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마음의 스승' 신영복을 만나다
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시작합니다. 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은 정치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점에서,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고 봅니다.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노회찬재단과 함께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마음으로부터 모시는 스승입니다. 저에겐 아직 스승을 평가할 자격과 능력이 모자랍니다. 신 선생님의 말과 글, 활동에서 저는 한 시대를 고뇌하는 실천가의 진수를 보아왔습니다. 선생의 사상과 철학은 금방 적장의 목을 벨 듯한 단호함과 엄중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체온을 따뜻하게 담고 있습니다. 이론과 사상이 이처럼 자신의 삶과 실천에 잘 녹아 있는 경우를 저는 일찍이 보지 못했습니다."
- <노회찬-정운영이 만난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랜덤하우스중앙, 2004, 124쪽)에서 노회찬이 신영복 선생에 대해 한 말.
3년 전인 2016년 1월 15일 오늘은 노회찬이 '마음의 스승'으로 존경한 신영복(申榮福) 선생님이 75세의 나이로 먼 길을 떠난 날이다.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고 1988년 8월 14일 특별가석방된 신영복은, 출소 10년 후인 1998년 3월 13일에 사면 복권으로 공민권을 회복, 18년 가까이 자유인으로 산 뒤 세상을 떠났다.
2016년 1월 7일 노회찬은 후원회장인 조국 교수와 점심을 같이 한다. 헤어진 뒤 얼마 있다가 그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신영복 선생님이 위중하신 것 같다는 거였다. 노회찬은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 목동 자택으로 방문, 이생에서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을 한다. 며칠 뒤 노회찬은 그날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며칠 남지 않았다는 전갈을 받고 황급히 댁으로 찾아뵌 것이 열흘 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연명치료를 받지 않는 환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특유의 평온하고 온화한 표정에 간간이 미소를 머금으며 오히려 저를 격려하셨지요. 이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의 만남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서도 선생님은 걱정 말라고 더 건강해지겠노라고 약속하셨고, 저도 다시 뵙겠다며 평소처럼 헤어졌습니다. 그 후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만, 막상 비보를 접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가는 길이라지만 선생님! 어찌 그리 바삐 가시려 합니까? 선생님께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큰 스승이셨습니다(경향신문, 2018.1.18.).
다가오는 헤어짐의 시간,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트위터에
헤어짐의 시간이 점점 더 다가오고 있는 것을 직감했는지, 사흘 뒤인 1월 10일 밤 노회찬은 트위터에 신영복의 시화 여덟 작품을 잇따라 올리는 것으로 "마음의 스승"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표한다.
<2016년 1월 10일 오후 10시 3분 트위터>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은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위로입니다.
몸이 차가울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길이 험할수록 함께 걸어갈 길벗을 더욱 그리워합니다.

<오후 10시 9분 트위터>
참된 자유(自由)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갖는 것입니다. -신영복

<오후 10시 12분 트위터>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영복

<오후 10시 26분 트위터>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 합니다.
사상(cool head)이 애정(warm heart)으로 성숙하기까지의 여정입니다. -신영복

<오후 10시 31분 트위터>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밝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신영복

<오후 10시 40분 트위터>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자 어느 깨어있던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오후 10시 56분 트위터>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신영복

<오후 11시 16분 트위터>
머리좋은 것이 마음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좋은 것이 손좋은 것만 못하고 손좋은 것이 발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신영복

1월 16일 밤 노회찬은 두어 시간 전 영면에 든 신영복을 생각하며 트위터에 글을 쓴다. "신영복 선생님!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8일 전 하직인사 드리러 갔을 때 제게 말씀하셨죠. '걱정마세요. 더 건강해질게요.' 그날 이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비보를 접하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선생님!" 그리고는 밤 12시경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궁극에 처하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열립니다. 열려 있으면 오래 갑니다. 변화와 소통이 생명입니다." 등 두 개의 시화를 트위터에 올린다.
<1월 16일 새벽 12시 2분 트위터>

<1월 16일 새벽 12시 6분 트위터>

"선생님의 뜻과 얼은 늘 저희와 함께 할 것입니다." 1월 16일 오후 2시경 노회찬은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대학성당에 차려진 빈소에 조문한 뒤 '청년 신영복'을 만나게 되고 사진과 함께 트위터에 글을 올린다.
성공회대학교에 마련된 신영복 선생님 빈소에 조문하고 나오는 길에 만난 청년 신영복입니다. 선생님의 뜻과 정신은 낡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진보의 미래입니다.

1월 17일 오후 3시와 1월 18일 오전 9시 40분에도 노회찬은 트위터에 신영복의 시화를 올린다. 고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지 않았을까 싶다.
(1월 17일 오후 3시)

세상에다 자신을 잘 맞추는 이른바 '지혜로운 사람'보다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세상은 조금씩 변화해 왔다. -신영복. (1월 18일 오전 9시 40분)
이 마음과 다짐을 노회찬은 이렇게 적는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더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선생님께서 즐겨 하신 이 말씀은 무엇보다 당신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중요성, 특히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변화와 소통의 중요성도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에다 자신을 잘 맞추는 이른바 '지혜로운 사람'보다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해 왔다는 잊지 못할 지적을 하셨습니다. 특히 물의 철학, 흐를수록 낮은 곳을 향하고 점차 넓어지면서 마침내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물, 바다에 이른다는 말씀으로 이 시대의 참된 진보가 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뜻과 정신은 낡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새 진보의 미래입니다. (경향신문 2016년.1.18.)
1월 18일 오전 11시 노회찬은 성공회대학교 대학성당에서 열린 영결식에 참석한다. 영결식은 고인이 즐겨 부르던 동요인 '시냇물'을 함께 부르며 마무리됐다. 감옥살이를 함께 한 죄수가 만기 출소를 하게 되면 건빵이라도 사서 조촐하게 파티를 하게 되고 건빵 한 봉지씩 나눠받으면 분위기는 훈훈해지고, 감옥살이 20년간 만기 출소하는 사람을 위해 한사코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부른 노래가 동요 '시냇물'이라고 한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신영복은 누구?
한 언론에서 "온몸으로 감당한 시대의 고통을 사색과 진리로 승화시킨 시대의 지성인"(연합뉴스, 2016.1.16.)으로 일컬은 신영복은 동양고전학자이며 사상가이자 빼어난 문필가이며 서화 작가다.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아 엮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1988년 출간된 후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엽서>(1993), <더불어 숲 1, 2>(1998), <나무야 나무야>(1996), <신영복의 엽서>(2003),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2004), <처음처럼>(2007), <청구회추억>(2008),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2015) 등 출간하는 책마다 공감과 감명을 주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기 성찰, 냉철한 사회 현실 분석, 세계인식에 관한 깊은 사색과 폭넓은 사유로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한글 서예로도 그는 일가를 이뤘으며, '신영복체' '쇠귀체' '어깨동무체' '연대체'로 명명된 그의 글씨체는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고 있다. '한 폭의 글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 '획의 성패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는 것'. 서체의 특징에 대해 그가 한 말이다.
신영복은 1941년 8월 23일(음력 7월 1일)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었다. 일제 말기의 암울한 시절, 그가 가진 희망은 일본 총독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조선이 독립되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면 일본을 다스리는 조선인 총독이 된다는 얘기다.
'일본 총독'이 꿈이었던 신영복은 1968년 통일혁명당(약칭 통혁당) 사건으로 2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는 지하당을 조직, 국가 전복을 기도하려다가 적발 검거된 가칭 「통일혁명당 지하간첩단」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1968년 7월 25일 중앙정보부에 체포된 신영복의 이름도 158명 검거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개인별 피의내용은 신영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영복(27.육군중위.서울상대 졸.숙대 강사. 육사 교관) ①66년 2월 김질낙에게 포섭 ②학생청년지도책을 맡고 이종태 노인영 박성준 이수인 이영윤 등을 포섭(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 (경향신문 1968.8.24.)

▲ 동아일보(1968.8.24.)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신영복은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었다. 또 현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그가 북에 갔다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들은 북에 갔다온 날짜를 대라고 구타와 전기고문을 하여 까무러치기도 했다. '무기수 신영복'은 이렇게 탄생했다(한홍구, 「신영복의 일생을 사색한다 - [기고] 한홍구 교수가 돌아본 신영복 선생의 삶」, <프레시안>, 2016.1.16.).
육사교관으로 현역 장교 신분이었던 27세의 청년 신영복은 1심과 2심인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각각 구형과 선고, 그리고 군법회의의 형 확정 절차인 관할관 확인을 거치며 모두 여섯 번이나 자신의 이름에 사형이라는 무거운 꼬리표가 붙는 것을 들어야 했다. 1969년 11월 11일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 환송, 무기징역이 확정된 것은 1970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 왼쪽부터 경향신문 (1969.1.16.), 동아일보 (1969.7.24.), 경향신문 (1969.11.12.).
신영복은 육군교도소를 거쳐 1970년 9월 안양교도소로 이감됐다가 1971년 2월 대전교도소로 이감돼 꼬박 15년을 살다가 출소한다. 1989년 12월 24일 인민노련 사건으로 체포된 노회찬은 서울구치소를 거쳐 1990년 안양교도소로 이감됐다가 늦가을 가랑비가 간간히 내리던 흐린 날 청주교도소로 이감돼 1992년 4월 1일 출소한다. 두 사람은 20년의 시차를 둔 안양교도소의 이른바 '(깜)빵 동문'였던 것이다.
기결된 뒤 수감됐던 안양교도소의 0.7평 감방은 신문지 넉장반의 크기. 키가 175이상 되면 대각선으로 자야 하고, 일어서도 천정에 머리가 닿는다. 국회 법사위원이 된 노회찬은 2004년에 국정 감사 할 때 다시 그 곳을 찾았다. "그 작은 방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끔찍해요. 아직도 그 방이 그대로 있어요"라며 그는 입술을 혀로 축인다(<민중의소리>, 2007.7.20.).
노회찬-신영복의 첫 만남: 「통혁당사건 무기수 신영복씨 옥중편지」
신영복은 한 인터뷰에서 대학 2학년 때에 있었던 4·19혁명과 다음해 5·16쿠데타가 자신이 사회변혁에 참여하고 결과적으로 감옥에 가게 된 계기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1년 재수 끝에 73년에 경기고에 입학한 노회찬은 의기투합한 같은 반 동료들과 함께 수유리 4·19묘소를 참배한다. 참배는 고교 2, 3학년 때까지 계속됐다. 노회찬은 "당시 4·19묘소 참배는 이후 30년 동안 제 삶의 뿌리가 됐다"며 "이후 자생적 운동권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노회찬과 신영복의 삶의 행로는 시·공간의 차이를 넘어 4·19라는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노회찬은 '마음의 스승' 신영복을 어떻게 만났을까? 첫 만남은 평화신문에 4회 연재된 무기수 신영복의 편지글을 통해서였다. 평화신문 원고의 경우 매수로 치면 90매 정도 되는 내용을 신문 한 면 전체에 실어서 보냈기에 당시로서는 상당한 분량이었다고 한다. 7월 10일 '수인(囚人)들은 늘 벽을 만납니다' 글로 시작된 연재는 '감방은 역사의식 일깨우는 교실'(2회)을 거쳐 총 4회가 실린다. 1주일여 뒤인 8월 14일 신영복은 석방된다.

▲왼쪽부터 평화신문 창간호 (1988.5.15.), 한겨레 (1988.7.15.).
"사실 저는 (선생님이) 출소하기 직전에 <평화신문>에 연재된 '통혁당 사건의 무기수 신영복 씨 (옥중) 편지'를 가까운 분이 추천해 주셔서 읽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1987년 제 나이 삼십대 초반이었죠. 결혼하기 직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87년 6월항쟁의 산물로 선생님이 석방되시고 석방될 그 무렵에 연재 글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으로 나왔고요."(이경아, 「스토리펀딩 노회찬의 프러포즈,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 2016.12.26.)
신영복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된 뒤 20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통해 얻은 성찰과 사색의 편린들은 엽서로 정리돼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이 엽서들을 모아서 정리한 책이 바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책을 낸 햇빛출판사는 같은 통혁당 수감자인 오병철의 부인 윤일숙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초판은 애초 출소일에 맞춰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가석방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족의 염려로 9월 5일로 맞춰졌다고 한다.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 알겠지만, 신영복의 편지글에는 읽는 사람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울림이 있다. 글이 굳이 누구를 깨우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조용히 읽은 사람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다. 훗날 한홍구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신영복은 감옥 안에서의 사색과 경험을 어딘가 기록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을 담아 둘 수 있는 그릇으로 한 달에 한 번 보내는 엽서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주제를 하나 잡으면 한 달 내내 감방 안에서 면벽 명상을 통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머릿속에서 교정까지 봐 두었다가, 엽서를 쓰는 날, 완성된 문장형태로 머릿속에 갖고 있던 것을 글씨로 옮겼다고 한다.
노회찬에게 최고의 책을 꼽으라면 그는 주저없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꼽는다. 구속되기 전에 출간되자마자 읽어보고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는 이 책을 감옥에 가서 읽으니 한층 감동적이고 절절하게 와 닿았다고 한다. "나 같은 사람에게 굉장히 필요한, 나 개인만이 아니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해서…. 어디서 묻든 간에 그 책을 최우선으로 꼽죠."(<민중의소리>, 2007.7.20.).

▲ 한겨레 (1988.9.14.)
노회찬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내용 가운데서 이것만은 꽉 잡고 읽으라고 권하고 싶은 글귀로 '상선약수', '하방연대'를 고른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라는 노랫말도 오랜 감옥 생활에서 지친 사람들이 바깥세상을 염원하면서 한 명 출소할 때마다 축가처럼 불러주던 노래였지만 이 가사에는 선생님이 늘 말씀하시는 '상선약수'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방연대'입니다.

노회찬-김지선의 인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나오자마자 저는 이 책의 전도사가 되어서 그때부터 선생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죠. 제가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이죠. 그 과정에서 아내 될 사람에게 편지 한 통과 함께 이 책을 선물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다음해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경아, 「스토리펀딩 노회찬의 프러포즈,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 2016.12.26.)
(※ 참고로 이전까지 노회찬이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었다.)

▲ 노회찬, 김지선 부부 (1994년 1월 1일 새해 첫날, 강원도 동해에서)

▲ <사회평론 길> 1996년 2월호, 149쪽
14년 뒤인 2010년.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10월 18일 북한산 대동문에서는 난데없는 카드섹션이 진행되어 등산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보신당 당원들과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모임 회원들이 참여한 케이블카반대 대책위원회, 가수 이현우의 팬클럽 회원들이 카드섹션의 주인공들이었다. 평소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이현우는 1인시위 뿐만 아니라 카드섹션에 사용될 그림을 직접 그리고 만장을 제작하는 등 북한산 지키기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다(http://www.1ung.net/34). 이날 자리를 함께 한 노회찬은 이런 비유로 인사말을 건넨다. "저는 국립대학보다 국립공원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얼마 전에 출간된 <노회찬의 약속>(레디앙, 2010.5.)에서 노회찬은 '아픈 서울'의 치유를 위해 "한강 살리기, 생명 살리기"를 약속한다.

ⓒ 노회찬재단
아마도 "나는 앞으로 더 이상 북한산을 오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북한산에게 미안하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기대어 쉬려고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염치없기 때문입니다."는 신영복의 심정과 같았을 거라고 본다.
'일하는 사람들의 사상과 실천': 화이부동(和而不同)
노회찬과 신영복, 두 사람의 인연은 인터뷰나 외부 강연을 자제하고 있던 신영복(성공회대 사회교육원 원장)을 강연장으로 나오게 한다. 2002년 1월 17일 오후 연세대 신인문대 대강의실, 500여명의 청중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뤘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위원장이 '노동자 철학'에 대해 신년 강연을 해달라고 끈질기게 부탁해 17일 저녁에 하기로 했어요." 노회찬(민주노동당 부대표 겸 서울시당위원장)의 노력 결과 강연을 수락한 것이다. 강의에 앞서 노회찬은 "많은 독자들이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선생님이 오랫동안 추구하고 있는 세계관과 철학의 승리"라고 말한다.
신영복은 '일하는 사람들의 사상과 실천'이란 주제로 90분 동안 노동자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배와 흡수를 뜻하는 획일성의 동(同)이 아니라 공존과 다양성을 전제로 한 화(和)의 논리로, 운동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행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할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진보 자신이다. 지금 진보정당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진보'다. 부족한 진보를 훈장과 족보로 가릴 수는 없다. 세상을 진보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진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기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기 위해' 만든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노회찬, 작심하고 말하다>(비아북, 2014)의 '머리글: Quo Vadis, 진보?'에서 노회찬이 한 말이다. 이어 '3부 화이부동(和而不同) 부동이화(不同而和)'에서 노회찬은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 "21세기 최대의 히트 상품은 진보정당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끝나지 않은 실험, 거대한 소수전략'에 대해 말한다.
"운동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행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할 것"이라는 신영복의 이야기는 'Quo Vadis, 진보?'의 '진보의 세속화'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의 세속화란 낡은 운동권적 진보에서 벗어나 현실에 밀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정치의 영역을 활용하는 현실주의적 접근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회찬은 그 핵심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기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집약한다. (계속)
노회찬 속의 신영복
노회찬 <난중일기> 속의 신영복, 그리고 글 선물
노회찬의 <난중일기>는 17대 총선 기간 중 2004년 1월 5일부터 3월 31일까지 기록한 일기다. 노회찬은 많은 사람들을 가슴 졸이게 하며 총선 다음 날인 4월 16일 새벽 2시 30분경 299명 가운데 꼴찌로 당선이 확정된다. 17대 국회의원이 된 뒤 노회찬의 2004년 9월과 10월 <난중일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신영복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한 데 대한 글이 두 편 있다. 정말로 많이 아쉬웠나 보다. 찐한 아쉬움이 글에 묻어난다.
2004년 9월 12일(일) 종일 비 내리다
아침부터 마음이 허전하다.
토요일의 여러 일정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강원도 인제 미산리에 있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어제 밤은 그곳에서 신영복 선생님이 교장으로 있는 <더불어 숲> 학교에서 오랜만에 신 선생님이 직접 강의하는 시간이었다.
신 선생님의 말과 글에서 깨우침을 얻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잠시 만나 얘기를 나눈 경우에도 여지없이 그러했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이다.
작년 가을 <더불어 숲>에서 신 선생님의 강의가 있을 때도 수강신청을 하고 회비를 송금했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이라크 파병발표가 있었고 청와대 앞에서 항의 기자회견이 잡혔다.
이근성 선배에게 미안하게 됐다고 연락을 하자 이 선배는 다음 강의라도 오라고 했는데 어느덧 1년이 지났다.
2004년 10월 2일 (토) 맑음 한파주의보
19시 30분부터 시작되는 <외침 아시아2004 록 콘서트>에 끝내 가지 못했다.
아시아지역 시민활동가 교육훈련비용 마련을 위한 음악회이다.
신영복, 김동춘, 한홍구, 김창남 교수 등이 윤도현, 강산에, 김C 등 가수와 함께 록을 부르는 기괴한 장면을 목격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국감 탓이다.
2005년 2월 21일 오전 노회찬 의원실 관계자가 국회 기자회견장에 들러 '신세대 맞춤형 의정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CD' 형태의 영상 다큐멘터리 의정보고서를 기자들에게 돌린다. 이 의정보고서는 신영복이 노회찬에게 보내준 "꽃이되어바람이되어”라는 타이틀로 제작됐다. 의정보고서는 △2004국정감사, 피감기관 의정활동 평가 1위 △굴욕적 용산미군기지 협상 문제제기 △국가보안법 폐지 △민생 인권을 위한 입법활동 △당과 함께 대중과 함께 등 5부로 구성돼 있으며 35분 분량의 동영상이다.
2009년 9월 6일 노회찬(진보신당 대표)은 이 글씨를 액자에 담아 '전국언론노동조합 언론악법 원천무효 시민바자회' 경매물품으로 내놓는다. 노회찬은 경매 시작 전 발언에서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물건을 가져오려 하였으나 아내에 반대에 부딪쳐 두 번째로 비싼 물건을 가져 왔다고 하며 제일 비싼 것은 바로 저라고 하여 바자회를 찾은 시민들에게 웃음까지 선물한다. 이어 노회찬은 이 물품이 희망가 이상으로 팔리게 되면 을지면옥의 냉면과 빈대떡을 대접하겠노라고 약속을 하기도 하였다. (※ 참고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노회찬은 평양냉면 광이다. 수도권의 소문난 평양냉면집은 거의 다 가봤을 정도이고,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옥류관 냉면이 너무 맛있어 여섯 그릇 먹고 특별방문록에 서명했다는 일화도 남겼다.)
바자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최상재(전국언론노조 위원장)는 이렇게 인사한다.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 속에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언론자유를 다시 생각하고 지금 기울어져가는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정말 모두가 주인이었고 모두가 참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바자회를 통해 6천만원이 넘는 소중한 기금이 마련됐습니다. 이 기금은 언론악법 원천무효와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소중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신영복은 신세진 사람에게 선물하라며 노회찬에게 글을 많이 써 주었다. 받은 글들 중에 노회찬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17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인 2005년 2월 15일 책과 함께 건네준 '함께맞는비'다. 신영복의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에 수록된 것으로, 서화집에는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노회찬은 "국회의원으로 갖고 있는 많은 우산 중 하나를 씌워주는 데서 끝나지 말고 동고동락하는 자세로 현장에서 같이 비를 맞으며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의원이 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신영복의 '함께맞는비'는 노회찬이 일하는 공간에서 늘 그와 함께 한다.

▲ 왼쪽부터 17대 의원회관,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와의 인터뷰 (2007.4.20.), 19대 노회찬 국회의원 지역사무실(노원구 상계동) 개소식 (2012.8.21.)
2006년 2월 14일 한 아이가 태어난다. 이름은 박지인(朴芝人). 오랫동안 노회찬과 같이 활동해 오면서 법률자문 역할을 묵묵히 해온 박갑주-김수정 변호사 부부의 아이로, 노회찬이 이름을 지었다. "섬진강 가로질러 송화강 너머까지 산과 들에 절로 나서 홀로자라는 들풀 지초(芝草)처럼 자유로이 살거라 / 초여름밤 어둠속에서 조용히 흰꽃 피우는 야생화 지초(芝草)처럼 한줄기 세상의 빛이 되거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김수정, 「[왜냐면]끝나지 않은 노회찬의 꿈」, 한겨레, 2018.12.6.). 2007년 노회찬은 아이의 돌 기념으로 부탁한, 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芝蘭之香>에 마음을 담아 아이에게 선물한다.

정년퇴임 '고별 수업'과 석과불식(碩果不食):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
2006년 6월 8일. 65세 정년을 맞아 퇴임을 앞둔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가 성공회대에서 있었다. 1989년 3월 성공회대에서 첫 강의를 시작하며 장기수에서 대학교수로서의 새 삶을 시작한 신영복은 이 자리를 끝으로 17년간의 교수생활을 마감한다. (정년퇴임 이후 2015년까지 신영복은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석좌교수를 지냈다.)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운을 뗀 이날 강의의 주제는 <주역>의 64괘 가운데 박괘(剝卦)에 나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였다. '박(剝)'은 '떨어지다(落)' '다하다(盡)' '소멸하다(消)'라는 뜻으로, 박괘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낸다. 신영복은 "사회변화가 쉽지는 않다고 본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로 '길을 잃었을 때는 근본으로 돌아가라'고 한국 사회를 진단한다. 그리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사람은 일생동안 참 멀리도 여행들을 떠나는데, 가장 먼 여행은 어디인가?" 그의 강의가 끝나자, 큰 박수 물결이 이어졌다. 강단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하는 그의 눈은 붉게 상기됐고 이슬이 맺혔다.
노회찬은 신영복의 정년퇴임과 새로운 출발을 지켜보기 위해 고별강연에 참석한다. "신 교수님처럼 겉과 속, 말과 행동, 이론과 사상이 일치하는 '지행합일'을 실천하는 사람을 보지 못해 평소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뒤 깊은 감명을 받았고, 92년 직접 신 교수님을 찾아간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고 있다"며 참석 이유를 밝힌다.
2006년 8월 25일 신영복 교수 정년퇴임식이 '여럿이 함께'라는 이름의 콘서트와 토크쇼로 진행되었다.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문집 <신영복 함께 읽기>(돌베개, 2006.8.)도 이에 맞춰 출간된다. <신영복 함께 읽기>는 '신출귀모'(신영복 선생님의 출판을 귀하게 생각하는 모임)가 기획하고 60여명의 '여럿이 함께'가 만든 신영복의 학문읽기(1부)와 추억담(2부)을 모은 책이다.
"신영복 선생을 거울로 삼고 닮아가려는 사람들이 만든 문집"에 노회찬은 <함께 걷는 서오릉 길>이라는 글을 싣는다. 서오릉은 1966년 어느 봄날 스물여섯 살의 청년 신영복이 오른 소풍길이고, 여기서 그는 우연히 여섯 소년을 만난다. 이때의 순수하고도 소박했던 만남과 우정을 다룬 것이 <청구회추억>이며 노회찬은 이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법,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맺는다. "신영복 선생과 함께 걷는다는 것,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 같은 곳을 디디고 서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축복이고 기쁨이다."

▲ 정년퇴임식에서 신영복, 노회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외에 가장 좋아하는 책이자, '신영복 문학의 백미'로 노회찬은 <청구회추억>을 꼽는다. 2008년 8월 28일 <노회찬의 난중일기>는 '청구회 추억'에 얽힌 개인적 추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8월 28일 (금) 맑음
<청구회 추억>은 이른바 <신영복 문학>의 백미이다. (…) <청구회 추억>은 사형선고를 받은 신영복 선생이 19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유품을 미리 정리하듯 남긴 글이다. <청구회>란 1966년 서오릉 소풍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섯 명의 꼬마들과 인연을 맺으며 만든 모임 이름이며 이들과의 2년에 걸친 만남의 기록이 <청구회 추억>이다.
1992년 출소 이후 진보정당건설운동에 매진하던 시절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함께 늘 <청구회 추억>을 권하곤 했다. 활동가라면 특히 조직사업을 하는 활동가라면 마땅히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고 강변했던 기억이 난다. 그땐 1991년 월간중앙에 게재된 글의 복사본밖에 없어 마치 유인물 건네듯 이 복사본을 손에 쥐어 주곤 했다. 구미의 조근래 동지는 이 복사본 <청구회 추억>을 읽고 신영복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싶다고 해서 신 선생을 모시고 구미까지 내려간 일도 있었다. 얼마 후 조근래 동지는 <청구회 추억>을 수첩만한 크기로 만든 책자를 나에게 보내오기도 했다. (…) <청구회 추억>은 이렇게 돌려가며 읽혀졌다. 그 후 <엽서>가 발간되면서 육군교도소 똥종이에 쓰여진 육필원고가 영인본으로 실리고, 부록처럼 다른 책에 함께 실리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 글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더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식힐 순 없었다.
27일 선재아트센터에서 <청구회 추억> 출간을 기념하는 북콘서트가 열렸다. 강당은 만원이고 통로와 계단까지 선남선녀로 가득 찼다. (…) <청구회 추억> 출간 기념회이기도 하지만 마침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0주년이 되는 시점이고 돌이켜보면 20년을 옥중에서 보낸 신영복선생의 <바깥세상 체험 20년>도 되는 터이라 신 선생의 인사말은 그에 걸맞는 '작은 강연'이 되었다. (…) 이 날도 신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라 했다. 가슴에서 발(실천을 뜻한다)까지 가는 여행은 더 힘들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나? 머리에서 출발하여 귀, 눈, 혹은 입까지 와서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수십년 운동을 하면서 칼날같이 날카롭게 맞선 상대가 아니라 함께 하는 동지들로부터 더 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스스로 올바르다는 생각에 빠져 쉽게 상처를 안겨주고, 또 상처를 받았다는 생각에서 그에 못지않은 상처를 주는데 주저함이 없다. 자신이 안긴 상처는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입은 상처만 바라보니 남는 것은 '상처 입은 피해자'들뿐이다.
이날 강연 중에서 신 선생은 독서란 3독이라 말하셨다. 텍스트(책의 내용)를 읽고 책쓴이를 읽고 동시에 자신을 읽는다고 해서 3독이라는 것이다. 마침 선선한 밤공기가 책읽기에 적절하다. <청구회 추억>이 우리들의 현재가 되길 바라며 3독을 권한다.
<노회찬마들연구소> 명사초청특강: "성찰과 모색"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석패한 노회찬은 11월 28일 지역 정당활동의 모범을 만들기 위해 노원구 상계동에 <노회찬마들연구소>를 설립, 창립기념식을 치렀다. 축하와 격려의 의미로 신영복은 '노회찬마들연구소' 제호를 글로 써서 선물한다. 2009년 1월 7일 신영복은 노회찬이 이사장으로 있는 <노회찬마들연구소> 명사초청특강에서 "성찰과 모색"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 연구소의 '명사초청특강'은 2008년 9월 7일부터 2012년 9월 26일까지 4년 동안 총 41회를 진행하면서 '지역명품특강'으로 장안의 화제를 몰고오기도 했다.

강연장인 노원역 인근 서울북부고용지원센터는 발 디딜 틈도 없이 500여 청중들이 빽빽이 메웠다. 여러 울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 가운데서 '물'에 대한 신영복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인간의 관계성을 가장 나타내는 것이 물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로서 배워야 합니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지요. 다투지 않습니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절벽을 만나면 뛰어내리고 큰 웅덩이를 만나면 건너뛰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서 넘칩니다. 이러한 물의 자기 변화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하게 배울 점이 또 있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점입니다. 바로 하방연대(下方連帶), 낮은 곳과의 연대입니다."

▲ 500여명이 참석한 이날 강연회에는 몰려든 인파로 앉을 자리가 부족해 강연중인 연단 위에 몰려 앉는 청중들도 눈에 띄었다. (사진=노회찬마들연구소)
신영복이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선생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은 것처럼, 노회찬의 삶에 신영복은 큰 영향을 준다.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 신영복은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 찾아뵐 수는 없었지만 신영복에 대한 노회찬의 생각도 아마 비슷했으리라고 본다. 노회찬의 글이나 말을 보면 신영복의 향기가 스며있다. '6411번 버스'와 '투명인간' 이야기로 잘 알려진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수락연설문>(2012년 10월 21일)은 이렇게 적고 있다.
"강물은 아래로 흘러 갈수록 그 폭이 넓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중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입니다."
인민노련 사건으로 체포된 지 23년이 되는 날인 2012년 12월 24일 노회찬은 '노회찬의 여의도 이야기'에 신영복의 말을 인용해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납니다> 제목으로 이런 글을 올린다.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야심성유휘 夜深星逾輝)는 말을 기억합니다. 지금 이 어둠 속에서 오직 한 가지 더욱 빛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약속뿐입니다. 두 달 전, 지난 10월 21일 창당대회에서 <대중적인 제대로 된 진보정당으로 거듭나겠다>고 한 대국민 약속입니다.…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는 말은 단지 밤하늘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가장 어두울 때 험하고 먼 길을 함께 걷고자 입당을 결심하신 모든 신입당원들께 뜨거운 환영의 인사를 전합니다."
2013년 7월 21일 진보정의당 대표 자리를 물러나는 노회찬의 <퇴임사>는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그동안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믿고 여기까지 함께 온 분들께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드립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걷는 길동무들이라 합니다. 당원동지 여러분 사랑합니다."
<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와 '노유진의 정치카페 테라스'
2015년 5월 21일 진보정의당 이정미가 진행하는 '노유진의 정치카페 테라스'라는 팟캐스트에 노회찬은 신영복과 함께 그의 인생과 새 책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돌베개, 2015)에 대해 2시간여에 걸쳐 잔잔한 이야기를 나눈다. "노 의원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안 나왔을 텐데...나왔다." 사실 신영복이 나오기 쉽지 않은 자리였다. 신영복은 암 투병 중이었는데 몸이 좀 회복되기도 했고 또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낸 것이었다.
1부에서는 노회찬과 신영복의 만남과 인연, '마지막 강의'의 의미와 건강상태, 소주 '처음처럼'의 탄생, '텍스트-저자-독자'와 '머리-가슴-발'의 '서3독'(書三讀),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로서의 독서, 청구회 추억과 모순의 결집체로서의 감옥생활, 경직된 인식틀로서의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악(詩書畵樂)의 중요성, 청년시절의 꿈과 이상 및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소중함 등 신영복의 삶 전반에 대한 일화를 들을 수 있다.
2부는 <담론>에 담은 신영복의 생각을 들려준다. 변방의 창조성과 역동성, '나무와 물'의 철학과 철학적 상상력, 감옥생활 20년의 교훈이자 고별수업 주제였던 석과불식(碩果不食)의 '엽락(葉落)-체로(體露)-분본(糞本)', <담론> 읽기의 의미 등에 대해 소중한 시간을 갖는다.
마무리 발언에서 노회찬은 휴머니즘과 변혁의 결합, 세상에 맞춰나가기보다는 세상을 바꿔나가는 삶으로 <담론>을 읽어낸다.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가 흐르며 2시간여에 걸친 이야기는 끝나며 신영복과 노회찬 두 사람은 자리를 떠난다. 다음 링크를 열면 이날 나눈 이야기를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http://www.shinyoungbok.pe.kr/video/307531)
(http://www.shinyoungbok.pe.kr/video/307542)
"내가 (교도소에서)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다. 길어야 2시간밖에 못 쬐는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다. 겨울 독방의 햇볕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였고 생명 그 자체였다." 이전엔 무심코 지나쳤던, 그러다가 얼마 전 책장을 다시 넘겼을 때 내 눈에 담긴 <담론>의 글귀다.

▲ 왼쪽부터 노회찬 신영복 이정미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은 2016년 1월 7일 노회찬의 병문안이 마지막이었고, 8일 후인 1월 15일 떠남과 헤어짐의 시간을 맞게 된다.
2016년 1월 18일 영결식 이후 그리움의 시간들
신영복이 세상을 떠난 뒤 3달이 채 안 된 2016년 4월 3일 일요일, 고향땅 밀양 선산에서 고인의 수목장이 조촐하게 진행된다. 좋아하는 진달래꽃도 묘목으로 표지석 주변에 빼곡하게 심어두었다고 한다.

▲ 출처: 사단법인 더불어숲
2017년, 구로구는 1주기를 맞아 신영복의 정신을 기리고, 주민들에게 사색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그의 대표적 저서인 <더불어 숲>에서 착안한 '더불어 숲길'을 조성했다. '더불어 숲길'은 그가 재직했던 성공회대 뒷산인 항동 산 23-1번지 일대에 길이 480m, 폭 2m로 조성된 산책로다. 생전에 직접 쓴 서화작품 31점이 안내판 형식으로 설치되어 있고 항동 철도길과 수목원, 구로 올레길 3코스와도 연결되어 있다. 한번쯤은 걸어봄직하다.

신영복은 떠났지만, 이후에도 계속 노회찬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그의 발자취를 알려주며 그리움을 대신한다. (※ 그러던 중에 맞이한 2016년 4월 13일 20대 총선, 창원 성산에 출마한 노회찬은 3선 국회의원이 된다.)
2016년 12월 25일 트위터
신영복 선생님 덕분에 아내와 결혼한 얘기 등 얽힌 사연들을 풀었습니다. [다음스토리펀딩] 노회찬의 프로포즈,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6659 여러분의 공감과 투자를 기다립니다!
2017년 1월 3일 트위터
신영복 선생 1주기 추모공연 [만남] 예매중입니다. YB, 김제동, 두번째달, 김형석, 더숲트리오, 문소리, 고민정 출연. 1월 19일(목요일) 블루스퀘어.
http://mticket.interpark.com/Goods/GoodsInfo/info?GoodsCode=16015996&app_tapbar_state=fix …
2017년 1월 4일 트위터
신영복선생 1주기를 맞이하여 두 권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미발표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와 대담집 <손잡고더불어>. 신영복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신년벽두에 읽기 적합한 내용입니다. 감히 일독을 권합니다.
2017년 1월 17일 <[신영복 1주기 추모기획: 만남] 신영복의 글을 만나다 국회의원 노회찬>(https://youtu.be/_UK-uYrscb8)을 통해 노회찬은 신영복이 '정치'에 대해 말한 글을 읽는다. 5월 15일 스승의 날에는 유고집인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와 <손잡고 더불어: 신영복과의 대화>에 카네이션 꽃을 올린다.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의 궁극적 목표가 평화로운 세상(平天下)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平和)란 글자 그대로 화(和)를 고르게(平) 하는 것이다. 화(和)의 의미가 쌀을 먹는 우리의 삶 그 자체라면 정치는 우리의 삶이 억압당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정치가 평화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까닭은 오늘의 정치적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짐지고 있는 고통이 무겁고 질긴 것이 사실이지만 바로 그 엄청난 무게 때문에 머지않아 '평화와 소통과 변화'라는 새로운 정치 전형(典型)의 창조로 꽃필 수 있기를 바란다. (…) 정치란 무엇인가. 평화와 소통과 변화의 길이다.

2017년 5월 15일 트위터
오늘은 스승의 날.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이셨던 신덕만 선생님을 비롯해 여러 스승님께 인사 올렸습니다. 영원한 스승 고 신영복 선생님께도 신간에 카네이션 꽃을 바쳤습니다.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1년의 시간이 흐른 2018년 1월 10일 신영복 선생 2주기 전시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0주년'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동산방화랑에서 열린다. 1월 20일까지 신영복 선생의 옥중 작품 17점을 포함한 서화, 옥중 엽서 원본 등을 전시했다. 노회찬은 이 자리에 참석해 고인을 추억하는 시간을 함께 나눈다.


▲ 인사말 하는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 (출처: 사단법인 더불어숲)
나흘 뒤인 1월 14일 오후 2시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성미가엘 성당. 노회찬은 신영복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째 되는 날을 기리는 추모식 자리에 함께 했다. 성공회대 교수밴드 <더숲트리오>(김진업, 김창남, 박경태)는 "다음 추모식에선 밝은 분위기 속에서 선생님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면 좋겠다"며, 신 교수가 감옥에서부터 부르곤 했던 '시냇물'을 시민들과 함께 합창하며 추모식을 마쳤다.
2018년 7월 23일 노회찬, 먼 길을 떠나다
2018년 7월 18일 여야 원내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노회찬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신영복으로부터 받아 소장하고 있던 글 6점을 표구사에 맡긴다. 7월 22일 오후에 귀국한 노회찬은 그 다음날인 7월 23일 아침 홀연히 먼 길을 떠난다.

3년 전인 2016년 1월 18일 고 신영복 선생 영결식, 노회찬은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 선생님은 떠나시지만 내일부터 선생님을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노회찬이 신영복을 그리워하며 다시 만날 것을 믿은 것처럼, 노회찬의 오랜 길동무들도 노회찬을 다시 만날 것을 믿고 있다.
노회찬의 생환(生還)과 새로운 만남의 첫 걸음으로 오는 1월 24일(목) 저녁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창립 기념행사가 열린다. "함께가면 길이된다"는 신영복의 말처럼 이제 노회찬재단은 '아름다운 동행' 속에서 "노회찬, 함께 꾸는 꿈"을 이루기 위해 '먼 길을 함께' 떠나고자 한다.
나는 다시 꿈을 꾼다. 대학서열과 학력차별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나라…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지 않는 나라…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 토마스 모어는 고작 하루 노동시간을 여섯 시간으로 줄여놓고 그 섬을 존재하지 않는 섬, 유토피아라 불렀지만 나는 그보다 더 거창한 꿈을 꾸지만 단지 꿈이라 여기지 않고 있다.…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니다. 그 꿈 이외에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절박한 시점에서 쓰인, 그리고 노회찬이 신영복 문학의 백미라고 꼽았던 <청구회추억>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Some day in the future, I want to take a lonely walk to Seo-O-Reung. With a bright azalea on my plastron, I want to go slowly on foot to Seo-O-Reung and slowly walk back."
'영원한 자유인'으로 '더불어 숲'의 세상을 꿈꾼 두 사람이 진달래 피는 올 봄철에 서오릉에서 만나 함께 천천히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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