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통일 문제

[평화통일시민강좌]

일취월장7 2017. 7. 12. 12:30

분단은 남의 탓, 통일은 우리 손으로!

[평화통일시민강좌] <1> 역사학자 김기협
2017.05.26 00:04:51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2015년과 지난해에 이어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평화통일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하는 평화통일시민강좌는 '새정부 통일정책, 이렇게 가야한다'를 주제로 7월 15일까지 총 5회에 걸쳐 진행합니다. (☞강좌 소개 바로 가기)

10.4 선언의 주역이었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지난 10년간의 남북대결정책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좌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정부가 시급하게 취해야 할 정책들이 무엇이 있을지 살펴보고 다시 6.15시대로 돌아가기 위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아내는 자리입니다.  

새로운 정권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냉전의 적폐를 해소하고 평화통일의 새시대를 열어갈 수 있도록 여론형성의 장이 될 ‘평화통일시민강좌’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총 5강으로 구성된 강좌의 시작은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강연입니다. 김 선생은 근대부터 현대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변화 양상을 살펴본 뒤 향후 우리가 통일을 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짚었습니다. 다음은 주요 강연 내용입니다.  

▲ 역사학자 김기협 ⓒ평화통일시민행동


전론 : 인류사회의 정치 환경이 바뀌고 있다. 

평화통일 운동을 실천하는 분들에게 문명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의견을 내놓게 된 이 기회를 반갑게 생각합니다. 지금 인류사회가 문명사의 큰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으며, 그에 따라 평화통일 운동을 둘러싼 전 지구적 정치 환경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평화통일 운동의 전망과 바람직한 방향에 관한 의견을 내놓고자 합니다.

제 의견이 유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전제로 하는 사실의 타당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가 아닌 분들을 상대로 하는 강연에서 이런 명제의 엄밀한 확인은 어려운 일이지요.

유럽에서 발원해 19-20세기 동안 인류사회를 휩쓴 "근대문명"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에 따른 현상 중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서 생각할 점을 몇 가지 뽑아 놓겠습니다.

1. "西勢東漸"(서세동점), 즉 서양 사정의 변화가 다른 곳의 사정에 큰 영향을 끼치는, 19~20세기 동안 전개되었던 형세가 해소되고 있습니다. 

2. 개인주의 원리에 입각한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역시 개인주의 원리에 입각한 선거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근대인이 경멸감을 품고 "봉건적"이라고 불렀던 유기론적 질서 원리의 복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3. 절대주권의 주체인 "국가"를 앞세운 세계질서의 원리가 효용성을 잃고 있습니다. 국가보다는 민족이 공동체의 틀로서 역할이 커지겠지만, 그 또한 근대 민족주의와 같은 배타성을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4. 자연과의 긴장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인간의 권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로서 인권보다 인류사회의 총체적 득실로 관심이 옮겨갑니다.

본론 : 평화통일의 전망과 그에 따르는 과제들 

제목에 "남의 탓"을 넣었습니다. 통일처럼 민족 주체성을 강조해야 할 과업 앞에서 남의 탓 앞세우는 것이 엉뚱하게 들릴 수 있지요. 도덕적 수련을 위해서는 "내 탓"을 앞세우는 것이 좋지만 현실 속의 사업을 놓고는 냉정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일을 놓고 반성할 것은 투철히 반성하되, 상황이 바뀔 때는 변화의 의미를 정확하게 포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현대사를 통해 우리 민족공동체의 대응에 반성할 잘못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많은 잘못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외부 사정으로 촉발된 것이었습니다. 그 외부 사정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우리의 잘못된 자세가 굳어진 것도 많습니다. 그 외적 원인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내부 투쟁에 너무 치우쳐 주체 형성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외부 사정이 크게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정확한 이해와 판단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세계정세 변화의 네 가지 측면을 전론에서 짚었습니다. 이제 그 각각의 측면을 놓고 우리의 통일 과제에 관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치욕과 고통의 역사에서 벗어날 기회
 

개항기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한국근현대사를 정리하면서 저는 외인론(外因論)에 기운 입장을 취합니다. 어느 시기에나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 있었고 현명한 사람, 우둔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백여 년 동안 착하고 현명한 사람들의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하고 악하고 우둔한 사람들이 활개를 친 일이 많았던 것은 민족사회 외부의 형세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1945년까지는 일본의 위세가 민족사의 흐름을 수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이후에는 미국의 존재가 한반도 형세에 질곡으로 작용했습니다. 을사오적이 도장을 찍은 것은 일본의 압력 때문이었고 이승만이 힘을 쓴 것은 미국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도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한반도를 긴장 상태에 묶어놓고 있습니다.

서세(西勢)가 가장 강한 때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였습니다. 거의 전 세계가 열강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서세의 끄트머리에 달라붙은 일본의 위세만으로도 동아시아 천하체제를 무너트리고 한반도를 넘어 중국까지 유린할 정도였지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계기로 서양의 위세가 내리막으로 접어들었지만 변화는 완만했습니다. 20세기 말까지도 미국의 패권이 당당한 것으로 보였지요.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자원과 환경 문제가 갈수록 두드러지게 부각된 것은 문명과 자연의 관계가 한계에 이른 결과였고, 서양의 위세를 위한 근거가 무너진다는 신호였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반동노선이 나온 것은 체제 운용이 어렵게 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냉전"이란 이름으로 반세기를 끌어온 두 진영의 적대적 공생 관계가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무너졌습니다. "세계경찰"이란 이름으로 제시된 미국 패권의 1극 체제는 신기루였습니다. 경쟁자가 보이지 않으니 유일 패권처럼 보였지만, 그 기반이 무너져 있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드러나 왔지요.  

21세기 들어 중국의 부상 앞에서 미국의 모습은 갈수록 초라해지고 있습니다. "트럼프정권"이란 괴이한 지도부를 갖게 된 것도 미국인 대다수가 만족할 만한 밝은 전망을 누구도 제시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결과로 보입니다. 

사드 배치 문제에서도 미국의 곤경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드만이 아니라 어떤 미사일방어망도 실용 가치가 없는 무기 개념입니다. 투척무기(projectile weapon)는 던지기 전에 못 던지도록 막아야 방어가 됩니다. 일단 발사된 투사체를 맞추는 데는 고정된 표적 맞추는 데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높은 기술이 필요하고, 설령 그런 기술이 가능하다 해도 비현실적 수준의 비용이 듭니다. 미사일방어망은 현대인의 과학 신앙을 이용해서 군수산업에 돈을 끌어들이는 야바위일 뿐입니다. [정욱식의 <사드의 모든 것>, 크레이그 아이젠드래스 등의 <미사일 디펜스 - MD, 환상을 좇는 미국의 방위전략> 참고.] 

▲ 지난 4월 26일 새벽 사드 발사대를 포함한 주요 장비가 성주 롯데 골프장 안으로 반입되고 있다. ⓒ연합뉴스


그 야바위의 대상은 한국보다도 미국 국민입니다. 지난 30년간 미국 정권이 이 야바위에 국고를 털어 넣은 것은 군수산업의 지지가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체제의 기반조건이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상황에 순탄하게 적응하는 길을 틀어막으며 미국인의 삶의 질을 형편없이 악화시킨 반동노선의 대표적 정책이 이것입니다.

그런 엉터리 정책으로 국제관계까지 훼손시키고 있는 것이 사드 배치 문제입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 정책으로 인해 일부 한국인이 아직도 갖고 있는 "혈맹" 의식조차 크게 위축될 것이 예상됩니다.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이라는 일반 한국인의 대외관계 인식을 일거에 중국 쪽으로 기울게 하고 있습니다. 

사드 문제를 놓고 중국이 피해자 시늉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표정관리에 바쁘다고 저는 봅니다. 물론 사드 배치가 이론적으로는 중국에 불리한 조치이지만 그에 비해 정치적 이득이 엄청나게 더 큰 "꽃놀이패"라고 보는 것입니다. 한-미간의 "혈맹" 관계 약화는 약간의 군사적 부담과 비교할 수 없는 중국의 큰 이득입니다.

20세기 후반을 통해 "서세"의 주축 노릇을 한 미국 패권의 퇴조에 따라 한민족의 장래를 위한 자주적 결정의 공간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정책은 한반도 정세에 계속해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서 그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해야 할 시점입니다. 

2. 새로운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은 "워싱턴에서 기침을 하면 감기에 걸리는" 입장을 아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영향력에 묶이게 된 원래 원인은 미국의 막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미국의 경제력이 크게 쇠퇴하고 있고 절대적 군사력도 흔들리기 시작하는 상황까지 한국의 예속성이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큰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선거민주주의, 두 측면을 담는 믿음입니다. 그중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오래전부터 "빨갱이"로 몰려 왔습니다만, 지금은 빨갱이 소리 듣지 않고도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도록 여건도 바뀌고 연구도 축적돼 있습니다. 그 측면은 경제학자들에게 맡기고, 저는 오늘 다른 측면, 선거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선거민주주의에 관련된 문제들은 아직도 잘 부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리한 비판의식을 가진 연구자와 운동가들도 선거민주주의 강화를 통해 자본 권력을 견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흔히 갖고 있지요. 단기적으로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본주의와 선거민주주의가 근대문명의 특성인 개인주의의 제도적 장치로서 표리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는, 불가분의 한 세트로 보는 겁니다.

이번 정권교체는 "선거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촛불의 승리"라고 저는 봅니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새누리당 정권의 행태 때문에 시민이 광장에 나선 것은 선거민주주의 체제로부터의 일탈이었습니다. 대통령선거는 선거민주주의 형식에 따라 치러졌지만 변화의 방향을 결정한 것은 그 형식을 벗어난 시민운동이었습니다. 그 결과 훨씬 말 되는 정권이 세워진 지금도 그 정권이 국가사회를 위해 필요한 정책을 세우고 수행하는 데 선거민주주의 제도가 (특히 국회를 통해) 상당한 제약을 가할 것이 전망됩니다. 

선거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살피는 데는 제가 최근 번역한 대니얼 벨의 <차이나 모델>을 권합니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유일한 절대적 정치 원리로 채택하는 데 따르는 문제들을 지적하며 민주주의와 현능주의(meritocracy)의 병용을 제안합니다. 모든 주요 공직을 임기제 선거로 선출하는 선거민주주의는 현능주의든 뭐든 다른 원리의 병용을 배제하는 성질을 가졌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의 실현마저 가로막아 왔다는 것입니다.

판웨이의 <중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모델론>도 참고할 만합니다. 그는 다수결의 원리에 아무 정치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그나마 선거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소수결"로 전락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런 주장들이 중국을 배경으로 활발하게 나오는 것은 중국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대안의 타당성은 차치하고, 선거민주주의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비판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근혜나 트럼프 같은 인물들이 선출되는 상황 앞에서. 

또 하나 권하고 싶은 책은 악셀 호네트의 <사회주의 재발명>입니다. 사회주의 이론의 거장 호네트는 이 책에서 "사회적 자유"를 말합니다. 원자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개인주의를 벗어나 유기론적 세계관의 도입을 제창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또한 미래 세계에서 가치를 발휘하려면 개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전망입니다. 

서세동점의 해소가 몰고 올 현상은 미국의 영향력 쇠퇴만이 아닙니다. 미국의 힘에 의지해서 형성되고 유지되어 온 정치-사회-경제 구조에 변화의 필요가 함께 닥칩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근대체제"를 지향해 왔습니다. 이제 그 체제 가운데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살려서 보다 안정적인 미래 체제를 빚어갈 수 있을지 체계적 탐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 역사학자 김기협 ⓒ평화통일시민행동


3. 국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선거민주주의는 근대세계에서 정권 정통성의 가장 일반적인 근거가 되었습니다. 선거민주주의의 부작용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국가를 "절대주권"의 주체로 보는 근대세계의 고정관념이 이 문제에 영향을 끼치는 점도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냉전이 끝날 때 "문명의 충돌"을 말한 새뮤얼 헌팅턴의 통찰력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보다 훨씬 윗길이었지요. 미국의 힘이 대표하는 근대문명의 승리를 후쿠야마가 구가할 때 헌팅턴은 근대문명의 흐름을 규정해 온 이념의 약발이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제 머릿속의 이념이 아니라 존재하는 현실의 대표로서 문명권들이 세계의 앞날을 견인하는 주체가 될 것을 헌팅턴은 예언했습니다.

근대적 주권국가는 이념으로 획정된 존재입니다. 국가는 문명사회에 늘 있어 온 자연스러운 존재죠. 하지만 그 형태는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양했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모습의 절대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지구를 쪼개 가진다는 관념은 근대세계의 특이한 현상이었고, 근대체제의 해소에 따라 이 관념도 흐려질 것입니다.

헌팅턴이 문명권을 미래 세계의 주체로 내다보면서 다른 관계 아닌 "충돌"을 얘기했다는 데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칠 때 충돌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관계가 또한 가능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규정하고 이해관계의 충돌만 보려는 경향이 있죠. 하나의 근대적 현상입니다. 마찬가지로 국가 간 관계도 이해관계의 충돌로만 보는 시각이 근대국가의 관념 밑에 깔려 있습니다. 국가 아닌 문명권이 관계의 주체가 되더라도 "충돌"의 가능성만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습관이겠지요.

자오팅양은 <천하체계>에서 세계정치, 세계정부의 관념을 못 가진 것이 근대 정치철학의 근본적 결함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동아시아의 "천하" 관념이 세계정치의 표상이었고 그 회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슬람권의 "움마"(이슬람의 집) 관념도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이슬람의 전통 정치사상은 우리 사회에 생소하지요. 저는 <프레시안>에 게재되는 이병한의 글 <유라시아 견문>을 통해 약간의 이해를 얻고 있습니다. 세계질서 내지 세계정치에 대한 인식은 근대 이전 안정성을 이룬 어느 문명에서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근대세계에서 그 인식이 사라진 것은 지속적 안정성을 갖지 못한 근대문명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양세력이 주도한 근대문명이 퇴화하고 있는 지금 단계에서 한민족 통일국가를 구상함에 있어서도 국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민족의 역사가 5000년이라고 하는데 민족국가의 역사는 1000년 가량으로 봅니다. 고려 통일을 계기로 한반도를 영역으로 하는 민족국가가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민족국가의 역사 대부분은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의 한 단위로 존재했습니다. 중국의 왕조에 조공관계로 종속된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왕조에 종속된 위치가 한민족 국가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위치였다고 제가 말한다면 "사대주의"라고 기분 나빠할 분들도 있겠죠. 조선의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에 "사대주의"란 말을 만들어 폄하한 것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조선의 개항을 강요한 제물포조약에서도 청일전쟁을 마무리한 시모노세키조약에서도 일본은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청나라와의 특수관계를 부정해야 조선에 마음 놓고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의도에서 "사대주의"란 말도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대관계는 일방적인 예속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이 명나라,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고 있던 500년간 중국 군대의 조선 주둔은 임진왜란 때와 청일전쟁 직전, 두 차례뿐이었지요.

19세기 이전 동아시아의 조공체제는 쌍무적 조약기구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다만 종주국과 번속국의 위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강자와 약자,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현실을 반영하는 중층적-유기론적 국제관계를 구축한 것이지요. 주권국가의 명목상 평등을 내걸었던 근대 국제체제가 유기론적 세계질서를 추구하는 세계정부에 접근해 가는 데 동아시아 조공체제가 중요한 모델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민족통일을 현실적 과제로 추구하려면 절대주권을 가진 근대국가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의 다른 형태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외관계만이 아니라 내부관계에서 남한 주민, 북한 주민, 해외 교민 등 오랫동안 서로 다른 국가체제에 속해 있던 여러 요소들의 원만한 통합을 위해서도 국가의 형태를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대세계를 지배한 원자론적 원리를 버리고 유기론적 원리를 추구하는 것을 큰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4. 평화통일을 위해 '종북' 정신이 필요하다. 

"평화통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대항해서, 전쟁 아닌 방법을 통한 통일을 주장하는 말로 쓰였죠. 그런데 이런, "방법으로서 평화"를 넘어 "목적으로서 평화"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통일이 이 세상에 위험을 줄이고 평화를 늘리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통일이 아니라면 방법이 평화적이 되기도 어렵습니다. 북한의 인적-물적 자원을 남한 자본가들이 마음껏 착취하게 하는 통일이나 강대국이 되어 다른 나라들을 억압하려는 통일이라면 반대하는 세력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민족통일이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되게 하려면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저는 하나의 예만 들겠습니다. 에너지 소비량입니다. 위키피디아의 "세계 에너지 소비량(World Energy Consumption)" 항목에 따르면 인류의 에너지 소비량은 1973년에서 2012년 사이에 대략 갑절로 늘어났어요. 이 소비량 급증이 인류평화에 큰 위협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에너지 소비량을 어느 수준까지 줄여야 인류문명이 어느 정도의 지속가능성을 가지게 될지는 연구가 더 필요한 주제입니다만, 최소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얼마라도 줄이기는 줄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민족통일 역시 한반도 전체의 에너지 소비량을 줄이는 계기가 되어야만 "평화통일"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남한의 1인당 평균 에너지 소비량은 세계 평균보다 크고 북한은 적습니다. 그렇다면 통일을 계기로 북한 주민이 남한 주민의 생활방식을 따르기보다 남한 주민이 북한 주민의 생활방식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북(從北)'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에너지 소비량 같은 기술적 문제를 놓고 '종북'이란 말까지 꺼내느냐고 웃으시겠지만,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방식과 가치관도 이에 따라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인권 의식에서도 빼야 할 거품이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 아닌 "사회적 자유"를 생각해야 한다는 악셀 호네트의 주장처럼, 인권도 개인의 절대적 인권이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 안에서 상대적으로 허용되는 인류공동체의 권리로 생각을 좁히지 않는다면 인류 전체가 불행에 빠지는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권리는 책임과 짝을 이뤄야 합니다.

큰 복권의 당첨자 중에 오히려 그로 인해 불행에 빠지는 사람이 꽤 많아서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 큰 이유가 가치관의 결함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돈이 없어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을 손에 넣는 것만을 행복의 조건으로 보고, 행복을 위한 더 구체적인 조건을 생각지 않기 쉽지요. 그러다 갑자기 돈이 생겼을 때 그 돈에 실린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아무 데나 함부로 휘둘러서 주변에 고통을 끼치고 그 고통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기 쉬운 것 아닐까요.

지난 150년간 동아시아인을 괴롭혀 온 서세동점 현상이 해소된다 해서 이제는 우리가 남을 괴롭힐 차례가 되었다고 신나 할 일이 아닙니다. 박근혜의 몰락이 정권의 교체에 그치지 않고 국가체제의 개선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처럼, 근대문명의 한계점에서 우리는 패권의 교체가 아니라 세계체제의 개선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박근혜 정권이 가리고 막아 왔던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는 방법을 찾기 위해 바쁩니다. 마찬가지로 서양세력이 휘둘러 온 패권이 해소되고 있는 지금, 그 패권의 전횡에 가리고 막혀 온 문제들을 제대로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 지난해 12월 3일 열린 사상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 전경. ⓒ프레시안(최형락)


문명사를 공부해 온 저로서는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사람들이 생각을 많이 쏟아야 한다고 봅니다. 근대문명은 사회 안의 개인도 세계 안의 국가도 원자 같은 독립된 개체로 보면서 그 개체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겼지요. 경쟁에 몰두한 개체들은 "공동체"의 과제들을 잊어버렸습니다. 자연을 착취(개발) 대상으로만 보는 근대인은 자연과의 관계를 인류공동체의 과제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반성할 점이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상대방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갑질을 삼가자는 얘기는 좋습니다. 그것은 상대적 존엄성입니다. 그런데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절대화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시스템에 속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자연을 소외시키는 태도는 결국 인간 자신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피할 수 없습니다.

5. 통일을 위해 "내 손으로" 할 일은? 

"남의 탓"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근현대사를 통해 우리 민족공동체의 대응에 반성할 잘못이 많이 있었지만 그 대부분이 외부 사정으로 촉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남의 탓 할 일이 줄어 가고 있다는 전제 위에 "내 손으로" 할 일을 생각해 봅니다.

근대화를 추구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부유하고 강한 나라들을 부러워하며 그 뒤를 따르려고 애써 왔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 민족 분단도 감수했고 사회 양극화를 초래했으며, 베트남 참전처럼 이웃을 괴롭힌 일까지 있습니다. 그 결과는 "헬조선"입니다.

민족통일은 이 사회가 당면한 여러 과제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듦으로써 "인간세상다운 인간세상"을 열어가는 노력의 한 측면으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분단은 근대세계 속에서 민족사회가 처해 온 곤경의 한 측면일 뿐입니다.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인류사회 전체가 근대세계 속에서 많은 문제를 품고 살아 왔는데 그 문제들 중에는 오랫동안 겪다 보니 당연한 것, 또는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있습니다. 물을 마음 놓고 먹지 못하게 된 지 수십 년인데 이제 공기도 마음 놓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는 환경 문제, 에너지 절벽을 바라보면서도 경제개발의 박차를 늦추지 못하는 자원 문제, 생산인구 감소와 복지 수요 증가 사이의 모순 등, 근대체제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인류사회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분단"이라는 우리 사회의 독특한 문제는 근대 세계체제의 모순을 직시하게 해주는 열쇠일 수 있습니다. 그 열쇠를 잘 활용하는 데서 분단으로 겪은 고통의 보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분단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체념한다면 지난 150년간 겪어온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근대 세계체제의 한계를 넘어설 길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비장한 자세를 취해야만 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자세를 냉철한 눈으로 돌아보기만 하면 나아갈 길이 떠오를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난 반년간의 촛불 운동이 이런 낙관을 뒷받침해 줍니다.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내다보기 힘들었지요. 그러나 이제 들어선 문재인 정권의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안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좋은 시작입니다. 

투표가 진행될 때까지도 저는 "문재인 정권"의 성격에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막상 나타난 모습을 보고 예상치 못했던 큰 신뢰감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경쟁과 대립의 정치를 벗어나 협력과 상생의 정치를 바라보는 자세가 진행되고 있는 문명 전환의 방향에 잘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이 어제보다 좋아졌다는 사실은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내일이 오늘보다 좋아질 것입니다. 꾸준한 실천 속에서 평화와 통일이라는 과제도 점점 더 구체성을 띄고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내다봅니다. 긴 시간 감사합니다.     



북한 사람이 만든 '메이드 인 차이나'의 비밀

[평화통일시민강좌] <2> 강주원 인류학 박사
2017.06.10 10:41:27

두 번째 강연은 강주원 인류학 박사의 강연입니다. 강 박사는 '대륙의 시작 한반도, 남북경제협력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남북한과 중국이 어떻게 경제적인 교류를 이어가고 있는지 소개했습니다.  

강 박사는 지난 10여 년 동안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인 단둥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중국과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까지도 아우르는 접경 지역의 현황을 연구하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다음은 주요 강연 내용입니다.  

▲ 강주원 인류학 박사 ⓒ평화통일시민행동


2년 전(2015년),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일 때 '신한반도 경제지도'를 발표했습니다. 물류를 중심으로 한 이 지도는 나진, 부산, 남포, 인천 등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도에는 빠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1998년부터 존재하였고 앞으로도 남북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할 인천-단둥(중국) 노선이 빠져 있습니다.  

1992년 한중수교 전후로 단둥에서 남북의 사람들이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1주일에 3번 인천에서 단둥으로 배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한반도 경제지도"에 인천-단둥이 빠져 있다는 것은 남북 경제교류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한국사회가 앞으로 무엇을 고민해야 할지에 대해서 저의 졸저인 <압록강은 다르게 흐른다>에서 언급하지 않은 부분까지 포함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 문재인 대통령이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발표한 한반도 신 경제지도 구상 ⓒ문재인 대통령 공식 블로그


▲ 2006년 단둥의 한 택배회사에는 서울-평양-중국의 택배 범위가 선명하게 표현되어있다. 약 10년 전 아니 최소한 단둥페리가 취항한 1998년부터 단둥은 삼국 물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다. ⓒ강주원


북한 사람이 만든 'MADE IN CHINA'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김진향 교수는 "개성공단 노동자 5만 명 중 3만 명이 봉제 쪽에 일했고, 개성공단이 한창 잘 돌아가던 2010년대 이후 한국에 판매되는 속옷의 90%, 의류의 30%가 개성에서 만들어졌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3만 명의 노동자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이처럼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단둥에서는 이런 일들이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예를 들어 저의 졸저인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에서 언급한 바 있는 삼국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단둥을 통해서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010년 5.24조치 이전에 한국의 봉제, 의류 쪽 회사들이 옷을 만들기로 결정하면 단둥에 있는 회사한테 하청을 주었고, 그 다음 단계로 단둥에 있는 한국 사람이 북한 사람을 만나 계약을 체결하면 며칠 뒤부터 평양에서 옷을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옷은 단둥을 거쳐 배에 실려 인천으로 들어옵니다.  

그 옷들은 'MADE IN DPRK'도 있었지만 대부분 'MADE IN CHINA'로 들어왔습니다. 이런 제작 단계를 거친 의류들은 한국의 홈쇼핑에 소개되고 사람들은 중국산으로 알고 사 입곤 하였습니다.  

라벨과 통계에는 보이지 않지만 북한 사람들이 만든 옷들이죠. 이 옷들이 팔리다 안 팔리면 땡처리로 길거리에서 팔리고 그러다 안 팔리면 컨테이너 박스에 실려서 인천에서 단둥으로 그리고 평양으로 들어갑니다. 평양사람들은 자기 친구들이 만든, 한국까지 갔다온 이 옷을 중국산으로 알고 입었습니다.  

남북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릅니다. 통계로는 잡히지 않지만 인류학의 참여관찰로 보면 보입니다. 단둥에 있는 한국 회사 중에 10위권에도 들어가지 않는 회사가 한해 옷 약 80만 점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보다 규모가 큰 회사들은 얼마나 많은 옷을 만들었을까요? 개성에는 3만 명의 봉제 노동자가 있지만 평양에는 더 많은 노동자가 옷을 만들어 왔습니다. 신의주에도 봉제 노동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성공단만큼 남북교류에 영향을 끼친 곳이 단둥이고 남북을 연결하는 물류가 존재하는 곳이 단둥입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휴전선만 놓고 남북관계를 봅니다. 거기서 '북한 퍼주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개성공단이 활성화되기 이전에도 우리가 퍼주었다는 금액의 50~60%는 인건비에 해당이 됩니다.  

이것의 대부분은 단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북한은 단순히 퍼주기의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북한의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하여 우리가 이득을 보면서 살아온 '교류'의 상대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한국사회는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남북관계를 휴전선을 사이에 둔 남북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 중국 지안쪽에서 바라본 압록강변의 북한 모습(2017년) ⓒ강주원


북한은 '개성공단'을 5개 이상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가 북한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폐쇄된 국가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북한이 폐쇄된 국가라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단서가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생각하는 만큼, 북한은 폐쇄된 국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경제 규모나 남북관계도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휴전선만 폐쇄하면 북한은 전체적으로 폐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개성공단만 막으면 북한으로 들어가는 현금 달러박스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개성공단을 막으면 북한은 곧 망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의 기본 시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무지한 시각이었습니다. 2013년 기준으로 개성공단 5만 명의 노동자가 약 100달러를 받고 일했습니다.  

그러나 단둥에서는 2만 명의 노동자가 약 300달러를 받고 일하고 있습니다. 단순 인건비만 놓고 보더라도 단둥이 개성보다 더 많습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개성공단만 달러를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둥에도 개성공단이 하나 더 있는 모양새입니다.

현재 해외 진출 북한 노동자 수가 터키, 중국, 러시아 중동에 1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북한의 해외 노동자와 몇 가지 경제 상황을 들여다보면 개성공단을 최소 5개 이상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한국사회가 주지하지 않은 채, 앞으로 한국은 개성공단을 북한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하면서, 개성공단을 선택 사항이라고 생각하고 협상에 나오는 북한을 만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단둥은 2만 명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2000명의 주재원(무역일꾼)이 있습니다. 단둥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기차는 하루에 약 600명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계산해 볼 때 한사람이 100만 원치의 물건을 사들고 간다고 치면 하루에 6억 원, 한 달 180억 원, 일 년 2000억 원입니다. 개성공단으로 들어가는 인건비는 약 1000억 원 이었습니다. 단둥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기차만으로도 개성공단 2~3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북·중 무역 규모를 약 70억 달러라고 추정하는데 위의 예에서 설명한 경제교류 모습은 통계에 잡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압록강의 밀무역에 해당이 되지도 않습니다. 북·중 국경무역은 통계를 내기 힘든 구조입니다. 그러니 통계 안에서만 북·중 경제교류를 들여다보면 북한 경제를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북·중 관계는 지원과 원조의 관계가 아니라 경제교류의 관계

한국사회는 북·중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죠? 그 가운데 대북제재의 일환으로 중국이 북한과 교류를 끊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생각의 바탕은 북한과 중국을 지원과 원조의 관계로만 보는 것입니다. 중국이 북한에 식량과 석유만을 원조한다고 판단하면서, 시진핑 주석이 결심만 하면 얼마든지 북한에 대한 대북제재를 할 수 있고 북·중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북·중 관계는 경제교류의 관계, 공생하는 관계입니다. 시진핑 주석이 대북 유엔제재에 대해서 '민생'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저는 이 민생은 '북한사람' 뿐만 아니라 '중국사람'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성공단 폐쇄로 100개 이상의 업체가 피해를 입고 파생피해액이 1조 원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에는 북한과 무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중 경제 차단을 원하는 한국 사람들이 있는데 중국이 개성공단 폐쇄와 같은 대북제재를 한다면, 압록강, 두만강의 국경도시에서 북한과 무역하는 중국사람들이 받을 피해액은 100조 원 이상이 되지 않을까요? 이점만 생각해보아도 한국은 중국에게 자국 국민의 100조 이상의 피해를 입더라도 대북제재에 동참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을 중국이 어떻게 들어줍니까? 

▲ 중국 단둥에서 북한 여권은 제재의 대상이 아닌 선물을 받는 기준이다(2017년) ⓒ강주원


단둥발 북한 가짜뉴스 깨기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저는 단둥에 있었습니다. 한국의 기자들이 단둥으로 몰려와 저에게 질문했습니다. "저 신의주 강변에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저 모습이야말로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북·중 국경선이 엄격하게 봉쇄당하고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 내용을 반영한 방송이 뉴스 화면을 장식했습니다. '북·중 국경 엄격하게 단속, 신의주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라고.  

이러한 보도는 작년 2,3월 대북제재가 한창일 때도 반복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기자들한테 뭐라고 설명을 하였을까요? "기자 선생님, 지금 압록강과 신의주는 영하의 날씨인데 누가 나와서 놀까요?" 

기자들은 북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압록강의 철조망을 넘어온다고 보도합니다. 하지만 이 철조망 안에서 중국 사람들은 산책도 하고 빨래도 하고 농사도 짓습니다. 탈북자가 목숨을 걸고 넘어온다는 곳에서 말이죠. 압록강의 철조망은 만들어진 지 10년 정도 되며 없는 곳도 있습니다. 이 철조망은 여기까지가 중국 땅이라는 표시입니다. 강 전체가 국경이므로 홍수나 가뭄일 때 늘 국경이 바뀝니다.  

북한 붕괴 징조와 경제 어려움의 증거로 많이 쓰이는 사진 중에 하나가 압록강 유람선에 쪽배를 타고 들어와 물건을 판매하는 모습입니다. 먹고 살기 힘든 북한 사람들이 대낮에 대놓고 밀수를 한다며 북한 붕괴가 임박했다는 증거로 쓰입니다. 하지만 쪽배를 탄 사람들은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는 중국 사람입니다. 한국말을 하니 기자들과 한국 여행객들은 북한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죠. 검증만 하면 금방 알게 되는 가짜 뉴스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작년 대북제재의 일환으로 통일부가 해외의 북한식당 이용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며칠 후 KBS가 단둥의 문 닫은 북한 식당을 보여주며 북한의 식당이 망하고 있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식당은 망한 것이 아니라 백 미터 옆에 새로 문을 연 것이었습니다. 기자들은 대북제재의 효과가 없는데, 단둥에 가서 검증하지도 않고 혹은 가짜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 단둥에 갑니다.  

▲ 2017년 신의주 풍경에서 한국 사회가 놓치고 있는 시각과 역사는 무엇일까 ⓒ강주원


다르게 보면 지금의 북한이 보인다 

해외로 파견된 북한 노동자에 대해 한국은 일반적으로 '인권' 문제로만 다가갑니다. 하지만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보여주듯이 한국사회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한국 근대화의 선봉장으로 생각합니다. 그 인원이 모두 합해도 2만 명이 채 안 되지만 우리는 그렇게 배우고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한 번쯤, 맥락상 다른 면도 있지만, 북한의 해외 파견 노동자를 이런 시각으로 보면 북한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아까 언급한 것처럼 단둥에는 연인원 2만 명의 노동자가 일을 합니다. 이 노동자들이 북한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단둥 북한 노동자 임금 300달러 중에 100달러를 노동자가 가져갑니다. 이 돈을 1~2년 모아서 물건을 사서 북한으로 들어갑니다. 이 물건들이 장마당을 활성화되는 배경입니다.  

2010년 5.24조치가 발표되었을 때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이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남북관계와 북한을 주로 TV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로 배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동안 살아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대북정책이 바뀌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사회의 대북인식을 바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가장 활약이 뛰어난 대북전문가는 '북한 붕괴론'자였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2~3년 전부터 한국의 커피믹스가 대량으로 들어가고 있고 북한 사람들의 입맛이 바뀌고 있다. 한국의 자본이 들어가고 있고 북한에 돈주가 늘어나면, 그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단초가 될 것이다. 때문에 북한 붕괴가 임박했다'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한국산 커피믹스는 2~3년 전부터가 아니라 단둥을 통해서 20년 전부터 평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북한은 왜 안 망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지금의 북한은 커피믹스가 아니라 커피믹스 만드는 기계를 원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경제 상황이 변해 왔습니다.  

미국의 '강력한 대북제재'가 이루어지고 있던 지난 10년 동안 국경도시 신의주에 20층 아파트가 10채 이상이 들어섰습니다. 그렇다면 실효성 없는 대북제재만을 주장하거나 책임지지 않는 미래 통일 담론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우리는 이것을 연구하고 북한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국‧북한‧중국인과 북한화교‧조선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는 단둥

단둥은 20년 전부터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만났습니다. 북한 노동자를 제외하고 연인원 2000명의 북한 사람과 북한화교 2000명 이상, 경제활동 인구인 조선족 4000명 이상, 한국 사람 2000명 등 전체 1만 명의 사람들이 남북을 연결시키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5.24조치 이전에는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직접 교역을 했지만 5.24조치 이후에는 남북의 직접 접촉이 금지됐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은 북한화교와 조선족을 매개로 북한 사람과 간접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구조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5.24조치 때문에 한국기업의 마진을 떨어뜨렸을 뿐입니다. 5.24조치 이전에는 한복이나 이불에 들어가는 수예도 북한산이 사용됐습니다.  

지금은 북한 사람이 만든 것을 북한화교나 조선족이 사와서 한국 사람에게 팔고 이것이 서울에 들어오는 구조입니다. 단둥의 호텔에서 숙식하는 북한 주재원들은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으며 한국 뉴스를 봅니다. 하루 종일 압록강 유람선에서 나오는 '소녀시대' 뮤직비디오를 신의주 강변을 지나는 사람도 봅니다. 단둥에서 한국사람들은 대동강 맥주를 마시고 북한 사람들은 서울우유를 마실 수 있습니다.  

▲ 한국사회가 대북제재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안 어둠의 대명사였던 신의주에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한국사회는 무엇을 고민해야됨을 보여주는 것일까(2017년) ⓒ강주원


개성공단도 재개하고 5.24조치도 해제되어야 합니다. 개성공단 재개를 북한이 동의한다고 가정할 때 공장이 정상화 되는 것만으로도 몇 개월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5.24조치를 해제하겠다고 말하자마자 북한의 반응과 상관없이 그 다음부터 남북교류가 활성화 될 수 있는 곳이 단둥입니다. 여기에 남북 관계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북한을 상대로 경제활동을 하면서 이익이 남지도 않는데 남북교류를 할 한국 기업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단둥은 지난 20년 동안 남북교류의 중요한 메카입니다. 단둥을 알아가는 과정이 남북관계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남북교류가 단절되어 있는 동안 북한은 끊임없이 변화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아직도 '고난의 행군', 그러니까 20년 전의 북한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강합니다. 교류 재개 만큼이나 북한을 선입견 없이 제대로 볼 수 있는 한국사회의 스스로의 준비도 필요합니다.  

개성공단은 다시 열려야 하고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상징이기도 합니다만, 개성공단이 닫혔다고 해서 남북관계가 모두 닫혔던 것은 아닙니다. 단둥이 있었습니다. 개성공단 중단으로 남북의 만남이 중단되었다고 너무 강조되다 보니 남북교류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단둥을 놓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사회가 단둥을 단순 사례로만 보거나 간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최소한 단둥을 개성공단과 더불어 남북교류의 한 축임을 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정부의 새로운 남북관계의 출발 가운데 하나는 "신한반도 경제지도"에 인천-단둥-평양"을 이어주는 물류의 흐름을 그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완성된 지도는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렇게 보완된 신한반도 경제지도에는 5.24조치 해제에 대해서 한쪽만이 주장하는 명분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실질적인 다양한 이유와 근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정세현 "일본은 미국에 'NO'라고 말하면서 커갔다"
[평화통일시민강좌] <3>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세 번째 강연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강연입니다. 정 전 장관은 '새 정부에 바란다 :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을 주제로 새 정부에 바람직한 남북관계 및 외교 정책을 조언했습니다. 다음은 강연 주요 내용입니다.  

▲ 강연하고 있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평화통일시민행동


미중간 갈등과 북한 핵미사일 능력 향상 : 출발 쉽지 않을 외교통일 분야

2010년 이후 경제력이 커진 중국은 군사비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습니다. 중국이 동북아시아의 군사강국으로 부상하면서 미국이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이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태평양은 중국과 미국이 나눠 써도 될 만큼 충분히 넓다", "미국과 중국사이의 관계를 신형대국관계로 가자"고 했습니다. 중국이 미국에게 자국을 2등으로 인정하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전 세계로 보면 미국과 중국의 군사력이 차이가 나지만 동아시아, 태평양 지역만 보면 미국과 중국의 군사력은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곤경이 시작됩니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도 미국이 북핵 폐기를 이유로 대지만 중국의 군사력이 강화되는 것을 견제하고 중국이 태평양 지배권을 잠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입니다. 미중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우리의 외교적 위치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외교에서 주도권을 가지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지난 9년 동안 잘못된 대북정책으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되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이 곧 붕괴한다고 믿었습니다. "통일은 새벽에 도둑처럼 올수 있습니다. 통일이 임박했다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했지요. 박근혜 대통령도 북한 붕괴론을 믿었습니다. 통일은 대박이라 하며 통일준비위를 만들었습니다. 2015년 1월 1일 현충원 참배를 하며 '통일원년'이라고 썼습니다.  

북한붕괴가 임박했다는 그 미망 때문에 북한 붕괴를 압박하고 남북대화를 하지 않고 교류협력을 차단시켰습니다. 그 시간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었습니다. 

북한을 협상장에 나오게 할 수 있는 레버리지가 바뀌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시절에는 북한의 경제가 어려웠습니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정상회담을 하려고 했을 당시 저는 김영삼 대통령한테 "지금 북한경제가 어렵습니다. 그들이 절실하게 남북경제협력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이 틈새를 파고 들어가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먹을 것, 입을 것을 주는 대신 그들이 휴전선 가까이 전진 배치해 놓은 장사정포와 방사포를 뒤로 물리려는 협상을 하시고 장관급 회담만 합의해 주시면 나머지는 실무적으로 얼마든지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래, 돈 주면 안되겄나"라고 했습니다. 경제협력지원으로 군사적 긴장완화를 하려고 했던 것이 1994년 7.27정상선언의 내용이었습니다.

2000년 정상회담에서도 그런 식으로 남북관계를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2007년 10.4선언이 나왔을 때도 남한의 경제력을 레버리지로 해서 북한의 대남군사도발을 사전에 억지하거나 줄일 수 있는 찬스가 많았습니다. 북한의 군사력을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도 남한과의 경제협력을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 자신에게 경제적 도움이 된다는 전망이 있었으므로 쓸데없이 군사적으로 남한을 괴롭혀 손해 볼 필요가 없다 생각했습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손을 맞잡은 남북 정상. ⓒ연합뉴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북한을 압박하는 정책을 펼치니 북한에 틈새시장을 주고 말았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에 대한 유엔제재가 이루어졌지만 중국 같은 경우 외형적으로는 협조했으나 내부적으로는 뒷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민생물자는 차관문제라 하여 중국산 생필품이 북한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군사적으로 전용될 위험한 물건은 규제했지만 그것은 북한에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습니다. 북한은 돈 들여서 외부로부터 기술을 사오는 나라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하는 나라입니다.

또한 북한은 내수경제가 돌아가는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1990년대~ 2000년대 초까지는 식량문제가 심각했지만 이제는 식량문제는 없습니다. 북한의 경제상황이 나아졌습니다.  

지금은 지원이 아니라 협력사업을 해야 합니다. 규모가 큰 투자를 해야 합니다. 북한은 포전담당제 등을 통해 단위면적당 생산력을 늘리고 있고 장마당에 물건이 돌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식량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생산력을 늘리기 위한 농약과 비료 생산의 과제가 있습니다.  

비료는 석유산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석유 도입량이 2억 4000만 톤이지만 북한은 100만 톤이 되지 않습니다. 비료생산에 여력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20년 전 일이므로 그렇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석유와 관련이 있는 농업용 비닐생산도 어렵습니다. 사회간접자본(SOC)에 속하는 항만, 부두, 도로, 철도 현대화 사업도 필요합니다. 철도의 현대화는 블루오션으로 가는 방법입니다. 만주 동북3성과 러시아의 연해주를 철의 실크로드로 연결해야 하는데 북한의 침목은 많이 낡았습니다. 이런 것을 현대화해야 하며 이 협력사업을 남북이 함께 해야 합니다.  

비반북과 반북의 남남갈등,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남남갈등이 심화됐습니다. 김영삼 정권까지는 남남갈등이 없었습니다. 남남갈등은 햇볕정책 때부터 나왔습니다. 김영삼 정권 때까지는 통일문제가 담론 수준이었으므로 현실문제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북한 사람을 본적도, 만난 적도 없고 평양에 가본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햇볕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하니 민간차원의 왕래와 대북지원이 쉬어졌습니다. 정부 차원에서도 회담도 많아졌습니다. 이러면서 통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졌습니다.

우리사회는 분단을 전제로 구축된 기득권이 있습니다. 반북을 전제로 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지난번 태극기 집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단체제하에서 구축된 기득권이 와해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분단체제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정책에 대한 저항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남남갈등입니다. 남한 내에서 반북과 비반북 사이의 이념적 갈등입니다. 

대북정책을 무조건 추진하지 말고 남남갈등을 해소하면서 전진을 해야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남북화해정책에 대한 저항이 남남갈등으로 나왔으며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대북압박정책에 대한 저항이 당연히 생겼습니다.

지난 탄핵정국에서 남남갈등이 극렬하게 물리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태극기 집회에서 촛불은 종북이고 태극기는 애국이라 했습니다. 반박근혜는 종북, 친박근혜는 애국처럼 되었습니다.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대북 화해 정책을 추진하는데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적극적으로 정책이 전개되지 않아서 그렇지 앞으로 남남갈등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아직은 선언적인 것에 그치고 있지만 실제로 남북교류협력이 노무현 정부 말기처럼 복원된다면 태극기 집회 세력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평화통일시민행동


남북관계가 중심, 외교 자기중심성 확보해야 

저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국가이익을 위해서 외국과 협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변 국가들과 협상하는데 항상 대한민국의 국가 이익을 머릿속에 넣고 협상에 임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성을 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일본은 이미 60년 말~70년대 초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리도 미국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습니다. 2차 대전 패전국인 일본을 미국이 조금 풀어주면서 안보관계를 완전히 상하종속관계로 만들려고 할 때 일본 언론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보수, 진보 언론 할 것 없이 '미국이 일본에 이러면 안된다. 우리가 패전국이지만 너무하지 않냐, 우리가 종이냐'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본 외무성 관리들이 미국과 협상할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미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잘 협조하여 경제적 군사적으로 G3에 들어갔습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국민적 분위기가 일본을 저렇게 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지도자가 일본사회를 이끌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중심에 놓고 한반도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북핵문제를 푸는데 있었어도 남북대화를 통해 북한이 북핵문제 해결에 협조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수순을 밟아가겠다고 하는데 저는 올바른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핵문제 해결이 당면 최고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슨 남북대화냐며 북핵문제 해결을 조건화하는 잘못된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까지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김정은 위원장과 대화하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남북대화, 북미대화 입구로 들어가서 북핵문제 출구로 나가겠다고 미국이 이미 순서를 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북핵문제가 해결이 안되었는데 무슨 남북대화 재개냐 하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종북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식이면 트럼프 대통령도 종북인가요?  

트럼프 대통령은 햄버거 먹으면서 김정은 위원장과 대화하겠다고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미북정상회담이라는 입구로 들어간다는데 그것은 올바르다 하고 우리가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서 남북관계 먼저 복원하고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을 빨리 재개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종북이라 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관계를 중심축에 넣고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것은 올바르게 설정된 정책방향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라는 입구로 들어가서 남북관계 복원이라는 중간대문을 통과하여 북핵문제 해결이라는 출구로 나와야 합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을 재개하여 한반도의 좁은 동쪽과 서쪽의 철조망을 통과해서 평양까지 가야합니다. 국장급, 차관급, 장관급회담 이런 식으로 남북관계를 복원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6자회담에서 우리의 입지가 생기고 북한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유엔 대북제재와 5.24조치,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다 

유엔 대북제재를 무시하고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에 들어가는 돈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쓰이므로 안 된다고 합니다. 돈은 전부 다 그리로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돈 쓸데 많습니다. 미사일, 핵은 군수담당비서가 지휘하는 군수공업위원회가 관할하며 북한은 미국과 사이 안좋은 나라들과 무기 거래를 해서 일 년에 10억 달러씩 벌어옵니다. 이건 2006년 북한이 미국에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10억 달러는 너무 많고 5억 달러 정도까지는 쳐준다 했고 북한이 3년 동안 미사일 발사를 유예하면 5억 달러 상당의 식량을 지원한다고 했습니다. 협상이 되어 타결되었고 북한이 얼마동안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 개성공단에서 조업중인 노동자들 ⓒ개성공동취재단


유엔 대북제재는 그렇게 까다롭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금강산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개를 틀어막는 것처럼 해석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주로 발언을 해서 그렇지 유엔제재 내용을 들여다보면 틀어막는 것은 아닙니다.  

유엔제재에는 '군사적으로 전용될 수 있는 우려를 표시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안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유엔제재의 해석은 유엔제재를 주도한 미 재무부가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2014년 금강산 관광 재개 이야기가 나오니 관광 자금이 '벌크캐시'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이후 미 재무부 실무 관리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돈은 유엔제재의 벌크캐시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을 했는데 언론에서 금방 사라졌습니다.

미 재무부 관리들과 잘 협의하면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제약은 그렇게 풀어야 하고 5.24조치 해제 논의가 나오게 되는데 이 조치도 해석여부에 따라 전면적으로 폐지한다는 이야기를 안 하고도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습니다.

법은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완전폐기는 천안함 문제가 있기 때문에 어렵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재개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무당 정치가 가능했던 이유는 색깔 공포증 때문
[평화통일시민강좌]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2017.07.12 02:42:55

네 번째 강연은 심리학자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의 강연입니다. 김 소장은 '이제 국가보안법 폐지를 말할 때'를 주제로 남한 내 뿌리깊은 '종북몰이'에 대한 문제점을 짚어봤습니다. 다음은 강연 주요 내용입니다.  

▲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평화통일시민행동


한국에 국가보안법이 있는 이유는 분단체제 때문입니다. 분단은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쳤고 이것을 분단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분단 트라우마의 핵심은 색깔 공포증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빨갱이, 종북으로 몰리는 것에 대한 과도한 공포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포증은 죽음과 같은 충격적인 공포를 경험했을 때 유발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색깔 공포증은 단순히 언어적 공격 이상입니다. '넌 빨갱이야' 이 말은 단순히 기분 나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심지어는 죽기까지 했습니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 좌익사범에 대한 학살,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 그 이후 조봉암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과 같이 간첩으로 몰아 하루아침에 감옥에 넣고 고문해서 죽인 사건들이 지속됐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리면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색깔 공포증 

색깔 공포증은 정신장애입니다. 한국인들은 집단 정신병이 있는 것입니다. 이 정신장애는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먼저, 사고능력을 저하시킵니다. 개 공포증을 예로 들면 어릴 때 개에게 물렸던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 치와와 같은 작은 개를 만나도 공포를 느낍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치와와가 이 사람을 무서워해야 마땅하겠지만 개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치와와를 무서워합니다. 치와와를 만나 공포가 유발되는 그 순간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통합진보당 해산 당시 종북몰이가 있었습니다. 대통령 부정선거를 획책하여 위기에 몰린 국정원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통합진보당에 대한 종북몰이를 시작했습니다. 21세기에 정당이 해산당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겼는데 정치인이나 진보언론들은 이에 대해 싸운 것이 아니라 침묵하거나 동조했습니다. 제가 만났던 한 언론사의 기자는 당시에 진보 안에 숨어있는 종북주의자들을 다 없애버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니 우리가 국정원에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음에 또 종북몰이가 시작되면 맞서 싸우지 못하고 똑같은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했습니다. 기자라면 우리 사회의 엘리트인데도 종북몰이 한 번에 사고능력이 마비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선고 이후 기자회견을 연 이정희 통진당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색깔공포증은 종북몰이가 한창일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일상적으로 사고능력을 저하시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금지' 때문입니다. 금지어가 대표적입니다. 우리는 어깨동무, 동무생각은 되지만 '동무'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는 되지만 '조선'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동강 맥주는 맛있다'나 '화성 12호는 참 멋지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금지가 있으면 사고능력이 저하됩니다. 프로이드는 빅토리아 왕조시대 때 여성이 남성보다 지적 능력이 떨어졌던 이유를 성에 대한 금지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경찰이 잡아갈 정도로 성에 대한 금지가 심했습니다. 여성들은 성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도록 머릿속을 단속해야만 했습니다. 떠오르면 말하고 싶어지니 머리에서 억제하고 금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 과연 '성'만 금지되겠습니까. 사람은 연상을 통하여 사고를 진행합니다. 성에 대한 생각은 다른 것을 떠오르게 하고 다른 어떤 것이 성을 떠오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 여성들은 '동물의 왕국'도 못 보고 동물원도 못 가게 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의 친교행동이나 교미는 성을 떠올리게 할 위험이 크죠.  

결론적으로 금지는 연상의 고리를 따라서 확대됩니다. 단순히 종북과 빨갱이만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관되거나 그것을 연상시킬 수 있는 것들까지도 금지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라도 금지나 억압이 있으면 전체적인 사고기능에 문제가 생기고 사고능력이 저하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민족'이란 단어를 금지어로 지정하고 통일에 대해서 1분 자유발언을 하라고 하면 '민족'이란 단어를 억제하는데 심적 에너지를 쓰느라 머리가 잘 안 돌아갑니다. 이렇게 사고 억제는 필연적으로 사고능력을 저하시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면서 이것을 잘 못 느낀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의식적으로 억제하는 단계가 1~2년 지속되면 억압이 됩니다. 억제는 의식적이지만 억압은 무의식적이죠. 억압은 무의식적이라 사람들은 자동적, 무의식적으로 어떤 생각을 억누르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억압은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억제는 어느 순간 풀 수 있지만 억압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색깔론과 관련해서는 억압의 명수들입니다. 의식적 노력 없이, 불편하다는 자각도 없이 일상적으로 사고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색깔 공포증으로 인해 판단능력도 손상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판단은 진위판단입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종북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으면 진위판단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사고를 진행하지 않습니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쪽이 위기에 몰리자 문재인 캠프를 공격하기 위해 'NLL'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영해선을 포기하는 매국 행위를 했다는 이 억지 주장에 대해서 우선 NLL이 영해선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판단부터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진위판단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NLL이 영해선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른 채 논란만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색깔 공포증은 후진적 정치를 고착시킨다 

색깔 공포증은 한국을 후진적인 정치에 묶어두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최순실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무당 정치가 가능했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색깔 공포증입니다. 정상적인 정치라면 진보와 보수는 갈등을 겪으면서도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사회를 발전시킵니다. 

북유럽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요, 북유럽의 보수는 진보가 주장했던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을 받아들였습니다. 거부했다면 선거에서 참패하고 정당 존립이 위태로워졌을 것입니다. 국민의 지지가 높은 진보의 정책에는 보수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양보하고 타협했고 그 결과 북유럽은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평화통일시민행동

그러나 한국은 보수가 불리하면 색깔론을 사용하기 때문에 북유럽과 같은 사회발전이 불가능했습니다. 이승만은 진보당의 당수였고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조봉암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를 간첩으로 몰아 죽였습니다. 4.19혁명 이후 박정희는 '좌경용공세력이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며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국민들이 반유신투쟁을 통해 민주화의 봄을 불러오자 전두환은 친북좌경세력을 척결해야 한다며 12.12 쿠데타를 일으켰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면서 나이 드신 분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식의 패배주의에 젖게 됩니다. 박근혜 퇴진 촛불 당시 '군대여, 일어나라' 이런 구호가 나오고 일부 사람들에게 먹혔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의 후진적인 정치의 원인은 색깔론에 있습니다. 장기집권 하면서 부정부패한 반장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새로운 반장후보가 반장선거에 출마해 이 부패한 반장을 비판하면 그는 표를 얻기 위해서라도 조금은 착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새로운 반장후보를 빨갱이로 몰아 없애버리면 되니 옛날 반장은 변화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국의 사대 극우 세력은 수틀리면 종북으로 몰아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했기에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발전하지 않은 채 70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의 사대 극우 세력이 조금도 변화하지 않은 채 21세기까지 생존한 결과 발생한 사건이 바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입니다.  

사상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일부는 제한되어야 한다? 

장기간 동안의 분단 체제, 폭압적인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한국인은 반민주적 의식에 젖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은 사상의 자유입니다.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도 필요한 것입니다.  

서구의 중세시대에는 사상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신 중심의 사상이 유일했으므로 지동설이나 진화론을 주장하면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신에 의해 권력을 부여받았다고 간주된 왕을 비판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상의 자유가 없으면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신흥자본가와 농민들은 사상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웠고 봉건제 국가를 공화제 국가로 바꾸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듯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사상의 자유입니다. 사상의 자유는 보편적 인권입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사상의 자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은 파쇼국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청 앞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치는 것이 사상의 자유냐'고 묻습니다. 사상의 자유를 인정한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색깔 공포증으로 '그건 아니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김일성 만세이든, 모택동 만세이든, 트럼프 만세이든 간에 자신이 믿는 사상을 표현할 권리는 인정되어야 합니다. 한국인은 사상의 자유는 제한되어야 한다는 파시즘적 명제에 동의합니다. 사상의 자유는 허용하되 종북은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박근혜가 진보당을 해산시키고 난 후에 진행되었던 기자간담회에서 한 외신 기자가 왜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지 물어봤습니다. 박근혜는 “사상의 자유 인정한다. 그러나 한국은 특수한 상황이므로 일부는 제한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전형적인 파시스트의 논리입니다.  

히틀러도 사상의 자유를 금지하면서 동일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독일은 사회주의 소련과 대치 중이므로 사회주의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맹위를 떨칠 때도 소련과 대치 중이라는 이유를 댔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이 후에 매카시즘을 자진해서 철회한 것은 소련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매카시즘이 나라를 망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파시스트들은 특수한 상황 때문에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고 싶어서 특수한 상황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는 특수한 상황을 핑계 삼아 제한해도 괜찮은 하찮은 권리가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입니다. 

자유한국당과 그 지지자들은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떠들어댑니다.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면 빨갱이, 간첩들이 설칠 것이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져 망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망하는 것은 나라가 아니라 사대 극우 세력이죠.

인류역사에서 사상의 자유를 허용해서 망한 나라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반면에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아서 망한 나라들은 있습니다. 히틀러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일본 군국주의는 사상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광기어린 야만 국가로 전락했으며 30년도 지속되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인류의 기본권리 문제로 접근되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한국이 70년간의 파쇼체제를 졸업하고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70년 분단 체제는 정치적으로는 파쇼 체제였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국가보안법 폐지로 사상의 자유가 전면적으로 허용되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평화통일시민행동


반민주적 사회풍토를 만든 국가보안법 

우리 사회는 획일적이고 독재적인 문화가 온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는 반대의견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마음에 안 들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나이도 어린 것이), 학벌(고졸 주제에), 군대(군대는 갔다 왔어?), 성(여자가 무슨 말이 그리 많아) 등의 비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찍어 누릅니다. 그럼에도 입을 다물지 않고 계속 저항하는 사람은 빨갱이나 종북이라는 공격을 받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비합리적 권위주의, 비합리적 찍어누르기의 맨 끝에는 '종북몰이'가 버티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안함의 침몰원인을 두고 북의 소행이 아니라고 합리적 의심을 하는 사람, 노조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것이 허용되는 사회는 건강하고 합리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동맥경화증에 걸려 있습니다. 소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든든한 버팀목으로 하여 상대방을 빨갱이로 몰아가면 이길 수 있으므로 소통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합리적인 소통과 토론이 불가능한 사회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또한 무권리를 일상화시켰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의 항쟁을 통해 정권을 교체하거나 끌어내리면서 상층 민주주의를 실현해 왔습니다. 그러나 기층에서는 무권리가 만연해 있고 노예 상태입니다.  

직장에서 노동자들이 회사 경영에 참가하거나 틀린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까?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교장이나 교감한테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거나 학교 운영에 참가할 수 있습니까?  

국가보안법은 한국인들이 광장에서는 정치의 주인이 되지만 일상에서는 노예 상태를 면치 못하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조에 가입하는 것이 이익이고 옳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종북 낙인이 찍힐까봐 쉽게 가입하지 못합니다. 노동자들은 노조가입 그 자체에는 별 거부감이 없지만 빨갱이로 몰리는 것은 몹시 두려워합니다.

한국에서 국가보안법이 없어지고 노조에 가입해도 아무런 탄압이나 불이익을 받지 않게 된다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북유럽 국가들의 노동자들보다 더 많이 노조에 가입하게 될 것입니다.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도 결국 국가보안법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창조와 혁신을 망친다 

지금까지 한국경제 성장의 비결은 후발자 전략, 즉 베끼기였습니다. 예를 들면 세계 최초로 스마트폰을 만들지는 못하는 한국은 미국 기업의 기술을 빠르게 베껴서 싸게 만들어 판매하는 전략으로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우리보다 더 잘 베끼는 나라들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이제 창조경제, 혁신경제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한국처럼 군사주의적, 권위주의적,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지배하는 기업에서는 혁신적인 기술과 아이디어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루빨리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기업문화가 자리 잡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지만 정권이나 윗사람에게 밉보이면 빨갱이로 몰리는 사회분위기에서 그것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보안법이라는 족쇄가 풀려야 우리 사회 곳곳에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사회풍토가 정착되고 창의성이 꽃펴날 수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우리 사회가 이대로 주저앉느냐 아니면 미래로 나아가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색깔 공격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미래로 가는 유일하고도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다행히 과거에 비해 지금은 색깔 공포증이 상대적으로 완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빨갱이, 종북으로 몰수는 있어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못합니다. 한국인들은 색깔 공격의 위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 즉 색깔 공격을 받는 경우에도 죽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짧게 잡더라도 김대중 정부 시기부터 20여 년 정도 경험해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촛불을 들어도 군대를 투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국민들은 예전보다 색깔 공격을 안 무서워합니다. 세월호 참사 때 정부가 종북몰이를 시도했지만 안 먹혔습니다. 정부만 욕을 먹었죠.  

2016년 북의 식당 여종업원 12명을 국내로 입국시켜 총선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려고 했지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반대 투쟁 역시 종북으로 몰려고 했지만 성주 군민들은 '우리는 종북이 아니라 경북이다'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요즘엔 종북몰이, 색깔론이 잘 먹히지 않습니다. 이 시기야말로 색깔 공포증을 완전히 치유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서 분단 체제를 민주주의 체제로 바꿀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합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통해 지금의 파쇼 체제를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로 바꾸어야 합니다.


고구려·백제·신라, 혈투 속에서도 교류했다…지금 우리는?

[평화통일시민강좌] <1> 정호섭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6.15남북공동선언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평화통일 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지난해에 이어 2회째를 맞은 평화통일 시민강좌는 남북 교류협력 재개 촉구를 주제로 오는 6월 25일까지 총 5회에 걸쳐 진행됩니다.

이번 강좌에는 겨레말큰사전 편찬과정, 북한을 여행하고 돌아온 외국인 사진작가에게 듣는 북한 이야기, 20년간 의료 지원을 해 온 민간단체의 경험담 등을 직접 듣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5월 14일 진행되는 제2강에서는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장의 강연을 통해 개성공단 폐쇄로 잃은 것들을 되짚어 보고 남북관계 복원에 대해 모색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첫 강좌로 지난 4월 30일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인 정호섭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의 '남북이 함께 고려의 발자취를 찾다-민족공동 문화유산 관련 남북교류협력의 역사와 평가'를 들어봤습니다.  

정 교수는 지금처럼 남북의 모든 채널이 막혀있는 대결 구도 속에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사업이 비정치적인 문화·역사·학술 분야의 교류라면서, 남북의 문화 교류가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다음은 정 교수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 정호섭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저는 현재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서 십여 년 동안 활동하고 있는 정호섭입니다.  

제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도교수님인 강만길 선생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저는 분단시대의 극복과 통일을 이루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소명이라고 배웠습니다. 요즘 같은 '글로벌'한 시대에 이에 걸맞은 인식을 가지기 위해서도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사를 전공하는 저는 만주를 많이 가는데요.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는 땅에서 '예전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삼면이 바다고 한 면은 막혀있는 섬 같은 반도에서 사는 우리들은 생각도 반도에 갇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주는 우리와 자연환경이 다릅니다. 그것을 보고 산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은 사고의 스케일이 다릅니다. 유럽을 비행기가 아닌 철도로 갈 수 있다는 것, 우리와 유럽이 대륙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교류협력 합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로 남북교류의 장이 마련되고 80년대 이산가족 방문과 예술공연단 방문이 있었으나 남북교류협력의 본격적인 장을 마련한 것은 2000년 6.15공동선언이었습니다.  

6.15공동선언 4항에 제반 협력, 교류 활성화로 신뢰를 구축한다는 내용이 있고 2005년 17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개성지구 역사유적들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습니다. 2007년 10.4선언 이후 제1차 남북총리급회담(2007. 11. 16.)에서 남북사회문화협력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역사교류와 관련하여 역사유적 및 사료 발굴 보존사업을 추진하는 내용을 각 항목에 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남한은 통일부가, 북한은 통일전선부가 교류협력사업을 주도하였습니다. 민간교류는 남한의 민간단체와 북한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 통일전선부 산하 기구)가 담당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순수한 민간교류가 아닙니다.

남북역사교류 사례들 

① 전시 

남한에서 북한 소장 유물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2003년 북한과 중국에 있는 고구려고분군이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개성에서 전시회와 토론회를 진행했습니다. 이 전시회를 기반으로 해서 6.15공동선언 발표 5돌과 조국광복 60돌 기념 전시회를 서울에서 열어 고구려 유물 60점을 전시했습니다. 고려대와 서울시 협력 사업이었는데 이때 남한에서 유물보험도 들고 운송도 책임지고 유물보존도 제대로 해서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은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북한전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② 단군릉에 대한 학술회의 

단군릉에 대한 학술회의도 했습니다. 단군릉은 장군총처럼 복원하였는데 훨씬 크게 지어 놓았습니다. 북한이 단군릉을 만들고 주장하는 것이 '대동강 문명'입니다. 세계 5대 문명 안에 대동강 문명을 넣어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대동강을 중심으로 세계 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단군릉을 갔었는데요, 무덤양식이나 출토유물을 보니 5세기 유물이었습니다.  

북한이 단군 부부의 능이라고 하니 대놓고 아니라고 할 수는 없고 나중에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과 선생한테 "선생,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오. 역사학자로서 이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따졌습니다. 그 선생도 아니라는 것을 아니 얼굴이 벌게지더군요.

북한과 역사 교류하면서 '노터치' 하는 것이 있습니다. 1910년 이후 현대사 부분은 토론 할 수 없습니다. 북한은 김일성 혁명 투쟁사가 현대사이므로 우리와는 현대사 구조가 다릅니다. 아무리 토론해도 견해차가 크다 보니 자연적으로 북한과의 역사교류는 전(前)근대사 중심으로 하게 됐습니다. 북한의 역사전통은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입니다. 수도가 모두 북쪽에 있죠. 

북한은 조선 시대 역사에서는 외세와의 투쟁사,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중요시합니다. 북한은 유물사관과 민족사관이 뒤섞여 있어요.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를 봐도 자신을 공산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자라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북한의 역사학은 민족사관이 있습니다.

북한의 역사학은 1970년 이전까지는 남한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유럽에서 근대학문을 공부했던 고고학자나 사학자들이 해방 후 월북했거나 납북되었기 때문에 남한에 남아있던 사학자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실증사학을 공부한 이병도 정도만 남아있었습니다.  

당시 최고 엘리트들이 북한에 가서 역사학의 체계를 잘 세웠는데 1968년 주체사상이 나오면서 학문의 자유가 제한됐습니다. 학문은 자유가 제한되면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다양한 이설이 나오고 토론하고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발전이 되는데 딱 하나의 틀에만 맞추라고 하면 발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면에서 다소 북한 역사학이 문제를 안고 있죠.

그래서 남북역사교류가 중요합니다. 역사인식의 차이가 큰 부분이 있으므로 통일을 대비하여 역사교류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③ 일제시대 및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토론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우리를 얼마나 수탈했는지에 대한 토론회나 일본해 표기의 부당성에 대한 남북토론회도 열렸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 및 독도 강탈책동 반대 학술토론회도 했습니다. 북한 역사학자들을 배에 태우고 독도에 가서 세레머니를 하는 것도 기획했었습니다.

④ 해외에서 이루어지는 남북역사교류 

올해와 같이 남북교류가 전면적으로 차단되거나 조건이 안 맞는 경우에는 제3국인 중국이나 러시아, 유럽에서 하기도 합니다. 올해 7월, 국사편찬위원회와 중국 연변대, 북한이 중국 베이징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하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안중근의거 100주년 토론회도 해외에서 열렸습니다. 특히나 이 사업은 북한이 아주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김일성주석 생전에 안중근 유해 찾기부터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사안이었습니다.  

⑤ 북한 문화재 복원·발굴·실태조사 

북한 문화재 남북공동 복원·발굴·실태조사도 했습니다. 금강산 신계사 발굴 및 복원, 개성공업지구 발굴조사, 고구려 유적 남북공동 학술조사, 고구려 궁인 안학궁 발굴조사, 고구려 고분군 남북공동 실태조사 및 보존사업 등이 있었습니다.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 조사는 2007년부터 시작되어 10년간 남북이 함께 한 사업입니다. 이 사업은 장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는 점, 민관이 함께 했다는 점 등에 의미가 큽니다. 보통 북한이 관대 관의 교류는 안 하려고 하는데, 제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통일이 됐을 때 북한의 문화재도 정부가 나서서 관리하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발굴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위탁한 형태로 10년간 민관 협력으로 진행됐습니다.  

▲ 2015년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 착수식 ⓒ문화재청


⑥ 중국대학을 통한 간접지원 

중국대학을 통해 간접 지원한 발굴도 있는데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연변대학교를 통해 남포시 용강군 옥도리 벽화고분 발굴조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 문화재 현황 조사와 문화재 안내서도 꾸준히 출판되고 있습니다.

남한의 무진동 차량을 타고 함경도로 올라간 북관대첩비

약탈문화재 남북 공동 반환 협력사업도 있었습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었던 북관대첩비(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 임진왜란 중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친 공을 기려 세운 비.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일본으로 가져갔다. 2005년 반환되어 2006년 개성을 거쳐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 193호로 지정되었다. 편집자)를 문화재청이 주도하여 일본으로부터 반환받은 뒤 원래 이 비가 있었던 함경북도 길주군에 세워두기 위해 북한에 비를 인도했습니다.

북관대첩비가 저의 선조와 관련된 비였습니다. 반환할 때 북한의 꽤 높은 사람이 저한테 전공도 아닌데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냐고 물어봐서 "저의 할아버지입니다"라고 하니 "그러면 잘해야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분이 밥 먹고 나오는데 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항렬을 물어보며 족보를 따졌습니다. 봉건적인 것을 타파하려는 북한에서 항렬을 따지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북관대첩비 반환할 때 남한에서 북한에 지원한 것이 박물관에서 유물 운송할 때 쓰는 무진동 차량입니다. 제가 고구려 전시할 때 북한에서 무진동차를 보고 나중에 유물 돌려줄 때 그 차도 한 대 달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정도 돈이 없어 못 줬는데 북관대첩비 반환할 때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차량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개성역사지구 세계문화유산 등록과 더불어 아리랑도 공동 등재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남한만 등록했습니다. 북한의 아리랑에는 김일성, 김정일 지도자를 찬양하는 아리랑도 있는데요, 북한에서 이것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해서 안 됐습니다.

12년간의 역사교류 성과를 날려버린 개성공단 중단 조치

2004년 이후 북한이 사회문화창구를 민화협으로 일원화시킨 이후 남북교류가 양적 질적으로 활성화 되었습니다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이후에는 대부분 중단되어 작년까지 개성만월대공동발굴 사업과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유일하게 남아있었습니다. 2010년 천안함 사태와 5.24조치로 남북교류가 전면 중단되었을 때 개성만월대 사업은 수해복구 명목으로 유일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개성만월대 공동발굴사업이 유일하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개성공업지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개성공업지구가 문을 닫았습니다. 남북역사교류사업 측면에서 2004년 시작해서 2016년까지 12년 동안 공들인 것이 한순간에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개성공단 중단은 굉장히 무식한 정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핫라인 정도는 남겨놓고 중단을 해야지 남북교류 창구도 다 없애고 12년간 투자한 금액을 날려 보내니 아쉽습니다.  

개성공업지구로 들어가는 돈이 북한의 미사일을 만드는데 과연 얼마나 쓰일까요? 1%도 안 됩니다. 제가 매년 한두 번씩 개성에 갈 때마다 개성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옷이 달라지고 자전거가 좋은 것으로 바뀌고 집 외장이 달라집니다. 태양열 판도 생깁니다. 개성공업지구가 개성주민의 생활 수준을 높여놨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보수 정부 입장에서도 유리한 것입니다.  

고구려·백제·신라, 치고받고 싸웠지만 문화 교류는 했다 

저는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전까지 통일 논의는 좌파진영의 논리였습니다. 통일대박론은 우파진영이 통일 논의를 가져간 엄청난 선언입니다. 물론 경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흡수통일을 전제한 논의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통일대박을 외치니 보수 언론에서마저 통일을 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를 몰아갔습니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통일논의를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습니다.

물론 의도가 순수하거나 미래지향적이지 않습니다. 통일준비위원회를 꾸렸는데 그 안에 역사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통일논의가 흡수통일을 전제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지난 2014년 드레스덴 선언에서 잘 나타납니다. 남북교류를 민족 동질성 회복, 인도적 지원, 나무 심기로 제한했습니다. 개성만월대 남북공동발굴 사업은 민족 동질성 회복 차원에서 박근혜 정부가 허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면 다 불허했습니다.

남북교류협력 사업은 지속적인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로 진행됩니다. 개성공단이 대표적인 사례이죠. 갑작스런 중단으로 투자금액을 다 날려버리지 않았습니까. 정치 경제 분야의 교류협력은 정세에 민감해야 하겠지만, 문화·학술 교류는 정례적·상시적으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옛날 고구려·백제·신라도 그렇게 치고받고 싸웠지만 문화교류는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리 정치적 대립관계라 할지라도 문화·학술 교류마저 끊는 것은 아쉽습니다.

▲ 정호섭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남북문화유산교류는 통일국가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

남북문화교류협력 사업은 작은 사업이기 때문에 남북 간 화해협력 분위기 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개성공업지구 만월대 발굴 사업 하면서 개성의 휴전선 근처에 있던 군부대가 개성 뒤쪽으로 밀려났습니다. 지금은 다시 앞으로 전진해 있습니다. 얼마 전 보도를 보니 북한이 개성공업지구에 있는 물건을 가져다 쓰면서 독자적으로 만월대를 발굴하고 있다고 합니다. 개성공업지구 폐쇄로 우리가 잃은 것이 많습니다.

문화유산 관련 사업은 결국 통일 국가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입니다. 북한의 경제난으로 문화재 보존이 미비한 상황인 현 시점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킬 수 있는 사업입니다. 북한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남한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은 여러 조건 중에 하나가 '개방'입니다. 실사단이 직접 가보고 점수를 매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평양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래서 북한은 예외적으로 사진으로 대체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프랑스도 그러한 도움을 줘서 고구려 고분이나 개성 역사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이렇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보호 협약이 작동됩니다. 따라서 이는 한반도 내 전쟁 방지에도 일정 부분 관련성이 있습니다.  

학술적인 면에서 남한은 고구려, 발해, 고려사가 약한 부분이고 북한은 신라, 백제사가 약한 부분이므로 서로 한국사 연구의 공백을 메울 수 있고 동북공정 문제나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를 공동으로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박물관이나 장비, 발굴 수준을 보여주면 북한의 학문적 수준과 발굴 기술 등도 함께 올라갑니다. 이런 것은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습니다. 남북교류협력은 보이지 않는 효과가 매우 큽니다.  

북한은 남북교류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유용한 사안에 대해서만 선택적 호응하고 남한도 정치경제 분야가 우선이므로 문화유산 교류에는 다소 인색합니다. 지금은 정부가 정치경제 분야가 잘 안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화유산에 지원하는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잘 안되면 문화, 역사교류를 지원하는 역설적인 상황이죠.  

퍼주기 논란? 역사교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남북교류가 퍼주기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구체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원이 북한의 경제와 군사 부분에 얼마만큼 들어가는지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성공업지구에 들어가는 돈이 미사일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하면서 구체적 데이터는 없습니다.

민족문화유산은 경제적 잣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골동품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문화교류 자체가 비과시적이고 간접적이며 감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계량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한 개성 만월대 지역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고려 시대 금속활자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실제로 제가 고구려 고분군 조사할 때 벽화군 10개를 요청해서 열었고 그때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비용은 몇억 들었습니다. 그때 사진들이 남한의 모든 관련 출판물에 쓰이고 있고 동북아역사재단이 만든 영상도 그 사진들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몇억 이상이죠.  

또 통일부가 북한에 돈을 못 주게 하기 때문에 현물을 줍니다. 예를 들면 육로로 신의주에 갔을 때 북한의 문화재 보존 시설 건축할 때 쓰라고 중국에서 벽돌과 타일을 사서 줬습니다. 실제 구성 주체들에게 가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민족문화재 보존이라는 민족의 백년대계를 위한 사업이며 장기적 관점에서 인내와 시간을 가지고 추진해야 하는 사업입니다.

남북관계, 첫눈에 반하는 남녀관계와 달라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남과 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억지로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북이 다른 것은 서로 인정한 상태에서 서로가 조금이라도 타협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가기 위한 접근을 해야 합니다. 이런 것부터 하고 나중에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시기를 만나면 조금 더 진일보하게 추진해 나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북관계가 남녀관계처럼 첫눈에 반하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남북문화교류 사업은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 구도 속에서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으며 청와대나 통일부의 의지의 문제입니다. 지금처럼 남북교류가 하나도 안되는 상황에서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사업은 역시 만월대 같은 비정치적인 문화, 역사, 학술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개성공단 폐쇄 100일…"직접 손실만 8천억원"

[평화통일시민강좌] <2> 정기섭 개성공단기업인협의회 회장


개성공단이 전면 중단된 지 100일이 다 되어 갑니다. 천안함 사건으로 남북교류를 전면 차단한 5.24조치가 있었지만 당시의 정책결정자들이 '남북관계의 마지막 끈'은 남겨져야 하고, 공단이 한번 중단되면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성공단은 신규투자를 불허하는 수준에서 현상 유지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설 연휴 마지막 날 2월 10일, 개성공단이 삶의 일상이고 소중한 일터였던 우리 기업인들과 근로자들은 정부의 전격 중단 결정과 이에 대한 북측의 추방 조치로 2월 11일 개성공단에서 쫓겨나듯 나온 후 언제 다시 개성공단에 갈지 알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전면중단 결정에 대해 억울하고 심지어 분노도 느끼지만, 중단결정의 원인과 이후의 과정에 대해 기업인의 입장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강연하는 정기섭 회장 ⓒ평화통일시민행동


대통령께 결재받은 사안, 재검토는 안된다 

2016년 초 북한의 핵실험으로 개성공단에 상주하는 남측 인원을 줄이는 조치가 있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 개성공단 운영에 지장이 있었으므로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통일부 장관과 면담 요청을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2월 9일 연락이 와서 10일 오후 2시 삼청동 회담본부에 가보니 그 자리에 장관뿐 아니라 차관의 명패도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개성공단에 무슨 일이 터지는가보다 직감을 했죠.  

그 자리에서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을 했고 이것은 대통령한테 결제받은 사항이니 재검토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개성공단 내의 많은 자재와 완성품을 들고나올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통일부는 이틀 동안 차 한 대, 사람 한 명만 들어갈 수 있게 했습니다. 결국 다음날 11일 북측의 추방조치로 우리는 개인 사물도 제대로 못 챙기고 황망히 피난 나오듯이 나와서 지금까지 못 들어 가고 있습니다.

통일부 장관도 모르는 개성공단 핵개발 전용론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의 이유를 세 가지로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개성공단 자금이 쓰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지금까지 개성공단으로 6200억 원이 들어갔고 이 금액을 연간으로 따지면 600억 원이 채 안 되는 돈입니다. 이 돈 중에 50%를 핵 개발에 썼다 하더라도 일 년에 300억 원 가지고 조 단위 비용 규모가 들것이라 추측되는 핵과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습니까. 통일부 장관도 잘 모르니 근거를 못 대는 것 아닙니까. 

지난 2월 국회 개성공단 관련 대정부 질의에서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의원이 "개성공단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외화는 북측 근로자 및 개성 시민들을 위한 생필품 구매에 쓰인다"고 말했습니다. 개성공단 근로자 임금이 70달러에서 시작해서 개성공단 중단 직전에는 200달러 정도였습니다. 많지도 않은 이 금액의 대부분이 개성공단 근로자 및 가족의 생필품 구매에 사용된다고 생각했을 때 개성공단 중단으로 핵·미사일 개발에 들어가는 자금을 차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또한 북한의 핵 개발 문제는 개성공단이 태동조차 하지 않았던 1990년대부터 있어 왔던 문제입니다. 핵 문제는 남북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관심 있는 사항이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남과 북이 다자간 협상을 통해서 풀어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핵 문제와 별개로 남북관계의 긴장 완화와 관계 개선을 위해서 경제협력은 해야 합니다. 또한 남북 간 교역을 활발히 하는 것이 군사안보 문제 해결에도 보탬이 됩니다.  

▲ 정기섭 회장 ⓒ평화통일시민행동


신변안전 문제? 연평도에 포가 날아 올 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국민의 신변안전에 대한 우려, 즉 개성공단 주재원들의 인질화 가능성"이었습니다. 개성공단에서 10여 년간 생활해 왔던 기업인들과 주재원들은 신변안전을 문제 삼는 정부의 주장에 전혀 동의하기 힘듭니다. 2010년 연평도 포격이나 2015년 목함지뢰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신변안전 문제에 대해 우려할 만한 상황은 없었습니다.

정부에서 예로 2013년 개성공단 잠정 중단시의 최후의 7인을 이야기합니다. 개성공단의 임금은 일반회사처럼 그달이 끝나기 전에 주는 것이 아니라 그달의 초과근무시간, 주말근무 등을 계산해서 다음 달에 지급합니다.  

2013년 4월 8일 북측이 근로자를 철수시켰던 당시에도 지난달 임금을 못 준 상태였습니다. 몇 달 혹은 일 년씩 임금이 밀려있는 기업이 있었고 세금도 안 낸 것이 있어서 모두 1300만 달러를 정산했어야 합니다. 북측에서 이를 정산하기 전에는 관리위원장이 남을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실제로 관리위원장이 일주일 남아있었습니다.

현대아산 직원 유모 씨 사건도 신변안전문제의 예로 들고 있는데 그 사람은 북측의 여성을 남쪽으로 탈출시키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져 상당 기간 북측에 억류되어 조사 받다가 현대 현정은 회장이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런 것을 예로 들면서 정부가 신변안전 문제로 개성공단을 갑작스럽게 중단한다고 했는데 기업들로서는 솔직히 진정성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부가 법적 절차도 없이 민간기업 문 닫게 할 수 있나? 

세 번째 이유는 "핵과 미사일 개발을 막기 위한 국제적인 제재 동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에서도 북한 주민들의 생계를 크게 저하시키는 제재는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개성 공단 전면 중단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사람들은 개성공단 내의 북측 근로자 5만4000명과 개성에 있거나 서울에서 관련 업무를 했던 남측 근로자 2000명, 그리고 123개 입주기업과 70여 개의 영업 기업입니다. 왜 애꿎은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개성공단 처음 시작할 때 정부가 기업들에 적극 권유를 했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보장하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국회에서 개성공업지구 지원에 관한 법률도 만들었습니다. 정부는 개성공단을 경제 원칙에 입각한 국제경제력 있는 공단으로 육성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시작할 때 정부로부터 복잡한 절차와 승인을 거쳤기 때문에 정부가 승인사항을 변경하거나 해지할 때에는 법률에 의거, 적법한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남북교류협력법에 의하면 남북협력사업을 정지할 때에는 '국가안전보장을 명백하게 해칠 경우에 한하여 6개월 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청문 절차를 거치도록'되어 있습니다. 작은 기업이 사업을 할 때에도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계약서에 의거한 위약금을 물고 해약을 합니다.  

우리는 공기업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부 마음대로 손실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개성공단을 중단시킬 수 있습니까? 이러한 조치를 보고 정부의 대북제재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정부가 민간기업을 마음대로 문 닫게 하고 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임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개성공단이 중단되고 우리가 잃은 것들 

지난 2013년 개성공단 잠정 중단 이후 남북의 치열한 협상 끝에 나온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 1항은 "남과 북은 통행 제한 및 근로자 철수 등에 의한 개성공단 중단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세의 영향 받음이 없이 남측 인원의 안정적 통행, 북측 근로자의 정상 출근, 기업재산의 보호 등 공단의 정상적 운영을 보장한다"입니다.

▲ 남북은 지난 2013년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7차례의 실무회담을 가진 끝에 그해 8월 14일 개성공단 정상화에 합의했다. 사진은 남측 수석대표인 김기웅(오른쪽) 당시 남북협력지구지원단장과 북측 수석대표인 박철수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부총국장이 합의문을 교환한 이후 악수하는 모습 ⓒ개성공동취재단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처음 3~5년 동안은 적자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북측 노동자들이 제품 품질에 대한 개념이 없으므로 '이 정도면 쓰는데 지장 없는데 왜 불량이냐'며 많이 싸웁니다. 납기일 맞추느라 애 많이 먹습니다.  

그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제 기업들이 이익을 창출하는 단계와 이르렀는데 하루아침에 사업장이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잃은 것의 첫 번째는 정부에 대한 신뢰입니다. 앞으로 경제협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공장도 짓고 영업소도 차려야 하는데 이번 경우를 보면서 누가 투자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두 번째는 남북경협의 실험장이자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개성공단을 두고 '통일의 옥동자'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과거의 남북경협사업은 주재원이 파견되어 장기간 일상적으로 북측 성원과 협력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개성공단은 상주하는 주재원 850명이 북측 근로자와 함께 생산을 같이 하는 곳입니다.

당장 눈에 띄지는 않지만 항시적인 만남을 통해 변화를 이루어 나가는 곳입니다. 체제와 제도 및 문화가 상이한 남과 북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협력할 수 있는지를 매일매일 실험하는 작은 통일의 공간이었습니다. 개성공단의 전면 중단으로 남북경제협력 및 작은 통일의 모델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는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습니다.

세 번째는 개성공단 입주 기업의 경제적 피해입니다. 기업의 직접투자 손실로만 8000억 수준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은 영업손실로 개성공단에서 쫓겨났지만 주문상품의 납품기한은 맞춰야 하므로 개성공단에서 100원 가지고 할 것을 200원, 300원 들여 다른 공장에서 생산하고 자재도 다시 발주하면서 손실을 크게 입었습니다. 이러한 영업손실까지 합치면 조 단위가 훨씬 넘어갑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부품 중에 북한 내에서 생산 못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국정원이 그런 것을 열심히 파악해서 그 부품들이 북한으로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인 제재 아닙니까. 핵미사일 개발은 북한 당국이 했는데 왜 남북의 근로자와 우리 기업이 벌을 받아야 합니까. 제재의 대상과 제재 조치로 인해 피해를 입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 질의 응답  

질문 : 개성공단 손실에 대해서 정부도 인정을 했으니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면 이기지 않을까요? 


▲ 정기섭 회장 ⓒ평화통일시민행동

정기섭 :

2010년 5.24조치로 손실을 본 회사들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했었는데 그때 법원이 정부의 통치행위로 인정은 안 했지만 정부가 배상을 해야 할 정도로 위법성이 크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개성공단의 조속한 재개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부의 공권력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개성공단 피해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요청하고 있습니다. 향후 이런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질문 : 개성공단 중단으로 기업들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요?

정기섭 : 개성공단에만 공장이 있는 50개 기업과 개성공단의 생산 비중이 50%가 넘는 회사까지 합쳐 입주 기업의 70%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보험 이야기가 나오는데 보험은 공단 중단 기간에만 주는 무이자대출입니다. 재개되면 다시 갚아야 합니다. 2013년 중단되었을 때 지급받은 보험은 한 달 이내에 갚으라고 했습니다. 못 갚은 회사는 첫 달은 3%, 두 번째 달 6%, 세 번째 달 9% 이자 쳐서 갚아야 했고 지금도 갚고 있는 회사가 있습니다.  

질문 : 정부가 2월 10일 개성공단 중단 결정을 하고 북측이 11일 오후 5시까지 나가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밤늦은 시간에 나왔습니다.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정기섭 : 11일 아침에 차 한 대씩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북측 인원도 출근을 안 했으니 혼자서 완제품과 몰드 같은 중요한 부품들을 차에 잔뜩 실었습니다. 3시 반에 나가기로 신고되어 있는데 5시에 나가면 이전까지는 벌금 50달러를 내면 됐기 때문에 우리 회사도 벌금 낼 생각을 하고 5시에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가다 보니 물건은 안되고 몸만 나가라고 해서 다시 물건을 내려놓고 나왔습니다. 나오는 차가 한두대가 아니고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밤늦게 나오게 된 것입니다. 어떤 회사는 급하니까 회사 건물 안까지도 못 들어가고 마당에 그냥 쌓아놓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3시 반에 나온 회사들은 물건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 개성공단 남한 인원들이 지난 2월 11일 밤 도라산 출입사무소를 통과해 남한으로 들어오고 있다. ⓒAP=연합뉴스


개성공단의 전기는 남측이 공급하고 물은 개성 인근 저수지 물을 끌어와서 공단 내에서 정수해서 급수했습니다. 남는 물은 개성 시내에 줬습니다. 2월 11일 밤 10시에 남측 인원이 다 내려오자마자 밤 11시에 한전에서 전기를 끊었습니다. 아마 수도도 끊겼을 것입니다.

물과 전기는 전략물자도 아니고 생활에 필수적인 것인데 끊을 때 끊더라도 며칠 여유를 줬어야 했습니다. 개성 시내 사람들이 북한 지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그런 예기치 않은 고통까지 주어야 합니까. 우리 정부의 조치가 너무 성급하고 졸렬하여 안타까웠습니다. 2013년 조치 때는 최소 전력은 보내고 수도공급도 계속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안볼 것이라 생각하고 전기도 끊으면서 수도 공급도 끊었습니다.



넌 뉴질랜드 사람이잖아, 북한에 갈 수 있어!

[평화통일시민강좌] 로저 세퍼드 사진작가


뉴질랜드 경찰이었던 저는 1999년 영어 교사로 1년 동안 한국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2006년 다시 한국에 와서 휴가를 보냈습니다. 그때 '백두대간'을 발견했습니다. 산에 오르는 중에 만난 한국 사람이 백두대간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었는데 굉장히 감명 깊었습니다. 

외국인들도 백두대간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친구와 함께 외국인을 위한 백두대간 가이드북을 만들었습니다. 백두대간을 조사하다 보니 한국의 산은 역사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산자락 곳곳에 있는 전설과 사연이 저를 한국의 산에 머물게 한 이유입니다. 

2010년 책이 발간되기 전 다시 한국에 휴가를 왔는데 그때 삶의 활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업을 관두고 한국에 와서 여행사도 만들고 책도 만들고 여행 가이드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한국의 산은 굉장히 멋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북한에 갈 생각은 못 했습니다. 북한은 성벽 뒤의 미지의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 사진작가 로저 세퍼드. ⓒ평화통일시민행동


너는 뉴질랜드인이잖아. 북한에 갈 수 있다고! 

한국 친구를 만나 이 일을 하면서 수입이 있었으면 하는 저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한국의 산을 찍어 책을 내고 싶다는 저의 생각에 대해 이미 그런 책은 많이 있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다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로저, 너는 뉴질랜드인이잖아. 북한에 갈 수 있다고! 북한에 가서 북한의 산을 찍어서 책을 내는 것은 어때?" 

그래서 저는 북한에 갔고 북한 방문 경험은 저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북의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며 남과 북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은 저의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곳입니다. 한국의 산들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한국의 생각, 역사 그리고 앞으로 한국이 가야 할 길까지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2011년 저는 평양에 갔습니다. 조선-뉴질랜드 친선 협회 관계자들과 함께 했는데요, 황성철(조선-뉴질랜드 친선 협회 담당관. 통역), 황철영(조선-뉴질랜드 친선협회. 행정 담당관), 한명수(운전사) 3명과 한 팀을 이루어 갔습니다. 

Mr.한 시간, "한 시간만 가면 됩니다"  

북한의 두류산을 갔습니다. 한국에는 두류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여러 개 있습니다. 북한에는 3~4개가 있고 남한에도 두류산이 3개 있습니다. 제가 2011년에 간 두류산(함경도)은 단풍도 잘 보존되어 있고 아름답습니다. 두류산에 올라갈 때 산림청 직원과 함께 갔습니다. 그 직원은 항상 군인과 비슷한 유니폼을 입고 나무에 걸려 불편할 것 같은 큰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지팡이용으로 큰 막대기까지 들고 있으니 산속의 마술사 같았습니다. 이 사람한테 정상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봤죠.  

"한 시간!" 

우리는 쉽게 믿지 못했습니다. 황성철이나 황철영은 도시 사람이라 산을 타는 것을 싫어했죠. 두류산을 오르는 내내 너무 피곤해 했는데요. 한 시간은커녕 6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Mr.한 시간'이란 별명을 붙였습니다. 아마 Mr.한 시간 혼자였다면 한 시간 만에 갔을 것 같습니다. 

▲ 맨 왼쪽이 'Mr. 한 시간', 맨 오른쪽이 황성철, 오른쪽에서 두 번째 황철영, 가운데는 로저 세퍼드. ⓒ로저 세퍼드


 
남이나 북이나 등산의 비밀 병기는 '술' 

북한 사람들도 남한 사람들처럼 등산할 때 음료수나 음식, 소주를 꼭 싸 들고 다닙니다. 대동강맥주, 도토리 소주를 꼭 가방에 넣고 다녀요. 도토리 소주는 북한에서는 '민중 소주'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데요, 심지어 아침을 먹을 때도 소주와 함께 하기도 합니다. 북한에는 쌀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막걸리가 없습니다. 평양에만 있죠. 남한에는 '막걸리'가 등산할 때 비밀 병기이지만 북한의 비밀 병기는 도토리로 만든 '소주'입니다.

2012년 두류산(2309미터, 양강도 백암군)에 갔을 때에는 박금철이라는 산림청 직원과 함께 갔습니다. 이때도 2011년도와 같은 사람들과 팀을 이루어 갔는데요. 황철영이 물과 음식이 든 가방을 메고 저는 카메라가 든 가방을 메고 올라갔습니다. 도시 남자인 황철영은 저희를 못 따라오고 뒤쳐져서 올라왔죠. 박금철과 저는 물이 없었기 때문에 두류산 정상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올라갔습니다. 정상에서 물이 오기만을 기다렸죠. 얼마 후 황철영이 올라왔습니다. 

"황철영! 물 줘!" 

그는 물을 재촉하는 저를 보더니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서 저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알았죠. 플라스틱 병에 물처럼 보이는 것이 있어서 마셔보니 소주였습니다! 물병 10개 중에 6병은 진짜 물이고 4명은 소주가 담겨 있었습니다. 맙소사! 물은 그 사람들이 다 마시고 소주만 남았던 것입니다. 도토리소주만 남아있었습니다. 

"황철영! 목마른데 누가 소주를 마시고 싶어 하겠어!" 

하지만 저는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습니다. 저희는 같은 팀이니깐요. 다행히 박금철이 수분이 많은 과일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위기는 모면했습니다. 저의 은인이었죠. 산을 내려오다 10대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부르니 그들이 깜작 놀랐습니다. 아마도 산 정상에서 백인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던 같아요. 그들이 우리를 샘터로 안내해줘 우리는 소주가 아닌 물을 마실 수 있었고 다시 행복해졌습니다. 

하늘 위의 연못을 품은 산, 백두산 

백두산은 정말 아름다운 산입니다. 저는 사진을 편집하거나 포토샵 처리를 하지 않는데요, 백두산은 그 자체가 아름다워 좋은 사진을 찍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백두산 천지에 구름이 비칩니다. 그래서 하늘과 천지가 잘 구분이 안됩니다. 제가 천지를 찍으려고 카메라 앵글을 잡으면 보이는 것이 다 구름 같아서 하늘을 찍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백두산은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고 백두고원도 정말 멋집니다. 

▲ 백두산 천지. ⓒ로저 세퍼드


우리가 화장실이 급해서 일을 보고 있는데 신기한 광경과 마주쳤습니다. 뗏목과 떼몰이꾼을 만난 것이죠. 급하게 카메라를 가져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처음 본 저는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서 황철영에게 저것을 해보고 싶다고 하니 황철영은 저를 이상한 사람(crazy ma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하면 저와 한 팀인 황철영도 해야 했으니깐요. 저와 황철영은 항상 대단한 모험을 했습니다. 

▲ 양강도 운흥군에서 만난 떼몰이꾼. ⓒ로저 세퍼드


질의 응답 


질문 :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북한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세퍼드 : 첫 번째 매력은 산에만 다녔으니 북한의 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매력은 북한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입니다. 2011년 방북 당시 저는 왜 한국은 분단됐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굉장히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목적 의식을 저는 존경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북한이 살아남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프리카에도 있었습니다만 북한 사람들은 확실한 목적이 있어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모습과 차이가 납니다. 둘 다 가난하지만 모습은 다릅니다. 

▲ 질문에 답하는 로저 세퍼드. ⓒ평화통일시민행동


핵 문제나 냉전의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만 남과 북은 언젠가 하나가 되어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남한이 북한을 흡수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한이 북한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합니다. 북한 사람들은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과 북이 원하는 통일의 중간 지점을 잘 찾아서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슈퍼 파워를 발휘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가 한반도 통일에 관여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스스로 서로 협력하고 해결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한은 지금보다 더 독립적으로 스스로 컨트롤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한 미군을 몰아내고 북한과 직접 협력하고 직접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 북한 사람들은 행복한가요? 

세퍼드 : 북한에는 남한 도시만큼 발전한 도시는 없습니다. 남한은 매우 발전한 나라이죠. 하지만 평양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남한 도시처럼 간판이나 광고판이 보이지 않습니다. 평양은 건물과 창문, 나무가 조화를 이루어 도시를 즐길 수 있는 풍경이 나옵니다.

북한 사람들은 저의 기준으로는 매우 행복해 보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트레스받는 모습이 북한에는 없습니다. 북한의 시스템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목적 의식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휴머니즘 의식이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고 도와주려고 합니다. 북한의 주체 사상은 북한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당을 쓰는 일처럼 '우리'를 위해서 내가 할 일을 아니지만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하게 합니다. 물론 남한 사람들도 행복한 사람 많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한 것 같아요. 

▲ 사진작가 로저 세퍼드. ⓒ평화통일시민행동


제가 소년이었을 때 뉴질랜드는 사회민주주의 국가였습니다. 지금은 조금 더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죠.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거 비용도 높지 않았어요. 지역사회에서 변호사, 의사, 정원사, 페인트공이 자연스럽게 섞여서 축구와 럭비 같은 스포츠를 즐겼어요.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동등하게 커뮤니티 활동을 했습니다. 일자리가 없거나 집이 없어서 힘들어할 일이 없었습니다.

북한은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로 뭉쳐 큰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이 북한의 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시스템은 다른 나라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깐요.



'노동'이냐 '로동'이냐? 중요한 건 따로 있다!

[평화통일시민강좌] 김병문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책임연구원


1989년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을 때 김일성 주석과 통일국어대사전을 만들기로 합의 했습니다. 2004년 남측의 통일맞이와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가 이전에 있던 일을 상기하여 의향서를 체결하고 2005년 남북이 금강산에서 결성식을 가졌습니다. 2006년 (사)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가 출범하여 사업승계를 받고 매년 4차례 남북이 편찬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이후 2010년 천안함 사건으로 정지되었던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은 2014년도에 재개됐습니다. 2014년 두 차례, 2015년 평양, 금강산, 중국 심양‧대련을 옮겨가며 세 차례 편찬회의를 진행했으며 마지막 12월 대련회의에서 2016년 2월에 편찬회의를 하기로 약속했으나 남북관계가 단절되어 현재까지 편찬회의를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2008년까지는 본격적 원고작성을 하기에 앞서 <겨레말큰사전> 올림말을 정하고 자모 배열순서와 자모의 이름을 정하는 등 큰 틀의 내용을 합의했습니다. 2009년부터 <겨레말큰사전> 사전을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남과 북이 반반씩 나누어 집필하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4~5차례 편찬회의를 하여 2019년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 지난해 12월 대련에서 열린 남북 공동 편찬회의. 이 회의를 끝으로 현재까지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은 잠정 중단된 상태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겨레말큰사전>은 33만 개의 어휘가 실리는 대사전입니다. 남측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측의 <조선말대사전>에 실린 50만 개의 어휘 중 사전에만 있고 쓰지 않는 말들은 버리고 23만 개의 어휘를 추렸습니다. 그리고 지역어와 기존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소설이나 문헌에는 있는 새로운 어휘 10만 개를 발굴하여 올림말 33만 개를 선정했습니다.

집필회의는 8개 조로 운영되며 남측은 2명, 북측은 1~2명이 한조를 이루어 7박 8일 동안 회의를 합니다. 한 조당 남측원고 1500개, 북측원고 1500개를 합의하고 옵니다.

갈치와 칼치, 강낭콩과 강남콩  

남북이 차이가 나는 형태 표기를 <겨레말큰사전> 에 적용하기 위해 단일화 작업을 하였습니다.  

▲표. 남북이 합의한 형태표기 예시


자모배열  

'ㅇ'은 소리가 없기 때문에 북측에서는 자모 순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ㄱ~ㅎ' 다음에 'ㅇ'이 나옵니다. 'ㄲ'이나 'ㄸ'같은 경우 남측은 한글 24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전에는 'ㄱ' 'ㄲ' 'ㄴ' 'ㄷ' 'ㄸ'순서로 들어가죠. 북측은 'ㄲ'나 'ㄸ'도 엄연한 글자로 취급합니다. '살'과 '쌀'은 다르니 자모로 인정하여 'ㄱ~ㅎ, ㄲ~ㅉ,ㅇ'으로 자모 40개로 합니다. <겨레말큰사전>에서는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ㄲㄸㅃㅆㅉ' 순서로 들어갔습니다.

'나방'은 '나비'로 통하고 '오징어'는 '낙지'로 통한다 

<겨레말큰사전> 은 한 어휘에 남, 북, 해외(연변이나 재일동포)에서 쓰는 예들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중고등학생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뜻풀이를 쉽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겨레말큰사전>은 남북의 정보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눅다'라는 말은 남북 둘 다 쓰는 말이지만 북측에서는 '싸다'라는 뜻으로 의미가 다릅니다. 이런 경우 둘 다 <겨레말큰사전>에 실었습니다.  

< 표준말국어대사전>과 <조선어대사전>은 표준어 중심이기 때문에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문화어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겨레말큰사전>은 지역어, 사투리 방언을 충실하게 반영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방언 '가투'(벌레 먹은 콩이나 팥)와 같은 어휘도 들어갑니다.

북측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통틀어 '나비'라고 합니다. 남측도 원래는 '나방'이란 단어가 없었는데요, 일제 강점기부터 생겨난 말입니다. 이런 어휘의 경우 '나비ː 1. 나비 2. 남측의 나비와 북측의 나비와 나방을 일컬음' 으로 해설하며 북측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나비는 앉을 때 날개를 접고 나방은 날개를 펼친 상태로 앉는다'라고 추가 해설을 해줍니다.

북측에서는 오징어를 낙지라고 합니다. 식당에 가서 낙지 달라고 하면 오징어가 나옵니다. 변별이 되지 않는 것인데요, 아마도 이것은 잘 안 잡히기 때문에 잘 먹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 김병문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책임연구원 ⓒ평화통일시민행동


분단과 지역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겨레말큰사전>


이런 차이는 분단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고 그 이전부터 생긴 것입니다. 남북 언어의 이질화를 걱정하는 많은 분들이 북측에 책임을 돌리며 북측에서 말을 이상하게 써서 이질화가 생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북의 말이 다른 것은 사회나 제도상의 차이도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방언, 즉 지역마다 달리 말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남측에서 지역마다 부추를 정구지, 솔 이라고 다르게 쓰는 것처럼 남북의 차이도 분단 이전부터 지역마다 달리 쓰는 말이 많습니다.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감자를 고구마라 부르고 우리가 아는 감자는 '하지감자'라고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 하고 감자는 '지슬'이라고 합니다. <겨레말큰사전>에서는 분단 상황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자는 취지로 지역어를 표준어나 문화어로 인정하여 모두 싣고자 했습니다.

방언적인 차이는 음운에서도 나타나는데요, 북측은 'ㅓ'와 'ㅗ'가 가까워서 발음이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편찬회의를 하면서 만난 북측 분과 인사를 하는데 북측 인사가 "장용남입니다"라고 해서 "아, 장영남 씨, 반갑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아니요, 장용남입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네, 장영남"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분이 한글로 이름을 적어줬고 제가 죄송하다고 하니까 "괜찮습니다. 개성사람도 잘 못 알아듣습니다"라고 하더군요.  

분단이 되어 70년이 흘렀지만 중부방언을 쓰는 개성사람들도 평양어 중심의 교육을 받아도 발음에는 중부방언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도 표준어 교육을 하지만 경상도나 전라도 사투리가 남아 있는 것처럼요.  

분단 이후 문법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휘는 우리가 지역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남북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입니다. '증권'이나 '주식시장' '유상증자'처럼 사회제도적인 차이에서 나오는 언어 차이는 교류가 되고 서로가 사는 모습을 가깝게 보면 충분히 금방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시대가 지나면서 계층이나 연령에 따라 조금씩 다른 말이 있습니다. '덕담'은 남측에서는 새해때 하는 말이지만 북측에서는 말을 주저리 늘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분단과 큰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흘러가면서 새로 생기거나 변하는 것입니다. '도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측에서는 도령을 높여 부르거나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을 높여 부르는 용어지만 북측에서는 두 번째 의미로는 쓰지 않습니다. '도련님'도 시대가 지나면 쓰지 않는 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외래어나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꾸기도 합니다. 이것은 북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측도 '제형'을 '사다리꼴'로 우리식으로 바꾸어서 씁니다. 북측은 제형이라고 합니다. 북측이 외래어를 전부 순화시켰다고 오해하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로 제시했는데 북측의 인민들이 쓰지 않으면 사전에서 빼버립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스크림이나 '에스키모'라고 합니다. 미원은 '맛내기'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민들이 쓰므로 사전에 올립니다.

'노동'이냐 '로동'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제일 어려운 것은 두음법칙과 사이시옷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협상으로 미루어 놓았습니다. '노동신문'으로 할 것인지 '로동신문'으로 할 것인지가 가장 큰 쟁점이고 서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북은 원래의 형태를 밝혀주는 것이 좋다고 하고 남측의 맞춤법도 원래의 형태를 밝혀주되 발음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고 합니다. 1933년 맞춤법 통일안의 원칙도 원래의 형태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읽는다(잉는다)' '읽고(익꼬)' '읽어(일거)' 소리가 제각각 다르지만 'ㄺ'을 다 밝혀주는 것이 그 예입니다.  

'먹다(먹따)' '먹고(먹꼬)' '먹어(머거)'도 받침 'ㄱ'의 소리가 다르게 나지만 'ㄱ'으로 표시해 주는 것처럼 북측은 소리가 바뀌는 것에 구애됨없이 원래의 형태를 밝혀주어야 한다고 해서 '로동'이라고 표기합니다. 남측은 '노동'과 '근로자'의 차이처럼 두음법칙이 적용됩니다.

1933년 한글 맞춤법의 원칙도 표기와 발음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시경 선생이 처음으로 제기했는데요, '낫, 낯, 낮, 낱, 낟'은 발음이 같지만 맞춤법이 다릅니다. 다 구분해서 써야 합니다. 처음 주시경 선생 이론대로 했을 때에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어렵다는 이유였죠. 하지만 이것이 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 강연중인 김병문 책임연구원 ⓒ평화통일시민행동


북측은 해방이후 조선어학회의 이극로 선생이 올라가 조선말의 기본 틀을 짰습니다. 북측은 1933년 한글맞춤법의 원칙을 충실하게 적용했을 때 '로동'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하여 그렇게 정했습니다. 또한 의식적인 실천으로 'ㄹ'발음도 합니다. 그런 취지에서 보면 언어학적으로는 협의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겨레말큰사전>과 관계없이 남측의 일부 국어학자들은 남북의 표기를 비교할 때 두음법칙에 대해서는 북측의 표기가 합리적인 것이 있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버스를 '뻐스'라 읽고 골대를 '꼴대' 가운을 '까운'으로 발음하는 것과 같이 발음과 표기는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문제가 간단치 않습니다. 여러 고려사항이 있습니다. 예전에 <겨레말큰사전>을 TV에서 방영한 적이 있는데 자세한 이유와 과정 없이 남측 안 몇 개, 북측 안 몇 개, 복수로 채택된 것이 몇 개 이런 식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남북이 대결하는 것처럼 말이죠. 바로 북측에서 이런 식이면 우리는 회의를 못한다며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두음법칙도 순수하게 언어학적으로만 볼 수만 없습니다. 분명 국민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있습니다. 사전은 꼭 언어학적으로만이 아니라 대중들이 읽고 이해해야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하므로 쉽게 정리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사이시옷 문제에 대해서는 설문조사를 해보더라도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등교, 등굣길, 장마, 장맛비 같이 굳이 사이시옷을 붙여야 하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북측은 사이시옷을 쓰지 않습니다. 두음법칙과 같은 원리입니다. 원래의 형태를 씁니다. 사이시옷은 쓰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되찾기' 정신을 잇는 <겨레말큰사전>

1920년대 후반 최현배, 이극로, 김윤경, 이희승 등 당시 쟁쟁한 언어학자들이 모여 사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자모음 순서를 정하고 표준어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사전은 어떻게 만들지 논의하여 1933년 맞춤법 통일안이 나옵니다. 조선어사전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조선어학회사건(1942년)으로 대부분의 회원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회원분들중에 옥중에서 돌아가시기도 하고 해방 될 때까지 감옥에 계시다 해방 후에 풀려난 분도 계신데, 이 분들이 다시 사전을 집필하려고 보니 사전원고가 없었습니다. 이후 수소문을 통해 서울역에서 원고를 찾았고, 예정보다 늦어진 1957년 한글학회에서 <우리말큰사전>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분단이 된 이후였고, 조선어학회에서 사전을 만들던 많은 분들이 북으로 올라가서 다른 사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조선어학회때 사전을 만들었다면 모르겠지만, 이것이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남북이 한반도 전역에서 머리를 맞대고 만든 사전이 없습니다.  

< 겨레말큰사전>은 역사적으로 보면 식민지시대 때 우리 말을 되찾기 위한 작업이었으나 미완으로 끝난 사전작업을 잇는 작업입니다. 통일을 준비하고 예비하는 차원에서 남북의 말과 지역어를 함께 담아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김병문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책임연구원 ⓒ평화통일시민행동

 
<겨레말큰사전>은 시작에 불과, 언어 태도를 바꾸기 위한 준비해야

<겨레말큰사전> 편찬작업은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언어적으로 보면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공동으로 사전을 작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언어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남북 간 이질감과 언어 태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쓰는 말을 통하여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나이가 몇 살인지, 지역은 어디 사람인지, 교육수준은 어떠하고 경제적 계층은 어디에 속하며 어떤 성격일지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게 되죠.  

남북통일 이후에 어미 하나하나의 문제보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동서독이 통일되었을 때 서독사람들이 동독 말을 쓰는 사람을 낮잡아 보았습니다. 문법적, 어휘적으로 잘못이 없는데 어떤 쪽의 어휘를 쓰는지 억양은 어떠한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죠.  

이런 태도는 우리 내부에도 있지만 통일이 되었을 때 문제가 될 것입니다. 형태를 통일하고 맞춤법을 맞추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입니다. 통일되기 전에 우리가 북한을 보는 태도와 관점이 어떻게 성숙되어 있느냐에 따라 언어적인 문제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습니다. 

< 겨레말큰사전>을 준비하는 것 이상으로 언어 태도를 고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여러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접근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겨레말큰사전>이 비로소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개성공단이 北 '달러박스'? 우리 이득이 더 많다!

[평화통일시민강좌] <6·끝> 김진향 전 개성공단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
2015.07.18 08:49:23

2015년은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00년의 한반도는 남과 북 사이에 화해와 교류협력, 평화의 기운이 넘쳐났으며 통일논의가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이후 남북 당국과 민간 교류는 대부분 단절됐고 남북관계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분단 70년, 광복 70년,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다시금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나아가 통일을 모색하기 위해 '평화통일시민행동'에서 '평화통일시민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모두 6회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강연의 주요 내용을 소개합니다.  

마지막 순서로 지난 11일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임진각 내 경기평화센터에서 '개성공단의 미래'를 주제로 김진향 전 개성공단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 (현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연구교수)의 강연이 열렸습니다.  

김 교수는 개성공단이 북한에 돈을 '퍼주는'사업이 결코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1년에 북측에 들어가는 금액이 임금과 세금을 합쳐 900억 원 정도입니다. 우리 기업들은 공단에서 이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고 최소 15배, 30배 남는 장사를 합니다. 이것이 정말 퍼주기입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개성공단이 작은 평화와 통일을 만들어가는 공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김 교수는 "(남북이) 추구하는 가치, 진선미의 기준, 말투, 사고방식을 배워갑니다. 상대방을 알면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알아가는 과정이 상호존중의 과정입니다. 개성에서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고 축적돼 갑니다"라면서 "이런 과정이 통일과 평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다음은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개성공단을 보면 통일이 보인다 

통일은 화해협력, 남북연합, 완전통일의 3단계가 있습니다. 남북이 서로를 존중하며 이루어 나가는 통일은 돈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흡수통일은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흡수통일로 인해 '통일비용'이 들 것이라는 전망은 기만이고 허구입니다. 실제 흡수통일은 일어나지 않을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가능해서도 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흡수통일의 가정이 성립되려면 북한이 무너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일단 무너진다고 칩시다. 북측이 붕괴한다고 하면 북측 주민 2480만 명 중 10%만 남한에 내려와도 248만 명입니다. 이 사람들을 우리가 받아야 하는데, 대한민국 경제가 248만 명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다시 전제를 생각해 봅시다. 북한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이데올로기', 즉 이념입니다. 왜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이 이행되던 시절에는 북한 붕괴에 대해 언급이 없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서 다시 북한 붕괴론이 나오겠습니까? 그 사이에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것인가요? 우리의 정권교체에 따라서 북한 정권은 붕괴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나요?  

▲ 김진향 전 개성공단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 (현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연구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평화의 오랜 제도와 과정이 결국 통일입니다. 평화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상호존중하면 됩니다. 남과 북의 역사적인 4대 합의가 있습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 공동선언과 2007년 10.4 선언입니다. 이 합의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은 '상호존중'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체제를 강요하지 않는다, 너희는 그렇게 살아라, 우리는 이렇게 살겠다, 다만 욕하지 말자, 싸우지 말자, 적대하지 말자" 입니다. 어렵습니까? 우리 사회 속에서 불교와 기독교와 가톨릭 모든 종교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남과 북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적대가 적대를 낳고 대립이 대립을 낳습니다. 호혜와 평화가 호혜와 평화를 낳습니다. 상호존중의 과정이 없는 통일 대박은 재앙입니다. 6.15공동선언 2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한 남북의 합의 사안을 담았습니다. 북한은 남과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을 최종적으로 하고 완전통일은 후대에 맡기자고 했습니다. 국가 지침으로 삼았습니다. 학자의 입장에서, 많은 협상을 했던 실무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맞습니다.

북한이 적화야욕으로 호시탐탐 남측을 노리고 군사적 충돌을 계속 일으킨다구요? 그들과 매일 같이 협상하고 토론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미안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들을 적대했구나, 분단체제 70년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비난하고 맹목적으로 적대 했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MB "개성공단에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 

개성공단에 들어간 기업들은 돈을 참 많이 법니다. 현재 개성공단 부지가 100만 평입니다. 2000년에 합의하고 2003년에 첫 삽을 떴습니다. 합의대로라면 2012년 기점으로 2000만 평 부지에 2000개 기업이 있는 50만 명의 대도시, 연 500억 달러의 생산량이 예상됐습니다. 또 해주, 남포를 비롯해 6~7개 도시에 개성공단 같은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어야 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현실화됐다면 남북 간 실질적인 경제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경제 분야에서의 상호 공존성이 엄청나게 높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2000만 평 중에 100만 평 정도만 개발돼있고 이마저도 공장이 들어선 지역은 38.7%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대지는 방치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일까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2월부터 입니다. 5.24조치 때문에 중단된 것이 아니라 정부 정책적으로 이미 2008년 2월부터 추가 신규투자를 다 막았습니다. 제가 당시에 개성공단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으로 있었는데요, 대북협상 과정에서 지침이 내려옵니다. 기업들은 눈앞에 돈이 보이니 공장을 더 짓게 해달라고 요구하는데 허가를 안해줍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용역을 줬습니다. 개성공단이 문 닫았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정치, 사회, 경제적 측면의 파장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결론은 '감당할 수 없다'였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새로운 시도도 하지 않고 기존에 하던 것만 유지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지금의 개성공단 상황은 매우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개성공단은 124개 기업이 들어가 있고 800명의 남측 노동자와 5만 3000명의 북측 노동자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1년에 북측에 들어가는 전체 금액이 임금과 세금을 합쳐 900억 원 정도입니다. 1억 달러가 안 됩니다. 개성공단 가지고 퍼주기, '달러박스' 라고 이야기 하는데 우리는 최소한 15배, 30배 남는 장사를 합니다. 이런 것은 왜 보도 안 합니까? 정말 퍼주기이고 달러박스입니까? 국민들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남북관계는 평화, 안보, 생존의 영역이기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북한은 찌질하지 않다, 만만치 않다고 이야기해야 국민들이 제대로 판달 할 거 아닙니까. 그 제대로 된 판단을 다 가려버리면 누가 감당할 겁니까? 특히나 군사적 문제는 중요합니다. 감당이 안 됩니다. 총체적 무지입니다. 북한에 대해 잘 모르는 '북맹'이 너무 많습니다. 정부 당국자들조차 잘 모릅니다. 그들은 북한이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알면 보입니다.  

매일 매일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는 개성공단 

개성공단의 남측 주재원이 많을 때는 2500명이었지만, 지금은 800명 정도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매일 매일 상호 오해와 갈등을 넘어 하나가 되어 가는지 설명하겠습니다.

현재 북측 근로자들은 연장, 야근, 특근 전부 해서 월평균 15만 원을 받습니다. 최초 2003년에는 50불, 우리 돈으로 5만 원에서 시작해서 연장, 야근, 특근 다하면 6만 원이었습니다. 5% 상한선이 있어서 10년 후에는 많이 쳐서 15만 원 받습니다.

개성공단 내 북측 노동자들 ⓒ개성 공동취재단


그런데 북·중 국경 지역의 중국 공단에서 일하는 북측근로자는 300~400불, 우리 돈으로 약 35~45만 원 받습니다. 우리에게 중동 특수가 있는 것처럼 북한도 중국에 인력을 많이 내보냅니다. 많이 받는 사람은 1000달러, 약 115만 원 까지도 받습니다.

그럼 이때 떠오르는 의문, 북한은 왜 남한과 함께 개성공단을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경제주의적인 관점에서 돈을 벌려고 개성공단을 합니다. 평화에 복무하고 호혜적인 경제프로젝트, 평화프로젝트라는 것은 부차적인 이유입니다. 하지만 북측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평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성공단 땅의 일개 보병사단, 포병사단을 송악선 북쪽으로 올리면서까지 개성공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고양에 있는 1사단을 삼각산 쪽으로 보내고 남북공단을 만들 수 있습니까? 말이 안됩니다.

초기 임금 산정 과정 당시 저는 청와대에서 그 협상을 진두지휘했습니다. 북측은 300달러, 우리는 200달러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50달러에서 시작하자는 통지가 왔습니다. 그들이 정말 돈이 필요했으면 이랬을까요? 이 모든 사실들은 그들에게는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화가 중요함을 이야기 합니다.

북측 근로자에게 왜 일하느냐고 물어봅니다. 우리의 기준에서 보면 직장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임금을 받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북측은 임금의 개념이 없고 생활비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북측에서는 노동을 우리의 기준인 임금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회주의 경제 질서에서는 노동의 개념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습니다. 다를 뿐입니다. 기업에서 일해서 생활비를 받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주는 것입니다. 왜? 국가가 자기를 파견시켰기 때문입니다. 고용과 피고용의 개념이 없습니다. 사장이 나를 고용한 것이 아니라 나는 국가적 조치에 의해서 당이 나에게 준 '분공'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개념입니다.

개성공단에 들어갔을 때 처음 겪는 갈등이 이런 것입니다. 남측의 사장이 일을 시키면 북측의 근로자들은 고용과 피고용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황당하게 쳐다봅니다. 우리에겐 사장님의 말이 맞죠. 전 세계 상식입니다. 내가 고용을 했고 내가 임금을 주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은 국가적 조치에 의해서 온 것일 뿐입니다. 우리와 다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 배우게 됩니다. 이 배움이 모든 오해를 풀게 합니다. 그것이 통일의 과정입니다. 사소하게 고용과 피고용의 개념을 이야기했지만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 진선미의 기준, 말투, 사고방식을 배워갑니다. 상대방을 알면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알아가는 과정이 상호존중의 과정입니다. 개성에서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고 축적돼 갑니다. 개성에서 우리 기업들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서로 알아가면서 통일과 평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개성공단 전경 ⓒ개성 공동취재단


그런데 개성공단에 투자하는 사장님들이 왜 2013년에 6개월 동안 잠정중단 됐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개 기업도 빠져나가지 않았을까요? 왜 전국을 돌면서, 도보 행진 하면서 개성공단 정상화를 이야기했을까요? 투자하는 사장님들이 저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김박사, 개성에서 돈 못 벌면 기업도 아니야" 

공단 가동이 중단됐던 6개월 동안 사장님들은 동남아 지역을 돌면서 혹시 개성공단을 대신할 곳이 있을지 찾아봤습니다. 다 돌아보고 나서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개성공단 만한 경쟁력을 가진 곳이 없다고. 개성공단이 안되면 이미 그들은 그 어디에서도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남과 북의 경협입니다. 상호존중만 하면 대박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대박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남북관계를 보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기존에 계획했던 경협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 상황은 민족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 후대들에게, 미래 세대들에게 죄짓는 것입니다. 지난해 러시아가 10년간 250억 달러를 투자해서 북측 철도 3700km를 현대화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습니다. 그 사업은 2007년 10.4선언 당시 부속합의에서 우리가 하기로 되어 있던 사업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지하자원을 가져오고 그 후속으로 러시아가 발전소를 짓기로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원래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들입니다.

남북이 함께할 수 있는 철도, 도로, 항만 등 엄청난 사회간접자본(SOC)사업들이 있습니다. 중동 특수의 수백 배, 수천 배가 북측에 있습니다. 왜 대한민국 기업들이 5.24조치 해제하고 북한에 올려달라고 하겠습니까. 남과 북이 완벽하게 윈-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북측은 대동강의 기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성공단의 부침과 정상화 

2008년 2월 국방부 장관은 '북한은 주적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10.4선언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았을 때입니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2008년 3월 "북핵 문제 해결 없이 개성공단의 확대는 불가하다, 개성공단의 중단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죽어났습니다. 개성공단에서 대북협상을 하고 있었는데요. 북측 파트너가 매일 통지문 가지고 저한테 흔들어댑니다. 어떻게 할 거냐고. 10.4선언, 부속합의들, 기숙사 건설, 탁아소 건설, 철도, 도로 연결 다 하기로 했는데 우리가 다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할 거냐고 재촉하는 북측 관계자에게 저는 기다려 보라고만 이야기했습니다. 심지어는 차라리 저를 추방시켜 달라고 이야기도 했습니다.  

"김진향 선생 어디 있어. 어떻게 할 거야" 

"제발 날 좀 두 달만 쉬게 보내줘. 내가 빚쟁이도 아니고. 나 이거 접수 못 해. 접수하지 말라 했어" 

2009년과 2010년, 남북 당국 간 개성공단 실무회담을 6번 했습니다. 그런데 10시간 동안 있으면서 10분 남북 연락관 접촉하고 9시간 50분 동안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개성공단은 '미운오리새끼'이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였습니다. "내버려둬라,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가 지침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11년까지 그 상황을 보고 나오게 됐습니다.  

▲ 파주 도라산 전망대에서 개성공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진향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개성공업지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에 따라 관리·운영되는 국제적인 공업지역입니다. 남북이 정상적인 관계였을 때에는 북측의 주권법에 따라 운영되는 주권 지역이었지만 남측과 충분히 협의했습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적대적으로 되는 순간 그렇게 안 됩니다. 공단 안에서 적대 행위가 발생합니다.  

심지어 스파이 행위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한 남측 직원이 북측 여직원을 데리고 나오려고 작업했다가 적발된 겁니다. 북측은 당시 이 직원을 116일 동안 억류했다가 풀어줬습니다. 이후 국정원이 기무사와 조사를 진행 했는데 실제로 그 직원은 북측 여직원을 빼 오려고 시도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다 보니 북측은 남측 인원 2500명 중에 최소 생산 인원만 남겨두고 공단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측 체류 인원이 8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왜 남북의 공단이 적대와 대립의 상징이 됐을까요? 처음에 공단을 만들 때와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북측은 변화된 조건에 맞게 개성공단의 법과 제도를 바꾸겠다고 계속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남측은 계속 이를 무시했습니다. 북측은 계속 던집니다. 남측은 계속 회피하고 북측은 일방적으로 발표합니다. 남측은 일방적으로 발표했으니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변해버린 개성공단이었습니다.  

언론이 보도합니까? 안 합니다. 아무도 몰라요. 공단은 그렇게 비정상화 되었습니다. 지난 12월 임금 관련해서 북측은 북측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정령으로 법을 바꿨습니다. 남북이 같이 운영하던 개성공단이 법적, 제도적으로 북측의 공단이 돼버렸습니다. 북측이 남측의 기업들과 사업을 하는 모양이 돼버린 겁니다.  

미래가 불안정하면 공단의 생산도 불안정해집니다. 남북 당국 간 관계에서 불신과 대립이 심해지면 안에서 일하는 남북근로자들 관계 역시 참 서먹해집니다. 말을 안하려고 합니다. 서로 눈치 봅니다. 예전에는 같은 사무실에서 같이 떠들고 이야기하고 술도 마셨는데 그 모든 것이 2008년 2월 이후로 끊겼습니다. 우리도 그들도 그저 물건을 찍어내고만 있습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공단의 진정한 '정상화'가 시급히 필요합니다.


남북한 '평화도시'를 건설한다면?
[기고] 문재인 정부의 통일 공약을 위한 '지공주의 공유도시론'과 '평화도시'
2017.06.24 13:27:08

1. 문재인 정부의 시장통합 및 점진적 통일 공약

새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평화통일 관련 6개 공약을 제시했다. 그 중에서 세 번째가 "남북한 시장을 하나로 통합하고 점진적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다. 세부 공약에서 밝힌 구체적인 시장통합 방법론은 "북한의 시장 확산 촉진과 남북 경제통합(경제통일)"이다. 다음으로 점진적 통일을 위한 방법론은 "시장통합을 바탕으로 하는 생활공동체 형성과 북한 이탈주민 정착지원"이다. 시장통합은 두 번째 공약인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실행'과도 연결되며, 점진적 통일은 네 번째 공약인 '남북기본협정 체결'과도 연결된다.

남북한 시장통합이라는 접근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시장이 '네트워크의 확산'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시장 '통합'이 아닌 글로벌 시대에 경제 네트워크로서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파라그 카나의 책 <커넥토그래피 혁명: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있는가?>(사회평론, 2017)는 커넥토그래피(Connectography: 연결 + 지리의 합성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지리적 조건이나 국경, 군사력으로 구획되는 주권국가 시대는 끝나고 고속도로·철도·파이프라인 등 에너지와 물품·인재 수송로, 정보·지식과 금융·기술이 광속도로 흘러가는 인터넷·통신망 등 기능적 사회기반시설들의 초국적 연결 시대가 됐다고 전망했다. 여기서 연결 주체는 정부나 국가가 아니라 개인과 기업, 광역 도시들이다. 그리고 지역연방이 다양한 개체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 책은 중국과 대만의 경제협력적 양안관계의 발전 사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상업 및 기반시설 통합을 통해 기능적 연방국가로 통합된 사례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소개한 기사(<한겨레>, 2017.6.16.)는 카나의 주장을 기초로, 남과 북 역시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하는 느슨한 형태의 연방이나 국가연합형 연방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통합 방식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점에서 남북한 시장통합과 점진적 통일의 공통된 핵심 키워드는 바로 '연결'이다. 통합을 서로 다른 두 시스템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스템의 연결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접근법을 문자 그래도 받아들인다고 할 때, 시장통합은 단순히 물건이 서로 오가는 무역을 넘어서는 일이다. 무엇보다 금융 자본주의 DNA를 담고 있는 '자본'이 오가기 때문에 시장통합에 따른 부작용까지 고민해야 한다. 어떤 방식의 시장통합이냐에 따라 점진적인 통일을 '촉진'할 수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통일연구원 부원장인 조민(2015)은 현실을 고려한 시장 경제의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통일이 개발논리에 휩싸인 소수 대자본의 향연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인식에서 그는 가령 북한 농지를 협동농장의 공동소유 및 공동생산 방식에 기초한 공동의 이익과 가치 창출 모델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조민, 2015: 37). 이러한 접근은 시장통합의 방향성 설정에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런데 현재 문재인 정부가 제시한 시장통합 관련 세부 공약은 방법론으로서 부족한 느낌이 든다. 북한 내에 시장이 확산된다고 해서 곧바로 남북 경제통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북한의 시장 확산이 남북 경제통합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더 나아가 이러한 시장통합을 바탕으로 생활공동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경제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실험공간'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도 여섯 번째 공약으로 접경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통일경제 특구법'을 제정하겠다고 했으니 이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글은 시장통합의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토지(가치) 공유를 핵심으로 하는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을 초보적으로 정립하고, 새로운 실험공간으로서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에 기초하는 '평화도시'를 제안하고자 한다.  

2. 토지(가치) 공유에 기초하는 '지공주의 공유도시론'
 

1) 지공주의 공유도시론 초보적 정립  

남과 북을 물리적으로 이어주는 대표적인 것이 토지다. 따라서 남북 시장통합 및 점진적 통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토지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토지정책을 깊이 탐구한 김윤상은 그의 저서 <지공주의>(2009)를 통해 토지가치 공유의 정신을 담는 '지공주의'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하는 제3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공주의는 자본의 사유와 토지의 공유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지공주의가 통일한국의 이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지공주의는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다. 둘째, 지공주의는 현재 남북한이 취하고 있는 체제보다 우수하다. 셋째, 지공주의는 남북한의 현 토지제도를 크게 바꾸지 않고도 도입이 가능하다. 토지사유제를 시행하고 있는 남한에서는 지대를 조세로 환수하면 되고, 토지가 국유인 북한에서는 토지 국유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인의 토지 사용을 확실하게 보장하고 임대료도 확실하게 징수하는 공공토지임대제를 실시하면 되기 때문이다(김윤상, 2009: 289-290). 남기업은 그의 저서 <공정국가>(개마공원, 2010)에서 한국은 물론 통일한국이 나아가야 할 국가모델로 '공정국가'를 제시하고, 북한이 나아갈 방향으로 공공토지임대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남기업, 2010: 236-248). 허문영·전강수·남기업도 "통일대비 북한토지제도 개편방향 연구"(통일연구원, 2009)에서 공공토지임대제를 중심축으로 하는 통일 정책을 제시했다. 필자도 <중국의 토지개혁 경험>(한울, 2011) 등에서 이론 및 중국 사례 연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공공토지임대제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기존 공공토지임대제 접근법의 한계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토지 소유 주체는 국가로 설정하면서 토지사용 주체는 개별화된 개인 및 기업으로 설정했다. 즉, 토지 소유 및 이용의 중간 주체로서 지역사회 공동체를 크게 강조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토지재산권 접근을 강조하다 보니, 부동산이라는 건물의 공동체적 소유 및 이용에 대해 깊은 논의를 진행하지 못했다. 즉 공(公)-공(共)-사(私)의 구조에서 중간 위치인 공동체의 역할을 간과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화폐제도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

따라서 기존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서 동시에 기존 정책 담론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차원의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 가능성을 필자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공유' 개념에서 찾고자 한다. 고전 경제학파의 전통에 속하는 아담 스미스와 헨리 조지(Henry George) 등을 비롯한 유력한 학자들이 개인 노동의 성과는 사유하되 그 기초가 되는 자연자원은 공유해야 한다는 이론(left-libertarianism)을 피력한 바 있다. 최근에 와서 공유지의 비극을 지역공동체의 자치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엘리너 오스트롬의 커먼즈(commons)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커먼즈 이론은 20년 넘는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일본이 도심 토지 저이용 문제를 해결하려고 제시한 '현대총유론'과도 연결된다. 2012년에 서울시는 도시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공유도시'(Sharing City)를 선포했다. 최근 한국의 지자체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 및 개인 자산을 공유자산화 하려는 전략을 모색 중에 있다. 중국은 도시재생 및 농촌 협동조합 추진에서 토지 공유(共有)와 지역 공동체의 참여를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종합해 보건데, 노동 생산물과 자본의 개인 소유는 격려하되 자연자원은 공유하려는 지공주의 접근법은 남북간 시장통합 및 점진적 통일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여기서 필자는, 중국 및 북한과 같은 경제체제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국가를 대상으로, 지공주의에 기초하면서 구체적인 정책 대안으로 공공토지임대제 및 관련 제도를 추진하는 도시를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이라는 틀로 접근하고자 한다. 여기서 개념 및 용어 선택과 관련하여 몇 가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 공유도시의 공간 범위는 도시 및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농촌지역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도농일체로 접근하는 것이다. 둘째,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은 서울시가 표방하는 '공유도시'(Sharing City) 개념과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서울시가 정의하는 공유도시는 "보유하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시간, 정보, 공간 등을 공유(share)해 도시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즉, 서울시가 추구하는 것은 공유도시가 아닌 '공용도시'이다. 이러한 개념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재산 소유권(ownership)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조성찬, 2016).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주거 세입자 문제, 가계부채 급등 문제, 도시재생에 따른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유휴 공간의 확산 및 방치 문제는 절대적인 사유재산권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셋째, 이미 서울시 등이 조금은 다른 목적으로 '공유도시'라는 용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를 채택한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 및 북한의 토지제도가 도시 토지의 국가 소유(公有) 및 농촌 토지의 마을공동체 소유(共有) 구조이기 때문이다. 즉, 토지가 공유(公有) 아니면 공유(共有)이기 때문에 공유도시라는 용어는 현재의 토지소유권 구조에 가장 부합한다. 공유도시는 내용상 커먼즈 이론 및 일본의 현대총유론과 유사하지만 일반인의 입장에서 '공동소유' 내지 '공유' 용어가 받아들이기 훨씬 쉽다. 그리고 절대적 사유 개념을 극복할 수 있는 접근법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2)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의 구성 체계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은 크게 '공유자원', '공유자산', '공유기업'으로 구성할 수 있다. 행정학에서 정의하는 공유자원은 한 국가 영토 내의 일반 대중이 공동으로 소유 및 향유하는 자원들이다. 대표적으로 토지와 지하자원 등이 있다. 이러한 공유자원은 경제발전에 따라 다양한 공유자산 형태로 분화된다. 중앙 및 지방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국공유지를 공유재(public properties)라고 부르며, 정부가 만든 기반시설은 공공재(public goods)라고 부른다. 커먼즈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공동체가 소유 및 관리하는 대상은 공동재(common pool properties)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회 전체의 노력에 의해서 형성되는 재화를 필자는 새롭게 사회재(social properties)로 분류하고, 토지가치(지대), 화폐, 도시경관 등을 사회재로 분류했다. 마지막으로, 공유기업은 정부 소유의 국공유기업과, 시민 또는 지역 공동체 소유의 각종 사회적 기업이다. 이처럼 공유자원-공유자산-공유기업이 부채에 기초하지 않는 화폐를 매개로 하면서 시민이 경제활동의 적극적인 주체로 참여하여 형성되는 경제를 사회적 경제라고 칭할 수 있겠다. 이러한 분류 및 체계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의 <표 1>과 같다.

▲ <표 1> 지공주의 공유도시의 구성 요소.


3)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으로 바라본 북한 스케치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시장 확산을 촉진하여 남북 경제통합으로 이어지도록 하겠다는 구상은 이미 밝힌 바 있다. 남한 정부가 북한의 시장 확산을 촉진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남한 정부의 전략과 무관하게 북한 내에는 이미 빠른 속도로 시장이 확산되고 있다. 북한 내 최근 흐름이 이를 잘 보여준다. 북한 경제전문가인 동용승(2017)은 북측 정부가 주민들의 시장 활동을 억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전담당제, 기업경영책임제 등으로 시장 기능을 활용하는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2017: 53). 그런데 이러한 시장 확산이 일정 정도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의 맥락에서 해석할 여지들이 많다.  

농촌 협동농장 소유의 농지는 기본적으로 공동재로 볼 수 있다. 북한은 김정일 정부 이래로 협동농장을 공동경작하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소수의 작업반 단위로 경작하는 포전담당제를 시행해 오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기존 방식을 더욱 발전시켜, 자기 땅이라는 인식을 주지 못하는 윤번제 방식 대신 농가마다 담당 토지를 분배했고 생산물을 평균 30(국가) : 70(농가)으로 분배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생산물 분배 비율이 최초에는 국가가 60%였으나 30%로 크게 줄어들었다. 국가에 납부하는 30%는 북측이 '지대'라고 부른다. 관련 분석에 따르면, 농지마다 수년에 걸쳐 생산성을 측정하여, 각 토지 생산성에 따라 분배비율이 달라지도록 조정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자기 땅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면서 텃밭보다는 협동농장의 자기 땅을 경작하는데 주력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농민들은 농장단위 또는 작업반 단위로 종자와 비료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결과 농업 생산성도 올라가고 있다. 가령, 2015년 알곡 생산량이 589만 1000톤으로 2001년에 비해 142만톤이 증가했다(동용승, 2017: 55; 내일신문, 2017.6.15.). 이처럼 북한은 현재 협동농장이라는 공동재를 지공주의에서 살펴본 '노동생산물 사유-토지가치 공유' 원리로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공장기업소에도 적용하고 있다. <표 1>에 따르면 공장기업소는 공유도시 구성요소의 세 번째인 공유기업에 속한다. 특히 정부 소유의 국영기업에 해당한다. 오늘날 북한 정부가 시행하는 경영 원리는 기업경영책임제이다. 전에는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고 임금 및 식량을 지급했다면, 이제는 각각의 기관과 공장기업소가 자체 경영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지급하고, 식량과 생필품을 배급해 주는 방식으로 전환해 가고 있다. 기업소는 농지와 동일하게 생산액의 30%를 국가에 납부하고 있는데, 이는 기업소가 국가로부터 생산수단을 임대 사용하는 것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하는 성격이다. 협동농장의 지대와 같은 성격이다. 동용승에 따르면, 현재 각 기관이나 기업소들은 성과를 더 내기 위해 외국자본을 유치하거나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김정은 정권이 이러한 시장경제 원리를 적극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2017: 55-56).  

그런데 변화하는 북한의 모습에서 불안한 요소도 감지된다. 가령, 핵-민생경제 병진노선을 채택한 김정은 정권은 미래과학자 거리, 려명거리, 아파트 신축 등 건설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데, 이 때 해당 부서에서 자체적으로 자재를 조달하고 건설을 책임지는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해당 단위들은 자재 확보를 위해서 지하자원을 수출하거나 다른 사업을 전개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시장의 돈주들에게 이권을 보장하는 식으로 주택건설 사업 등 대형 사업에 투자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동용승, 2017: 53; 임을출, 2016). 현재 북한 내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사업은 아파트 건축사업과 부동산 임대사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주택 매매가 불법이지만 자본가들(돈주)이 정부 관료와 결탁하는 방식으로 매매를 하고 있으며, 막대한 투기적 이익을 향유하고 있다. 이는 지공주의의 핵심 문제의식인 토지가치(사회재)의 독점적 향유에 해당한다.  

앞서 살펴본 북한의 모습은 최근 평양을 방문한 진징이(金景一) 베이징대 교수의 방문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내일신문>, 2017.6.15). 한 마디로 말해서 시장경제 원리가 작동하여 전쟁위기설에도 불구하고 평양은 활력이 넘치고, 상품이 넘치고, 도시 건설이 팽창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국제 사회의 고강도 대북제재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북한이 내세우는 우리식 경제관리방식이라는 틀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진징이 교수는 이러한 변화를 '평양현상'으로 포착하고 조만간 북한 전역에 확산될 것으로 전망했다.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으로 북한의 변화상을 스케치해 보니, 협동농장의 포전담당제와 공장기업소의 기업경영책임제를 통해 새로운 차원의 공유경제 내지 사회적 경제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의 가능성과 한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능성 측면에서 보면 '노동생산물 사유-토지가치 공유'라는 지공주의 원리가 확대 도입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공유자산의 대상 중에서 사회재에 해당하는 두 자산인 토지가치(지대)와 화폐가 결합하여 사적 주체의 특권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향후 북한 지공주의 공유도시의 불안정성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동할 것이다.  

3. 접경지역에 실험공간으로서 '평화도시' 제안  

문재인 정부는 통일공약 6번째로 남북 접경지역 발전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공동관리위원회를 설치하여 접경지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통일경제 특구법'을 제정하는 두 가지 안을 제시했다. 역시 현 단계에서 구체성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징이 교수의 평양 방문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듯이, 북한은 도시 발전을 새로운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민들은 새로운 틀 내에서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균형점을 찾고 있다. 남한의 도시 역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다. 어쩌면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 먼저 도시공간에서 새로운 대안체제를 실험해야 하지 않을까?

접경지역 발전은 남북간 점진적 통일을 위한 과도기적 공간을 추진하는데 의미가 있다. 통일방안은 뒤에서 다시 논의하겠지만, '통일방안-접경지역 발전-통일경제 특구법'은 상호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런데 접경지역이라는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발전 컨셉은 제시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 접경지역에 평화도시를 건설하자는 안이 여러 차례 제안된 것으로 안다. 이런 맥락에서 본 글에서 기존 아이디어를 살리면서,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에 기초하여 새로운 도시공간을 설계 및 실험하는 방안을 제안하려는 것이다.  

조금은 다른 맥락이지만, 중국은 경제체제 전환을 위해 지금까지 40년 동안 실험중이다. 이미 많이 알려져 있듯이 경제체제 전환 초기에 5대 경제특구를 연해지역에 설치하여 실험을 전개하였다. 그 이후에 실험을 통해 검증된 정책 모델들을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한 단계로 다양한 개발구가 설치되었다. 개발구 유형도 경제기술개발구, 고급기술개발구, 수출가공구, 보세구, 대만기업투자구, 변경합작경제구, 국가관광휴양구 등 다양하다. 이제는 상하이 등 자유무역구를 중심으로 더욱 큰 개방과 개혁을 촉진하여 국제경쟁력을 제고하고자 도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실험은 경제정책 차원만이 아닌 사회제도, 행정, 문화 등 다방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바로 상하이 푸동신구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급 신구와 충칭 량장신구를 중심으로 하는 종합형 개혁시험구이다. 중국은 그야말로 '실험의 나라'다(조성찬 외, 2017).

우리도 남측 및 북측의 관련 기관 및 시민사회가 함께 논의하여 접경지역에 평화도시를 생태적으로 건설한 후 제3의 대안적 경제체제를 적어도 50년 정도는 실험해야 하지 않을까? 서울시도 공유도시를 표방했고, 평양시도 시장원리가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으니, 새로운 접점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화도시에서 지공주의 원리에 부합하는 창의적인 제도들을 실험하고, 이러한 사회적 경험을 점진적 통일의 자원으로 삼는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통일경제 특구법'에 이러한 내용을 담아 중국처럼 장기간 다양한 실험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평화도시를 통해 남북 경제통합 및 생활공동체 형성을 실험할 수 있다. 좀 더 발상을 전환해서 접경지역에서 추진하기 때문에 통일경제 특구법을 남과 북이 함께 논의하여 제정하고, 통일경제헌법의 모체가 되도록 할 수도 있다. 이젠 좀 더 혁신적인 도전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