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쫄지마, 시바!' 시대는 끝났다 - 플랫폼 노동? 사실상 '임시직(Gig)노동'

일취월장7 2019. 6. 6. 16:27

'쫄지마, 시바!' 시대는 끝났다

[프레시안 人스타] 위근우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작가
   
전홍기혜 기자 .  이명선 기자
2019.06.06 05:24:09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쓴 위근우 작가는 '남성 페미니스트 앨라이(ally)'를 자처한다. 대중문화 평론 등 '사회적 글쓰기'가 직업인 위 작가에게 2019년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평등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도 없었던 한국 사회"에서 일부 20대 남성 등을 중심으로 '반(反)페미니즘' 주장이 휘몰아치는 상황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고 한다.

'이퀄리즘(Equalism)' 등 아무리 다른 말로 포장하려 해도, 이들의 시도는 결국 논의를 초기화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미투운동(#Metoo)'과 '버닝썬 사건'을 통해서 드러났듯이, '남성 권력에 의한 여성 성 착취'에 여성들이 실존적 생존적 위협을 겪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을 전제한 뒤 논의를 진전시켜야 한다." 

위 작가는 또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확인되는 '여성 혐오'는 다른 소수자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젠더 이슈뿐 아니라, 장애인과 성소수자 이슈, 그리고 지역 차별까지 사회 전반의 문제가 된다. 한 이슈에서 차별을 용인하면 그다음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과도한 PC함(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우려하는 것에 대해 위 작가는 "주제넘은 소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과도한 PC함은 거대한 허수아비'다. PC함에 대한 집착이 표현의 자유를, 사람과 세상을 억압한다는 주장은 그저 가능태의 영역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PC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다. 세월호 희생자 시점의 소설이라면서 미성년 여성의 목소리를 자처해 "내 젖가슴처럼"이라는 표현을 쓴 강동수 작가가 부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선임되는 게 과도한 일이다." 

다음은 지난 3일 있었던 위근우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 위근우 작가. ⓒ프레시안(최형락)


'글 써서 밥 벌어 먹고 사는' 페미니스트 

프레시안 : 칼럼과 SNS에 쓴 글을 모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시대의창 펴냄)에는 30개 이상의 글이 담겨있다. 하나하나가 다 민감한 주제인데, 실명 비판에 현안 위주의 글을 쓰는 이유는? 

위근우 :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산다고 할 때, 그 글은 예쁘게 꾸민 상품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협업의 한 부분으로서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사회적 순기능 덕에 '글을 써서 밥 벌어 먹고 산다'라는 당위(當爲)가 존재하는 것 아닐까?

특히 저널리스트라면, 공적 논의의 맥락에서 현안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글쓰기는 피할 수 없는 일 같다. 20대였던 2000년대 초반부터 강준만 전북대 교수와 진중권 동양대 교수의 글을 읽었다. 그래서인지 실명 비판과 현안 위주의 글에 익숙한 편이다. 또래들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명 비판을 하고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 데 있어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적 논의의 맥락에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비판하고 문제 제기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잘 모르겠다.(웃음) 

▲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위근우 지음, 시대의창 펴냄). ⓒ시대의창

프레시안 : 글도 글이지만, 본인이 '남성 페미니스트'의 입장을 취하는 점도 도드라진다. 책의 주요 주제 역시 '페미니즘'이다. 많은 사람들이 백래시가 두려워서 피하는 주제다.

위근우 : 페미니즘 이슈는 최근 가장 활발한 공적 논의가 일어난 영역이다. 개인적으로 그 이전부터 페미니즘에 원론적으로 동의하고 있었지만, 추상적인 상태였다. 그러다 2015년 '메갈리아 사태' 이후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공부하면서부터는 원론적이고 추상적이기만 한 담론이 오히려 논의 자체를 왜곡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페미니즘의 가치에 원론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메갈리아의 방법적 과격성을 문제 삼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건 한국 여성들이 겪는 여러 구체적 문제들을 외면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소위 '페미니스트 앨라이(ally) 남성'이 된 것 같다. 

페미니스트 앨라이 남성에 대한 페미니스트 내부의 비판적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배우 유아인의 '애호박게이트'를 다룬 칼럼에서 말한 것처럼 "남성 페미니스트란 자신이 속한 남성중심적 사회에 스민 여성혐오적 관점과 편견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반성하며, 자신에 대한 여성들의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관련 기사 : 2017년 12월 2일 자 <경향신문> [위근우의 리플레이] '페미니스트' 자처한 그대가 '남초'들의 지지를 받는 건 왜일까요?)  

'여성이 주장했을 때 비난받은 이야기를 남성이 한다고 권위가 붙느냐?' 같은 비난은 정당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해당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은, 침묵이 성차별적 세상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진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건, 신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지금 이곳에서의 '쓸모' 여부로 판단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다.(웃음) 

반페미 전사들에게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야!"  

프레시안 : 책에서 정치적 진보를 자처하지만, 페미니즘(Feminism)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남성들의 커뮤니티의 반응을 전했다. "메갈(리아) 워마드 때문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의 P만 들어도 거부감 생겨서요"라니. 과연 이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위근우 : 2015~16년까지는 설득하고 싶었던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이후부터는 잘 모르겠다. '설득을 포기하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설득이라는 행위에 다소 회의적이다.

고민 중 하나가 '우리 사회에 20대 남성들의 '반(反)페미' 담론이 틀린 거라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라는 게 있었나?' 하는 것이다.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했던 성평등의 당위가 옳다는 최소한의 합의가 존재했나?  

'일간베스트(일베)'의 경우, 아무리 목소리의 볼륨이 크다고 해도 사회 전반에 걸쳐 '일베는 나쁘다'라는 합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젠더 이슈에 있어서는 한국 사회가 '반(反)페미' 정서는 틀렸다는 합의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가령 '일베'를 제외하고도 20대·30대 남성들의 경우, 2015년 전후만 하더라도 '우리는 페미니즘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메갈리아 같은 과격한 페미니즘은 문제다'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원론적인 동의가 있는 줄 알았지. 그런데 지금은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페미 전사'를 설득하기보다 이들이 목소리의 크기로 여론을 만드는 것에 대해 선을 그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마지노선이랄까? '너희가 무슨 여론을 만들려 하든, 그건 틀렸어. 도는 건 지구!'라고.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라고.

진중권 교수가 책 <폭력과 상스러움-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푸른숲 펴냄)에서 "보수성의 집요함은 논리의 튼튼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습속(아비투스)이라는 몸의 보수성, 즉 관성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는데, 페미니즘 논의 역시 비슷한 것 같다. 수많은 여성들이 말한 것처럼 반페미 전사들의 논리는 박살 난 지 오래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퀄리즘(Equalism)'이라는 말로, '우먼스플레인'이라는 방송과 책으로 판본을 바꿔가며 논의를 뒤로 돌리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퀄리즘, 논의를 뒤로 돌리지 말라! 

프레시안 : '우먼스플레인'은 이선옥 작가와 개그맨 황현희가 유튜브 '김용민TV'에서 진행하는 젠더 이슈 코너다. 이들이 주장하는 이퀄리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위근우 : 논의를 초기화하고 있다고 본다. '미투운동(#Metoo)'과 '버닝썬 사건'을 통해서 드러났듯이, '남성 권력에 의한 여성 성 착취'에 여성들이 실존적 생존적 위협을 겪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을 전제한 뒤 논의를 진전시켜야 한다. 그런데 왜 논의를 뒤로 돌리려고 하는 건지.  

도지사이자 차기 대권주자였던 사람(안희정)이 자신의 비서를 위력에 의한 성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아직 판결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라거나 '잘못된 미투일 수 있다'는 사고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뒤로 돌리고 있다. 어쩌면 실제로 억울한 남성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이다. 지금까지 여성들이 실제로 경험한 실존적·생존적 두려움과는 다르다. 

'젠더 갈등'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 갈등 양상이라는 게 남성들은 자신이 잠재적 범죄자로 몰리는 게 두렵고 여성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인해 피해자가 될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걸 같은 무게로 잴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실존적·생존적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뒤에 남성이 신뢰를 회복할 방법을 찾는 게 옳은 순서 아닐까? 그런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남녀가 갈등을 일으키니 이제 극복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프레시안 : 20대·30대 남성들은 '어머니가 받은 차별은 이해하지만, 또래 여성이 무슨 차별을 받았느냐'고 반박하고 있다. 그 안에 자리 잡은 심리는 '아버지만큼 누릴 수 있는데, 못 누리고 있다'는 피해 의식이다. 그나마 과거와 같은 노골적인 차별은 많이 사라졌다.

위근우 : 제도적인 차별은 형식적으로나마 개선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 이면의 문화와 담론 영역에 대한 분석 및 비판이 중요해졌다.

'대림동 취객 사건'만 해도 현장을 수습하던 경찰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논란의 초점이 '여성 경찰'에 맞춰지더니, '여경을 뽑지 말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문제를 너무나도 쉽게 여성 전체로 범주화하고 있다. 만약 남성 경찰이 현장을 수습했다면? 그래도 남경을 뽑지 말자는 이야기가 나왔을까? 이런 식의 담론 구조는 제도적인 차별만큼이나 물질적인 힘을 발휘한다. 

20대·30대 남성들이 아버지 세대와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억울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여성들에게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여성들을 공격하는 건 그 억울함을 풀 대상을 잘못 찾은 거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언론이, 미디어가 계속해서 여성 차별 담론을 이야기해야 한다. 형식적인 평등의 근거는 마련됐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 유뷰트 '김용민TV' 갈무리.


'과도한 PC함'은 거대한 허수아비다 

프레시안 : 페미니즘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 더 이상 젠더 간의 문제가 아니다. 혐오 발언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순간, 장애인이나 성소수자와 같은 약자들 또한 대상이 된다.

위근우 : 그렇다. 젠더 이슈뿐 아니라, 장애인과 성소수자 이슈, 그리고 지역 차별까지 사회 전반의 문제가 된다. 한 이슈에서 차별을 용인하면 그다음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앞서 20대·30대 남성들을 설득하는 데 있어 회의적이라고 했는데, '설득이라는 방법론이 반페미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또 다른 승리의 경험을 주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는 건 그래서다. 그냥 틀린 건 틀린 거라고 이야기해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해하고 설득한다면, 그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어쨌든 경청해주네? 이것 봐, 서로 좋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달라진 걸까? 개선된 걸까?  

프레시안 : 이퀄리즘을 내세운 '우먼스플레인'도 그렇지만, '남성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며 끊임없이 피해자 자리를 가져가려 한다.  

위근우 : 처음에는 이퀄리즘에 대해 방법은 잘못됐지만, 성평등이라는 전제하에 나온 헛발질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페미니즘을 사장시키기 위한 조직적 담론이고, 전략이다. 피해자 자리 뺏기를 하고 있는데, '과도한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로 사회가 경직화된다' 등 여러 가지 임기응변으로 전략을 다양화하고 있는 것 같다. 말만 들으면, 그럴싸하다.(웃음) 

하지만 공적 논의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한국 사회라고 하는 맥락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런데 조금만 눈을 돌려 보자. 한국이라는 나라가 '과도한 PC함' 때문에 문제가 되는지, 아니면 생각 없이 하는 혐오 발언 때문에 문제 되는 게 많은지. 그런 맥락을 지워버리는 게 이퀄리즘의 가장 쉬운 전략 같다. 

프레시안 : 정치적 올바름(PC)을 불사한 논쟁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책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조던 B. 피터슨·스티븐 프라이·마이클 에릭 다이슨·미셸 골드버그 지음, 조은경 옮김, 푸쉬케의숲 펴냄)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를 경직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위근우 : 책에서도 밝혔듯이 '과도한 PC함은 거대한 허수아비'다. PC함에 대한 집착이 표현의 자유를, 사람과 세상을 억압한다는 주장은 그저 가능태의 영역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PC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다. 세월호 희생자 시점의 소설이라면서 미성년 여성의 목소리를 자처해 "내 젖가슴처럼"이라는 표현을 쓴 강동수 작가가 부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선임되는 게 과도한 일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강제적 힘을 발휘한 적 없던 사회에서 과도한 PC함으로 인한 경직한 문화를 걱정하는 건 주제넘은 소리일 뿐이다."(<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287쪽)  

ⓒ프레시안(최형락)


'쫄지마, 시바!'시대는 끝났다 

프레시안 : 문재인 정권에 우호적인, 자칭 리버럴리스트 남성들이 이퀄리즘 이슈를 키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퀄리즘의 대표 화자는 이선옥 작가와 오세라비 작가지만, 이들은 김용민 피디나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위근우 : 문화적 리버럴이 한국에서 정치적 진보이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국가 권력이 개인의 양심을 억누르는 상황에서 '쫄지마, 시바!'와 같은 '쿨(cool)한' 태도가 실제로 저항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이 아닌 동등한 시민끼리의 젠더 권력에서도 그것이 유효할까? <나는 꼼수다>의 '비키니 사건'은 한국 리버럴 남성의 성감수성이 얼마나 부족한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프레시안 : 요즘 정치인이나 지식인마저도 대중 의견에 편승해, 이른바 '셀러브리티(셀럽)'가 된다. 그렇다 보니, 공적 논의 자체가 축소되는 것 같다.  

위근우 : 언론이 과거와 같은 권위를 갖지 않다보니, 더더욱 책임을 지지 않는 일이 많아진 것 같다. 의견이 마치 지식인 양 유통되기도 하고. 더는 <조선일보>가 나라의 헤게모니를 쥐고 흔들지 못하는 것처럼 언론 권력이 해체된 것은 긍정적일 수 있지만, 그 권위가 해체된 뒤 남은 것이 '나무위키'나 극우 유튜버, 음모론적인 영화라면 한국 사회가 개선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적 논의의 장으로, 언론이 책임 있게 재구축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 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학생이 '선생님은 나무위키를 참고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어디를 믿고 어떤 정보를 가져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뼈 맞은' 기분이었다. 고등학생도 아는 것이다. '언론'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그 수많은 매체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 많은 사람들이 책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보고, 공유했다. 구글 갈무리.


남성이 아닌 '여성의 분노'에 주목해야 

프레시안 :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언론 또한 남성에게만 주목할 뿐 여성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82년생 김지영>(김남주 지음, 민음사 펴냄)이 100만부 이상 팔린 것을 보면, 여성들의 요구는 명백하다.  

위근우 : 여성은 외면되고 남성으로 과대표 되는 측면이 있다. 사실 목소리는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목소리만으로 당위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건에 대해 B의 목소리가 크다고 B의 목소리가 A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프레시안 : 여성들의 비연애-비섹스-비혼-비출산은 (안 좋은 표현이지만) '재생산 시스템'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 의미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다. 20대·30대 여성들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고 있다. 

위근우 : 그렇다. 사회와 언론은 여성의 분노가 무엇인지 정말 심각하게 분석해야 한다.

여성들이 비연애-비혼을 외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일단 리스크가 너무 크다. 제도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생의 많은 부분이 틀어질 수 있다. 여성들의 리스크 부담을 경감시키지 않으면서 여성들에게 전통적 가치를 부정한다고 말하는 건 잘못이다.  

프레시안 : 젠더 이슈와 관련해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도 없다고 지적했는데, 성범죄 의혹을 받은 남성 연예인이 언제 그랬냐는 듯 복귀하는 걸 보면 무섭다는 생각까지 든다. 피해자인 여성은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사회 복귀조차 못하는데.

위근우 : 성범죄 의혹을 받은 사람의 복귀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대중 역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성범죄는 특히 무혐의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여성시민단체들이 줄곧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고 무죄인 것은 아니다. 가수 정준영의 경우 두 차례나 불법 영상 촬영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았지만, 경찰과 검찰 조사에서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렇지만 결국 어떻게 됐나.  

ⓒ프레시안(최형락)


'밥값 하는 글'을 고민한다 

프레시안 : 최근 웹툰 작가 기안84의 청각장애인 비하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종차별적 표현이 논란이 됐다. 그동안 칼럼과 SNS를 통해 여성과 장애인 비하를 꾸준히 비판했는데, 문화비평을 하는 입장에서 참 기운 빠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근우 : 세상이 변하지 않아서? 실제로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비평문 하나로, 세상이 확 바뀐다면 더 위험한 사회 아닐까?(웃음)  

한국 사회와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책을 냈지만, 책은 또 글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게 아니다. 거대한 공적 논의의 일부분이자, 목소리에 불과하다. 다만, 이 책과 글을 통해 공적 논의가 활성화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다음 단계인 소비자 운동과 같은 당위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글쟁이로 살아가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위근우 : 글을 써서 먹고살겠다고 마음먹은 만큼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웃음) 그렇다고 기득권에 붙어서 글을 쓴다고 달라지진 않을 거고. 그럼에도 굳이 비판을 통해 세상에 변화를 요청하는 글을 쓰는 것은 그게 글로 먹고 사는 일의 본질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밥 먹고 살기 어려운 것과 별개로 '밥값 하는 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글은 누군가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음식도 아니고,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연료도 아니다. 그럼에도 글을 써서 돈을 받는다. 사회적 협업 안에서 글의 실천적 효과에 대한 기대 때문에 원고료를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글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세상의 개선에 도움이 되는 영역 안에서의 참여가 아닐까? 앞서 말했듯 무언가에 대해 옳고 그름을 묻는 비판적 글쓰기 외에 다른 방법을 잘 모르겠다. 

프레시안 :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조합원이다. 조합원으로 한마디 한다면?

위근우 :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할 때부터 조합원으로 출자했다. 개인적으로도 <매거진t> <텐아시아> <아이즈> 등 줄곧 신생 매체에서 일했다. 글이나 기사로 먹고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 과거 몇몇 일간지들이 먹고살던 방법이 사라진 상황에서 '기자 정신'만 요구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조합원이 됐다.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가 된 지금은 '누가 누구를 지원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웃음)

< 프레시안>이라는 매체가 정론직필이라는 공적 논의의 공론자로, 논의의 장에서 중요한 참여자가 되기를 바란다. 조합이 됐든 자생적 실험이 됐든 잘 됐으면 좋겠다.



플랫폼 노동? 사실상 '임시직(Gig)노동'

[창비 주간 논평] "노동권 보호가 시장 혁신보다 앞서야 한다"
2019.06.06 05:23:32

공유경제는 보통 플랫폼 기술을 이용해 (비)물질자원의 수요가 필요한 이들과 빌려줄 여유가 있는 이들 사이를 효율적으로 연결해주면서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신생의 닷컴 시장 유형을 일컫는다. 물론 이 '공유'(sharing)의 시장 셈법에는 사회적 증여나 재분배 등의 가치 지향이 담겨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온라인 중개 플랫폼' 경제라는 풀이말이 '공유경제'라는 허세보다 더 솔직하고 정확하다.

우리에게 이 공유경제가 가시적으로 사회문제가 된 발단에는, 플랫폼 자원 배치의 동학에 인간 산노동이 중요한 거래 품목으로 삽입된다는 사실에 있다. 플랫폼 육체노동이 일반 물질자원 논리와 흡사해져 가는 것이다. 공유경제, 특히 육체의 산노동을 거래하거나 자원 배달에 이용하는 플랫폼노동은 사실상 '임시직(긱, Gig)노동'의 형태를 띠고 있다. 플랫폼 장치의 굴레 안에서 전통의 고용관계가 서비스 계약관계로 바뀌면서, 이들 플랫폼노동의 지위는 파편화하고 노동 위험 대부분이 개개인에게 외주화되는 형세다.

최근 승차 플랫폼 노동시장은, 택시-카풀 업계 논쟁으로 시작해 이제 '타다' 등이 시장에 합류하면서 지형이 더욱 복잡해지는 모양새다. 배달 라이더 노동시장의 경우에는, 노동의 파편화나 위험의 외주화에 맞서 4대보험 및 산업재해 처리, 노동 결사권 등이 중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를 두고 여러 주장과 의견이 분분한데 관료/정부 불신론, 플랫폼노동 대세론, 플랫폼노동 보호론 등이 대결하거나 혼재하는 양상이다. 이들 주장의 면면에 대해서는 향후 좀 더 호흡이 긴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몇 가지 꼭 선결해야 할 핵심 쟁점을 짚고자 한다.

필자는 새로운 플랫폼 시장 변화 속에서 견지해야 할 최소한의 사회 덕목이, 플랫폼 신기술의 효율적 측면을 긍정적으로 흡수하는 가운데서도 보장되는 사회적 약자 포용론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에 대한 기본 전제 없이는 플랫폼경제는 향후 시민사회의 적대가 될 공산이 크다. 

사회 포용적 기술혁신론의 입장에서 보자면, 플랫폼 노동자들의 인권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기본적인 사회 합의가 필요하다. 현재 플랫폼노동의 위기 상황은 사회적으로 무엇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실종되면서 나타난 시장 이해갈등의 각축전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배달 라이더, 운전기사, 돌봄·청소 노동자, 퀵노동자 등 취약한 플랫폼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보장하는 안전판 마련이 시급하다. 플랫폼노동을 동시대 '고용유연화'의 새로운 단계로 본다면, 노동권 보호가 시장 혁신보다 앞서야 한다.

둘째, 플랫폼노동의 존재 근거는 고객 소비의 편의성을 보장한다는 것인데, 이와 상충하곤 하는 노동 생존권 문제를 사회적으로 돌파해낼 수 없다면 플랫폼노동의 질 개선, 상생, 포용성장은 어려울 수 있다. 불친절과 승차거부 등이 택시업계의 고질병으로 문제 제기되는 반면, 배달노동을 공식적으로 24시간 풀가동하는 새벽 배송이 소비 편의로 각광받는 한 현재 플랫폼노동 기본권이나 생존권 문제는 사회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기 쉽지 않다. 무엇보다 플랫폼노동 권리에 대한 시민들의 폭넓은 이해와 설득이 필요하기에 더 그러하다. 타다 등이 '친절 서비스'와 '자동 배차'로 급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 플랫폼 기술혁신의 적정성 점검이 필요하다. 현재 플랫폼 기술 도입이나 혁신의 잠재력이 과연 우리 사회 내에서 포용성이라는 꼴값을 갖추고 있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산노동의 질을 악화하는 신기술을 그저 혁신이라 우기긴 어려운 까닭이다. 더디 가더라도 노동 권리의 존엄성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합당하고 적정한 수준에서 기술 효율성의 안착을 독려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플랫폼노동 강도를 스마트폰 앱 등을 매개해 자동화하는 알고리즘 기술 통제의 적정 수준까지도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따져 물어야 한다.

넷째, 정부·서울시·경기도 등 지자체의 중재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카풀 문제에서 보여줬던 사회적 대타협류의 모델로는 한계가 있다. '대타협'이라는 시도 자체는 좋았으나 사회 신뢰 모델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적어도 논의 테이블에 시민사회는 기본으로 하면서, 관련 스타트업 등 소외된 이해당사자들까지 포함해 좀 더 포괄적 시민의회 테이블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어렵겠지만 정부는 중재력과 합의를 이끌어낼 민주적 플랫폼노동 협의체를 구성하기 위해 좀 더 끈질기게 고민하고 애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관련 노동법이나 정책 입안을 통해 사회적 타자에 대한 안전판을 마련하는 것과 함께, 우리 사회가 중장기적으로 플랫폼 긱경제를 넘어설 사회 대안이나 전망까지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플랫폼경제는 정도 차이는 있더라도 사회 전 분야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의 물질과 비물질(데이터) 노동을 변변한 보상이나 사회적 공유 가치 확산 없이 대부분 지대 방식으로 수취하는 사적 이윤 모델에 기대고 있다. 플랫폼노동의 가치가 구성원에게 재분배되고 사회적으로 증여되는 상생과 호혜의 플랫폼 대안 구성을 논의하고 장려할 때인 것이다. 이제는 플랫폼경제의 수정 모델 제시가 됐건 새로운 대안의 모색이 됐건 실질적인 플랫폼노동의 혁신적 실천 방향을 다잡아야 한다. 제도 안팎의 상상력과 실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