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연구소

봉준호, BTS에 견주는 페이커, 미래 유망 직업 될까?

일취월장7 2020. 3. 5. 09:47

봉준호, BTS에 견주는 페이커, 미래 유망 직업 될까?

  • AhnLab
  • 2020-03-04

"봉준호·손흥민·BTS·페이커, 韓 4대 엘리트" – ESPN (미국 스포츠전문 방송)

“봉준호·김연아·BTS·손흥민·페이커, 韓 5대 국보 – 시나닷컴 (중국 유력 포털 사이트)

 

지난 2월 10일(현지 시각) 봉준호 감독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4관왕을 달성한 직후 쏟아진 해외 기사들의 제목이다. 기사 제목을 보고 봉준호를 비롯해 손흥민, BTS, 김연아까지 고개를 끄덕였다가 ‘페이커’에서 고개를 갸웃했다면 최소 30대 이상이다. 페이커가 궁금하다면 코로나19로 학교도, 학원도 가지 못한 채 집에서 스마트폰이나 PC만 보고 있는 아이에게 물어보면 된다. 공무원, 건물주에 이어 요즘 아이들의 장래 희망으로 떠오른 페이커와 그의 ‘직업’에 대해 알아본다. 

 

  

 

<그는 서울의 평범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내신 성적은 상위 10%의 모범생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집에 있는 컴퓨터로 게임을 해왔다. 리그오브레전드라는 게임이 국내에 들어온 지 1년만에 세계 랭킹 1등을 찍었을 때 메신저로 “프로 게이머가 될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선생님은 그의 중퇴를 허락하셨고, 아버지도 “공부는 언제든지 다시 할 수 있으니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팔을 걷어 부쳤다. 평소에도 “왜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하느냐”는 잔소리 한 번도 하지 않은 아버지였다. 그렇게 그는 프로 게이머가 됐다. >

 

페이커(Faker)라는 게임 닉네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프로 게이머 이상혁 선수의 이야기다. 코로나19 사태로 학원도 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아이 모습에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잔소리를 겨우 억누른다는 학부모들이 대부분인 요즘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고 게임만 하는 걸 보고 잘 한다고 칭찬해 줄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 칭찬은커녕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페이커’의 부모처럼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부모들도 조금씩 늘고 있다. 아이가 좋아하는 걸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전통적인 ‘유망 직종’이나 ‘안정적 직업’이 더 이상 유망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을 수 있다는 계산도 있다. 과거와 달리 게임만 잘 해도 웬만한 연예인이나 스포츠선수보다 더 나은 대우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도 한몫 거든다. 페이커가 독보적인 경우이긴 하겠지만 그의 연봉이 30억 원이 넘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한 물 간 줄 알았던 ‘프로 게이머’, ‘이스포츠’의 화려한 컴백

미국의 스포츠 방송인 ESPN의 e스포츠 전문기자인 타일러 에즈버그는 ‘한국의 4대 엘리트’로 봉준호 감독과 함께 페이커, 손흥민, BTS를 꼽았다. 중국의 포털 시나닷컴에서도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4관왕 소식을 전하면서 한국의 5대 국보로 봉준호, 김연아, BTS, 페이커, 손흥민을 소개했다. 페이커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한국의 4대 엘리트이자 5대 국보로 불릴까? 

 

  

▲ 프로 게이머 ‘페이커’ 이상혁 (*사진 출처: SK텔레콤 T1 홈페이지)

 

페이커, 아니 이상혁은 리그오브레전드(LOL)라는 게임의 세계 챔피언인 ‘프로 게이머’로, 일명 롤드캅이라 불리는 월드챔피언십에서 3회 우승했고 국내외 대회에서 무려 20번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에 중국 구단으로부터 100억 원 대의 연봉을 제안받기도 했다. 그가 2016년에 벌어들인 상금만 89만 달러(10억 4천만 원 상당)이고 연봉은 30억 원+a로 추정된다. 인센티브를 합치면 50억 원이 넘는다는 얘기까지도 들린다. 취업은 물론 안정적인 경제력, 편안한 주거환경을 만들기 쉽지 않은 요즘 시대에 페이커 이상혁은 젊은이들에게 그야말로 우상으로 불린다.

 

‘프로 게이머’는 스타크래프트나 피파, 카트라이더와 같은 게임(e-스포츠) 대회에 출전해 실력을 검증 받으면 프로 게임단에 스카웃되어 연봉을 받고 일하는 ‘직업’이다. 프로야구나 프로축구 선수들과 비슷하다. 선수는 경기에서 승리하고 개인기록을 목표로 하고, 이 선수들을 고용한 프로 게임단(기업)은 기업의 이미지 상승과 제품 홍보 등의 효과를 기대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 게이머는 1998년 신주영(본명 박창준)이고, 최초의 프로게임단은 IT벤처기업 청오정보기술이 발족한 청오SG이다. 프로 게이머로는 임요환, 홍진호 등이 이름을 널리 알렸다. 프로 게임단에는 현재 페이커가 소속된 SK텔레콤 T1, KTF매직엔스, CJ Entus, 공군 ACE 등이 있다. 

 

시장조사기관 Newzoo의 발표에 따르면 2018년 전 세계 e스포츠 연관 산업의 매출은 900만달러(약 1조 원)이고 2021년에는 16억 5천만 달러까지 상승할 전망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17 e스포츠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e스포츠 산업 규모는 2016년 기준 830억3000만 원이며 e스포츠 산업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생산 1637억 원, 부가가치 633억 원, 취업 1만173명으로 나타났다. 전체 게임 시장은 규모가 더 크다. 전세계 게이머 인구는 23억 명에 이르고, 전체 시장은 1349억 달러에 달한다. 2021년에는 시장 규모가 174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e스포츠대회에 대한 관심도 어느 프로 스포츠 경기 못지 않다. 지난해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리그오브레전드 월드컵’ 결승전 티켓 4만장은 1분 만에 매진됐다. 페이커가 출전한 이 경기는 전 세계로 생중계됐고 5000만명이 시청했다.

 

국내에서 펼쳐지는 e스포츠를 보기 위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도 해마다 늘고 있다. 라이엇게임즈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펼쳐진 리그오브레전드챔피언스코리아(LCK) 경기 현장에 2000여명의 외국인 관중이 다녀갔다. LCK 스프링 시즌을 찾은 해외 관객은 1160명, LCK 서머 시즌에는 1100명의 해외 관객이 직접 현장을 방문해 경기를 관람했다. 

 

이 게임을 시청하는 해외 팬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2019 LCK 스프링 정규리그를 시청한 해외 접속자 수는 55만5000명이다. 결승전은 해외에서 242만 시청자가 접속해 지켜봤다. 서머 정규리그는 47만5000명, 결승전은 240만7000명이 해외에서 관람했다. 국내 시청자의 3~4배가 넘는 인원이 해외에서 한국 리그를 시청한 것이다.

 

각광받는 직업 프로 게이머, 어떻게 될 수 있나?

이런 트렌드에 발맞춰 지난해 연세대학교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e스포츠 및 게임 콘텐츠 전공 개설에 대한 MOU(양해각서)를 체결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연세대학교는 게임 분야의 핵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e스포츠 및 게임 콘텐츠 전공을 개설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인재들이 게임 업계로 진출할 수 있는 교육기반을 마련하고, e스포츠 분야 전문 인력 양성도 함께 추진할 계획이다. 현재 국내에 e스포츠 관련 학과로는 전남과학대학교의 e스포츠과, 중앙대학교의 e스포츠 특기전형, 명지대학교의 디지털콘텐츠디자인학과 등이 있다.

 


 

프로 게이머가 각광을 받다 보니 프로 게이머가 되기 위한 사람들을 위해 게임 전략을 가르치는 사설학원까지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 최초로 정식 인가를 받은 모 학원의 경우 수강생은 1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내에 게임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은 10개 안팎. 학원 수강생은 주로 프로 게이머를 지망하는 10대들로 이루어져 있다. 

 

프로 게이머가 되기 위해서는 e-스포츠협회에서 주관하는 준프로 선발전인 커리지 매치 경기에 참가해야 한다. 토너먼트 형식으로 경기를 해서 4강에 입상하면 준프로 게이머의 자격을 얻게 되는 동시에 프로 게임단의 선수 선발에 참여할 자격이 생긴다. 연습생으로 입단해서 프로 게이머 소양교육을 2차례 받고 나면 비로소 정식 프로 게이머가 된다. 프로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공인대회에서 한 번 더 입상하면 프로 게이머로 인정받는다. 

 

프로 게임단에 소속된 프로 게이머는 주로 합숙생활을 하면서 게임 연습을 한다. 다른 프로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게임단은 감독, 코치, 팀원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들과 함께 다양한 전략을 짜고 기술을 익힌다. 게임리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최소 3개월에서 6개월에 이르기까지 예선과 본선을 거쳐 경기가 펼쳐지는데 경쟁이 매우 치열해서 소수의 프로 게이머들만 메이저 리그라고 불리는 게임대회에 진출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게임만 해도 억대 연봉…그러나 프로 게이머의 문은 좁다

프로 게이머는 짧은 순간에 빠른 판단을 내리고 적절한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빠른 두뇌 회전과 순발력이 중요한 것이다. 순발력이 중요한 만큼 프로 게이머라는 직업을 오래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대다수의 프로 게이머 연령이 20대 초•중반이고 30대가 되면 은퇴를 해야 할 만큼 라이프사이클이 매우 짧다. 

 


 

또한 소수의 프로 게이머들은 수억 원의 연봉과 인기를 누리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말 그대로 직장인의 급여에 못 미치는 생활을 해야 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표한 '2018 e스포츠 실태조사'에 따르면, 프로 선수가 될 경우 평균 연봉은 1억7600만원 정도다. 프로 게이머가 되지 못한 아마추어 게이머들은 35.7%가 연 200만원 미만을 벌고 58.9%는 한 해 소득이 전혀 없다. 물론 프로 게이머만 그런 건 아니고 프로야구나 프로축구, 연예인의 세계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프로 게이머를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인식은 많이 바뀌고 있다. 지난해 교육부가 조사한 ‘학생 희망 직업’ 결과에 따르면 ‘프로 게이머’는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이 꼽은 희망 직업 8위에 올랐다. e스포츠에 대한 저변이 확대된 탓이다. 2018년 개최된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대회에서 e스포츠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됐고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도 e스포츠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이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섣불리 뛰어들 수 없는 게 프로 게이머 시장이다. 라이엇게임즈에 따르면, 국내에서 롤을 하는 인원은 약 30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 중 프로 게이머로 활동하는 선수는 82명이다. 프로 게이머가 될 확률은 0.0027%라는 소리다. 지난해 대학수능능력시험 전체 응시자 수는 53만명. 서울대 의대 입학 정원은 135명이다. 페이커 이상혁이 "프로 게이머가 되는 건 서울대 의대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한 건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