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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기업으로 생각하는 권력자들에게

일취월장7 2019. 7. 3. 11:26

대학을 기업으로 생각하는 권력자들에게

[민미연 포럼] 한국에서 학문공동체는 가능한가?


강사법이 국회를 통과해 조만간 시행될 예정이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강사보수이건만, 이것마저도 줄이려는 대학들 때문에 강사들에 대한 대규모 해고가 자행되었다. 우리는 대학을 학문의 전당, 학문공동체의 주체라고 생각해왔다. 강사해고를 둘러싼 대학들의 태도를 보면 한국에는 학문도, 학문공동체도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이 ‘학문’과 ‘학문공동체’가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임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대학 강사의 대량해고는 한국이 얼마나 부박한 사회인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20년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은 대학에서도 거셌다. 한국 대학의 기업화는 1995년 김영삼 정부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한 '세계화 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5·31 교육개혁안)이 출발점이었다. 대학 설립 준칙주의, 대학 정원 자율화, 국립대학 민영화, 총장 직선제 폐지, 교수 계약제, 등록금 자율화, 교육 시장 개방, 대학 평가 등이 도입되거나 목표로 제시되었다. 이 개혁안의 최종목표는 한국 교육을 철저하게 시장자본주의에 맞추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는 경쟁력을 대학들에게 지상과제로 부여한다. 또한 모든 지식은 계량화, 수치화, 서열화의 압박을 받았다. 시사지 <유에스 뉴스 & 월드 리포트>가 대학들을 평가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같은 언론사들이 대학을 서열화하고 점수를 매긴다. 평가를 하는 자는 권력을 가지게 되고 평가받는 자는 권력이 씌운 매트릭스 안에서 허둥댄다. 매트릭스를 넘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대학들은 각자 매트릭스 안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찾으려 한다. 개별 대학이 점수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때 매트릭스는 더욱 강화된다. 각자도생은 각자의 생존으로 이어지지 않고 각자의 쇠락으로 연결된다. 매트릭스를 만든 권력은 경쟁력 있는 대학이 좋은 대학이고 우리의 미래를 만든다고 거짓말한다. 경쟁력을 위해 인문사회 분야의 많은 학과는 통폐합되고 구조조정대상이 된다. 경쟁력을 증명하는 논문 게재 수, 학술대회 개최 수까지 점수로 계량화되어 평가받는다. 그런데 학문공동체에 신자유주의를 강박하는 권력자들이 말하는 경쟁력이 진짜 경쟁력인지 어느 누구도 논박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경쟁을 했을 때 좋은 사회가 온다는 보장도 없다. 전 세계적 '경쟁의 물신화'는 결과적으로 극단적 불평등으로 귀결되었다. 수치화되는 경쟁력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대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대학교수가 아니라 대학생으로부터 나왔다. 2010년 당시 고려대 학생이었던 김예슬은 대학을 그만둔다는 '대학 거부 선언'을 했다. 김예슬은 "대학은 글로벌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라고 자퇴의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김예슬의 선언을 젊은이의 치기로 생각한 사람이 많았지만, 이후 악화된 대학의 황폐화를 생각한다면 학문공동체에 대한 섬세한 윤리적 감각을 가졌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대학을 기업으로 생각하는 권력자들에게 대학은 사회의 한 기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실용학문의 경우 현재의 흐름이 아주 부정적이지만은 아닐 것이다. 실용학문은 매트릭스의 효율적 작동만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초점을 매트릭스의 기능이 아니라 매트릭스 존재 자체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바로 이것이 인문학의 일이다. 인문학적 성찰, 인문학적 반성을 경유하지 않은 유용성의 추구는 미국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를 만든다. 개별 부문에서는 세계의 첨단을 달리지만 공동체는 사라진다. 수백만이 노숙자로, 수천만이 의료보험이 없는 의료 빈곤층으로 살아간다. 유용성에 대한 극단적 추구는 유용성이 제공하는 삶의 편의를 누려야 할 인간을 망가뜨린다. 대학은 학문공동체의 핵심이고 학문은 매트릭스에 질문할 수 있는 지성적 능력이다.  

현재 우리 대학의 모습은 어떠할까? <한국학논집> 74호에 실린 이재성 계명대 교수의 논문 '대학의 기업화와 인문학-대학의 파국과 인문학의 몰락'이 설명하는 한국 대학의 모습이다. "지금 여기, 우리 사회의 대학과 대학교육은 어떤가. 대학서열화와 사학 중심의 대학체제라는 고등교육의 구조적 문제는 도외시한 채 학령인구 감소라는 사회현상을 대학의 재구조화, 즉 대학구조조정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학과 대학인은 자율의 능력과 목소리를 상실했고 국가권력의 눈에 대학의 자유와 자율성은 안중에도 없다." 게다가 구조조정은 시장주의를 동력으로 삼는다. 시장주의는 대학을 학문공동체가 아니라 기업으로 생각한다. 돈 되는 것만 한다는 생각은 일면 '쿨'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어떤 것이 돈이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나친 시장주의로 몰락하는 미국 대학에 대한 심층보고서인 <대학주식회사>의 저자 제니퍼 워시번은 이렇게 말한다. "대학생에게 편협한 직업교육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읽기, 쓰기, 수학, 과학 등에 걸친 폭넓은 기반, 즉 학생들의 지적능력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연마시키는 교육을 제고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상기 논문에서 재인용) 시장의 수요는 항상적으로 변하기에 폭 좁은 직업교육만 받은 경우 시장의 수요가 사라지면 그대로 끝나기 때문이다. 인재란 현재의 시장에 최적화된 사람이 아니라 시장의 유동성에 스스로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학의 기업화, 학문공동체의 해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심각한 문제를 촉발할 것이라 단언하는 전문가가 있다. 고부응 중앙대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바탕으로 낸 <대학의 기업화>(한울 펴냄)에서 이렇게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대학이 기업화됨으로써 학문공동체가 소멸하고 있다는 것은 학문 자체가 소멸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족국가가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근현대 대학의 모델이 되고 있는 독일의 베를린대학은 연구중심대학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바람직한 민족국가의 구성원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이기도 했다. 대학의 기업화는 이러한 베를린대학의 모형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국가의 쇠퇴와 연결되는 것이다." 민족국가의 쇠퇴란, 공동체로서의 민족과 제도로서의 국가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고부응은 "한국에서 대학의 기업화, 민족국가의 쇠퇴, 초국적 기업 자본주의의 득세가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거의 맞물리면서 연이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이 세 현상이 결국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민족국가의 쇠퇴는 국가, 국적이라는 형식적 틀은 같이 걸치고 있지만 상호 간에 느끼는 연대의 감정이 바래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 발생하는 폭력의 강도가 날이 갈수록 더욱 커지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연결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더욱 냉담해져 가고 더욱 가혹해져 간다. 국적은 같을지라도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은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국의 사상가 패트릭 J. 드닌은 자신의 책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이재만 옮김, 책과함께 펴냄)에서 공동체 복구를 위한 대안으로써 "리버럴아츠(교양 교육. 필자 주)의 강화"를 제안한다. 공동체를 다시 복구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교육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모든 전망이 불투명할 때는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정제되지 않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런 힘을 완벽히 제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공동체해체를 걱정하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을 길러낼 수는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런 사람들이 다시금 새로운 방식으로 공동체를 복원할 것이다. 대학은 학문공동체의 주역으로서 여기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