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미국은 왜 전쟁을 하는가?

일취월장7 2019. 1. 2. 17:08

미국은 왜 전쟁을 하는가?

[전쟁국가 미국·1강-①] 미국의 군사주의와 동아시아
2018.12.15 14:11:50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지난 12월 5일부터 오는 3월 13일까지 총 8회에 걸쳐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의 '전쟁국가 미국'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이 강연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해온 군사주의 노선이 현재 세계의 혼란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후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봅니다. 

<프레시안>은 격주로 진행되는 강연을 정리해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아래는 지난 12월 5일 진행된 1회 강연을 보강한 내용입니다. 1회 강연은 아래 내용을 포함해 총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강연 소개 바로 가기)

세계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 미국이 쇠퇴하고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 물론 패권이 교체된 것은 아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이며 경제 대국이다. 중국이 군사력을 강화한다고 하지만 기껏해야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등 자국 주변에 대한 미국의 군사 패권을 견제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은 전 세계 어느 곳이든지 30분 내에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경제 규모 역시 아직은 미국이 중국을 앞서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쇠퇴는 분명하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미국 군사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에너지 자원의 보고 대중동지역을 미국의 통제권 아래 두겠다는 네오콘의 야망은 백일몽임이 판명됐다. 2001년 아프간 침공 이래 18년째 '긴 전쟁(Long War)'을 벌이면서 이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6천5백만 명의 전쟁 난민이(2차 대전 이후 최대) 유럽으로 몰려들면서 유럽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유럽 정치의 극우화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오늘의 미국을 '혼돈의 제국'이라 부르는 이유다.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는 미국 경제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2016년 정치 아웃사이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2차 대전 후 미국 지배 엘리트가 추구해온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더 이상 미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음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식 체제와 가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2011년 10월 25일 자 <뉴욕타임스>는 "미 국민의 89%는 정부가 올바른 일을 할 것이라고 믿지 않고, 74%는 미국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84%는 의회가 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다"고 보도했다. 이 무렵 아랍의 민주화를 외치며 궐기했던(아랍의 봄) 중동지역의 청년들은 더 이상 미국식 체제를 자신들의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밝혔다.

2차 대전 이후 경제, 군사, 정치에서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세계를 이끌었던 미국의 패권(Hegemony)은 몰락했다. 헤게모니란 피지배자들의 자발적 동의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2003년 이후 미국의 세계 지배는 '동의 없는 지배' 즉 '일방적 강제'일 뿐이다. 따라서 미국의 세계 지배는 지속 가능성이 없거나 대단히 희박하다. 

반면 중국은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나아가 구매력 기준 GDP로는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차머스 존슨은 2000년 발간한 저서 <역풍(Blowback)>을 통해 20세기 후반 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동아시아의 경제적 부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은 이러한 변화의 거의 마지막 과정으로 향후 동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이제 거의 기정사실이 됐다. 2차 대전 후 일본에서 시작된 경제 기적은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거쳐 동남아 국가들, 그리고 중국과 베트남으로 확대됐다. 마지막 남은 곳이 북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수교, 한반도 평화체제가 완성된다면 북한도 그 기적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미래의 세계 경제는, 나아가 세계의 미래는 동아시아가 이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천하의 대세다.

문제는 동아시아가 경제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인 반면 정치‧안보 측면에서는 가장 불안정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그 원인은 일차적으로 북핵 위협, 보다 근원적으로는 중국과 미국(그리고 일본)의 대립에 있다.  

한편 16세기 이후 서구의 경제적 흥기가 군사력의 우위에 바탕을 둔 데 반해 동아시아의 경제적 부상은 군사력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았다. 군사력 측면에서는 여전히 미국이 압도적 우위를 누리고 있다. 전쟁 없는 세계의 공동 번영은 가능할 것인가? 향후 세계의 미래를 판가름할 중대한 문제이다. '전쟁국가 미국'을 탐구해야 하는 이유이다.

지금 우리는 19세기 중반, 서구 세력이 동아시아를 침탈한 이래 세 번째 중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첫 번째 전환기는 1876년 개항, 두 번째 전환기는 1945년 해방이다. 첫 전환기는 일제 식민지로 귀결됐고, 두 번째 전환기는 분단과 전쟁을 초래했다. 국제 정세의 변화에 주체적 대응을 못한 탓이다. 정세 변화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세 변화에 무지했고 과거에 안주한 탓이다.  

1989년 탈냉전 이후의 세 번째 전환기에도 주체적, 창조적 대응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외세에 휘둘리며 집안싸움이나 벌이는 못난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전쟁국가 미국'의 실상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는 이유이다. 

▲ 한국전쟁 당시 38선 경계표시판 ⓒ프레시안 자료사진


서구의 세계 지배와 군사력 

현재 미국은 전 세계를 자신의 작전 구역으로 삼고 있다. 북부사령부(북미), 남부사령부(중남미), 인도태평양사령부(동아시아), 유럽사령부(유럽), 중부사령부(중동 및 중앙아시아), 아프리카사령부(아프리카)가 그것이다. 이들 6대 지역 사령부 외에 핵무기를 관장하는 전략사령부, 우주를 관할하는 우주사령부, 사이버공간에서 작전하는 사이버사령부까지 있다. 그야말로 인류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이 미군의 작전 구역이다.  

미국의 군사비는 대략 한해 7000억 달러 정도다. 여기에 핵무기 통계는 잡히지 않는다. 핵무기는 국방부 관할이 아니라 에너지부 관할이기 때문이다. 미 군사비 전체 규모는 대략 1조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다른 모든 나라들의 국방비를 모두 합쳐도 미국 국방비에 미치지 못한다. 인류 역사상 이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던 나라는 없었다. 왜 그럴까? 미국의 보수파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다음 발언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서유럽이 세계를 장악한 것은 이념이나 가치관 또는 종교의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무력을 조직적으로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은 종종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만 비서구인들은 절대 잊지 않는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를 간명하게 요약했다. 서구의 세계 지배는 군사력의 우위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다. 군사력에 의한 세계 지배로 서구는 자유와 번영을 누렸고 비서구는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우리는 흔히 서구를 자유, 민주, 인권 등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선진 사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구가 번영한 바탕에는 비서구에 대한 잔혹한 지배와 통제가 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남미를 차지했고, 영국은 인도와 말레이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집어삼켰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만 수 천 만 명의 원주민이 유럽인들에게 도살당했다. 제국주의 열강은 아프리카를 분할 지배했고, 중국을 반(半)식민지화 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과 대만, 만주를 먹었다.  

16~19세기 동안 1500만~3000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 등의 담배, 설탕, 목화 농장에서 죽도록 일을 했다.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약 2000만 명의 중국인을 아편 중독자로 만들었다. 중국이 아편 판매를 금지하자 전쟁으로 응수했다. 벨기에가 지배한 콩고의 고무농장에서는 최대 10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죽어나갔다.

이른바 서구 선진국들이 말하는 자유, 민주, 인권, 자유무역 등은 그들 사회 내부, 또는 서구 국가들 간에만 통용되는 가치였다. 영국이 식민지 인도의 자유, 민주, 인권을 보장했을까?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무역 관계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었나? 전혀 아니다. 자본주의 선진국에게 식민지란 원자재의 공급처, 그리고 자국 생산품이 소비처였을 뿐이다. 식민지가 원자재를 공급하고 종주국의 생산품을 소비했던 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었다. 무력에 의한 강제 때문이었다. 

미국엔 2개의 국방부가 있다  

'국방'이란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즉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의 주권,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미국에는 국방부가 두 개 있다. 기존 국방부 외에 국토안보부가 있다. 국토안보부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만들어졌다. 국토안보부야말로 '국방'이란 말의 본래 취지에 부합한다. 그러니까 미국은 2001년이 돼서야 자국 방어에 눈을 떴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기존의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는 뭘 하는 곳인가? 미국의 군사 역사학자 앤드류 바세비치는 기존 국방부는 '군사력투사부(Department of Military Projection)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지적한다. 즉 외국에 대해 미국의 군사력을 적용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미국의 의지를 강요하기 위해서다. 즉 미국 국방부는 2001년까지는 자국 방어가 아니라 외국을 지배, 통제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식민주의에 반대하며 자유롭고 정의로운 국제 질서를 추구한다고 천명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쟁 또는 비밀공작을 통해 미국에 저항하는 정권을 전복하고 미국 입맛에 맞는 정권을 세워 왔다. 이란, 과테말라, 칠레 등 50개국이 넘는다. 영토 정복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무력에 의해 자국의 의지를 관철시킨다는 점에서 미국의 행태는 19세기 서구 식민주의와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미국의 행태를 신식민주의라고 부른다. 또는 제국주의적 반식민주의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군사력을 대폭 강화한 나름의 명분이 있기는 하다. 소련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분일 뿐, 실상은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 복원을 위해서는 군사력 증강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핵위협, 재래식 전쟁, 그리고 비밀공작을 통해 자국의 의지를 관철시켜 왔다. 이를 군사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의 패배와 최근 대중동전쟁은 미국의 군사주의가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군사주의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전쟁, 또는 전쟁 준비가 미국 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요소로 굳건히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군산복합체가 그것이다. 냉전 이후 전쟁의 상업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민간 기업이 무기를 생산하는 차원을 넘어섰다. 전쟁 수행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2013년 미국 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은 CIA 직원이 아니었다. 부즈 알렌 해밀턴이라는 민간회사의 직원이었다. 미국 정보기관의 업무 중 약 70%를 민간기업이 담당하고 있다.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2004년 이라크의 팔루자 전투에서 블랙워터라는 용병 기업이 악명을 떨친 적이 있다. 이라크 전투 요원의 3분의 2 가량이 이 같은 용병 기업의 민간요원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미국에서 전쟁은 최고의 장사인 셈이다.

우리는 미국을 제대로 알고 있나 

미국을 안다는 건 세계를 아는 것이다. 지난 70여 년간 미국이 세계를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세계를 알아야 한국을 알 수 있다. 세계 속 한국의 위상을 알아야 세계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 20세기 초 한국이 식민지가 된 것도, 해방이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것도 세계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의 좋은 면만 보려 한다. 어두운 면에는 눈을 감거나 아예 모른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미국은 천사, 북한은 악마다. 왜 유독 한국은 미국을 비판적으로 인식하지 않는가? 심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한국은 미국이 만든 나라이기 때문이다. 일제로부터 해방시켜 준 나라도, 북한의 침공으로부터 지켜준 나라도, 1950년대까지 먹여 살린 나라도 미국이다.  

가장 중요한 건 한국이 학문적, 사상적으로 미국에 예속됐다는 점이다. 사회학자 김종영(경희대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인구 당 미국 유학생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2012-13년 미국의 해외 유학생은 중국이 23만 5597명으로 1위, 인도가 9만 6574명으로 2위, 한국이 7만 627명으로 3위다. 인구 대비 유학생 수는 한국이 중국의 7.8배, 인도의 17.5배에 이른다. (<지배 받는 지배자>, 돌베개, 2015년)  

정확한 출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국 공무원 박사 학위자의 97%가 미국 학위자라는 통계도 있다. 같은 친미 국가인 일본만 해도 한국만큼 미국으로 유학을 가지 않는다. 김종영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미국 유학생은 1만 9568명으로 7위다.

미국은 자국이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일한다고 자처한다. 베트남과 전쟁을 벌일 때도,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도 '우리 의도는 좋았어(We meant well)'라고 말한다. 결과가 나빠서 그렇지, 원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전수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미국 유학을 통해 이 같은 사상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한국에서 미국 비판은 거의 불가능하다. 비판을 해도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남재희 전 장관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 한국은 '미국이라는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노는 손오공'인 셈이다.  

▲ 지난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훈련중인 미군의 모습. ⓒ연합뉴스


한국이 세계에서 대만과 함께 유이(唯二)하게 서구가 아닌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역사적 경험도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로막는다. 중남미는 물론이고 인도,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지역들은 모두 서구의 식민지 경험을 했다. 따라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한 뼈아픈 경험을 온몸으로 느낀다. 반면 한국은 미국에 의해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다. 미국이 고마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언론의 역할도 한몫했다. 제도 언론은 기본적으로 정치 권력, 자본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현상 유지에 봉사한다. 기득권에 포획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 단위로 현실을 전하는 언론이, 몇 십 년만에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를 제대로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한미동맹은 굳건해야 하고, 주한미군 철수는 절대 안 된다는 얘기만 줄곧 해댄다. 이러한 제도언론의 집중 포화가 국민으로 하여금 거대한 변화의 실상에 눈 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과 삼성의 결탁 문제로 한참 시끄러울 때, 한 언론사 간부가 삼성 미래전략실 부사장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가 화제였다. '저희는 삼성의 눈으로 사회를 봅니다'라고 했다. 삼성 돈을 받다 보면 삼성의 눈으로 사회를 볼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은 아닐까? 

미국과 함께 살아가려면  

미국을 제대로 알자는 것은 미국을 무작정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미국을 타도하자는 것도 아니다. 미국과 전쟁을 벌였던 중국과 베트남이 미국을 타도하려 했던가. 아니다.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에 참여해서 자신의 정당한 생존권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중국은 1972년, 베트남은 1995년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했고, 이후 미국이 만든 세계 질서 속에서 경제 발전에 매진하고 있다. 올해 들어 북한이 미국과 벌이고 있는 비핵화 협상도 바로 중국, 베트남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미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미국과 함께 살아야 한다. 미국의 정당한 국익은 존중하되 부당한 요구는 거부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예컨대 사드 배치 등으로 중국과 군사적으로 대립해야 할 이유는 없다.  

역사의 긴 안목으로 보면 어떤 강대국도 영원할 수 없다. 19세기를 호령했던 대영제국도 100년 만에 쇠퇴했고 일본제국은 50년 만에 몰락했다. 미국도 쇠퇴의 길에 들어선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 막강한 군사력이 초래할 전쟁의 위협이 특히 우려스럽다. 미국의 군사주의가 초래할 혼란과 전쟁의 위협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전쟁국가 미국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다.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선도할 청사진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한국전쟁은 미국의 전쟁국가화, 그리고 동아시아 대립의 결정적 계기였다. 따라서 남북의 화해는 한반도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중대한 사업이다. 요컨대 세계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데 한반도가 관건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연재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어진다. 첫 회는 미국 건국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 미국은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했고, 멕시코전쟁으로 영토 확장을 마무리했으며, 스페인전쟁으로 아메리카를 넘어 세계로의 진출을 시작했다. 동아시아는 미국의 새로운 서부였다. 그리고 1차 대전을 통해 세계의 최대 채권국으로 등극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자신의 제국적 팽창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먼로 독트린, 명백한 운명, 문호 개방, 민족 자결 등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2차 대전. 2차 대전으로 미국은 세계의 패권국가에 등극한다. 미국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을 두고 '좋은 전쟁', '굿 워(Good War)'라고 한다. 독일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라는 완벽한 적을 무찔러 세계의 해방자가 되는 한편 전쟁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엔(UN)과 국제통화기금(IMF) 설립 등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구축한다.

세 번째는 한국전쟁. 한국전쟁으로 미국은 '영구 전쟁 국가'가 된다.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복원하기 위한 군사주의 프로젝트 NSC-68의 실행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우리 생각보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쟁이다. 베트남전쟁보다 훨씬 중요한 전쟁이었다. 베트남전쟁보다 미국 역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한국전쟁이다.  

네 번째는 1953년 이후 미국이 제3세계에 대해 벌인 반혁명 전쟁을 다룬다. 이란 비밀공작과 베트남전쟁, 쿠바 피그스만 침공이 그것이다. 1953~65년 미국의 군사력은 절대적 우위를 누린다. 군사력 2위인 소련에 비해 최대 40배에 달했다.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세계에 자국의 의지를 강요했다. 미국식 제도와 가치를 제3세계에 이식시키려 했다. 이게 군사주의다. 외교나 협상 대신 군사력을 앞세운다. 그러나 실패했다. 미국이 제대로 반성을 했더라면 군사주의를 포기할 소중한 기회였으나 미국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섯 번째, 1945~1975년 동아시아 30년 전쟁(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 막을 내리고 미국의 주요 전장은 중동지역으로 옮겨간다.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과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 계기였다. 아프가니스탄전쟁과 걸프전쟁이다. 특히 1979~1989년의 1차 아프간전쟁은 그 실상이 대중에게 가장 덜 알려진 전쟁이다. 미국의 전략이 미 지상군 병력을 동원한 재래식 전쟁에서 대리인을 앞세운 비밀전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프간전쟁은 겉으로는 소련의 침공에 대한 아프간의 저항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아랍의 무슬림 전사들을 동원해 소련을 무너뜨리려는 전쟁이었다. 30억 달러의 자금이 투입된 미 중앙정보국(CIA) 역사상 최대의 비밀공작이었다. 미국과 사우디가 자금을, 미국이 무기를 공급하고 파키스탄 정보국(ISI)이 무슬림 전사의 훈련과 작전을 담당했다.

당시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유도한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카터 대통령에게 "각하, 드디어 소련에게 그들의 베트남을 선사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미국이 베트남의 수렁에서 고전한 것처럼 소련을 아프간이란 수렁에 빠뜨렸다는 얘기다.

아프간전쟁은 소련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된다. 당시 소련은 도대체 적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 전쟁을 '유령의 전쟁(Ghost War)'라고 불렀다. 아프간전쟁은 오늘날 중동지역 혼란의 씨앗이 된다.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과격파 이슬람 무장세력이 이 전쟁을 통해 양성됐기 때문이다. 그 숫자는 대략 12만을 헤아린다.  

이들은 냉전이 종식된 후 총부리를 미국으로 돌린다. 알 카에다, IS가 그들이다. 당시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는 미국의 아프간 공작에 대해 "당신들은 프랑켄슈타인을 만들고 있다"고 일갈했다.  

1991년 걸프전쟁은 중동지역의 석유통제권을 위한 전쟁이었다. 또한 베트남전쟁 이후 지상군 동원을 꺼렸던 이른바 '베트남 증후군(Vietnam Syndrome)'을 극복한 전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축출하지 못했던 네오콘은 이후 줄곧 이라크의 정권 교체를 줄기차게 요구한다.  

여섯 번째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이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 대중동전쟁을 다룬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뿐만 아니라 이란 이슬람정권까지 전복시켜 북아프리카에서 아프간, 파키스탄에 이르는 대중동지역을 미국의 통제권 아래 두고자 했다. 세계 에너지 자원의 보고를 통제함으로써 서유럽, 일본은 물론 중국까지도 지배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2006년 가을이 되면 실패임이 분명해지고 네오콘은 퇴장한다.

미국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2차 대전에 뛰어들어 세계 패권을 장악했다. 반면 9.11테러를 빌미로 시작한 대중동전쟁은 미국의 쇠퇴를 재촉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미국의 쇠퇴에 대해 미국의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자신의 금을 탕진했고, 이라크 침공으로 세계의 신뢰를 상실했다"고 평가한다. 헤게모니를 잃어버린 것이다. 

일곱 번째는 2차 대전 후 미국의 군사패권과 경제패권의 흐름 및 상관관계를 살펴보고 마지막에는 북핵과 한반도,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2편에 계속됩니다) 


"미국은 태어날 때부터 제국이었다"
[전쟁국가 미국·1강-②] 독립전쟁에서 남북전쟁까지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지난 12월 5일부터 오는 3월 13일까지 총 8회에 걸쳐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의 '전쟁국가 미국'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이 강연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해온 군사주의 노선이 현재 세계의 혼란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후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봅니다. 

<프레시안>은 격주로 진행되는 강연을 정리해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아래는 지난 12월 5일 진행된 1회 강연을 보강한 내용입니다. 1회 강연은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 더 연재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전편 보러 가기 : 미국은 왜 전쟁을 하는가?) 


미국의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미국은 태어날 때부터 제국이었다'고 말한다. 즉 "초기 정착민이 영국을 떠나 버지니아에 도착하고 서쪽으로 이주하던 시절부터 미국은 정복을 추구하는 제국이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건국 이후 미국이 안고 있는 근원적 모순을 지적한다. 미국인의 자유를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노예 등 타자(他者)들을 정복해 온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이 살해됐다. 영국인이 처음 북미 대륙에 닿았을 지금의 미국 영토에는 약 1000만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1900년 그 숫자는 20만 명으로 줄어든다. 미국은 처음부터 전쟁과 살육으로 세워진 나라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하였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라는 부분에서 크게 고민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에는 당연히 흑인도 포함돼야 했지만 그랬다가는 미국 경제를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흑인 노예는 미국 경제를 떠받치는 버팀목이었다.

게다가 제퍼슨은 그 자신이 농장주로서 노예를 부렸으며 흑인 노예와의 사이에 사생아를 낳기까지 했다. 결국 흑인 노예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백인들의 재산으로 규정됐다. 미국 독립선언문이 말하는 '사람'이란 결국 백인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경제발전은 흑인 노예의 희생에 의한 것이었다. 1800년대 초 미국의 흑인은 전체 인구의 20% 정도였다. 남북전쟁이 일어난 1860년대 백인 인구는 2700만, 흑인 노예는 400만 명 가량(약 13%) 됐다. 자유 신분의 흑인은 48만 8000명에 불과했다.

노예제도는 1860년대 남북전쟁으로 폐지됐지만 흑인들의 실질적 참정권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60년대 민권운동에 의해 비로소 확보됐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2등 시민으로 취급받고 있다.  

미국의 자유, 미국의 노예제 

'미국의 자유, 미국의 노예제(American Freedom, American Slavery)'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미국의 자유와 노예제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뜻이다. 즉 흑인 노예의 희생이 있었기에 백인의 자유가 가능했다는 뜻이다. 같은 제목의 책도 있다. 이처럼 미국은 출발부터 모순적인 국가였다. 이 근원적 모순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지금 트럼프가 추구하고 있는 반(反)이민 등 백인우선주의 정책이 그 증거다.  

지배와 정복으로 출발한 미국은 '화(和)'를 모른다. 너와 내가 다르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평화롭게 살자는 생각이 없다. 미국은 '동(同)을' 추구하는 국가다. '내 식대로 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는 게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9.11 테러 직후 부시 대통령은 세계를 향해 "우리 편 아니면 적(You are with us or against us)"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야말로 미국인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1783년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1789년 연방정부를 출범시켰으며 이후 1850년까지 북미 대륙을 정복해 나간다. 이 시기를 영토 팽창의 시대라 할 수 있다.

1783년 독립 당시의 미국 영토는 북미 대륙 동쪽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애팔래치아산맥 동쪽에 13개 주가 있었고, 산맥 서쪽에서 미시시피 강까지는 오늘날 중서부(Midwest : 오하이오, 일리노이, 인디애나 등)라 부르는 곳으로 당시에는 아직 주권을 갖지 못한 영토(territory)였다. 대륙 서쪽의 절반 이상은 스페인 땅이었고, 북쪽(오늘날 캐나다)은 영국이 갖고 있었다. 또 남으로는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요컨대 독립 당시 미국은 유럽 강대국에 둘러싸이고, 북미 대륙 각지에서 원주민과 전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였다.

▲ 지도 1. 1783년 미국 독립 당시 북미 대륙 (출처 : 월터 라페버 <The American Age> p.29)


그런데 이런 나라가 불과 60년 만에 북미 대륙 대부분을 석권할 정도로 팽창한다. 여기에는 당시 유럽의 정세가 미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이후 1815년 나폴레옹전쟁이 끝날 때까지 4반세기 동안 유럽의 열강들이 혁명과 반혁명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인 것이다. 즉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대륙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1803년 제퍼슨 대통령은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여 단숨에 영토를 두 배로 늘린다(루이지애나 매입). 당시 유럽의 패권을 놓고 영국과의 일전을 앞둔 나폴레옹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루이지애나(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로키산맥 동쪽에 이르는 지역으로 오늘날의 루이지애나 주와는 다르다)를 팔아버린다. 기존 영토와 맞먹는 넓이의 이 지역에서 훗날 13개 주가 생겨난다.  

한편 1836년에는 미국 남서쪽 국경 넘어 멕시코 땅에 정착한 미국계 이민들이 텍사스 공화국(Lone-star state)을 설립하고 독립을 선포한다. 미국계 이민들은 타국의 땅에 나라를 세운 것뿐만 아니라 멕시코가 금지한 노예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 연방정부는 텍사스의 미국 합병을 꺼리고 있었다. 북부의 여러 주들이 노예제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45년 제임스 포크 대통령이 텍사스를 미 연방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 미국과 멕시코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멕시코전쟁 1846~1848년) 

1848년 미국은 멕시코로부터 태평양과 맞닿은 서부지역까지 빼앗는다.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등 미국 서부의 도시 이름이 스페인어원인 것이 이곳이 원래 멕시코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국은 전쟁과 정복을 통해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관통하는 영토 대국으로 성장한다.  

당시 미국의 목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캐나다와(캐나다는 18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멕시코까지 차지하려 했다. 캐나다를 정복하려던 전쟁이 1812년의 미영 전쟁(1812년 전쟁)이다. 이른바 '사촌간의 전쟁(Cousin's War)'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미국사에서 아주 유명하다. 영국군이 미국 본토에 상륙해 백악관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2001년 9.11 테러 전까지 미국 본토가 침공 당한 유일한 사건이다. 결국 계획했던 캐나다 정복은 실패한다.

미국은 원래 쿠바도 정복하려 했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 당시 제퍼슨 대통령은 "다음 목표는 쿠바"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그런 미국이 1850년 이후 영토적 팽창을 사실상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인종주의와 노예제가 그것이다. 우선 미국이 쿠바와 멕시코로 영토 팽창을 계속할 경우 비백인 인구가 늘어날 것을 우려했다. 비백인 인구가 백인 우위를 위협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남쪽으로의 영토 팽창이 노예제를 확대해 남부 주들의 위상을 강화하는 것도 달갑지 않은 사태였다. 연방정부를 장악한 북부 세력은 자유민들의 임금노동을 바탕으로 상공업 발전을 꾀하고 있었다. 

이제 미국의 목표는 영토 팽창에서 상공업 발전과 미국 경제의 해외 진출로 바뀐다. 1850년대까지 미국은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다. 하지만 이제 제조업과 상업의 발전을 통해 해외로의 팽창에 나선 것이다.  


▲ 지도 2. 1850년까지 미국의 영토 팽창 (출처 : 월터 라페버 <The American Age> p.132)


'먼로 선언'과 '명백한 운명' 

그에 앞서 19세기 전반 미국의 영토적 팽창 과정에서 제기된 두 가지 핵심 이데올로기를 살펴본다. 하나는 먼로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 하는 존재인 것처럼, 모든 국가는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념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국익을 위한 행동을 그럴 듯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그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요체는 '자신에게 좋은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것이다. 대외정책의 경우 '미국에 좋은 것이 세계에도 좋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한다.

19세기 전반 미국의 영토적 팽창 시기에는 먼로 선언과 명백한 운명이, 19세기 말 미국의 해외 진출 때에는 문호 개방(Open Door)과 민족 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선 먼로 선언과 명백한 운명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먼로 선언은 1823년 12월 제5대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발표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유럽의 그 어떤 국가도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미국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에 대해 일절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유럽 열강 역시 아메리카 대륙의 내정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흔히 먼로 선언을 고립주의 선언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미국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정확하게 이 선언은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의 독점적 세력권'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먼로 선언이 발표된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 1823년은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등 남미의 주요 국가들이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직후이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식민종주국 스페인 등이 몰락하면서 남미 여러 나라가 독립했다.

그러나 전쟁이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나고 유럽의 구질서가 회복되면서 유럽 열강들은 과거의 식민지를 되찾으려 했다. 바로 이때 미국은 바로 먼로 선언을 통해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 개입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또는 '명백한 사명'은 1845년 존 오설리번이라는 언론인이 만든 말이다. 간단히 말해 미국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으로 세계로 계속 뻗어 나가면서 자유를 전파할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났다는 얘기다. 미국은 워낙 특별한 나라라서, 미국이 세계로 진출할수록 자유의 영역은 넓어진다는 자기 합리화다. 따라서 텍사스, 캘리포니아, 오리건 등 대륙 서부로 진출할 자격과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먼로 선언과 '명백한 운명'이 합쳐져 먼로 독트린이 완성된다. 1945년 12월 2일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먼로 독트린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면서 미국은 더 활발하게 서부로의 팽창을 계속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가 바로 멕시코전쟁이다. 먼로 독트린의 입장에서 본다면 멕시코전쟁은 타국의 영토 탈취가 아니라 자유의 영역의 확대가 되는 셈이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미국 경제의 해외 팽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은 이 경쟁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미국이 가장 눈독 들인 시장은 중국이었다.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이었기 때문이다.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른바 '흑선'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것은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미국에 큰 일이 일어난다.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2차 대전을 포함해 건국 이래 미국이 치른 수많은 전쟁 중 미군 전사자가 가장 많았던 전쟁이 남북전쟁이다. 4년간의 동족상잔에서 60만 명이 죽었다. 당장 내전이 발발했으니, 중국이고 일본이고 외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미국의 해외 진출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일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비록 강제로 개항을(1854년) 당하기는 했지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과학계의 천황이라고 불렸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가토 슈이치라는 비판적 지식인과 나눈 대담에서 '일본이 서구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개항 직후 서구 열강이 남북전쟁 등 전쟁에 휩쓸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853~56년에는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가 크림전쟁, 1861~65년에는 미국의 남북전쟁, 1870년에는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보불전쟁을 벌였다. 이런 전쟁들이 없었더라면 일본도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역사의 우연 덕분에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남북전쟁은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남부 주들이 미 연방에서 탈퇴해 별도의 국가를 세우려던 것을 연방정부의 무력으로 저지시킨 전쟁이다. 이 전쟁은 미국에 커다란 상처를 안겼지만, 미국이 통합 국가로 성장하는 데 아주 중요했던, 거쳐야만 했던 과정이었다.

미국을 영어로 하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United States of America)', 여기서 스테이츠(States)는 곧 '국가들'을 말한다. 미국의 주(州) 하나 하나가 곧 국가인 셈이다. 그래서 남북전쟁 이전 미국을 영어로 설명할 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 아(are)'라고 복수형 동사를 사용했다. '아(are)'가 '이즈(is)'라는 단수형 동사로 바뀐 때가 남북전쟁 이후다. 드디어 미국이 명실상부한 하나의 국가가 된 것이다. (3편에 계속됩니다.)



미국, '제2의 서부' 동아시아로 진격하다

[전쟁국가 미국·1강-③] 스페인전쟁과 '문호 개방' 정책
2018.12.19 07:36:25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지난 12월 5일부터 오는 3월 13일까지 총 8회에 걸쳐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의 '전쟁국가 미국'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이 강연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해온 군사주의 노선이 현재 세계의 혼란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후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봅니다. 

<프레시안>은 격주로 진행되는 강연을 정리해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드립니다. 아래 글은 지난 12월 5일에 진행됐던 1강 강연을 정리한 세 번째 강의록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전편 보러 가기 : 1. 미국은 왜 전쟁을 하는가? 2. "미국은 태어날 때부터 제국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룩한다. 2차 산업혁명의 주역이 된 것이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는 생산 과잉에 의한 공황을 낳았다. 이로 인해 파업을 비롯한 노동자,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이 벌어졌고 미국은 심각한 사회적 혼란에 직면했다.

미국의 선택은 해외 시장 확대였다. 1898년 스페인전쟁을 통해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를 합병하고 쿠바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같은 해 하와이도 합병했다. 이후 미국은 카리브해 지역을 자신의 경제 영역으로 통합하는 한편 하와이, 필리핀을 발판으로 중국 시장 진출을 모색한다.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미국이 내세운 명분이 바로 '문호 개방(Open Door)' 정책이다. 이후 '문호 개방'은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원칙이 된다. 

미국의 비약적 산업화  

남북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864년 5월 6일, 윌리엄 헨리 세워드(William Henry Seward) 국무장관은 마드리드 공사에게 미국은 "이미 충분한 영토를 갖고 있다"면서 더 이상의 "정복"을 원치 않는다고 선언했다. 300년 간의 영토 팽창이 종말을 맞고 미국 역사는 기술적, 상업적 팽창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룩한다. (1870년 통일을 완수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 독일과 함께 2차 산업혁명의 선두 주자로 나선다. 1차 산업혁명은 영국이 주도했다. 주로 개인 사업자들이 석탄과 증기기관을 이용해 최초의 산업화를 이룩했다. 1870년대 이후로는 미국과 독일 주도로 석유와 전기, 철도와 내연기관, 그리고 화학공업 등에 의한 2차 산업혁명이 진행된다.  

1869년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된다. 1880년대부터는 법인기업이 나타나 경제 운용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존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이 대표적이다. 1870년대 에디슨의 개인연구소였던 곳이 1901년에는 제네럴 일렉트릭(GE)이라는 거대 회사로 변모한다. 록펠러를 비롯해 앤드류 카네기(철강), J. P. 모건(금융, 철강, 전기) 등 미국 자본주의의 거인들이 모두 이때 등장한다(자동차의 헨리 포드는 20세기 초).  

남북전쟁 직전만 하더라도 미국에는 제철공장이 없었다. 석유는 이제 막(1859년) 발견된 상태였다. 당시까지 미국은 농산품을 주로 수출하던 농업국가였다. 그러나 40년 뒤가 되면 미국은 철강과 석유산업에서 세계 최고가 된다. 1902년 미국의 철강 생산량은 영국과 독일을 합친 것보다 많아진다.  

건국 이후 무역 적자국이었던 미국은 이 산업혁명에 힘입어 1874년부터 무역 흑자국으로 전환하고, 이 기조는 1971년까지 100년 간(1875, 1888, 1893년은 적자) 이어진다. 세계 교역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868년 6%에서 1913년 11%로 거의 2배가 된다. 증가분은 거의 모두 공산품이었다. 영국을 제치고 세계의 공장으로 등극한 것이다. 1870년에서 1910년 사이 미국 인구는 2배로 늘어난다.  

제국의 시대 

그러나 2차 산업혁명에 의한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생산의 과잉을 불러왔다. 생산 과잉은 공황을 초래했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 열강들은 생사를 건 시장 쟁탈전을 벌였다. 자국의 상품을 독점적으로 소비할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한 것이다. 1870년에서 1900년 사이 영국의 영토 확장은 자그마치 123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프랑스는 906만, 독일도 259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1878년 유럽 열강과 식민지가 차지한 면적은 지구 전체의 67%였고 1차 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는 84%로 늘어난다. 근대사 4부작을 쓴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1875~1914년을 '제국의 시대'로 명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 열강이 독점적 해외 시장 확보를 위해 각축전을 벌인 시기다. 

미국은 생산 과잉이라는 전 지구적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을까? 미국 역시 1873년과 1893년 공황의 직격탄을 피해가지 못했다. 특히 1893년 5월 시작된 불황은 1898년까지 5년간 계속됐으며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노동자와 농민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1893년 첫 해에만 은행 500개와 기업 1만 5000개가 문을 닫았고 1894년의 실업자 수는 400만에 이르렀다. 한 미국 언론은 "이토록 사람 목숨이 값싼 적은 없었다"고 개탄했다.

경제 위기의 첫 번째 희생자는 노동자와 농민들이다. 1870년대 후반 이후 철도파업을 비롯한 수많은 파업이 벌어진다. 노동절(메이데이, 5월 1일)의 기원이 된 헤이마켓 폭동이 1886년 일어났고, 정부와 자본가들은 군대를 동원한 폭력 진압으로 대응했다. 농민들은 농민동맹과 인민당 결성 등 정치투쟁에 나섰다.  

두 번째 희생자는 군소 자본가들이다. 대형 자본에 먹히기 때문이다. 즉 경제 위기를 계기로 경제력의 집중이 심화된다. 금융력을 앞세운 이른바 머니트러스트가 등장한다. 1912년 미 하원 특별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J. P. 모건을 비롯한 6개 대형 금융기관이 철강, 철도, 공익사업, 석유 등 기간산업을 독점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J. P. 모건의 통제 아래 있는 기업은 자그마치 112개나 됐다. 즉 2차 산업혁명은 공황, 노동자.농민의 저항, 경제력 집중이라는 상황을 초래했다. 

아메리카를 넘어 해외 시장으로 

1893년 공황에 대한 해법은 해외 시장 개척일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든 노동자든, 정치가든 농민이든 여기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음과 같은 발언들이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나는 수출업자다. 나는 세계를 원한다." (찰스 러버링 매사추세츠 주 직물업자, 1890년)

"우리는 우리의 공산품과 농산물을 위한 우리만의 시장을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잉여생산물을 위한 해외 시장을 원한다." (윌리엄 매킨리 오하이오 주지사, 1895년 1월)

"미국의 공장은 미국인들이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의 토지는 미국인들이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운명은 무엇이 우리의 정책이 돼야 할지를 정해 놓았다. 세계의 교역은 우리의 것이 돼야 하며 그렇게 될 것이다.(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 1897년 4월) 

이제 문제는 팽창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팽창을 할 것인가로 좁혀졌다. 미국 경제가 해외로 진출하지 못한다면 미국 사회에 혼란, 나아가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과 같은 발언이 이를 말해준다.  

"우리는 매우 어두운 밤을 앞두고 있다. 상업적 번영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대중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기업인 F. L. 스테츤) 

"중국 시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윌리엄 프라이어 상원의원)

1895년 전미제조업자협회(NAM)가 결성된다. 이 협회의 목표는 해외시장 확보였고 이를 위해'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시장 확보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1897년 시어도어 서치 위원장은 "우리 제조업자의 대부분은 국내 시장을 초과했거나 초과하고 있다. 해외 교역 확대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밝혔다. 한편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은 "시장 확대"를 내걸고 팽창주의 성향의 후보 윌리엄 매킨리를 당선시킨다.

알프레드 테이어 메이한과 프레데릭 잭슨 터너 

이런 가운데 한 군사전략가와 역사학자가 미국 경제의 해외 진출을 옹호하고 촉구하는 이론을 내놓는다. 알프레드 테이어 메이한(1840~1914년)과 프레데릭 잭슨 터너(1861~1932년)가 그들이다.  

1890년 미 해군대학 교장 테이어는 <역사에 미치는 해군력의 영향>이라는 책을 발간해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 군사전략가로서 명성을 떨친다. 그는 이 책에서 '한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해외 시장을 통제하거나 해외 지역의 원자재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한 통제권을 확보하려면 강한 해군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자국의 상선단을 보호하고 비협조적인 외국으로 하여금 통상과 투자의 문호를 개방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한 해군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테이어는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해외 각지에 해군 운용을 위한 보급망을 갖춰야' 하며 따라서 '중미 지역에 운하를 건설하고, 카리브해든 태평양이든 통상을 하려는 지역에 해군 기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컨대 "미국의 점증하는 생산력이 해외 시장을 요구한다. 미국은 해외로 팽창해야 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이후 테이어(군사)는 헨리 캐봇 롯지 상원의원(의회),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군부 차관보(행정부)와 함께 미국 경제의 대외 팽창을 강력히 추동하는 3인방 중 한 명이 된다.

한편 젊은 역사학자 프레데릭 잭슨 터너는 1893년, 콜럼버스 항해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 역사학회 총회에서 "미국 역사에서 프런티어의 의미(The Significance of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미국 영토의 태평양 연안 확장으로 "미국 역사상 첫 시기가 마무리됐다"면서 미국에 더 이상 프런티어가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 상태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북미 대륙을 넘어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의 대답은 물론 끊임없는 프런티어의 확장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팽창은 지난 삼백년 간 미국적 생활방식의 확고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태평양 연안에 백인이 정착하고 주인 없는 땅을 차지하면서 팽창은 이제 정지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팽창의 에너지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경솔한 것이다. 보다 적극적인 대외정책,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 그리고 카리브해 및 주변 지역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들이야말로 미국의 대외 팽창이 계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른바 프런티어 사관이다. 이렇게 해서 1845년 존 오설리번이 제시한 '명백한 운명'은 터너의 프런티어 사관으로 진화한다. 미국은 세계를 정복할 '명백한 운명'을 타고 났으며 이제 제2의 서부인 동아시아를 향해 프런티어를 확장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을 둘러싼 열강의 이권쟁탈전과 미국 

이런 와중에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승리한다. 청은 일본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주었고, 타이완과 산둥반도를 빼앗겼다. 이후 산둥반도는 이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이 토해내야 했지만, 어쨌든 청일전쟁으로 일본은 해외 진출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우리에게 청일전쟁은 조선이 일본에 식민화되는 첫 번째 계기로 기억된다. 하지만 세계 시장을 상대로 경제활동을 벌이는 미국 등 자본주의 열강의 관심은 달랐다. 한마디로 청일전쟁은 중국을 먹이로 한 제국주의적 경쟁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제친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선수를 빼앗긴 셈이다. 당시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이러한 사태는 우리의 점증하는 상업적 이익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가장 엄중한 주의를 요한다"고 우려했다.

자본주의 열강의 중국 침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897년 11월 14일 독일은 자국 선교사의 피살을 계기로 산둥반도의 교주만을 점령한다. 일본과 유럽 열강이 중국을 분할 지배할 것이라는 미국의 우려는 더욱 증폭된다. 이에 앞서 1897년 9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해군부 차관보는 매킨리 대통령에게 "우리는 필리핀을 보유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또한 11월 오빌 플랫 하원의원은 마닐라야말로 전체 아시아 위기의 핵심이라며 마닐라 점령을 촉구한다. 마닐라는 중국과의 교역을 위한 핵심 중계항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스페인이 마닐라를 통해 중국으로 보내는 은(銀)의 규모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대중국 교역을 합친 것과 같은 정도였다고 한다. 

1898년 3월 말 독일이 자오저우완(膠州灣)에 대한 99년 조차권을 확보하는 등 중국의 경제적 양보를 얻어내자 미국 기업계와 정부는 드디어 스페인과의 전쟁 방침을 굳히게 된다.

스페인전쟁과 쿠바 : 경제적 통제 

왜 스페인인가? 스페인이 필리핀과 쿠바의 식민 종주국이었기 때문이다. 당초 미국의 목표는 마닐라를 빼앗아 대중국 교역의 전초기지로 삼는 한편, 쿠바인들의 독립 쟁취로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미국 기업의 대쿠바 투자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1898년 4월 시작돼 그해 7월에 끝난 스페인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카리브해 최대의 섬인 쿠바였다. 당시 미국은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 등에 엄청난 규모의(5000만 달러) 투자를 해놓고 있었는데 쿠바인들의 독립운동이 성공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이 독립에 성공할 경우 자칫 기존의 모든 투자를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스페인에 대해 쿠바를 안정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노쇠한 제국 스페인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결국 미국이 직접 무력행사에 나서 쿠바를 '독립'시키고 푸에르토리코를 합병하는 한편 필리핀을 식민지화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살펴보면 세계에 자유와 평화, 인권과 정의를 전파하겠다는 미국의 행태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스페인전쟁 자체의 추이는 간단하다. 4월 25일 미 의회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고, 5월 1일 존 듀이 제독이 마닐라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한다. 스페인 병사 4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미군은 1명의 사망자만 발생했을 뿐이다. 5월 26일 미군 선발대 1만 6000명이 쿠바로 떠나 3주 후 도착, 전투가 시작됐으며 약 한 달여 만인 7월 17일 스페인 육군이 항복한다. 미군 400명이 전사했고 2000명은 부상 또는 질병으로 사망했다.

7월 22일 워싱턴에서 평화협상이 시작돼 8월 12일 백악관에서 평화의정서(protocol of peace)가 교환됨으로써 사실상 전쟁은 끝난다. 그리고 12월 10일 파리에서 정식 평화협정이 체결돼 미국은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을 영토로 확보한다. 미국은 스페인에게 필리핀 양보의 대가로 2000만 달러를 지급한다. 이 때문에 스페인전쟁은 미국에서 '작지만 화려한 전쟁(little splendid war)'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추악한 전쟁이 이어진다. 3년여에 걸쳐 그 뒤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는 1902년 7월까지 3년 반 동안의 반란진압작전으로 필리핀인 약 20만 명을 살해했고, 쿠바에서는 1903년 3월까지 회유와 압박을 동원해 미국의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우선 쿠바의 경우를 살펴보자. 

사실 1898년 기준 쿠바 독립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스페인의 철수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쿠바인들의 피어린 독립투쟁이 있었다. 쿠바인들은 중남미 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한 1819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868년부터 1878년까지 10년간 독립전쟁을 벌인 데 이어 1879~80년에도 봉기했다.

특히 1895년부터는 쿠바 독립전쟁의 영웅인 호세 마르티의 주도 아래 스페인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있었다. 당시 마르티는 "쿠바의 독립을 통해 미국의 영향력이 서인도제도를 비롯해 우리 아메리카에(중남미)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 19세기 초부터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던 스페인은 반군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스페인은 미국에 대해 쿠바 사태의 평화로운 해결을 제의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선포한다. 내심 쿠바인에 의한 쿠바의 독립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4월 11일 매킨리 대통령이 의회에 '군사 개입' 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고, 4월 25일 의회는 선전포고를 단행한다. 당시는 매킨리는 자원병 12만 5000명 모집을 계획했는데 실제 자원자는 그 2배가 넘었다고 한다. 그만큼 전쟁 열기가 높았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 참전의 의도에 대해 쿠바 혁명 세력과 미국 내 반제국주의 세력이 경계심을 표하자 팽창주의 세력은 한 가지 꼼수를 낸다. 선전포고에 대한 이른바 텔러 수정안(Teller Amendment)을 받아들인 것이다.  

텔러 수정안은 콜로라도주 상원의원 헨리 텔러가 제안한 것으로 "쿠바 인민은 자유롭고 독립된" 민족이며, 사태가 안정된 후 "쿠바 정부와 섬에 대한 통제를 쿠바 인민들에게 맡길 것"이라고 약속했다. 미국이 쿠바에 대한 야욕이 없음을 보증한 것이다. 4월 20일 상원은 텔러 수정안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닷새 후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막상 스페인 군이 항복하자 미국의 태도는 180도 돌변한다. 우선 7월 17일 스페인 군의 항복식에 쿠바 독립군 사령관의 참여를 거부한다. 또한 1899년 1월 1일 거행된 승전 축하 행사에도 쿠바 독립군의 참여를 막는다.  

미국의 매킨리 대통령은 향후 쿠바는 "피정복 영토로서 미국은 참전국의 자격으로" 통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쿠바 혁명세력의 참전 자격을 부정했다. 쿠바의 독립은 쿠바인들의 독립투쟁이 아니라 미국의 참전으로 가능했다는 억지다. 따라서 미국의 통치를 받으라는 얘기다. 또한 존 그리그스 법무장관은 쿠바 임시정부 부통령에게 미군은 "점령군으로서 미군이 주둔하는 곳은 모두 미국 주권에 따라 통치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 지도 3. 1860년대 이후 미국의 카리브해 진출 (출처 : 월터 라페버 'The Cambridge History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2권 p.150)


이러한 미국의 표변은 다음과 같은 자기기만과 위선으로 정당화되고, 미국 국민들에게 선전된다. 우선 매킨리의 최측근이며 <뉴욕 트리뷴> 발행인인 화이트로 라이드는 텔러 수정안에 대해 "국가적 히스테리 상황에서나 가능한 자기 부정적 법률"이라고 폄하하면서 "미국 본토 방위를 위해 쿠바를 통제해야 할 절대적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외 팽창을 열렬히 주장했던 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은 텔러 수정안이 "의회가 충동적이며 잘못된 관대함에 빠져" 승인했기 때문에 구속력이 없다고 강변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에게는 잘못된 판단에 의한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의무"가 있으며 "쿠바인들이 자치 능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날 경우 영구히 쿠바를 소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위선의 극치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군사 점령하면서 미국의 쿠바 내정 간섭을 쿠바 헌법에 보장할 것을 강요한다. 1901년 2월 27일 미 상원을 통과하고 3월 2일 매킨리 대통령이 법으로 공포한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이 그것이다. 오빌 플랫 상원의원이 제안한 이 법은 미국이 쿠바 내정에 계속 개입할 권리가 있고, 쿠바의 국가 채무 규모와 조약 체결권을 제한할 수 있으며, 관타나모만 해군기지를 미국에 영구 임대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국가 채무를 제한한 것은 차관을 빌미로 한 유럽 국가의 영향력 침투를 막기 위한 것이었고 관타나모 해군기지는 곧 건설할(1907~1914년) 파나마운하를 동쪽에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플랫 수정안을 쿠바 헌법에 부대조항으로 삽입하지 않을 경우 쿠바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결국 플랫 수정안은 1903년 3월 쿠바 헌법에 포함된다. 

이렇게 해서 쿠바는 1934년까지 미국의 보호국으로 남게 된다. 1909-1913년에는 마군이라는 이름의 미국인이 쿠바 대통령이 되는 기막힌 사태도 벌어진다. 1925-1933년 쿠바를 통치한 독재자 게랄도 마차도가 하야할 당시 쿠바 내 자산의 70%가 미국인 소유였다. 1934년 미군이 쿠바를 떠난 것은 그 전 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함포외교를 포기하는 '선량한 이웃 정책(Good Neighbor Policy)'을 채택한 덕택이다.

그러나 쿠바의 예속적 지위는 1959년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때까지 지속된다, 쿠바 '독립' 후 미국 기업은 쿠바의 온갖 자산을 사들여 쿠바를 미국인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유나이티드 프루트는 사탕수수 농장 190만 에이커(약 23억 평)을 에이커(1224평) 당 20센트에 사들였으며 베들레헴 철강 등 미국 기업이 쿠바 광물자원의 80% 이상을 소유했다.

1900년 당시 미국이 쿠바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는 군정장관 레오나도 우드가 워싱턴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사람들은 내게 미국이 말하는 쿠바의 안정된 정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온다", "나는 그들에게 적절한 금리에 돈을 빌려줄 수 있고, 자본가들이 기꺼이 쿠바에 투자하려 할 때, 그때가 쿠바가 안정됐음을 의미한다고 대답해준다"고 적었다.  

또한 매킨리에게 보내는 메모에서 "사람들이 내게 무엇이 안정된 정부냐고 물어오면 '6% 이자로 돈을 빌려줄 수 있을 때'라고 말해줍니다"라고 보고했다. 미국 자본의 투자를 보장하는 것이 안정된 쿠바 정부의 역할이란 얘기다.  

스페인전쟁과 필리핀 : 무력에 의한 영토 정복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 당시 제퍼슨 대통령이 '다음 목표는 쿠바'라고 할 만큼 쿠바는 미국인에게 친숙한 땅이었다. 반면 필리핀은 미지의 땅이었다. 미국인은 필리핀에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닐라항을 장악하겠다는 미국의 야욕은 엄청난 비극을 불러온다. 20만 명의 무고한 필리핀인이 목숨을 잃었고, 미국은 순식간에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한 것이다.  

1898년 5월 1일 조지 듀이 제독이 마닐라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한 데 대해 한 반제국주의자는 "듀이는 마닐라를 접수하면서 부하 하나만 잃었다. 그러나 이로써 우리가 추구해온 체제는 몽땅 날아갔다"고 개탄했다. 

언론인 출신으로 동남아 전문가인 스탠리 카르노는 "필리핀 합병은 미국인의 경험에서 하나의 결정적 전환점"이라면서 "역사상 최초로 미군이 해외에서 전투를 했고, 또한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 외부의 영토를 정복했으며 이전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이제 식민종주국이 됐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당초 마닐라항만을 장악하려 했다. 마닐라가 대중국 교역의 최대 중개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필리핀에서는 스페인의 300년 통치에 대항해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주도하는 독립투쟁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마닐라항을 가지려면 필리핀 전체를 정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독립세력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1898년 10월 28일 매킨리 대통령은 미군에게 필리핀 전체를 점령할 것을 명령한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매킨리는 훗날 감리교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필리핀 문제를 놓고 몇 날 밤 고민을 하면서 백악관에서 무릎을 꿇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어느 늦은 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필리핀 모두를 차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하여 필리핀인들을 교육시켜 그들을 향상시키고(uplift) 기독교로 개종시켜라. 우리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치신 것처럼,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그들을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해주어라"는 계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역사가에 따르면 매킨리는 "필리핀인을 전혀 몰랐다. 그들이 그토록 완강하게 저항해 비극적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 완전히 오판했다." 필리핀인은 이미 300년동안 기독교도(가톨릭)였다. 또한 스페인 지배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필리핀에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던 매킨리의 신의 계시를 앞세운 결정은 아시아 최초의 반식민혁명에 불을 붙였다. 

매킨리의 본심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착한 이웃이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의회에 스페인과의 파리평화조약 비준을 요청하며 "우리는 (필리핀을) 프랑스나 독일에게 넘겨줄 수 없다. 그들은 동양과의 교역에서 우리의 경쟁자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밑지는 장사이며 바보 같은 짓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본심은 대중국 교역 확대였다.

미국의 모든 이들이 필리핀 정복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철강왕에서 평화주의자로 변모한 앤드류 카네기는 미국이 필리핀 양보의 대가로 스페인에 지급한 2000만 달러를 자신이 내고 필리핀인들에게 독립을 주겠다면서 "대통령 자신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를 비판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을 비롯한 양심적 인사들이 필리핀 정복에 반대했다.

그러나 압도적 다수는 찬성이었다. 필리핀 정복을 가장 열렬히 주창한 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인디애나)의 1900년 1월초 상원 연설은 이들의 속내를 잘 말해준다.

"필리핀은 영원히 우리 것입니다. (중략) 앞으로 우리 무역의 최대 거래처는 아시아가 될 것입니다. 태평양은 우리 바다입니다. 유럽은 물건을 많이 만들수록 식민지에서 소비처를 확보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잉여생산물을 소비해줄 곳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당연히 중국이 소비처가 돼야지요. 

필리핀은 우리에게 아시아 전체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기지가 됩니다. (중략)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대부분 무역 관련 분쟁이 될 겁니다. 태평양을 지배하는 힘은 따라서 세계를 지배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필리핀을 차지함으로써 그런 힘은 영원히 미국 것이 될 겁니다"

한편 필리핀 독립운동 지도자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8년 6월 12일 필리핀 독립을 선언했고, 1899년 1월 23일 헌법 제정과 함께 필리핀공화국을 수립했다. 초대 대통령은 아기날도였다. 필리핀공화국은 2월 4일 미국에 선전포고했고 2월 6일 첫 전투가 벌어진다. 이후 3년 반 동안 잔인한 살육전이 벌어진다.  

▲ 지도 4. 미국의 태평양 진출 (출처 : 월터 라페버 'The Cambridge History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2권 p.89)


당시 전쟁에 참여한 미군 병사들은 고향에 보내는 편지에서 "모든 니그로들을 천당으로 보내기 위해" 필리핀에 왔으며 "인디언들을 없앤 것처럼 니그로들을 소탕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의 '반란 진압'은 인디언 학살을 방불했다. 실제로 전쟁을 지휘한 미국 장군 30명 중 26명(87%)이 본토에서의 인디언전쟁 경험자였다. 사령관은 더글라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 장군이었다.  

'반란 진압'은 잔인했다.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리는가 하면, 어린이들까지 죽였다. 물고문도 자행했다. 필리핀 주민들에 대한 민간인 사찰도 시행됐다. 훗날 FBI, CIA, NSA 등 미 정보기관에 의한 민간인 사찰의 시작이었다.  

1901년 11월 <필라델피아 레저>는 필리핀에서 미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희가극에 나오는 한가한 놀이가 아니다. 우리 군인들은 무자비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남자고 여자고 어린아이고 할 것 없이, 반군 포로와 단순 체포자, 반군 활동 적극 가담자와 반군인 것으로 의심되는 자를 가리지 않고 10세 이상이면 다 죽여 버린다. 씨를 말리려고 작정을 한 것 같다. 필리핀 사람은 개보다 나을 것 없다는 생각까지 만연하고 있다"  

팽창주의자들은 적극 반박했다. <뉴욕 월드>는 "지배하기 위해서는 정복해야 하고 정복하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부의 한 섬유업자는 "우리 자신이 식민지에서 벗어날 때부터 우리는 식민지를 보유해 왔다"고 변명했다.  

미국의 대외 팽창을 주장해온 헨리 캐봇 로지와 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은 '미국은 이미 인디언들을 가혹하게 다뤄왔다. 지금 필리핀인들을 대하는 것처럼'이라며 별 것 아니라는 태도를 취했다.  

1901년 3월 23일 아기날도가 미군에 생포된다. 같은 해 9월 28일 발랑기가 학살 사건이 벌어진다. 사마르섬의 발랑기가 해변에서 필리핀 반군이 미군 9연대 C중대원 48명을 살해한 데 대한 보복으로 주변 지역 1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최소 수 천명이 살해됐다. 수 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토벌대장 제이컵 스미스 대령은 "포로는 필요 없다. 죽이고 불태워라. 더 많이 죽이고 더 많이 불태우는 것이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중략) 사마르섬을 들짐승이 울부짖는 황무지로 만들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미국은 당시 발랑기가에서 약탈한 교회 종 3개를(이중 1개는 반군의 공격 개시 신호로 쓰였다) 117년만에 최근(2018년 12월 15일) 필리핀에 반환했다.  

1902년 7월 4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필리핀 평정을 선언했다. 3년 반의 전쟁 동안 동원된 미군은 12만 6000명, 사망자는 4374명(쿠바전쟁의 10배 이상)이었다. 필리핀 반군 2만 명, 민간인 20만 명이 사망했다. 미국의 전쟁 비용 4억 달러. 그러나 진짜 비용은 독립 이후 오랜 기간 전 세계 민주주의 혁명 운동에 영감을 주어왔던 미 공화국의 타락이었다. 미국은 의미 있는 세계 변화의 적으로, 현상 유지의 수호자로 변질됐다.

하와이 합병 : 미국 최초의 해외 정권 전복
 

1898년 7월 7일 미국은 하와이를 50번째 주로 합병한다. 필리핀은 무력 점령하고 쿠바는 군사력을 앞세워 보호국화 한 반면 하와이는 미국이 문화적, 경제적 정복을 끝낸 다음에 합병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합병 전 이미 하와이는 백인에게 문화적, 경제적으로 정복당한 것이다.  

1819년, 하와이에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 들어간다. 이들은 하와이 왕족을 개신교도로 개종시키고, 그 영향력을 발판으로 장관 등 주요 정책 결정권자가 된다. 또한 사탕수수 등 하와이의 경제적 가치에 눈을 뜬 일부 선교사들은 스스로 농장주로 변신한다. 1849년이 되면 토지 거래를 가능케 하고 원주민을 노동자로 만드는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하는 데 성공한다.

1850년대가 되면, 미국 선교사 16개 가문이 1인당 평균 493에이커(60만 평)의 토지를 보유한 하와이 최대 지주로 성장한다. 1892년에는 미국인과 유럽인이 하와이 토지의 3분의 2를 보유한다. 하와이의 설탕 생산은 1876년에서 1885년 사이에 6배나 증가하는데 설탕농장의 3분의 2가 미국인 소유였다. 당시 미국의 한 외교관은 이들 선교사를 일컬어 "공동체의 흡혈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890년 하와이의 인구는 원주민 40,612명, 중국인과 일본인 27,391명,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노르웨이인 6,220명이었다. 미국인들은 하와이의 정치적 실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하와이의 투표권은 재산권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3년 1월 새로 취임한 릴리우로칼리니 여왕이 보통선거제도를 도입하려 했다. 하와이에 대한 하와이인의 주권을 되찾으려 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현지 공사 조지 스티븐스와 짜고 미 해병 162명을 동원해 쿠데타로 대응한다. 쿠데타의 명분은 미국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여왕을 쫓아내고 하와이공화국을 수립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민주혁명으로 포장했지만, 사실상 이는 미국 최초의 해외 정권 전복이었다. 그것도 하와이 경제를 장악한 민간인이 주도하고 미 정부와 군대가 후원하는 형태의 것이었다.  

1894년 하와이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샌퍼드 돌이 취임한다. 이 사람은 파인애플로 유명한 회사 돌(Dole)을 만든 제임스 돌의 사촌이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 정부에 합병을 요청, 하와이 합병이 성사된 것이다. 돈과 이윤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다.  

문호 개방 정책 : 미 제국의 백년대계 

미국은 스페인전쟁으로 카리브해 일대를 장악하고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지만, 중국 시장 진출은 부진했다. 무엇보다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1889년 사모아 문제로 독일과 전쟁 일보 직전에 갔을 때 미국의 해군력은 세계 12위였다. 터키, 중국보다도 뒤졌다. 1890년대 말 영국의 아시아 주둔 해군 전함은 미군 전체보다 많았다. 당시에는 해군력이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미국은 19세기 말에야 철갑 군함 건조 등 해군력 증강에 나선다.

또 미국 내에서 미국의 군사주의적, 영토주의적 팽창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시장인 중국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세력 범위(spheres of influence)'라는 이름으로 중국 영토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1899년에 영국이 그의 '세력 범위' 안에서 중국 정부에 관세를 지불하는 것을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의 주권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영국의 선례를 따름으로써 중국은 분할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세력 범위'를 갖지 못한 미국은 그러한 분할의 위기에 대해 불만이었다. 중국이 분할되면 미국은 중국 진출은 불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묘안이 바로 '문호 개방 정책'이다. 미국의 우월한 생산력을 앞세워 중국 시장에 '공정하게' 접근하자는 얘기다. '공정하게' 무역을 하면 당연히 미국이 우위를 점할 것이기 때문이다. 1846년 당시 세계 최강의 산업국가였던 영국이 자유무역을 제창한 것과 같은 이치다. 

1899년 9월 6일 국무장관 존 헤이는 첫 번째 '문호 개방 문서(Open Door Note)'를 발표한다. 열강의 '세력 범위'를 포함해 중국의 모든 지역에서 모든 국가에 대해 통상과 항해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1900년 7월 3일에는 두 번째 '문호 개방 문서'를 선포한다. 중국의 영토 주권 보장을 요구한다. 즉 어떤 열강도 중국, 중국 영토의 일부를 식민지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국 등 강대국은 미국의 제안에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애매모호한 답변을 미국에 보내 왔다. 일본만이 분명히 반대했을 뿐이었다. 존 헤이는 모든 강대국이 미국의 제안을 수락하였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문호 개방'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하나의 선언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의 군사력으로는 문호 개방 원칙을 강제할 수 없었다. 또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완성하면서 연해주로 뻗어오는 러시아의 동진을 막아야 했다.  

결국 미국은 같은 해양세력인 영국, 일본과 제국주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중국을 공동 경영하기로 한다. 1902년 영국은 일본과 동맹(영일 동맹 : 19세기 이후 영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동맹)을 맺었고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에 군자금을 대준다. 나아가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평화조약을 중재하고, 1905년에는 태프트-가쓰라 조약을 통해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양해하기로 한다.

그런데 1929년 대공황 이후 일본은 중국의 독점적 경영에 나선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이 그것이다. 일본이 중국을 독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 중국 시장을 둘러싼 미국과 일본 간의 갈등은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문호 개방이 현실화 된 것은 2차 대전 이후다. 냉전 당시 이른바 '자유세계'에서 미국의 문호 개방 원칙이 관철된 것이다. 그리고 냉전 이후에는 전 세계가 미국의 자본에 문호 개방된다. 이른바 지구화(Globalization)가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문호 개방은 미국 경제의 세계 진출을 위한 백년대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의 관세전쟁은 미국이 문호 개방 원칙에서 물러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4편에 계속됩니다.)


"전쟁은 최고의 장사다"
[전쟁국가 미국·1강-④] 1차 대전, 'JP모건을 위한 전쟁
2018.12.29 11:59:08

"최고로 신뢰할 만한 회계자료에 따르면 지난 1차 대전 때 군인 1명을 죽이는 데 드는 비용은 약 2만 5000달러였다. 그런데 유럽의 어떤 대기업도 정부가 저지른 이런 극도의 낭비에 대해 단 한 차례도 항의하지 않았다. 살인을 개별 조폭들에게 맡긴다면 건당 비용은 100달러를 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대기업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살인이 이들 대기업의 주업이기 때문이다. 무기는 그들이 자랑하는 상품이다. 정부는 그들의 고객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들이 만든 제품은 아군이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적군도 사용해왔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 터지는 포탄 파편이 전선에 나가 있는 한 인간의 뇌와 심장과 내장을 파고드는 동안, 2만 5000달러의 대부분인 이윤은 무기 제조업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춘>의 1934년 3월자 기사 '무기와 인간'의 첫 부분이다. 다음 달 별도의 소책자로도 발간된 이 기사는 유럽 무기산업의 추악함을 고발한다. 그러나 이 고발 기사는 유럽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미국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차 대전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이 전쟁이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전쟁'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며 참전을 단행했다. 나아가 민족 자결, 국제연맹 창설 등 14개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미국의 주도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했다. 윌슨의 평화 원칙은 지금까지도 미국 외교의 대원칙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도, 평화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파산 위기에 빠진 미국의 은행가와 무기 제조업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금융재벌 JP모건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당시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측의 무기 구입 및 차관 획득을 위한 유일한 대행자였던 JP모건은 연합국 측의 패배 가능성이 보이면서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거액의 전쟁물자 외상 대금과 대출금을 모두 떼일 판이었다. 미국이 참전한 진정한 이유다. 이 때문에 어떤 이는 1차 대전을 '세상을 JP모건에 안전하게 만들어준 전쟁'이라고까지 말한다. 그 실상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제국주의 열강의 자살극, 1차 대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이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한 세르비아 인에게 암살된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1차 대전이 발발한다.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그리고 오스만제국을 한편으로(Central Powers : 중부세력),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을 다른 한편으로(Allies : 연합국) 4년 3개월여 동안 자본주의 열강 간에 참혹한 전쟁이 벌어진다. 1815년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이후 100년간 지속됐던 유럽의 평화가 깨진 것이다.

1918년 11월 11일 전쟁이 끝났을 때 군인 사망자가 1000만 명, 민간인 사망자는 2000만 명으로 무려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 비용은 자그마치 1860억 달러. 미국 등 연합국이 1230억 달러를 사용했고 독일은 390억 달러를 썼다. 연합국 중에서는 영국이 540억 달러, 미국이 220억 달러를 지출했다. 

전쟁 발발 당시 이미 영국은 노쇠한 제국이었다. 전쟁 비용 540억 달러의 36%를 국민 세금으로, 64%는(352억 달러) 외부 대출로 충당했다. 대출의 주요 공급원은 미국이었다. 1914년 3월부터 1920년 3월까지 영국이 지출한 540억 달러는 그 이전 225년간의 정부 지출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쟁 직전 7억 1100만 파운드였던 영국의 국채는 종전 즈음에는 82억 파운드로(390억 달러 ; 당시 1파운드는 4.76 달러) 6년 만에 정부 부채가 1150% 증가한다. 사실상 국고가 파산 상태에 이른 것이다.  

한마디로 영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무기와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전쟁을 치렀다. 이에 따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전쟁이 끝난 후 전쟁 부채를 갚느라 몰락의 길을 걷는다.

반면 미국은 1917년 4월 2일 참전을 결정했지만 실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종전 6개월 전인 1918년 5월이었다. 미군은 연 인원 200만 명이 참전해 11만 6000명이 전사하고 20만 4000명이 부상을 당했다(반면 4년 이상 전쟁을 치른 프랑스는 100만 명 이상이 전사했고 영국 전사자 역시 100만 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 중 영국, 프랑스 등에 제공한 군수물자와 신용 대출 덕에 전쟁 이후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최대 채권국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향후 세계의 진로를 좌우하는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전쟁 기간 미국 대기업과 정부는 유례없이 긴밀한 결탁 관계를 맺었다. 경쟁을 통제하고 대기업의 이윤을 보장하면서 은행과 군수기업들은 크게 번창했다. 

이처럼 연합국 측에 전쟁 물자를 공급하고 전쟁 자금을 빌려주는 과정에서 2만 1000명의 백만장자와 억만장자가 생겨났다. 반면 미국의 공공부채는 1913년 10억 달러에서 1919년 말 250억 달러로 2500% 늘어난다. 미국 국민 1인당(1억 3000만 명)의 200달러의 전쟁 부채를 진 셈이다. 국민들의 혈세와 수십만 군인의 목숨을 대가로 2만 1000명의 거부가 태어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단숨에 경제 부흥을 이룩한 일본, 베트남전쟁에 참여해 경제 개발의 기반을 닦은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 보라. 1차 대전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들이 벌이는 전쟁에서 연합국 측의 군수물자 공급 및 신용 대출을 독점한 JP모건은 도대체 얼마나 벌어들였을까. JP모건에게 1차 대전은 '최고의 장사' 기회였던 셈이다. 

'죽음의 상인' 

사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다수 미국인들은 관심이 없었다. 1차 대전은 구대륙 제국주의 열강의 추악한 이권 다툼이었을 뿐이다. JP모건이 군수물자 공급과 신용 대출로 영국과 결탁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참전할 이유도 없었다.  

이러한 전쟁의 실상, 즉 대다수 국민이 혈세와 목숨을 희생하는 동안 미국의 군수기업과 은행들은 떼돈을 벌었다는 추악한 진실은 1930년대 이후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그 진실이 소상히 밝혀진 것은 1934년 4월부터 2년간 지속된 미 상원 군수산업조사특별위원회의 조사에 의해서였다.(나이위원회에 대해서는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공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권 138~158쪽과 스메들리 버틀러 <전쟁은 사기다> 참조)

▲ 스메들리 버틀러(1881∼1940년) 장군의 저서 <전쟁은 사기다>(War is a Racket) ⓒFeral House

공화당 소속의 노스다코타 주 상원의원 제랄드 나이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조사위원회는 일명 나이위원회, 또는 '죽음의 상인' 조사위원회로 불린다. 군수기업을 '죽음의 상인'으로 지칭한 것이다. 조사위원회는 조사관과 회계사 80명을 동원해 1차 대전 당시 미국 대기업들의 회계장부를 샅샅이 조사했다. 특위 위원들은 그 결과를 보고 경악했다.

특위 위원 중 한 명인 제임스 포프 상원의원은 앞으로 청문회를 통해 "그 탐욕과 음모와 전쟁 공포를 조장하는 선전과 로비의 실태가 공개되면 국민은 경악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관련 정보가 공개되는 순간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참전 이유는 민주주의도 평화도 아닌, 미국의 제국주의적 영향력 확대와 대기업의 이윤 때문이었다.

나이위원회가 소집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었다.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혁명에 성공하며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는 차르 치하 당시 외무장관의 비밀서류를 발견해 이를 공표했다. 그것은 전쟁이 끝난 후 전승국들이 전체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적절히 나누어 갖는다는 내용이었다(사이크스-피코 협정).  

이 비밀협약은 1916년 2월에 수립되었고 같은 해 5월 관련 국가 정부들로부터 비밀리에 비준을 받았다. 당시까지 명목상 중립을 지켰던 미국 정부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타 국가들은 물론 관련 국가의 국민들도 이 비밀협약의 내용을 알지 못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단의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전쟁 당시 비밀 외교 등을 연구하면서 미국이 참전한 진짜 이유는 민주주의나 세계 평화가 아니라 영토 획득과 기업의 이윤 때문이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또한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고 1933년에는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럽에 새로운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전쟁',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윌슨의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이 의원은 1934년 2월 상원 외교위에 무기, 탄약 등 전쟁 장비 제조 및 판매에 관련된 개인과 기업들에 대한 조사를 제안했다. 미국이 새로운 해외 전쟁에 말려드는 것과 미국 군대가 기업인들의 해외투자 보호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1934년 4월, 상원 군수산업조사특별위원회가 설립됐고 군수품재벌 관련 청문회가 시작됐다. 조사위원회의 활동 목적은 전쟁을 통한 부당이득 취득이 있었는지, 무기 제조업자들이 선전 활동을 통해 정부를 전쟁으로 몰아갔는지를 조사하는 한편 앞으로 전쟁 수행 과정에서 대기업의 이윤 추구가 일절 없도록 정부가 모든 무기 제조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해야 하는지 등 향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청문회 시작되기 직전 미 군수산업을 고발하는 두 권의 책이 같은 날 발간됐다. H. C. 엥겔브레히트와 F. C. 해니건 공저의 <죽음의 상인들>, 그리고 언론인 조지 셀드스가 쓴 <철, 피, 이윤>이 그것이다. 두 책은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고 특위 조사관들에게 많은 기초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서두에 말한 <포춘> 3월자 '무기와 인간' 이 별도의 소책자로 발간됐다.  

영국과 JP모건의 결탁 

1차 대전 발발 당시 중립을 표방했던 미국은 어떻게 전쟁에 끌려들어 간 것일까? 그것은 미국의 금융재벌 JP모건이 영국 정부와 결탁한 때문이었다.

석유, 금융, 식량 등 주요 국제 문제에 대해 30년 넘게 비판적 글을 써온 윌리엄 엥달은 저서 <화폐의 신>(Gods of Money)에서 "월가의 머니트러스트는 전쟁에 참여해야만 유럽에 재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파산한 영국이 남겨놓은 공백을 치고 들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이른바 '미국의 세기'를 창출한 첫 걸음이다"라고 지적한다.

1936년 2월 24일 발표된 나이보고서는 "조사 대상이 된 군수업계는 때로 비정상적인 편법, 미심쩍은 특혜와 커미션 같은 방법을 써먹었다. 그들은 일이 되게 하기 위해 외국 정부 관료나 그들의 절친한 친구에게 뇌물을 먹이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쟁 발발 직후 JP모건은 영국이 군수품, 무기, 군복, 화학물질 등 현대전을 치르는 데 필요한 모든 물품을 구매하는 데 영국 정부를 위한 유일한 거간꾼 노릇을 하게 된다. 더욱이 영국 정부는 JP모건을 미국 민간은행에서 빌리는 모든 영국 전쟁부채의 독점적인 금융대행사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JP모건은 전시 구매를 조직하고 거기에 자금을 조달하는 일, 그리고 어떤 회사가 공급처가 될 것이며 물품 가격은 어떻게 책정할지 따위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모건가와 연계된 기업들은 모건이 눈치 빠르게 벌인 이 사업에서 가장 큰 이득을 챙겼다.

1915년 1월 금융회사 JP모건의 수장 J. P. 모건 2세는 백악관에서 윌슨 대통령을 만나 JP모건과 영국의 결탁 문제를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윌슨은 모건그룹이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행하는 그 어떤 조치에도 반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1916년 한 해에만 미국 업계는 12억 9000만 달러 상당의 군수품을 영국과 프랑스에 수출했다.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기 직전인 1917년 4월 JP모건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50억 달러어치(현재 시세 900억 달러) 군수품을 수출했다. 만일 그 대금이 상환되지 않으면 심각한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JP모건의 동업자 토머스 라몬트는 1915년 4월 필라델리아에서 열린 정치사화과학아카데미에서 행한 "전쟁이 미국의 금융적 지위에 미치는 영향"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쟁 관련 품목을 취급하는 우리나라 제조업체와 상인들은 사업을 통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중략)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진척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미국이 국제적인 금융대출시장에서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역이나 금융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문제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전쟁을 끝내지 않고 질질 끄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독일의 수출무역이 거의 완전히 바닥상태지만, 만약 전쟁이 조기에 끝나버리면 우리는 십중팔구 독일이 재빠르게 기사회생해서 다시 경쟁국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1917년이 되면서 별안간 상황이 좋지 않게 굴러갔다. 1917년 2월 러시아 군부가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러시아 황제가 폐위되었다. 러시아 군 지도부는 반란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만일 러시아 군대가 전쟁에서 손을 뗀다면 독일은 더 이상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을 동시에 감당하느라 기진맥진할 필요 없이 오로지 서부전선에만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곧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패배를 의미했다.

JP모건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에 15억 달러가 넘는 전쟁 차관을 주선해주고, 유럽 교전국에 제공된 50억 달러어치의 군수물자에 관한 인수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니만큼 끝내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는 거두는, 그들로서는 전혀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이런 상황에서 1917년 3월 5일 월터 하인스 페이지 영국주재 미국 대사가 윌슨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밀서를 보낸다. 그는 록펠러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다. 영국 대사로 부임하기 직전 록펠러재단 산하 일반교육위원회의 위원을 맡기도 했다.

"저는 우리를 서서히 압박해오는 이 위기에 대처하려면 JP모건의 역량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고 봅니다. 일개 민간기관이 담당하기에는 너무 엄청나고 급박한 상황입니다. (중략) 그렇지만 우리가 독일과의 전쟁에 직접 참가한다면, 연합국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아마도 신용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 정부는 얼마든지 영국과 프랑스에 차관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을 겁니다. (중략) 우리가 독일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 한 우리 정부는 당연히 그러한 직접적인 신용을 제공할 수 없을 겁니다."

4주 후인 1917년 4월 2일, 윌슨은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한다.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참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윌슨이 참전을 선택한 진정한 동기는 참전을 해야만 전후 협상 과정에서 발언권이 보장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2월 28일 백악관을 방문한 민간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 참여한 국가의 수반이라면 미국 대통령은 평화협상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중립국 대표로 간다면 기껏해야 '문틈으로 떠드는' 정도밖에 할 수 없겠지요. 미국 대통령의 말이 먹히려면 협상 테이블에 참가해서 우리의 외교정책을 밀어붙이고 옹호해야지, 안 그러면 아무것도 될 수 없어요."  

윌슨의 선전포고 요청에 대해 상원에서는 단 6명만이, 하원에서는 50명이 반대했다. 반대 의원들은 윌슨을 '월스트리트의 앞잡이'라고 공격했다. 조지 노리스 상원의원 "우리는 이제 성조기에 달러 문양을 그려 넣게 될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로버트 라폴레트 상원의원은 참전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한다면 반대가 10배 이상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만큼 미국 국민들은 유럽 열강들이 벌이는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정부는 자원병 100만 명 확보를 호소했지만 참호전과 독가스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열기는 식어갔다. 자원병 모집 공고 6주 만에 입대를 자원한 사람은 7만 3000명에 불과했다. 결국 의회는 징병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선전포고 이후 1918년 11월 11일 종전까지,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연합국에 93억 8631만 달러를 대출해 준다. 영국이 41억 3600만 달러, 프랑스가 22억 9300만 달러를 빌렸다. 그러나 사실 영국 정부나 프랑스 정부는 그 돈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 돈은 연합국에 공급되는 전쟁물자 대금으로 미국 재계가 부리나케 쓸어갔다. 미국 재계는 대부분 모건그룹, 아니면 록펠러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이위원회 활동은 성공했는가? 

나이위원회의 근본 취지는 미국이 새로운 해외 전쟁에 말려드는 것, 그리고 미국 군대가 기업인들의 해외투자 보호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1차 대전 동안 군수기업 등의 부당한 이득 취득이 있었는지, 무기 제조업자들이 선전 활동을 통해 정부를 전쟁으로 몰아갔는지를 조사하는 한편 앞으로 전쟁 수행 과정에서 대기업의 이윤 추구가 일절 없도록 정부가 모든 무기 제조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해야(무기산업 국유화) 하는지 등 향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1936년 4월 3차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마친 나이위원회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하지 못했다. 첫째, JP모건과 록펠러, 듀퐁 등 미국 대기업들이 전쟁을 통해 어마어마한 이윤을 취했다는 사실은 밝혀냈다.

둘째, 무기업자가 정부를 전쟁으로 몰아갔는지에 대해서, 즉 윌슨의 참전 동기가 JP모건 구하기였는지에 관해서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했으나 정치, 언론, 대학 등 제도권세력의 물타기 작전에 희석됐다. 즉 '미국 이상주의 외교의 위대한 선구자, 윌슨'이라는 신화는 큰 타격을 입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셋째, 전쟁으로부터 이윤을 제거하겠다는 노력은 완전히 실패했다. 나이 의원을 비롯한 위원들은 한때 무기산업 국유화라는 근본적 개혁까지 고려했고, 현실적으로는 전쟁 이윤에 대해 중과세하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이 모든 노력은 5년간 미 의회 내에서 잠자고 있다가 1941년 12월 미국의 2차 대전 참전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30년대 대중들의 분노에 전전긍긍했던 대기업들은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취한다.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하려면 전쟁 수행 과정에서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라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 대기업은 2차 대전에서 1차 대전보다 훨씬 더 큰 이윤을 취했으며 이후 미국에는 군산복합체가 정착되면서 영구 전쟁 국가로의 길을 걷게 된다.

나이위원회의 활동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미 국민의 지지는 차고 넘쳤다. 출범 1년이 채 안 된 1934년 12월 말 현재 나이위원회 활동을 지지, 격려하는 편지가 자그마치 15만 통이나 접수됐다. 위원회 활동이 끝나가던 1936년 3월 7일 갤럽 여론조사에서 "사적인 이윤을 위한 무기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82%가 '그렇다'(18% '아니다')고 대답했다.  

이 여론조사에서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의 한 잡화상은 "지난 수 세대 동안 무기 관련 이윤 시스템이 우리를 전쟁으로 몰아갔다"고 지적했다. 이는 윌슨이 JP모건을 연합국 전담 금융거래자로 허용했을 때 이미 "참전으로 가는 길은 뚫렸다"는 나이 위원장의 발언과 정확히 같은 맥락이다. "미국에게 전쟁이란 국민을 속여 대기업을 배불리는 수단이다"(노엄 촘스키), 또는 "외국과의 전쟁은 부르주아계급이 생각하기에 이득이 생길 것 같을 때만 일어난다"(조지 오웰)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더글라스 맥아더보다 더 용맹했고, 그보다 훨씬 군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의 반전 고전 <전쟁은 사기다>가 출간된 것도 이때였다(1935년). 이 책에서 버틀러 장군은 다음과 같이 전쟁의 실상을 고발한다.  

"전쟁은 사기다. 언제나 그래왔다. 전쟁은 아마도 가장 오래됐고, 손쉽게 가장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으며, 그리고 확실히 가장 사악한 사업이다. 나아가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사업이다. 또한 이윤은 돈으로 계산되지만 손실은 인간의 목숨으로 지불되는 유일한 사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사기'야말로 전쟁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라고 믿는다. 전쟁이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것은 '(권력) 내부'의 극소수 사람들만이 알 뿐이다. 전쟁은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가 희생하는 사업이다. 전쟁을 통해 극소수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다."  

"나는 현역 군인으로 33년 4개월을 복무했으며 그 대부분을 대기업과 월가, 은행가들을 위한 고급 조폭(a high class muscle man)으로 일했다. 한마디로 나는 자본주의를 위한 사기꾼, 조폭이었다.  

1914년 나는 멕시코, 특히 탐피코를 미국 석유업계가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이티와 쿠바를 내셔널시티뱅크가 돈을 긁어모으기에 적당한 장소로 변모시키는 것을 도왔다. 월가의 이익을 위해 중미 6개 국가를 침탈하는 것을 도왔고, 1902∼1912년에는 브라운브라더스국제은행을 위해 니카라과 소탕을 도왔다.  

1916년 미국 설탕업계가 도미니카공화국에 진출하는 것을 도왔으며, 1903년에는 온두라스를 미국 과일 기업들이 활동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만들어주었다. 1927년에는 스탠다드오일이 아무런 방해 없이 중국에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알 카포네에게 한마디 조언을 해줄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기껏해야 시카고의 3개 구역에서 사기 행각을 벌였지만, 나는 세 대륙에 걸쳐 그 짓을 했으니 말이다."

나이위원회는 1936년 4월 발표한 3차 보고서를 통해 전쟁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기심을 추구하는 조직(기업)이 국가로 하여금 군사행동에 나서도록 선동하고 겁박하는 행위를 방치하는 것은 세계 평화에 반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 국민의 염원, 나이위원회의 지적을 미국의 지배엘리트는 교묘하게 회피하고 거부했다. 일례로 <뉴욕타임스>는 위에 말한 갤럽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뿐만 아니라 <워싱턴 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등 유력 언론, 월터 리프먼 등 저명한 언론인들도 나이위원회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모두 회의적, 또는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즉 대기업을 비롯해 미국의 제도권 세력은 전쟁을, 전쟁을 통한 이윤 획득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J. P. 모건, 나이위원회에 출석하다 

1936년 1월 7일, 미국 금융계의 최고 거물 J. P. 모건이 나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했다. 세기의 격돌이라고 할 만한 빅 이벤트였다. 만일 윌슨의 참전 결정이 JP모건의 군수물자 외상 대금 및 대출금 회수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 입증된다면 미국 정부와 대기업의 도덕성과 정당성은 추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비해 위원회 측은 1년 가까이 금융회사 JP모건의 각종 문서 200만 건을 조사했다. 나이 위원장은 라디오 방송에 나가 국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대기업의) 상업적 이익 보장을 위해 미국의 중립정책을 연합국에 대한 대출을 허용하는 수준까지 밀고 갔습니다. 연합국들은 미국이 결국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대해(결국은 참전할 것이라는) 일말의 의구심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잘 몰랐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치부책을 누가 쥐고 있는지,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J. P. 모건은 이런 추정을 부인하는 9쪽짜리 성명을 발표했다. 연합국들에 대한 대출은 (전쟁의 승패와 관련 없이) 회수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대출을 해준 금융기관들이 '대출금의 안전 회수'를 위해 정부에 압력을 넣어 참전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판타지 같은 허구의 이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월 7일 청문회에서 위원회 측은 전쟁이 일어난 1914년 윌슨이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국무장관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로버트 랜싱 전쟁장관 편에 서서 미국 은행가들이 교전 당사국에 대출하는 것을 허용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공개했다(이 결정 직후 브라이언은 장관직을 항의 사퇴했다). 전쟁의 한쪽 당사국에 전쟁 자금을 대출해주면서 중립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또한 나이 위원장은 윌슨이 참전 이전에 이미 연합국들의 밀약을(연합국이 이길 경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동맹국 영토를 분할 지배한다는) 알고 있었으며, 상원 외교위원들에게는 나중에(1919년) 베르사유 평화회담에서 비로소 알게 됐다고 '허위' 증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윌슨이 의회와 국민을 기만했다는 얘기다.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의 공저자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은 1차 대전 당시 윌슨의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나이 위원회 조사는 윌슨이 사실상 국민을 속이고 전쟁에 참전했음을 보여주었다. 윌슨은 연합국들에 대한 대출과 기타 지원을 허용함으로써 중립정책을 해쳤고, 독일군의 만행을 의도적으로 과장했으며, 연합국들 간의 밀약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했다. 1차 대전은 민주주의 확보를 위한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고. 제국의 전리품을 나눠먹기 위한 전쟁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53쪽)  

그러나 우드로 윌슨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민주당 의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태를 두고 당시 <워싱턴 포스트>는 "항의와 분노의 회오리바람이"이 몰아쳤다고 표현했다.  

상원의원 톰 코널리(텍사스)가 공격을 주도했다. 그는 1월 17일 상원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나는 특위에서 주장하는 혐의들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악랄하기 그지없는 주장이니까요. (중략) 특위 위원장이라는 자가 우리를 평화로 안내하겠다고 하면서 돌아가신 분(윌슨)에 관한 역사의 기록을 바꿔놓고 있습니다. 그분은 위대했고 선하셨으며 살아생전에는 적들과 감연히 맞선 분이었습니다."  

그는 이어 나이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1차 대전 관련 미국 역사 기록에 먹칠을 하려는 가증스러운 짓거리"라고 비난했다. 

다음날에는 윌슨 행정부 말기 재무장관을 역임한 카터 글래스 상원의원(버지니아)이 공격에 나섰다. 그는 나이에 대해 "악랄한 중상모략, 돌아가신 대통령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비방, 윌슨의 무덤에 오물을 뿌리는 짓거리"라고 비난했다. 주먹으로 탁자를 얼마나 세게 두들겼는지 들고 나온 문건에 마구 피가 튀었다. 글래스 의원은 이렇게 고함쳤다.

"아니 이런 악의적인 선전선동이 어디 있습니까. 거짓 주장입니다. 모건 가문이 우드로 윌슨의 중립정책을 바꿔놓았다니 말이나 됩니까!" 

나이 위원장은 차분하게 반박했다. "정말 놀라운 일은 특위 활동을 잠시 중단하기 위한 '사전 조율' 같은 것이 없었는데, 모건과 그 일파들이 출석하면서 특위에 대한 적대감이 분출됐다는 사실"이라며 사과 발언을 하는 대신 관련 서한과 문건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미국은 전리품을 나눠 먹기로 한 사실을 알면서 참전했다. 그런데 우리는 연합국들 간에 비밀협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베르사유 평화회담에 가서야 비로소 폭탄 같은 뉴스로 알게 됐다"(5편에 계속됩니다.)     


윌슨이 추앙받는 이유는
[전쟁국가 미국·1강-⑤] 미국의 세계 지배와 선전 선동
2018.12.31 08:37:55

조직적 선전‧선동의 시작

1차 대전이 끝난 지 100년, 나이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지 8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제럴드 나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 참전의 주요 원인이 JP모건 구하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미국의 참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윌슨의 민족 자결'로 기억된다. 윌슨은 민족 자결,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주창한 미국식 이상주의 외교의 선도자로 추앙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직적인 선전‧선동(propaganda) 덕택이다.  

윌슨은 참전을 결정하고 2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917년 4월 13일 참전을 독려하기 위한 선전기관으로 공보위원회(CPI : 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를 설립한다. 국민들의 전쟁 열기를 북돋우고 반전평화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대학과 언론의 전폭적인 참여 하에 CPI는 훌륭하게 그 목적을 이뤄낸다. 이후 전쟁과 관련된 정부의 선전선동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는다. 2차 대전과 한국전쟁, 걸프전쟁과 이라크 침공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고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윌슨이 내세운 '민족 자결'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기만적이었던가를 살펴보자. 윌슨이 민족 자결을 포함한 14개 평화원칙을 발표한 것은 1918년 1월 8일 의회 연설을 통해서였다. 윌슨은 연설에서 미국 참전의 목적은 국제 사회의 공정한 평화 수립에 있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속내는 사뭇 달랐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독일과 단독 강화를 추진하는 소비에트 러시아를 만류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3월 3일 소련이 독일과 단독 평화협정(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윌슨의 시도는 실패한다. 제정 러시아 영토였던 폴란드와 핀란드, 발트 3국, 우크라이나, 조지아에 대한 주권(면적 77만 7000㎢, 주민 5000만 명)을 포기한 값비싼 평화였다. 

윌슨이 내세운 14개 평화 원칙 중 제6항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모든 영토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 러시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해결함으로써, 러시아가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자국의 정치 발전과 국가 정책에 대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자국이 스스로 선택한 제도 하에서 자유로운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진심으로 환영을 받을 수 있도록 세계의 다른 국가들이 최선을 다해 최대한 자유롭게 협력할 것이다." 

즉 소비에트 러시아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민족 자결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윌슨은 영국 등 서방 국가들과 함께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기 위해 미군을 러시아에 파견한다. 미군의 러시아 주둔은 윌슨의 민족 자결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중적 행태는 그가 주창한 국제연맹 창설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다. 윌슨의 평화주의 외교에 공감했던 미국의 많은 진보적 정치인, 지식인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탓이다.

▲ 대통령 재직 시절의 우드로 윌슨 ⓒU.S. National Archives


공보위원회(CPI : 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 

공보위원회(CPI)은 윌슨의 친구이자 덴버의 신문기자 출신 조지 크릴이 맡았다. 크릴이 CPI에 합류한 것은 에드워드 버나이스를 통해서였다. 버나이스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귀화 미국인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두뇌 회전이 가장 빠른 선전가로 꼽힌다. 그는 당시 미국에는 아직 생소했던 인간심리학 분야의 전문가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이자 미국 저작권 대리인이었기 때문이다.  

크릴과 버나이스는 친영파 저널리스트이자 윌슨의 절친한 조언자인 월터 리프먼의 소개로 CPI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리프먼은 모건을 둘러싼 월가 세력과 영국의 비밀조직 '라운드 테이블'을 이어주는 밀사였다. 라운드 테이블은 1909년 창립된 이래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하도록 영국을 부추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CPI는 전시에 사실상 미디어 검열관 노릇을 했다. 뉴스 매체를 검열하는 '자율적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반독일 선전을 통해 의회가 미국 역사상 가장 억압적인 법률인 방첩법(1917년)과 반선동금지법(1918년)을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명한 사회주의자 유진 뎁스는 반전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18년 6월 체포돼 방첩법 위반 등 10개 혐의로 10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전쟁이라는 것들을 보면 정복과 약탈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중략) 그게 바로 전쟁의 본질이에요. 지배계급은 늘 전쟁을 선포만 했습니다. 실제 전투에 나가 싸우는 것은 늘 피지배계급이었습니다"  

또한 CPI는 선정적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크릴, 프로이트 심리학과 그것을 통한 인간의 무의식적 동기 분석이라는 무기를 갖춘 버나이스, 이 두 사람을 내세워 미국 대중을 선동했다. 독일 병사들이 벨기에 아기를 총검으로 난도질했다든가, 벨기에 여인의 젖가슴을 도려냈다는 식의 충격적 얘기를 퍼뜨림으로써 독일에 대한 원초적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런 '정보'들을 보도자료 형태로 언론에 배포했다. 매주 2만 건이 넘는 신문 칼럼이 CPI의 보도자료를 인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4분 맨(Four-Minutes Man)이라는 전국 차원의 자원봉사단을 꾸렸다. 그들의 임무는 영화 시작 전에 전쟁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4분간 하는 것이었다. 7만 5000명이나 되는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이것은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카이저 : 베를린의 야수> <늑대 같은 독일 문화> 등의 반독일 선전영화를 상영했다. <타도하자 독일 황제>라는 영화는 어찌나 인기가 좋았던지,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입장을 거부당한 데 격분한 군중들이 난동을 부리는 탓에 폭동 진압 경찰이 출동했을 정도였다.

이들의 전략은 인간의 가장 저열한 감정을 충동질 하는 것이었다.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웰은 1927년 <세계 대전에서의 프로파갠다 기술>이라는 저서를 통해 1차 대전 동안 CPI가 행한 선전선동을 분석했다.  

라스웰은 이 책에서 크릴과 리프먼, 버나이스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했는데 이들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들이라고 해서 지성적으로 행동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감성적으로 호소함으로써 어떤 행동인가에 나서도록 의식적으로 그들을 이끌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라스웰 역시 그들의 믿음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반면 독일의 선전선동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완전히 실패했다고 한다. 라스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쟁 기간에 병력과 자원의 동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인식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여론도 동원해야 했다. 여론에 대한 지배력은 생명과 재산에 대한 지배력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현대국가에서는 전쟁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강하므로 모든 전쟁을 위협적이고 잔인무도한 침략자에 맞선 방어전으로 보이게끔 몰아가야 한다."

"잔인한 이야기는 늘 인기가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대중이 적에게 품은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느끼게 해주고, 또 어느 정도는 범죄 가해자와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에게 강간당한 젊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피해국의 많은 남성들에게 은밀한 대리만족감을 준다."  

이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군사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됐다. 여론에 대한 지배력, 인간 심리에 대한 조작이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하게 됐다. 버나이스는 1928년 저서 <선전>을 통해 자신의 성공을 이렇게 자랑했다. 

"전시의 선전이 놀라운 성공을 거두자 일부 지식인들은 선전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1955년 저서 <동의의 조작>(The Engineering of Consent)을 통해 "홍보는 정보와 설득, 조정을 통해 대중이 어떤 행동이나 주의주장, 운동이나 조직을 지지하도록 이끄는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1차 대전을 기점으로 여론 조작을 통한 '동의 이끌어내기(Manufacturing of Consent)'는 미국이 영구 전쟁 국가로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대량살상무기의 등장 

1차 대전에서는 대량살상무기가 처음 등장한다. 독가스(화학무기)가 그것이다. 또한 공중폭격이 처음 시도되면서 군사력의 중심이 해군력에서 공군력에서 이동하는 단초가 된다. 특히 1차 대전 당시 미국은 화학무기 분야에서 놀라운 생산력을 과시한다.

화학무기는 1915년 4월 22일 2차 이프르전투에서 독일이 프랑스 군에 대해 처음 사용했다. 그해 9월 영국군은 프랑스 로스에서 독가스로 독일에 보복했다. 1915년 4월-1917년 7월 독가스 전투로 인한 영국군 사망자는 1895명, 부상자는 2만 1908명이었다.

그러나 1917년 7월 12일 독일군은 이프르에서 영국군에게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겨자 가스를 사용했다. 이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가스로 인한 영국군 사망자는 4167명, 부상자 16만 970명으로 크게 늘어난다. 러시아군의 경우 독가스 사망자는 5만 6000명, 부상자는 42만 5000명에 달한다.  

▲ 1차 세계대전 당시 방독면을 쓰고 있는 독일 군사들 ⓒ위키피디아


전쟁 기간 중 교전국들은 39종의 독극물 총 12만 4000톤을 사용했다. 독가스는 대부분 66만 발의 포탄으로 쏴서 살포했다. 미국은 뒤늦게 화학무기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생산력에 있어서는 단연 발군이었다. 미국의 화학무기 프로그램은 1917년 9월 각 대학에 분산돼 있던 연구 프로그램을 수도 워싱턴 D.C.의 아메리칸대학에 일원화함으로써 본격화됐다.

1918년 6월 28일에는 육군 산하에 화학전국을 신설했다. 1700여 명의 화학자가 60여 동의 건물에서 작업을 했다. 종전 무렵에는 화학자 수가 5400명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화학자의 전쟁'이란 말까지 나왔다. 원자탄이 개발된 2차 대전은 '물리학자의 전쟁'이었다.

미국이 생산한 화학무기는 영국, 프랑스, 독일을 다 합친 것보다 3-4배나 많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인간을 말살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전쟁이 끝나던 날, 미국은 겨자 가스 2천 톤을 유럽 전장에 보내기 위해 항구 부두에 쌓아놓은 상태였다.

1920년의 한 청문회에서 전쟁부 차관보 베네딕트 크로웰은 1919년으로 계획된 대공세에서 화학무기가 핵심적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1919년 대공세가 시행됐다면 아마도 베를린 입성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겁니다. 화학무기 덕분에 말입니다. 물론 그 계획은 극비였지요." 

우드로 윌슨과 민족 자결 

우드로 윌슨은 '민족 자결'이라는 미국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은 아직도 미국 외교의 대원칙으로 통용된다. 미국에서 윌슨은 미국이라는 나라와 대통령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놓은 지도자로 평가된다. 윌슨을 떠받드는 미국인들의 세계관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남부 버지니아 주 출신의 윌슨은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장로교 목사로 도덕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했고 대단히 고집이 세며 독단적이었다. 그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세계를 위한 고귀한 사명을 띠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1차 대전 종전 직후 "마침내 세계는 미국이 세상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프린스턴대 총장 시절인 1907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닫혀 있는 나라들의 문을 때려 부숴야 한다. (중략) 외국에서 금융가들이 따낸 이권은 각료들이 안전하게 지켜줘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고분고분하지 않는 나라들의 주권이 침해돼도 할 수 없다." 

그는 혁명을 혐오하고 무역과 투자 확대를 열렬히 옹호했다. 대통령이 된 후 전미외국무역협회 발언에서 "내가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이 나라의 무역을 최대한 발전시키고 외국 시장을 정당하게 확보하는 일"이라고 공언했다. 파업은 "문명에 도전하는 범죄"라고도 말했다.  

또한 남부인의 후예답게 백인이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이 강했고 대통령 재임 기간에 연방정부 공무원들에 대한 흑백차별을 노골화했다. 심지어 1915년에는 인종주의 영화로 악명 높은 <국가의 탄생>을(영웅적인 KKK 단원이 야만적이고 음탕한 노예 출신 흑인들로부터 힘없는 백인 여성을 구해낸다는 내용) 백악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는 "촌철살인으로 역사를 썼구먼. 딱 하나 유감인 건 저게 다 진실이라는 거야"라고 말했다.

참전을 통해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계'를 만들겠다는 윌슨의 원대한 구상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대해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은 "윌슨의 실패는 이상주의와 군사주의, 탐욕과 현실정치가 독특하게 혼합돼 있던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의 강대국으로 급속히 탈바꿈하던 시기의 상징"이라면서 "1920년대 초가 되면 제퍼슨과 링컨, 시인 휘트먼과 청년 제닝스 브라이언이 꿈꿨던 미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J. 에드거 후버, 우드로 윌슨의 손때가 묻은 미국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윌슨의 이중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회정의를 외쳤지만 재산권은 신성불가침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은 형제라고 하면서도 백인이 아닌 인간은 열등하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찬미하면서도 시민적 자유를 유린했다. 제국주의를 규탄하면서도 제국의 질서가 존속되도록 용인했다."  

그것은 어쩌면 "영토와 시장, 안전에 대한 욕망을 번영, 자유, 안보 같은 그럴 듯한 명분으로 정당화"해온(역사학자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 미국적 전통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미국인의 윌슨적 세계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1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