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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의 '꼼수'를 고발한다"

일취월장7 2011. 9. 1. 18:43

"한국 드라마의 '꼼수'를 고발한다"

[모 피디의 그게 모!] '한예슬의 난'이 남긴 것 : <3> 배우와 피디

기사입력 2011-09-01 오후 4:09:35

- 현직 피디가 말하는 '한예슬의 난'

<1> 스타 시스템
<2> 제작사와 방송사

부당한 거대 권력이 해체되는 모습은 언제나 찡한 감동을 준다. 방송국이라는 거대 권력이 정의롭고 창의적인 주체들에 의해 해체되어 정당하게 분배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처럼 험한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의 과잉 노동과 드라마 질의 저하라는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별다른 권력이 없는 개별 창작자들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면 방송국과 제작사의 방관 혹은 횡포를 벗겨내고 새로운 제작 시스템을 정착시킬 수 있을까? 배우는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힘 없는 개별 창작자일까? 그들의 보이콧은 이곳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방송국, 혹은 제작사가 개과천선하면 일거에 이 부조리들이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현실의 복잡함과 섬세함을 외면하는 것이다. '한예슬의 난'에서 있었던 '배우 대 연출'의 대립구도를 보자. 더 이상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연기)'할 수 없다는 것이 표면에 드러난 이유였다. 그리고 배우의 입장에서 이는 무척 타당하다. 그런데 노동 환경은 이 대립의 갈등 요소가 될 수 없다. 더 이상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연출)할 수 없다는 마음은 연출이 더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갈등할 사람들이 아니라 연대해서 문제를 해결해야할 동료다.

그런데 그 연대가 왜 이루어지지 않을까?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제대로 지목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와 대립구도를 만들어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명확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모두들 명확히 알 수 있는 자신의 이해 관계에만 충실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대상에게만 불만을 토로하게 된다. 적은 형체가 없고 동료도 식별이 안 되는 안개 속의 전투다.

그렇다면 감지되는 위협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너무 긴 러닝타임이다. 월화수목 미니시리즈 시간대를 기준으로 하면 회당 70분, 일주일에 2회 방송이다. 총 140분. 일일연속극은 사정이 좀 낫냐고? 40분씩 다섯 편이면 200분.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다. 주말 연속극이나 되야 70분보다 좀 짧을까, 대체로 한국드라마 장르는 작가, 배우, 감독, 스태프들에게 일주일에 장편 영화 한 편에서 두 편에 육박하는 분량을 채워내기를 요구한다. 그 이유는 러닝타임이 길수록 광고를 많이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법에서 광고량은 러닝타임의 10%를 붙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우리의 드라마들은 동일한 프라임 타임대에 편성되는 경우가 많다. 러닝타임이 짧으면 바로 상대사로 채널이 돌아가 라이벌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올려주게 된다. 따라서 '상대사보다 조금 일찍 시작해서 상대사보다 조금 늦게 끝나는' 편성이 모두들 알고 있는 편성 상의 '꼼수'다. 드라마가 '더 길게, 더 자주' 하는 것이 한국 시청자를 대상으로 시청률을 올리는 방법으로 지목되고 거기에 광고수입도 발맞추어 연동하니 드라마는 그대로 늘어나게 된다.

감지되는 두 번째 위협은 생방송 제작이다. 이는 드라마의 퀄리티 뿐만 아니라 제작진의 건강, 사고의 위험을 불러일으킨다. 생방송 제작은 제작비 절감 필요와 참여하는 주체들의 의견조율의 어려움 때문에 생긴다. 노동권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렇게 잠 못자고 일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정해진 방송일과 방송 분량을 그대로 둔 채로 노동권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제작일수를 늘려야 합리적인 노동환경에서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데, 이는 제작비의 문제다. 제작비를 늘린다해도 드라마 제작의 사행적 성격 때문에 스타 배우와 스타 작가의 계약금만 높아지기 일쑤다.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의 이해관계를 중재하다 보면 '이러다간 방송 못 나간다' 정도의 위험이 느껴지지 않고서야 해결이 나질 않는다. (이전 칼럼 참고)

그래서 늘 노동의 관점에서 드라마 제작 현장을 접근하는 일은 폐에 문제가 있는 사람의 가슴에 빨간약을 발라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꼴이 된다. 결국 '편안한 노동 환경'이라는 같은 파이를 두고 누가 더 많이 가져가느냐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 드라마 제작 시스템은 연출자, 배우, 스태프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다른 곳에 있는 승리자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방법은? ⓒ뉴시스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유주의 경제 정책에서도 만능이 아니었다. 상황에 맞는 법적 규제가 가해지지 않으면 사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자유로운 경쟁은 독점과 빈부격차로 인해 공동체를 붕괴시킨다. 드라마 제작 환경 또한 그러하다. 이 게임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당면 과제는 '건강한 환경'이나 '공존'이 아니라 '이기적 생존'이다. 지금 상태에서는 자정작용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시금 이 제작 환경을 야기한 방송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외주 제작을 장려하기 위한 규정을 두었을 때처럼, 드라마 제작 환경의 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는 규정 또한 두어야 한다.

필요한 첫 번째 규정은 러닝타임에 대한 규정이다. 방송 편성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미니시리즈와 연속극의 주당 편성 시간의 총계의 상한선을 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140분인 미니시리즈의 주당 방송 시간을 최대 100분으로 줄인다면 시청자는 회당 50분짜리 주2회 미니시리즈, 혹은 주1회 100분짜리 미니시리즈를 볼 수 있게 된다. 주당 20분의 감축은 촬영일 2일 정도를 감축할 수 있는 분량이므로 현장의 부담은 훨씬 줄게 된다. 대본 또한 분량을 채워넣기 위한 씬을 좀 덜 써도 된다.

다만 이 경우, 20분에 해당하는 광고 2분도 줄게 된다. 그만큼의 수익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 드라마 장르에 한해 중간광고를 허용한다면 역시 극복할 수 있다. 러닝타임을 줄이되 광고 유치는 현황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각종 간접광고 때문에 불편해지는 씬들을 줄일 수 있는 이중의 효과도 지닌다.

이렇게 러닝타임을 줄이면서 수익 확보도 유지할 수 있게 한다한들, 드라마 제작의 사행성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결국 제작환경 개선은 공염불이다. 선투자 개념으로 제시되는 스타 배우와 스타 작가의 개런티에 대해 시장 규모에 맞는 샐러리 캡을 두면 어떨까. 예를 들어 배우의 경우, 주연급 4명의 출연료 총합이 5천을 넘지 못하게 한다면 자연히 무리한 캐스팅은 줄어들 것이고 스타 배우에 집중되는 몸값이 다른 배우에게 나눠지는 효과도 있게 될 것이다. 작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인들에 대한 적절한 작가료의 지급동시에 스타 작가에게 몰리는 지나친 작가료를 제어할 수 있도록 지급체계에 대한 제한이 들어가야 한다.

러닝타임 제한, 수익 확보, 분배 시스템 재정립. 이것은 추상적으로 방송국을 욕한다고, 제작사를 욕한다고, 배우나 연출을 욕한다고 해결되는 것들이 아니다. 드라마 제작 환경이라는 생태계에서 이들은 적자생존을 위해 달리는 경주마들일 뿐이다. 그리고 각각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여 숲을 보는 사람도 드물고, 숲을 본다해도 그것을 적절하게 언급하기도 어렵다. 현재 드라마 제작진들이 내던져진 환경 또한 이러저러한 방송법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생태계의 정화를 위한 새로운 법적 체계를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예슬의 난'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바가 있다면 악마의 시스템 속에서 서로를 지목하며 싸워봤자 스캔들 밖에 되지 않는다는 슬픈 사실이다. 악마의 시스템은 그 시스템 안에서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나의 승리인 것이 아니라, 모두의 이해관계에 맞는 체계 정립을 요구하여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배우 대 연출'의 대립 구도가 아니라 '배우와 연출'이, 제작사와 방송사가 생존에 앞선 공존의 체계에 대한 요구를 해야 하며, 방통위는 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더 나은 드라마가 더 공들인 과정을 통해 탄생하게 하는 모태가 될 것이다.
 

/모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