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통일 문제

‘김정은표 경제’의 실용주의적 접근

일취월장7 2018. 10. 8. 10:09


김정은표 경제의 실용주의적 접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김정일 위원장 시기 경제정책을 큰 틀에서 유지하는 듯했다. 하지만 2011년 집권 이후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산업정책 측면에서 변화가 적지 않다.

이석기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webmaster@sisain.co.kr 2018년 10월 04일 목요일 제576호


관련기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1년 집권 이후 경제정책 기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선언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 시기 경제정책을 큰 틀에서 유지했다. 그러나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산업정책 측면에서 변화가 적지 않다.

김정은 위원장은 먼저 시장을 용인했을 뿐 아니라 적극 활용했다. 경제 관리제도 개혁을 통해 국영기업의 시장경제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인민경제계획법’이나 ‘기업소법’ 등을 개정해 제도화했다. 이렇게 추진한 시장화가 2000년대 북한 경제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
북한에는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의 보급이 점차 늘고 있다.
사진은 ‘에너지절약형·녹색형 거리’를 표방한 평양의 여명거리.

둘째, 자원 배분 정책에서도 실용주의 방식을 택했다. 투자 능력이나 기술 수준을 고려해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부문에 대한 대규모 투자는 속도를 조절했다. 대신 단기간에 성과를 거둘 수 있거나 이미 거두고 있는 부문에 자원을 집중했다. 에너지 부문에 자원을 우선 투입했고, 기존 설비의 안정화나 현대화 등을 통한 소재 공급 역량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 기술 개발이나 설비투자 등에서 성과가 확인되면 이를 확산시켰다. 소비재 부문에서는 중앙정부 재정의 역할을 축소하고 시장을 적극 활용하는 등 국가 역할의 재정립을 모색했다.

셋째, 2013년부터 국산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연료, 자재와 설비, 그리고 제품의 국산화 형태로 추진되었다. 시장에 대한 정책과 결합된 국산화 정책으로 국산 설비 현대화가 확산되는 등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북 경제제재가 강화된 이후 점차 국산화에서 자립성쪽으로 강조점이 이동했다.

넷째, 양적 성장 전략에서 과학기술 육성 및 인재 양성 등을 통한 질적 성장 전략으로 전환을 모색했다. 이를 위해 원격교육 확산, 과학기술 및 과학기술자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에서도 과학기술이 강조되었다.

다섯째, 실용주의적 산업정책이나 과학기술 및 교육·훈련 중시 정책, 주민 생활과 밀접한 부문 투자 등 전반적인 경제정책 기조에 맞춘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이렇게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 및 시장경제를 합법화한 경제 관리체계의 개혁은 북한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마련했다. 실용주의적 투자와 자원 배분 정책은 중앙정부에 의한 자원 낭비의 요소를 줄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과학기술 중시 정책과 국산화 정책도 제한적이지만 여러 산업의 기술 수준 제고와 설비 현대화, 그리고 새로운 제품의 개발 등 긍정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질적 성장 전략으로의 전환은 대외 경제 관계가 통제된 현재로서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하지만 성장 잠재력을 확충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회복 중인 북한 경제

ⓒ평양사진공동취재단
9월19일 평양 옥류관에서 열린 남북 정상 및 수행단 오찬에 앞서 최태원 SK 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웅 쏘카 대표, 구광모 LG 회장(오른쪽부터)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북한 경제는 1990년대 말 이후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회복 중이다. 제조업 회복은 여타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디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기계공업과 경공업을 중심으로 생산 역량의 회복 및 시장 경쟁력의 제고 가능성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중국 등으로부터 꾸준히 기계 및 설비를 도입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기계 및 관련 산업의 생산능력이 회복되었다. 예를 들면 오랫동안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던 승리자동차연합기업소나 금성뜨락또르연합기업소 등 핵심 기계공장이 새로운 트럭을 개발하고 양산하기 시작했다. 중소 규모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수의 어선도 건조된다. 또한 국산 설비에 의한 설비 현대화가 경공업 기업을 중심으로 폭 넓게 진행 중이다. 가공식품 등 일부 소비재 부문에서도 중국산 수입품과 경쟁하는 북한산 제품이 늘고 있다. 여전히 중국산 수입품의 비중이 크지만 종합시장이나 백화점 등에서 북한산 제품의 비중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정보화와 중간계층 이상의 구매력 증가 등으로 ICT(정보통신기술) 제품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부품 및 반제품을 수입해 북한에서 최종 조립한 제품도 늘었다. 이렇게 시장화와 국산화, 그리고 과학기술 중시 정책 등이 결합되어 기술 부문에서 창업과 유사한 형태의 연구개발 및 생산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수력발전소 건설 및 화력발전소 개보수 등을 통해 전력 공급을 늘리기 위한 투자도 지속되고 있다. 아직까지 성과는 제한적이다. 다만, 정부의 재생에너지 개발 및 보급 정책과 주민들 노력으로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의 보급이 늘고 있다. 북한은 1990년대 에너지난 이후 에너지 효율 제고를 위한 투자를 꾸준히 진행해왔는데,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에도 석탄가스화 고온공기 연소기술 등 에너지 절약 및 전환을 위한 투자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발전량 증가로 제한적이지만 북한의 에너지 사정은 조금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대규모 장치 사업인 금속 및 화학 산업은 북한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급 역량이 크게 개선되지 않아 북한 산업의 회복 및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시장화의 진전 및 제도 개혁 등으로 남북한 경제협력의 제도적 기반은 개선되었다. 향후 남북한 산업 협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전망된다. 그럼에도 아직 북한 경제 전반에 새로운 제도가 착근되고 있지는 못한데, 이는 제도보다 북한 기업을 비롯한 북한 경제의 역량 부족 때문으로 보인다. 향후 남북 경협이 재개되면 시장질서에 입각한 남북 경협 방식을 통해 제도 변화가 북한 경제 전반에 확산될 수도 있다. 남북 경협이 재개되면 경공업 분야의 위탁가공 교역이 활발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 이후 건설 및 건설 관련 산업, 산업용 기계를 중심으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협력할 가능성도 열리리라 기대된다.


평양을 마천루로 만든 김정은

[이영종의 평양인사이트] “北 경제난 감추려는 체제 선전용” 분석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0.10(수) 14:00:00 | 1512호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교류와 협력에 탄력이 붙고 있다. 회담에서 서명된 ‘군사 분야 이행 합의서’에 따라 비무장지대(DMZ)에서의 지뢰제거 작업이 착수됐고, 곧이어 6·25전쟁 당시 이 지역에서 숨진 남북한 군과 유엔 참전군 등의 유해 발굴 작업도 이뤄질 전망이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남북 정상회담과 10·4 합의를 기념하기 위한 공동행사도 평양에서 열리는 등 당국·민간 차원의 방북도 이어지고 있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과 민간단체의 방북 등이 이어지면서 과거와 확 달라진 평양의 파노라마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대동강변을 따라 들어선 고층 주상복합 빌딩과 아파트는 물론 미니 신도시 수준으로 개발된 여명거리 등 평양의 모습이 연일 TV방송 등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정상회담 만찬장에서 “평양의 발전이 참으로 놀랍다. 대동강변을 따라 늘어선 고층빌딩과 평양 시민들의 활기찬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려온 북한에서 이런 건설·건축이 이뤄졌다는 점에 모두들 놀라는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김정은 시대 들어 이런 움직임이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대북제재를 이겨낸 북한의 저력’으로까지 평가하는 분위기다.

 

조선중앙통신은 2017년 7월22일 평양 여명거리가 현대건축의 본보기로 21세기의 “에너지 절약형 거리·녹색형 거리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조선중앙통신은 2017년 7월22일 평양 여명거리가 현대건축의 본보기로 21세기의 “에너지 절약형 거리·녹색형 거리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文대통령, 대동강변 들어선 고층건물에 놀라움 표시


2011년 말 김정일 사망으로 집권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양시 건설과 함께 체제 선전형 건축물을 짓는 데 올인했다. 평양 정상회담을 위해 항공편으로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을 맞이한 순안공항은 그 가운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직접 공사현장을 수차례 방문했고, 국제 수준의 공항으로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김 위원장이 이곳 건설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공사가 한창이던 2014년 가을 현지 점검차 공항을 방문한 김정은은 인테리어 공사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서 “이런 식이면 어느 나라의 공항과 다를 게 없다. 주체적으로 건설하라 했는데 이행하지 않았다”고 불호령을 내렸다. 당시 공사 책임자는 김정은의 건설 참모로 알려진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이었다. 백두산건축연구원 설계사로 일하다 김정은의 눈에 들어 벼락출세한 마원춘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해임돼 가족과 함께 양강도 협동농장으로 추방됐다. 1년 만에 구사일생으로 복귀했지만 유난히 핼쑥해진 몰골에 김정은의 곁에 접근하는 걸 꺼리는 듯 겁먹은 표정까지 나타났다. 김정은 위원장은 공항 준공식장에서 평양과 순안공항 사이에 고속철을 놓자며 새 공항시설에 애착을 보였다.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 집권 이후 시기를 ‘주체건축의 새로운 전성기’라고 주장한다. 특히 “오늘 평양에서는 사회주의 문명국의 면모를 보여주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며 이를 김정은의 “정력적인 영도가 낳은 결실”이라고 찬양하는 데 몰입하고 있다. 집권 첫해인 2012년에만도 김정은에 의해 평양시 창전거리와 인민극장, 평양아동백화점, 능라인민유원지, 유경원, 인민야외빙상장, 평양민속공원이 잇달아 완공됐다는 것이다. 


사실 건설 분야에 대한 북한 최고지도자의 관심은 김정은이 처음은 아니다. 아버지이자 선대 수령인 김정일도 1974년 2월 노동당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으로 권력을 넘겨받기까지 20년간 김일성 유일영도체계 확립과 함께 대형 건설·건축 프로젝트에 주력했다. 평양시 창광거리와 문수거리에 고층 아파트를 비롯한 현대적 주거시설을 건설하고 주체사상탑이나 개선문, 평양산원 등 북한이 체제 선전 차원에서 내세우는 상당수 건축물을 짓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김정은의 경우는 건설·건축 분야에 전례 없이 몰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정은은 평양건축종합대학 창립 60주년을 맞은 2013년 11월 직접 이곳을 방문해 “건축인재 양성의 거점”이라고 강조하며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 김정은은 자신이 이 대학의 명예총장이 되겠다고 말했다. 

 

김정은의 행보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평양을 과시성 대형 건축물로 꾸며 거대한 쇼윈도를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집권 5년 차인 그가 강원도 문천에 건설한 마식령스키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건설·건축은 평양에 집중됐다. 문수물놀이장이나 미림승마구락부, 능라인민유원지 등이 대표적이다. 스위스 조기유학 당시 자신이 체험한 세계적인 워터파크인 알파마레를 본뜬 유람선도 대동강에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무개차를 타고 9월18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백화원초대소로 이동하며 시민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무개차를 타고 9월18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백화원초대소로 이동하며 시민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 평양사진공동취재단

 

김정은은 ‘만리마 속도’나 ‘평양 속도’ 같은 신조어까지 내세우면서 이른바 노력 경쟁을 촉구했다. 그러다 보니 부실공사로 인한 대형 참사가 벌어지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2014년 5월에는 건설 중이던 평양 평천구역 23층 아파트 붕괴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미처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입주했던 주민들이 비교적 부유하고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이라 입소문이 북한 외부까지 번졌다. 

 

김정은은 공사 책임자를 주민들 앞에 세워 사과하게 하는 등 수습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북한은 참사 이후에도 평양 대동강변에 53층 주상복합 아파트와 46층짜리 쌍둥이 고층 아파트를 짓고 이를 핵 개발과 장거리미사일 시험발사에 기여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선물용으로 나눠줬다. 건축물을 체제 유지를 위한 세력을 관리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들어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일부 인사들 사이에서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제가 호전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고층빌딩 건설이나 580만 대에 이르는 휴대폰 보급, 야간에도 전력이 끊기지 않는 등의 모습에서 이를 감지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경제나 민생 전반이 좋아진 게 아니라 평양 등 일부 특권층에 한해 벌어지는 일종의 ‘쇼윈도’ 효과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 고위 탈북인사는 “정상회담이나 남북 관련 행사를 위해 방북한 인원이나 대표단을 위해서는 최고로 잘 짜인 시설 참관이 이뤄지고 전력의 경우도 우선 보장된다”고 귀띔했다. 2500만 인구 중 극소수에 불과한 평양 시민을 위한 시설일 뿐 일반 주민들의 삶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지적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아직은 립서비스에 불과한 것으로 주민들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평양 시민만 잘 먹고 잘살아”


북한 엘리트 세력이나 주민들도 최근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언급이나 서울과 워싱턴을 향한 유화 제스처 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한다. 젊은 최고지도자가 과연 남한과 미국 등과의 정상회담 담판을 통해 개혁·개방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서다. 집권 이후 6년 동안 벌여온 핵과 미사일 도발, 고모부 장성택까지 무참하게 처형하는 공포정치에서 벗어날 것이냐가 관건이란 얘기다. 

 

김정은이 진정성 있는 비핵화 이행과 남북 및 북·미 관계개선 조치에 나서기 전까지는 거대한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평양의 화려한 겉모습에 현혹돼선 곤란하다는 신중론에도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욕망이 분출하는 혁명 도시, 평양을 소개합니다

[프레시안 books] 주성하의 <평양 자본주의 백과전서>
2018.10.06 11:36:12

"이 세상에 북한만큼 겉과 속이 다른 곳은 단언컨대 어디에도 없다. 주민도, 정권도 매우 이중적이다. 워낙 단단한 가면을 쓰고 있어 외부에서 그 실체를 정확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평양 자본주의 백과전서>(주성하 지음, 북돋움 펴냄)라는 표면적으로는 매우 이중적으로 보이는 제목의 책 머리말이다. 겉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의 속, 특히 평양은 시장경제로 급격히 진화되고 있다. 이 책은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의 탈북인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가 자신의 '휴민트'(정보원이나 내부 협조자 등 인적(人的)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얻은 정보 또는 그러한 정보수집 방법을 뜻한다)를 활용해 "외부인을 만나는 순간 속내를 철저히 숨긴 배우로 둔갑하는 평양 시민들"의 실생활과 속내를 끌어냈다. "평양시민 스스로가 작성한 평양 심층 보고서" 격인 이 책에 대해 저자는 "탈북해 한국에 온 후 지금까지 10여 권의 북한 관련 책을 냈지만 그중 이 책을 가장 먼저, 제일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고 머리말에서 밝혔다.

2018년 4월 남측 예술단 평양 공연에서 평양 시민의 '심금을 가장 틀어잡은' 노래는 이선희의 '아름다운 강산'과 윤도현의 '1178'이라는 인터뷰만 봐도 이 책이 담고 있는 정보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지금 평양에도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고 있다" 


▲ <평양 자본주의 백과전서>, 주성하 지음, 북돋움 펴냄.

평양의 부동산 투기 열풍과 하룻밤 유흥비로 1000-1500유로를 펑펑 쓰는 '북한 0.01% 금수저'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는 북한식 시장주의화가 어떤 모습으로 진화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지금 평양에는 서울 못지않은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고 있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한국적 자본주의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 부동산 투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주택 시장은 북한의 자본주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가에서 개인에게 주택을 배정하는 것은 기본 원리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투기 열풍'이 불고 있을까.

평양의 부동산 투자자는 주로 정부 기관이나 국가급 기업소를 등에 업은 개인, 또는 그런 개인들의 집단이라고 한다. 이들은 뇌물을 '윗단위 간부'에게 주고 평양시의 재건축 계획까지 입맛에 맞게 바꾸고 투자자를 모집해 아파트를 지은 뒤, 각자의 기여도와 투자금액에 따라 아파트를 배분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나눈다. 부동산 투기 열풍으로 평양의 아파트 가격은 2000년대 초에만 해도 최고가 5000달러에 불과했는데, 현재는 최고급 아파트는 30만 달러에 거래된다고 한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서는 권력과 함께 돈이 필요하다. 건설상무를 조직해 움직이는 핵심 인물인 건설주는 투자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북한은 은행이 유명무실해 담보 대출 같은 것은 없다. 권력자의 비자금과 돈주(북한의 신흥자본가)의 달러가 있어야 한다. 투자한 권력자와 돈주의 레벨이 곧 건설주의 능력이다. 조선노동당의 핵심 권력 기관인 중앙당 조직지도부 고위간부 정도를 끼고 있으면 최상위 건설주에 속한다. 권력층 역시 돈을 불리기 위해 건설주라는 하수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권력층은 직접 나서지 않고 아내나 자녀를 대신 내세운다."  

"욕망의 분출로 뜨거워진 혁명의 수도" 평양의 부동산 투기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한국의 부동산 투기와 너무나 똑같다. 차이는 북한 최고급 아파트의 로열층은 저층(2-3층)과 중층(7-12층)이라는 점 정도다. 전력 사정이 좋지 않은 북한에서는 승강기가 자주 멎기 때문에 고층은 선호되지 않는다.  

'그란트' 한 장만 찔러주면.... 

'0.01% 금수저'의 일상을 보면, 남한과 북한 두 사회의 유사성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그는 주말이 되면 친구들과 고려호텔 길 건너의 '창광숙소'를 찾는다. 점심에 친구 셋과 함께 가면 1000유로(한화 약 130만 원)로 새벽까지 빛낼(즐길) 수 있다. 가끔 기분이 내키면 1500유로를 쓸 때도 있다(...)창광숙소는 일명 '재포(재일동포)' 출신이 운영하는 곳이다. 원래는 외국인 전용이라 북한 주민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실상 그곳을 찾는 외국인은 거의 없다. 주요 고객은 북한의 금수저나 돈주 같은 부류다. 창광숙소 1층에는 최고급 사우나, 최신식 안마 시술소와 함께 뉴욕의 맨해튼 거리에나 있을 법한 바가 있다. 가격은 유로로 책정되어 있지만 달러도 받는다. 사우나는 3유로, 안마는 20유로 정도로 시설과 서비스 수준에 비해 비싸지 않다(...)당구장이 있는 2층에는 침대방도 있어 '애인과 함께 오면 안성맞춤'이라 한다. 영업 규정상 2층 역시 외국인만 이용할 수 있지만 '그란트(50달러) 한 장 찔러주면' 체크인 없이 방을 빌릴 수 있다." 

국가의 인민에 대한 통제력 상실과 극심한 부패를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북한의 시장주의화 방식에 대해 저자는 "사상 유례 없는 봉쇄 속에서, 세계와 분리된 채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소련이나 동유럽과도 다르고, 현재 중국이나 베트남과도 다르다고 평가했다.  

2018년 문재인 정부 들어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이런 북한의 시장주의화가 배경이기도 하다. 저자가 책의 가장 마지막('창업 블루오션, 평양!')에서 소개한 것처럼 한국이 직접 북한에 투자를 할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한반도가 '자본주의 정글'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십년간 억눌렸다 이제 막 봉인이 해제되기 시작한 북한의 '욕망'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년만에 50번째, 평양 사람들 얼굴엔 자신감이"

[인터뷰]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 펴낸 이기범 북민협 회장
2018.10.08 11:47:20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으로 2018년 한반도는 지난해와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남북 정상은 판문점 선언과 평양 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임을 천명한 것과 함께, 추후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물론 유엔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북한의 핵 문제 역시 아직 해결되지 않아 남북 간 협력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미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통해 공동 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2차 북미 정상회담도 조만간 열릴 것으로 관측돼 북미 관계가 대결적인 상황으로 되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북미 관계가 원만히 풀린다면 그에 맞춰 남북관계 역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으로 보인다. 남북 정부 간 협력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협력 사업도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지난 9월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북측 민화협 관계자들을 만난 데 이어 3차 남북 정상회담 수행원 자격으로 평양에 다녀온 이기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회장을 만나 향후 남북 민간 협력의 방향을 들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기범 북민협 회장은 북측 민화협 관계자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업을 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며 "구호 물품을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 인프라를 만들어가는 협력을 해나갔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구체적으로는 지역 단위의 기술 교육부터 각 지역 단위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 등을 협력하는 것"이라며 "2000년대 중반에 이러한 활동이 일부 진행됐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이러한 활동이 단절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측의 필요성이나 수요 등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개발 협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남북이 새로운 협력을 하게 된다면 이런 부분부터 먼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 수행원 자격으로 10여 년 만에 평양을 찾은 이 회장은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무엇이 달라졌냐는 질문에 "평양의 경우 도시 개발이 많이 이뤄졌다. '창전거리'와, 과학자들이 모여 사는 '미래 과학자거리', '여명거리' 등을 중심으로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섰는데, 이 세 지역은 앞으로 평양의 발전 방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북한 사람들의 심적 자신감이 느껴졌다. 초기에는 제재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이후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해내고 인민들의 삶의 질을 어느 정도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는 희망, 자신감 등이 엿보였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이 회장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시민들을 상대로 한 연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며 "북쪽 시민들이 문 대통령 연설을 듣고 반응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 남북관계와 대남 이미지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인터뷰는 지난 4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이기범 북민협 회장 ⓒ프레시안(이재호)


프레시안 : 1998년 11월 첫 방북 이후 그동안 49차례 북한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 계기 방문이 50번째였는데, 이번에는 북한 측과 어떤 논의를 했나?

이기범 : 2009년 가을에 방문한 이후 거의 10년 만의 방북이었다. 공식 일정으로는 김영대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과 만나 인민문화궁전에서 회의를 가졌다. 김 부위원장은 2004년 6월에 만수대의사당에서 면담한 적이 있었는데 이 만남을 기억하고 있어서 서로 반가워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특별 수행원 약 50여 명 중에 시민사회 관계자가 총 4명 갔는데 저와 김덕룡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 염무웅 겨레말 큰사전 이사장이 함께 했다.  

남북이 민간 차원에서 협력하는 부분은 스포츠와 문화, 예술 등의 분야가 있는데 북한은 지금이 판문점 선언 이후인 만큼 판문점 시대에 맞게 새로운 방식으로 하자고 말했다. 다만 큰 틀에서 앞으로 잘 해보자는 정도 외에 구체적 합의를 이룬 자리는 아니었다.

물론 내년에 전국체전 100주년과 3.1운동 100주년 등의 행사를 남북이 함께 추진해보자는 이야기는 나왔다. 이러한 행사들은 비교적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다. 예술 공연과 스포츠 교류 등도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은데 순수 민간 차원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남북 정부 모두 아직 구체적인 안이 정해진 것 같지 않다.

다만 지난 9월 평양 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은 전염성 질병의 유입 및 확산 방지를 위한 긴급조치를 비롯한 방역 및 보건‧의료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하였다"고 한 만큼 정부든 민간이든 보건 의료 분야와 관련한 협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최근 북측 관계자들과 만나서 향후 협력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이기범 : 지난달 초에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 민화협 대표단을 1년 6개월 만에 만났다. 북측은 남북 정상 간 합의대로 움직이겠다고 밝혔다. 지난 4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민간교류나 인도적 개발 협력 분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으니 앞으로 추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일단 우리끼리라도 시작할 수 있는 부분은 시작하자고 해서 협력 방향에 대해 합의한 부분은 있다.  

북측 민화협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업을 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구호 물품을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 인프라를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협력을 해나갔으면 좋겠다는 입장이다. 인도적 지원에서 개발 협력으로의 전환은 이미 2000년대 중반 정도에 시작된 바 있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이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고 난 뒤에는 식량과 물품 등 긴급구호적인 성격을 띤 지원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런 지원이 많았고 이후에는 어린이어깨동무와 같은 몇몇 단체들이 북과 힘을 합하여 병원이나 제약공장 등을 세우기도 했다. 개발협력은 여기서 좀 더 나아가서 사회 전반의 발전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을 만드는 일에 협력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지역 단위의 기술 교육부터 각 지역 단위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 등을 협력하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에 이러한 활동이 일부 진행됐다. 어린이어깨동무도 우리민족서로돕기본부 등 다른 단체와 함께 일부 지역에서 초보적인 형태의 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이러한 활동이 단절됐다.

아무튼 지역단위의 개발 협력을 남북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도 딱 정형화된 의제로 북쪽이 제안한 것은 아니다. 북측의 필요성이나 수요 등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개발 협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협력이 필요한 부분으로 파악한 것이다. 즉, 남북이 새로운 협력을 하게 된다면 이런 부분부터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역단위의 개발 협력은 우선 인프라 구축이 전제돼야 한다. 도로망, 철도, 전기를 비롯한 에너지 등의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민간 차원에서 인도적 개발 협력을 할 수 있는 기반 구축은 남북 정부 간 협의해서 추진해야 할 사항이고 지역 개발이나 보건 의료, 식량 증산 등의 주체는 민간들이 되는 것으로, 통일부도 그런 식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으로 협의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북쪽 사회도 그동안 변화가 있어서 협력의 내용과 방식에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의료나 보건 같은 경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투자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간의 지원이 이루었던 성과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다.

북쪽의 보건의료 인프라가 얼마나 개선됐는지 확실하게 판단하기는 이르다. 물론 새로운 병원들이 생기긴 했다. 옥류 아동병원, 류경안과종합병원, 평양산원 유선종양연구소를 비롯해 제약회사 등등이 생겼는데 전반적인 보건 의료 상황이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투자도 더 많이 필요할 것이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으로 본다.  

프레시안 : 인프라 부분 외에 농업 부문은 우리가 북한과 함께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나?

이기범 : 식량 문제와 관련해서 과거에 그 분야에서 활동하던 단체를 중심으로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에서 분과를 꾸려서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시민단체나 민간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일은 없다. 다만 지자체에서는 관심이 많으므로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민간단체와 지자체가 협력하면 좋겠다. 서울시는 산림녹화에 관심이 크고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같은 경우 농업 협력 단체별 기구를 따로 만들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농업 교류 협력이 재개된다면 지자체가 많이 참여할 것으로 본다.  

프레시안 : 북한이 관광 산업에 관심 많다고 하던데? 

이기범 : 관광 쪽이 아무래도 수익 측면에서 즉각적인 효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지난 판문점 정상회담 때 냉면이 상당히 주목받았는데, 북측에서도 이런 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양 정상이 백두산에 함께 올랐는데, 백두산 관광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홍보가 어디 있겠나.  

대북 제재, 비핵화와 함께 유연해져야 

프레시안 : 2009년 이후 거의 10년 만에 다시 북한에 방문했는데 실제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측면이 있었나? 

이기범 : 나름 경제발전도 이뤄지고 자신들의 국가적 목표도 정해졌다고 보인다. 그러다 보니 북측도 여기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업의 틀을 정하자고 이야기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지역 개발과 과학기술협력인 것 같은데, 군이나 시 정도 규모의 개발에서 남북이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 평양 대극장 앞에서 정상회담 환영 예술 공연 관람을 기다리고 있는 이기범 회장 ⓒ이기범

평양의 경우에는 우선 도시 개발이 많이 이뤄졌다. 특히 '창전거리'와, 과학자들이 모여 사는 '미래 과학자거리', '여명거리' 등을 중심으로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이 세 지역은 앞으로 평양의 발전 방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두 번째는 북한 사람들의 심적 자신감이 느껴졌다. 초기에는 제재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이후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해내고 인민들의 삶의 질을 어느 정도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는 희망, 자신감 등이 엿보였다.

프레시안 : 그런데 지난 2014년 4월, 북한에서 모든 남한 민간 단체와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아직까지 이 방침은 유효한가?

이기범 : 베이징에서 북측 민화협 관계자를 만나지 않았나. 이를 보더라도 북한의 그러한 방침은 변화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민간 차원의 남북 협력도 다시 시작하자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 측도 5.24조치 해제 등 평화와 번영을 지향하는 차원에서 정책을 재검토 해야 할 것이다.  

제가 북민협 회장 자격으로 이번 정상회담에 같이 갈 수 있었던 것도, 남북 정부가 민간 차원에서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해 발전적인 길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또 실제 북측에서 김영대 부위원장과 민화협 등 관계자들이 나와서 우리 측과 면담을 진행했고 그러한 의지가 확인됐기 때문에, 인도 분야에서의 개발 협력을 재개하고 활성화하도록 노력하자는 원칙은 새로 세워진 것으로 본다. 민간 협력 재가동에 대한 원칙적 합의를 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향후 어떤 협력 사업을 진행할 예정인가?  

이기범 : 북쪽에 새로운 수요가 있으니까 일단 거기에 맞추는 사업을 진행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사업은 아니고, 과거 진행했던 지역 개발 협력 사업의 규모를 더 키우고 지역에 자급 자족적인 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 분야는 그동안 쭉 했던 것처럼 보건 의료분야라든가 영양증진 분야인데, 이 역시 규모를 좀 더 키우고 평양의 수준을 우선 높이면서 이를 북측 전역으로 확산하는데 협력하는 일을 해야 할 것으로 본다.  

북민협 차원에서도 각 분야별로 소속 단체들이 원하는 분과에 들어가서 북측이랑 같이 할 수 있는 사업을 개발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본격적인 사업을 어렵게 하고 있는 상황이긴 하다.  

물론 제재가 있어도 인도적 물품은 반입시킬 수 있기 때문에 약품의 경우 통일부와 유엔 제재위원회, 필요한 경우에는 미국의 승인을 받아 보내려고 한다. 그런데 제재 예외를 신청하는 절차가 까다롭다. 예를 들어 북측에 비닐하우스를 세운다고 하면 비닐과 철제 프레임이 같이 들어가야 하는데 철제의 경우 제재 품목이다. 그렇다고 비닐만 제공하면 비닐하우스를 만들지 못한다. 제재 속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은 있지만 절차 자체가 굉장히 힘들고 물품이 제한돼있다.  

이런 이유로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일단 할 수 있는 일은 시작해 나가자는 생각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제재 품목에 해당되더라도 인도적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유엔과 미국에 설득하고, 이를 통해 하나의 사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남북 정상회담과 이어진 북미 정상회담으로 비핵화에 대한 진전과 한반도의 평화‧신뢰 구축이 동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동시적 접근이 이뤄지고 있고, 유엔의 모든 제재 결의안에는 상황 변동이 있을 경우 제재를 강화할 수도 있지만 약화할 수도 있다는 항목이 들어있다. 또 사실 북한이 비핵화와 관련해 몇 가지 진전 및 가시적인 결과를 내놓고 있는데 반해 제재는 한 점의 변동도 없다. 이런 부분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남북 정상회담 둘째날인 지난 9월 19일 평양 능라도에 있는 북한 최대 규모 종합체육경기장인 '5.1 경기장'에서 집단 체조 예술 공연이 열렸다. ⓒ이기범


냉면과 백두산에 관심 보이던 젊은 세대, 이들에게 기회를 줘야

프레시안 : 지역 개발이나 교류 협력도 중요하지만 남북의 주민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도 중요한 부분 같다. 어린이어깨동무에서는 인도적 차원의 협력 외에 평화교육도 진행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5만 명 정도 평화교육에 참여했던데 이 역시 남북 간 중요한 프로젝트로 가져가야 하는 것 아닌가?  

이기범 : 남북이 힘을 합해서 건물을 세우고 보건 의료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남북의 사람들이 만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평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6.15, 10.4 선언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남북의 해당 분야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게 됐다는 측면이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가 불필요한 적개심을 해소하고 대화를 통해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워크숍이나 교육을 같이 하는 것 외에 남북 주민들 간 이러한 의식의 저변이 확대되는 것이 중요한데, 이번 정상회담 때 평양시민들을 상대로 한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이 이런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그 성격은 정치적 사건이지만 이 연설 자체가 사회문화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북쪽 시민들이 문 대통령 연설을 듣고 반응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 남북관계와 대남 이미지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제가 당시 능라경기장에서 문 대통령의 연설을 듣는 시민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시민들의 얼굴에서 호기심과 놀라움 등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이건 저의 주관이 개입된 느낌에 불과하지만, 찍어온 사진도 다시 보면 시민들이 마지못해 앉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름의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는 구별된다.  

우리가 남측에서 했던 교육을 북측에서도 하려면 북측의 전문가와 함께 내용을 다듬고 자연스러운 교육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교육 차원에서 사람과 만남을 통해 자연스러운 평화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건 의료 사업을 하러 북측에 방문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으로, 대화하는 가운데서 서로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변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앞으로도 이 부분이 중요할 것 같다.  

물론 현재 국면은 정부 주도로 비핵화를 진전시키고 남북협력에 필요한 기반과 제도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사회가 변하려면 역시 사람들 간의 만남이 중요하다. 민간 차원에서 특정한 현장에서 특정 분야의 사람들이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의논하고 부대끼기도 하는, 그런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프레시안 : 최근 출간한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에서 2008년부터 최근까지 초중고등학교를 보낸 학생들은 과거에 남북이 협력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저술했다. 남한 내에서도 남북 평화와 관련한 교육이 그만큼 필요하다는 증거 아닌가?

▲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 이기범 지음, 보리 펴냄

이기범 : 이 책을 쓸 때 남북관계가 너무 어두웠고 학생들은 남북관계에 대한 기억조차도 많이 없었다. 그래도 과거에 남북이 힘을 합하면 결실이 맺어진 적이 있었다는 기억을 되살려야 남북관계를 변화시키자는 시민들의 공론이 모아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지난해부터 집필하기 시작했다.

말씀하신 평화 교육은 중등 교육 과정에 관련 내용이 일부 있는데 필수는 아니고 선택이다. 일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말을 들어보니까 2008년부터 10년 사이의 사회적 분위기가 평화, 특히 남북평화를 가르치기는 조심스러워서 교육을 하기가 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교육은 꼭 남북관계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성숙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여전히 남측에서는 북측에 대해 호혜적이거나 상호주의적인 인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안상수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9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왜 평양에 태극기가 없었냐고 물어보자, 이낙연 국무총리가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에 오면 인공기를 휘날릴 수 있겠냐고 반문한 사례가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 한 쪽으로 치우쳐 생각하시는 분들이 적잖이 있을 것 같다. 한 언론사 기자도 자기네 회사 지국을 평양에 만들어야 겠다고 하길래, 그럼 북측의 <로동신문> 지국을 서울에 만드는 건 괜찮냐고 하니까 그건 안된다고 하더라. (웃음) 

우리가 북쪽과 관계에서는 상당 부분 호혜적인, 상호주의적인 의식이 마비되는 측면이 있다. 무의식중에 특별히 북에 대해 적대적 생각을 가져서라기 보다는, 이런 상호적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책에서 "한반도 평화는 단일국가를 이룬다는 바람보다는 삶의 질이 나아진다는 전망으로 협력해야 한다. 시민들의 활발한 참여가 중요하다. 평화공동체라는 집으로 들어갈 사람들이 스스로 집을 지어야 한다. 자기 삶을 누군가 대신하는 과정으로는 불평등과 불합리가 되풀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남북 관계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남한 시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시다면?  

이기범 : 북한과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선과 부정적인 시선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우선 평창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꾸리는 사안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공정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다. 이건 그만큼 현재 우리 사회의 공정성이 많이 흐트러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이 세대들은 순수한 측면에서의 호기심도 있다. 제가 이번에 정상회담을 갔다 왔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냉면 어땠냐, 백두산은 어떠냐 등등을 물어보더라. 과거에 평양냉면 이야기를 꺼냈다면 남북관계 같이 중요한 문제를 두고 냉면 이야기나 한다면서 경망스럽다고 했을텐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다르다. 본인들의 피부에 와닿는 흥미로운 것이나 변화가 있고 영향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진다.  

▲ 이기범 회장 ⓒ프레시안(이재호)


그런 점에서 젊은 세대가 미래의 남북관계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많이 만들어 줘야 한다. 예를 들어 이번에 10.4 남북정상선언 남북 공동 기념식이 평양에서 열린다고 할 때, 참석해야 할 분들이 많겠지만 젊은 세대들을 많이 참여시켰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북쪽에서도 여기에 맞춰서 젊은이들이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평화교육이 이뤄지는 것이 필요하다.  

또 남북 간 끊어진 도로와 철도 복원하는데 수십조 원이 든다는 주장이 있는데, 실제 철도와 도로를 복원하는 데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 그리고 이걸 연결하면 어떤 이득이 있고 우리 삶에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알려줘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남한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로, 대륙으로 넓힐 수 있도록 사고의 패러다임을 밝혀주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 10, 20대에게 기회를 주면 잘 참여할 것이다. 본인에게 영향이 있는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 젊은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잘 북돋을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