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공무원 시험에만 매달리게 하는 나라, 미래가 없다

일취월장7 2018. 12. 24. 17:47

공무원 시험에만 매달리게 하는 나라, 미래가 없다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과거(科擧)'를 통해 본 '공시족(公試族)' 열풍
2018.12.22 12:54:19


얼마 전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11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 9개월 연속 계속되던 고용률 하락이 멈추고, 취업자 증가 폭도 10개월 이래 최대치를 나타냈으며, 청년층의 고용도 최근 몇 개월 이래 증가하여 청년층 실업률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간 하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사실 최근 정부가 추진한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한 단기 일자리 대책의 효과가 일정 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여, 여전히 청년 일자리 문제는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와 더불어 일부 보수 언론에서는 최근 여론조사의 현 정부 지지율 하락이 소위 "이영자현상(20대, 영남, 자영업자들의 지지율 하락)"과 "신동엽현상(신세대, 동쪽, 옆구리 중도층의 민심이탈)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서 공통적인 것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청년층의 지지율 이탈이다. 이는 바로 청년실업, 즉 청년들의 취업난과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청년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 가운데에서도 우리 사회에서는 소위 '공시족(公試族)' 열풍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현 정부의 공무원 17만 4000명 증원 공약사항 또한 '공시족' 열풍을 부채질하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일명 '공시족'이 꾸준히 증가하여 올해에 이미 40만 명을 넘어서 전체 취업준비생 중 40%가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액이 21조 원 이상이라고 한다. 이는 청년 '공시족' 40만 명이 경제활동으로 거둘 수 있는 생산효과 15조 원과 이들의 가계 소비 지출액 6조 원이 포함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제적 손실 이외에도 우수 인재의 '공시족'화에 따른 사회 전반에 끼치는 손실은 통계를 낼 수 없을 만큼 막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공시족' 열풍은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시대에서는 관료로의 진출만이 당시 지식인들이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특히 유교의 전통이 오랜 기간 정치사상계를 지배한 중국에서는 관리가 되는 것만이 입신양명의 유일한 통로였다. 부를 축적한 상인들 대부분도 본인뿐만 아니라 자제들을 관료로 진출시키는 것이 당면 목표였다. 

중국에서 황제를 지칭하는 천자(天子)는 하늘로부터 위탁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천자는 드넓은 천하를 혼자의 힘으로 다스릴 수 없었던 관계로 자신의 명을 받아 다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참여할 경험과 능력을 겸비한 인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가장 효율적인 관리 선발방법을 꾸준히 모색한 결과, '과거(科擧)'라는 제도가 정립됐다.  

원래 중국에서는 '선거(選擧)'라는 관리 등용방법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각 지방으로부터 인재를 추천받아 중앙에서 일정한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향거리선(鄕擧里選)'의 약어(略語)다. 특히 한대(漢代)에는 유가(儒家)의 기본 덕목인 효(孝)와 청렴(淸廉)의 실천 정도를 기준으로 추천받아 관리를 선발하였기 때문에 '효렴과(孝廉科)'라고 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된 중정관(中正官)들이 지방의 인재를 9품(品)으로 나누어 중앙에 천거하는 구품중정제 혹은 구품관인법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관리를 선발하던 시기에는 귀족의 전성시대로써 관리 후보자를 추천하는 권한을 중앙과 지방의 귀족이나 호족(豪族)들이 독점하고 있어서, 아무리 천자라 하더라도 이들 귀족들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명을 따르는 관리를 마음대로 선발할 수도 없었고, 아울러 자신의 정치도 펼쳐나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후 수당(隋唐)시대 '과거'제도가 성립되면서 천자의 관리 임명권이 조금씩 생겨나게 되었다. '과거'란 '과목별로 치루는 선거(選擧)'의 준말로, '수재(秀才)', '명경(明經)' 그리고 '진사(進士)'로 과목을 나누어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수당시대에는 여전히 귀족중심의 정치가 유지됐고, 또한 '과거'시험의 과정 중에 귀족들에게 유리한 면접시험(신언서판‧身言書判) 과정도 있어서 귀족의 자제가 우선적으로 선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또한 '과거'이외에도 문벌귀족의 자제가 자동적으로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문음(門蔭)'제도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행되던 '과거'제도는 송대(宋代)에 이르러 전통 귀족들이 몰락하고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유력 세가(世家)들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서민출신의 능력과 실력을 겸비한 선비(士)들을 객관적이고 공정한 방법으로 선발하는 체제로 개편되었다.

예를 들면 호명법(糊名法)이 시행되어 이름을 가리고 채점하게 하고, 등록법(謄錄法)을 시행하여 수험생이 쓴 답안지를 다른 곳에 베껴 쓰게 한 후 채점을 하게 함으로써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곧 관직의 세습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집안의 배경이 없어도 실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관직으로의 진출이 가능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써 천자에 대항하는 강력한 귀족을 대신하여 천자의 뜻에 따라 다수의 민중들을 통치하는 서민 출신의 관료가 선발되는 진정한 의미의 '과거'가 완비됐다. 이후 '과거'제도는 몽골족이 통치했던 원(元)시기를 제외하고 명청(明淸) 중화 제국시대를 거치며 수도와 각 지방에 설치한 관립학교에서의 교육을 '과거'시험과 연계시키면서 매우 복잡하게 발전했고, 20세기 초까지 중국에서 유일한 관리 선발 방법으로 지속됐다. 

특히 명청시대에는 청년 지식인들이 각급의 학교 과정과 여러 단계의 '과거'시험을 거치면서 소위 '신사(紳士)층'을 형성하여 중앙과 지방의 지배층으로 존재했다. 물론 이들 '신사층'이 모두 관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앙과 지방의 정치‧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서 여론을 주도했다. 또한 이들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일정한 혜택 즉 요역(徭役)을 감면받는 우면(優免)특권을 누리는 특권계층이었던 관계로 시대가 흐르면서 신사층의 숫자는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래서 명대 중기, 즉 15세기 중반에는 '신사층'에 처음 진입한 '생원(生員)'들이 '과거'시험의 최종 단계인 '전시(殿試)'를 통과하여 소위 '진사(進士)'의 지위를 취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해 약 3000대 1의 경쟁을 뚫어야했다. '생원'으로의 진입도 여러 단계의 경쟁을 뚫어야만 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은 실로 '낙바생'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시험지옥'이었던 중국의 '과거'제도는 처음 만들어 질 당시만 해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진보된 이념과 체계를 갖춘 관리 선발 방법이었다. 이전의 시대와는 달리 가문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모든 선비는 자신이 실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누구나 시험을 통해 관리가 될 수 있는 획기적인 제도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거'제도는 또 다른 측면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전통 중국에서의 관리가 되는 것은 그 지위가 평생 보장되는 소위 '종신고용'으로, 다른 직종으로의 전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명청시대의 사회적 유동성(Social Mobility)이 매우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이랬기 때문에 당시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젊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과거' 시험 준비에만 몰두하게 만들어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지적(知的) 낭비를 초래하게 됐다. 또 주요 '과거'시험의 과목은 공허한 주자학(朱子學)적 담론에만 탐닉하게 만들어 실용학문이나 자연과학으로의 지적(知的) 전환이나 발전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됐다.

중국의 '과거'는 오랜 역사와 합리적 이념을 갖춘 제도였지만 그 이면에 내포된 부정적 요인으로 인하여 봉건 왕조체제가 붕괴된 이후 근대 중국 사회에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같은 '과거'제도의 변천과정은 '공시족' 열풍이 몰아치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수많은 청년들이 엄청난 취업난 속에 취직 경쟁에 몰리면서 '공시족'은 이제 우리 사회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는 전통 중국의 '과거'제도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의 많은 병폐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도전과 다양한 변화를 선도해야 할 미래의 주인공 청년들이 '공시(公試)'에만 매달리는 현상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경제의 손실이다. 4차 산업혁명을 넘어 5차 산업혁명을 준비해야 할 우리에게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유지원 교수는 현재 원광대학교 인문대학 학장과 한중관계연구원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소설] 건설사, 공무원, 중개사, 보좌관, 그리고 기자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연말특집: 엽편소설] 맥(脈)
2018.12.24 11:02:08

"야! 이제 알았어, 알았단 말이야." 

국내에서 건설 분야 하도급 순위 1위인 창대건설 경영기획실에서 최선임 차장으로 일하는 창욱이 말했다.  

"서울의 인구가 줄어드는데, 출산율도 대폭 줄어들고 있는데, 물가는 올라도 소득은 늘지 않았다는데 말야. 생활비 등 돈이 항상 필요한 고령 인구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데, 행정 수도까지 건설해 서울에 모여 있던 정부의 행정 기능을 대부분 세종시로 이전했는데, 그간 뭐 이런저런 부동산 가격 안정화 대책을 내놓았는데, 집값은 왜 고공행진만 하는 거야"라고 국회의원 비서관을 하는 현석이가 말하자 무릎을 치며 답한 것이다. 이제야 뭔가 비밀을 알았다는 말투였다.  

대학시절부터 무슨 일이든 매우 차분하고 말끔하게 해냈던 창욱은 창대건설의 경영진이 신뢰하는 중견 간부라 회사의 전략은 물론 기밀까지 모두 취급을 하여 회사의 속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경험이 쌓이면서 부동산 시장의 구조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회사 내의 신망이 두터워 내년초 부장 승진이 예고되어 있었다. 

현석은 뭐든지 걸리면 파고들어 뿌리를 뽑는 성향을 지녔다. 3년째 여당 정의혁신당의 초선 ‘한다고(韓多告) 의원’을 위해 의원실에서 수석비서관으로 일하고 있다. 한다고 의원은 여당 의원이지만 정부의 실정이나 실책도 가감 없이 정확히 조사해 폭로하고 대안을 제시하여 왔기에 등원이후 계속 주목을 받아왔다. 차세대 리더로도 언론이 평가하였다. 야당보다도 여당의 당 대표나 원내대표가 더 두려워하고 골치 아파하는 정치인이었다. 여당의 집안 단속을 하는데 종종 애를 먹이는 의원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경제학과의 부동산 자산 연구 동아리 '맥(脈)'에서 함께 어울렸던 친구 4명이 2018년 1월 10일 저녁 신년회를 하는 자리에서 오간 대화였다. 날씨는 무척 싸늘했지만 이들이 모인 마포 고깃집에서는 삼겹살 굽는 고소한 냄새가 대학시절 우정을 전격 소환하듯 향기롭게 진동하였다. 기름이 튀고 연기가 옷을 파고들어도 즐겁기만 했다.  

대학시절 그들의 아지트였던 '맥'은 부동산 자산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것의 건전하고 투명한 거래를 연구하던 경제학과의 동아리였다. 조선 영조 27년인 1751년 <택리지(擇里志)>를 쓴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을 신봉하며 땅이나 건물의 맥을 우리 몸의 혈맥처럼 제대로 짚어보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었다.  

이들 4인방은 한번 파고들면 끝을 보는 끈질긴 투지를 선보였다 이런 기질의 반쯤은 타고난 것이고, 반쯤은 대학에 와서 서로 닮아간 것이다. 그래서 학교의 모든 분쟁, 심지어 남의 연애사까지 끼어들어 오지랖이 넓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나름 옳은 자의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할 정도로 정의로움이 도드라졌기에 4명의 친구가 한 동아리는 명성이 높았다. 학과는 물론 학교 내에서 ‘별종 동아리’의 ‘괴짜 4인방’으로 불렸다. 이들의 우정과 신뢰역시 무척 끈끈하였다. 

대학시절 일찌감치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15년동안 강남 한복판에서 부동산 중개업소를 해온 종현이와 뒤늦게 참석한 국토부 서기관 명우는 창욱과 현석이가 주도하는 대화에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다. 그냥 말만 듣고 입가에 미소만 지었다. 종현이는 오래 전부터 뇌경색으로 몸져누우신 부모님의 막대한 치료비를 대기 위해 돈벌이가 급해 일반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일찌감치 중개업소의 실장을 거쳐 중개업소를 직접 차려 운영하였다. 그간 돈 쓰는 배짱이 두둑한 복부인, 되는 물건만 있으면 지르는 큰 손 아줌마들, 수익률 높은데만 찍어달라고 채근하는 돈 많은 노친네들을 숱하게 상대하였고 고생 끝에 논현동에 5층짜리 작은 건물도 한 채 마련하였다.  

명우는 내심 출세욕이 있었는지 3학년 때부터 행정고시 공부에 매진하였다. 집중력이 뛰어나 4학년 말에 완판에 붙었다. 희망대로 국토부에 입직하였다. 동아리 시절의 관심과 전문성을 이어가기 위해 주택, 토지, 도시계획 정책을 관장하는 부서에서 계속 일했다. 도시의 설계나 부동산 가격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핵심적인 자리였다. 그래서 명우는 이들 동아리 출신 친구들 사이에서 '컴퍼스(compass)'라 불렸다. 여러 후보지 가운데 개발할 곳의 금을 긋는 무시무시한 실무자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고깃집에서 소주가 몇 순배가 돌면서 이들은 시시콜콜한 가정사, 대학 친구들 얘기, 자녀 교육 얘기, 직장 얘기를 모두 쏟아냈다. 심지어 군대시절 이야기, 요즘 축구, 프로야구 이야기까지 털어냈다. 그 후 다시 부동산 얘기로 화제가 돌려지자 모두 한숨만 내쉬기 시작했다. 왜곡된 부동산 시장구조를 제대로 해부하여 이런 중병의 원인을 치료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금방 망할 것 같다는 게 이들의 한결같은 이야기였다.  

창욱은 "최근에 대학 학과 초청 특강을 가서 학생들 얘기를 들어보니 졸업 후 취업해 서울 한복판에서 집을 사는 것은 평생 불가능하다고 보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높은 청년 실업률에 보수가 좋은 일자리마저 없어 돈을 모으기도 여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강남에 비싼 집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도 자녀들이 자신의 집을 물려받아도 세금 내고 나면 반 토막이 되어 그 자리에선 도무지 살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강남은 웬만한 거부가 아니고서는 영원히 유지될 수 없는 위치 권력이다"고 말했다. 

현석은 "국회에 들어와서 영감님(국회의원님을 치칭하는 말) 보좌할 정책연구를 하면서 30대 초반 직장인들을 만나봤더니 저 출산, 그러니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가 혹독한 부동산 가격 때문이며 아무리 많은 출산 장려금을 경쟁적으로 줘도, 유아복지를 늘려도, 거대한 자본이 소요되는 집값이 하향 안정화 되지 않으면 자식을 낳아서 사람 대접 제대로 받게 키울 자신이 어렵기 때문에 출산율 회복이 어렵다고 입을 모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현석은 젊은 커플들의 낮은 출산율 원인이 단순히 변화된 라이프스타일 탓이라거나 양육이나 교육 부담 때문이라기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집을 사기 위해 아이를 안 낳고 맞벌이를 해서 자금을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할 절박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듣고 놀란 것이다. 그들이 사야 될 집이 바윗덩어리처럼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것이고 삶의 질을 억누르거나 퇴보 시키는 핵심 사유가 된 것이다. 각종 경제연구소나 정부의 진단과 전혀 다르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명우는 주택정책 담당 공무원답게 내내 입이 무거웠다. 그러나 비워진 소주병의 수가 늘어나면서 점점 취하자 성대가 부드러워지면서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들만 있는 편한 자리인데다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그런지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답답한 세종시 정부 청사 사무실을 벗어나 우정이 가득한 바깥 공기를 마음껏 흡입하니 편안한 모양이었다. 명우는 답답한 듯 가슴을 손으로 두드리며 "야, 이거 모두 정부 탓이야"라고 소리쳤다. 친구들이 "뭔데?"라고 일제히 되묻자 말하기 시작했다.  

명우는 "사실 나도 공무원이지만 역대 정부가 '맥'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건설사들 로비, 강남 힘센 사람들 로비, 그들의 목소리를 우선적으로 들어줘서 이렇게 된 거야. 서울 변두리나 수도권 소외지역에 지하철 같은 교통 인프라 추가 건설 안 해주고 말이야, 경제성(B/C) 따진다는 논리로만 접근해 인구이동이 많은 강남에 또 겹겹이 지하철 깔아주니까 강남은 더욱 인프라가 집중되고, 강남 집값 더 올려주는 거지. 소외된 다른 데를 한번 보라구!"라고 말했다.

명우는 이어 화가 난 듯 더 큰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KTX 두고 서울역, 용산역이 멀다면서 SRT까지 왜 만들었겠어. 원래 터미널은 ‘강남 반포’, 철도역은 ‘서울역’ 구도였는데, 그것이 일종의 관습헌법이었는데 기득권층이 힘으로 무너뜨렸지. 자본이 집중된 곳에 인프라를 더욱 집중시키니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그들만의 섬이 되는 거야. 내가 아는 것 참 다 털어놓기도 그렇고. 허위 매물 게시 운운하면서 중개업소 압박하고 인위적으로 얼마 이상만 부르게 한다든지 등의 부동산 시장을 왜곡시키는 세력들의 단속도 겉으로만 한 것이라는 걸 자인해. 공무원으로서 나도 책임이 크다. 야! 미안하다. 한잔 해!" 

창욱은 맞장구를 치며 "건설사도 책임이 크지. 이거 비밀이지만 우리 경영기획실 비밀 캐비넷에 국토부에 로비한 의견서, 서류 뭉치 따위 가득하다. 내가 관리자라서 여러 번 봤다. 퇴직한 국토부 공무원들도 로비용으로 땡겨서 이사, 부사장, 고문으로 많이 들어와 있다. 현직 국회의원들 동생도 두 분이나 있고.... 의뢰인들의 모든 문제를 척척 해결해 주는 유수의 RT&PT와 같은 로펌에도 컨설팅과 대관업무 용역을 주기에 웬만한 사항은 다 해결된다. 내가 볼 때 역대 정부는 서민 주거권 확보 공약은 말뿐이고, 상세히 들여다보면 비유컨대 건설사들 돈 제대로 벌게 안전 빵 시스템을 깔아주는 정책을 펴 온거지. 나도 우리 회사를 위해 일고 있지만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건 아니라고 본다"고 호응하였다. 

종현은 취기에 발그레한 얼굴로 중개업소를 하면서 겪은 경험을 한 줄 한 줄 털어놓았다. 부동산에 통달한 듯 래퍼처럼 술술술 읊었다. 종현의 말은 매우 빨랐고 비트가 있었다.

"솔직히 말이야! 부동산 가격 모두 심한 뻥튀기야. 아파트 부녀회나 이들과 연계되어 있지. 스타 부동산 강사들까지 달려들지. 자산 컨설팅 업체까지 중개업소들을 압박하지. 그래서 담합해 집값을 일제히 올리지. 인근 지역에서도 덩달아 같은 방식으로 올리지. 중개업소들도 그곳에서 계속 장사하려면 주민들 압력에 따를 수밖에 없지. 연쇄적으로 단지별로 가격 차등을 두는 계급적 층위가 형성되지. 서울 도심 곳곳에 범접하기 어려운 배타적인 ‘섬’을 만드는 거지. 권역별로 순차적으로 단숨에 일제히 가격을 급등시키지. 희소재를 만들어버리는 거지. 서울이란 곳이 넓은 것 같지만, 몇 군데에서 이런 도미노가 이어지면 시장은 완전히 왜곡되는 거야. 지금 그 상태지. 정부가 도무지 손을 쓸 수 없지. 의지가 있다 해도 선거 표심 때문에 안 되지. 평균 2년마다 선거가 있잖아. 어느 정당이 집권해도 손을 안 쓰리란 기대가 시장에 쫙 깔려 있는 거지. 집을 마련하려는 사람들은 막상 집 사려면 마땅한 집이 많지 않아. 그래서 은행, 사채 대출받아 능력 밖의 아파트를 턱없이 많은 돈을 지불하고 말야. 그 욕망의 섬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 

그러자 현석이가 한참 고심하더니 소주를 한잔씩 돌리곤 말했다.  

"그런 문제점을 나도 알지만, 니들이 더 빠싹하게 알고 있으니 우리가 좀 힘을 모아 한번 해결해보자. 더 이상 방치해선 우리 경제가 송두리째 망할 거 같잖아. 아이들에게 희망이 없잖아. 전혀, 네버…. 우리는 이미 외환위기를 경험해 봤잖아. 빈부 격차나 기회의 상실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고. 우리 다시 대학 동아리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경험이 많으니 이제 맥을 제대로 짚어보자."

창욱, 명우, 종현이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야, 현석아! 뜻은 정말 좋은데 부동산 문제를 어떻게 우리 넷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거야, 그 어려운 문제를?"이라고 물었다. 그러자 현석은 "내가 모시는 우리 꼴통 영감님과 최근 110명의 생각 있는 언론인들이 무려 300만 명의 시민들로부터 클라우드 펀딩을 받아 새롭게 출범한 방송사 <메가 미디어>를 이용하면 될 것 같아. 내게 생각이 있어. 빅 빅쳐, 그랜드 플랜말이야! 모든 일은 타이밍이 중요한데 요즘 물이 들어와서 이제 노 저을 때가 된 것 같구나. 절묘한 타이밍이야"라고 말했다.  

꼴통 영감은 한다고 의원을 지칭한 것 이었으며, <메가 미디어>는 권력 견제, 부패 감시, 정의 실현을 모토로 저널리즘 본연의 책무를 실현하기 위해 6개월 전 출범한 신생 언론이었다. 메가 미디어는 2016년 국정농단을 규탄한 대규모 촛불시위 이후 기레기 언론의 혁파를 주장하며, 존경 받는 미디어의 탄생을 열망하던 시민들의 열띤 호응을 얻고 무려 7천억 원이란 사상 초유의 펀딩 실적을 기록했다. 이 정도의 자본금과 호응세라면 기존의 언론 시장 질서나 저널리즘의 판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상황이었다.  

종현이가 매우 간단히 설명을 하였다. 

"이전 정권을 무너뜨린 부패 분야 탐사 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받은 <한반도 일보>의 '독사 여기자' 강신혜 기자와 부패 냄새라면 귀신같이 맡는 <서울 포스트>의 '발군의 개코' 유발군 기자도 <메가 미디어>에 합류했다는군. 취재 진용이 어머어마 해. 기자들이 그렇게 많이 이직할줄 몰랐네. 정말 기대되네." 

그렇다. <메가 미디어>는 각 언론사의 용기와 능력이 출중한 탐사 전문 기자만 70명을 스카우트하였기에 자본력과 실력 면에서 정치 권력도 함부로 어찌 하지 못하는 규모와 취재 진용을 갖췄다. 특히 내부 고발자 등 취재원이 피해를 볼 경우 펀딩에 참여한 200명의 주주 변호사들이 법률 지원을 하며 평생 생계를 보장하는 '화끈한 시스템'을 구축했기에 맘 놓고 고발이나 폭로가 가능했다. 부패와 전횡, 나쁜 유착과 고약한 갑질의 고리를 일소하고 청렴한 사회를 지향하는 저널리즘 분야의 새로운 기회이자 바람으로 여겨졌다.

<메가 미디어>가 다양한 주제의 탐사 보도로 사회를 혁신하며 맹위를 떨칠 때쯤인 2018년 5월 이 4인방은 다시 모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부동산 문제에 관해서는 제대로 맥을 짚어보자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체계적인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언론이 '망국병'으로 떠들어 대지만 전혀 대책다운 대책이 없는 부동산 가격이나 정책의 문제점을 제대로 제시하여 정책 변화를 이끌 매우 중요한 핵심 자료들을 6개월간 수집하기로 하였다. 그 뒤 11월에 만나 최종 점검을 하고 새해 첫날 거사를 하기로 하였다.  

명우는 국토부 캐비닛에 들어 있는 역대 부동산 및 도시계획 정책 결정 자료와 건설업체 및 건설사 협의체의 로비 자료를 모두 모았으며, 창욱은 창대건설 비밀 창고에 있는 서류 뭉치를 뒤져 건설사와 관료의 유착, 금품제공과 매수 문건, 건설사들의 담합, 인허가 심사 자료 유출 증거와 관련 특혜 자료 등을 확보하기로 하였다. 종현은 그간 알고 지내던 부동산 중개인들과 주변인, 지역별 중개업 협회 등을 통해 꾸준히 증거 자료를 모아 주택 가격을 왜곡시키는 세력들을 일별하여 정리하였다. 모두 물적 증거로 쓰이도록 가급적 사진, 동영상, 문서 행태로 확보하였다. 현석은 이런 자료를 한다고 의원에게 모아 보고하고, 절친한 <메가 미디어> 국회 출입 기자와 연락을 취해 기자회견을 준비하였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업계 1위 대창건설의 자료를 제대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철통같은 보안이 작동하는 캐비넷에 들어 있어 평소에는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창욱도 이런 자료는 통신사가 보안 시스템을 점검하면서 스위치를 내릴 때와 사장이 지시해 전략수립을 위한 문서 분석을 할 경우에만 볼 수 있었다. 창욱은 때를 기다렸지만 쉽게 기회가 오지 앟았다. 새해를 20일 남겨놓은 날. 창욱이 당직 근무를 을 하였다. 때마침 대창건설 주변에 있던 이 통신사의 기지국 통신구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인터넷과 인터넷으로 연결된 회사 금고와 캐비넷 보안망이 먹통이 되었다. CCTV도 작동하지 않고 휴대전화, TV도 온갖 불통이었다. 창욱은 이때를 이용해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작전 요원처럼 목표로 했던 중요한 문서들을 확보하였다. 얼마나 떨리고 긴장되었던지 가슴까지 땀으로 흥건하였다.

새해 첫날인 2019년 1월 1일 오후 2시. 국회 로텐더 홀. 한다면 하는 한다고 의원은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이들 4인방이 준비해온 기밀 자료를 분석해 상세히 폭로하였다. 동아리 맥 출신의 4인방도 기자 회견장에 동석했다. 창대건설과 담당 부처 관료들과의 유착, 건설사들 간의 담합, 교통 인프라의 추가 확대를 논의한 흑막이 속속들이 파헤쳐졌다. 강남 부동산 가격을 연쇄적으로 올린 세력들의 실체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특히 <메가 미디어>는 부동산 문제의 핵심에 있는 관련자들의 실명과 사진을 모두 공개하였다. 메가 미디어 출범 이후 가장 큰 이슈이자 이벤트였기 때문에 시청점유율이 다채널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40.5%를 찍었다.  

기자회견장에는 거의 모든 매체의 기자들이 취재와 질의에 참여하였다. 번쩍이는 플레쉬 세례에 회견 단상의 참석자들은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그러나 대다수 매체들은 자사의 최대 광고주인 대창건설 등을 의식한 간부들의 제지나 게이트 키핑의 고의 누락으로 보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 생중계나 관련 내용을 보도한 방송사는 4~5개에 그쳤으며, 신문사도 다음날 3곳만이 보도하였다.  

그러나 <메가 미디어>는 가장 상세히 보도하였다. <메가 미디어>의 상보 여파로 인터넷을 타고 관련 내용이 전국, 각국으로 전파되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유투버들은 자기의 의견까지 덧붙여 일사천리로 퍼뜨렸다. <메가 미디어>는 이들의 폭로 자료를 기반으로 추가 취재에 나서 연루된 역대 관료들과 정치권 인사들을 모두 파악하여 다음날 속보로 보도하였다. 지자체와 건설사들의 비리도 폭로되었다. 발군의 탐사 기자들이 발로 뛰어 일주일 후 추가적으로 강남권 일대와 강북 중심지역 일대의 투기 조장 세력을 모두 찾아내 보도하였다. 강남의 핵심 아파트 3곳의 부녀회에서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리기 위해 만든 문건이 폭로되기도 하였다. 스타 강사와 컨설팅사, 대부업체가 연결된 부동산 투기의 고리도 밝혀졌다.  

한다고 의원의 폭로기자 회견 다음날. 창대건설 회장이자 창대그룹 회장 이박구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창욱은 회사의 영업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창대건설에서 해고되고 말았다.  

명우는 공문서 유출 혐의로 직위 해제되면서 공무원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종현은 자신이 운용하던 부동산 사무실 유리창이 박살나고 자녀들을 살해하겠다는 협박 전화에 시달렸다. 그래서 당분간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현석은 "한 의원이 너무 큰 사고를 쳤다"면서 국토부와 건설사들의 역로비 전화를 하기 위해 "한다고 의원을 바꿔 달라"는 여당 동료 의원들의 전화를 받느라 진땀을 흘렸다. 이어 퇴근길에 괴한이 모는 오토바이가 들이닥쳐 중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하는 고초를 겪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사고였다.   

입원한 현석이 몸을 추스를 정도가 된 날 <메가 미디어>는 '맥' 출신의 4인방을 병원과 스튜디오로 이원 연결하는 방식으로 특별 회견을 생중계하였다. 추가 자료 공개 등이 이어졌다. 해고, 징계 사실, 그들의 소감도 상세히 알려졌다.  

이를 본 시청자와 네티즌들은 청와대에 이들의 해고 철회, 징계 철회를 청원하였다. 하루 만에 서명자가 50만 명을 돌파하고 이어 다음날 반나절이 지나 80만 명을 돌파하였지만 청와대는 그때까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100만 명이 서명을 한 다음날인 토요일 저녁 7시. 같은 날 같은 시간대 서울 세종로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들의 신변 보호와 신분 원상 복구, 부동산 정책 전환을 촉구하는 촛불시위가 동시에 열리자 대통령은 '중대 결단'을 하였다. 특별회견을 통해 부동산 문제를 완전히 뿌리 뽑겠다고 선언하였다. 부동산 문제의 '맥'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대통령의 선언이후 단호한 후속 조치가 이어졌다. 회견 다음날 대통령 경제수석과 경제비서관, 경제 부총리와 1, 2차관, 국토부 장·차관이 전격 교체되고 부동산 문제를 전담할 특별위원회가 청와대에 설치되었다. 청와대는 "청와대를 비롯한 모든 정부기관을 세종시로 이전하고 정책적으로 서울의 모든 대학을 한반도 남쪽 X축의 중심인 대전으로 이전해 별도의 '대학 도시'를 만들도록 조치하며, 자산 기준 10대 기업은 지방 도시를 하나씩 자율적으로 선택하여 본사를 이전토록 하며, 대전시-세종시-청주시를 일자형으로 연결하는 전철을 가설하며, 서울의 대학들이 있던 자리는 서울 시민을 위한 녹지형 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국토부도 큰 폭의 정책 전환을 하였다. 국토부는 "앞으로 교통 인프라는 경제성보다 복지의 확대와 균형 발전에 중점을 낙후 지역과 소외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확대하고 복비(거래 수수료)를 대폭 낮추고 중개업소 업무의 건전성을 대폭 강화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아울러 "강남과 도심에 집중된 인구와 교육 인프라 등의 분산을 위해 서울의 지하철 2호선 외곽을 큰 동심원으로 하는 제2의 2호선을 건설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어 교육부는 "국토부와 연계하여 새로운 2호선 라인 역들에 걸치도록 도심의 초·중·고 고교를 이전토록 하여 서울의 모든 학교는 단일 학군제로 어느 지역에서나 1시간 내에 등교가 가능토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지하철 망을 균등하게 분산시키고 외곽지역의 배차와 급행열차를 확대되어 서울의 동서 남북간 통학에 전혀 문제가 없어지게 하겠다. 이것이 완료되는 3년 뒤부터 앞서 말한대로 서울을 단일 학군으로 설정해 추첨을 통해 중·고교 배치를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어 국회에서는 면책되는 내부 고발자의 고발 행위를 폭넓게 용인하는 방향으로 관련 대한 법률을 개정하여 소급 적용함으로써 4인방의 해고나 징계가 철회되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천만 다행이었다.  

그 후 3년이 지났다.  

강남에서 매매가 20억 원이던 아파트는 6억~7억 원으로, 10억 원이던 아파트는 3억~4억 원으로 떨어졌다. 정부는 헌법을 개정해 ‘토지 공개념’ 조항을 강화하고 하위 법률을 통해 기업이나 개인은 일정 규모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른바 ‘토지소유 상한제’였다. 대통령은 주거 복지의 보장을 핵심 국정 과제로 새로 꼽아 모든 아파트 건설과 분양은 공영제로 하여 누구나 한 채의 집을 소유하거나 장기임대 방식으로 거주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3채 이상의 법률상 주택은 아예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여 ‘주택 소유상한제’도 관철하였다. 토지와 주택의 소유는 허용하되 그 상한을 두어 헌법 119조에 명시된 대로 시장 경제의 왜곡에 대응하는 정부의 조정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한 것이다. 

민간 건설사들은 건설업을 통해 더 이상 이윤 확대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대폭 규모를 축소하였으며, 이로써 대기업의 경우 건설은 주력사업 분야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건설은 중소 규모 회사들이 영위하는 사업 분야로 정착되었다. 부동산 투기도 사라졌다. 건설사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집값이 대폭 하향 안정되면서 부동산 투기에 관심을 두던 청년들도 에너지, 바이오, 소셜미디어, 로봇, 인공지능, 드론, 우주 개발, 수소차, 전기차, 유전공학, 첨단 섬유, 문화 콘텐츠 창작, 임산자원, 원료 농업, 혁신 농업과 혁신 수산업, 신기술 육종 등 신기술 분야의 창업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동산 중개업소도 그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다. 포탈들도 부동산 중개 사업에서 손을 뗐다. 값이 저렴한 다양한 주택이 공급되어 경제적 부담이 줄어들고 자녀들을 사람답게 키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결혼율도 높아지고 3~4명의 아이를 낳는 가정도 대폭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심 백화점에서 대낮에 점심과 커피 타임을 즐기는 ‘3명의 아이를 지닌 직업 없는 주부’가 더 이상 부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일도 사라졌다. 오피스텔도 가격이 낮아지고 전세금이나 월세도 낮아지면서 20대, 30대를 주축으로 하는 사무실형 창업자들도 대폭 늘어났다. 깨알 같은 중소기업도 다양한 업종에서 많이 생겨났다. 대기업들도 여론에 따라 투명 경영과 사회적 책임 경영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존경받는 기업의 평판을 얻게 되었다. 경제는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성장률도 3%대를 거쳐 4%대까지 회복되었다.

대통령은 과감한 부동산 정책 전환으로 인해 부동산 값이 안정되고 출산율 증가 , 창업자 증가, 취업률 증가, 소득 증대, 성장률 제고 등의 선순환 효과가 뚜렷이 나타나면서 지지율이 대폭 회복되었다. 그래서 이어진 대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같은 당 후보에게 안정되게 정권을 물려줄 수 있었다. 부동산 문제를 건드리면 부동산 기득권 세력 등의 방해로 집권에 실패한다는 통설을 깨고 과감한 정책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것이다.

현석은 폭로 회견의 기획자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일약 명사로 떠올랐다. 그래서 직후부터 언론 인터뷰가 쇄도하였다. 폭로 회견 준비 전후 사정을 담은 책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이어 새로운 정부 출범 후 다가온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현석은 등원 후 상임위원회 가운데 국토위원회로 배정받아 그곳에서 일하다가 청와대의 2기 대통령 참모진 개편 때 국토·자원·에너지 담당 수석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복직한 창욱은 10년 뒤 사장급인 창대그룹 건설사업 본부장이 되었다. 회사가 축소되어 지주회사의 사업본부로 격하되었지만, 사장의 지위로서 활기차게 신사업을 추진하였다. 창욱은 창대건설 시절의 사업 방향을 대폭 전환하여 친환경 바이오 주택 연구와 수목장 사업 연구, 동남아 지역 폭염 방지 주택 개발과 건설에 주력하여 환경과 바이오에 집중한 미래형 건설 사업으로 독보적인 사업 능력을 인정받아 다음해 10개 신문사와 경영인총연합회가 공동 선정한 ‘경영자 대상’을 받았다.  

명우는 국토부 도시계획국장, 주택정책국장을 차례로 지낸 뒤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국토부 제2차관으로 발탁되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된 이후에는 남북 협력 행정시대에 접어들면서 명우는 북한 지역 거점 도시를 체계적으로 개발하는 행정 책임자를 맡아 파견 근무하였다. 유능한 건설 행정가를 파견해 달라는 북측 김정은 위원장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종현은 공정거래위원회에 부동산 투명 거래 담당 ‘부위원장’ 자리가 신설되면서 발탁되어 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의로운 폭로를 결심한 그의 용단과 부동산 거래의 특수한 노하우와 전문성을 인정받아 잠시 공무원이 된 것이다. 종현은 3년의 임기를 마치고 부동산의 투명한 거래를 연구하는 ‘맥 부동산 정책 연구소’를 설립해 운용하였다. 이 연구소는 3년 뒤 우리나라 도시계획·건설·주택 정책 분야 연구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싱크탱크로 부상하였다. 

<메가 미디어>는 한국 사회를 건전하게 이끄는 언론 본연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기존 신문사와 방송사를 제치고 '영향력 1위', '인지도 1위',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언론으로 급부상하였다. 저널리즘 분야의 새로운 전략과 용기 있는 실천으로 한국 언론계의 지형을 바꾼 것이다. 이에 미국 CNN은 "한국 사회를 보려면 <매가 미디어>를 보면 된다. <매가 미디어>는 한국을 탐구하는 '한국 사회학' 그 자체"라고 소개함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