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한국 파놉티콘 만들 '괴물 법안'이 다가온다 - 일본의 실체 알린 조선 선비 신숙주

일취월장7 2019. 8. 9. 09:16


한국 파놉티콘 만들 '괴물 법안'이 다가온다

[삶은경제] 민생법안 위장한 데이터 경제 3법 국회통과 우려


한일 경제 전쟁의 불똥이 노동자들에게 튈 우려가 다분해지고 있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가 확정된 첫 주말을 보내며 더불어민주당 원내 정책 담당 의원들이 모여 주 52시간 노동제 수정 법안을 추진한다는 소식과 300인 미만 사업장의 주 52시간 노동제 적용 시기를 1년 이상 늦추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이번 주 발의할 예정이라는 소식, 고소득 전문직을 52시간 노동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전해졌다. 

장맛비가 쏟아지자, 이때다 하며 폐수를 하천에 흘려보내는 악덕 기업주처럼,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경제 위기를 기회로 재벌, 대기업의 청부입법으로 손가락질을 받던 법안들을 득달같이 밀어붙이는 모습이다. 토론, 여론의 비난, 지지자들의 실망까지 모두 홍수처럼 쓸어버릴 일본의 경제 침략 앞에 누구보다 들뜬 자들이 여당 의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일 경제 전쟁 이슈의 수면 밑에서 이뤄지는 역주행이 놀랍다. 그중에서도 심각한 문제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부작용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민생법안으로 위장한, 이른바 '데이터 경제 3법'의 국회통과 우려가 아닐 수 없다.  

1. 정보인권 실패 국가로 가자? 바통 넘겨받은 문 정부 

21세기 인간존엄의 핵심가치라는 정보인권 보호의 관점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 프랑스 속담)'은 지난해 끝났다. 박근혜 정권이 '개인정보 비식별화 가이드라인'이란 것을 만들고 시민의 정보주권을 마음껏 유린할 때만 해도 시민 사회와 노동계는 개와 늑대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저 촛불로 세울 다음 정부는 '빅데이터 시대, 더욱 그 의미가 각별해진 개인정보보호강화'에 책임이 있다 믿었고, 광장에서 확인된 시대정신이 위의 인용부호 속 글자 그대로 문재인 정부의 대국민 약속으로 확인되자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2018년 11월 '데이터 경제 3법' 개정안이란 이름이 붙어 개인정보보호 3법 개정안이 정부안으로 민주당 소속 의원 3명(인재근, 김병욱, 노웅래)을 통해 발의된다. 놀라운 것은 법안이 그동안 미흡하게나마 시민의 정보인권을 보호해 온 핵심 장치들을 사실상 무력화하고, 기업 이윤을 극대화(물론, '일자리' 드립은 여기서도 빠지지 않았다)하는데 몰입했음이 확인됐다는 점이다. 새 정부 정보인권 보호활동을 기다리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시민 사회는 곧바로 기자회견에 나섰다(https://act.jinbo.net/wp/40024/). 

이렇게 개와 늑대의 시간은 끝나고 우리 앞에 선 권력의 실체를 확인했다. 문재인 정부는 정보주권을 지키는 충견이 아닌, 박근혜 정권의 바통을 넘겨받아 정보주권을 유린하려는 늑대의 면모를 드러냈다. 정보인권 파괴에 돌직구로 덤벼들다 저항에 직면한 전 정부와 달리 문재인 정부는 집권초기 4차 산업혁명위원회(헤커톤 이벤트)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시늉이라도 한 정도가 차이랄까? 최종적으로 나온 개정안을 보면, 양보할 수 없는 쟁점에서 시민 사회의 문제제기는 무시됐고, 기업의 입장은 대폭 수용됐다. 

2. 정보 보호는 족쇄, 데이터 경제가 좋은 것이여~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데이터 경제 활성화에 반대하는 분, 손을 번쩍 들어주시기 바란다. 당연히 아무도 없다. 세계 거의 모든 도시와 정부가 최소한 마음만이라도 4차 산업혁명으로 총진군하는 이때, 데이터 경제 활성화 법안이라니! 모두가 공감할 작명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정보 비식별화 가이드라인'이라는 난감한 작명으로 우호적 여론형성 자체를 포기했던 이전 정부와 확실히 차별화된 지점이다.  

그런데 과연 작명으로 끝날 문제일까? 정보인권의 핵심가치인 우리 국민의 개인정보보호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법률은 행정안전부가 소관부처인 개인정보보호법, 과기정통부가 소관부처인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금융위원회가 소관부처인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등 3법이다(더러는 이 세 가지 법률을 한꺼번에 '개,망,신,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세 가지 법률의 이름에 모두 '개인정보의 보호'가 들어있음은 쉽게 확인된다. 당연히 법을 집행할 정부 책임도 최소한 절반은 프라이버시 보호에 있음이 법 이름에 확인된 셈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이 3법의 정체성이 '데이터경제 활성화'에 있다고 규정한 뒤, 개인정보보호 3법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의 개정안을 '데이터 경제 3법 개정안'이라고 부른다. 민주당은 이것을 다시 민생법안이라는 프레임으로 포장해 대중에 선전한다(https://bit.ly/2yEzS5L). 법의 이름에 각인된 정부의 정보인권 보호책임이 감쪽같이 가려져 미디어를 타고 대중에게 전파됐다.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서, 정보인권의 족쇄라도 풀어야 데이터 경제가 달릴 것이라는 단순무식한 헛소리가 아닐 수 없다. 

3. 대통령님, 내 개인정보가 왜 원유가 되어야 하나요? 

데이터 경제 활성화 법안에 담긴 정부의 속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가 지난 4월 국회 4차산업혁명특위 전체회의에서 나온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의 발언이다. 이날 유 장관은 '개인정보를 활용할 수 없게 발목을 잡는 게 개인정보보호법'이기 때문에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서 '보호'라는 이름을 빼는 문제를 행정안전부와 협의하겠다고 발언(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망언)을 한다. 주무부처 장관이 정보인권보호의 책임을 발목잡기로 묘사한 것이다.  

유 장관의 이날 발언은 이미 1년 전, 판교 스타트업캠퍼스에서 열린 '데이터 경제 활성화 규제혁신 현장방문'에서 행한 문 대통령 발언의 연장선에 있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산업화 시대 석유가 성장 기반이었던 것처럼 4차 산업혁명 시대 미래 산업의 원유는 바로 데이터"라고 말했다. 여기서 미래 산업 원유인 데이터는 무엇일가? 대통령이 말한 데이터는, 와이파이를 못 잡아 울며 겨자 먹기로 쓰는 값비싼 데이터가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이 1년 365일, 24시간 풀타임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는 온갖 형태의 개인정보를 말한다. 병원, 금융, 교육, 교통, 숙박, 오락, 여행, 유흥 등 온갖 형태의 온·오프라인 거점에서 모바일 또는 신용카드를 이용해 상호작용으로 만드는 개인정보다. 

스마트폰에 들어있는 위성항법장치(GPS)는 24시간 오차범위 10미터 이내로 내 위치를 추적해 위치정보를 생산한다.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무수히 많은 렌즈들이 나를 촬영해 데이터를 만든다. 잠든 사이 스마트워치가 당신의 심박정보를 측정하고, 당신이 일어난 시간을 기록해 구름너머 어딘가에 있는 클라우드에 저장하는 바로 그 데이터가 대통령이 말한 원유다. 정유사가 채굴해서 가공 후 팔면 끝인 원유와 달리 대통령이 말한 개인정보는 헌법 17조, 프라이버시 침해금지 보호를 받는다. 기업인이 아닌 대통령 입에서 개인정보 데이터가 원유라는 말이 나왔을 때 우리는 충격과 공포를 느껴야 마땅했다. 

4. 노골적인 정보주권 파괴 의도 : 신용정보법개정안 
  
기업으로 하여금 국민 개인정보의 무한 활용과 판매를 가능하게 만들어 4차 산업혁명 선도국가가 아니라, 자칫 정보인권 실패 국가의 비전을 보여줄 법안이 바로 '데이터 경제 활성화 3법 개정안'이다. 전국사무금융노조는 이 3가지 법률개정안 세트 가운데 금융위원회가 주무부처인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하 신용정보법)에 주목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3가지 법률개정안 중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 2개 개정안은 함께 처리 되어야 실제 운용이 가능해지는 구조인데 반해, 신용정보법 개정안은 나머지 두 개정안과 독립돼 있다는 점이다. 이유는 개인정보법 개정안이 개인정보보호 컨트롤타워로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역할, 책임이 없어 유명무실한 기구라는 평가)를 설정했으나, 개인정보의 핵심정보인 신용정보는 위원회 소관업무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트린 최대 정보유출사고들이 모두 금융사의 신용정보유출사고임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라운 입법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신용정보법 개정안은 나머지 두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혼자 정무위를 거쳐 본회의를 통과하면 모든 금융사가 당장 적용할 수 있게 된다. 금융회사들이 올해부터 시행 중인 금융혁신지원특별법에 근거한 금융규제 샌드박스제도(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되면 2년간 개인정보활용 등 각종 규제를 면제해준다) 덕분에 일반 국민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개인정보의 상업적 활용에 재미(?)를 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법안 시행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해 그리 만든 듯하다. 아무튼 지난 3월 국회에서 신용정보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다룬 토론회(http://ccej.or.kr/51559)가 열렸을 때, 이날 드러난 법안의 실제 모습은 상당수 참가자들을 분노케 했다. 

5. 내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 마음대로 수집해서 신용평가

금융당국이 모든 규제(라 쓰고 개인정보보호라 읽는다)를 개혁해서 이루겠다는 핀테크 혁신. 그런데 여기서 잠깐, 핀테크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개인정보(데이터)를 최대한 활용해 은행, 보험, 증권 상품을 새롭게 구성해서 소비자에 팔겠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신한은행이 내놓은 '페이스 페이'란 서비스를 소개한다(https://bit.ly/2ZxKdfD). 스마트폰이 없어도, 카드가 없어도, 얼굴만 들고(?)다니면 오프라인 매장에서 결제할 수 있다. 내 얼굴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얻는 결제 서비스다. 괜찮은 거래인가?  

그런데, 정보인권 실패 국가의 스토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가장 먼저 보이스 피싱. 지난 해 신고 된 피해금액만 5000억 원에 육박했고, 미신고 피해액을 감안하면 이미 1조 원대의 범죄시장이 됐다는 추측이 나도는 이 금융범죄는 그동안 개인정보유출사고에 철저하게 솜방망이 처벌로 대처해온 우리 정부의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다.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노인이 범죄표적이란 선입견과 달리 20대 이상 50대까지 개인정보의 디지털 전환에 가장 적극적인 세대가 피해자의 80%에 육박한다.  

개인정보를 많이 활용하는 세대일수록 범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은 당연히 커진다. 특히 지난해만 30% 이상 피해 규모가 늘어난 상황에서 정부의 데이터 경제 활성화 법안이 통과될 경우, 금융소비자의 얼굴 데이터 정보를 비롯해 모든 활동이 데이터화되고 거래되는 상황에서 진화하게 될 범죄의 발전상은 상상조차 힘들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유통되는 개인정보를 대단히 엄격하게 관리하고 정보유출로 정보주체에게 피해를 입힌 금융회사나 신용정보회사 등 관련기관에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 처벌할 수 있어야 하지만, 정부의 데이터 경제 활성화 3법에는 관련 규정이 전무하다. 

신용정보법 개정안의 여러 독소조항 중 가장 심각한 상태로 꼽히는 것은 '공개된 개인정보'까지 동의 없이 수집, 제공하도록 한 조항이다. 내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이나 본 기고문처럼 제3자를 통해 공개한 정보를 (상대적으로 소자본 설립이 가능한) 개인신용평가회사, 본인신용정보관리회사가 마음대로 수집해 신용평가에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이제 신용정보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내가 쓰는 이 글이 내 신용등급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신중하게 고려해야하는 시대, 진정한 정보인권 실패 국가가 열리는 것이다. 도대체 정보인권 실패 국가 말고 이 법이 그리는 대한민국이 무엇이란 말인가?  

▲ 정부발 '데이터 경제 활성화 3법 개정안'은 한국을 파놉티콘 사회로 만들 수 있다. ⓒflickr.com


6. 파놉티콘에 살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직접 설계하자 
   
우리는 어떤 빅데이터 사회를 꿈꾸는가? 우리는 기업과 자본이 미디어에 뿌려대는 이미지와 정보의 무대 위에서만 빅데이터 사회를 생각해 온 것 아닐까? 저들이 보여주는 찬란한 이상의 대가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따져보았던가? 정말로 노동자가 원하고 필요한 데이터 인프라스트럭처가 무엇인지, 그것을 이용해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싶은지 함께 이야기해 본 적이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모든 재료가 나의 데이터, 나의 소유로만 지어질 수 있는 건축물을, 내 허락도 없이 정부와 기업이 자신들 마음대로 설계하고 짓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렇게라도 건축물이 잘 지어지고, 우리가 그 곳에서 편하게 살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지어진 건축물은 우리 바람과 달리 스스로 주인이라 착각하고 살아온 죄수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감시하는 건축물이 될 공산이 크다. 지금 한국 사회는 4차 산업혁명, 빅데이터 시대, 데이터 경제 같은 깃발을 휘두르며 그리로 달려가고 있다. 일본의 경제도발이 온 국민의 위기감을 최고조로 올린 이때 민생법안으로 위장한 정부의 데이터 경제 활성화 3법이 국회를 통과하게 된다면, 재벌, 대기업은 조만간 21세기형 파놉티콘(panopticon)의 감시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당장 저항해야 한다. 


지나간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오늘 일본을 넘어설 수 있다
[기고] 지금 우리가 일제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이유

필자는 최근 현재 2급 공무원 명칭인 이사관이 구한말 통감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동시에 서기관을 비롯하여 사무관, 주사 등의 공무원 명칭 역시 일제 잔재라는 점을 기술하였다(프레시안 “일제 강점기 때 공무원 직급명칭, 폐기돼야 한다”). 이에 전주시는 일재 잔재 청산 차원에서 이사관을 비롯한 공무원직급 명칭을 바꾸기로 하고, 중앙 정부에게도 건의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한 언론은 이와 관련해 이사관 명칭은 일제 잔재가 맞지만, 나머지 서기관, 사무관 등은 일제 잔재가 아니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에 따르면, 서기관 등의 명칭들은 모두 1894년 혹은 1895년 고종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제 잔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점령된 경복궁, 포로가 된 고종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군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이 내세운 동학농민군 진압은 명분이었을 뿐이었고, 청나라 세력을 조선으로부터 축출하고자 한 것이 일본 파병의 중요한 목표였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흔히 간과하고 있는 당시 일본의 또 다른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바로 경복궁 점령과 고종의 신변 확보 그리고 조선군 무장 해제였다. 


일본은 “정한론(征韓論)”의 기치 하에 1876년 강화도 침략 이후 조선 식민지화 방책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준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그 계획의 현실화에 착수했던 것이었다. 물론 일본의 최종 목표는 “조선의 식민지화”였다.

일본식 ‘갑오개혁’, 일본 식민지의 토대 구축  

당시 일본이 조선에 파병했던 총 병력은 8천 여 명이었다. 이들은 조선에 상륙하자마자 조선 정부와 전혀 합의 없이 임의로 경부 간 전선 가설을 무단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5천 명의 병력을 서울에 주둔시켰다. 이미 ‘의도’가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그 주력은 용산에 주둔했고 아현을 비롯해 공덕, 만리창 등 요충지마다 병력이 배치되었다. 한눈에 경복궁을 파악할 수 있는 북악산과 남산에는 포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7월 23일(이하 양력) 새벽에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영추문을 부수고 진입, 조선수비군을 제압하고 건청궁에서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고종을 강박해 작성된 교지(敎旨)로써 조선군을 무장 해제시켰다. 


어디까지나 일본에 종속된 친일 정권 수립이 저들의 목표였다. 일본의 준비된 계획에 따라 7월 27일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나흘 뒤에는 일본식 관료제도인 <의정부 관제안>이 가결되어 8월 13일 조선 전역에서 정식으로 시행되었다. 결국 이는 일본 식민지로 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관제 개혁’에 서기관을 비롯하여 사무관, 주사, 서기 등 새로운 관제에 의한 “순수 일본식 직급과 그 명칭”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관제(官制)들이 ‘일제 잔재’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일제 잔재일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일제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까닭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구한말의 이른바 ‘갑오개혁’을 전후한 역사에 대해 애매모호한 평가가 많다. 여전히 갑오개혁이나 개화파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평가가 적지 않은 현실이다. 


필자는 1988년 김종규라는 필명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펴낸 바 있었다. 그 책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동학농민세력을 중심으로 일본에 반대하는 역량이 모두 연합하는 방안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개화파가 본질적으로 지닌 친일적 성격을 밝히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은 당시 상당한 반향이 있었는데, 그 무렵 어느 평론지에서 서중석 선생이 그 책을 언급하면서 좋은 평가를 내려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지나간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 한 세기 전에 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에서 행했던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평가해야 한다. 당시의 과오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도금’ 수준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일본헌법은 제1조에서 제8조까지 온통 ‘천황’에 할애하고 있으며, 정치는 신도(神道)라는 토템과 강인하게 결합되어 있다. 민주주의와 너무 거리가 멀고, 충분히 ‘봉건적’이다.  
오늘 우리가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자 하는 이유는 비단 일제 잔재의 청산 그 자체에만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더 커다란 의미는 바로 일제 잔재 그것에 내재하고 있는 반민주성과 봉건성을 청산하는 데 존재한다. 우리가 진정 일제 잔재를 청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일본이 지금 벌이고 있는 ‘망동’도 넘어설 수 있다.  



아베를 오만하게 만든 박정희·박근혜의 원죄
[기고] '식민 지배 사죄'를 '돈'으로 대신 받았으니

며칠 뒤면 광복절이다. 우리 겨레가 일제의 국토 강제점령과 억압, 수탈 때문에 35년이 넘도록 신음하다가 해방을 맞이한 날이다. 그 뜻 깊은 국경일을 앞두고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오만한 언행을 비판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제강점기 (조선)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신일철기업[옛 신일철주금])이 배상해야 한다"고 최종 확정 판결한 것이었다. 그 판결에 따라 여운택 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1억원씩 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피고인 신일철기업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는데, 엉뚱하게도 아베가 그 판결이 나온 지 9개월이나 흐른 지난 7월 1일부터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 수출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한국 산업의 숨통을 조이려는 기도가 분명해 보였다. 아베는 "한국이 한일 청구권협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일방적으로 하면서 국교 정상화의 기반이 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 (한국 정부는) 국가와 국가 간 관계의 근본에 관련된 약속을 우선 제대로 지켰으면 한다"고 '경고'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 2일 아베는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우대국)에서 한국을 빼겠다"고 발표했다.


바로 그날 오후 문재인 대통령은 긴급 각료회의를 열고 "이번 조치는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명백한 무역보복"이라고 규정하면서 "'강제노동 금지'와 '3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와 국제법의 대원칙을 위반하는 행위", "일본이 G20 회의에서 강조한 자유무역 질서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세계경제에 이기적인 민폐행위'라는 강도 높은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국교가 수립된 뒤 54년 만에 두 나라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여기서 일본 정부 수반인 아베가 왜 이렇게 한국을 오만불손하게 대하는지, 그 원인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박정희와 박근혜가 대통령 자리에 있던 때 '국가원수' 자격으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 저지른 온갖 만행과 약탈, 착취에 대한 책임을 엄중하게 묻지 않고 오히려 일시적으로 경제적 대가를 받아내는 데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주권자들이 '굴욕적 한일회담'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데도 위수령을 발표하고 대학 문을 닫은 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어제의 원수라 해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일본 사람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민복리를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라는 것이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로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었지만, 심각한 문제는 일본 정부의 '조선 식민지배'에 관한 사죄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딸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었다. 박근혜는 대통령 재직 중인 2015년 12월 28일 일본 정부와 '위안부 합의'에 서명했다. 일본이 10억엔(약 108억원)을 출연해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에 사용하도록 '화해·치유 재단'을 설립하고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진정으로 사죄한다'는 내용이었는데, 2016년 10월 총리 아베는 '사죄 편지를 써서 피해자들에게 전달할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재단은 일본이 출연한 10억엔으로 위안부 피해 생존자 47명 중 34명, 사망 피해자 199명 중 58명의 유족에게 '치유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다수 피해자들이 재단 해산을 요구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25일 미국 뉴욕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하면서 아베에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국민의 반대로 화해·치유재단이 정상적 기능을 못하고 고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사실상 재단 해산 방침을 통보했다.  


박정희와 박근혜가 일본 정부로부터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를 단 한 마디도 받아내지 못하고 '돈'으로 화해한 것이 오늘날 아베가 한국에 대해 오만방자한 언동을 계속하는 행태의 뿌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경제전쟁’ 자체가 불필요한 ‘국가 전략 시프트’ 필요
  • 박광기 뉴패러다임미래연구소 소장(前 삼성전자 부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09 14:00

[기고] 경제·안보의 홀로서기가 한·일 경제전쟁의 진정한 승부처

 일본 정부가 반도체,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핵심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에 이어 우방국에 대해 개별품목 수출 허가를 면제해 주는 백색국가 제도에서도 한국을 제외했다. 이제 일본은 식료품과 목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제품에 대해 대(對)한국 수출규제를 실시할 수 있게 된다. 한국 기업은 주력 제조 수출산업 전 분야에서 제조공정에 차질이 발생하거나 거래처와의 납기 신뢰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생겼다. 위기다.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려면 현 상황을 ‘경쟁 관점’에서 보지 말고 ‘운용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일본과의 경쟁에서 답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강점을 운용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 같은 궤도에서 일본과 경쟁할 것이 아니라 궤도 자체를 달리해 ‘경제전쟁’ 자체가 불필요한 환경으로 옮겨가는 국가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무엇이 필요할까. 한국을 가두고 있는 ‘세 개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저성장, 샌드위치 성장모델, 동북아에 갇힌 국가 위상에서 벗어나야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다.

먼저 ‘탈(脫) 저성장’이다. 지금 한·일 경제전쟁에서 필요한 건 기술경쟁에서의 극일(克日)이 아니다. 저성장 탈출이 본질이다. 이미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일본의 최고 이슈는 경제 부활이다. 한국 역시 주력산업의 쇠퇴로 십여 년간의 저성장 기조에 경제 규모가 수축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금 한국의 저성장은 일본 부품 공급에 문제가 생겨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일본에 싸워 이긴다고 해서 경제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누가 먼저 경제력을 더 키워 4만 달러, 5만 달러 사회로 가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 나는 게임이다.

한국 가두고 있는 세 개의 감옥에서 탈출하기

기술 자립과 국산화, 수입처 다변화 노력은 지금껏 안 해 오지 않았다. 초격차를 외치며 지금껏 해 왔고 성과도 있었다. 계속해야 할 일이지만 현실을 직시하면 모두 본질적인 해법은 될 수 없다. 자칫 일본 대응에 매달리다 정작 일본의 보복 이전부터 수축 중인 주력산업을 되살릴 향후 2~3년의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한국 경제가 탈피해야 할 감옥은 ‘샌드위치 성장모델’이다. 일본 소재·부품·장비의 의존도가 아니라 중·일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의 상품 제조 수출형 성장모델에서 벗어나는 것이 본질이다.

이번 일본의 수출규제는 한국 주력 제조산업 경쟁력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반도체 메모리는 세계 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지만 생산 장비와 소재는 국산화 비율이 각각 17%, 50%에 불과하다. 자동차산업도 전기자동차나 친환경차의 경우 일본 기술 없이는 만들 수 없다. 세계 1위 조선산업은 고성능 친환경 도료의 90% 이상, 건설 분야에서는 미니 굴착기의 90%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에 241억 달러 규모의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부품소재 수입이다. 일본이 몽니를 부리면 주력산업 대부분이 타격을 입는 구조다. 우리 경제구조가 반도체, 화학 등 기존 주력산업은 물론 수소차, 2차 전지 등 미래 산업도 양산 제조업을 주력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한 일본 기술의 의존도를 줄이기는 쉽지 않다. 이번 사태로 우리는 중국의 제조굴기, 보호무역, 선진국과의 기술격차 등으로 동북아 분업구도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버린 한국의 ‘상품 제조 수출’이라는 성장모델 자체가 한계점에 이르렀음을 직시하게 됐다.

양산 제조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한·중·일의 국제 분업 구도가 같은 구조로 영원히 유지될 수는 없다. 후발국의 출현에 따라 분업 역할을 계속 진화시키는 국가만 살아남는다. 이제 우리의 경제 체질도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 샌드위치가 된 양산 제조 중심에서 후발국 대비라는 한 단계 위로 올라가야 한다. 일본도 완성품 제조가 한국으로 넘어가면서 핵심부품·소재·장비 중심의 고부가 산업으로 바뀌지 않았던가. 더욱이 핵심부품과 소재를 국산화하려면 양산 제조에 매여 있는 자본과 인력을 해방시켜야 연구개발 여력을 키울 수 있다. 우리만의 강점을 살려 상품 제조 수출을 대체할 새로운 성장모델을 찾아 ‘탈 샌드위치’하는 것이 본질적 해법이다.

우리 실력이 일본 대비 부족하다고 자학할 필요는 없다. 실력을 어떤 잣대로 바라보느냐의 문제다. 소재 분야 핵심기술이라면 우리가 부족하겠지만 우리만의 강점, 실력은 따로 있다. 이를 찾아 활용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진정한 극일은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강점으로 일본 기업이 할 수 없는 분야를 찾아 그 일을 해낼 때 자연적으로 이뤄진다. 우리 경제가 성장기에 있을 때는 극일을 목표로 뛸 수 있지만 경제가 성숙기에 접어든 지금 극일을 목표로 우리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하수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가 유념해야 할 키워드는 ‘탈 동북아’ 국가 위상이다. 중·일에 영향받는 동북아의 한국이 아니라 경제·안보의 홀로서기가 가능한 세계 속의 한국으로 거듭나는 것이 본질이다.

경제 규모 세계 12위로 성장한 한국은 지금 미국·중국·일본으로부터 홀로서기를 강요받고 있다. 강대국으로부터 안보·경제적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해법을 찾을 때까지 강대국의 압박은 계속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은 정치·외교적 중립 위상을 확보하기 이전에 중립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홀로서기 가능한 ‘세계 속 한국’으로 거듭나야

이를 위한 선결조건은 국가산업과 기업이 특정 강대국의 시장 의존도, 기술 의존도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차별화된 산업을 구축하는 일이다. 우리 기업이 대일본 기술 의존도, 대중국 시장 의존도, 대미국 안보 의존도를 줄일 수 있어야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국가산업 경쟁력이 국제정치를 선도하는 시대다.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 중국굴기, 아베의 정상국가론, 미·중 패권경쟁의 넛크래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국면에 빠진 한국의 국가 좌표는 무엇인가? 강대국 4개국 관리에 힘을 소진할 것이 아니라 성동격서로 국제사회 다수의 개발도상국들을 끌어들여 국제사회의 신뢰 자산을 높여야 한다. 신흥국들과 산업 파트너십을 맺어 ‘국제사회 다자연대’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을 국가 좌표로 삼아야 한다.

홀로서기 국가전략으로 선·후발국의 샌드위치에서 선·후발국을 잇는 ‘글로벌 브리징 허브국’으로 포지셔닝할 수 있다. 글로벌 허브로서 한국은 신흥국의 산업 수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제품을 만들고 팔아서 국가경제를 성장시키던 단계에서 한국의 산업화 경험과 노하우를 코칭하는 산업 파트너십 성장모델로 진화하는 것이다. 한·일 경제전쟁의 진정한 승부처는 경제·안보적 자주독립 곧 홀로서기다. 한국은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일제 잔재와 수구냉전 세력의 동거
[최창렬 칼럼] 정말 극일(克日)을 하려면

최근의 불안한 변수들, 즉 러시아의 영공침범,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도발, 중국의 패권주의와 미국의 국익우선주의는 한국에겐 커다란 위협 요소들이다. 그러나 정치와 경제, 안보 등 전방위적인 불안 요인 중 일본의 노골적인 '경제 선전포고'는 일본이 한국의 우방이라는 면에서 다른 나라들의 잠재적 도발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일본은 조선을 강압적으로 병탈한 침략국가다. 한국현대사의 비극은 모두 일본이 잉태했다.  대법원 징용배상 판결과 안보를 빌미 삼아 경제보복을 감행하는 일본의 행태는 아시아를 침략하고 조선을 식민지배하면서 자행한 갖은 만행의 폭력성과 야만성, 후진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식민체제와 분단체제의 역사적 기원이 일차적으로는 일제라는 외부적 요인이겠지만, 친일의 내부적 요인 또한 흘려보낼 수 없다. 대한제국 이래 친일의 존재에 대한 담론이 다시 떠오르는 이유이다.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조선은 통일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의 의해 분단을 맞고, 전전긍긍하며 해방정국의 추이를 엿보던 남한의 친일세력은 미군정에 재빨리 편승했다.  
 
미군정은 효율적인 남한 통치를 위해 숙달된 관료와 경찰 등이 필요했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하거나 일본으로부터 수혜를 받은 자들과의 이해관계의 일치는 이 땅에 일제 잔재 청산을 원천적으로 막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분단에서 비롯된 냉전은 남한에 반공국가의 수립을 가져왔고, 친일파는 반공의 우산아래 신분을 세탁·유지하며 오히려 국가의 요직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친일과 반공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쿠데타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강화하기 위해서도 유용한 도구였다. 냉전이데올로기와 재벌 위주의 경제성장 정책은 군사정권 유지의 두 축이었고 이는 민주주의와 인권 탄압,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사회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전략물자 수출우대 국가에서 한국을 배제한 일본의 이른바 '백색국가' 제외는 안보와 경제적 적대행위에 다름아니다. 사실상의 경제 선전 포고와 다름없는 일본의 행위는 2차 대전 이후 숨죽이던 일본의 극우세력이 한반도를 둘러 싼 안보지형을 흔들고, 이를 틈타 '전범국가'에서 '전쟁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일본에게 한반도 평화와 문재인 정권의 존재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일본은 내년 한국 총선에서 극우성향의 정당이 다수당이 되고, 대선에서 보수세력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면 이를 다시 평화헌법 개정의 호기로 삼으려 할 것이다.  
 
일본은 '전쟁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의 존재가 필요하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정세에서 평화 프로세스가 불가역의 흐름으로 정착된다면 개헌의 명분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자유한국당은 북한 미사일 도발을 빌미 삼아 9·19 군사합의 파기를 주장하고 있다. 한국당으로 상징되는 수구냉전 세력도 북한을 외부의 적으로 상정하여 안보논리를 강조한다면, 신북풍을 선거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정치공학 작동의 공간이 생길 수 있다. 결국 극우세력의 집권은 한반도 안보지형을 다시 냉전시대의 긴장관계로 되돌릴 수 있고, 북미 관계도 악화될 수 있다. 정확히 일본이 바라는 구도다.   
 
해방 직후로 시계를 돌려보면 미국에게 한반도 통일은 관심 밖의 사항이었다. 1945년 9월 7일 동경에서 맥아더는 한반도 통치안에 대한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한다. 내용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하여 미군의 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졸지에 또 다시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고 패전국 일본은 오히려 미국의 보호를 받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해방 전에 수립된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동맹에서 비롯한 인민위원회는 불과 25일만 존속한 셈이다. 1945년 9월 9일 미군정청의 아놀드 소장이 미 군정장관으로 부임하면서 미군정이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9월 14일 한국의 경찰 조직은 일제 시대의 모습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제는 척결되지 않았고, 이후 이승만과 한민당 등 보수세력과 일제에 협력했던 세력은 보완적 관계로 한국 수구의 기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 벌어진 1948년 제주 4·3 항쟁과 여순 민중 항쟁 등의 역사적 배경과 진상 규명은 군사정권과 독재정권 및 보수정권에 의해서 가려지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한국에서 일제 잔재 청산의 실패와 반공주의는 역사왜곡과 개혁지체로 나타났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규명 없이 일제 잔재 청산은 요원하다. 한국 내부의 일제 잔재 청산이 전제되지 않으면 일본의 침략적 근성에 대해서 정파와 계급을 초월한 대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반공주의가 한국현대사를 규정했던 요인이라는 집단지성의 정착이 긴요한 이유이며, 우리 내부의 일제 잔재와 냉전의식을 걷어내지 못하면 극일(克日)은 불가능하다.      


일본의 실체 알린 조선 선비 신숙주

신숙주는 임금에게 남긴 유언에서까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강조했다. 그가 7개월간 일본을 두루 둘러보고 와서 쓴 <해동제국기>는 당시 ‘일본 바로 알기’의 교과서였다. 우리는 지금 일본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8월 08일 목요일

요즘 화두는 단연 일본의 무역 도발이다. 한·일 관계는 수교 후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 같아. 한국과 일본은 참으로 묘한 역사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애증의 세월이라고도 표현하지만 솔직히 애(愛)보다는 증(憎)이 더 우위에 섰다.

삼국시대 일본은 백제와 친밀했지만 신라와는 진저리가 나도록 싸웠지. 고려 말 창궐했던 왜구들은 고려 멸망의 원인으로까지 지목된다.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겪었으며 근대에 들어서는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어. 일본이라고 하면 고개부터 젓는 건 조건반사에 가까울 거야. 네가 언젠가 “이유는 모르겠는데 일본은 그냥 싫어”라고 토로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보니 한·일 사이에는 터무니없다 싶은 오해도 많이 도사리고 있어. 일본의 큰 서점마다 있다는 ‘혐한’ 코너에는 한국에 대한 어이없는 험담과 거짓말이 그득 쌓여 있지.
중국 화공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신숙주 초상. 보물 613호이다.

일본인들의 이런 모습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동시에 아빠는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지닌 편견과 무지도 적지 않다고 봐. “우리가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해주었다”라는 자긍심은 가질 수 있지만 일본이 우리가 전해준 문물로 겨우 나라꼴을 갖추고 미개국을 면했다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야. 며칠 전에는 학식과 인품을 겸비한 분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그분이 “일본의 여성 기모노 뒤에 단 방석(?)은 언제 어디서건 남자를 상대하기 위해 차고 다니는 것”이라고 말해서 기함을 한 적이 있어. 오해와 무지는 두 나라 사이에 놓인 거리를 더욱 멀고 험하게 만들 뿐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아빠는 ‘전쟁’으로까지 표현되는 최악의 한·일 관계에 즈음해서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한 이들, 서로 간에 우정을 쌓으며 이해를 넓혀 벗이 되고 동지로 남았던 이들의 얘기를 몇 주간 들려주고자 한다.

신숙주(1417~1475)라는 이가 있어. 세종과 문종의 크나큰 신뢰와 간절한 당부를 배신하고 수양대군, 즉 세조 쪽에 가담해 그를 도왔던 사람이지. 세간에서는 배신자로 일컬어졌고 “여름철 잘 쉬어버리는 ‘숙주’나물의 유래”라는 얘기도 있어. 그러나 신숙주는 여섯 임금을 섬기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당대의 명신이기도 해. 우선 그는 언어 천재였어.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류큐(오키나와)어 등 7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니까. 어려서부터 소문난 천재였는데 곤드레만드레 취해 집에 들어가서도 책을 읽는 노력파이기도 했다는구나.

1443년 신숙주는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의 서장관에 임명돼 7개월 동안 일본을 두루 둘러보고 돌아왔어. 이 경험을 바탕으로 1471년 <해동제국기>라는 책을 완성하게 돼. 일본에 다녀온 뒤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신숙주는 자신의 일본 경험과 견문을 매우 상세히 기록했단다. 덕분에 <해동제국기>는 후대의 조선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본인들도 주목하는 자료로 남아 있어. 지금도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은 한국인밖에 없다는 말이 있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도 일본을 그리 크게 보지 않았다. 1402년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보면 일본은, 큼직하게 그려진 조선 아래에 널브러진 작은 섬나라 같거든. 하지만 신숙주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상당히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어. “동해에 있는 나라가 하나만은 아니나 일본이 가장 오래되고 큰 나라라, 그 땅은 흑룡강의 북쪽에서 시작해 제주의 남쪽에 이르며, 유구국(류큐국)과 서로 접해 있고 그 세력이 심히 크다.”

이해는 정확한 인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거란다. 일본과는 지극히 제한된 교류만 해왔고 왜구들의 습격에 지긋지긋해했던 한반도 사람들은 일본을 인의를 모르는 작은 섬나라의 야만인쯤으로 대했어. 신숙주 역시 일본을 “약속 안 지키고 사나운” 오랑캐로 대하는 관점을 버리지는 못했으나 <해동제국기> 서문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지. “무릇 국교를 맺고 서로 예방하며 풍습이 다른 나라를 어루만지고 접촉할 때에는 반드시 그 정세를 알아야 예를 다할 수 있고 그 예를 다해야 마음을 다할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
1984년 조선시대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 원본(위)이 국내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들도 도리로 대하면 예를 갖출 것” 

신숙주는 일본의 정치와 경제·사회·문화에 대해 두루 기록했어.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천황’의 위상을 상세히 설명하고 일본과의 외교 시 감안해야 할 점들부터 일본인의 사나운 기질,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 숟가락 없이 젓가락만 사용하는 식생활, 일본 문자 가타가나까지 소개했지. 이를 설명하면서 그는 일본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해(하우봉 전북대 교수, ‘<해동제국기>로 본 신숙주의 일본 인식’). 신숙주 이전이나 신숙주 이후나 일본에 간 조선 사신들은 일본을 이해하기보다는 문화적 우월감에 빠지는 경향이 강했고, 성리학적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오랑캐의 나라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혔지만 신숙주는 달랐던 거야. 하우봉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어. “일본의 기이한 풍속에 대해서도 담담히 소개할 뿐 야만시하지 않았다. 이는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언급한 ‘풍습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해서는 그 실정을 알아야 한다’는 자세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일본 풍속에 대한 신숙주의 이러한 가치중립적인 태도는 각 민족의 문화적 독자성을 인정하려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심지어 신숙주는 일본 ‘천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의 연호(年號)를 그대로 써줬다는구나. 꼬박꼬박 중국 연호를 썼고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그 연호를 수백 년 동안 고수했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선비로서는 매우 열린 자세였다고 할 수 있지 않겠니. 

신숙주는 일본이 조선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어.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무술에 정련하고 배를 다루는 것이 익숙합니다. 그들을 도리로 대하면 예절을 차려 조빙하고, 그렇지 않으면 함부로 표략을 했던 것입니다.” 도리로 대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교역 상대로 대접해주고 그들이 원하는 이익을 챙겨준다는 뜻도 클 거야. 신숙주는 “교역 장소로 공식 허용했던 삼포(三浦)를 통해 입국한 일본인들을 상경시켜 국왕을 알현하는 외교 절차를 밟게 함으로써 외교적으로 조선에 복속시키고, 그 대가로 무역을 허가해주면서 삼포를 무역의 장소로 활용하는(손승철 강원대 교수, 동아시아역사넷 ‘동아시아역사인물 신숙주 편’)” 방안을 제시했어. 이는 조선의 대일본 정책의 근간이 된단다. 약탈자를 교역의 상대로 순화하고 외교를 통해 평화를 가져온 것이지.

세상을 떠나면서 임금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신숙주의 유언 역시 일본과 관련된 것이었어. “청컨대 일본과의 화친을 잃지 마소서.” 영의정을 지낸 홍윤성이 “이제 신숙주가 죽었으니 만일 일본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 나라 산천의 구부러짐과 바름, 습속의 좋아하고 숭상하는 바를 누가 알 것인가”라고 탄식했듯, 조선 최고의 일본통이었던 신숙주는 “일본을 모르게 될 때” 조선이 겪을 수 있는 환란을 내다보았을 거야. “반드시 그 정세를 알아야 예를 다할 수 있고, 그 예를 다해야 마음을 다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던 신숙주의 말은 지금도 유효할 것 같구나. 무역 도발을 자행하는 일본에 대한 분노는 지당하고 그 역사적 만행에 대한 기억은 천추의 한이다. 그런 일본에 맞서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본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가늠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일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본 전범 기업들의 반격 카드, ISDS
[시민정치시평] ISDS와 강제동원 청구권의 관계

우리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빌미로 일본이 경제 도발에 나섰다. 패소한 일본 기업들이 법원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버티자 이들의 국내 자산에 대한 매각 절차가 시작되었다. 최종 매각 결정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릴 텐데 일본 전범 기업들의 반격 수단으로 투자자-국가분쟁해결제도(ISDS: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가 유력하다. ISDS를 통하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의 집행을 막을 수 있고, 자산이 매각되더라도 손실을 보전받을 수 있다.

ISDS 사건만 보도하는 전문지 IA Reporter 도 일본 기업들의 ISDS 제기 가능성을 여러 번 언급한 바 있고, 국내 언론도 작년 대법원 판결 직후 일본 정부가 ISDS까지 고려한다는 보도를 냈다. 


그 동안 우리를 상대로 제기된 ISDS 분쟁 사건을 보면, 일본의 전범 기업들이 ISDS를 반격 카드로 꺼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ISDS가 태동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현대판 BIT의 효시는 유럽국가들이 1950년대 말부터 추진한 양자간 투자 협정이었다. 선두에는 독일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지고 해외 투자 자산을 몽땅 잃게 생긴 독일이 나섰던 것이다. 전 세계 최초 BIT가 바로 1959년에 독일이 파키스탄과 맺은 투자 협정이고, 우리나라가 맨처음 맺은 BIT의 상대방도 독일이었다. 만약 일본 전범 기업들이 우리 법원을 통한 자산 매각을 막기 위해 ISDS를 활용한다면, BIT의 정신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일본 기업들이 ISDS를 위해 기댈 조약은 2003년에 발효된 한일 BIT(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간의 투자의 자유화·증진 및 보호를 위한 협정)와 2014년에 발효된 한중일 BIT다. 이들 BIT는 전범 기업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다.  

먼저 절차의 일방성을 살펴보자.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 제2항의 중재를 통한 분쟁해결이나 일본 정부가 거론했던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한 분쟁해결은 일본이 일방적으로 시작할 수 없다. 국제사법재판소는 한일 양국이 모두 동의를 해야 비로소 관할권을 갖고 재판을 할 수 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의 중재는 중재위원회 구성에 우리 정부가 협력해야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ISDS는 일본의 전범 기업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일방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ISDS 절차 진행에 동의하지 않을 재주가 없다. 일본과의 조약을 통해 동의권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다(한일 BIT 제15조 제3항, 한중일 BIT도 같은 조항에 같은 내용을 두고 있다). 그리고 ISDS는 일본 기업만 제기할 수 있고, 우리 정부가 일본 기업을 상대로 뭘 청구할 수 있는 절차는 두지 않는다. 

다음은 내용의 일방성이다. 우리 정부는 일본 기업을 상대로 무엇을 해 줄 의무만 진다. 일본 기업은 우리나라에 대해 아무런 의무가 없다.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거나 대한민국의 법률과 규정을 잘 지켜야 한다거나 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따위의 의무는 없다. 일본 전범 기업이 ‘외국인 투자자’라는 외피를 뒤집어쓰면 우리나라를 상대로 오로지 권리만 주장할 수 있다. 이 권리에는 투자자의 ‘만능 열쇠’로 불리는 공정·공평 대우 뿐만 아니라 수용·보상(한일 BIT 제10조)이 포함되어 있다. 지금까지 전 세계 ISDS 분쟁에서 투자자들이 거의 100% 주장하는 권리가 바로 ‘공정·공평 대우’이다. 투자 유치국은 외국인 투자자를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우할 의무를 지는데, 여기에는 사법정의가 포함되고, 따라서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이 ‘공정·공평 대우’ 의무를 위반했다고 다툴 수 있다. 법원의 자산 압류, 매각 절차는 수용·보상 의무 위반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필자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 ISDS 분쟁에서 등장하는 매우 전형적인 것들이다. 

2012년 론스타의 ISDS를 시작으로 우리나라를 상대로 제기된 ISDS 분쟁에서 청구된 손해액이 117억 달러에 달한다. 불과 7년 만에 약 14조 원의 분쟁에 휘말린 것이다.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세다(대한상사중재원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처리한 1899건의 국내 중재와 국제 중재를 모두 합쳐도 규모가 4.9조 원에 불과한데 우리를 상대로 한 ISDS의 경우 건 수는 10건에 불과하지만 배상 청구액은 2배가 넘는다. 평균 배상액으로 따지면 ISDS가 453배에 달한다). 일본 전범 기업들이 ISDS를 제기한다면 이는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충격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ISDS 출구 전략을 빨리 마련해야 한다. 

마침 이낙연 총리가 7월 12일 국회 예결위에 출석해 ISDS가 “폐지돼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공식 답변함으로써 출구 전략의 큰 그림을 제시했다. 문제는 출구 전략을 구체화할 실무 부서에서 총리의 공식 답변을 개인 의견으로 전락시키고 나섰다는 점이다.

이달 초 중국에서 열린, 인구수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시아 태평양 지역 FTA인 역내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상장에서 산업통상자원부가 꾸린 우리 협상단은 국무총리의 공식답변이 나온지 한 달도 안 되어 이를 무시하고 ISDS 지지 입장을 표명 했다. 국회 예결위에서 이낙연 총리가 답변할 때 현장에 있었던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 총리 답변에 이은 후속 질의에 직접 답변을 했기 때문에, 산통부는 누구보다도 총리의 의중과 취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국제 무대에서 대놓고 총리를 무시했다.  

그 직전에는 법무부와 외교부가 반기를 들었다. 법무부와 외교부는 지난달 말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에 제출한 ISDS 개혁방안 에서 ISDS 폐기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먼 것들로 채워 우리 정부의 개혁방안을 냈던 것이다.

2012년 2월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 의원 모두를 포함한 96명의 국회의원이 세종문화회관 앞에 모여 이렇게 주장한 서한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다.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는 국내 기업과 외국 기업에 차별 없이 적용되는 공공정책조차도 사기업이 국제중재기구로 끌고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이것은 공공 이익을 보호해야 하는 양국 정부의 정책 공간을 축소하고, 공공 서비스를 보호하고 국민 건강, 식품 안전, 그리고 환경 보호를 증진하려는 국가의 권한을 무력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위험한 제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서한에 서명한 전·현직 국무위원으로는 이낙연 총리, 김부겸 전 행안부 장관, 박영선 중기부 장관이 있고,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노영민 비서실장도 동참을 했다(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명자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뿐이다). 7년 전 ISDS 폐기 주장의 근거들은 이제 폭발적인 분쟁을 초고속으로 경험한 우리에게 막연한 우려가 아니라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ISDS를 유지하려는 이해집단을 잘 통제하면 이낙연 총리가 주장했던 출구는 쉽게 열 수 있다. 더구나 당시 서한에 서명했던 의원들이 야당 대표로 있어서(심상정 정의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국회의 초당적 지지도 가능하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남희섭 소장은 참여연대 ISDS 대응 TF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