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잃어버린 10년', 통일은 정치 슬로건이 아니다

일취월장7 2016. 12. 23. 10:35

'잃어버린 10년', 통일은 정치 슬로건이 아니다

[현안진단] 새로운 정부, 이제는 '평화'를 말할 때다
평화재단      
2016.12.22 17:34:07


다시 '잃어버린 10년'

잃어버린 10년! 이명박 정부가 등장했을 당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통일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함축하는 말이었다. 진보 정권 시기 우리는 '남북관계의 일상화 시대'라는 감동을 경험했다. '죽기 전에 한번 꼭 가봤으면' 했던 꿈에 그리던 금강산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갈 수 있었고, 한국전 당시 북한의 주요 남침로였던 파주 인근 비무장지대(DMZ)는 매일 아침 개성공단으로 가는 긴 차량 행렬로 뒤덮였다. 평양에는 남한의 전문가와 활동가, 그리고 관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냉전체제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가슴 벅찬 일들이 현실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동해에서 금강산으로 크루즈 여행선이 출항하는 때 서해에서는 남북한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고, 북한은 화해와 협력을 뒤로하고 핵무기 개발이라는 '금지된 장난'을 시작했다. 북한은 남북관계에서 항상 갑이 되기를 원했고,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보상을 요구했다.  

냉전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남북관계를 열어야 했던 진보 정권은 북한 지도부의 변화를 기다리며 이를 감내했다. 그러나 상당수 국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도발과 협상, 그리고 실리 추구를 반복하는 변하지 않는 남북관계에 대한 피로감은 보수 정권을 탄생케 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 말기 다시 '잃어버린 10년(정확히 9년)'의 화두가 등장하고 있다. 보수 정권 10년 동안 '비핵개방 3000'이라는 야심찬 기획도, '통일대박'이라는 언감생심의 상상도 이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기약 없는 중단 상태에 놓였고 개성공단은 폐쇄되고 말았다. 분주히 오가던 남북한 간의 발길은 끊어진 지 오래고 대화 채널마저 없다.

북한의 도발과 핵무기 개발이 원인이라지만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도발, 그리고 북한 핵 개발의 심화라는 현실은 모두 보수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보수 정권 10년의 대북‧통일 정책을 또 다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문제는 진보 정권 10년간 쌓았던 남북관계의 탑을 보수 정권이 모두 무너뜨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진보 정권이 이룩했던 남북관계의 발전은 보수 정권의 대북‧통일 정책의 자산으로 승계되어야 했으며, 그 바탕 위에서 정책적인 조정이 이루어지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나가야 했다. 진보 정권 10년간 쌓았던 남북관계는 마뜩찮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공이 든 탑이었으며, 탑을 허물 것이 아니라 더 튼튼하게 만들 방도를 찾는 것이 온당했다.

이제 남북관계에서 한국 정부가 가지고 있는 레버리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동포들이 희생당한 함경북도 수해라는 끔찍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강력한 제재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두 번의 '잃어버린 10년', 그렇다면 우리는 20년을 공허하게 허비한 셈인가! 이제 냉철한 성찰과 반성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때다.  

▲ 지난 2000년 6월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해 평양을 찾은 김대중(오른쪽) 대통령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영접하는 모습. ⓒ연합뉴스


트럼프 당선과 새로운 선택 

미국 내부에서조차 충격적이었던 트럼프 후보의 당선을 우연한 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냉전 체제 붕괴 이후 과도기 동안 국제 질서는 자본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를 지향했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과 미국 국력의 한계로 국제질서는 다극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뉴노멀(New Normal)시대의 전개는 미국에게 다른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대변하는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가 미국 국민의 선택을 받은 이유이다.  

트럼프의 등장 이전 이미 영국의 브렉시트(BREXIT)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트럼프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며 미·소 양강 체제의 붕괴 이후 국제질서와 세계 경제 체제 재편 과정이라는 구조적 환경 변화에 대한 미국 국민의 현실적 선택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트럼프의 등장은 한국에게 위기이자 기회이다. 한미관계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접해왔던 한미관계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인식이다. 한국 정부의 대북‧통일 정책은 미국과 보조를 맞추면 되는 일이었으며, 한국의 안보는 혈맹인 미국이 영원히 지켜준다는 믿음에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한미관계가 사랑이 아닌 '계약' 관계라는 점을 간결하고도 명백하게 말해주었다. 가격이 안 맞으면 한미 사이의 계약관계는 파기될 수 있으며, 주한 미군도 언제든 철수할 수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입장이다. 대선 캠페인 기간 트럼프의 발언에 따르면 말이다. 한미관계가 지금까지 굴러온 대로 가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비율에 대한 압력이 증가할 것은 명약관화하며, 미국의 이런저런 요구사항이 늘어날 것도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트럼프의 고립주의 성향과 동맹에 대한 인식이 한국 외교와 안보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의존 일변도의 외교안보 정책이 현재와 같은 세계사 변환기 한국의 국가전략에 적합한지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이며, 국익 평가에 따라서는 우리가 남북관계에 주도권을 쥐고 지정학적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여지도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새 정부가 한미관계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한반도에서 미국이 부담하는 짐을 상당 부분 내려놓기를 원할 것이다. 트럼프의 등장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볼 일이 아니라, 남북관계 발전과 한국의 외교안보력 강화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로 인식할 일이다.  

북핵 문제의 불편한 진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해와 바람의 나그네 옷 벗기기 시합에서 나그네는 결국 햇볕에 의해 스스로 옷을 벗고 만다. 햇볕정책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배경이다. 문제는 북한이라는 나그네는 옷을 벗을 생각이 아예 없다는 점이다.  

지난 20여 년간 햇볕도 바람도 결국 나그네의 옷, 즉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북한은 5차례의 핵실험과 6차례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감행했다. 특히 집권 5년에 불과한 김정은 정권에서 북한 핵미사일 개발과정의 절반 이상이 소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핵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협상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경제·핵 병진노선을 천명하고 있으며, '하늘이 무너져도 핵 포기는 있을 수 없다'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북한은 올해 5월 7차 당 대회에서는 자신들이 핵 보유국이며 책임 있는 행동을 하겠다고 천명했다. 김정은 정권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한국은 물론 미국 내의 전문가와 정책 당국자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또한 5차례의 핵실험으로 북한이 실질적인 핵 능력 국가에 근접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제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 할 때다. 그동안 북핵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협상과 노력은 실패했으며, 한국이 북핵의 실질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북핵 문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안보 위협이며,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제 스스로 인정해야 할 때이다. 북핵 문제가 심화되는 것을 현 단계에서 반드시 막아야 하며, 보다 창의적이고 차분한 방법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현 단계에서 대북제재 국면의 급격한 변화가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제재의 궁극적 목표는 협상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북핵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가능하다면 협상의 채널과 의제를 과감하게 확장하고 개방해야 한다.  

북한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축소는 물론 북한의 요구 사항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도 나그네가 옷을 벗지 않겠다면 장기적인 노력을 통해 김정은 정권이 아닌 북한의 체제와 사회가 옷을 벗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는 북한 정권이 아닌 체제와 주민에 대한 관여의 확대를 의미한다.  

▲ 북한 관영 매체 조선중앙TV는 9일 핵무기연구소 성명을 통해 5차 핵 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밝혔다. ⓒ조선중앙TV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하여 

"통일의 필요성을 지지하는 응답자의 절반 가량이 평화적인 분단체제에도 동의한다"

얼마 전 통일연구원의 연구결과이다. 헌법에 평화통일이 명시되어 있고, 한민족이라는 역사의 기억을 간직한 우리가 통일이라는 담론을 외면할 수 없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적게는 절반, 많게는 80%까지 통일에 대해 긍정적인 응답이 나오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 통일이 반드시 독일식의 단일국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분단체제는 천문학적인 고비용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남북한의 기형적 발전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병리적 현상이다. 분단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는 불편함이다. 그러나 그 통일이라는 말이 갖는 구체적 내용은 평화와 연결시켜 볼 때 매우 다양하다.

한반도의 분단은 한반도 평화의 위기가 지속됨을 의미하며, 통일은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상태를 확보하는 한 단계이자 수단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당면적으로는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을 이루면서 장기적으로는 끊임없이 통일 과정의 단계를 높여나가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진보와 보수, 여야의 합의로 탄생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휴면 상태에서 깨워 제대로 가동시켜야 할 시점이다. 장기간의 분단은 남북한 간의 구조적 이질성과 적대감을 형성했으며, 이는 단시간에 해소되기 어렵다. 김정은 정권의 폭정과 주민들의 회의감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에 남한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 이유이다.  

어느 날 갑자기 김정은 정권이 붕괴하고 그러면 당연히 남한주도의 통일이 실현될 것이라는 가정은 환상에 가깝다. 통일대박론은 대박을 얻는 과정은 무시한 채 최종 결과물만 얘기하고 있어 공허할 수밖에 없다. 

북핵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포함하는 한반도 안보 위기의 해소, 남북한 간의 자유 왕래와 경제 활동의 자유화만으로도 사실상의 통일일 수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화해협력 단계의 완성만으로도 한반도의 평화는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루게 된다. 남북한 간의 평화적인 공존의 장기화는 자연스럽게 북한의 변화와 두 체제의 수렴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제 단기간 내 실현 가능성이 낮은 통일을 정치적 슬로건에서 해방시키고 통일의 필요조건인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해 나가야 할 때다. 평화가 문을 열면 그것은 곧 통일 과정의 시작이다. 시급한 북핵 문제의 관리와 아울러 다양하고도 창의적인 한반도의 평화 상태를 달성하는 대안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2017년 들어설 새 정부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광장의 촛불은 6월항쟁 완결판

2016년 촛불은 위험한 저항권 대신 단호한 비폭력으로 움직였다. 광장은 절묘하게 국회를 압박하면서 탄핵을 이끌어냈다. 집회의 규모, 구성의 다양성, 결집의 지속성에서 완벽했다. 정치적 술수는 설 자리가 없었다.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2016년 12월 23일 금요일 제483호


주권자가 입법부를 시켜 통치자에게 해고 통지를 보냈다. 단호한 탄핵 여론과 광장의 고강도 압박으로 주권자의 뜻을 확인한 국회는, 12월9일 재적 인원 300명 중 234명의 찬성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다. 가결 정족수 200명을 넉넉하게 넘겼다. 박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나올 때까지 직무가 정지되었다. 헌재 재판관 9인 중 6인 이상이 찬성하면 대통령 탄핵이 확정된다.

익숙한 이분법이 무너졌다. ‘광장의 시민과 선출된 국회’ ‘직접민주주의 대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분법으로는 12월9일의 결과물을 설명할 수 없었다. 대통령의 1차 대국민 사과(10월25일)부터 따져 격동의 7주 동안 실제로 벌어진 일은 이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는다. 광장의 시민은 입법부를 집요하게 동원해 행정부 수반에게 책임을 묻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대의제에 대한 직접민주주의의 승리일까? 그보다는 대의제를 놀랍도록 훌륭히 다루어낸 주권자의 승리였다. 2016년 겨울, 한국 민주주의는 1987년 여름의 광장으로부터 또 한 단계 도약했다.

ⓒ시사IN 윤무영
11월26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제5차 촛불집회가 서울 광화문과 세종로 일대에서 열렸다. 이날 주최측 추산 약 190만명이 모였다.

1987년 여름의 광장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직선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최종 해결책으로 보였으나 곧 난제를 던져주었다. 일단 선출한 대통령이 더 이상 민주적 책임성에 구속받지 않을 때, 주권자는 그를 견제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오랜 왕정과 군부독재의 경험 직후에 등장한 직선 대통령은 ‘선출된 왕’과 잘 구분되지 않았다. 선거제도는 민주화되었으되 사회의 구동 원리가 민주적으로 재편되려면 통치자와 주권자 모두 적응이 필요했다.

‘막 나가는 통치자’를 견제하는 헌정적 원리는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 수직적 견제의 원리다. 시민이 직접 통치자를 끌어내리려 시도하는 저항권이 대표적이다. 발동된다면 비상 상황이다. 둘째, 수평적 견제의 원리다. 민주적 정통성의 또 다른 원천인 입법부를 통한 견제가 이에 해당한다. 평시에 원활히 작동해야 할 견제 원리이지만, 1987년 이후 입법부가 이를 제대로 구현했다고 보는 여론은 소수다.

2016년 겨울의 광장은 ‘수직’과 ‘수평’의 기로에 서 있었다. ‘수직’은 위험했다. 저항권이란 체제 변동까지 감수하는 고비용의 선택이었고, 헌정체제 자체를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요구는 거의 없었다. ‘수평’은 못 미더웠다. 광장에 선 주권자들은 대통령 퇴진이라는 고도의 선택을 해낼 만큼 유능한 입법부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11월 한 달 동안 광장이 보여준 선택은 그래서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지도부 없는 100만 인파가 서로 토론한 적도 없이 고도의 합의와 규율을 유지했다. ‘수직’은 분명히 기각됐다. 비폭력에 대한 광장의 합의는 너무나 단호해서 경찰 차벽에 붙인 꽃무늬 스티커마저 도로 떼어줄 정도였다. 강경파 집회 참석자들은 “경찰과 <조선일보>한테 칭찬받는 시위”라고 야유하기도  했다.

2016년, 광장이 정치를 발견했다

광장의 주류가 채택한 비폭력 노선은 차라리 단호한 전략 기조였다. ‘수직’을 우선 제쳐둔 상황에서, ‘수평’이 작동하기를 그저 손 놓고 기다리기에 입법부는 미덥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경로는 입법부가 제대로 움직이도록 끊임없이 압박하는 것이었다. 광장은 정확히 그 방향으로 집중했다. 압박의 성공 가능성은 집회의 규모, 구성의 다양성, 결집의 지속성에 달려 있었다. 이 요소들이 끝까지 유지되어야만 입법부를 움직일 전망이 있었다. 새누리당에서 최소한 28표를 떼어내야 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를 향해, 광장은 이렇다 할 리더도 없이 집중력을 유지했다. 결국 62표 이상을 집권당에서 가져오는 대승을 이뤄냈다.

폭력은 집회의 규모와 다양성과 지속성 모두를 위협할 위험 요소였으므로 제어당했다. 100만명 단위 집회가 매주 도심을 가득 채우면서도 물리적 충돌 한 건 벌어지지 않는 집회 양상을 외신은 놀라워하며 보도했다. 강경파 집회 참석자들은 광장 주류의 태도가 오히려 다양성을 억누르는 폭력이라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는데, 묘하게 본질을 꿰뚫는 지적이었다. 광장에서 비폭력 노선은 단호하게, 어떤 의미로는 폭력적으로 관철되었다. 이것은 ‘착한 게 좋다’는 식의, ‘보수 언론에 잘 보이자’는 길들여진 태도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수직’을 기각하고 ‘수평’을 압박한다는 전략 기조와 어긋난 강경파를 사실상 힘으로 제압해버렸다.

명시적으로 합의한 바 없지만 이것은 광장의 정치적인 결단이었다. 광장에 선 주권자들은 지독히 이기고 싶어 했고, 이길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탐색했으며, 그 과정에서 입법부라는 주권자의 수단을 결정적으로 재발견했다. 폭력이 배제된 것은 이 결정적 수단을 작동시키기 위해서였다.

ⓒ시사IN 이명익
12월7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위한 야 3당 결의대회’에서 야 3당 지도부와 국회의원·당직자들이 대통령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

광장의 압박에 반응해 탄핵을 향해 가던 입법부는, 11월29일 대통령 3차 담화 이후 잠시 대오가 흐트러졌다. 새누리당 비박계가 탄핵 대신 대통령이 제안한 ‘합의에 의한 사퇴’로 회군하면서 탄핵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그리고 12월3일 토요일에 6차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날 광장이 보여준 압박의 밀도는 역사에 기록될 만했다. 주최 측 추산 전국 232만명이라는 규모도 초유의 사건이었지만, “우리는 타협할 권리를 입법부에 준 적이 없다”라는 주권자의 분노는 입법부에 거대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폭발 직전의 기운이 넘실거렸던 6차 집회의 분위기는, 만일 탄핵안이 부결될 경우 한편에 치워두었던 저항권 행사가 선택지로 부활할 것이라고 강하게 암시했다. 6차 집회 이후 국회에서는 “탄핵이 부결되는 날에는 촛불이 국회를 태워버릴 것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새누리당 비박계는 곧바로 반응해 탄핵 대오로 복귀했다. 국회의 탄핵 찬성표 234표는 재적 인원의 78%다. 같은 날 발표된 한국갤럽 정례 여론조사의 탄핵 찬성 의견 81%와 큰 차이가 없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입법부는 결국 주권자의 의사에 구속받았다.

이렇게 해서 2016년 겨울의 광장은 정치를 발견했다. ‘광장’과 ‘제도권 정치’라는 익숙한 이분법은 하나로 통합됐다. 2016년 이전에 광장이 열릴 때면 그곳은 반(反)정치, 탈(脫)정치의 에너지로 끓어올랐고, 광장과 정치는 거의 언제나 양자택일의 문제로 간주되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정치를 혐오하고 직접행동을 찬양하는 광장의 정서에 끊임없이 비판 목소리를 내왔다. 그는 이번에 중요한 변화를 봤다. “이 광장은 반(反)정치로 달려 나가는 대신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권력의 수단을 놀랍도록 능숙하게 사용해서, 결국 더 효율적으로 시민권력을 행사했다. 입법부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주권자의 도구라는 인식이 폭넓게 공유되었고, 실제로도 입법부를 뜻대로 작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탈정치 담론이 주력이었던 2008년의 촛불과 비교하면 차이는 명백하다. 2016년의 광장에서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주체, ‘정치적 시민’이 탄생했다. 이건 연구자들이 꼭 책을 써야 할 사건이다.”

2016년 겨울의 광장이 재발견한 무기는 입법부만이 아니었다. 헌법 역시 주권자의 도구상자에 추가됐다. 광장 최고의 연사로 떠오른 방송인 김제동씨는 무대 발언 대부분을 헌법 소개에 할애했다. “권력을 국민이 아니라 최순실로부터 나오게 했으므로 헌법 제1조 1항 위반” “사사로이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줬다면 헌법 제2조 위반”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지 않았으니 헌법 제20조 2항 위반” 등 그의 발언은 헌법 조항을 넘나들었다. 헌재가 탄핵 사유로 받아들일 만큼 전문적이지는 않았지만, 주권자가 헌법을 도구로 가져왔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광장의 주권자들은 헌정체제가 망가졌다고 느꼈고, 헌정을 복원하길 원했다. 이것은 체제 변동 시도가 아니었다. 체제에 대한 자신감, 체제가 주권자의 명령에 복무할 것이라는 믿음, 그러지 않을 경우 저항권을 발동할 수 있다는 위협으로 이루어진 패키지였다. 헌정을 복원하자는 요구를 내거는 순간, 헌법은 자연스럽게 주권자의 무기가 된다. 헌법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2008년의 광장에서도 중요한 슬로건이었다. 하지만 2016년의 광장은 국민의 최종 권력을 선언하는 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헌법에 통치자가 어떻게 미달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하며, 그 책임을 물을 경로를 찾아냈다.

ⓒ연합뉴스
11월29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뒤 돌아서 나가고 있다.

주권자가 시민권력의 도구를 다루는 방식에 적응하고 있다. 이만큼 기존 엘리트에게 나쁜 소식은 흔치 않다. 엘리트 블록은 광장과 입법부의 갈라치기에 발 빠르게 나섰다. 탄핵 가결 전에 나온 12월9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탄핵 이후 절차는 헌재에 맡기고 여야는 국정을 수습하라”며, 이제 더 이상 집회 여론에 휘둘리지 말라고 주문했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직후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서 “이제는 거리의 목소리가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동력으로 승화되도록 간곡히 당부드립니다”라고 했다. 광장의 정치는 영원할 수 없고, 언제인가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헌정체제가 충분히 복원되었다는 주권자의 판단이 나오기 전에 박근혜 정부와 보수 언론이 먼저 나섰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촛불은 ‘6월 항쟁’의 마무리일 수도

입법부와 헌법은 이른바 ‘87년 체제’의 도구상자 안에 언제나 들어 있던 무기였다. 이를 사용하기 위해 헌법이 바뀔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1987년 이후에도 주권자들은 이 무기들을 사용하기보다는 대체로 외면했다. 입법부 구성이 터무니없이 불리하거나 선거 일정이 지나치게 멀어서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2008년의 광장이 둘 모두에 해당한다), 그렇다 해도 광장에서 정치는 잠재적 도구가 아니라 문제의 근원으로 취급받았다. ‘87년의 도구상자’는 온전히 활용된 적이 사실상 없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87년 체제가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는 너무 쉽게 상식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30년 만에 ‘6월 항쟁’을 마무리하는 중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이 관점으로 보면, 한국 사회에는 “다음 헌법을 어떻게 만드는가?”보다는 “더 잘 작동하는, 우리 삶에 더 좋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만드는가?”가 더 시급한 질문이 된다.

이제 한국 사회는 ‘탄핵 이후’와 ‘광장 이후’를 디자인하는, 지금껏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섰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는, 탄핵 직후로 예정되어 있던 총선이 모든 논란을 해소할 일종의 최종 심판으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2016년 탄핵 이후의 한국 사회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정당성을 상실한 대통령에게 해고 통지를 보내는 데까지는 놀라운 합의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을 만드는 과정까지 그 수준의 합의가 유지될 가능성은 낮다.

무엇이 더 잘 작동하는 민주주의일까. 더 좋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공통의 목표는 일단 성취했고, 이제는 저마다 답이 다를 질문을 받아들었다. 혼란과 시련, 그에 따른 정치 혐오가 어느 정도는 필연으로 대기하고 있다. 2016년 겨울의 광장은 정치에 맞서서 승리한 경험이라기보다는, 정치를 도구로 쓰는 데 성공하여 승리한 경험이었다. 이 경험이 예고된 시련을 헤쳐 나갈 길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인상적인 승리를 거둔 주권자들이 다음 도전 과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