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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미안하고 고마운 영화 - 신파로 버무려진 <신과 함께 : 죄와 벌>

일취월장7 2018. 1. 3. 11:49

[1987], 미안하고 고마운 영화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webmaster@sisain.co.kr 2017년 12월 28일 목요일 제536호                       

구호 좀 외쳐봤다. 최루 가스 좀 맡아봤다. 백골단에 쫓기거나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 이른바 ‘문민정부’ 시절에 대학을 다녔는데도 그랬다. 당시 학교에는 “데모 좀 해봤다”라는 선배들로 넘쳐났다. 졸업한 뒤 나 역시 “데모 좀 해봤다”라고 떠벌리는 축이었다. 위험은 부풀리고 활약은 과장하기 일쑤였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시대였다. 군사정권 때든 문민정부 때든, 호기심 때문에라도 다들 한두 번은 슬쩍 시위 대열의 끝자락에 서보던 시절이니까, 우리의 20세기는.

그런데 영화 <1987>은 1987년의 서울로 관객을 데려가면서, “데모 좀 해봤다”고 자랑 한번 못해본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훗날’을 맞이하지도 못한 채, ‘왕년’을 추억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영원히 1987년의 겨울에 갇힌 사람. 박종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스물두 살 대학생.

1987년 1월14일, 응급처치를 위해 다급하게 불려온 의사의 겁에 질린 얼굴이 영화의 첫 장면이다. 사인을 감추려고 서둘러 화장을 시도하는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석)과 졸개들이 다음 장면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가 부검을 명령하면서 계획이 틀어진다. ‘은폐’에 실패하자 ‘조작’으로 방향을 바꾼 경찰.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표가 나온 게 이때다. 또 하나의 진실을 감추는 데 성공했다고 그들은 자신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기만 입 다물면 그만인데도 기어코 입을 여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나타난다. 자기가 다칠 걸 알면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행동이 이어진다. 시신에 남은 고문 흔적을 기자에게 몰래 귀띔한 의사, 보도 지침을 어기고 그 내용을 기사로 쓴 기자(이희준), 그 기사를 지면에 싣기로 결정한 데스크(고창석), 잡혀온 고문 경찰관들이 털어놓은 숨은 공범의 존재를 밖으로 알린 교도관(유해진)…. 그렇게 수많은 개인들이 제 몫의 위험을 감수한 뒤, 자주 이런 대사를 한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집니다.”


바위를 향해 줄지어 몸을 날린 계란들
영화 또한 스타를 대거 캐스팅한 뒤 대부분 순차적으로 등장시킨다. 배우들은 마치 계주를 하듯 이야기의 바통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고 빠진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집니다, 여기서부터는 당신이 해주세요’라는, 작지만 단단한 결심으로 거대한 바위를 향해 줄지어 제 몸을 날리는 수많은 계란들의 아름다운 릴레이. 그대로 ‘1987년 6월 항쟁’까지 달려간다. 박종철로 시작해 이한열로 맺는다. 도저히 울지 않을 재간이 없는 영화다. 그들이 죽었기에 내가 죽을 위험을 면한 주제에, 감히 “데모 좀 해봤다”고 떠벌린 지난날이 부끄러워서 혼났다.

1987년.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었고 누군가는 실제로 목숨을 빼앗겼다. 그들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뜨거웠던 청춘의 후일담’을 얻었지만, 정작 그들의 청춘은 차가운 영안실에서 끝장났다. 그날이 오면, ‘그날’을 만끽할 자격이 누구보다 충분한 이들이었지만 한순간도 ‘그날’의 공기를 마셔보지 못하고 묻혔다. 이 미안하고 고마운 역사를 영화로 처음 기억하기까지 꼬박 30년 걸렸다. <1987>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바통을 이어받아 그 시대를 그려낼 다음 영화를 나는 벌써부터 기다린다.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1987>

[기고] 대한민국은 '시민 항쟁'이 만들었다
2017.12.28 17:43:35 
    

(이 글은 영화 <1987>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을 보는 시간은 무참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발생과 박 처장(김윤석 분)으로 대표되는 야만적 국가권력의 사건 은폐 및 축소 시도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자 했다. 또 이를 시민들에게 알리려는 다양한 사람들의 분투 및 고난과 마침내 광명천지에 드러난 전두환 정권의 악마성에 분노한 주권자들의 항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인 전두환은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사람답게 공권력에 악마적 야수성을 부여했다. (전두환을 수괴로 하며 12.12군사반란의 몸통인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의 후견인이 박정희였고, 전두환과 하나회가 군부요직에 포진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도 박정희였다. 즉 박정희가 없었다면 하나회도, 12.12군사반란도, 광주학살도, 전두환 정권도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의 철권통치 아래서 기본권은 헌법전 속에서나 찾을 수 있었고, 국가와 시민들은 정권을 위해 존재했다. 공권력의 폭력 앞에 사람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는 것도 피했고, 숨 죽여 말했다. 독재자를 축출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일은 너무나 아득해 보였다.

그때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가 있었다. 20대 초반의 꽃다운 청년 박종철 열사는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물고문을 당하다 숨진다. 도주 중인 선배의 행방을 말하라는 경관들의 강압에 불응한 대가는 고문과 죽음이었다.  

박 처장은 박 열사의 사체를 태연히 "태우라"고 지시하는 악마적 인간인데 박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는데 광적으로 매달린다. 빨갱이에 대해 사무치는 증오와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박 처장은,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빨갱이로 간주하고 핍박한다. 빨갱이라면 이를 다글 다글가는 박 처장이 잡은 빨갱이 중에 정말 빨갱이(폭력적 사회주의자, 남파간첩 등)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박 처장과 안기부장(문성근 분)으로 상징되는 공권력의 고문치사 은폐 및 조작에 맞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직업적 양심과 정의감으로 무장한 채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폭로하려 분투한다. 대검의 최 검사(하정우 분)는 박종철 열사의 시신을 부검 없이 화장하려는 경찰에 맞서 부검을 관철하고, 박종철 열사의 상태를 처음 확인한 중앙대 병원 의사는 기자에게 박 열사가 고문치사에 의해 사망했다는 정황을 넌지시 알려주며, 박 열사의 시신을 부검한 부검의는 전두환 정권이 원하는 사인인 심장마비가 아니라 고문치사에 의한 사망임을 밝히고, 윤 기자(이희준 분)는 고문치사 사실을 지면화하며, 한병용 교도관(유해진 분)은 목숨을 걸고 고문치사 은폐 및 축소 사실을 재야에 알리고, 이부영(김의성 분)과 김정남(설경구 분)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감옥 안과 밖에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은폐 및 조작의 실체적 진실을 폭로한다. 이쯤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리고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가 있다. 피기도 전에 고문과 최루탄에 의해 숨진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삶과 죽음은 너무나 빛나고 아름다워 오히려 처연하다.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드는데 하나 뿐인 생명을 던진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 덕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 장준환 감독이 강동원을 이한열 열사역에 캐스팅하고, 여진구를 박종철 열사역에 캐스팅한 건 영원히 빛날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아름다움을 시각화하기에 강동원과 여진구가 적임이라고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87년 6월 항쟁의 산물이며, 6월 항쟁을 발전적으로 지양한 촛불혁명의 아들이다. 이명박과 박근혜로 상징되는 야만과 퇴행을 경험한 우리들은 다시는 그런 역사를 반복해선 안 된다. 우리가 다시 찾은 민주공화국과 기본권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그걸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인생이 바쳐졌는지를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냉소하다 역사와 대의가 결집한 시청광장에 합류한 연희(김태리 분)처럼 우리도 정치적 인간, 생각하는 주권자로 진화해야 하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은폐 및 조작을 폭로하는데 힘을 모은 온갖 직업과 다양한 지향을 가진 사람들처럼 우리도 차이를 넘어 손을 맞잡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더 확장해야 하고 단단히 만들어야 한다. 확장되고 단단해진 우리가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고 기본권을 실질화해야 한다.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1987>을 보길 바란다. 3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고, 선이 어떻게 악을 물리쳤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헌신과 희생이 있었는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1987>, 후배 순영이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기고] 1987년, 기억나는 것들과 기억해야 할 것들

 후배 순영이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영화 <1987>이 화제다. 페이스북 등 SNS에 관람평이 쏟아지고 있다.

나 역시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둔 지난해 26일, 시사회에서 영화 <1987>을 봤다.
지난 한 해 6월민주항쟁 30년사업추진위원회 일을 거들면서 많은 행사 준비, 진행에도 참여했지만, 정작 나는 1987년 6월에 거리에 나서본 적이 없다.

1986년 초에 터진 조직 사건으로 수배 중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소위 '위장 취업'으로 서울 성수동의 모 철공소(당시에는 흔히 '마찌꼬바'라고 했다)에서 기름밥 먹고 있을 때라서 평일 낮엔 거리에 나갈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 6월의 직접적인 기억이랄까 추억은 그닥 없지만, 영화에도 등장하듯 가두시위와 백골단과의 쫓고 쫓기는 급박한 달음질 경험이야 그 전에도 익숙했던 것이니 만큼 감정이입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다 같이 1980년대 거리의 경험을 공유하는 세대끼리도, 의식이나 경험에서 1980년대 전반 세대와 후반 세대는 또 차이가 있다. 

80, 81, 82 학번으로 이어지는 세대는 엄혹했던 전두환 독재의 공포정치를 몸으로 체험했다면, 상대적으로 85, 86 학번 이후 세대는 소위 '유화국면'의 연장선에서, 그리고 한편으로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민족해방 노선'(NL)의 영향으로 운동권 문화도 조금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내가 속한 80년대 초 학번 세대는 4학년만 되면 시위를 주동하고 학교를 정리(제적)하는 게 당연시되는 분위기였고, 농담으로 후배들이 "형은 언제 나가요?"하고 은근히 압박 아닌 압박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에 비하면 1980년대 후반 전대협과 한총련을 거치면서 학생운동 지도부가 졸업하지 않은 채로 말하자면 5학년, 6학년이 되어 여전히 학생운동 지도부를 맡는 식의 시스템은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간간이 접하는 '의장님'에 대한 예우를 강조하는 문화는 솔직히 거부감도 들어서 과연 내가 그 시대에 학교를 다녔다면 어땠을지 쉽게 상상이 되질 않았다. 

광주학살로 국민을 죽이고 집권한 전두환 군사독재의 야만성, 잔악무도한 공포정치 속에 사회적으도 '재야'라고 불리는 일군의 양심적 지식인들 외에는 노동운동도, 그 어떤 사회운동도 유의미한 정치적 저항세력이 되지 못하던 시절에, 학생운동의 지향은 사회주의 혁명 외에는 달리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연장선에서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든 제적이 되든) 마치고 노동운동으로 '존재 이전'을 통해 혁명의 주력으로서 노동자들을 각성시키고 조직화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래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든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은 전혀 없이, 오직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어떻게 하면 '학생'이라는 특수한 사회계급적 존재로서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이 언제든 혁명적 노동자로서의 계급성이 아니라 기회주의적 프티 부르주아인 지식계층으로 변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당시 우리의 고민이자 토론 주제였다.


그 실천은 당연히 합법적 공간에서는 불가능했고 학생운동의 주력은 비합법 지하조직이었으며, 소위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 현장으로 존재를 이전해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지하전위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순수하지만 한편으로 순진하기도 했던 열정은 당연히 노회하고 악랄한 공안권력의 표적이 됐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고문 당하고 감옥살이를 했다. 일부는 자신을 희생하거나 희생 당함으로써 열사가 됐다.

1987년을 전후한 그 시대의 비극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흔히 누군가를 극도로 증오하면 상대를 닮게 된다던가. 그 시절의 (학생)운동을 평가하면서 '군사독재와 싸우는 과정에서 군사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조차도 당시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아니, 교정에 일반 학생들과 구분하기 어려운 사복전경들이 우글대고, 심지어 학생들 중에도 경찰의 프락치가 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운동권의 보안의식과 경직성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 선택이었다. 언제 경찰에게 잡혀가서 (박종철 열사가 선배의 은신처를 불도록 고문 당했듯이) 동료를 배신하도록 고문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상적 공포는 영화에서도 담아낼 수 없는, 그 시대 운동권 학생들만의 특유한 경험이자 원초적 의식이었다.

그 시대의 또 다른 비극은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쫓아 사회로 나갔으면 훌륭한 자기 역할을 했을 사람들이, 이 흐름 속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을 스스로 선택해서 적응하지 못하고 '희생'된 사례들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위장취업할 때, 보통은 팀을 짜서 이미 노동운동에 진출해 있는 선배의 지도를 받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물론 개별적 결단으로 홀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선배의 지도 없이 동료들끼리 팀을 짜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를 흔히 '이전팀', 혹은 약자로 '이전티(T)'라고 불렀다. 


개인적으로 내가 담당했던 어떤 후배들의 이전팀에서, 봉제공장에 취직한 여자 후배가 있었다. 똑똑하고 착한 심성의 후배였지만 마음이 모질지 못하고 여렸고, 무엇보다 손이 느렸다.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신분증을 위조해 위장취업했기에 실제로는 자기보다 훨씬 어린 여성 노동자들 밑에서 '시다'로 일하면서, 공장에서 이 후배의 이름은 위조된 신분의 '아무개'라는 이름조차 아닌 '바보'로 불렸다. 


"바보야 이거이거 해, 바보야 이것도 못 하니? 바보야 이 멍청아!"

 어린 선배들보다 실제로는 더 많은 지식을 쌓았고 심지어 더 성실하다는 것으로도 이 간극은 애당초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비유하자면,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던 셈이라고나 할까. 
후배의 스트레스는 공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전팀은 함께 모여서 합숙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힘들게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팀원들이 모여 하루 한 일을 보고하고 평가하는 자리를 가졌다.

현장에 잘 적응해 다른 노동자들과도 친분을 쌓는 경우는 칭찬의 대상이 됐지만, 이 후배는 사실 나를 포함한 팀의 골칫거리였다. 


당시의 엄혹하고 치열한 분위기에서, 이 후배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는 애당초 존재할 수 없었다. 평가회 때마다 후배는 팀원들의 단골 비판 대상이 되었고, 나 역시 한편으로 안타까워하기는 했지만 안타까움만으로는 후배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었다.
결국 후배는 적응하지 못하고 팀을, 그리고 노동현장을 떠났고, 그 뒤로 전혀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참담한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죽음에는 당연히 우리의 책임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시대가, 독재정권의 잔혹한 탄압이, 그것들만이 그녀의 죽음에 모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런 비극적 사례는 다소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꼭 이런 사례까지는 아니라도 결국 운동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증이나 어쨌든 후유증으로 고통 받은 사례들을 내 주변에서도 여럿 알고 있다. 아니, 아마도 그 시절에 나름 치열하게 운동했다는 사람들 모두가 주변에 그런 사례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미워졌다"는 구절에서 항상 감정이입으로 마음이 먹먹하게 무거워진다. 

영화 1987을 보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참기 힘들게 아팠던 이유는 단지 영화 속에 그려지는 상황, 사건들에 대한 단순한 감정이입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동시에 같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그 많은 희생들, 피해자들. 

나는 운이 좋게 살아남아 지금까지 운동을 하고 있다는 죄송함. 그리고 지금까지도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수구 적폐세력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 


차마 글로 표현하기 힘든 그 복잡다단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화 <1987>을 보는 내내 영화의 스토리, 완성도와 무관하게 나는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사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정말이지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이런 류의 영화나 영상물을 볼 때마다 겪었던 감정이고, 그래서 광주항쟁을 그린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됐을 때도 한편으로 보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이 없어서 지금까지도 보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때 다들 진도에, 팽목항에 내려갈 때도 정말이지 가서 어떤 기분이 들지 자신할 수 없어서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몇 달이 지나서야 단체 방문에 끼어서 다녀왔던 기억이랄까. 

그래도 이젠 어느 정도 좀 적응이 돼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볼 때도 살짝 그런 '더러운'(달리 뭐라고 해야 할지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질 않는다) 기분을 느끼긴 했지만 나름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영화 <1987>을 보면서는 아예 정면으로 그 기분이 나를 덮쳐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괴로웠고, 정신적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늦었지만, 애꿎게 희생된 후배의 이름을 불러본다. 
누군가는 그녀를 기억해줘야 하기 때문에.
순영아,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지내고 있기를. 


"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천만관객 한국영화'? 오히려 퇴보하고 있지 않나
[김경욱의 데자뷔] 신파로 버무려진 <신과 함께 : 죄와 벌>
2017.12.28 14:40:15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신과 함께>를 보고나서, '쌍천만 감독'으로 불리는 흥행의 귀재 윤제균의 말이 떠올랐다. <해운대> 시나리오를 컨설팅 하는 자리에서 그는 "쓰나미 전에 관객들을 웃기다가 쓰나미가 몰려오고 인물들이 죽어나가면서 관객을 울리면 됩니다. 그렇게 웃고 울리면 관객들은 만족스럽게 극장 문을 나서게 될 것이고, 그러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고 자신했다. 반신반의 했지만, <신과 함께>까지는 맞는 말인 것 같다. 특히 신파를 동원해 최대한 관객을 울릴 수 있으면, 흥행은 떼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 13편 가운데 세 편(<국제시장> <7번방의 선물> <해운대>)은 그것을 증명해준다. 나머지 흥행작들 중에도 신파적 요소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평생을 바친 남자(<국제시장>), 어린 딸을 위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채 사형당하는 장애인 아버지(<7번방의 선물>), 쓰나미가 몰려와 차례로 죽어가는 인물들(<해운대>). 그들의 안타까운 처지와 비극을 최대한 증폭시키는 장면을 접하면, 울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저승편', '이승편', '신화편'으로 구성된 주호민의 만화 <신과 함께>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각색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승편'을 예로 들면, 저승과 이승을 오가며 두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다채로운 저승세계와 다양한 인물들이 출몰한다. 김용화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저승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보다 각색이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순제작비 175억 원(후편까지 합하면 350억 원)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관객 600만 명. 한국영화 흥행의 또 다른 보증수표가 스펙터클이라면, CG를 통해 지옥의 풍경을 구현해내면 볼거리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 많은 관객을 동원하려면, 스펙터클만으로는 부족하다. 김용화 감독은 <국가대표>를 통해 관객을 울리고 흥행에도 성공한 경험이 있으니 신파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 영화 <신과 함께> 스틸컷.


원작에서, '저승편'의 주인공 김자홍은 회사원이다. 그는 탈모가 될 정도로 직장에서 고생하다 업무상 억지로 마시던 술로 병을 얻어 39살에 결혼도 못하고 죽음에 이른다. 그가 특별히 나쁜 죄를 지은 적 없는 평범한 인물이라 해도 죄를 촘촘하게 찾아내는 지옥의 관문을 통과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국선변호사 진기한의 유능하고 헌신적인 변호 덕분에, 김자홍은 49일 동안 7개의 지옥을 무사히 통과해 환생하게 된다. 김자홍의 이야기가 저승에서 전개된다면, 억울하게 죽어 원귀가 된 유성연 병장의 이야기는 이승에서 펼쳐진다. 

영화는 김자홍의 이야기는 원작과 완전히 다르게 바꾸고, 유성연의 이야기는 거의 그대로 각색했다. 김자홍은 소방관이며, 불을 끄던 중에 아이를 구하려다 사망한다. 김자홍과 일면식도 없던 유성연은 영화에서 동생 수홍으로 설정된다. 그는 군대에서 복무하다 관심사병 원동연의 실수로 총에 맞는다. 김자홍의 49제가 끝나기도 전에 동생이 죽은 것이다. 형제가 젊은 나이에 잇따라 세상을 떠난 것도 기가 막힌데, 혼자 남게 된 그들의 늙은 어머니는 말을 못하는 장애인이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남편 없이 온갖 고생을 감내하며 키운 자식들을 한꺼번에 다 잃은 것이다. 이 정도 설정으로는 관객의 눈물을 짜내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김자홍은 더욱 비극적인 인물로 설정된다.  

김자홍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어머니는 치료가 어려운 중병에 시달리고 동생은 영양실조에 걸린다. 그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동생과 함께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고 했지만, 동생에게 들키는 바람에 실패한다. 그 후 그는 가출을 하고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집에 오지 않는다. 대신 낮에는 소방대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도 쉬지 못하고 번 돈을 어머니와 동생의 생계를 위해 쓴다(어떤 방법으로 돈을 전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자홍은 단 한순간도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다가 결국 남을 구하고 죽은 가련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의 가족은 여전히 가난한 상태이며, 동생은 고시에 매달린다. 영화의 시대배경은 1970~1980년대가 아니라 2016년이다.

신파를 극대화하기 위해, 원작의 지옥도 많이 변형했다. 원작은 '불교의 저승시왕(죽은 자를 심판하는 열 명의 왕)과 열개의 지옥'에 근거해, 망자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49제 같은 전통 의식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이야기의 설정에 따라 편의대로 지옥의 순서를 바꾸고 지옥명도 바꿔버렸다. 어머니와 아들의 신파를 클라이맥스에 배치하기 위해, 3번째 송제대왕의 한빙지옥을 7번째 염라대왕의 천륜지옥으로 바꾸는 식이다. 

천륜지옥에서 김자홍은 어머니가 아들의 행위를 알아챘으면서도 의식이 없는 척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들이 집을 나가는 건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신을 죽이려는 아들을 방치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는 차라리 병든 자신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어머니, 죽어서 그 사실을 알게 되는 큰 아들, 죽어서 어머니의 꿈에 나타난 둘째 아들, 동반자살을 감행하려 했던 가난한 가족의 비극을 전시하면서, 영화는 관객의 눈물을 충분히 짜내는데 성공한다(이 신파의 기술은 <7번방의 선물>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아버지가 영문을 모른 채 '아빠'를 부르는 어린 딸에게 애써 웃음 지으며 작별하는 장면과 쌍벽을 이룬다). 물론 이밖에도 관객의 더 많은 눈물을 위해 자질구레한 장치들이 널려있다. 이 신파로부터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결국 '효도'인 것일까? 그런데 효도를 말하면서, 김자홍에게 어머니의 살해 시도와 어머니의 용서라는, 엄청난 '죄책감'까지 얹어야 하는 것일까? 

신파의 문제는 개인에게 벌어진 사건을 오로지 감정에 호소하면서 전후맥락과 배경을 가려버리는 데 있다(예를 들면, 국정농단자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고, 중병을 호소하고, 아이가 보고 싶다고 울먹이는 식이다). 원작의 김자홍의 죽음에는 한국의 직장문화와 관행 같은, 사회적 원인을 제시하고 있지만, 영화의 김자홍의 죽음은 그저 불운한 사고일 뿐이다.  

인터넷으로 <신과 함께>를 검색하면, 천만관객 운운하는 기사들이 뜬다. 한편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흥행기록을 갱신하는 건 뉴스거리가 될 수 있고, 그 영화를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에게는 너무나 기쁜 소식이겠지만, 사실 관객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저 돈과 시간을 투자했는데 관객이 많이 든 영화가 되었다면 실패하지 않은 선택이라고 만족하는 정도일 것이다. 5000만이 좀 넘는 남한 인구에서, 천만관객이라는 수치는 그렇게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천만관객을 영화흥행의 화제 중심에 두고 그 수치에 집착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있다(지금까지 롯데엔터테인먼트에서 배급한 영화 중에 천만관객 영화가 없었는데 그래서 <신과 함께>의 흥행에 롯데의 기대가 아주 크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올해 등장한 한국영화의 블록버스터 또는 텐트폴 영화는 이상할 정도로 감독의 개성이 사라져버렸다. 대부분 흥행의 공식을 최대한 동원해서 이리저리 끼워 맞춘, 규격화된 상품 같았다. 결국 천만관객 영화라는 레테르 속에서, 한국영화는 질적인 면에서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