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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병, 처방전은 페미니즘 -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성범죄를 부르고

일취월장7 2017. 8. 3. 11:22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여자’라는 병, 처방전은 페미니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

노혜경 시인·前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02(수) 13:00:00 | 1450호


어떤 위대한 생각 가운데는 살면서 저절로 깨닫는 것들도 있지만, 대개는 누군가가 고심해서 명제로 정리한 덕분에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생각을 전개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많은 과학적 생각들도 그렇지만, 철학이나 인문학의 수많은 공리들도 알고 보면 누군가가 이미 말한 것이다. 특정한 개인의 발명이 아니라 인류문명이 성숙하면서 말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

 

페미니즘의 가장 힘센 격언은 내 생각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명제다. 이 명제는 개인적인 것을 규정하는 권력이 남성의 것이어서 여성들의 언어나 일상은 언제나 사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옛날에 서울 동숭동 낙산아파트 아래 다가구주택에 살 때였다. 큰방 창문 바로 아래가 골목길이 약간 넓어진 공터였는데, 어느 날 밤에 남성의 폭언과 여성의 비명이 들려왔다. 놀라서 창밖을 내다보니 어떤 남자가 여자를 개 패듯 패고 있었다. 놀란 나는 112에 신고를 했다. 남자는, 경찰이 달려왔는데도 여전히 폭력을 멈추지 않고는 “내 마누라 내가 버릇 가르치는데 경찰이 왜 나서냐”고 했다. 여성은 가정에 속해 있고 따라서 사생활의 영역이므로, 가정폭력은 경찰이 개입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남자인 경찰의 동조였다. 서너 번 신고를 하고서도 그 사건은 경찰이 개입해서가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질질 끌고 다른 곳으로 가는 방식으로 없어져버렸다.

 

2000년 김대중의 방북과 2007년 노무현의 방북은 새삼 느낌이 다르다. 이미 우리는 세상이 변하는 시간대에 살고 있다. 2007년 10월2일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제공

2000년 김대중의 방북과 2007년 노무현의 방북은 새삼 느낌이 다르다. 이미 우리는 세상이 변하는 시간대에 살고 있다. 2007년 10월2일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제공


 

여성 문제를 사적인 영역에 묶어두는 이유

 

이런 일은 특별한 게 아니라 지나치게 전형적이어서 문제다.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된 지금도 아동학대나 배우자 학대를 하는 남성 중 상당수가 이와 비슷한 논리를 들이댄다. 폭력이 범죄 같은 사회적 문제로 보이는 것은 남성들끼리의 영역에서만인 거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것이, 여성들의 문제를 더더욱 사적인 영역에 묶어두는 이유가 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는, 이런 흔하기 짝이 없는 사례를 거론해 보면 아주 쉽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 사례 말고 나의 이 갑갑하고 시시한 일상의 어디가 정치적인 걸까.

 

또 하나 예를 들어보자. 엊그제 케이블TV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보는데, 이재명 성남시장 부부가 등장했다. 모처럼 주말외식을 하기로 한 아내 김혜경씨는 들떠서 남편에게 여러 차례 옷을 갈아입히고, 자신도 계속 옷을 바꿔 입어본다. 그러느라 외출해야 할 시간을 훌쩍 넘긴다. 처음엔 김혜경씨에게 호감을 표하던 남성 패널들은 차츰 김혜경씨를 험담하기 시작한다. 그때 이지애 아나운서가 일침을 놓는다. “이날을 부인은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며칠 전부터 파마도 하고 손톱도 다듬고.”

 

실제로 정치인의 아내인 김혜경씨는 일반적인 가정주부들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감당한다. 남편의 의상을 준비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남편의 준비가 모두 끝난 다음 비로소 자신의 몸단장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 장면을 바라보는 패널들 중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사람은 일하는 아내인 이지애씨밖에 없었다.

 

김혜경씨는 설명한다. 남편의 옷차림이 비난당할 때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고. 공적 영역의 삶이 아내의 위치에 이르면 사생활이 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답답해졌다. 꼭 공직자의 아내가 아니라 해도, 대부분 가정주부의 직을 지닌 여성들이 겪는 일은 엇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엔 어떤 문제가 있다. 아내는 모든 가족의 준비를 끝낸 다음 비로소 자신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 문제. 남편은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바닥나면 화를 내도 되는 문제. 이렇게 나의 일상의 삶이 알고 보면 순전히 개인적으로 사소하거나 특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정말 많다. 그런데도 왜 내가 일상에서 겪는 이런 것들은, 실제로 나를 이토록 괴롭히는 이런 것들은 특별하게 다뤄지지 않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내가 스스로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 덩달아 내 삶 자체를 시시하게 여기게끔 한 기묘한 문화적·사회구조적 어떤 힘이 있다. 내가 스스로 그렇게 선택한 적 없는 내 인생의 초라함. 나를 이렇게 살라고 지시한 적 없는 채로 그리 살게 만드는 그 힘을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아직 페미니즘 얘긴 시작하느라 고생하는 중”

 

처음으로 저 말을 인쇄물로 정리해 낸 것은 캐롤 해니쉬라는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스트였다고 한다. 하지만 저 말은 흡사 공리처럼 이미 떠돌고 있었던 말이었다는 이유로 캐롤은 저 말의 원작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달리 말하면 여자들은 이미 많이 아프고, 아픈 사람들은 병의 원인을 안다. 그 병에 이름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름을 붙여보자. 병의 이름은 ‘여자’. 이름이 생겼으니 처방전을 써보자. 그 처방전을 우리는 ‘페미니즘’이라 부른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보자. 이 처방전은 반드시 여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도 아픈 사람들은 안다. ‘여자’란 말의 복잡한 내용은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그냥 나아가 보자.

 

지난 19대 대선 때 ‘성 소수자’란 이름으로 불리던 사람들을 향한 어느 대선후보의 한마디, “성 정체성은 누가 찬성하고 반대할 일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성 소수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울린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언어가 “너는 틀렸다”라고 규정하는데,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처방전. 이렇게 큰 규모로 약자를 위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적도, 이야기된 적도 처음이다. 이 처방전은 그래서 지금껏 소외됐던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페미니즘은 이전에는, 최소한 백 년 전에는 존재한 적 없었던 종류의 사상이다. 현존문명의 토대가 되는 근대 계몽주의가 만들어놓은 범주 구분이나 기타 분류 체계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들어본 적 없던 사상이어서 이야기하려면 말이 길어진다. 게다가 주로 여자들이 말한다. 어지간히 독하게 말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는다. 요즘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 많이 쏟아지고 관심이 커지는 중이라 흡사 모든 이들이 다 아는 이야기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아, 천만에, 아직 페미니즘 이야기는 시작하느라 고생하는 중이다.

 

그렇더라도, 해 보자. 페미니즘이 작동해 세상이 변화하는 국면은 생각보다 시시하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때 김대중 대통령이 순안공항에 내려서던 순간은 눈물이 앞을 가려 눈을 못 뜰 지경이었지만, 2007년 10·4 공동선언 때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군사분계선의 노란 금을 넘어가던 순간은 똑같이 역사적이었음에도 꼭 옆집 대문 들어서듯 가볍게 갔다. 이미 우리는 가볍게 세상이 변하는 시간대를 살고 있다. 가볍게, 시시하게, ‘이 별것 아닌 것을 아직도 몰라요? 시대에 뒤떨어지지 마세요’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여중생 A]의 미래, 누군지 아니?

중림로 새우젓 (팀명)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8월 04일 금요일 제515호

가정폭력과 따돌림에 시달리는 한 소녀가 있다. <여중생 A> (웹툰 연재 완료, 비아북, 2017)의 주인공 장미래의 좌우명은 ‘호사다마’다. 가족과 또래집단이 세상의 전부인 중학생 시절, 양쪽에서 모두 학대당했다. 그는 “행복한 감정에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나에겐 주제넘은 일이란 걸 잊으면 안 돼(20화)”라며 가정폭력을 견딘다. 학교에서는 “내가 그 애의 급까지 끌어내릴 것 같으니까(32화)” 좋아하는 아이에게 고백조차 하지 못한다. 버거운 현실 때문에 반 아이들의 사소한 시비에도 다툴 힘이 없다. “그냥 나인 게 잘못인 건가(10화).” “오늘 그 말은 나에겐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듯하다(24화).” 열여섯 살 미래는 매일 절망한다.

미래가 안착할 수 있는 공간은 게임 <원더링 월드>뿐이다. 그곳은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 내가 진실로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다른 곳(21화)”이라고 믿고 싶은 공간이다. 자신이 “취해도 탈이 나지 않을 관계(25화)”인 원더피플 길드원이 있는 곳이다. 게임 자체에는 흥미를 잃은 지 오래이다. 하지만 길드 내에서 실질적인 부길마로 인정받고, 운영진에게 게임의 문제를 건의하기도 할 때, 그곳에서만은 자신이 생각보다 괜찮은 인간인 것 같다고 느낀다. 그것은 생리대를 사기 위해 생일 선물로 1000원만 달라는 현실의 미래에게 “네가 태어난 것부터가 실수인데 선물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선물이냐?(51화)”라며 구타하던 아버지 곁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자존이었다.

ⓒ이우일 그림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가상세계인들 어떠랴. 무엇이든 애착을 가지고 뿌리내릴 곳이 있을 때 사람은 튼튼하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미래가 게임에서 얻는 보람과 안정감은 현실로 전혀 전이되지 못한다. 그녀에게 “유일한 진짜”는 <원더링 월드> 안에서의 삶이었다. 자신을 게임 속 인물이라고 믿는 것은 현실의 그녀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학교에서 겉도는 나” “아빠한테 맞는 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나”(67화) 등 현실의 자신은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모든 고통이 평생 지속될 것이라고 여겨졌을 때 미래는 죽음을 결심한다. 게임에 접속해 작별 인사를 남기려 한다.


그것이 미래를 바꿔놓는 계기가 될지는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그날 길드원 ‘희나쨩’, 현실의 현재희를 실제로 만난다. 미래는 친구와 노는 법을 하나씩 배우게 된다. 재희와 놀이공원을 찾았다가 아이들이 소풍을 기다리는 이유가 “친구와 함께하는 것(61화)”임을 배운다. 또한 친구 관계가 “놀아줘서 고마운” 게 아니라 서로 대등하게 다툴 수 있는 관계임을 깨닫는다. 친구의 상처를 못 본 척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친구가 미래의 현실에도 드디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재희와 함께하며 미래는 어둡고 길었던 터널을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남을 함부로 대한 무례했던 과거를 사과하면서…


“사람이 무너지기 전 지탱해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딱 한 명이면 충분하다(85화).” 미래는 현실에 자리 잡기 위해 노력한다. 학교에서도 급우들과 함께하는 조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며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애쓴다. “걔네가 피하는 건데 내가 눈치 없이 구는 걸 수도(74화)” 있어 불안해하면서도 “의자에 앉으면 엉덩이가 데기라도 하는 것처럼 쉬는 시간마다 부리나케 아이들을 찾아(72화)” 간다. 친구들의 취향이 자신과 달라도 친구가 좋아하는 만화책과 아이돌 가수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남을 함부로 대한 무례했던 과거를 사과하면서 한 발짝씩 나아간다.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아무런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아(83화)” 미래는 친구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자기를 편견 없는 포용으로 받아들이는 또 다른 친구들이 한 명씩 늘어간다.

2016년 7월24일 연재된 76화는 웹툰 <여중생 A>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미래의 담임교사가 ‘학생 기초 조사서’를 꺼내든다. 상담을 마치고 나가는 미래를 교무실 밖에서 기다려주는 친구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교사는 비어 있는 미래의 ‘친한 친구들’ 칸에 새로 생긴 세 친구의 이름을 적어 넣는다. 미래에게도 드디어 안착할 친구들이 생겼다. 그것은 미래를 죽지 않고 살아남게 하는 첫걸음이었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성범죄를 부르고

이민경 (작가)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8월 04일 금요일 제515호

지면에 글을 싣는 차례가 돌아오는 한 달 동안은 무엇에 대해 써야 할지 내내 고민한다.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 끊임없이 주제를 바꾼다. 이번엔 유독 더했다. 처음에는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에 대해 쓰려고 했다. 그를 애써 비호하는 남성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다 한 중학교에서 수업 중 벌어진 학생들의 집단 자위 사건을 쓰려고 했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위계관계보다 강력한 성별 위계관계를 짚고 싶었다. ‘그럴 수도 있다’라는 누리꾼의 말이나, ‘집단적이거나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 장난이었다’라는, 절대로 반어관계에 놓일 수 없는 말로 어물쩍 비호하려 드는 교육청과 학교 당국의 문제점을 반드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인·연예인 합성 신고 계정’을 본 순간, 그럴 수 없어졌다. 최근 트위터에는 지인이나 연예인의 사진을 포르노 사진과 합성해주는 소위 ‘능욕 계정’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런 계정이 삭제되기 위해서는 사용자들이 일일이 트위터 본사에 신고를 해야 한다. ‘신고 계정’은 신고해야 할 목록을 한데 모아 사용자 개개인의 수고를 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나 역시 이 계정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신고할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 텐데 덕분에 손쉽게 신고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짧은 시간 안에 능욕 계정 대부분이 사라졌다.

ⓒ정켈 그림

미디어에 퍼져나가던 폭력에 미디어의 특성을 확실하게 파악한 여성들이 효율적인 방법으로 대항한 것이다. 멋진 승리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구조적인 폭력을 어디까지 개개인의 선의와 노력에 기대야 할지 암담하기도 했다. 몰래카메라에서부터 ‘능욕 계정’까지, 여성의 신체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침해되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몰카나 능욕 계정 따위가 퍼지는 속도와 범위는 빠르고 광대해진다. 오래된 폭력의 새로운 모습에 그저 막연해지는 순간 기발한 대응법이 등장하고, 그렇게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 또 다른 폭력이 나타나 다시 망연해지고….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여성들은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되던 순간들을 언젠가부터 성폭력이라는 말로 정확하게 불렀다. 흩어져 존재하던 폭력을 한자리로 모았고, 그것을 제재할 법의 테두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등장했고 피해자의 이름을 딴 사건을 가해자의 이름을 붙여 다시 고쳐 부르기도 했다. 피해자에게만 꽂히던 비난의 화살을 가해자에게로 돌리는 데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요즘은 법이 만들어지고도 한참 동안이나 남성 중심적으로 기울던 판결마저 조금씩 뒤집히는 모습이 보인다. 여성들로 하여금 신고를 주저하게 만들었던 무고죄가 힘을 잃어가고 있으며, ‘혐의 없음’이 무죄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점점 더 많이 들려온다.

여성들은 그렇게 새로운 성범죄에 함께 대응한다

여성들은 오랜 시간 성폭력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다음 세대를 지켜내기 위해 이미 아주 많은 것들을 해왔다. 하지만 성폭력은 날로 기승을 부린다. 세상의 모든 진보에도 꿈쩍 않고 한 치도 변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기술의 발전에 완벽히 적응해 한층 더 교묘해지고 저열해졌다. 여성들은 새로워진 성폭력의 양상에 걸맞은 대응 방식을 개발해내면서 매일같이 치열하게 싸운다. 그런데도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제자리이거나 더 나빠지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탁월한 방법을 생각해내면, 성폭력은 근절될까. 당연히 아니다. 지금의 고통은 여성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폭력은 저지르는 자가 멈추지 않고서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