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폄훼, 이렇게 시작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에서 진실은 1980년 광주항쟁 기간, 그리고 '5월 운동'의 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요구·실천되었던 의제였다. '5.18 진실 규명'의 구호는 책임자 처벌과 함께 1980년 광주 문제를 해결하는 선결 조건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요 동력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주체들은 '5.18의 진실규명이 곧 한국의 민주화'와 직결되는 과제였다.
이에 1980~199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5.18의 진실을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하여, 5.18의 진실을 밝혀내는 담론 투쟁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5월 운동'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5월 운동, 민주화 운동을 통해 1988~1989년 광주 청문회가 이루어졌고,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를 통해 5.18 항쟁의 사실들은 법적·제도적 차원에서 진실의 위상을 부여받았고, 정치적 복권과 기념사업 등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지만원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이 '광주 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의 소행이다' 등의 5.18 왜곡 사례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 신군부의 5.18 왜곡 – 왜곡의 기원
5.18 왜곡의 기원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차지하는 계획에 따라 전국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21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잔악한 진압이 원인이 되어 시민들의 시위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고 단순히 불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의해 시위가 발생했다며 광주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소수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폄하했다.
다음으로 신군부는 항쟁을 진압하고 6월부터 '김대중 음모론'을 조작해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김대중 음모론을 적용하여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을 처벌하는 공식적 죄목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당시 군부가 구속자들을 김대중 음모론으로 기소한 죄목들은 많은 증언을 통해 날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유언비어론과 김대중 음모론은 '이창용 간첩 사건'과 같이 북한의 사주에 의한 광주사태로 귀결된다. 결국 신군부는 분단이라는 정치적 조건을 활용하는 반공주의에 5.18 항쟁을 집어넣어, 대한민국의 분열과 갈등의 요소로 낙인찍어 버렸다. 5.18 항쟁을 통해 남한 사회를 반공의 이데올로기로 몰아넣으며, 5월의 시위 상황을 광주지역에 한정시켰고, 광주 시민의 저항을 '지역 감정' 문제로 유폐시켜버렸던 것이다.
과거 청산 운동으로서의 5.18 – 왜곡의 조건
1980년 5월 27일 5.18 항쟁이 진압된 이후 5.18 유가족 및 관련자 그리고 지역민들은 그리고 다수의 민주화 운동 세력은 5.18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신군부 및 정부가 5.18의 사실들을 정치적으로 유폐시키고자 사용했던 '광주 사태'라는 함의를 '의거', '항쟁', '민주화 운동'으로 재정립하려고 노력하였고, 우리 사회는 이를 '5월 운동'이라고 말한다. 1987년 6월 항쟁은 5.18의 진실을 전국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1988~1989 '광주 청문회'를 계기로 관 주도의 진실규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요 관련자들은 진술을 거부하였고, 관련 자료에 접근하는 데 현실적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의 진상들이 밝혀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시절은 5․18특별법이 만들어 지면서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었고,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이었다.
이렇게 5.18 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전두환·노태우 등 사건 관련자들이 군사반란 및 내란죄로 구속되어 처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5월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명령, 지휘권 이원화, 외곽봉쇄 과정에서의 민간인 살상, 실종자 등의 문제 등이 미해결로 남았다.
이러한 미해결 과제를 해결하고자 노무현 정부는 지난 2007년 국방부 내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을 재조사하여 규명하도록 했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국회청문회, 검찰 수사와 법원의 재판 등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국방부 내부 자료를 수집·검토하고, 관련자를 인터뷰하는 등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진상에 접근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5.18 항쟁에 대한 다방면의 조사와 사법적 집행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및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5.18 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과거사 청산이 때로는 정치적 타협에 의해, 때로는 사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되면서 많은 한계점이 지적되고 있다.
민주화 운동의 부인과 5.18 왜곡의 재등장 – 왜곡의 성격
5.18 항쟁을 필두로 한 국가의 진상규명 작업은 제주 4·3 항쟁, 70년대 민주화 운동 관련자, 여순 사건, 의문사 사건, 85년 미문화원점거 사건, 군산 오송회 사건 등 과거 독재정권이 조작했던 정치적 사건들의 진상규명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국가기구로서 국가인권위원회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이 설치되면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건과 관련자들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과 명예회복 그리고 이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 진행되었다. 또한 이러한 진상규명의 성과에 힘입어 과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던 사람들이 복직되거나 개인적 명예를 회복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5.18 항쟁에 대한 왜곡의 경우 1990년대 후반 지만원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지만원은 "5․18광주폭동은 반미주의의 뿌리이며 북괴군의 적화전략이다"라든지 "5.18도 5.18묘지에 묻힌 민주열사도 다 좌익들의 자산이다" 등의 글을 인터넷에 유포시켰고, 다른 보수 웹사이트는 "왜 우리는 광주사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2010년 1월8일), "집단발포를 한쪽은 5.18무장단체였다", "광주사태를 간첩이 선동했다고 보는 50개의 이유!"등의 글을 웹상에서 유통시켰다. 급기야 <12․12와 5.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과 같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처음 이들의 주장이 등장했을 때 5․18의 사실관계를 무시하여 자의적으로 배치·조작하고 있다는 점, "~했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와 같이 간접 참여자의 증언을 직접 참여자의 증언으로 과장하고 있다는 점, 일부 보수세력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은 그저 미비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등장했고, 이들은 일련의 과거청산 작업을 "좌파진영이 정부권력을 끼고 '역사 뒤집기'를 진행하는 것"으로 부인했다. 또한 일련의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정치적 복권과 명예 회복을 국가정체성,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로 몰아갔다.
진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일련의 5.18 왜곡은 과거 신군부세력이 5.18 항쟁의 진실을 은폐하고 실상을 지역에 고립시켜 전국화시킴으로서 당대의 민주화 요구를 차단했던 정치적 전략의 산물이었다. 또한 최근의 왜곡 담론은 5․18의 진실을 폄훼하면서 궁극적으로 진보세력을 반정부·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함으로써 반대로 보수세력의 집결을 도모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보수 단체들의 5.18 왜곡 활동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눈감아 주는 듯 했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교과서를 국정화시키면서 일부 보수단체의 입장을 공식화하려 했다.
지만원의 왜곡을 배경으로 조선일보의 5.18 왜곡 보도, 인터넷 뉴스매체 <뉴스타운> 등 인터넷상의 왜곡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자, 최근에는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이 5.18을 왜곡하는 내용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하고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에서 공중 사격한 탄흔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을 비롯한 5.18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주목받고 있다.
5.18 왜곡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하기 위해 비공개 문서의 공개와, 위원회 구성을 통한 재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자칫 일련의 대응이 왜곡 담론과의 대결 구도를 형성함으로써 이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지난 10년의 보수 정권을 보면, 이들은 보수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를 하나로 귀결시키는 반공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정부가 주도하는 5.18담론은 정권에 따라 그 내용이 좌우되면서 지역적 갈등과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2011년 5.18 민주화 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5.18 항쟁과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세계 인권운동으로서 공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5.18 담론이 사회적 문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스스로 5.18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유가족과 항쟁의 참여자 그리고 광주 지역민들이 바라는 것은 희생자와 유가족들이 제대로 인정을 받고, 우리 사회가 제대로 인정하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제시했던 바와 같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등 근본적인 권위와 역사적 당위를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최근 추가적인 진실규명을 통해 제대로 된 사실을 밝히고 이를 전국에 다음 세대에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5.18이 더 이상 지역 간 갈등의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올바른 역사로 남게 해야 할 것이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연재합니다.
"국정교과서 해결은 간단...전면 철회 선언하면 된다"
옳고 그름을 떠나 50% 이상의 지지를 얻고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호소는 엄살만은 아니었다. 국회 의석이 여러 정당들이 나누어가지고 있는 상황, 게다가 여당이 된 민주당의 의석은 겨우 120석, 그러니까 국회 과반은커녕 40%에 딱 턱걸이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정권 교체에 동의하면서도 문재인 후보를 찍지 않은 진보 및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협치의 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높은 국민의 당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따라 새 정부가 과연 적폐 청산이나 사회 대개혁에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하는 상황이다.
전임 정부와 달리 언론장악은 엄두 낼 수도 없는 정부이다. 언론의 비판과 감시 앞에 하루도 발 뻗고 잠자지 못할 정부이기도 하다. 그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청와대 권력 외에는 사회 권력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 대개혁은 그만큼 더 어려운 과제다.
게다가 이번에 권력에 접근하지 못한 이들은 더더욱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에 더 집착할 가능성이 크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을 추진한다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도 공언했던 바다. 개헌하자는 주장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헌 논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다른 개혁 과제를 추진하는 것이 쉬울까 싶다. 그야말로 믿을 구석은 정권교체와 사회 대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일 테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 이 새 정부의 개혁을 지지하는 역할만을 할 수는 없다.
고고한 척하면 되기 때문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과 감시, 더 개혁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과정에서도 해야 할 일은 많다. 북핵 위기, 사드 위기, 경제 위기 등 헤쳐가야 할 위기도 많다. 이럴 때일수록 우선순위를 잘 잡고 가야 할 것이다. 정부도 마찬가지이고, 시민사회단체들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둘 사이에는 우선순위 설정이 다를 수 있고, 또 다른 것이 당연한 일이다. 갈등을 고조하고 정쟁을 가중시키는 정책부터 추진하는 것은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의 삶을 보듬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국민들을 위한 따뜻한 돌봄의 실현과 사회 전반의 공공성을 확대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국공립어린이집, 국공립요양시설, 공공병원 등 공공인프라의 확대는 국민들의 삶의 안정시키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며,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해 줄 것이다.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가계소득이 두터워지게 하는 것도 새 정부의 중요하면서도 우선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땀 흘려 일하면 먹고는 살 수 있고,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고, 미래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는 사회로 가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국가기관이나 공직자들의 불법 부당행위를 막기 위해서는 잘못에 대해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표적으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에 국가정보원이 벌인 정치공작, 특정 단체에 대한 지원 등에 대한 대통령이 책임지고 진상을 밝히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정쟁이나 사회 갈등이 적으면서도 시민들의 기대와 열망이 쌓여있는 과제들은 또 많다. 물론 국회의 협력을 얻어야 가능한 일들이다. 18세 투표권을 보장하도록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도록 추진하는 것이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 법률을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국가정보원의 국내정치 개입을 근절하도록 국정원법을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면 국회의 협력을 기다릴 필요 없이 대통령과 행정부 스스로 결단하면 될 일도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전면 철회를 선언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세월호참사와 관련한 제2기 특별조사위원회를 정부 스스로 독립적 기구로 꾸리는 것도 그러하다. 그 위원회의 조사 활동에 모든 정부기관이 적극 협력하도록 하는 것은 대통령의 의지만으로도 가능하다.
이러저러한 개혁 과제들을 열거하자면 10가지도 100가지도 더 늘어날 것이다. 많은 것을 해결하는 것보다는, 몇 가지라도 분명하게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독주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개혁은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힘이 있을 때 추진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국민적 동의와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개혁은 금방 벽에 부딪힌다. 그 좌절의 후유증은 다른 개혁의 추진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국민적 동의, 그리고 다른 정치세력의 동의와 기반이 넓은 것부터, 그리고 기반을 넓혀가면서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약체 정부인만큼, 국회 내에서도 40%의 의석만 확보하고 있는 여당인 만큼 개혁의 지지 세력과 동의 기반의 확인을 거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진보적 시민사회운동 진영이 처한 환경도 이제 달라졌다. 지난 9년 동안은 퇴행에 퇴행을 거듭하는 청와대, 행정부와 집권 여당에 맞서 싸우는 것이 시민사회의 역할이었다. 이제는 퇴행의 저지가 아니라 개혁의 속도와 범위를 두고 싸우는 시대가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냐 일부 개정이냐를 두고 갈등을 빚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한 경험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경우가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이명박근혜의 5.18 왜곡 도저히 못참아 개정판 냈다"

▲ 소설가 황석영 씨가 11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 내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기자회견에서 개정증보판 발행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이재의·전용호 지음,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창비 펴냄) ⓒ연합뉴스
5·18민주화운동에 어느 가톨릭 신자가 드리는 사죄의 글
공수부대를 제 물건처럼 돌려쓴 독재자
1982년 2월5일 공수부대원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이 타고 있던 C123이 제주 상공에서 사라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를 위해 악천후에 무리하게 투입됐다가 사고를 당했다. 전두환은 유감 표명을 하지 않았다.
1982년 2월5일 출동 명령이 떨어졌소. 전두환 대통령이 2월6일 제주공항 신활주로 건설 준공식에 참석한다는 거였지요. 온 제주에 비상이 걸리고 제주 지역의 군관민이 총출동해서 쓸고 닦고 장식하고 각을 잡았다오. 대통령 외곽 경호를 담당하던 우리도 하던 대로 장비 챙기고 옷을 다려 입고 검은 베레모 쓰고 C123 수송기에 올라탔소. 그런데 우리는 제주 땅을 밟지 못했지. 당시 제주공항은 악천후 속이었소. 아니 출발지인 성남공항도 마찬가지였지요. 눈이 계속 내려서 성남 서울공항 통제국은 모든 항공기 이륙을 통제했고 제5전술 공수비행단에서도 C123의 이륙이 불가하다는 보고를 두 번씩이나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륙이 안 된답니다!’ 하고 사령관이나 기타 책임자에게 보고했던 장교는, 이런 호령을 들었을 거요. “안 되면 되게 해 이 자식아. 각하가 가신다는데.” 작전명 봉황새. 우리는 봉황을 수행하는 뱁새들처럼 눈 내리는 활주로를 날아올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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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철 1982년 2월5일 제주도 한라산 계곡에 추락한 C123 수송기. |
그날 오후 C123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소. 군함들과 비행기들이 바다를 뒤졌지만 잔해는 나타나지 않았지. 다음 날, 군은 한 대학 등반대로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제보를 듣게 됩니다. “등반 훈련 중인데 모 지점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어요.” 그 소리 속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지르던 비명도 포함돼 있었을 거요.
마침내 2월6일 오후 4시께 한라산 해발 1060m 지점에서 우리가 탄 C123 기체가 발견되었소. 그 안에 타고 있던 공수부대원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은 몰사했습니다. 우리가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사람, 전두환은 제주를 떠날 무렵에야 분향소에 들렀고 짤막한 한마디를 남겼소. “이번 사건은 조종사 착각으로 일어난 사고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그 말을 들으면서 영혼의 처지로도 벌떡 일어나 그 턱을 걷어차고 싶었지. 최소한 자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 유감의 뜻이라도 표명해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오. 거기다가 공군도, 비행단도 무리라는 일을 억지로 하게 한 사람들의 책임은 어디로 가고 ‘인명은 재천’이라니.
우리도 우리지만, 졸지에 자식과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전두환의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신체 강건하고 사자도 때려잡을 것 같던 장정들이 왜 그렇게 속절없이 죽어가야 했는지, 누가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으로 우리를 몰아붙인 건지 밝혀야 할 거 아니오. 때는 서슬 푸른 5공화국, 정부가 신문의 기사와 방송 뉴스 순서까지 ‘보도지침’을 내리며 통제하던 시기였지. 수십명이 죽었지만 언론의 관심은 단신 하나로 끝났소. 우리 사고는 ‘군사상 기밀’로 취급됐거든.
참사 소식이 알려진 2월7일, 정확한 상황을 알려주지 않은 채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하자 일부 유가족들이 부대 상황실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소. 유리창을 깬 이는 세 살과 돌 된 아이의 엄마였지. 남편의 죽음을 밝히는 자료라면 뭐든 손에 쥐고 싶었던 그녀가 피투성이 손으로 움켜쥔 것은 상황일지였소. 거기에는 황망한 기록이 있었지. 사고 다음 날 아침 8시45분, 그러니까 사고 기체가 발견되기도 전 박희도 공수특전사령관이 해당 부대 대대장에게 이런 명령을 보낸 거요. “훈련명칭 변경-금번 훈련은 특별 동계 훈련으로 호칭하니 전 장병에게 주지시키기 바람.” 즉 대통령 경호 작전인 ‘봉황새 작전’을 대간첩 ‘특별 동계 훈련’으로 호칭하겠다는 얘기였지. 53명의 대한민국 정예 병사들은 대통령 경호를 위해 출동한 게 아니라 ‘특별 동계 훈련’을 위해 공군의 반대와 공항의 통제에도 떠났다는 거요. 전두환에 대해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군바리(그들을 어찌 군인이라 하겠소)’들의 농간이었지. 이래 놓고 인명이 재천이라.
그렇게 우리는 죽었소. 창창한 젊음과 희망, 한창 사랑이 꽃피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웃음이 나올 아이들을 두고 우리는 ‘특별 동계 훈련’ 중에 온몸이 산산조각 나서 죽었지. 죽음이 흔한 시절이었소. 1980년 광주에서 우리 공수부대원들은 같은 사람의 야욕 때문에 시민들을 죽였고, 또 시민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요. 그중 죽지는 않았으되 제대로 살지 못했고 살았으되 평생을 절망에 허덕인 우리 동료 얘기를 잠깐 덧대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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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화면 갈무리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는 김동관씨(오른쪽). 김씨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원이었다. |
1979년 5월 군 입대를 했다가 3공수여단에 차출된 젊은이가 있었어요. 이름은 김동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77학번이었소. 그런데 그는 공수부대원으로서 1980년 5월 광주에 군홧발을 찍게 되지. 그때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은 악랄한 쪽으로 대단했지. 김동관은 그 참극 앞에서 정신을 놓아버렸소. 총격전 와중에서도 총을 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을 사냥하듯 쏴 죽인 하사관들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도 벌였다고 하더군.
“명령은 데모대 중에서 무장한 경우에만 사격을 하게 돼 있었어. (그런데) 얘들, 특전사 요원 애들은 무차별 사격했다고, 무차별로. 내가 그걸 봤어.” 눈앞에서 자기 동료들이 사람을 오리처럼 쏘아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또 총을 맞았지만 그래도 살아서 심장이 뛰던 시위대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전남대 뒷산 나무 아래에 두고 발걸음을 옮기며 그의 정신은 시나브로 망가져갔지요. 복학을 했지만 자신이 체험했던 지옥을 잊지 못했고 행복하게 살자고 하면 자신의 동료들이 파괴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평화와 생명의 기억이 그 발목을 잡아챘지. “‘서!’ 그래서 안 서면 그냥 쏴버렸어. 무장을 했건 안 했건. 무서워서 도망가면 그걸 쏴 죽였어. 이 특전사 애들이. 그러니, 무차별 학살이지 무차별 학살….”
그는 술로 세월을 보냈고 술에 취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도졌지. 불현듯 일상 사이로 끼어드는 지옥의 악몽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는 평생 정신병원을 전전해야 했지. “그때 전두환을 죽여야 되고 노태우도 죽여야 되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 매일매일 생각하면 술이 안 끊어지는 거야 술이. 슬퍼서… 복수를 해야겠다고 불타는 게 아니라 슬퍼서. 그들의 죽음이 슬퍼서.”
우리가 대통령 경호할 때 청와대에 있었던 ‘영애’가 쫓겨나고 새 대통령이 뽑혔다는 소리 여기까지 들립니다. 그 와중에 우리 공수부대를 제 물건처럼 이리저리 돌려쓰고 제 경호원으로, 시민의 학살자로 만들었던 독재자가 여전히 살아서 활개를 치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치가 떨리게 됩니다. 참 그런 사람이 아직 살아서 “광주 사태는 폭동”이라고 뇌까리고 있다는 소식에 그가 우리 분향소에서 했다는 말을 아프게 되씹게 돼요. “그래, 인명은 재천이구나. 참 하늘은 얄궂고 짓궂고 험상궂고 심술궂구나.” 또다시 5·18이군요. 정권교체 환호 속에 들뜨더라도 잊지 말아주시오. 정신없더라도 챙길 건 챙겨주시오.
자유를 위해 인생을 건 조정식을 기억하다
밥 먹기 전 팔을 뻗어 주먹을 쥐면서 고 조정식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노동운동 현장에서 산업재해로 스물다섯 해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배후’에는 전두환의 폭정이 있었다.
10여 년 전 아빠는 어떤 사건을 취재하던 중에 퇴직을 앞둔 보안과 형사와 온종일 함께 돌아다닌 적이 있어. 보안과라는 건 대공(對共), 즉 국내에 암약하는 북한 간첩망을 적발하거나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업무를 맡은 부서였지만, 실제로는 북한과 관련이 있건 없건 반정부 인사들을 사찰하고 경우에 따라 잡아 족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단다. 고문 기술자로 유명한 이근안을 비롯해서 여러 악명 높은 이름이 ‘보안과’ 형사들이었지.
처음에는 꺼림칙했지만 아빠가 만난 보안과 형사는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고 오히려 진솔한 회고담을 들려주었어. 체포하거나 취조해본 사람 가운데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서울대 82학번 조 아무개 학생을 들었지.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는데 사연을 맞춰보고 이리저리 알아보니 그 형사의 기억 속 학생이 조정식이라는 이와 맞아떨어진다는 알게 됐어. 오늘은 아빠가 만난 보안과 형사 기억 속의 조정식에다 그 뒤 아빠가 접하게 된 조정식의 사연을 덧붙여서 늙은 보안과 형사의 목소리에 실어보고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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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정식씨가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배경에는 ‘1980년 광주’가 있었다. |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82학번이었어. 난 법대생으로 알았는데 물리학과라더군. 나랑 인연이 된 계기는 1985년의 ‘반제동맹’ 사건이었어. 서울대 제적·휴학생들을 중심으로 노동 현장에 침투해 활동하면서 노동운동 관련 제적 학생들을 규합, 5월 말경부터 북괴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한 ‘반제동맹당’을 결성(<동아일보> 1986년 11월12일)한 사건이지. 정식이도 그때 체포됐어. 경기도경으로 끌려왔는데 무지 고생을 했을 거야. 그때도 그 유명한 이근안이 붙어서 험하게 다뤘거든.
조사하다가 밥을 주는데, 왜 그 천주교인들이 성호를 긋잖아? 그런데 걔는 구호 외칠 때 팔 뻗는 거, 그 동작으로 세 번 힘 있게 내지른 뒤에 밥을 먹더라고. 내가 데리고 있었던 내내 그랬어. 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척 척 척 세 번 딱 하고 밥을 먹어. 뭐라고 해야 하나. 누구 보라는 시위는 아니었고 자기 자신한테 하는 다짐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참 말이 없는 놈이었어. 주변을 조사해보니 뭐 의식화 같은 작업을 활발하게 하지는 못했다더군. 그렇게 수줍어하는 성품이었대. 위장 취업을 해서 근로자들을 선동하는 것도 좀 붙임성이 있고 능청을 떨 구변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야.
잡혀온 놈들 중에 말 잘하는 놈 참 많았거든. 하지만 걔는 진짜 말 한마디 안 했어. 취조할 때도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거나 그게 다였어. 하지만 그런 느낌 있잖아. 아 이놈은 진짜 만만찮은 놈이구나. 겁도 안 먹을 것 같고, 눈치도 안 볼 거 같은 놈. 밥 먹으면서 걔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팔을 뻗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그 샌님이 무섭게 느껴지더라고. 좀 말을 시켜도 한마디도 안 해. 마치 벙어리처럼.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과묵한 녀석이 시위 현장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다가 경찰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도망치기는커녕 쩌렁쩌렁 연설을 해서 주변 시민들이 들고일어나게 만든 적도 있었다는 거야.
평생 막노동하며 식구를 부양했던 아버지를 존경하고 가족들에게도 끔찍한 순둥이였대. 걔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야.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저는 아직 아버님께 못난 아들입니다. 집안의 장남이면서도 아버님을 그 머나먼 땅에서 고생하시도록 만들고 가족들에게 본의 아니지만 온갖 슬픔과 고통을 주었던 점에서 저는 못난 아들입니다. (중략) 그렇지만 저는 불의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 어떤 시련과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 굽히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서울대저널> 132호).’
형을 살고 나왔다든가 집행유예로 나왔다든가 정식이가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또 다른 공장에 갔다는 정보는 듣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딱 부평역 앞에서 정식이하고 마주친 거야. 덥석 팔을 붙잡았지. 체포한 거냐고? 아니, 훈계, 아니 하소연을 했어. 그 가난한 노동자 아버지가 장남 서울대 간다고 했을 때 얼마나 좋아했겠어? 잔치를 해도 2박3일 할 일이지. 그런 애를 내 손으로 잡아넣었는데 겨우 출옥해서는 학교로 안 돌아가고 또 다른 공장에 갔다니 내 가슴이 다 아프더라고. 나중에는 빌다시피 했어. 너 잘된 뒤에 하고 싶은 일 하고 지금은 제발 학교로 돌아가라고.
그런데 애가 참 착한 게 나한테 대들지도 않고 묵묵히 그 말을 들어줬어. 자기 잡은 형사한테 욕이나 하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라비틀어진 손목에 꾀죄죄한 물색에 얼굴은 반쪽이 되어서는 끄덕끄덕 들어주더라고.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까지 하는데 참 가슴이 아팠어. 마치 내가 자기 삼촌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전하게 자기 인생을 걸었던 젊은이들
그때로부터 한 몇 달이 지났나. 누군가 조정식이 얘기를 전해주더군. ‘반제동맹 사건 조정식 알지?’ 하면서. 아 글쎄 죽었다는 거야. 서울 성동구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선반 작업 도중에 기계 균형 맞추려 고정시켜놨던 추가 별안간 튕겨 나와서 뒷머리를 때려버렸다는 거야.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대. 1964년생이니까 그때 만으로 스물다섯 정도나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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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1979년 11월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유신은 끝났지만 독재는 계속됐다. |
밥 먹기 전에 팔을 뻗어 주먹을 쥐면서 녀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평역 앞에서 ‘짭새(걔들은 우리를 그렇게 불렀지)’ 아저씨 훈계 들어주면서는 또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 순둥이가 왜 그런 열렬한 투사가 돼서 내 손에 잡히고 이근안한테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해야 했을까. 왜 그냥 보기만 해도 찬란한 젊은 나이, 가족 생각을 그리도 끔찍이 하던 순둥이 정식이를 투사로 만든 이유는 뭐였을까. 잡다한 이유도, 다양한 배경도 많겠지만 그건 다름 아닌 전두환이었어.
정식이는 대구 출신으로 1980년 광주에 대해서는 까맣게 몰랐지. 대학 와서 광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몰래 몰래 전해진 광주 관련 기록들을 보면서 소스라치고 치를 떨며 분노하고 땅을 치고 통곡했던 거야. 어디 걔뿐이겠어. 당시 운동에 뛰어든 학생들의 출발은 거의 모두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이었어. 물론 비슷한 또래면서도 광주가 뭐냐 하고 공부만 파던 우병우 같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말이야.
아 또 기억나는 게 있다. 정식이가 나직하게 읊조리던 노래야. 유치장에 앉아서 부르는데 투쟁가 그런 건 아니었고 찬송가 분위기의 운동권 노래였지. ‘이 세상 사는 동안’이라고 했어. 가사를 검색하면 나올 거야.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흘릴 눈물들 이 생명 다한 후에 다 씻어지리니 참된 삶 사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보다 더 귀한 건 생명을 봄이라. 너와 나 함께 손을 잡고 이 길을 걸으며 죽어도 뺏지 못할 자유를 되찾자.’ 보안과 형사로서 걔들한테 나는 독재의 주구 이상은 아니었겠지. 나도 걔들을 이 사회가 용납 못할 적이라고 생각했고 말이야. 하지만 ‘죽어도 빼앗지 못할 자유를 되찾기 위해’ 정직하고 온전하게 자기 인생을 걸었던 젊은이들에게는 지금이라도 경의를 표하고 싶어. 생각하면 할수록 목이 메고 가슴이 떨려. 그 눈물나게 푸르른 젊음들이 단 한 사람 때문에 뒤틀려버린 걸 생각하면 욕지거리가 솟아나기도 하지. 누군 누구겠어. 전두환이지. 최소한 그 인간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회고록이니 뭐니 하면서 죽어간 사람들 영혼에까지 구정물을 튀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삶을 살려다가 지쳐 쓰러져갔는데.
반복되는 거짓, 어떻게 이들 한(恨) 달래 주나

▲ <나는 부정한다>의 한 장면.
황석영 작가는 5월 23일 정관용 시사자키 인터뷰 중 "그전에 3,40쪽 유인물('광주백서'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이 있었다면서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게 이제 어떻게 됐냐 하면 광주에서 여러 팀이 이제 그걸 준비를 했는데 그 팀을 우리 현대문화연구소 측에서 다 이렇게 하나로 모았거든요. 그게 앞부분의 축약본은 그때 당시 소진섭이라는 친구가 그 부분을 해서 재야 인사들한테 보내고 그리고 아마 KNCC 종교단체, 기독교단체를 통해서 광범위하게 대학가로 나왔어요."
필자가 기록한 '광주백서'는 81년 4월에 완성됐고, 82년 1월에 인쇄돼 전국에 배포됐다. 황작가가 말하는 "현대문화연구소가 (관련 자료를) 모은"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84년인데 그것을 필자가 "그 앞부분의 축약본을 모아 다른 사람들에게 보냈다"고? 필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배포한 것은 82년 1월인데? 시기가 전혀 맞지 않고, 물론 전혀 사실이 아니다. 더구나 이 논리에 따르면, 내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성과를 '절도'한 것으로 된다.
이는 명백히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 훼손"에 해당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 만들어놓은 '스토리'로 다른 사람의 진실과 희생 그리고 노력을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광주 5.18의 진실"은 그 자체의 진상을 비롯해 그 역사 기록의 엄정한 진실도 포함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름 있는 사람"은 없다
필자는 80년 광주에서 광주항쟁의 발단부터 전개과정 그리고 마지막까지의 전 과정을 관계자들의 증언과 각종 기록을 토대로 하여 '광주백서'를 기록하고 전국에 배포하여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렸다.
이후 85년 풀빛출판사에서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라는 책의 작성 과정에서 이 '광주백서'는 가장 중요한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황석영 작가는 대체로 이 '광주백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해왔고, 이후 이 문제를 둘러싸고 <신동아>와 <오마이뉴스> 등에서 관련 보도가 나오기도 하였다.
황 작가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광주 기록과 관련해 "광주의 이름 없는 청년들이 썼다고 하면 누가 믿겠나?"라고 말했다. 황석영 작가도 처음부터 "이름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 터이다. 물론 본심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류의 발언은 "이름 없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 사회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사회"라고들 한다. 그런데 진보 언론들도 이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많은 경우에 '쉽게' 유명한 사람에게만 발언권을 제공하고, 선정적으로 보도하면서 관심과 주목을 받고자 한다. 일부 진보 쪽 출판사들의 '매명주의(賣名主義)'와 상업주의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독점 사회의 폐단이고 기득권 논리이며, 기회균등 원칙에 위배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더욱 승자 독식의 사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극우로부터 '간첩'으로 공격받는 가운데 또 명예와 보람을 짓밟힐 수 없다
80년 스무 살 필자가 광주항쟁을 기록했을 때, 필자는 수배자 신분에 먹지도 못하고 복막염에 장결핵에 걸려 있었다. 통증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무슨 명예를 바라고 기록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광주의 진실을 전국에 널리 알려 "희생되신 분"들의 억울함을 풀게 하고 전두환 권력의 잔학성을 낱낱이 고발하고자 함이었다. 인쇄와 배포도 직접 서울 을지로에 나가 종이와 중고 타자기를 샀고, 남대문시장에서 등사기도 샀으며 광주에 내려가 전국에 등기로 우송하고 기독교회관이나 각 학교 학회 사무실에 배포했다.
필자는 이제까지 그 "광주기록"으로 단 한 푼의 돈을 벌어본 적도 전혀 없다. 더구나 지만원 등 극우인사를 비롯해 극우사이트 '일베' 등에서 필자를 '광주백서'의 저자라 해 남파간첩이니 빨갱이니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느니 지속적으로 날조하면서 "이런 자가 국회도서관에 근무 중"이라고 명시하며 (암묵적으로) 일종의 공격을 선동하기도 하였다. 이런 날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진실과 명예는 짓밟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작 필자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광주 기록의 진실에 대한 아측(我側)의 각종 왜곡이다. 그때마다 필자의 명예와 보람은 철저히 짓밟히고 있다. 진실과 명예는 짓밟힐 수 없다.
광주항쟁의 역사 기록에 대한 왜곡 언행은 이제 그만 중단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정의를 위해 싸웠던 열아홉 또래 소년, 전영진 열사를 그리다
59년생 김의기와 61년생 황보영국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의로운 청년의 죽음은 끊이지 않았다. 대학생 김의기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뿌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동자 황보영국 역시 목숨을 바쳐 광주를 부르짖었다.
이한열 학생의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목 놓아 불렀던 26명의 이름 가운데 오늘은 두 명에 대해 얘기할까 한다. 김의기와 황보영국. 1959년생 돼지띠 김의기는 1980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1961년생 소띠 황보영국은 1987년 스물일곱 나이로 비슷한 외침을 지상에 남기고 역사라는 하늘의 별이 됐다. 먼저 경북 영주 출신인 김의기부터 이야기해보자.
1980년 5월27일. 공수부대는 광주 시민군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전남도청을 점령했어. 광주는 피로 물들고 군부독재의 통제는 완벽해 보였지. 광주·전남을 제외한 전국 각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정말로 까맣게 몰랐어. 그러나 그 새까만 어둠 속에서 광주의 참상을 전하는 촛불이 오롯이 켜진 건 5월30일, 광주항쟁 종료 후 단 3일 뒤였단다. 서슬이 시퍼렇던 계엄령하의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 6층 창밖으로 유인물이 때 아닌 눈처럼 휘날렸다. 근처에 있던 계엄군들이 지체 없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지. 험악한 욕설과 날카로운 구호가 적막한 봄 하늘을 찢었고, 이윽고 한 사람이 6층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음과 같은 유인물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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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5월18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당시 희생된 이들의 묘역에 참배하고 있다. |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를 직접 보고 돌아온 몇 안 되는 서울의 대학생이었어. 또한 불과 보름 전 계엄 철폐를 요구하며 서울역 앞을 뒤덮었던 수십만 학생 시위대의 일원이기도 했지. 당시 학생운동 리더들은 요구를 충분히 전달했으니 일단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자며 시위대를 해산시켰어(이걸 ‘서울역 회군’이라고 부른다). 시위가 절정을 이룬 순간 학생들은 정부에 민주주의 이행을 요구하며 한발 물러섰지만 전두환 일당은 오히려 그 틈을 노렸다. 광주항쟁은 그 와중에 벌어진 비극이었어.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대한민국 국민의 목줄기를 물어뜯은 전두환 일당의 만행에 몸서리를 치며 서울로 돌아왔지만 보름 전에 기세등등했던 수십만 학생 대군은 온데간데없고, 계엄령이 떨어지면 어디어디서 만나 싸워보자는 약속도 이미 시커멓게 잊혀가고 있었어. 김의기는 그 암담함을 참을 수 없었던 거야.
그즈음 TBC라는 방송사에 근무하던 정훈 PD는 제작비 지급 부서에 근무하던 한 여직원과 인사를 나누게 돼. “서강대 나오셨다면서요? 제 동생도 거기 지금 다녀요” 하면서 반가워하며 “우리 집엔 형제가 많은데 그 동생이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게 된답니다”라고 뿌듯해하던 누나였지. 얼마 후 정 PD는 학살자 처단을 외치며 죽어갔던 서강대 후배의 소식과 더불어 그 후배 김의기가 여직원의 동생이었음을 듣게 됐지. 누나의 말에 따르면 김의기는 누구보다 착한 젊은이였어. “의기는 2월에 졸업한다고 했어요. 2월이 돼서도 졸업을 안 하기에 왜냐고 물으니까, 저보다 가난한 친구에게 등록금을 주어서 자기는 가을에 하게 됐다고 하더군요(누나 김주숙의 증언).”
“우째 이럴 수가 있노 세상 사람들아”
그 착하고 정의감 넘치는 청년에게 1980년 5월은 견딜 수 없는 갑갑함이었고 찢어버리고 싶은 재갈이었어. 어떻게 이런 미친 세상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술 마시고 연애하고 시시덕거리며 살 수 있는 것인가. 우직한 청년 김의기는 그 괴리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의 유서를 다시 읽어보렴. 그의 속내가 그대로 울려 나온다. “이건 아니잖아. 우예 이럴 수가 있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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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암담함을 알리며 자결한 김의기 열사와 황보영국(아래) 열사. |
노무현 변호사가 활약하던 도시 부산에서도 1987년 4월 광주항쟁 사진전이 열렸어. 당시 사진전 개최에 관여했던 박승원 신부의 말을 들어보자. “시장 아주머니들이 와서 관람 시간을 연장해달라는 거예요. 와서 보고는 광주 영정들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정보기관 요원부터 시장 아주머니에 이르기까지 광주의 진실은 머리를 쇠몽둥이로 두들기는 충격이었던 거야.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성실한 기독교인 청년 황보영국에게도 그랬어. 역시 부산 출신인 박종철 학생 추모 집회에 참석했다가 며칠 유치장에 머문 걸 제외하면 별다른 운동권 활동 이력도 없었던 이 부산 청년은 광주항쟁 7주년을 하루 앞둔 1987년 5월17일, 부산상고 앞 대로에서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다. 사람 모양의 불덩이가 되어서도 그는 안간힘을 쓰고 달리며 외쳤다.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아마 그 역시 생전에 여러 번 경상도 사투리로 한탄했을 거야. “우째 이럴 수가 있노 세상 사람들아.” 끝내 그가 숨을 거두자 경찰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등을 떠밀었다. “빨리 화장해버리시오.” 불타 죽은 그의 시신은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단 하루 만에 불구덩이로 들어가야 했어. 대학생도 아니고 무슨 노동조합원도 아니었던 황보영국의 죽음은 그때도, 그 이후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어. 그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된 건 무려 14년이 지난 2001년이었다. 하지만 문익환 목사는 그를 기억했고 역사적인 연설 속에서 황보영국 이름 넉 자를 영원히 살려놓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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