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시사저널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대한민국, 길을 묻다⑩ 이어령

일취월장7 2019. 3. 12. 09:54

[이어령 인터뷰①] “‘빨리 감기’ 하듯이 살고 있다”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2 08:00
[시사저널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대한민국, 길을 묻다⑩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산업화 시대에 밀려나 있던 복지, 생명가치 살아날 것”(上)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⑩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을 부르는 호칭은 아주 다양하다. 교수, 장관, 고문, 이사장. 대개는 고민하다가 쉽게 선생님으로 부른다. 지난 50여 년 ‘이어령’ 이름 석 자 앞뒤론 수많은 타이틀이 붙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지만, 또 어느 것 하나에도 얽매인 적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어디서나 자유롭게 사고했고 자유롭게 글 썼다.” 그 덕에 그에겐 ‘창조의 아이콘’이라는, 누구도 쉽게 얻지 못할 별명이 수년 동안 호(號)처럼 따라붙었다.

‘창조’라는 단어는 이어령의 한평생을 설명하는 ‘열쇠’와 같은 것이었다(2013년 호영송 저서 《창조의 아이콘 이어령 평전》 338쪽). 그의 지난 행보는 대부분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의 ‘첫발’이었다. 초대 문화부 장관 시절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기획했고,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엔 13개국 언어의 24시간 통역 봉사단을 꾸려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 한창 고민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를 2002년 ‘디지로그’라는 신어를 통해 일찍이 강조한 바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 시사저널 임준선

“새하얀 눈길에 첫발 찍는 재미로 살았다”

그의 생 역시 세상이 맞춰놓은 시계와는 사뭇 다르게 움직였다. 20대에 혜성같이 등단해 기라성 같은 기성문단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그 무렵 중년이 돼야만 가능할 신문사 논설위원을 맡았다. 대개 신념이 굳어버리는 나이 일흔에 새로이 종교를 갖기도 했다. 암 투병하며 스스로 ‘죽음과 마주하고 있다’고 말하는 지금, ‘생명자본주의’를 강조하며 AI(인공지능) 시대, 놓쳐선 안 될 생명의 가치를 부르짖고 있다.

2월28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빌라촌 가장 안쪽에 위치한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연구소는 한국이 중국의 대륙문화와 일본의 해양문화를 화합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2008년 그가 세운 재단이다. 두 시간 가까운 인터뷰 동안 그에게선 그 어떤 작은 병색조차 느낄 수 없었다. 현재 그는 어떠한 항암치료도 받지 않으며 이따금 검진차 내원하는 게 전부다. “죽음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빨리 감기’ 생활 중”이라는 그에게서 젊은 기자가 부끄러울 정도의 짙고 강한 생의 열정이 묻어났다. 

요즘 하루 일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예전 점괘나 토정비결 중에 ‘갈 길은 먼데 석양은 지고 있다’는 말이 있어요. 그동안 그게 무슨 뜻인지 와 닿지 않았는데 이젠 알겠어요. 살아온 것의 약 10배는 더 살아야 남은 일을 다 할 수 있을 만큼 갈 길이 먼데 시간은 날 기다려주지 않네요. 환자가 아니더라도 벌써 내 나이 여든일곱이니까. 한마디로 내 일과 어떠냐 하면, ‘빨리 감기 하듯이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글도 여기저기 막 쓰고 책도 이것저것 띄엄띄엄 골라 읽어요.”

마음이 분주하시겠어요.

“그러니 아픔이나 걱정은 없어요.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고 하잖아요. 괴로운 일, 우울한 일 있을 땐 바쁘면 돼요. 단, 어떤 목적을 위해 바쁘면 스트레스만 쌓여서 좋지 못해요. 지금 나처럼 이제껏 못 했던 거 하나하나 하며 바쁘게 보내는 건 걱정도 덜어지고 힘도 나고 재미도 있죠.”

하지만 요즘엔 바쁨에 허덕이며 불행하게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잖아요.

“요즘 사람들 ‘불행하다’ ‘불행하다’ 하죠. 그런데 99개 불행이 있어도 개중 하나는 반드시 길(吉)하고 기쁜 일이 있기 마련이에요. 아무리 깜깜한 동굴 속이라도 빛이 흐르는 곳은 있습니다. 고로 한 점의 빛만 있어도 슬퍼 말고 실망하지 말라는 말을 해 주고 싶어요.”

말처럼 참 쉽지 않은 것이, 대부분 한 점의 빛보다 99개의 불행에 더 신경 쓰며 살아가니까요. 

“근데 진짜 절망에 빠지고 죽음과 맞부딪히면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이 드러나요. 다들 엄살로 그러는 거지, 누구도 진짜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진 몰라요. 사람들 사이엔 여러 가늠할 수 없는 차별이 있고 이게 곧 불행을 만들지만, 결국 누구나 다 똑같이 죽음 앞에 놓이게 돼요. 아무리 잘나가는 사람 앞에서 작아 보이더라도 ‘당신과 난 같아, 우리 다 언젠가 죽어, 평등해’라고 생각하면 부러워하거나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참, 내가 이런 얘기 참 안 하던 사람인데 나도 늙었나 봐요. 예전엔 무조건 도전하라, 앞서 가라 했는데 요즘에 이런 얘길 하는 걸 보면 별수 없이 나도 ‘꼰대’가 되는가 봐요.” 


“공무원들, 영혼 없는 일만 주니 영혼 없는 것”

“이어령은 지독한 독서광이다…그의 광범위한 지식은 폭넓은 독서와 그 줄기를 꿰어서 기억하는 탁월한 기억력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창조의 아이콘 이어령 평전》 中

이전부터 다독(多讀)을 해 오셨는데 그렇게 발췌해 읽을 정도로 아직 읽을 책들이 많으세요.

“책은 수요량이라는 게 없어요. 돈은 일정량 이상 되면 언제부턴가 그냥 숫자가 되죠. 몇천억, 몇조원을 갖고 있으면 그게 느껴질까요. 책은 그런 물적 욕망이 아니기 때문에 끝이 없고 바닥이 없어요. 아무리 잘살아도 냉장고를 집에 천 대씩 놓나요. 자동차 만 대씩 둘까요. 책은 달라요. ‘평생 난 소설 몇 권 읽을 거야, 시 몇 권 읽을 거야’가 아니라, 읽음이 세상 어떤 것보다 큰 감동을 준다면 얼마를 읽어야 그게 만족스럽겠어요. 읽어도 읽어도 모자라죠.”

물질로부터 얻는 만족보다 크다고 보시는군요.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갖고 끝없이 탐구해 정신적 만족을 얻는 것의 기쁨은 물질로부터 얻는 기쁨과 똑같아요. 근데 어느 쪽을 통해 만족을 얻는 게 더 쉽겠어요. 물질은 반드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으니 어렵지만, 내가 스스로 탐구하면서 만족을 얻는 건 쉽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싸우고 터지며 가는 걸까요. 잠깐 다른 얘길 하면, 내가 만일 물질적인 길을 걸었으면 아마 참패했을 거예요. 셈도 약하고 체력도 약해요. 외국 여행 가면 계산을 못 해서 주머니에 어느 순간 동전만 꽉 차요. 장관도 했지만, 그때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게 결재서류가 쌓이는 거였어요. 문화부니까 그나마 버텼지. 그래서 난 더 자유롭게 생각하고 글 쓰는 삶을 추구했어요. 그간 내 직함이 수십 가지였지만 어디 한 번도 얽매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죠.” 

그동안 정말 많은 직함을 가지셨는데 특별히 무겁거나 부담스러웠던 자리가 있었나요.

“많은 일 했지만 책임지는 자리, 얽매여 있어야 하는 자리는 거의 없었어요. 대학에 50년 있으면서도 총장이나 학장, 심지어 학과장까지 한 적이 없어요. 장관이 좀 무거운 자리이긴 했죠. 그래서 내가 처음에 극구 사양하기도 했잖아요. 학과장도 안 한 사람이 어떻게 장관 하냐고. 그런데 나도 모르게 막 발표가 돼서 할 수 없이 하게 됐지만, 맡은 이상 또 책임을 다했어요. 2년 동안 밤잠 안 자고 열심히 했죠.”

역대 문화부 장관들 평균 재직기간보다 더 오래 하셨어요.

“아마 제일 오래 했죠. 하다 보니 장수 장관이 됐어요.”

공무원 문화와 잘 맞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일본 공무원 사회에 이런 말이 있어요. 공무원이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가 있다. 지각하지 말라, 결근하지 말라, 그리고 일하지 말라. 일 열심히 하면 괜히 사고 저지른다 이거예요. 이런 조직이 관료조직인데, 이건 어느 나라든 경직돼 있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어요. 우리나라 공무원들에 대해 흔히 있는 예산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우수하고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해 주고 신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아주 열심히 해요. 공무원들이 영혼이 없는 게 아니라, 영혼 없이 할 일들만 주니까 영혼이 없는 거예요.”

 

“소신 있게 발자국 찍으며 살라”

늘 새로운 걸 추구해 ‘창조의 아이콘’이라고 불리셨어요. 창조 정신의 발원은 무엇이었나요.

“눈이 새하얗게 와 있어요. 걸으려고 보니 이미 누가 그 위를 다녀갔어요. 기분이 좋을까요. 그냥 앞선 발자국 뒤쫓아가는 게 돼 버리잖아요.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한 발 한 발 가보는 것. 그 재미로 살았어요. 가끔 팬들이 와서 내가 롤모델이라고 하는데 그때마다 난 그런 소리 말라 해요. 나와 똑같은 코스로 살면 그만큼 또 불행한 게 어딨어요. 그래서 당신 길을 가라고 해요.”

아무도 안 간 새 길을 먼저 가는 게 보통 두렵잖아요.

“아무도 안 간 길에 첫발을 디디려면 어린아이처럼 발 동동 구르며 망설여지곤 하죠. ‘홍조(鴻爪)’라는 말이 있어요. 기러기들은 겨울마다 눈에 자기 발자국을 콕 찍어놔요. 나 여기 왔다 갔다고. 그러고 날아가고 나면 그게 계속 남나요. 바람에 금세 다 사라지고 녹아요. 그래서 홍조라는 말이 ‘허무하다’는 의미로도 쓰여요. 혼자 걸어가든 남의 발자국 따라 걸어가든 다 결국 언젠가는 지워져요. 그러나 당장 내일 지워질지라도 내 발자국 소신 있게 찍으며 살자고 강조하고 싶어요.”

[이어령 인터뷰②] “정보화 이후 생명화 시대 온다”


[시사저널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대한민국, 길을 묻다⑩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산업화 시대에 밀려나 있던 복지, 생명가치 살아날 것”(中)


10여 년 전 모두가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된다고 생각할 때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을 뜻하는 ‘디지로그’라는 새 개념을 제시하며 또 하나의 ‘가지 않은 길’을 개척했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 발달로 인간이 소외되고 기계가 앞서는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해 아날로그적 감성을 지켜야 한다는 움직임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앞서 제시한 ‘디지로그’ 개념을 설명하며 “한국은 아이디어 가진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알아주고 지원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첨언하기도 했다. “미국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적극적으로 믿고 투자해 주죠. 구글도 대학생 둘이서 시작한 거잖아요. 지금 우리 주변에도 놀라운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만, 지원이 없어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많을 거예요.” 그는 오늘날 AI 등 기술을 산업자본이 아닌 ‘생명자본’과 접목시켜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생명이 존중되는 기술의 발달, 일찍이 그가 말한 디지로그 개념과도 맞닿아 있는 주장이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 AI 시대에 대해 이미 수년 전 ‘디지로그’ 용어를 만들어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 결합. 지금의 구글이나 아마존이 다 이런 거예요. 디지털 회사가 자동차를 만들었어요. 갖고 있던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자율주행차를 만들고, 반대로 자동차 회사가 AI를 연구하며 디지털 세상에 진출하기도 해요. 아날로그가 지나고 디지털이 오는 게 아니라 이렇게 둘이 결합하는 시대에 대해 일찍이 얘기한 바 있었죠.”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한 4차 산업혁명의 길로 우리 사회가 잘 가고 있다고 보세요.

“우선 ‘4차 산업’이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 산업은 ‘인더스트리(industry)’, 즉 ‘공장’이란 뜻이 있어요. 발전된 기술을 갖고 다시 제조업 시대로 가자는 건가, 아니잖아요. 정보화 시대 이후 지금은 무엇보다 생명자본이 강조되는 ‘생명화 시대’가 와야 할 때예요. 산업시대까진 기계의 혁명이었어요. 인간으로 치면 신체. 힘을 기르자, 근력을 기르자는 게 산업시대였어요. 그런데 이젠 근력이 아니라 지력을 기르는 시대예요. 물질이 주도하던 자본주의를 떠나, 이 지력을 기를 수 있는 생명이 중심 되고 생명이 존중되는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예를 들어 높은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었을 땐 노인이나 장애인 등 약자들은 쉽게 올라갈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엘리베이터 기술이 생기고 나니 모두가 동등하게 건물에 올라갈 수 있게 됐어요. 기술을 통해 모든 생명이 동등한 복지를 누리게 했죠. 나이 들어 운전 못 하는 노인들 또는 장애인들이 자율주행차로 인해 어디든 동등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런 게 기술이 발달하는 지금, 생명자본이 우선되는 ‘생명화 시대’인 거예요. 의료도 마찬가지예요. AI 기술로 정밀 의학이 가능해지면서 같은 감기에 걸렸어도 개인마다 각기 다른 처방을 할 수 있게 됐어요. 병에 걸리기 전 선제적으로 고치는 선제 의학도 가능해졌고요. 기술을 통해, 산업화 시대에 밀려나 있던 복지, 생명의 가치가 살아나는 시대인 거죠.”

1990년 12월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오른쪽)이 서울을 방문한 평양음악단 환영만찬에서 성동춘 단장과 건배 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90년 12월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오른쪽)이 서울을 방문한 평양음악단 환영만찬에서 성동춘 단장과 건배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아무리 어두워도 어딘가 출구 있다”

그는 입버릇처럼 글쓰기가 곧 자신의 삶이자 목숨이라고 강조해 왔다. 그렇기에 건강이 약해진 지금도 결코 펜을 놓지 않으며 아직도 써야 할 글이 넘쳐난다고 말한다. 스스로 삶을 정리하는 중이라 말하고 있는 이 시간, 그의 노트엔 나날이 무엇이 적히고 있을까. 삶의 한복판에서 분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과 친해지고 있다는 그는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을까.

절대 자서전은 쓰지 않겠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어떤 글을 쓰고 계세요.

“자서전은 안 쓰지만 내 얘기를 객관화하고 거기에 남의 얘기도 섞어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내가 경험했던 모든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우리 이야기를 전부 모아 열두 권짜리로 완성하고 싶은데, 불행히도 내가 몸이 아파 잘 진행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열두 권 책 중 첫 번째 권을 쓰고 있고, 추가로 알파고 내용이 담긴 AI 관련 책도 쓰고 있고, 우리의 젓가락 문화에 대한 글도 쓰고 있어요. 십이간지의 상징성과 관련해서도 쓰고는 있는데 완성을 못 하고 있죠. 이제 좀 글맛도 알고 정말 더 잘 쓸 것만 같은데. 일본 화가 호쿠사이가 나이 아흔쯤에 ‘하나님, 이제 좀 그림을 그릴 만하니 죽게 생겼습니다. 조금 더 살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다던데, 딱 그런 마음이네요. 죽음과 딱 마주하니 남은 시간이 너무 짧고 아까운 거죠.”

지금 같은 한반도 상황에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해야 할 일도 많을 것 같습니다. 

“당장 (인터뷰 시점으로) 지금 북·미 정상회담도 진행 중이지만, 우리나라만 봐서는 한반도 상황에 답이 없어요. 한반도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대륙문화와 미국 등 서양과 일본 등을 통해 들어온 해양문화가 딱 마주한 곳이에요. 우리가 이들 사이 중재 역할을 잘하면, 이들의 패권 다툼 속에 고립되는 게 아니라 화합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옛날엔 늘 우리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져 왔죠. 그런데 이젠 고래 싸움을 새우가 잘 말릴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를 만들고 화합의 역할에 기여하고자 했는데, 나는 병들고 시간은 없게 됐네요. 내가 처음 말한 대로 ‘갈 길은 멀었는데 석양이 지고 있는’ 상황인 거죠. 내가 미처 못 한 일들을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대신해 주길 바랍니다.” 

인생의 선배로서 삶의 한복판에서 고민하는 젊은 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내가 젊은 시절 절망스러웠을 때 쓰고 지닌 시가 있었어요. 산중수복의무로(山重水複疑無路)-산과 물이 첩첩하여 길이 없는가 했는데, 류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산골 속에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꽃이 만발한 또 하나의 마을이 있더라. 정말 길이 막혀 있고 이게 끝이라고 생각한 그 순간에 또 하나의 마을이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사람들이 불행한 건 자꾸만 자로 잴 수 없는 걸 재려 하기 때문이에요. 숫자에 의해 자신의 행복도를 측정하고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죠. 왜 옛날에 길 가다 만나는 깡패들이 ‘야, 너 왜 이렇게 ‘재고 다녀’’라고 말하곤 했잖아요. 그 말 그대로 나도 말하고 싶어요. 재고 다니지 말라고요. 잴 수 없는 것 많아요. 그러니 젊은 친구들은 재지 말고 너무 쫓기지도 말고 그냥 주어진 삶을 살길, 아무리 어두워도 어딘가엔 출구가 있고 전혀 모를 딴 마을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길 바랍니다.” 

2013년 12월15일 이어령 전 장관이 자신의 팔순 잔치이자 책 《생명이 자본이다》 출판기념회에서 부인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와 함께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3년 12월15일 이어령 전 장관이 자신의 팔순 잔치이자 책 《생명이 자본이다》 출판기념회에서 부인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와 함께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딸 이민아 목사 먼저 보낸 후 무신론자에서 교인으로

 

“네가 애통하고 서러워할 때 내 머릿속의 지식은 건불에 지나지 않았고 내 손에 쥔 지폐는 가랑잎보다 못하다는 걸 알았다. 70 평생 살아온 내 삶이 잿불과도 같은 것이라는 걸 가르쳐 준 것이다” - 이어령 저서 《딸에게 쓴 편지》 中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에겐 목사였던 딸과 스물다섯의 어린 외손자를 먼저 떠나보낸 아픔이 있다. 딸 이민아 목사는 김한길 전 의원과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변호사로 활동하다 2009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2011년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이듬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 목사는 남미·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청소년 구제 활동을 했다. 이 목사 역시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지금의 아버지처럼 치료나 수술 없이 그저 암을 받아들였다. 

“우리 딸 미국에서 아주 잘살았어요. 요트가 두 대였고 그랜드 피아노도 집에 떡하니 있고. 근데 그거 다 뿌리치고 아프리카 가서 아이들 끌어안고 살았잖아요. 그 큰 집을 하우스 처치로 만들어 교회 못 나오는 사람들 불러다 예배하고. 그러니 가정이 지켜질 수 있었겠어요. 우리 딸은 고통, 고난을 자처해서 갔어요. 그러다 보니 암도 걸리고 나중엔 눈도 안 보이고. 그래도 물질보다, 죽음보다 더 높고 소중한 비전이 있었던 거예요.” 

늘 단단하고 엄한 아버지였지만 딸의 투병 앞에선 그도 약해졌고 무너졌다. 호영송 작가가 4년여 동안 쓴 《창조의 아이콘 이어령 평전》에는 ‘(그는) 늘 무슨 일에 부딪히건 대강 넘어가지 않고, 자존심 꺾고 타협하지 않았는데 딸의 아픔과 좌절 앞에 무릎을 접었다’고 써 있기도 하다. 딸이 투병 중 실명하게 되자 그는 “내 딸에게서 빛을 거둬가지 않는다면 당신(하나님)을 위해 평생 봉사하겠다”고 기도했다. 그리고 7개월 만에 딸 이 목사는 눈을 떴다. 

이를 경험한 후 이 전 장관은 기독교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오랜 무신론자로 살며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도 많이 써 왔다. 그러나 딸의 꾸준한 전도와 딸을 통해 얻은 경험이 그에게 일흔의 늦은 나이에, ‘지성에서 영성으로’ 사는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신을 안 믿는 사람도 다 종교인이에요. 나 하나님 안 믿어, 그 사람처럼 하나님 잘 아는 사람 없어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안 믿는다는 거니까.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처럼 하나님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믿지 않았을 때부터 종교는 끝없이 나에게 싸움을 걸어왔어요. 지금 보면 그 순간에도 늘 하나님은 계셨다고 생각해요. 다만 종교를 믿기 전이나 후나 늘 성서처럼 살아야 하는 건데, 역시 악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맘대로 안 되네요.” 




[시사저널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대한민국, 길을 묻다⑩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산업화 시대에 밀려나 있던 복지, 생명가치 살아날 것”(下)
이어령 전 장관에게 글쓰기는 목숨과도 같았다. 사진은 그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 모습 ⓒ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제공
이어령 전 장관에게 글쓰기는 목숨과도 같았다. 사진은 그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 모습 ⓒ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제공

노태우 정부 시절 초대 문화부 장관을 맡은 2년여의 기간 동안 그는 가장 보람됐던 일로 서울 시내 ‘쌈지공원’을 조성한 일을 꼽았다. 이는 그가 장관 시절 눈물을 보였던 몇 안 되는 기억이기도 하다. 

그 당시 서울 시내엔 어떤 용도로도 활용하기 힘든 소위 ‘자투리땅’들이 있었다. 변두리로 갈수록 이러한 ‘노는 땅’은 더 군데군데 많았다. 대부분 동네 주민들이 연탄 등을 쌓아놓고 쓰는 용도로 활용됐다. 이 장관은 고건 당시 서울시장과 함께 이 땅의 활용도를 고민했다. “하루는 서울 지적도를 쫙 펴놓고 이 자투리땅들을 전부 찾아냈어요. 그리고 그중 몇 군데를 찍어서 조그만 ‘쌈지공원’을 만들기로 결정했죠.”

이 장관은 작은 공원 안에 유명 조각가의 작품을 세우고 바람에 따라 소리를 내는 풍경(작은 종)들도 달았다. 여러 예술가들의 재능기부가 한몫했다. “이곳에서 주민들이 자유롭게 뛰놀도록 하자. 여기서 숨구멍이 트이고, 아이들이 여기 설치된 작품들을 감상하며 시인을 꿈꾸고 미술가를 꿈꾸도록 하자.” 그의 이런 포부는 곧장 ‘문화부가 왜 공원을 만드느냐’는 국회의 항의에 부딪혔다. 그때마다 그는 “그곳은 가장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한가운데 놓인 ‘문화 아리아’”라고 강조했다.

개원식 때 고건 시장과 함께 참석한 이 장관은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았다. “동네 어린아이들이 색종이 같은 데다가 맞춤법도 다 틀린 비뚤비뚤한 글씨로 ‘장관님 고맙습니다’라고 적어 쭉 붙여놨더라고요. ‘틀림없이 편지를 쓴 아이들 중에 예술가가 배출될 거다, 이게 문화다’ 생각했어요. 그 풍경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확 날 것 같아요.” 

이 장관은 당시를 회상하며 재미있는 일화도 하나 털어놓았다. 

이 장관에 따르면, 당시 그가 공원 안에 풍경을 달아놓겠다고 했을 때 직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한사코 그를 뜯어말렸다. ‘그 동네 사람들은 남의 집 문패까지 훔쳐간다’며 ‘장관이 세상 물정 모른다’는 얘기가 그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고집을 부려 풍경을 달았다. ‘댕그랑거리는 게 아름다우니 아무도 떼 가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었다. 

“우스운 건 그렇게 큰소리치고 나서, 그 공원 가까이 사는 우리 직원 한 명에게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한 번씩 누가 떼 갔나 확인해 보라’고 시켰어요. 그 직원은 아침마다 나한테 보고했어요. ‘아직 안 떼 갔습니다’라고. 그런데 그 풍경, 내가 장관 그만둘 때까지 그대로 있었어요. 내 생각이 맞았던 거예요.”

이렇게 만들어진 쌈지공원은 30년이 흐른 지금도 서울 일대 곳곳에 남아 마을의 쉼터가 되고 있다. 그는 “그 후 소식을 듣기로는 마을 사람들이 공원에서 잔치도 열었대요. 이만한 보람이 어딨을까요”라며 “지금도 고건 시장 만나면 ‘거기 한번 가봅시다’ 말합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