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중국의 권력투쟁에 미사일로 베팅한 북한 - '시진핑 일인체제'는 한국 언론의 오보

일취월장7 2017. 11. 23. 16:02

중국의 권력투쟁에 미사일로 베팅한 북한

11월9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만났다. 지난 4월 정상회담에 비해 시 주석의 태도가 느긋하고 당당해졌다. 중국공산당 제19차 당 대회 이후 권력 장악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남문희 기자 bulgot@sisain.co.kr 2017년 11월 21일 화요일 제531호

사상 최대의 전력을 동원한 트럼프의 ‘함포 외교’도 ‘자금성’의 높은 담을 넘지는 못했다. 일본에서는 “최고의 압박(11월6일 미·일 정상회담)”, 한국에서는 “힘에 의한 평화(11월8일 한국 국회 연설)”를 강조하던 트럼프 대통령이 정작 중국에 가서는 “압박과 견제”라며 그 톤을 다운시켰다. “유엔 안보리 대북 결의의 엄격하고도 전면적 이행”이라는 시진핑 주석의 절제된 약속에 만족해야 했다.

ⓒXinhua
11월9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앞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중 환영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트럼프 대통령이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중·일 아시아 순방을 통해 3국으로부터 대규모 통상이익을 거뒀다. 이번 순방에 맞춰 미국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 3척이 서태평양 일대에 배치되었다. 이 항공모함 3척을 동원해 짧은 기간 최대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지난 4월8일 시진핑 주석을 처음 대면했을 때도 함포 외교가 동원됐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지금 이 순간 시리아를 향해 59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이 날아가고 있다’고 통보했다. 당시 시진핑 주석의 반응은 지금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만리장성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지만 그때는 흔들렸다.

4월 회담 때 미·중 정상 간에 ‘묵계’가 오갔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북핵 문제 해결에 협력하지 않을 경우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의 대형 금융기관과 기업에 대한 제재를 검토하겠다고 했고, 시 주석은 북한이 다시 중대한 도발을 할 경우 중국 기업의 대북 송금과 석유 수출을 규제하는 등 “독자 제재를 검토하겠다”라고 화답했다는 것이다. 100일간 유예기간을 두자는 전제가 있었지만 북핵 문제가 불거진 지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 측에서 ‘제재’라는 말이 나온 순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아시아 순방의 핵심이 중국 방문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에서 그가 제기할 핵심 의제는 결국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4월의 첫 정상회담 이래 북한은 화성 12호와 화성 14호 발사를 통해 미국 본토를 위협했고 지난 9월 수소폭탄 실험까지 감행했다. 100일 유예기간이 이미 지났다. 그러니 이번에 대북 원유 공급과 송금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라는 것이다. 최근 일부 언론은 여기에 중국 내 북한 노동자 추방까지 트럼프가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른바 ‘3대 대북 압박 조치’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있다”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중국의 독자 제재에 대해서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 주석이 지난 4월에는 왜 대북 제재 약속을 했고, 이번에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상황이 달라졌고, 무엇보다 시진핑 주석이 처한 위치가 달라졌다.

4월 정상회담 때는 시진핑이 쫓기는 처지


지난 4월 시 주석은 쫓기는 처지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난 10월24일 폐막한 중국공산당 19차 당 대회 얘기다. 시 주석은 당 대회 이전 치열한 권력투쟁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게 시 주석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시 주석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례적으로 이른 시기인 4월8일 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의했다. 또 조건부 대북 독자 제재를 약속했다. 바로 19차 당 대회를 앞두고 대미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제스처였던 셈이다. 이번 당 대회 결과 시 주석은 권력 강화에 성공해 한결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미국이 요구한다고 들어줄 이유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북한은 이제 안심해도 될까? 북한이 가장 우려하는 원유 공급 중단을 시 주석이 동의하지 않았으니 한시름 놓아도 될까? 지난 19차 당 대회 직전 중국을 대하는 북한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한은 19차 당 대회 하루 전날인 10월17일 축하 전문을 보냈고, 10월25일 시 주석의 총서기 재선을 축하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문도 발송했다. 지난 5월 초 중국의 대북 제재 동참을 북한이 격렬하게 비판한 이래 <조선중앙통신> 등에서 사라졌던 ‘습근평(시진핑)’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북한이 보여왔던 ‘대중 적대시 태도’의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북한은 그동안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중국이 주최하는 중요 행사 때마다 ‘고춧가루’를 뿌려왔다. 하루이틀 된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 항저우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 다음 날(9월6일) 동해를 향해 미사일 세 발을 쏘았다. 지난 5월14일 베이징에서 일대일로 정상회담이 열릴 때는 화성 12호 미사일을 발사했고, 브라질·러시아·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 정상이 참석한 브릭스 정상회담이 열린 9월3일에는 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모두 다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시진핑 주석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국제회의라는 점이다. 즉 북한은 시 주석이 중요한 국제회의를 주최하는 날을 일부러 골라 ‘고춧가루’를 확 뿌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여온 것이다. 그런 북한이 19차 당 대회 이후 시진핑 주석의 승승장구를 축하하고 나선 것이다. 어떻게 봐야 할까?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지난 6월21일 워싱턴에서 미·중 전략안보대화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미국은 4월 북핵 위기 국면 이후 중국이 그동안의 협조 노선을 버리고 비협조적으로 돌아선 이유를 따졌다. 특히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관여하는 중국 기업들과 이를 지원하는 10여 개 중국 은행과 무역회사를 특정하며 대처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아무런 협조도 얻을 수 없었다. 4월 정상회담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이 격분했고, 지난 6월27일 미국 국무부는 ‘2017년 인신매매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중국에 가장 낮은 ‘3등급’을 부여했다. 북한과 이란, 시리아, 수단, 콩고 등과 같은 등급으로, 2014년부터 2등급을 유지한 이후 3년 만에 다시 강등됐다. 이어 타이완에 대한 무기 판매 재개 및 단둥은행에 대한 금융제재를 단행했다.

당시 중국의 태도 변화 배경에 당과 군의 은퇴한 원로그룹의 저항이 있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시진핑 주석이 대미 협조 정책으로 치달아 대북 압박을 가하자, 6·25 참전 세대 등 북한과 혈맹의식을 가지고 있는 원로들이 들고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뒤 중국 권력 내부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북한이 7월4일 화성 14호 발사부터 9월3일 6차 핵실험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최근 여러 정보에 따르면 시진핑 주석의 대미 협조 노선에 제동을 건 것은 은퇴한 원로그룹만이 아니라고 한다. 중국 권력의 핵심 내에서 시 주석의 발목을 강하게 잡는 그룹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장쩌민 전 주석 세력이 그 중심이었다. 이번 당 대회에서 ‘칠상팔하(七上八下·67세는 유임하고 68세는 은퇴한다)’라는 나이 제한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중국공산당 상무위원 7명 중 장더장·류윈산·장가오리(장고려) 등 세 사람이 장쩌민계였다. 이들은 시 주석이 북한 관련 결정을 할 때마다 북측의 얘기도 들어봐야 한다며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해왔다. 군부에는 선양(심양)군구가 버티고 있어 그 힘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장쩌민 전 주석과 쩡칭훙 전 국가부총리를 필두로 세 사람의 상무위원과 그들을 따르는 세력들 그리고 선양군구까지 가세한 세력이 시진핑 주석 세력과 대북 정책을 두고 충돌하며 권력투쟁을 벌였다. 북한은 그동안 중국 권력 지도에서 이른바 장쩌민계와 일체가 되거나 또는 도구가 되어 권력투쟁의 한 축을 외곽에서 담당한 셈이다. 시진핑 주석의 행적을 뒤쫓아 다니며 북한이 고춧가루를 뿌려온 이유다.

ⓒ중신망(中新网)
2014년 1월4일 중국 선양군구의 ‘붉은 군대’ 사단이 흰색 위장복을 입고 눈 덮인 산야를 행군하고 있다.

장쩌민 전 주석을 중심으로 한 이 세력을 보통 상하이방(상해방)이라고 한다. 출발은 지린방(길림방)이었다. 장쩌민은 1950년대 랴오닝성의 창춘제일기차제조창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정치적인 힘을 갖게 되자 옌볜대 조선어학과 출신으로 김일성대 경제학부에 유학했던 장더장을 내세워 지린방을 구축했다.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랴오닝성 출신들을 대거 중앙정부로 끌어올린 것이다. 또한 1989년 톈안먼 사건으로 당 총서기가 된 이래 당시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양상쿤·양바이빙(양상곤·양백빙) 형제를 몰아내고(양가장 사건) 그 자리에 선양군구 출신의 쉬차이허우(서재후)를 앉혔다. 쉬차이허우는 궈보슝(곽백웅)과 더불어 후진타오 시절에 이르기까지 중국 군부를 장악한 장쩌민의 대리인이었다.


ⓒEPA
10월18일 중국공산당 제19차 당 대회에 참석한 시진핑(왼쪽에서 두 번째) 국가주석, 장쩌민(오른쪽에서 두 번째) 전 국가주석.

문제는 이들과 북한의 관계다. 장쩌민 시대 북·중 관계는 긴밀히 유착돼 있었다. 장더장이야말로 김정일 위원장의 대리인으로 불릴 정도로 북한 이익을 대변했고, 저우융캉·류윈산·장가오리 등은 수시로 북한을 오가며 교류했다. 특히 이들 세력의 물리력이나 다름없는 선양군구는 북한 핵·미사일 개발의 실질적인 배후라는 설이 파다했다. 선양군구가 북한의 핵 개발에 관여한 이유 역시 중국 권력투쟁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선양군구는 6·25 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제4야전군이 주축이다. 조선족 출신이 많다. 흔히 북·중 혈맹관계라 할 때 중국 쪽 혈맹의 주체가 바로 선양군구다. 이들은 또 장쩌민 세력과 결탁해 중국 권력의 한 축을 맡았다. 재래식 전력으로는 선양군구를 대적할 세력이 없다. 다만 핵무기를 관장하는 청두(성도)군구만이 그 위협이 된다. 그래서 이들이 북한에 핵물질과 장비를 뒤로 흘려주고 북한 기술자를 데려다 교육과 훈련을 담당해왔다는 것이다. 유사시는 북한의 핵이 곧 자신들의 핵이 될 수 있다고 여긴 셈이다. 국제 제재의 국면에서도 북한에 식량과 원유 공급이 이뤄졌고 북한이 단둥이나 다롄 등의 기업으로부터 생필품에서 무기구매까지 가능했던 것도 바로 선양군구 덕분이었다. 과거 김정일 위원장은 선양군구를 여덟 차례나 방문했고 선양군구의 고위층에게 희토류 광산 개발권을 제공하는 등 이권으로 보상해왔다. 2013년 2월12일 3차 핵실험 이후 북·중 관계가 험악해지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의 핵이 워싱턴만 겨냥하라는 법은 없다. 베이징도 겨냥할 수 있다”라고 발언했다. 그 얘기를 들은 시진핑 주석이 격노했다고 한다. 

2012년 제18차 당 대회에서 총서기에 오른 시진핑 주석은 첫 과제로 당과 군의 장쩌민 세력 척결에 나섰다. 측근인 왕치산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벌여온 반부패 투쟁, 즉 ‘호랑이 사냥’이 바로 그것이다. 맨 처음 저우융캉 정법위 서기가 보시라이 사건에 연루되어 철퇴를 맞았고, 선양군구 대부인 쉬차이허우가 궈보슝과 더불어 부패 혐의로 수감 중에 사망했다. 쉬차이허우 일파를 제거한 뒤인 2015년 말 선양군구를 베이징군구로 흡수하려다 반발에 부딪혀 무산된 적도 있다. 그 뒤로는 기존의 7대 군구를 동서남북중의 5대 전구로 개편을 시도했다. 선양군구를 겨냥한 것이었다. 각 군구에는 작전과 훈련 기능만 남기고 병력 동원과 명령은 중앙에서 틀어쥐는 체제로 재편했다. 선양군구는 베이징군구에 속해 있던 내몽골과 지난(제남)군구에 속했던 산둥 지역을 흡수해 북부전구로 확대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몽골은 장쩌민계 상무위원 류윈산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산둥은 장가오리의 영향권이었다. 즉 이번 19차 당 대회에서 이들이 은퇴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Xinhua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장쩌민 전 주석 세력과 밀접한 연관을 맺어왔다.

중국 내 북한 지지 세력의 기반 무너져 

결과적으로 장쩌민 세력은 지난 7월 후계자로 내세웠던 쑨정차이가 낙마하고 당 대회를 통해 최고 권력기관인 상무위원회가 시진핑 세력으로 재편되면서 사실상 몰락했다. 중국 권력 내 북한의 든든한 지지 세력 기반이 무너진 것이다. 다만 선양군구인 북부전구에서 장쩌민계의 세력이 손을 뗀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이들이 관장해온 대북 원유 공급 중단을 당장 감행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대북 원유 공급에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다. 어떤 돌발 사태가 벌어질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또한 중국 권력 내 북한 지원 세력이 몰락했다 해도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즉 시 주석이 당장 김정은 체제의 붕괴를 시도할 가능성은 그리 높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북한이 중국 내 권력투쟁의 일환으로 무력 도발을 벌이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 친위대’ 시자쥔, 중국 미래 짊어지다

시자쥔, 제19기 중앙위원회서 대약진…상무위원 3명, 정치국원 절반 이상 차지

모종혁 중국 통신원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1.23(목) 08:01:01 | 1466호


“향후 15년 동안 중국은 ‘시자쥔(習家軍)’이 짊어지고 이끌어 갈 겁니다.” 필자가 최근 홍콩에서 만났던 한 출판사 편집인은 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전당대회) 이후 중국 정치를 이렇게 전망했다. 여기서 시자쥔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개인적 인연이 깊고, 시 주석에게 절대 충성하는 측근세력을 가리킨다. 그는 “전통과 관례를 중시하는 중국 특성상 시 주석은 20차 전당대회에서 3연임을 시도하진 않을 듯싶다”면서도 “중앙과 지방 요직에 모두 시자쥔을 배치해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처럼 상왕(上王)으로 계속 군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새로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5명은 60대다. 1990년대 초 덩샤오핑(鄧小平)이 확립해 50대의 후계자를 뽑아 공개하던 ‘격대지정(隔代指定)’이 무너졌다. 격대지정은 한 세대를 건너뛰어 차차기 리더를 미리 지정하던 관례였다. 1992년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이을 후계자로 후진타오(胡錦濤)를 낙점해 상무위원에 앉혔다. 2007년 퇴임했던 장쩌민의 의중에 따라 시 주석이 상무위원이 됐다. 2012년 후진타오는 후춘화(胡春華·54) 전 광둥(廣東)성 서기와 쑨정차이(孫政才·54) 전 충칭(重慶)시 서기를 정치국원으로 뽑아 후계구도를 정립했다.

 

시진핑 집권 2기의 시작을 알리는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가 10월18일 개막한 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전·현직 공산당 간부들이 당대회에 참석했다. © 사진=연합뉴스

시진핑 집권 2기의 시작을 알리는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가 10월18일 개막한 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전·현직 공산당 간부들이 당대회에 참석했다. © 사진=연합뉴스

 

시진핑, 풍부한 행정 경험 쌓은 관료 선호

 

그러나 장쩌민이 밀었던 쑨 전 서기는 부패 혐의로 낙마했다. 상무위원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던 후 전 서기는 정치국원만 연임했다. 시 주석의 후계자로 부상했던 천민얼(陳敏爾·57) 충칭시 서기도 정치국원으로 승진하는 데 그쳤다. 이는 2012년에 설정됐던 차차기 후계구도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실제 전당대회 직후 개최된 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에선 시자쥔의 대약진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시자쥔은 상무위원은 3명이었지만, 15명이 바뀐 정치국원 25명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시자쥔은 크게 시 주석의 고향 인맥, 푸젠방(福建幇), 즈장신쥔(之江新軍)으로 나뉜다. 시 주석은 태자당(太子黨·공산혁명 지도자의 자녀) 출신이다.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은 공산당 8대 원로 중 한 명으로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했다. 그러나 1962년 실각해 10여 년 동안 유배됐다. 시 주석도 부친 고향인 산시(陝西)성으로 하방(下放)됐다. 이 시기 시 주석은 어렵게 말단 공무원이 돼 촌서기까지 올랐다. 문화대혁명 말기 명문 칭화(淸華)대에 입학해 1979년 졸업했다. 향촌조직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권력 정점까지 올라선 태자당 인사는 아주 드물다.

 

자오러지(趙樂際·60)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와 리시(李希·61) 광둥성 서기는 대표적인 고향 인맥이다. 자오 서기는 칭하이(靑海)에서 줄곧 일했다. 본적과 고향은 시 주석과 같은 산시다. 또한 부친은 시중쉰 밑에서 일했던 부하다. 리 서기는 간쑤(甘肅)에서 태어났는데, 고향은 시중쉰이 혁명 활동을 시작했던 량당(兩當)현이다. 또한 시중쉰과 친한 리쯔치(李子奇) 전 간쑤성 서기의 비서로 일했다. 2006년부터 5년간 옌안(延安)시 서기로 재직할 때는 시 주석이 일했던 량자허(梁家河)촌을 관광지로 조성했다.

 

푸젠방은 1985년부터 2002년까지 시 주석이 일했던 푸젠성 출신을 가리킨다. 시 주석은 샤먼(廈門) 부시장부터 단계를 밟아 성장까지 오르며 풍부한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이번에 정치국원이 된 차이치(蔡奇·62) 베이징시 서기와 황쿤밍(黃坤明·61) 중앙선전부장은 시 주석 밑에서 일했다. 경제정책을 입안하는 허리펑(何立峰)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도 푸젠방이다. 다만 이들은 시 주석의 직속 측근은 아니었기에 즈장신쥔보다 친밀도는 낮다. 시 주석은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저장(浙江)성 성장 및 서기를 역임했다. 이 시기 시 주석의 측근과 부하가 즈장신쥔이다.

 

2003년 3월부터 5년간 시 주석은 ‘저장일보’에 칼럼 ‘즈장신어(之江新語)’를 232편 실었다. 즈장신어 내용은 현재 시진핑 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당시 즈장신어를 기획했고 초고를 썼던 이가 천민얼 서기다. 천 서기는 시 주석의 후광을 받아 저장성 선전부장에서 부성장을 거쳐 구이저우(貴州)성 부서기, 성장, 서기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쑨 전 서기 실각 후 충칭시 서기까지 됐다. 충칭은 최근 수년간 중국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 중이다. 다만 19차 전당대회 직전에는 중앙위원이었기에 두 계단을 뛰어넘어 상무위원이 되는 건 무리가 따랐다.

 

상하이시 서기에 내정된 리창(李强·58)은 새롭게 떠오르는 신데렐라다. 리 서기는 시 주석이 저장성 서기로 재직할 때 비서 역할을 했다. 그 뒤에는 관운이 따르지 못했다. 2013년에 저장성 성장이 됐고, 2016년에야 장쑤(江蘇)성 서기로 승진했다. 또한 18차 전당대회에선 정치국 중앙위원 후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번 전당대회 직전에 중앙위원이 됐고, 직후엔 정치국원으로 선임됐다. 불과 2주 동안 두 단계를 건너뛴 파격 승진이었다.

 

행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상하이시 서기로 영전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상하이는 베이징, 톈진(天津), 충칭 등 4대 직할시 중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상하이시 서기는 장쩌민과 시 주석이 최고지도자로 오르기 직전 거쳤던 자리다. 결국 리 서기의 고속 승진은 시 주석의 입김 없이는 불가능하다. 리 서기는 10년 뒤 68세가 된다. 만약 5년 뒤 최고지도자가 될 경우 10년 뒤엔 ‘7상8하(七上八下)’의 불문율에 걸린다. 다만 68세 이상을 은퇴시키는 관례를 리 서기에게 적용하는 건 애매하다. 과거 리 서기처럼 전당대회가 개최됐던 해에 68세인 상무위원은 없었다.

 

중국 공산당 19차 전당대회를 다룬 중국 신문 © 사진=연합뉴스

중국 공산당 19차 전당대회를 다룬 중국 신문 © 사진=연합뉴스

 

눈여겨봐야 할 ‘다크호스’ 딩쉐샹

 

3대 인맥에 들진 않지만,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승진한 딩쉐샹(丁薛祥·56)을 눈여겨봐야 한다. 중앙판공청은 우리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한다. 이번에 리잔수(栗戰書) 전 주임이 상무위원에 선출되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에 내정되면서 그 위상이 높아졌다. 딩 주임은 본래 장쩌민의 푸단(復旦)대학 후배인 상하이방이었다. 시 주석이 상하이시 서기로 8개월간 재임할 때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그게 인연이 돼 2013년 시 주석이 중앙판공청으로 불러들였다. 시 주석이 측근으로 삼는 충성심, 성실성, 업무능력 등 3가지 조건을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시자쥔에 비해 후춘화 전 서기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후 전 서기는 고등학생, 대학생, 청년노동자 등을 관장하는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출신이다. 과거 공청단파는 명문대 출신이 많았고 승진이 빨랐다. 베이징대 출신으로, 40대에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서기가 됐던 후 전 서기가 그러했다. 그러나 시 주석은 출신 학교를 따지지 않는다. 풀뿌리 조직부터 풍부한 행정 경험을 쌓은 관료를 선호한다. 현재 후 전 서기가 갈 수 있는 자리는 공석인 국가 부주석과 부총리다. 국가 부주석은 보통 차기 후계자가 맡았다. 만약 국가 부주석이 되지 못하면, 후 전 서기에겐 더 기회가 없다. 



'시진핑 일인체제'는 한국 언론의 오보

[기고] 과연 시진핑 일인체제란 없다
2017.11.23 14:46:13 
    
지난달 18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 결과를 두고 한국 언론은 대체로 "시진핑 일인체제가 열렸다"고 평가했다. 후계자 지명이 미뤄졌다는 점,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 발표로 시진핑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이에 관해 한국의 대표적 중국 연구가인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잘못된 해석이라는 평을 내렸다. 그리고 이번 19차 당 대회의 진정한 의미를 되짚는 기고를 보냈다. 결론을 내리자면 시진핑 일인체제란 존재할 수 없고, 시진핑은 '동급자 중 일인자' 자리를 굳건히 했다는 정도로 이번 당 대회를 이해해야 한다고 조 교수는 강조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중국의 정치 체제를 알고, 이번 당 대회를 통해 중국 미래 권력을 점치는 의미에서 조 교수의 기고를 게재한다. 편집자.  

2017년 10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9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를 놓고 우리 학계와 언론계는 상당히 다르게 평가한다. 물론 학계라고 해도 학자마다 차이가 있고, 언론계라고 해도 언론사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번 당대회를 바라보는 학계와 언론계의 평가는 분명히 다르다. 오랫동안 중국 정치를 연구한 나로서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공산당 19차 당 대회에 관한 과장된 혹은 잘못된 평가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굳어질 경우, 앞으로 우리가 중국 정치를 이해하는데 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전반부는 일반 독자용으로 썼다. 후반부는 중국의 엘리트 정치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알고 싶어 하는 고급 독자용으로 썼다. 시간이 없거나 결론만 간단하게 알고 싶은 독자라면 전반부만 읽어도 내 주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18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19차 당 대회에서 18차 중앙위원회 업무보고를 하고 있는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AP=연합뉴스


시진핑 '절대권력'과 '일인체제'? 

공산당 19차 당 대회를 보도한 국내 언론이 가장 많이 사용한 표현은 아마도 '절대권력'과 '일인체제'였을 것이다. 이번 당 대회를 통해 시진핑이 절대권력을 획득했고, 그 결과 엘리트 정치는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집단지도 체제에서 시진핑의 일인체제로 변화했다는 주장이다. 이를 주장하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6세대 정치인 중에서 차기 지도자가 지명되지 않음으로써 시진핑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진핑이 공산당 20차 당대회(2022년 예정)에서 권력을 연장할 가능성이 커졌다. 둘째, '시진핑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하 '시진핑 사상'으로 약칭)이 당헌에 삽입됨으로써 그의 권위가 덩샤오핑을 능가하여 마오쩌둥에 버금가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통치이념은 덩샤오핑 '이론'이라고 부르지만, 시진핑의 통치이념은 마오쩌둥 '사상'처럼 '시진핑 사상'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당 대회를 통해 정말로 시진핑이 절대권력을 획득했고, 그 결과로 시진핑 일인체제가 등장했는가? 이런 주장은 크게 두 가지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중국의 엘리트 정치에서 최고 지도자들이 실제로 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기제(mechanism)를 이해하지 못 한다는 문제가 있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오랜 혁명과 국가 건설 과정을 통해 위대한 혁명가과 국가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또한 이들은 당·정·군을 망라하는 조직과 전국 각지에 두터운 인적 관계망을 구축했다. 마오쩌둥의 표현법을 빌려오면, "당·정·군·민간·학교(黨政軍民學) 등 모든 분야와 동·서·남·북·중앙(東西南北中) 등 모든 곳에" 이들의 동료와 부하가 포진해 있었다. 이를 통해 이들은 막강한 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할 수 있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개인 권력' 혹은 '카리스마적 권력'이라고 부른다. 

반면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등 덩샤오핑 이후(Post-Deng) 시기의 지도자들은 공산당 총서기나 국무원 총리와 같은 공식 직위를 통해서만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마오나 덩이 가졌던 전설적인 명성이나 인적 관계망이 없다. 또한 이들은 법률과 당규(黨規)가 정한 절차에 따라 권력을 행사한다. 즉 이들은 자신 마음대로 공식적인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 동시에 이들은 다른 정치 세력(파벌)과의 경쟁 속에서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대립하면서 권력을 행사한다. 학계는 이를 '제도 권력' 혹은 '직무 권력'이라고 부른다.  

개인 권력(카리스마적 권력)과 제도 권력(직무 권력) 간의 차이는 분명하다. 먼저 개인 권력을 행사하는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공식 회의 없이도 중요한 정책 및 인사를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반면 제도 권력을 행사하는 덩 이후의 지도자들은 반드시 정치국이나 정치국 상무위원회 등에서의 논의를 거친 후, 동시에 은퇴한 정치원로들의 의견을 청취한 이후에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 또한 마오와 덩은 공식 직위와 상관없이, 혹은 은퇴해서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 덩 이후의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장쩌민은 2004년 중앙군사위원회(중앙군위) 주석에서 물러난 후 권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상하이방은 사실상 해체 수순에 돌입했다.   

이런 면에서 마오쩌둥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 절대권력을 행사했고, 당시의 엘리트 정치는 명실상부한 마오쩌둥의 일인체제였다. 덩샤오핑은 마오와 달리 다른 혁명원로들과 상의해야 했다는 점에서, 그러나 그가 공식적으로 어떤 정책을 결정한 다음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준(準)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덩 시기의 엘리트 정치는 덩의 일인체제가 아니라 '혁명원로의 과두체제'였다. 반면 덩 이후의 총서기는 공식 법률과 당규의 제한을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정치 세력(파벌)과의 경쟁 속에서 권한을 행사하는 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할 뿐이다. 엘리트 정치도 주요 정치가와 정치집단이 함께 정책을 결정하는 집단지도 체제다.  

다만 집단지도 체제가 운영되는 방식, 특히 총서기의 역할은 상황과 조건, 지도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 차이가 났다. 예를 들어, 후진타오는 상대적으로 약한 총서기였다.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9인제로 합의 도출이 어려웠다. 게다가 절대 다수가 상하이방-태자당 연합으로 이루어져 후진타오가 이들의 협력을 얻기도 쉽지 않았다. 은퇴한 장쩌민도 후진타오의 권력 행사를 방해했다. 또한 후진타오는 성격상 일방적인 권력 행사보다는 공식 절차를 존중하고 타 세력과 협의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국내외 조건도 개인 권력 강화에 매진할 수 없게 만들었다. 2008년에만 소수민족 지역의 소요 진압, 쓰촨 지역 대지진 복구,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 세계 금융위기의 대응 등의 힘겨운 과제가 있었다. 

반면 장쩌민은 상황이 달랐다. 그도 집권 1기(1989-1997년)에는 취약한 권력 기반, 낮은 지명도와 명성, 열세인 정치 세력으로 총서기로서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특히 혁명원로 중 일부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집권 2기(1997-2002년)에는 혁명원로들이 사망함으로써 '시어머니들'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강화된 권력 기반과 높아진 명성, 상하이방이라는 자파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집권 2기가 끝날 무렵에는 혁명원로들이 중앙군위 주석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도 과감히 거절하고 3회 연임을 강행할 수 있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강한 총서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총서기는 영국 내각의 총리처럼 '동급자 중 일인자(First among equals)'의 역할을 수행한다.  

둘째, 이런 주장은 이념적 권위가 어떻게 실제 권력이 되는지를 이해하는 못하는 문제, 동시에 '종이 위의 규정'(법률적 규정)과 실제 권력을 혼동하는 문제가 있다. 단적으로 시진핑 '사상'과 마오쩌둥 '사상'의 단어가 같고, 그것이 당헌에 삽입되었다고 해서 시진핑의 이념적 권위가 곧바로 마오쩌둥의 이념적 권위처럼 강력하게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념적 권위는 오랜 실천을 통해 타당하다고 검증된 이후에, 동시에 당정 간부뿐만 아니라 지식인 집단, 일반 국민이 수용할 때에만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지금 중국의 일반인 중에서 장쩌민의 '삼개대표 중요 사상'과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당 조직과 당원에 실제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할까? 이 두 가지의 통치이념은 각각 공산당 16차(2002년) 및 18차(2012년) 당대회에서 당의 공식 지도이념으로 결정되었다.  

이런 면에서 시진핑은 이제 이념적 권위를 획득하는 첫발을 디딘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첫발이 크고 힘차기 때문에 향후에 장쩌민이나 후진타오에 비해 더욱 강력한 이념적 권위를 가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아마도 현재와 같이 시진핑 정부가 '강력한 중국'의 수립을 위해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마오쩌둥 사상이나 덩샤오핑 이론처럼 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시진핑이 마오나 덩처럼 천지개벽하는 업적을 낼 조건과 상황이 아니고, 따라서 그의 사상이 갖는 권위도 결코 마오 사상과 덩 이념에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당헌에 시진핑 사상이 들어갔다고 해서 현실에서 시진핑이 갑자기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당헌의 규정이 곧바로 현실의 권력이 되는가? 이는 다른 문제다. 예를 들어,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라는 후광과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 4인방 세력의 구속과 문화대혁명의 종결이라는 실제 업적, 공산당 주석, 중앙군위 주석, 국무원 총리라는 당·정·군의 3권을 한손에 거머쥔 유일한 지도자였지만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끝내는 덩샤오핑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렇다고 화궈펑이 불법적으로 권력을 획득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공산당의 공식 절차를 밟아 권력을 획득했다. 현재 시진핑은 화궈펑 정도의 후광과 업적, 그만큼의 공식 직위도 획득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 사상이 당헌에 삽입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절대권력 혹은 일인체제 운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정리하면 시진핑은 장쩌민과 후진타오처럼 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엘리트 정치도 집단지도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시진핑은 출발부터 권력 기반이 전임자들보다 훨씬 견실했기 때문에, 게다가 부패 척결과 정풍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일반 당원과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획득했기 때문에 전임자보다 강력한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2016년에는 핵심(核心) 지위를 획득했고, 이번 당 대회에서는 시진핑 사상이 당헌에 게재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시진핑은 집단지도 체제 속에서 전임 총서기보다는 더 커다란 조종자(coordinator)로서의 권력을 행사하지만, 아직은 마오나 덩처럼 최종 결정자 혹은 거부권(veto)을 행사하지는 못하는 '동급자 중 일인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일반 독자용이다. 다음부터는 고급 독자용이다.

몇 가지의 인선 규범과 집단지도 체제  

중국의 엘리트 정치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정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주요 지도자의 선출과 퇴임 등 인사(人事)는 정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당 대회에 주목하는 이유는, 당 대회 직후 개최되는 새로운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중국의 엘리트 정치가 실제로 바뀌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집단지도(集體領導, collective leadership)를 '특정한 지도자가 자의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개별 지도자 간에 권한과 책임을 나누는 체제'로 정의한다. 중국의 표현을 사용하면, 이는 '집단 결정과 개인 책임 분담의 결합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정치체제다. 먼저,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집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정책의 성격에 따라 정치국 상무위원회, 정치국, 중앙위원회,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어 논의되고 표결로 결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집단 결정이다. 이는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처럼 조직(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정책을 결정한 일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이다. 

또한 각 지도자에게는 고유한 권한과 책임이 있어 각자 일정한 자율권을 인정받되, 담당 분야에 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개인 책임 분담'이다. 구체적으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은 각자가 이끄는 당정기관을 대표하여 고유한 권한을 행사하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진다. 공산당 전체를 대표하는 총서기(중앙군위 주석 겸직)는 군사, 외교, 개혁 전반, 당무(黨務: 특히 인사), 서기처의 상무 서기는 조직과 이념(ideology)을 담당한다. 국무원 총리와 부총리는 경제 및 행정,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 위원장은 입법과 감독,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정협) 주석은 종교·민족·화교·지식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통일전선 업무, 중앙기위 서기는 부패 척결과 당 규율을 담당한다.  

또한 집단지도 체제는 공식 법률과 당규(黨規), 그리고 비공식 규범(norms)을 통해 운영된다. 이 중 규범은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공산당 14차 당 대회(1992년) 이후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같은 권력기구의 구성,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권력을 이양하는 권력승계에 대한 규범이 만들어졌다. 이런 규범은 헌법이나 당헌의 제정을 통해 확정된 것이 아니라, 처음에 지도자들이 합의하여 등장한 이후 계속 준수되면서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규범은 지도자들이 합의하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집단지도 체제는 이런 규범이 만들어짐으로써 등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집단지도 체제가 붕괴되고 시진핑 일인체제가 등장했다는 말은, 과거의 규범이 폐기되고 새로운 규범이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규범에 주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첫째는 연령 및 임기 규범이다. 연령 규범으로는 68세 규정이 있다. 이것은 공산당 16차 당 대회(2002년)부터 적용된 것으로, 68세 이상자는 당·정·군의 최고 직위에 새롭게 취임할 수 없다는 규정이다. 참고로 공산당 15차 당 대회(1997년)에서는 70세 규정이 등장했는데, 장쩌민이 예외로 인정되면서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직위는 법률과 당규로 연령 제한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장관과 성장은 65세에 퇴임해야 한다(단 상황에 따라 일정기간 연장할 수 있다). 임기 규범은 당정기구의 수장은 2회만 재임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말한다. 그러나 중앙군위 주석은 예외다. 연령제와 임기제는 종신제를 폐지하여 마오쩌둥과 같은 절대권력의 등장을 막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권력을 원만히 교체하도록 함으로써 엘리트 정치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이점에서 이는 정치개혁의 최대 성과였다.   

둘째는 권력기구의 구성 규범이다. 이에 따르면,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5대 권력기구의 책임자를 포함해야 한다. 즉 공산당의 총서기(중앙군위 주석 겸직)와 서기처 상무 서기, 국무원의 총리와 상무 부총리, 전국인대 위원장, 전국정협 주석, 중앙기율검사위원회(중앙기위) 서기가 바로 이들이다. 또한 정치국은 당정기구의 고른 안배와 함께 지역 안배에 따라 지역 대표를 포함해야 한다. 대개 4대 직할시, 경제 규모가 큰 성(예를 들어 광둥성), 소수민족 자치구(예를 들어 신장)의 당서기가 정치국원에 선임된다. 이 규범은 공산당 14차 당 대회(1992년)에 등장하여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이는 당정관계에서는 공산당이, 중앙-지방 관계에서는 중앙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규범이다. 그밖에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는 지금까지 소수민족 지도자나 여성이 선임된 적이 없다.   

셋째는 세력균형의 규범이다. 이에 따르면,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정치국은 특정 정치세력(파벌)이 독점할 수 없다. 따라서 태자당, 공청단파, 상하이방과 같은 여러 정치세력에 일정한 지분을 보장해야 한다. 특히 공산당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는 한 정치세력이 독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태자당이 공산당 총서기를 차지하면 공청단파가 국무원 총리를 차지한다. 이것도 대략 공산당 15차 당 대회(1997년)에서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넷째는 차기 지도자의 사전 결정 규범이다. 이에 따르면, 총서기 후보는 권력을 승계하기 최소한 5년 전에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어 경험을 쌓은 뒤에 권력을 물려받는다. 이는 덩샤오핑 등 혁명원로들이 자신들의 사후에도 권력승계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게끔 도입한 조치였다. 후진타오와 시진핑이 이 규범에 따라 각각 공산당 14차(1992년) 및 17차(2007년)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언론은 이를 두고 격세지정(隔世指定: 한 세대를 뛰어 넘는 후계자 지정)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후진타오에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즉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이 지정했지만 시진핑은 장쩌민이 지정한 것이 아니다. 

다섯째는 후보 추천의 규범으로, 공산당 17차(2007년) 및 18차(2012년) 당 대회에서 실행된 민주추천회(民主推薦會) 제도가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위원(후보위원 포함)과 정치원로 등 350~400명은 민주추천회라는 후보 추천 회의에 참석하고, 여기서 투표를 통해 정치국원 및 정치국 상무위원의 후보를 추천한다. '선출'이 아니라 '추천'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중앙위원회가 이들을 선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두 번 실행되었기 때문에 규범으로 정착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시진핑에게 마오쩌둥과 같은 일인체제자의 아우라를 씌우는 건 중국 정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이 아니다. ⓒpixabay.com


19차 당 대회와 인선 규범 

그렇다면 이번 당 대회에서는 인선 규범이 얼마나 준수되었는가? 과연 집단지도 체제를 뒷받침하는 기존의 규범이 폐지되고, 시진핑 일인체제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규범이 등장했는가?

-68세 규정 

먼저 68세 규정은 철저하게 준수되었다. 즉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군위, 중앙기위에서 68세 이상자는 모두 예외 없이 퇴임했다. 왕치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앙기위 서기인 왕치산의 거취는 이번 인선에서 최대 쟁점이었다. 많은 언론과 학자들은 시진핑이 왕치산의 유임을 위해 68세 규정을 깰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로 공산당 중앙판공청 부국장인 덩마오성은 2016년 10월의 한 기자회견에서 68세 규정을 "민간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면서 19차 당 대회에서는 이 규정이 변경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68세 규정은 예외 없이 지켜졌다. 이는 향후 엘리트 정치와 관련하여 큰 의미가 있다. 시진핑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이 규정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2022년 공산당 20차 당 대회에서 69세가 되는 시진핑이 이를 무시하고 권력을 연장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권력기구의 구성과 세력균형의 규범 

권력기구의 구성 규범도 지켜졌다. 먼저,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전처럼 공산당의 총서기(시진핑)와 상무 서기(왕후닝), 국무원의 총리(리커창)와 부총리(한정), 전국인대 위원장(리잔수), 전국정협 주석(왕양), 중앙기위 서기(자오러지)로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당정기구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체제가 유지되었다. 동시에 당정기구의 책임자에게 일정한 권한을 인정해주는 일종의 권력분산 체제도 유지되었다. 정치국의 구성도 마찬가지다. 정치국원에는 4대 직할시(차이치, 리훙중, 천민얼, 리시), 광둥성(리창), 신장자치구(천취안궈)의 당서기가 포함되었다. 또한 중앙군위 부주석 2인(쉬치량과 장여우샤)도 정치국원에 선임되었다.  

세력균형의 규범도 준수되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시진핑 세력(시진핑, 리잔수, 자오러지), 공청단파(리커창, 왕양), 상하이방(한정), 무당파(왕후닝) 등 주요 정치세력을 포함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공산당 18차 당 대회(2012년)보다 이번이 더욱 세력균형의 규범에 맞게 구성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때는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에서 리커창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광의의 시진핑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여러 세력이 협의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총서기인 시진핑의 발언권이 가장 강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시진핑의 절대권력 혹은 일인체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국의 경우에는 정치국 상무위원 7인을 포함하여 모두 25인 중에서 시진핑 세력이 13인을 차지하여 다수파가 되었다. 그 결과 시진핑 세력이 정치국을 주도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이들이 다수파라고 해서 다른 정치세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공산당 17차(2007년) 및 18차(2012년) 당 대회 때에도 정치국의 세력 분포는 이와 유사했다. 즉 상하이방-태자당이 다수파였지만 공청단파도 일정한 지분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세력균형이 유지되었다. 이전의 당 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정치국 구성을 놓고 시진핑 일인체제가 형성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차기 지도자의 사전 결정 규범  

그런데 차기 지도자의 사전 결정 규범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것이 이번 인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당 대회 전에 광둥성 당서기 후춘화와 충칭시 당서기 천민얼이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임될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차기 지도자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하지 못했다고 해서 후계자 선임 과정이 이번 당 대회에서 중단된 것은 아니다. 대신 이번에 차기 지도자의 사전 결정 방식이 '다수 후보의 경쟁을 통한 결정 방식'으로 바뀌고, 바뀐 방식에 따라 후계자 선정 과정이 진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후춘화는 정치국원에 유임되면서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되었고, 그가 국무원 부총리에 기용되어 능력을 입증한다면 차기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천민얼과 딩쉐상(공산당 중앙 판공청 주임)은 정치국원에 선출됨으로써 차기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이번에 6세대 지도자가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지 않은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후계자 사전 결정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폐지되었을 수 있다. 공산당의 설명에 따르면, 이번에 6세대 지도자를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폐단으로는 후계자의 보신주의와 교만한 태도, 후계자가 느끼는 과도한 압력과 반대파의 공격으로 인한 불필요한 갈등의 발생, 더 좋은 후계자가 선정될 가능성의 차단 등이 지적되었다. 이런 지적은 일리가 있다. 따라서 당내 합의를 통해 후계자 사전 결정 제도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현재까지 거론되는 6세대 지도자들이 자질이 부족하고 업적이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후춘화는 경험은 많지만 혁신정신이 부족하고, 업적도 출중하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그는 차기 지도자가 되기 위해 지나치게 신중하게 행동하는 보신주의 행태를 보인 측면이 있다. 반대로 천민얼은 과감성이 있고 진취적이지만 경험과 업적이 부족한 것이 흠이다. 즉 천민얼은 아직 검증된 지도자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차기 지도자를 결정하기보다는 더 많은 후보에게 기회를 주어 경쟁을 유도하고, 5년 후에 능력과 업적을 보고 최종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진핑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그렇게 했을 수 있다. 시진핑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만약 경쟁 집단의 지도자가 총서기 후보로 선임될 경우에는 권력 누수(lame duck)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즉 차기 지도자를 중심으로 경쟁 집단이 세력을 결집하여 시진핑 세력에 대항할 수 있다. 따라서 후계자 선정을 주도할 수 없다면 연기하는 것이 시진핑의 입장에서는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   

6세대 지도자가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지 않음으로써 엘리트 정치에 몇 가지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우선, 향후 5년 동안 후계자 선임을 둘러싸고 6세대 지도자 들 사이에, 또한 주요 파벌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엘리트 정치에 불안정을 초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경쟁이 파벌 간의 갈등으로 비화한다면 엘리트 정치의 안정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은 있다. 또한 이번 조치로 시진핑의 권력이 강화될 것이다. 앞으로 6세대 지도자들이 후계자로 선정되기 위해 충성 경쟁을 전개할 것이기 때문에 시진핑은 이들을 통제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뜻에 따라 후계자를 선정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차기 지도자가 선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공산당 20차 당 대회 이후에도 시진핑이 총서기 직위를 유지할 것으로 예측하거나, 시진핑이 직위에서는 물러나지만 덩샤오핑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리라 예측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시진핑이 68세 규정을 어기고 총서기를 계속하기는 어렵다. 또한 제도 권력은 직위에서 나오기 때문에 시진핑이 직위에서 물러나면 영향력은 약화된다. 다만 현재 진행 중인 군 개혁을 구실로 시진핑이 중앙군위 주석을 유지한다면 이는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즉 이를 이용하여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지도자 후보 추천 방식의 변화 

공산당 지도부의 인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후보 추천 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민주추천회 제도가 폐지되고 '면담 조사 방식'이 도입됐다. 이는 매우 중요한 변화다. 2017년 4월 24일에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19기 중앙 영도기구의 인선 방안'을 결정했다. 이때부터 6월 말까지 시진핑과 다른 '중앙의 관련 지도자 동지들'(인선에 참여한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추정)은 정치국원,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기위 위원, 중앙군위 위원의 후보를 추천 받기 위해 일정한 범위 내의 고위급 인사를 대상으로 개별 면담을 진행했다. 

먼저 시진핑은 '현임 당 및 국가 지도자, 중앙군위 위원, 당내 원로' 등 57인을 면담하여 후보 추천에 대한 이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다른 '중앙의 관련 지도자 동지들'도 중앙과 지방의 장관급 고급간부, 군의 전구(戰區) 책임자, 18기 중앙위원 등 모두 258인을 면담했다. 비슷하게 '중앙군위 책임자 동지', 즉 주석과 부주석도 군 책임자 32인의 의견을 청취했다. 종합하면, 모두 347인이 후보 추천에 참여했는데, 이는 중앙위원(후보위원 포함)과 정치원로를 합한 규모와 대체로 일치한다. 즉 후보 추천에 참여한 인사의 규모는 민주추천회 제도를 실행할 때와 비슷했다. 다만 이들이 후보를 추천하는 방식이 투표에서 면담으로 바뀌었다. 

면담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세 가지의 자료가 주어졌다. 면담 조사 배치, 현임 당 및 국가 영도간부 명부(名冊), 장관급 당원 영도간부 명부가 그것이다. 첫째는 후보 추천과 관련된 규정과 절차를 설명한 자료다. 둘째 및 셋째는 피추천 대상자(pool) 인사 자료다. 면담 장소는 공산당의 권력기구가 밀집한 중난하이였고, 면담 시간은 충분했다고 한다. 추천에 참여한 면담 대상자들은 절차에 따라 인사 자료를 읽고 후보 추천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했다고 한다. 

추천된 후보를 대상으로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정치국은 심의를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후보 목록이 만들어졌고, 2017년 9월 25일에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심의를 거쳐 '19기 중앙 영도기구 구성원의 인선안(초안)'을 결정했다. 이후 중앙기위와 중앙 조직부는 이를 심의하고 그 결과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서면 보고했다. 중앙군위도 '19기 중앙군위의 인선안'을 심의하고 그 결과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서면 보고했다. 일종의 인사 검증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2017년 9월 29일에 정치국은 '19기 중앙 영도기구의 인선 건의 명단'을 결정했다. 이것은 당 대회 폐막 다음날에 개최된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9기 1중전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렇다면 왜 면담 조사 방식이 도입되었을까? 공산당의 설명에 의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첫째, 민주추천회는 후보 추천 기제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민주추천회가 개최되면 350~400인의 중앙위원(후보 포함)과 정치원로가 중앙 조직부가 준비한 약 200명의 예비후보(장관급 인사)를 대상으로 정치국원과 정치국 상무위원을 추천하는 투표를 실시했다. 그런데 이들이 예비후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투표하는, 즉 인정표(人情票)나 관계표(關係票)를 던지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둘째, 저우융캉, 쑨정차이, 링지화 등 "정치적 야심가와 음모가들"이 민주추천회 제도를 악용하여 서로 결탁하여 득표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심지어 뇌물로 표를 사는 "불법적이고 반당적인 활동"까지 감행했다. 이를 보충 설명이나 하듯이, 중앙기위의 업무보고는 "저우융캉, 쑨정차이, 링지화 등이 당의 정치규율과 정치규범을 엄중하게 위반했고, 정치적 야심이 팽창하여 음모 활동을 전개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당대회 기간에 대표단이 업무보고를 심의할 때, 증권 감독관리위원회 주석인 류스위는 쑨정차이가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 쉬차이허우, 궈보슝과 함께 "당내 높은 지위에서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매우 탐욕스럽고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당권 찬탈 음모를 전개하여 우리를 서늘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사실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 등이 구속되었을 때부터 이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하였다느니, 시진핑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다느니 하는 다양한 소문이 돌았다. 다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추측만 있었지 중국 당국에 의해 확인된 것이 없었다. 이번에 이것이 확인됐다. 보시라이, 링지화, 쑨정차이가 민주추천회 제도를 이용하여, 즉 중앙위원(후보위원 포함)을 대상으로 조직적으로 득표 활동을 전개하여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려고 획책했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은 이를 "정권 찬탈 음모"라고 비판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유로 민주추천회 제도는 폐지되었다. 이는 시진핑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 제도를 폐지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면담 조사 방식의 도입은 시진핑의 권력 강화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먼저, 민주추천회 제도가 폐지되면서 중앙위원과 정치원로들은 무기명 비밀투표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기회를 잃었다. 대신 이들은 시진핑 및 정치국 상무위원과의 면담을 통해 의견을 말해야 하는 곤혹스런 상황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들이 시진핑의 의사에 반하는 인사를 후보로 추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시진핑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후보가 추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후보 명단을 심의하는 과정에서도 시진핑의 의견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민주추천회 제도에서는 객관적인 투표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총서기가 득표 순위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로 2007년 5월에 실시된 민주추천회 투표에서 시진핑이 최다 득표자였기 때문에 후진타오는 자신이 선호했던 리커창 대신에 시진핑을 총서기 후보로 추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별 면담을 통해 수집된 자료는 객관적인 수치로 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인사 문제에서 최대 발언권을 보유한 총서기가 자신의 선호에 맞게 후보를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다만 시진핑도 면담 조사를 통해 확인된 당내 의견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인선 과정에서 파벌 간의 세력균형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밖에도 이번 인선에서는 시진핑이 권력 강화를 위해 추진했다고 하는 몇 가지 조치가 실현되지 않았다. 먼저, 왕치산이 68세 규정에 따라 퇴임했다. 그를 대신한 자오러지도 시진핑과 가까운 인물이지만 정치 업적이나 명성 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왕치산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결국 시진핑은 가장 강력한 정치적 우군을 잃었다. 또한 시진핑이 선호했다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규모 축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 주석제의 도입도 마찬가지다. 다만 시진핑이 실제로 이런 조치들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강력하게 추진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중국공산당 19차 당 대회를 정치·경제·사회·외교·군사 등 다양한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는, 필자가 편집을 담당하고 성균중국연구소가 2018년 3월에 출간할 예정인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시황제’ 파워 원천은 때를 기다리는 ‘은인자중’

‘독재체제’ 구축한 시진핑 中 주석의 절대권력 비결

홍순도 아시아투데이 베이징지국장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1.24(금) 08:00:01 | 1466호


중국은 독재에 너무나도 익숙한 나라라고 단언해도 좋다. 민주주의를 실시해 본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다. 14억 명의 인구가 1949년 이후 70여 년 동안 이어진 공산당 독재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국가 최고지도자가 독재를 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좋은 말로 하면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독주 체제, 조금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 독재 체제가 실제로도 아주 잘 구축돼 있다. 10월24일 막을 내린 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19차 전당대회)에서 이런 구도가 더욱 확실하게 정립됐다. 앞으론 14억 명을 독재하는 공산당을 시 총서기 겸 주석이 그야말로 황제처럼 완전히 좌지우지하게 됐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공산당은 시황제로도 불리는 시 총서기 겸 주석이 막강한 권력을 쥐기 전까지만 해도 집단지도체제 아래서 일사불 란하게 움직였다. 총서기의 주도하에 7인 정원의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멤버들이 권력을 균등하게 분할, 거대한 G2 국가 중국을 황금 분할하듯 절묘하게 통치했다.

 

그렇다면 이런 공산당을 완벽하게 장악한 시 주석의 비결과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비결은 너무나 많다고 해도 크게 무리가 아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사실상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그가 권력을 쥐게 된 가장 큰 비결은 조용히 때를 기다린 성품이다. © 사진=AP연합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사실상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그가 권력을 쥐게 된 가장 큰 비결은 조용히 때를 기다린 성품이다. © 사진=AP연합


 

親기업 성향·아버지 후광·오만하지 않은 인성

 

우선 가장 큰 비결은 역시 튀지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은인자중(隱忍自重)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중국의 과거 외교 전략에 비춰보면 도광양회(韜光養晦·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라고 해도 좋다. 대체로 사람이 너무 과도하게 나서면 다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시 주석은 정반대 유형의 인물로 유명하다. 절대로 튀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납작 엎드리는 스타일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다. 이는 그가 2007년 11월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시 자타 공인의 차기 최고지도자 리커창(李克强) 현 총리에게 극적 뒤집기를 통해 총서기 후보로 낙점되기 전까지 거의 무명에 가까운 정치인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크게 무리가 없다. 여기에 2007년 11월에 정치국 상무위원이 돼 처음으로 베이징에 올라오기 전까지 무려 24년 동안 지방 지도자로 재직하면서 은인자중한 것을 더할 경우 그의 ‘몸 굽히기’는 거의 전율이 느껴질 정도라고 해도 좋지 않나 싶다. 이런 그의 특징은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휘하의 당정 간부들을 질책할 때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좀체 없는 것엔 이런 이유가 있다.

 

뒷배경이나 특정 계파의 지원 없이 기층에서 한 단계씩 올라가면서 실력을 쌓은 것 역시 그의 독주 체제 구축의 비결로 손색이 없다. 진짜 그런지는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우선 그는 젊은 시절인 1983년부터 베이징(北京)과 가까운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서기로 일하면서 당 간부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쌓았다. 이어 1986년부터 2007년까지 푸젠(福建)성, 저장(浙江)성, 상하이(上海)시 등에서 시장, 서기, 성장 등을 지냈다. 또 인대(人大·지방 의회)의 상무위원회 주임, 중앙당교 교장으로도 일했다. 이 정도 경력이면 능력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해야 한다. 막강한 권력을 뒷받침하는 자신의 방대한 인맥 역시 이때 만들었다.

 

권력이 나오는 총구인 군대 경험도 무시하지 못한다. 첫 경험은 칭화(淸華)대학을 졸업한 1979년에 했다. 부총리 겸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인 겅뱌오(耿飇)의 비서로 일한 것. 이때 그의 활약은 진짜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신에게 맡겨진 겅의 업무 스케줄 조정, 내빈 접대, 연설문 작성 등의 일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처리했다. 틈틈이 군 고위 간부들과 교류하면서 인맥도 다졌다. 이 밖에도 그는 지방에서 일하면서 늘 현지의 군구 간부 등을 역임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심지어 당 최고위 직급에 있을 때도 의도적으로 군문(軍門)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2010년 10월 실질적으로 미래의 군권을 장악하게 될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자리에 취임한 것은 이로 보면 우연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야 한다.

 

이른바 비즈니스 프렌들리 성향, 아버지가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習仲勳)이라는 사실,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은 인성 역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위에 적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지는 극강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봐야 한다.

 

 

‘친위부대’ 시자쥔과 만기친람도 힘의 원천

 

당연히 그의 권력은 요지부동의 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하는 것이 완벽하게 장악한 군부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해야 한다. 현재 그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보유하고 있다. 이 상태로도 그의 힘은 막강하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군 요직에 전원 오랜 심복들을 앉히면서 인민해방군을 완전히 자신을 옹위하는 군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이런 단정은 19대에서 당·정·군 주요 기관의 부장(장관) 이상 요직에 기용될 고위급 인력풀인 204명의 중앙위원 명단에 그의 군부 내 최측근들이 대거 진입한 사실을 봐도 크게 무리하지 않다. 우선 쉬치량(許其亮·67)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과 장유샤(張又俠·67), 웨이펑허(魏鳳和·63) 군사위원을 꼽을 수 있다. 모두들 시 주석의 군부 내 측근 장성들로 알려져 있다.

 

리쭤청(李作成·64) 연합참모부 참모장, 먀오화(苗華·62) 정치공작부 주임, 리상푸(李尙福·59) 장비발전부 부장, 장성민(張升民·59) 군기율검사위 서기도 꼽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외에 19대 직전 시 총서기 겸 주석이 임명한 한웨이궈(韓衛國·61), 선진룽(沈金龍·61), 딩라이항(丁來杭·60) 육해공군 사령원(사령관), 저우야닝(周亞寧·60) 로켓군 사령원, 가오진(高津·58) 전략지원부대 사령원 등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 주석 앞에서 충성 맹세를 한 군부 내 최측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설사 가정이라고 하더라도 쿠데타 같은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좋다.

 

군부를 제외한 당정에 널리 퍼져 있는 친위부대인 이른바 시자쥔(習家軍·시진핑 파벌)의 존재도 그의 막강한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무려 24년 동안이나 지방에서 근무하면서 무수하게 많은 당정의 간부들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일찍 출세를 한 만큼 이들의 대부분은 부하들이었다. 그는 이들을 절대 허투루 보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인물이 있으면 꼭 발탁해 측근으로 삼았다. 2007년 상무위원이 돼 미래의 최고지도자로 낙점된 이후부턴 아예 노골적으로 챙기기까지 했다. 가능하면 주변에 두면서 능력을 발휘하게도 만들었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진짜 그렇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리잔수(栗戰書·67) 신임 정치국 상무위원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시 주석보다 3년 연상의 30년 지기로 그의 당내 지지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만든 일등공신으로 부족함이 없다. 총서기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중앙판공청 주임 자리에 있으면서 충성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 아저씨” 대중 인기, 쾌도난마 ‘사정의 칼’

 

리 상무위원의 후임으로 취임한 딩쉐샹(丁薛祥·55) 중앙판공청 부주임도 주목해야 한다. 시 총서기 겸 주석이 2007년 3월부터 10월까지 짧은 기간이나마 상하이 서기를 지낼 때 판공청 주임으로 일했다. 최측근이 될 수밖에 없는 비서실장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시 총서기 겸 주석이 집권한 다음 해인 2013년 중앙판공청 부주임으로 파격적 승진을 했다. 중앙판공청 주임을 거쳐 2022년의 제20차 전국대표대회(20대)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경우 시 주석의 후계자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중앙선전부장으로 승진한 황쿤밍(黃坤明·60) 부부장 역시 시자쥔의 일원으로 손색이 없다. 시 주석이 1985년부터 2002년까지 푸젠성 샤먼시와 푸젠성에서 근무할 때 인연을 맺은 다음 2002년부터 저장(浙江)성 서기로 자리를 옮기자 같이 따라갔다. 측근 중의 측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주군인 시 주석의 강력한 추천으로 중앙후보위원에서 19대에서 25명 정원의 정치국에 입성, 정치국원이 됐다.

 

이외에 천민얼(陳敏爾·57) 정치국원, 리수레이(李書磊·53) 중앙기율검사위원회 부주임, 류허(劉鶴·65) 중앙재경영도소조 주임, 유취안(尤權·63) 중앙서기처 서기 등도 시자쥔으로 불리지 않으면 섭섭한 경우에 속한다. 모두들 시 주석의 권력 강화에 힘을 보탠 최측근으로 불려야 한다. 이들 중 류 주임은 내년 회기가 시작되는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에서 경제 담당 부총리로 선출돼 이른바 시코노믹스(시진핑+이코노믹스)의 정책 전반을 총괄할 것이 확실하다.

 

극강이라는 단어도 무색한 시 주석의 또 다른 힘의 원천으로는 만기친람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많이 가진 국가급 지도자 자리와 시다다(習大大·시 아저씨)로 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는 대중적 인기, 쾌도난마처럼 휘두르는 사정(司正)의 칼 등을 더 꼽을 수 있다. 이 중 특히 사정의 칼은 최측근인 왕치산(王岐山) 전 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의 뒤를 이어 새롭게 시자쥔의 일원이 된 신임 상무위원 자오러지(趙樂際·60)가 쥐게 되면서 더욱 날카로워질 것으로 보인다. 19대 이후에도 시 주석의 권력 강화에 사정의 칼이 이용될 것이라는 말이 된다. 시 주석이 시황제로 불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적확(的確)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더불어 그가 19대를 통해 자신의 집권 2기 시대를 열면서 대관식을 가졌다는 외신들의 보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