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촛불'은 MB때 '촛불'을 복기해야 한다
시민혁명의 영구 혁명화
희망찬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나라가 온갖 정치적 추행과 부패로 인해 끝없이 나락으로만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 와중에 지난 겨울 위대한 촛불 혁명이 시작되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선 시민들이 참담했던 절망의 끝에서 그 정치적 악행의 주범인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역사적 성취를 이뤄낸 지금, 이제는 오히려 나라를 완전히 새롭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이 온 나라를 감싸고 있다.
단순히 그 과정에 참여한 시민들의 수가 많아서만은 아니다. 앞으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어서만도 아니다. 헌법재판소의 국회 결의안 인용부터 완전히 확실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과열된 대권 경쟁이 지난 87년처럼 '죽 쒀서 개 주는' 결과를 낳지 말라는 보장도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분명한 근거를 가진다. 그것은 바로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공화국에 대한 수많은 시민들의 합일된 의지와 그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을 갖고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 다름 아니라 광장의 요구에 응답하는 제도권 정치라는 놀라운 수단 말이다.
어느 언론은 이를 두고 시민들이 '한 손에는 촛불, 한 손에는 정치'를 들었다고 표현했다. 또 어떤 이는 광장과 정치가 만났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촛불이 정치 혐오를 넘어서 드디어 정치를 도구로 삼았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미 촛불을 드는 행위 자체가 정치이며, 광장에는 광장 나름의 정치 문법이 작동하고 있는 바, 나는 이를 시민 정치와 의회 정치의 만남이라고 표현하련다. 어쨌거나 작년 말 우리는 바로 그런 만남이라는 스스로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너무도 생생하게 확인했고, 그것만으로도 우리 시민들은 전 세계에 다른 유례가 없을 역사적 성취를 이루어내었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힘으로 민주주의가 생생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희망의 근거다.
물론 앞으로 넘어야 할 난관은 차고 넘친다. 박근혜 탄핵이라는 목적을 위해 하나로 뭉치기는 했지만, 그 수많은 촛불 시민들은 여러 현안들에 대해 다양한 이견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당장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는지, 개헌을 해야 하는지, 한다면 대선 전에 해야 하는지, 어떤 권력구조를 택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들부터 서로 다른 생각의 날선 결들이 부딪히고 있다. 정계 개편을 통한 정권 재창출이라는 기득권 세력의 수동 혁명의 시도도 전혀 포기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촛불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단순히 대통령 한 명을 권좌에서 쫓아내는 데서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적폐들을 제거하고,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만들어 사회 전체의 근본적 변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민주공화국이라고는 하지만 툭하면 시민들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는가 하면, 정경유착이 자행되어도 또 극심한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속절없이 진행되어도 최소한의 정치적 개입조차 봉쇄당하는 사이비 민주주의 체제가 이 땅에서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에 전혀 걸맞지 않은 우리의 '앙시앙 레짐'은 철저히 혁파되어야 하고,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세우려는 시민들의 열망은 어떤 경우에도 실현되어야 한다. 이것은 현실적 가능성이기 이전에 너무도 절박한 역사적 당위다. 그리고 적어도 이 경우 '해야만 하는 것은 곧 할 수 있는 것이다.'(칸트)
그러기 위해서는 촛불 혁명은 말하자면 영구 혁명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앞으로도 시민들이 기약도 없이 주말마다 광장으로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투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것은 촛불이 이제 일상화되고, 조직화되며,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촛불이 무정형의 얼굴 없는 익명의 대중들의 목소리로만 남지 않게끔 그것에 일정한 체계를 부여해서 의회의 정치를 좀 더 잘 시민 권력의 도구로 만들어야 하며, 또 그러한 시민적 주권성이 좀 더 확실하게 법적, 제도적 기반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시민 정치와 의회 정치의 아름다운 만남이 새로운 형태로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또 정당들은 정당들대로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자기 점검과 혁신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이에 대해 짧게 몇 마디 해 두려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반(反)-정치의 정치'를 넘어
나로서는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광장에 나왔던 시민들이 자주 일정한 정치 혐오의 경향을 보여 왔다는 일각의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지난 2008년의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가 그 열정과 강도와 지속성에 비해 아주 미미한 성과만 거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당시의 촛불이 오로지 반정치적 지향만을 드러냈기에 그랬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촛불 운동은 기성의 정당이나 조직 운동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정치 공간의 확장을 보여주었다고 해야 한다. 당시의 여권이 연이은 대선과 총선에서 압승했다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정치 지형과 별다른 정치적 계기가 없었던 탓이었지, 촛불이 정치와의 결합 자체를 아예 거부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과정에서 불붙었던 시민 정치의 새로운 지향을 담아낼 제도권 정치의 틀과 내용이 마련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의 시민 정치는 말하자면 반-정치의 정치였다. 낡은 이념과 지역구도 따위에 안주하는 제도권 정치에 대한 명백한 혐오와 거부의 태도를 보였지만, 시민들의 일상적 삶과 대중들의 평범한 집단적 상식과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었다. 그때 촛불은 수구 기득권 세력에게 무력하게 정권과 의회 권력 모두를 내주긴 했어도 그들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를 했고, 야당들에게는 시민의 힘을 믿고 제대로 된 견제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물론 시민 정치는 그 엄청난 촛불대집회들을 통해서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고, MB 정권의 악정을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했다. 나아가 그 정권을 선거에서 정치적으로 징치하지도 못했고 결국 박근혜라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확실히 얼마간의 패착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촛불은 자기 조직화에 실패했다. 기성 정당이나 그동안의 조직 운동에 대한 반감이 컸던 탓이라고 이야기되지만,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가진 촛불 대중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을 반-정치라는 틀 안에 다소 소극적으로 가두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그 틀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없었다고는 보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시도는 결국 제도권 정치 안으로 일방적으로 흡수되어 버린 것 같다. MB 정권 말기 '민주통합당'의 탄생 과정이나 이른바 '안철수 현상'은 그 명백한 증거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이런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가령, 벌써부터 조짐이 보이지만, 우리 촛불 시민들이 특정 후보에 대한 맹목적 팬덤을 형성한 채 자신과는 다른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비난하고 혐오하는 대열에 설 때, 그 잘못은 반복되고 있다. 촛불이 특정 후보의 캠프로 들어가 소멸되거나 시민 정치가 특정 후보를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반대가 맞다. 어떤 경우에도 촛불의 주권성과 주도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후보들이 촛불의 열망에 반응하게 하고 그 정치적 도구가 되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결선투표를 매개로 하든 어떤 식으로든 연합정치의 틀을 만들어 가능하다면 차기 정부를 야권 전체의 공동 정부로 만들고 그 정부가 촛불 혁명을 완수하도록 해야 한다. 혁명이 지금 기로에 서 있다.(다음 편에 계속)
프랜차이즈 정당은 필요 없다
야당들의 적폐부터 청산해야
촛불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야당들도, 아니 야당들부터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문제는 언제나 제도권 의회정치고 정당정치다.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발전시키려 해 왔던 우리 현대사의 역사적 고비마다 민주진보 진영의 정당들, 특히 민주당 계열의 '리버럴 정당'들의 지리멸렬함이 가장 큰 문젯거리였다. 그 동안 우리 리버럴 정치인들은 늘 분열과 무능의 늪에 빠져 역사적 죄를 저지르곤 했더랬다. 저 멀리 4.19 이후에도 그랬지만, 1987년에도 그랬고 지난 2012년의 정권 교체기에도 그랬다. 이번이라고 다를 수 있을까?
당연히 미덥지 못하다. 이미 민주당과 국민의 당이 나뉘어져 있는데, 여기 저기 다시 내부 분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심지어 여권의 비박 세력을 포함하여 새로운 정치 지대를 형성해 보겠다는 움직임도 있다. 이번의 촛불 혁명 과정에서도 민주당과 국민의 당은 좌고우면하느라 제 갈 길을 잃을 때가 많았다. 그나마 우리가 희망의 끈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은 이 당들이 머뭇거리다가도 결국 촛불 시민들의 의지에 굴복해 그것을 실현하는 정치적 도구이기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한국 리버럴 정당들은 이 과정에서 배워야 한다.
사실 그 동안 한국 리버럴 정당들은 그 어떤 뚜렷한 이념도 가치도 공유하지 못한 채 그저 동일한 상호만 공유하는 정치적 자영업자들의 프랜차이즈식 정당이기를 그만두지 못했다. 그 당들은 그 동안 '저항적'이라는 명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퇴행적일 수밖에 없는 지역주의를 적극적 기반으로 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시민들의 수구 기득권 세력에 대한 혐오를 소극적 기반으로 하여 겨우 연명해 왔을 뿐이다. 내 생각에 촛불 혁명은 한국 리버럴 정당들의 이런 고질적인 병폐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지 그 길을 보여주었다.
이번 촛불 혁명의 과정에서 어떤 반면교사로서 분명해진 진실이 하나 있다. 그 동안 자주 그 반대가 옳다고 주장되어 왔지만, 우리 리버럴 정당들의 무능함은 기본적으로 바로 시민정치와 거리를 두고 시민이라는 자신의 참된 토대를 애써 무시해 온 데서 비롯한다는 점 말이다. 그 당들은 이제 지금껏 곧잘 망각해 왔던,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한 번도 깨달은 적도 없던 자신들의 궁극적 존재 이유를 뒤늦게나마 자각하길 바란다.
교훈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에서 리버럴 정당들은 시민사회에서 발원하고 정의와 연대의 문법을 에너지원으로 하는 시민적 권력의 요청에 충실할 때에만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많은 리버럴 정치인들은 그 동안 너무 자주 그 시민적 권력의 요청을 망각한 채, 시민들의 의지와 열망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특권만 챙기는 정치계급이 되려고 했었다. 어쩌다가 잠시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광장으로부터 벗어나려고만 했었다. 시민사회의 깊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외침을 애써 무시한 채 법과 제도의 논리만을 앞세우며 정치적 특권만 누리려 해왔다. 이 적폐부터 청산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포퓰리즘이 아닌 씨비씨즘(civicism)
무슨 거창한 이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정치적 지향의 좌우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시민사회가 곳곳에서 내는 신음 소리들에 귀 기울이고 그 아픔들에 공감하며 만연한 불의에 맞서 시민들과 함께 분노하고 싸우겠다는 지향과 그에 따른 실천만 있으면 된다. 지난 4.13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민주당이나 국민의 당이 미더워서 그 많은 의석을 안겨준 것이 아니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세력이라는 더 현저한 불의부터 응징해야한다는 생각에 그 당들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 참된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최근 민주당이 지지율 40%를 넘나들게 된 것도 그 불의를 혁파해야 한다는 광장의 절대 명령에 이 당이 우왕좌왕 하다가도 결국 앞장 서 굴복하는 모습을 보인 탓이라고 해야 한다. 시민들을 따랐더니 시민들이 따르는 것이다. 우리 야당들은 바로 이 교훈을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기본 원칙으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리버럴 정당들은 정당청치를 유권자들이라는 소비자들에게 정책이라는 상품을 팔아 의석이나 정권이라는 이윤을 남기는 행위쯤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이해된 정치판에서는 이미 돈이나 주류 언론과 같은 막강한 사회적 권력 자원에 기대서 경쟁하는 수구 기득권 정치 세력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 스스로를 민주적 시민사회의 정치적 기구(기관)로 이해하면서 거기서 발원하는 시민적 권력, 곧 '힘없는 자들의 권력'에 기대고 또 그것을 강화하는 데 헌신할 수 있는 민주적 정당이 필요하다.
민주적 정당에 있어서 시민은 그 정치적 목적이자 방법이어야 한다. 이 당은 모든 시민의 평등한 존엄성을 보호하고 실현하며 그 시민들을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역능화(empowerment)하는 것을 정치의 궁극적 지향으로 삼아야 한다. 이 당은 또 단순히 자신들의 사적 이익 추구에만 매몰되지 않고 일상에서 그리고 때때로 광장에서 우리 사회 전체의 공동선을 고민하고 사회 정의를 위한 실천에 참여하는 활동적이고 비판적인 시민들과 언제나 함께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시민들을 믿고 의지하며 시민들의 외침에 제대로 응답하는 정당, 그리고 그 정치적 성공을 언제나 시민적 주체의 성장과 시민정치의 강화와 연결시키는 정당, 바로 그런 정당이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민주 정당이다. 우리 야당들은 바로 이런 정당이 되려고 해야 한다.
무슨 포퓰리즘 정당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페팃(P. Pettit)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씨비시즘(civicism)', 곧 '시민주의' 정당이 되라는 이야기다. 이 당은 언제나 보통의 시민들의 요구와 열망에 충실하고 그 시민들과 함께하는 정치를 하되, 포퓰리즘 정당처럼 얄팍한 정치적 배제와 적대를 부추김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노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 공감할 수 있고 그래서 보편화 가능한 시민들의 열망과 지향에 기초하고, 시민들 모두의 평등한 상호성이라는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포용과 평화, 우애와 연대라는 시민적 이상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촛불 혁명이 하루아침에 완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긴 과정을 거치는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운동일 수밖에 없다. 검찰, 사법, 재벌, 언론, 사학 등 숱한 개혁의 대상들이 산적해 있다. 복지나 일자리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숙제도 많다. 더구나 아직도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양식으로 자라잡지도 못했다. 단지 시민사회와 의회, 시민정치와 정당정치, 광장과 국회의 아름다운 만남을 통해서만 그 지난한 과제들이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인 바, 이 교훈에 충실한 새로운 정당 정치를 기대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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