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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다

일취월장7 2013. 11. 13. 10:39

‘보수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다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의 이념과 자질, 도덕성에 관한 논란이 거세다. 역사학계와 야당은 그에게 국편을 맡긴 것이 박근혜 정부의 ‘역사 장악 시도’라며 반발한다. 3대 역사 기관의 수장을 뉴라이트 인사가 싹쓸이

변진경 기자  |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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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호] 승인 2013.11.13  10: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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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국편)의 전신은 광복 후인 1946년 3월 경복궁 집경당에 설치된 국사관(國史館)이다. 고려 시대의 예문춘추관이나 조선 시대의 춘추관처럼 국가에서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설치한 전담 기관이다. “일인들이 비곡(悲曲)한 억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근본적으로 쳐부수어 새로운 사관(史觀)에서 국사를 수사(修史)하기 위해” 예산 70여만 원을 들여 국사관을 개관하게 됐다고 1946년 5월4일자 <동아일보>는 전한다.

1949년 문교부 직속 국사편찬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1987년 과천 청사로 자리를 옮긴 뒤 2013년 제12대 위원장이 취임하기까지 70여 년간 국편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료 수집·보존·연구·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왕조실록> 48책, <승정원일기> 141책 등 민간에서 내기 힘든 한국사 기초 자료들을 간행했으며, 문서 620만 장과 사진 5000여 장(2012년 기준)에 이르는 한국사 자료를 해외에서 수집하는 일도 앞장서서 해왔다.

5급 이상 국가직 공무원과 초·중·고등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한 국사 교육 연수도 국편이 맡았으며 일선 학교에서 사용되는 역사 교과서를 검정 심사하는 것도 국편의 몫이다. 그 밖에 한국사와 관련한 남북 협력사업, 한국사 능력검정시험 사업, <조선왕조실록> 영문판 보급사업 등의 국가적 임무도 맡았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임기 3년의 차관급 정무직 국사편찬위원장의 자격 요건과 업무수행 조건으로 ‘역사에 대한 학식이 풍부하고 덕망이 높은 자’ 그리고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그 업무를 수행할 자’(사료의 수집·편찬 및 한국사의 보급 등에 관한 법률)를 요구하는 것도 그래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10월 31일 국정감사장에서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이 의원들의 자진사퇴 요구에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10월 31일 국정감사장에서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이 의원들의 자진사퇴 요구에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런 국편이 최근 논란의 한가운데에 섰다. 지난 10월1일 새로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취임한 유영익(77) 전 한동대 석좌교수의 이념과 자질, 도덕성 등에 관한 논란이 거세게 일었기 때문이다. 한국역사연구회 등 5개 역사학계 단체는 유 전 교수의 국편 위원장 내정설이 흘러나오던 지난 6월부터 내정 철회 성명을 발표하는 등 강하게 반대해왔다. 9월부터는 민주당 등 야당 의원도 반대운동에 가세했다. 취임 이후에도 논란은 가라앉지 않아, 지난 10월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장은 유영익을 둘러싼 여야 간 정쟁으로 내내 시끄러웠다. 유 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아도 교학사 교과서 등 역사 왜곡 논쟁이 한창인 가운데 유 위원장에게 국편을 맡긴 것은 이번 정부의 ‘우편향’ 역사관과 역사 교육관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일생을 ‘이승만 찬양’에 바친 뉴라이트 학자


유영익 위원장은 본래 ‘이승만 전문가’로 이름을 알린 학자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그는 유학 시절 도서관에서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읽은 뒤 자신을 포함한 대다수 한국 청년들이 갖고 있던 ‘반(反)이승만’ 감정을 버리게 됐다고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혀왔다. 이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씨와의 인연으로 이 전 대통령이 남긴 자료들을 입수한 유 위원장은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서 50억원 기금을 지원받아 이승만연구소의 전신인 현대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 건국 대통령 이승만> <젊은 날의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등 유 위원장이 쓴 책도 모두 이승만에 관한 것이고 최근 10년 사이 청소년 역사 강좌, 주한미군 한국 현대사 강의 등에 나갈 때마다 들고 나간 주제도 모두 ‘이승만의 삶과 업적’이었다. 유 위원장은 저서와 강의 등을 통해 미국식 대통령제의 확립,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 70만 대군 육성, 농지개혁, 기독교 확산 등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꼽아왔다.

사학자가 역사적 인물을 학술적 연구 대상으로 삼고 몰두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하지만 유 위원장의 이승만 연구는 ‘학술’ 행위가 아닌, 학자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잃은 ‘찬양’ 행위라는 평이 많다. 광복 후 친일파 청산을 막고, 6·25 직후 도피한 뒤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고, 부정선거를 주도하고, 4·19 희생자들을 낳아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승만에 대해 “적어도 공 7, 과 3은 된다”라고 평가할 뿐 아니라 그 업적을 미화하는 정도가 상식에서 벗어난 수준이라는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윤무영</font></div>유영익 위원장은 뉴라이트 역사 단체인 ‘교과서 포럼’(위)의 <대안 교과서> 집필에 동참했다. 
ⓒ시사IN 윤무영
유영익 위원장은 뉴라이트 역사 단체인 ‘교과서 포럼’(위)의 <대안 교과서> 집필에 동참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은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을 한 끝에 드디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고야 만’ 구약성경의 인물 야곱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필생의 대업이었다”(학술 논문 <이승만, 건국 대통령>), “(조선 태종, 고대 중국 진시황,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한 모세 등 일련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비교될 수 있는 이승만 대통령은) 애석하게도 민주주의를 최고 가치로 받드는 현대인들로부터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학술 논문 <이승만, 독립과 부강의 기반을 다진 국가 창건자>)와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더불어 유 위원장은 “(미국으로 간 이승만은) 짐승과 같이 저열한 상태에 빠진 한국민을 기독교를 통해 거듭나게 할 목적으로 신학 공부를 곁들여 했다”(<한국논단> 1996년 8월호 기고문), “이승만은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큰 공헌을 했다”(2005년 서울신학대 강좌) 따위 민족 비하나 종교 편향적 발언을 한 사실도 밝혀져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까지 나서 유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일생을 ‘이승만 찬양’에 바친 유 위원장은 자연스레 지난 10년 사이 세를 불린 우파·뉴라이트 역사 운동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2004년 “좌편향 근현대사 교과서를 바로잡겠다”라며 출범한 뉴라이트 역사 단체 ‘교과서포럼’에 참여했고 그 단체의 <대안 교과서> 집필에도 동참했다. 교과서포럼의 <대안 교과서>는 4·19 혁명을 학생 의거로 격하하고 5·16 군사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빚었다. 2006년 11월 교과서포럼은 <대안 교과서>의 내용을 알리는 심포지엄을 열었다가 4·19 관련 단체 회원들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때 사회를 맡은 유영익 위원장은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이영훈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4·19 단체 회원들에게 멱살을 잡혔다(18쪽 사진). 유 위원장은 또 최근 우편향에다 오류투성이인데도 검정 심사를 통과해 논란이 되고 있는 교학사 교과서의 집필을 주도한 한국현대사학회 상임고문이기도 하다.

“인사 난맥 넘어선 역사 도발”


유 위원장의 우편향 행보는 역사 분야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2007년 1월 보수 단체인 국가비상대책협의회가 개최한 토론회에 참석한 유 위원장은 “한국의 중산층이 정치적으로 무책임한 선택을 한 것이 현재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치세력의 연합체 형성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를 맞이해 열린 이 신년 토론회에서는 ‘좌파 재집권을 막기 위한 보수 대연합’을 구축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이런 정치적·이념적·역사적 편향성은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계속돼 국정감사장에서 “햇볕정책은 친북정책이다”와 같은 ‘막말’로 드러나기도 했다(교육부 서남수 장관은 이에 대해 “연령이 고령이고 심야 시간이라 실언을 한 것 같다”라고 대신 해명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06년 11월 유영익 위원장(오른쪽)이 <대안 교과서> 토론회에서 4·19 단체 회원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연합뉴스
2006년 11월 유영익 위원장(오른쪽)이 <대안 교과서> 토론회에서 4·19 단체 회원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이렇게 시빗거리가 많은 유 위원장을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국편의 수장으로 임명한 것은 단순한 ‘인사 난맥’을 넘어서는 중대한 도발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우려다. 역사교육연구소 김육훈 소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자기 입맛에 맞는다고 해서 운동권 사학자를 국편 위원장으로 임명하진 않았는데 유 위원장 임명은 바로 그런 꼴이다. 우리나라 3대 역사 기관이라 할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의 수장을 동시에 뉴라이트 인사로 임명한 걸 보면 그간 민간에서 증폭시켜온 우편향 역사 인식을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확산시킬 뿐 아니라 그것을 교육정책으로까지 구체화하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전국역사교사모임 이성호 회장도 “역사 교육과정과 교과서 내용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편을 틀어쥠으로써 현재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치열하게 벌어지는 한국 현대사 논쟁에 정부가 깊숙이 간여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최근 보수 언론과 여당 일각에서 국사 교과서 국정 전환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 또한 현 정부의 역사 장악 시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한다(16쪽 상자 기사 참조).

박근혜 대통령은 유 위원장을 국편 위원장으로 내정한 지난 9월 인문학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편협한 자기 생각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고 잘못하면 영혼을 병들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뜻하는 ‘영혼을 병들게 하는 역사 교육’이 무엇인지는 2008년 교과서포럼의 <대안 교과서>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전한 축사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기술하고 광복 후 이승만·박정희의 독재를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은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역사에 대한 평가가 잘못된 시각으로 왜곡돼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 여러분은 후손들을 위해 큰일을 하셨고, 덕분에 걱정을 덜게 됐다”라고 말했다.

40년 전, 박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도 현행 역사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제도 개편에 나선 바 있다. “주체적인 민족의식에 투철하고 민족중흥의 의욕에 충만한 후세 국민을 길러낸다는 관점에서 볼 때 현행 국사 교과서의 내용은 상당 부분 개편이 필요하다”라는 전제하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택한 방식은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전환’이었다. 중·고교 각 11종씩 발행돼 나오던 검정 교과서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민족적 가치관 확립을 위한 일관성 있는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 발행될 국사 교과서가 꼭 담아야 할 내용을 순서대로 정리한 ‘개편 지시 방향’의 1항은 다름 아닌 ‘유신정신 반영’이었다(1973년 6월9일 문교부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방안 보고> 자료 참조). 끊임없이 아버지 시대로의 회귀를 꿈꾼다는 지적을 받는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 분야에서도 아버지의 전철을 밟아가는 모양새다.

 

 

역사 원로들 "朴정부 집요한 '역사 전쟁', 이유는…"

퇴임 교수 16명 "교학사 감싸다 국정 교과서 회귀? 시대착오"

김덕련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1-12 오후 5:52:50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을 받는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와중에 검인정 체제를 버리고 국정 교과서 체제를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부실한 교학사 교과서 때문이 아니라 8종 교과서 전체 및 검인정 체제의 문제 때문에 역사 교과서 논란이 벌어졌다는 식이다.

최근 새누리당 김무성·심재철 의원이 국정 교과서 부활을 거론한 데 이어 정홍원 국무총리까지 "올바른 역사 교육을 위해서는 통일된 국사 교과서가 필요할 수 있다"며 힘을 실어줬다. 이로 인해 정부와 여당이 국정 교과서 부활을 공식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사를 연구해온 원로 학자들이 12일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이를 규탄하는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강만길 전 고려대 교수와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 초대·2대 위원장), 박현서 전 한양대 교수, 서중석 전 성균관대 교수, 안병욱 전 가톨릭대 교수(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전 위원장), 윤경로 전 한성대 교수(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 이만열 전 숙명여대 교수(국사편찬위원회 전 위원장), 이이화 전 서원대 석좌교수, 조광 전 고려대 교수, 이렇게 9명이 참석했다.

수십 년간 한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다가 정년 퇴임을 한 이들로, 한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은 그 이름을 접할 수밖에 없는 쟁쟁한 인사들이다. 이들 외에도 뜻을 함께한 이가 7명 더 있다. 모두 16명의 정년 퇴임 교수가 역사 교과서 문제에 관해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정부·여당이 앞장서 한국사 교육을 이념 공세 도구로 활용…걱정된다"

60∼80대인 이들이 노구를 이끌고 한자리에 모인 건 "한국사 교육을 정쟁의 수단으로 악용하려는 사태"가 걱정스러워서다. 이들은 교과서로서 기본 요건과 수준을 갖추지 못한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를 교육부가 무리하게 감싸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제 식민 통치, 친일, 독재를 미화하고 정당화한 왜곡된 기술"을 교육부가 추인했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 "교학사 교과서는 수구 종북…거기에 국민은 없다" / "박근혜 둘러싼 '소통령'들, 제 무덤 파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정부 여당, 보수 언론, 뉴라이트의 이념 공세라고 이들은 밝혔다. 정부의 과도한 간섭은 "전체주의적 통제를 위한 전초 작업"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보수 언론과 수구 세력, 뉴라이트는 맹목적으로 좌편향 낙인을 찍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서술하고 독립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평가하고 독재와 인권 탄압을 비판하는 것을 좌경, 용공, 종북으로 매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는 정부 여당이 앞장서 한국사 교육을 이념 공세의 도구로 활용하겠다고 나서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역사 교육이 이념 통제를 위한 수단일 수 없습니다."

서중석 전 교수는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은 사실상 정부 홍보 수단으로 역사를 활용하고 현대사를 반공 교육으로 일원화하는 게 대단히 강했다"고 말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이뤄진 근현대사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국정 교과서 체제에서 벗어났는데, 일각에서 이를 되돌려 역사를 다시 권력의 도구로 만들려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 전 교수는 이를 위해 "수구 냉전 세력이 역사학계와 (기존) 교과서 편집자들을 좌파, 종북, 심지어 남로당식 사관이라며 몰아치고 있다"며 "이것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와 자유의 문제에서 굉장히 어려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걸 이야기해준다"고 진단했다.

▲ 원로 한국사 학자들이 12일, 역사 교육에 대한 권력의 개입을 규탄하는 기자 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교학사 사태와 국정 교과서 회귀 움직임, 박근혜 정부 역사관의 상징적 표현"

박근혜 대통령이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 대통령이 교학사 교과서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역사 문제와 관련해 그동안 보인 태도가 이 사안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안병욱 전 교수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선 발언하지 않는 것이 박 대통령의 특성인 것 같다"고 운을 뗀 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역사를 파괴하고 망치는 정책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안 전 교수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개의 판결이 있다'고 한 박 대통령의 후보 시절 발언과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 회복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하며,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역사에 대한 일련의 간섭과 수준 이하의 교학사 교과서 검인정 통과" 등의 일이 벌어진 것도 그 연장선상이라고 지적했다. "검인정에 제출될 수도 없는 책을 편법을 동원해 끝내 검정을 통과시키고,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의 책을 국정 교과서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현 정부 역사관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안 전 교수는 "6월항쟁 전 교수들이 성명을 발표할 때 가장 많이 참여한 게 사학과 교수들"이라며 "장기 집권을 획책하는 쪽은 학계에서 가장 껄끄러운 집단이 한국사 쪽이라고 보고,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집요하고 치밀하게 역사 전쟁을 벌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이화 전 석좌교수도 2008년 뉴라이트 단체인 교과서포럼에서 <대안 교과서>를 내자 박 대통령이 높이 평가한 일 등을 상기시키며 "이런 분위기를 김무성 의원이나 교육부가 잘 파악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역사 문제 등을 이유로 일본과 정상 회담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친일 미화 논란을 일으킨 교학사 교과서를 통과시키는 건 박근혜 정부의 모순 아니냐고 지적했다.

원로 학자들은 "이번 파동이 검정 제도 때문에 발생한 문제인 것처럼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이어 유신 독재 시절 "전체주의적 획일화 교육의 폐해"를 상기시키고, "다시 국정 교과서를 통해 정권의 입맛에 맞는 한 가지 역사 해석만을 획일적으로 주입하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망발"이라고 규탄했다. 검인정 체제에서 국정 교과서로 돌아가는 건 명백한 퇴행이며, 검인정 체제에서 자유 발행제로 나아가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조광 전 교수는 "본래 국정 교과서가 지향하는 건 국가 이념의 보편화"라며 "그게 통용되는 건 전체주의 때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국정 교과서로 돌아가자는 것은 사회의 지향점을 전체주의에 두어야 한다는 것과 통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조 전 교수는 "그런 측면에서 국정보다 검인정이 우월하고, 많은 국가에서 검인정보다 자유 발행제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만열 전 교수는 일본과 역사 교류를 하던 때의 경험을 소개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지적하면 '당신들은 아직도 국정 단계 아니냐. 그러면서 어떻게 검정 체제인 일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수 있느냐'는 답이 돌아오곤 했다는 것이다. 이 전 교수는 "당장 자유 발행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자유 발행제로 가는 것이 추세이며, 국정 교과서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박근혜 정부, 국편 등을 선전 홍보 기구로 만들고 있다"

원로 학자들은 교학사 교과서 사태를 정부가 수습해야 하며, 국정 교과서 부활 등을 통해 한국사 연구와 교육을 이념 대립 도구로 악용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국사편찬위원회(국편) 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등 역사 관련 주요 학술 기관의 책임자로 "역사관에 문제가 많은 어용 인사들을 임용"했다고 질타했다. 국가의 근간이 돼야 할 학술 기관임에도 "시류에 영합한 인사들을 들러리로 세워 선전 홍보 기구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다.

유영익 국편 위원장은 국민에게 쫓겨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예찬하는 인사로 꼽히며,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친일 미화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원로 학자들은 "잘못된 인사를 시급히 바로잡아 학술 기관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편은 문제투성이인 교학사 교과서를 거르지 않아 이번 파동을 불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 강만길 전 교수는 국편에서 일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국편이 교과서에까지 간여하는 건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강 전 교수는 "지금은 왕조 시대가 아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가 역사를 편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국가는 자료만 편찬해 학자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편 위원장을 역임한 이만열 전 교수는 "국편이 해방 이후 한국사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한다"면서도 "MB(이명박) 정권 들어 국가가 아니라 정권에 예속되는 일이 여러 번 있었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국편이 대단히 곤혹스러운 처지가 된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윤경로 전 교수는 기자 회견의 핵심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교학사 교과서는 자격 미달이다. 이걸 빌미로 국정 교과서로 돌아가려 한다면 국민적 저항을 받을 것이다. 이걸 전하려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