운영을 보필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많아 적격하지 못하다”고 겸양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국가경영의 요체는 안보와 경제다. 국민을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치의 대본인데 최근 북의 도발이 가중되고 있고 국제정세가 격변하는 등 안보 상황이 위중함으로 나는 국방태세 강화와 안보외교에 전념해야 한다. 나를 대신하여 경제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잘 이끌어 주기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처음부터 경제에 관해 전폭적인 권한위임을 받은 셈이다.

그는 이미 5·16 직후 있었던 화폐개혁의 실무책임과 한일회담 청구권 대표를 맡으면서 박정희 시대의 주요 경제운용에 깊숙이 개입했었다. 이후 재무부 차관, 상공부 차관을 거쳐 재무장관 상공장관을 역임하면서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입안, 수립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는 경제 건설의 기초를 놓았고 1970년대에는 그 발전과 성장을 이끌었다. 1978년 12월 말 퇴임 때까지 9년 3개월 동안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서 수출 증진과 중화학공업 건설 등 1970년대의 경이적인 고도성장과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나가는 데 혼신을 다해 헌신했다.

나는 1974년 10월부터 1978년 12월, 그의 퇴임 때까지 4년 3개월 동안 그의 보좌관으로 봉직한 바 있다. 그의 구체적인 업적은 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한국 경제정책 30년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저서는 한국 경제개발사의 1차 사료적 자료로서 경제학도, 지식인, 정치인뿐만 아니라 오늘의 번영된 대한민국을 있게 한 발전 과정을 알게 하는 국민 필독의 고전이다. 또한 경제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세계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 정책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 김정염 비서실장의 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의 영문판 표지.
그는 학구적인 경제 관료이며 철저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강직하고 청렴한 원칙주의자이며 산업화 시대의 대표적 청백리였으며 뛰어난 경세가였다. 그는 한때 연세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내정된바 있었으나 정부의 부름 때문에 학계 진출을 포기했다. 격무 중에도 틈만 나면 <아사히신문> <요미우리신문> <산케이신문> 등 일본 신문들과 미국 <뉴욕타임스> <US News & World Report>, 홍콩의 <Far Eastern Economic Review> 등을 정독하는 등, 세계 경제동향을 살피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비서실장이 되면서 주한 미국대사(포터, 하비브, 슈나이더)들과 회합을 갖고 한미 현안에 대해 차원 높은 협의를 지속했다. 특히 카터 행정부 때에는 슈나이더 대사와 월 1회 단독회담을 갖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 자주국방태세 강화를 위한 신무기체계 개발, 소위 인권 문제를 포함한 긴급조치 등 한미 군사·외교 현안 전반에 걸쳐 긴밀한 협의와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한 요담을 계속했다.

그는 대통령 통치자금과 관련하여 “대통령께서 돈을 너무 많이 쓰게 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께서 풍족한 자금을 쓰게 되면 자칫 부패, 정경유착, 국가부패 풍조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엄격히 경계해야 한다.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빠듯하게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절약과 절제를 수범했다. 그는 경제인들의 정치헌금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엄격한 원칙을 세워 운용했다.

①3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하되 이익을 낸 업체로 제한했다.

②비료, 농약, 종자, 사료, 농기구 및 영농 관련 업체와 어구·어선 제조업 등 농·축·어민을 대상으로 하는 업체는 배제했다. 이들 업체에 대해서는 여유이익분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농·축산 및 어민들에게 되돌려 주라는 의미에서다.

일례로 경기농약회사 소유주 권태흥이 정치헌금 제의를 해왔을 때 김 실장은 농어민 관련 기업 배제 원칙에 따라 성금을 접수하지 않았다. 당시 경기농약은 다른 제조업 못지않게 영업이익을 많이 낸 건실한 기업이었다. 이에 권 사장은 그해 연말 고향을 찾아가는 여공들을 위해 방한복을 대량 기증했다.

③자발적 순수 성금 원칙 아래 이권이나 청탁거래 등과의 연계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의 비서실장 재직기였던 1970년대는 1960년대의 산업기반 조성기를 거쳐 연 12%의 본격적인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였다.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발전 지원과 기업육성 및 수출 진흥정책에 힘입어 실적과 이익을 많이 낸 기업들의 자발적인 순수 성금만을 접수했다.

어느 한 기업의 과다한 성금 제의나 이권과 관계된 거래 연계 가능성이 있는 성금 제의는 철저히 배제했다. 30개 대상 기업들이 형편대로 골고루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조달된 정치자금은 시중은행에 골고루 예금해 두었다가 쓰곤 했다.

국방헌금과 새마을성금 등도 함께 접수했으나 국방부와 새마을 관계 기관에 이관, 관리했다. 특히 새마을성금에 있어서는 정부의 새마을사업 외에 비예산 필요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④박 대통령에 대한 기업인들의 사적 접근을 봉쇄함으로써 이권청탁의 길을 차단했다.

김 실장 재임 중 경제인의 박 대통령 사적 독대 사례는 박태준 포항제철회장을 제외하고는 1건도 없었다. 김 실장도 9년여 동안 경제인들과의 사적 만남이 1건도 없었다.

▲ 포항제철소 건설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박태준 회장(맨 아랫줄 왼쪽서 세번째)에게 어떤 외부 간섭이나 청탁이 없도록 ‘종이마패’를 써주었다. 일요신문 DB
박태준 회장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을 지냈을 뿐 아니라 군 재직 시부터 그의 참모로 봉직했던 특수 관계였다. 포철 건설 당시 외부 간섭이나 청탁 등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박 회장에게 써 준 ‘종이마패’와 3선개헌 당시 개헌 불찬성 의견을 표명한 박 회장에 관한 정보보고에 대해 “그 사람은 개의치 말라”고 엄명한 것은 두 사람간의 특별한 신뢰관계의 표시라 하겠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경우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현대조선 창설과 관련하여 비교적 박 대통령과 잦은 만남을 가졌으나 독대는 없었고 모두 관계 장관, 김 비서실장 및 관계 비서관 배석 하에 공적업무를 위한 만남이었다.

비서실 운용에 있어서도 절제와 검약 겸손과 협조의 기풍을 진작했다. 그는 보리, 잡곡 권장기에는 보리잡곡밥을, 분식 때에는 국수와 짜장면을 청와대 본관 식당에서 배달해 주는 대로 9년여 동안 점심으로 먹었다.

그는 공적 업무수행 이외에 사적인 외부접촉은 철저히 차단 자제했다. 주말 운동도 반드시 수석비서관들하고만 했고 외부인사와의 회식은 없었다. 나는 공화당 당직자들과의 소통을 위하여 제한적인 인사들과의 주말 운동 또는 회식 등을 조심스럽게 건의했으나 김 실장은 한번 길을 트면 겉잡을 수없이 확대되거나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외부접촉을 삼가는 원칙을 고수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대통령부(청와대) 자체가 최고의 권력기관이기 때문에 주어진 권한의 80% 범위 내에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장관급이던 수석비서관제를 차관급으로 하향 조정함으로써 행정부에 대한 대통령비서실의 월권, 간섭, 군림의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원천 봉쇄했다. 행정부처 간의 협력과 조정의 역할을 권장했다.

참모 연구보고와 말씀자료에 대한 대통령의 서명을 근거로 한 지시각서 시달을 폐지시켰다. 이때의 대통령 서명은 읽어보았다는 확인인데 이것이 지시각서로 부풀려 행정부로 하달될 때 그 부작용이 심대하다는 것이다. 이는 상공부, 재무부 장·차관 시절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겪었던 경험을 교훈으로 하여 시정 조치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4] ‘김정염의 비서실’의 진면목
‘인재풀’ 특보실 신설… 장관급 이상 상당수 발탁
[제1129호] 2014년01월03일 11시33분

 

[일요신문] 김정염 대통령비서실장은 인재를 모으고 키워 국가 동량으로 배출했다. 행정부처의 유능한 엘리트들을 수석비서관, 비서관, 행정관 등으로 발탁했다. 대통령비서실 근무를 통하여 국정에 대한 종합적 안목과 정무적인 판단 능력, 정책추진 능력 등을 배양토록 했다.

매년 총무처로부터 고시 합격 신임 사무관들 중 성적순으로 10명씩 배정받아 2년 정도 비서실에서 근무케 함으로서 업무능력과 공직관, 국가관을 확립케 한 뒤 행정부처로 전출시켰다. 이렇게 훈련, 양성된 엘리트 관료들은 대통령비서실과 행정부서를 순환근무하면서 그 역량을 십분 발휘했고 국가의 동량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 1979년 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정염 주일대사에게 신임장을 수여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그중에서도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의 발탁은 자주국방 태세 강화를 위한 방위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 건설을 통한 국부 창출을 동시에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한 인사의 백미라 하겠다.

1968년 이후 가중되고 있는 북한의 전쟁 위협과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방위산업 육성이 긴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고 방위산업 건설을 독려했으나 방대한 재원조달과 기술 문제 등으로 그 진척이 여의치 못했다.

이때 오원철 상공부 광공전(鑛工電) 차관보가 김 실장에게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연계한 ‘병진건설’ 아이디어를 설명했고 두 사람은 곧바로 박 대통령께 그 내용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다음날인 1971년 11월 10일 오 차관보를 청와대경제2수석비서관으로 전격 임명하였고 이때부터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연계 건설계획이 본격적으로 시동되었다. 대한민국의 명운을 가른 인사라 할 수 있다.

한편 김 실장은 대통령특별보좌관실을 신설하여 다음과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각계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비서실 업무와는 차원이 다른 특별보좌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교육·문화특별보좌관 : 박종홍 서울대 교수 △외교 : 김용식 전 유엔대사, 최규하 전 외무장관, 김동조 전 외무장관 △안보 : 유재흥 전 국방장관, 서종철 전 국방장관, 박원근 예비역 중장 △정치(국내·외) : 이용희 서울대 교수, 함병훈 연세대 교수, 김경원 고려대 교수, 장위돈 서울대 교수 △경제 : 남덕우 전 기획원 장관, 신병현 한국은행 총재, 박진환 서울대 교수, 김명윤 고려대 교수 △법률 :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 △사회 : 장동환 성균관대 교수, 임방현 <한국일보> 논설위원.

이렇듯 1970년대 대통령부(청와대)는 비서실과 특별보좌관실을 합쳐 대한민국의 인재풀 역할을 했다. 최규하 대통령을 비롯, 국무총리, 감사원장, 경제부총리, 각 부처 장관 등 역대 정부까지 37명의 장관급 이상 공직자가 그 인재풀에서 배출됐다.

김정염 실장은 사실상 ‘경제부통령’의 입장에 있었지만 행정부처와의 마찰이나 갈등 및 불협화음이 전혀 없었고 그가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단 한 건의 불미스러운 일이나 말썽이 없었다. 그는 대통령의 질책을 받을 만한 일에 대해서는 장관들을 대신하여 보고해 주면서 장관이 들어야 할 꾸중을 대신 들었고 칭찬받을 일에 대해서는 장관을 앞세워 보고케 하면서 장관들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칭찬을 받도록 배려했다. 그는 스트레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힌 바 있다.

“막중한 국정운영의 최종 책임을 맡은 대통령께 가해지는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다. 대통령께서 장관들에게 일일이 꾸중을 하시거나 화를 내시지는 않는다. 그 대신 비서실장에게는 모든 스트레스를 풀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과 국정운영을 위해 바람직하다.”

김 실장은 1977~1978년 탈모와 좌골신경통 때문에 오래도록 고생했다. 샤워할 때마다 머리털이 한 줌씩 빠졌고 좌골신경통 때문에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보고를 받고 결재했다. 박 대통령의 호출 때에는 절뚝거리면서 집무실로 달려가곤 했다. 이 모든 신체적 장애가 스트레스 때문에 왔다는 진단이었다.

물리치료, 약물치료, 한방치료 등 여러 가지 치료와 노력을 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증세는 심해지면서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은 채 한결같은 자세로 비서실장 임무를 수행했다. 참으로 놀라운 정신력이었고 극기심의 발로였다. 그런데 이러한 증상들은 비서실장 퇴임 후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자 저절로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 청와대비서실 민방위발대식에서 김정염 비서실장이 신고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머리 좋기로 유명했다. 모든 계수는 그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으며 박 대통령의 하문 시 주무장관보다 더 정확한 답변을 했다. 국정 전반에 관해 분야 별로 소상히 파악하고 있어 박 대통령 보좌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가히 완벽한 비서실장이었다. 주요 전화번호도 모두 외우고 있었다. 1년에 몇 번 만나지 못하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이름을 거의 모두 기억해서 오랜만에 만나는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컴퓨터라는 별칭을 듣기도 했다.

그는 또한 극진한 효자였다. 매주 토요일 퇴근하면서 가회동 부모님 댁에 들려 문안드리는 것을 9년여 동안 한 번도 건너뛰는 일이 없었다. 충효동근(忠孝同根)임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대통령비서실 규모를 최소화하고 능률을 최대화했다. 9년여 비서실장 재임 중 비서실 규모를 총계 230명 내외로 운영했다. 이 중 운전수, 여직원 고용원(청소·정원관리) 등 기능직이 120명 선이고 행정요원 비서관, 수석비서관 등이 110명 선이었다. 특정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전문 인력으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시적으로 운영했다. 부실기업 정리사업, 관광 진흥사업, 8·3 사채동결 조치 등이 그것이다.

‘김정염 비서실’은 최소의 규모로 최대의 능률을 발휘하여 일을 가장 많이 한 대통령비서실이었다. 그는 최장수 최우수 완전 청결한 대통령비서실장의 모법이며 영원한 사표(師表)라고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역대 정권에서 보았던 대통령비서실의 과비대나 과직급 상향 현상과 가신그룹의 발호, 문고리 권력의 부패, 대통령 가족·친인척들의 부패와 국정 농단 왜곡 등 비정상적인 운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1978년 12월 김 실장은 그의 건강에 대한 박 대통령의 특별배려에 따라 9년 3개월 동안의 대통령비서실장을 사임하고 일본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사 재임 중 1979년 10·26 박 대통령 서거의 비극을 맞이하였고 신군부에 의해 해임, 귀국했다. 박 대통령 서거 후 1993년 그는 세계은행이사회의 ‘동아시아로부터의 교훈’ 강좌에 초청받아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에 대하여 기조연설을 하고 질의 응답했다. 세계은행은 <한국 경제정책 30년사-김정염 회고록> 영문판을 세계은행 경제개발원 정책수립 총서 창간호로 출판하여 개발도상국 경제개발 교과서로 활용했다.

이에 앞서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은 1992년 초 소위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하여 한국 등 네 마리 용을 따라붙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국 경제개발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그의 회고록을 <한국 경제 발전-한강의 기적과 박 대통령>이라는 중국어판으로 번역 출간하여 공산당과 내각 및 국영기업체의 간부용 필독참고서로 활용했는데 김 실장은 한·중 우호증진을 위해 중국어판 회고록에 대한 인세를 사양했다.

이처럼 그는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혼신을 다해 헌신했고 박 대통령 서거 후에는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성공 노하우를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의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개발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많은 개발도상국과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개혁개방을 하려는 나라들에게 경제개발 성공 노하우를 알리는 등대가 되고 있다.

그는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뒤 박 대통령 기념사업회장을 맡아 그동안 진전이 없었던 기념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박 대통령 기념도서관과 기념회관 건립을 완성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