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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동 고시원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

일취월장7 2019. 2. 8. 14:36

대림동 고시원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

재한 조선족은 왜 대림동에 모였을까. 우리는 그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림동 한 달 살기’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했다. 대림동은 그들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이자 결과였다.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글 김동인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astoria@sisain.co.kr 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제594호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상점 간판에는 중화요리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閣)·루(樓)·원(園)·옥(屋) 같은 으리으리한 단어가 없다. 그저 점(店)이나 관(館) 따위 이름이 붙은 ‘작은 가게’뿐이다. LED 장식이 가로등 대신 길거리를 비추고, 향신료 냄새와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중국어가 후각과 청각을 마비시킨다. 중국 소도시 하나를 통째 옮겨놓은 듯 날것 그대로다.

서울 지하철 2·7호선이 만나는 대림동은 약 20년간 꾸준히 내국인 인구가 감소해온 지역이다. 2000년 2만4254명이 살던 대림2동은 2018년 1만2758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떠난 자리는 이주민이 채웠다. 2000년 89명에 불과하던 대림2동 상주 외국인은 2018년 9240명으로 늘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외국인은 이보다 많다. 반드시 이곳에 살지 않더라도, 대림동은 중국 출신 이주민에게 일종의 ‘관문’으로 기능한다. 장을 볼 때에도, 스마트폰을 개통할 때에도, 고향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들러야 하는 ‘배후지’다.

<시사IN>은 지난해 12월2일부터 올 1월2일까지 한 달간 이곳에서 대림동을 들여다보았다. 기자는 대림2동 대림중앙시장 인근 작은 고시원에서 서른 번의 밤을 보내며 원주민과 이주민, 정착민과 임시 거주민을 만났다. 통계와 법률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계에 놓인 삶을 마주했다. 조화와 갈등이 복잡하게 반복되는 이곳에서도 생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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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8일 금요일 저녁 조선족들이 약속 장소로 가장 많이 이용하는 대림역 12번 출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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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남구로역 교차로에 모였던 조선족 노동자들이 봉고차에 타고 일터로 이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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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2동 한 음식점 종업원이 가게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다.



대림동 고시원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책상 모서리에 무릎을 찧었다. 월 38만원짜리 고시원 침대에 누우려면 다리를 책상 아래로 집어넣어야 했다. 네댓 번 잠을 설치고 나면 겨우 아침이 왔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 냉기에 콧등이 시큰했다. 2018년 12월, 5㎡(1.5평) 남짓한 크기의 고시원에서 서른 번의 밤을 보냈다.

고시원이 위치한 상가 건물은 서울시 영등포구 도림로 38길 끄트머리에 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이른바 ‘대림동 메인 스트리트’라 불리는 대림중앙시장 길 한가운데다. 고시원 투숙객 열에 아홉 사람의 모국어는 중국어였다. 방은 12개이지만, 화장실은 하나뿐이었다. 주말이면 지하 1층 가라오케에서 2층 방까지 노랫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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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7일 드론으로 촬영한 대림동 일대 저녁 풍경.

법정동 기준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 행정동 기준 대림1·2·3동은 2017년 8월 영화 <청년경찰>의 개봉과 흥행으로 새삼 주목받았다. 영화에서 대림동은 가출 청소년을 납치해 난소를 적출하는 일당의 근거지로 묘사됐다. 영화 속 택시 기사는 “여기 조선족들만 사는데 여권 없는 중국인도 많아서 밤에 칼부림이 자주 나요. 경찰도 잘 안 들어와요. 웬만하면 밤에 다니지 마세요”라는 대사를 한다. 대림동에 거주하는 재한 조선족(중국동포, 한국계 중국인 등을 통칭) 커뮤니티는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제작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2018년 11월8일 1심 재판부는 “개인이 아닌 전체를 혐오 집단으로 묘사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2018년 10월2일 <동아일보>는 ‘서울 초교 첫 全(전) 신입생 다문화 학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대림2동에 위치한 대동초등학교 2018년도 신입생 전원이 다문화가정 자녀라는 내용이었다. 오보였다. <동아일보>는 “1학년 70명 중 54명이 다문화가정 자녀”라고 기사 내용을 수정했다. 초등학생이라는 ‘다음 세대’가 부각되며 대림동이 다시 주목받았다. 대림동 내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의 확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재한 조선족은 왜 하필 대림동에 모이기 시작했을까? 동네는 얼마나 어떻게 변했고, 그곳에서 사는 삶은 또 어떨까? 대림동은 정말 위험할까? 우리는 재한 조선족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지난해 12월2일 시작된 ‘대림동 한 달 살기’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했다.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낯선 것들로 가득했다. 이동통신 매장은 위챗(중국 메신저 앱) 아이콘을 붙여두고, 식당 입구에는 틱톡(TikTok: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동영상 기반 소셜 미디어) 아이디가 적혀 있다. 상점에서 취급하는 물건도, 식당에서 주문할 수 있는 음식도 달랐다. 목 좋은 곳에는 빠짐없이 여행사·행정사·환전소·이동통신 매장이 빼곡히 들어섰고 간판은 대개 중국어 간체로 적혀 있었다.

ⓒ시사IN 신선영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대림2동 풍경.
대림중앙시장 거리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내국인은 이탈하고, 외국인은 느는 곳

대림동은 의외로 작고 생각보다 복잡했다. 대림1·2·3동도 각각 다르다. 대림1동은 최근 아파트 재건축이 진행 중인 ‘안쪽 동네’다. 지하철 7호선 신풍역과 대림역 사이에 있어서 상가보다는 주거지가 많다. 대림역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한 대림3동은 상대적으로 ‘젊은 동네’다. 길과 골목이 비교적 정방형으로 구획되어 있고, 아파트와 빌라가 어우러진 평범한 서울 동네에 가깝다. 거주 인구도 가장 많다.

반면 대림2동은 미로처럼 뒤엉킨 옛 골목을 유지하고 있다. 주거 환경만 놓고 볼 때 대림2동은 이 지역에서 가장 낙후됐다. 집은 낡았고, 길목은 좁으며, 주차할 곳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대림중앙시장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상권이 활성화되었고, 지하철 2·7호선 대림역과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이 인접해 있어서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하다. 서울 전역에서 모여들기 쉬운 동네이자, 서울 어디든 이동하기 편리한 동네다. 대림동에서도 가장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는 곳이다. 언론에서 흔히 말하는 ‘대림동’은 대림2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한 조선족은 얼마나 많이, 언제부터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을까. 서울시에서 발표한 ‘등록인구 통계’를 통해 이주의 흐름을 짐작해볼 수 있다(아래 그래프 참조). 2000년 대림동 전체(대림 1·2·3동 합계) 인구는 총 8만2139명, 이 가운데 등록 외국인은 299명이었다. 대림2동만 놓고 봐도 내국인은 2만4254명이었지만 외국인은 89명뿐이었다. 상황은 2003년부터 2006년 사이에 급격히 변했다. 2003년 1378명이었던 대림2동 등록 외국인 수는 2006년 5073명으로 3배 이상 급증했다. 이후에도 2007년 6408명, 2008년 8167명으로 꾸준히 증가한 대림2동 등록 외국인은 2018년까지 10년간 8000~1만명을 유지하고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단기 체류자를 고려하면 실제 대림동 거주 외국인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림동이 중국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일종의 ‘관문(Portal)’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거주 중인 등록 외국인 수가 통계상 10년 동안 정체되어 있다고 해서 ‘2008년 이후 대림동 외국인 인구는 그대로다’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오히려 이 통계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내국인의 이탈이다. 2000년 2만4254명이던 대림2동 내국인 인구는, 2018년 1만2758명으로 반 토막 났다. 최근 7년 사이 5200여 명이 감소했다. 내국인은 이탈하고 외국인은 늘고 있다.


왜 하필 대림동이었을까. 재한 조선족 주민 다수는 “가리봉보다 살 만해서”라는 이유를 첫 번째로 꼽았다. 대림동 이주는 2000년대 중반 본격화된다. 반지하 월세방일지언정 가리봉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거 환경이 쾌적했다.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인력시장과도 멀지 않았다. 여성들의 경우 강남 지역 식당을 오가기에 2호선이 다니는 대림동은 최적의 위치였다.

대림동의 독특한 부동산 구조도 한몫했다. 특히 재한 조선족의 이주가 집중적으로 이뤄진 대림2동은 아파트를 찾기 어려운 동네다. 과거 논밭이었던 이곳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사이 다가구주택 밀집지역으로 변신했다. 대림2동 대다수 주택은 당시 유행했던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다. 2층 독채에는 주인집이 살고 있고, 1층은 둘로 나누어 전세를 놓는다. 지층은 공간을 3~4개로 나누어 월세를 놓는 식이다. 여기에 옥탑방이 추가되면서 8가구 정도가 함께 사는 공동주거 공간이 완성된다. 주민들은 이런 집을 ‘대림2동 표준형 주택’이라고 불렀다.

재한 조선족들이 몰리면서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시작은 먹거리였다. 식재료 상점부터 연회가 가능한 대형 음식점(대주점)이 2000년대 들어 등장했다. “그때 시장 인근에 ‘전화방’이 많았어요. 길거리에 아예 전화기를 내놓고 영업하는 곳도 있었죠.” 대림동에서 20년 넘게 거주한 내국인 고안수씨(49)의 말이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사람들에게 대림동은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되는 공간이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대림중앙시장 골목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렸다. 대림2동 주민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리며 곳곳이 인산인해였다. 지난해 12월은 연말이라 더욱 붐볐다. 크고 작은 식당마다 송년회가 열렸다. 이른바 ‘대주점(大酒店)’으로 불리는 연회장이나 ‘연변냉면’ ‘하룡냉면’ 같은 유명 식당은 예약 손님으로 붐볐다. 재한 조선족이 대림동이나 구로동에만 사는 건 아니다. 다른 동네에 살더라도 대림동은 필요에 따라 꼭 들러야 하는 공간이다. 시장과 식당, 일자리를 구하는 직업소개소 외에도 각종 여가를 보내는 곳이다. 중국산 게임을 할 수 있는 PC방과 당구장 외에도 각종 유흥업소가 몰려 있다. 장을 보고, 친구를 만나고, 생활 편의시설을 이용하며 일자리를 구한다.

대림2동 유동인구의 규모는 서울시 공공 빅데이터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는 전체 행정구역을 1시간 단위로 쪼개 유동인구를 파악한다. 대중교통과 스마트폰 이용량을 분석해 추산한 결과다. 2019년 1월5일 토요일 기준,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유동인구가 많은 시간대와 장소는 저녁 9시 대림2동(약 8070명)이었다(아래 인포그래픽 참조).










학원 전단지 쏟아지는 대림역 12번 출구

이 밖에도 이주민은 각종 ‘정보’를 찾아 대림동으로 모여든다. 정보의 핵심은 불법체류 단속 등 신분 변화와 관련한 내용이다. 마침 기자가 이곳에 머무른 기간은 법무부가 지정한 ‘특별 자진 출국 기간’이었다. 2018년 10월1일부터 2019년 3월까지, 6개월 내 자진해서 출국할 경우 추후 입국 규제 등 불이익 조처를 취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반대로 이 기간 단속에 적발된 불법체류자는 입국 규제 규정이 엄격해져 길게는 10년간 입국이 금지된다. 매주 ‘자진 출국’ 안내문을 나누어주는 이들을 대림역 주위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각종 상가 건물에도 ‘불법(체류자) 상담’이라는 안내문이 나붙었다.

정부의 외국인 출입국 정책은 해마다 노동시장의 요구에 따라 변했다. 주기적으로 자진 신고 기간을 마련해서 불법체류 중인 이들을 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상황에 따라 입국 문호를 넓히거나 좁히기를 반복했다. 제도가 자주 바뀌다 보니 관련 정보에 늘 귀를 기울여야 했다. 대림동에는 한국식 행정절차와 각종 서류 작업을 대행해주는 여행사나 행정사 사무실도 잇달아 문을 열었다. 여행사·행정사 외에도 정부 정책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업종이 바로 각종 학원이다.


ⓒ시사IN 신선영
요즘 대림동에서 인기를 끄는 자격증은 실기 비중이 높은 버섯종균기능사다.

대림동을 처음 찾은 사람들은 다른 동네에선 볼 수 없는 몇 가지 기호에 혼란을 겪는다. C38·H2·F4·F5처럼 암호 같은 낯선 문구가 점포마다 붙어 있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직원 구함. H2, F4, F5, 한국인 가능” “F4를 위한 최고의 선택. ○○○학원” 온종일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림역 12번 출구 근처에서는 정오 무렵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각종 학원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한다. “철근 수강료는 60만원이고, 거푸집은 70만원이야. 각각 재료비는 20만원이고. 원서비는 따로 내야 돼.” 형틀(거푸집), 건축도장(페인트), 건축목공(목수), 온수온돌(설비), 방수, 철근, 비계 등 건설기능사 외에도 미용, 요리, 제과·제빵, 세탁기능사 학원이 도림로 인근 빌딩마다 들어차 있다.

‘제빵기능사가 세탁기능사보다 따기 쉽습니다.’ 대림2동에 위치한 한 학원 외벽에 붙은 광고 문구다. 대림동 학원가의 경쟁은 노량진 학원가 못지않다. 합격자 사진을 외벽에 걸어두거나 합격자 명단을 학원 입구에 붙여둔다. 한 내국인 주민은 “요즘은 이곳에서 버섯종균기능사가 가장 핫하다”라고 말했다. 재한 조선족 중에는 대화는 가능해도 한국어 독해나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많다. 버섯종균기능사처럼 필기 비중보다 실기 비중이 높은 자격증이 인기다. 이들 학원은 ‘손쉬운 비자 전환’을 전면에 내걸며 홍보한다. 최근에는 종로나 여의도에 있는 학원까지 홈페이지에 ‘F4(재외동포) 비자’를 내세우며 ‘비자용 학원 시장’ 공략에 나섰다.

잠깐 돈만 벌어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운 이들도 비자를 전환하고 체류 기간이 길어질수록 ‘앞으로’를 고민하게 된다. 재한 조선족의 이주는 가족 단위로 확장된다. 혈혈단신 한국에 입국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체류하게 되면 가족과 친지가 연이어 건너온다. 대림동에서 20년 이상 거주한 김정숙씨(38)는 “우리 집도 지층과 1층에 세를 주고 있는데, 부부가 살다가 애가 태어나면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중국에서 부모가 한국으로 온다”라고 말했다. 2000년대 대림동 이주가 2인 가구 시대를 열었다면, 2010년대 대림동은 ‘3대가 모여 사는 삶’이 펼쳐진다. 이들 가운데 거주 기간이 오래되고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이들은 영주권 비자(F5)로 전환하거나 귀화를 추진하기도 한다. 재외동포재단에 따르면 지금까지 귀화한 재한 조선족(법무부 분류명 한국계 중국인)은 1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장기 체류를 거쳐 3대 정착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바로 ‘조선족 3세대’다. 경제활동이 가장 활발한 세대다. 대림동에서 가장 대표적인 동포 조직 중 하나인 한마음연합회 김용선 회장(42)은 조선족 세대 구분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제시대에 만주 땅으로 넘어온 1세대 동포들이 우리 조부모 세대다. 해방 직후 국경이 닫히면서(분단) 그대로 머물며 살다 우리 부모 세대인 조선족 2세대가 태어났다. 하지만 2세대는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그저 농사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같은 3세대들은 그나마 축복받은 세대다. 조선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굳이 한국으로 오지 않더라도 이들 3세대 조선족의 ‘이중 언어’ 능력은 중국 내에서 자산이 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칭다오(청도) 같은 연해 지역 대도시에 한국 기업이 대거 진출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중국 내 한국 기업에서 일하다 2010년대에 뒤늦게 한국으로 오는 이들도 늘었다. 한국 제조업 기업이 동남아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사업을 철수하기 시작하면서다.

1970~1980년대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교육받을 기회가 많았고, 이중 언어라는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에 다양한 네트워크를 가진 조선족 3세대는 2010년대 ‘대림동’을 더 입체적으로 바꿔놓았다. 정착 초기만 해도 이들 3세대는 내국인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돈을 모아 상점을 열고, 조그만 사업을 시작하면서 ‘재한 조선족 3세대 중산층’이 등장했다.

3세대 중산층은 주로 자영업에서 성공을 거뒀다.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 중 하나인 ‘대림중앙문화관광형시장 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는 윤민진 박사는 대림동 상권의 특성을 “다른 지역에 비해 경기를 타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내국인을 상대로 영업하는 다른 동네와 달리, 이주민을 상대로 한 대림동은 국내 경기변동의 영향을 덜 받는다. 다른 지역과 달리, 프랜차이즈에 의지하지 않는 방식도 대림동 자영업자의 특징이다(42~43쪽 기사 참조). 이들은 식당을 크게 열거나, 대림동과 구로동에 비슷한 점포를 여러 개 소유하면서 같은 재한 조선족이나 한족 출신 중국인을 고용하기도 한다.

“한국인 1등, 조선족 2등, 한족은 3등 시민”

무역업으로 성공하는 3세대도 늘었다. 초기 정착민인 부모 세대와 달리, 중국 내 네트워크가 많다는 것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한국 상품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권양석씨(49·가명)는 “한국 내 네트워크가 빈약하다 보니 중국 물품을 한국에 수입하는 사업은 어렵다. 하지만 중국 내 유통망은 우리가 더 빠삭하니까 괜찮은 한국 상품을 중국에 수출하기에 상대적 이점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인기 있는 품목은 한국 화장품이다. 보따리상부터 정식으로 법인을 차려서 화장품 수출 사업을 벌이는 이들까지 규모도 다양하다. 이들 회사의 물류창고와 사무실은 비교적 덜 복잡한 대림3동에 모여 있다.

안정적으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며 영주권이나 국적을 획득한 이들의 등장은 대림동 인구 지형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0년대 들어 3세대 중산층의 ‘재이주’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가족이 늘고 좀 더 안정적인 주거를 필요로 하는 대림2동의 3세대 중산층이 대림3동으로 많이 이사했다. 단독주택 반지하에서 좀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찾아 상대적으로 정비가 잘된 대림3동으로 이주하는 식이다. 2010년 대림3동 외국인 인구는 3187명이었지만 2018년에는 4907명으로 늘었다. 대림3동에 거주 중인 한 이주민은 “대림2동은 지하철역이나 시장과 가까워 월세가 많이 올랐다. 최근 젊은 친구들이 대림3동에 가게를 많이 냈는데, 젊은 층은 대림2동보다 이쪽 가게를 더 자주 찾는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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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중앙시장에서 한 주민이 음식 포장을 기다리고 있다.

아예 대림동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리 멀지 않은 수도권 지역을 눈여겨보았다. 대림동을 벗어난 재이주 지역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집값이 저렴해야 한다. 먼저 이주한 재한 조선족이 있다면 더 좋고, 주변에 전통시장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또 하나 중요한 조건이 있다. 지하철로 언제든 쉽게 대림동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가장 적합한 지역이 바로 인천 부평구 부평동과 과거 소사구로 묶여 있던 부천시 심곡본동, 소사동 지역이다. 2010년 12월 경기도 부천시와 인천시 부평구에 거주하는 재한 조선족은 각각 564명과 287명이었지만, 2018년 9월에는 부천시 7615명, 인천시 부평구 3892명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3세대 중산층은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들이 조직한 단체는 1990년대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중국동포 인권운동을 주도하던 ‘교회 커뮤니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지역 언론사는 한때 20개가 넘었다. 이들 단체는 각종 봉사활동과 동포 지원 사업을 벌인다. 목표는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차별적 대우를 줄이는 데 있다.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삶’이 ‘한국에 뿌리내리는 삶’으로 바뀌면서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3세대 중산층이 등장했지만 오늘날 대림동의 근간을 이루는 이들 다수는 육체 노동자다(38~39쪽 기사 참조). 대림동에 거주하거나 대림동을 거쳐 가는 모두가 중산층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림동을 오가는 재한 조선족 가운데 다수는 내국인 평균 이하의 소득을 얻고 있다. 재외동포재단이 2016년 실시한 ‘국내 체류 중국동포 현황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54.6%가 연간 소득 2000만원 미만으로 나타났다. 1인 거주자 비율은 28.8%, 월세 또는 임시 거처에서 지내는 이들은 약 72.7%에 달했다.

대림동 곳곳에서도 이 같은 통계를 뒷받침하는 삶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고시원에 머무는 이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가장 열악한 주거는 찜질방이다. 대림역 11번 출구 인근에 있는 한 대형 찜질방에는 캐리어 보관실이 따로 있다. 30~ 40ℓ 백팩을 들고 온 이들은 사우나 탈의실 라커 위에 가방을 올려두기도 했다. 사우나 탈의실 곳곳에는 건설 현장 안전모, 세탁용 가루비누, 작업복 등이 방치돼 있었다. 돈이 없어서 월세를 구하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지방 현장 일이 끝난 후 다른 일을 찾는 동안 머무르는 이들도 많았다.

ⓒ시사IN 신선영
지난해 12월15일 중국 조선족 자녀와 한국인 자녀가 함께 교육받는 구로도서관 어울림학교에서 학생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대림동에는 재한 조선족만 거주하는 게 아니다. 한국어가 낯설더라도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 한국을 찾는 한족 출신 중국인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부는 투자 이민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지만, 꽤 많은 한족이 재한 조선족 사장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거나, 재한 조선족 ‘오야지(팀장)’가 이끄는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 대림동에서 만난 한 한족 출신 중국인은 “여기서 한국인은 1등 시민, 조선족은 2등 시민, 한족은 3등 시민이지 않나”라며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중국에서 조선족이 소수민족으로 차별받는 것과는 반대 양상이 대림동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특히 한국에서 ‘언어(한국어)’는 일종의 권력이고 자산이 된다. 한 내국인 집주인은 “최근에는 반지하 방에 조선족이 한족을 데려와서 대신 임차 절차를 밟아주기도 한다. 옛날에는 세입자들이 대부분 말이 통했는데, 최근에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입자도 많아서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2010년 중반 이후 대림동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골목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림동 주민들은 “최근 2~3년 사이에 대림동에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라고 말했다. 대림동에 터전을 이룬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나, 부모를 찾아 입국한 젊은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른바 재한 조선족 4세대의 등장이다.

어린 나이에 한국에 오거나, 아예 한국에서 태어난 4세대는 한국 사회에 쉽게 적응했다. 학교에서 한국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정작 부모들은 아이들이 ‘중국어를 할 줄 모른다’며 걱정스러워한다. 이중 언어를 경쟁력으로 삼았던 3세대와 달리 한국에서 한국 교육을 받고 자란 자녀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어가 낯설 수밖에 없다. 귀화를 원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비자 문제 때문에 경범죄도 안 저질러”

하지만 ‘중도 입국 자녀’로 중국에서 뒤늦게 건너온 4세대의 고충은 좀 더 복잡하다. 부모 없이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많다. 부모가 한국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조부모나 친척 밑에서 중국식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언어 문제에 봉착한다. 특히 한국의 공교육 체계에 편입해야 하는 10대는 언어 문제로 교육과정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적응 문제는 교육 문제에서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동포지원센터 최승이 센터장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로·대림동 치안이 불안한 건 아니다. 다만 최근 들어 중도 입국 청소년 범죄 문제는 신경이 쓰인다. 이 지역 특성상 부모가 오랫동안 일하러 나가거나,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줄 수 없는 가정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가정이 흔들리면 청소년 범죄도 늘어난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1월18일 저녁 조선족 동포로 구성된 외국인 자율방범대 대원들이 방범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을 대림동 외부에서는 ‘위험신호’로 인지한다. 치안에 대한 우려도 정작 동네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대림동에서 오랜 기간 지낸 내국인 가운데 “시장 골목은 조금 낯설고 무서워서 잘 가지 않는다”라는 이들도 있는 반면 “여기서 수십 년 살았지만 ‘칼부림’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다수다. 오히려 재한 조선족들은 “비자 문제 때문에 경범죄도 저질러선 안 된다”라고 설명한다. 과태료나 벌금 기록이 남을 경우 재외동포(F4) 비자를 가지고 있더라도 연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에 한 번씩 ‘한국 거주 자격을 심사받는’ 이들로서는 범죄기록을 늘 조심할 수밖에 없다.

재한 조선족이 모여든다는 이유로 대림동을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처럼 묘사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미 대림동은 서울 서남권에서 손꼽히는 상업지역이다. “영화 <청년경찰>이 대림동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확대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만큼 호기심도 불러일으켰어요. 실제로 맛집을 찾아 대림동에 오는 사람도 많아요.” 한 재한 조선족 상인은 최근 몇 년 사이 대림동에 생겨난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대림동에는 언론을 통해 이름을 알린 식당과 상점이 하나둘 등장했다. 주민들 역시 대림동이 ‘서울에서 들러볼 만한 에스닉타운(이색적인 동네)’으로 자리매김해 사람들이 활발히 오가는 게 가장 긍정적인 미래라고 생각한다. 일부는 시 차원에서 대림동을 ‘차이나타운 특구’로 지정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1992년 한·중 수교를 기준으로 보면 재한 조선족 이주 역사는 올해로 27년째다. 대림동의 변화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며 뿌리내리는 과정이 반영된 결과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은 이들의 체류를 ‘정착’으로 바꿔놓았다. 정착에는 갈등이 따른다. 정체성과 차별의 문제가 찾아온다. 대림동에서 시흥동으로 옮겨 가정을 일구어 살고 있는 김정필씨(가명·33)는 한국에서 지내는 삶을 ‘세련된 차별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좀 친해진 한국인들도 ‘한국과 중국이 축구 경기를 하면 어디를 응원할 거냐’는 질문을 생각 없이 던진다. 이런 질문은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모국이고 중국은 조국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김씨는 중국에서도 ‘소수민족’이라는 경계에 선 삶을 살아왔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기사 나가면 악플이 달린다는 걸 잘 안다. 우리한테 ‘짱깨’라고 욕하는 거 다 안다. 그래도 우리 목소리와 우리 삶, 우리가 가진 고민이 대림동 밖으로 알려졌으면 좋겠다.”  

※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은 ‘대림동 한 달 살기’ 웹페이지(daerim.sisain.c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조선족이 많아 치안이 불안하다고?

김동인 기자 astoria@sisain.co.kr 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제594호


지난해 12월11일 KBS 팩트체크K 팀이 ‘조선족은 강력범죄의 원흉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이날 저는 서울 대림동 구석진 식당에서 시라지국(시래깃국)을 우물거리며 이 기사를 읽었습니다. 댓글을 살펴봤습니다.

“기자님께서 먼저 대림동이나 신풍, 가리봉동 이런 조선족 동네서 살아보시죠. 일주일도 못 살고 도망 나올걸.” “밤에 대림동 가보면 이런 기사 절대 못 씁니다. 쪽수 적은 한국인들만 가려서 시비 걸고, 지들끼리 웃고, 지나가면 성희롱하는 게 조선족 패거리들인데.” “책상에 앉아서 숫자 비교하지 말고 조선족 밀집지역에서 직접 몸으로 한번 겪어보든가. 기자 완장 이런 거 두르지 말고 일반인 취객처럼 한번 돌아다녀봐.”

당시 저는 대림동 생활 11일차였습니다. ‘아, 이분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대림동을 온종일 쏘다닐 수 있게 됐구나….’ 머물던 방이 너무 추워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던 저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한 달간 몸으로 겪은 대림동을 ‘팩트체크’ 해드리겠습니다.


ⓒ시사IN 신선영




대림동은 치안이 불안하다. 칼 맞아 죽는 사람도 있다던데?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고, 동네 분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질문입니다. 실제 2017년 12월 우발적 살인이 한 차례 일어난 바 있기 때문이죠. 피해자와 용의자는 모두 재한 조선족이었습니다. 용의자는 당시 다툼 끝에 피해자를 칼로 찌르고 급히 고향 하얼빈으로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설득 끝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자수했죠. 2017년은 대림동 중국동포 단체들이 영화 <청년경찰> 상영 반대 운동을 벌인 해이기도 했습니다. 동네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마침 영화 <범죄도시> 흥행과 이 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어쩌다 한번 우발적인 일이라 해도, 바깥에서는 ‘저기 원래 저러나 보다’ 생각하기 쉽죠.

그렇다면 실제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범죄에 대한 공포’를 얼마나 체감하고 있을까요? 대림동 토박이 한국인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중국에서 이주해온 분들이 칼을 소지하고 있거나, 서로 흉기로 위협하며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제가 만난 한국인 가운데 직접 그런 장면을 봤다는 분은 없었습니다.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오는 반응도 한결같았습니다. “다른 동네 사람들한테도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일상적으로 칼부림 나는 동네는 아니다.”

질문을 바꾸어보았습니다. “실제 이 동네에 살면서 치안이 불안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나요?” 반응은 조금 갈렸습니다. “처음에는 좀 낯설고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부터 “딱히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까지. 오히려 귀화한 조선족 출신 주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년 전 처음 왔을 때에는 나도 이 동네가 낯설고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가 정비되고 사람도 많아지면서 그런 생각은 안 들게 되더라.” 제가 대림동에 사는 동안에는 어땠냐고요? 1월1일 새벽 동네 맥줏집에서 한 번,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 동네 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장면이었죠.


조선족은 중국인인데 왜 스스로를 동포라고 부르나?

엄밀히 말해 ‘동포’는 법적 개념입니다. 재외동포법에서 규정하는 동포는 재외 국민과 한국계 외국인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중국 지역으로 이주한 한국인의 자녀들 역시 동포에 포함됩니다. 한국계 중국인 3세대까지는 재외동포법에 따라 동포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재미동포·재일동포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흔히 ‘조선족’이라 부르는 이들은 재중동포에 해당합니다. 다만 ‘재중’이라는 단어가 현재 중국에 살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살고 있는 이들은 중국에서 온 동포라는 의미로 ‘중국동포’라 통칭합니다. 결국 한국계 중국인·재중동포·중국동포·조선족은 비슷한 말입니다.

정체성 호칭은 상당히 정치적인 개념입니다. 한국 사회가 그동안 ‘조선족’이라는 말에 다소 부정적 의미를 담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과의 연결고리를 강조하기 위해 동포라는 개념을 더 자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동포라는 개념은 때때로 정반대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동포라는 표현만으로는 재한 중국동포를 의미하는지, 재중 한국동포를 의미하는지 모호해지기 때문이죠. 이미 귀화한 사람들은 ‘내국인’에 해당되기 때문에 동포 개념에 맞지도 않고요.

“조선족이 중국인이지 어떻게 동포냐”라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귀화하지 않은 재한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인 동시에, 동포이기도 합니다. 실제 대림동에 살고 있는 재한 조선족들도 ‘동포’ ‘조선족’ ‘한국계 중국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일부 이주민들은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성을 나쁘게 볼 필요도 없다고도 설명하더군요. 참고로 우리한테 꽤 익숙한 ‘교포’라는 표현은 공식적으로는 ‘동포’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대림동에 불법체류자가 많지 않나?

과거에는 불법체류자가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재외동포 비자를 받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2007년 방문취업제도가 실시되면서 방문취업(H2) 비자를 받는 이들이 늘었고, 불법체류자를 양지로 끌어올릴 길도 열렸습니다. H2 비자를 받은 이들 가운데 한국에서 재외동포(F4) 비자로 전환하는 경우도 늘었고요. 재한 조선족의 경우 다른 외국인에 비해 ‘한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길’이 넓은 편입니다.

지난해 10월14일 송기헌 의원실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8월 기준 중국 국적자의 불법체류 비율은 6.7%에 불과했습니다. 타이·카자흐스탄·몽골 국적에 비해 월등히 낮은 수치였습니다. 대림동 이주민 커뮤니티의 구성원 다수가 중국 국적을 지녔다는 점을 감안하면, 동네를 오가는 이들 가운데 불법체류자의 비중은 낮다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불법체류 신분으로 이 동네에 머물기에는, 월세도 비싸고요.



중국인 상점에 가면 한국 사람은 쫓겨난다던데?
대림동 PC방에서 한국인이 쫓겨났다는 기사도 났는데?

이 지역 상점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어를 잘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꽈배기 하나를 사기 위해 보디랭귀지를 동원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상점도 물건 사겠다는 손님을 쫓아내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다만 편의시설 사정은 조금 달랐습니다. 가령 PC방은 중국에서 널리 쓰이는 ‘PC방 관리 프로그램’이 깔려 있습니다. 한국 PC방에 넥슨, 피망 같은 퍼블리셔의 게임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이 깔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한 PC방 매니저는 “설치된 프로그램 자체가 중국 서버만 접속이 가능하도록 세팅되어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모든 사업장이 그런 건 아닙니다.



대림동에 가보면 쓰레기, 담배꽁초로 난리도 아니라던데…

쓰레기와 흡연 문제는 대림동의 오랜 숙제가 맞습니다. 대림동에서 의외로 많이 볼 수 있는 게 바로 CCTV와 전봇대 앞에 놓아둔 테이블입니다. 테이블은 전봇대 옆에 쓰레기를 슬쩍 두고 가는 사람을 막기 위해 설치됐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그나마 나아졌다”라고 말하는 주민이 많습니다. 오래 거주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한국식 분리배출에 많이 익숙해졌다는 겁니다.

담배꽁초 투기나 흡연 문제에도 일부 문화적 차이가 있습니다. 저도 대림동 고시원에서 지내며 가장 힘들었던 문제가 실내에 찌든 담배 냄새였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사람이 몰리는 호프집·당구장·PC방 역시 한국 법에 따라 대부분 실내 흡연을 금지하고 있지만, 일부 2·3층 영업장에서는 늦은 시각이면 실내 흡연을 방치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상인이 오히려 대림동에서 쫓겨나는 것 아닌가?

대림동에서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전까지 대림동은 동네 사람을 상대하는 상점이 많았습니다. 2010년대 들어 외부에서 방문하는 유동인구가 늘어나면서 많은 상점이 중국인을 위한 편의시설로 바뀌었습니다. 일부 상가는 중국어만 가능한 직원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업종에 따라 여전히 내국인이 장사를 이어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주된 원인은 상가 임대료 상승입니다. 마진이 크게 남지 않는 유통업은 동네에서 상대적으로 빠른 시간에 도태됩니다. 최근에는 중국 식자재나 물품을 파는 유통업이 임대료 상승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동네 대형마트에서도 기본적인 중국 식자재(중국 무, 모충, 진달래, 초두부, 중국술 등)를 팔기 시작하면서 내국인·외국인 할 것 없이 유통 매장이 위태로워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한국인만 피해를 당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조선족 커뮤니티는 한국 사회 그 자체

중국 지린성 출신인 박우 한성대 교수는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를 10여 년 동안 연구해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그에게 ‘이주민 출신 연구자의 시선으로 관찰한 대림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김동인 기자 astoria@sisain.co.kr 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제594호


박우(37) 한성대 교양교직학부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중국 지린성 룽징(용정) 출신이다. 2005년 한국으로 유학 왔다. 당시 우연한 계기로 서울 가리봉동에서 재한 조선족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자진 출국’ 상담을 돕게 되었다. 그 경험이 박 교수를 재한 조선족 집거지 연구로 이끌었다. 연구 과정에서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의 중심이 가리봉동에서 대림동으로 옮아가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시사IN 신선영
박우 교수(사진)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보인 개발주의 광풍이 재한 조선족 사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고 말한다.

10여 년에 걸친 참여 관찰 연구 끝에 박사 논문 <재한 조선족 집거지 사업가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서울대 사회학과, 2017)를 완성했다. 같은 재한 조선족이더라도 시민권이 부여된 경로·시기·자격이 각각 달랐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이 획득하는 ‘기회 구조’도 달랐다. 이는 곧 재한 조선족 분화로 이어졌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보인 개발주의 광풍이 재한 조선족 사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박 교수는 가리봉동과 대림동 같은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는 그 자체로 한국 사회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1월14일 이주민 출신 연구자로 오랜 기간 지역에 밀착해 있었던 박 교수를 만나 ‘연구자의 시선으로 관찰한 대림동’에 대해 물었다.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를 연구하기 시작한 게 2005년이다. 당시에는 가리봉동이 가장 큰 조선족 커뮤니티였다.


2005~2006년 법무부가 자진출국제도를 시행했다. 2004년 재외동포법을 개정했고, 2007년 방문취업제도 도입 전까지 일종의 준비 기간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집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불법체류 신분이라 밖에서 활보하기 어려웠다. 법적 신분이 안정을 찾으면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고, 상권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대림동 얘기가 나온 것도 이즈음(2006년)부터다. 식당 하는 분들도 가리봉동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대림동 쪽으로 가야 한다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가리봉동은 공단 노동자가 거주하기 위한 공간이지만, 대림동은 집도 넓고 상가도 컸다.

재한 조선족 사이에서 중산층이 출현한 것도 그즈음부터인가?

양꼬치 식당이 등장하기 시작한 게 2005~2006년이다. 처음에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그러다 돈을 모아 가게를 여는 식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결국 지역에서 여러 목소리를 내는 건 사장들이다. 커뮤니티 안에서 이른바 중국동포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 내는 사람 중에 노동자가 없었다. 자영업을 하는 ‘프티부르주아지’가 지역 담론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재한 조선족 사이에서 ‘불평등’ 문제는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나?

재외동포법 개정 이후 방문취업제도가 실시되면서 사람마다 기회 구조가 달라졌다. 국가가 비자 체계를 통해 일종의 ‘위계적 시민권’을 부여했다. 국가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공헌했는지 따져보고 시민권을 준 셈이다. 일종의 ‘공헌적 권리’다.

각 이주민의 공헌도를 판단하는 건 결국 국가라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그런데 공헌도를 판단하는 근거가 굉장히 개발주의적이다. 학력이 높거나 자본이 많으면 대한민국 국민에 가까운 권리를 주고, 그것도 안 된다면 신체라도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 산업노동력으로서 권한을 주는 거다.

그렇게 얻은 ‘기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나?

예를 들어 재외동포(F4) 비자는 국민에 준하는 권리를 갖는다. 선거권·피선거권을 빼면 경제적 권리는 누릴 수 있다. 반면 방문취업(H2) 비자는 일종의 ‘동포 노동자’ 권리다. 비자가 끝나면 다시 나갔다가 들어와야 한다. F4는 전문직도 할 수 있고, 자본 소유도 가능하니까 여기서 쭉 살 수 있다. H2나 단기체류(C3) 비자는 동산 소유가 안 된다. 이 차이로 인해 F4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자본가가 출현했다. 안 그래도 인적자본과 사회자본이 다 다른데, 국가가 추가로 자격을 매겨준다. 여기서 분화가 촉발됐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 메커니즘과 닮았다.

중산층만 되어도 다들 자신의 성공에 자부심을 가지더라.

개발주의적인 사고가 잘 드러나는 모습이다. 연구를 위해 인터뷰하다 보면 다 본인이 힘들었던 얘기를 한다. 1960~1970년대 한국인이 고도성장 과정에서 분투했던 모습이 보인다. (그런 자부심을 갖게 된 것 자체가) 이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성공한 이들이 한국 주류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경쟁하는 모습도 보았다.

메인스트림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여기에서도 개발주의적 마인드가 드러나는 게, 일부 중산층들은 “내가 가방끈이 짧다”라면서 몸을 사린다. 상을 받거나, 공적인 자리에 서야 하면 언어 구사가 서투르니까 선뜻 나서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단체끼리 경쟁하는 경우도 있는데, 오히려 경쟁 때문에 단체들이 건강해지는 면도 있다. ‘우리는 정관이 있다’ ‘회원이 얼마다’ ‘우린 이사회 연다’ ‘우린 감사도 있다’는 식으로, 시스템을 근거로 서로 우위를 점하려 한다.

ⓒ시사IN 김동인
2010년대 들어 다양한 조선족 단체가 설립되었다.
위는 재한 조선족 사회의 큰 단체 중 하나인 CK여성위원회의 2018년 송년회 모습.

그런 민주주의 시스템을 이들은 중국에서 배워본 적이 없잖나.

10년 넘게 대림동에서 지내며 그런 민주적인 가치를 뒤늦게 체득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체득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살아온 체제와 문화가 달라서 충돌하는 문제도 있을 것 같다.

쓰레기 분리수거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국가가 모든 영역에 개입해서 관리했다. 처음 한국에 온 사람들은 애초에 분리수거라는 걸 몰랐다. 중국에서는 쓰레기를 버릴 때 ‘위생비’를 납부하면 관리자(국가)가 알아서 한다. ‘거버넌스’도 한국에서는 ‘협치’로 번역하지만 중국에서는 ‘치리(治理)’라고 부른다. 위에서 아래로 지시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지나가면 차가 양보를 하잖나. 이걸 최근 중국에서는 CCTV로 찍어서 벌금을 때리는 식으로 강제로 질서를 만든다. 치리의 대표적인 사례다.

다른 갈등도 비슷한 맥락인가?


내가 보기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다. ‘개인주의에 대한 상상의 차이’가 있다. 개인주의라는 게 내가 잘되기 위해 너도 잘되어야 한다는 이해와 같다. 중국에서는 개인주의 없이 집단주의 체제에서 살았고, 내가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쓰레기 분리수거 말고도 고성방가 문제라든가, 흡연 문제도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이 정도고 하면 안 되는 행동은 이 정도다’라고 선을 그었을 때 한국인의 기준과 충돌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노동자층에서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제기됐을 것 같은데.

파편적으로는 있지만 집단화되기는 어렵다. 대형 공장을 중심으로 한 동네에 계속 산다면 노동조합이라도 만들겠지만, 이 동네에서는 비정규직으로 계속 옮겨 다녀야 하니까 세력화가 어렵다. 동네에 대해 얘기하고 동네 이미지에 민감한 건 결국 상인들이다. 상인은 지역 주민 아이덴티티가 강하지만, 일용직 노동자에게 대림동은 어차피 떠날 곳이다. 중국으로 간다는 게 아니라, 한국 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일한다는 뜻이다.

대림동에 한족 출신 중국인이 늘고 있다. 언젠가는 대림동이 이들로 대체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쉽지 않다. 한족 출신 중국인은 법적 지위를 획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재한 조선족은 예외적으로 법적 지위를 얻었다. 한국의 ‘동포적 세계화’ 덕분이다. 자본이 해외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 교민과 동포가 미들맨 구실을 했다. 재외동포법도 처음에는 재미교포와 유럽 지역 교민을 위한 것이었다(1999년 제정 당시 중국동포는 해당되지 않음). 그래서 초반에는 중국이나 구소련 동포에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정치 환경이 그랬으니까. 그런 게 풀리면서 중국동포라는 일종의 혈통적·법적 카테고리가 출현한 것이다.

사실 ‘조선족’이라는 경계는 한국에 오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귀화하면 동포라는 흔적도 사라진다. 조선족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사라지는 개념인가?

한국에서는 사라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점진적으로 귀화도 더 확대될 것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이미 그 자체가 일종의 ‘시티즌십’이다. 한국에 80만명이 와 있다고 하지만, 동북 지역에 여전히 80만~90만명, 중국 내 대도시에 10만명 정도 분산되어 유지되지 않을까. 지금 동북3성도 농촌 지역은 다 비었다. 대도시에서 클러스터화된다. 조선족 공동체가 붕괴된다며 우려하는 이들도 있는데, 오히려 도시에 모여 살면서 교육 기회가 늘었다는 장점도 있다. 이런 도시 집중 현상은 중국동포뿐 아니라 중국 전역이 겪는 문제다.

일각에서는 아예 대림동을 차이나타운으로 관광 상품화하자는 의견도 있다.

상권에 영향을 받는 사람과 실제로 거주하며 사는 사람들 사이에 이해가 충돌한다. 대림동에는 이미 한국화된 중국동포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중국동포타운’ 같은 걸 조성하려는 움직임을 싫어한다. ‘차이나타운으로 개발하고 정비하자’는 것도 너무나 한국적인, 개발주의적 마인드다. 1990년대 한국식 지역 개발과 닮았다. 대림동에는 한국화를 넘어서 서울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많다. 아이들한테 중국 지역 사투리 대신 표준말을 쓰게 하려고 노력한다. 흔히 ‘초국적 이주’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대림동 이주는) ‘초국적 상경’이라고 볼 수 있다.



새벽 4, 남구로역에 중국어가 울려 퍼진다

대림동의 하루는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움직이면서 시작한다. 직업소개소에선 모텔, 사우나 등 숙식 제공 일자리를 연결해준다. 일자리를 찾는 이들 중엔 단기 체류 중인 한족도 많다.

김동인 기자 astoria@sisain.co.kr 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제594호


연단에 선 강사가 수강생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여기서 한국어 읽을 줄 아는 분 손 들어보세요.” 6명 가운데 손을 든 사람은 기자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그럼 한국어 알아듣는 건 괜찮으신가요?” 세 사람이 추가로 손을 들었다. 나머지 한 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여기 한국분이 한 명 계시니까, 이분이 동의하시면 중국어 자막 수업 영상으로 진행하도록 하죠.”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기자를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이자 강사가 교육 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난해 12월19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위치한 한 건설 안전교육 학원. 건설 현장 잡부 일을 하려면 이곳에서 4시간짜리 안전교육을 반드시 수강해야 한다. 수업을 듣는 이들 대부분은 재한 조선족이었다. 함께 교육을 받게 된 한 50대 남성은 지방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다 일감이 떨어져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수업은 50분씩 총 네 차례 이어졌다. 1교시는 산업안전보건법에 관한 영상을 시청했다. 2교시부터는 건설회사에서 오래 일한 강사가 각종 현장 안전수칙(비계 작업, 용접, 리프트 작업 등)을 말로 설명했다.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다던 40대 남성도 졸음을 쫓으며 강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중국어 자료는 1교시 수업에만 사용했을 뿐 나머지 시간은 한국어 자료로 수업을 진행했다. “이런 걸 조심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라는 내용의 강의를 모두가 이해했는지 알 수 없었다.

ⓒ시사IN 신선영
1월18일 새벽 남구로역 교차로에서 조선족 노동자들이 일감을 기다리며 서 있다.

안전교육을 받은 직후 작업복 매장에 들렀다. 가격별로 걸려 있는 작업복 매대에서 한국GM과 팔도식품 마크가 박힌 작업복을 발견했다. 도매상에서 덤핑으로 떼 온 제품이었다. 가격은 1만5000~3만원 정도. 디자인과 상관없이 무조건 따뜻해 보이는 옷을 집어 들었다. 대기업 협력업체 작업복이 대림동을 거쳐 각 지역 공사장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건설업은 대림동을 처음 찾은 이들이 가장 먼저 택하는 업종 중 하나다. 현재 다른 일을 하더라도 정착 초기에 ‘노가다(막일) 경력’이 없는 남성은 찾기 어렵다. 대림동은 이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저렴한 월세방, 기본적으로 필요한 장비를 파는 매장, 각종 직업소개소가 골목 곳곳에 포진해 있다.

건설 인력시장의 영향은 대림동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슈퍼마켓이나 철물점, 열쇠 가게뿐 아니라 동네 세탁소 앞에서도 붉은색 반코팅 장갑을 묶음으로 팔고 있었다. 대림역 8번 출구에서 대림역 9번 출구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각종 안전화 매장이 늘어서 있다. 280㎜ 사이즈의 안전화를 구하기 위해 인근 매장 다섯 군데를 넘게 돌았다. 근처 생활용품 매장에서는 현장에 나가는 사람들이 구입하는 대형 백팩을 팔고 있었다. 현장 노동자 대부분은 이 백팩에 작업복과 안전화 따위를 담았다.

대림동의 하루는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움직이면서 시작된다. 새벽 4시30분이면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서성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재한 조선족 건설 노동자들이 팀 단위로 움직였다.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재한 조선족 가운데 일부는 ‘팀장(오야지)’이 되어 다른 재한 조선족 인력을 이끈다.

팀에 속하지 않고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을 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대림역 8번 출구 인근 직업소개소를 돌아보았다. 직업소개소 대부분은 재한 조선족 출신 직업소개사가 일자리를 소개하고 있었다. “처음이신가 보구나. 30대 남성이 할 만한 일이 있긴 한데…. 일단 소개비 12만원을 선납해야 해요.” 그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환풍구 설치 업체를 안내했다. 하루 일당은 10만원, 특근까지 하면 5만원이 추가되는 일자리였다. 소개받는 사람이 하루를 일하든, 1년을 일하든 소개비는 건당 12만원이었다. 당일치기로 일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남구로역 용역회사로 가야지. 대림동에서는 주로 지방에서 숙식하는 업종을 취급한다.”

“우리도 동남아 출신이나 한족한테 밀린다”


대림동 직업소개소가 취급하는 업종은 다양하다. 건설 현장 외에도 시설 정비, 모텔, 사우나, 요양원, 제조업 공장 등 주로 숙식을 제공하는 지방 일자리를 연결해준다. 각 소개소 입구에는 ‘오늘의 일자리’를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지역, 임금, 그리고 일이 가능한 비자 종류를 설명한다. 대림동 직업소개소 일대에는 재한 조선족뿐 아니라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출신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1월18일 새벽 4시, 대림역 8번 출구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도림천을 건넜다. 도림로를 따라 15분 정도 걷다 보면 남구로역 교차로에 도착한다. 넥워머를 걸치고, 커다란 백팩을 멘 남성들이 줄지어 남구로역 인력시장으로 향했다. 하나은행 구로동지점 앞으로 가니 일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대부분 중국 출신이었다. 남구로역 교차로를 사이에 두고 남구로역 2번과 5번 출구 앞에는 한국인이, 하나은행 코너에는 중국인이 늘어서 있었다.

중국인 구역에서 일을 구하려 서성였다. 새벽 5시, 묘하게 긴장감이 흘렀다. 이곳에 모여든 수백명 인파 대부분은 중국어를 사용했다. 재한 조선족 외에 단기 체류 중이거나 불법체류 중인 한족까지 모여 있었다. 한 재한 조선족은 “이쪽에서는 중국어가 가능한 재한 조선족 팀장이 주로 인력을 데려간다”라고 설명했다. 사람을 구하는 팀장들은 조용히 다가와 중국어로 가격을 협상하고 인력을 데려갔다. 누가 일감을 제안하는 사람(팀장)이고, 누가 일감을 찾는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중국어를 못하는 상태에서 일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길 건너 한국인들은 중국 국적 노동자에 대해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한족 출신 중국인 인력이 많아지면서, 임금 협상력이 갈수록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일부 팀장들이 불법체류 인력을 중개하면서 단가를 낮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합법적인 절차로 일을 구하는 재한 조선족 노동자도 고충을 털어놓았다. “우리도 동남아 국가 출신이나 한족한테 밀린다.”

새벽 5시58분이 되자 주변 지역을 청소하던 환경미화원 4명이 일제히 하나은행 앞에 모여 바닥에 버린 종이컵과 담배꽁초를 쓸기 시작했다. 사실상 파장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을 구하지 못한 채 다시 돌아온 대림역 12번 출구에는 하루를 공친 건설 노동자들이 하나둘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양꼬치 성지엔 프랜차이즈가 없다

음식점 데이터로 들여다본 대림동은 더욱 흥미롭다. 서울 다른 지역과 달리 대림역 주변에는 프랜차이즈 밀집지가 보이지 않는다. 외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 수도 압도적으로 많다.

신수현 (도시데이터 분석가)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제594호


‘대림동’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어떤 게 떠오르는가? 꽤 많은 이들은 조선족 혹은 중국 사람이 생각날 것 같다. 또 누군가는 지하철 7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긴 에스컬레이터를, 그 길을 올라갈 때 바깥으로 얼핏 보이는 원색의 직업소개소 간판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런데 대림동을 음식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양꼬치와 칭다오(맥주)에서 마라탕이나 훠궈까지. 그래서 음식점 관련 데이터로 대림동을 들여다보았다.

서울에서 운영 중인 음식점은 15만 개를 약간 넘는다(2019년 1월 기준). 이 중 프랜차이즈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공정거래위원회 가맹사업시스템에 등록된 영업표지(브랜드)가 상호에 포함된 음식점’ 개수는 1만 개 정도로, 전체의 6%를 약간 넘는 수준이다. 음식점 15개 중 1개가 프랜차이즈 음식점인 셈이다.

프랜차이즈는 브랜드 규모나 정체성에 따라 나름의 출점 전략을 가지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프랜차이즈는 일반적으로 유동인구와 주변 사업체, 거주 인구 규모를 따진다. 대림역 주변 사업체 분포와 스타벅스 입지를 한번 살펴보자(아래 <그림 1> 참조). 대개 진한 색으로 표시된 사업체 밀집지역에는 스타벅스가 촘촘히 들어서 있고, 거주지 인근에도 드물지 않게 들어가 있다. 대림역 주변의 다른 지하철역 주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림역 주변에는? 없다.

서울에 존재하는 프랜차이즈 음식점 지도를 그려보면, 자연스럽게 유동인구가 집중된 주요 지하철역 주변에 프랜차이즈 밀집지가 나타난다(아래 <그림 2> 참조). 대림역 주변에는 밀집지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 서남부를 거점으로 출퇴근하는 사람에게 “대림역에 사람이 없느냐”라고 묻는다면 코웃음을 칠 게 뻔할 정도로 꽤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지역이다. 그런데도 프랜차이즈 밀집지가 형성되지 않았다. 기존 음식점 밀도지도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뚜렷하다. 음식점 밀집지는 존재한다. 상권의 크기만으로 따지면 홍대 앞이나 종로, 강남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사당이나 수유, 불광 정도는 된다. 음식점은 있는데 프랜차이즈가 보이질 않는다. 

신규로 프랜차이즈를 내려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 모르는 동네에 가게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음식점의 경우 더 그렇다. 대림동을 이미 일반적이지 않은 곳, 낯선 곳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대림동은 프랜차이즈가 쉽게 들어오지 않는, 혹은 들어오지 못하는 동네가 되었다.

대림동은 서울의 다양성에 기여

서울시 열린데이터광장에 공개된 음식점 데이터에는 업장 대표의 내·외국인 여부와 국적이 등록되어 있다. 15만 개에 이르는 음식점 중 외국 국적 거주민이 대표로 등록된 업체 수는 약 1800개로 전체의 1%를 조금 넘는다. 이를 국적별로 다시 나눠보면 중국이 68%로 가장 높고, 미국·캐나다가 13%, 타이완·일본이 각 4% 정도를 차지한다. 그 1%의 음식점들은 어디에 몰려 있을까? 지도를 통해 밀집도를 살펴보면, 한눈에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아래 <그림 3>에서 왼쪽은 서울 전체 음식점 밀집지역이다. 진하게 표시된 밀집지역은 종로-명동, 합정-홍대-신촌, 강남대로-테헤란로 등 대표적인 번화가(<그림 1> 왼쪽과는 또 다르다)와 각 지역의 중심지를 포괄한다. <그림 3>에서 오른쪽 지도는, 그중 외국인이 대표자인 음식점들만을 골라 밀집한 지역을 표시했다. 건대입구역 부근에 약간의 밀집지역이 보이지만, 압도적으로 밀집을 보이는 지역은 대림역 일대, 딱 한 곳이다.

도시정책에서 ‘다양성’ 이라는 가치가 등장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그 다양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확보하고 이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도시 전체의 스케일로 보면 대림동은 이미 서울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공간이다. 외국인(중국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클러스터가 서울의 반경 안에, 그것도 수도권 전철역 중 상위 10% 수준의 승하차 인구를 가진 지역에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공간은 충분히 잠재성이 있다.



왜 대림동으로 옮겼을까

글 김동인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astoria@sisain.co.kr 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제594호


ⓒ시사IN 신선영
중국인들이 많이 사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벌집’ 주택.

1978년부터 시작된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은 상하이·칭다오 등 연해 지역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전통적 중공업 지역이던 동북3성(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은 오히려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지역에 모여 살던 중국 조선족은 1990년대 중국 내 연해 지역이나 대도시 외에도 한국·일본·미국·영국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1990년대에는 이들이 한국에 장기 체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제한적이었다. 체류 기한을 넘긴 채 한국에 불법체류자로 남는 이들이 늘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1970~1980년대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살던 ‘가리봉동 벌집’(1인용 방이 벌집처럼 배치되어 있고 공용화장실을 이용하는 구조)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한국 저임금 노동자의 열악한 주거 환경은 그대로 중국 저임금 노동자의 초기 정착 터전이 되었다. 마침 가리봉동은 남구로역 근처의 인력시장과 가까웠고 영세 소기업과 각종 인력사무소가 모여 있었다.

음지에 있던 조선족 이주민들은 2004년 재외동포법 개정, 2007년 방문취업제도 시행을 통해 양지로 나올 수 있었다.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거주가 가능하게 되면서 좀 더 나은 주거 환경에 대한 요구가 뒤따랐다. 마침 2003년 가리봉동 일대가 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되면서 세입자였던 이주민들이 주거 안정을 위협받기 시작했다. 방문취업제도 시행 이후 한국을 찾는 조선족 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신분 보장, 인구 증가, 상권 확대, 재개발 이슈가 결합하면서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는 인근 대림동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F4비자를 따기 위해서라면

글 김동인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제594호


2019년 현재 재한 조선족(한국계 중국인)은 몇 단계를 거쳐 가장 안정적인 ‘귀화’로 접어든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C38(단기 체류)이다. 3년에 한 번씩 방문해 90일 동안 머물 수 있는 방문 비자(90일 복수 비자)다. 3개월간 머물며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친인척이 한국에 있어서 곧바로 재외동포(F4)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방문취업(H2) 비자를 선택한다.

2007년에 제정된 방문취업제도는 중국 및 구소련 지역 동포를 위해 도입했다. 이 제도를 통해 H2 비자를 받으면 최대 3년간 체류할 수 있다. 무연고 한국계 중국인, 즉 친족이 한국에 없는 경우에도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체류가 가능해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방문취업제도 도입 이후 중국 내 조선족 사회에서 한국행이 가속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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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신분을 확보하고 싶은 조선족들은 갱신만 하면 되는 F4 비자를 따기 위해 노력한다.

H2 비자를 얻더라도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리기는 어렵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중국에 돌아가서 재입국해야 한다. 좀 더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신분을 확보하고 싶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F4 비자에 눈을 돌린다. F4 비자는 중국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갱신만 하면 된다. 단순노무 업종을 제외하면 직업 선택의 자유도 H2 비자에 비해 폭넓게 보장된다. 60세 이상 재외동포는 F4 비자를 획득할 자격이 있는데, 60세 미만 재외동포는 국가 기술자격인 ‘기능사’ 자격증을 따야 F4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대림동에 거대한 학원시장이 등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2010년대 들어 F4 비자를 얻는 이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22~23쪽 인포그래픽 참조). 2016년에는 처음으로 재외동포 비자를 얻은 이들이 방문취업 비자로 체류하는 이들을 추월하기도 했다. 영주권(F5)을 얻거나 귀화를 신청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재한 조선족의 안정적인 체류가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의 타자그들이 사는 세상

서울 대림동에서 생을 일구는 다섯 사람의 일상을 쫓아가 보았다. 이주 경험이 있다는 것 외에는 나이·성별·하는 일, 대림동이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까지 서로 다르다. 그 당연한 ‘차이’마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글 김동인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제594호



샤오룽바오에 담긴 중산층의 꿈

홍세화(36·린궁즈멘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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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7일 아침 홍세화씨가 둘째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있다.

대림동에 사는 내국인 주민들이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식당이 있다. 얼마 전 유명 맛집 소개 프로그램 제작진이 벌써 이곳을 촬영해 갔을 정도다. 중국식 칼국수와 샤오룽바오(小籠包)를 취급하는 ‘린궁즈멘관(임공자면관)’이다. 가게 주인 홍세화 사장은 ‘대장부’다. 호탕하고 유쾌하다. 지린시에서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 식당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신길동 신풍시장에 조그맣게 좌판을 열어 장사를 시작한 것이 점점 규모가 커졌다.

“딴 건 몰라도 내가 손맛 하나는 진짜 자신 있거든요.” 지금은 대림중앙시장에만 가게를 세 개나 가진 ‘3세대 중산층’이다. 홍씨에게 대림동은 베이스캠프다. 이제는 대림동에 안착했으니, 다음 목표를 세우고 있다. 최근 서울 신정동의 식당 자리를 인수했다. 중국 출신이 없는 동네에서 진짜 토종 한국인의 입맛을 공략해보고 싶어서다. “일종의 도전이죠. 조금이라도 젊을 때 해봐야지 언제 해보겠어요.”

그는 한국에 뿌리를 내리려면 한국인과 부딪치고 섞이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믿는다. 홍씨의 자녀도 신길동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중국 출신이 한 반에 많아야 3~4명이다. 대림2동으로 집을 옮겨 중국 출신 학생이 많은 대동초등학교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굳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이가 크면서 같이 살아야 하는 이들도 한국 사람이잖아요. 자기가 자라면서 돌파해야지.” 홍씨가 신정동 사람들의 입맛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가게 이름은 일찌감치 ‘린궁즈’로 정했다. 작은 가게를 의미하는 ‘면관’이라는 단어를 뺐다. 좀 더 크고 번듯한 가게를 일궈보겠다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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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피(凉皮:중국식 비빔면 요리) 좌판에서 시작한 홍씨의 사업은 대림동 식당 세 곳으로 확대됐다.






바른생활 사내 혹은 국경 없는 사내

이현(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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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30일 연말휴가를 얻어 서울살이 8개월 만에 처음으로 서울 구경에 나선 이현씨가 대림역 8번 출구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중국동포지원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는 이현씨는 ‘바른생활 사나이’다. 정해진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씨는 충남 아산에 위치한 회사에서 일한다. 회사 인근 기숙사에 거주하지만 주말이면 가족과 친척을 만나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해 상경한다. 아산 외곽 지역에 있는 회사에서 버스를 타고 1호선 온양온천역으로, 이곳에서 다시 신도림을 거쳐 대림동까지. 버스를 기다리고 환승하는 데에만 편도로 총 4시간이 걸리는 여정이다.

이씨의 고향은 중국 상하이다. 부모는 한국인이 상하이에 세운 회사에서 일했다. 이씨가 20대가 되면서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부모는 한국인 사업가를 따라 미얀마로, 친척들은 서울 대림동과 대구에 터전을 잡고 함께 살았다. 그는 중국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 새로운 일과 언어를 배우려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나마 나머지 가족인 누나, 조카와 친척들이 모두 한국에 있으니까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어디에서 살 것인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뿌리를 내릴지 정하지 않았다. 다만 국경이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살고 싶다. 한국어도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직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지만 조금 더디더라도 진득이 공부하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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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8일 이씨가 대림동 친척 집에서 미얀마에 있는 어머니와 영상 통화를 하는 모습.





“애국가 4절을 자꾸 까먹는 거라”

김광용(43, 애민·루이국수 사장)



ⓒ시사IN 신선영
귀화한 김광용씨 가족은 대림동에 3대가 모여 살고 있다.
대동초등학교를 다니며 태권도를 배우는 아들은 김씨의 자랑거리다.

대림중앙시장에서 식당 ‘애민’과 ‘루이국수’를 운영하는 김광용 사장은 묘한 억양을 구사한다. 부산에서 오래 생활한 까닭에 부산 방언과 경북 방언, 중국 동북지역 방언이 뒤섞였다. “첨 왔을 때 암꾸도 없으니께네 한국인 형님이랑 계속 노가다를 뛰었거든. 내 감천항 방파제를 지었는데 얼마 전에 태풍 땜에 쓸려붓더라고. 하, 마음이 참 그렇데.”

경북 포항에 살던 김씨 외가는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넘어갔다. 김씨의 외삼촌은 ‘많이 배운’ 엘리트였지만,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지역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밥상머리에서 외삼촌은 김씨 형제에게 한국 역사와 사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느이 박정희를 아나? 박정희가 원래 만주에서 군관학교 졸업한 거는? 그이 한국에서 대통령이었는데….”

한국에 오기 전 그는 랴오닝성 다롄시에 공장을 세운 한국 신발회사에서 근무했다. 한국 조직 문화라면 이미 익숙했다. 김씨는 2007년 태어난 지 100일 된 아이와 아내를 두고 먼저 한국에 건너왔다. 경남 지역의 각종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2013년 대림동에 자리를 잡았다. 6년간 떨어져 지낸 아이에 대한 감정은 애틋했다. 지금 대동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어느새 중국어보다 한국어를 편하게 쓴다.

그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 귀화를 선택했다. 아직도 귀화 시험 보던 날 떨렸던 마음을 잊지 못한다. “애국가를 4절까지 외워야 하는데 4절에서 자꾸 가사를 까먹는 거라. 어휴, 귀화 시험 진짜 어려운 거예요.” 현재 대림2동 월세방에 살고 있는 김씨의 꿈은 더 넓고 쾌적한 집에서, 아이가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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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빵은 김씨 가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다.




“난 대림동보다홍대 앞이 좋아요”

류향이(24)



ⓒ시사IN 신선영
한국식 메이크업을 하고 롱패딩 점퍼를 입은 류향이씨는
한국의 여느 20대와 다를 바 없다.
지난해 12월30일 류씨가 서울 경복궁 일대를 찾았다.

류향이씨의 스마트폰에는 유독 가수 현아 사진이 많다. 당당하고 예뻐서 좋아한단다. 그는 한국에 온 지 채 1년이 안 되었다. 중국에서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대학 졸업 후 한국행을 택했다. 어머니는 이미 류씨가 어렸을 적 먼저 한국에 왔다. 그에게 대림동은 어쩔 수 없이 들르는 동네다. 한국어를 배우고, 미용 관련 자격증을 따는 게 일차 목표다. 그러려면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한 학원이 몰려 있는 대림동을 들러야 한다.

하지만 류씨에게 대림동은 오래 머물고 싶은 동네는 아니다. 류씨 또래보다는 부모 세대가 좋아할 법한 상점과 시설이 몰려 있다. 대림동에서는 어른들을 위한 ‘옌볜 가요 노래방’이 많지만, 정작 그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케이팝 팬이었다. 또래 친구들과는 주로 홍대 앞에서 만난다. ‘코노(동전 노래방)’를 찾거나 친구와 거리를 돌아다닌다. 친한 친구는 류씨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지금은 유통업계에서 일한다.

언어에 재능이 있어서 한국어를 빨리 배우는 편이다. “일단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도록 공부한 다음에, 일본어나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요. 이제까지 살아본 적 없는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기도 해요.” ‘전 세계 어디서든 살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를 가진 새로운 세대. 류씨는 이제껏 대림동이 품어온 이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이주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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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씨가 중국동포지원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언젠가 우리 사연이드라마에 나오길”

윤금애(45·스마트폰 매장 운영)



ⓒ시사IN 신선영
1월3일 대림역 인근 스마트폰 매장에서 윤금애씨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철모르던 시절, 한국에 가기만 하면 돈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질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처음 한국에 올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윤금애씨 조부모는 경북 상주에서, 외조부모는 경북 고령에서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넘어왔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인근 상즈(상지)시. 부모는 이곳 조선인 마을에서 태어나고 결혼해 하얼빈에서 터전을 일궜다. 군인 출신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성공하고 싶었지만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유리천장에 부딪혔다.

유년 시절은 상대적으로 유복했지만, 중학생 때 아버지가 임종하며 집안이 기울었다. 윤씨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1994년 한국으로 떠났고, 윤씨도 스물여섯이던 2000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2001년에서 2004년까지 대림2동에 있는 친구의 반지하 방에 얹혀살면서 강남 신사동에 있는 식당으로 매일 출퇴근했다. “처음에는 무조건 돈 모아서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어요. 옷도 한 벌 가지고 계속 돌려 입고.” 인생에서 가장 숨 가쁘고 치열하게 살던 때, 힘이 되어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그는 남편이 살던 안양에서 핸드폰 매장 일을 배웠고, 지금은 대림역 4번 출구 주변에서 스마트폰 매장을 운영한다.

“언젠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에 우리 이야기가 소재로 등장했으면 좋겠어요. 각자가 가진 사연과 역사가 많거든요.” 주말 밤 가게 문을 닫고 ‘자율방범대’ 옷을 챙겨 입던 윤씨가 이렇게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그는 “중국동포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으면…” 하는 생각으로 대림역 인근 자율방범대 활동을 이어나갔다. 20대는 너무 빨리, 힘들게 지나갔지만 그는 이제 정착민으로 한국에 뿌리를 내렸다.

ⓒ시사IN 신선영
윤씨는 주말 저녁마다 구로4동 자율방범대에서 활동한다.
재한 조선족 사회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길 바라며 시작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