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폭력의 숙주가 된 학교와 일터, 해법은?

일취월장7 2018. 2. 27. 12:19

폭력의 숙주가 된 학교와 일터, 해법은?

[서리풀 논평] 생활세계 또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위해
2018.02.26 16:40:39


한 대형병원에서 간호사가 목숨을 끊은 것을 계기로 '태움' 문화가 다시 관심사가 되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갈까? 모르긴 해도 조직문화에 대한 상식적 진단, 개인 탓이 아니라 구조적 요인이라는 지적, 국회에서의 법률 논의라는 '전형적' 경로로 갈 가능성이 크다. 그 끝은 늘 그렇듯 몇몇 당사자를 빼고는 유야무야가 아닐까?

그 전형적 해법 찾기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조직문화와 구조 요인에 대한 진단과 함께 문화와 규범을 바꾸는 정책과 관리가 당연히 필요하다. 문제는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따라서 금방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집요한 문제 제기와 지속적 실천이 필요함에도.  

의료계 안에 폭력과 학대가 만연해 있다는 뉴스는 새삼스럽지 않다. 간호사의 태움 문화나 전공의에 대한 폭력은 잊을 만하면 다시 드러나는 만성적 문제다. 심각성은 2015년 인권위와 보건의료노조가 조사한 결과에 잘 나타나 있다(☞관련 기사 : "간호사 태움 악습, 인성 문제 아닌 의료인력 부족 구조적 문제").  

"지난 12개월 동안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11.7%가 신체폭력을, 44.8%가 언어폭력을, 6.7%가 성희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자 전공의는 응답자의 14.5%가 신체폭력을, 55.2%가 언어폭력을, 16.7%가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한 것처럼 때 맞추어 발표된 대한간호협회의 조사결과도 큰 흐름이 비슷하다(☞관련 기사 : 간호협회, 간호사 법정인력기준 어긴 병원 대대적 고발 예고).  

"지난 12개월 동안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라고 응답한 비율이 40.9%에 달했고, 가장 최근에 괴롭힘을 가한 가해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직속상관인 간호사 및 프리셉터가 30.2%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동료간호사가 27.1%, 간호부서장이 13.3%, 의사가 8.3%로 직장 내 괴롭힘의 대부분이 병원관계자로부터 발생하고 있었다."

현상이 이렇고 그것이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면, 이제 원인 특히 근본 원인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그중 한 가지, 인력 부족과 장시간 노동은 따로 근거를 댈 필요도 없이 가까운 기억을 되살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의사든 간호사든 또는 그 어떤 인력이든, 그 어느 직장과 조직이든, 심지어 태움과 폭력이 있든 없든, 인력과 노동시간 등의 구조적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노동 '착취'는 건강을 해치고 삶을 빼앗으며 결국 생명을 파괴한다.

우리는 인력 부족이나 장시간 노동과 함께 또 다른 구조로서 '신자유주의적 병원'에 주목한다. 성과와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이 병원에서 모든 노동자는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따라 행동한다. 원자화된 개인주의자, 그리고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이로써 인간관계의 친밀함, 공동체적 유대, 진지하고 성실한 인간관계, 장기간의 헌신 같은 가치는 어울리지 않는다.  

적은 인력으로 일을 빨리 마쳐야 제때 퇴근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일을 제대로 못 하는 신입 직원은 무엇이 될까? 이들은 '후배'나 '동료'가 아니라 내 '경쟁력'을 훼손하는 (비인간화한) 노동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부하 직원은 내 성장의 토대가 되는 '인적 자본'으로, 따라서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물화'되고 소외된다. 태움과 학대,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병원에서 태움과 폭력 인권 침해를 없애는 데 구조는 시작이고 기본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어디 병원만 그렇던가. 모든 직장과 모든 노동은 구조이면서 또한 그 안에 속한 주체들이 빚어내는 '주관성'과 '상호주관성'의 세계다. 사람을 대상으로 노동하는 곳일수록 인간관계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복잡하고 중요할수록 '문화'는 사건과 경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구조이다.  

의료기관과 의료직의 폭력적 위계 문화는 완강한 구조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여러 이유 가운데서도 생명을 다루는 직종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자 명분이다. 생명을 이유로 반(反)-생명을 용인하는 역설이라니.  

문화는 시간과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생성되는 권력이다. 의료전문직의 문화와 이에서 비롯된 행동은 하루아침에 그리고 독립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다른 직종과 달리 의료직의 '사회화' 과정에는 대학이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 그런데, 그 대학부터 형편이 이렇다.

"한 사립대학 간호학과에서 선배들이 신입생의 군기를 잡는 강압적인 내용이 담긴 문자메시지를 발송해 (…) 메시지에는 신입생이 지켜야 할 10개 항목이 상세히 적혀 있다. 해당 문자에서 신입생은 도서관 외에는 엘리베이터 탑승이 금지된다. 계단을 이용해 다녀야 한다. 밝은색 머리 염색과 트레이닝복, 슬리퍼 착용도 금지다."(☞관련 기사 : "신입생은 엘리베이터 금지"…간호학과 신입생 공지사항 10개 내용은?) 

"저녁 9시, OO향우회 4학년생 A·B 두 명이 예과·본과 1·2학년 남학생 약 10명을 소집해 가혹행위를 했다. (…) 2학년생 한 명이 식당 앞에서 A를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은 게 발단이 됐다. (…) 평소에도 2학년 행동에 불만이 많았다."(☞관련 기사 : "인사 안해? 머리 박아" K대 의대 똥군기 고발) 

보건의료계열 대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상당수 대학이 이와 비슷한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 보편적인 문제일수록 심층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고가 나고 말썽이 생겨도 그때뿐, 완강하게 지속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하나의 토대 또는 구조라 해야 할 것 같다.  

토대와 구조의 한 가지 연원을 한국 사회의 폭력성에서 찾는 시각은 설득력이 있다(☞관련 기사 : 어떤 여대생들이 모텔에서 자는 이유).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하나의 '병영'이 되었고, 억압과 복종, 지배와 순응이 자연스럽게 내면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학교는 역사적 폭력과 내면의 폭력을 '물화'하는 공간이자 매개다. 이런 맥락에서 학교 구조가 직업과 직장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분야가 폭력에 더 취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폭력문화와 신자유주의적 구조가 만난 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답답한 상황의 원인이다. 다시 말하지만, 병원이나 의료기관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한국의 수많은 직장에서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는 괴롭힘은 보편적 토대 위에 있다.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해결 방법도 다르다. 우리는 법이나 지침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관료주의적) 발상으로 문제를 줄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사회적 문제를 지금 이 자리(병원, 의료, 의료직)에서 해소하겠다는 대책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보편과 토대에 접근하지 않으면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신자유주의적 병원의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이는 다른 기회에 다시 말하기로 한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 폭력성과 이를 물화하는 사회화 과정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문제를 다시 꺼내 들 수밖에 없다. 특히 '생활세계'의 민주주의를 계발하고 강화하는 것 이외에 마땅한 해답을 생각하기 어렵다.  

노파심에서 말하면, 여기서 생활세계의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이나 구조를 벗어나 일상과 개인의 실천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굳어진 학술용어에 연연하지 말자). 그보다는 권력구조를 목표로 하되 거기에 가 닿을 수 있는 '체화된 실천'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생활세계에서 실천하고 실현하는 민주주의는 더 좋은 구조를 만드는 토대가 되고, 새로운 구조는 다시 실천을 촉발하고 증진한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이나 학생회는 생활세계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좋은 노동조합과 학생회는 다시 직장과 학교의 생활세계를 더 넓고 깊게 민주화한다.  

범위를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직장과 학교의 경계를 넘어 '체제'를 재구성하는 원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앞서 미뤄 놓았던 과제, 신자유주의적 병원과 작업장을 바꾸는 것 또한 민주주의 강화와 무관하지 않다. 



어떤 여대생들이 모텔에서 자는 이유

[정희준의 어퍼컷] 대학폭력, 그리고 즐기는 교수들


최근 대학의 선후배 간 군기잡기와 폭력문화가 논란이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대학만 열 개에 가까운데 체육 관련 학과 외에도 연극영화과, 간호학과, 무용학과에서도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예 문서화 되어 신입생들에게 전달된 지침들을 보면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선배를 보면 달려가서 여학생들도 90도 조폭인사를 해야 하고 커피는 숨어서 마셔야 한다. 휴대폰 통화도 안 되고 대학생인데도 이름표를 학교 밖 전철역까지 붙이고 다녀야 한다. 


이어폰, 모자, 파마, 화장도 금지하고 시계 외엔 악세사리도 안 된다는데 특히 황당한 사실은 머리가 원래 갈색인 학생들은 검정색으로 염색을 해야 한단다. 나아가 학교 밖 생활까지 통제한다. ‘신입생 아르바이트 금지’ 규정은 아무 때나 집합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 신입생들은 분명 외국어학원조차 다닐 수 없을 것이다. 또 어느 학교에서는 새벽 집합 때문에 집이 먼 여학생들은 학교 앞 모텔에서 단체로 잠을 자기도 한단다. 이게 과연 대학인가.

내가 재직 중인 학교에도 현재 집합이 없지 않은데 과거엔 이러한 군기잡기가 심했었다. 사실 2000년 처음 부임했을 때는 충격 그 자체였다. 학생회 임원들과 토론도 하고 혼도 내가며 설득한 덕에 과거에 비해 많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사이 나는 학생회 임원들에겐 가장 나쁜 교수, 학생회 행사를 방해하는 악명 높은 교수가 됐다.

조폭조차 숨어서 하는 짓을… 

사실 대학교에서의 폭력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2008년 용인의 어느 대학 무예학과의 신입생이 입학도 하지 않았는데 훈련 중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2007년엔 전북의 모 대학 스포츠과학과 신입생들은 수많은 사람과 차가 다니는 학교 정문에서 대낮에 팬티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조폭조차 자신들의 행위가 부끄러워 숨어서 하는 법인데 이들 대학생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후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학생들은 그 이유를 여럿 내세운다. 그게 있어야 학교가 제대로 돌아가고 선후배 간 끈끈해지고 예의가 바르게 되며 졸업 후 사회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어느 것 하나 맞는 게 없다.  

학교를 돌아가게 하는 것은 교수와 직원들이지 공부해야 할 학생들이 아니다. 때리는 놈들끼리는 끈끈해질지 모르겠지만 당한 학생들은 끈끈해지기는커녕 졸업 후에는 치를 떤다. 예의는 그런 주장을 하는 녀석들이나 잘 지켰으면 한다. 직장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실력이지 조폭인사가 아니다. 보통 무능한 사람이 인사 열심히 하고 다닌다.

일부 체육학과 학생들은 ‘학과의 특성상’ 단체기합이 필요하다고 강변한다.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체육학 공부하는데 기합을 받고 맞아야 할 이유는 없다. 혹시 외국에 그런 나라가 있나? 없다. 그리고 체육학과생들은 무용, 연극영화처럼 집단이 모여 공연을 하거나 무대세트 작업을 하지도 않고, 의대, 간호학과처럼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학과 특성 주장하는 것도 결국 때리기 위한 합리화일 뿐이다. 

대학 폭력의 기원 

참으로 괴이한 문화다. 그러나 어떤 현상이든 원인은 있게 마련이다. 첫째 이유는 한국사회의 폭력성이다. 대한민국이 근대기에 접어든 20세기는 폭력의 세기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지배방식도 폭력이었고 저항의 방식도 폭력이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은 폭력의 정수였다. 이승만 정권을 거쳐 박정희로부터 시작된 군사독재 시절 역시 지배와 저항 모두 폭력이었다. 결국 한국의 근대를 가로지르는 핵심은 폭력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는 하나의 병영이었다. 억압과 지배, 순응과 복종이 내면화 됐고 우리는 폭력에 서서히, 그리고 깊게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폭력’을 ‘지금의 폭력’으로 현실화하고 동시에 ‘내면의 폭력’을 ‘폭력행위’로 구체화 한 주체가 있으니 바로 둘째 이유인 학교에서의 폭력이다.

물론 학교 이전에 또 다른 폭력공간으로 가정이 있고 가정폭력이 발휘하는 심대한 악영향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가정은 사적 공간이다. 따라서 학교라는 공적 공간에서 교사라는 직업집단에 의해 어린 아이들에게 행해지는 폭력의 문제는 한국사회의 폭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지난 주 칼럼에서 지적했듯 교사들에 의한 학교폭력은 아직도 전국적인 현상이다. 우리 세대 뿐 아니라 지금 젊은이들도 교사들의 ‘이유 없는 폭력’을 몸으로 감당하며 성장해야 했다. 교육기관에서 행해지는 (교육을 빙자한) 체벌, 즉 구타와 가혹행위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  

우선 훈육을 담당하는 교련교사나 체육교사들이 조회를 치를 때나 각종 행사를 준비하며 행하는 공개적인 폭력이 있다. 동시에 교실 내에서 담임선생 등이 행하는 일상적 폭력이 있다. 학교 폭력은 온갖 언어폭력, 구타, 얼차려를 망라한다. 그런데 지난 주 칼럼에서 밝혔듯 교사들의 스스럼없는 폭력은 조직적이기까지 한데다 ‘폭력의 효율성’에 중독된 교사들은 그 습속을 떼어 내기가 쉽지 않다. 결국 초중고교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청소년들은 억압과 지배, 순응과 복종 뿐 아니라 교육 공간에서의 폭력을 스스로 경험하며 이를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규정’이 폭력이다 

학교 폭력의 메커니즘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규율 또는 규정 자체가 폭력이라는 점이다. 교사가 학생들을 때리고 가혹행위를 하고 기합을 주는 근거는 바로 정해놓은 규정을 어겼을 때이다. 즉 규정을 들어 자신들의 폭력을 합리화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실수하는 것은 밥 먹고 똥 싸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교사들은 온갖 규율을 만들어 놓고 이를 어겼다며 폭력을 행사한다. 규정이 바로 폭력의 합리화 장치인 것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학 신입생에게 강요되는 규정이 바로 그것들이다.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대학생들이 선배들로부터 강요당하는 행동규정, 복장규정은 모두 청소년기에 교사들로부터 ‘당했던’ 바로 그것들이다. 인사 똑바로 안 했다고, 대답 크게 안 했다고, 말 했다고, 이름표 안 달았다고, 지각했다고, 눈 떴다고 기합 받고 맞지 않았던가. 

문제가 된 복장 규정도 중고등학교에서 강제로 시행하며 그걸 빌미로 교사들이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과 어쩜 그렇게 똑 같은가. 겨울에 외투도 검은색 파커로 통일해야 하고 신발도 검은색이어야 하고 심지어는 신발끈까지 검은색이어야 한다. 어떤 학교는 한겨울에도 교복만 입어야 한다. 그 추운 날 외투조차 못 입게 하는 것이다. 내 아들 학교는 검정색 외투만 허락한다고 해서 급하게 수십만원 주고 파커를 사야했다. 돈도 없는데 그놈의 복장규정 때문에 신용카드로 빚내서 샀다. 

이렇듯 태어나서부터 폭력에 물든 학교만 다닌 아이들이 드디어 대학에 갔다. 그런데 대학은 ‘신세계’였다. 폭력의 주체였던 교사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갑자기 맞이한 폭력의 공백이다. 그러나 이들은 폭력에 더 익숙한 아이들이다. 곧 선후배라는 위계를 만들어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배운 대로 실행에 옮긴다. 규정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후배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조폭인사를 마구 받는다. 기합도 주고 때리기도 한다. 짜릿하다. 이게 바로 권력이다.  

▲ 폭력에 물든 학교만 다닌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해 또 다른 폭력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 연합뉴스



폭력을 즐기고 있는 교수들 

언급했듯 이러한 폭력문화는 체육 관련 학과 뿐 아니라 무용학, 연극영화학, 의학, 간호학 등 전공이나 직업의 특성이 집단성이 강조되는 학과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전혀 없는 인문사회계열의 학과에서도 매년 오리엔테이션이나 엠티 때면 선배들의 강압으로 인해 원치 않는 얼차려를 하게 되고 음주 강요로 인해 사망사고가 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체화된 폭력과 복종이 이런 비극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계에 의한 폭력문화가 체육학 등 몇몇 학과에서만 유난히 두드러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 캠퍼스 내에서 버젓이, 공개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대학 폭력문화의 결정적 이유 세 번째는 바로 이러한 폭력적 위계질서를 즐기는 교수들 때문이다. 아이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아무리 폭력에 길들여져 대학에 왔어도 교수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조직폭력’은 생겨날 수 없다. 체육학과 내 폭력이 군대나 운동부보다도 더 센 것은 교수들의 용인, 심지어는 조장 없이는 설명하기 힘들다.

일례로 몇 년 전 경기도에 있는 모 대학 체육대학의 얼차려가 최초로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 찾아간 기자에게 체육대학장이 한 말이 가관이다. 자랑스러운 전통이기 때문에 자신이 학장으로 있는 한 얼차려 집합은 계속될 것이라고. 그 학교에 재직한 바 있는 박노자 교수가 이 학교의 난감한 캠퍼스 풍경을 묘사한 바 있다. 

"필자는 국내에서 굴지의 체육대학이 있는 곳에서 근무했었는데, 점심 먹을 때마다 체대 학생들과 마주쳤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살아온 러시아의 문화도 민주적이지 않았지만 식당에 열을 지어 ‘행군’해서 들어오고 선후배 순서대로 차례로 앉고 교수가 나타나자마자 일제히 일어났다가 일렬 전체로 착석하는 체대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폭력교육, 바꿀 수 없는가 

이 어처구니없는 대학 폭력문화는 한국사회의 폭력성, 초중등학교 교사들의 폭력, 그리고 교수들의 조장이라는 삼위일체가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지난 수년 간 문제가 되었음에도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은 바로 폭력에 대한 대학 당국의 무관심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듯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는 교육기관 전체가 폭력을 용인하고 조장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결국 한국의 교육은 언어폭력은 물론 신체적 폭력에 가학행위까지 익힌 수많은 졸업생들을 사회를 향해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따끔하게 가르치고 필요하면 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문화의 뿌리는 지금 일을 벌이고 있는 아이들 보다는 이전 세대에게 있다. 이 아이들만 조롱할 게 아니라 우리도 뭔가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먼저 아이들에게 손대지 말아야할 것이고 다음으론 예쁜 말을 써야 할 것이다. 언어는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다. ‘놈’, ‘새끼’, ‘자식’은 교육자가 학생에게 쓸 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