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2017년, '새 대통령'은 정말 다를까? - 막을 수 없는 변화의 기운이 몰려오고 있다

일취월장7 2017. 1. 2. 12:14

2017년, '새 대통령'은 정말 다를까?

[서리풀 논평] '정치적 관심' 끊는 순간, 재앙은 반복된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    
2017.01.02 11:18:47


'서리풀 논평'을 응원하는 모든 독자에게 2017년 새해 인사를 드린다. 혹시 비관하거나 절망할 환경이 더 많더라도, 새해에는 일부러 낙관하고 희망을 품었으면 한다. 우리가 무생물이 아닌 한, 조건이 곧 원인일 수는, 그리하여 기계적 인과관계에 굴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어떤 조건도 받아 안아 스스로 양분과 동력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먼저 지난해 2016년의 의미. '촛불'을 빼고 2016년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지막 날, 광장에 나온 누적 인원이 1천만 명을 넘었다니, 2016년 후반은 전체가 하나로 역사적 사건이다. 그것으로 '구체제'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면, 촛불은 한 세대를 지속한 '1987년 체제'의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싶다.  

다른 것보다는 모종의 낙관을 회복한 것이 큰 의의라 해야 하겠다. 시민의 열망에 대해, 또한 시민이 가진 힘에 대해, 냉소와 회의가 많이 줄었다. 다시 무엇인가를 바라고 요구하는 에너지를 확인했다는 것만으로 이 역사를 가볍게 볼 수 없다.

거기까지, 그리고 그 어떤 열매를 맺을지 모르는 불확실함 가운데에 2017년을 맞는다. 모두가 관심을 가진 탄핵 심판 자체는 오히려 예측할 수 있는 사건이다. 1월이든 3월이든 대통령은 파면될 것이다. 그 어느 잣대로도 다른 경우를 상상하지 못하니, 이건 확실하다.

불확실한 것은 그 이후. 물론,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정치 일정은 기계적으로 확실하다. 막상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불확실성은 이런 것들이다. 어떤 대통령을 어떻게 뽑을 수 있을까? 새 대통령은 정말 다를까? 그리하여 다음 시대와 사회는?

먼저 짚어야 할 한 가지는 대통령 선거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질문이다. 좋고 옳은 대통령이 중요한 이유는 열 가지도 넘게 꼽을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하나는 그가, 그 어떤 다른 것도 아닌, 바로 '나'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노인기초연금을 올릴 수 있으며 국민연금 보험료도 손볼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의 혜택 범위(급여)와 진료비(수가)를 바꾸거나 본인부담을 낮추는 일도 결국 그의 몫이다. 성과연봉제를 강행할지, 국공립 보육시설을 늘릴 것인지, 장애인 부양의무자 규정을 폐지할지, 이런 논란에서도 어떤 대통령인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한 가지 잊지 말 일은 이때 대통령은 개인이자 집단이며, 또한 정신이기도 하다는 것.  

그러니, 2017년 첫째 할 일은 끈질기게 '정치적 관심'을 기르고 유지하는 것이다. 대통령을 뽑는 일은 나와 가족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일상과 생활의 과제와 직결된다. 나의 이해가 걸렸으니 당연히 끝까지 보고 살피며 말을 걸어야 한다.

대통령 선거가 형식적으로는 제도정치의 역할인 것이 분명하다. 정당을 중심으로 후보를 뽑고 선거를 치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오늘, 정당이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중구난방으로 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도 바로 제도정치다. 

제도정치와 시민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제도정치와 정당은 시민(주권자, 유권자)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대의제를 핑계로 끊임없이 시민의 직접 행동을 경계하고 배제하려 한다. 정치가 자기 기반을 소외시키려는 자기 배반이자 모순이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정당과 정치인은 "이제 우리에게 맡겨 달라"고 말했다. 점점 더 자주 이 말을 듣게 되리라 예상한다.

거듭 강조한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할 테니 본분과 본업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경계해야 한다. 역할을 따지는 것은 곧 시민을 배제하겠다는 강력한 시그널이 아닌가. 제도정치가 안심하는 그런 참여, 구경꾼이나 훈수꾼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 2017년 우리가 관심을 두는 방법이 되어야 한다.  

단순한(?) 관심을 넘어 어떤 대통령 어떤 정권인지를 묻는 것이 다음 할 일이다. 2016년 모든 시민이 구체제를 청산하는 데에 동의했다면, 2017년은 어떤 대통령과 정권인지, 무슨 일을 하는 정부여야 하는지, 시민의 뜻을 모아야 한다.  

낡고 악한 것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하지만, 2017년은 새롭고 마땅한 것을 요구하고 압박하고 만드는 때다. 다음 정부에서 정치, 남북관계, 경제, 언론, 검찰, 노동, 복지, 교육, 보건은 어때야 하는가? 더 구체적인 것으로, 청년 일자리와 노인 빈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제도정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선거 국면에 들어서면 공약으로 제시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천만에, 이번에도 공약은 기술과 정책을 두루 망라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말하고 제시하여 사회적 동의와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면, 그 모든 약속은 허무하다!
 
시민이 다음 정부를 생각하고 말하며 요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시민이 권력의 주체라면 각자 미래를 꿈꾸고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계획과 구상에서 나를 배제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잘 알든 모르든 큰 계획이 있는 없든, 나도 정치 공동체에 참가하고 의견을 내는 것이 '좋음'이고 또한 '옳음'이다.  

사회체제 차원에서도 이제 시민의 힘에 기대야 한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 시스템이 어때야 하는지, 그들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까? 대통령 선거 공약에 오죽 잘 정리되어 있으려고? 아니다. 어느 경제 전문가가 한국 경제의 미래상을 제시하던가? 어느 사회정책 전문가가 저출산 고령화 대책에 그렇게 전문적이던가? 

이른바 전문가는 단순 기술자가 된 지 오래, 미래 비전과 사회적 지향이 정립된 이후에야 기술과 방법론을 말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들은 시민과 주권자에 봉사해야 마땅하나, 그나 우리나 기술과 방법을 버릇처럼 비전과 지향으로 혼동한다.  

다음 정부의 새로움은 새로운 약속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이고, 그런 점에서 정책이 아니라 정치다. 시민과 주권자가 정치적 '주인 됨'을 회복해야 다음 정부가 어떤 시대적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지,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시민이 말하고, '그들'이 들어야 한다.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다. 관심을 가지고 요구를 말하는 것은 행동이고 실천이 아닌가. 혼자 동떨어져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모이고 뭉치고 집단이 되어야 한다. 조직과 집합적 행동이 힘과 임팩트를 키울 수 있다.  

2017년은 새로운 모임이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던 조직은 더 커지기를 바란다. 꼭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른바 '약한 결속(weak ties)'이 너른 기반을 가지면 때로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한 가지 예.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은 미국에서 인종차별 철폐 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유명하지만(☞관련 기사 바로 가기), 그의 작은 행동이 큰 사회적 운동으로 전화한 데에는 지역사회 연결망, 그중에서도 약한 연결(결속)의 역할이 컸다(The Power of Habit: Why We Do What We Do in Life and Business, 8장, (☞바로 가기)).

어떤 것은 완전히 새롭게, 어떤 것은 옛것을 새롭게, 당분간 우리에게는 많은 연결과 결속의 기회가 있다. 다음 대통령이 어때야 하는지 어디서나 늘 말할 것 아닌가? 이것들이 개인과 사회의 이익을 민주적이면서 동시에 공공적으로 보호하는 통로와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관심을 시작하고 지속하는 것, 삶과 생활에 기초하여 새로움을 말하고 요구하는 것, 그리고 통로와 매개를 만들고 조직하는 것, 이 모두는 멀리 보고 이 시대에 녹아들어야 할 일이다. 다만 한 가지, 탄핵과 대통령 선거를 기회라고 생각하면, 어떤 것은 마냥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그리고 읽지 못하는 분들에게도) 2017년이 행복과 보람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병신년(丙申年)을 보내며…"천민 자본주의 끝내자"

[김성훈 칼럼] 한비자(韓非子)의 나라가 망할 징후들을 극복하려면…
김성훈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 대표      
2017.01.01 00:36:07


병신년(丙申年)은 가히 '난세(亂世)'라 불러 부족함이 없는 한 해이었다. 그 마지막 날 12월 31일 광화문 광장에 모인 촛불 시위대 말석에 참가하여 박근혜 치하의 국정 문란과 최순실 일당의 국정 농단 사태를 규탄하던 중 어마지두에 새해 정유년(丁酉年)을 맞이한 소감은 착잡하였다. 박근혜 통치 하의 4년을 되돌아 볼 때 이미 해마다 곳곳에 나라가 망할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갑오년의 304명 세월호 수장(水葬), 을미년의 옥시싹싹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1000여 명 살상 사건, 병신년의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의 국정 농단 사태, 이외에도 2014년 갑오년 코오롱의 경주 마우나 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사고(138명의 사상자)와 장성 효사랑 요양병원 화재사고(28명의 사상자), 메르스 사태 등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애먼 죽음을 맞았고 수천 수백만 민초들의 심장을 쥐어뜯어 엄동설한 심야임에도 촛불을 들고 광장을 헤매게 하였다.  

ⓒ프레시안(최형락)


한비자(韓非子)의 "나라가 망할 때 나타나는 징후"가 바로 지금 이 나라에서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 전 중국 진시황 치세하의 소국 한(韓)나라의 비(非)라는 법사상가가 황제에게 제왕학(帝王學)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나라가 망하는 징조 47가지(亡徵篇)'를 바쳤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백성이 주인인 민주(民主)주의 체제가 아니고 왕이 곧 나라인 군주(君主)주의 체제라, 곧이곧대로 적용하기 곤란한 대목도 발견되지만 그 원칙, 그 징후는 여전히 유효하다. 동서고금의 정치지도자 중에 그 이치를 애지중지 학습하고 행여 국정을 망쳐 나라를 망하지 않게 하려고 노심초사한 군왕도 부지기수였다. 훌륭한 구국치세의 대안서로 그리고 도덕윤리와 양심의 수양서로서 공맹의 유가(儒家)적 가르침이라든가 불가(佛家)의 대자대비(大慈大悲)사상, 기독(Jesus Christ)의 구속(救贖, redemption) 사상이 모두 죄악과 비참함으로부터 인류를 건져내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가르침이다.

지면의 제약으로 한비자의 '나라가 망하는 징조 47가지'를 일일이 해설할 수는 없으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 치하의 작금의 사태는 그 전임 이명박 시대의 국정 문란 사태와 겹쳐 나라가 온통 한비자의 망할 징조에 꽉 차 있는 듯하다. 흔히들 대통령과 그 지도부 및 부화세력의 탐욕과 무위·무능·무원칙 그리고 비리와 부정부패 행위는 지금의 이 나라가 다행스럽게도 헌정(憲政)체제라 5년의 단임 임기제로서 그 총수를 합법적으로 갈아 치울 수 있어서 무너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라의 진짜 주인인 풀뿌리 국민(民草)들이 깨어 있어 희망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자기네 기득권과 탐욕을 박근혜 정권의 운명과 동일시하려는 무조건적인 '박사모'들과 나라가 망하고도 호의호식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여기저기 산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나라의 비극이다. 하기야 국치(國恥) 36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렸던 이완용 매국노들에겐 나라가 망하든 말든, 망했건 말건, 자기들 가족과 친지들만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태평성대요 행복이라 여기는 족속들이 있었으니 한 때는 '민족소멸론(萬世一家大和族)'이 횡행하기도 했잖은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명박근혜' 8년간 한비자의 망징들이 고스란히 드러난 시대임에도 지금 우리나라 민초들은 깨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망징(亡徵, 나라 망친 징후)들 

일찍이 공자께서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는 근본 기둥으로 믿음(신뢰)과 식량 그리고 군대, 셋을 들면서 그중에 으뜸은 백성들의 믿음이요, 그다음이 식량주권과 군대라고 순서를 매겼다. 무역자유화가 된 현시점이지만 그 옳고 그름을 다시 한 번 겸손하게 물어보자.

첫째, 박근혜 씨가 나는 "순수하게"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나라를 위해 나라가 번성하는 방도라고 믿고 재벌들에게 수백억 원을 거둬들였다고 말했을 때 '그렇고 말고요'라고 동의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장차관 임명과 대일, 대북 외교문서에 최순실 씨의 가필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위안부 범죄 문제를 순수하게 눈감아주고, 개성공단도 그냥 폐쇄하고, 우병우 김종 일당도 순수하게 임명했을까? 박근혜 씨의 순수성을 그대로 믿을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둘째, 우리나라에 식량주권(Food Sovereignty)이 지금 존재하는가. OECD 국가 중 식량자급율(23.6%)이 최하위인 국가이며 GMO(유전자조작 농산물) 식품과 가공품 수입이 제1위인 나라, 미국 다음으로 1인당 GMO 식품 소비량이 높은 나라, 유방암, 자폐증, 치매, 불임증 유병률이 두 번째로 높은 국가, 식품완전표시제를 정부가 앞장서 틀어막는 국가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이쯤 해서 아직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나마 깨어 있는 민초들 덕분이다. 

셋째, 눈만 떴다 하면 들리는, 천문학적인 방산비리 사건, 군대 사고, GMO 식품 일등 소비의 국군과 어린이 단체급식, 세월호가 가라앉아도 가서 구하지 못한 막강 해군의 구조함 통영호의 침묵, 대통령 선거에 동원된 군인들의 댓글 행위, 이 모든 엄연한 사실들을 박근혜 정권은 없었던 일로 치부한다.  

공자님께서 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보시면 그 제자 자공에게 말한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그 나라는 설 수 없다(民無信不位)"라는 말씀만 되풀이하실 것 같다. 게다가 4대강의 녹조라떼와 이끼벌레가 녹색혁명이라고 우기는 전직 대통령 앞에선 차마 할 말을 잊으실지 모른다.

천민(賤民)자본주의를 끝내야 

"피눈물이 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다"라는 박근혜 씨에게 들려줄 충고가 하나 있다. 아무리 자기 아버지 박정희가 그립다고 해서 자기 주변에 죽을 날이 살아갈 날보다 길지 않은 노욕(老慾)의 나이 7순 8순 노춘(老春)들의 득세가 너무 심하다는 말이다. 이들이 그동안 쌓아온 재능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살아도 남은 인생이 바쁜데 이래저래 사적 부역에 동원되어 노년을 먹칠해야 하는가. 그 피해, 그 잘못들이 우리 사회 민생들을 더욱 고달프게 하고 병들게 했다면 그 폐해를 누가 갚아야 하는가. 고스란히 민생의 몫으로 돌아올 뿐이다. 그들의 '박근혜 찬양'이 드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고, 그들의 자축 파티장 촛대가 휘황찬란하게 타오르는 곳에 백성들의 피눈물이 고스란히 흘러내린다.(歌聲高處 民聲高, 燭漏落時 民漏落). 박근혜 씨는 피눈물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한 마디로 나라 경영 방식을 박정희 시절부터 수출주도의 고속성장체제로 산업화 정책을 몰아붙이는 과정에서 삼성 등 재벌 우선주의, 매판자본들의 성장 제일주의, 민주주의 대신 대기업천민자본주의(Corporatocracy)를 앞세워 왔던 과정에서 '돈이 최고'라는 맘몬주의가 우리 정치경제 사회 곳곳에 뿌리내렸고 그것이 지금 서민들의 피눈물 나는 삶이 되었다. 정치가와 대자본이 유착하는 곳에 과학자들은 돈을 위해 도덕과 양심을 내팽개치고, 교수 학자들은 영혼을 팔았다. 종교집단도 십자가 위에 세종대왕 표와 신사임당 표를 덩달아 붙였다. 예수, 부처님, 공자는 언제나 세종대왕 표나 신사임당 표의 뒷자리로 물러나야했다. 


이른바 천민자본주의 시대가 60여 년 넘게 이 사회 전반의 의식(意識)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민생은 부익부 빈익빈의 피눈물 쏟는 구도 속에 사회 양극화에 매몰되고 환경생태계는 파괴되었으며 종(種)의 다양성은 사라진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 찾아왔다. 천민자본주의가 '끝'나지 않으면 기업도, 국가도, 대통령과 정치꾼들도 '쫑(終)'이 나는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이제 거시(巨視, Macro)가 아닌 미시(微視 Micro)적 접근이 필요한 시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가족들의 식사비용과 생활비를 자신의 월급에서 지급하는 원칙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캐나다의 젊은 총리 트뤼도는 지난 한해 자기 연봉 34만 달러(CAD) 중에서 세 자녀 양육비(2명의 고용보모비)와 가족 생활비, 아홉 차례 휴가 시 전용비행기 사용비, 심지어 한 달 83달러씩 내는 인터넷과 케이블 이용비를 국고에 반납하였다. 도합, 연봉의 10% 이상을 반납한 것이다. 이는 일찍이 EU 스위스 등 선진국가들의 공직자들이 불문율로 행하고 있는 관행이다.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일부터 솔선하여 챙기는 것이 민생·민권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작지만 그냥 스쳐 지나칠 수 없는 기본적인 미시적인 민생문제를 우리나라에 몇 가지만 풀어보자. 예컨대,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관저에서 키우는 대여섯 마리 진돗개 사육비를 누가 부담하는가? 혼밥·혼술을 즐기는 사적인 그의 식사 생활비는 어디서 지출되고 있는가? 국민들을 "개, 돼지"라고 총칭하는 장차관과 고위 관료들의 골프 요금, 점심 식사 등 사적인 경비지출은 누가 부담하는가. 대부분 국민의 혈세로 충당하거나 국고에서 지출되고 있지 않는가? 범위를 확대하여 대기업체 임원들의 각종 사적인 경비지출은 어디서 감당하는지 묻지 마라 갑자생이다.정치인과 기업인의 공적 업무와 사적 업무가 구분이 어렵다고 변명하려 들지 마라. 문제는 통치자들의 철학이요 양심의 문제이지 미시적인 구분의 문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풀뿌리 민생들의 안전한 먹을거리와 그 뒷바라지가 더 중요하냐? 아니면 기업들의 이윤과 수출입 문제가 더 중요하냐? 기업체의 전기료를 낮춰주기 위해 일반 가정의 전기료를 더 많이 올리는 정책이 민초들의 민생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이를 일컬어 현대적 경영방법이라고 합리화할진대, 그게 국가인가. 박정희 식 수출주 도의 산업화 정책이 '이명박근혜'로 전이되어 가족농 주도의 우리나라 농어업을 황폐시킨 오늘날의 천민자본주의야말로 단두대에 올려야 할 암적인 존재들이 아닌가. 우리 주변에 산적해 있는 이들 매크로적 갈등 문제를 이제 좀 눈높이를 낮춰 미시적 민생 위주의 구조로 전환할 진정한 사회개혁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돼야 할 때이다.  

백성이 살아야 궁극적으로 나라가 살고 정부와 대기업도 살 것이 아닌가? 노동자 농민 서민 자영업자들이 대기업과 함께 두루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 진정한 보수개혁의 종착지가 아니던가. 그러기 위해선 배려와 나눔과 협동의 문화, 대자연을 품은 따뜻한 사회공동체 세상이 퍼져야 가능하다. 그것은 미시적으로 접근할 때 이를 수 있는 길이다.

(이 글은 2017년 1월 5일 자 <한국농정신문> '김성훈의 농사직썰'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송박' 이후, '영신'은 가능할까?

[사회 책임 혁명] "박근혜 없는 미래로는 부족하다"
안치용 한국CSR 연구소장    
2016.12.31 20:47:15


2016년 병신년을 보내고 2017년 정유년을 맞는 사람들의 개인적 감회는 각양각색이겠지만, 국가적 현안에 대해서는 다르지 않지 싶다. 현재 탄핵 심판을 받느라 청와대에 칩거 중인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주말마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드는 '광장인'이든, 시대착오적인 '박사모'이든 누구에게나 관심사는 '박근혜'다.

'박근혜'와 관련한 쟁점은 단순하다. 그가 스스로 물러날 기미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 현시점에서,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을 얼마나 신속하게 처리하느냐와, 소추안 인용으로 탄핵 심판의 결론이 나면 박근혜 씨가 어느 수위의 사법 심판을 받게 될 것인가 정도다. 

헌법재판소 박한철 소장이 신년사에서 "(탄핵 심판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하겠다"고 밝힌 만큼 박근혜 씨의 퇴진 시기는 박근혜 측의 지연작전에도 불구하고 앞당겨질 가능성이 커졌다. 대통령이 아닌 개인 박근혜 씨에 대한 사법 처리는 이후 정치적 상황과 국민 여론에 의거해 시간을 두고 결정되겠지만, 구속을 모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헌재 박 소장이 신년사에서 "탄핵심판 심리가 우리 헌정 질서에서 갖는 중차대한 의미를 잘 알고 있으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고 "헌재는 오직 헌법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한 법 절차에 따라 사안을 철저히 심사해 공정하고 신속하게 결론을 내리겠다"고 한 만큼 탄핵 기각은 가능하지 않은 시나리오로 보인다. "국민의 믿음에 부응해 헌법재판소가 맡은 역할을 책임 있게 수행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박 소장의 언급은 사실상 탄핵 인용을 예고한 셈이다. (그러한 예상에도 불구하고 만약 탄핵 기각 결정이 내려진다면?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 나라는 해방 후 정국 상황에 필적하는 끔찍한 혼란에 직면하여 그 향배를 누구도 짐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칭 진보라는 어떤 모험주의자들은 이 같은 사태를 학수고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2016년 마지막 날 '박근혜 퇴진 10차 촛불집회' 모습.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송구영신(送舊迎新)에 빗댄 '송박(送朴)'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송박' 이후에 '영신'이 가능할까는 불확실하다. '영신'을 논하기에 앞서 박근혜 정권의 공과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창조경제' 운운한 박근혜 씨의 공약이 실현된 부문을 들자면 유일하게 성형 산업이 있겠다. 선출직 최고위직에 오른 제법 나이 든 인물이 일상적으로 성형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은 박 씨 개인이 근무 시간과 비선을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성형 산업 홍보에 크게 기여했다. (여성 대통령의 미용 시술을 일각에서 사생활과 관련지어 옹호하며 많은 의혹 제기를 간단히 부당한 것으로 치부하나, 이 같은 논의는 문제의 핵심이 미용 시술이 아니라 미용 시술의 방법과 시기임을 일부러 외면한 사악한 옹호이다.)

보톡스와 필러는 물론 무슨 리프팅이니 하는 다양한 성형 시술 방법이 전 국민에게 소개되었고, 대통령을 모델로 한 '시술 전과 후(BEFORE vs. AFTER)'의 비교 효과가 모든 언론을 도배하였으니 천문학적 광고 효과를 거둔 셈이다. 중국 등 해외 언론에도 우리 선진 성형 기술이 대서특필되었다. 박근혜 씨는 분명 국내 성형 산업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로 기억될 것이다.

공과 중에서 이것 말고 공을 더 찾아보자니, 필자가 '박사모'나 '엄마부대' 소속원이 아니어서 그런지 잘 찾아지지 않는다.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역사교과서 국정화, 위안부 관련 한일 외교협상 등 모두 부적절한 의사 결정이었다는 판단이 든다. 물론 사드 배치 등 몇몇 의사 결정에는 지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겠지만, 결정 자체의 정당성을 논하기에 앞서 결정을 도출하는 절차적 정당성이 무너졌기에 정상적인 민주 정부의 의사 결정이라고 강변하기는 어렵다. 혹자는 박근혜 씨를 상징하는 동물과 연관해 조류독감(AI)의 창궐이 박 씨 때문이라고 비난하나, 술자리 유머지 정색할 비판은 아니다.  

이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송박영신'이 되려면 결코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되는 '박근혜'라는 인물을 그저 청와대에서 나오게 하거나 감옥에 보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 '박근혜'라는, 결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을 대통령으로 만든 정치체제를 반성하고 바꾸어야 한다. 총체적 반성과 전면적 혁신이 필요하다. 그 주체는 촛불을 든 '광장인'이 되어야 한다. '박근혜' 한 사람만 나가고 '박근혜'를 만든 그 시스템과 사람들을 그대로 둔다면, 또 다른 '박근혜'가 나타나는 건 시간문제다. 그땐 조류독감이 대규모로 발발한다면 술자리에서 누구 탓으로 돌릴 텐가. 

2016년에 1000만 명이 촛불은 든 이유가 단지 '박근혜' 한 명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라면, 그 많은 광장인의 노고(勞苦)가 너무 초라하다. 광장에서 우리는 현재의 부패와 죄악을 단죄하지만, 동시에 과거를 반성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래를 기획해야 한다. '박근혜' 없는 미래로는 부족하다. '박근혜'를 만들어낸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는 미래이어야 한다. 물론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하여도 2017년에 당장 '송박영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첫걸음은 내딛어야 한다. 앞으로 한 발 내딛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뒷걸음질치게 돼 '송박영박'의 도로(徒勞)로 2017년 연말에 '내가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나' 하며 자괴감을 느끼게 될 게 뻔하지 않은가.  


막을 수 없는 변화의 기운이 몰려오고 있다

김정한 기자 입력 2017.01.02 10:26 댓글 10        

  

[NYT터닝포인트] 통제가 불가능한 힘

[편집자 주] '사실 앞에 겸손한 정통 민영 뉴스통신' 뉴스1이 뉴욕타임스와 함께 펴내는 '뉴욕타임스 터닝포인트 2017'이 발간됐다. '터닝포인트'는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별 전환점마다 콕 짚어 독자 스스로 미래를 판단하고 차분히 대비토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지침서이다. 올해의 주제는 '혼돈과 격변의 시대'이며 부제는 '기로엔 선 자유민주주의와 세계화'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른바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통과 등으로 다사다난했던 2016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해를 조망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201612월 청와대 촛불시위. © 뉴스1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전 세계 유권자들이 투표에서 엘리트들을 향한 분노를 표출했다. 영국은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했고 미국의 유권자들은 정치권의 비주류였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세계화와 자유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기조가 득세하고 있다. 무너지고 있는 전후질서의 공백을 무엇이 채울 것인가?

마침내 긴 파동이 펼쳐졌다. 국내의 분노한 세력 이 감지된 두 국가는 미국과 영국이다. 모두 세계화 수준이 높고, 초강력 자본주의가 발달한 금융 허브들이며, 사회가 개방적인 국가들이란 점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면죄부를 누리는 엘리트, 급변하는 기술, 난민 유입, 불안정한 생존 등을 향한 공포와 좌절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속화되면서 최소한 10년간 계속 구축됐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승리가 사라지고, 광도 없어지고, 확실성도 줄어들었다. 전쟁은 벌어졌지만 승전하는 방법은 아무도 몰랐다. 상처는 곪았다. 대도시와 그 주변부 사이에는 생활은 물론 문화 수준의 격차도 커졌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졌다. 남녀의 성별조차 논쟁거리가 됐다. 온라인 세계에서는 민족 간의 갈등 속에서 진실이 무디어지고 주도권을 잃었다.

일자리도 사라졌다. 불평등은 깊어졌다. 권력자들의 말과 민중들의 삶 사이에는 큰 괴리가 생겼고, 정치에 대한 불신은 커졌다. 유로화, 이라크 전쟁, 대침체 등 대형 실패작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 책임자들은 처벌을 면했다.

시리아는 서구의 무기력함을 새롭게 드러낸 압축판이다. 한마디로 도덕성의 부재다. 피가 흥건한 시리아 내전 속에서 발생한 난민의 거대한 인파가 유럽으로 밀려들었다. 대중선동가들이 바로 이 점을 포착했다.

국인들이 파시즘과 파괴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유럽 대륙의 승리를 상징했던 유럽연합(EU)과 결별하는 쪽에 투표한 것도 바로 난민 유입 때문이었다. 미국인들은 2016118일 도널드 J.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 그는 외국인 공포증을 최대한 활용했다. 1930년대 유럽이 공포심을 팔아 군중을 규합한 행위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이는 큰 위력을 발휘했고 트럼프는 난민 정책에 타협하는 모습을 보던 힐러리 클린턴에게 승리를 거뒀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와 트럼프의 승리가 모두 압도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민주주의는 근소한 차이 때문에도 과격한 변화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 공화당 대선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트럼프를 공평하게 평가하자면, 유권자들의 엄청난 불안감을 직감하고 그것을 직설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냉전종식 후 25년간 번성했던 자유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는 절정기가 지났고, 이제 비자유주의와 권위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지금은 그 동안 사람들의 가슴에 묻혀 있던 편견들이 표출 되는 시기다. 폭력의 기운이 감돌며 불이 붙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날 정치적 비장의 카드는 부패된 제도, 이슬람교 신자들의 이주, 고소득 전문가들의 고압적 합의 등에 맞서 대중을 이끄는 것이다. 트럼프가 이를 입증했고, 2017년에는 프랑스 국민전선의 대표인 마린 르 펜이 대통령선거에서 이를 입증할 가능성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제45대 미국 대통령 당선인. © 뉴욕타임스=뉴스1

군사동맹, 무역 협정, 정치적 통합, 합법적 통치의 틀 등을 포함한 전후질서는 엉성해졌다. 전후질서를 뒷받침했던 미국의 힘도 갑자기 불분명해졌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민주주의를 깨뜨릴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며 트럼프를 가장 크게 자극하고 있다.

이집트와 중동은 물론 도처에 널려 있는 독재자들이 트럼프의 승리에 쾌재를 부르고 있다. 트럼프가 무슨 일을 할지, 그가 내세운 과격한 공약이 얼마나 실행될지 말하기는 시기상조다. 하지만 격변이 뒤따를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성마르고, 성급하고, 부주의한 성격을 드러낼 것이다. 그의 측근들과 권력에 대한 책임감이 얼마나 그를 견제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트럼프는 현재로선 제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인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점점 더 힘을 잃을 것이 다. 발트 3국은 안보가 더 취약해질 것이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푸틴-트럼프 우호조약의 지원을 받아 더욱 권력을 강화할 것이다. 중국과 미국의 무역관계는 긴장이 첨예해질 것이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군사적 긴장도 날카로워질 것이다.

이란과 미국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 및 독일(5P+1) 사이에서 신중하게 조율되었던 핵협상은 와해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중동의 지정학적 위험성은 더 커질 수 있다. 지하드(이슬람 성전주의자)나 여타 단체의 미국 공격을 사전에 막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트럼프는 핵무기를 유휴자산쯤으로 간주할 것으로 보인다.

화석연료 사용이 다시 늘어날 것이다. 기후변화와 싸우고자 도출한 파리 기후변화협약은 약화될 것이다. 6500만 명의 이주민들이 이동 중이며, 이 가운데 3분의 1은 난민이다. 중부 유럽과 도처에서 외국인을 공포의 대상으로 보는 민족주의가 주류가 되면서 이들은 피난처를 찾을 것이고, 이들의 자존감은 희미해질 것이다. 기술이 확고하게 발달하고 인공지능(AI)도 큰 진전을 이룰 것이다. 이는 미국인들에게 제조업 일자리를 되찾아주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을 시험하게 될 것이다.

일부 형태의 고용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자칭 구세주라 할지라도 사라진 고용을 되살리는 마술을 부리지는 못할 것이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이미 죽어버렸다. 지난 수십 년간 등장한 자유무역협정 중 가장 개방적인 북미자유유역협정(NAFTA)을 비롯한 여타 자유무역협정은 없어지거나 존재감이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 모든 것이 대중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것인가? 트럼프는 한동안 뿌려댈 마법가루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중도 지구촌 전체 인구의 일부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민족주의나 권위주의가 전 세계를 뒤흔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저항할 것이다. 거리에서, 법정에서, 언론을 통해서, 미국 헌법의 틀을 짠 사람들이 선동 정치가를 막기 위해 만들어낸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통 해서 맞설 것이다.

그래도 트럼프에게는 막강한 권력, 공화당이 주도하는 의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할 임무가 있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 또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말이다. 자유주의를 수호 하려는 투쟁은 길어질 것이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과 캐나다의 저스틴 트뤼도 같은 사람들이 그러한 노력을 이끌게 될 것이다.

트럼프는 자유세계의 수호자라는 역할을 미국이 바가지를 쓰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를 거래 대상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이 이미 수호자의 역할을 다른 국가에 넘겼을 가능성도 있다.

반이민주의 집단 '오딘의 병사들'. © 뉴욕타임스=뉴스1

서구의 민주주의는 격변의 한가운데 있으며 그 실체도 잘 모른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사실상의 직접 민주주의는 간접 민주주의를 측면에서 공격했다. 인간의 정신에 대한 스마트폰의 여파는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스마트폰의 중독성은 위험한 수준이며 사고의 적이 될 수 있다.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합법성을 확보하고자 원래 자신의 성향도 아닌 공화당에 들어가 당을 장악하고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는 선거운동에서 트위터를 통해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기존의 채널은 소용도 없고 필요도 없었다. 영국과 미국의 주요 정당들은 다시 한 번 그 존재의 타당성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기술 진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외면당한 소외 계층에게 민주주의가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자유주의 사회와 자유 시장경제의 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할 방법을 찾으려면 보다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 사회가 보다 공정해지고, 공평해지며, 다양한 사회 계층에 기회가 골고루 제공될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한다. 독일은 자본주의와 결속력이 잘 균형을 이루고, 노동자에 대한 존중과 고등교육 수혜자와 기술 보유자에 대한 책무가 균형을 이루며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2016년에 나타난 대중의 분노는 저절로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엘리트들의 오만과 무지는 놀라울 정도다. 변화에 투표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겸손해야 하고 생각을 바꿔야 한다. 선동가와 인종 차별주의자에게 굴복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매순간 싸워야 할 것이다. ()진실의 사회에 순응하라는 말도 아니다.

진실은 진보의 핵심이다. 하지만 마땅한 처벌을 내릴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도 잔인하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두렵다.

: 로저 코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저 코언. © 뉴욕타임스=뉴스1

(로저 코언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다. 신간으로는 <기억의 혼들: 유대인 가족의 여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