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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피해자들 두 번 죽이는 ‘무차별 테러’

일취월장7 2018. 3. 21. 10:45

미투 피해자들 두 번 죽이는 ‘무차별 테러’

피해자 신상털기·허위사실 유포·가짜뉴스까지 확대 재생산

정락인 객원기자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20(화) 08:56:00 | 1483호


1월29일 창원지검 통영지청 서지현 검사(45·사법연수원 33기)는 JTBC 《뉴스룸》에 직접 출연했다. 현직 여검사의 방송 출연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안태근 전 검사장(52·사법연수원 20기)의 성추행을 폭로했다.

 

서 검사의 폭로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이것을 도화선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에 동참하며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동안 수치심에 침묵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미투에 동참하며 스스로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감수하고 용기를 내며 자신을 드러냈다. 그리고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하고 수치스러운 피해 사실을 적나라하게 세상에 꺼내 놓았다. 성폭력 특성상 피해자가 자신을 밝히고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은 피해자지만 또 다른 피해에 직면할 수 있다. 실제 미투 운동에 동참하며 성폭력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이 2차, 3차 피해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특히 방송 등을 통해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한 피해자들의 경우 테러 수준의 공격을 당하고 있다.

 

© 일러스트 안병현

© 일러스트 안병현

 

불륜녀로 몰아가며 피해자 공격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정무비서였던 김지은씨(33)는 3월5일 JTBC에 출연해 지난해 6월부터 최근까지 8개월 동안 안 전 지사에게 4차례 성폭행과 함께 수시로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김씨는 범행 장소와 시기로 안 전 지사와 동행한 러시아와 스위스 출장을 지목했다. 특히 안 전 지사는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진 2월25일에는 김씨를 불러 미투에 대한 불안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날도 김씨를 성폭행했다고 주장했다. 김씨의 얼굴과 실명은 물론 목소리와 표정까지 방송을 통해 그대로 드러났다. 굳이 방송에 출연하게 된 이유에 대해 “제가 오늘 이후에라도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게 방송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 방송을 통해 국민들이 저를 조금이라도 지켜주셨으면 좋겠다”며 불안감을 내비쳤다. 결국 그의 방송 출연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마지막 선택지였던 셈이다. 김씨는 국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국민들이 저를 지켜주신다면 다른 피해자들도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간청했다. 김씨는 변호인단을 꾸려 방송 하루 뒤인 3월6일 안 전 지사를 서울서부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김씨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방송에 나와 성폭력 사실을 폭로한 뒤 무차별 공격에 시달렸다. 김씨와 관련한 언론 기사의 댓글에는 ‘너도 좋았지’ ‘돈을 노리고 폭로했냐’ ‘불륜이다’ ‘냄새가 난다’ ‘성폭행으로 둔갑한 치졸한 공작’ ‘유부남과 놀아난 돌싱녀’ 등의 악플이 달렸다. 김씨의 외모를 비하하는 내용도 적지 않다. 김씨에 대한 ‘신상털기’도 심각하다. 김씨의 출신학교부터 교우관계, 사진 등이 유포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김지은’을 검색하면 네티즌들이 김씨에 관해 가장 많이 검색한 연관 검색어가 뜬다. 여기에는 ‘김지은 정무비서 학력’ ‘김지은 정무비서 결혼’ ‘김지은 비서 나이’ ‘김지은 비서 프로필’ ‘김지은 돌싱’ ‘김지은 남편’ ‘김지은 이혼녀’ 등 각종 개인 신상과 관련한 내용이 집중적으로 검색된 것을 알 수 있다.

 

동영상 전문 사이트인 유튜브에서 ‘김지은 안희정’을 검색해 보면 자극적인 제목의 영상이 검색된다. ‘안희정 반격 시작! 김지은 돌싱 폭로! 미투 후회! 돌싱인 게 죄인가요?’ ‘안희정 충격 고백, 사랑해, 김지은 정무비서 사랑했었다’ ‘안희정 전 지사 판 뒤집혔다. 김지은 비서 비밀 밝혀져’ ‘김지은, 안희정을 거절 못한 충격적 진실 이제서 폭로’ 등이다. 대부분 김씨가 일방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게 아니라 불륜 관계였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들이다. 이들 동영상의 조회 수는 수백만에서 수십만을 기록하고 있다. 김씨를 ‘불륜녀’로 몰아가려는 목적과 사회적 이슈에 편승해 자극적인 제목과 개인 신상을 집중 부각시켜 조회 수를 늘리려는 상업적 목적이 함께 있다고 볼 수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을 폭로한 김지은 전 충남도 정무비서 © JTBC 제공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을 폭로한 김지은 전 충남도 정무비서 © JTBC 제공


 익명 폭로자 지인들까지 피해 입어

 

검색사이트인 구글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지은 비서’를 검색하면 방송 인터뷰 사진 외에 사생활 관련 사진까지 공개돼 있고, 일부 블로그·카페·커뮤니티 등에는 김씨와 관련한 각종 루머 등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올려져 있다. 김씨가 ‘돌싱’(돌아온 싱글·이혼한 사람)인 것을 부각시켜 미투를 폄하하거나 안 전 지사를 먼저 유혹한 것처럼 사건의 본질을 오도한 것도 적지 않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씨의 가족도 공격 대상이다. SNS(사회관계망)에는 김씨의 아버지가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과 자유선진당 당협위원장으로 대전의 유지라는 내용의 가짜뉴스가 퍼졌다. 안 전 지사를 죽이기 위한 야당의 의도적인 폭로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김씨 측은 “모두 허위”라며 “당원이었던 적도 없고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김씨는 신상털기, 허위사실, 악성 루머 등이 극성을 부리자 손편지를 공개하며 자신에 대한 2차 가해를 멈춰 달라고 호소했다. 김씨를 돕고 있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전성협)도 기자회견을 통해 “추측성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나 전달하는 2차 가해 행위를 중단해 달라”고 촉구했다. 현재 김씨는 얼굴이 알려져 외부 생활을 전혀 못하고 있으며,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라고 한다.

 

익명 폭로자의 경우도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은 3월7일 현직 기자 A씨가 2011년 정봉주 전 의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단독으로 보도했다. 프레시안은 피해자인 A씨에 대해 피해 당시에는 기자 지망생이었고, 현재는 현직 기자라고 밝혔다. 이 보도가 나가자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려던 정 전 의원은 돌연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이때부터 프레시안과 정 전 의원 간의 진실 공방이 시작됐다. 정 전 의원 측은 3월12일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프레시안 보도를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익명의 A씨에 대해 해당 기사를 쓴 서어리 기자와 대학동문이자 언론사 입사 시험을 함께 준비했던 친구 사이라고 특정했다.

 

네티즌들은 서 기자의 신상을 털기 시작했다. ‘서어리 기자’는 단번에 포털사이트 상위 검색어를 점령했다. 네티즌들은 서 기자의 나이·사진·친구·페이스북 등을 검색하며 A씨를 밝히는 데 주력했다. 서 기자의 SNS 등의 계정도 샅샅이 훑어 친한 친구를 찾아내고, ‘대학동문’과 ‘기자’라는 키워드를 통해 공통점을 가진 사람을 줄여 나갔다. 그러다 서 기자와 친한 대학 친구 세 명 중 한 명을 A씨로 특정했다. 그는 서 기자와 대학동문이며, 친한 친구 중 한 명으로 한때 언론사 기자 생활을 했던 S씨였다.

 

네티즌들은 S씨의 페이스북 계정에 몰려가 댓글을 통해 온갖 비난을 퍼부으며 악플을 달았다. 아울러 S씨의 사진을 ‘정봉주 전 의원 성추행 폭로 당사자 A씨’라며 유포했다. 일부 블로거나 회원이 수십만 명에 달하는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서어리 기자와의 관계를 언급하며 S씨의 사진과 실명이 공개됐다. 심지어 찌라시(사설 정보지)에도 S씨가 ‘A씨’라고 단정해서 암암리에 유포되기도 했다.

 

문제는 S씨가 프레시안 보도에 나온 ‘A씨’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SNS 계정을 통해 “정봉주 전 의원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 피해자 A씨를 추측하는 과정에서 제가 마치 피해자 A인 것처럼 단정하는 허위사실이 유포되고 있다. 제가 기사를 쓴 서어리 기자와 동문이고, 기사에 피해자가 기자라는 언급 때문에 그런 억측이 나온 모양인데, 분명히 밝히지만 저는 피해자도 아니고 이번 사건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저의 실명과 사진, 신상정보가 공공연하게 유포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심지어 개인 SNS와 모바일 메신저로 저에게 피해자 A임을 실토하라는 협박까지 한다. 이에 개인의 명예가 훼손된 것은 물론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정신적 피해를 보고 있다”고 토로했다. S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한때 기자 생활을 한 것은 맞지만 지금은 일반 회사원이다. 피해자를 캐내려는 잘못된 추측과 신상털기로 나와 같은 2차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 ‘김지은’으로 검색하면 관련 동영상이 나온다(왼쪽). 정봉주 전 의원의 성추행 피해자로 지목돼 신상정보가 유포된 S씨가 SNS 계정에 게시한 글과 고소장 © 인터넷 캡처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 ‘김지은’으로 검색하면 관련 동영상이 나온다(왼쪽). 정봉주 전 의원의 성추행 피해자로 지목돼 신상정보가 유포된 S씨가 SNS 계정에 게시한 글과 고소장 © 인터넷 캡처

 

위험에 노출된 피해자 보호 대책 시급

 

S씨는 법적 대응에도 나섰다. 그는 3월12일 오후 서울 광진경찰서를 찾아가 댓글이나 블로그, 카페 등을 통해 자신을 피해자로 추정하거나 단정해 글을 올리고 사진과 신상정보를 무단으로 게재한 사람들을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서지현 검사도 2차 피해에서 예외가 아니다. 현직 검사 신분인데도 각종 루머와 악플 등에 시달렸다. 한 현직 부장검사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성추행 문제를 자신의 인사문제와 결부시키지 말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그는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표현을 동원해 가며 마치 서 검사가 성추행 사건을 부풀려 인사 특혜를 받으려 한다는 인상을 주도록 했다. 서 검사는 해당 검사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를 요청했다. 서 검사에 대한 외모 비하 등 각종 악플도 쏟아졌다.

 

성폭력 피해자와 미투 운동을 비꼬거나 가해자를 두둔하는 일도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유명 소설가인 하일지 동덕여대 교수는 수업 중 “소설 《동백꽃》의 줄거리는 점순이가 총각을 성폭행한 것”이라며 “소설 속 화자인 ‘나’도 미투를 해야겠네”라고 조롱한 것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았다. 하 교수는 또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피해자를 언급하며 “처녀와 달리 이혼녀는 욕망이 있을 수 있다”며 피해자를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학생들은 성폭행 피해자가 원해서 관계를 맺었다는 뜻으로 들렸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대학 강단에 선 지식인들조차 성폭력 피해자를 왜곡되게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투로 인한 2차, 3차 피해는 특정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동안 미투를 통해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피해자들 대부분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힘겹게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백한 피해자들이 추가 피해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감내하며 위험에 노출돼 있다. 



여성의 목소리로 민주주의 새로 쓴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들은 미투 선언 나도 말한다를 통해 고통의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는 깨달음과 치유의 순간을 만났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8년 03월 20일 화요일 제548호

‘숭한 짓’의 정체에 대해 이제는 할머니도 말하기 시작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설 연휴 고향에 다녀온 한 회원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회원의 고향 마을 한의사는 치료를 이유로 여성 노인들을 지속적으로 성추행했다. 할머니들은 쉬쉬해왔던 서로의 불쾌했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이게 그 미투인가 보다”라고 이야기했다. 할머니들의 여든다섯 삶에 처음으로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언어’가 생겼다.

정치·사회·문화 분야를 막론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연일 미투 선언이 이어졌다. 선언은 이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만들었다. ‘미투’는 “나도 당했다”라는 고발의 성격보다 “나도 말한다”라는, 공론장을 만드는 움직임으로 번역해야 옳다. 여전히 성폭력에 대한 이해가 매우 협소하고 척박한 한국에서 사회적 낙인과 2차 피해를 무릅쓰고 뚫고 나온 목소리는 공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시사IN 신선영
미투 운동을 상징하는 하얀 장미꽃.
불과 23년 전인 1995년까지만 해도 형법 제32장은 성폭력을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했다. 성폭력이 여성 개인의 존엄이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기보다, 그 여성에 대한 남성의 독점권을 위반한 범죄로 간주한 것이다. 이는 이후 ‘강간과 추행에 관한 죄’로 바뀌었지만, 사회는 여전히 성폭력을 정조와 순결의 관점으로 바라봤다. 1997년 9월10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가 대표적이다. MBC는 택시 기사한테 성폭행을 당한 19세 여성 자살 사건을 보도하며 이렇게 마무리한다. “수치스러운 삶 대신 죽음을 택한 이양의 선택은 정조 관념이 희박해진 요즘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고, 1993년 제기된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이 5년이라는 지난한 법정투쟁 끝에 1998년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 남녀차별금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에 성희롱 규정이 처음 마련됐다. 법에 여성의 경험과 관점이 반영되기 시작한 이 같은 흐름을 농담쯤으로 치부하고 싶어 하는 ‘백래시(backlash·반격)’ 역시 존재했다. “성희롱하려면 3000만원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는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 재판 1심에서 3000만원의 손해배상 선고가 난 것을 비꼬는 말이었다.

ⓒ시사IN 이명익
3월8일 서울 명동에서 여성단체 회원들이 미투 운동 지지와 성폭력 근절을 요구하며 행진을 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가 마주한 16가지 질문

미투 운동이 일어나기 전 반(反)성폭력 운동은 대개 성폭력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고 무력해진 피해자에 대한 사회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의 강고한 분위기도 이를 거들었다. 논문 <성폭력 피해의 특성에 따른 피해자의 성폭력 통념 경험>(김보화·추지현·이미경, 2017)에 따르면 사회에 통용되는 성폭력 통념은 크게 16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피해자 낙인(몸이 더럽혀졌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다, 수치심과 자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인생 망친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연애나 결혼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피해자 비난(네가 끝까지 저항했다면 성폭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성폭력은 네가 유혹하거나 유발한 면이 있다, 네가 남자에게 만만해 보였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평소 성관계가 난잡하거나 문제가 있는 여자이다) △피해 사소화(남자가 성욕을 통제하지 못해 실수한 것이다, 과도하게 예민해서 피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려봐야 이로울 게 없다, 성폭력 피해를 공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피해 의심(너도 즐겼을 수 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오해했을 수 있다, 보복이나 이익을 얻기 위해 거짓으로 신고하기도 한다)이 바로 그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는 적어도 이 16가지 질문 앞에 한 번씩은 마주선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성폭행 피해자인 응답자 235명은 이 16가지 성폭력 통념 중 평균 5.41개를 경험했다. 주로 ‘피해 사소화’에 집중돼 있었다. 성폭력 피해가 아는 사이에서 발생했을 경우로 좁혀보면 피해 자체를 부정하려는 ‘피해 의심’이 더 많이 작동했다. 흔히 성폭력은 낯선 사람이 저지르는 범죄로 인식돼 있지만, 2016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에 따르면 1353건의 상담 사례 중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87.1%(1178건)이었고, 모르는 사람에 의한 피해는 7.5%(101건)에 그쳤다.

ⓒ시사IN 신선영
2016년 5월19일 ‘여성혐오 살인 사건’ 추모 포스트잇이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를 빼곡하게 감쌌다.
안희정·안태근을 비롯해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최근의 미투 운동 역시 아는 사이에서 저질러진 성폭력을 폭로했다. 성폭력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면식’ 범죄는 피해 경험을 드러내기 더 어렵게 만든다. 특히 피해자가 성인일 경우 “평등한 관계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작동한다. 이 대목에서 ‘저항했는가’는 사건을 판단하는 주요 잣대가 된다. 2010년 기준으로 성폭력 사건 기소율은 50%를 밑돈다. 성폭력의 법적 판단 기준이 ‘최협의 폭행’, 즉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곤란할 정도의 폭행이 있었는지 여부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렵게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해도 기소까지 가는 일이 쉽지 않은 셈이다. 이 모든 지뢰밭을 통과해 소송을 진행할 경우 가해자 측에서 걸어오는 무고와 명예훼손 소송은 ‘숙명’이 된다(28~30쪽 기사 참조).

1938년 영국에서 공연된 연극 <가스등(Gas Light)>에서는 남편이 아내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전등을 일부러 낮추는 장면이 나온다. 아내가 집 안이 너무 어둡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해 아내를 탓함으로써 아내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남편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다. 여기서 유래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용어는 권력과 위계가 작동하는 성폭력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피해자들은 피해를 당하고도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한다.

ⓒ시사IN 조남진
2016년 겨울에서 이듬해 봄으로 이어진 ‘촛불 광장’에서 여성혐오 발언을 한 사회자는 사과했다. 위는 2016년 12월10일 광주 금남로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
“나도 말한다”라는 선언은 이 모든 조건과 상황을 뛰어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뤄진다. 침묵은 ‘말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깨졌다. 대중이 서지현 검사를 시발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미투 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사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들은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2015년 칼럼니스트 김태훈이 쓴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칼럼이 패션 잡지 <그라치아>에 게재됐다. 페미니즘을 장애에 빗댄 이 칼럼은 당장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온라인상 해시태그 운동으로 이어졌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에서 “내가 페미니스트다”라는 선언으로 넘어가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자칫 ‘화장실 변사체녀’ 사건이 될 뻔했다. 사건은 여성들이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 찾아가 포스트잇을 붙임으로써 의미를 획득했다. 이 공동의 경험은 ‘#살아남았다’로, 다시 그해 10월 ‘#○○_내_성폭력’으로 이어졌다.

이 ‘말하기’가 축적되는 과정에서 익명의 개인들은 동일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타인들을 만났다. 사적인 경험은 ‘다른 주제’로 점차 확장됐고, 이 토대 위에서 여성들의 자기 서사는 저항 담론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됐다. 경험을 맥락화하는 과정을 통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가해자의 이름을 가리면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판에 박힌 듯한 크고 작은 성폭력 피해 사례를 통해 여성들은 고통의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는 깨달음과 치유의 순간을 만났다. 이 과정을 통해 연대할 수 있는 타인의 존재를 발견한 건 큰 수확이었다(<SNS 해시태그를 통해 본 여성들의 저항 실천> 김효인, 2017).

그해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진 광장의 촛불은 여성들의 것이기도 했다. 광장은 여성과 여성 정치인, 여성 대통령으로 환원된 혐오의 언어들이 뒤섞인 페미니스트 정치의 각축장으로 기능했다. 집회에서 여성혐오 발언을 한 사회자가 사과하고, 여성혐오 가사를 담은 노래로는 무대에 설 수 없었다. 촛불은, 탄핵이라는 ‘해일’이 밀려오는데 여성혐오라는 ‘조개’를 줍고 있던, 논란을 만들어낸 여성들의 목소리 덕분에 비로소 민주적일 수 있었다.

ⓒ시사IN 이명익
3월9일 성폭행 혐의를 받고 서울서부지검에 자진 출석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운데).
“어린 여자아이는 강력한 여성으로 돌아온다”

일련의 과정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더 이상 ‘예비 피해자’ 자리에 놓는 것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기존 성폭력 불안에 대처하는 여성 정책은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을 분리하며 공간 자체를 성별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는 그 ‘선한’ 의도와 관계없이 여성 전체를 통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대책으로 등장한 성별 분리 화장실이 대표적이다. 여성들은 ‘여성들만의’ 공간에서 안전하기보다, 모두가 안전한 공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선정적 보도는 물론이고 성폭력 사건에서 유책 사유를 여성에게 두는 기사에 대한 적극적인 아카이빙과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이 역시 성폭력 사건을 이용해 여성을 두려움에 옭아매고 스스로 검열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대는 배후 없이 나아가고 후퇴함을 반복하며 하나의 ‘정치적 기획’으로 작동했다. 미투 운동은 이 맥락에서 살펴야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 이들은 성폭력 반대 운동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 성폭력 통념을 극복하기 위해 앞장섰다. 지난 1월16일 미국 체조 대표팀 주치의로 여성 140명을 성추행·성폭행한 혐의를 받아 기소된 래리 나사르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카일 스티븐스의 말 그대로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려 돌아온다.”

거대한 미투 물결은 당연하다는 듯 백래시를 불러왔다. 방송인 김어준씨는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다스뵈이다>에서 “공작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첫째 섹스, 좋은 소재이고 주목도 높다. 둘째 진보적 가치가 있다. 피해자들을 준비시켜 진보 매체를 통해 등장시켜야겠다.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기회다’ 이렇게 사고가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미투 운동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피해자를 도구화하는 발언이라는 비판이 따랐다.

강간의 역사를 다룬 기념비적 책인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오월의봄, 2018)에서 저자 수전 브라운밀러는 “여성의 정치는 남성들이 좌우파 세력을 나눠온 전통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작동한다”라고 정의한다. “적이 강간을 하면 그 적이 얼마나 짐승 같은 자들인지 보여주는 증거가 되지만, 우리 편이 강간을 하면 그 사실을 화제로 꺼내는 행위가 정치적 협잡”이 되는 상황에서 강간은 ‘의혹의 영역’으로 강등되어 역사에서 배제되어왔다. “언제나 다른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강간 사건을 폭로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항상 존재하며, 이들은 진실 여부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전망에 따라 강간 사건을 판단”했음을 저자는 역사적 맥락에서 논증해나간다.

성폭력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하는 동안 이처럼 정치적인 계산을 하느라 바쁜 사회는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병가를 낸 채 검찰 진상조사에 응하고 있는 서지현 검사의 사무실은 무단으로 치워지고, 이름이 지워졌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김지은씨에 대한 외모 평가가 난무했고, 확인할 수 없는 인성에 대한 지라시가 돌며 ‘2차 가해’ 역시 이어졌다. 얼굴과 실명을 드러내지 못한 피해자들에게는 피해 여부 자체를 놓고 여론 재판이 벌어졌다.

남성 중심 네트워크는 여성들에게 ‘적폐’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2002년 미국 의회 전문지 <더 힐>과 한 인터뷰에서 “구설에 오를 수 있는 행동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아내 외 다른 여성들과 개인적인 교류나 접촉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한 이른바 ‘펜스 룰(Pence Rule)’이 엉뚱하게 미투 운동에 대한 남성들의 대처법으로 오르내리기도 했다. 성폭력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회식 등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일은 여성의 영역을 좁히는 또 다른 차별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인다. 펜스 룰은 일터의 권력이 남성에게 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무기’인 셈이다.

이러한 일상의 권력구조는 한 조직의 민주주의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남성 중심의 네트워크는 여성들에게 곧 ‘적폐’다. 정권 교체로 꺼진 듯 보였던 촛불은 젠더 문제로 옮아 2라운드를 예고하고 있다. 정치권력 교체를 열망했던 광장의 촛불은 사그라졌지만, 일상 권력의 분배를 요구하는 촛불은 어쩌면 이제 시작이다. 미투 운동 전선에서 사회가 이뤄야 할 진전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질을 결정하는 새로운 가늠자가 될 수 있다.

2002년 심리학자 데이비드 리색과 폴 M 밀러가 공동으로 쓴 논문 <들키지 않은 강간범들의 재범 및 중복범죄>는 기존 통념을 반박하며 성폭력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높인다. 이들은 1991~1998년 당시 매사추세츠 보스턴 대학 남학생 임의표본 1882명을 선정해, 자원한 이들을 대상으로 ‘아동기 경험과 성인기의 기능’을 연구 주제로 내걸고 조사를 진행했다. 술을 마시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는지 여부가 핵심이었다. ‘강간’이나 ‘공격’ 등 단어를 세심하게 피한 질문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성폭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추가 면담까지 마친 결과 이 ‘드러나지 않은 강간범’들은 자신이 한 행동이 강간이고 자신이 강간범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의 ‘남자다운’ 성적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왜냐면 그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복면을 하고 칼을 휘두르면서 여성을 덤불로 끌고 들어가는 것만이 강간범이라고 말입니다(<미줄라> 원더박스, 2017).”

이 연구가 보여주듯 성폭력은 일상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를 ‘괴물’로 묘사하는 것은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떨어뜨리고 해결을 방해할 뿐이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 채 저질러왔다. 그러는 동안 피해자는 지금도 고통받고 있다.

3월9일 서울서부지검에 자진 출석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성폭력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성실히 검찰 조사에 임하겠다”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일절 없었다. 같은 날 성폭력 혐의로 소환 조사를 앞두고 있던 배우 조민기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씨의 자살로 한편에서는 ‘미투 운동이 사람을 죽였다’라는 여론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야말로 1월29일 서지현 검사가 미투 운동에 동참하며 사회에 들려줬던 이야기를 다시 되새겨야 한다. “범죄 피해자분들께, 성폭력 피해자분들께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