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수 경제 블로그

[스크랩] 거품붕괴 후의 대한민국 2

일취월장7 2011. 9. 15. 14:40

사회 정의와 도덕적 이유를 명분으로 거품붕괴를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거품이 붕괴되면 경제적 약자일수록 더 큰 피해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창한 명분이 아닌 이익을 말하고 싶습니다. 거품붕괴는 사회적 약자에게 이익이 됩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이익이란 개념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이익만이 이익은 아닙니다. 사회, 문화적, 정치적 이익도 이익입니다. 아주 큰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후에 우리와(자식들)에게 매우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계층이 고착화된 사회이거나, 그에 준하는, 계층이동의 역동성이 거의 상실된 사회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회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쟁의 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경쟁의 출발선을 긋는데 부모가 관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너무 커졌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의 배후에는 부동산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능력보다 할아버지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계층이 고착화된 사회는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거품의 붕괴는 모두는 아닐지라도 상당수의 사람들의 출발선을 같게 만들어주거나 엇비슷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새로운 경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른바 “리셋”이죠.

 

그럼 진짜 부자는 어떻게 되느냐고요? 그들이 붕괴에 따른 이익을 모두 거머쥐면 어떡하느냐고요?

 

그건 여러분들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상항이 그리되면 한줌밖에 안 되는 그들은 고립될 것입니다. 고립되면 죽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립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까지 고립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노 정권 시절의 이른바 “시장주의자”임을 자처했던 이들의 지지가 여전히 굳건하기 때문입니다. 즉, “토건동맹”에 포섭된 적지 않은 사람들의 지지 때문입니다.

 

이들은 노 정권 시절 “시장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정부는 개입하지 말라!”고 목청을 높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이들 중에 더 이상 시장을 말하는 자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이 믿는 유일한 동아줄은 “정부개입”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자기 이해에 따라)언제든 과거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의 판단에 우리 모두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도 이들 중 상당수는 생물학적, 사회적 수명이 그리 길게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은 젊은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의 각오가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원칙이 무엇인가가 정말로, 정말로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취지로 전에 올렸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 제 주장에 대한 최소한의 근거 역할을 해줄 것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거품이 붕괴하면 대한민국이 곧 망할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거의 협박 수준입니다.)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거품의 붕괴가 대한민국을 ‘회춘’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보다 젊고 역동적인 한국사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붕괴는 대한민국을 한 단계 더, 질적으로 발전시켜주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국사회에 “제 1차 토지개혁”에 준하는 거대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거품의 붕괴는 낡은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제 2 차 토지개혁”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불공정한 질서를 강요하는 한국사회의 기득권이 거의 예외 없이 부동산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품이 붕괴되면 분명 어려운 시기가 일시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우리가 지혜롭게 선용만 한다면 분명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가능한 사회도 다시 올 것입니다.

 

“파괴 없는 창조는 없습니다. 파괴 없는 발전도 없습니다.”

 

아무리 투기꾼들이라 할지라도 위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그들이 그처럼 갈망하는 재건축이 가능하려면 우선, 낡은 아파또를 박살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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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토지개혁에 성공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 가운데 토지개혁을 그토록 신속하게 실행한 사례는 흔치 않다. 한국과 대만 정도다. 양국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토지개혁 과정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냉전시대 동아시아에서 안정적인 반공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농민의 지지가 필요했다. 다른 하나는 양국이 ‘동아시아의 기적’으로 불리는 압축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토지개혁의 성과가 산업화의 길을 열었다.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토지 귀족의 이해는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았을 것이며, 토지 문제에 발목이 잡혀 사회·경제적 불안이 지속되었을 것이다.

 

 

토지개혁에 성공한 몇 안 되는 경우

 

전통사회에서 토지는 단순히 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분을 의미하고, 권력을 의미한다. 토지로 얽힌 오래된 질서를 바꾸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다. 한국은 어떻게 토지개혁을 신속하게 할 수 있었을까?

 

한국의 토지개혁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무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토지개혁은 해방 정국의 시대적 과제였다.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지만, 뿌리 깊은 지주-소작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신속하게 추진됐다. 소련 군정의 ‘인민민주주의 혁명론’, 식민지 시기 급진적 농민운동의 경험, 그리고 농민들의 오랜 열망이 결합된 결과였다. 북한의 지주들은 동유럽처럼 저항을 선택하기보다는 남쪽으로의 탈출을 선택했다. 이른바 ‘월남’ 현상이다. 북한의 신속한 토지개혁은 남쪽에 압력으로 작용했다. 토지개혁을 남한에서는 농지개혁이라고 부른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3월27일 ‘농지개혁안 실시에 관한 건’에서 밝힌 취지는 “농민들에게는 농지를 제공해 자작농으로 육성하고, 지주들은 보상과 적산불하 등을 통해 산업자본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역사의 경로에서 보면 농지개혁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농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근거였고, 중·장기적으로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입구였다. 농지개혁으로 전근대적 지주계급이 해체되었고, 산업자본이 형성되었으며, 그 결과 경제 근대화의 기초가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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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받거나 산업역군이 된 농민의 자녀들

 

농지분배 사업은 전쟁이 끝나고도 몇 년이 흐른 1957년 말에 가서야 겨우 완료됐다. 지주계급에게는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전통적 지주계급을 해체했고, 촌락의 봉건적 질서는 무너졌다. 농민 역시 승리자는 아니었다. 직접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난한 소작농은 가난한 자작농이 되었다. 신분적 질서는 사라졌지만, 소작의 뿌리 깊은 관행은 변형된 형태로 잔존했다. 1960년 농업센서스에 따르면, 여전히 소작농이 61만 호 존재하고 그것은 총농가의 26.4%에 달했다. 농민은 농지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세농으로 남았다.

 

긍정적 측면도 있다. 농지개혁은 한국 사회가 전통적 농업국가에서 현대적 공업국가로 전환하는 길을 열었다. 신분질서에서 해방된 농민의 아들딸들은 교육의 기회를 누렸고,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양질의 노동력, 즉 산업역군이 되었다. 지주들의 조직화된 이해관계가 부재한 것은 민주화의 길에서 분명 축복이었다.

 

그러면 농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지주계급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상상력의 실체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이 제공하고 있다. 토지가 아니면 죽음을. 20세기 초 멕시코의 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외침이다.

 

그로부터 80년이 흐른 1994년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에서 사파타의 후예들(사파티스타)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의 첫 번째 요구사항이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토지 문제는 여전히 라틴아메리카의 미래로 가는 발목을 잡고 있다. 브라질은 또 어떤가? 2005년 기준으로 여전히 대농장 소유주 1.6%가 전체 농지 면적의 53%를 차지하고 있다. 무토지 농민들의 좌절과 분노는 브라질 정치가 넘어야 할 벽이다. 그들은 현대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토지개혁에 실패했다. 그동안 땅을 가진 대농장주는 권력을 갖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토지 없는 농민들은 임금 노동자로 살거나 도시로 쏟아져나와 거대한 빈곤 지대를 형성했다.

 

토지 없는 농민들의 열망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 정권의 집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농민 출신인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정권은 대농장 소유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있고, 브라질의 룰라 정권 역시 무토지 농민 문제를 풀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토지 문제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토지개혁 실패한 남미·필리핀의 사례

 

토지 문제에 얽혀 있는 국가가 어디 라틴아메리카뿐이겠는가? 필리핀의 사례 역시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1950~60년대만 하더라도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부유하며 교육 수준이 높은 국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1986년 시민혁명으로 코라손 아키노 정권이 들어섰지만, 저성장과 경제 불안이 지속되고 있다.

 

필리핀의 정체는 무엇 때문일까?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그중에서 토지 문제가 핵심이다. 필리핀의 토지 소유 구조는 지주-소작 관계가 특징적이며, 대토지 소유가 압도적으로 많다. 16세기 스페인의 침략 이후 1946년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기까지 400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남겨준 유산이기도 하다. 20세기 독립 이후 몇 번의 토지개혁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를 장악한 지주계급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필리핀 현대사의 사회·경제적 불안정의 배후에는 극단적 토지 소유의 불균등이 배회하고 있다.

 

한국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어두운 현대사의 터널을 걸었을 것이다. 물론 라틴아메리카와 필리핀의 사례를 곧바로 한국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역사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랜 식민지 경험이 있고, 현대사에 초대받지 못한 원주민이 존재했으며, 플랜테이션 농업이 이루어지는 지형적 차이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 역시 오래된 신분제도를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비록 플랜테이션이 아닌 소농 중심의 농업 구조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치·사회적으로 미칠 부정적 유산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아 농촌 사회의 신분적 질서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전후 한국 사회의 특징인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가능했을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작농의 자녀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소작농이나 도시 빈민의 운명을 거스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분 세습과 아울러 교육과 복지 분야의 양극화는 지금 우리가 겪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벌어졌을 것이다.

 

반면 정치적으로 토지 귀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지주의 정당은 필리핀 사례처럼 민주화가 이뤄졌더라도 토지제도 개혁에 적극적으로 저항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돈과 권력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적 발전을 기대하겠는가. 경제적으로도 토지 귀족은 지대 추구를 우선한다. 산업자본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되었다면 수출지향형 산업화 대신 라틴아메리카의 수입대체형 산업화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세계적 명품을 소비하는 소수의 특권층과 구매력이 없는 다수의 빈곤층이라는 양극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내수산업이 발전할 수 있겠는가.

 

극단적 양극화와 계급 갈등 불렀을 것

 

사회적으로 일제강점기 급진적 농민운동의 전통을 고려해볼 때, 계급 갈등은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다. 냉전 반공주의의 강압 체제에서 사파타의 후예들이 나타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토지 없는 농민들의 분노는 ‘끊임없이 좌절하는 급진주의’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것은 현대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토지개혁은 전쟁이라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전반적으로 지주계급의 해체는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농업과 농민의 관점에서 보면, 토지개혁이 곧바로 농민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의 농업은 불균형 발전과 개방의 물결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농민이 웃는 날은 언제쯤 올까?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출처 :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글쓴이 : 원성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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