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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폄훼, 이렇게 시작되었다

일취월장7 2017. 6. 23. 15:55

5.18 폄훼,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민정치시평] 진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5.18 민주화 운동에서 진실은 1980년 광주항쟁 기간, 그리고 '5월 운동'의 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요구·실천되었던 의제였다. '5.18 진실 규명'의 구호는 책임자 처벌과 함께 1980년 광주 문제를 해결하는 선결 조건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요 동력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주체들은 '5.18의 진실규명이 곧 한국의 민주화'와 직결되는 과제였다.

이에 1980~199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5.18의 진실을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하여, 5.18의 진실을 밝혀내는 담론 투쟁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5월 운동'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5월 운동, 민주화 운동을 통해 1988~1989년 광주 청문회가 이루어졌고,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를 통해 5.18 항쟁의 사실들은 법적·제도적 차원에서 진실의 위상을 부여받았고, 정치적 복권과 기념사업 등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지만원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이 '광주 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의 소행이다' 등의 5.18 왜곡 사례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 신군부의 5.18 왜곡 – 왜곡의 기원 

5.18 왜곡의 기원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차지하는 계획에 따라 전국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21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잔악한 진압이 원인이 되어 시민들의 시위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고 단순히 불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의해 시위가 발생했다며 광주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소수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폄하했다.

다음으로 신군부는 항쟁을 진압하고 6월부터 '김대중 음모론'을 조작해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김대중 음모론을 적용하여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을 처벌하는 공식적 죄목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당시 군부가 구속자들을 김대중 음모론으로 기소한 죄목들은 많은 증언을 통해 날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유언비어론과 김대중 음모론은 '이창용 간첩 사건'과 같이 북한의 사주에 의한 광주사태로 귀결된다. 결국 신군부는 분단이라는 정치적 조건을 활용하는 반공주의에 5.18 항쟁을 집어넣어, 대한민국의 분열과 갈등의 요소로 낙인찍어 버렸다. 5.18 항쟁을 통해 남한 사회를 반공의 이데올로기로 몰아넣으며, 5월의 시위 상황을 광주지역에 한정시켰고, 광주 시민의 저항을 '지역 감정' 문제로 유폐시켜버렸던 것이다. 

과거 청산 운동으로서의 5.18 – 왜곡의 조건 

1980년 5월 27일 5.18 항쟁이 진압된 이후 5.18 유가족 및 관련자 그리고 지역민들은 그리고 다수의 민주화 운동 세력은 5.18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신군부 및 정부가 5.18의 사실들을 정치적으로 유폐시키고자 사용했던 '광주 사태'라는 함의를 '의거', '항쟁', '민주화 운동'으로 재정립하려고 노력하였고, 우리 사회는 이를 '5월 운동'이라고 말한다. 1987년 6월 항쟁은 5.18의 진실을 전국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1988~1989 '광주 청문회'를 계기로 관 주도의 진실규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요 관련자들은 진술을 거부하였고, 관련 자료에 접근하는 데 현실적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의 진상들이 밝혀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시절은 5․18특별법이 만들어 지면서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었고,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이었다. 

이렇게 5.18 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전두환·노태우 등 사건 관련자들이 군사반란 및 내란죄로 구속되어 처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5월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명령, 지휘권 이원화, 외곽봉쇄 과정에서의 민간인 살상, 실종자 등의 문제 등이 미해결로 남았다.

이러한 미해결 과제를 해결하고자 노무현 정부는 지난 2007년 국방부 내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을 재조사하여 규명하도록 했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국회청문회, 검찰 수사와 법원의 재판 등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국방부 내부 자료를 수집·검토하고, 관련자를 인터뷰하는 등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진상에 접근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5.18 항쟁에 대한 다방면의 조사와 사법적 집행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및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5.18 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과거사 청산이 때로는 정치적 타협에 의해, 때로는 사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되면서 많은 한계점이 지적되고 있다. 

민주화 운동의 부인과 5.18 왜곡의 재등장 – 왜곡의 성격

5.18 항쟁을 필두로 한 국가의 진상규명 작업은 제주 4·3 항쟁, 70년대 민주화 운동 관련자, 여순 사건, 의문사 사건, 85년 미문화원점거 사건, 군산 오송회 사건 등 과거 독재정권이 조작했던 정치적 사건들의 진상규명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국가기구로서 국가인권위원회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이 설치되면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건과 관련자들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과 명예회복 그리고 이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 진행되었다. 또한 이러한 진상규명의 성과에 힘입어 과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던 사람들이 복직되거나 개인적 명예를 회복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5.18 항쟁에 대한 왜곡의 경우 1990년대 후반 지만원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지만원은 "5․18광주폭동은 반미주의의 뿌리이며 북괴군의 적화전략이다"라든지 "5.18도 5.18묘지에 묻힌 민주열사도 다 좌익들의 자산이다" 등의 글을 인터넷에 유포시켰고, 다른 보수 웹사이트는 "왜 우리는 광주사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2010년 1월8일), "집단발포를 한쪽은 5.18무장단체였다", "광주사태를 간첩이 선동했다고 보는 50개의 이유!"등의 글을 웹상에서 유통시켰다. 급기야 <12․12와 5.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과 같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처음 이들의 주장이 등장했을 때 5․18의 사실관계를 무시하여 자의적으로 배치·조작하고 있다는 점, "~했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와 같이 간접 참여자의 증언을 직접 참여자의 증언으로 과장하고 있다는 점, 일부 보수세력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은 그저 미비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등장했고, 이들은 일련의 과거청산 작업을 "좌파진영이 정부권력을 끼고 '역사 뒤집기'를 진행하는 것"으로 부인했다. 또한 일련의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정치적 복권과 명예 회복을 국가정체성,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로 몰아갔다. 

진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일련의 5.18 왜곡은 과거 신군부세력이 5.18 항쟁의 진실을 은폐하고 실상을 지역에 고립시켜 전국화시킴으로서 당대의 민주화 요구를 차단했던 정치적 전략의 산물이었다. 또한 최근의 왜곡 담론은 5․18의 진실을 폄훼하면서 궁극적으로 진보세력을 반정부·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함으로써 반대로 보수세력의 집결을 도모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보수 단체들의 5.18 왜곡 활동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눈감아 주는 듯 했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교과서를 국정화시키면서 일부 보수단체의 입장을 공식화하려 했다.

지만원의 왜곡을 배경으로 조선일보의 5.18 왜곡 보도, 인터넷 뉴스매체 <뉴스타운> 등 인터넷상의 왜곡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자, 최근에는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이 5.18을 왜곡하는 내용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하고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에서 공중 사격한 탄흔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을 비롯한 5.18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주목받고 있다.

5.18 왜곡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하기 위해 비공개 문서의 공개와, 위원회 구성을 통한 재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자칫 일련의 대응이 왜곡 담론과의 대결 구도를 형성함으로써 이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지난 10년의 보수 정권을 보면, 이들은 보수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를 하나로 귀결시키는 반공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정부가 주도하는 5.18담론은 정권에 따라 그 내용이 좌우되면서 지역적 갈등과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2011년 5.18 민주화 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5.18 항쟁과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세계 인권운동으로서 공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5.18 담론이 사회적 문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스스로 5.18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유가족과 항쟁의 참여자 그리고 광주 지역민들이 바라는 것은 희생자와 유가족들이 제대로 인정을 받고, 우리 사회가 제대로 인정하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제시했던 바와 같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등 근본적인 권위와 역사적 당위를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최근 추가적인 진실규명을 통해 제대로 된 사실을 밝히고 이를 전국에 다음 세대에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5.18이 더 이상 지역 간 갈등의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올바른 역사로 남게 해야 할 것이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연재합니다.



"국정교과서 해결은 간단...전면 철회 선언하면 된다"

[시민정치시평] 개혁의 폭과 속도​가 중요하다​
2017.05.11 14:44:44

'촛불 대선'이라고 불린 19대 대통령 선거가 적폐 청산을 약속한 문재인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시대를 압도할 것 같던 촛불시민 혁명의 열기가 이어진 선거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4​1​%를 간신히 넘은 지지율로 당선된 점은 ​새 정부가 가야 할 길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50% 이상의 지지를 얻고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호소는 엄살만은 아니었다. 국회 의석이 여러 정당들이 나누어가지고 있는 상황, 게다가 여당이 된 민주당의 의석은 겨우 120석, 그러니까 국회 과반은커녕 40%에 딱 턱걸이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정권 교체에 동의하면서도 ​문재인​ 후보를 찍지 않은 ​진보 및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협치의 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높은 국민의 당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따라 새 정부가 과연 적폐 청산이나 사회 대개혁에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하는 상황이다. 

전임 정부와 달리 언론장악은 엄두 낼 수도 없는 정부이다. 언론의 비판과 감시 앞에 하루도 발 뻗고 잠자지 못할 정부이기도 하다. 그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청와대 권력 외에는 사회 권력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 대개혁은 그만큼 더 어려운 과제다.

게다가 이번에 권력에 접근하지 못한 이들은 더더욱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에 더 집착할 가능성이 크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을 추진한다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도 공언했던 바다. 개헌하자는 주장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헌 논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다른 개혁 과제를 추진하는 것이 쉬울까 싶다. 그야말로 믿을 구석은 정권교체와 사회 대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일 테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 ​이 새 정부의 개혁을​ 지지하는 역할만을 할 수는 없다. 

고고한 척하면 되기 때문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과 감시, 더 개혁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과정에서도 해야 할 일은 많다. 북핵 위기, 사드 위기, 경제 위기 등 헤쳐가야 할 위기도 많다. 이럴 때일수록 우선순위를 잘 잡고 가야 할 것이다. 정부도 마찬가지이고, 시민사회단체들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둘 사이에는 우선순위 설정이 다를 수 있고, 또 다른 것이 당연한 일이다. 갈등을 고조하고 정쟁을 가중시키는 정책부터 추진하는 것은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의 삶을 보듬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국민들을 위한 따뜻한 돌봄의 실현과 사회 전반의 공공성을 확대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국공립어린이집, 국공립요양시설, 공공병원 등 공공인프라의 확대는 국민들의 삶의 안정시키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며,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해 줄 것이다.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가계소득이 두터워지게 하는 것도 새 정부의 중요하면서도 우선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땀 흘려 일하면 먹고는 살 수 있고,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고, 미래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는 사회로 가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국가기관이나 공직자들의 불법 부당행위를 막기 위해서는 잘못에 대해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표적으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에 국가정보원이 벌인 정치공작, 특정 단체에 대한 지원 등에 대한 대통령이 책임지고 진상을 밝히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정쟁이나 사회 갈등이 적으면서도 시민들의 기대와 열망이 쌓여있는 과제들은 또 많다. 물론 국회의 협력을 얻어야 가능한 일들이다. 18세 투표권을 보장하도록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도록 추진하는 것이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 법률을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국가정보원의 국내정치 개입을 근절하도록 국정원법을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면 국회의 협력을 기다릴 필요 없이 대통령과 행정부 스스로 결단하면 될 일도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전면 철회를 선언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세월호참사와 관련한 제2기 특별조사위원회를 정부 스스로 독립적 기구로 꾸리는 것도 그러하다. 그 위원회의 조사 활동에 모든 정부기관이 적극 협력하도록 하는 것은 대통령의 의지만으로도 가능하다.

이러저러한 개혁 과제들을 열거하자면 10가지도 100가지도 더 늘어날 것이다. 많은 것을 해결하는 것보다는, 몇 가지라도 분명하게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독주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개혁은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힘이 있을 때 추진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국민적 동의와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개혁은 금방 벽에 부딪힌다. 그 좌절의 후유증은 다른 개혁의 추진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국민적 동의, 그리고 다른 정치세력의 동의와 기반이 넓은 것부터, 그리고 기반을 넓혀가면서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약체 정부인만큼, 국회 내에서도 40%의 의석만 확보하고 있는 여당인 만큼 개혁의 지지 세력과 동의 기반의 확인을 거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진보적 시민사회운동 진영이 처한 환경도 이제 달라졌다. 지난 9년 ​동안은 퇴행에 퇴행을 거듭하는 청와대, 행정부와 집권 여당에 맞서 싸우는 ​것이 ​시민사회의 역할이었다. 이제는 퇴행의 저지가 아니라 개혁의 속도와 범위를 두고 싸우는 시대​가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냐 일부 개정이냐를 두고 갈등을 빚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한 경험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경우가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이명박근혜의 5.18 왜곡 도저히 못참아 개정판 냈다"

5.18 37주년 맞아 <죽음을 넘어...> 전면개정판 출간
2017.05.11 17:57:46

5.18광주민주화운동(이하 5.18) 37주년을 맞는 오는 18일을 일주일가량 앞두고 이 사건의 진실을 최초로 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이재의·전용호 지음,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창비 펴냄)가 출간 32년 만에 분량을 대폭 보강한 전면개정판으로 출간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저자들은 11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이 책의 의의를 되새겼다.  

기자간담회에는 황석영 작가를 비롯해 이재의 전 전남나노바이오연구원 원장, 전용호 광주전남소설가협회 회장 등 책의 주요 저자를 비롯해 정용화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정상용 전 국회의원(개정판 간행위원장)이 참여했다. 

독재 군부가 광주 시민의 항쟁을 북한의 사주에 따른 시민 폭도의 만행으로 날조하고, 200명이 넘는 시민을 무차별 학살한 계엄군의 만행을 자위권 행사로 포장한 가운데 주류 언론이 이를 살포함에 따라 사건의 진실이 파묻힐 위험에 처한 당시, 1985년 발간된 5.18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대학가와 사회 운동권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읽히며 긴 시간 '지하 베스트셀러'로 자리했다. 

전면개정판은 계엄군의 군사작전 관련 문서, 피해보상 등 행정기관 문서, 1868건의 항쟁 참여자 증언자료, 5.18 재판 자료, 검찰수사기록, 청문회 자료 등을 바탕으로 신군부의 내란 모의부터 가해자들의 불법 행위에 이르는 법률적 판단 등 상당량의 사실을 5.18을 중심으로 보강했다.  

당초 소설가 황석영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의 영문판이 1999년 미국에서 출간되며 주 집필자인 이재의 전 원장의 존재가 드러났다. 이 전 원장을 비롯해 주요 자료를 모으고 초판을 쓴 이들은 출간 후 군부에 끌려갈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무명의 저자들이 쓴 책의 신뢰도가 낮아질 것을 고려, 집필 팀은 최종 데스크를 찾았고 어려움 끝에 황석영 작가가 이 책임을 떠맡았다. 당시 집필자들은 황 작가에게 원고를 넘기기 전 "참여할 경우 감옥에 가실 것"이라고 했으나, 황 작가가 이를 흔쾌히 수락해 어렵게 이 책은 풀빛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군부는 황 작가를 잡아들였으나, 곧바로 풀어주고 외국으로 떠나보냈다. 당시 정식 재판이 진행될 경우, 군의 치부가 공공연히 알려질 것을 우려했으리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 소설가 황석영 씨가 11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 내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기자회견에서 개정증보판 발행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근혜 집권기 5.18 왜곡 지나쳐 개정판 내" 

한 팀으로 우리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기록물 중 하나를 만든 이들은 이번 개정판 출판 기자간담회에 다시 모여 "30년이 지난 사건을 되새기는 게 고통이었으나, 보수 정권의 사실 왜곡이 지나쳐 이 책을 다시 쓰기로 했다"고 개정판 출간 의의를 밝혔다. 

정상용 전면개정판 간행위원장은 "이명박근혜 정권 9년간 5.18의 역사 왜곡, 폄훼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며 "여러 왜곡된 사실에 관한 진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1985년 첫 출판 당시에 비해 새로운 많은 사실이 알려졌기에, 이 책을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정 위원장은 "보수 정권 들어 줄기차게 진행된 역사 왜곡의 배후에 국가 권력기관이 개입했다고 확신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황 작가는 "북한군의 남파설, 북한의 지령에 의한 시민 폭동설이 거짓임은 당시 현장에 있던 외신기자는 물론, 한국 기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당장 현장을 취재한 조갑제 씨도 '(북한 조작설을) 부인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5.18은 국민 주권을 찬탈한 군부 쿠데타를 비판하고 민주 회복을 주장한 광주 시민의 국민 저항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전면개정판은 지난 2013년부터 준비됐다. 2014년 개정판 간행위원회가 구성됐고, 국민성금을 바탕으로 개정판 집필이 추진돼 3년 만에 출간됐다.  

저자들은 왜곡에 맞서기 위해 당사자들의 증언뿐만 아니라 계엄군의 작전 기록 등 구체적 기록을 확보하려 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대부분 기록의 공개를 군이 거부해 시간이 지체됐다.  

황 작가는 "당초 개정판은 지난해 5월 18일 출판이 목표였는데 늦춰지던 중 촛불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제가 촛불집회에 참여하다 독감에 걸렸는데, 폐렴으로 발전해 3개월가량 정양하느라 더 늦춰졌다"고 개정판 발간이 늦춰진 이유를 설명했다. 

이 전 원장은 "초판은 당시 한계상 주로 항쟁 당사자 중 생존자 40~50명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개정판은 범위를 넓혀 당시 군부가 어떻게 작전을 짰는지 등을 보안사 자료 등을 중심으로 보강했다"며 "우리가 수집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수집해 철저히 근거를 밝혀 왜곡 원천을 뿌리 뽑겠다는 일념으로 개정판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개정판은 계엄군의 최초 집단 발포가 자행된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 학살보다 더 큰 규모의 학살이 20일 밤 광주역 앞에서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내용을 비중 있게 실었다. 저자들은 5.18의 가장 큰 규모 전투는 이날 밤 일어났다고 평가한다. 개정판에 따르면 20일 밤 광주역 전투에서 총탄 등에 맞아 숨진 사람은 5명이고, 부상자는 최소 11명이 넘는다. 

이 같은 보강 작업에 따라 당초 원고 750매 분량이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개정판은 원고 2000매 분량으로 늘어났다. 그나마 초고 4000매 분량을 절반 가까이 줄인 결과다.  

이에 청소년의 접근이 쉽지 않으리라는 판단 하에 집필팀은 청소년용 책을 따로 준비할 예정이다. 영문판과 유럽판 작업 역시 계획 중이다.  

"전두환 회고록 잘 나왔다" 

질의응답 시간에 집필자들은 긴 시간을 들여 5.18의 의의를 설명했다. 이 가운데 일부 집필자는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다.  

집필팀이 목소리를 가장 높인 순간은 최근 논란이 된 전두환 씨 회고록과 관련된 질문이 나온 순간이었다. 전 씨의 아들 전재국 씨 소유 출판사인 시공사 산하 임프린트에서 나온 회고록에서 전 씨는 자신이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자신은 5.18의 제물이라고 망언했다.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이재의·전용호 지음,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창비 펴냄) ⓒ연합뉴스

정 간행위원장은 "저는 전두환 회고록이 잘 나왔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교훈을 주기 때문"이라고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이 회고록을 통해 앞으로 국가적으로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을 함부로 사면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며 "잘못을 저지른 이를 사면하려면 정말 국민 대다수가 원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이어 "5.18의 피해자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면 언제든 용서하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지만, 학살 책임자 누구 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며 "저는 전두환 회고록을 보고 분노가 치밀기 이전에 슬픔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정부에 바라는 바가 없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이 전 원장은 더 많은 기밀 자료를 공개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 당시 재판 자체가 매우 격렬했는데, 관련 기록이 여태 공개되지 않았다"며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도 많은 중요 자료가 군사기밀을 이유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전 원장은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라도 여태 묻힌 수많은 자료가 공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 간행위원장은 계엄군의 양심선언을 요청했다.  

그는 "여전히 행방불명자가 60명이 넘는데, 저희는 그들 대부분이 암매장됐으리라고 추정한다"며 "이에 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당시 계엄군이 나서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저는 당시 부당한 명령에 따라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도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며 "이분들이 새로운 정부 아래에서 편하게 진실을 밝히실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5·18민주화운동에 어느 가톨릭 신자가 드리는 사죄의 글

[기고] 아직도 5.18의 진실을 왜곡하는 사회에서
2017.05.12 10:13:45

필자가 40년쯤 살아온 서울 쌍문동 골목에서 일어난 80년대 기억 한 토막. 우리말이 어눌하고 행색이 초라한 60대 남자가 주말이면 골목에 나타났고 그때마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고장 난 장난감을 들고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는 가위와 접착제, 펜치와 드라이버로 아이들 장난감을 고쳐주고 있었다. 그 사람 곁에 앉아 얘기를 나눈 적 있다. "일본에서 왔습니다. 우리 일본이 한국 사람들에게 나쁜 짓 많이 했는데 제가 해드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절반은 한국 와서 골목을 찾아다닙니다. 애들하고 놀아주고 고장난 장난감 고쳐줍니다." 니버(Niebuhr, Reinhold 1892~1971)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떠올리며, 비도덕적 사회에서 온 도덕적 인간의 순박했던 언행을 필자도 흉내 내고 싶어졌다.

아직도 5.18의 진실을 왜곡하는 사회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며칠 후 37주기를 맞는다. 아직도 5·18은 시민의 궐기가 아니라 북한군의 선동이었다고, 무고한 시민학살을 가리켜 '난세를 치세로 바꾸는 용단'이었다고, 군사반란의 주모자요 발포명령자 전두환이 자기는 '광주사태 치유 씻김굿의 희생자'라고 우기는 뻔뻔하고 비도덕적인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가톨릭교회 신자 한 사람으로서,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 우선 한국가톨릭의 교계에서 광주 시민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늦게나마, 사죄하고 싶다. 광주 금남로 교구청 6층에서 공수특전단의 만행과 학살을 직접 목격한 윤공희 대주교님, 시민들의 수습대책위에 앞장서다 옥고를 치룬 김성용 신부님과 조철현 신부님을 비롯한 광주대교구 사제단의 모범이 여태껏 필자의 양심에 촉구하는 본분이기도 하다. 

먼저, 한국가톨릭주교단을 대신하여 광주시민들에게 사죄한다. 그 처절한 광주 참상을 직접 겪은 윤공희 대주교님이 소집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내놓은 성명서(1980.5.23)가 광주시민들에게 끼쳤을 모욕감과 분노를 두고 필자가 대신해서 용서를 빈다. 한국군 최정예 공수특전단이 총칼로 비무장 시민들을 사살 도륙하는 판을 주교단은 "정치적 견해차로 빚어진 분쟁"이라고 규정하였다. 비무장 양민을 헬기의 기총사격으로 학살하며 '화려한 휴가'를 즐기던 군인들과 '광주시를 초토화하겠다'는 계엄사령관의 협박이 TV에서 방송되는 터에 처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가던 시민들더러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라"는 양비론적 훈유를 내리다니!  

술자리에서 부하의 총질에 죽은 불교 신자 박정희를 위해서 한국주교단이 명동에서 추도미사(1979.11.2)를 집전하였다. (그의 장례에서 목사의 기도와 스님의 목탁과 신부의 성수 분향이 묘지에 베풀어지는 장면은, 고인의 신앙에 따라 장례를 거행하는 외교사절들 눈에는 희극에 가까웠으리라.) '광주사태'가 '5·18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된 뒤에도 광주 희생자들을 위한 주교단의 추도미사는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지만 그분들에게도 '사회교리 영성'이 깊어지고 있으니 언젠가 가련한 그 넋들을 하느님 앞에서 위로하는 주교님들의 미사가 바쳐지리라 믿는다.  

광주가 계엄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시점에 필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호주 기자가 "대구의 고위성직자를 만났더니 '광주는 본래 좌익들이 많아요. 이번 사태도 그들이 일으켰을 거에요' 하더라며 필자의 견해를 묻던 기억이 나 그 성직자의 이름으로도 광주시민들에게 사죄한다.  

그해 가을 명동 전진상교육관의 모임에서 "어째서 5·18에 침묵하셨나요?"라는 청년의 질문에 "우리마저 월남처럼 될 수는 없었소. 미군장성으로부터 38선의 상황을 보고받은 바 있소"라고 답변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이름으로 광주시민들께 이해를 구한다. 최근 공개된 미대사관 문서에 드러난, 그 당시 38선 북한군의 특이상황 없었다는 보고로 미루어 특전단의 이동을 승인한 미군부의 술수였을 듯한데, 차후에 희생자들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셨으면서도 광주시민 학살을 당장 규탄하지 않으신 침묵에 일반국민들이 의아해 했기 때문이다. 15년 뒤 관훈클럽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잘못된 과거를 단죄하고 권력과 금력에 의한 부정부패를 척결하자"(1995.12.20)하시던 추기경님의 발언에 감사드리면서, 그 몇 달 전까지는 "5·18은 역사에 맡기자"던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에 동조하신 일을 두고는 고인을 대신하여 필자가 사과를 드린다. 

공동체의 행적을 함께 책임져야 하기에 

군사반란자 전두환-노태우가 재판을 받던 무렵에 <월간조선>(1996년 2월호)에 "죄인(罪人) 아닌 사람 없는데 누가 누구를 단죄(斷罪)합니까?"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올린 김남수 주교님을 대신하여 광주시민들 앞에 무릎 꿇어 깊이 사죄한다. 스스로 가톨릭 보수의 수장을 자처하신 그 회견에서 김주교님은 "광주사건은 민란이었다"고 단정하셨고, 진상을 밝히자는 거국적 요구에는 이렇게 반대하셨다. 

"정의를 구실로 민중이 분노하고 있고 그 분노는 비이성적이다. 역사적으로 사람의 분노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 계급투쟁이고 공산주의 아닌가? 진실은 후세에 가서야 밝혀진다. 남북대치 상황에서 우리끼리 이렇게 싸워야겠는가?"  

전두환의 7000억, 노태우의 4000억의 부정축재에 대해서는 "그 시대 정치인으로서는 빠져나오기 힘든 허물"이라고 감싸주시고, 비무장 시민 학살에 대해서는 "우리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죄인 아닌 사람이 없고, 우리는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지 우리가 판관이 아니다"라며 변호해주셨다. 5·18군사반란에 대한 김안젤로 주교님의 이런 평가에 감격한 <월간조선> 이동욱기자는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보는 가장 아름다운 성직자, 저는 수원에서 그런 분을 뵌 것 같습니다"는 찬사로 회견을 마쳤다.  

장발장을 감화시킨 미리엘 주교의 화신이라고 칭송받으신 김주교님의 진의는 그보다 7년 전, 문규현 신부님이 북한에 건너간 임수경양을 데리고 휴전선을 넘어올 무렵에 밝혀졌다. 세계청년학생축제에 참석하러 평양에 간 명수대 본당 신자를 데리고 내려오는 가톨릭사제를 구속할 것인가 망설여져 사법당국이 카톨릭교회의 눈치를 보자, 김주교님이 주교회의 의장으로서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우리 사회는 좀 더 법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하셨다(1989.7.27). 문 신부와 임 양이 휴전선을 내려오자마자 구속됨으로써 남북화해를 도모하는 사제와 신자를 주교가 검찰의 손에 넘긴 모양새가 되었다. 

필자가 한국 가톨릭에서 존경받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김남수 주교님을 거명까지 하면서 대신 사죄하는 이색적인 언행에는 세 가지 명분이 있다. 첫째, 하느님과 사람 앞에 죄 되는 생각과 말과 행함을 고백하면서 '의무를 소홀히 한 죄'까지 용서비는 종교가 가톨릭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교회다"라는 명제로 신앙인은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역사적 행적과 진로를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때문이다. 셋째, 필자가 아우와 함께 1979년 추석날 밤에 끌려가 중정 남산 6국에서 한 달 넘게 취조 받을 적에 "이 형제는 가톨릭에서 번역활동을 하는 신자일 뿐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주교님들의 구명문서에 두 분도 서명해 주신 은인이시므로 40여 년 흐른 지금에라도 그분들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아량과 이해를 대신 받아내고 싶었다. 김재규씨는 10월 26일 새벽에 우리 형제를 남산에서 내보냈고 그날 저녁 궁정동에서 유신정권을 끝장냈다. 


공수부대를 제 물건처럼 돌려쓴 독재자

1982년 2월5일 공수부대원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이 타고 있던 C123이 제주 상공에서 사라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를 위해 악천후에 무리하게 투입됐다가 사고를 당했다. 전두환은 유감 표명을 하지 않았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5월 17일 수요일 제505호

전두환이 처음 별을 단 건 1973년이었어. 별을 달았지만 보직은 그대로였지. 제1공수특전여단장이었어. 그래서일까 공수부대를 무척 신뢰했던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 적이 아닌 자국의 국민들을 때려잡기 위한 임무에 공수부대를 투입했지. 자신의 경호에도 공수특전단을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어. 오늘은 공수부대원들 가운데 전두환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인생의 대부분을 빼앗겨버린 이들의 이야기를 역시 그들의 목소리에 실어 들려주려고 해.

1982년 2월5일 출동 명령이 떨어졌소. 전두환 대통령이 2월6일 제주공항 신활주로 건설 준공식에 참석한다는 거였지요. 온 제주에 비상이 걸리고 제주 지역의 군관민이 총출동해서 쓸고 닦고 장식하고 각을 잡았다오. 대통령 외곽 경호를 담당하던 우리도 하던 대로 장비 챙기고 옷을 다려 입고 검은 베레모 쓰고 C123 수송기에 올라탔소. 그런데 우리는 제주 땅을 밟지 못했지. 당시 제주공항은 악천후 속이었소. 아니 출발지인 성남공항도 마찬가지였지요. 눈이 계속 내려서 성남 서울공항 통제국은 모든 항공기 이륙을 통제했고 제5전술 공수비행단에서도 C123의 이륙이 불가하다는 보고를 두 번씩이나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륙이 안 된답니다!’ 하고 사령관이나 기타 책임자에게 보고했던 장교는, 이런 호령을 들었을 거요. “안 되면 되게 해 이 자식아. 각하가 가신다는데.” 작전명 봉황새. 우리는 봉황을 수행하는 뱁새들처럼 눈 내리는 활주로를 날아올랐소.  
ⓒ서재철
1982년 2월5일 제주도 한라산 계곡에 추락한 C123 수송기.

그날 오후 C123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소. 군함들과 비행기들이 바다를 뒤졌지만 잔해는 나타나지 않았지. 다음 날, 군은 한 대학 등반대로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제보를 듣게 됩니다. “등반 훈련 중인데 모 지점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어요.” 그 소리 속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지르던 비명도 포함돼 있었을 거요.

마침내 2월6일 오후 4시께 한라산 해발 1060m 지점에서 우리가 탄 C123 기체가 발견되었소. 그 안에 타고 있던 공수부대원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은 몰사했습니다. 우리가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사람, 전두환은 제주를 떠날 무렵에야 분향소에 들렀고 짤막한 한마디를 남겼소. “이번 사건은 조종사 착각으로 일어난 사고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그 말을 들으면서 영혼의 처지로도 벌떡 일어나 그 턱을 걷어차고 싶었지. 최소한 자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 유감의 뜻이라도 표명해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오. 거기다가 공군도, 비행단도 무리라는 일을 억지로 하게 한 사람들의 책임은 어디로 가고 ‘인명은 재천’이라니.

우리도 우리지만, 졸지에 자식과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전두환의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신체 강건하고 사자도 때려잡을 것 같던 장정들이 왜 그렇게 속절없이 죽어가야 했는지, 누가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으로 우리를 몰아붙인 건지 밝혀야 할 거 아니오. 때는 서슬 푸른 5공화국, 정부가 신문의 기사와 방송 뉴스 순서까지 ‘보도지침’을 내리며 통제하던 시기였지. 수십명이 죽었지만 언론의 관심은 단신 하나로 끝났소. 우리 사고는 ‘군사상 기밀’로 취급됐거든.

참사 소식이 알려진 2월7일, 정확한 상황을 알려주지 않은 채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하자 일부 유가족들이 부대 상황실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소. 유리창을 깬 이는 세 살과 돌 된 아이의 엄마였지. 남편의 죽음을 밝히는 자료라면 뭐든 손에 쥐고 싶었던 그녀가 피투성이 손으로 움켜쥔 것은 상황일지였소. 거기에는 황망한 기록이 있었지. 사고 다음 날 아침 8시45분, 그러니까 사고 기체가 발견되기도 전 박희도 공수특전사령관이 해당 부대 대대장에게 이런 명령을 보낸 거요. “훈련명칭 변경-금번 훈련은 특별 동계 훈련으로 호칭하니 전 장병에게 주지시키기 바람.” 즉 대통령 경호 작전인 ‘봉황새 작전’을 대간첩 ‘특별 동계 훈련’으로 호칭하겠다는 얘기였지. 53명의 대한민국 정예 병사들은 대통령 경호를 위해 출동한 게 아니라 ‘특별 동계 훈련’을 위해 공군의 반대와 공항의 통제에도 떠났다는 거요. 전두환에 대해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군바리(그들을 어찌 군인이라 하겠소)’들의 농간이었지. 이래 놓고 인명이 재천이라.

그렇게 우리는 죽었소. 창창한 젊음과 희망, 한창 사랑이 꽃피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웃음이 나올 아이들을 두고 우리는 ‘특별 동계 훈련’ 중에 온몸이 산산조각 나서 죽었지. 죽음이 흔한 시절이었소. 1980년 광주에서 우리 공수부대원들은 같은 사람의 야욕 때문에 시민들을 죽였고, 또 시민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요. 그중 죽지는 않았으되 제대로 살지 못했고 살았으되 평생을 절망에 허덕인 우리 동료 얘기를 잠깐 덧대보겠소.


ⓒMBC화면 갈무리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는 김동관씨(오른쪽).
김씨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원이었다.
“'서!’ 그래서 안 서면 그냥 쏴버렸어”


1979년 5월 군 입대를 했다가 3공수여단에 차출된 젊은이가 있었어요. 이름은 김동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77학번이었소. 그런데 그는 공수부대원으로서 1980년 5월 광주에 군홧발을 찍게 되지. 그때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은 악랄한 쪽으로 대단했지. 김동관은 그 참극 앞에서 정신을 놓아버렸소. 총격전 와중에서도 총을 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을 사냥하듯 쏴 죽인 하사관들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도 벌였다고 하더군.

“명령은 데모대 중에서 무장한 경우에만 사격을 하게 돼 있었어. (그런데) 얘들, 특전사 요원 애들은 무차별 사격했다고, 무차별로. 내가 그걸 봤어.” 눈앞에서 자기 동료들이 사람을 오리처럼 쏘아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또 총을 맞았지만 그래도 살아서 심장이 뛰던 시위대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전남대 뒷산 나무 아래에 두고 발걸음을 옮기며 그의 정신은 시나브로 망가져갔지요. 복학을 했지만 자신이 체험했던 지옥을 잊지 못했고 행복하게 살자고 하면 자신의 동료들이 파괴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평화와 생명의 기억이 그 발목을 잡아챘지. “‘서!’ 그래서 안 서면 그냥 쏴버렸어. 무장을 했건 안 했건. 무서워서 도망가면 그걸 쏴 죽였어. 이 특전사 애들이. 그러니, 무차별 학살이지 무차별 학살….”

그는 술로 세월을 보냈고 술에 취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도졌지. 불현듯 일상 사이로 끼어드는 지옥의 악몽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는 평생 정신병원을 전전해야 했지. “그때 전두환을 죽여야 되고 노태우도 죽여야 되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 매일매일 생각하면 술이 안 끊어지는 거야 술이. 슬퍼서… 복수를 해야겠다고 불타는 게 아니라 슬퍼서. 그들의 죽음이 슬퍼서.”

우리가 대통령 경호할 때 청와대에 있었던 ‘영애’가 쫓겨나고 새 대통령이 뽑혔다는 소리 여기까지 들립니다. 그 와중에 우리 공수부대를 제 물건처럼 이리저리 돌려쓰고 제 경호원으로, 시민의 학살자로 만들었던 독재자가 여전히 살아서 활개를 치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치가 떨리게 됩니다. 참 그런 사람이 아직 살아서 “광주 사태는 폭동”이라고 뇌까리고 있다는 소식에 그가 우리 분향소에서 했다는 말을 아프게 되씹게 돼요. “그래, 인명은 재천이구나. 참 하늘은 얄궂고 짓궂고 험상궂고 심술궂구나.” 또다시 5·18이군요. 정권교체 환호 속에 들뜨더라도 잊지 말아주시오. 정신없더라도 챙길 건 챙겨주시오.



자유를 위해 인생을 건 조정식을 기억하다

밥 먹기 전 팔을 뻗어 주먹을 쥐면서 고 조정식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노동운동 현장에서 산업재해로 스물다섯 해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배후’에는 전두환의 폭정이 있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5월 17일 수요일 제504호


10여 년 전 아빠는 어떤 사건을 취재하던 중에 퇴직을 앞둔 보안과 형사와 온종일 함께 돌아다닌 적이 있어. 보안과라는 건 대공(對共), 즉 국내에 암약하는 북한 간첩망을 적발하거나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업무를 맡은 부서였지만, 실제로는 북한과 관련이 있건 없건 반정부 인사들을 사찰하고 경우에 따라 잡아 족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단다. 고문 기술자로 유명한 이근안을 비롯해서 여러 악명 높은 이름이 ‘보안과’ 형사들이었지.

처음에는 꺼림칙했지만 아빠가 만난 보안과 형사는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고 오히려 진솔한 회고담을 들려주었어. 체포하거나 취조해본 사람 가운데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서울대 82학번 조 아무개 학생을 들었지.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는데 사연을 맞춰보고 이리저리 알아보니 그 형사의 기억 속 학생이 조정식이라는 이와 맞아떨어진다는 알게 됐어. 오늘은 아빠가 만난 보안과 형사 기억 속의 조정식에다 그 뒤 아빠가 접하게 된 조정식의 사연을 덧붙여서 늙은 보안과 형사의 목소리에 실어보고자 해.  



고 조정식씨가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배경에는 ‘1980년 광주’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82학번이었어. 난 법대생으로 알았는데 물리학과라더군. 나랑 인연이 된 계기는 1985년의 ‘반제동맹’ 사건이었어. 서울대 제적·휴학생들을 중심으로 노동 현장에 침투해 활동하면서 노동운동 관련 제적 학생들을 규합, 5월 말경부터 북괴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한 ‘반제동맹당’을 결성(<동아일보> 1986년 11월12일)한 사건이지. 정식이도 그때 체포됐어. 경기도경으로 끌려왔는데 무지 고생을 했을 거야. 그때도 그 유명한 이근안이 붙어서 험하게 다뤘거든.

조사하다가 밥을 주는데, 왜 그 천주교인들이 성호를 긋잖아? 그런데 걔는 구호 외칠 때 팔 뻗는 거, 그 동작으로 세 번 힘 있게 내지른 뒤에 밥을 먹더라고. 내가 데리고 있었던 내내 그랬어. 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척 척 척 세 번 딱 하고 밥을 먹어. 뭐라고 해야 하나. 누구 보라는 시위는 아니었고 자기 자신한테 하는 다짐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참 말이 없는 놈이었어. 주변을 조사해보니 뭐 의식화 같은 작업을 활발하게 하지는 못했다더군. 그렇게 수줍어하는 성품이었대. 위장 취업을 해서 근로자들을 선동하는 것도 좀 붙임성이 있고 능청을 떨 구변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야.

잡혀온 놈들 중에 말 잘하는 놈 참 많았거든. 하지만 걔는 진짜 말 한마디 안 했어. 취조할 때도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거나 그게 다였어. 하지만 그런 느낌 있잖아. 아 이놈은 진짜 만만찮은 놈이구나. 겁도 안 먹을 것 같고, 눈치도 안 볼 거 같은 놈. 밥 먹으면서 걔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팔을 뻗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그 샌님이 무섭게 느껴지더라고. 좀 말을 시켜도 한마디도 안 해. 마치 벙어리처럼.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과묵한 녀석이 시위 현장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다가 경찰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도망치기는커녕 쩌렁쩌렁 연설을 해서 주변 시민들이 들고일어나게 만든 적도 있었다는 거야.

평생 막노동하며 식구를 부양했던 아버지를 존경하고 가족들에게도 끔찍한 순둥이였대. 걔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야.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저는 아직 아버님께 못난 아들입니다. 집안의 장남이면서도 아버님을 그 머나먼 땅에서 고생하시도록 만들고 가족들에게 본의 아니지만 온갖 슬픔과 고통을 주었던 점에서 저는 못난 아들입니다. (중략) 그렇지만 저는 불의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 어떤 시련과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 굽히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서울대저널> 132호).’

형을 살고 나왔다든가 집행유예로 나왔다든가 정식이가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또 다른 공장에 갔다는 정보는 듣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딱 부평역 앞에서 정식이하고 마주친 거야. 덥석 팔을 붙잡았지. 체포한 거냐고? 아니, 훈계, 아니 하소연을 했어. 그 가난한 노동자 아버지가 장남 서울대 간다고 했을 때 얼마나 좋아했겠어? 잔치를 해도 2박3일 할 일이지. 그런 애를 내 손으로 잡아넣었는데 겨우 출옥해서는 학교로 안 돌아가고 또 다른 공장에 갔다니 내 가슴이 다 아프더라고. 나중에는 빌다시피 했어. 너 잘된 뒤에 하고 싶은 일 하고 지금은 제발 학교로 돌아가라고.

그런데 애가 참 착한 게 나한테 대들지도 않고 묵묵히 그 말을 들어줬어. 자기 잡은 형사한테 욕이나 하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라비틀어진 손목에 꾀죄죄한 물색에 얼굴은 반쪽이 되어서는 끄덕끄덕 들어주더라고.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까지 하는데 참 가슴이 아팠어. 마치 내가 자기 삼촌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전하게 자기 인생을 걸었던 젊은이들


그때로부터 한 몇 달이 지났나. 누군가 조정식이 얘기를 전해주더군. ‘반제동맹 사건 조정식 알지?’ 하면서. 아 글쎄 죽었다는 거야. 서울 성동구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선반 작업 도중에 기계 균형 맞추려 고정시켜놨던 추가 별안간 튕겨 나와서 뒷머리를 때려버렸다는 거야.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대. 1964년생이니까 그때 만으로 스물다섯 정도나 됐나.

ⓒ연합뉴스
1979년 11월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유신은 끝났지만 독재는 계속됐다.


밥 먹기 전에 팔을 뻗어 주먹을 쥐면서 녀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평역 앞에서 ‘짭새(걔들은 우리를 그렇게 불렀지)’ 아저씨 훈계 들어주면서는 또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 순둥이가 왜 그런 열렬한 투사가 돼서 내 손에 잡히고 이근안한테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해야 했을까. 왜 그냥 보기만 해도 찬란한 젊은 나이, 가족 생각을 그리도 끔찍이 하던 순둥이 정식이를 투사로 만든 이유는 뭐였을까. 잡다한 이유도, 다양한 배경도 많겠지만 그건 다름 아닌 전두환이었어.  

정식이는 대구 출신으로 1980년 광주에 대해서는 까맣게 몰랐지. 대학 와서 광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몰래 몰래 전해진 광주 관련 기록들을 보면서 소스라치고 치를 떨며 분노하고 땅을 치고 통곡했던 거야. 어디 걔뿐이겠어. 당시 운동에 뛰어든 학생들의 출발은 거의 모두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이었어. 물론 비슷한 또래면서도 광주가 뭐냐 하고 공부만 파던 우병우 같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말이야.

아 또 기억나는 게 있다. 정식이가 나직하게 읊조리던 노래야. 유치장에 앉아서 부르는데 투쟁가 그런 건 아니었고 찬송가 분위기의 운동권 노래였지. ‘이 세상 사는 동안’이라고 했어. 가사를 검색하면 나올 거야.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흘릴 눈물들 이 생명 다한 후에 다 씻어지리니 참된 삶 사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보다 더 귀한 건 생명을 봄이라. 너와 나 함께 손을 잡고 이 길을 걸으며 죽어도 뺏지 못할 자유를 되찾자.’ 보안과 형사로서 걔들한테 나는 독재의 주구 이상은 아니었겠지. 나도 걔들을 이 사회가 용납 못할 적이라고 생각했고 말이야. 하지만 ‘죽어도 빼앗지 못할 자유를 되찾기 위해’ 정직하고 온전하게 자기 인생을 걸었던 젊은이들에게는 지금이라도 경의를 표하고 싶어. 생각하면 할수록 목이 메고 가슴이 떨려. 그 눈물나게 푸르른 젊음들이 단 한 사람 때문에 뒤틀려버린 걸 생각하면 욕지거리가 솟아나기도 하지. 누군 누구겠어. 전두환이지. 최소한 그 인간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회고록이니 뭐니 하면서 죽어간 사람들 영혼에까지 구정물을 튀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삶을 살려다가 지쳐 쓰러져갔는데.



반복되는 거짓, 어떻게 이들 한(恨) 달래 주나

[김경욱의 데자뷔] <나는 부정한다>로 바라본 5.18을 둘러싼 왜곡
2017.05.18 11:21:52


"겁쟁이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만 위협한다." <나는 부정한다>에서, 변호인 리처드의 말.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37주년이다. 그러나 그날의 진실은 아직도 온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29일에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1074회에서는 '화려한 휴가..... 각하의 회고록'이라는 부제 아래, 4월 5일에 출판된 <전두환 회고록>을 다루었다. 

방송에 따르면,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5.18을 광주사태라고 지칭하고, 불순분자와 폭도에 의한 난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자신은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과 무관하다’고 항변한다. 뿐만 아니라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진 것은 시위대가 먼저 무장을 했기 때문"라고 주장한다.

인터뷰에서,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발포명령은 없었으며, 자위권 차원에서의 발포도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지만원은 "5. 18이 600명의 북한 특수군이 일으킨 무장폭동이었다"는 날조까지 펼친다. 여전히 최초의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명확한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을 악용해, 범죄 사실 자체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새빨간 거짓말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천인공노할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것이 알고 싶다> 1074회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믹 잭슨의 <나는 부정한다>에는 이 질문에 대한 시사점이 있다. 이 영화에서 역사학자 데이빗 어빙은 5.18에 대한 전두환 일당의 주장처럼,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는 논리를 펼친다. 왜냐하면 대량학살을 위한 가스실 같은 시설은 없었으며, 사망한 유태인들은 단지 전쟁에서 발생할 수 있는 희생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치가 철저하게 증거인멸을 한 결과 히틀러가 학살을 지시한 기록이나 유태인이 가스실에 있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는 현실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 한다. 유태인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는 저서에서 "어빙이 히틀러의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하는데, 어빙은 이를 꼬투리 삼아 데보라가 역사가로서의 자신의 명성을 훼손했다고 고소를 한다. 이것은 이차대전이 끝나고 50년이 지난, 1994년에 실재 있었던 일이다.

▲ <나는 부정한다>의 한 장면.


어빙이 영국에서 소송을 제기 했기 때문에 데보라와 변호인단은 그의 주장이 틀렸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 재판 과정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어빙이 대중을 선동하는 방식과 변호인단이 마련한 전략이다. 

어빙은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자신이 데보라의 주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를 강변한다. 또 홀로코스트로 가장 널리 알려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이 대량학살의 장소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홀로코스트는 날조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히틀러가 유태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는 주장까지 한다. 그는 또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홀로코스트는 너무 지루하다. 유태인들은 그것이 3천년 동안의 유일한 흥미 거리이기 때문에 계속 홀로코스트 이야기만 떠든다"며 조롱한다(우리도 5. 18 또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이와 비슷한 망언을 경험 했다). 

어빙의 주장에 대처하는 데보라와 변호인단의 전략은 완전히 상반된다. 데보라는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인 자신과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이 증언에 나서서, 어빙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반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기억에는 착오가 있을 수 있고 어빙이 그 틈을 파고들어 증언 자체를 거짓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어빙의 무자비한 공격에 의해 상처를 받고 모욕감을 느끼는 이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또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순간, 어빙의 프레임에 말려들 위험이 있다. '홀로코스트가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주장하듯이, 문제는 프레임이다. 데보라가 유태인으로서 매우 격앙된 상태인데 비해 노련한 변호사 리처드는 냉정하고 치밀하게 변론을 준비한다. 그는 데보라에게 "가장 옳다고 느껴지는 것이 반드시 가장 효과가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홀로코스트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대신, 어빙의 저서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논리적인 허점과 모순을 파고든다. 어빙의 주장에서 발견되는 오류, 독일어 자료에 대한 오역 등을 밝혀내면서, 그를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사를 왜곡하는 거짓말쟁이라고 규정한다. 더 나아가 어빙의 연설과 일기에 나타난 말을 근거로 그가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이기 때문에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히틀러의 무죄를 옹호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날조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8주 동안 계속된 재판의 마지막 순간에 판사가 당혹스런 질문을 던진다. '어빙이 진짜 반유대주의자라고 해도 그 자신이 말하는 것을 정말 믿고 있다면,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할 수 있는가?' 이것은 학문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에 대해 리처드는 "어빙이 반유대주의자라는 걸 우리가 알고 있다면, 홀로코스트의 부정이 어떤 역사적 정당성도 없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 둘이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건 억측이 아니다"고 답변한다. 판사는 리처드의 주장을 받아들이다.  

판사가 판결을 내리기까지 감도는 긴장감,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어떤 기시감이 있다. 어빙은 텔레비전에 출연해 미국인 데보라의 영어 악센트를 조롱하고, 자신이 재판에서 이긴 것처럼 꾸며대면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주장을 멈추지 않는다. 재판에서 승리한 데보라는 "적에게 맞선다는 건 괴롭고 불확실하고 몹시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해야 했다. 모두 지나간 다음에야 그런 일들이 영웅적이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 1074회에서, 김상중은 "가해자들은 여전히 그날의 일을 사과하지 않고 피해자들만 살아남은 것을 죄스러워 한다. 반복되는 거짓과 왜곡 속에서 우리는 이들의 한을 어떻게 달래 줘야 할까?"라며 탄식한다.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날조하는 이들의 주장이 <나는 부정한다> 같은 경우처럼, 법정으로 간다면 어떤 공방과 판결이 나오게 될까? 어처구니 없게도 자신이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전두환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고 한다.  

"진실의 전모가 밝혀지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가능한 조사만이라도 이루어져야 한다." 

절대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서 나온 말 같아서 소름이 끼치고 화도 나지만,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데보라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생존자분들과 학살당한 분들, 여러분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고통의 목소리는 전해졌습니다." 

37년 전, 광주에서 희생된 분들의 영면을 빈다. 


'광주 기록'의 진실 왜곡, 이제 그만 해야 한다
[기고] 역사의 진실이 왜곡돼서는 안 된다

황석영 작가는 5월 23일 정관용 시사자키 인터뷰 중 "그전에 3,40쪽 유인물('광주백서'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이 있었다면서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게 이제 어떻게 됐냐 하면 광주에서 여러 팀이 이제 그걸 준비를 했는데 그 팀을 우리 현대문화연구소 측에서 다 이렇게 하나로 모았거든요. 그게 앞부분의 축약본은 그때 당시 소진섭이라는 친구가 그 부분을 해서 재야 인사들한테 보내고 그리고 아마 KNCC 종교단체, 기독교단체를 통해서 광범위하게 대학가로 나왔어요." 

필자가 기록한 '광주백서'는 81년 4월에 완성됐고, 82년 1월에 인쇄돼 전국에 배포됐다. 황작가가 말하는 "현대문화연구소가 (관련 자료를) 모은"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84년인데 그것을 필자가 "그 앞부분의 축약본을 모아 다른 사람들에게 보냈다"고? 필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배포한 것은 82년 1월인데? 시기가 전혀 맞지 않고, 물론 전혀 사실이 아니다. 더구나 이 논리에 따르면, 내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성과를 '절도'한 것으로 된다.

이는 명백히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 훼손"에 해당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 만들어놓은 '스토리'로 다른 사람의 진실과 희생 그리고 노력을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광주 5.18의 진실"은 그 자체의 진상을 비롯해 그 역사 기록의 엄정한 진실도 포함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름 있는 사람"은 없다 

필자는 80년 광주에서 광주항쟁의 발단부터 전개과정 그리고 마지막까지의 전 과정을 관계자들의 증언과 각종 기록을 토대로 하여 '광주백서'를 기록하고 전국에 배포하여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렸다.  

이후 85년 풀빛출판사에서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라는 책의 작성 과정에서 이 '광주백서'는 가장 중요한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황석영 작가는 대체로 이 '광주백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해왔고, 이후 이 문제를 둘러싸고 <신동아>와 <오마이뉴스> 등에서 관련 보도가 나오기도 하였다.

황 작가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광주 기록과 관련해 "광주의 이름 없는 청년들이 썼다고 하면 누가 믿겠나?"라고 말했다. 황석영 작가도 처음부터 "이름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 터이다. 물론 본심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류의 발언은 "이름 없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 사회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사회"라고들 한다. 그런데 진보 언론들도 이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많은 경우에 '쉽게' 유명한 사람에게만 발언권을 제공하고, 선정적으로 보도하면서 관심과 주목을 받고자 한다. 일부 진보 쪽 출판사들의 '매명주의(賣名主義)'와 상업주의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독점 사회의 폐단이고 기득권 논리이며, 기회균등 원칙에 위배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더욱 승자 독식의 사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극우로부터 '간첩'으로 공격받는 가운데 또 명예와 보람을 짓밟힐 수 없다

80년 스무 살 필자가 광주항쟁을 기록했을 때, 필자는 수배자 신분에 먹지도 못하고 복막염에 장결핵에 걸려 있었다. 통증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무슨 명예를 바라고 기록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광주의 진실을 전국에 널리 알려 "희생되신 분"들의 억울함을 풀게 하고 전두환 권력의 잔학성을 낱낱이 고발하고자 함이었다. 인쇄와 배포도 직접 서울 을지로에 나가 종이와 중고 타자기를 샀고, 남대문시장에서 등사기도 샀으며 광주에 내려가 전국에 등기로 우송하고 기독교회관이나 각 학교 학회 사무실에 배포했다.
   
필자는 이제까지 그 "광주기록"으로 단 한 푼의 돈을 벌어본 적도 전혀 없다. 더구나 지만원 등 극우인사를 비롯해 극우사이트 '일베' 등에서 필자를 '광주백서'의 저자라 해 남파간첩이니 빨갱이니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느니 지속적으로 날조하면서 "이런 자가 국회도서관에 근무 중"이라고 명시하며 (암묵적으로) 일종의 공격을 선동하기도 하였다. 이런 날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진실과 명예는 짓밟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작 필자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광주 기록의 진실에 대한 아측(我側)의 각종 왜곡이다. 그때마다 필자의 명예와 보람은 철저히 짓밟히고 있다. 진실과 명예는 짓밟힐 수 없다.  

광주항쟁의 역사 기록에 대한 왜곡 언행은 이제 그만 중단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정의를 위해 싸웠던 열아홉 또래 소년, 전영진 열사를 그리다

59년생 김의기와 61년생 황보영국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의로운 청년의 죽음은 끊이지 않았다. 대학생 김의기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뿌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동자 황보영국 역시 목숨을 바쳐 광주를 부르짖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6월 22일 목요일 제509호

이한열 학생의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목 놓아 불렀던 26명의 이름 가운데 오늘은 두 명에 대해 얘기할까 한다. 김의기와 황보영국. 1959년생 돼지띠 김의기는 1980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1961년생 소띠 황보영국은 1987년 스물일곱 나이로 비슷한 외침을 지상에 남기고 역사라는 하늘의 별이 됐다. 먼저 경북 영주 출신인 김의기부터 이야기해보자.

1980년 5월27일. 공수부대는 광주 시민군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전남도청을 점령했어. 광주는 피로 물들고 군부독재의 통제는 완벽해 보였지. 광주·전남을 제외한 전국 각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정말로 까맣게 몰랐어. 그러나 그 새까만 어둠 속에서 광주의 참상을 전하는 촛불이 오롯이 켜진 건 5월30일, 광주항쟁 종료 후 단 3일 뒤였단다. 서슬이 시퍼렇던 계엄령하의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 6층 창밖으로 유인물이 때 아닌 눈처럼 휘날렸다. 근처에 있던 계엄군들이 지체 없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지. 험악한 욕설과 날카로운 구호가 적막한 봄 하늘을 찢었고, 이윽고 한 사람이 6층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음과 같은 유인물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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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5월18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당시 희생된 이들의 묘역에 참배하고 있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를 직접 보고 돌아온 몇 안 되는 서울의 대학생이었어. 또한 불과 보름 전 계엄 철폐를 요구하며 서울역 앞을 뒤덮었던 수십만 학생 시위대의 일원이기도 했지. 당시 학생운동 리더들은 요구를 충분히 전달했으니 일단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자며 시위대를 해산시켰어(이걸 ‘서울역 회군’이라고 부른다). 시위가 절정을 이룬 순간 학생들은 정부에 민주주의 이행을 요구하며 한발 물러섰지만 전두환 일당은 오히려 그 틈을 노렸다. 광주항쟁은 그 와중에 벌어진 비극이었어.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대한민국 국민의 목줄기를 물어뜯은 전두환 일당의 만행에 몸서리를 치며 서울로 돌아왔지만 보름 전에 기세등등했던 수십만 학생 대군은 온데간데없고, 계엄령이 떨어지면 어디어디서 만나 싸워보자는 약속도 이미 시커멓게 잊혀가고 있었어. 김의기는 그 암담함을 참을 수 없었던 거야.

그즈음 TBC라는 방송사에 근무하던 정훈 PD는 제작비 지급 부서에 근무하던 한 여직원과 인사를 나누게 돼. “서강대 나오셨다면서요? 제 동생도 거기 지금 다녀요” 하면서 반가워하며 “우리 집엔 형제가 많은데 그 동생이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게 된답니다”라고 뿌듯해하던 누나였지. 얼마 후 정 PD는 학살자 처단을 외치며 죽어갔던 서강대 후배의 소식과 더불어 그 후배 김의기가 여직원의 동생이었음을 듣게 됐지. 누나의 말에 따르면 김의기는 누구보다 착한 젊은이였어. “의기는 2월에 졸업한다고 했어요. 2월이 돼서도 졸업을 안 하기에 왜냐고 물으니까, 저보다 가난한 친구에게 등록금을 주어서 자기는 가을에 하게 됐다고 하더군요(누나 김주숙의 증언).”

“우째 이럴 수가 있노 세상 사람들아”

그 착하고 정의감 넘치는 청년에게 1980년 5월은 견딜 수 없는 갑갑함이었고 찢어버리고 싶은 재갈이었어. 어떻게 이런 미친 세상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술 마시고 연애하고 시시덕거리며 살 수 있는 것인가. 우직한 청년 김의기는 그 괴리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의 유서를 다시 읽어보렴. 그의 속내가 그대로 울려 나온다. “이건 아니잖아. 우예 이럴 수가 있노 말이다.”

전두환 정권의 암담함을 알리며 자결한 김의기 열사와 황보영국(아래) 열사.
김의기가 떠난 지 7년이 흘렀다. 그러나 1987년에도 여전히 광주를 이해하는 사람들보다는 전연 깜깜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어. 최근 100만 관객을 넘긴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에 보면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감시하던 정보기관 요원이 이런 인터뷰를 한다. 어느 날 노무현 변호사가 그에게 광주항쟁 관련 비디오를 건넸어. “당신도 한번 봐야 한다.” 처음에는 ‘이런 거 주면 당신 잡아가야 한다’고 뻗대던 정보기관 요원이었지만 호기심이 나서 문 잠그고 비디오를 돌려본 그는 노무현 변호사를 찾아와 치를 떨었다고 해. “백주대낮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노무현 변호사가 활약하던 도시 부산에서도 1987년 4월 광주항쟁 사진전이 열렸어. 당시 사진전 개최에 관여했던 박승원 신부의 말을 들어보자. “시장 아주머니들이 와서 관람 시간을 연장해달라는 거예요. 와서 보고는 광주 영정들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정보기관 요원부터 시장 아주머니에 이르기까지 광주의 진실은 머리를 쇠몽둥이로 두들기는 충격이었던 거야.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성실한 기독교인 청년 황보영국에게도 그랬어. 역시 부산 출신인 박종철 학생 추모 집회에 참석했다가 며칠 유치장에 머문 걸 제외하면 별다른 운동권 활동 이력도 없었던 이 부산 청년은 광주항쟁 7주년을 하루 앞둔 1987년 5월17일, 부산상고 앞 대로에서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다. 사람 모양의 불덩이가 되어서도 그는 안간힘을 쓰고 달리며 외쳤다.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아마 그 역시 생전에 여러 번 경상도 사투리로 한탄했을 거야. “우째 이럴 수가 있노 세상 사람들아.” 끝내 그가 숨을 거두자 경찰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등을 떠밀었다. “빨리 화장해버리시오.” 불타 죽은 그의 시신은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단 하루 만에 불구덩이로 들어가야 했어. 대학생도 아니고 무슨 노동조합원도 아니었던 황보영국의 죽음은 그때도, 그 이후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어. 그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된 건 무려 14년이 지난 2001년이었다. 하지만 문익환 목사는 그를 기억했고 역사적인 연설 속에서 황보영국 이름 넉 자를 영원히 살려놓게 돼.

혹여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아빠는 그들이 스스로 몸에 불을 댕기거나 죽음으로 항거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일에는 찬성하지 않아. ‘열사(烈士)’라는 호칭에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지만 또 다른 한쪽으로 그 호칭이 마냥 달갑지 않은 것은 그들의 ‘죽음’에 방점이 찍힌 표현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야. (아빠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만)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건, 그들의 죽음보다는 그들의 삶 때문이라고 생각해. 최선을 다해 살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위 사람들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하려고 했던 그들의 치열한 삶이 우리가 겸손히 올려다보아야 할 역사의 별빛이 되는 이유일 거야. 1980년 5월 이후 7년, 광주라는 이름의 십자가와 수백명 광주 영령의 한 맺힌 가시관을 쓰고서 대한민국은 한발 한발 힘겨운 걸음을 옮겨왔어. 6월항쟁이라는 영광의 언덕을 향해서 말이야. 그 언덕 위에서 문익환 목사는 지나온 길에 핏방울로 떨어졌으나 꽃으로 피어났던 이름들을 불렀다. 목숨 바쳐 광주를 부르짖었던 두 살 차이 경상도 청년, 김의기 학생과 노동자 황보영국은 나란히 서서 그 호명(呼名)을 들었겠지. 경상도 말로 “됐나?” “됐다!” “기분 좋나?” “기분 좋다!”를 주고받으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