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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통합 정신’에 주목한다

일취월장7 2019. 5. 27. 11:40

노무현의 통합 정신에 주목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오랜 기간 통합론을 이야기해왔다. 때에 따라 통합이 원칙보다 우위일 수 있다고도 말했다. 대화와 타협이 그가 말한 3단계 민주주의였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2019년 05월 27일 월요일 제610호


<시사IN> 제90호 ‘노무현 최후의 꿈’ 추모 특집호 표지 사진

특정 시기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있다. 동시대와 후대에 끼친 영향이 너무 커서 그 발자취만 좇아도 당대의 많은 것이 설명되는 인물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 반열에 들 만하다. 그의 이름을 빼놓고 21세기 대한민국의 첫 20년을 기록하는 것은 만용에 가깝다. 이 시기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은 대부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직간접적 연관을 가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얽힌 사건들은 하나하나가 가볍지 않다. 전례 없는 ‘팬덤’을 바탕으로 극적으로 대권을 잡았다. 사상 처음으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으나 여론 역풍이 거세게 불었고,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복귀했다. 임기를 마친 뒤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와 대척점에 있었던 후임 대통령들은 훗날 부정행위가 드러나면서 차례로 구속되었다. 그중 한 사람은 임기 도중 탄핵되었다. 시민 수백만명이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랜 친구가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사건들만 되짚어도 이 정도다.

노무현 정치의 출발점은 통합운동

ⓒ청와대 사진기자단
2007년 5월 노무현 대통령(오른쪽)이 문재인 비서실장과 함께 청와대 본관을 나서고 있다.


‘대통령 노무현’은 재임 중 인기가 없었다.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공격받았다. 한쪽에서는 ‘좌파’, 다른 쪽에서는 ‘신자유주의자’라고 비판했다. 퇴임 뒤 측근들에 이어 본인까지 검찰 수사를 받자 언론은 그의 도덕성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2009년 5월 서거 이후 판은 뒤바뀌었다. ‘인간 노무현’이 재조명받으면서였다. 국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에는 조문객 500만명이 몰렸다.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은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보수 정부 9년간 민주주의에 위기 신호가 켜질 때마다 그의 이름이 언급됐다. ‘노무현 정신’을 말하는 이가 점점 늘었다.

무엇이 노무현 정신일까. 몇 가지 키워드로 후보군을 추릴 만하다. 시민들은 국민 참여 정치, 권위주의 타파, 친서민, 원칙과 소신 등을 가장 많이 떠올린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사’ 역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세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과 복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나라, 지역주의와 이념 갈등, 차별의 비정상이 없는 나라가 그의 꿈이었습니다.”

서거 뒤 출판된 그의 미완성 회고록 <성공과 좌절>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이 생각하는 노무현 정신이라고 읽을 만한 구절이 있다. 대통령의 일반적 과제와 참여정부의 역사적 과제를 되짚어보자고 쓴 뒤 ‘후보 시절의 약속은 무엇이었을까?’라는 대목에서 그는 “명시적으로 공약하지 않은 공약이 있었다”라고 했다. 그 아래에는 이렇게 적었다. “시민들과 정서적 공감대가 이루어진 묵시적인 약속이 있었다. 서민, 고졸, 입지전적 인물, 일관된 소신의 길, 손해 보는 길, 바보 노무현, 이런 것들은 명시되지 않았으나 시민들은 계약 이상의 무게로 받아들였다. 그 정신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연합뉴스
2002년 4월27일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대선 후보로 결정되자 노사모 회원들이 환호를 보내고 있다.


최근 자유한국당 인사들이 언급한 노무현 정신은 그 결이 사뭇 다르다. 지난 3월5일 봉하마을을 방문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방명록에 “대통령님의 통합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깊이 기억하겠다”라고 썼다. 노 전 대통령이 행한 ‘통합’이 어떤 의미인지 질문을 받자 황 대표는 “FTA나 해외 파병 등 이런 부분에서 갈등을 해소하신 것을 기억한다”라고 답했다. 참여정부에서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의 해석도 비슷했다. 2016년 11월 박근혜 정부의 총리 후보로 지명된 뒤 그는 “노무현 정신의 본질은 이쪽저쪽 가리는 게 아니라 국가를 걱정하고 국정을 걱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7월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이 되면서 비판받자 그는 “노무현 정신은 ‘여기도 대한민국, 저기도 대한민국’이다”라고 반박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노 전 대통령의 이미지는 대개 원칙과 소신을 위해 싸움을 불사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호통 치는 장면을 연상한다. 그러나 ‘통합’이 노무현 정신이라는 야당 인사들의 주장에도 근거가 없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이 <성공과 좌절>에 직접 쓴 구절이 있다. “(국민 통합은) 경선 때 핵심 의제였는데, 그 후 본선에 와서는 호응이 떨어졌다. 대신 먹고사는 이야기가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것(국민 통합)이 최고의 과제였다.”

‘원칙’이나 ‘소신’ 같은 가치와 상충할 수 있을 법한 ‘국민 통합’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왜 최고의 과제로 꼽았을까? 정치적·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게 국가 최고 지도자의 책무라고 여겨서일까? 만일 그렇다면 통합은 ‘대통령 노무현의 수행 과제’가 될 순 있어도 ‘노무현 정신의 본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시사IN 포토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2004년 3월 광화문사거리( 세종대로사거리)에서 열렸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대선 출마 전부터 오랜 기간 ‘통합론’을 이야기해왔다. 예컨대 2001년 한 강연에서 그는 “한 국가공동체는 통합되어야 합니다. 국민들은 하나로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어떤 지향에 대해 공감하면서 전략적 합의를 가지고 새로운 역사를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데, (중략)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2007년 퇴임을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노무현 정치의 출발점은 1989년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에 대한 통합운동”이라고 말했다. 또 “원칙에는 매우 까다롭게 매달리지만 통합을 위해서라면 어떤 다른 가치도 희생할 수 있는 정치를 해왔다”라고 자평했다. 때에 따라 원칙보다 통합이 우위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분명 통합은 정치인 노무현의 오래되고 중요한 화두였다.

하지만 ‘노무현의 통합 정신’을 주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곧잘 싸움에 휘말렸다. 어떤 전장에는 스스로 들어갔고, 직접 다툼을 시작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를 원칙과 소신의 상징으로 봤고 다른 이들은 그가 평지풍파를 일으킨다고 비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라고 말한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 역시 노 전 대통령의 투사적 면모가 통합의 정치와는 상충한다고 여겼다. 지난 2월 김 전 장관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주의에 직접 몸으로 맞서 싸웠다면, …내가 해야 할 정치는 ‘통합의 정치’이다”라고 말했다. ‘노무현의 통합’은 무엇이고, 어떻게 ‘원칙을 위한 싸움’과 병존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다시 봐야 할 ‘대연정’ 제안

ⓒ연합뉴스
1988년 국회 ‘5공 비리 청문회’에서 노무현 의원이 호통을 치고 있다.


<성공과 좌절>에 실린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두 가지 정치 풍조와 싸워왔다고 말했다. 19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손잡은 ‘3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으로 빚어진 기회주의와 분열주의다. 같은 책에 실린 다른 인터뷰에서는 더 노골적으로 “내 20년 정치 인생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투쟁”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맞서기 위해 2002년 대선에서 내건 기치가 ‘원칙과 통합’이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3당 합당 결과 훼손된 ‘원칙’이, 단순히 동시대에만 영향을 주는 정치 윤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이 합당의 정치적 본질이 ‘군부독재 세력과 손잡는 것은 부도덕하다’거나 ‘여야가 세를 합쳐 거대 1당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당위를 뛰어넘는 반동이라고 봤다. 노 전 대통령은 3당 합당 이후 정치 영역을 넘어 사회 전체가 체득할 나쁜 교훈을 염려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성공’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기회주의를 배척할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회적 노력이 소멸되어버렸다. …자신의 강한 영향력으로 반(反)화합이라는 대결적 정서를 통해 적대적 대결 구도를 만들어놓고는… 이제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사회적으로 심판을 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통합을 위해서는 어떤 다른 가치도 희생할 수 있다’는 노 전 대통령의 신조가 왜 이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을까? <성공과 좌절>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렇게 썼다. “3당 합당이라는 것이 이름은 합당이지만, 그 내용은 국가적 분열이고 민주 세력의 분열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분열주의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미래에 가장 나쁜 영향을 미친다.”

ⓒ노무현사료관
2000년 4월 16대 총선을 앞두고 부산 지역에 출마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


그가 보기에 3당 합당은 “호남을 지역으로 고립”시키고 지역 구도를 완전히 고착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말하자면 3당 합당은 그 자체로 분열주의 행위이기에 오히려 그 세력과 선을 긋는 것이야말로 통합 정신에 부합한다. 그가 내세운 통합의 의미는 ‘정파를 가리지 않는 갈등 봉합 수단’과 거리가 멀다. 정치인에게 선택을 강제하는 일종의 규범에 가깝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독특한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데에는 3당 합당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반대한다는 의미 이상이 내포되어 있다. 노무현재단의 유시민 이사장은 ‘노무현의 국민 통합’ 과정을 이렇게 해석했다(26~31쪽 기사 참조). “‘공존의 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서로 이해관계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공존할 수 있도록 규칙을 만들고, 그에 걸맞은 문화를 체득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 존재를 인정하고, 안정적이고 공정하게 경쟁하며, 결과에 승복하고, 소수라 할지라도 다음 경쟁에서는 다수가 될 가능성을 늘 열어놓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유시민 이사장의 정의에 따르면 국민 통합은 사회적 신뢰를 구축해나가는 작업이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 국정홍보비서관 등을 지낸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비슷한 답변을 내놓았다. “‘국민소득 5만 달러’나 ‘양극화 없는 세상’ ‘복지국가’ 같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었다. 노 전 대통령이 말한 통합의 길은 곧 ‘대화를 통해 타협하는 정치’였다. 그런 정치 환경만 만들어두면 사회가 나아갈 방향은 자연히 수렴될 것이라고 봤다. 충분한 토론을 거치면 합리적 결론이 도출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상처럼 안 되는 분야도 있었다. 세력 불균형 때문이었다. 김종민 의원은 힘 있고 목소리 큰 쪽이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대결처럼 보이는 문제 제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루는 임기 말 재임 시기를 정리하던 노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동서를, 빈부를 통합하겠다는 생각으로 정치를 시작해 여기까지 왔는데, 대통령 4년 하면서 대한민국을 더 갈라놓은 것 아니냐?’라고 말씀하셨다. 당황하고 있던 사이 ‘이것도 민주주의의 한 과정이지’라고 덧붙이시더라.”

ⓒ청와대 사진기자단
2004년 12월8일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에 주둔한 자이툰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통합이 잘 알려지지 않은 핵심 가치라면 ‘민주주의’는 이미 노무현 정신의 중추로 자리 잡은 가치다. 2007년 참여정부평가포럼 연설에서 노 전 대통령은 “적어도 민주주의 정도의 수준을 갖춘 가치가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인 것이고 나머지는 (통합을 위해) 타협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같은 해 원광대학교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강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가 “가장 훌륭한 통합의 기술”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번영에 적합”하고, “자유를 존중”하는, “평화의 제도”라는 것이다. 이 연설의 핵심은 민주주의에 대한 예찬이었다. 여기서 노 전 대통령은 “앞으로 우리 세상은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만큼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론’은 그의 정치 행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007년 신년 연설에서 그는 민주주의의 발전 과제를 3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는 반독재 투쟁, 2단계는 투명사회·지역구도 통합, 3단계는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였다. 말하자면 2단계 민주주의는 지역주의 타파, 3단계 민주주의는 “연정, 연합정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정치였다.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6월, 당시 제1 야당인 한나라당에게 선거구제 변경(소선거구제에서 중대선거구제로)에 동의해준다면, 국무총리를 포함한 장관 임명권을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른바 ‘대연정’이다. 소선거구제에서 호남에선 민주당 계열 후보만, 영남에선 한나라당 후보만 의원으로 뽑히는 지역주의 구도를 타개하자는 발상이었다. 부산에 민주당 계열 후보로 출마하고 연거푸 패배한 경험을 가진 노 전 대통령으로선 절실한 문제였지만 다른 정치인들(심지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을 포함한)에겐 그렇지 않았던지, 대연정 주장은 비웃음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눈앞의 손익 아니라 역사의 맥락을

ⓒ시사IN 윤무영
2016년 11월26일 국정 농단에 항의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집회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2007년 신년 연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시점에서 볼 때 대연정 제안의 실패는 민주주의 발전상 필연이었을 것이다. 이날 연설에서 그는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너무 시대를 앞선 성급한 제안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국 민주주의는 노 전 대통령의 기대만큼 빠르게 발전하지 않았다. <성공과 좌절>에서도 그는 “제3단계 민주주의 (…) 부분에 관한 한 한국은 매우 초보적 수준도 아니고 부재 수준”이라고 탄식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았던 대연정(3단계 민주주의)을 성급하게 제안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대화와 타협이 되지 않는 획일주의 정치 문화가 나타난 것은, 지난날 독재와 반독재와 같이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대결주의, 그리고 지역 간 대립 구조 같은 요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제도를 이렇게 만들어가겠다거나 하는 논쟁이 실제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단계 민주주의를 그는 “대화, 타협, 협상으로 결론을 하나로 모아나가는 통합의 과정”이라고 불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합론이나 투철한 민주주의관, 극적인 삶의 궤적은 10주기를 맞는 지금도 독특하게 여겨진다. 많지 않지만 그의 측근이나 팬 가운데에는 ‘노무현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있다. 노무현주의라는 용어는 성립할 수 있을까?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불가능한 건 아니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처럼 정립된 이념 체계를 갖추지 않더라도, ‘트럼프주의(Trumpism)’처럼 동시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면 일종의 주의(-ism)라고 부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최예린·나경희


반면 노무현재단 인사들은 노무현 가치를 ‘노무현주의’로 단정 짓기보다는 좀 더 넓게 해석되기를 바란다. 유시민 이사장은 “노무현주의? 그런 건 없다. 성립이 안 된다고 본다. 노 대통령은 스스로 ‘내 이념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주의’라고 말한 바 있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신’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이야기가 다를 수 있고, 존중해야 한다. 내 생각에는 ‘함께 사는 세상’ 같다”라고 말했다. 천호선 노무현시민학교 교장도 “굳이 그렇게(노무현주의) 부르는 게 노 전 대통령의 뜻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 같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천 교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100% 생각이 같거나, 무조건 노 전 대통령이 옳다고 보는 사람들보다, 그 시대의 민주적 과제를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시민학교를 운영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각자의 이념과 평가 분야에 따라 10주기를 맞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달리 볼 것이다. 다만 눈앞의 손익뿐 아니라 역사의 맥락을 살피는 자세는 참고할 만하다. 노 전 대통령은 늘 ‘좋은’ 선례를 궁리했다. 지역구에 출마하는 게 대의명분에 맞는지, 정책이나 이념이 미래 사회에 기여할지 상상했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 성패 여부를 사회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뇌했다. 멀리는 명분 없는 3당 합당 세력에 대적해 비주류로 남았고, 가까이는 “출렁이는 여론의 바탕에 면면히 흐르는 국민들의 의지와 정신”을 외면하는 차기 대선 주자들을 비판했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하자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그를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비난했다. 10여 년 뒤 대통령 박근혜를 끌어내린 기반은 노무현 정부에서 다진 민주주의였다.



바람개비는 지금도 돌고 있다

최직경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5월 27일 월요일 제610호


걷다 보니 2차선 도로의 가드레일에 꽂혀 돌아가는 노란색 바람개비가 보였다. 오후 2시쯤 버스에서 내려 진영시외버스터미널부터 한 시간 남짓을 걷고 난 뒤였다. 걸었던 길의 양옆으로는 공사 현장이나 공장이 즐비했다. 보도블록은 기대도 할 수 없었고, 좁은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화물차들을 피해 걷느라 끊임없이 주위를 살펴야 했다. 5월 중순을 넘어 여름으로 꺾어지는 계절의 아스팔트 도로는 뜨거웠고, 이마엔 더위 때문인지 식은땀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이 맺혔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걷는 건, 한 시간조차도 쉽지 않았다.

평일임에도 꽤 많은 사람이 각자의 기억 속을 걷고 있었다. 함께 온 아이에게 그분에 대해 얘기하는 젊은 부부, 한참을 굳어진 표정으로 수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중년 남자, 박석에 쓰인 글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조심스레 묘역을 걷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 난 가드레일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태우며 그들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 이제 막 파래지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로 자리한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있다. 바위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흐릿해져가는 것을 막을 방법을 나는 10년이 되도록 찾지 못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묘역에 오래 머무는 것이 쉽지 않아 더 걷기로 했다. 기념관도 많고 그를 떠올리게 할 물건들을 파는 가게도 있다. 라면이나 막걸리를 팔며 자리를 지키는 식당도 보였다. 난 쫓기는 사람처럼 어디에도 들어가질 못하고, 아무도 없는,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곳을 찾아 걸었다. 갓길에 주차된 차들의 행렬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걷고 나서야 혼자가 됐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가드레일 아래로 흐르는 도랑이 전부였다. 거의 말라가는 물을 보며 내년에는 결코 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시사IN 조남진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앞둔 5월12일 봉하마을을 찾은 시민들이 묘역 앞을 지나고 있다.


누군가를 상실한 것이 동력이 되어 말해지는 희망은 늘 달갑지 않았다. 이모티콘이나 짧은 글로 기억을 되새기는 것은 손쉬운 제스처로 느껴졌고, 그분의 이름을 자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는 여전히 어떤 힘이고 상징이자 근원이기까지 했다. 많은 이들은 그를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워했지만, 난 묻고 싶었다. 10년 전 그때로부터 우리는 아직 한 발자국도 못 뗀 건 아니냐고. 그리고 고백해야 했다. 난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어느새 해는 산을 넘어 논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람은 조금 차가워지고 주위는 더욱 고요했다. 그분을 누구보다 사랑했을 사람이 당분간은 이곳을 찾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을 생각했다. 그는 누군가를 잃지 않고도 얘기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돌아올 테니 그때 기분 좋게 반겨달라고 했다. 반드시 기억하고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 당시 그의 말에 느꼈던 고마움일 것이다.

터미널로 되돌아가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다. 해가 지고 있는 덕분인지, 길이 조금 익숙해진 것인지 땀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가드레일 너머 넓게 펼쳐진 푸른색 논과 나무들을 보며 걸었다. 나와 그 풍경 사이에, 노란색 바람개비는 계속해서 돌고 있다.



고등학생이 부치는 편지

이희찬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5월 27일 월요일 제610호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멀어 보이는 목표라도 작은 실천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은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원대한 계획이나 꿈을 가지고 있지만, 첫 한 걸음이 두려워 시작하지 못합니다. 고등학교 생활의 종착역을 바라보고 있는 저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에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21세기의 첫해에 태어난 저에게 대통령에 대한 첫 기억은 그를 떠나보내는 장면이었습니다. 2009년 5월23일 토요일 아침, 버스 안 라디오에서 뉴스 속보로 대통령을 처음 접했습니다.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역사를 지켜봤던 부모 세대와 달리, 제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었지만 역으로 우리가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2009년, 초등학교 2학년에게 전직 대통령의 서거는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뉴스에서 목격한 광경은 뇌리에 남았습니다. 2009년, 2012년, 2014년으로 이어진 사건들은 저를 각성시켰습니다. 가족과 함께 노무현재단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봉하마을에도 다녀왔으며, 작년에는 노무현장학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서민을 위해 헌신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보를 접하면서 국제적인 공조를 통하여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소수자들을 돕는 외교관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통령을 바라보며 외교를 진로로 잡았을 때, 주위의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허황된 꿈이라는 비난을 수없이 들었고,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할 뻔한 적도 많았습니다. 이때마다 <여보, 나 좀 도와줘> <성공과 좌절> 등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서를 읽으며 나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노무현의 길’에서 ‘이희찬을 길’을 찾았습니다.

ⓒ사진공동취재단
2009년 5월27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분향소에서 조문객이 조문하고 있다.


누구도 걷지 않았던 길, 피할 수 있었던 험한 길을 굳이 선택한 노무현 대통령의 삶에서 저는 처음으로 ‘도전’을 배웠습니다. 그 도전들은 역설적으로 대통령의 서거 이후에 꽃을 피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편한 길을 선택했다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도 안락하게, 그러나 눈과 귀를 닫은 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과의 타협보다 불의와 맞서는 길을 골랐고, 역사의 진보를 이뤄냈습니다.

어느덧 10주기, 이제 단순히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서 살아갈 희망을 봤듯이, 더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에게서 희망을 찾기를 소망합니다. 그와 동시에 이젠 대통령을 놓아드리고 싶습니다. 정치적 싸움에 노무현이란 이름이 너무 많이 사용됐고, 그 과정에서 가치가 퇴색된 면도 적잖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끝에 도달하지 못하리라 믿었던 천리 길도 절반은 넘게 온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좁은 길 옆에는 어느새 형형색색의 꽃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