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미국의 전쟁과 여론 조작의 역사

일취월장7 2017. 10. 6. 16:23

미국의 전쟁과 여론 조작의 역사

[전쟁 국가 미국]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2017.09.19 01:47:20 
    
미국의 전설적 독립 언론인 이지 스톤(I. F. Stone : 1907~1989년)은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관리들이 거짓을 유포하면서 자신들도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때, 그런 나라에는 곧 재앙이 닥친다"는 말을 남겼다.

1922년, 만 열네 살에 기자 생활을 시작한 스톤은 이후 60여 년간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는 명제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정부의 거짓말을 까밝히는 것이야말로 언론인 본연의 임무라는 게 그의 언론 철학이었다.

그는 또 트루먼 정부 때인 1952년 "국내외적으로 무력에 의한 억압에 의존하는 경향이 점점 더 심해졌다. 세계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내 마음대로 한다'는 오만한 자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면서 미국의 군사력을 앞세운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치른 수많은 전쟁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스톤의 지적이 정곡을 찌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소련과의 핵 군비 경쟁을 비롯해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등 대부분이 불필요한 전쟁, 또는 해서는 안 될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정보 은폐와 왜곡, 조작 등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지난 70여 년간 미국은 국가 안보의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들을 수행하면서 주택, 교육, 의료 등 인간 안보에 쓰여야 할 소중한 자원들을 탕진했다. 이와 함께 민주주의도 파괴됐다.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 경제의 한계를,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 민주주의의 파탄을 보여주는 사태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극단적 테러와 난민의 증가, 강대국 간 군사 대치의 심화 등 혼란으로 치닫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리비아에 이르는 대중동지역은 17년째 계속되고 있는 전쟁으로 난민이 사상 최대로 늘어났고,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나토와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북핵을 빌미로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2차 대전 후 미국 정부의 거짓말에 의해 촉발되고 수행된 수많은 전쟁들이다. 베트남전쟁과 1,2차 이라크전쟁이 대표적이다. 이들 전쟁은 미국의 선택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전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정보 은폐와 왜곡, 조작 등을 통해 여론을 조작했다. 

제임스 코난트가 기획하고 헨리 스팀슨의 이름으로 발표된 <하퍼스>의 '원자탄 사용 결정' 기사는 스톤이 말한 '정부의 거짓말' 중 선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목표는 원자탄을 사용 가능한 전쟁 무기로 대중과 적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정부의 거짓말이 완전한 허위일 경우는 거의 없다. 진실의 외양을 갖춘다. 진실의 일부를 보여주면서 그것이 전체적 진실인 것처럼 말한다. 핵심적 사실을 은폐하거나, 아주 낮은 가능성을 엄청난 위협인 것처럼 과장하기도 한다.  

정부는 이를 국민 설득, 또는 여론 형성이란 말로 미화한다. 반면 비판세력은 여론 조작, 또는 프로파갠다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 비판자들을 오히려 거짓 선동가로 규정한다. 코난트가 핵의 진실을 규명하려 한 작가 존 허시나 레오 실라르드 등 핵과학자들의 노력을 "역사의 왜곡"으로 규정한 것처럼, 정부와 비판 세력 간에는 '무엇이 진실인가'를 놓고 치열한 담론 투쟁이 벌어져 왔다.  

그 결과는 대체로 정부 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따라 미국은 끝없는 전쟁의 수렁에 빠졌다. 미국은 2001년 아프간전쟁 이후 지금까지 17년째 대중동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비록 저강도 전쟁이긴 하지만 미국 역사상 최장 기간의 전쟁이다. 이른바 '긴 전쟁(Long War)'이다. 미군 지휘관들 스스로가 50년 또는 100년, 몇 세대에 걸쳐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면서 일방적 군사주의가 문제의 근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미국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오히려 미국을 끝없는 전쟁의 수렁 속으로 밀어 넣어 왔다는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미국의 대다수 국민들은 이러한 일방적 군사주의를 맹신한다. '전쟁 국가 미국'이 변화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 지난 2002년 1월 29일(현지 시각)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 의회에서 가진 시정연설에서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테러를 지원하는 정권"이라며 "악이 축"(Axis of Evil)이라고 규정했다.이후 1년이 지난 2003년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다.


정보 은폐에 의한 핵무기 정당화 

스팀슨은 원자탄 사용 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은폐했다. 첫째 소련의 대일 참전, 그리고 전후 미소 관계에 대한 고려가 원자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둘째 천황제 유지 보장을 통해 일본의 조속한 항복을 받아내려는 조셉 그루 국무장관 대행의 노력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우선 후자의 경우. 그루 국무장관 대행은 천황제 유지를 보장해준다면 일본이 항복에 응할 것으로 봤다. 이에 따라 트루먼에게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것을 촉구했다. 1945년 1월 국무장관 대행을 맡은 그루는 1932년부터 진주만 기습 때까지 9년 이상 일본 대사를 역임한 미국 최고의 일본통이다.  

그루의 오랜 친구인 스팀슨도 당시 그의 입장에 동조했다. 당초 스팀슨은 <하퍼스> 기사에 '천황제 유지' 논란을 다뤘으나 논점을 흐린다는 코난트의 주장에 따라 삭제했다.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고도 일본을 항복시킬 수 있는 대안이 있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원자탄 사용의 진짜 목표는 소련에 대한 무력 과시였다. 예컨대 트루먼은 45년 5월 15일 자 자신의 일기에 원자탄이라는 신무기가 향후 소련과의 외교 대결에서 '마스터 카드'가 될 수 있다고 적었다. 이른바 핵을 앞세운 강압 외교(nuclear diplomacy)를 시사한 것이다.

그러나 '천황제 유지' 논란이 스팀슨의 초고에 수록된 것과 달리 원자탄과 소련과의 연관성은 애초부터 언급되지 않았다. 원자탄이 소련을 겨냥한 무력 과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스팀슨도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판단했던 것이다. 미국의 도덕성과 원자탄 사용의 정당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 하퍼스> 기사에서 스팀슨은 자신의 개인적 의견이 아니라 정부의 공식 입장을 담았다. 반면 1948년 발간된 자신의 자서전에서는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자서전에서도 원자탄과 소련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부의 검열 때문에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스팀슨 기사가 발표된 직후 그루는 스팀슨에 편지를 보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스팀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만일 트루먼이 천황의 지위를 보다 일찍 보장해 주었다면 "원자탄은 전혀 사용될 일이 없었고...세계 모두가 승자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맥조지 번디에 따르면 당시 스팀슨은 "그루가 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스팀슨과 번디는 당시 마무리 단계에 있었던 스팀슨의 자서전에 그루의 '천황제 유지를 통한 조기 항복' 노력을 새로 써넣었다. 나아가 스팀슨은 그루의 시도에 "전적으로 동의했으며" 그 자신도 트루먼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적었다. 심지어 "언젠가 역사는 미국이 무조건 항복을 고집함으로써 전쟁을 오래가게 했다는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쓰기까지 했다.

자서전에서는 소련과의 연관성도 솔직하게 인정했다. 45년 4월부터 "원자력에 관한 미국 정책의 핵심적 문제들이 소련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음"이 분명해졌으며,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 소식을 접하고 미국 지도자들은 드러내놓고 만족감을 표했다는 것, 그 이유는 원자탄이 소련의 침공에 대비해 서방이 간절하게 원하는 군사적 "평형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러나 원자탄과 소련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딱 여기서 그친다. 그 이유는 미 국무부의 사실상의 검열 때문이었다. 당초 자서전 원고에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9월 11일 자 스팀슨의 메모가 포함돼 있었다. 소련과의 치명적 핵 군비 경쟁을 막기 위해 소련과 직접 솔직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건의였다.  

이와 함께 스팀슨은 번스 장관의 국무부가 "원자탄을 일종의 외교적 무기로 간주"하고 일부 국무부 인사들은 "원자탄을 비장의 외교 무기로 활용하려 하며 (중략) 미국 정치인들은 원자탄을 엉덩이 밑에 깔아놓고 소련 협박에 열을 올리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스팀슨과 번디는 외교적 파장을 우려해 이 부분의 초고를 조지 마샬 국무장관에게 보내 검토를 요청했다. 사안의 민감성을 파악한 마샬은 당시 국무부 정책기획단장을 맡고 있던 조지 케넌에게 자문을 구하게 했다. 초고를 읽은 케넌은 격노했고 스팀슨에게 다음과 같이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만일 이러한 발언들이 스팀슨 씨의 공식 전기에 수록된다면 상당수 독자들은 원자탄 투하가 소련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적에서 결정됐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결론 내릴 것으로 심히 우려됩니다. 그러한 생각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토록 자주 우리의 '핵 외교'를 얘기해 왔으며, 미국이 핵폭탄으로 세계 전체를 위협하려 한다고 비난해 왔습니다" 

(역사학자 바튼 번스타인에 따르면 케난 자신도 46년 말 미국의 원자력 국제 관리 계획을 소련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암묵적 핵 위협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즉 미국 정부는 실제로는 핵 위협을 가하면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위선적 행동을 한 것이다)

결국 이 내용은 스팀슨의 자서전에 실리지 못했다. 역사학자 바튼 번스타인은 만일 이 내용이 자서전에 수록됐다면 미국의 원폭 결정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 원자탄 사용의 진짜 목적이 소련에 대한 무력 과시라는 관점은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65년, 가 알페로비츠가 <핵 외교 : 히로시마와 포츠담>을 출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다. 

스팀슨 기사를 기획한 코난트의 의도는 단순히 '히로시마'라는 과거의 원자탄 사용을 정당화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미래에도 언제든 원자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이를 미국 국민들에게 설득하고 특히 소련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난트는 스팀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자탄 사용에 반대하는 프로파갠다가 저지되지 않고 방치된다면, 원자탄 개발로 확보된 미 군사력의 강점이 약화될 것이고 이에 따라 원자력 국제 통제에 관한 협상을 타결시킬 가능성도 낮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우리가 다량의 원자탄을 보유하고 있고 다음 전쟁에서 주저 없이 사용할 것이라는 점을 소련에 인식시킨다면 소련은 결국 원자력 통제를 위한 국제기구 창설이라는 미국의 제안에 응할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겉으로는 원자력에 관한 국제 통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속으로는 소련에 대한 무력 위협을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미국 정부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성급한 결정이었다고 인정하거나 비판자들의 비판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의도와 결의에 대해 소련에 잘못된 메시지를 주는 셈이라고 그는 우려했다.  

미국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히로시마를 타격했으며, 앞으로도 원자탄을 정당한 전쟁 무기로 사용할 것임을 적들에게 각인시킨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수 개월 후 코난트는 미군 최고 교육기관인 국방대학에서 군 장성들과의 비밀회동을 갖고 미군 고위의 "공식 소식통"이 미래의 전쟁에서 핵무기가 "군사적으로 필요할 경우" 주저 없이 사용할 것이라는 점을 공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스팀슨의 기사가 이러한 미군 방침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면서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핵무기는 정당화됐고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한 핵심적 수단이 될 터였다.

▲ 미국은 히로시마가 안전하다고 했지만 원자폭탄을 맞은 히로시마는 사실상 폐허나 다름 없었다. 사진은 원폭 투하 이후 히로시마의 모습 ⓒ위키피디아


일방적 군사주의의 실패와 지속
 

2차 대전 후 미국의 대외정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군사주의(militarism)'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으로 세계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미국의 의지란 세계를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하는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미국 지도부의 이러한 목표는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막대한 전쟁 특수로 미국 경제가 되살아났을 뿐 아니라 원자탄이라는 절대무기를 보유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으로 독일, 일본 등 적대국은 물론이고 영국, 소련 등 동맹국의 경제도 폐허가 된 반면 미국 경제는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막강한 생산력을 확보했다. 미국 자체는 물론 영국, 소련 등의 전쟁 물자 대부분, 심지어 독일의 전쟁 물자 일부까지도 미국이 생산한 탓이다. 

게다가 미국은 독립 이후 단 한 차례의 전쟁에서도 패배하지 않은 무패의 신화를 자랑하고 있었다. 멕시코전쟁(1846~48년)으로 미국 영토를 3분의 1 이상 늘렸고, 스페인전쟁(1898년)으로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 괌 등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를 획득했으며, 1차 대전을 통해서는 세계 최대의 채권 국가가 됐다. 여기에 핵무기까지 독점했으니 세계 패권을 향한 미국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군사력의 우위가 곧 정치경제적 지배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졌다. 10월에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됐다. 국민당 정권의 중국을 아시아 및 세계 경영의 파트너로 삼으려 했던 미국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진 것이다.  

게다가 세계 자본주의 복원의 핵심 파트너인 서유럽의 경제 회복이 지지부진했다. 이른바 '달러 갭(dollar gap)'이다. 미국은 과잉 생산된 미국 상품을 해외에 팔아야 했다. 당시에는 서유럽이 가장 유망한 소비시장이었다. 하지만 서유럽에는 미국 상품을 살 달러가 크게 부족했다. 경제가 회복되지 않은 탓이다. 서유럽은 살길을 찾기 위해 제3의 길을 모색했다. 미국과 소련 모두로부터 거리를 둔 사회주의, 또는 중립주의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지도부에게 이는 미국의 국익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서유럽이 독자 노선을 걷는다면 미국의 과잉 생산력을 해결할 방도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책으로 나온 것이 국가안보회의 문서 68(NSC-68)이다. 1950년 4월에 작성된 이 극비문서는 군사력의 대대적인 증강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연간 국방비를 기존의 3~4배로 대폭 늘리는 한편 병력 규모도 2~3배로 늘려 유럽에 배치하자는 것이었다.  

서유럽에 대한 경제원조 계획인 마샬 플랜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대대적 군사 원조로 완성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 서유럽의 독자 노선을 가로막는다는 '이중 봉쇄(dual containment)'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국민이 전시도 아닌 평시에 대대적 국방비 증액을 위해 기꺼이 세금을 더 내며, 자국도 아닌 타국(서유럽) 방위를 위해 자식을 군대에 보내겠는가. 그러나 미국 정부는 군부와 학계, 교육계 등의 저명인사들을 동원해 결국은 NSC-68을 관철해 낸다.

있지도 않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과장한 것이 주효했다. 특히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미국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일성 주도의 통일을 위한 내전이 아니라 스탈린 지시에 의한 세계 공산혁명의 전주곡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대대적 재무장에 대한 미국 국민의 동의를 얻어낸 것이다.

이로써 냉전은 미‧소 간의 정치외교적 대결에서 군사적 대결로 전환된다. 이른바 냉전의 군사화다. 1953년이 되면 미국의 군사력은 타국의 어떠한 추종도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 우위를 누린다. 당시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군사력은 라이벌 소련보다 최소 9배 이상 강력했다고 한다. 세계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위다. 1996년 클린턴 행정부가 천명한 '전 부문에 걸친 군사력의 압도적 지배(Full Spectrum Dominance)'는 이미 이때 시작된 것이다. 

소련은 치명적 군비 경쟁에 돌입했고 결국은 스스로 붕괴한다. 한편 미국은 세계에 대한 무분별한 군사 개입, 즉 일방적 군사주의에 돌입한다. 베트남전쟁이 대표적이다.

베트남전쟁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패배하면서 끝날 수 있었다. 뒤이어 열린 제네바회의에서 합의한 2년 내 남북 베트남의 총선거가 실시됐다면 말이다. 이 합의를 파기한 것은 미국이다. 총선이 실시된다면 공산주의자 호치민이 통일 베트남의 지도자가 될 것이 확실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에 아이젠하워 정부는 합의 이행을 거부했고, 미국에 거주했던 가톨릭 신자 응오딘지엠을 앞세워 남베트남에 반공 정권을 세웠다.  

그 결과는 20여 년에 걸친 처참한 전쟁이다. 핵무기 등 압도적 화력의 미국은 보잘것없는 무기를 가진 농민 게릴라들의 항쟁을 꺾지 못했다.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반대도 한몫을 했다. 1968년 테트(구정대공세)의 여파로 그해 3월 존슨 대통령이 재선 출마 포기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베트남전쟁의 승패는 결정 났다. 압도적 군사력의 미국이 베트남 인민의 강인한 독립 의지에 패배한 것이다. 

▲ 1971년 4월 워싱턴에서 벌어진 베트남전 반대 시위. ⓒ위키미디어커먼스


베트남전쟁은 압도적 군사력만으로는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즉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환상임을 드러냈다. 따라서 베트남전쟁은 2차 대전 후 지속돼온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를 포기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1969년 집권한 닉슨은 키신저와 함께 데탕트를 추구했다. 미국 군사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중국과는 관계를 정상화하며, 소련과는 핵 군비통제 협상을 시작하는 등 현실주의 외교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닉슨-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는 1976년을 고비로 파탄에 직면한다.

우선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1974년 8월 사임한다. 1975년에는 훗날 네오콘의 수장으로 활약하는 도널드 럼스펠드와 딕 체니가 포드 행정부의 핵심 요직에 진출한다(럼스펠드는 백악관 비서실장, 체니는 국방장관). 이들은 키신저의 백악관 안보보좌관 직을 박탈하는 한편, 중앙정보국(CIA)의 소련 군사력 평가를 '미국과 대등'에서 '미국보다 우위'로 바꿔치기 한다.  

원래 소련 군사력 평가는 CIA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나 CIA의 당초 군사력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럼스펠드 등은 외부 전문가들로 별도의 팀(Team B)을 구성해 소련의 군사력 위협을 과장했다.  

외부 전문가가 CIA 고유 기능인 군사력 평가를 맡는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CIA 국장이었던 윌리엄 콜비는 이에 저항하다 결국은 쫓겨났고 후임 조지 H. W. 부시가 이를 승인함으로써 소련의 군사력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됐다. 이와 함께 소련과의 군비통제 협상(SALT 2)도 무산된다. 

그리고 1981년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소련과의 군비 경쟁은 다시 격화된다. 특히 이때부터 미국이 전력을 기울인 것은 전략방위구상(SDI)으로 알려진 미사일 방어망의 구축이다. 미사일 방어망은 72년 요격미사일금지조약(ABM) 위반이다. 이 때문에 클린턴 정부 때까지 미사일 방어망 구축은 조심스럽게 진행되지만 2002년 부시 행정부가 ABM조약을 파기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다.  

사실 미사일 방어망은 1960년대 말부터 미 군산복합체의 숙원 사업이었다. 이것만큼 오랫동안 커다란 이윤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은 없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네오콘 등 전쟁 세력이 소련과의 군비 통제 협상에 반대하고 레이건 정부에서 대대적 군비 증강에 나선 것도 미국의 안보 때문이 아니라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현실에 부합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61년 퇴임사에서 경고한 군산복합체의 위험, 군산복합체에 의한 미국 경제의 군사화는 1970년대가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미국 경제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1989년 냉전의 종식은 미국이 군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제2의 기회였다. 실제로 미 국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냉전 종식에 따른 '평화 배당금(peace dividend)'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1991년 1월 미군이 이라크군을 공격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미 국민은 베트남전쟁 패배 이후 최초의 대규모 전쟁에서의 승리에 환호했고, 군부는 자신감을 되찾았으며, 군산복합체는 그동안의 재고 무기들을 처리하는 한편 미제 무기의 대외 판매 기회를 얻었다. 군사주의가 다시 득세한 것이다. 

1차 이라크전쟁(걸프 전쟁)은 과연 불가피한 전쟁이었을까?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미국이 선택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1979년부터 10년간 은밀히 지원한 1차 아프간전쟁과 함께 현재 대중동지역의 내전과 혼란을 초래한 씨앗이었다. 결국 미국은 결코 군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전쟁들 배후에는 전쟁을 가능하게 한 미국 제도권의 치밀한 여론 조작이 있었다.


압도적 '핵근육'의 미국,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이유?
[전쟁 국가 미국] 미국 핵무기, 냉전을 초래하다
2017.10.05 13:27:39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해 스팀슨, 코난트 등 미국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그토록 공을 들여 핵무기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이에 대한 미 국민의 동의를 끌어낸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핵무기가 전후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수단이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을 바탕으로 전후 세계 질서를 미국의 계획대로 형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핵무기가 미국 일방주의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을 앞세워 뒤늦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한 소련을 배제하고 일본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했다. 또한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을 분단했으며 소련에 대한 전쟁 배상을 거부했다. 핵무기가 가져다준 미 일방주의의 승리였다.

하지만 핵무기가 미국의 모든 대외정책 목표를 실현시켜 줄 만능의 보검은 아니었다. 예컨대 소련은 미국의 핵 위협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권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의 핵무기가 중국의 공산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소련의 핵 개발도 저지할 수 없었다. 나아가 미 대외정책의 핵심 목표인 서유럽의 경제 재건도 핵무기로 이룰 수는 없었다.

요컨대 핵무기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대외정책 목표의 일부를 실현시켰지만 모두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특히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지고 10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전후 미국이 누려왔던 전략적, 지정학적 우위는 중대한 위협에 직면한다.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핵 및 재래식 군사력의 대대적 증강이었다.

핵무기는 미소 냉전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또한 미소 대결의 양상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였다. 1945년 8월부터 4년간 미국은 핵 독점에 바탕을 둔 일방주의를 추구했다. 그 결과가 냉전을 낳았다. 1949년 8월 소련의 핵 실험으로 핵 독점이 무너진 후에는 핵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했다(1950-52년). 이후 1965년까지 미국은 압도적 핵 우위를 바탕으로 절대적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 그 결과는 한국전쟁 및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이다. 그러나 핵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가 미국의 승리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이번 회에는 2차 대전 동안 지속됐던 미국과 소련의 협력 관계가 전쟁 직후 대립으로 변화하는 데 핵무기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 원폭 투하 이후 히로시마의 모습 ⓒ위키피디아


핵무기가 없었다면 

'가상의 역사(plausible history)'란 말이 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다면, 또는 일어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예컨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센티미터만 낮았다면 로마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를 유추해볼 수 있다.

전후 국제 상황에 대해서도 만일 미국에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소 관계는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당시 미국 고위 당국자 두 사람의 말을 옮겨 본다.

1945년 4월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와 미국은 지난 150년간 언제나 잘 지내왔다. 러시아는 미국에 우호적이었으며 협력적이었다. 양국의 세력권은 지리적으로 충돌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대체로 충돌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8월 일본이 항복한 직후 모스크바를 방문한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는 4개월 전의 스팀슨과는 달리 전후 미소 관계에 대해 회의적 전망을 내놓았다.

"원자탄이 사용되기 전이었다면 나는 미소 관계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중략) 사람들은 겁먹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다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원자탄 사용으로 미국을 포함한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며 미소 관계의 앞날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는 얘기다.  

만일 1945년 7월 최초의 핵 실험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우선 미국과 소련의 필사적 핵 군비 경쟁이 일어났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는 인류의 절멸을 가져올 핵전쟁의 공포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 안보에 쓰여야 할 소중한 자원이 핵무기 개발에 쓰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지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은 1945년 3월에야 필사적 전투 끝에 오키나와에 상륙할 수 있었다. 미군 전사자는 1만 3000명, 일본 측은 군인 7만 명이 전사하고 오키나와 주민 10만여 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1945년 11월 규슈 상륙, 3월에는 혼슈 상륙을 계획하고 있었다. 예상되는 미군 전사자는 4만 5000여 명.

결국 원자탄이 없었다면 미국은 소련군의 참전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그 경우 미국은 소련과 함께 일본을 점령해야 했을 것이다. 만일 미국과 소련이 일본을 공동 점령했다면 한반도의 분단은 피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소련의 참전 예정일인 8월 8일에 앞서 8월 6일 서둘러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일본의 단독 점령을 위한 것이었다.

원자탄이 없었다면 전후 처리의 핵심 사안인 독일 문제 처리에서도 미국은 또 다른 승전국인 소련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국은 전후 급속한 군대 감축을 단행했다. 1945년 6월 1200만이었던 병력은 2년 후 8분의 1(150만)로 줄었다. 반면 유럽 전쟁의 80%를 감당했던 소련 육군은 1945년 5월 1136만에서 1947년 6월 287만으로 4분의 1 규모가 됐다. 미군 병력의 약 2배다. 즉 유럽에서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은 압도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자탄이 없었다면 미국은 얄타회담에서의 합의대로 소련에 대한 전쟁 보상을 완수하고 독일에 대한 4대국 공동관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경우 독일은 분단되지 않고 소련에 대한 전쟁 배상을 하게 될 터였다. 전후 독일에 대한 소련의 방침은 '통일 독일, 중립 독일'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공동 관리로 통일 독일의 소련에 대한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동시에 약 100억 달러의 전쟁 배상을 받아내 소련 경제를 재건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원자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에 대한 군사 개입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후 미국 세계 전략의 핵심 목표는 세계 경제의 핵심 산업 지역인 서유럽을 미국 경제권에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재래식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한 소련이 무력으로 서유럽 국가들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1950년 1월 미국은 남한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애치슨 선언)을 밝혔다. 그랬던 미국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즉각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원자탄으로 소련의 유럽 침공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자탄이 없었다면 미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미국이 원자탄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다면 그것은 당시 미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의 표현대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적을 상대로 벌이는 잘못된 전쟁"이 됐을 것이다. 

핵무기를 등에 업은 미국의 일방주의 

물론 이상은 '2차 대전 말기 미국이 원자탄을 갖지 못했다면'이라는 가정적 상황에 기초한 일종의 사고(思考) 실험이다. 실상은 이와는 다르게 전개됐다. 7월 16일 트리니티 핵 실험 성공 소식에 "전혀 새로운 자신감"을 갖게 된 트루먼은 일방주의로 치달았다. 반면 스탈린은 미국의 원자탄 개발로 세계의 전략적 균형이 무너졌다면서 핵 개발 추진에 본격 나섰다. 이후 그는 미국의 핵 공격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의 원자탄 사용은 소련의 핵개발을 초래했고 이후 두 나라는 40여년 간 피 말리는 핵 군비 경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민생 안보에 쓰여야 할 소중한 자원이 핵무기 개발에 탕진됐다. 미국의 경우 1995년까지 50년간 약 5조 달러를 핵무기 개발에 사용했다. 그 결과 미국 경제는 군사 수요에 의해 움직이는 전쟁 경제(War Economy), 미국 정부는 전쟁을 일삼는 전쟁 국가(Warfare State)가 됐다. 

소련은 핵 군비 경쟁의 여파로 스스로 붕괴했다. 독일 학자 유르겐 브룬은 냉전에 대해 "소련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한 고의적 군비 경쟁'이라고 말한다.

원자탄을 독점한 미국은 전후 일본 처리에 대한 소련의 참여를 원천 봉쇄하고 일본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확보한다. 1945년 6월 스탈린은 대일본전 참전에 앞서 홋카이도 점령 계획을 세웠다.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거쳐 홋카이도에 상륙하는 계획이었다. 러일전쟁 때 일본에 빼앗긴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수복하는 것은 물론 홋카이도를 점령함으로써 전후 일본 문제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원자탄의 위세에 눌린 스탈린은 38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스탈린은 일본 항복 나흘 후인 8월 19일 트루먼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 영토 일부를 점령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러시아 군이 일본 본토 어딘가에 점령 지역을 갖지 못한다면" 러시아 여론은 "심각하게 나빠질 것"이라며 홋카이도 점령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미국이 소련의 요청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22일 스탈린은 홋카이도 상륙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10월 하순 소련을 방문한 미국 특사 애버럴 해리먼에게 스탈린은 홋카이도 진주가 불허된 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나아가 소련은 태평양에서 미국의 위성국 역할을 맡지 않을 것이라면서 일본에도 독일과 비슷한 '연합국 통제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일본 문제 처리에 소련의 참여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배타적 통제는 미국의 핵 독점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게 스탈린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핵 독점으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한 미국이 소련의 요청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미국의 합의 위반 

미국의 핵 독점은 미국의 대독일 정책에도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소련에 대한 전쟁 배상을 거부했고,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분단했으며 서독의 재무장과 경제 재건을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의 핵심 의제는 독일 문제였다. 루스벨트는 두 가지 기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독일의, 유럽에 대한 안보 위협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차례 세계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전쟁 역량을 뿌리 뽑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의 산업 역량도 약화시켜야 했다. 근대 전쟁에서 산업 역량은 곧 전쟁 수행 능력이기 때문이다.

▲ 얄타 회담(1945년 2월) 당시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위키미디어커먼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여론이 전후 미군의 장기 유럽 주둔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상비군을 가져본 역사적 경험이 없다. 1차 대전 이후에도 대규모 소집 해제를 통해 상징적 숫자의 군대를 유지했을 뿐이다. 따라서 전후 대규모 미 지상군의 유럽 주둔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미군이 철수한 후 유럽은 소련의 독무대가 될 수밖에 없다. 

루스벨트의 선택은 소련과의 협력뿐이었다.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소련, 영국은 독일에 대한 4대 강국 관리, 소련에 대한 대규모 전쟁 배상 등에 합의했다. 미국은 사실상 독일의 중립화에 합의했다. 독일을 단일한 국가로 4대 승전국이 공동 관리한다면 그 결과는 중립화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지배권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 동유럽을 통해 독일의 침략을 받은 소련의 역사적 경험을 고려해서, 나아가 유럽 안보를 위한 소련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독일로부터의 전쟁 배상 규모를 200억 달러로 정하고 이중 절반인 100억 달러를 소련 몫으로 배정했다. 소련의 실제 전쟁 피해는 1280억 달러에 달했지만 현실적 사정으로 고려한 결과였다. 독일군 격퇴의 약 80%를 소련군이 담당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억울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약속들은 미국의 원자탄 확보 이후 거의 모두 물거품이 됐다. 원자탄이 초래한 미국 일방주의 때문이다. 우선 미국은 1946년 5월 미국 등이 관리하는 서독 지역으로부터의 대소련 전쟁 배상을 일방적으로 거부했다. 그 조짐은 이미 트리니티 핵 실험(7월 16일)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소 미국 대사 조셉 데이비스는 1945년 7월 28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국무장관) 번스는 배상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핵실험 성공의 전모가 알려진 이후 배상 문제에 관해 소련을 찍어 누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됐다."

번스는 "뉴멕시코(트리니티 핵실험)의 성공은 우리에게 막강한 힘을 안겨주었다. 결국 우리가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명했다.  

결국 소련은 서독 지역에서 겨우 6억 달러의 전쟁 배상을 챙길 수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관리하던 동독 지역에서 45억 달러를 회수해 모두 51억 달러를 챙겼다. 동독은 인구, 영토, 경제 규모가 서독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즉 동독은 경제 규모에 비해 서독보다 20배 이상의 배상 부담을 떠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동독 경제는 피폐해졌으며 약속된 규모의 전쟁 배상을 받지 못한 소련의 경제 재건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번스의 핵외교 

미국은 얄타회담에서 암묵적으로 합의된 소련의 동유럽 지배권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핵무기의 위력을 앞세워 동유럽마저 미국의 경제적 세력권에 포함시키려 한 것이다.

1945년 9월 11일 시작된, 전후 처리를 위한 런던 외상 회담에서 번스 국무장관은 몰로토프 소련 외상에게 동유럽 국가들에 대해 다당제와 자유선거를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몰로토프는 미국도 이탈리아, 그리스, 일본에서 배타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느냐며 소련은 동유럽에 대해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항변했다.

번스의 공격적 언사에 심사가 뒤틀린 몰로토프는 마침내 "당신은 코트 주머니에 원자탄을 가지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번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우리 남부 사람들 기질을 몰라요. 우리는 주머니에 대포를 넣어가지고 다닙니다. 이런 식으로 차일피일하는 것을 당장 집어치우지 않는다면 (중략) 원자탄을 뒷주머니에서 꺼내 바로 당신에게 안겨줄 거요."

하지만 이러한 번스의 핵외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동유럽에 대한 지배권은 소련 안보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번스의 핵 위협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권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독일의 분단과 서독의 서방 편입 

핵 독점은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소련의 협력 없이도 독일의 안보 위협을 잠재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미국에게 핵무기가 없었다면 소련의 침공도, 독일의 군사적 재기도 막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를 독점함으로써 소련의 침공을 저지하는 것과 함께 독일의 군사적 재기도 억누를 수 있게 됐다. 이른바 이중 봉쇄(Dual Containment)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자신감은 1945년 8월 22일 트루먼, 번스와 프랑스 지도자 드골 장군과의 회담에서 잘 드러난다. 이 회담에서 드골은 1차 대전 이후와 같은 독일의 재기를 우려하면서 독일의 핵심 산업지역인 루르 지역을 국제 관리 하에 둘 것, 라인강 서쪽 지역을 독일 영토에서 제외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독일의 위협을 너무 과장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자탄을 가지고 있는 만큼 어떤 나라도 감히 침략을 꿈꾸지는 못할 테니까요"라고 대답했다.

▲ 1945년 5월 베를린에 입성해 깃발을 내건 소련군. 멀리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인다. ⓒ위키미디어커먼스


미국은 또한 1946년 6월 태평양 비키니 환초에서 트리니티 이후 최초의 핵실험을 단행했다. 미국은 한 달 전인 5월 3일 서독의 대소 전쟁 배상을 중단했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원자탄을 대외 전략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했다.  

비키니 핵실험의 작전 명칭은 '교차로(Operation Crossroads)'. 시기는 번스와 몰로토프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치열한 협상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미국은 핵실험을 통해 강압적, 일방적으로 독일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소련 관영 신문 <프라브다>는 비키니 환초 상의 거대한 버섯구름 사진을 보여주며 미국이 핵전쟁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소련은 독일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요구에 명시적으로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핵무기를 앞세운 미국의 일방주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단일한 독일, 중립화된 독일'을 원했다. 그래야 소련에 대한 안보 위협을 제거하고 전쟁 배상을 받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적이며 통일된 독일을 원했다. 그것이 소련의 국익에 가장 잘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에 일국사회주의 건설을 지향했을 뿐, 독일 등 세계에 대한 공산 혁명을 꿈꾸지도 않았다. 독일의 공산화는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는 "독일에게 공산주의란 암퇘지에게 안장을 올리는 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미국은 독일의 분단을 원했다.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복원을 위해서는 독일의 선진적 경제를 미국 영향권 아래 통합해야 했는데, 통일 독일이 그 길을 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전후 미국은 영국이든 프랑스든 독일이든 유럽 국가들이 독자 노선을 택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독자 노선은 중립, 사회주의, 또는 소련과의 경제 교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주도에 의한 세계 경제 통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9년 5월 8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을 공식 출범시켰다. 서독은 1954년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소련은 1953년 말까지 단일한 중립 독일을 원한다며 이를 위해 동독을 해체할 용의가 있다고 촉구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결국 냉전은 핵무기를 앞세운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가 빚어낸 산물이었다. 이로 인해 2차 대전의 공식 종결은 냉전 이후로 미뤄져야 했다. 독일과 연합국 간의 평화협정은 독일 통일 후인 1990년에야 체결될 수 있었다. 일본과 소련은 아직도 평화협정을 맺지 못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