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중심 통일론 30년, 이제 '동독'에서 바라보기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①] 독일 신연방주 사람들을 만난 이유는?
2018.10.06 11:30:54
올해 초만 해도 이 같은 반전이 일어나리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남북은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해빙의 물꼬를 텄다.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의 중요한 변수인 북미관계 역시 화해의 전기를 맞았다.
지금 필요한 건 공존과 교류의 길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세밀히 닦는 것이다. 그간 북한은 어떤 한국인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한국에는 남극만큼이나 먼 땅이었다. 한국이 사실상 섬이었던 까닭이다. 이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남북이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만 그 다음(통일)을 본격적으로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 통합'이 먼저 선행되는 게 중요하다.
지금은 정부가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교류가 시작된다면 정부는 필연적으로 뒤로 물러나게 된다. 시민 각자가, 인민 각자가 교류의 주체가 된다. 이제 질문을 준비해야 할 때다. 과연 우리는 북한과 교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오는 2019년은,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진지 꼭 30년째 되는 해다. 그 30년간, 이를테면 베를린 장벽을 넘어 온 동독의 스무살 청년은 이제 50살이 됐다.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어떻게 직업을 구했고, 어떻게 서독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을까?
교류는 상호 동등히 이뤄져야 한다
<프레시안>은 지난 9월 7일부터 약 이주일에 걸쳐 독일을 둘러봤다. 정확히는 독일 신연방주, 즉 옛 동독 지역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모두 동독 체제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만난 이유는 간단하다. 분단 시절 동서독이 얼마나 달랐는지, 재통일 후 두 체제가 어떻게 하나로 융합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점이 어려웠는지를 개개인 삶의 여정을 통해 알아보기 위해서다.
우리에게 독일 재통일은 어느 정도 익숙한 주제다. 모두가 대략적인 재통일 이야기를 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로부터 1년여 후인 1990년 10월 3일, 분단됐던 서독과 동독은 다시 하나의 독일로 통일됐다. 서독의 동독 흡수 통일이었다. 독일은 급박했던 재통일의 비용을 치르느라 한때 ‘유럽의 병자’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고생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결국 탄탄한 통일 국가로 다시 섰다. 지금도 유럽 경제를 견인하는 선진국 독일의 역사에 관해 우리가 익히 들어온 줄거리다.
이 이야기에서 빠진 내용이 사람이다. 우리는 오랜 기간 이어진 동서독의 교류를 서독 정부, 서독 체제 중심적으로 들어왔다. 서독 정부가 이른바 '동방정책'을 이어왔고, 때맞춰 소련을 정점으로 한 공산 체제가 무너졌기에 재통일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실제 사람의 이야기는 빠져 있다. 통일은 당시 극단적으로 다른 체제를 살던 사람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동서 교류가 정말 동독 사람들에게 통일에의 열망을 불러일으켰는지 등의 이야기를 통일의 약자였던 동독의 입장에서 우리는 정리해보고자 했다.
통일 후 교류의 경험 역시 중요하다. 동서독 통일 후 이어진 동서 독일 사람들의 교류는 일방적이었다. 서독 자본이 주역이었고, 서독 정치가 주역이었고, 서독 사회가 주역이었다. 흡수 통일의 결과다. 동독은 철저히 조연에 머물렀다. 그 차이가 잘못된 교류로 이어졌다. 독일은 지금도 이 격차를 극복하는 중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반면교사다. '흡수통일은 안 된다'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 '강자 주도의 일방적 교류는 안 된다'는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남북한 사람이 동등하게 교류할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구체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통일로 북한 시장이 열리면 남한에도 일자리 기회가, 추가 투자 기회가 열릴 것’이라는 식의 통일 설득론은 자칫 북한을 단순한 투자 대상으로만 전락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 독일 베를린 테러의 토포그래피 박물관 인근에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의 잔해. 베를린 시내 곳곳에 장벽이 보존되어 있다. ⓒ특별취재팀
다른 체제는 다른 사람을 만든다
물론 독일과 한반도 사정은 다르다. 이제는 둘의 역사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두 분단 상황의 동질성이 오히려 논의되지 않을 지경이다.
다른 체제는 다른 사람을 만든다. 오늘날 북한을 '우리의 이웃'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오늘날 청년세대 중 일본인, 미국인, 유럽인보다 북한사람을 더 가까운 이로 생각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북한에는 이제야 기초적 자본주의 체제가 이식되고 있다. 자생적으로 피어난 '장마당 자본주의'다.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체제다. 한국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최선봉에 선 나라다. 수출 의존도가 매우 높은, 다시 말해 세계 경제에 밀접하게 접목된 나라다. 시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몰아낸 경험을 한 민주주의 국가다. 이처럼 다른 체제가 70년 이상 잦은 교류를 하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우리가 남북 교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건, 화성인과 금성인의 만남이다.
때로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살펴야 숲이 살아난다. 정부가 숲을 조성하지만, 나무를 건강하게 자라게끔 하는 힘은 민간에서 나온다. 우리는 독일의 사례에서, 민족 통일의 당위론 차원에서 오직 큰 이야기만 하다 놓친 세밀한 이야기들이 결국 커져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친구 사이에서, 연인 사이에서 작은 갈등이 큰 싸움으로 벌어지는 것과 같다. 한국 사회는 이에 관한 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동독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최대한 세밀히 정리할 것이다. 그들의 삶을 통해 동독에서, 통일 독일에서 한국의 과거사를, 북한의 오늘을, 미래에 평화로운 공존이 보장되는 한반도를 상상해보고자 했다. 동독인의 삶을 거울로 삼아, 우리는 다가올 교류의 시간에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인터뷰이 각자의 관점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는 각자의 삶만큼이나 제각기다. 그럼에도 화자들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북 교류에의 단초를, 반면교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11편의 이어질 이야기는 크게 통일 당시 성년이었던 이들의 이야기, 통일 당시 청소년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로 나뉜다. 마지막으로는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정리한다. 독일 분단이 낳은 아주 특별한 기업사 한 편도 준비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 바란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본 기획은 독일 신연방주에서 분단과 재통일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특별취재팀
서독 사람들 잘 사는 게 부러웠었냐고요? 전혀요!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②] "동독은 통일을 기대하지 않았다"
2018.10.08 14:07:51
예나는 신연방주(옛 동독 지역이었던 5개주) 튀링엔(Thüringen) 주의 인구 11만 명 규모 중소도시다. 세계적 광학 기업인 칼 자이스(Carl Zeiss)의 의료장비사업부와 천문장비사업부가 이 도시에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칼 자이스의 기업 철학을 확고히 한 경영인이자 과학자 에른스트 아베가 교수로 머문 프리드리히 쉴러 대학(Friedrich Schiller University)도 유명하다. 신연방주 대부분이 침체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예나는 오랜 산학 협동 체제가 안착한 덕분에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주거비용이 계속해서 오르는, 신연방주에서는 찾기 힘든 도시다.
지난 달 9일과 10일, 이곳에서 평생을 보낸 크리스티안 플뤼겔(Christian Flugel, 이하 크리스티안, 1948년생)-카린 플뤼겔(Karin, 이하 카린, 1950년생) 부부와 이바 마리아 베어톨트(Eva Maria Berthold, 이하 베어톨트, 1953년생) 씨를 만났다. 이들은 아동기에 동독 체제를 경험했고, 청년기에 동독 체제에 적응했으며, 부모가 되어 동독 민주화 시위와 독일 재통일을 경험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새로운 사회에 적응했다. 플뤼겔 부부는 지금도 가끔 일하는 한편, 인근에 거주하는 자녀 부부와 교류하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베어톨트 씨도 안정된 직업을 가진 자녀 부부를 가끔 만나며 큰 문제없는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옛 시절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자유가 중요했다
고등학교 졸업 파티에서 만난 플뤼겔 부부는 1971년 결혼했다. 첫 아이를 바로 얻었다. 크리스티안은 측량기 설계사로, 기계 설계사로 직업을 바꿔가며 일할 때였다. 카린은 육아를 위해 잠시 일을 쉬었다. 쉬다 보니 카린이 다시 전공인 회계업무자로 노동 현장에 나간 건 결혼 14년째였다. 지속적인 인구 유출로 인해 여성 노동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동독에서 여성이 이처럼 오래 집에 머무른 건 흔치 않은 사례다. 이들 부부는 동독 정부에 아이를 맡기길 원하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큰 아이가 졸업반이 되자, 부부는 체제와 본격적으로 불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독에서는 당국이 허락한 학생만 아비투어(Abitur, 대학입시자격)를 볼 수 있었다. 한 반에 2~3명 정도로 한정됐다. 학생은 자유독일청년단(일명 유겐트, FDJ, Freie Deutsche Jugend)에 가입해야 입시 자격 취득에 유리했다. 부모가 당에 충성한다는 증거를 보여야 했고, 입시 자격을 얻어도 남성의 경우 병역을 잘 마쳐야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유럽 사회에서 기독교는 근본 문화이자, 삶의 방식이다. 유물론 국가가 되었다고 해서 이를 단숨에 탄압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교회는 당국에 껄끄러운 존재였다. 부부의 큰 아들은 반에서 1등을 도맡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아비투어를 받지 못했다. 부부는 자녀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가 되기를 원했다. 1987년, 부부는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당시 국가평의회 의장에게 직접 탄원서를 써 자녀의 아비투어 응시 허락을 요청했다. 일은 풀리지 않았다. 당시 동독에서 시민이 당국에 무언가를 요청할 때 이처럼 의장 앞으로 된 편지를 쓰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결되는 일도 많지 않았다. 큰 문제없이 살던 부부는 체제의 문제점을 절감했다.

▲ 이바 마리아 베어톨트 씨. 평생을 예나에서만 살아온 토박이다. 베어톨트 씨를 비롯해 많은 동독 출신이 통일 여파로 동독의 공동체 정신이 사라졌음을 안타까워한다. 실제 이동기 교수에 따르면, 동독은 가족의 유대 정도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곳이다. 정서적으로 서독보단 한국에 더 가까운 곳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별취재팀
베어톨트 씨도 체계화된 억압에 신음했다. 베어톨트 씨는 동독 유일의 공보험 회사에서 일했다.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의 독재정당) 당원 가입 압력이 회사에서 내려왔다. 회사 내에는 당연히 슈타지(STASI, 동독 국가보안부, 동독의 방첩기관이지만, 소련의 KGB처럼 사실상 시민 감시 역할까지 담당했다.)와 연결된 인사가 있었다. 베어톨트 씨는 체제에 조용히 저항하는 사람이었다. 가입을 거부해서 여러 차례 추궁을 당했다.
그 사이 아이는 둘로 늘어났다. 회사를 옮겨야 했다. 보험사는 하루 8시간 근무를 요구했다. 젊은 나이였지만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루 6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줄이려니 이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공 교통관리부로 이직해, 대중교통 계획을 짜는 업무를 했다. 당시에 일자리를 찾기란 쉬웠다. 사람이 모자라기도 했다. 더 중요하게는, 노동이 노동자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없는 일자리라도 만들어야 했다.
이 두 가족에서 공통점이 하나 발견된다. 결혼을 일찍 했고, 아이를 일찍 낳았다는 점이다. 플뤼겔 부부는 23-21살에 결혼해 바로 아이를 가졌다. 베어톨트 씨는 스무 살인 1973년에 결혼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때는 다 결혼을 일찍 했어요. 나이 스물에 아이를 가진 사람이 흔했지요. 동독에서 집은 당국이 모든 인민에게 지급하는 의무의 대상이었고, 사적 거래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야 집을 주고, 아이가 많아야 더 큰 집을 줬으니까 결혼을 일찍 해야 할 수밖에 없었죠. 여자는 출산 몇 주가 지나면 바로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다시 일터로 나가곤 했죠." (베어톨트)
아이가 늘어나자 베어톨트 씨는 문제에 부딪혔다. 예나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칼 자이스 (당시) 본사가 위치했다. 동독 전역에서 노동자가 모여들었다. 10만여 명 규모의 이 도시가, 동독 시절에는 6만여 명의 칼 자이스 노동자를 품었다(이들 중 약 5만여 명이 통일 직후 일자리를 잃는다). 체제가 한계에 다다르자 집 공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가 많아도 방 2개짜리 집을 얻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동독 사람들이 일찍 결혼한 이유, 일찍 아이를 낳은 이유가 집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그마저도 힘들어진 것이다.

▲ 베를린 슈타지 박물관에 보관된 1982년 예나의 평화 시위 모습. 1980년대 초부터 동독 전역에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이어졌다. ⓒ특별취재팀
시민 혁명
베어톨트 씨는 체제가 무너지리라는 예감을 하기 시작했다. 실은 둘째를 얻기 전, 1981년에 한 아이를 더 얻었었다. 하지만 출산 닷새 만에 아이가 사망했다. 아이의 기형이 원인이었다. 영양 결핍 문제도 있지 않았나 싶었다. 임신 시절 음식 배급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빵이나 버터를 얻기도 점차 힘들어졌다. 집 문제가 생기고 배가 고파지니 참았던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체제가 한계에 달했으니 계속 억누를 수는 없잖아요. 옛날에는 정년퇴직한 노인만 서독으로 이주를 요구하면 보내줬거든요. 그런데 서서히 나이 제한이 풀리더라고요. 서독으로 오가는 기준도 조금씩 완화되고. 서독에 가서 잘 사는 친척을 만나 선물이라도 얻어오면 사람들 기분이 풀릴 테니 그걸 노린건가 싶기도 해요." (베어톨트)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시민은 완전한 자유를 원했다.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시민 저항은 1989년 9월 25일, 마침내 라이프치히(Leipzig)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를 중심으로 시민 8000여 명이 집결한 역사적 민주화 운동 '월요 시위'로 폭발했다. 한 달 후 시위 인원은 7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실질적인 독일 재통일의 시작이다. 반체제 집회가 동독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예나에서도 성 미카엘 교회(Stadtkirche Sankt Michael) 앞 광장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팔을 교차해 원을 빙 둘러 조용히 침묵하는 시위였다. 플뤼겔 부부도 시위에 참석했다.
흔히 한국에서는 동서독 통일을 '독일 통일'로 표기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잘못된 표기다. 독일에서 동서독 통일은 '재통일(Wiedervereinigung)'로 표기한다. '독일 통일'은 프로이센 제국에 의한 1871년의 독일 제국 성립을 뜻한다. 독일 재통일을 시간순으로 정리할 때, 서독의 동방 정책보다 먼저 거론해야 할 일이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민주화 혁명이다. 한국이 반독재 투쟁으로 민주정권을 쟁취하던 때와 비슷한 시기, 동독에서도 민주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동독 인민이 시위에서 주로 쓴 구호가 "우리가 인민(Wir sind das volk)"이라는 말이다. 비록 이 구호가 최근 독일 극우의 인종차별 집회에 다시 쓰여 그 의미가 퇴색된 감은 있지만, 동독 민주화 투쟁 당시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민주화 투쟁은 실제 결실도 낳았다. SED는 독재를 포기하고, 자유 선거를 받아들이는 한편, 시민운동 대표자들과 함께 새 동독 헌법 논의를 위한 시민회의기구도 받아들였다. 시민의 힘으로 새로운 민주국가 동독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 5월 18일 동서 마르크화 통합이 이뤄짐에 따라 사실상 동서독은 재통일되었다.

▲ 크리스티안 플뤼겔 씨. 통일은 그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플뤼겔 부부는 지금도 자녀들과 자주 교류한다. 교육열, 자녀에 관한 관심 등에서 한국의 부모 세대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크리스티안 씨는 스스로를 "예나 사람(Jenaer)"이라고 칭했다. ⓒ특별취재팀
"예나에도 슈타지 근무처가 있었어요. 교회에서 예배를 볼 때도 슈타지의 비밀정보원이 참석한다는 걸 모두가 알았지요. 그 사람들은 다 녹음기를 들고 다녔어요. 항상 당국이 감시하니까, 솔직히 말해 난 시위에 나갈 때 조금 무서웠어요." (크리스티안)
"이 양반은 무서웠다는데, 난 안 무서웠어요. (웃음) 성 미카엘 교회 앞에 조그마한 광장이 있는데, 여기가 시 중심가입니다. 그냥 사람들이 손잡고 원을 만들었죠. 무슨 플래카드 같은 걸 들고 있지도 않았어요. 주로 사람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한 번은 (당시 국영기업화한) 자이스 (당국이 임명한) 사장이 나와서 동독 정부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어요. 사람들이 다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했던 게 기억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인상 깊은 장면이지요." (카린)
서쪽에서는 샴푸 향기가 났다

▲ 동독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독일 재통일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됐다. ⓒ특별취재팀
분단 시절 동서 독일은 남북한처럼 완전히 교류를 닫지 않았다. 물론 분단 초기에는 이들도 냉전의 최전선 국가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1960년대 말까지 서독은 동독 수교국과는 국교를 단절한다는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 Doctrine)'을 추진했다.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을 추진하면서 본격적으로 해빙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부 차원의 이야기다.
민간 교류는 분단 초기부터 매우 활발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독 한 가운데에 있던 베를린에서 동서 사람이 비교적 자유롭게 상대 영역을 오갈 수 있었다. 장벽이 세워진 후에도 상대 체제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다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 왕래가 가능했다.
동독 체제가 점차 흔들리며 복지 부담이 커지자 정년퇴직자, 연금생활자는 자유롭게 서쪽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 정치범이나 체제 부적응자 등은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에 일정액의 배상금을 내고 서쪽으로 데려오는 식의 이전도 있었다.
이산가족의 일회성 상봉조차 힘겨운 남북의 분단 상황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에 따르면 "1963년부터 한 해에 가장 적게는 7000여 명, 가장 많게는 3만5000여 명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합법 이주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동독을 이탈한 난민의 수는 매년 3000명에서 6000명이었지만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합법 이주민 수는 그것의 2배에서 5배나 많았다."
(☞관련기사 : 독일 통일 새롭게 보기 "이제 평화능력을 기를 때")
물론 모든 이가 자유롭게 동서를 왕복한 건 아니다. 동독의 군인, 경찰, 교사 등 당국이 중요하게 생각한 노동자는 서독 방문이 어려웠다. 그렇더라도 인척 관계가 분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속됐다는 점은 분명 남북의 분단 상황과 비교될 만한 지점이다. 동서독 사람들이 인접 국가인 체코에서 상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훗날 동독 체제가 흔들리고 인근 국가에 자유화 바람이 불자, 체코와 헝가리 등 인접 국가는 동독인의 서독 탈출 경로가 됐다.
베어톨트 씨도 분단 시절 서쪽 사람들과 교류했다. 친척들이 바이에른 주에 거주했다. 친척들은 자주 동쪽으로 찾아왔고, 베어톨트 씨 역시 가족 행사일에는 서쪽을 방문했다.
"서쪽에 있는 친척 한 분이 페인트업자였어요. 예나에 오실 때마다 꼭 하는 말씀이 '왜 건물들이 다 회색이냐'는 거였어요. 그런 차이가 있다는 걸 당시는 몰랐지. 통일 후 예나에서 가장 먼저 바뀐 게 건물 벽 색깔과 지붕 색깔이에요.
나도 서쪽에 다녀와 봤죠. 1986년 즈음이었는데, 서독 친척집에 가서 돌아올 때마다 친척들이 돈을 주머니에 넣어주곤 했었는데, 그래도 못 받아요. 서독에서 들어오는 기차는 도중에 경찰이 한 번 세운 후, 승객 신분증 검사를 하고 짐을 다 뒤졌거든요. 걸리면 큰일 나지요. 그러니 일정 액 이하 물건만 받았지, 돈은 안 됐어요.
서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슈퍼마켓에 요거트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게 가장 안 잊혀. (웃음) 집 샤워실에 수압, 온도를 조절하는 장치가 있는데 그걸 사용할 줄 몰라서 다섯 살 조카에게 물어본 기억도 나요. 이때가 1987년이네.
당시 동독에는 샤워 시설이나 욕조가 없는 집이 많았어요. 우리는 시부모님 댁 지하실에 수도를 연결해서 욕조에 물을 받아 샤워했는데, 그나마 사정이 괜찮았지요. 샤워실이 없는 집은 예나 시내의 수영장 샤워실을 이용했으니까." (베어톨트)

▲ 카린 플뤼겔 씨. 지금도 집에서 회계 관련 업무를 틈틈이 본다. 동독은 여성의 노동력을 중요시했기에, 이처럼 상당수 동독 여성은 평생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여성을 가정에 두려한 문화는 서독의 것이었다. ⓒ특별취재팀
"20, 30, 40, 50세 등 뒷자리가 '0'으로 끝나는 생일을 크게 기념하는 게 독일의 문화에요. 서독에 사는 친척 중 이 나이 대 생일을 맞은 이가 있으면 동독에서도 비교적 쉽게 서쪽으로 갈 수 있었어요.
크리스티안의 친척이 서쪽에 살아서 1985년에 이 양반이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인근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완전히 낯선 사람이 되어서 돌아온 거야. 몸에서 샴푸 냄새가 나더라고. 너무 놀라서 난 그때 울었지 뭐야. (웃음)" (카린)
통일을 원한 건 아니다
서독의 우월한 문화는 분명 동독 사람을 놀라게 했다. 우리의 경우도 실제 많은 한류 드라마, 한류 스타가 북한 사회에서 알려지면서 새로운 충격을 경험하는 이들이 늘었으리라 예상된다. 분명 그 같은 효과가 동독에 있었다. 당시 튀링엔 주 일부를 제외하면, 동독 대부분 지역에서 서독 방송 전파가 잡혔다. 원하는 이라면 누구나 서독 방송을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서독 방송을 통해 동독 젊은이들은 일찌감치 서구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서구의 자유로운 문화는 동독 젊은이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대표적인 아이콘이 청바지다. 청바지와 로큰롤은 당시 젊음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동독 젊은이들에게 리바이스 청바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동독 국민의회 회장을 지낸 호르스트 진더만(Horst Sindermann)의 손자가 리바이스에 열광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동독은 내외의 자유 압력에 맞서기 위해 다른 공산국가보다 상대적으로 인민에게 더 자유로움을 주려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독 인민은 서방을 제외하면 자유롭게 해외여행이 가능했다. 정부는 자체적으로 청바지를 제작해 인민에게 보급했다. 펑크 밴드 활동도 가능했고, 염색 등의 소소한 일탈도 허용됐다. 그럼에도 약간의 자유로 인민의 근본적 열망을 짓누르기란 불가능했다.
특히 체제 후반기가 되면 이 같은 열망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게 된다. 대표적 사례가 미국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1988년 동베를린 콘서트다. 동독 정부는 상대적으로 '반미적(?)'이면서 이미 공공연하게 동독 젊은이들 사이에 알려진 이 가수를 불러 인민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으나, 결과는 당혹스러웠다. 당시 동독 인구의 1%가 넘는 16만 명이 공연장에 모여 성조기를 흔들어댔다.
그런데 이들이 '자유'와 '통일'을 동일시했으리라고 단언하기란 어렵다. 민주적 체제로의 전환과 통일은 완전히 다른 맥락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를 비롯해 우리가 현지에서 만난 이들 상당수도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인들이 원한 건 민주주의와 자유였지, 통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통일 구호는 장벽 붕괴 1년여가 가까워서야 나왔다는 평가가 사실상 정설이다.
"서독으로 도망갈 생각을 안 했느냐고? 안 했어요. 그 사람들 잘 사는 것 부럽다거나, 배 아프다 생각하진 않았어요. 서독의 많은 물건들을 보니 ‘이런 게 꼭 필요한가’ 싶기도 하더라고. 물론 동독에서는 자동차를 구하기도 힘들고 물건도 부족했지만,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는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배웠어요. 무엇보다, 모든 게 조금씩 부족하니 이웃과 교류가 잦았지요. 동독에는 상부상조 정신이 있었어요." (베어톨트)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재통일되리라 생각했느냐고? 전혀. 보통 동독 사람 중에 통일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거에요. 물론 동독 독재 체제가 무너지리라 생각은 했지만, 통일을 생각한 건 아니야. 장벽이 무너진 후 서쪽으로 가고 싶었느냐고? 아니요. 이미 아이가 셋이나 되고, 집도 괜찮고 직장도 괜찮았는데 왜 옮겨요? 난 지금도 슈투트가르트나 뮌헨(함부르크와 함께 독일 최고 부자 지역) 같은 데서 살 생각 없어요. 예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에요." (크리스티안)
"물론 서독이 잘 사니까 그 체제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긴 했어요. 그렇다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니 통일되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이제 정말 자유롭게 살겠다'는 생각 정도였지. 아무튼 장벽이 무너진 건 좋았어요. 난 감격해서 막 울었어요." (카린)

▲ 베를린 DDR 박물관에 남아있는 1988년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동베를린 콘서트 모습. 당시 동독에서 자유를 향한 젊은이들의 갈망은 컸다. ⓒ특별취재팀
통일 사회에 적응하기
이유야 어찌되었든, 역사는 '예정대로' 흘러 재통일이 완성됐다. 서독식 체제가 동독을 집어삼켰다. 동독인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 곧 서독인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 짧았던 판타지가 끝나고, 현실이 닥쳤다.
"엄청나게 해고됐지. 슈타지와 관계있던 사람들부터 해고됐어요. 우리 회사에서도 이 회사 오래 못 갈 것 같다는 이야기들이 나왔어요. 그런데 우연찮게 서독의 알리안츠가 동독 공보험을 통째로 인수한다는 정보를 들었어요. 그걸 믿고 알리안츠에 지원해서, 다행히 일자리를 잡았지요. 실제로 1990년 2월 1일에 알리안츠가 동독 공보험을 인수했어요.
당시 동독 사람들이 다 재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서쪽 체계와 동쪽 체계가 달랐으니까. 다행히 알리안츠 재교육은 며칠만 받으면 되는 수준이라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괜찮았어요. 돌이켜 보면 우리는 운이 좋았어요. 내 남편은 칼 자이스 측량 부서에서 일했는데, 이 부서는 서쪽에서도 필요로 해서 다행히 남편도 안 잘렸어요. 그때 자이스에서 엄청나게 잘렸지요.
통합되고 우리 회사에 서쪽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주로 고위직으로. 가족 전부가 잘 모르는 이 동네로 오진 않으려 할 것 아니에요? 주로 남자들만 오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동쪽 여자들은 일도 열심히 하고 가정에도 충실하다'고 좋아했지요. 동독에서는 여자도 다 일하는데, 당시 서독에서 여자들은 주로 집안에만 있었거든. 그래서 그런지, 서독 출신 상사 중에 이혼하고 동독 여자와 결혼하는 사례가 많았어요. 아무래도 주말 부부로 지낸 점도 문제가 됐겠지. 서독에서 온 내 직속 상사는 본인 비서와 결혼했지요.
아무튼,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극도로 바뀌었지. 통일 후 가장 아쉬운 점이, 동독에 남아있던 공동체개념(Gemeinsinn)이 사라졌다는 거에요. 무엇보다 상황이 계속 급변하기만 하고 체제가 안정되지 않으니까 다들 불안해했어요. 실직자가 워낙 많으니 우울증 환자도 많았지요.
그렇다고 통일을 나쁘게 보느냐고? 아니. 통일 좋았어요. 그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통일 당시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많이 안정됐지요. 동독 시절은 꼭 하지 않았어도 될 경험이야." (베어톨트)
"걱정이 정말 많았지. 워낙 급변하니까. 서독 사람들이 동독 사람들보다 더 지위를 중시하더라고요. 사람을 보는데도 직업을 보고 선입견을 가져요. 그나마 예나는 사정이 나았지. 난 적응 잘 했어요. 정치인 생활도 해봤는데 뭘. 그 얘기 들려줄까?
장벽 붕괴 직후에 동독에서 첫 자유선거(1990년 3월 18일 열린 인민회의 자유선거)가 열렸어요. 드디어 SED가 독재를 포기하고, 자유선거가 열렸지요. 사실 이 선거가 지나고 나서야 통일이 민심으로 확 굳었어요. 이때 나는 조경회사 관리자로 일했는데, 기독민주당(CDU)에 입당해 의원 선거에 나갔습니다. 비록 떨어졌지만. (웃음) 이후 우연찮게 예나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도른부르크(Dornburg) 시에서 시장을 구한다는 공모가 나서, 거기 지원했는데 당선됐지요. 당시 이 시의 시장 선거는 시민 선거가 아니었고 의회 선거였어요. 나름 통일 후 다양한 일도 해 봤고, 삶도 잘 풀렸지요. 자식 셋은 다 대학에 보냈고, 여행도 자유롭게 다니고. 통일 덕분에 에어푸르트(Erfurt) 부근 집안 소유 땅도 사유재산으로 인정받아서 그 돈으로 아이들을 유학 보내기도 했지요. 통일로 큰 혜택을 받았어요." (크리스티안)
"돈을 조심해서 써야 한다는 게 통일 후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어요. 빵도 가장 싼 걸로, 식재료도 딱 버터와 햄 정도만으로. 그 정도로 절약해야 했어요. 걱정이 많았지요.
서독 사람들이 군림하는 건 마음에 안 들었어요. 우리는 살아남으려고 밤낮으로 일했거든. 버터 한 조각, 바나나 하나를 사더라도 줄을 서서 샀어. 그런데 서독 사람들이 통일 후에 우리한테 보이는 태도가 '너희 아무 것도 모르니 우선 일하는 법부터 배워'라는 식이에요. 아주 기분 나빴지요. 사람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서독 사람 중에는 우리가 동독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좀 적응하니 괜찮아지더라고. 통일 전에는 막연히 서독 사람들은 다 똑똑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 다만 확실히 다른 건, 서쪽 사람들은 혼자서 살아가는 개인주의 체제에 익숙했는데 우리는 달랐단 거에요. 동독 사람들이 요새도 농담 삼아 이야기해요. 서독 사람들은 오리처럼 뒤뚱거려서 밑창만 봐도 서독 사람인지, 동독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웃음)" (카린)
이 인터뷰이들은 모두 통일에 잘 적응했다. 평온한 일상도 누린다. 물론 세대마다 통일을 바라보는 관점, 통일 경험은 다를 것이다. 우리는 플뤼겔 부부의 자녀, 베어톨트 씨의 사위와도 인터뷰했다. 하지만 이들의 경험은 이후 젊은층의 이야기를 전할 때로 미루고, 우선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삶을 산 이의 이야기를 다음 편에 전한다. (통역: 조경혜)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반독재 평화 시위가 열린 예나의 성 미카엘 교회 앞 광장. ⓒ특별취재팀
베를린의 동독 출신 노동자 오마지치 씨 이야기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③]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이야기
2018.10.09 16:23:12
베를린 장벽 붕괴 한 달 후, 동독은 스스로 민주국가로의 이행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989년 12월 7일, 동독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운동가와 사회주의통일당(SED) 수뇌부가 만나 민주적 체제 수립을 논의하는 기구 '중앙원탁회의'가 출범했다. 이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으려 했다. 민주적 헌법을 만드는 것부터 자유로운 정당 활동 보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의가 쏟아졌다.
하지만, 통일에의 열망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1990년 5월 18일, 1대 1 기준의 마르크화 통합은 동독 자생적 변화의 끝을 상징했다. 이후 독일은 다시 하나가 됐다. 이제 서독 체제를 일방적으로 흡수하는 숙제가 동독인에게 주어졌다. 상당수는 급변하는 시대의 조류에 힘없이 떠밀려갔다. 동독은 통일 당했다.
소개할 안드레아 오마지취(Andrea Omasics) 씨의 인생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지금도 독일 내에서 논란이 되는 동서 간 격차, 그로 인한 구 동독 지역의 극우화 현상 등은 결코 우연히 생겨나지 않았다. 체제 적응에 실패하는 이를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 이는 민주 국가라면 마땅히 고민해야 할 숙제다. 북한과의 교류를 앞둔 우리도 서둘러 준비해야 할 문제다. 약자의 눈으로 독일 재통일을 바라봐야 할 이유다.

▲ 극우 시위 사태로 논란이 된 작센 주 인구 25만 명 규모 도시 켐니츠의 화요일 오전 9시경의 풍경. 중앙역 인근의 번화가임에도 도시가 텅 비어있다. 급격한 통일의 후유증으로 구 동독 도시 상당수는 극심한 실업 상태를 겪어야 했다. ⓒ특별취재팀
오마지취 씨의 사례를 전하기에 앞서, 재통일 30주년을 향해 가는 오늘날 독일의 동서 격차 상황을 통계를 통해 잠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달 2일자 <더 타임스>와 작센(Sachsen) 주 지역 언론 <mdr 작센> 등에 따르면, 유럽의 도시별 하수도에서 가장 많은 양의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이 검출된 지역이 바로 최근 극우단체의 이른바 ‘인간사냥 사태’와 난민 반대 시위로 몸살을 앓은 작센 주 도시 켐니츠(Chemnitz)다. 2위는 튀링엔(Thüringen) 주의 주도인 에어푸르트(Erfurt)다. 5위가 작센 주 주도인 드레스덴(Dresden), 7위는 뉘른베르크(Nürnberg)다. 유럽에서 마약이 가장 만연한 도시 톱10 중 독일에서만 4개 도시가 올라 있고, 그 중에서도 3개 도시가 신연방주 소속이다.
격차는 더 다양한 통계자료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국가정보원이 지난해 10월 발간한 <통계로 보는 독일통일> 자료집에 따르면, 2016년 현재 신연방주(베를린 제외)의 지역총생산(GDP)은 3486억1500만 유로로 구연방주(베를린 제외) 2조6546억100만 유로의 7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물론 신연방주는 5개주고, 구연방주는 8개주임을 고려해야 한다. 도시주 3개(베를린, 함부르크, 브레멘) 중 2개가 구 서독 지역에 있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격차는 분명하다. 2016년 기준, 신연방주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인 메클렌부르크-포포메른 주의 GDP는 414억2900만 유로로, 도시주(일종의 직할시)에 불과한 함부르크(1106억7400만 유로)의 37% 수준이다.
2010년을 기준(100)으로 볼 때, 2015년 현재 구연방주의 취업인구가 105.6명으로 늘어나는 동안 신연방주는 오히려 99.9명으로 줄어들었다. 2016년 현재 구연방주의 실업률은 5.6%이지만, 신연방주는 8.5%에 달한다. 통일 이후인 1991년부터 2015년 사이 바이에른 주 인구는 1만 명당 23.9명이 늘어났지만, 작센-안할트 주에서는 55.8명이 줄어들었다. 2015년 기준, 통일 당시 1450만 명이었던 동독 인구는 200만 명 순감했다. 통일 이후 신연방주에서 인구가 늘어난 지역은 수도 베를린을 둘러싼 브란덴부르크 주뿐이다.
베르텔스만재단이 △다양성 인정 수준 △유대감 △공동의 이익 도모라는 3대 요소로 지역별 사회결속력을 분석한 결과, 1993년에서 2003년 사이 신연방주 5개주 전부에서 사회결속력 지수가 뚝 떨어졌다. 구연방주에서 이 지수가 떨어진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이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벌어지고 있다. 통일 후 혼란이 극에 달했던 1995년 당시 조사 결과에서 작센, 튀링엔, 브란덴부르크, 메클렌부르크-포포메른, 작센-안할트 주의 사회결속력 지수는 각각 –0.23, -0.36, -0.71, -0.74, -0.94였는데, 2003년 조사에서는 이 수치가 각각 –0.50, -0.77, -0.93, -0.43, -1.31로 더 떨어졌다. 그나마 약간이라도 개선된 곳은 오직 메클렌부르크-포포메른 주뿐이다. 서독 지역의 사회 결속력이 꾸준히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반면, 동독 사회는 갈수록 해체되는 경향을 보이는 셈이다. 차이가 동서로 극명하게 갈린다.
이 같은 상존한 격차가 2015년 독일 재통일 25주년을 맞아 각 언론사가 일제히 동서 격차를 조명한 이유다. 당시 독일 공영방송 ARD의 보도 제목 "하나가 되었으나, 결코 같아지지는 않았다"는 상징적이다. 경제적 격차, 불안한 미래는 필히 극우화 바람을 불러온다. 물론 유럽 전역에 부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조치로 인한 소득 양극화, 늘어나는 난민 유입 등의 원인이 있겠으나, 유독 신연방주에서 극우화 바람이 거센 이유를 통일 후유증과 떼놓고 설명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제 오마지취 씨의 인생 역정을 소개할 차례다. 오마지취 씨는 장벽 건립 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청소년 시절에는 방황했다. 동독 시절 싱글맘으로서, 비숙련 노동자로서 아이 셋을 키웠다. 열심히 노력해 한때 내 가게를 가지나 했으나, 통일의 여파로 모든 재산을 잃었다. 통일 후에는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평생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그는 지금도 통일이 좋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터뷰이의 생각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오마지취 씨의 육성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각색했다.

▲ 안드레아 오마지치 씨. 오마지치 씨 삶의 이력은 구 동독 출신으로서는 특별하지 않은 모습일 지 모른다. 통일 후에도 동독의 일부 엘리트 노동자는 좋은 삶을 이어갔지만, 대다수 저숙련 노동자는 힘든 시기를 거쳐야 했다. ⓒ특별취재팀
서에서 동으로
난 1957년 서베를린에서 7남매 집안의 셋째로 태어났어요. 그러다 한 살 때 동베를린 쉔하우저 대로(Schönhauser Allee) 부근으로 이사했죠. 장벽 바로 맞은편이야. 요새는 부자들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지(프렌츠라우어베르크).
어떻게 동서를 오갈 수 있었느냐고? 당시에는 베를린 장벽이 없었어요. 그냥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어. 보통사람들이 이념이니 뭐니 알았나. 당시 우리 아버지 직장은 서베를린에 있었는데, 동베를린 집값이 싸서 이사했어요. 그게 다야. 그런데 하루아침에 장벽이 세워져버리더라고.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야 그런 일이 생길 걸 몰랐지. 이때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이들도 있어요.
결국 아버지는 일자리를 잃었어요. 그래서 직업센터를 찾아 일을 얻었어요. 동독에 이런 센터가 많았어요. 센터에 노동자카드(사회보험 적용 대상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신분증)를 들고 가서 실직 상태를 증명하면 나라에서 다른 직업을 알선해주곤 했죠. 나중에 통일 되고 이 카드로 인해 연금 수령 문제가 생기기도 했어요. 동독에서의 노동 경력을 인정받으려면 이 카드가 필요한데, 통일 되고 별 생각 없이 이걸 버려버린 사람들이 노동 경력을 입증 못해서 연금 수령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죠. 난 잘 보관하고 있는데, 사실 내 경력이 백퍼센트 기록되진 못했어.
아무튼, 동독에서는 직장을 잃어도 바로바로 새 일자리를 찾아주니 실업자가 거의 없었어요. 나중에 아버지는 기차 운전을 하셨고, 과일 판매도 하셨지. 어머니는 사무 관리직으로 일했죠.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도박을 좋아했고, 집에도 잘 안 들어오셨어요. 집이 싫던 난 사춘기 때 가출했죠. 그러다 경찰에 여러 번 잡히기도 했죠. 동독에서 나 같은 아이는 일종의 계도소인 청소년감화소(Erziehungsheim, 직역하면 훈육의 집)로 보내졌어요. 14살에 그곳에 들어가 2년 정도 생활했죠. 17살에는 소년원(Jugendwerkhof)으로 보내졌죠. 이곳은 악명 높았어요. 호네커 의장의 아내가 이 시설을 전국에 늘리는 걸 밀어붙였는데, 이 시설 때문에 가족이 생이별하는 일이 많았거든. 난 괜찮았어요. 집이 더 싫었으니까. 여기서 일하는 법도 배우고, 비슷한 또래들과 생활도 같이 했어요.

▲ 분단 시기 미국이 담당했던 동서 출입경 지역인 체크포인트 찰리. 지금은 베를린의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독일 분단사를 상징하는 지점의 하나다. 역시 대표적 관광 명소인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부근의 오베르바움 다리 역시 분단 시기 동서 접경 지역이었다. ⓒ특별취재팀
동독의 싱글맘
성인이 되고 창고 관리인으로 일했어요. 실용적이고 돈도 잘 버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21살인 1978년에 결혼했어요. 당시 이미 남편과 동거 중이었는데, 대출을 받으려고 혼인신고했어요. 동독에서는 결혼한 부부나 아이가 있는 가정이 대출 받기 쉬웠거든. 이후 베를린을 떠나 남편의 고향인 퓌르스텐발데(Fürstenwalde)의 시부모님 댁에서 살았어요. 보통 동독에서 결혼하면 집을 얻었는데, 시부모님 댁이 커서 우리는 그 집 아래층에 살았죠. 그리고 당국에는 '우리는 집 필요 없다'고 했어요. 이게 나중에 내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겠어.
남편과 결혼 7년 만에 이혼했어요. 사랑의 유통기한이 7년인 건 세계 공통 아닌가? (웃음) 양육권은 내가 가졌어요. 동독에서 이혼하면 법적 절차를 밟는데, 대부분의 경우 아내가 양육권을 가졌어요. (동독의 여성 노동에 관해서는 지금도 여러 의견이 나온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했으니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이지만,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동독이 여성의 노동 참여를 요구했을 뿐, 동독이 더 여성 친화적인 정부는 아니었다는 지적도 많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성이 노동에 활발히 참여함에 따라 오마지치 씨의 사례에서처럼 여성이 양육권을 쉽게 지킬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한 지점으로 보인다. 여전히 남은 가부장적 문화에 출산 후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까지 더해 이혼 시 여성이 양육권을 지키기 어려운 한국과 비교된다.)
이제 이혼했으니 집이 필요하잖아. 당국에 집을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과거에 집 필요 없다 했다'며 집을 안 준다는 거야. 어쩔 수 있어? 이혼하고도 시댁에서 살았어요. 그러다 셋째 아이까지 갖게 됐지 뭐예요.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않는 전 남편 가족과 계속 살 순 없잖아요? 이미 큰 아이는 12살이고 둘째가 2살, 막내는 생후 4개월 됐을 때예요.
당시 전 시부모님 집이 참 열악했어요. 난 아래층 방 3개 중 2곳을 썼는데, 이 방들이 다 연결되어 있거든. 주방에 가려고 해도 남의 방을 지나야만 하는 상황이에요. 집에 욕조가 없고 변기도 없었죠.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 당국에 집을 요청했지만 반년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어요. 다시금 호네커 의장 앞으로 편지를 썼죠.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이니, 사회주의 국가의 이상대로 모든 인민에게 기본적인 물질적 토대를 제공할 의무가 정부에게 있다고 말이야. 2주 내로 내 요청에 정부가 답하지 않는다면, 빈 집에 그냥 들어가 살겠다고 했어요. 서쪽으로 가겠다고도 했고. 그제야 당국에서 집을 주더라고. (앞서 플뤼겔 씨 부부의 사례에서 보듯, 인민이 문제 해결을 위해 호네커 의장에게 직접 호소하는 형식이 동독에서는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오마지치 씨 편지의 논조에서 보듯, 강력하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편지도 형식상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내 집이 생기니 상황이 조금 나아졌어요. 동독에서는 아이가 셋 이상인 싱글맘에게 양육 지원을 더 해 줬어요. 주거비를 추가로 주고, 아이 옷값 등도 조금 더 줬지. 크리스마스에는 보너스를 주기도 했죠. 이런 지원금이 아이가 만 18세가 될 때까지 나왔어요. 어린이집을 구하는데도 혜택이 있었죠. 이런 지원은 동독이 좋았어요.
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상점 판매원으로 일했어요. 동시에 공장의 기계 보조공으로서도 일했고. 이른바 투 잡을 뛰었죠. 요즘 사람 기준으로 보면 힘든데 뭐 그리 많이 낳았느냐 싶죠? 당시 사람들이 좀 순진했어. 생활이 가난하지만 그렇다고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었고, 육아 부담도 적었으니 아이를 많이 갖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좀 있었어요. 아이가 있는 집은 한 달에 하루 '집안일을 위한 휴가(Haushaltstag)'도 유급으로 얻었는걸.

▲ 오마지치 씨의 동독 시절 노동자 카드.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역할을 했는데, 이 카드에 소지자의 노동 이력이 빼곡이 기록됐다. ⓒ특별취재팀
재통일의 여파
정신없이 살다보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더라고. 이때 마침 동독에서도 자유 바람이 일었는데, 1990년 1월 1일에 일하던 가게 운영권을 내가 인수하게 됐어요. 일종의 봉급 사장이 된 셈이지. 이제 살림이 좀 펴나 싶었는데 가게 소유권이 몰수되어버렸지 뭐야? 자세한 사정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이때 희망이 꺾였죠.
재통일 되고 퓌르스텐발데에도 실업자가 넘쳐났어요. 일자리가 없으니 어떡해? 가족과 친지들이 다 있는 베를린으로 1991년 돌아왔어요. 일단은 여동생이 살던 집에 들어앉았지.
분단 당시에 동독을 탈출할 생각 안 해 봤느냐고? 안 했어요. 당시 사촌 여동생이 서베를린에 살아서 출산을 축하하러 한 번 가봤어요. 여기서 살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서독 체제에서 나 같은 사람은 낙오자가 되겠다 싶었죠. 어차피 난 일자리도 동쪽에 있는데, 그냥 동독에서 평범하게 아이 키우면서 이웃이랑 잘 지내고 싶었어요.
재통일 후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됐어요. 일단 난 실업자가 됐지.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 정부에서 일자리 재교육을 이것저것 시켰어요. 난 화장품 메이크업 교육을 받았어요. 내 가게를 차리고 싶었거든. 그런데, 자격증 시험일에 아이가 아파서 못 갔어. 아쉽죠.
일자리 찾기를 포기하진 않았지만, 직장이 없는 상황 자체가 고통이었어요. 아이 셋을 기르면서 직업센터를 꾸준히 가야하고, 실업급여 받으러 다니는 것 자체가 힘들었죠. 이때 (한국의 과거 불법 노점상과 비슷한) 일종의 불법 간이음식점에서 시간제 근무를 하며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어요. 그렇게 재통일 후 쭉 살았지. 그러다 보니 이 나이가 되어 버렸어. 난 지금은 베를린 도심에서 (대중교통 기준) 동쪽으로 약 한 시간 이상 떨어진 헬러스도르프(Hellersdorf)의 아파트 단지에서 살아요. 나 같은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에요(인구 약 300여만 명이 사는 베를린은 서울 면적 1.5배 크기의 거대 도시다.).
지금은 결손 가정의 아이를 돌보는 돌봄 노동자로 일해요. 세금 카테고리상 자영업자인데, 실제로는 하청 노동자예요. 한국의 특수직 자영업자와 사정이 같아요. 어느 사회에나 조손 가정이 있고, 부모가 몸이 아파 집안일을 하기 힘든 가정도 있잖아요? 이런 곳에서 복지 지원 신청을 하면 복지단체가 나 같은 사람에게 연락해요. 그러면 우리가 가서 맡은 가정의 집안일을 해 주죠. 독일의 복지시스템 일부예요.
이런 사람을 위한 지원제도인 소득불능연금(Erwerbsunfähigkeitsrente)도 있어요. 소득 수준이 매우 낮거나, 몸이 불편해 노동을 하기 힘든 사람이 따로 받는 연금이에요. 나도 일자리 문제로 인해 이 연금을 5년 정도 받았어요.
통일이 좋았느냐고? 글쎄...
계속 이 연금을 받으면 되는데 뭣 하러 힘든 일을 하느냐고?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집에 앉아 있어봐야 뭐 해요? 그렇게 사는 건 의미가 없어요. 내가 할 줄 아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난 평생 내 가게를 꾸리고 싶었지만, 형편이 되지 않아 못 했어요. 이제 다른 사람 손 안 벌리고 내 힘으로 돈 벌면서 살고 있는데 얼마나 좋아요. 돈을 모아서 따뜻한 나라로 여행 갈 생각이야.

▲ DDR박물관에 전시된 유겐트 복장. 독재 시절 한국, 북한과 마찬가지로 동독은 병영국가였다. 청소년은 유겐트로부터 집단 체제의 일원이 됐다. ⓒ특별취재팀
이 일을 하면서 어려운 가정을 볼 때마다 통일이 좋았다고 마냥 웃어넘길 수 없게 돼요. 요즘 사회 안전망이 다 무너졌잖아요. 예전에는 젊은이라면 사회가 일단 받아들여줬어요. 일자리가 없으면 일자리를 구해주고, 교육을 받고 싶다면 공부하게 해 줬어요. 그런데 요즘 사회는 젊은이를 그냥 무시해요. 그러니 젊은 아이들이 자꾸만 엇나가는 거야. 동독 시절에는 아이들이 활기찼어요. 유겐트가 있으니 아이들이 어디든 소속되어 활발히 활동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할 일이 없으니 마약이나 하잖아요!
(소년단 등 동독 체제에 관한 태도는 앞선 인터뷰이들의 사례를 봐서도 알 수 있듯, 이처럼 사람마다 다르다.)
이 사회에서는 이른바 자유가 있어서 원하는 건 뭐든 돈으로 살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기본적인 것도 사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웃을 돕는 문화도 사라지고 있어요. 모두가 경쟁하기만 해요. 사회적 유대가 돈독했던 옛 시절이 가끔 그리워요.
물론 청승맞게 동독 시절이 좋았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동독 출신으로 재통일 후 힘들게 사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요. 젊은 시절 친구들을 시간이 지나 만나보면, 잘 사는 아이들이 없어요.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중독자 자녀를 가진 집도 많죠.
나 같은 사람이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으니 한 마디 더 할까요? 독일 미디어가 동독을 묘사하는 걸 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독일 미디어가 온통 동독 사람들은 어릴 적 고아원에서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못 한다는 식으로 보도하는데 짜증나요. 난 오히려 소년원에서 인간적인 대접을 받았거든. 동서독 사람이 뭐가 그렇게 달라? 동쪽에서든 서쪽에서든, 애초에 일을 안 하려는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동독의 일부 사람 예를 가지고 모든 동독 사람이 게으르다는 식으로 보도하니 문제예요. (통역: 추영롱)
앞선 인터뷰이들이 통일로 인해 혜택을 받은 구 동독 출신의 소수라면, 오마지취 씨는 통일의 여파에 적응하지 못한 대부분 저소득 노동계층을 상징하는 사람이다. 다음 편에는 역시 비슷한 연령대의 인터뷰이를 한 번 더 만나볼 예정이다. 그는 동독 체제에 온 몸으로 저항했으며, 동독 독재 체제를 극도로 혐오한 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더 젊은 세대와의 이야기를 전할 예정이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남북한에 전하는 '통일 선배'의 조언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④] 슈타지 역사기록소의 리히터 씨
독재 정권은 필연적으로 경찰국가 체제를 완성한다. 공권력이 시민을 위협함으로써 독재 체제는 민주주의의 적이 된다. 민주화 전 한국이 그랬다. 현재 북한도 그렇다. 과거 동독이 그랬다.
슈타지(STASI, 국가안전부)가 동독 일당 독재 체제를 떠받쳤다. '당의 방패와 검'이라는 구호로 1950년 2월 출범한 방첩기관 슈타지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직후인 1989년 12월 14일 해체되기 전까지 동독 인민 1450여만 명을 철저히 감시했다. 1950년 2700여 명이었던 슈타지 공식 요원은 1989년 8만8897명까지 늘어났다.
슈타지 요원들은 민간인 비공식 협력자(IM, 민간인 비밀정보원)를 활용해 극단적인 시민 감시 활동을 벌였다. 1989년 당시 IM은 무려 18만여 명에 달했다. 그 중에는 동독 포환던지기 대표선수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우도 바이어(Udo Beyer, IM 코드명 캡틴)도 있다. 펑크 밴드의 베이시스트, 동구권 국가의 관광객 등으로 위장한 IM들이 동독 사회 곳곳에서 시민을 감시하고,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을 슈타지 교도소(Stasi-Untersuchungshaftanstalt)로 보냈다. 동독 시절, 25만 명 이상의 시민이 슈타지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려 고통 받았다. 이들 중 수천 명은 시베리아 수용소로 추방됐다. 당시 슈타지 감시망은 인구 175명 중 한 명 꼴에 달할 정도였다. 슈타지의 모델이었던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보다 훨씬 강력한 감시 체제였다.
재통일 후 독일 정부는 동독 시절 슈타지를 포함한 당국의 반인권 범죄 약 7만5000건을 조사했다. 조사를 통해 10만여 명의 혐의대상자가 추려졌고, 이들 중 1737명이 피고인으로 확정, 1021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 중 유죄판결을 받은 이는 756명이었는데, 이들 중 92%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소개할 칼 하인츠 리히터(Karl-Heinz Richter) 씨는 청소년 시절 슈타지 교도소에 끌려갔다. 서독으로 몰래 탈출하려했다는 이유였다. 이때부터 리히터 씨의 평생에 걸친 동독 독재 정부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는 슈타지와 갈등한 자기 삶을 기록한 책을 자비로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본업인 건축업을 하는 한편, 자신이 수감 생활을 했던 베를린 북부 판코우(Pankow) 인근 역사박물관에서 가이드로 활동한다. 독일 언론과도 자신의 경험을 인터뷰한 바 있다.

▲ 베를린 슈타지의 옛 본부를 개조한 슈타지 박물관에 KGB(왼쪽)와 슈타지(오른쪽) 문양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슈타지는 동독 독재 체제를 떠받치는 기구였다. ⓒ특별취재팀
그의 삶을 정리하자면 자연스럽게 '북한 과거사 청산'이라는, 현재 해빙 분위기의 한반도에서는 거론하기 매우 힘든 주제가 떠오르게 된다. 작은 희망도 소중한 지금의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국가안전보위부(북한의 방첩기관) 문제를 다룰 수는 없다. 가장 바람직한 건 긴 시간을 두고 북한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여러 통일 전문가들이 남북 통일을 긴 호흡으로 보되, 디테일한 문제까지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며, 북한의 문제는 북한 스스로 풀도록 남한이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한국이 북한의 인권 문제를 주도적으로 들고 나온다면, 자칫 한국은 북한 위에 군림하려는 하는 모습으로 오인될 수 있다. 현재 통일 담론에서 한국은 강자고 북한은 약자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해 군림했다는 비판은 지금도 구 동독 지역에서 강하게 나오는 불만의 이유다.
여러 이유로, 어쩌면 리히터 씨 인터뷰는 여럿에게 불편함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체제와 불화한 이의 목소리 역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특히 리히터 씨의 남북 관계에 관한 관점은 이역만리 외국인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체계적이고, 진지했다. 다음은 리히터 씨의 목소리로 재구성한 그의 이야기다.
탈출 실패...슈타지에게 끌려가다
난 1946년 7월 31일, 브란덴부르크 주 동쪽의 슈바르츠하이데(Schwarzheide)에서 태어났어요. 베를린에서 120㎞가량 떨어진 곳이지. 어릴 적부터 난 동독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독재 시스템이 일상에 영향을 미쳤으니까. 이웃끼리, 친구끼리 서로를 평가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이웃 중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그 사람이 서쪽으로 도망친 건지, 감옥에 끌려간 건지 알 수가 있나.
학교에 다닐 때 사회주의 체제를 찬양하고, 자본주의를 악마화하는 수업을 필수적으로 들어야 했어요. 난 그 따위 수업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1963년, 10학년까지만 마치고 김나지움(Gymnasium, 독일의 중고등학교)을 그만뒀어요. 체제에 신물이 나서 친구 17명과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모색했죠. 탈출 방법은 간단해. 다리에서 서베를린행 기차로 뛰어내리는 거지. 탈출 시도가 흥미로웠는지, 요즘에도 가끔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와요. 첩보영화 같다 생각들 하나봐.
부모님 생각 안 했느냐고? 물론 마음의 짐이 됐죠. 사회 분위기와 달리 우리 집 분위기는 좋았거든. 그래서 탈출계획을 짤 때 친구들과 이 문제를 많이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어쨌든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하잖아요. 탈출하기로 했지.
재수가 없었어. 탈출에 나만 실패했어요. 기차에서 떨어져서 팔뼈과 갈비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죠. 이 상태로 슈타지에게 발각됐어요. 동베를린 북부 판코우(Pankow)의 교도소로 끌려갔어요. 6개월 간 수감됐죠. 슈타지가 도망가려던 건방진 젊은 놈을 치료할 필요 없다고 봤는지, 제대로 치료해주지도 않더군요. 그대로 죽을 운명이었죠.
다행히, 서독으로 도망에 성공한 친구가 기자회견에서 내 얘길 했어요. 나중에야 알았는데, 서독 언론이 엄청나게 몰렸죠. 다른 나라 언론사도 취재 올 정도였어요. 이 기자회견 덕분이었는지, 시간이 좀 지나자 슈타지도 나에게 어느 정도 의료 지원을 해 줬어요. 그래도 수감 초반에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서 출옥 후 18개월 간 병원 신세를 졌어요. 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이상하게 붙어버렸거든. 골절 부위를 다시 절개하고 새로 붙이는 수술을 했죠. 나이 드니 상처 부위가 쑤셔.
출옥 후에는 엔지니어 직업 교육을 받았고 기계공으로 일했어요. 1968년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1970년에 결혼했죠. 그러다 친구 소개로 국영 정유회사 미놀(VEB Minol)의 주유소 직원으로 일했는데, 이 때 주유 가격을 조작해 뒷돈을 좀 벌었지. 나쁘다고? 그렇긴 한데, 당시 경제 형편이 다들 어려우니 이런 일이 흔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집단적, 도덕적 타락을 정부에 대한 불신이라는 핑계로 위안'한 거지(인용구는 리히터 씨가 직접 쓴 책의 내용). 대체로 한동안은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죠.

▲ 칼 하인츠 리히터 씨. 젊은 시절 권투에 빠지기도 했다는 그는 고령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었다. ⓒ특별취재팀
동독과의 싸움
하지만 난 여전히 체제가 싫었거든. 1974년부터 정부에 서독으로의 출국 허가 요청서를 계속 올렸어요. 나 이 체제 싫으니 서독으로 보내달라고. 그런데, 이번에는 슈타지가 내 아내를 잡아가버렸어요. 내가 주유소에서 부당하게 챙긴 이익을 부인의 혐의라며 잡아간 거예요. 다행히 부인은 6개월 간 수감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이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어?
결국 1975년 8월 13일, 난 아내, 딸과 함께 합법적으로 동독에서 '제명'되었고, 서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됐어요. 타이밍이 잘 맞았지. 나 같은 사람이 1975년에 서베를린으로 많이 추방됐어요. 아마 그때 무슨 협약이 있어서 가능했지 싶은데? (1975년 7월 30일부터 사흘간 열린 헬싱키 협정으로, 미국을 포함해 동서방 체제 35개국이 모여 주권존중·전쟁방지·인권보호를 핵심으로 체결한 협정이다. 동독도 이 협정에 서명했다.)
부모님을 남겨두고 떠났느냐고? 그래, 맞아요. 당시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께는 함께 이주를 권유했지만 당신이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 겁난다며 거부하셨어요. 다행히 당시 어머니는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나고 계셔서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죠.
서베를린에서는 화물 운전사 일을 구했어요. 이대로 원하는 곳에 정착하고 자유를 얻었으니 좋게 풀렸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서야 아내가 슈타지에게 감금됐을 때 진실을 뒤늦게 알았어요. 성고문을 당했죠. 이후로 아내는 평생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어요(인터뷰 당일에도 리히터 씨의 아내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내가 보기엔, 이미 블랙리스트에 오른 나를 슈타지가 길들이려고 그렇게 한 것 같아요(실제 베를린의 슈타지박물관에는 슈타지가 블랙리스트 길들이기 수법으로 이 같은 방법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내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어요? 우리 가족은 슈타지 때문에 망가졌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를 해야 했지. 장거리 화물차 뒤편에 운전수가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죠? 그걸 개조해서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을 서쪽으로 데려왔어요. 탈출하는 사람과 만날 지점을 정하면, 그곳을 지나다가 차를 잠시 정차해요. 그러면 풀숲에서 기다리고 있던 탈출자가 벼락같이 차에 뛰어들어서 숨어 들어가는 거죠. 동독 경찰이 검사 안 했느냐고? 나 이제 서독 사람이야. 국경 경찰이 서독 차량을 함부로 못 뒤졌죠.
그렇게 21명을 동에서 서로 탈출시켰어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였죠. 당시 서독 화물차가 동독 내부로 진입은 불가능했지만, 동서독 교차 지역의 고속도로는 이용 가능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 슈타지 박물관은 슈타지에 협력한 주요 IM들의 실명과 얼굴을 모두 전시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슈타지의 IM이었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우도 바이어. ⓒ특별취재팀
외국 망명... 그리고 귀국
그런데 일이 또 희한하게 진행되더군요. 이 일을 처음 나에게 제안한 동독 출신 동료가 있는데, 알고 보니 그 놈이 슈타지의 IM이었어. 이 탈출계획도 알고 보니 슈타지가 날 잡으려고 만든 함정이었더라고. 슈타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요원 두 놈이 서독 경찰로 위장해 우리 집을 찾아오기도 했어요(슈타지는 동독 출신 서독인 약 700여 명을 동독으로 불법 납치했다.). 그 놈들 세계 곳곳에서 첩보 활동을 했어요. 결국, 서독 경찰이 서독을 떠나라고 권고하더군요. 나이지리아로 떠나게 됐어요. 1979년의 일이에요.
가족이 나이지리아에 정착했지만, 아내와 딸이 지내기 힘들어했어요. 아내와 딸은 베를린과 나이지리아를 오가며 살았죠. 그런데 나이지리아도 안전하지 않았어요. 그곳에서도 슈타지의 납치 시도가 있었거든.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로 또 넘어갔죠.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예멘 등에서 일했어요. 그 나라들에서 위스키 밀수를 해서 돈 엄청 벌었지. 그쪽 나라에서 술 밀수하다 걸리면 사형이야. (웃음) 그러고 보니, 당신들 한국에서 왔죠? 나 중동에서 한국 건설노동자들과 함께 일한 적 있어요. 노예처럼 일하더군. 안타까웠어요.
외국을 전전하면서도 난 꾸준히 서독 경찰과 연락했어요. 내가 슈타지의 납치 대상이다 보니, 서독 경찰이 정기적으로 연락했어요. 그러다 1989년이 왔어요. 운명의 해지.
바깥에서도 뉴스로 고국 소식 꾸준히 봤죠. 동독이 심상치 않더라고. 서독 경찰에게 '이제 독일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이제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을 거라 하더군요. 그 말을 믿고 1989년에 고국행 비행기에 올랐어요. 운명처럼, 내가 서베를린 쪽 장벽 부근에 있을 때 장벽이 무너졌어요. 갑자기 사람들이 동쪽에서 마구 밀려들어왔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에요.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두근해. 드디어 저 독재 체제가 무너졌다 싶었지.

▲ 동독 정부는 사진에서 보듯 펑크 패션도 허용했지만, 그 메시지가 체제에 위협적이어선 안 되었다. 나쁜 메시지의 옷을 입어 슈타지 조사를 받은 당시 젊은이의 모습. 슈타지박물관에 전시. 슈타지는 서구 자본주의의 타락을 인민에게 선전했는데, 록 음악, 선정적 영화 등을 예로 들었다. ⓒ특별취재팀
난 동독과 불화했어요.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지. 나 말고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문제는 체제 말기가 오기 전까진 용기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적었다는 거예요. 더러운 체제에서 침묵한다면, 결국 그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침묵하는 이들이 소시민적인 평화, 나만의 평화를 추구한 걸 지나치게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침묵이 다른 이들에게 억압으로 돌아갔음을 알아야 해요.
베를린 장벽이 왜 무너졌겠어요? 동독 말기에는 경제적 상황이 너무 안 좋았어요. 판이 바뀌었지. 그러다 보니 입 다물고 살던 사람들까지 목소리를 내게 된 거예요. 예전에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적으니 슈타지가 여러 심리 전략으로 체제를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그게 불가능해진 상황이 온 거죠.
동독만 변해서 장벽이 무너진 게 아니에요.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면, 동독에서도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 당시 대학살이 일어났을 거예요. 결과적으로 장벽은 운이 좋았기에 무너졌어요.

▲ 리히터 씨가 자신의 책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특별취재팀
남북한에 전하는 통일 선배의 조언
아무래도 내가 독재 체제를 살아봐서 그런지, 남북한 소식에 관심이 많아요. 내가 당신들만큼 그 사회를 잘 알진 못하겠지만, 북한은 여러 독재 체제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독특한 사례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항하는 이들이 쉽게 나오지 않겠지. 아마 동독보다 훨씬 강하게 이데올로기 주입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지난 4월의 남북 정상회담은 나도 아주 감동적으로 봤어요. 난 남북이 언젠가 꼭 통일국가를 만들기를 바라요. 헤어졌던 이들이 다시 하나가 된다는 건 아주 중요해요.
내가 보기에 남북 통일에서 가장 힘든 건 남북한 경제적 격차가 아니에요. 경제적 격차가 있더라도 투자가 이어지면 경제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돼요. 정말 힘들고, 정말 중요한 건 북쪽의 민주화에요. 북한 사람들 사고방식이 남한 사람들과 아주 많이 다를 걸요?
뭔가를 알아야 그리워할 수 있어요. 나는 베를린 장벽이 생기기 전을 알아서 자유가 뭔지 조금 알았어요. 그러니 자유를 그리워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과연 자유가 무엇인지 알까요?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자유를 그리워할 수 있어? 이런 상황에서 자유에 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가 (통일 후) 현실을 마주하면, 그 충격은 엄청나요. 남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 할 거야.
북한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요. 통일 여건이 조성되면 남한에 기대하는 게 클 텐데, 그건 절대로 충족되지 않을 거예요. 이게 충족되지 않음을 알게 되면, 크게 상처받을 수 있어요. 주제넘긴 하지만, 동독 출신으로서 내 경험을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해요. 당이 도와주지 않아요. 동독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통일 후 매우 힘들었어요.
남한의 젊은 세대도 내가 보기엔 통일의 변수가 될 것 같아요. 그들은 분단과 어떤 직접적 상관이 없잖아요? 그런데 통일 상황이 조성되면, 그들은 그 모든 변화가 자신들의 부담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향한 반발심이 강하게 일어날 수도 있지. 좋은 통일을 이루려면 그들을 잘 달래야 해요.
통일 이후 대도시와 소도시의 격차, 빈부 격차로 인한 문제에도 주의해야 해요. 남한에서 대도시와 소도시 사람 간 삶의 질이 차이나지 않아요? 그런데 통일이 되면 북쪽 사람들이 많이 내려올 거 아니에요. 그러면 원래 가진 것 없던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을 더 미워하게 될 거예요.
잘 본 것 같다고? 이런 일을 우리가 다 경험했어요. 재통일 후 독일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을'들의 싸움, 즉 약자가 다른 약자를 혐오하는 사회 현상이 일어났어요. 아마 남북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급박한 통일은 안 된다... 남북이 배워야 할 교훈
맞아요. 내가 말한 '을들의 싸움'이란 게 극우화 현상이에요. 우리에겐 악몽과 같은 현상이지. 이 문제를 사람마다 다르게 볼 텐데, 난 특히 작센 주의 특수성에 주목해요.
그 동네 사람들이 원래 좀 달라요. 작센 주 주도 드레스덴 근처에 프라이탈(Freital)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어요. 그 도시가 협곡에 위치했어요. 그래서 분단 시절에 서독 TV 전파가 안 닿았어요. 결국 그 사람들이 서독 미디어를 가장 적게 접했죠. 그런데 그 동네가 요즘 극우 문제로 가장 시끄러워요. 그 동네는 정말 '무 개념의 계곡'이라고. (웃음) (이 같은 지역 비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인터뷰이의 생각을 되도록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한편, 독일 내에서 작센 주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선을 전하고자 그대로 옮긴다. 상당수 독일인들이 작센 주를 경멸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기본적으로 동독 사람들이 외국인을 두려워해요.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그래. 동독 시절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쿠바나 에티오피아, 베트남 등에서 다양한 인종의 이주민이 오긴 했어요. 그런데 그 수가 굉장히 적었고, 대부분은 대도시에 살았어요. 그러니 그런 시골 동네 사람들은 외국인 자체를 접해보지 못했어요. 다르니 두려워하는 거야. 그 상황에서 통일 후 한꺼번에 변화가 닥치니, 그 분노를 생소한 외국인에게 표출하는 거지. 그게 극우가 잘 나가는 이유예요.
그런 사람들, 어차피 동독 시절이었다 해도 자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했을 거예요. 자본주의 체제로 세상이 바뀌니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더 잃어버린 것 같거든. 그러니 더 분노하는 거라고. 이제 그 동네 문제를 어떻게 손쓰기 어려운 지경이 돼 버렸어요. 안타까워.
이런 문제 때문이라도 남북은 급박한 통일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당장 우리가 너무 급하게 통일했다가 통일 30년이 지나도록 이런 문제를 겪고 있잖아요. 일단 두 개의 정부 체제를 유지하고 천천히 통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한테서 배울 건 배우라고. 내가 너무 주제넘은 참견을 하나? (웃음) (통역: 추영롱)
30년전 10대 동독 소년, 지금은 어떻게 살까?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⑤] 동독 1020세대가 기억하는 독일의 재통일
2018.10.11 15:36:21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 사회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기존 동독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던 30~50대의 동독 주민들 중에서는 하루아침에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똑같은 변화를 겪은 10~20대는 이들과는 좀 달랐다. 물론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양태는 달랐지만, 이들에게는 동독 사회와 비교했을 때 보다 자유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와 서방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에 <프레시안>은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 지역에 거주하며 청년‧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요하네스 빈클러(Johannes Winkler, 1965년 생), 세바스티안 플뤼겔 (Sebastian Flügel, 1973년 생), 칼 에릭 다움 (Carl Erik Daum. 1978년 생) 씨를 만나 그들이 기억하는 독일 재통일과 동독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독일의 재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재통일로 인해 동독 사회와 주민들이 받았던 충격과 부정적인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들의 인터뷰는 지난 9월 9일(현지 시각) 신 연방주(옛 동독 지역이었던 5개주) 중 하나인 튀링엔(Thüringen) 주에 위치한 예나 시에서 진행됐다.
재통일의 출발, 교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당시 김나지움 6학년(
김나지움은 독일의 인문계 중등 교육기관이다. 김나지움 6학년은 한국 기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에 해당한다. 편집자) 이었던 다움 씨는 동독 이야기를 꺼내자 가장 먼저 동독 시절 국가보안부이자 소위 '비밀 경찰'로 악명 높았던 '슈타지'(Stasi)를 언급했다.
"아버지가 동독 시절 철물점을 운영하셨다. 그런데 가게에 이따금 정보를 캐내기 위해 슈타지 요원들이 들르는 경우가 있었다. 슈타지 요원이 들어오면 금방 표시가 났기 때문에, 가게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다 알 수 있게 "당신 슈타지 맞지?"라고 말하면 그 요원은 그냥 나가버리곤 했다. 이런 식으로 슈타지 요원들이 정보를 캐내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다움)다움 씨에 따르면 슈타지는 교회나 환경단체와 같이 동독 내에서 활성화된 주민들 모임에 이른바 '정보원'을 한 명씩 심어놓았다. 그런데 이 정보원은 단체 내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을 관찰하기만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누가 정보원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플뤼겔 씨는 교회를 관리하는 고위층은 누가 슈타지인지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목사들은 오히려 슈타지가 한 명씩 심어져 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동독 정부에서 금지하고 있는 반정부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교회의 경우, 슈타지가 교회에 와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안심했다는 설명이다.

동독 정부에서 슈타지를 교회에 보낸 이유는 분명했다. 교회가 반정부시위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1989년 9월 25일, 라이프치히(Leipzig)의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를 중심으로 시민 8000여 명이 집결한 '월요 시위'가 동독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동독 내에서 교회가 민주주의의 창구 역할을 한 것이냐는 질문에 플뤼겔 씨는 "민주주의 같은 개념은 아니었고 교회나 환경 단체가 큰 가족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들 하고 있으면 편하다, 좋다고 느꼈고 여기서는 내가 좀 더 자유롭게 행동해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실제 동독 시절에는 지금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두 배 정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주말에 교회를 가지 않고 다른 곳에 놀러갈 수도 있지만, 동독 시절에는 교회를 가는 것외에 다른 여가 생활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동독 내에서) 재통일을 주도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교회나 환경 단체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동독 정부는 교회를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했지만, 1970년대 이후 경제가 어려워지고 소련의 지원도 떨어지자 정부의 힘이 약해졌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더 많이 교회나 환경단체에 더 많이 가게 됐다" (플뤼겔) 동독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슈타지의 활동도 많이 위축됐다. 플뤼겔 씨는 장벽이 무너진 이후인 1989년 12월 즈음부터 슈타지가 교회나 다른 단체에 방문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슈타지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재통일 이후 슈타지들이 보험회사나 운전 학원, 부동산 중개소 등으로 전업했지만 동독 사람들은 누가 슈타지였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충성심을 보여라 동독 정부는 체제에 충성심을 보이는 학생들에게만 대학 진학의 기회를 열어뒀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대학 진학과 취업의 갈림길에 섰던 빈클러 씨는 동독 체제가 이어졌다면 자신의 대학 진학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내가 아비투어(Abitur, 대학입시자격)를 치르고 대학 공부를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학교에 다닐 때부터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 학급이 25명이라고 한다면 동독 정부는 그 중 3명 정도만 아비투어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나는 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의 집권당)의 소년단이라고 불리는 FDJ(Freie Deutsche Jugend, 자유 독일 청년단) 활동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SED의 당원도 아니었다" (빈클러) 결국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엔지니어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동독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 9월, 광학회사인 칼자이스(Carl Zeiss)가 운영하는 엔지니어 교육기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장벽이 무너진 뒤인 1990년에는 이 교육기관의 본부가 있는 예나에서 공부했다.
동독 시절에 정부에 충성하면서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빈클러 씨는 "아버지가 교회 목사였다. 아버지는 성경의 십계명에 써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니가 생각하는 것을 소신있게 이야기한다고 가르쳤다"며 정부에 거짓으로 충성하는 표시를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다움 씨 역시 동독 내에서 대학을 가려면 충성심을 증명하는 증표가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다움 씨보다 10살이 많은 형은 장벽이 무너졌을 때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동독 시절에는 대학에 가려면 동독 정부에 충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FDJ에 속하거나 당원이 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군대에 3년동안 복무해야 했다.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는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실 형은 동독이 계속 유지됐다면 (군 복무를 했더라도) 대학에 가지 못했을 수도 있었는데 통일이 되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다움) 동독 TV를 누가 봐? 슈타지와 충성 유도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던 동독 정부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특히 서독의 TV 채널이 동독에서도 방영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동독의 몇몇 지역만 빼고 서독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아마 동독 사람 중에 동독 TV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가끔 동독 TV에서 좋은 영화를 보여주거나, 호네커(동독 최고 집권자, SED의 서기장)가 누굴 만나고 있는지 알고 싶을 때만 동독 TV를 봤다. 요즘도 그렇지만 뉴스 시작하기 전에 시계가 나오지 않나. 당시 서독 방송에는 동그란 시계가, 동독 방송에는 네모난 시계가 나왔다. 가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TV 속 시계 모양을 물어봤는데, 학생들 대부분 당연히 동그랗다고 대답했다. 다 서독 TV만 보니까.(웃음) 1989년 가을 서독 방송에서 헝가리가 국경을 열어 사람들이 넘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또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한 엄마가 수 미터 정도 되는 (서방국가의) 높은 대사관 담장 위로 자기의 아이를 넘기는 장면이 방영됐다. 동독인들은 이 방송을 보면서 사람들이 아무런 폭력적인 상황 없이 (국경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교회를 주축으로 평화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100명이 모였다가 다음날 500명이 됐고, 학생이나 젊은층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도 같이 나갈 정도였다. 방송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한 셈이다" (플뤼겔) 동독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와중에 1989년 5월 사람들의 시위에 불을 당긴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SED가 부정선거를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선거에서 SED는 98.9%가 자신들에게 표를 던졌다고 했다. 이건 당시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치였다. 당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에게 실제 어느 정당에 투표했냐고 조사를 해봤다. 그 결과는 SED가 말한 것과 너무 달랐다" (빈클러) "당시 선거는 기표소에 들어가서 후보를 찍는 비밀선거가 아니었다. 오히려 누가 비밀선거를 하는지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다. 비밀투표를 하겠다고 기표소에 들어가는 순간 정부에 낙인이 찍혔다" (다움) "기표소에 들어가면 비밀투표를 했다고 표시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다음 날 직장 상사가 불러서 기표소에 좀 들어가지 말라고, 그러면 우리 회사가 지원을 못 받는다면서 말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플뤼겔) 동독이 소위 '큰 형님'이라고 부르던 소련의 태도 변화도 동독 사람들의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키는 데 주요한 촉매제가 됐다.
"동독 사람들에게 소련은 모범적인 국가로 인식돼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개방을 한다고 하니까 동독에서 혼란이 커졌다. 소련에서 동독으로 보내는 잡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개방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동독 정부는 그 잡지에 대한 판매를 금지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동독 사람들은 정부에 더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내게 됐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정부 수립 40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당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호네커에게 "도와줄게"가 아니라 "변화 늦게 하면 너한테 벌을 줄거야"라고 이야기하니까 동독 주민들은 "이게 뭐지" 싶었다" (플뤼겔) "1989년 라이프치히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이 시위를 막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시위에 나서게 됐다" (다움) 장벽 붕괴를 전후로 학교의 분위기도 변하기 시작했다. 다움 씨는 동독으로부터 도망친 선생님도 있었다고 말했다.
"1989년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동독 정부는 중국 정부가 정말 잘했다고 칭찬했는데,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선생님이 있었다. 동독 정부에 대해 친화적인 발언을 했던 선생님들도 그 발언 수위가 약해졌다. 동독은 당시 매년 9월 1일 새 학기가 시작됐다. 학기 시작 첫 날에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 한 분이 안 계셨다. 알아보니 프라하에서 (서방국가 쪽) 대사관으로 넘어갔다고 하더라. 선생님뿐만 아니라 서독으로 넘어간 친구들도 많았다. 하루하루가 변화의 연속이었다" (다움) 통일이 아니었다면?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독일의 재통일이 이뤄졌다. 다움 씨와 플뤼겔 씨는 당시 통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동독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연방주(구 동독)가 서독에 흡수되고 화폐 개혁도 예정보다 몇 달 더 빨리 이뤄졌다. 동독에서는 체제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 매일 매일 느껴졌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동독 내에서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혁된 동독을 유지하자고 했던 사람도 있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흡수통일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더 좋은 방법은 없었던 것 같다"(다움) "서독이 동독을 흡수했거나 훔쳐갔다고 보지 않는다. 동독에서 그 상태로 뭘 유지할 수 있었을까? 경제를 비롯해 동독 내의 많은 것이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 (플뤼겔) 빈클러 씨 역시 당시 시위에 나섰던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원했다고 회고했다. 다만 그는 통일로 인해 유토피아가 열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동독 말기에는 (1989년 5월 지방선거와 같은) 부정선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SED에서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시위에 나갔다. 사회주의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물론 당시 시위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원했다. 개인적으로는 동독에서 여행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 화가 났다. 그렇다고 동독 내에서 억압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 권리인데 그게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흡수통일이 내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긴 했다. 통일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 직장을 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빈클러 씨는 튀링엔 주 천문관측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편집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낙원이 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빈클러) 빈클러 씨와 다움, 플뤼겔 씨에게 통일이 나름의 기회로 작용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움 씨는 본인이 통일로 인한 이득을 가장 많이 본 세대일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인의 부모님 세대는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이 때문에 여전히 서독에 대한 반감을 가진 경우도 있을 거라고 전했다.
"통일될 무렵에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후 서독 교육 시스템에 바로 안착해서 아비투어를 보고 대학에 갈 수 있었다. 10살 많은 형도 대학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에게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또 연금과 관련, 재통일 체제에서 동독 사람들이 동독 시절 직장에 다녔다는 것을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동독 내에서는 세계적인 수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만한 기술이 있는 공장도 있었지만, 재통일 체제에서 이런 공장을 없애버린 경우도 많다. 기존 서독 지역에 경쟁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도 서독을 나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부분 때문이다" (다움) 30년이 지났지만 독일 재통일이 이뤄진 지 30여 년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동서독 간 차이는 존재한다. 이들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서독 사람들과 만났을 때 사고방식과 행동 양태가 동독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말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첫 1년은 뮌헨에 있었다. 당시 회사 사장이 동독 사람에게 '프로젝트가 언제 끝나냐'고 물으면 동독 사람은 '한달 후'라고 대답하고 정말 한 달 후에 끝냈다. 그런데 서독 사람에게 물어보면 일주일 후에 끝난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라. 하지만 절대 그 기간 내에 끝나지 않는다. 동독 사람들은 불평도 많고 좀 딱딱하긴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약속은 지키는 성향이 있는데, 서독 사람들은 말은 다 해줄 것처럼 하지만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플뤼겔) "서독 출신들은 동독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랐기 때문에 생활 방식도 다르다. 유머감각도 좀 다르고. 예를 들어 서독 출신 사람들은 동독 출신에 비해 자산 관리를 잘하는 것 같다. 또 동독 사람들은 풍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지 않았나? 그래서 물건을 샀는데 뭔가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고쳐서 써보려고 노력하는데 서독 사람들은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어쨌든 동독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방식에서 동독의 잔재 같은 것이 남아있다. 동독 시절에 언론 매체가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해서 지금도 언론 매체를 통해 나오는 기사를 보면 일단 덮어놓고 믿지는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빈클러)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동독 시절에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밖에서 자유롭게 말하면 안 되는 사회였는데, 서독의 경우에는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스스로 자신감이 있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딸이 지금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계속 발표 수업을 한다. 자꾸 자기를 보여주는 교육을 십수 년 동안 배우면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다움) 동서독 간 격차가 많이 좁혀졌다고는 하지만 경제적 차이도 여전하다. 본격적인 경제 활동을 하기 전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본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나이대에 서독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출발할 때의 자본이 두 배는 더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리고 그 아이들의 자손 세대 정도가 되어야 서독과 대등한 경제적 출발 자본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일반 기업들도 40년 동안의 동독 시절에 다 망가졌다. 지금 동독에 큰 회사들이 이따금 있지만 나머지는 굉장히 영세하다. 겨우 겨우 열심히 일해서 회사를 키워 놓으면 서독에서 그 회사를 사버리곤 한다. 앞으로 두 세대는 더 지나야 동서독이 비슷한 경제적 수준이 되지 않을까" (플뤼겔) 동서독은 40년 동안 따로 살다가 재통일됐지만 남북은 분단만 해도 70년이 넘어가고 있다. 또 전화나 편지를 교환하고 서로 방문도 할 수 있었던 독일에 비하면 남북은 교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북은 독일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동독의 다수는 체제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동독 정부는 개인의 의견을 통제하지 못했다. 서독에서 친척이 오고 가면 동서독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정보가 왔다갔다 했는지 동독 정부는 몰랐다. 이런 측면에서 동서독은 남북 상황과 비교되지 않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다움) "동서독은 재통일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남북은 이런 식으로 통일하면 안된다" (플뤼겔) (통역 : 조경혜) "너희도 통일할 것 같아?"
플뤼겔 씨의 부인은 한국인이다. 바로 독일에서 호평을 받은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을 독일어판으로 번역한 조경혜 번역가다. 조 번역가는 1996년 예나로 유학을 왔고 이후 지금의 남편인 플뤼겔 씨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22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느꼈던 소회와 바깥에서 본 한국의 모습은 어떤지 들어보기 위해 9월 10일(현지 시각) 그를 자택에서 만났다.
우선 1990년대 중반, 독일이 통일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예나라는 구 동독 지역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서독 지역에도 진학할 수 있는 학교가 많았을텐데 왜 하필 예나였을까?
"1996년이면 재통일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독문학을 공부하려고 알아보던 중 교수님이 요즘에는 동독도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 서독 지역에도 지원하고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와 예나에 있는 대학에도 지원했는데 예나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다. 그래서 입학허가서 들고 바로 왔지. 그 때만 해도 한국 사람이 예나에 얼마나 있는지 그런 건 생각도 못하고 그냥 짐 싸서 왔다. 예나에 도착해서 알게 됐는데 당시 한국 사람이 5명 있었다. 첫 번째 한국인을 만나는데 3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여기가 예전 동독 지역이다 보니,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물어봤다. 어르신들 중에는 동독 시절에 북한 사람 많이 알고 지냈다는 분도 계신다" 학위만 따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어느새 독일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었다. 20년 넘게 백인이 아닌 동양인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물어봤다. 특히 요즘 독일에서는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떠오르면서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도 늘어가고 있어 독일 내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독일 극우 집단들의 타깃이 동아시아 쪽은 아니라서 제가 직접적으로 위협을 느낀 건 없다. 그런데 지난해 60대 여성이 한 난민에 의해 강간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독일 사람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일 때문에 외국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느끼진 않는다. 다만, 이슬람 문화를 좋아하는 독일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베를린의 경우 터키계 무슬림이 많이 거주하는데도 그렇다.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경우 전략적으로 경제가 어려운 동독 지역을 공략한다. 당신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난민 때문이라는 식으로 선전을 한다. 그런데 난민에 대한 반감은 극우뿐만 아니라 중산층에도 좀 있는 것 같다. 자기가 낸 세금을 가지고 난민의 생활비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어 보인다"동서독 간 경제적 차이도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주로 동독 지역에서 지지를 얻은 이유가 됐을 거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실제 동독 지역에 거주하면서 동서독 간 경제적 차이를 느낀 적은 없었을까?
"예전 서독 지역에 가면 분위기가 동독 지역과는 좀 다르다. 물론 예전 서독 지역 중에서도 주로 큰 도시를 가봤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확실히 동독 지역보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독일 기준으로 외국인도 훨씬 많고. 또 예나는 대학이 있어서 동독 내에서도 발전이 좀 이뤄진 도시이지만 여전히 동독 지역 도시들은 좀 어렵다. 라이프치히만 해도 큰 공장 건물을 가지고 있음에도 수리할 수 있는 자본이 없어서 빈 건물로 놔둔 곳이 상당수 있다. 물론 예나도 재통일 전에는 좀 어두웠다고 한다. 그런데 재통일 이후에 낡은 건물을 수리하고 색을 칠하고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밝아졌다고 한다. 예나의 건물 중에 웬만한 건 다 수리했다고 보면 된다. 하다못해 페인트칠이라도 다 새로 했다" 분단 40년에 통일 30년이 가까워 오지만 동서독 간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곧 있으면 분단 100년이라는 시간표를 받아들지도 모를 남북은 앞으로 어떤 관계를 설정해 나가는 것이 좋을까?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남북 간 갈등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여기가 한국보다 더 난리다. 지난해에는 저도 걱정되더라. 그리고 독일 사람들이 '너희도 통일할 거 같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어려울 거 같다고 답했다. 우리는 전쟁을 하기도 했고 분단됐을 때 교류도 안했고. 또 이산가족도 이제 많이 남지 않았고. 독일은 40년 분단 기간 20년 정도는 TV부터 시작해서 통신 등을 허가하면서 동서독 간 교류를 해왔다. 이게 기반이 되어 국제 정세가 딱 맞아 떨어질 때 통일을 한 것이다. 이 사람들도 통일을 해야겠다고 계획하고 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남북이 교류하는 게 선행되어야 통일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경제적인 문제보다 남북이 이질화가 심각해졌다는 것이 가장 문제 아닐까 싶다. 남한은 문명과 변화에 너무 민감하고 북한은 너무 통제돼서 사실 극과 극이다. 이 둘이 융화되려면 남북이 서로 개방하고 교류하면서 조금씩 통일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동베를린 출신 오스카 수상 감독, 그가 보는 통일은?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⑥] 동독 출신의 프라이당크 영화감독
2018.10.12 18:08:20
'독일 영화'는 한국에서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를린 영화제가 있지만, 한국에서 독일 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은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인 빔 벤더스, 베르너 헤어조크 등의 몇몇 대가, 할리우드 감독이라 해야 할 롤랜드 에머리히 등 소수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독일 영화계란 곧 서독 영화인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독 출신이 독일 영화계에서 설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영화계뿐만이 아니다. 독일 사회에서 서독 출신의 엘리트 계층 독점 현상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베를린사회과학연구소가 2012년 발표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독일 엘리트층의 95%가 서독 출신이며, 동독 출신은 2.8%에 불과하다. 이 같은 현상은 시간이 더 지나야, 즉 독일의 재통일 후 태어난 젊은 세대가 충분히 사회에 진입해야만 완화될 것이다.
지난 달 12일 만난 요헨 알렉산더 프라이당크(Jochen Alexander Freydank, 1967년생) 감독은 예외적 사례다. 프라이당크 감독은 지난 2009년 <토이랜드(독일어 Spielzeugland)>로 아카데미 단편 영화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로 세계의 관심을 받은 프라이당크 감독은 지난 2014년 영화 <카프카의 굴>로 부산 국제 영화제를 찾기도 했다. 동서독 출신 지역을 넘어, 독일 영화인 중 이처럼 세계적으로 성공한 감독 자체가 많지 않다. 프라이당크 감독을통일 독일에서 두각을 나타낸 구 동독 출신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프라이당크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주제는 통일 후 동독, 정확히는 베를린의 변화와 동독인의 독일 주류 사회로의 진입 스토리다. 프라이당크 감독은 1967년 베를린 카를 마르크스 대로(Karl-Marx Allee)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힙스터 천국' 베를린에서도 주목받는 클럽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샤인(Friedrichshain) 부근이다. 한 때 동독 체제 선전용으로 기획한 거리가 지금은 세계 젊은이들을 불러 모으는 힙스터 거리로 변했다.
프라이당크 감독이 현재 거주 중인 프렌츠라우어베르크(Prenzlauerberg) 또한 옛 힙스터 거리로 유명했다. 지금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완료돼 가난한 이는 찾아보기 힘든 비싼 지역이 됐지만 말이다. 프라이당크 감독과 프렌츠라우어베르크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그의 어조로 각색해 정리했다.

▲ 프라이당크 감독. 동독 출신으로 여러 벽을 뚫고 예술적 성취, 비평적 성취를 모두 얻어낸 감독이 되었다. ⓒ프라이당크 제공
영화감독을 꿈꾼 동베를린 청년
전 1967년 9월, 동베를린 카를 마르크스 대로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통일 후에는 여행의 자유가 주어졌으니 세계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봤죠. 하지만 항상 베를린이 제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지금은 프렌츠라우어베르크 부근에서 생활하죠.
전 아카데믹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베를린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셨죠. 통일 이후 많은 동독 출신이 그랬듯, 서독에서 온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셔야 했지만요.
가정 환경 덕분에 전 어릴 적부터 상대적으로 풍부한 문화적 세례를 받고 자랐죠.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동독에서 영화는 체제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반면, 연극은 더 예술적 장르로서 자리 잡았죠. 그 덕분에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조금은 정치비판적인 연기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 영화에 빠져들었죠. 연극보다 더 콤팩트하고, 더 확장성도 좋았으니까요. 미학적 실험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동독 시절 저에게 영향을 준 작품요? <차가운 심장(Das Kalte Herz)>과 1980년대 동독 펑크 록 씬(Scene)을 다룬 다큐멘터리 <속삭이고 울부짖다(Flüstern und Schreien)>를 꼽겠습니다. 기본적으론 (한국의 AFKN과 같은) 주독 미군 방송 RIAS를 더 접했네요. 동베를린 젊은이들은 다 서독 방송이나 미군 방송을 시청했죠.
영화감독의 꿈을 꾸었기에, 아비투어를 치른 후 동독 국영 방송 ARD의 어린이, 청소년 프로그램의 조연출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인민군에서 사진병으로서 18개월 간 복무했죠. 동독에서 징집을 거부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징집을 거부하면 수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동독에서 수감 생활을 한다는 건 죽으러간다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징집을 피할 길이 없었죠. 더구나 징집을 거부한다는 건 (영화를 위한)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전 기독교 신자였고, 그 때문에 무기를 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안을 찾은 게 사진병입니다. 당시 저는 배우로서도 조금 활동했고, 영화계 일을 했기에 이 같은 대안을 겨우 찾을 수 있었죠.

▲ 과거 동독 시절의 상징이었던 TV타워. 368m로 독일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다. 동독 정부가 1969년 설립했다. TV 송신탑이지만, 체제 선전 목적이 있었다. 당시 기준으로 장벽 바로 인근에 세워졌다. 서독에서도 바로 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했다는 뜻이다. ⓒ특별취재팀
바닥에서 상공으로
장벽이 무너질 당시 전 작은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었습니다. 장벽이 무너지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죠.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일단 너무나 충격적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구 동독 지역에서는 연일 평화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장벽이 무너진 후 시위 구호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국민'이라는 구호가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라는 구호로 변했습니다. 이어서 시위에 국기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동독기가 나왔으나, 나중에는 망치, 컴퍼스, 호밀 고리가 그려진 동독기가 사라지고 독일 국기(서독기)가 등장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상황이 되어버렸죠.
그렇게 통일을 맞았습니다. 기회가 열리리라 생각했죠. 하지만 쉽지 않더군요. 베를린과 포츠담의 영화 대학에 다섯 차례 지원했지만, 모두 낙방했습니다.
독일 영화계는 기본적으로 인맥이 중요합니다. 대부분 성공한 독일 출신 감독은 부모님이 이미 유명한 영화인이었거나, 유력 집안 자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시는 더했습니다. 도제식이었죠.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과해야만 대학 입학이 가능했는데, 인터뷰 때마다 교수들과 부딪쳤습니다. 미학적 기준의 차이였죠. 교수들은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흡수할 수 있는 학생을 원했는데, 그 부분에서 저와 의견 차이가 났죠.
결국 밑바닥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방송, 연극 무대를 가리지 않고 현장 일을 했습니다. 영화 영역에서는 의상을 제외한 모든 일을 해봤고, 공장이나 슈퍼마켓에서 일해보기도 했습니다. 동독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이런 일을 겪었느냐고요?
글쎄요. 답변하기 조금 어렵네요. '동독 출신이라 차별 받는다'라고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같은 느낌은 갖고 있었습니다. 비단 영화계뿐만이 아니라, 독일의 모든 중요한 자리, 즉 엘리트 계층에서 대체로 구 동독 출신은 극소수인 게 현실입니다. 반면, 인구로만 따지면 구 서독 출신이 구 동독 출신보다 더 많지만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독일 군인의 절반가량은 동독 출신입니다. 체제가 서독 위주였으니 구조적 출발선이 달라서 생긴 결과랄까요. 어떤 분야든 더 높은 위치로 가려면 넘어야 할 장벽이 있는데, 이 때 중요한 학벌, 인맥 등에서 동독 출신은 부족할 수밖에 없죠. 이 때문에 재통일의 열기가 가라앉은 후에는 너무나 컸던 기대에 따른 실망감이 사회에 번지기도 했습니다.
사실상 신분제 사회라고 느끼느냐고요? 그건 전혀 아니죠. 그 주장은 너무 나갔습니다. 일단 중요한 건 제 세대, 즉 통일을 경험한 세대와 통일 후 세대는 다르다는 겁니다. 지금 젊은 독일 세대에게는 출신 지역이 의미가 없습니다.
어찌됐든, <토이랜드>를 위해 힙겹게 돈을 모아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외국의 유명한 상을 타니 저를 보는 독일 영화계 시선도 달라지더군요.
참고로 독일의 영화 시스템은 한국과 조금 다릅니다. 영화에 국가가 재정적으로 참여하는 할당분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공영방송사가 수신료 이익 중 일부를 영화에 투자하는 시스템이죠. 다만 모든 영화가 이 같은 지원을 받진 못합니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열린 도시가 사람을 바꾼다
결과적으로 전 동독 출신이었다는 점 때문에 삶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만은 않습니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늦잠을 잘 때 전 새벽부터 일어나 일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죠.
더구나 전 구 서독 출신이 갖지 못한 경험을 했습니다. 동독 체제에서 독일 체제로, 일종의 경계를 넘어가는 경험을 해봤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다른 두 세상을 경험해 봤죠. 그 덕분에 다른 이들보다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동독보다 중요한 건 베를리너로서 정체성입니다. 분단 시절 동베를린은 동독의 문화 중심지였습니다. 동독에서 예술 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베를린에 모였습니다. 동독의 파리였다고나 할까요. 동베를린 특유의 사투리가 있는데, 당시 그 사투리를 쓰면 뭔가 쿨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동베를린이 물질적 측면에서 동독의 다른 도시보다 조금 더 풍요로웠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도시에서는 케첩을 구하기 어려웠지만, 동베를린에서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웠습니다. 물론 1인당 2병으로 제한되긴 했지만요. 자연히 동베를린은 다른 곳에 비해서 생동감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서베를린과 가까웠기 때문에 서독 사람들과 연락하기도 쉬웠고, 그 덕분에 더 살아있는 서구 소식을 들을 수 있기도 했습니다. 동베를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동독 독재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이런 외부와의 교류는 중요합니다. 동베를린만큼은 아니지만, 분단 시기 라이프치히도 박람회로 인해 일찍부터 외부 사람과 교류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같은 작센(Sachsen) 주의 도시임에도 라이프치히는 드레스덴, 켐니츠 등과 다릅니다. 더 열려 있죠. 요즘 라이프치히에 젊은 예술인이 몰려드는 이유입니다. 반면 작센의 프라이탈(Freital)은 지형 문제로 인해 분단 시기 서독 방송을 보기 힘들었는데, 현재 난민, 극우 문제에 관해 가장 극단적인 도시의 하나입니다.

▲베를린의 명물 암펠만과 관련한 관광상품을 파는 기념품 숍. 암펠만은 지금도 신연방주에서는 일상에서 시민과 함께 숨쉬는 공공디자인이다. 통일 정부는 이 디자인까지 모조리 서독식으로 통일하려 했다. ⓒ특별취재팀
서독 주도 재통일의 그늘
맞아요. 요즘 구 동독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극우 문제인 듯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나쁜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일종의 선동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사회를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듯합니다. 물론 동독 지역에 극우적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서독 지역에도 많습니다. 지난 켐니츠 사태 때 몰려든 극우 시위자 중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더 중요한 건 왜 저들이 불만을 갖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태의 악화를 막고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구 동독 출신이 사회에 불만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이처럼 자신보다 더 약한 자(외국인)를 차별하는 문제로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 글쎄요, 극단적으로 동독 출신을 단정하는 건 반대합니다만,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주변 지인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독일 언론에 불만이 많습니다. 구 서독 언론이 미디어를 지배하니, 그들의 시각으로 동쪽을 바라본다는 거죠. 예를 들어 보죠. 구 동독에서는 저축 개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를 과하게 축적하는 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나쁜 일로 인식됐죠. 이처럼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돈 관리 개념이 없이 살아왔는데, 재통일 후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밀려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죠. 구 동독 출신이 불만을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생각됩니다. 이런 점부터 살펴봐야 왜 신연방주의 일부 도시에서 극우 집회가 집중적으로 열리는가를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돌이켜 보면, 동독이 가진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장점이 사라진 게 아쉽습니다. 교육제도, 보육제도 등에서는 동독 체제도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모두 서독식으로 바꿔버렸죠.
심지어 재통일 초기에는 교통 신호등 체계까지 일방적으로 서독식으로 바꿨다가 시민의 반발로 원래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습니다(암펠만, 베를린의 상징인 공공 디자인으로 구 동독의 신호등 체계로 사용됐다. 서독 지역에서는 암펠만을 보기 힘들지만, 구 동독 지역에서는 지금도 신호등 문양으로 암펠만을 사용한다.). 이처럼 재통일 후 정부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동독의 흔적을 지우려 했습니다.
반발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구 동독의 유명한 저항적 언더그라운드 펑크 밴드였던 필링 비(Feeling B) 멤버 하나는 재통일 후 반어적으로 "동독에도 충분히 문제가 많은데, 이제 우리가 서쪽 문제까지 감당하게 됐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 밴드 출신 2명이 나중에는 독일 인기 록 밴드인 람슈타인(Rammstein)의 멤버가 되어 유명인으로 살아가죠. 통일에 비판적이었던 이가 지금은 통일 후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인 베를린 프렌츠라우어베르크에 산다니 재미있죠.

▲ 프라이당크 감독이 태어난 카를 마르크스 대로 부근의 모습. 옛 동독 시절 체제 선전용으로 만든 널찍한 대로다. 평양이나 베이징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디자인과 크기의 건물들이 거대한 도로 주변을 메우고 있다. 현재 독일에서는 보기 힘든 이색적 풍경이다. ⓒ특별취재팀
베를린이라는 환상
제가 사는 곳이기도 하죠. 최근에는 이곳이 정말 많이 변했어요.
며칠 전 이곳 부근 교회에서 시위가 있었습니다. 예전 이곳에서 살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밀려난 구 동독 사람들의 시위였습니다. 이제 동베를린은 평범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됐다는 증거죠.
통일 전에는 이 지역(프렌츠라우어베르크 쉔하우저 대로 부근)에서 방 하나를 구하는 데 서독 화폐로 3마르크, 유로화로는 1.5유로 정도면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월세로 1000유로(약 130만 원)가량이 듭니다. 30년 만에 670배 정도 올랐죠. 전 동독 출신으로 비교적 성공한 사례라 그나마 여기서 현실 유지가 가능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죠.
집 문제는 재통일 후 동독 출신이 경험한 가장 새로운 문제입니다. 동독 당시 집은 보급의 대상이었고, '일단 사람은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가난한 사람은 기본권조차 얻기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최근 취재를 위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갔는데, 그곳도 젠트리피케이션이 극심하더군요. 딱 과거 동베를린의 모습이었어요.
당신들이 뭘 물어볼지 알아요. 통일 후 동베를린의 이른바 저렴한 물가가 젊은이를 모았고, 그 덕분에 베를린이 힙스터 천국으로 거듭났다는 거죠? 제 경험으로 보자면, 실제 1990년대 말까지는 창조적인 분위기가 존재했어요. 통일 후 돈도 없고 직업도 없지만 집은 있던 동베를린의 젊은이들이 할 일이 뭐 있었겠어요? 파티 했죠. 더구나, 동베를린의 특수성이 존재했어요.
독일 말로 '키츠(Kiez)'라고 하는데, 그냥 동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종의 문화적 지역 개념이지만 지금은 행정적으로도 사용하죠. 베를린에 17개의 키츠가 있어요. 각 키츠별로 문화가 다릅니다. 이런 다양성이 베를린을 개방적이고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베를린의 개방성이란 백인에게만 그렇죠. 가난한 비 백인에게는 결코 열려있지 않아요. 난 오픈 마인드라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너희 아이를 터키계, 아랍계 아이들이 많은 학교에 보내도 괜찮으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싫다고 답하죠. 소위 '베를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가난한 예술가 동네'는 사실 좀 미신과 같은 측면이 있어요. (통역: 추영롱)
통일은 '움직이지 않는 이주', 남북 청년들 서로 호기심 갖길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⑦] '세제곱관점' 유디트 앤더스 활동가
2018.10.14 18:35:21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10대였던 청소년들은 독일 재통일이라는 격변을 겪었다. 하지만 서독과 동독 청소년의 체감은 달랐다. 재통일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서독에 비해, 동독 출신의 청소년들은 완전히 달라진 교육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런데 동독 출신들에게는 힘겨웠던 재통일의 기억은 서서히 지워져 갔다. 재통일된 독일 사회의 주류인 서독 출신들의 통일 기억이 이들의 기억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이들의 기억은 잊혀져 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동독 출신의 젊은 세대들, 즉 1976~1986년에 태어나 10대 또는 그보다 더 어렸을때 베를린 장벽 붕괴와 재통일을 겪은 이른바 동독의 '제3세대'들은 2010년 '세제곱관점'이라는 사회 문화단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베를린 장벽 붕괴와 재통일의 기억을 나누는 것과 함께, 동독의 관점과 서독의 관점, 그리고 유럽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13살 때 재통일을 겪은 동독 출신의 유디트 앤더스(Judith C. Enders, 1976년 생) 씨는 이 단체의 창립 멤버다. 그는 "201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주년이 지났을 때 당시 TV에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과 정치인들이 장벽 붕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들은 주로 서독 출신이었고 동독 출신인 저희가 했던 경험과는 완전히 달랐다"며 "세대별로도 재통일의 경험이 다 다를 텐데 이런 것들이 무시됐고, 서독 출신 남성 위주로만 장벽 붕괴와 재통일을 바라보는 것이 불편했다"고 말했다.
앤더스 씨는 동독 출신인 자신들이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의 재통일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 세대가 장벽 붕괴와 재통일 문제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이를 바탕으로 지금 동독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우리의 관점으로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생각했다"며 '세제곱관점'이라는 단체를 꾸리게 된 이유를 소개했다.
앤더스 씨는 "세제곱관점을 만든 이후 2011~2012년 동독 출신의 젊은 층들을 대상으로 컨퍼런스를 열었는데 당시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그동안의 침묵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했다"며 "독일 사회에서 재통일 이후 동독 출신의 제3세대들의 목소리가 조명된 사실상 첫 사례였다"고 전했다.
그런데 독일 내에는 여전히 재통일된 사회에 원만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동독 출신 '제3세대'들도 존재한다.
이와 관련 앤더스 씨는 "여전히 동독 출신의 사람들에게는 '2등 시민'이라는 콤플렉스가 있다. 더군다나 지방에 남아있는 동독 출신들은 동독 밖으로 나갈 기회를 가지지도 못했고 부모님도 이를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서독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본 적도 별로 없다"며 이들을 변화로 이끌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없애야 한다. 동독 출신이라서 가지고 있는 부끄러움과 같은 감정이 있는데 이런 것을 함께 나누는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같은 독일 국민인 서독 출신의 사람들도 함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지난 9월 16일 (현지 시각) 베를린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동독에서 태어났다가 재통일 이후 서독에서 거주하셨다고 들었다.
앤더스 : 구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의 남쪽에 있는 알텐부르크에서 태어나 3살 때까지 살다가 베를린 인근 북쪽에 위치한 비트슈톡이라는 작은 도시로 이주했다. 재통일 된 이후에 마르부르크라는 예전 서독 지역의 도시로 이사해서 1년 정도 살았다. 그런데 당시 느낌이 좋지 않아서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갔다.
서독 지역으로 이사했을 때 김나지움 1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김나지움은 독일의 인문계 중등 교육기관이다. 김나지움 11학년은 한국 기준으로 고등학교 2학년에 해당한다. 편집자) 그 학교에 800명 정도가 다녔는데 그 중 동독 출신은 3명밖에 없었다. 또 동독 시절과 비교했을 때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이 달랐다. 동독 출신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을 좀 더 잘했고 언어 과목이 부족했다. 언어 과목도 영어나 프랑스어보다는 러시아어를 배웠다.
이렇게 다른 점이 있다 보니 서독 출신 친구들은 저를 비롯해 동독에서 온 친구들을 좀 특수한 아이들처럼 봤다. 마치 동물원에 있는 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독 출신의 다른 친구들은 동독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심지어 동독이 있었는지 들어본 적이 없는 친구들도 있었다.
동독 출신인 우리에게 재통일은 모든 시스템이 바뀌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독 출신 친구들의 일상은 별로 바뀐 것이 없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 즉 서독 친구들은 TV를 통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을 봤지만, 이게 그 친구들의 인생에 있어서 아무런 전환점도 아니었다. 이렇게 배경이 다르다 보니 서독 친구들이 나의 말을 이해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학교 내에서 소외감도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따돌림을 당하거나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서독 친구들은 동독 출신인 우리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같이 어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새로운 저에게는 서독 출신의 친구들이 우리의 상황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고 그래서 좀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프레시안 : 학창시절의 경험이 '세제곱관점'이라는 단체를 만들게 된 이유가 됐나? 단체를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이고 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앤더스 : 독일의 재통일을 동독의 관점과 서독의 관점, 그리고 유럽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세제곱관점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게 됐다. 또 여기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는 내가 보는 관점과 다른 사람이 보는 관점이 다르며, 이런 부분을 서로 이야기하고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주년이 지났다. 당시 TV에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과 정치인들이 장벽 붕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주로 서독 출신이었고 동독 출신인 저희가 했던 경험과는 완전히 달랐다. 세대별로도 재통일의 경험이 다 다를 텐데 이런 것들이 무시되고 서독 출신 남성 위주로만 장벽 붕괴와 재통일을 바라보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장벽 붕괴와 재통일 문제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이를 바탕으로 지금 동독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우리의 관점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6명의 동독 출신 친구들과 2명의 서독 출신 친구들이 모여서 동독 출신의 많은 젊은층들이 서독에 가서 교육을 받는 문제, 동독에 아무도 남지 않은 문제, 미래 동독은 과연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의 문제 등에 대해 우리의 관점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다.
우선 2011~2012년에 '(젊은) 세대의 자기 발견과 기성세대와의 커뮤니케이션'(selfdiscovery of a generation and communication to the older generation)이라는 이름으로 컨퍼런스를 열었다. 1976~1986년에 태어난 동독 출신의 이른바 '제3세대 동독'(Dritte Generation Ostdeutschland)'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이들이 장벽 붕괴와 재통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리기 위해 컨퍼런스를 시작했다.
당시 컨퍼런스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참가했는데 대부분 이 연령대의 사람들이었다. 참가자들은 그동안의 침묵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 이 컨퍼런스를 통해 제3세대들이 재통일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컨퍼런스는 독일 사회에서 재통일 이후 동독 출신의 제3세대들의 목소리가 조명된 사실상 첫 사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컨퍼런스를 베를린에서 했는데, 사실 베를린은 동서로 나뉘어져 있고 접촉도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방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방에 살고 있는 동독 출신 청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버스로 투어를 시작했다.

▲ 세제곱관점에서 진행한 버스 투어 안내 사진. 버스에는 '제3세대 동독'(3te generation ostdeutschland)라는 문구가 쓰여있고, 아래에는 구 동독 지역의 지도가 놓여있다. ⓒ유디트 앤더스 제공
열흘 동안 각 지역 버스 터미널에서 동독 출신의 청년들을 만나 대화하고 서로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또 지역 사회에서 학교를 위한 프로젝트를 한다든지 아니면 대안적인 문화 센터 같은 모임 단체나 할레에 위치하고 있는 연구 단체 등에서 행사를 열면서 지방에 있는 청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생각을 교환하는 활동을 했다.
이처럼 우리는 주로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없애고, 동독 출신이면 가지고 있는 죄책감 같은 감정이 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영화 프로젝트, 사진 전시, 책 출간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고 웹사이트에는 구 동독에 대한 이야기도 실어 뒀다.
프레시안 : 동독 출신들이 느끼는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앤더스 : 동독에서는 전반적으로 재통일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통일을 통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이른바 '제2의 시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본인이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에 동독이 망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독 사회에서 소위 '잘 나가던' 사람들도 재통일 이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적응 역시 쉽지 않았고. 저는 그래서 동독 출신들은 '움직이지 않은 이주'를 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또 과거 동독이 독재정권이었기 때문에 독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다. 물론 슈타지에서 일했던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동독 출신을) 뭉뚱그려서 '독재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동독이 서독에 비해 기술적으로 뒤떨어지기도 하고, 발랄하고 활발한 서독의 이미지와 반대로 동독은 칙칙하고 재미없다는 이미지도 있다. 서독에서 생각하고 있던 동독에 대한 이러한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동독 사람들에게 반영되면서 동독 출신들은 스스로 '뭔가 뒤떨어진 사람 같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서독 출신들은 동독 출신들을 좀 불쌍하듯이 (바라본다). 서독 출신들은 동독 출신들이 스스로 힘을 얻고 일어서는 것을 지원해주는 것 보다는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경우도 있다. 아마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이미 재통일이 된 지 3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 이른바 제3세대들의 경우 통일 이후에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독 출신들에게는 그러한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같은 것이 남아 있는 것인가?
앤더스 : 굉장히 다양하다. 저희 또래에서는 재통일이 됐기 때문에 (자유롭게 해외) 여행도 가고 유학도 가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는 사람도 있다. 반면 서쪽으로 나가는 것이 조심스럽고, 또 그런 기회도 별로 없어서 살던 지역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독일 재통일 이후 현재까지 사회 통합이 됐다고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저희가 보기에 동독 출신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재통일 이후 동독 밖으로 나가며 유동적으로 이동하는 사람과 지역에 있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남성들이 지역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이 켐니츠 같은 지역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켐니츠는 과거 동독 시절 '칼 마르크스의 도시'라는 이름의 '칼 마르크스 슈타트'로 불렸다. 재통일 이후 경제적으로 쇠락하는 양상을 보였으며, 최근에는 독일 극우단체의 시위와 난민 반대 시위 등이 일어나고 있다. 편집자)
지역에 남아있는 동독 출신들은 동독 밖으로 나갈 기회를 가지지도 못했고 부모님도 이를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서독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본 적도 별로 없다. 베를린의 경우 본인이 따로 어딘가를 가지 않더라도 전 세계에서 베를린에 찾아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과정 속에서 개인의 변화도 생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동독 지역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접할 수 없다. 옛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 할레, 예나 등은 유학생이라도 있지만 다른 도시들은 누군가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
동독 출신들이 가지고 있는 수치심, 죄책감 등을 청산해야 하는데 이게 '생애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20~30년이 지나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돼 있다. 그래서 이게 지금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고 있다.
프레시안 : 동독 출신 남성들이 유독 재통일을 힘겨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앤더스 : 저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동독에서는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아버지나 남편에 의존하지 않았다. 여성 해방이나 남녀평등을 이론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서 있었기 때문에 동독 출신 여성들이 활동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 2013년 세제곱관점에서 처음으로 출간한 책 <제3세대 동독>(dritte generation ost) ⓒ유디트 앤더스 제공
그런데 동독 여성들이 서독 여성들에 비해 더 해방된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동독 여성들은 성평등을 자연스럽게 부여 받았다. 정치적으로 투쟁해서 쟁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독에서는 여성 해방 운동이 있었고 서독 여성들은 이런 것들을 직접 투쟁해서 쟁취했다.
또 동독은 헌법에 남녀 평등이 있었지만 서독에서는 이 부분이 뒤늦게 헌법에 포함됐다. 서독은 부르주아지를 바탕으로, 동독은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계급의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 문제에 대해서도 시스템적인 차이가 있다.
동독에도 좋은 제도가 있었다
프레시안 : 동독 출신은 통일되고 동독의 가치가 부정당하는 경험을 집단으로 한 것 같다. 그런데 성평등 문제와 같이 지금 생각하기에 재통일 이후에 남겨뒀어도 괜찮았던 동독의 제도나 사회문화적인 분위기들도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하나?
앤더스 : 그런데 여성 문제도 동독이 더 나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이건 토론이 좀 필요한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와 마찬가지로 동독 체제의 제도가 더 나았다기보다는, 재통일 이후에도 동독에 있던 제도들을 함께 개발해 나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예를 들어 교육 시스템은 서독보다 동독 지역이 좀 더 평등했다. 또 경제적 격차도 동독이 서독에 비해 적었다. 그런데 동독으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제도들을 재통일 이후 제대로 활용하기는 어려웠다. 서독이 승리자였고 동독은 패배자였기 때문이다.
또 동독에서 살던 사람들 중에 동독이 가지고 있던 교육, 여성, 경제 분야에 있어서 선진적이었던 부분을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전승되지 않은 측면도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부모세대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재통일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경우도 있다.
프레시안 : 재통일 이후 동독 출신들이 여전히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앤더스 : 개인적으로 다 다르다. 저같은 경우는 동독이나 통일 독일의 정체성보다는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미래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만 바라보면 잃어버린 것만 보이게 마련이다. 또 내가 누구인지를 바라보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면 안된다.
또 동독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 문제에 대해 서독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시민 교육이나 정치 교육 등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한다. 마치 연인관계와 비슷한 것 같다. 현재 독일은 같이 있었다가 헤어짐을 겪었고 다시 만나지 않았나?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상대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지가 중요하다.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세대 간에도 이해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 간 과거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게 필요하다. 그래서 저희는 제3세대 뿐만 아니라 그 부모들의 이야기도 책으로 묶어 출판하기도 했다.
저는 2010년 세제곱관점 활동을 시작하면서 저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개발해 낼 수 있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앞으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굉장히 많이 불편했지만 지금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많이 변한 상태다.
프레시안 : 세대 경험이 다르다고 하셨는데 부모와 젊은 세대 간에 경험의 차이에 따른 갈등도 있을 것 같다.
앤더스 :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제3세대의 부모들은 보통 30~50대였다. 이미 동독 사회에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경우는 사회적인 성공을 위해 차근 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삶의 중반점에 위치하신 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면서 본인의 사회적 지위, 아이들의 교육 등 두려움과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걱정이 많았던 부모들이 아이들을 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제3세대들은 이전 세대에는 없던 자유를 느꼈다. 그러면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많았다.
프레시안 : 남북은 이제 다시 교류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재통일을 겪은 본인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남북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앤더스 : 가능한 한 편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서로 호기심을 가지고 만나길 바란다. 사람마다 좋은 경험도 있고 나쁜 경험도 있는데 예전에 서로 하나였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만나길 바란다.
서로 심리적으로 견제하면서 '이렇게 하게 되면 어려움이 있겠지' 라는 생각보다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이렇게 대화하면 지금보다 더 나아지겠지'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교류하면 좋을 것 같다. 열린 마음과 관대한 마음, 호기심 이렇게 세 가지를 가지고 서로를 만났으면 좋겠다. (통역 : 한정화)
나라가 분단되자 회사도 분단됐다: 칼자이스 스토리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⑧] 재통일의 여파를 이겨내다
2018.10.16 09:09:17
칼 자이스(Carl Zeiss)는 렌즈 기술로 유명한 회사다. 의료용 렌즈, 현미경 렌즈, 안경 렌즈, 카메라 렌즈, 천체투영관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졌다.
1846년, 독일 튀링엔 주의 도시 예나(Jena)에서 카를 자이스가 자신의 이름을 딴 광학회사 칼 자이스를 설립했다. 회사는 1866년 대학 교수였던 물리학자 에른스트 아베(Ernst Abbe)의 참여, 1884년 화학자 프리드리히 쇼트(Friedrich Otto Schott)의 참여로 본격적인 성장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카를 자이스 사망 후 둘은 아베의 주도 아래에 단독 주주의 횡포를 막고자 칼 자이스 재단을 설립, 지금의 칼 자이스 체제를 만들었다. 재단은 당시로는 급진적이라 할 만한 하루 8시간 노동제, 풍부한 휴가제 등을 회사에 도입했고, 종신 고용 모델에 기반을 둔 연구자 중심 기업 체제를 완성, 예나의 프리드리히 쉴러 대학과 함께 산학 협력 기반을 다졌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비극이 시작됐다. 히틀러의 압력 하에 군사용 렌즈를 보급하던 칼 자이스의 예나 공장을 1945년 4월 13일, 미 육군 80보병사단이 점령했다. 튀링엔 주는 소련의 점령 지대였지만, 예나만은 달랐다.
미군은 칼 자이스 이사진을 포함한 핵심 임직원 77명을 서쪽 미군 점령 지대인 하이덴하임(Heidenheim)으로 빼돌렸다. 중요 기술 기업인 칼 자이스를 소련에 빼앗길 수 없다는 판단 아래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이덴하임은 지금 칼 자이스 재단이 자리한 곳이다. 미군보다 한 발 늦은 1945년 12월 31일, 소련은 예나를 비롯해 동쪽에 남은 칼 자이스를 압류했다.
1946년 10월, 서쪽으로 강제 이주된 칼 자이스 임원진은 오버코헨(Oberkochen)에 '자이스 옵톤 광학공업 오버코헨 유한책임회사(GmbH)'를 설립했다. 이듬해 회사명은 '칼 자이스'로 변경됐다. 1948년 6월, 소련은 예나에 남은 칼 자이스 재단을 인수하고 동쪽의 칼 자이스를 '콤비나트 인민기업(VEB) 자이스 예나'로 국영화했다. 이로써 동서 독일이 갈라지듯, 기업도 동서로 갈라졌다.
체제가 갈등하듯, 한때 한 몸이었던 기업도 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냉전 시기 두 회사는 자신이 아베가 만든 회사의 적통임을 입증하려 국제 무대에서 싸웠다. 싸움은 법정으로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데탕트의 시기, 두 회사도 휴전했다. 이후 재통일이 왔다. 둘로 갈라진 기업을 한 몸으로 만들면서 엄청난 규모의 노동자 해고라는 산을 넘어야 했다.
칼 자이스는 독일의 분단-재통일 역사를 상징한다. 이윤을 따라 움직이기 마련인 기업사에서 찾기 쉽지 않은 이야기다. 취재진이 이 회사에 주목한 이유다. 취재진은 칼 자이스 역사를 상징하는 예나에서 동독 콤비나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을 만났다.
지난 달 11일, 지금은 은퇴한 전 임원진인 볼프강 볼크홀츠(Wolfgang Volkholz, 1947년생) 씨와 빌프리드 랑(Wilfried Lang, 1951년생) 씨, 그리고 현재 칼 자이스 기록보관소에서 근무하는 볼프강 빔머(Wolfgang Wimmer) 박사와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칼 자이스 기업사를 정리했다.
볼크홀츠 씨는 지난 1971년 자이스 예나에 입사해 2006년 (통일된) 칼 자이스 유한회사의 임원까지 승진한 후 2012년 은퇴했다. 랑 씨는 1974년 자이스 예나에 입사해 2005년 칼 자이스 부회장까지 올랐고, 2016년 은퇴했다. 랑 씨는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셋 중 유일하게 서독 출신인 빔머 박사는 1993년 베를린에서 독일 의약품산업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96년 칼 자이스 기록보관소에 입사했다. 회사 역사를 정리한 책 <같은 사람끼리 모이기 마련(Birds of a Feather)>의 책임편집자다.

▲ 빌프리드 랑(왼쪽) 씨와 볼프강 볼크홀츠(오른쪽) 씨. 이들은 동독 출신으로 칼 자이스 통일 시기의 혼란을 견뎌냈고, 회사 최고위직까지 오른 후 은퇴했다. ⓒ특별취재팀
한 가족이 적으로
동서 칼 자이스의 충돌은 1948년 본격화했다. 이 해 7월 30일, 오버코헨의 칼 자이스는 재단 주소지를 예나에서 하이덴하임으로 이전하겠다며, 도시가 소재한 서독 뷔템베르그-바덴 주정부에 승인을 요청했다. 이제 칼 자이스는 서쪽에만 있다는 뜻이었다. 예나의 VEB 자이스는 발끈했다. 오버코헨 칼 자이스와 동독 국가통상기관(DIA)의 긴 협상이 시작됐다. 1954년 2월 12일, 결론이 났다. 서독 괴팅겐 지방재판소는 VEB 자이스 예나가 칼 자이스 명칭과 상표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국영기업이 된) 예나의 칼 자이스는 이제 가짜라는 뜻이다. 싸움은 국제전으로 번지게 됐다.
"당시는 두 기업이 적대적이었어요. 천문분야뿐만 아니라 현미경, 의료기기 등 모든 부문에서 동서 자이스가 경쟁했죠. 아마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사례이지 않을까 싶어요." (볼크홀츠)
1965년, 영국 런던에서 동서 칼 자이스가 맞붙었다. 6년에 걸친 법정 싸움 끝에, 동서는 겨우 타결안을 냈다. 1971년 4월 27일, 런던 고등법원에서 오버코헨의 칼 자이스(이하 오버코헨)와 VEB 자이스 예나(이하 예나)는 △예나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에 제품을 판매할 시 '칼 자이스' 브랜드 대신 '예놉틱(Jenoptik)'을 사용하고 △오버코헨은 코메콘(COMECON) 국가에서 제품을 판매할 때 '옵톤(Opton)' 브랜드를 사용하며 △비 서방 유럽국가와 아시아, 아프리카, 미국을 제외한 아메리카에서는 동서 자이스가 '칼 자이스' 브랜드를 함께 사용하되, 소비자가 동서 제품 생산지를 명확히 구별 가능하게끔 보충설명서를 첨부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런던 협정'에 동의했다. 상대의 존재를 상호 인정하면서 겨우 갈등을 봉합한 것이다. 뒤늦게 임원진으로만 꾸려진 기업으로 재출발한 서쪽의 사실상 승리였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오버코헨을 대리했던 미국의 잭슨 변호사가 제소 이유서에 쓴 내용은 냉전 체제의 갈등을 일개 기업까지 떠안아야 했던 시대상을 상징적으로 웅변한다.
"본 건은 냉전의 부산물로,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경제 체제를 지닌 채 두 부분으로 분열되어 상호 적대하는 독일의 모습을 투영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고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칼 자이스 광학기기 기업과 오너였던 에른스트 아베 교수가 만든 정관에 따른 사회·경제적 이상(理想)으로, 75년 전에 설립된 칼 자이스 재단의 전설적인 이야기다." (도서 <우리가 할 수 없으면 누구도 할 수 없다>(아민 헤르만 지음, 장미화 옮김, 삼성경제연구소 펴냄)에서 발췌)
이제 동서 자이스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됐다. 동쪽은 비대해졌다. 1980년대 중반 들어 일본산 제품이 글로벌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은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예나와 드레스덴에 흩어진 연구센터를 통합, 예나에서 연구부터 제품 생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한 번에 소화하는 대형화 전략을 택했다. 이로써 VEB 자이스 예나의 노동자 수는 도합 6만 명까지 불어났다. 예나 인구가 10만 명을 겨우 넘을 때였다. 예나가 사실상 칼 자이스였다.
재통일의 여파
이처럼 조직이 비대해진 상황에서 재통일이 닥쳤다. 본래 하나였던 두 기업이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협상에 돌입했다. 1990년 5월 29일, 동서 자이스는 재단 통합을 선언하고 독일 각지에 흩어진 칼 자이스 오버코헨, VEB 자이스 예나, 쇼트 유리 마인츠, VEB 예나 유리 등 4개 기업을 빠른 시간 안에 하이덴하임의 칼 자이스 재단 아래에 통합키로 결정했다. 준비 과정으로 국영기업이었던 VEB 자이스 예나는 1990년 6월 29일, '칼 자이스 예나 GmbH'로 전환됐다.
통합은 쉽지 않았다. 당시 서독의 동독 흡수 상황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0년 7월 1일, 동서 마르크화가 1대 1 비율로 통합됐다. 이어 신연방주의 VEB들은 전부 새로운 조직 독일신탁청(Treuhand) 재산이 되었다. 이로써 신탁청은 약 400만 명의 노동자 목줄을 쥔 4만5000개 국영기업의 주인이 되어, 이 기업들의 민간 자본 매각을 담당하게 됐다. 칼 자이스 예나의 소유주도 신탁청이 되었다. 칼 자이스 예나는 다시 '예놉틱 칼 자이스 예나 GmbH'로 사명을 변경했다.
그런데 당시 동서 마르크화의 적정 환율 기준은 약 1(서)대 4(동)였다. 이를 무리하게 1대 1 비율로 통합한 게 화근이었다. 안 그래도 국영기업 특성상 비대한 조직의 동쪽 기업들 자산 가치는 일제히 곤두박질쳤다. 민간 자본들이 경쟁력을 잃은 동쪽 기업을 인수하려 할 리 없었다. 그 사이 5만여 명이던 칼 자이스 예나의 직원은 이미 2만70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노동자 절반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뜻이다. 정리해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90년 11월 22일, 칼 자이스 통합 컨설팅을 맡은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하이덴하임과 예나로 나뉜 재단을 통합하고, 예나의 자이스 노동자 수는 2만7000명에서 1만200명으로 줄여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남은 인력을 다시 거의 3분의 1로 줄이는 가혹한 구조조정이었다. 1991년 말까지 예나 전역에서 2만여 명의 자이스 노동자들이 해고 반대 시위를 이어갔다.
1991년 6월 11일, 마침내 통합 결론이 나왔다. △칼 자이스 재단 본거지는 하이덴하임에 두고, 예나의 재단은 예나 지역 부동산만을 관리하는 에른스트 아베 재단으로 전환하는 한편 △예놉틱 칼 자이스 예나를 임직원 7400명의 '예놉틱 GmbH'와 2800명의 칼 자이스 예나 GmbH'로 분할하며 △나머지 2만여 명은 해고한다는 방안이었다. 이로써 진통 끝에 하나였다 둘이 된 회사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사업 부문별로 보면, 예나에는 천체투영관과 의료 장비, 현미경 사업을 남겼고, 그 사이 새로 시작한 반도체 사업을 비롯해 나머지는 전부 서쪽으로 일원화했다.

▲ 동독 VEB 시절 칼 자이스는 체제에 복무해야 했다. ⓒCarl-Zeiss-Stiftung
정리해고
이 고통스러운 정리해고는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이뤄졌을까. 취재진과 만난 이들은 모두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았다.
"동독 시절에는 예나에서 부품부터 조립까지, 모든 걸 다 했어요. 그래서 서쪽 기준으로 보면 직원이 아주 많았죠. 재통일 후 둘을 하나로 합치려다보니 정리해고는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어요.
정리해고가 결정된 후 가장 큰 고민이 누가 떠날 것이냐였죠. 사회적 요소와 전문적 지식, 두 가지를 주된 기준으로 잡았어요. 예를 들어 두 사람의 나머지 조건이 동일하다면 둘 중 더 어린 사람을 해고했어요. 나이가 찬 사람은 새로운 직장을 잡기 어려우니까. 같은 방식으로 한 명은 맞벌이를 하고 한 명은 남편만 일을 한다면, 맞벌이하는 사람을 해고했어요. 아이가 몇 명 있는지도 고려했죠. 저의 경우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과거 업무 특성상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경험이 있어 살아남았어요.
아주 고통스러운 전환이었죠. 사회주의 체제의 기업을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하게끔 하느냐를 아는 이는 당시 세계에 없었으니까요." (볼크홀츠)
"독일의 노동 관련법에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하는 걸 막는 여러 조건이 명시되어 있어요. 하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건 칼 자이스의 전통이기도 해요.
에른스트 아베가 칼 자이스에 들어온 후, 칼 자이스는 사회를 개혁하는 기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조직 내에 강했어요. 이런 전통이 동독 시절에도 끊어지지 않았죠. 정 노동자를 해고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손 쳐도, 기업 외적 변수까지 고려해야만 했어요.
예를 들어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칼 자이스는 다시금 노동자를 해고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어요. 세계 여러 기업이 그랬듯이요. 당시 자이스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급여를 13% 줄이고, 임원은 25%를 줄이는 대신 해고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그 결과 1년 후 경기가 회복되자 이들은 줄어든 급여를 되돌려 받을 수 있었죠." (랑)
칼 자이스는 여러모로 특이한 기업 모델이다. 지난 2004년 재단이 유일 주주인 주식회사화했지만, 그 전까지는 각 유한책임회사가 재단의 결정에 따르는 집단 기업 모델이었다. 특정인의 기업 자산 지배를 탐탁지 않게 본 아베의 결정이었다. 되도록 임직원이 정년까지 근무하는 전통 역시 아베 시대의 유산이다. 전문 경영인보다 기술자를 더 우대하는 문화 역시 100년이 넘었다. 칼 자이스 역사를 이야기할 때 창업자보다 아베의 이름이 더 거론되는 까닭이다.
두 임직원과 달리 독일 재통일 후 회사에 합류했고, 제조 업무가 아닌 기업 역사를 정리하는 빔머 박사가 이 같은 모델의 장단점을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정리했다.
"'아베 정신'은 비록 칼 자이스가 기업임에도, 모든 것을 학문화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기술적으로 좋은 제품이라면 시장성을 따지지 않고 일단 생산하고 보는 풍토가 있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정신이 분단 시기에도 동서 양측에 이어졌습니다. 1980년대에 일본산 제품에 밀릴 당시 동서 자이스가 (일단 좋은 제품이라 판단하면 만들고 보는) 같은 실수를 범했다는 점은 이 같은 관점에서 흥미롭습니다.
동독 시기 예나에서 아베를 공격하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SED의 입장에서 아베는 어쨌든 자본가였으니까요. 하지만 예나의 노동자 중 동의한 이는 거의 없었을 겁니다. '당이 아베를 오해하고 있다'는 반발이 많았죠. 1970년대가 지나며 결국 SED는 아베 정신과 일종의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1989년에 SED가 만든 아베 전기 영화가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 아베는 못된 자본주의자가 아니며 숭고한 이상을 가진 학자로 묘사됩니다. 다만, 아베 밑의 경영진이 나쁜 자본가로 나오죠." (빔머)

▲ '칼 자이스 정신'을 만든 에른스트 아베. 칼 자이스 역사에서 에른스트 아베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기업을 통해 민주주의를 학습한다는 신념을 지녔던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zeiss.co.uk
눈물의 구조조정
재통합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재통일 후유증은 단숨에 해소되지 않았다. 기업이 항상 위기를 맞는 것, 항상 새로운 경제위기가 닥쳐오는 건 경제사에서 언제나 확인 가능하다.
재통합 당시 대규모 구조조정도 부족했음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동서 양측에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연이었다. 1994년 10월 17일, <슈피겔>은 헤드라인에 "자이스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다"라고 보도했다. 서쪽 칼 자이스가 소재한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 주의 디터 스푀리 경제부장관은 "칼 자이스 문제는 독일 재통일의 결과"라고 이 사태를 촌평했다.
결국 구조조정 전문가가 기업에 등장했다. 지멘스의 구조조정을 지휘했던 피터 그라스만(Peter Grassmann)이 1995년 1월 1일, 칼 자이스의 새 CEO로 취임했다. 그는 26개이던 사업부를 5개 사업부로 재편하고, 예나에 투자 예정이던 2억 마르크 규모의 자본 투입을 취소하고, 2600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일부 자회사를 매각했다.
고통스러웠던 구조조정은 드디어 끝났다. 숱한 이의 희생으로 얻어낸 결과였다. 2000년 9월 23일, 칼 자이스 예나는 오픈하우스 행사를 열었다. 이제 예나가 제 궤도에 올랐음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행사였다. 드디어 재통일이 남긴 고통이 끝난 것이다. 현재 칼 자이스는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30여 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다.

▲ 칼 자이스 기록보관소의 볼프강 빔머 박사. 서독 출신인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칼 자이스에 입사했다. 비록 베를린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베를린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다시 하나로
칼 자이스 관계자들은 예나 시내에서 자동차로 약 15분가량 떨어진 시 외곽의 고풍스러운 사옥에서 취재진을 맞이했다. 동독 시절인 1971년 지어진 건물이다. 이들은 곧 첨단 기술을 적용한 신사옥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과거를 상징하는 건 정말 이 건물뿐일까. 이제 동독 시절의 흔적은 남지 않았을까.
"콤비나트 시절이 남긴 유산은 이 건물과 나 같은 은퇴자들뿐이죠. (웃음) 동독 시절이 남긴 흔적은 없습니다. 다만 인간적 유대는 이어지고 있죠. 예나가 일종의 칼 자이스 도시다 보니, 나 같은 은퇴자도 시내 카페나 식당에서 과거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곤 합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냈기에, 만나면 별의별 이야기를 나누죠.
회사에서도 우리 같은 은퇴자를 챙깁니다. 매년 하루씩 퇴직자들을 회사로 초대해 그 사이 회사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설명해주죠. 각 부서에서 직원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에도 퇴직자를 초대합니다. 회사가 일반인의 견학 신청을 받기도 하는데, 이 때 퇴직자들이 가이드가 됩니다." (볼크홀츠)
"난 동독 시절의 유산이 백퍼센트 남아있다고 확신합니다. 아베 정신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인간관계가 돈독하다는 점에서 다른 기업과 칼 자이스가 구분됩니다." (랑)
이 같이 특이했던 역사는 지금도 신입 사원에게 교육된다. 빔머 박사에 따르면 "신입 직원이 오면 인터넷을 이용해 회사의 사업 영역과 역사를 알려주는 강연을 생중계한다." 과거와 지금이 다른 점이 있다.
"과거에는 역사 강연을 법무팀장이 했습니다. 동서독 칼 자이스의 법정 싸움 역사 등에 사람들이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죠. 누가 옳았는지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저는 강연할 때마다 칼 자이스는 하나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빔머)
구조조정 당한 이들과 남은 이들이 서로 적대하진 않았을까. 인터뷰에 참여한 생존자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했지만, 이를 온전히 믿기란 어렵다. 다만, 자이스가 상대적으로 이 같은 문제를 좋은 결론으로 맺고자 한 시도는 조명할 만하다.
자이스는 구조조정 시기 원칙을 세웠다. 되도록 퇴직자들이 창업한 기업으로부터 물품을 조달하자는 것. 이런 방식은 퇴직자가 새로운 창업자로 나서게끔 했고, 그들이 계속 예나에 정착해 도시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는 선순환을 가져왔다.
"예나가 신연방주의 다른 도시에 비해 지금도 활기가 있는 중요한 이유라고 저는 봅니다. 자이스에서 해고된 이들이 주변의 작은 기업에 취업하도록 회사가 도왔고, 퇴직자들이 새로운 기업을 만들면 이들을 지원하려고 했어요.
예를 들어, 칼 자이스는 예나 시내 반경 100km 이내에 있는 소기업에서 부품 60% 이상을 조달합니다. 지역을 발전시키자는 거였죠. 값 싼 중국산 제품을 사지 않았느냐고요? 근방 기업의 제품도 가격 경쟁력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자이스는 대량 생산하는 기업이 아닙니다. 중국산 제품은 대량 생산 체제의 기업과 잘 맞죠." (볼크홀츠)
"예나 시 전체가 자이스를 중심으로 네트워크화되어 있어요. 이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예나와 오버코헨의 차이점이기도 하죠. 오버코헨에는 가까운 대학도 없고, 부품 기업도 근처에 많지 않습니다. 해고자가 적기 때문이죠. 반면 예나는 바로 인근에 대학이 있기에 산학 협력이 아주 쉽습니다. 부품 회사도 주변에 많죠. 이 같은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나 시가 곧 칼 자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 지역 축구 클럽 이름이 'FC 칼 자이스 예나'겠어요? (웃음)" (랑)

▲ 예나의 칼 자이스 천체투영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체투영관이다. 칼 자이스는 베를린에도 천체투영관을 운영하고 있다. ⓒwikipedia
인내심이 필요하다
남북한이 교류의 희망을 키워가면서 자연스럽게 남한 자본의 북한 진출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지난 달 18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한국의 여러 기업인이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칼 자이스의 전현직 임직원들에게 남북 자본 교류에 관한 생각을 들어봤다. 이들은 남북한 분단사에 관한 지식이 없다면서도, 조심스레 문화적 차이를 잘 극복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의 재통합 당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선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걸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조언을 해 줄 이가 단 한 명도 없었죠. 남북의 분단 상황은 독일과도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동서독의 경제적 격차보다 남북의 경제적 격차가 더 큰 만큼, 아마 아주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문제를 침착하게 대비하되, 닥쳐오는 현실에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랑)
"인간적인 면을 많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체제가 변한다는 건 인생의 전제조건이 변화함을 뜻합니다. 아마 남북의 교류가 잦아진다면 자연스럽게 남한 위주로의 변화가 이어질텐데, 그만큼 북한 사람들이 많이 힘들 겁니다. 동독 출신들도 변화에 적응하는 게 어려웠는데, 북한 사람들은 동독 사람들보다 훨씬 큰 어려움을 견뎌야 할 겁니다. 이에 남한이 인내심을 갖고 충분한 시간을 주길 바랍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부유한 남한 사람들이 자본을 앞세워 북한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행히도 동서독 재통일 당시는 이런 실수가 있었습니다." (볼크홀츠) (통역: 조경혜)
독일 통일 최대 피해자는 동독 여성, 그 중에서도...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⑨] 아우가 훔볼트대학 교수
2018.10.17 17:26:04
독일 재통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동독 여성, 정확히는 동독의 미숙련 여성 노동자라는 지적이 있었다. 노동을 인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봤던 동독 사회에서는 여성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대부분 여성이 노동자였다. 통일 직전인 1989년 당시 동독 여성의 취업률은 91.2%에 달했다. 세계대전의 피해가 컸던 데다, 끊임없는 인구 유출로 노동력 부족을 고민한 동독 정부가 여성을 집 안에 둘리 만무했다. 여성을 노동 현장으로 불러내기 위해 육아는 국가에서 책임졌다.
이를 상징하는 장면이 동독 탁아소의 '단체 변기 시간(Collective Potty Breaks)'이다. 유아에게 단체 배변훈련을 시킴으로써 개인주의 성향을 줄이고 공동체 정신을 일찌감치 키운다는 목표 아래에 동독 정부가 국가적으로 시행한 프로젝트다. 여러 아이를 한 변기에 앉혀 용변을 보게 했고, 마지막 아이까지 배변을 끝마쳐야 모두 함께 일어나게 했다.
비록 동독 시절의 사회주의적, 인권 침해적 교육 태도가 드러난 사례이지만, 목적성을 제거하고 보자면 국가가 주도해 만든 복지 시스템이 여성을 노동자로서 자립하게끔 도왔다. 이 같은 지원이 동독 시절 여성의 첫 자녀 출산 연령을 낮아지게끔 했다. 1970년 동독 여성의 첫 자녀 평균 출산연령은 21.9세에 불과했다. 구 동독 출신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별명 '무티(Mutti, 어머니)'가 전형적 동독 여성상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이가 진정한 어머니라는 뜻이다.
반면 서독은 다른 전략을 택했다. 서독 역시 전쟁의 여파로 남성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기에 다자녀 가구를 원했다. 이를 위해 서독은 '집에 있는 어머니상'을 모범으로 삼았다. 남성은 노동하고, 여성은 아이를 많이 낳아 집안에만 머무는 모습이다. 서독에서 직장 여성은 '까마귀 엄마(Rabenmutter)'로 불리었다. 새끼를 신경 쓰지 않는 까마귀에 여성을 빗댄 말이었다. 노동하는 여성을 나쁘게 봤다. 서독은 68혁명의 여파로 젊은 세대가 들고일어나서야 아주 느린 변화를 시작했다. 68혁명 이후 여성들은 사회 진출을 원했고, 출산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동서의 차이는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막스 플랑크 재단이 2011년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8년 현재 신연방주 지역 여성의 첫 자녀 출산 평균연령은 27.5세며 구연방주 여성의 경우는 28.7세다. 구 동독 여성들이 첫 자녀를 더 빨리 출산하는 경향은 재통일 후 한 번도 뒤집히지 않았다. 여성을 가정에 가두기 전략과 복지를 강화해 여성의 육아 부담을 줄이기 전략 중, 출산율을 높이는데 어떤 정책이 효과적인가를 선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 동독 시절 보육 정책의 일환이었던 '단체 변기 시간'의 사진은 베를린 DDR박물관 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flickr.com
동독 여성은 재통일의 피해자
재통일 후 구 동독 지역의 모든 것이 서독식으로 변했다. 대 여성 가치관도 서독식으로 재정립됐다. 어차피 동독 지역 노동자들 상당수는 해고 대상자였다. 여성 대부분이 일자리를 잃고 가정으로 내몰렸다. 이제 미숙련 구 동독 여성 노동자는 '까마귀 엄마'라도 되기 위해 비정규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2013년 독일경제사회연구소(WSI) 발표에 따르면, 2010년 현재 독일 여성의 47.5%는 시간제 근무를 하는 반면, 남성의 경우 8.5%에 불과했다.
재통일이 독일 여성에게 미친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 달 12일 울리케 아우가(Ulrike E. Auga, 54세) 베를린 훔볼트대학 교수를 만났다.
동베를린 태생의 아우가 교수는 문화, 젠더, 종교철학 등을 연구했다. 동독 시절 민주화 투쟁에 나섰고, 재통일 후에는 학자의 길을 걸었다.
아우가 교수는 구 동독의 여성 노동을 현대의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신화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동독 여성이 재통일의 피해자라는 평가에 부분 동의했다. 서독식 제도, 곧 자본주의적 제도가 모든 것을 휩쓰는 게 과연 옳은 일이냐고도 물었다.
아우가 교수는 재통일의 여파 자체를 조금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구 동독이 통일 독일의 '내부 식민지'가 되어버렸다는 시각이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과연 진정한 자유가 있는 체제라고 볼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아우가 교수의 자택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 울리케 아우가 훔볼트대학 교수. 그는 여성, 문화적 관점에서 독일 재통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특별취재팀
동독 여성 인권 > 서독 여성 인권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로 인해 특히 구 동독 여성이 일자리를 많이 잃었다. 재통일이 구 동독 여성에게는 재앙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의하는가?
아우가 : 우선 동독 당시 여성의 노동 상황을 정리하고 싶다. 법적으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로서 권리를 갖고 있었다. 사회의 모든 일자리에 남녀가 동등하게 지원할 수 있었다. 같은 일을 하면 당연히 남녀를 가리지 않고 동일한 임금을 받았다.
따라서 동독의 여성은 남편의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물질적 기반이 있었기에 여성이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고, 해방적 사고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뒤지지 않는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평등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서독과 달리) 구 동독에서 포르노그래피가 불법이었다는 점도 짚고 싶다. 동독 정부는 여성의 몸을 물질화, 상품화하는 것에 반대했다. 물론 동독이 특별히 여성 친화적인 국가여서가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슈타지는 대국민 체제 교육을 위해 '서방의 타락' 실태를 홍보하곤 했는데, 당시 주로 사용한 사례가 록 음악과 포르노그래피였다. 편집자.).
동독의 여성 인권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점은 임신 3개월째까지는 낙태가 합법이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서독에서는 종교적 문제로 인해 낙태가 불법이었다. 하지만, 동독에서는 아니었다. 이 같은 차이가 재통일 후 큰 사회적 논란으로 이어졌다. 구 동독 지역에서는 여성이 '내 몸의 권리를 내가 가졌는데 왜 낙태를 못하게 하느냐'며 크게 반발했다. 결과적으로 현재 독일은 동독 시절과 마찬가지로 낙태를 합법화했다.
이 같은 동독 시절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구 동독 여성을 재통일의 피해자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굳이 '피해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자칫 구 동독 여성을 비하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고 여겨서다.
프레시안 : 서독식 흡수 통일이 여성에게 더 가혹했던 건 사실이라고 볼 수 있나?
아우가 : 재통일 후 구 동독 여성들의 법적 권리, 경제적 권리가 분단 시절에 비해 제한되었다고 볼 수는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에는 매우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정권이 들어섰다. '정상 가정에서는 여성이 전업주부여야 한다'는 사회적 강요가 대단히 강했다. 베이비붐 시대가 지나고도 노동자가 부족하자, 1970년대 이후 서독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스, 터키 등지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때도 여성에게는 일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반면, 동독의 사회주의 정부는 '모든 사람은 노동해야 한다'는 이념에 충실해야만 했기 때문에 서독과 같은 접근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은 서방과의 비교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실제 ‘여성해방’을 강조했다. 그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성 역할 차이도 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익숙했던 구 동독 여성들이 재통일 후 대량 실업의 여파에 휘말렸다. 이는 남녀 모두에게 공통된 사건이었지만, 여성의 실업률이 더 높았다. 여성들은 이에 더해 서독식 '정상가정'의 굴레에도 얽매였다. 재통일 직후 당시 구 동독 지역에는 싱글맘, 이혼 여성이 많았다.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보수적 서독식 시각은 이 같은 여성을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재통일의 여파를 극복하고서도 한 번 시작된 차별은 구조적으로 남았다. 구 동독의 경제·사회 시스템의 기본은 보육이었다. 남녀 모두 일을 해야 했기에 아이는 국가가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독에서는 이 같은 제도가 미비했다. 그나마 재통일 후 많은 여성주의자와 시민운동가들이 노력해서 제도가 많이 개선됐지만, 아직 부족하다.
프레시안 : 재통일 후에도 신연방주와 구연방주에서 보육 체제에 차이가 있나?
아우가 : 단언하기는 어렵다. 독일의 교육 제도는 주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그런 잔재가 조금은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관해 예나에서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조경혜 번역가는 신연방주 도시인 예나의 보육 시스템이 서독 지역에 비해 더 저렴하고 체계적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상징인 유로타워. '유럽 금융의 심장'이라 할 만한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내적으로는 서독식 자본주의 체제의 완승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읽히기도 한다. ⓒ특별취재팀
자본주의는 절대선이 아니다
프레시안 : 이처럼 문화, 체제가 달랐던 동서 독일이 일방적인 서독식으로 통일됨에 따라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많은 이가 최근 독일의 문제로 떠오른 극우 시위 사태 등을 재통일의 연장선에서 보고 있는데, 이에 동의하나?
아우가 : 재통일 후 독일 매체가 동독을 어떻게 바라보았느냐가 중요하다. 동독은 실패한 국가라는 이미지가 너무 컸다. 이 같은 시각의 조명이 이어지면서, 동독은 '내부 식민지화' 되었다. 동독을 나쁜 체제로 보는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독재와 타협하지 않은 동독 출신까지 모두 한 단계 낮은 이로 매도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이런 시각은 이른바 '제1세계'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자유를 기준으로 다른 세계 사람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일반적 태도다. 독일로 돌아가자면, 서독식 자본주의 가치를 자연주의화함으로서 일종의 세계의 기준으로 삼아버렸다. 그러니, 구 동독 출신은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에 더해, 나의 세상에 누군가는 넣고, 다른 누군가는 배제하는 건 모든 세상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체제 안의 사람, 너희는 바깥의 사람이라는 배제의 논리가 동서독 사이에서는 물론, 최근 난민 문제에서도 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정체성'이나 '오스탈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문제다.
프레시안 : 서독에 대한 동독인의 반발로 오스탈기 현상이 강해졌다는 평가에도 동의하지 않는가?
아우가 :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면 위험하다. 정체성의 단위는 흔히 국가 차원에서 정의된다. 독일로 따지자면 '넌 (수준이 낮은) 동독 출신'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 단어가 지배하면 개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의미가 없어진다.
이런 잘못이 재통일 후 독일 내에 존재했다. 단순히 정부 차원에서만 위계가 내려지지 않았다. 시민 사이에서도 정체성에 따른 낙인 현상이 발생했다. 지배적인 담론에서 잘못 사용하는 단어를 바꿀 필요가 있다. 특히 (통일을 염원하는) 한국을 위해서도 필요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프레시안 :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한국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보나?
아우가 : 미디어가 승자와 패자를 나눠서는 안 된다. 독일 미디어는 계속해서 동서를 승자와 패자의 기준으로 나눴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남북이 통일로 다가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누군가는 낙오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남북 사회는 낙오자를 최소화하는 경제 체제를 새롭게 만들려 노력해야 한다. 즉, (남북 일방의 방식이 아니라) 제3의 길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시민 사회가 이 같은 담론을 꾸준히 재생산해야 한다.

▲ 아우가 교수 역시 당시 동독의 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동독 정부에 저항했다. 하지만, 그는 서독식 일방주의에도 저항한다. ⓒ특별취재팀
대안 공동체의 모색
아우가 교수의 개인사 역시 흥미로웠기에, 이 부분에 관한 질문도 이어졌다. 아우가 교수는 청소년기에 동독 정부로부터 학업 금지령 제재를 당한 바 있다.
프레시안 : 젊은 시절 학업 금지령을 받았다고 들었다. 왜 받았나?
아우가 : 동독 시절 특히 기독교 가정의 자녀는 아비투어(대학입학시험) 자격을 받기 어려웠다. 난 개신교 가정의 자녀였고, 아버지는 수의사였다. 동독 당시 기본적인 교육 원칙상 아비투어를 보기 힘들었다. 종교 문제에 더해 아버지의 직업도 문제였기 때문이다. 동독은 부모가 노동자일 경우 아이는 공부를 더 하게 유도했고, 부모가 엘리트라면 아이가 노동자가 되도록 했다.
이에 더해, 나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더 안 좋았다. 고모와 이모가 서독으로 몰래 도망치다 잡혔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자체도 독재 체제에 비판적이었다. 아버지는 SED 당원이 아니었고, 나 역시 청소년기 당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바 있었다. 아비투어 자격을 받을 수 없었다.
프레시안 : 그럼에도 분단 시기 기독교 신학을 공부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가능했나?
아우가 : 공교육 체계와는 별개로, 교회가 선교 목적으로 제공하는 교육 시스템(Sprachenkonvikt, 교회 기숙 학교)이 있었다. 이 기관이 기독교 교육에 더해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성경을 위한 언어도 가르쳤다. 난 대학 진학 대신 이곳에서 교육 받았다.
프레시안 : 당시가 몇 년도인가?
아우가 : 1987년이었으니 23살 때다. 동베를린의 교회 기숙 학교에서 5년간 공부했다. 30~50명 정도의 동료들과 함께였다. 재통일 후 내가 이수한 프로그램이 서독의 비슷한 교회 프로그램과 함께 훔볼트 대학에 통합되었고, 덕분에 난 훔볼트 대학 학위 이수를 인정받았다.
프레시안 : 동독 후반기에 청년기를 보냈고, 당시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선 걸로 안다. 당시 교수께서 지향한 건 동독 내부의 개혁이었나, 아니면 서독과의 통일이었나?
아우가 : 이는 내가 왜 기독교 신학을 공부했는지와 연관해서 답해야 할 듯하다. 나를 포함해 당시 많은 이들이 (통일이 아니라) 동독에 '연대하는 공동체'를 만들기를 꿈꿨다.
동독 설립 후 많은 동독인이 비록 서독보다는 가난해도, 도덕적이나 공동체적으로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독재의 여파로 인해 체제가 무너져갔다.
이를 대체할 가능성을 나는 교회에서 보았다. 당시 교회에는 나뿐만 아니라 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이가 모였다.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은 교회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에 독재 정부에 대항했다.
프레시안 : 서독과의 통일을 생각한 건 아니라고 볼 수 있나?
아우가 : 그렇다. 당시 우리는 동독식 공산 독재의 폐해를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서독식 자본주의 역시 원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체제는 착취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제3의 길을 우리 스스로 찾기 원했다.
실제 이상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베를린 장벽 붕괴 후에는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노력(중앙원탁회의, 1989년 12월 7일, SED 수뇌부와 시민운동가가 만나 민주적인 새 체제 수립을 위해 만든 기구)이 구체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급박한 과정을 지나 동독은 서독에 흡수됐다. (통역: 추영롱)
극우 현상? 한국도 다르지 않다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⑩] 디르크 힐베르트 드레스덴 시장
2018.10.18 17:07:05
현재 한국에서 독일 관련 뉴스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는 극우 시위다. 독일도 인정하는 문제다. 지난 달 29일, 독일 통일 기념일을 나흘 앞두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독일 통일은 성공적이었지만, 1990년대 초반 발생한 많은 일을 (우리가) 오늘날 다시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메르켈 총리가 지적한 '다시금 직면한 갈등'이 최근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 나아가 세계를 뒤흔드는 극우화 바람이다.
독일 극우 세력의 핵심은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 Alternative für Deutschland)'이다. 유럽통합에 반대하며, 동성애, 다문화주의 등에 반대하는 전형적인 극우 집단의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최근 난민 문제를 계기로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다. AfD가 특히 옛 동독 지역 일부에서 내년 지방선거 후 제1당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AfD가 독일 연방의회 입성을 위해 움직이는 정치 세력이라면, 독일 극우화의 다른 한 축에는 페기다(Pegida, Patriotische Europäer gegen die Islamisierung des Abendlandes)가 있다. '유럽의 이슬람화에 저항하는 애국적 유럽인의 모임'이라는 뜻의 이 단체는 독일 작센(Sachsen) 주의 주도인 드레스덴(Dresden)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반 이슬람 집회를 이어가며 극우주의 세력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독일에서 극우주의 바람이 부는 현상은 단순히 한두 가지 원인을 꼽아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폐해, 인류사를 관통하는 타 민족 배제 정서 등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유독 신연방주, 즉 구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극우화 바람이 부는 현상은 재통일의 후유증과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북한 지역을 구 동독 지역과 함께 묶어 생각해 볼 법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잖은 탈북민 단체가 극우적 정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아 왔다.
지난 달 17일, 페기다 운동의 시발점인 드레스덴을 찾아 디르크 힐베르트(Dirk Hilbert) 시장을 만났다. 마침 월요일이었다.
1971년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힐베르트 시장은 한국 언론에도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다. 성악가인 아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당(FDP,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내건 정당이지만 한국의 자유한국당과는 조금 노선이 다르다. 민영화, 규제 완화 등을 기치로 내걸고 있으며, 복지를 줄이고 기본소득제를 도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동성 파트너의 법적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 역시 주요 정책이다. 편집자.)의 지지를 받은 그는 2015년 선거에서 범 야권 후보로 나와 당선됐다.
이처럼 여러 정당 기조에 한 발씩 걸친 이미지 덕분인지, 그는 선거 당시 페기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거에서는 다문화 가족인 자신의 배경을 적극 홍보하며 드레스덴을 다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로 만들자고 강조하기도 했다. 시장 당선 후에는 극우단체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가 사흘간 그의 가족이 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기도 했다.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는 그와 구 동독의 극우화에 관해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 디르크 힐베르트 드레스덴 시장. 힐베르트 시장 역시 독일 재통일의 혜택을 입은 통일기 젊은 세대다. 여전히 독일에서 구 동독 출신이 엘리트층으로 오르는 사례는 적지만, 서서히 이들 젊은 세대가 변화를 이끌고 있다. ⓒ특별취재팀
구 동독은 지금 세계와 대화하는 중
프레시안 : 1988년 드레스덴 공대를 졸업한 후 직장 생활을 하다 정치에 입문했다. 이력을 튼 계기가 있나?
힐베르트 : 독일 재통일 후 동독에 여러 변화가 일어났는데, 당시 나의 할아버지가 동독 기독교민주연합(CDU)의 당원으로 활동하셨다. 이에 청소년기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정당 행사를 자주 다녔다.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정치 입문 시기는 2001년이다. 당시 평범한 직장인이던 나는 프랑스 니스(Nice)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FDP에서 드레스덴 경제부 담당자로 출마할 생각이 있느냐고 나에게 연락했다. 당시 드레스덴 정부는 FDP와 CDU 연정 정부였다.
결국, 2001년 6월 8일 휴가지에서 후보로 등록했고, 3개월 후 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이때부터 정치인 이력을 시작했다.
프레시안 : 재통일 전후 고향의 변화를 직접 경험한 셈인데, 무엇이 가장 달라졌나?
힐베르트 : 아무래도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 인민들이 직업을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통일 후 건물들도 개성적으로 변화했다.
프레시안 : 현재 드레스덴은 작센 주의 대표적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대학이 있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외국인이 많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한편으로 드레스덴은 백인우월주의를 강조하고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이들이 밀집하는 페기다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 같은 간극이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힐베르트 : 구 동독 지역이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재통일 이전 구 동독 사람들은 외국인을 많이 접하지 못했다. 그런데 재통일 후 많은 외국인이 갑자기 밀려들어왔다. 이 가운데 테러 뉴스 등이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이런 이유로 시위가 일어났다고 본다.
하지만 구 동독의 이런 배타적 모습만 지나치게 부각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지금껏 드레스덴과 작센 주는 많은 유학생을 받고, 이들이 지역민과 함께 사는 공동 사회를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드레스덴 시 차원의 정책 하나를 소개해드리겠다. 우리는 난민들에게 잘 꾸며놓은 좋은 집을 제공한 후, 이들과 드레스덴 내 독일인 가정 하나를 연결해 정착을 돕는다. 즉, 난민 가족이 독일인 가족과 가족 대 가족으로서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제공한다. 난민 가족을 정기적으로 시청에 초대해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대화를 나누면 자연스럽게 외국인을 향한 (독일인의) 두려움도 사라질 수 있다.
한국의 상황에 우리 현실을 빗대고 싶기도 하다. 당신이 알다시피 난 한국인과 결혼했고, 한국 상황을 잘 안다.
한국도 최근 난민 문제에 반대 목소리를 낸 걸로 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 사람들을 반대하는(혐오하는) 이들이 많은 걸로도 안다. 이 점에서 한국도 사실 구 동독과 다르지 않다. 세계에 열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닥친 변화에 당황해 그 같은 입장을 취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들과 더 교류해야 한다.
앞으로도 난민 문제는 세계적 이슈가 되리라고 본다. 드레스덴은 다른 도시보다 앞장서 이 문제로 인한 갈등을 겪었다. 우리 도시가 모두가 하나 되는 프로그램을 잘 기획해 세계 여러 공동체에 본보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레시안 : 드레스덴의 페기다 운동을 부각하는 언론에 불만을 가진 것으로도 보인다.
힐베르트 : 언론이 독자에게 새로운 문제를 알려 충격을 주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그만큼 긍정적인 부분도 조명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드레스덴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조명하는 언론은 거의 없다.
실제 난민 중에는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독일인 중에도 범죄자가 있다. 그런데 독일 언론들은 난민이 저지른 범죄만 기사화한다. 이런 기사가 자꾸 나오니 현지인이 난민에게 더 편견을 갖게 된다.

▲ 독일 극우단체 페기다의 드레스덴 집회 모습. 독일 전역의 극우단체가 구 동독 지역으로 몰려든다. ⓒwikimedia
독일 극우 사태? 한국도 다르지 않다
프레시안 : 한국인 아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 피부색이 다른 이와의 결혼 생활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쳤나?
힐베르트 :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 부부는 매일 새로운 것을 서로 배우고 있다(힐베르트 시장은 손님 접대 시 손님이 커피와 한국 차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권유한다. 한국 문화를 알린다는 차원에서다. 편집자.).
프레시안 : 시장 당선 이후, 선거 당시 당신을 지지하기도 한 극우 세력을 비판한 걸로 안다. 그 때문에 2016년에는 가족들이 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았다고 들었다.
힐베르트 : 당시 드레스덴에 들어오는 난민을 위해 어떤 숙소를 제공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당시 나는 '그들이 머물 곳이 없다면 우리 집 거실이라도 내놓겠다'고 했다. 이 발언에 극우적 사람들이 (내 정책에 반대해) 자신들이 머물겠다며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이에 경찰이 며칠 간 우리 집을 보호해줬다. 사람들의 감정이 격해져 일어난 일종의 해프닝이다.
프레시안 : 당신 가족이 곧 극우세력에 관한 당신의 대답인가?
힐베르트 : 그렇다. 내 이웃 사람은 유대인이다. 우리는 이웃을 통해 다문화를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프레시안 : 한국의 난민 반대 사례를 얘기한 걸로 봐서 한국 상황을 잘 아는 것 같다. 당신의 이 같은 대답을 난민을 반대하는 한국인을 향한 답변으로 이해해도 되겠나?
힐베르트 : 물론.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한국과 신연방주의 상황은 여러모로 비슷한 듯하다. 드레스덴의 경우, 최근에는 난민 문제와 별개로 중국인 관광객의 쓰레기 투척 사례도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날수록 마음을 닫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구 동독이 서독과 같은 순 없다
프레시안 : 당신은 계속해서 열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드레스덴 시민이 지지하고 있나? 반대자가 꽤 많을 듯한데?
힐베르트 : 그렇다고 본다. 물론 내가 시장에 당선된 이유가 단순히 다문화 정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난 선거 당시 부시장으로서 시정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다문화적 배경도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지난 8월 20일 독일 여론조사 업체 포르자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힐베르트 시장은 독일 자치단체장 중 시정 만족도 4위에 올랐다. 편집자.)
프레시안 : 드레스덴은 신연방주에서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한 도시다. 재통일에 잘 적응한 도시라고 볼 수 있는데, 무엇이 이를 가능케 했나?
힐베르트 : 휴먼 파워가 중요했다. 드레스덴에는 좋은 대학이 있었고, 이에 따라 핵심적인 연구소도 원래 있었다. 이 인재들이 재통일 이후에도 드레스덴 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이었다. 지금도 대기업의 투자가 이어지는 이유다. 최근에는 폭스바겐이 드레스덴에 전기자동차 사업 관련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물론 전략도 중요했다. 우리는 기업 유치 시 신기술 분야 투자에 집중한다. 어차피 옛 기술, 옛 산업부문에서 신연방주는 서독 지역과 경쟁할 수 없다. 이미 그곳에 인프라, 인력이 다 갖춰져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직 신기술 산업 분야에만 집중한다. 예를 들어, 드레스덴은 차세대 태양 전지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최근 유치했다.
그래도 통일이 답
프레시안 : 한국은 독일을 통해 남북한의 미래를 점쳐보고자 한다. 최근 남북한은 화해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이 독일 재통일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나?
힐베르트 :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중요하다. 앞서 말했듯, 일단 사람들이 교류를 해야 오해가 사라진다.

▲ 힐베르트 시장은 남북한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교류란 일방적 거래가 아니다. ⓒ특별취재팀
남북한이 연방 체제를 이루든 통일 국가를 이루든, 우선은 남한 사람들이 지금껏 북한 사람들의 삶을 인정해주고 존중하는 배려심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우리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구 동독 사람들은 재통일로 인해 그간 자신이 살아오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이는 사람이 견뎌내기 아주 힘든 사건이다. 이 상황에서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우리보다 덜 배웠으니 당신의 삶은 가치가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면, 초기의 통일 열기는 확 가라앉고 사회는 더 침체될 것이다.
두 체제의 통일을 위해서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남한의 기업들이 용기를 갖고 북한에 투자해야 한다. 남한 정부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북한에 투자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는 등의 용기를 내야 한다. 이 같은 투자가 잘 되지 않는다면, 상당수 북한 사람은 잘 사는 남한으로 몰려갈 것이다. 이는 더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간 혼란이 있었지만, 재통일은 결과적으로 독일의 성장을 도왔다. 재통일로 인해 같은 언어를 쓰는 인력 공급이 확대되어 독일 기업은 독일어를 쓰는 각 분야 전문가를 더 쉽게 채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한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남북이 통일된다면 인구가 약 7000만 명 정도가 되는 걸로 안다. 그만큼 한국 기업은 더 좋은 인재를 쉽게 채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에는 지하자원도 풍부하지 않나. 통일 후 혼란을 잘만 극복한다면, 아시아에서 한국의 정치력과 경제력이 더 커질 것이다.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이 당신에게는 무엇을 주었나?
힐베르트 : 나는 재통일의 혜택을 본 세대다. 생각을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젊은 시절 통일이 왔기에 다양한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통역: 박영철)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켐니츠의 오늘
신연방주 극우화 현상은 켐니츠(Chemnitz)에서 절정을 이뤘다. 지난 8월 26일, 인구 약 25만 명의 작센 주 주요 도시 켐니츠에서 35세의 쿠바계 독일 남성이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체포된 용의자는 시리아 출신 23세 남성과 이라크 출신 22세 남성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진 하루 후인 같은 달 27일, 전국에서 약 6000명의 극우단체 회원이 켐니츠에 결집해 반 난민, 반 이민자, 네오 나치 구호가 섞인 인종차별 집회를 열었다. 이들이 주로 외친 구호 중 하나는 (난민을 끌어안은 주역으로 이들이 평가하는) "메르켈은 물러가라(Merkel muss weg)!"였다. 사건은 더 커졌다. 같은 달 29일, 용의자 2명의 인적 정보가 담긴 구속영장이 유출됐다. 역시 극우주의자인 작센 주 교도관의 소행이었다.
페기다와 AfD를 지지하는 단체로 알려진 '프로 켐니츠' 등이 용의자 인적 정보를 온라인에 퍼뜨렸다. 이 정보를 확인하고 전국에서 켐니츠로 몰려든 극우세력은 난민으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린치를 가하는, 사실상 인간사냥을 방불케 하는 폭력집회를 열었다. 독일이 발칵 뒤집혔다.
극우세력에 반대하는 이들의 저항도 본격화했다. 지난 달 1일, 열린 독일을 지향하는 1만1000여 명의 시민이 켐니츠에 모여 시위를 열었다. 같은 달 3일에는 뮤지션들이 주도해 한국의 촛불집회와 같은 콘서트 형식의 극우 반대 시위를 열었다. 이 시위에 6만50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주 출신 예술가 라이너 오폴카(Rainer Opolka)는 켐니츠의 명물인 카를 마르크스 두상 주변에 나치식 경례를 하는 늑대 여러 마리가 모인 섬뜩한 작품 <그 늑대들이 돌아왔나(Die Wolfe sind zurück)?>를 전시해 극우단체를 비판했다(이 작품은 취재진이 켐니츠를 찾은 지난 달 17일에는 이미 철거되어 있었다). 독일 전역이 난민 문제, 극우 문제로 갈라졌다.

▲ 작센 지역언론인 <mdr 작센>에 보도된 오폴카 씨의 극우 비판 조형물 <그 늑대들이 돌아왔나?>의 모습. 현재는 철거되었다. ⓒ기사 링크: https://www.mdr.de/sachsen/chemnitz/chemnitz-stollberg/woelfe-aktion-in-chemnitz-100.html
주목할 것은 켐니츠와 작센 주다. 한때 독일 연방 최고의 지역으로 꼽히던 작센 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화를 잃었다. 연합군은 독일을 향한 보복으로 작센 주를 선택, 드레스덴에 집중 폭격을 퍼부어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 같은 역사를 공유한 켐니츠는 동독 시절 카를 마르크스 시(Karl Marx Stadt)로 개칭되어 동독의 주요 공업 도시로 성장했으나, 통일 이후 생산 기반을 송두리째 잃었다. 독일 재통일로 인한 신연방주의 피해를 상징하는 도시다.
취재진은 힐베르트 시장과의 인터뷰 직후, 곧바로 켐니츠를 찾았다. 도시는 한참 활기가 넘쳐야 할 시간인 오전 9시경, 오후 5시경(상당수 직장인이 퇴근 후 아이와 함께 쇼핑하는 시간이다. 편집자.)에도 텅 비어 있었다. 백화점이 있는 중심가를 제외하면, 카를 마르크스 두상 인근에도 텅 빈 상점이 많았다.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실업의 상처가 지금도 도시 곳곳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취재진이 찾은 날 저녁에도 카를 마르크스 두상 근처에서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극우 세력에 반대하는 이들이 모인 시위였다. 두상 뒤에는 큰 현수막이 "켐니츠는 회색도, 갈색도 아니다(Chemnitz ist weder grau noch braun)!"라는 글귀로 장식됐다. 독일에서 갈색은 나치를 상징하는 색으로 활용된다. 회색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듯, 중립을 뜻한다. 즉, 이 말은 "켐니츠는 극우 세력을 지지하지도, 어설픈 중립을 지키지도 않는다"라는 뜻이다. 중앙역 인근 한 건물에는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No! Nie weder faschismus)!"라는 낙서가 벽에 그려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베트남계로 추정되는 중년 부부, 중국계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젊은이 몇을 제외하면 아시아계 사람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민 사냥 사태의 여파를 걱정하는 듯, 독일의 어느 도시보다 더 친근한 모습으로 취재진에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이 많았다. 자신의 도시를 향한 세계의 시선에 켐니츠의 평범한 시민 역시 상처를 입은 듯했다.

▲ 켐니츠의 명물 카를 마르크스 두상 주변을 "켐니츠는 회색도, 갈색도 아니다"라는 구호가 둘러쌌다. ⓒ특별취재팀
"독일서 바라보는 한국은 아시아의 등대"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⑪]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
2018.10.19 23:50:18
남북미의 평화를 향한 움직임은 올 한해 내내 한반도를 넘어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은둔의 독재자에서 정상국가의 지도자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였고, 전쟁을 불사하겠다던 트럼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과 발걸음을 함께 하며 북한과 타협의 문을 열려 하고 있다.
한국과 비슷하게 냉전의 대결장이 되어 분단을 경험한 독일에서도 한반도 소식은 화제를 모았다. 냉전 체제 극복을 넘어 재통일까지 이룩한 독일인에게 한반도의 이 같은 변화는 다른 어떤 나라 사람에게서보다 의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취재진이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를 만난 이유다.
정 대사는 독일을 잘 아는 인물이다. 1954년생인 그는 1979년, 청년기에 서독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올해 1월 2일에는 주독 한국대사로서 통일 독일을 찾았다. 독일의 분단과 재통일 체제를 모두 경험한 셈이다. '장벽 너머 사람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다.
그간 취재진은 크게 재통일 당시 독일의 기성세대, 그리고 지금은 장년이 된 재통일 당시의 청년세대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집중했다. 정 대사와는 한국인의 시각으로 본 독일 재통일을 이야기하고, 현재의 한반도 변화를 바라보는 독일인의 시각을 관찰자의 눈으로 재정리하는데 집중했다.
인터뷰에서 정 대사는 독일 정치권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언급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동아시아의 등대"라는 상찬도 나왔다고 전했다.
정 대사는 다만 구 동독 지역이 여전히 과거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다며, 독일의 급박했던 재통일을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독일의 재통일 과정과 당시 상황이 한국과는 여러모로 다르지만, 여기서 우리가 참고할 건 참고해 북한과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정 대사는 지난 3일에는 베를린의 베를린자유대 한국학연구소 이전식에 참석해 박남영 북한대사와 포옹하는 모습을 남기기도 했다. 정 대사는 대사 부임 후 박 북한대사를 세 차례 만났다.
지난 달 13일 베를린 한국대사관에서 실시한 정 대사와의 인터뷰를 정리했다.

▲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 그는 분단 시절 서독에서 유학했고, 지금은 통일 독일에서 생활한다. 독일의 분단과 그 극복기를 생생히 지켜보고 있다. ⓒ특별취재팀
독일이 한반도에 관심 갖는 이유는?
프레시안 : 주독대사로 부임하신 지 약 8개월여가 지났다. 그동안 한국에서 남북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분단을 극복한 국가인 독일에서도 한국 문제에 관심이 있을 것 같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독일 현지의 관심 수준이 어느 정도였나? 그저 단순한 외신 한 꼭지 이상의 의미가 있었나?
정범구 : 독일이 아무래도 한국 상황을 특별히 바라보는 분위기가 있다. 우리처럼 분단 체제였다가, 이를 극복한 국가니까. 제가 만나는 독일사람 중 여럿이 한국 상황에 마음이 쓰인다고 한다.
'단순 외신 수준'의 관심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난 4.27 판문점 선언 당시 독일 언론은, 많게는 신문 3개 면을 이 소식을 전달하는 데 사용했다.
특히 옛 동독 시절 고위 인사들을 만나보면 특별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 시각에 따르면 동독 입장에서 독일 재통일은 '통일을 당한 경험'이다. (남북 힘의 격차가 있는) 우리 상황과 비교해서 생각하게 된다.
프레시안 : 독일 언론의 관심이 예상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주로 어떤 시각으로 한반도 변화를 바라보나?
정범구 : 우선 놀라움이다. 지난해만 해도 한반도는 핵 위기 상태였는데 한해 만에 급반전이 일어났으니까. 이곳에서 동아시아는 (아랍 지역과 마찬가지로) 분쟁 지역의 하나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대 강으로, 전면으로 맞부딪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 우려가 컸다. 당시 메르켈 총리가 "한반도에서 무력 사용은 안 된다"는 입장을 바로 내고, 독일이 한반도 문제에서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맡겠다는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올해 들어 달라졌으니 아주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프레시안 : 한반도 안정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해되는데, 북핵 문제 해결에 포커스를 맞춘 미국, 일본과는 시각이 달라 보인다.
정범구 : 그렇다. 독일은 남북한 동시 수교 국가다. 일방적으로 미국식 입장을 고수하진 않는다. 기본적으로 독일의 입장은 한반도 문제를 전쟁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동아시아의 등대"
프레시안 : 대사 업무를 수행하면서 여러 독일 정치인도 만나보셨을 텐데,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특별히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었나?
정범구 : 지난 3월 27일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연방 하원의장을 만났는데, 이분이 예상보다 한반도 문제에 아주 큰 관심을 보였다. 우선 이 분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1972년부터 정치인 생활을 시작해서 지금도 활동하는 유일한 현역 정치인이다. 46년 내내 지역구 의원 생활을 했다. 제가 유학생이던 서독 시절에도 정치인이었던 분이다.
이분과 당초 20분간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었는데, 이분의 관심이 워낙 커서 40분간 한반도 문제를 이야기했다. 당시 이 분이 저에게 한국의 변화, 한반도 정세의 변화 등과 관련해 "한국은 동아시아의 등대"라고 했다. 인상적 표현이었다. 비록 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의 이야기지만, 당시 이미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전환의 계기가 마련되었을 때다.
한국을 이처럼 높이 평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한국이 빠른 산업화에 성공해 세계 10대 경제 강국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점. 둘째, 동시에 한국이 모범적으로 민주화 이행에도 성공했다는 점. 세 번째로 얼마 전까지도 전쟁 위협이 고조된 지역(한반도)에서 주도적으로 극적인 평화의 모멘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도 한국의 다이나믹한 변화를 인상 깊게 보고 있다다.
프레시안 : 아무래도 독일이 분단, 급격한 발전 등 한국과 현대사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이 같은 반응이 나온 듯하다.
정범구 : 그렇다. 다만 상찬의 포인트가 우리 일반 국민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
보통 한국 기성세대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이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물론 이것도 놀라운 성과지만, 독일은 한국이 민주주의적 가치를 체화한 나라라는 점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극단적으로 말해, 독일은 상대국을 민주주의 국가냐 아니냐는 점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독일이 대외관계를 설정할 때 상대국에 관한 최상의 표현은 '가치 공동체'다. 이 '가치'에는 '민주주의적 가치', '다원주의적 가치', '자유무역에의 신봉' 등이 포함된다. 이 가치를 모두 만족하는 나라가 세계에 그리 많지 않다. 유럽연합(EU) 소속국과 기타 G7 국가를 포함해 한국 정도다. 이 점을 고려하면, 독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국을 더 높이 평가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 자신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국제 문제에 책임을 가져야 할 일원이라는 거다.

▲ 프로이센 왕국이 세워 지금은 베를린의 랜드마크가 된 브란덴부르크 문. 냉전 시기에는 베를린 장벽 8개 검문소 중 하나로 쓰인 탓에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었다. 이제는 독일 재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남북한으로 비교하자면, 판문점과 같은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특별취재팀
독일서 배울 것: 준비 없는 통일은 재앙
프레시안 : 동서독 분단 시기 서독으로 유학을 떠나 상당 기간에 걸쳐 동서독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통일 독일과 당시를 비교하면, 특별히 눈에 보이는 차이점이 있나?
정범구 : 난 1979년에 서독으로 나왔다. 공부를 끝내고 귀국한 때는 재통일 시기인 1990년이다. 아무래도 당시와 비교하면, 이제 통일이 확실히 사회에 녹아들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동서 베를린 간 자유 통행이 가능해졌다. 당시 저도 서독 브라운 슈바이크에서 국도를 통해 동쪽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당시 내가 처음 떠올린 생각이 지금도 선명한데, 20세기에서 18세기로 돌아온 듯했다.
동독의 실체를 보기 전만 해도 나에게 동독은 동구권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내가 동독에서 약 60㎞ 떨어진 지역에서 공부했기에, 동독TV 전파가 잡히곤 했다. 당시 동독TV를 보면 서독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여름에 휴가들을 잘 다니고, 트라비라는 차량은 전 인민이 한 대씩 갖고 있고...
하지만 막상 실체를 보니 현실이 달랐다. 특히 도로 상태는 아주 안 좋았다. 도로 곳곳이 깨진 상태라 시속 30㎞를 내기도 어려웠다. 집들도 외관상으로만 보면 벽이 멀쩡한 건물이 거의 없었다.
그때의 기억이 인상에 남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아직도 북한을 쉽게 방문하지 못하잖나. 당시 나는 '북한도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며 동독 지역을 돌아봤다.
1989년 독일 재통일 당시 자료를 보면, 대략 동독은 서독의 33% 수준 국가였다. 그랬는데도 외관상으로는 그처럼 엄청난 격차가 보였다. 그런데 현재 남북 상황은 어떤가? 2017년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남북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격차가 47대 1이다. 동서 격차보다 훨씬 크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급격한 통일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만일 어떤 변수에 의해 북한 체제가 붕괴해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상황이 온다면, 남한에도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다.
프레시안 : 실제 옛 동독은 서방 홍보용으로 인민이 자유롭게 산다는 점을 강조하곤 했다고 들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전시장 국가였으니, 인민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줬고 인민을 위해 청바지를 생산하기도 했다. 강력한 통제가 지금도 작동하는 북한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던 듯하다.
정범구 : 동독도 기본적으로 경찰국가였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다른 통제 사회에 비해서는 자유가 조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동독만 해도 사회주의 독재 이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민주 공화국을 경험했다. 북한과 역사 배경이 다르다.
프레시안 : 그처럼 기본적 경험이 있었음에도, 재통일 후 동서 격차가 엄청났다. 그 때문에 지금도 독일은 통일 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3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재통일 28주년 기념행사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 통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재통일 28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당면한 도전 과제"라며 "통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완성까지는 머나먼 길을 걸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정범구 : 아무래도 구 동독 지역에서는 통일 이후를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동독이 무너질 당시 마지막 집권자가 한스 모드로 전 총리다. 올해 나이가 90세다. 이분을 얼마 전에 만났는데, 한 서류를 보여주시더라. 동독이 나름대로 만든 통일 플랜이었다. 하지만 이미 당시 통일 주도권은 서독이 쥔 상태였고, 결국 서독 주도로 흡수 통일이 완성됐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자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다. 당시 헬무트 콜이 동서독 마르크화를 통합하면서 특히 큰 비판이 일었는데, 그처럼 급박한 조치가 없었다면 독일 재통일이 더 더뎠고 힘들었으리라는 생각 말이다.

▲ 동독 정부가 청바지에 열광하는 인민을 위해 생산한 청바지 '복서.' 동독 정부는 청바지를 입은 동독 연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롭게 거리를 달리는 모습, 가족이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는 모습 등을 홍보영상으로 만들어 서방에 홍보했다. 복서 바로 곁에 당시 동독 젊은이의 꿈이었던 리바이스 청바지가 걸린 모습이 인상 깊다. 베를린 DDR박물관 전시. ⓒ특별취재팀
김정은 위원장이 변해야 북한도 변한다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 과정을 어떻게 평가하나?
정범구 : 내부의 노력과 국제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
독일 내부적으로 보자면,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펴면서 냉전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 때 동독에서도 라이프치히 시민을 중심으로 체제 항쟁이 이어져 통일의 전기가 마련됐다. 때맞춰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으로 대표되는 변화를 이끌면서 통일이 가능했다. 기실 고르바초프가 아니었다면 동서독의 재통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1989년~1990년의 사태 전개 상황이 궁극적으로 통일을 바라보는 우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베를린 장벽이 1989년 무너졌지만, 당시 서독 정치인들은 독일이 통일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동서독은 여전히 미영불소 4개국 합의 하에 관리되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즉, 이니셔티브는 저들 강대국에 있다고들 보았다. 실제 영국의 대처는 강경하게 독일 재통일을 반대했다.
이 상황에서 소련이 변화하고, 이에 맞춰 독일 정치인들이 역할을 분담해 미국의 통일 협조를 이끌어내면서 국제 여론을 통일 찬성 분위기로 바꿨다.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을 남북관계에 비유하자면, 한반도 변화에도 국제 여론이 매우 중요하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꾸준히 북한은 물론, 미국과 EU 등을 설득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반면, 분명히 당시와 지금의 다른 점도 있을 듯하다. 특별히 다른 점이 무엇일까?
정범구 : 아무래도 북한과 동독 사회의 차이점이 눈에 보인다. 동독만 해도 슈타지가 엄청난 힘을 지닌 경찰국가였다. 슈타지 요원만 9만 명에, 비공식 협력자(IM)는 18만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동독의 경찰 체제는 기본적 인권을 어느 정도는 지키려했다. 예를 들어 정치범도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비록 동구권으로 한정되긴 했지만, 인민의 여행도 보장됐다. 특히 기독교 문화는 동독도 통제하지 못했다. 이런 최소한의 기반이 있었기에 동독 체제 말이 되자 반독재 시민 투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즉, 내부의 변화 움직임이 생길 수 있었다.
반면, 북한은 아무래도 이런 자생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체제는 아니다. 따라서, 결국 북한이 변화하려면 최고 권력자의 결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즉,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제가 독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김정은 위원장이 정말 비핵화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본다고 대답한다. 이제 북한도 더는 사회주의적 구호, 선전만으로 체제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김 위원장이 젊다는 게 중요하다. 그는 외국 유학 경험이 있다. 핵만으로는 체제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안다. 인민의 실질적인 생활 수준 개선을 이뤄내야만 체제가 안정될 수 있음을 안다고 본다. 핵만 내주면 경제를 살려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데, 왜 안 하겠는가.
이런 관점으로 북한을 바라보니, 북한의 관료주의 체제가 강하다는 점도 눈에 들어오더라. 관료 체제에서 최고지도자 혼자 혁신적 생각을 한다고 변화가 쉽게 일어나나? 그렇지 않다. 아무리 최고지도자라도 나라 구석구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 즉, 북한이 실질적으로 변화하려면 중간 관료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기득권층이 약 3만 명 정도 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면서 체제를 바꾸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당장 우리 사회에서도 촛불 이후 대통령이 바뀌었는데 왜 현실이 변하는 게 없느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크잖나? 북한은 오죽하겠나? 김 위원장이 변화의 말을 한 마디 해도, 그 이행 과정을 누군가 확인하지 않는다면 변화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김 위원장이 현장 지도에서 화를 많이 낸다는 데,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자신이 말할 때 눈앞의 간부들은 고개를 숙이지만, 정작 현장에 와 보면 제대로 변화되지 않겠지. 북한의 변화에는 대외적 문제는 물론, 이처럼 바깥의 우리는 알기 어려운 내부적 사정도 극복해야 한다는 숙제가 있다.

▲ 남북관계 변화는 한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뤄질 수 없다. 남북 두 정상과 함께 주변 국의 변화, 관료의 변화도 함께 이행되어야만 한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통일에의 의지 계속 이어져야
프레시안 : 많은 사람이 '남북 관계는 동서독 관계와 너무 달라 한국이 독일로부터 배울 건 없다'고들 한다. 동의하나?
정범구 :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물론 동독과 북한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분단 체제를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갔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나. 특히 한국은 독일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우선 빌리 브란트 정부의 대 동독 원칙이다. 접근을 통한 변화, 즉 가까이 다가가서 변화를 이뤄내겠다는 것이다.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끝없이 동독과 접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빌리 브란트의 보좌역으로 전 서독 경제협력부 장관이자 ‘독일 재통일의 설계사’로 불린 에곤 바르의 말이다. 이 기조를 서독 정부가 계속 유지했다. 서독 사람들은 동독의 친지를 언제든 만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위해 서독 정부가 동독으로 가는 시민을 금전적으로 지원했다. 함부르크와 베를린 간 고속도로도 서독 정부가 깔았다. 당장은 돈이 나가는 것 같지만, 그만큼 동서독 접촉 면이 넓어진다는 이유였다. 이 같은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배울 건 통일에의 의지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재통일 기념일마다 통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이 같은 우려에 관해 브란트가 한 말이 있다. "같은 뿌리에서 자란 나무는 결국 함께 성장하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앞서 보았듯 남북의 격차는 동서독 격차보다 크다. 우리가 무리하게 통일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다만, 통일에의 전망과 비전은 꾸준히 갖고 가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우리가 동서독 통일로부터 받아들일 교훈이라고 본다.
동독, 북한, 그리고 민주주의
프레시안 : 언급한대로, 여전히 독일 통일이 완수되지 않았다는 독일 내 평가가 많다. 동서 격차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범구 대사는 독일의 급박했던 통일로부터 좋았던 점과 잘못된 점 모두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정범구 : 물론 경제적 격차 문제는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장벽은 무너졌지만, 동서 독일인 마음 속 장벽은 더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이 실제 독일에서 있다. 아직 구 동독 출신이 2류 취급을 받는 부분이 있다.
지금 구 동독 지역에서 심각한 문제가 인구 유출이다. 상당수 지역이 농촌 지역인데, 특히 여성 노동 인력이 서쪽으로 빠져나가면서 경제적, 문화적 소외 요소가 크다.
구 동독 내 세대 간 갈등 요소도 있다. 지금 구 동독 노령 세대는 동독을 건설한 세대다. 이들은 사회주의 체제가 발전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풍부한 복지 혜택을 누렸다. 그런데 재통일 이후, 이런 이야기는 이제 공공연하게 하기 힘들게 됐다. 구 동독의 모든 게 잘못됐다는 인식이 강해졌으니까. 이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다음 세대는 통일의 희생양이다. 장벽이 무너질 때 장년이어서, 급격한 체제 변화를 온몸으로 떠안은 세대다. 이들이 가장 불운하다.
통일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는 부모, 조부모와 전혀 다른 세대다. 서독 출신처럼 당당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통일 독일의 세대다. 이처럼 세 새대의 경험이 극단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동독 내부적으로도 갈등 요인이 있다. 이런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결합해 지금 구 동독 지역의 극우화가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동독 지역의 극우화는 우리도 눈여겨봐야 할 지점인 듯하다. 당장 한국에 안착한 적잖은 탈북민이 북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걸 미디어가 자주 보도한다.
정범구 : 동독의 경우를 말하자면, 구 동독인의 민주주의 훈련 여부도 극우화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고 본다. 아무래도 서독 출신에 비해 구 동독 기성세대는 민주주의 교육에서 취약한 면이 있었다.
남북관계에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아직 통일을 이야기하기엔 이르지만, 통일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지역에 민주주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체제의 특성상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보다 수직적 관계, 복종에 더 익숙하다. 만일 지금 이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통일이 온다면, 북한이 (동독처럼) 극우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다.
물론 서독 사람이 동독 사람을 이해해야 하듯,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서독 사람들이 흔히 동독 출신을 비하하며 하는 말이 자기표현을 못 한다, 타자를 관용하지 않는다, 게으르다는 얘기다. 그런데, 사교성은 자본주의적 습성이다. 자신을 상품화해야 하니 평판에도 민감하고, 좋은 관계에 목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굳이 사교적이려 노력할 이유가 없다. 이런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두 체제의 생활 수준 격차를 좁히기 위해 우리가 독일로부터 배워야할 게 있을까?
정범구 : 부임 후 상황을 보자면, 독일은 여전히 동서 간 심리적 통합을 위한 노력보다 과거 동독 체제 청산에 더 힘을 쏟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슈타지 활동가에 관한 아카이브화 작업을 하거나,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 하에서 동독인들이 얼마나 비민주적 취급을 받았는지 등을 들여다보는데 집중한다. 이런 노력이 필요하지만, 심리적 통합을 위해서도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그는 왜 박근혜 '드레스덴 연설'을 비판했나?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⑫] 뤼디거 프랑크 비엔나대학교 교수
옛 동독 출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일 재통일을 조망해 보는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의 마지막 주인공은 뤼디거 프랑크 비엔나대학교 교수다. 그는 독일 내에서 손꼽히는 동아시아 전문가로, 북한 김일성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유학생활을 한 적도 있다.
프랑크 교수는 지난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에 대해 "연설문 작성자를 해고하라"고 비판한 바 있다. (☞ 기사 보기 : 동독 출신 교수 "박근혜, 연설문 작성자 해고하라") 그가 박 대통령 연설에 이같이 다소 과격해보일 수 있는 주장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드레스덴 연설이 있은 지 4년이 지난 2018년, 서울에서 프랑크 교수를 만났다. 그는 당시 연설을 비판한 이유에 대해 "(박 대통령이) 독일 통일이 동독에 대한 서독의 승리인 것 같은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이 북한에 대해 이와 유사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남한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평양(북한에)에 신뢰를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프랑크 교수는 당시 동독 사람들이 서독과 통일을 원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독의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면서도 "우리는 동독이 좀 더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나은, 그리고 여행의 자유가 있으며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프랑크 교수는 "서독에 흡수되고 싶지는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로운 혁명을 원했다. 물론 먼 미래에 통일을 하는 것은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통일이 아니라 개혁을 원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 독일의 재통일은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뤄졌다. 통일 당시 20대였던 프랑크 교수는 동독 내 자신의 부모님 세대들이 통일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이러한 측면이 당시 동독에 있던 10~20대에게 대물림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공통적인 이념이 없다는 점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독일의 재통일은 '현재진행형'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이에 대해 프랑크 교수는 "독일 국가주의(애국주의)는 나치 시대의 경험 때문에 선택지가 될 수 없고, 그래서 공통의 이념을 공유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이 독일로부터 배울 것은 일단 통일의 과정이 시작되면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 뿐이라면서, 통일 전에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해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프랑크 교수는 "보통 약자가, 즉 북한이 한국의 체제를 따를 것이고 한국으로부터 도움이나 자금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통일 전에 북한이 나름의 경제적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본다"며 북한이 일방적인 도움을 필요로하지 않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면서 이러한 가능성도 열어두고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프랑크 교수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 차 한국을 방문했던 지난 7월 16일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뤼디거 프랑크 비엔나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동독 출신으로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청년기에 직접 경험했는데, 당시 동독 지역의 분위기는 어땠나? 그리고 당시 청년 세대들은 어떤 변화를 바라고 있었나?
프랑크 : 동독의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소련, 심지어 중국과 같은 개혁을 원했다. 동독이 좀 더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나은, 그리고 여행의 자유가 있으며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를 원했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개혁하고 싶었지 통일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서독에 흡수되고 싶지는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로운 혁명을 원했다. 물론 먼 미래에 통일을 하는 것은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통일이 아니라 개혁을 원했다.
이런 저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혁명이 서독의 정치 세력에 의해 장악됐을 때 많은 불만이 있었다. 많은 동독인들이 느끼기에 통일은 서독의 프로젝트였다. 동독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프레시안 : 여전히 동서독 간에 갈등이나 동독인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갈등이나 차별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주목할 만한 차이는 있다. 독일 내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리더들이 서독 출신인 경우가 많다. 정치인이나 교수 등을 보면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동독에 살고 있는데도 서독 억양을 쓰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대학 총장이나 교수의 80%가 서독 출신이다.
물론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동독 출신이긴 한데, 사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대에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했다. 즉 메르켈 총리의 경우 원래는 서독 출신인데 동독 출신으로 바뀐 거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메르켈 총리가 동독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서독 간 갈등과 관련해서는, 세대에 따라 좀 다른 것 같다. 몇 주 전에 예전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는 내가 라디오에 출연한 것을 들었고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독 리포터의 멍청한 질문에 대해 동독 출신의 교수가 똑똑한 대답을 했다고 평가했다.
반면에 지난 2월 나의 새 책을 소개하기 위해 TV에 출연했을 때 나는 익명의 서독 사람으로부터 엽서를 하나 받았다. 그는 내가 동독 출신이라는 것에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물론 이런 반응은 구세대의 이야기다. 그들은 냉전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양쪽의 '프로파간다'를 모두 겪었고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통일 당시 40대였던 이런 분들은 그때의 사회 변화에 적응하기가 정말 어려웠고 직업도 많이 잃었다. 물론 당시에 직업이나 지식이 통일된 상황과 잘 맞아 떨어지는 몇몇 분들은 행운이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적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또 동독이 서독의 체제나 법을 받아들이는 상황, 즉 외부 시스템이 들어온 것이었기 때문에 동독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이름을 쓰거나 일본 신을 숭배하는 등의 행위를 싫어했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제 세대는 좀 달랐다. 통일된 이후에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고, 대학도 졸업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법도 알고 있었고, 나름 성공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통일된 이후 태어난 제 아들은 지금 18살인데 그 아이에게는 통일이 중요하지 않다. 이미 통일된 독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제 아들은 독일을 그냥 독일 그 자체로 생각한다.
또 부모님 세대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이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한국에도 그렇겠지만 부모가 소득이 낮고 대학교육을 받지 못하고 좋은 관계망(연줄)을 갖지 못하면 그게 다음 세대까지 넘어가는 경우가 있지 않나? 독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 특히 통일 이후에도 같은 장소에 오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교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 차이를 없애는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가 고향이 라이프치히인데, 아직 거기에 살고 있는 친구 중 한 명은 여전히 소득이 매우 적다. 기본적인 생활 외에 다른 것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독일 통일의 패배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 등이 있는 작센주는 통일 성공의 상징처럼 보인다. 통일로 인해 경제 성장을 이뤘다는 분석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동독의 경제 수준이 서독의 70% 정도라고 대체적으로 보고 있는데, 통일 이후 장기적으로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있었나?
프랑크 : 경제적으로 몇몇 긍정적인 사례들이 있고, 작센주의 경우 통일 이전부터 발전됐던 곳이긴 하지만 다른 지역의 경우 통일 이후 산업이 많이 붕괴됐고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 옛 동독 지역에 위치한 인구 25만 명의 켐니츠 시의 모습. 동독 당시에는 '칼마르크스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전시 도시로서 번화했지만, 통일 이후 경제 위기를 겪으며 쇠락했다. 사진을 촬영한 곳은 중앙역 부근 시내 중심가였는데 평일 오전 9시였음에도 지나다니는 차량도, 사람도 많지 않았다. ⓒ특별취재팀
그런데 이같은 일이 북한에서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북한은 이미 1990년대 초반에 이같은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고난의 행군). 게다가 독일과는 달리 통일 이후 북한에 투자할 자본이 있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다. (북한이) 중국과 근접해있다는 것이 이러한 배경 중 하나다.
그리고 동서독 간 경제 문제와 통일을 연결짓는 것은 다소 위험할 수 있다. 1990년대 통일 이전에는 동독과 서독이 체제가 달랐기 때문에 경제적 격차가 있을 수 있는데, 30년이나 흐른 지금은 그 차이가 통일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만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같은 서독인데 뮌헨은 좀 더 돈이 많고 브레멘은 그렇지 않다. 경제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요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자연스럽게 생긴 변화인지, 어떤 것이 통일 때문에 생긴 변화인지 구분 짓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동독 쪽에 특별한 지원이나 프로그램은 없을 것 같다. 도시 간의 차이처럼 개인 간의 삶도 통일이라는 변수로 구분 짓기는 굉장히 어렵다.
프레시안 : 지역 격차, 세대 격차, 가치관 변화 등이 동독 지역에 급격히 일어났을 텐데, 그로 인해 동독 내부에 새로운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았나? 통일의 영향으로 새로운 사회 문제, 예를 들면 극우화 현상 등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프랑크 : 일단 스킨헤드, KKK(Ku Klux Klan, 백인 우월주의 단체) 등 극우적인 행동이 서방 세계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동독 지역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지만 사실 이건 동독 지역의 현상이 아니다. 심지어 이건 독일의 현상도 아니다.
정치적 극단주의는 이념의 공백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강자에 의해 식민지가 됐다'는 느낌과 결합된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건은 동독 지역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났고 이것이 동독 지역에서 극우적인 움직임이 힘을 얻게 된 이유다.
그런데 소위 "새로운" 사회적 문제들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라 매우 오래된 것들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직업과 수입이 없고 그래서 미래가 없다는 문제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 젊은 사람들이 떠나고 부동산이 가치를 잃고, 나이든 사람들은 불만이 많아지면서 과거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현상은 동독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동독 지역에서 정말로 새로운 현상은 이러한 모든 일이 매우 갑자기, 그리고 빠르게 일어났다는 점이다. 실제 이러한 현상은 구 동독 지역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통일 이후) 불과 1~2년 사이에 실업률이 0%에서 10%, 심할 때는 20%까지 올라갔다.
프레시안 : 경제분야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분야의 문제 때문에라도 '독일 통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내부 평가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프랑크 : 독일 통일은 예상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필요로 했다. 우선 정치적으로 동서독 간 공통된 이념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일 국가주의(애국주의)는 나치 시대의 경험 때문에 선택지가 될 수 없고, 그래서 공통의 이념을 공유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예를 들면 월드컵에서 독일 깃발을 흔드는 것이 한국인들이 태극기를 드는 것과는 다른 의미인가?
프랑크 : 국기를 흔들고 응원하는 문제가 독일 신문이나 TV에 자주 나오는 토론 주제다. 일단 국기는 그 경기가 있을 때만 흔드는 것이다. 다른 데서 흔들면 '나치 아니야? 우파 아니야?'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월드컵 기간 중에 항상 그런 문제가 제기된다. 근데 이건 독일 사람에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정치인이 이런 주제를 꺼내면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정부든 공통된 사회 통합의 가치를 만들고 확보하려는 욕망이 있을 것 같은데 독일 정부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지?
프랑크 : 사회통합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그런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각자가 알아서 하면 좋겠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동독의 유산
프레시안 : 독일의 통일이 서독 중심의 흡수통일이었지만, 동독에도 통일 이후에 계속 남길 만한 가치나 유산이 있을 것 같다. 동독으로부터 전해내려온 것 중에 통일 이후에도 살릴 만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프랑크 : 알다시피 우리는 독재 속에서 살아왔다. 우리는 이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 중 하나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하고, 더 이상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동독에서는 정치적인 자유도,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통일 이후 이런 자유를 쟁취하다 보니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반대로 서독에서는 원래 그런 게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덜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프레시안 : 통일 당시 여성학자들의 인터뷰를 보니까 통일의 가장 큰 피해자가 동독의 저숙련 여성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동독 사회에서 여성은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입했는데 서독 사회는 여성의 일자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 이후 저숙련 여성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많이 잃었다고 한다.
프랑크 : 당시 동독 여성들은 사회 내에서 영향력이 강하고 독립적이었다. 동독 경제가 여성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가 육아도 도움을 주고 사회복지도 잘 마련했어야 했다. 그런데 통일 이후에는 많은 여성들이 정규직보다는 파트타임으로 많이 일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 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동독 때보다 적은 상황이다.
사회적 시스템으로 인해 여성들이 일을 많이 하지 않고 있는 측면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세금 문제다. 독일은 결혼하면 부부의 수입을 합해 세금을 매긴다. 또 세금에 누진세가 있어서 부부가 모두 일을 할 경우 수익이 많아지고, 그만큼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들 중에서는 차라리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가정 전체 수익 측면에서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프레시안 : 통일 후와 비교했을 때 예전 동독이 더 좋았던 사례 중 하나로 여성이 노동하기 좋은 환경이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까?
프랑크 : 그런데 이건 잘못된 이유로 좋은 결과가 나왔던 사례다. 동독 정부는 여권 신장의 차원에서 여성의 노동을 권고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여성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노동을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다. 물론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평등을 보장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프레시안 : 통일 후 동독 지역에서 한동안 '오스탈기'(Ostalgie, '동쪽'이라는 뜻의 '오스텐(Osten)'과 '노스탤지어'의 독일어인 '노스탈기(Nostalgie)'의 합성어. 동독에 대한 향수를 의미한다. 편집자) 현상이 일어났고, 최근에는 오스탈기 제품이 이른바 '힙스터 문화'의 소비재로 각광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스탈기 현상은 단순히 통일 부작용으로 설명하기는 조금 어려울 듯한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프랑크 : '오스탈기'와 같은 예전을 그리워하는 현상이 특별히 구 동독 지역에서만 나타난다고 오해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노스탤지어'는 모든 곳에 있다. 이건 과거에 대해 이상적으로 해석하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다. 모든 언어에 "좋았던 옛 시절"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또한 과거에 대한 갈망은 예전의 국가, 예전의 시스템 또는 예전의 생활 환경에 대한 것이 아닌,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그리움이 훨씬 크다. 이는 왜 노스탤지어가 중산층이나 고연령층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동독에 대한 향수 또는 그리움을 갖는 경우도 동독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본인이 젊었을 때, 어렸을 때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여러 비판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당신에게, 그리고 독일에 준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프랑크 : 14세기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을 때 그 시기를 살았던 한국 사람들처럼 (독일의) 통일은 내 삶의 일부다. 몇몇 사람들은 일본 식민지 지배를 경험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박정희 시대 또는 1987년의 민주화를 경험했다.
모든 사람들의 삶에는 좋은 방향 또는 나쁜 방향으로 운명을 결정짓는 주요한 사건이 있다. 이는 종종 동시에 나타난다. 통일을 동떨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통일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바꿨다. 나에게 있어서 통일은 큰 변화였다.
그러나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인생에서 통일 보다는 세계 2차대전이 더 큰 사건이었고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또 1999년 태어난 내 아들 입장에서는 통일은 단지 역사 책으로부터 알게 된 사실일 뿐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지만, 때때로 큰 변화들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단지 살아남아야 할 수도 있고,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는 계기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른 변화들과 마찬가지로 통일은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오직 이기거나 오직 패하기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독일 통일의 영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독일 내에 존재하는 많은 개인들의 삶 만큼이나 다양하다. 한국에서도 이와 같을 것으로 본다.
준비하지 않으면 실수할 것
프레시안 : 2014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을 두고 '독일 통일과 동독에 대한 이해 없이 만들어 진 연설문'이라고 비판했다. 드레스덴 연설이 왜 문제였는지를 간략히 설명해 달라. 아울러 남북이 독일 통일 혹은 동독 개혁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독일 통일이 동독에 대한 서독의 승리인 것 같은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이 북한에 대해 이와 유사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남한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평양(북한에)에 신뢰를 줄 수 없다.
독일의 사례가 한국에 어떤 교훈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한국은 독일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 독일과 한국은 너무 많은 측면에서, 너무 많이 다르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일단 통일의 과정이 시작되면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한국이 동독으로부터 배울 점이라고 본다. 따라서 한국은 통일 전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우선 통일 이후 재산권 처리 문제가 쟁점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땅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누가 북한의 땅을 가지고 있는지. 남한에서는 부동산 서류 있으면 땅의 소유가 어느 정도 증명이 되지만 평양의 경우, 예를 들어 누군가가 류경호텔이 있던 자리에 대해 이거 내 땅이라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러면 누가 진짜 소유권자인지에 대한 싸움이 일어나고 몇 년에 걸쳐 법적 공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법적 공방이 진행될 동안에는 누구도 거기에 투자하지 않는다. 그러면 일자리도 사라질 것이고 통일 비용도 그만큼 많이 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이 아직 독일의 사례를 제대로 배우거나 이를 통해 통일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두 번째로 북한의 엘리트들을 통일 이후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특히 노동당의 고위층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독재에 가담했으니 그들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감옥에 보낼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을 것인가? 북한군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결정을 미리 내려 놓아야 한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독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너무 당연히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그렇다.
왜 한국이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한국 정부 관계자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알고 있는데 나중에 통일되고 나서 생각해 볼게" 라고 한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독일의 경험에 따르면 지금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프레시안 : 현재 통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준비가 너무 미흡하다는 뜻인가?
프랑크 : 한국이 대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치인이 문제지. 그래서 결정을 미루는 것이다. 당신이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생각해 보라. 일단 임기 동안에 할 수 있는 것만 하자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정치인은 어려운 문제는 미룰 수밖에 없다.
북한 당 간부 및 군, 관료 등의 처리 문제만 해도 만약 어떻게 처리하겠다고 발표하면 당연히 북한에서는 굉장히 화를 낼 것이다. 화해 기조랑 평화 분위기를 무너뜨린다고 반발할 수 있음 있다. 그래서 쉬쉬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건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다. 또 정치인들에게 장기적인 일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트럼프와 같은 대통령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웃음)
프레시안 : 한국 정부는 올해 안으로 종전선언이 나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남북 경제협력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보다는 통일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지?
프랑크 : 일단 경제협력은 북한에 대한 제재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투자할 수 있으니까.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을 올해 안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정부가 무엇인가 했으면 좋겠다는 것은 매우 한국적인 사고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하는 것보다는 예를 들어 민간 부문에서 투자가 가능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투자를 하라고 강제하는 것보다는 환경을 마련해줘서 기업들이 스스로 결정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또 특정한 한 정부에 국한된 단기적인 통일 정책보다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유지할 수 있는, 그리고 모든 사회가 함께할 수 있는 장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해결책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이게 매우 중요하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 필요 없을 수 있지만 가능성이 있는 한 대비해야 한다. 북한이 붕괴하지 않고 남한처럼 개발될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를 통해 최악의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 한국 도움 필요 없을 수도
프레시안 : 올해 들어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동아시아 전문가로서 최근 급변하는 남-북-미 관계를 어떻게 지켜봤나?
프랑크 : 2018년 초 남북이 단지 (어떤 상황이 일어나서 거기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더욱이 그들은 미국과 중국 등 국제사회에서 힘을 가진 국가들을 다루기 위해 협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1950년대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외교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사진은 함께 군사분계선(MDL)을 넘는 남북 정상 ⓒ공동취재단
남북이 필요에 의해 이같은 협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의 주도권을 남북이 가져가겠다는 것으로 읽혔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내전이 있었을 때 일본이 침입했는데,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단 내전을 멈추고 협력해서 일본을 무찔렀다. 그 이후에 다시 경쟁했다.
지금 남북은 함께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평창 올림픽에 맞춰 의제를 설정했다. 또 4월 27일 정상회담을 이뤄냈다. 남한은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모든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방침에 감사를 표시했으며 심지어 노벨 평화상까지 언급했다.
프레시안 : 통일 이전에 남북이 서로 만나는 것이 필요해 보이는데, 남북 주민들은 여전히 제한적인 교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앞으로 남북이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정책을 펴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통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독일의 통일 과정이랑 똑같을 거라고 전제하는데 그건 오류다. 보통 약자가, 즉 북한이 한국의 체제를 따를 것이고 한국으로부터 도움이나 자금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통일 전에 북한이 나름의 경제적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본다. 북한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발전 과정을 거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즉 둘 다 경제 성장을 이뤘을 때 통일이 되면 북한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에서 북한으로 일자리가 넘어가면서 한국의 일자리가 부족해질 수도 있다. 독일 같은 경우 동독에서 서독으로 일자리가 이동했다. 그래서 동독이 어려워졌는데, 한국에서는 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
프레시안 : 한국 경제의 큰 특징은 소수의 재벌이라 불리는 대기업 집단이 경제 체제를 좌우한다는 점이다. 통일이 되면 한국 경제의 이러한 특수성이 더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프랑크 : 재벌의 자본이 북한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북한은 텅 빈 공간이 아니다. 북한 내에서도 재벌이 생기고 있다. 주유소, 화장품, 컴퓨터 공장 등도 있고 고려항공의 경우에는 항공사업뿐만 아니라 택시나 카페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이 통일된다고 해서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북한의 기업은 국가기업이긴 한데 족벌 경영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가족이 경영하기도 하고 군이 경영하기도 하는, 약간 섞여 있는 형태다. 기업 이름 중에 '승리'라는 말이 들어있으면 보통 군이 경영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남북이 교류를 하면 북한도 사실상 한국이 과거에 겪었던 것과 같은 고도성장을 거칠까?
프랑크 : 경제성장이 어떻게 될 거라고 완벽하게 예측하지는 못하겠지만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독일 통일 과정처럼 북한이 붕괴해서 남한이 흡수통일 하는 것과 북한이 내부의 개혁을 통해 정치 체제는 유지하되 경제 성장을 이루는 방식이다.
만약 두 번째 시나리오가 현실 가능하다면 북한은 한국과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북한에는 값싼 노동력도 있고 높은 교육을 받은 숙련된 노동자도 존재하고 있으며,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관념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북한은 독재 체제라서 특정한 산업을 공략,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경제 성장을 이루는 방식을 채택할 수 있다. 또 북한은 섬이나 다름 없는 남한과는 달리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광물자원도 남한에 비해 많다. 다만 미국과 같은 정치적인 파트너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정치적인 파트너를 만들어야 한다.
프레시안 : 한국에서는 젊은 세대가 통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변화를 계기로 통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통일 가능성에 대해 전망해본다면?
프랑크 : 통일은 여론의 문제가 아니다. 1990년 당시 많은 독일 사람들은 통일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통일은 일어났다. 최근의 사건들은 거의 20년 동안 (남한 사람들이) 가져왔던 북한에 대한 (생각이) 변하는 것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통제 불가능할 수도 있고 1990년 전후로 생겨났던 동유럽의 상황으로 (국면을) 이끌 수도 있다. 또는 1978년 이후 중국처럼 강력한 경제 성장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한국 통일의 기회가 커질 것으로 본다.
트럼프와 한반도 평화
프레시안 : 중국은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크게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북한 경제가 붕괴해 난민이 발생하지 않게끔 관리해야 한다는 현실적 우려 또한 있다.
프랑크 : 우선 북한과 중국은 무역 분야에서는 계속 교류를 했다. 그런데 한국-미국과 같은 동맹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리더로 입지를 굳히길 원한다. 이를 위해 인접해있는 국가인 한국이 꼭 필요하다. 마치 미국이 멕시코, 캐나다, 쿠바와 같은 이웃 국가들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중국이 한국을 점령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중국에 우호적인지, 한국이 안정적인지 등이 중국에게는 중요하다.
또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존재를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미국이 남한에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를 도입하려고 할 때처럼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중국이 북한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의 밑바탕에는 최소한 현 상황을 유지하거나 미국의 영향을 없애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한국에 영향을 미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북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면 이건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을 두려워하는 중국은 북한의 붕괴 위협이 커지면 이를 막으려고 할 것이다. 이게 중국이 북한의 안정을 원하는 이유다.
프레시안 : 현재의 한반도 평화 국면을 만드는 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정부의 역할이 어느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트럼프 정책을 완전히 지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한반도 정책에 대해서는 트럼프가 매우 긍정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 미국 정부는 북한과 대화하기 위해 조건을 높이면서, 즉 CVID를 먼저 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전제조건을 내세웠는데 트럼프는 '이전에는 어땠든지 상관없이 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행동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가 위험한 부분도 있다. '화염과 분노', 지난해 유엔 총회에서 발언했던 완전한 파괴, 핵 단추 이야기 등 그의 발언에는 우려스러운 지점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입장을 계속 고수한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트럼프의 인내심이 끊어져서 군사적인 행동을 취하면 정말 위험해질 수 있고 2차 한국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프레시안 :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재선을 하지 못하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워질까?
프랑크 : 부시 정부는 ABC(Anything but Clinton), 즉 전임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이 했던 것을 부정하고 이와 반대되는 정책을 취했다. 트럼프는 ABO, 'Anything but Obama', 즉 오바마 정부에서 했던 정책을 부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에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마찬가지로 트럼프가 했던 정책과 반대 정책을 실행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북미 간의 이러한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위험할 수도 있다. (통역 : 이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