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백제·신라, 혈투 속에서도 교류했다…지금 우리는?
[평화통일시민강좌] <1> 정호섭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6.15남북공동선언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평화통일 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지난해에 이어 2회째를 맞은 평화통일 시민강좌는 남북 교류협력 재개 촉구를 주제로 오는 6월 25일까지 총 5회에 걸쳐 진행됩니다.
이번 강좌에는 겨레말큰사전 편찬과정, 북한을 여행하고 돌아온 외국인 사진작가에게 듣는 북한 이야기, 20년간 의료 지원을 해 온 민간단체의 경험담 등을 직접 듣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5월 14일 진행되는 제2강에서는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장의 강연을 통해 개성공단 폐쇄로 잃은 것들을 되짚어 보고 남북관계 복원에 대해 모색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첫 강좌로 지난 4월 30일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인 정호섭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의 '남북이 함께 고려의 발자취를 찾다-민족공동 문화유산 관련 남북교류협력의 역사와 평가'를 들어봤습니다.
정 교수는 지금처럼 남북의 모든 채널이 막혀있는 대결 구도 속에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사업이 비정치적인 문화·역사·학술 분야의 교류라면서, 남북의 문화 교류가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다음은 정 교수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 정호섭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저는 현재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서 십여 년 동안 활동하고 있는 정호섭입니다.
제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도교수님인 강만길 선생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저는 분단시대의 극복과 통일을 이루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소명이라고 배웠습니다. 요즘 같은 '글로벌'한 시대에 이에 걸맞은 인식을 가지기 위해서도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사를 전공하는 저는 만주를 많이 가는데요.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는 땅에서 '예전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삼면이 바다고 한 면은 막혀있는 섬 같은 반도에서 사는 우리들은 생각도 반도에 갇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주는 우리와 자연환경이 다릅니다. 그것을 보고 산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은 사고의 스케일이 다릅니다. 유럽을 비행기가 아닌 철도로 갈 수 있다는 것, 우리와 유럽이 대륙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교류협력 합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로 남북교류의 장이 마련되고 80년대 이산가족 방문과 예술공연단 방문이 있었으나 남북교류협력의 본격적인 장을 마련한 것은 2000년 6.15공동선언이었습니다.
6.15공동선언 4항에 제반 협력, 교류 활성화로 신뢰를 구축한다는 내용이 있고 2005년 17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개성지구 역사유적들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습니다. 2007년 10.4선언 이후 제1차 남북총리급회담(2007. 11. 16.)에서 남북사회문화협력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역사교류와 관련하여 역사유적 및 사료 발굴 보존사업을 추진하는 내용을 각 항목에 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남한은 통일부가, 북한은 통일전선부가 교류협력사업을 주도하였습니다. 민간교류는 남한의 민간단체와 북한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 통일전선부 산하 기구)가 담당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순수한 민간교류가 아닙니다.
남북역사교류 사례들
① 전시
남한에서 북한 소장 유물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2003년 북한과 중국에 있는 고구려고분군이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개성에서 전시회와 토론회를 진행했습니다. 이 전시회를 기반으로 해서 6.15공동선언 발표 5돌과 조국광복 60돌 기념 전시회를 서울에서 열어 고구려 유물 60점을 전시했습니다. 고려대와 서울시 협력 사업이었는데 이때 남한에서 유물보험도 들고 운송도 책임지고 유물보존도 제대로 해서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은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북한전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② 단군릉에 대한 학술회의
단군릉에 대한 학술회의도 했습니다. 단군릉은 장군총처럼 복원하였는데 훨씬 크게 지어 놓았습니다. 북한이 단군릉을 만들고 주장하는 것이 '대동강 문명'입니다. 세계 5대 문명 안에 대동강 문명을 넣어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대동강을 중심으로 세계 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단군릉을 갔었는데요, 무덤양식이나 출토유물을 보니 5세기 유물이었습니다.
북한이 단군 부부의 능이라고 하니 대놓고 아니라고 할 수는 없고 나중에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과 선생한테 "선생,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오. 역사학자로서 이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따졌습니다. 그 선생도 아니라는 것을 아니 얼굴이 벌게지더군요.
북한과 역사 교류하면서 '노터치' 하는 것이 있습니다. 1910년 이후 현대사 부분은 토론 할 수 없습니다. 북한은 김일성 혁명 투쟁사가 현대사이므로 우리와는 현대사 구조가 다릅니다. 아무리 토론해도 견해차가 크다 보니 자연적으로 북한과의 역사교류는 전(前)근대사 중심으로 하게 됐습니다. 북한의 역사전통은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입니다. 수도가 모두 북쪽에 있죠.
북한은 조선 시대 역사에서는 외세와의 투쟁사,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중요시합니다. 북한은 유물사관과 민족사관이 뒤섞여 있어요.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를 봐도 자신을 공산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자라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북한의 역사학은 민족사관이 있습니다.
북한의 역사학은 1970년 이전까지는 남한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유럽에서 근대학문을 공부했던 고고학자나 사학자들이 해방 후 월북했거나 납북되었기 때문에 남한에 남아있던 사학자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실증사학을 공부한 이병도 정도만 남아있었습니다.
당시 최고 엘리트들이 북한에 가서 역사학의 체계를 잘 세웠는데 1968년 주체사상이 나오면서 학문의 자유가 제한됐습니다. 학문은 자유가 제한되면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다양한 이설이 나오고 토론하고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발전이 되는데 딱 하나의 틀에만 맞추라고 하면 발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면에서 다소 북한 역사학이 문제를 안고 있죠.
그래서 남북역사교류가 중요합니다. 역사인식의 차이가 큰 부분이 있으므로 통일을 대비하여 역사교류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③ 일제시대 및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토론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우리를 얼마나 수탈했는지에 대한 토론회나 일본해 표기의 부당성에 대한 남북토론회도 열렸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 및 독도 강탈책동 반대 학술토론회도 했습니다. 북한 역사학자들을 배에 태우고 독도에 가서 세레머니를 하는 것도 기획했었습니다.
④ 해외에서 이루어지는 남북역사교류
올해와 같이 남북교류가 전면적으로 차단되거나 조건이 안 맞는 경우에는 제3국인 중국이나 러시아, 유럽에서 하기도 합니다. 올해 7월, 국사편찬위원회와 중국 연변대, 북한이 중국 베이징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하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안중근의거 100주년 토론회도 해외에서 열렸습니다. 특히나 이 사업은 북한이 아주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김일성주석 생전에 안중근 유해 찾기부터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사안이었습니다.
⑤ 북한 문화재 복원·발굴·실태조사
북한 문화재 남북공동 복원·발굴·실태조사도 했습니다. 금강산 신계사 발굴 및 복원, 개성공업지구 발굴조사, 고구려 유적 남북공동 학술조사, 고구려 궁인 안학궁 발굴조사, 고구려 고분군 남북공동 실태조사 및 보존사업 등이 있었습니다.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 조사는 2007년부터 시작되어 10년간 남북이 함께 한 사업입니다. 이 사업은 장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는 점, 민관이 함께 했다는 점 등에 의미가 큽니다. 보통 북한이 관대 관의 교류는 안 하려고 하는데, 제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통일이 됐을 때 북한의 문화재도 정부가 나서서 관리하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발굴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위탁한 형태로 10년간 민관 협력으로 진행됐습니다.

▲ 2015년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 착수식 ⓒ문화재청
⑥ 중국대학을 통한 간접지원
중국대학을 통해 간접 지원한 발굴도 있는데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연변대학교를 통해 남포시 용강군 옥도리 벽화고분 발굴조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 문화재 현황 조사와 문화재 안내서도 꾸준히 출판되고 있습니다.
남한의 무진동 차량을 타고 함경도로 올라간 북관대첩비
약탈문화재 남북 공동 반환 협력사업도 있었습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었던 북관대첩비(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 임진왜란 중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친 공을 기려 세운 비.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일본으로 가져갔다. 2005년 반환되어 2006년 개성을 거쳐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 193호로 지정되었다. 편집자)를 문화재청이 주도하여 일본으로부터 반환받은 뒤 원래 이 비가 있었던 함경북도 길주군에 세워두기 위해 북한에 비를 인도했습니다.
북관대첩비가 저의 선조와 관련된 비였습니다. 반환할 때 북한의 꽤 높은 사람이 저한테 전공도 아닌데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냐고 물어봐서 "저의 할아버지입니다"라고 하니 "그러면 잘해야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분이 밥 먹고 나오는데 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항렬을 물어보며 족보를 따졌습니다. 봉건적인 것을 타파하려는 북한에서 항렬을 따지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북관대첩비 반환할 때 남한에서 북한에 지원한 것이 박물관에서 유물 운송할 때 쓰는 무진동 차량입니다. 제가 고구려 전시할 때 북한에서 무진동차를 보고 나중에 유물 돌려줄 때 그 차도 한 대 달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정도 돈이 없어 못 줬는데 북관대첩비 반환할 때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차량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개성역사지구 세계문화유산 등록과 더불어 아리랑도 공동 등재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남한만 등록했습니다. 북한의 아리랑에는 김일성, 김정일 지도자를 찬양하는 아리랑도 있는데요, 북한에서 이것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해서 안 됐습니다.
12년간의 역사교류 성과를 날려버린 개성공단 중단 조치
2004년 이후 북한이 사회문화창구를 민화협으로 일원화시킨 이후 남북교류가 양적 질적으로 활성화 되었습니다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이후에는 대부분 중단되어 작년까지 개성만월대공동발굴 사업과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유일하게 남아있었습니다. 2010년 천안함 사태와 5.24조치로 남북교류가 전면 중단되었을 때 개성만월대 사업은 수해복구 명목으로 유일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개성만월대 공동발굴사업이 유일하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개성공업지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개성공업지구가 문을 닫았습니다. 남북역사교류사업 측면에서 2004년 시작해서 2016년까지 12년 동안 공들인 것이 한순간에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개성공단 중단은 굉장히 무식한 정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핫라인 정도는 남겨놓고 중단을 해야지 남북교류 창구도 다 없애고 12년간 투자한 금액을 날려 보내니 아쉽습니다.
개성공업지구로 들어가는 돈이 북한의 미사일을 만드는데 과연 얼마나 쓰일까요? 1%도 안 됩니다. 제가 매년 한두 번씩 개성에 갈 때마다 개성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옷이 달라지고 자전거가 좋은 것으로 바뀌고 집 외장이 달라집니다. 태양열 판도 생깁니다. 개성공업지구가 개성주민의 생활 수준을 높여놨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보수 정부 입장에서도 유리한 것입니다.
고구려·백제·신라, 치고받고 싸웠지만 문화 교류는 했다
저는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전까지 통일 논의는 좌파진영의 논리였습니다. 통일대박론은 우파진영이 통일 논의를 가져간 엄청난 선언입니다. 물론 경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흡수통일을 전제한 논의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통일대박을 외치니 보수 언론에서마저 통일을 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를 몰아갔습니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통일논의를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습니다.
물론 의도가 순수하거나 미래지향적이지 않습니다. 통일준비위원회를 꾸렸는데 그 안에 역사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통일논의가 흡수통일을 전제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지난 2014년 드레스덴 선언에서 잘 나타납니다. 남북교류를 민족 동질성 회복, 인도적 지원, 나무 심기로 제한했습니다. 개성만월대 남북공동발굴 사업은 민족 동질성 회복 차원에서 박근혜 정부가 허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면 다 불허했습니다.
남북교류협력 사업은 지속적인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로 진행됩니다. 개성공단이 대표적인 사례이죠. 갑작스런 중단으로 투자금액을 다 날려버리지 않았습니까. 정치 경제 분야의 교류협력은 정세에 민감해야 하겠지만, 문화·학술 교류는 정례적·상시적으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옛날 고구려·백제·신라도 그렇게 치고받고 싸웠지만 문화교류는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리 정치적 대립관계라 할지라도 문화·학술 교류마저 끊는 것은 아쉽습니다.

▲ 정호섭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남북문화유산교류는 통일국가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
남북문화교류협력 사업은 작은 사업이기 때문에 남북 간 화해협력 분위기 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개성공업지구 만월대 발굴 사업 하면서 개성의 휴전선 근처에 있던 군부대가 개성 뒤쪽으로 밀려났습니다. 지금은 다시 앞으로 전진해 있습니다. 얼마 전 보도를 보니 북한이 개성공업지구에 있는 물건을 가져다 쓰면서 독자적으로 만월대를 발굴하고 있다고 합니다. 개성공업지구 폐쇄로 우리가 잃은 것이 많습니다.
문화유산 관련 사업은 결국 통일 국가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입니다. 북한의 경제난으로 문화재 보존이 미비한 상황인 현 시점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킬 수 있는 사업입니다. 북한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남한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은 여러 조건 중에 하나가 '개방'입니다. 실사단이 직접 가보고 점수를 매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평양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래서 북한은 예외적으로 사진으로 대체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프랑스도 그러한 도움을 줘서 고구려 고분이나 개성 역사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이렇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보호 협약이 작동됩니다. 따라서 이는 한반도 내 전쟁 방지에도 일정 부분 관련성이 있습니다.
학술적인 면에서 남한은 고구려, 발해, 고려사가 약한 부분이고 북한은 신라, 백제사가 약한 부분이므로 서로 한국사 연구의 공백을 메울 수 있고 동북공정 문제나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를 공동으로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박물관이나 장비, 발굴 수준을 보여주면 북한의 학문적 수준과 발굴 기술 등도 함께 올라갑니다. 이런 것은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습니다. 남북교류협력은 보이지 않는 효과가 매우 큽니다.
북한은 남북교류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유용한 사안에 대해서만 선택적 호응하고 남한도 정치경제 분야가 우선이므로 문화유산 교류에는 다소 인색합니다. 지금은 정부가 정치경제 분야가 잘 안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화유산에 지원하는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잘 안되면 문화, 역사교류를 지원하는 역설적인 상황이죠.
퍼주기 논란? 역사교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남북교류가 퍼주기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구체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원이 북한의 경제와 군사 부분에 얼마만큼 들어가는지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성공업지구에 들어가는 돈이 미사일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하면서 구체적 데이터는 없습니다.
민족문화유산은 경제적 잣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골동품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문화교류 자체가 비과시적이고 간접적이며 감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계량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한 개성 만월대 지역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고려 시대 금속활자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실제로 제가 고구려 고분군 조사할 때 벽화군 10개를 요청해서 열었고 그때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비용은 몇억 들었습니다. 그때 사진들이 남한의 모든 관련 출판물에 쓰이고 있고 동북아역사재단이 만든 영상도 그 사진들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몇억 이상이죠.
또 통일부가 북한에 돈을 못 주게 하기 때문에 현물을 줍니다. 예를 들면 육로로 신의주에 갔을 때 북한의 문화재 보존 시설 건축할 때 쓰라고 중국에서 벽돌과 타일을 사서 줬습니다. 실제 구성 주체들에게 가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민족문화재 보존이라는 민족의 백년대계를 위한 사업이며 장기적 관점에서 인내와 시간을 가지고 추진해야 하는 사업입니다.
남북관계, 첫눈에 반하는 남녀관계와 달라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남과 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억지로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북이 다른 것은 서로 인정한 상태에서 서로가 조금이라도 타협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가기 위한 접근을 해야 합니다. 이런 것부터 하고 나중에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시기를 만나면 조금 더 진일보하게 추진해 나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북관계가 남녀관계처럼 첫눈에 반하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남북문화교류 사업은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 구도 속에서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으며 청와대나 통일부의 의지의 문제입니다. 지금처럼 남북교류가 하나도 안되는 상황에서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사업은 역시 만월대 같은 비정치적인 문화, 역사, 학술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개성공단 폐쇄 100일…"직접 손실만 8천억원"
[평화통일시민강좌] <2> 정기섭 개성공단기업인협의회 회장
개성공단이 전면 중단된 지 100일이 다 되어 갑니다. 천안함 사건으로 남북교류를 전면 차단한 5.24조치가 있었지만 당시의 정책결정자들이 '남북관계의 마지막 끈'은 남겨져야 하고, 공단이 한번 중단되면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성공단은 신규투자를 불허하는 수준에서 현상 유지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설 연휴 마지막 날 2월 10일, 개성공단이 삶의 일상이고 소중한 일터였던 우리 기업인들과 근로자들은 정부의 전격 중단 결정과 이에 대한 북측의 추방 조치로 2월 11일 개성공단에서 쫓겨나듯 나온 후 언제 다시 개성공단에 갈지 알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전면중단 결정에 대해 억울하고 심지어 분노도 느끼지만, 중단결정의 원인과 이후의 과정에 대해 기업인의 입장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통령께 결재받은 사안, 재검토는 안된다
2016년 초 북한의 핵실험으로 개성공단에 상주하는 남측 인원을 줄이는 조치가 있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 개성공단 운영에 지장이 있었으므로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통일부 장관과 면담 요청을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2월 9일 연락이 와서 10일 오후 2시 삼청동 회담본부에 가보니 그 자리에 장관뿐 아니라 차관의 명패도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개성공단에 무슨 일이 터지는가보다 직감을 했죠.
그 자리에서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을 했고 이것은 대통령한테 결제받은 사항이니 재검토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개성공단 내의 많은 자재와 완성품을 들고나올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통일부는 이틀 동안 차 한 대, 사람 한 명만 들어갈 수 있게 했습니다. 결국 다음날 11일 북측의 추방조치로 우리는 개인 사물도 제대로 못 챙기고 황망히 피난 나오듯이 나와서 지금까지 못 들어 가고 있습니다.
통일부 장관도 모르는 개성공단 핵개발 전용론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의 이유를 세 가지로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개성공단 자금이 쓰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지금까지 개성공단으로 6200억 원이 들어갔고 이 금액을 연간으로 따지면 600억 원이 채 안 되는 돈입니다. 이 돈 중에 50%를 핵 개발에 썼다 하더라도 일 년에 300억 원 가지고 조 단위 비용 규모가 들것이라 추측되는 핵과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습니까. 통일부 장관도 잘 모르니 근거를 못 대는 것 아닙니까.
지난 2월 국회 개성공단 관련 대정부 질의에서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의원이 "개성공단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외화는 북측 근로자 및 개성 시민들을 위한 생필품 구매에 쓰인다"고 말했습니다. 개성공단 근로자 임금이 70달러에서 시작해서 개성공단 중단 직전에는 200달러 정도였습니다. 많지도 않은 이 금액의 대부분이 개성공단 근로자 및 가족의 생필품 구매에 사용된다고 생각했을 때 개성공단 중단으로 핵·미사일 개발에 들어가는 자금을 차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또한 북한의 핵 개발 문제는 개성공단이 태동조차 하지 않았던 1990년대부터 있어 왔던 문제입니다. 핵 문제는 남북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관심 있는 사항이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남과 북이 다자간 협상을 통해서 풀어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핵 문제와 별개로 남북관계의 긴장 완화와 관계 개선을 위해서 경제협력은 해야 합니다. 또한 남북 간 교역을 활발히 하는 것이 군사안보 문제 해결에도 보탬이 됩니다.

신변안전 문제? 연평도에 포가 날아 올 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국민의 신변안전에 대한 우려, 즉 개성공단 주재원들의 인질화 가능성"이었습니다. 개성공단에서 10여 년간 생활해 왔던 기업인들과 주재원들은 신변안전을 문제 삼는 정부의 주장에 전혀 동의하기 힘듭니다. 2010년 연평도 포격이나 2015년 목함지뢰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신변안전 문제에 대해 우려할 만한 상황은 없었습니다.
정부에서 예로 2013년 개성공단 잠정 중단시의 최후의 7인을 이야기합니다. 개성공단의 임금은 일반회사처럼 그달이 끝나기 전에 주는 것이 아니라 그달의 초과근무시간, 주말근무 등을 계산해서 다음 달에 지급합니다.
2013년 4월 8일 북측이 근로자를 철수시켰던 당시에도 지난달 임금을 못 준 상태였습니다. 몇 달 혹은 일 년씩 임금이 밀려있는 기업이 있었고 세금도 안 낸 것이 있어서 모두 1300만 달러를 정산했어야 합니다. 북측에서 이를 정산하기 전에는 관리위원장이 남을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실제로 관리위원장이 일주일 남아있었습니다.
현대아산 직원 유모 씨 사건도 신변안전문제의 예로 들고 있는데 그 사람은 북측의 여성을 남쪽으로 탈출시키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져 상당 기간 북측에 억류되어 조사 받다가 현대 현정은 회장이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런 것을 예로 들면서 정부가 신변안전 문제로 개성공단을 갑작스럽게 중단한다고 했는데 기업들로서는 솔직히 진정성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부가 법적 절차도 없이 민간기업 문 닫게 할 수 있나?
세 번째 이유는 "핵과 미사일 개발을 막기 위한 국제적인 제재 동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에서도 북한 주민들의 생계를 크게 저하시키는 제재는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개성 공단 전면 중단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사람들은 개성공단 내의 북측 근로자 5만4000명과 개성에 있거나 서울에서 관련 업무를 했던 남측 근로자 2000명, 그리고 123개 입주기업과 70여 개의 영업 기업입니다. 왜 애꿎은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개성공단 처음 시작할 때 정부가 기업들에 적극 권유를 했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보장하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국회에서 개성공업지구 지원에 관한 법률도 만들었습니다. 정부는 개성공단을 경제 원칙에 입각한 국제경제력 있는 공단으로 육성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시작할 때 정부로부터 복잡한 절차와 승인을 거쳤기 때문에 정부가 승인사항을 변경하거나 해지할 때에는 법률에 의거, 적법한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남북교류협력법에 의하면 남북협력사업을 정지할 때에는 '국가안전보장을 명백하게 해칠 경우에 한하여 6개월 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청문 절차를 거치도록'되어 있습니다. 작은 기업이 사업을 할 때에도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계약서에 의거한 위약금을 물고 해약을 합니다.
우리는 공기업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부 마음대로 손실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개성공단을 중단시킬 수 있습니까? 이러한 조치를 보고 정부의 대북제재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정부가 민간기업을 마음대로 문 닫게 하고 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임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개성공단이 중단되고 우리가 잃은 것들
지난 2013년 개성공단 잠정 중단 이후 남북의 치열한 협상 끝에 나온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 1항은 "남과 북은 통행 제한 및 근로자 철수 등에 의한 개성공단 중단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세의 영향 받음이 없이 남측 인원의 안정적 통행, 북측 근로자의 정상 출근, 기업재산의 보호 등 공단의 정상적 운영을 보장한다"입니다.

▲ 남북은 지난 2013년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7차례의 실무회담을 가진 끝에 그해 8월 14일 개성공단 정상화에 합의했다. 사진은 남측 수석대표인 김기웅(오른쪽) 당시 남북협력지구지원단장과 북측 수석대표인 박철수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부총국장이 합의문을 교환한 이후 악수하는 모습 ⓒ개성공동취재단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처음 3~5년 동안은 적자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북측 노동자들이 제품 품질에 대한 개념이 없으므로 '이 정도면 쓰는데 지장 없는데 왜 불량이냐'며 많이 싸웁니다. 납기일 맞추느라 애 많이 먹습니다.
그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제 기업들이 이익을 창출하는 단계와 이르렀는데 하루아침에 사업장이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잃은 것의 첫 번째는 정부에 대한 신뢰입니다. 앞으로 경제협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공장도 짓고 영업소도 차려야 하는데 이번 경우를 보면서 누가 투자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두 번째는 남북경협의 실험장이자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개성공단을 두고 '통일의 옥동자'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과거의 남북경협사업은 주재원이 파견되어 장기간 일상적으로 북측 성원과 협력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개성공단은 상주하는 주재원 850명이 북측 근로자와 함께 생산을 같이 하는 곳입니다.
당장 눈에 띄지는 않지만 항시적인 만남을 통해 변화를 이루어 나가는 곳입니다. 체제와 제도 및 문화가 상이한 남과 북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협력할 수 있는지를 매일매일 실험하는 작은 통일의 공간이었습니다. 개성공단의 전면 중단으로 남북경제협력 및 작은 통일의 모델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는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습니다.
세 번째는 개성공단 입주 기업의 경제적 피해입니다. 기업의 직접투자 손실로만 8000억 수준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은 영업손실로 개성공단에서 쫓겨났지만 주문상품의 납품기한은 맞춰야 하므로 개성공단에서 100원 가지고 할 것을 200원, 300원 들여 다른 공장에서 생산하고 자재도 다시 발주하면서 손실을 크게 입었습니다. 이러한 영업손실까지 합치면 조 단위가 훨씬 넘어갑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부품 중에 북한 내에서 생산 못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국정원이 그런 것을 열심히 파악해서 그 부품들이 북한으로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인 제재 아닙니까. 핵미사일 개발은 북한 당국이 했는데 왜 남북의 근로자와 우리 기업이 벌을 받아야 합니까. 제재의 대상과 제재 조치로 인해 피해를 입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 질의 응답
질문 : 개성공단 손실에 대해서 정부도 인정을 했으니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면 이기지 않을까요?
정기섭 :
2010년 5.24조치로 손실을 본 회사들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했었는데 그때 법원이 정부의 통치행위로 인정은 안 했지만 정부가 배상을 해야 할 정도로 위법성이 크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개성공단의 조속한 재개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부의 공권력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개성공단 피해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요청하고 있습니다. 향후 이런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질문 : 개성공단 중단으로 기업들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요?
정기섭 : 개성공단에만 공장이 있는 50개 기업과 개성공단의 생산 비중이 50%가 넘는 회사까지 합쳐 입주 기업의 70%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보험 이야기가 나오는데 보험은 공단 중단 기간에만 주는 무이자대출입니다. 재개되면 다시 갚아야 합니다. 2013년 중단되었을 때 지급받은 보험은 한 달 이내에 갚으라고 했습니다. 못 갚은 회사는 첫 달은 3%, 두 번째 달 6%, 세 번째 달 9% 이자 쳐서 갚아야 했고 지금도 갚고 있는 회사가 있습니다.
질문 : 정부가 2월 10일 개성공단 중단 결정을 하고 북측이 11일 오후 5시까지 나가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밤늦은 시간에 나왔습니다.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정기섭 : 11일 아침에 차 한 대씩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북측 인원도 출근을 안 했으니 혼자서 완제품과 몰드 같은 중요한 부품들을 차에 잔뜩 실었습니다. 3시 반에 나가기로 신고되어 있는데 5시에 나가면 이전까지는 벌금 50달러를 내면 됐기 때문에 우리 회사도 벌금 낼 생각을 하고 5시에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가다 보니 물건은 안되고 몸만 나가라고 해서 다시 물건을 내려놓고 나왔습니다. 나오는 차가 한두대가 아니고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밤늦게 나오게 된 것입니다. 어떤 회사는 급하니까 회사 건물 안까지도 못 들어가고 마당에 그냥 쌓아놓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3시 반에 나온 회사들은 물건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 개성공단 남한 인원들이 지난 2월 11일 밤 도라산 출입사무소를 통과해 남한으로 들어오고 있다. ⓒAP=연합뉴스
개성공단의 전기는 남측이 공급하고 물은 개성 인근 저수지 물을 끌어와서 공단 내에서 정수해서 급수했습니다. 남는 물은 개성 시내에 줬습니다. 2월 11일 밤 10시에 남측 인원이 다 내려오자마자 밤 11시에 한전에서 전기를 끊었습니다. 아마 수도도 끊겼을 것입니다.
물과 전기는 전략물자도 아니고 생활에 필수적인 것인데 끊을 때 끊더라도 며칠 여유를 줬어야 했습니다. 개성 시내 사람들이 북한 지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그런 예기치 않은 고통까지 주어야 합니까. 우리 정부의 조치가 너무 성급하고 졸렬하여 안타까웠습니다. 2013년 조치 때는 최소 전력은 보내고 수도공급도 계속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안볼 것이라 생각하고 전기도 끊으면서 수도 공급도 끊었습니다.
넌 뉴질랜드 사람이잖아, 북한에 갈 수 있어!
[평화통일시민강좌] 로저 세퍼드 사진작가
뉴질랜드 경찰이었던 저는 1999년 영어 교사로 1년 동안 한국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2006년 다시 한국에 와서 휴가를 보냈습니다. 그때 '백두대간'을 발견했습니다. 산에 오르는 중에 만난 한국 사람이 백두대간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었는데 굉장히 감명 깊었습니다.
외국인들도 백두대간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친구와 함께 외국인을 위한 백두대간 가이드북을 만들었습니다. 백두대간을 조사하다 보니 한국의 산은 역사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산자락 곳곳에 있는 전설과 사연이 저를 한국의 산에 머물게 한 이유입니다.
2010년 책이 발간되기 전 다시 한국에 휴가를 왔는데 그때 삶의 활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업을 관두고 한국에 와서 여행사도 만들고 책도 만들고 여행 가이드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한국의 산은 굉장히 멋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북한에 갈 생각은 못 했습니다. 북한은 성벽 뒤의 미지의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뉴질랜드인이잖아. 북한에 갈 수 있다고!
한국 친구를 만나 이 일을 하면서 수입이 있었으면 하는 저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한국의 산을 찍어 책을 내고 싶다는 저의 생각에 대해 이미 그런 책은 많이 있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다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로저, 너는 뉴질랜드인이잖아. 북한에 갈 수 있다고! 북한에 가서 북한의 산을 찍어서 책을 내는 것은 어때?"
그래서 저는 북한에 갔고 북한 방문 경험은 저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북의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며 남과 북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은 저의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곳입니다. 한국의 산들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한국의 생각, 역사 그리고 앞으로 한국이 가야 할 길까지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2011년 저는 평양에 갔습니다. 조선-뉴질랜드 친선 협회 관계자들과 함께 했는데요, 황성철(조선-뉴질랜드 친선 협회 담당관. 통역), 황철영(조선-뉴질랜드 친선협회. 행정 담당관), 한명수(운전사) 3명과 한 팀을 이루어 갔습니다.
Mr.한 시간, "한 시간만 가면 됩니다"
북한의 두류산을 갔습니다. 한국에는 두류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여러 개 있습니다. 북한에는 3~4개가 있고 남한에도 두류산이 3개 있습니다. 제가 2011년에 간 두류산(함경도)은 단풍도 잘 보존되어 있고 아름답습니다. 두류산에 올라갈 때 산림청 직원과 함께 갔습니다. 그 직원은 항상 군인과 비슷한 유니폼을 입고 나무에 걸려 불편할 것 같은 큰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지팡이용으로 큰 막대기까지 들고 있으니 산속의 마술사 같았습니다. 이 사람한테 정상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봤죠.
"한 시간!"
우리는 쉽게 믿지 못했습니다. 황성철이나 황철영은 도시 사람이라 산을 타는 것을 싫어했죠. 두류산을 오르는 내내 너무 피곤해 했는데요. 한 시간은커녕 6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Mr.한 시간'이란 별명을 붙였습니다. 아마 Mr.한 시간 혼자였다면 한 시간 만에 갔을 것 같습니다.

▲ 맨 왼쪽이 'Mr. 한 시간', 맨 오른쪽이 황성철, 오른쪽에서 두 번째 황철영, 가운데는 로저 세퍼드. ⓒ로저 세퍼드
남이나 북이나 등산의 비밀 병기는 '술' 북한 사람들도 남한 사람들처럼 등산할 때 음료수나 음식, 소주를 꼭 싸 들고 다닙니다. 대동강맥주, 도토리 소주를 꼭 가방에 넣고 다녀요. 도토리 소주는 북한에서는 '민중 소주'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데요, 심지어 아침을 먹을 때도 소주와 함께 하기도 합니다. 북한에는 쌀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막걸리가 없습니다. 평양에만 있죠. 남한에는 '막걸리'가 등산할 때 비밀 병기이지만 북한의 비밀 병기는 도토리로 만든 '소주'입니다.
2012년 두류산(2309미터, 양강도 백암군)에 갔을 때에는 박금철이라는 산림청 직원과 함께 갔습니다. 이때도 2011년도와 같은 사람들과 팀을 이루어 갔는데요. 황철영이 물과 음식이 든 가방을 메고 저는 카메라가 든 가방을 메고 올라갔습니다. 도시 남자인 황철영은 저희를 못 따라오고 뒤쳐져서 올라왔죠. 박금철과 저는 물이 없었기 때문에 두류산 정상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올라갔습니다. 정상에서 물이 오기만을 기다렸죠. 얼마 후 황철영이 올라왔습니다.
"황철영! 물 줘!" 그는 물을 재촉하는 저를 보더니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서 저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알았죠. 플라스틱 병에 물처럼 보이는 것이 있어서 마셔보니 소주였습니다! 물병 10개 중에 6병은 진짜 물이고 4명은 소주가 담겨 있었습니다. 맙소사! 물은 그 사람들이 다 마시고 소주만 남았던 것입니다. 도토리소주만 남아있었습니다.
"황철영! 목마른데 누가 소주를 마시고 싶어 하겠어!" 하지만 저는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습니다. 저희는 같은 팀이니깐요. 다행히 박금철이 수분이 많은 과일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위기는 모면했습니다. 저의 은인이었죠. 산을 내려오다 10대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부르니 그들이 깜작 놀랐습니다. 아마도 산 정상에서 백인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던 같아요. 그들이 우리를 샘터로 안내해줘 우리는 소주가 아닌 물을 마실 수 있었고 다시 행복해졌습니다.
하늘 위의 연못을 품은 산, 백두산 백두산은 정말 아름다운 산입니다. 저는 사진을 편집하거나 포토샵 처리를 하지 않는데요, 백두산은 그 자체가 아름다워 좋은 사진을 찍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백두산 천지에 구름이 비칩니다. 그래서 하늘과 천지가 잘 구분이 안됩니다. 제가 천지를 찍으려고 카메라 앵글을 잡으면 보이는 것이 다 구름 같아서 하늘을 찍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백두산은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고 백두고원도 정말 멋집니다.
우리가 화장실이 급해서 일을 보고 있는데 신기한 광경과 마주쳤습니다. 뗏목과 떼몰이꾼을 만난 것이죠. 급하게 카메라를 가져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처음 본 저는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서 황철영에게 저것을 해보고 싶다고 하니 황철영은 저를 이상한 사람(crazy ma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하면 저와 한 팀인 황철영도 해야 했으니깐요. 저와 황철영은 항상 대단한 모험을 했습니다.

▲ 양강도 운흥군에서 만난 떼몰이꾼. ⓒ로저 세퍼드
질의 응답
질문 :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북한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세퍼드 : 첫 번째 매력은 산에만 다녔으니 북한의 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매력은 북한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입니다. 2011년 방북 당시 저는 왜 한국은 분단됐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굉장히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목적 의식을 저는 존경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북한이 살아남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프리카에도 있었습니다만 북한 사람들은 확실한 목적이 있어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모습과 차이가 납니다. 둘 다 가난하지만 모습은 다릅니다.

▲ 질문에 답하는 로저 세퍼드. ⓒ평화통일시민행동
핵 문제나 냉전의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만 남과 북은 언젠가 하나가 되어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남한이 북한을 흡수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한이 북한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합니다. 북한 사람들은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과 북이 원하는 통일의 중간 지점을 잘 찾아서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슈퍼 파워를 발휘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가 한반도 통일에 관여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스스로 서로 협력하고 해결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한은 지금보다 더 독립적으로 스스로 컨트롤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한 미군을 몰아내고 북한과 직접 협력하고 직접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 북한 사람들은 행복한가요?
세퍼드 : 북한에는 남한 도시만큼 발전한 도시는 없습니다. 남한은 매우 발전한 나라이죠. 하지만 평양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남한 도시처럼 간판이나 광고판이 보이지 않습니다. 평양은 건물과 창문, 나무가 조화를 이루어 도시를 즐길 수 있는 풍경이 나옵니다.
북한 사람들은 저의 기준으로는 매우 행복해 보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트레스받는 모습이 북한에는 없습니다. 북한의 시스템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목적 의식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휴머니즘 의식이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고 도와주려고 합니다. 북한의 주체 사상은 북한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당을 쓰는 일처럼 '우리'를 위해서 내가 할 일을 아니지만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하게 합니다. 물론 남한 사람들도 행복한 사람 많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한 것 같아요.

제가 소년이었을 때 뉴질랜드는 사회민주주의 국가였습니다. 지금은 조금 더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죠.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거 비용도 높지 않았어요. 지역사회에서 변호사, 의사, 정원사, 페인트공이 자연스럽게 섞여서 축구와 럭비 같은 스포츠를 즐겼어요.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동등하게 커뮤니티 활동을 했습니다. 일자리가 없거나 집이 없어서 힘들어할 일이 없었습니다.
북한은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로 뭉쳐 큰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이 북한의 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시스템은 다른 나라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깐요.
'노동'이냐 '로동'이냐? 중요한 건 따로 있다!
[평화통일시민강좌] 김병문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책임연구원
1989년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을 때 김일성 주석과 통일국어대사전을 만들기로 합의 했습니다. 2004년 남측의 통일맞이와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가 이전에 있던 일을 상기하여 의향서를 체결하고 2005년 남북이 금강산에서 결성식을 가졌습니다. 2006년 (사)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가 출범하여 사업승계를 받고 매년 4차례 남북이 편찬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이후 2010년 천안함 사건으로 정지되었던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은 2014년도에 재개됐습니다. 2014년 두 차례, 2015년 평양, 금강산, 중국 심양‧대련을 옮겨가며 세 차례 편찬회의를 진행했으며 마지막 12월 대련회의에서 2016년 2월에 편찬회의를 하기로 약속했으나 남북관계가 단절되어 현재까지 편찬회의를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2008년까지는 본격적 원고작성을 하기에 앞서 <겨레말큰사전> 올림말을 정하고 자모 배열순서와 자모의 이름을 정하는 등 큰 틀의 내용을 합의했습니다. 2009년부터 <겨레말큰사전> 사전을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남과 북이 반반씩 나누어 집필하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4~5차례 편찬회의를 하여 2019년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 지난해 12월 대련에서 열린 남북 공동 편찬회의. 이 회의를 끝으로 현재까지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은 잠정 중단된 상태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겨레말큰사전>은 33만 개의 어휘가 실리는 대사전입니다. 남측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측의 <조선말대사전>에 실린 50만 개의 어휘 중 사전에만 있고 쓰지 않는 말들은 버리고 23만 개의 어휘를 추렸습니다. 그리고 지역어와 기존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소설이나 문헌에는 있는 새로운 어휘 10만 개를 발굴하여 올림말 33만 개를 선정했습니다.
집필회의는 8개 조로 운영되며 남측은 2명, 북측은 1~2명이 한조를 이루어 7박 8일 동안 회의를 합니다. 한 조당 남측원고 1500개, 북측원고 1500개를 합의하고 옵니다.
갈치와 칼치, 강낭콩과 강남콩
남북이 차이가 나는 형태 표기를 <겨레말큰사전> 에 적용하기 위해 단일화 작업을 하였습니다.

자모배열
'ㅇ'은 소리가 없기 때문에 북측에서는 자모 순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ㄱ~ㅎ' 다음에 'ㅇ'이 나옵니다. 'ㄲ'이나 'ㄸ'같은 경우 남측은 한글 24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전에는 'ㄱ' 'ㄲ' 'ㄴ' 'ㄷ' 'ㄸ'순서로 들어가죠. 북측은 'ㄲ'나 'ㄸ'도 엄연한 글자로 취급합니다. '살'과 '쌀'은 다르니 자모로 인정하여 'ㄱ~ㅎ, ㄲ~ㅉ,ㅇ'으로 자모 40개로 합니다. <겨레말큰사전>에서는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ㄲㄸㅃㅆㅉ' 순서로 들어갔습니다.
'나방'은 '나비'로 통하고 '오징어'는 '낙지'로 통한다
<겨레말큰사전> 은 한 어휘에 남, 북, 해외(연변이나 재일동포)에서 쓰는 예들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중고등학생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뜻풀이를 쉽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겨레말큰사전>은 남북의 정보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눅다'라는 말은 남북 둘 다 쓰는 말이지만 북측에서는 '싸다'라는 뜻으로 의미가 다릅니다. 이런 경우 둘 다 <겨레말큰사전>에 실었습니다.
< 표준말국어대사전>과 <조선어대사전>은 표준어 중심이기 때문에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문화어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겨레말큰사전>은 지역어, 사투리 방언을 충실하게 반영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방언 '가투'(벌레 먹은 콩이나 팥)와 같은 어휘도 들어갑니다.
북측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통틀어 '나비'라고 합니다. 남측도 원래는 '나방'이란 단어가 없었는데요, 일제 강점기부터 생겨난 말입니다. 이런 어휘의 경우 '나비ː 1. 나비 2. 남측의 나비와 북측의 나비와 나방을 일컬음' 으로 해설하며 북측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나비는 앉을 때 날개를 접고 나방은 날개를 펼친 상태로 앉는다'라고 추가 해설을 해줍니다.
북측에서는 오징어를 낙지라고 합니다. 식당에 가서 낙지 달라고 하면 오징어가 나옵니다. 변별이 되지 않는 것인데요, 아마도 이것은 잘 안 잡히기 때문에 잘 먹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 김병문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책임연구원 ⓒ평화통일시민행동
분단과 지역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겨레말큰사전>이런 차이는 분단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고 그 이전부터 생긴 것입니다. 남북 언어의 이질화를 걱정하는 많은 분들이 북측에 책임을 돌리며 북측에서 말을 이상하게 써서 이질화가 생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북의 말이 다른 것은 사회나 제도상의 차이도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방언, 즉 지역마다 달리 말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남측에서 지역마다 부추를 정구지, 솔 이라고 다르게 쓰는 것처럼 남북의 차이도 분단 이전부터 지역마다 달리 쓰는 말이 많습니다.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감자를 고구마라 부르고 우리가 아는 감자는 '하지감자'라고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 하고 감자는 '지슬'이라고 합니다. <겨레말큰사전>에서는 분단 상황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자는 취지로 지역어를 표준어나 문화어로 인정하여 모두 싣고자 했습니다.
방언적인 차이는 음운에서도 나타나는데요, 북측은 'ㅓ'와 'ㅗ'가 가까워서 발음이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편찬회의를 하면서 만난 북측 분과 인사를 하는데 북측 인사가 "장용남입니다"라고 해서 "아, 장영남 씨, 반갑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아니요, 장용남입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네, 장영남"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분이 한글로 이름을 적어줬고 제가 죄송하다고 하니까 "괜찮습니다. 개성사람도 잘 못 알아듣습니다"라고 하더군요.
분단이 되어 70년이 흘렀지만 중부방언을 쓰는 개성사람들도 평양어 중심의 교육을 받아도 발음에는 중부방언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도 표준어 교육을 하지만 경상도나 전라도 사투리가 남아 있는 것처럼요.
분단 이후 문법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휘는 우리가 지역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남북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입니다. '증권'이나 '주식시장' '유상증자'처럼 사회제도적인 차이에서 나오는 언어 차이는 교류가 되고 서로가 사는 모습을 가깝게 보면 충분히 금방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시대가 지나면서 계층이나 연령에 따라 조금씩 다른 말이 있습니다. '덕담'은 남측에서는 새해때 하는 말이지만 북측에서는 말을 주저리 늘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분단과 큰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흘러가면서 새로 생기거나 변하는 것입니다. '도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측에서는 도령을 높여 부르거나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을 높여 부르는 용어지만 북측에서는 두 번째 의미로는 쓰지 않습니다. '도련님'도 시대가 지나면 쓰지 않는 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외래어나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꾸기도 합니다. 이것은 북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측도 '제형'을 '사다리꼴'로 우리식으로 바꾸어서 씁니다. 북측은 제형이라고 합니다. 북측이 외래어를 전부 순화시켰다고 오해하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로 제시했는데 북측의 인민들이 쓰지 않으면 사전에서 빼버립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스크림이나 '에스키모'라고 합니다. 미원은 '맛내기'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민들이 쓰므로 사전에 올립니다.
'노동'이냐 '로동'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제일 어려운 것은 두음법칙과 사이시옷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협상으로 미루어 놓았습니다. '노동신문'으로 할 것인지 '로동신문'으로 할 것인지가 가장 큰 쟁점이고 서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북은 원래의 형태를 밝혀주는 것이 좋다고 하고 남측의 맞춤법도 원래의 형태를 밝혀주되 발음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고 합니다. 1933년 맞춤법 통일안의 원칙도 원래의 형태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읽는다(잉는다)' '읽고(익꼬)' '읽어(일거)' 소리가 제각각 다르지만 'ㄺ'을 다 밝혀주는 것이 그 예입니다.
'먹다(먹따)' '먹고(먹꼬)' '먹어(머거)'도 받침 'ㄱ'의 소리가 다르게 나지만 'ㄱ'으로 표시해 주는 것처럼 북측은 소리가 바뀌는 것에 구애됨없이 원래의 형태를 밝혀주어야 한다고 해서 '로동'이라고 표기합니다. 남측은 '노동'과 '근로자'의 차이처럼 두음법칙이 적용됩니다.
1933년 한글 맞춤법의 원칙도 표기와 발음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시경 선생이 처음으로 제기했는데요, '낫, 낯, 낮, 낱, 낟'은 발음이 같지만 맞춤법이 다릅니다. 다 구분해서 써야 합니다. 처음 주시경 선생 이론대로 했을 때에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어렵다는 이유였죠. 하지만 이것이 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 강연중인 김병문 책임연구원 ⓒ평화통일시민행동
북측은 해방이후 조선어학회의 이극로 선생이 올라가 조선말의 기본 틀을 짰습니다. 북측은 1933년 한글맞춤법의 원칙을 충실하게 적용했을 때 '로동'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하여 그렇게 정했습니다. 또한 의식적인 실천으로 'ㄹ'발음도 합니다. 그런 취지에서 보면 언어학적으로는 협의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겨레말큰사전>과 관계없이 남측의 일부 국어학자들은 남북의 표기를 비교할 때 두음법칙에 대해서는 북측의 표기가 합리적인 것이 있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버스를 '뻐스'라 읽고 골대를 '꼴대' 가운을 '까운'으로 발음하는 것과 같이 발음과 표기는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문제가 간단치 않습니다. 여러 고려사항이 있습니다. 예전에 <겨레말큰사전>을 TV에서 방영한 적이 있는데 자세한 이유와 과정 없이 남측 안 몇 개, 북측 안 몇 개, 복수로 채택된 것이 몇 개 이런 식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남북이 대결하는 것처럼 말이죠. 바로 북측에서 이런 식이면 우리는 회의를 못한다며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두음법칙도 순수하게 언어학적으로만 볼 수만 없습니다. 분명 국민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있습니다. 사전은 꼭 언어학적으로만이 아니라 대중들이 읽고 이해해야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하므로 쉽게 정리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사이시옷 문제에 대해서는 설문조사를 해보더라도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등교, 등굣길, 장마, 장맛비 같이 굳이 사이시옷을 붙여야 하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북측은 사이시옷을 쓰지 않습니다. 두음법칙과 같은 원리입니다. 원래의 형태를 씁니다. 사이시옷은 쓰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되찾기' 정신을 잇는 <겨레말큰사전>1920년대 후반 최현배, 이극로, 김윤경, 이희승 등 당시 쟁쟁한 언어학자들이 모여 사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자모음 순서를 정하고 표준어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사전은 어떻게 만들지 논의하여 1933년 맞춤법 통일안이 나옵니다. 조선어사전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조선어학회사건(1942년)으로 대부분의 회원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회원분들중에 옥중에서 돌아가시기도 하고 해방 될 때까지 감옥에 계시다 해방 후에 풀려난 분도 계신데, 이 분들이 다시 사전을 집필하려고 보니 사전원고가 없었습니다. 이후 수소문을 통해 서울역에서 원고를 찾았고, 예정보다 늦어진 1957년 한글학회에서 <우리말큰사전>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분단이 된 이후였고, 조선어학회에서 사전을 만들던 많은 분들이 북으로 올라가서 다른 사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조선어학회때 사전을 만들었다면 모르겠지만, 이것이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남북이 한반도 전역에서 머리를 맞대고 만든 사전이 없습니다.
< 겨레말큰사전>은 역사적으로 보면 식민지시대 때 우리 말을 되찾기 위한 작업이었으나 미완으로 끝난 사전작업을 잇는 작업입니다. 통일을 준비하고 예비하는 차원에서 남북의 말과 지역어를 함께 담아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김병문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책임연구원 ⓒ평화통일시민행동
<겨레말큰사전>은 시작에 불과, 언어 태도를 바꾸기 위한 준비해야<겨레말큰사전> 편찬작업은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언어적으로 보면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공동으로 사전을 작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언어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남북 간 이질감과 언어 태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쓰는 말을 통하여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나이가 몇 살인지, 지역은 어디 사람인지, 교육수준은 어떠하고 경제적 계층은 어디에 속하며 어떤 성격일지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게 되죠.
남북통일 이후에 어미 하나하나의 문제보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동서독이 통일되었을 때 서독사람들이 동독 말을 쓰는 사람을 낮잡아 보았습니다. 문법적, 어휘적으로 잘못이 없는데 어떤 쪽의 어휘를 쓰는지 억양은 어떠한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죠.
이런 태도는 우리 내부에도 있지만 통일이 되었을 때 문제가 될 것입니다. 형태를 통일하고 맞춤법을 맞추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입니다. 통일되기 전에 우리가 북한을 보는 태도와 관점이 어떻게 성숙되어 있느냐에 따라 언어적인 문제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습니다.
< 겨레말큰사전>을 준비하는 것 이상으로 언어 태도를 고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여러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접근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겨레말큰사전>이 비로소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개성공단이 北 '달러박스'? 우리 이득이 더 많다!
[평화통일시민강좌] <6·끝> 김진향 전 개성공단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
2015.07.18 08:49:23
2015년은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00년의 한반도는 남과 북 사이에 화해와 교류협력, 평화의 기운이 넘쳐났으며 통일논의가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이후 남북 당국과 민간 교류는 대부분 단절됐고 남북관계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분단 70년, 광복 70년,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다시금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나아가 통일을 모색하기 위해 '평화통일시민행동'에서 '평화통일시민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모두 6회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강연의 주요 내용을 소개합니다.
마지막 순서로 지난 11일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임진각 내 경기평화센터에서 '개성공단의 미래'를 주제로 김진향 전 개성공단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 (현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연구교수)의 강연이 열렸습니다.
김 교수는 개성공단이 북한에 돈을 '퍼주는'사업이 결코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1년에 북측에 들어가는 금액이 임금과 세금을 합쳐 900억 원 정도입니다. 우리 기업들은 공단에서 이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고 최소 15배, 30배 남는 장사를 합니다. 이것이 정말 퍼주기입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개성공단이 작은 평화와 통일을 만들어가는 공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김 교수는 "(남북이) 추구하는 가치, 진선미의 기준, 말투, 사고방식을 배워갑니다. 상대방을 알면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알아가는 과정이 상호존중의 과정입니다. 개성에서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고 축적돼 갑니다"라면서 "이런 과정이 통일과 평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다음은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개성공단을 보면 통일이 보인다
통일은 화해협력, 남북연합, 완전통일의 3단계가 있습니다. 남북이 서로를 존중하며 이루어 나가는 통일은 돈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흡수통일은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흡수통일로 인해 '통일비용'이 들 것이라는 전망은 기만이고 허구입니다. 실제 흡수통일은 일어나지 않을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가능해서도 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흡수통일의 가정이 성립되려면 북한이 무너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일단 무너진다고 칩시다. 북측이 붕괴한다고 하면 북측 주민 2480만 명 중 10%만 남한에 내려와도 248만 명입니다. 이 사람들을 우리가 받아야 하는데, 대한민국 경제가 248만 명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다시 전제를 생각해 봅시다. 북한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이데올로기', 즉 이념입니다. 왜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이 이행되던 시절에는 북한 붕괴에 대해 언급이 없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서 다시 북한 붕괴론이 나오겠습니까? 그 사이에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것인가요? 우리의 정권교체에 따라서 북한 정권은 붕괴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나요?

▲ 김진향 전 개성공단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 (현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연구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평화의 오랜 제도와 과정이 결국 통일입니다. 평화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상호존중하면 됩니다. 남과 북의 역사적인 4대 합의가 있습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 공동선언과 2007년 10.4 선언입니다. 이 합의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은 '상호존중'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체제를 강요하지 않는다, 너희는 그렇게 살아라, 우리는 이렇게 살겠다, 다만 욕하지 말자, 싸우지 말자, 적대하지 말자" 입니다. 어렵습니까? 우리 사회 속에서 불교와 기독교와 가톨릭 모든 종교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남과 북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적대가 적대를 낳고 대립이 대립을 낳습니다. 호혜와 평화가 호혜와 평화를 낳습니다. 상호존중의 과정이 없는 통일 대박은 재앙입니다. 6.15공동선언 2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한 남북의 합의 사안을 담았습니다. 북한은 남과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을 최종적으로 하고 완전통일은 후대에 맡기자고 했습니다. 국가 지침으로 삼았습니다. 학자의 입장에서, 많은 협상을 했던 실무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맞습니다.
북한이 적화야욕으로 호시탐탐 남측을 노리고 군사적 충돌을 계속 일으킨다구요? 그들과 매일 같이 협상하고 토론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미안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들을 적대했구나, 분단체제 70년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비난하고 맹목적으로 적대 했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MB "개성공단에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
개성공단에 들어간 기업들은 돈을 참 많이 법니다. 현재 개성공단 부지가 100만 평입니다. 2000년에 합의하고 2003년에 첫 삽을 떴습니다. 합의대로라면 2012년 기점으로 2000만 평 부지에 2000개 기업이 있는 50만 명의 대도시, 연 500억 달러의 생산량이 예상됐습니다. 또 해주, 남포를 비롯해 6~7개 도시에 개성공단 같은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어야 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현실화됐다면 남북 간 실질적인 경제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경제 분야에서의 상호 공존성이 엄청나게 높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2000만 평 중에 100만 평 정도만 개발돼있고 이마저도 공장이 들어선 지역은 38.7%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대지는 방치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일까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2월부터 입니다. 5.24조치 때문에 중단된 것이 아니라 정부 정책적으로 이미 2008년 2월부터 추가 신규투자를 다 막았습니다. 제가 당시에 개성공단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으로 있었는데요, 대북협상 과정에서 지침이 내려옵니다. 기업들은 눈앞에 돈이 보이니 공장을 더 짓게 해달라고 요구하는데 허가를 안해줍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용역을 줬습니다. 개성공단이 문 닫았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정치, 사회, 경제적 측면의 파장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결론은 '감당할 수 없다'였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새로운 시도도 하지 않고 기존에 하던 것만 유지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지금의 개성공단 상황은 매우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개성공단은 124개 기업이 들어가 있고 800명의 남측 노동자와 5만 3000명의 북측 노동자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1년에 북측에 들어가는 전체 금액이 임금과 세금을 합쳐 900억 원 정도입니다. 1억 달러가 안 됩니다. 개성공단 가지고 퍼주기, '달러박스' 라고 이야기 하는데 우리는 최소한 15배, 30배 남는 장사를 합니다. 이런 것은 왜 보도 안 합니까? 정말 퍼주기이고 달러박스입니까? 국민들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남북관계는 평화, 안보, 생존의 영역이기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북한은 찌질하지 않다, 만만치 않다고 이야기해야 국민들이 제대로 판달 할 거 아닙니까. 그 제대로 된 판단을 다 가려버리면 누가 감당할 겁니까? 특히나 군사적 문제는 중요합니다. 감당이 안 됩니다. 총체적 무지입니다. 북한에 대해 잘 모르는 '북맹'이 너무 많습니다. 정부 당국자들조차 잘 모릅니다. 그들은 북한이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알면 보입니다.
매일 매일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는 개성공단
개성공단의 남측 주재원이 많을 때는 2500명이었지만, 지금은 800명 정도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매일 매일 상호 오해와 갈등을 넘어 하나가 되어 가는지 설명하겠습니다.
현재 북측 근로자들은 연장, 야근, 특근 전부 해서 월평균 15만 원을 받습니다. 최초 2003년에는 50불, 우리 돈으로 5만 원에서 시작해서 연장, 야근, 특근 다하면 6만 원이었습니다. 5% 상한선이 있어서 10년 후에는 많이 쳐서 15만 원 받습니다.
그런데 북·중 국경 지역의 중국 공단에서 일하는 북측근로자는 300~400불, 우리 돈으로 약 35~45만 원 받습니다. 우리에게 중동 특수가 있는 것처럼 북한도 중국에 인력을 많이 내보냅니다. 많이 받는 사람은 1000달러, 약 115만 원 까지도 받습니다.
그럼 이때 떠오르는 의문, 북한은 왜 남한과 함께 개성공단을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경제주의적인 관점에서 돈을 벌려고 개성공단을 합니다. 평화에 복무하고 호혜적인 경제프로젝트, 평화프로젝트라는 것은 부차적인 이유입니다. 하지만 북측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평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성공단 땅의 일개 보병사단, 포병사단을 송악선 북쪽으로 올리면서까지 개성공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고양에 있는 1사단을 삼각산 쪽으로 보내고 남북공단을 만들 수 있습니까? 말이 안됩니다.
초기 임금 산정 과정 당시 저는 청와대에서 그 협상을 진두지휘했습니다. 북측은 300달러, 우리는 200달러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50달러에서 시작하자는 통지가 왔습니다. 그들이 정말 돈이 필요했으면 이랬을까요? 이 모든 사실들은 그들에게는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화가 중요함을 이야기 합니다.
북측 근로자에게 왜 일하느냐고 물어봅니다. 우리의 기준에서 보면 직장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임금을 받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북측은 임금의 개념이 없고 생활비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북측에서는 노동을 우리의 기준인 임금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회주의 경제 질서에서는 노동의 개념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습니다. 다를 뿐입니다. 기업에서 일해서 생활비를 받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주는 것입니다. 왜? 국가가 자기를 파견시켰기 때문입니다. 고용과 피고용의 개념이 없습니다. 사장이 나를 고용한 것이 아니라 나는 국가적 조치에 의해서 당이 나에게 준 '분공'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개념입니다.
개성공단에 들어갔을 때 처음 겪는 갈등이 이런 것입니다. 남측의 사장이 일을 시키면 북측의 근로자들은 고용과 피고용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황당하게 쳐다봅니다. 우리에겐 사장님의 말이 맞죠. 전 세계 상식입니다. 내가 고용을 했고 내가 임금을 주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은 국가적 조치에 의해서 온 것일 뿐입니다. 우리와 다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 배우게 됩니다. 이 배움이 모든 오해를 풀게 합니다. 그것이 통일의 과정입니다. 사소하게 고용과 피고용의 개념을 이야기했지만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 진선미의 기준, 말투, 사고방식을 배워갑니다. 상대방을 알면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알아가는 과정이 상호존중의 과정입니다. 개성에서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고 축적돼 갑니다. 개성에서 우리 기업들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서로 알아가면서 통일과 평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개성공단에 투자하는 사장님들이 왜 2013년에 6개월 동안 잠정중단 됐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개 기업도 빠져나가지 않았을까요? 왜 전국을 돌면서, 도보 행진 하면서 개성공단 정상화를 이야기했을까요? 투자하는 사장님들이 저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김박사, 개성에서 돈 못 벌면 기업도 아니야"
공단 가동이 중단됐던 6개월 동안 사장님들은 동남아 지역을 돌면서 혹시 개성공단을 대신할 곳이 있을지 찾아봤습니다. 다 돌아보고 나서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개성공단 만한 경쟁력을 가진 곳이 없다고. 개성공단이 안되면 이미 그들은 그 어디에서도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남과 북의 경협입니다. 상호존중만 하면 대박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대박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남북관계를 보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기존에 계획했던 경협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 상황은 민족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 후대들에게, 미래 세대들에게 죄짓는 것입니다. 지난해 러시아가 10년간 250억 달러를 투자해서 북측 철도 3700km를 현대화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습니다. 그 사업은 2007년 10.4선언 당시 부속합의에서 우리가 하기로 되어 있던 사업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지하자원을 가져오고 그 후속으로 러시아가 발전소를 짓기로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원래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들입니다.
남북이 함께할 수 있는 철도, 도로, 항만 등 엄청난 사회간접자본(SOC)사업들이 있습니다. 중동 특수의 수백 배, 수천 배가 북측에 있습니다. 왜 대한민국 기업들이 5.24조치 해제하고 북한에 올려달라고 하겠습니까. 남과 북이 완벽하게 윈-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북측은 대동강의 기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성공단의 부침과 정상화
2008년 2월 국방부 장관은 '북한은 주적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10.4선언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았을 때입니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2008년 3월 "북핵 문제 해결 없이 개성공단의 확대는 불가하다, 개성공단의 중단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죽어났습니다. 개성공단에서 대북협상을 하고 있었는데요. 북측 파트너가 매일 통지문 가지고 저한테 흔들어댑니다. 어떻게 할 거냐고. 10.4선언, 부속합의들, 기숙사 건설, 탁아소 건설, 철도, 도로 연결 다 하기로 했는데 우리가 다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할 거냐고 재촉하는 북측 관계자에게 저는 기다려 보라고만 이야기했습니다. 심지어는 차라리 저를 추방시켜 달라고 이야기도 했습니다.
"김진향 선생 어디 있어. 어떻게 할 거야"
"제발 날 좀 두 달만 쉬게 보내줘. 내가 빚쟁이도 아니고. 나 이거 접수 못 해. 접수하지 말라 했어"
2009년과 2010년, 남북 당국 간 개성공단 실무회담을 6번 했습니다. 그런데 10시간 동안 있으면서 10분 남북 연락관 접촉하고 9시간 50분 동안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개성공단은 '미운오리새끼'이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였습니다. "내버려둬라,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가 지침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11년까지 그 상황을 보고 나오게 됐습니다.

▲ 파주 도라산 전망대에서 개성공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진향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개성공업지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에 따라 관리·운영되는 국제적인 공업지역입니다. 남북이 정상적인 관계였을 때에는 북측의 주권법에 따라 운영되는 주권 지역이었지만 남측과 충분히 협의했습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적대적으로 되는 순간 그렇게 안 됩니다. 공단 안에서 적대 행위가 발생합니다.
심지어 스파이 행위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한 남측 직원이 북측 여직원을 데리고 나오려고 작업했다가 적발된 겁니다. 북측은 당시 이 직원을 116일 동안 억류했다가 풀어줬습니다. 이후 국정원이 기무사와 조사를 진행 했는데 실제로 그 직원은 북측 여직원을 빼 오려고 시도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다 보니 북측은 남측 인원 2500명 중에 최소 생산 인원만 남겨두고 공단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측 체류 인원이 8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왜 남북의 공단이 적대와 대립의 상징이 됐을까요? 처음에 공단을 만들 때와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북측은 변화된 조건에 맞게 개성공단의 법과 제도를 바꾸겠다고 계속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남측은 계속 이를 무시했습니다. 북측은 계속 던집니다. 남측은 계속 회피하고 북측은 일방적으로 발표합니다. 남측은 일방적으로 발표했으니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변해버린 개성공단이었습니다.
언론이 보도합니까? 안 합니다. 아무도 몰라요. 공단은 그렇게 비정상화 되었습니다. 지난 12월 임금 관련해서 북측은 북측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정령으로 법을 바꿨습니다. 남북이 같이 운영하던 개성공단이 법적, 제도적으로 북측의 공단이 돼버렸습니다. 북측이 남측의 기업들과 사업을 하는 모양이 돼버린 겁니다.
미래가 불안정하면 공단의 생산도 불안정해집니다. 남북 당국 간 관계에서 불신과 대립이 심해지면 안에서 일하는 남북근로자들 관계 역시 참 서먹해집니다. 말을 안하려고 합니다. 서로 눈치 봅니다. 예전에는 같은 사무실에서 같이 떠들고 이야기하고 술도 마셨는데 그 모든 것이 2008년 2월 이후로 끊겼습니다. 우리도 그들도 그저 물건을 찍어내고만 있습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공단의 진정한 '정상화'가 시급히 필요합니다.
남북한 '평화도시'를 건설한다면? [기고] 문재인 정부의 통일 공약을 위한 '지공주의 공유도시론'과 '평화도시'
2017.06.24 13:27:08
1. 문재인 정부의 시장통합 및 점진적 통일 공약
새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평화통일 관련 6개 공약을 제시했다. 그 중에서 세 번째가 "남북한 시장을 하나로 통합하고 점진적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다. 세부 공약에서 밝힌 구체적인 시장통합 방법론은 "북한의 시장 확산 촉진과 남북 경제통합(경제통일)"이다. 다음으로 점진적 통일을 위한 방법론은 "시장통합을 바탕으로 하는 생활공동체 형성과 북한 이탈주민 정착지원"이다. 시장통합은 두 번째 공약인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실행'과도 연결되며, 점진적 통일은 네 번째 공약인 '남북기본협정 체결'과도 연결된다.
남북한 시장통합이라는 접근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시장이 '네트워크의 확산'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시장 '통합'이 아닌 글로벌 시대에 경제 네트워크로서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파라그 카나의 책 <커넥토그래피 혁명: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있는가?>(사회평론, 2017)는 커넥토그래피(Connectography: 연결 + 지리의 합성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지리적 조건이나 국경, 군사력으로 구획되는 주권국가 시대는 끝나고 고속도로·철도·파이프라인 등 에너지와 물품·인재 수송로, 정보·지식과 금융·기술이 광속도로 흘러가는 인터넷·통신망 등 기능적 사회기반시설들의 초국적 연결 시대가 됐다고 전망했다. 여기서 연결 주체는 정부나 국가가 아니라 개인과 기업, 광역 도시들이다. 그리고 지역연방이 다양한 개체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 책은 중국과 대만의 경제협력적 양안관계의 발전 사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상업 및 기반시설 통합을 통해 기능적 연방국가로 통합된 사례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소개한 기사(<한겨레>, 2017.6.16.)는 카나의 주장을 기초로, 남과 북 역시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하는 느슨한 형태의 연방이나 국가연합형 연방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통합 방식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점에서 남북한 시장통합과 점진적 통일의 공통된 핵심 키워드는 바로 '연결'이다. 통합을 서로 다른 두 시스템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스템의 연결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접근법을 문자 그래도 받아들인다고 할 때, 시장통합은 단순히 물건이 서로 오가는 무역을 넘어서는 일이다. 무엇보다 금융 자본주의 DNA를 담고 있는 '자본'이 오가기 때문에 시장통합에 따른 부작용까지 고민해야 한다. 어떤 방식의 시장통합이냐에 따라 점진적인 통일을 '촉진'할 수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통일연구원 부원장인 조민(2015)은 현실을 고려한 시장 경제의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통일이 개발논리에 휩싸인 소수 대자본의 향연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인식에서 그는 가령 북한 농지를 협동농장의 공동소유 및 공동생산 방식에 기초한 공동의 이익과 가치 창출 모델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조민, 2015: 37). 이러한 접근은 시장통합의 방향성 설정에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런데 현재 문재인 정부가 제시한 시장통합 관련 세부 공약은 방법론으로서 부족한 느낌이 든다. 북한 내에 시장이 확산된다고 해서 곧바로 남북 경제통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북한의 시장 확산이 남북 경제통합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더 나아가 이러한 시장통합을 바탕으로 생활공동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경제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실험공간'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도 여섯 번째 공약으로 접경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통일경제 특구법'을 제정하겠다고 했으니 이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글은 시장통합의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토지(가치) 공유를 핵심으로 하는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을 초보적으로 정립하고, 새로운 실험공간으로서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에 기초하는 '평화도시'를 제안하고자 한다.
2. 토지(가치) 공유에 기초하는 '지공주의 공유도시론'
1) 지공주의 공유도시론 초보적 정립
남과 북을 물리적으로 이어주는 대표적인 것이 토지다. 따라서 남북 시장통합 및 점진적 통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토지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토지정책을 깊이 탐구한 김윤상은 그의 저서 <지공주의>(2009)를 통해 토지가치 공유의 정신을 담는 '지공주의'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하는 제3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공주의는 자본의 사유와 토지의 공유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지공주의가 통일한국의 이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지공주의는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다. 둘째, 지공주의는 현재 남북한이 취하고 있는 체제보다 우수하다. 셋째, 지공주의는 남북한의 현 토지제도를 크게 바꾸지 않고도 도입이 가능하다. 토지사유제를 시행하고 있는 남한에서는 지대를 조세로 환수하면 되고, 토지가 국유인 북한에서는 토지 국유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인의 토지 사용을 확실하게 보장하고 임대료도 확실하게 징수하는 공공토지임대제를 실시하면 되기 때문이다(김윤상, 2009: 289-290). 남기업은 그의 저서 <공정국가>(개마공원, 2010)에서 한국은 물론 통일한국이 나아가야 할 국가모델로 '공정국가'를 제시하고, 북한이 나아갈 방향으로 공공토지임대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남기업, 2010: 236-248). 허문영·전강수·남기업도 "통일대비 북한토지제도 개편방향 연구"(통일연구원, 2009)에서 공공토지임대제를 중심축으로 하는 통일 정책을 제시했다. 필자도 <중국의 토지개혁 경험>(한울, 2011) 등에서 이론 및 중국 사례 연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공공토지임대제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기존 공공토지임대제 접근법의 한계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토지 소유 주체는 국가로 설정하면서 토지사용 주체는 개별화된 개인 및 기업으로 설정했다. 즉, 토지 소유 및 이용의 중간 주체로서 지역사회 공동체를 크게 강조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토지재산권 접근을 강조하다 보니, 부동산이라는 건물의 공동체적 소유 및 이용에 대해 깊은 논의를 진행하지 못했다. 즉 공(公)-공(共)-사(私)의 구조에서 중간 위치인 공동체의 역할을 간과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화폐제도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
따라서 기존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서 동시에 기존 정책 담론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차원의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 가능성을 필자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공유' 개념에서 찾고자 한다. 고전 경제학파의 전통에 속하는 아담 스미스와 헨리 조지(Henry George) 등을 비롯한 유력한 학자들이 개인 노동의 성과는 사유하되 그 기초가 되는 자연자원은 공유해야 한다는 이론(left-libertarianism)을 피력한 바 있다. 최근에 와서 공유지의 비극을 지역공동체의 자치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엘리너 오스트롬의 커먼즈(commons)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커먼즈 이론은 20년 넘는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일본이 도심 토지 저이용 문제를 해결하려고 제시한 '현대총유론'과도 연결된다. 2012년에 서울시는 도시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공유도시'(Sharing City)를 선포했다. 최근 한국의 지자체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 및 개인 자산을 공유자산화 하려는 전략을 모색 중에 있다. 중국은 도시재생 및 농촌 협동조합 추진에서 토지 공유(共有)와 지역 공동체의 참여를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종합해 보건데, 노동 생산물과 자본의 개인 소유는 격려하되 자연자원은 공유하려는 지공주의 접근법은 남북간 시장통합 및 점진적 통일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여기서 필자는, 중국 및 북한과 같은 경제체제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국가를 대상으로, 지공주의에 기초하면서 구체적인 정책 대안으로 공공토지임대제 및 관련 제도를 추진하는 도시를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이라는 틀로 접근하고자 한다. 여기서 개념 및 용어 선택과 관련하여 몇 가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 공유도시의 공간 범위는 도시 및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농촌지역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도농일체로 접근하는 것이다. 둘째,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은 서울시가 표방하는 '공유도시'(Sharing City) 개념과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서울시가 정의하는 공유도시는 "보유하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시간, 정보, 공간 등을 공유(share)해 도시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즉, 서울시가 추구하는 것은 공유도시가 아닌 '공용도시'이다. 이러한 개념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재산 소유권(ownership)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조성찬, 2016).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주거 세입자 문제, 가계부채 급등 문제, 도시재생에 따른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유휴 공간의 확산 및 방치 문제는 절대적인 사유재산권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셋째, 이미 서울시 등이 조금은 다른 목적으로 '공유도시'라는 용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를 채택한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 및 북한의 토지제도가 도시 토지의 국가 소유(公有) 및 농촌 토지의 마을공동체 소유(共有) 구조이기 때문이다. 즉, 토지가 공유(公有) 아니면 공유(共有)이기 때문에 공유도시라는 용어는 현재의 토지소유권 구조에 가장 부합한다. 공유도시는 내용상 커먼즈 이론 및 일본의 현대총유론과 유사하지만 일반인의 입장에서 '공동소유' 내지 '공유' 용어가 받아들이기 훨씬 쉽다. 그리고 절대적 사유 개념을 극복할 수 있는 접근법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2)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의 구성 체계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은 크게 '공유자원', '공유자산', '공유기업'으로 구성할 수 있다. 행정학에서 정의하는 공유자원은 한 국가 영토 내의 일반 대중이 공동으로 소유 및 향유하는 자원들이다. 대표적으로 토지와 지하자원 등이 있다. 이러한 공유자원은 경제발전에 따라 다양한 공유자산 형태로 분화된다. 중앙 및 지방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국공유지를 공유재(public properties)라고 부르며, 정부가 만든 기반시설은 공공재(public goods)라고 부른다. 커먼즈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공동체가 소유 및 관리하는 대상은 공동재(common pool properties)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회 전체의 노력에 의해서 형성되는 재화를 필자는 새롭게 사회재(social properties)로 분류하고, 토지가치(지대), 화폐, 도시경관 등을 사회재로 분류했다. 마지막으로, 공유기업은 정부 소유의 국공유기업과, 시민 또는 지역 공동체 소유의 각종 사회적 기업이다. 이처럼 공유자원-공유자산-공유기업이 부채에 기초하지 않는 화폐를 매개로 하면서 시민이 경제활동의 적극적인 주체로 참여하여 형성되는 경제를 사회적 경제라고 칭할 수 있겠다. 이러한 분류 및 체계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의 <표 1>과 같다.

▲ <표 1> 지공주의 공유도시의 구성 요소.
3)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으로 바라본 북한 스케치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시장 확산을 촉진하여 남북 경제통합으로 이어지도록 하겠다는 구상은 이미 밝힌 바 있다. 남한 정부가 북한의 시장 확산을 촉진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남한 정부의 전략과 무관하게 북한 내에는 이미 빠른 속도로 시장이 확산되고 있다. 북한 내 최근 흐름이 이를 잘 보여준다. 북한 경제전문가인 동용승(2017)은 북측 정부가 주민들의 시장 활동을 억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전담당제, 기업경영책임제 등으로 시장 기능을 활용하는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2017: 53). 그런데 이러한 시장 확산이 일정 정도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의 맥락에서 해석할 여지들이 많다.
농촌 협동농장 소유의 농지는 기본적으로 공동재로 볼 수 있다. 북한은 김정일 정부 이래로 협동농장을 공동경작하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소수의 작업반 단위로 경작하는 포전담당제를 시행해 오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기존 방식을 더욱 발전시켜, 자기 땅이라는 인식을 주지 못하는 윤번제 방식 대신 농가마다 담당 토지를 분배했고 생산물을 평균 30(국가) : 70(농가)으로 분배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생산물 분배 비율이 최초에는 국가가 60%였으나 30%로 크게 줄어들었다. 국가에 납부하는 30%는 북측이 '지대'라고 부른다. 관련 분석에 따르면, 농지마다 수년에 걸쳐 생산성을 측정하여, 각 토지 생산성에 따라 분배비율이 달라지도록 조정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자기 땅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면서 텃밭보다는 협동농장의 자기 땅을 경작하는데 주력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농민들은 농장단위 또는 작업반 단위로 종자와 비료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결과 농업 생산성도 올라가고 있다. 가령, 2015년 알곡 생산량이 589만 1000톤으로 2001년에 비해 142만톤이 증가했다(동용승, 2017: 55; 내일신문, 2017.6.15.). 이처럼 북한은 현재 협동농장이라는 공동재를 지공주의에서 살펴본 '노동생산물 사유-토지가치 공유' 원리로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공장기업소에도 적용하고 있다. <표 1>에 따르면 공장기업소는 공유도시 구성요소의 세 번째인 공유기업에 속한다. 특히 정부 소유의 국영기업에 해당한다. 오늘날 북한 정부가 시행하는 경영 원리는 기업경영책임제이다. 전에는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고 임금 및 식량을 지급했다면, 이제는 각각의 기관과 공장기업소가 자체 경영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지급하고, 식량과 생필품을 배급해 주는 방식으로 전환해 가고 있다. 기업소는 농지와 동일하게 생산액의 30%를 국가에 납부하고 있는데, 이는 기업소가 국가로부터 생산수단을 임대 사용하는 것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하는 성격이다. 협동농장의 지대와 같은 성격이다. 동용승에 따르면, 현재 각 기관이나 기업소들은 성과를 더 내기 위해 외국자본을 유치하거나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김정은 정권이 이러한 시장경제 원리를 적극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2017: 55-56).
그런데 변화하는 북한의 모습에서 불안한 요소도 감지된다. 가령, 핵-민생경제 병진노선을 채택한 김정은 정권은 미래과학자 거리, 려명거리, 아파트 신축 등 건설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데, 이 때 해당 부서에서 자체적으로 자재를 조달하고 건설을 책임지는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해당 단위들은 자재 확보를 위해서 지하자원을 수출하거나 다른 사업을 전개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시장의 돈주들에게 이권을 보장하는 식으로 주택건설 사업 등 대형 사업에 투자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동용승, 2017: 53; 임을출, 2016). 현재 북한 내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사업은 아파트 건축사업과 부동산 임대사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주택 매매가 불법이지만 자본가들(돈주)이 정부 관료와 결탁하는 방식으로 매매를 하고 있으며, 막대한 투기적 이익을 향유하고 있다. 이는 지공주의의 핵심 문제의식인 토지가치(사회재)의 독점적 향유에 해당한다.
앞서 살펴본 북한의 모습은 최근 평양을 방문한 진징이(金景一) 베이징대 교수의 방문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내일신문>, 2017.6.15). 한 마디로 말해서 시장경제 원리가 작동하여 전쟁위기설에도 불구하고 평양은 활력이 넘치고, 상품이 넘치고, 도시 건설이 팽창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국제 사회의 고강도 대북제재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북한이 내세우는 우리식 경제관리방식이라는 틀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진징이 교수는 이러한 변화를 '평양현상'으로 포착하고 조만간 북한 전역에 확산될 것으로 전망했다.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으로 북한의 변화상을 스케치해 보니, 협동농장의 포전담당제와 공장기업소의 기업경영책임제를 통해 새로운 차원의 공유경제 내지 사회적 경제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의 가능성과 한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능성 측면에서 보면 '노동생산물 사유-토지가치 공유'라는 지공주의 원리가 확대 도입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공유자산의 대상 중에서 사회재에 해당하는 두 자산인 토지가치(지대)와 화폐가 결합하여 사적 주체의 특권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향후 북한 지공주의 공유도시의 불안정성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동할 것이다.
3. 접경지역에 실험공간으로서 '평화도시' 제안
문재인 정부는 통일공약 6번째로 남북 접경지역 발전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공동관리위원회를 설치하여 접경지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통일경제 특구법'을 제정하는 두 가지 안을 제시했다. 역시 현 단계에서 구체성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징이 교수의 평양 방문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듯이, 북한은 도시 발전을 새로운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민들은 새로운 틀 내에서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균형점을 찾고 있다. 남한의 도시 역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다. 어쩌면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 먼저 도시공간에서 새로운 대안체제를 실험해야 하지 않을까?
접경지역 발전은 남북간 점진적 통일을 위한 과도기적 공간을 추진하는데 의미가 있다. 통일방안은 뒤에서 다시 논의하겠지만, '통일방안-접경지역 발전-통일경제 특구법'은 상호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런데 접경지역이라는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발전 컨셉은 제시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 접경지역에 평화도시를 건설하자는 안이 여러 차례 제안된 것으로 안다. 이런 맥락에서 본 글에서 기존 아이디어를 살리면서, 지공주의 공유도시론에 기초하여 새로운 도시공간을 설계 및 실험하는 방안을 제안하려는 것이다.
조금은 다른 맥락이지만, 중국은 경제체제 전환을 위해 지금까지 40년 동안 실험중이다. 이미 많이 알려져 있듯이 경제체제 전환 초기에 5대 경제특구를 연해지역에 설치하여 실험을 전개하였다. 그 이후에 실험을 통해 검증된 정책 모델들을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한 단계로 다양한 개발구가 설치되었다. 개발구 유형도 경제기술개발구, 고급기술개발구, 수출가공구, 보세구, 대만기업투자구, 변경합작경제구, 국가관광휴양구 등 다양하다. 이제는 상하이 등 자유무역구를 중심으로 더욱 큰 개방과 개혁을 촉진하여 국제경쟁력을 제고하고자 도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실험은 경제정책 차원만이 아닌 사회제도, 행정, 문화 등 다방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바로 상하이 푸동신구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급 신구와 충칭 량장신구를 중심으로 하는 종합형 개혁시험구이다. 중국은 그야말로 '실험의 나라'다(조성찬 외, 2017).
우리도 남측 및 북측의 관련 기관 및 시민사회가 함께 논의하여 접경지역에 평화도시를 생태적으로 건설한 후 제3의 대안적 경제체제를 적어도 50년 정도는 실험해야 하지 않을까? 서울시도 공유도시를 표방했고, 평양시도 시장원리가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으니, 새로운 접점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화도시에서 지공주의 원리에 부합하는 창의적인 제도들을 실험하고, 이러한 사회적 경험을 점진적 통일의 자원으로 삼는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통일경제 특구법'에 이러한 내용을 담아 중국처럼 장기간 다양한 실험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평화도시를 통해 남북 경제통합 및 생활공동체 형성을 실험할 수 있다. 좀 더 발상을 전환해서 접경지역에서 추진하기 때문에 통일경제 특구법을 남과 북이 함께 논의하여 제정하고, 통일경제헌법의 모체가 되도록 할 수도 있다. 이젠 좀 더 혁신적인 도전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