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아직도 5.18이냐고? - 광주 학살은 어떻게 냉전 해체를 가로막았나?

일취월장7 2019. 2. 26. 18:20


아직도 5.18이냐고?

[인권으로 읽는 세상] 5.18, '민주화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5.18 망언'을 쏟아냈다. 5.18을 '광주 폭동'으로, 유공자들을 '괴물집단'으로 칭한 것이다. 여야 4당의 해당 의원 제명 추진과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은 '다양한 역사해석' 운운하며 김진태, 김순례 의원에 대한 징계를 유예했다. 지난해 제정된 특별법에 따라 구성 중인 '5.18 진상규명위'에도 부적격 논란이 일고 있는 이들을 재추천 했다. 자유한국당의 이런 행태가 그리 놀랍진 않다. 단지 이들이 자신들의 속내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이를 정치적 결집의 이념으로 표방할 수 있게 된 현실이 놀랍고 참담할 따름이다. 정부여당은 '역사부정죄' 제정을 언급하며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5.18은 40여 년 전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싸움이 아니다. 자유한국당의 이런 행태가 가능한 근거가 무엇인지, 2019년 한국사회에서 다시금 5.18이 이야기된다는 게 무슨 의미여야 하는지 물을 때다.  

아직도 5.18?

지난해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5.18은 87년 직선제 개헌, 95년 전두환, 노태우 처벌로 마무리된 승리의 역사였고, 5.18 국립묘지 조성, 국가유공자 선정까지 국가차원의 예우와 배상이 완료된 역사로 기억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5.18은 정확히 거기서 멈췄다. 군사독재에서 대의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의 불가피한 과거청산과 피해자 대책만 집행된 것이다. 이마저도 김영삼, 김대중 집권이 이루어지자 국민통합을 위한 전두환, 노태우 사면으로 마무리된다. 5.18에 대한 국가차원의 포괄적인 진상규명보고서는 아직도 없다. 국회청문회, 광주시 차원의 조사와 사료편찬 작업, 국방부 특조위와 같은 활동이 그때그때 진행됐을 뿐이다.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산출하지 못할 정도로 당시 자행된 학살과 폭력의 전모를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5.18은 군사독재를 종식시킨 '민주화' 운동의 동력이 되었지만, 같은 이유로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이라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직선제 개헌이 되고, 김대중 집권으로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자 '민주화'는 종결되었고 5.18도 정리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5.18 망언'들이다.  

20여 년 전에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졌더라도 지만원은 나타났을 수 있다. 하지만 전두환도 주장하지 않는 북한군 개입설을 이렇게 무식하게 들이미는 것은 한 사회가 합의 가능한 '사실'의 수준을 떨어뜨린다. 더 중요한 것은 지만원의 주장내용이 아니라,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이고 확대 재생산하는 이들이다. 비록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5.18 피해자들은 더 이상 '폭도'라고 불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5.18을 국가기념일로 기념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그런데 전두환이 회고록을 출간해 5.18을 모욕하고 자유한국당이 지만원을 국회에 초청할 때 5.18 피해자들은 구체적 공포를 느낀다. 당시 광주에서 싸웠던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5.18을 기억하며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이들은 '민주화' 이후에 벌어지는 5.18 폄훼와 왜곡이 더욱 무섭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5.18에 관한 한 세월은 약이 아니다. 5.18은 과거 역사적 사실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당시의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세력이 가시화되고, 5.18 폄훼를 자양분으로 정치적 결집을 시도하는 현재의 문제다. 이번에 구성되는 '5.18 진상규명위원회'가 지연되어 온 과거청산 작업을 마무리하는 게 아닌 2019년의 5.18 운동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무엇이 5.18을 '과거'로 만드는가
 

'5.18 망언'은 2월 국회를 마비시킬 정도로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에게 5.18에 대한 태도는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 가치이다. 각각 민주화 운동의 적자, 냉전 반공체제의 보루를 자처하는 그들에게 5.18은 우회할 수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고 규정 짓지 못하는 사람들, 5.18을 국가기념일로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 이 '소동'은 낯설 뿐이다. 5.18에 대한 정부 공식명칭은 '5.18 민주화운동'이다. '광주사태', '광주학살', '5.18 민중항쟁'과 같은 여러 명칭이 경합했고 결국 '5.18 민주화운동'이 됐다. 이는 80년 5.18이 일으킨 한국사회 변혁의 물결이 '87년 직선제 개헌'이라는 대의민주주의로 정리됐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민주화운동 국가기념일이었던 사람들에게 5.18은 '과거'일 수밖에 없다. 자유한국당도 87년 헌법을 부정하지 않는다. 김진태가 직선제 폐지를 외치는 것도 아닌 이상, 5.18은 정치권 '소동'에 그칠 뿐이다.

2019년, '민주화'된 세상에서 남의 돈 받아 일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삶의 단편이 어떠한가. 지옥 같은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들어간 직장은 생존을 위해 존엄을 내주는 거래가 일상이고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정말 죽게 된다. 성별, 학벌, 외모, 나이 뭐가 됐든 다른 이보다 나은 능력치를 극대화해 살아남아야 한다. 가해와 피해의 자리를 교차하며 이어가던 직장도 오래 일하는 건 쉽지 않다. 노동자는 언제든 쓰고 버리는 상품이 된지 오래다. 더 나이 들면, 아이를 돌봐야 한다면 열악한 일자리들만 '선택'가능하다. 물론 자유롭게 투표도 가능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킨다면 집회시위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화'된 세상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고 더 공고해졌다. 그러니 '민주화운동'인 5.18이 지금 무슨 의미겠는가?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를 신자유주의로 폭력적으로 재편한 김대중은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배우게 했다. 김대중 정권 아래에서 5.18은 그렇게 박제화 됐다.  

우리 시대의 5.18
 

5.18은 '민중항쟁'으로도 불렸다. 변혁의 기운이 넘쳤던 80년대에는 '민중항쟁'이 5.18의 이름이었다. 70년대 소수 지식인-학생 중심의 반(反)유신투쟁과 달리 거리로 쏟아져 나온 다양한 계층의 광주 시민들을 드러낼 단어는 '민중'이었다. 열흘 동안 진행된 '학살'의 시간은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피가 뚝뚝 흐르는 적극적 '항쟁'의 시간이기도 했다. 5.18은 벌어진 '사건'의 규모나 내용 면에서 결코 '김대중 석방', '신군부 규탄'과 같은 구호로 제한될 수 없는 '민중항쟁'이었던 것이다. 5.18 전에 부마항쟁이 있었다. 박정희 피살과 신군부 쿠데타라는 정치적 격변이 가로놓여있지만 두 사건은 동일한 정치경제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70년대 말 오일쇼크로 한국 경제가 휘청거리던 때, 유신체제의 위기가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로 현실화됐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는 구속자 중에 학생은 소수이고 때밀이, 식당종업원, 공장노동자, 구두닦이와 같은 이들이 다수인 민중봉기로 부마항쟁을 서술한다. 부산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잔인한 진압방식으로 공포감을 조성해 진압에 성공한다. 동일한 과정이 광주에서 반복되었고 학살로까지 이어졌지만 광주 민중들은 무장을 해 저항을 한 것이다. 그렇게 공수부대를 물리치고 잠시나마 광주를 해방시킨다. 이 모든 사건을 '직선제 개헌', '정권교체'와 같은 '민주화 운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물가는 30% 이상 뛰고 실업률이 치솟던 때, 누구도 불만하나 속 시원히 이야기할 수 없었던 시기에 터져 나온 시위는 '민주주의'와 같이 어렵고 경험조차 못해본 개념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인간존엄성의 요구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물론 다양한 계층이 함께 했던 만큼 5.18의 모습은 다면적일 것이다. 하지만 공수부대의 잔혹한 폭력과 학살에 맞서 싸우겠다는 실존적 결의는 공수부대의 폭력에 맞서지 않고서는 자신과 공동체의 인간성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직관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는 민주적 제도나 협상, 폭력/비폭력의 틀을 넘어서는 것이다. 사회적 자원을 많이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폭력에 더 쉽게 노출된다. 최후의 보루인 인간 존엄성이 시험대에 오르는 경험을 더 자주 겪게 된다. 계엄군 진입 직전까지 도청을 지켰던 시민군 중에 저학력 계층이 훨씬 많았던 것은 그들은 마지막까지 저항하지 않고서는 그 동안 짓밟힌 존엄을 회복할 방법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5.18 민중항쟁'이 2019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건 공수부대의 잔혹한 폭력의 서사보다,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개인을 넘어선 연대 속에 가능한 공동체적 존엄의 가능성이 아닐까? 여전히 5월 광주의 폭력은 상상조차 어렵지만, 지금 여기서 존엄한 인간으로 함께 살기 위해 연대하고 싸우는 수많은 우리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바로 우리가 5월의 민중이다. 5월 정신은 그렇게 스스로를, 세계를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 속에 살아있다.     



누구나 다 아는 5·18 진실, 그들은 왜 부정하나

5·18 민주화운동이 국회에서 광주 폭동’ ‘괴물 집단으로 폄훼되었다. 역사부정죄를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이들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져봤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9년 02월 25일 월요일 제597호



고립되어 마땅한 말이 온라인에 고이더니 거리로 쏟아졌다. 마침내 입법기관인 국회 안에서 떵떵거리는 말이 되었다. 2월8일 극우 논객 지만원씨는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5·18 진상규명 대국민 공청회’를 열었다. 자유한국당 김진태·이종명 의원이 공동 주최자로 나섰다. 이 자리에서 5·18 민주화운동은 이종명 의원에 의해 ‘광주 폭동’으로, 5·18 유공자는 김순례 의원에 의해 ‘괴물 집단’으로 규정되었다.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도태되어야 할 역사 왜곡과 선동이 국회 문턱을 넘어온 건 이 문제가 다른 차원의 해결이 필요한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국회의원의 말은 그 자체로 공적 성격을 띠고 사안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입법 방향을 설정한다. 자유한국당은 공청회가 문제되자 “다양한 의견 존재가 보수 정당의 생명력이다”(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 “역사적 사실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나경원 원내대표)라는 발언으로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2월11일 ‘5월 단체’들은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앞에 천막을 치고 항의에 나섰다(24~25쪽 딸린 기사 참조). 결국 공청회 나흘 만인 2월12일 김병준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뒷북 수습에 나섰다. 이날 김 위원장은 두 차례 고개를 숙였다. “지난 39년간 여러 차례 국가기관 조사를 통해 근거가 없음이 확인된 ‘5·18 북한군 개입설’을 계속 주장하는 것은 보수를 넘어 국민을 욕보이는 행위다. 특히 공당의 국회의원이 이런 주장에 판을 깔아주는 행동도 용인돼서는 안 된다.”


ⓒ연합뉴스
2월13일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대위원장(가운데)이 5·18 단체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관리 책임 소홀을 이유로 당 중앙윤리위원회(윤리위)에 스스로 징계를 요청했고, 공청회를 주최하고 참석한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의원 역시 윤리위에 회부됐다. 2월14일 윤리위는 김병준 위원장에게 ‘주의’를, 이종명 의원에게는 ‘제명’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각각 당 대표와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한 김진태·김순례 의원에 대해서는 2월27일 전당대회 이후로 징계를 유예했다. 두 의원이 차기 지도부가 될 경우 징계는 유야무야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지도부에 입성하지 못하더라도 여론의 관심에서 비껴나기 위해 ‘시간 벌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 끈질기게 되풀이

자유한국당은 예정대로라면 2018년 9월 출범했어야 할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 조사위)의 발목도 잡고 있다. 지난해 2월 국회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5·18 진상규명법)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인권유린과 발포 책임자 등을 밝히기 위한 조사위를 꾸리기로 했다. 하지만 국회의장 1명, 여당과 야당이 각 4명씩 추천해 대통령이 임명하는 조사위원 중 자유한국당 추천 몫 3명 중 2명이 아직 공석이다.

1월14일 자유한국당은 조사위원 3명을 늑장 추천했지만, 2월11일 문재인 대통령은 이 중 2명(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 권태오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에 대해 자격요건 미달을 이유로 재추천을 요청했다. 사실상 임명 거부였다. 5·18 진상규명법 제7조는 법조·역사·법의학·인권 등 관련 각 분야에서 5년 이상 재직·종사한 자를 조사위원 자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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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씨(아래)는 16대 대선을 앞둔 2002년 8월부터 ‘5·18 북한군 개입’을 주장했다.


공청회로 논란의 중심에 선 김진태·이종명 의원은 지난 1월 5·18 조사위 조사위원 후보로 지만원씨를 추천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종명 의원은 5·18 진상규명법 통과 당시 진상규명 범위에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 개입 여부 및 북한군 침투조작사건’(제3조 6항)을 넣을 것을 관철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번 공청회를 국회에서 열 수 있었던 것도 이 조항 덕분이었다. 2월13일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의원 등 21명은 관련 조항을 삭제한 수정안을 발의했다.

5·18 민주화운동이 국가법정기념일로 지정되고 제도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지만원씨를 필두로 이를 폄훼하는 세력 역시 꾸준히 있어왔다. 가장 ‘끈질긴’ 주장은 당시 광주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내용이다. 지씨는 2002년 8월 16대 대선을 앞두고 ‘대국민 경계령! 좌익세력 최후의 발악이 시작됩니다’라는 제목의 신문 광고를 통해 관련 주장을 시작했다. 지씨의 ‘외로운’ 싸움을 뒷받침한 건 2011년 개국한 종편 채널들이었다. 2013년 채널A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북한군이라고 주장하는 탈북자 인터뷰를 ‘방송사 최초’ 타이틀로 내보냈다. TV조선 역시 비슷한 시기 북한 특수부대 장교 출신이라 주장하는 사람을 내세워 광주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중징계와 사과방송이 뒤따랐지만 관련 방송을 캡처한 이미지가 온라인에 북한군 개입의 ‘근거’로 퍼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북한군 개입설’은 야당에서마저 배척당하는 이슈였다. 5·18 진상규명법 이전에도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모두 7차례 국가 차원의 조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밝혀왔기 때문이다. 1980년 사건 직후 계엄사 발표, 1985년 국방부 재조사, 1988년 국회 ‘5공 비리 진상규명 청문회’(일명 광주 청문회), 1995년 검찰 및 국방부 조사, 1996~1997년의 5·18 재판,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2012년 국정원의 비공개 조사가 이뤄졌지만 당시 북한군이 국내에 들어왔다는 증거나 정황은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사IN 이명익
‘5·18 망언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토론회(사진)에서 한상희 교수는
“5·18 역사부정 행위는 타락한 보수의 생존 전략이다”라고 정의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서청원 의원(무소속)은 2월11일 입장문을 내고 “600명의 북한군이 육로로 왔단 말인가, 해상으로 왔겠는가. 그런 일을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해당 의원들의 사과를 요구했다. 역시 광주 현장을 취재했던 보수 논객 조갑제씨도 북한군 개입설을 제기하는 세력을 향해 꾸준히 자성을 촉구해왔다. 조씨는 2월10일 ‘조갑제닷컴’에 ‘이종명 의원실로 보낸 편지(1월28일)’를 공개하기도 했다. 조씨는 국회 공청회 토론 참가 요청을 거절하며 “자칫 잘못하면 북한군을 신출귀몰한 군대로 치켜세우고 국군을 바보로 만드는 자해 행위가 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번 국회 공청회 논란 이후 2월12일 국방부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국방부는 2013년 5월30일 “5·18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라고 밝히며 ‘군의 입장’이라는 공식 문서를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정홍원 전 국무총리 역시 2013년 6월10일 국회에 출석해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라고 답했다. 2017년 1월 비밀 해제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비밀 문건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1980년 5월9일자, 6월6일자 문건에는 각각 “현재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 상황을 빌미로 어떤 군사행동도 취할 기미가 없다”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의 특정 행동이 자칫 전두환의 합리화를 위한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결국 전두환을 돕는 행위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 지지자들이 ‘김 의원에 대한 당 윤리위 제소 취소’를 요구하고 있다.

정작 북한군 개입설에 다시 불을 붙인 건 전두환씨였다. 전두환씨는 2017년 4월 출판된 회고록을 통해 지만원씨의 북한군 개입 주장을 전폭적으로 인용한다. 불과 1년 전인 2016년 6월 <신동아> 인터뷰에서 전두환씨와 부인 이순자씨는 북한군 침투설이 금시초문이며 “지만원의 주장을 연희동과 연결시키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의원이 이 같은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 공청회 논란 직후 세 의원은 프레임 전환을 시도한다. 사과하면서도 단서를 달았다. “5·18 유공자 명단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미 ‘법적 판단’이 이뤄진 부분이다. 2018년 12월21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재판장 김용철)는 ‘5·18 유공자 명단 및 유공 내용 공개촉구 국민연합’ 대표 등 102명이 국가보훈처장을 상대로 낸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 소송을 기각하며 5·18 유공자 명단과 공적 사유는 정보공개법 비공개 대상정보 세부기준(제9조 1항 6호)에 따라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관련 정보는 사망이나 행방불명 경위, 부상이나 장해(障害) 정도, 치료 내역이나 기간, 죄명과 복역 기간이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그 자체로 개인의 내밀한 정보라고 봤다. 또 같은 이유로 보훈 대상자·고엽제 후유증 환자 등 다른 국가유공자 명단도 대부분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단, 독립유공자의 경우 공적을 기록·보존하고 연구할 목적으로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시행령 제2조 6호)에 따라 1986년부터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당 대표 선거에 나선 오세훈 후보 역시 명단 공개에 힘을 실었다. 2월12일 오 후보는 ‘가짜 유공자’가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세 의원의 문제 제기가 합리적이라고 옹호했다. 이는 지만원씨가 주장하는 “5·18 유공자 수가 광주시장의 재량으로 마구 늘어난다”라는 말과 궤를 같이한다. 지씨는 또 “5·18 유공자 자식들이 공무원 7급의 89.4%, 9급의 85.6%를 독차지했으며 법원 검찰 서기의 95%가 그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유한국당 일각의 우려처럼 정말 ‘가짜 유공자’가 있을 수도 있다. 2018년 12월18일 송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가보훈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근거로 5·18 계엄군 가운데 73명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됐고 그중 56명은 심의 절차조차 거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송 의원에 따르면 73명이 수령한 보상금과 연금은 모두 164억2300만원으로 한 사람당 평균 약 2억2400만원이 지급됐다. 일반 유공자는 한 사람당 평균 약 4300만원을 보상받았다. 송 의원은 5·18 당시 첫 총기 진압 당사자로 알려진 차 아무개 대위를 비롯해 계엄군 30여 명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는 사실도 함께 밝혔다.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1990년 8월6일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5·18보상법)이 제정되며 관련 법 개정을 거쳐 7차에 걸쳐 보상받은 인원은 2018년 12월 현재 5807명이다. 이 중 70%가량이 1993년 이전에 보상이 인정됐다. 5·18 유공자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에 따라 보상을 받은 자여야 한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5·18 민주유공자는 작년 말 기준 4415명이다. 7차 개정 당시 보상 신청 기한을 2015년 6월까지로 한정했다. 보상자 중 약 1400명 가까이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지만 8차 법 개정을 하지 않는 한 앞으로 신규 등록은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상심의원회 위원 15명은 2016년 박근혜 정부 당시 광주시장과 국무총리가 임명하거나 위촉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무원 채용 시 가점을 부여하지만 이는 5·18 유공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유공자에게 주어진다. 공직을 ‘싹쓸이’할 만한 규모도 아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017년 7·9급 공무원 시험 합격자(5826명) 가운데 가점 대상 국가유공자는 2.2% (132명)이며 그중에서도 5·18 유공자는 9명(0.15%)에 불과했다.

역사부정을 형법으로 처벌할 수 있을까?


2월13일 더불어민주당은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5·18 망언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 패널로 참석한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적 규제 가능성 논의에 앞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과 선동의 문제점을 짚었다. 한 교수는 5·18 역사부정 행위를 “타락한 보수 세력의 생존 전략”으로 정의하며 군사정권과 그 대체 정권 후계자들의 위기감이 투영된 ‘혐오 정치’의 한 형태라고 정의했다. 5·18 민주화운동에 지역주의와 반공주의를 덧씌워 현재로 호출하는 정치인들은 ‘태극기 부대’로 집단화된 일부 대중을 민주적 시민이 아닌 동원·공작·선동의 대상으로 놓고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한다. 이는 단순한 역사왜곡을 넘어 민주주의를 훼손한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형법적 규제의 필요성 역시 긴급히 요청된다. 토론회 발제자로 나선 김재윤 전남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인을 ‘권위주의적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 살해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의 사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행위’인 ‘역사적 사실의 부인’ 관점에서 보았으며, 독일 형법의 홀로코스트 부인 처벌 규정(제130조 3항과 4항)을 이에 적극 대처하는 대표적인 예로 소개했다(26쪽 딸린 기사 참조).

한국도 포괄적이나마 명예훼손(형법 제307조 1항)으로 역사부정을 처벌할 수 있다. 적어도 관련해 8건 이상의 소송을 치렀거나 치르고 있는 지만원씨 역시 2003년과 2013년 각각 명예훼손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확정받았지만, 2012년에는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김 교수는 “당시 대법원은 명예훼손은 맞지만 ‘누구’의 명예를 훼손했는가에 대해 개개인이 특정될 수 없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집단 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의 난점이다”라고 말했다. 이 판결 이후 지씨의 ‘망언’ 역시 날개를 달았다.

현재 국회에는 ‘5·18을 부인·왜곡·날조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 조항을 삽입한 5·18 진상규명법 일부 개정안 4건이 계류 중이다. 김 교수는 한번 법을 만들면 개정하기 어려운 점을 우려하면서도 관련 법에 예술·학문, 연구·학설 등에 기여하는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위법성 조각 사유’를 삽입해서 보완할 것을 제안했다.

토론회 패널로 참여한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역사부정에 대한 논점을 ‘역사적 진실이 중요하다’라는 거시 관점이 아니라, ‘인간 존엄의 피해’와 ‘소수자 차별로서의 혐오 표현’으로 좁혀서 법적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역사부정죄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현재성이 충분히 입증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와 그 후손만이 아니라 역사부정 대상이 되었던 인구집단 전체, 즉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 호남 차별과 연계돼 있으며 그 경험이 현재진행형임을 주목했다. 홍 교수는 혐오표현금지법에 앞서 역사부정법이 제정되는 것이 적절한지도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다. 유럽 역시 혐오 표현 금지가 먼저였고, 혐오 표현의 한 형태인 역사부정을 별도로 처벌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역사부정죄가 마련됐다.

법 제정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홍 교수는 “법을 통해 역사부정 행위를 일망타진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보다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만은 허용하지 않는다’라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주고, 이를 바탕으로 형사처벌 외 여러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광주 학살은 어떻게 냉전 해체를 가로막았나?

[기고] 5.18과 1980년 한반도 주변 역학 관계


1980년 5.18 광주 항쟁에 대한 극우 진영의 왜곡이 도를 넘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북한군 개입설 등이 공론장에서 떠돈다. 이는 민주 진보 진영의 광주 항쟁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그간 주춤했던 탓도 있다. 한국 현대사를 똑바로 살피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반성이 나온다. 광주 항쟁을 다룬 대표적 저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어판 내는 일을 했던 설갑수 씨의 글을 싣는다. 2017년 5.18 기념재단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을 설 씨와 재단 측의 동의를 받아 다시 소개한다. 지만원 박사 등이 주장하는 북한군 개입설은 실증적인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1980년 당시 상황과도 맞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글이다. 당시 북한은 한국에 대해 군사 행동을 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 당연히 광주 항쟁에 개입할 의사도 없었다. 당시 미국 정부 역시 같은 판단을 했었다. 탐사보도 전문기자 팀 셔록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보한 미국 정보기관 자료로 확인된 내용이다. 반면, 광주 항쟁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폭력 진압은 미국과 중국이 손 잡는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을 가로막은 사건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 세력의 역사적 과오는 광주 시민 학살과 성폭행 등에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다 일찍 완화될 수 있었던 냉전 질서를 다시 굳혔다. 다음은 설 씨의 글 전문이다.   


소위 보수 정권 기간 동안, 즉 이명박의 임기가 시작된 2008년 2월부터 박근혜의 탄핵에 이르는 2017년 3월까지 광주 항쟁의 집단적 기억과 역사는 극우세력에 의해 극심한 왜곡에 시달려 왔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빛나고, 가장 비극적인 열흘이었던 광주항쟁은 진상 규명이 활발했던 199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의 버금가는 사건으로 대중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디게나마 도약하는 시기에는 북한 특수 부대 개입설 등과 같은 광주 항쟁에 대한 왜곡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왜곡은 한국 민주주의가 그만큼 취약하다는 방증일 뿐이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광주항쟁에 대한 탐사보도와 학문 연구가 사실상 정체했다는 것도 극우의 왜곡을 가능케 한 다른 요인이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다시 불붙기 시작한 진상규명 노력조차, 여전히 과거에 이미 거론됐거나, 찾아냈던 사실을 복기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한국 내 진실규명 상황이 착잡하게 더딘 탓도 있겠지만, 한국 전쟁 이후 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던 광주 항쟁에 대한 국제적 역학 연구는 미국의 항쟁 진압을 규명하는데 국한돼 왔다. 광주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역학과 세계 경제정치적 맥락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다.


사실상 첫 시도이므로, 글의 범위를 1980년 전후의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역학에 제한한다. 또한 논증을 위한 데이터 역시 1차 자료, 외교, 정부 문서 그리고 언론 자료 등으로 제한한다. 


기존의 연구가 거의 부재한 탓이다. 또한 자료 접근성의 극심한 제한 때문에 중국 측 1차 자료를 인용할 수 없었다. 보다 많은 1차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중국이 어떤 논리와 목적을 갖고 한반도의 1980년 5월을 접근했고 개입했는지를 보다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광주항쟁 : 신냉전시대의 길목 


광주항쟁은 1980년대 중반까지 미국 카터-레이건 행정부를 잇는 신냉전 시대의 중심인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관계 역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총을 겨누고 싸운 27년 만에, 미국과 중국은 1979년 1월1일을 기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에 앞서, 1978년 8월 12일, 일본과 중국이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서로 손잡고, 소련을 견제하면서 서로의 시장에서 경제적 활로를 찾으려는 미국과 중국이 새로 짠 거대한 장기판을 비집고 나온 시험대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각자의 영향권 하에 있는 지역의 분쟁이 군사행동으로 격화할 수 있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에 대한 첫 시험대였던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국교정상화를 기점으로,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구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해체될 기미조차 없던 동서 양극체제 하에서,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긴장 완화가 필요했다. 

미국이 구상하고, 중국이 적극적이었던 미국-남한-북한의 3자회담이 그것이다. 미중 국교 정상화 7개월 이후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와 한국 대통령 박정희는 공동성명에 3자 회담 제안을 포함시킨다. 


미국의 의도는 중국의 지지 하에 미국-남한-북한 세 주체가 모여 서로 교차 승인 후, 남북 불가침 선언을 통해 한국전쟁을 종식한다는 게 회담의 장기 목표였다. 남북의 교차 승인은 물론, 북미, 한중 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장기적 프로젝트였다. 유념할 것은 이것은 단순히 평화체제는 아니었다. 미국과 중국이 손잡고 소련을 견제하려는, 냉전체제의 한계 안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주변 열강의 의도와 무관하게, 남북한 민중들에게는 고단한 군사대결 체제를 종식하고, 냉전 체제 하에서 평화 공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였다. 빈약한 기회였으나, 한반도의 대전환이 가능한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이 기회가 무산된 결정적 계기는 광주 항쟁의 무력 진압과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학살 정권과 당장에 평화를 대화한다는 것은 실리도 명목도 없었다. 대화를 줄다리기하던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중국의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항쟁의 유혈 진압과 관련해서 미국을 비판했다. 광주항쟁의 무력 진압과 그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미중의 냉전적 동맹 하에서조차, 한반도에서 남북을 둘러싼 두 열강이 이해가 상충되며, 서로의 영향권에 대해 계속 갈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 후, 급속히 냉각된 남북관계는 간헐적 해빙기를 제외한다면, 1991년 12월 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 기본 합의서)가 체결까지 냉전 상태를 지속했다. 이 또한 노태우 정권 하의 제한적 국내 민주 역량이 이끌었 다기보다, 동구권의 해체와 탈냉전 구도의 영향 등 국제 정세에 대한 남북 지배층의 적극적 대응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0 년 5월 항쟁 전후로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어떻게 재편하려고, 광주의 무력 진압과 전두환의 집권이 그것을 결정적으로 종결 했는지 살펴보자.


여력이 없는 북한 


1970년대 중반과 말기에 접어들어서, 격변하는 한반도 주변 정세와 더불어, 남북의 국내 정세도 녹록지 않았다. 1970년대 말, 남한은 중공업 과잉 투자로 말미암아, 경제는 급작스럽게 냉각됐고, 기층 민중의 불만이 기존의 지식인과 학생 중심의 민주화 운동과 접목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점증하는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의 경제지표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북한 경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장기침체에 들어갔다는 게, 좌우를 아우르는 합의다. 또한 이런 정치경제 상황에서,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는 마무리되고 있었으나, 적어도 북한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압도할 여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남과 북 모두,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남한에서는 1979년 부마 항쟁에 이어, 10.26 그리고 이듬해 5.18에 이르는 정변이 일어났다. 외부에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지만, 북한도 비슷한 시기에 정치 불안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 1980년 5월 28일, 평양주재 헝가리 외교관이 본국에 보고한 전문은, 시민의 자발적 봉기라는 초유의 비상사태가 남한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정보부에 해당하는 국가안전보위국의 국장 이진우가 조선 만주 국경의 소요 대응을 현장지도하고 있었다고 밝힌다. 


헝가리 외교관과 면담한 부국장은 "남한의 최근 소요(광주 항쟁) 이래, 북한 당국은 남한이 (항쟁 진압에) 쏠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남측의 도발보다, 북쪽에 자리잡은 적대 세력의 체제전복 활동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Wilson Center Digitnal Archive 1980) 미국 정보기관 사이의 협의체인 국가 정보 위원회(National Intelligence Council)에 미 중앙정보국(CIA)가 제출한 1980년 6월 2일자 회의의제에서 정보국은 미국의 단호한 군사공격 의지 표명이 북한이 광주 항쟁에 개입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고 자화자찬 한다. (CIA, Agenda Items for 10 June NUC Warning Meeting 1980)


그러나 사실상 북한은 남한의 정치 혼란을 이용할 의사도 능력도 이미 고갈되어 있었다. 미국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이 미국 정보공개법(FOIA)을 활용해 입수한 북한 지도자들의 대화는 이 점을 드러낸다. 김일성과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등이 나눈 대화다. 1980년 5월 30일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정보 보고서는 "'최종 검증이 안된' (not finally evaluated) 첩보(intel)"를 담고 있다고 적시된 것으로 봐서 제3국이나 북한 내부 인적 첩보(humint)를취합한 자료로 보인다. 정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월 19일 남한에서 학생 시위에 이어, 광주에서 학생 소요가 일어나는 와중, 북한의 주석궁에서는 김일성 주석과 무력부장 오진우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비밀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 북한의 지도자들은 광주 소요가 전국적 인민 반란으로 확대된다면, 남한을 침공하는 일을 자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김일성이 실제로 침공을 준비한다고 시사하는 이상 징후는 없다." 


요약하면, 광주 항쟁이 전국 반란으로 번지면, 군사행동을 한번쯤,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북한의 입장이었고("자제하지 않겠다"), 실제로는 그조차 아무런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의사도 능력도 없는 말의 성찬이었다. 이 점은 2017년 5.18 기념재단이 CIA FOIA 웹사이트에서 찾아낸 광주항쟁 관련 20여 개의 기밀해제 문건에서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1980년 7월, 미국 정치인으로서 북한을 최초 방문한 스티븐 솔라즈(Stephen Solarz) 하원의원을 만난 김일성은, 비록 외교적 수사라 할지라도, 광주에 개입을 하지 않은 이유는 미국의 경고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조금 길지만 인용한다.


"광주사태(incident)가 일어나자, 미국은 제3자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발언이 우리를 향한 경고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봉기에 개입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역시, 이러한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남한 당국이 말하는 북조선의 남침 위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북한이 남한의 혼란상을 이용해 남침하려 한다는두려움도 사라졌다. 미국의 가장 큰 우려인 즉, 남한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남한으로 전진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자만, 이번 사태는 우리가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StephenS. 1980,9-10) 


이에, 솔라즈는 "북 측이 남한의 소요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며, "그러한 북의 입장은 건설적이었다"고 답한다. (242. Memorandum of Conversation 1979) 북으로 출국 전, 국무부와 정보부의 대북 브리핑을 받은 미국 하원의원의 화답이었던 셈이다. 


3자회담 : 북한의 대담한 제의, 중국의 후원, 그리고 미국의 화답


위에서 인용한 김일성의 발언은 북한이 1970년대 중반부터 취한 외교 노선의 논리와 같은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군사력을 통한 남한의 무력 점령 전략을 점차 포기하고 있었다. 


열전 대신, 북한은 스스로를 둘러싼 냉전구도의 재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미국과 중국이 데탕트의 일환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1970년대 중후반, 북한은 중국과 함께 미국을 상대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당사자의 지위를 활용 한반도에서 유일한 자주국가의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그리하여, 체제 안전 보장을 확보하려 했다. 1974년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 회의에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결의했고, 1977년 1월,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공식 제안했다. 한편 남한에 대해, 연방제 구성과 단일국호 유엔 가입을 제안했다. 박정희는 남북 불가침 조약 회담을 역제안하기도 했다.

1970년대 말, 박정희 유신정권 하에서, 한미 관계가 소원해졌다 해도, 미국이 한국을 완전히 배제한 채, 냉전체제 하에서 북한과 한국 전쟁의 강화 조약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는 일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미국의 제안이 남북미 3자 회담 제안이다.


카터 행정부 당시, 국무부 파일을 살펴보면, 미국은 1979년 7월 카터와 박정희 정상회담의 코뮤니케를 통해 3자 회담을 제안하려고 했고, 1979년 초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내부입장이 정리되자, 5월에는 중국과 이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한다. 5월 4일 백악관 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nski)는 주미 중국대사 차이 제민(柴泽民)과 만난다. 하루 전, 차이 대사와 카터 대통령과 미소 군축회담에 대한 면담의 내용을 재확인 것을 제외한다면, 3자 회담이 유일한 대화 주제였다. 미국은 3자 회담을 실현시킬 방법을 중국에게 물었다. 브레진스키는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통한 극동 지역의 안정이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이해이지만, 소련의 이해는 아니라며, 3자 회담을 통한 남북 긴장 완화의 목적이 종국적으로 소련 봉쇄 전략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242. Memorandum of Conversation 1979)


차이 대사가 북한이 남한이 참여하는 3자 회담 틀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하자,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대북 대화는 남한의 의구심을 사게 될 것이며, 미국과 중국이 3자 회담을 실현할 수 있는 창의적 해결책(creative solution) 을 모색하자고 제의해 중국의 동의를 얻는다. 중국의 지원을 확인하자, 미국은 3자 회담 제안 준비를 재빠르게 진행한다. 5월 23일에는 정상회의 준비 명목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전 주한대사 필립 하비브(Philip Habib)를 특사로 서울로 보내, 이를 조율한다. 그리고 대중 접촉을 통해, 북한의 입장과 의중 변화를 계속 확인해 간다.


미국의 뜻대로, 그리고 중국의 의도대로, 7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남북한 미국의 고위당국자 회담이 제안됐다. 북한은 7월 10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한미 공동 제안을 거부하고, 종전 서명의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이 주도하고 남한이 옴저버 자격으로 참석하는 3 자 군사회담을 역제안 한다. 이 시기부터 미국은 중국과 루마니아와 같이 미국과 통하지만 북한의 우방인 나라를 통해 북한을 설득해 나간다. 급기야, 1979년 10월 13일, 당시 루마니아 외상이었던 스테판 안드레이(Stefan Andrei)을 통해 북한의 3자 회담 거부가 최종 입장이 아니며, 이 제안을 계속 고려하겠다는 전언을 듣는다. (Romanian Remarks on the Korea Trilateral Proposal 1979) 


그러나 이 모든 움직임은 10.26 박정희 암살로 시작한 남한의 정변과 5.18 광주 항쟁의 진압과 신군부의 집권으로 중단되었다. 무엇보다 광주의 유혈진압과 그에 대한 지지로 말미암아, 한국과 미국 모두 남북 긴장 완화를 위한 정치적 도덕적 이니셔티브를 상실했다.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의 회고록(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Carter and Korea in Crisis(한국판 제목은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 의하면, 1980년 5월 22일, 국무성 아태 차관보 리차드 홀부르크(Richard Holbrooke)는 중국 대사 차이를 국무성으로 불러, 중국이 북한이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고무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광주에서는 시민군이 도청을 점거한지 하루가 채 되지 않고, 미국이 전두환의 유혈 진압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백악관 회의와 같은 날 만난 이 두 사람이 당시 남북한 사정에 대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중국은 일면 미국을 제한적으로 비판하고, 북한을 단속함으로써, 한반도의 안정을 조기에 확보하고, 자신의 대북 영향력을 확인 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맞닿아 있었다.

체로키 파일 

3자 회담 협상 무산과 더불어 주목할 지점은 소위 체로키 파일(Cherokee files)이다. 팀 셔록이 1996년 정보공개법을 통해 입수해서 세상에 알려진 체로키 파일은,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10.26 이후 한국 상황을 점검하고 비상사태를 대비하려고 구성된 것이 아니라, 3자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 국무성은 1979년 6월 8일을 기해 3자 회담 관련 모든 전문들에 "Cherokee"라는 분류 캡션을 넣으라고 지시한다. (DepartmentState 1979) 보안등급이 높은, 한반도 담당 고위관리만 3자 회담 전문을 읽고, 토론하고 회담의 성사를 진행할 사실상의 태스크 포스가 이 즈음 시작된 것이다. 체로키 팀은 최소 13명의 고위관리들로 이뤄져 있었다.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위한 회담을 촉진하기 위해 구성된 테스크 포스가 이듬해 5월에는 신군부의 군사쿠데타를 인정하고, 광주의 유혈진압을 사실상 승인한 것은 언뜻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전혀 모순된 상황이 아니다. 위에서 서술한대로, 당시 한반도의 긴장 완화는 목적이 아니라, 지역을 재편하려는 미국과 중국의 수단이었다. 수단은 새로운 목표를 위해서 언제나 폐기될 수 있다. 미국은 신군부 지지를 통한 질서회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지역구도 재편을 위한 한반도 긴장완화라는 수단을 버렸다. 요컨대 기존의 냉전질서에 대한 도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쉽게 진압을 결정한 것이고, 중국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묵인하거나 방조하면서, 지역에서의 자신을 영향력을 유지했다.


결론을 대신해서. 


1. 1980년 5월, 광주 항쟁은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었다. 주변 열강의 어느 정부도 광주 시민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중국과 미국은 극동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긴밀히 협조했다. 양국 모두 광주 항쟁이 신속히 종결될 것을 원했고, 그러한 구도를 만들어 나갔다. 


2. 이러한 구도 속에서, 북한이 광주 항쟁을 획책하거나,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극우 지만원의 북한개입설은 실증적으로나 지역 역학적으로나 어불성설이다.


3. 현재까지는, 남북미 3자 회담 더하기 중국이라는 구도 하에서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표면 상, 1970년대 말 시도됐던 3자 회담의 구도가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때와 다른 점은 긴장 완화와 화해가 회담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점이다. 


4. 주변 열강 구도를 비집고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의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통성 있는 건강한 민주정부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 화해 구도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주체가 촛불혁명 이후 집권한 문재인 정부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5. 또한 1970년대 말 당시, 열강 구도의 재편 속에서, 미국과 중국의 3자 회담 구상을 적극 활용하지 못한 남북한 권위주의 체제의 경직성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남북 모두, 이 빈약하지만 새로운 기회를 적극 활용하지 않고, 상대방을 고립시키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6. 광주 항쟁의 유혈진압으로 주변 열강들의 긴장 완화 흐름을 한반도에 주입하는 게 불가능해지자, 남북관계도 냉각되어 갔다. 한반도 내부에서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남북화해도 불가능하고, 세계열강에 자기 운명을 내맡길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7.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격동과 동북아시아의 세력의 재편 속에서 중국이 광주항쟁을 어떻게 평가했고, 정책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충분한 자료와 논쟁을 통해 그런 연구가 진행된다면, 광주항쟁의 세계사적 의미를 올곧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