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주 3일 노동 사회'를 말할 때
[프레시안 books] 황광우의 <촛불 철학>
"아프면 하늘의 뜻에 맡기고, 잠은 이슬 맞고 하늘 보면서 자고, 가고 싶은 곳은 군내버스가 데려다 주는 곳까지만 가련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제도가 정말 좋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공적인 의료보험의 보장률은 63퍼센트 정도다. 의료보험 비적용 항목이 너무나도 많은 현실에서 중병에 걸릴 경우 의료비는 서민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태에 이르렀다. 전국 어디에서나 삶의 터전인 집은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엄청난 집값 때문에 지방에서 서울로의 이사는 꿈도 꿀 수 없고, 지방에서마저도 개발과 재개발의 명목으로 살던 곳에서 쫓겨나 갈수록 주변부로 내몰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광주와 서울을 오가는 기차(KTX) 승차비가 10만 원에 이를 정도로 높은 교통요금 때문에 어디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다. 내 친구는 이러한 현실을 체념조로 한탄했다.
황광우의 신간 <촛불 철학: 문재인 정부에 보내는 한 철학도의 물음>(풀빛 펴냄)을 읽으며, 친구의 한탄이 떠올랐다. 내 친구는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의 중고등학교에서 30년 이상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오랜 세월을 안정적인 공무원으로 산 내 친구의 현실 인식이 이러할진대, 저임금의 늪에서 허덕이며 생계의 벼랑 끝에 내몰린 수많은 우리 이웃의 마음은 어떨지.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청년, 동일한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도 정규직 노동자 절반의 임금을 겨우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 시간 당 6500원도 못 받는 시간제노동자(알바), 하루 12시간 일을 해도 100만 원을 겨우 받는 영세업체 노동자, 문을 열자마자 얼마 못 버티고 파산하는 생계형 자영업자의 신음이 들린다. 이 신음이 지옥의 소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아름다운 선율이란 말인가?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는 신조어가 '헬조선'이다. 헬조선은 어디에서 어떻게 왔을까? <촛불 철학>에서 황광우는 상세한 자료와 통계 수치를 바탕으로, 헬조선의 근원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권력자와 재벌이 뇌물과 특혜를 주고받으며 쌓아온 정경유착과 부정축재, 부정부패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개발독재 과정에서 재벌이 권력자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친 반대급부로 훨씬 많은 특혜를 받으며 성장하고, 권력자는 부를 부정하게 축적한 과정을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또 장시간 노동으로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한 노동자가 성장의 결실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저임금의 덫에 허덕인 이유가 정경유착과 부정축재의 폐해임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정경유착은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세계화를 외친 김영삼 정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도 여전히 공고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권력자와 재벌의 정경유착과 부정축재에 관해 영화보다 생생한 보고서다.
주 3일 노동하는 나라
<촛불 철학>은 단순히 헬조선의 근원을 찾는데 그치지 않는다. 어떻게 헬조선 사회를 극복할 것인지에 관한 대안을 제시한다. 어떻게 모두에게 자유롭고 행복한 '웰(페어)조선'을 만들어 갈 것인가? 저자는 자신의 발칙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근거한 '주 3일 노동제'를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미래로 본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600만 명이고, '사실상의 청년 실업자'가 400만 명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 한 사회에서 5명은 하루 8시간 진골을 빼며 과다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5명은 일자리가 없어 탱자탱자 놀고 있다. 어떻게 할까? 간단하다. 10명이 다 같이 4시간씩 일하면 된다. (…) 2천만 명의 임금 노동자가 주 5일 일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5백만 명의 청년들이 취업을 하지 못하고 경제 활동 밖에서 서성이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간단하다. 2500만 명이 다 같이 주 4일 일하면 된다. (…) 내가 구상하는 '주 3일 일하는 사회'는 '주 4일 노동과 주 2일 노동'이 공존하는 사회이다. 주 4일 노동은 정규직이고, 주 2일 노동은 파트타임 노동이다. 단, 조건이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준수한다. 주 4일 일하는 사람이 연봉 4천만 원을 받을 경우, 주 2일 일하는 사람은 연봉 2천만 원을 받는다."
저자의 '주 3일 노동제'는 현재 시점에서는 하나의 가설적 제안이지만, 나는 이 제안이 실현 불가능한 몽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세계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필연적으로 노동 시간을 단축해 왔다.
인공지능 로봇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이 현재와 같은 속도로 진행된다면, 전 세계적으로 산업의 모든 부문에서 기계가 급속한 속도로 인간을 대체하는 것은 필연일 것이다. 국제기계협회의 전 회장 윈피싱어(William Winpisinger)가 1990년대 중반에 제기한 "향후 30년 이내에 세계 전체 수요에 필요한 모든 재화를 생산하는 데 단지 현 세계 노동력의 2%만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 정부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마당에 어떻게 '사실상의 청년 실업자' 400만 명의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밖에 해결책이 없다는 저자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주 3일 노동 사회'와 전제 조건
저자가 그리는 주 3일 노동 사회는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일을 할 수 있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주 4일의 노동과 주 2일의 노동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경쟁하며 악조건 속에서 장시간 노동(과다 노동) 할 필요가 없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정도의 노동(필요 노동)을 하면 된다. 그러면 인간은 주 3일이나 5일(일요일 포함)의 여유 시간에 "팔아먹기 위한 생산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과 감정, 의지와 열정을 드러내는 창조적 활동, 그러면서 그 활동의 성과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사회적 봉사로 이어지는 활동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사회로 가는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교육과 의료의 확실한 사회 보장이라는 저자의 진단은 정확하다. 하지만 저자의 소망과 달리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교육과 의료는 공공성이 점점 더 약화되었다. 이미 교육과 의료 기능 상당 부분이 시장 영역으로 넘어가 개인 부담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났다.
주거 문제도 중요한 전제 조건의 하나다. 평균 5억 원에 달하는 서울의 아파트를 한 채 마련하려면 젊은 부부가 매년 2000만 원씩 25년을 모아야 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필요 노동만을 할 수 있는가? 서울만의 문제도 아니다. 전국의 땅이 투기꾼의 먹잇감이 되었다. 웬만한 중소도시의 아파트도 평당 가격이 1000만 원에 이르는데 연소득 2000만 원 내외의 임금 노동자가 어떻게 집을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주택 문제를 모두 다 시장에 맡기지 말고 정부가 적절하게 개입하라고 촉구한다. "공공주택을 청년들에게 제공하라." 물론 부동산 투기로 부를 축적해 온 1퍼센트의 사람들은 격렬하게 반대하겠지만 말이다.

▲ 이제 성장 프레임을 버리고 노동 시간 단축을 얘기할 때다. ⓒ프레시안(최형락)
성장 프레임의 덫
독재정권 시절의 정경유착과 부정축재에서 비롯한 부의 편중과 불평등은 1987년 민주화를 쟁취한 이후에도 더 심화했고, 앞으로도 개선될 가능성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경제가 성장하면 풍요롭고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왔다. 나온 지 거의 50여년이 되어가는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로 시작하는 노래가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다양하게 우리의 머릿속에 주입했다. 이 생각은 국민 모두의 머릿속에 주문처럼 박혀 있다. 저자는 독재자 박정희가 민중을 유혹하기 위해 내건 성장(만능주의) 프레임의 강고함이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부가 편중되고 불평등이 심화한 원인임을 단언한다.
"박정희는 갔지만, 박정희가 만든 프레임, 성장주의의 프레임은 강고하였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독재자들과 싸웠으나, 독재자들이 추진한 성장주의 프레임을 깨지 못하였다. 그것이었다."
성장이란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엇이 떠오르는가? 씨에서 뿌리가 나고 움이 트고 싹이 트고 가지가 나고 몸통이 불어나 열매를 맺는 식물(특히, 나무)이 떠오르고, 갓 태어난 상태에서 몸집이 커가는 동물(특히, 사람)이 떠오른다.
사람은 갓난애로부터 유아기와 아동기, 사춘기를 거쳐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를 비롯한 많은 타인과 관계를 맺어, 그들의 지원을 받으며 신체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한다. 성인이 아동보다 많은 일을 할 힘을 지니고 있기에, 어린 시절 우리는 빨리 어른이 되길 바란다. 나무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우리는 다 자란 나무를 어린 나무보다 귀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나 나무의 성장에 대해 우리가 가진 생각 체계가 성장 프레임이다.
경제와 성장이 결합한 어구 '경제 성장'은 바로 우리가 경제를 성장 프레임 내에서 이해함을 예시한다. 이 프레임에서는 경제를 '사람'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성장하기 전 한국 경제는 미성숙한 아동이고, 엄청나게 성장한 한국 경제는 튼튼한 성인이다.
부모가 어린자식이 어서 빨리 튼튼하게 자라나기를 바라며 온 정성을 쏟듯이, 모든 국민은 경제가 빨리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합심하여 죽어라고 일했다. 그 결과, 미숙아 상태의 경제는 오늘날 건강한 성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 다 자란 경제의 결과물을 일부 사람(재벌)만이 소유해 버렸다. 온 마을이 합심하여 한 아이를 키웠는데 성인이 된 아이의 성취를 한 가정이 다 차지한 셈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 큰 아이를 두고 "이 아이가 몸집이 조금만 더 불어나면 더 많은 것을 가져다 줄 거야."라는 헛된 믿음을 되뇌고 있다.
물론 성장 프레임에서 경제는 '나무'일 수도 있다. 이때 발전하기 이전의 경제는 어린 나무이고 상당히 발전한 경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정도로 자란 나무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어린 나무(가난한 경제)가 자라 열매(부)를 맺으면 그 열매를 함께 나누어 가지리라 기대하며, 열심히 거름(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주면서 합심해서 커다란 나무(풍요로운 경제)로 키웠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나무가 열매를 맺자 힘 있는 몇 사람(권력자와 재벌)이 와서 열매를 쓸어 담았다. 해마다 자신의 몫으로 남는 열매가 줄어드는 상황에도, 사람들은 나무가 더 자라서 더 많은 열매를 맺으면 자기 몫이 늘어나리라는 몇 사람의 말을 믿고 50년이나 넘게 나무를 키우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고도 여전히 "이 나무가 조금만 더 자라면 우리에게도 많은 열매가 돌아올 거야."라는 믿음을 허망하게 붙잡고들 있다.
성장주의를 타파하라
저자는 성장 프레임을 타파하지 못하면 권력과 재벌의 야합, 비정규직 차별, 실업과 시험에 얽매인 청년의 고통, 부동산 투기 광풍, 생계비에 못 미치는 최저임금의 덫은 계속될 것이라고 단언하며 성장 만능주의 신앙의 타파를 격하게 역설한다.
"1965년도 한국인의 일인당 지엔피(GNP)가 100달러였다. 2010년도 한국인의 일인당 지디피(GDP)가 2만 달러를 상회하였다. 불과 45년 만에 200배로 소득이 증가하였다. 우리의 행복도 200배로 증가했는가? (…) 핸드백에 4000만 원짜리 현금 통장을 20-30개씩 넣고 다니며 돈을 넣고 빼는 졸부들이 (…) 20만 명이라 치면, 전체 경제 활동 인구 2000만 명의 딱 1%다. 까놓고 말하여 지난 40년의 고도성장 과정은 이들 1%의 졸부들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경제 성장이었다. 그렇게 1%의 졸부들이 100억 원대의 자산을 축재하고 있는데, 지금 1300만 명 노동자들 중 57%에 달하는 700만 명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한 달 50~60만 원 하는 박봉에 시달리고 있다. (…) 한국인에게 성장주의는 일종의 모태 신앙이다. (…) 성장주의는 재벌을 우리의 구세주로 각인시켜 놓았다. 성장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졸부들의 개 신세를 면할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이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 놓은 성장(만능) 프레임으로 인해, 거의 모든 한국 사람은 재벌이 성장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자신들을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 줄 구원자라고 믿었다. 성장 프레임에서 '성장은 절대 선'이었고 '재벌은 구세주'였다. 은유가 단지 언어의 장식적 수단이 아니라 사고와 인지 과정의 중요한 부분으로 우리의 언어생활은 물론,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지배한다는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말처럼 '성장은 선'이나 '분배는 악', '재벌은 구세주', '성장주의자는 선한 영웅', '분배주의는 악당'과 같은 은유가 우리의 삶을 지배해 왔다.

▲ <촛불 철학>(황광우 지음, 풀빛 펴냄) ⓒ프레시안
인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어떤 사람의 대동맥과 심장이 다른 기관으로 가는 영양분을 다 빼앗아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아니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 얼마 살지 못할 것이다. 설령 기적과 같이 생존한다 해도 심각한 병자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와 같은 재벌이 경제성장의 과실 대부분을 다 가져간다면 '한국 경제'라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얼마 못가서 죽을 것이다. 인체의 모든 기관이 균형 있게 영향을 섭취하여 성장한다고 해도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더 성장하기란 어렵다. 사람이 신장 3미터, 몸무게 300킬로그램까지 자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듯 경제도 무한히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프레임은 세상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구조화된 지식 체계로서 마음속의 창에 비유된다. 어떤 프레임이 마음속에 일단 자리 잡으면, 이 프레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일종의 덫이다. 어떤 프레임으로 인해 죽음에 비견되는 고통을 경험할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새로운 프레임으로 눈을 돌릴 수 있다. 프레임 이론을 만든 레이코프의 말이다. 80퍼센트에 이르는 경제활동인구가 생계의 벼랑 끝에 내몰린 지금이 바로 성장 프레임을 버릴 때라고 역설하는 저자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 많은 사람이 <촛불 철학>을 읽어 성장만능 프레임에서 벗어나 왜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어떻게 일자리를 공유해야 하는지를 성찰해 주 3일제 노동 사회로 나아가는 길에 함께하기를 소망한다.
미래 세대가 지금 연금제도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막내를 위한 이불 속 밥 한 그릇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오래 전에는 귀가가 늦어 저녁 밥상에 앉지 못한 식구가 있으면, 밥 한 그릇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 주인의 귀가를 기다렸다. 풍족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어도, 돌아오지 않은 가족의 밥그릇은 남아 있었다. 그 식구가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올 수도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그릇 밥은 남아 있어야 했다. 그게 가족의 연대이다.
그래도 밥그릇을 남겨두는 이유
연대가 커지면 사회적 제도가 된다. 누구나 언젠가 노인이 되어 노동 시장을 떠난다. 생업이 끊기고 소득이 없어지는 사회적 약자가 된다. 그래서 세대 간의 연대로 세대의 어려움을 분담하고 최소한의 생계를 지켜주려는 제도가 만들어진다. 그 핵심이 연금이다.
연대를 약속했다고 모두가 똑같이 기여하지는 않는다. 분담하다 보면 현실적으로 많이 부담하는 세대와 적게 부담하는 세대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다른 세대에 비해 동료들이 많은 세대는 적게 부담할 것이며, 다른 세대에 비해 동료들이 적은 세대는 많이 부담해야 한다. 호황기 세대는 부담이 적을 것이고, 불황기 세대는 부담이 클 것이다.
연금을 수령액에서도 세대 간의 격차가 발생한다. 적게 기여하고 많이 받는 세대와 많이 기여하고 적게 받는 세대의 차이가 생긴다. 인구 수나 경제 상황을 예측하여 불공평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다. 미래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혹자는 당장 경제적 곤란을 겪는 노인들이 많으니 이후에 연금기금이 고갈되어 젊은이들에게 보험료를 무리하게 걷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지금 더 많은 금액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 수 없는 미래를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고, 스웨덴이나 독일에서는 연금 기금이 고갈되어 매년 발생하는 연금수요액을 그해 거두는 연금 보험료로 충당하면서도 연금제도가 무리 없이 운영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설령 우리나라에서 연금 기금이 고갈되는 일이 발생한다 해도 크게 우려할 일은 없다. 당장 인기를 얻고 싶은 정치인이나 이제 곧 연금의 수혜자가 될 중장년층으로서는 귀가 솔깃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러면 세대 간 연대는 어떻게 되는가? 미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명백한 변화의 추세마저 무시하고 오지 않은 미래 세대의 삶을 방치해도 되는가?
각종 인구 관련 통계를 살펴보면 우리 고령화 속도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빠른 수준이고, 멀지 않은 시기에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정확한 시점이나 액수를 명시할 수는 없으나, 이 상황에서 현행 연금제도를 유지할 경우 2060년을 전후하여 기금은 고갈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 부과 방식으로 전환할 경우 그 시점에 경제활동을 하는 세대들은 은퇴자의 연금 지급을 위해 현재의 두 배가 넘는 20% 이상의 보험료를 납부해야 한다.
만약 현재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40%보다 더 많은 금액을 연금으로 지불하려고 한다면 연금 기금은 더 빨리 고갈되고 연도별 부과 방식으로 전환된 보험료율은 더 오를 수밖에 없다. 때마침 호황으로 해당 세대가 여력이 있다면 모를까, 불황으로 소득 자체가 적다면 연금 보험료 부담이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다음 세대가 현행 연금제도를 그대로 수용할까?
게다가 다음 세대의 선의에 연금제도의 존속을 의지하려는 순진한 발상도 문제이다. 설령 미래 세대가 현 세대의 연금 전액을 부담할 만한 경제적 여력이 있다고 해도 그 큰 금액을 아무런 반발 없이 순순히 부담해 줄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세대마다 부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연금 보험료 부담이 이전 세대에 비해 두세 배에 이르는 상황을 누구나 '연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설계하지 않았고 기금 소모에 관여하지도 않았던 미래 세대에게 연금제도에 애착과 책임을 마냥 요구하기는 어렵다. 상황이 이러하면 공적 연금 제도를 무력화하려는 정치적인 시도도 있을 수 있다. 만약 이러한 흐름에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참하면 공적 연금은 크게 휘청거릴 수도 있다. 지금 부재중인 미래 세대가 자신의 몫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늦은 밤, 혼자 벌어 많은 가족들을 부양하는 막내 자식이 야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집의 문을 연다. 남은 밥이 없다. 이미 집에 있던 가족들이 다 먹어 버렸다. 이럴 수가 있냐고 화를 내면, '가족의 정'이 중요하니 참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괜찮은 걸까? 아마 경제 능력이 있는 막내의 입장에서는 혼자 가출하여 독립 생계를 꾸리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이런 경우 다른 식구가 필요하면 밥을 그 막내에게 덜어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식구의 몫을 막내에게 호의로 나누어 주는 것과 별개로, 애초에 막내의 몫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분통이 터진다.
우리 세대가 연금 기금을 고갈시키고자 한다면, 미래 세대가 제기할 이 질문에 답을 준비하는 것이 먼저이다. '나는 그저 좀 늦게 왔을 뿐인데, 왜 내 밥은 하나도 없는 것인가?' 지금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막내를 의식하지 않고 솥에 남은 밥을 모두 긁어먹으려 한다. 막내에게 어떻게 말할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혹시 가족의 연대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중에도 없다.
한 가정의 사례가 이 대한민국이 된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지 못하면 불만스러운 젊은이들이 노인 세대 부양을 거부하고 나설 수 있다. 굳이 연금제도를 놓고 어른들과 다투고 싶지 않으면 대한민국을 버리고 가출해 버릴지도 모른다. 팔팔한 젊은이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연금 기금이 고갈된 상황에서 노인을 직접 부양할 미래 세대가 느낄 박탈감이나 부담감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다만 당장 우리 세대가 직접 느끼고 있는 고통도 큰 상황에 굳이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 다들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세대의 책임을 자각해야
이런 판국에, 그 옛날 아무리 힘들어도 늦게 올 막내를 위해 이불 밑에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묻어두던 배려를 떠올려 보는 것은 천진한 발상일 뿐일까? 윗사람이 된다는 것이 단순히 집안의 재산을 편한 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한 나라의 어른 세대로서, 다른 방법은 궁리해 보지도 않고, 늦게 올 젊은이들은 아랑곳없이 금고를 다 비워버리려는 편리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남들 보기 부끄러운 노릇이 아닌가?
마윈이 주장한 '현금 없는 중국', 누구를 위한 편의인가?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대세 '스마트폰 결제'는 정말 유토피아인가?
2017.07.14 11:01:56
현금 없는 사회는 세계적인 추세로, 중국 역시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어떤 국가보다 모바일 결제가 빠르고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전자상거래는 물론 대형 마트, 백화점, 음식점, 병원, 관공서, 택시, 심지어 노점상에서도 모바일 결제가 가능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임의 회비, 축의금 등도 모바일 결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모바일 결제가 사회 다방면에서 이루어지면서 모바일 결제 규모가 지난해 약 38조 6천억 위안에 달했고 전년 대비 215.4% 증가하였다. 향후 그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를 향해 박차를 가하는 마윈 회장
2016년도 기준, 알리바바의 즈푸바오와(支付宝, 알리페이)와 텐센트의 웨이신즈푸(微信支付, 위챗페이)가 모바일 결제 규모의 52.3%와 33.7%를 각각 점하면서 모바일 결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알리바바의 마윈(马云) 회장은 올해 2월 중국을 5년 내에 현금 없는 사회로 만들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마윈 회장의 이 같은 발언에 중국 내에서는 "백년이 지나도 현금 없는 사회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즈푸바오가 일명 "현금 없는 도시 계획(无现金城市计划)"을 내놓았고 여기에 5개의 도시가 동참하면서 "현금 없는 사회가 5년 내에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평들이 나오고 있다.
"현금 없는 도시 계획"에 참여한 5개 도시에는 항저우(杭州), 우한(武汉), 텐진(天津), 푸저우(福州), 꾸이양(贵阳)이 있다. 즈푸바오가 현금 없는 도시를 계획한다 할지라도 시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이루어지기 힘들다. 이에 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즈푸바오의 "현금 없는 도시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5개 도시일까?
먼저 항저우는 마윈 회장의 고향이자 알리바바의 본사가 있는 곳으로 95% 이상의 마트와 편의점에서 즈푸바오 결제가 가능하며 98% 이상의 택시가 모바일 결제를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우한은 즈푸바오 사용자가 약 900만 명에 달하여 중국 전체 도시 중 두 번째로 사용자가 많은 곳으로 98% 이상의 택시, 80% 이상의 편의점, 75% 이상의 음식점과 미용실 등에서 모바일 결제가 가능하다.
다음으로 텐진을 보면, 텐진의 상주인구는 1550만 명으로 이중 즈푸바오 사용자가 690만 명에 달하며 올해 5월 즈푸바오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모바일 결제 소비자 지수가 전국에서 10번째로 높다고 한다.
즈푸바오의 주 이용층은 빠링허우(80后, 1980년 이후에 출생한 세대), 지우링허우(90后, 1990년 이후에 출생한 세대)다. 푸저우의 경우 인구의 약 500만 명이 이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중 80%가 빠링허우와 지우링허우로 젊은층의 이용이 높다. 그리고 95%의 택시, 85%의 마트와 편의점, 80%의 요식업에서 모바일 결제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꾸이양은 2017년도까지 전 도시에 공공 무료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도시 전체에 인터넷 플러스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주요 목적이겠지만 사실 알리바바는 또 다른 속셈으로 지역 선정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모바일 결제 시장에서 즈푸바오의 점유율이 높기는 하지만 온라인을 제외하고 오프라인만을 놓고 본다면 웨이신즈푸의 점유율이 훨씬 높다. 따라서 웨이신즈푸를 견제하고 오프라인의 점유율까지도 탈환하기 위해 즈푸바오 사용자가 많고 모바일 결제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이 도시들을 우선 지역으로 선정하였을 것이다.
또한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즈푸바오가 올해 8월 1일부터 8일까지를 "현금 없는 도시 일주일(无现金城市周)"로 지정하고 현금 없는 사회를 미리 경험해보는 주로 만들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웨이신즈푸에서 2015년 매년 8월 8일을 "웨이신즈푸 현금 없는 날(微信支付无现金日)"로 지정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즈푸바오가 얼마나 웨이신즈푸를 의식하는지 알 수 있다.
현금 없는 사회,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현재 중국의 357개 도시에서 즈푸바오가 사용되고 있다고 하니 5개의 현금 없는 도시를 비롯하여 "현금 없는 도시 일주일"이 성공적으로 진행이 된다면 마윈 회장의 발언처럼 5년 이내에 현금 없는 사회를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금 없는 사회를 모두가 반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재 모바일 결제는 주로 스마트폰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2016년 12월 말 기준, 중국 내 휴대전화 사용자는 총 6억 9500만 명으로 이중 모바일 결제 이용자는 4억 6900만 명이다. 이를 통해 중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직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인구의 삼분의 이가 모바일 결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모바일 결제 규모가 세계 1위라고는 하나 주 이용층은 빠링허우와 지우링허우의 젊은층으로 노인층에게는 아직 어려운 부분이다. 중국 사회는 이미 고령화에 진입하여 2015년 60세 이상 인구가 2억 명에 달했고 이들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결국 5년 이내에 도래할 현금 없는 사회를 위해 스마트폰을 구매하여 모바일 결제 방법을 공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과연 누구를 위한 현금 없는 사회가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현금 없는 사회를 통해 생활의 편의뿐만 아니라 지하경제 양성화, 세금 탈루 근절, 동전과 지폐를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 절감 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준비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편의가 아닌 불편한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