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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자 현상은 왜 생겼나

일취월장7 2019. 4. 30. 09:52

20대 남자 현상은 왜 생겼나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20대 남자 현상은 왜 생겨났나? ‘반(反)페미니즘 정체성 20대 남성’의 특수성을 가설로 추려봤다. 적어도 우리는, 생산적으로 틀리려고 노력했다.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2019년 04월 29일 월요일 제606호



<시사IN>과 한국리서치의 20대 남자 공동기획 시리즈는 ‘20대 남자 현상’의 실체와 동력을 밝혔다. 제604호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에서 우리는 20대 남자 현상의 핵심이 ‘권력이 남성을 차별한다는 인식’이라고 지목했다. 제605호 ‘반(反)페미니즘 전사들의 탄생’에서 우리는 이 20대 남자 현상의 엔진을 확인했다. 25.9%, 그러니까 넷 중 한 명에 이르는 크고 강고한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을 포착했다. 20대 남자 현상이라고 세간에 알려진 현상 대부분은 이들 강고한 정체성 집단이 주도했다. 이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다. ‘무엇이’와 ‘어떻게’를 확인했으니, 남은 질문은 ‘왜’일 수밖에 없다. 20대 남자 현상은 왜 탄생했나? 

“모르겠는데요.” 분석을 총괄한 한국리서치 정한울 연구위원(정치학 박사)이 말했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20대 남자 전체를 세대론으로 묶어서 보면, 반페미니즘 말고는 다른 세대와 차이를 보이는 항목이 많지 않습니다. 세대론으로 접근하면 답을 찾기 어려워요.” 20대 남자들이 다른 세대·성별과 갈라지는 지점을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유일한 예외는 페미니즘에 대한 단호한 반대와 강한 거부감이다. 그런데 그건 우리가 찾는 이유라기보다는, 어떤 이유가 작동한 결과일 가능성이 더 높다.

ⓒ연합뉴스
반(反)페미니즘 정체성을 지닌 20대 남성은 초·중·고교 과정에서는 여성이 더 뛰어나지만
취업 후에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더 유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20대 남자가 다른 세대·성별과 무엇이 다른지 물어보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았다. 우리는 20대 남자 현상의 핵심 엔진을 25.9% 정체성 집단으로 특정했으므로, 이들이 왜 등장했나를 물어보는 것이 더 나은 접근법이다. 그리고 이들을 이해하면, 이들을 엔진으로 하는 20대 남자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208개 질문 문항을 짜면서, 20대 남자 현상을 설명할 가설을 최대한 집어넣었다. 정한울 연구위원이 통계 처리를 거쳐 기각할 가설과 검토할 만한 가설을 추렸다. 우리가 추린 가설들의 조합을 소개한다. 앞으로 볼 문항들은, 반페미니즘 정체성과 통계적으로 한 덩어리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고 나온 것들이다.

■‘피해’의 경험이 잡히다

16~17쪽 <표 1>은, 각 생애주기별로 남녀 중 어느 쪽이 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은 결과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20대 남성, 그러니까 25.9%의 답변만 따로 모아 그렸다. 이 정체성 집단은 초·중·고교 교육과정과 대학 입시에서는 여성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취업 시험에서도 약간이나마 그렇다. 하지만 취업 후 업무능력과 사회생활에서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더 유능하다고 본다.

표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왼쪽이다. 초·중·고교 교육과정에서 여성이 더 유능하다는 응답이 39.1%나 된다. 이건 그 외 20대 남자(28.4%)보다 훨씬 높고, 심지어 20대 여자(33.7%)보다도 높다. 대학 입시로 와도 이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29.2%가 여성의 손을 들어준다. 이것도 그 외 20대 남자(21.7%)나 20대 여자(23.5%)보다 높다.

이 공고한 정체성 집단은 ‘여성’과 ‘유능’을 이어 붙이는 데 일관되게 반대한다. 하지만 교육과정만 놓고 보면 모든 세대·성별을 통틀어 여자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그룹이 이들이다. 취업 시험도 정도는 덜하지만 자신감 없기는 마찬가지다(여성 유능 20.8%, 남성 유능 12.5%). 생애 경험이 충분히 축적된 영역(교육·입시·취업)에서 이들은 또래 여자들에게 거의 주눅 들어 있다.

교육과정에서 남자들이 또래 여자에 밀린다는 관찰은 역사가 길다. 남자아이의 부모는 내신 성적에서 밀릴 것을 걱정해 남녀공학을 기피한다. 2018학년도 수능 성적을 남녀로 나눠 분석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자료를 보면, 국어·수학(나)·영어에서 여학생 성적이 높았다. 수학(가)는 여학생 평균이 0.1점 높아서 사실상 같았다.

<표 2>는 짝짓기 시장에서 이들이 겪은 경험을 짐작하게 해준다. “한국은 연애·결혼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이기적으로 군다”와 “여자가 남자에게 이기적으로 군다”라는 문장을 각각 제시하고, 동의 여부를 물었다. 그 결과,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남자의 이기심은 유난히 낮게 평가했고(8.7%), 여자의 이기심은 단연 높게 평가했다(65.2%). 데이트 경험에서 상대방 성별이 더 이기적이고 자신들이 더 헌신적이라고 믿는 건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들은 격차가 눈에 띄게 크다.

두 문항을 조합해 ‘짝짓기 상처 지수’를 만들어보자. “상대방 성별이 이기적이다” 응답률에서 “내 성별이 이기적이다” 응답률을 빼보았다. 차이를 한눈에 비교하기 좋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의 ‘짝짓기 상처 지수’는 56.5다. 그 외 20대 남자는 19.3이다. 30세 이상 남자는 13.4다. 20대 여자들은 25.2(남자 이기적 57.3-여자 이기적 32.1)다. 30세 이상 여자는 18.7(남자 이기적 60.8-여자 이기적 42.1)이다.

어떤 세대·성별보다도,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짝짓기 시장에서 가장 상처받는 집단이다. 이들은 두 질문 모두에서 단연 튀는데, 자기 성별은 가장 이타적으로, 상대방 성별은 가장 이기적으로 평가했다. 즉, 이들은 연애·결혼 시장에서 상대에 대한 불신과 자기 긍정 둘 다 가장 강하다. 이러면 연애·결혼 시장에서 불만을 갖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이들의 유난한 평가가 실제 현실대로라면, 기성세대 여자보다 지금 젊은 세대 여자가 더 이기적이 되고, 동시에 기성세대 남자보다 지금 젊은 세대 남자가 더 이타적이 되는 과정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의미다. 이들은 “남자가 이기적으로 군다”에 동의하는 비율도 기성세대 남자보다 훨씬 낮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들의 유난한 평가가 다른 세대·성별 대비 유난한 피해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결과는 별다른 가정을 도입할 것 없이 잘 설명된다. 이들의 ‘짝짓기 상처 지수’가 현실을 반영한 결과인지 피해의식인지는 우리 조사만으로 확증하기 어렵다.

통계를 분석해본 정한울 연구위원은 학창 시절 경험과 연애·결혼 시장의 경험이 반페미니즘 정체성을 형성한 후보들 중 하나라고 지목했다. 둘은 삶의 경험에서 20대 남성의 피해의식이 축적될 유력한 경로다. 이 피해의식을 민감하게 느끼는 남자일수록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맥락이 제거된 공정’의 등장

우리는 “한 팀으로 일을 했을 때, 기여한 만큼 차등적으로 보상을 받는 것과 공평하게 받는 것 중 어느 쪽이 공정한가?”라고 물었다(<표 3-1>). 무엇을 공정하다고 판단하는지, 공정에 대한 감각을 물은 것이다. 통계분석 결과 이 문항이 반페미니즘 정체성과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나왔다.

제604호와 제605호 기사에서 우리는 ‘공정을 중시하는 감각’은 20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 세대·성별에 공통된 속성이라는 사실을 보였다. 그런데 “무엇이 공정인가?”라고 물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20대 남자는 ‘차등 보상’을 더 선호했다. 30세 이상 남자는 20대보다는 ‘공평 보상’ 쪽으로 더 가서 두 응답이 팽팽했다. 우리의 주요 분석 대상은 아니지만, 30세 이상 남자 중에서도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분명하게 차등 보상을 선호(61.3%)했다.

이 질문에는 20대 여자도 65.1%가 차등 보상을 선호했다. 30세 이상 여자는 공평 보상으로 쏠렸다(53.5%). 무엇이 공정한지를 판단하는 감각은 성별보다는 세대로 갈린다. 20대는 한 팀으로 수행한 프로젝트에서도 개인별 성과 평가를 선호한다. 공동책임의 원리는 20대에서 남녀 불문 인기가 없다.

‘개인 책임, 개인 보상’의 원리가 남자라는 성별과 만나면 재미있는 화학작용이 벌어진다. 개인 책임, 개인 보상을 선호하는 성향은, 남자들 중 반페미니즘 정체성을 예측하는 지표로도 잘 작동한다. 왜 그런가? <표 3-2>부터 <표 3-4>까지를 보면 단서가 있다. 우리는 “취업 시 여성 할당 정책에 동의하는지”를 물었다(<표 3-2>).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100%가 동의하지 않는다. “전혀 동의 않는다”는 강경 응답만 91.3%다. 이들에게 취업 시 여성할당제는 불의와 불공정의 상징이다.

반전이 있다.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여성 지원과 보상 정책에 동의하는지”도 물어봤다(<표 3-3>).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이 단호한 여성혐오 집단이라면, 여성을 위하는 정책이라면 덮어놓고 반대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문장에는 정체성 집단 중 64%가 동의했다.

<표 3-3>은 이 시리즈 전체에서도 손꼽히게 튀는 그래프다. 여성 우대 문제만 나오면 전체 여론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던 정체성 집단이, 여기서는 다른 남자들의 여론과 처음으로 겹쳤다. 이들의 동력이 ‘덮어놓고 여성혐오’라는 가설에는 <표 3-3>이 중요한 반례가 된다. 이들은 맹목적이지 않다. 기준을 세워 상황에 따라 판단한다. 다만 그 기준이 보통의 남자들과 다르다.

그 ‘다른 기준’이란 무엇인가. 핵심은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는가’로 갈린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여성의 잘못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이것은 여성이 사회적·생물학적으로 진 짐이다. 지원과 보상은 정당하다. 반대로 책임이 자기 안에 있다면 그것은 개인이 감당할 일이다. 이럴 때는 국가가 뭔가를 보장해준다면 불공정하다.

이런 구분, 책임 소재가 그 사람 내부인지 외부 환경인지를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대부분 사람들이 갖고 있다. 사회심리학은 이런 걸 ‘귀인’이라고 부른다. 원인이 내부와 외부 중 어디로 귀착되느냐를 따진다는 의미다. 내부면 본인 책임이다. 외부면 도와야 한다. 아주 간명하고 알기 쉬운 아이디어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의 그래프조차 보통의 남자들과 겹치게 만들 만큼 자명해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부냐 외부냐를 가르는 경계선을 판단하는 건 쉬워 보이지만 매우 어렵다. 사람들은 대체로 남의 행동을 설명할 때 외부 환경 요인을 과소평가하고, 그 사람의 내재적 특성 때문이라고 과하게 믿는 경향이 있다. 사회심리학에는 ‘기본 귀인 오류’로 널리 알려져 있는 개념이다. 세계적인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최근작 <불평등 트라우마>에서 이렇게 썼다. “환경의 힘을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멍청해서 가난하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대표적인 기본 귀인 오류다. 이것이 바로 ‘편견’의 정의라고 볼 수 있다.”

내부 원인이면 본인이 책임지고, 외부 원인이면 돕는데, 그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를 가혹하게 잡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다시 말해, 환경과 사회구조의 힘을 고려해주지 않고 그 사람의 내재적 특성 탓(“게으르고 멍청해서 가난해”)을 하는 경향이 강해지면 어떻게 될까. 명백히 외부에 해당하는 극소수 사례(육아 경력단절)를 제외하면, 모든 문제가 내부로 간주된다. 그러면 모든 우대정책이 부당하고 불의한 것이 된다.

일리노이 대학 심리학과의 린다 스킷카 등 연구자들은 2002년 논문(‘Disposit-ions, Scripts, or Motivated Correction?’)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보고한다.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 환자의 치료비를 공공이 도와야 할까? 여기에도 귀인 문제가 개입한다. 보수 성향 응답자들은 그 환자가 성폭행이나 수혈 등 외부 원인으로 감염이 되었을 때는 돕는 데 찬성하지만, 동성애 등 자신의 선택으로 감염되었을 때는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진보적인 응답자들은 자신의 책임으로 감염된 환자들도 도와야 한다는 응답이 보수적 응답자보다 많았다. AIDS에 걸리고 싶어서 성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다. 환경과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 ‘외부’ 귀인을 넓게 잡아주는 것이다.

하이라이트는 그다음이다. 실험자들은 응답자에게 실험실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높낮이를 판단하는 과제를 주었다. 질문과 상관없는 일에 신경을 쓰도록 주의를 분산시킨 것이다. 응답자들은 그 과제를 하면서 동시에 같은 질문에 답을 했다. 그러자 보수·진보 양쪽 다 공공의 치료비 보조에 반대 응답이 올라갔다. 더 의미심장하게도, 진보적 응답자들의 반대 응답이 더 많이 올라서 보수파와 차이가 없어졌다. 공정의 문제를 판단할 때 다른 과제로 인지 부담을 주면, 응답자들이 덜 섬세해지고 더 단호해진다.

게임이론과 진화경제학 연구자인 최정규 교수(경북대 경제학과)는 이 실험을 기자에게 소개한 뒤 이렇게 설명했다. “경제학의 시조인 애덤 스미스가 18세기부터 강조한 얘기가 있다. 공정성을 판단하는 건 앞뒤 맥락을 섬세하게 고려해야 하는 작업이다. 역지사지도 해보고, 상대 입장에 서보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상상해야 한다. 이게 원래 뇌에 부담이 큰 작업이다. 그래서 다른 과제로 인지 부담을 주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 부담을 덜려면, 섬세함을 덜어내고 일관되게 가혹한 판단을 하면 된다.

이제 <표 3-4>를 보자. “여성 고위직 비율 확대 정책에 동의하는지”를 물었다. 우리가 알던 익숙한 그래프 형태로 돌아간다. 한국 사회에서 고위직 여성이 부족한 이유는 여성 내부에 있나 외부에 있나? “외부”, 그러니까 성차별과 유리천장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국가 정책으로 여성 고위직을 늘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30세 이상 남자들은 “약간 동의”가 가장 많이 나온다(표에는 없지만, 여자들은 단호하게 동의한다). “내부”, 그러니까 여성 자신의 능력이 이유라고 믿는 사람들은 국가 개입이 불공정하다고 믿는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동의 안 함” 79.2%로 단연 튄다.

이제 <표 3-2>와 <표 3-3>이 다른 이유도 분명해진다. 취업에 실패하는 이유는 여성 내부에 있다고 믿는 남자들이 단연 많다. 그래서 <표 3-2>는 왼쪽으로 쏠린다. 경력단절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성 외부에 있다고 남자들도 믿는다. 그래서 <표 3-3>은 오른쪽으로 쏠린다. <표 3-4>는 둘의 사이에 있다. 여성 고위직이 부족한 이유가 외부에 있다고 믿는 30세 이상 남자는 오른쪽으로, 내부라고 믿는 20대 남자는 왼쪽으로 엇갈린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여성에게 덮어놓고 가혹하다기보다는, 도움을 받을 자격에 가혹하다. 그러니까 책임이 내부인지 외부인지를 결정하는 경계선이 깐깐하다는 점에서 분명하고 지속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표 3-1>은 이런 깐깐함이 20대들에게 남녀 불문 나타난다고 암시한다. 20대 여자도 기성세대 여자와는 다른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는 페미니즘이라는 주적, 경계를 깐깐하게 긋는 태도를 켜기 좋은 주적이 있다. 먼저 폭발하기 좋은 환경을 만났다.

조사 결과를 접한 임동균 교수(서울대 사회학과)는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에서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현재 20~40세를 대략 아우르는 이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공정성과 약자 보호다. 그런데 이게 공정성을 기성세대보다 더 강조한다기보다는, 그거 말고 나머지 사회규범들, 암묵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던 규범들이 줄줄이 해체되어서 그렇다. 공정성 외의 나머지 가치 잣대가 전부 흩어지는 바람에 공정성 잣대 하나가 증폭된다. 경계선(귀인 판단)이 가혹해지는 경향은 밀레니얼의 이런 세대적 특성도 있고, 20대가 복잡한 사회생활 경험이 많지 않아서 생기는 ‘연령효과’도 있을 것이다. 둘 중 어느 힘이 더 주된 것인지는 시간을 두고 관찰해볼 문제다.”

사람들의 능력이나 노력 문제처럼 보이는 것들이 알고 보면 사회구조와 환경의 영향일 수 있다. 지능, 학습능력, 사회성 등 명백히 타고나는 것으로 보이는 능력들조차 그렇다. 그런 맥락을 무시하고 웬만한 귀인을 다 내부로 간주해버리는 건 쉽고 편하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멍청해서 그렇다”라고 간주하는 데는 섬세함이 필요 없다. 공정성이라는 단일 잣대만 살아남으면 이 경계선이 유난히 가혹해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납작한 공정, ‘맥락이 제거된 공정’을 마주한다. 맥락도 구조도 증발한 채, 사실의 조각 몇 개가 ‘팩트 폭행’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온라인 공간에서 끊임없이 복제된다. 그래서 팩트 폭행은 우리 시대를 상징할 만한 유행어다. 이 말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맥락이 제거된 공정’의 시대를 증언한다. “역지사지도 해보고 상대 입장에 서보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상상하는, 앞뒤 맥락을 섬세하게 고려하는 작업”이 설 자리가 사라진다.

■병목 사회의 딜레마


통계분석은 또 한 번 의외의 문항과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을 엮는다. 경쟁에 대한 태도가 그것이다. <표 4-2>를 보자. “경쟁의 승자가 더 많은 몫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문장을 주고 찬반 의견을 물었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20대 남자 집단은 87%가 찬성해서 단연 높다. 즉, 경쟁 원리를 긍정하고 수용하는 성향이 강하다. 여기에 찬성하는 비율이 반페미니즘 정체성과 관계가 있다고 분석됐다.

그런데 <표 4-1>은 의외의 결과를 보여준다. 경쟁 원리를 수용하는 성향이 높은 정체성 집단이, 경쟁을 활력소가 아니라 피로의 근원으로 보는 성향도 가장 높다. 이런 묘한 관계는 경쟁에 대한 설문 전반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등장한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경쟁이 삶의 질을 악화시킨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경쟁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본다. 한국에서 경쟁의 결과는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한다고 본다. 그런데도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은 운보다는 실력 문제라고 본다. 이런 모순은 정체성 집단이 가장 뚜렷하기는 하지만, 다른 세대·성별도 비슷하다. 즉, 사람들은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과도하게 몰입한다.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첫째, 왜 이런 모순적인 태도가 나올까. 둘째, 이게 20대 남자 현상과 무슨 상관일까.

두 질문에 동시에 답해줄 수 있는 논리를 정치철학자 조지프 피시킨이 제공한다. 책 <병목 사회>에서 피시킨은, ‘전사 사회’라는 비유를 든다. 일종의 원시 부족사회인 전사 사회에서, 좋은 직업은 오로지 전사 하나뿐이다. 전사가 되어야만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 아이가 성인이 되는 해에 치르는 전사 시험은 완벽하게 공정하다. 그렇다면 이 사회는 공정할까? 피시킨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는 기회 자체의 종류가 지나치게 제약되어 있다. 전사가 아닌 다른 재능은 쓸모없고, 아이들의 소망과 목표는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전사가 되는 것 하나로 강요된다.

전사 시험은, 그것이 아무리 공정하다 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과몰입시킨다. 경쟁은 과열되고, 자원이 낭비되고, 원하지 않는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지원자들은 전사 시험을 통과하는 데 집중하고, 시험의 가치를 기를 쓰고 긍정한다. 그게 유일한 통로라서다. 이것이 피시킨이 ‘병목’이라고 부르는 원리다. 이런 사회는 구조적으로 공정할 수 없다. 통과하는 병목이 아무리 공정하게 관리되더라도, 병목 이전과 병목 이후를, 섬세한 의미로 ‘공정’하게 만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전사 사회는 지적 유희로 그치지 않는다. 중요한 시험 하나로 삶의 경로가 결정 나는 나라는 현 시대에도 많다. 피시킨은 이걸 ‘중요한 시험 사회’라고 부른다. 전사 사회의 현실판이다.

피시킨의 병목 사회 모델은 우리 조사가 보여주는 모순, 경쟁에 대한 긍정과 피로가 동시에 일어나는 모순을 병목과 과몰입으로 잘 설명해준다. 중요한 시험 사회에서는, 병목에 대한 몰입·긍정·추종과 피로·과부하가 동시에 나타난다. 한국 사회는 고도성장기 내내 중요한 시험 사회였다. 대입 시험, 사법고시 등이 ‘중요한 시험’의 상징으로 작동했다. 경쟁에 대한 태도에 세대별 차이가 크지 않은 이유가 이것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 중요한 시험 사회를 거쳐간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경쟁에 강한 몰입감을 보여준다.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 가치를 훼손하거나 우회하려 든다고 간주되는 어떤 시도든 적대감을 드러낸다. 이것도 자연스럽다.  
<표 5-1>을 보자. “한국에서는 한번 실패하면 재기가 어렵다”라는 문장에,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이 두드러지게 강한 동의를 표했다. 한국 사회의 구조를 강한 병목 구조로 본다는 징후다. 이런 조건에서, 경쟁의 가치에 개입하려는 외부의 시도는 그게 무엇이든 핵심 가치를 훼손하는 시도다. 그걸 흔들려는 시도는 대단한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바로 그런 기획으로 간주된다.

■세대 계약이 무너지다

제604호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 기사가 온라인에 공개됐을 때, 포털사이트에서 추천을 많이 받은 댓글 중 하나는 이렇다. “구시대 남자가 얻은 기득권을 젊은 세대는 경쟁해서 얻어야 하니 상대적으로 불공평하다고 느끼겠지. 구시대 남자들이 안 하던 의무는 늘고 권리는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거야.” 우리의 마지막 주인공인 세대론이다.

세대론은 반페미니즘 정체성을 작동시키는 중요한 변수다. 20대 남자들은 부모 세대에서 여성 차별이 심각했다는 데 이견이 없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조차도 79.2%가 이에 동의한다. 기성세대 남자는 권리를 누렸다. 하지만 20대는 이중으로 권리를 박탈당한다고 이들은 느낀다. 남자의 기득권과 고도성장 세대의 기득권이 동시에 사라진다.

이것은 세대 계약의 붕괴로 드러난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나는 부모 세대보다 기회를 더 많이 얻을 것이다”라는 문장에 73.9%가 “그렇지 않다”라고 답했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의 기회를 열어주려 하나 빼앗으려 하나?”라는 질문에는, 69.6%가 “빼앗으려 한다”라고 답했다.

세대 계약을 불신할수록 반페미니즘 정체성도 강하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설문이 <표 5-2>다. “내가 낸 국민연금은 어차피 못 돌려받는다”라는 문장에,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의 82.6%가 동의했다. 이들은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기회를 빼앗고 있고, 자신들은 기성세대를 부양하나 그것을 후속 세대에게 돌려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구구조가 감소 추세로 들어선다는 사실이 이 공포를 뒷받침한다.

이렇게 해서 ‘이중의 착취’가 발생한다. 기성세대에 의한 착취와 여성에 의한 착취가 동시에 쏟아진다고 느끼는 이들이 강고한 정체성 집단으로 뭉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써왔던 ‘남성 마이너리티 정체성’은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부족하다. ‘젊은 남성 마이너리티 정체성’이라고 써야 제대로 된 표현이다. 이 이중 마이너리티라는 현실에서 기성세대 남성의 점잖은 훈계는 먹혀들지 않는다. 이것은 남녀 갈등인 동시에 세대 갈등이기도 한데, 이 전선에서 기성세대 남성은 애초에 이들의 편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나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한 바퀴를 돌았다. 우리 조사는 반페미니즘 정체성 20대 남성의 특수성을 몇 가지로 추려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들은 또래 여자에게 위축되거나 피해의식을 가졌을 개연성이 있다. 초·중·고교 교육과정이나 입시 경쟁에서, 또 데이트 시장에서 ‘피해의 경험’을 공유한다. 사실이든 허위든 이것이 정체성의 원재료일 수 있다.

이들은 공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특별하지 않다. 이들은 공정 그 자체 외에 다른 잣대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렇게 해서 ‘맥락이 제거된 공정’이 시대정신으로 등장한다. 이 태도가 생물학적 남성 성별과 만나면 중요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이 조합은 여성에게 덮어놓고 가혹하다기보다는, ‘도움을 받을 자격’에 유난히 가혹하다.
ⓒ연합뉴스
1월29일 오전 경남 창원시 해군교육사령부 교육훈련대에서 훈련병이 목봉체조를 하고 있다.

경쟁을 피곤해하면서도, 경쟁의 가치를 건드리는 시도에 크게 반발한다. 병목사회에서 병목을 통과하는 경쟁은 특별히 신성하다. 20여 년의 생애경험에서 피해자는 오히려 자신이지만 특별대우를 요구할 생각은 없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20대 남성 집단은, 대입 ‘남성’ 가산점 제도에 83.4%가 반대했다. 그런데 피해자인 자신에게 배려는커녕 기성세대는 세대 계약 붕괴를 안겨주고, 권력은 특권을 요구하는 여자들 편이다.

이런 세계에서, 상호 신뢰에 기반을 둔 호혜적 관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외상 거래, 그러니까 어떤 영역에서 좀 손해를 보더라도 나중에 다른 형태로 돌려받는 거래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 기성세대 남성은 군 복무라는 성차별을 감내했지만 사회에 진출하면 그걸 이자까지 쳐서 돌려받았다. 사회는 군대 원리로 작동했고, 군필자는 우대받았다. 바로 이런 외상거래를 이제는 신뢰할 수 없다. 바로바로 손익계산을 맞추는 방법밖에 없다. ‘맥락이 제거된 공정’이라는 잣대는, 이 즉시 현금거래의 원리에 최적화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도달한, ‘20대 남성 마이너리티’의 마음이다.

이 조사는 가설부터 만들어나가는 탐색적인 조사였다. 여기서 제안된 이야기는 한 차례 조사에서 추려낸 가능성의 집합일 뿐이다. 가설을 검증하려면 더 정교하고 목표를 좁힌 설문지와, 직접 인터뷰 등 다른 방식의 접근방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긴 이야기는, 아마도 여러 군데가 틀렸다고 결론 날 것이다. 탐색적 조사에서 뽑아낸 가능성의 이야기가 그대로 정답인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생산적으로, 반증 가능하게 틀리려고 노력했다. 이제 무엇이 틀린 이야기인지를 검증하기가 이전보다 쉬워졌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장자연 사건의 목격자인 윤지오씨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힘닿는 대로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있다. 윤지오씨의 공개 증언으로 검찰 과거사위의 진상조사 기간도 늘어났다.

김연희 기자 uni@sisain.co.kr 2019년 04월 29일 월요일 제606호

시작 전부터 사람이 몰렸다. 4월14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 좌석 113개는 이미 만석이었다. 보조의자가 동원됐다.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듯 홀 뒤쪽으로 방송사 카메라가 빼곡했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주최로 지난 3월 출간된 <13번째 증언> 북콘서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리는 자리였다. 흰색 원피스를 입고 무대에 선 윤지오씨의 단발머리가 한결 가벼워 보였다. “한 분 한 분 평생 기억하도록 하겠다. 솔직히 지난 10년간 한탄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섣불리 (신원을 공개하고) 나오는 건 너무 위험했다. 그러면 13번째 증언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살아 있어서 감사하다.”

10년 전 스물두 살 윤씨는 ‘장자연 사건’의 참고인 중 한 사람이었다. 2009년 3월7일 목숨을 끊은 신인 배우 장자연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술접대·성상납을 강요당했다는 내용의 문건을 남겼다. 언론사 사주, 유명 드라마 PD 등이 언급된 ‘장자연 리스트’는 연예계의 어두운 면을 비추는 고발장이었다. 수사가 시작되자 피의선상에 오른 이들은 하나같이 장씨를 모른다고 하거나 혐의를 부인했다. 장자연씨와 함께 더컨텐츠엔터테인먼트의 신인 배우였던 윤씨만이 장씨의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당시 경찰과 검찰은 참고인인 윤씨를 12회나 불러 조사했다. 윤씨는 ‘이순자’라는 가명으로 밤늦게 시작해 새벽에 끝나는 강도 높은 수사에 임했다. 2018년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검찰 과거사위) 진상조사단이 장자연 사건 재조사에 착수한 이후에도 윤씨의 증언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윤씨는 ‘김지연’ ‘윤모씨’라는 호칭으로 신분과 얼굴을 숨겨왔다.


ⓒ시사IN 이명익
윤지오씨는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는 용기를 주신 국민들에게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10년의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윤씨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20대 후반, 배우로서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계약하려 했던 대형 기획사의 대표로부터 ‘성상납’ 제의를 받기도 했다. 이를 거절하자 대표는 윤씨에게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돌아가려고 하느냐”라고 말했다. 윤씨는 <13번째 증언>에서 “(장자연) 언니의 죽음으로도 세상은, 아니 연예계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라고 썼다. 그래서였다. 윤씨는 결국 지난 3월5일 얼굴과 이름을 공개했다. 같은 날 윤씨가 쓴 책 <13번째 증언>도 세상에 나왔다. “2009년 수사 당시 최선을 다해 조사에 협조했지만 묵인돼버렸다. (세상에 대한) 신뢰를 크게 잃었다.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가면서 재조사가 시작됐다. 23만명이나 되는 국민들이 여전히 자연 언니의 죽음을 한탄스럽게 생각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시사IN> 제600호 ‘넌 발톱의 때만큼도 모른다고 하더라’ 기사 참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윤씨는 뉴스, 라디오 방송, 시사 프로그램, 신문, 온라인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힘닿는 대로 인터뷰에 응했다. 3월15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리해서 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분명 가해자가 단 한 번이라도 볼 거라고 생각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는 용기를 주신 국민들에게 감사한다.”

장자연 사건과 관련해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다. 장자연 문건은 언론에 공개된 4장 이외에 리스트 형태로 된 부분이 더 있었다. 윤씨는 2009년 장자연씨 유족이 봉은사에서 문건을 태우기 전에 전문(全文)을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윤씨를 통해 이 리스트에 한 언론사 사주 일가의 같은 성을 가진 사람 세 명, 유명 PD와 감독, 이름이 특이한 국회의원 등 사회 유력 인사들 이름이 쓰여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2009년 수사 때 검찰과 경찰은 이 부분을 묻지 않았다. 윤씨는 3월12일 검찰 과거사위 진상조사단에 나가 관련 내용을 진술했다. 3월18일에는 장자연씨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조 아무개 전 <조선일보> 기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2009년 수사 당시 윤지오씨는 가라오케에서 조씨가 장자연씨를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진술했지만 검찰은 조씨를 무혐의 처분했다. 지난해 검찰 과거사위가 출범하면서 조씨는 9년 만에 재판에 넘겨졌다.

공개 증언에 나서며 윤씨는 ‘생존 방송’을 시작했다. SNS나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자신이 무사함을 알리고, 시청자들이 윤씨의 안전을 지켜주는 일종의 ‘셀프 CCTV’였다. 이 생존 방송을 통해 시청자들은 공익제보자가 겪는 제도적·심리적 어려움을 생생히 목격하기도 했다. 윤씨는 2018년 JTBC와 익명 인터뷰를 한 이후 당시 살고 있던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를 두 차례 당했다고 했다. “전화 인터뷰에서 책을 쓴다고 한 시점부터 제 행방을 추적하는 분들이 있었다. 어떤 언론사였다. 저는 A4 용지 한 장(사라진 장자연 리스트)을 넘어가는 분량의, 30명 가까운 분들을 상대해야 한다(2019년 4월11일, JTBC <뉴스룸> 인터뷰 중).”

신변 보호 위해 ‘생존 방송’ 하기도


신변 보호를 위해 경찰에서 지급한 비상호출용 스마트워치가 작동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윤씨는 3월30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현재 스마트워치로 신고한 지 약 9시간39분이 경과했는데 아무 연락이 되지 않는다’라며 불안감을 토로했다. 윤씨는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24시간 동행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간 다음 날 경찰은 여경 5명으로 특별팀을 구성해 윤씨를 보호하고, 공익제보자에 대한 신변보호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당초 검찰 과거사위의 장자연 사건 재조사는 3월 말 종료될 예정이었다. 3월12일 검찰 과거사위는 “진상조사단 활동을 추가로 연장하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과거사위 소속 진상조사단에서 “충실한 조사를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하다”라는 의견을 전달했지만 과거사위에서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증언자 윤지오의 등장은 예정된 결말을 뒤바꾸는 데도 일조했다. 3월18일 문재인 대통령은 “검·경의 명운을 걸고 장자연·김학의·버닝썬 사건을 낱낱이 규명하라”고 지시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3월19일 검찰 과거사위 진상조사 활동을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10년 전 지연된 정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 딱 두 달 더 늘어났다. 윤씨는 조만간 가족이 있는 캐나다로 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