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우리는 지금 세계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 탄핵 이후, '촛불'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일취월장7 2016. 12. 12. 16:44

우리는 지금 세계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김민웅의 인문정신] 왕의 목을 벤 촛불, 시민혁명 제2단계를 위해
김민웅 경희대학교 교수     
2016.12.12 15:28:42


왕정의 가산체제 해체

시민혁명 제1단계가 완료되었다. 탄핵이라는 방식으로, 마침내 '왕의 목을 벤 시민'들은 이제부터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대통령 궐위에 따른 국정 공백의 혼란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시민들이 아니다. 이미 그 자신이 국정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권은 이 위력적인 시민혁명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될 판이다.

'박근혜'는 왕정을 지향했다. 그래서 공화국의 민주주의 헌법을 쉽게 유린할 수 있었고, 공적 권력을 자신의 가산(家産)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새누리당은 그 가산체제의 신분 질서를 유지하면서 왕정을 방어하는 기본 세력이었다. 검찰과 국정원도 이 기본 세력을 구성하고 있었고, 공영 방송과 보수 언론 역시 다르지 않다. 시민혁명의 타격 대상이 누구인지 뚜렷한 상황이다.  

한편, 탄핵은 '박근혜 퇴진' 절차의 보조적 수단일 뿐이다. 시민혁명의 주체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지금도 앞으로도 '즉각 퇴진' 외에는 없다. 뿐만 아니라,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의 권한을 '박근혜'가 임명한 국무총리와 내각이 이어받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헌법적 정당성이 무너진 '박근혜'를 비롯해 그 휘하에 있던 모든 권력자들도 탄핵과 퇴진 대상이라는 점을, 시민혁명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지난 10일 탄핵 통과를 자축하기 위해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요구는 '즉각 퇴진'과 함께 '박근혜 구속'이었다. 시민들이 세월호 유가족의 노래가 울려 퍼진 인권콘서트에서 들었던 "약속해"의 의미는 끝까지 진실을 밝혀서 책임져야 할 자들을 처벌하겠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우리들은 행동할 거야. 끝까지 다 밝혀낼 거야. 끝까지 다 처벌할 거야. 세상을 바꾸어 낼 거야. 약속해, 반드시 약속해."  

정의는 그렇게 세워진다. 역사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워진다.

이제 시민들은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권력의 지휘를 받아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했다는 의문이 생겨난 지금은 더욱 그렇다. 탄핵에 대한 헌재의 법률적 검토와 결정 과정이 진행되는 사이, 시민혁명 무산 세력을 우려하는 시민들은 헌재도 역사의 흐름과 만나지 못하면 그대로 두지 않을 기세다. 헌재도 현재 재판대에 오른 셈이다.  

▲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다음 날인 10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뜻하는 304개의 구명조끼가 등장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시민혁명 제2단계의 과제 

그렇다면 시민혁명 제2단계의 과제는 명료해진다. 첫째는 박근혜 권력의 적폐 청산이다. 그 청산이 어느 시기에 이르러야 완결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탄핵 국면 직후, 개헌이나 대선 정국을 말하는 세력은 청산 정국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단정해도 된다.  

적폐 청산은 우선 권한대행 체제의 교체에서 비롯된다. 그 자신들이 박근혜 권력의 적폐 생산자 내지 동조 또는 방치에 관여한 세력이 여전히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시민혁명의 요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검찰과 국정원의 대대적인 개혁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적폐를 주도한 정부가 계속 가동된다는 것은 시민혁명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좌절시킬 가능성이 높다. '새누리당 해체'가 구호로 외쳐지고 있는 상황이 이를 대변한다.

두 번째로 세월호 특별법 개정과 특조위 활동 재개를 비롯해, 역사 국정교과서, 한일 군사정보 협정, 사드 배치, 한일 위안부 협상 등의 작동 중지 내지 폐기 조처를 즉각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해결하고자 했던 고통이 그대로 잔존한 채 혁명의 성과를 이루지 못할 수 있다.

특히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의 오랜 고투와 꺾이지 않았던 진실 규명 의지는 오늘의 시민혁명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었다. 2014년 4월 16일 그 엄청난 희생이 이뤄지고 있을 때 국가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박근혜의 7시간'은 '박근혜 체제'의 일탈적 본질을 고스란히 보여준 사례가 아니었던가.  

뿐만 아니라 관련 사실이 드러나면서 점점 확인되고 있지만, '7시간' 의혹은 단지 직무유기 정도가 아니라 300명이 넘는 목숨을 학살한 적극적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재앙이 발생했는데 그 재앙을 막아낼 책임을 지지 않았다면 의도가 의심되고, 여러 형태의 구조작업 시도가 있었는데 이를 차단한 것은 아이들의 몰살을 가져온 중대 범죄이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권한을 강화하는 것은 그래서 박근혜 체제의 가장 민감한 대목을 짚어 청산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셋째, 권력과 재벌의 결탁을 만천하에 보여준 박근혜 체제는 대자본에 대한 개혁 조처와 노동자, 농민들의 삶을 지켜내는 법과 제도 그리고 정책이 얼마나 절박하고 긴급한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성과급연봉제를 전면 도입함으로써 노동자에 대한 착취 강도를 높이고 직업 안정성을 중대하게 위협하는 정책은 돈으로 움직인 권력의 핵심 기반이다.

생존의 위기에 몰린 농민을 물대포로 가격해 살해한 권력의 행태는 바로 그런 흐름에서 가능했다. 노동자들도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 이들의 처지는 모두 돈과 권력이 손을 잡고 만들어낸 정책의 희생물이다. 이를 반전시키지 않으면 시민혁명은 기성 정치인들의 기득권 유지에 기여하는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 촛불은 매주 광화문 광장을 달구고 있다. 광장에 세워진 거대 촛불에는 '시민혁명 만세'라고 쓰여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혁명은 왕의 목을 벤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혁명은 왕의 목을 벤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피폐하게 만든 구조물 전체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구조물을 만드는 작업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이제 탄핵 절차를 냉정히 지켜보고 시민들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훈계'는 혁명을 멈추게 하려는 역사적 반동일 뿐이다. 이들은 언제라도 기회를 노리고 자신들의 주도권을 복구하려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촛불 시민들의 시민대토론회를 경내 질서 유지라는 이유로 시민들을 잠재적 질서파괴자로 몰면서 불허하고, 탄핵 압박을 위한 국회 전면 개방을 거부한 의회의 기득권, 그리고 국회 앞에 차단벽을 설치한 것 또한 두고두고 비판받아댜 한다. 시민 배제적 대의제의 정치적 수명은 이제 끝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민 배제적 대응이 작동한다는 것은 직접 민주주의 주체에 의한 의회 정치의 수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 시기, 제왕적 대통령제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개헌 논리도 매우 경계해야 한다. 검찰과 국정원 개혁, 그리고 집회, 결사의 자유가 헌법대로 보장되었다면 제왕적 권력은 가동하지 못한다. 언론에 대한 권력의 통제는 현행 헌법이 보장한 조처도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 제왕적 권력의 구조물이 된 기구와 이들의 민주주의 탄압에서 가능했다. 더군다나 정확한 대표성을 반영할 수 있는 대의제를 가로막은 선거제도는 기성 정치권의 부패와 타락을 가져왔고 직접 민주주의의 요구를 거듭 배반해온 것이 아닌가. 

우선, 청산 정국이 답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제2단계의 최대 작업은 청산 정국의 전개다. 어물쩍 넘어가려는 순간, 땅속에 묻혀야 할 세력들이 좀비가 되어 나타나 교묘한 변신과 기만으로 시민혁명의 흐름을 왜곡하고, 시민들에게 정치적 좌절감을 안겨줄 수 있다. 이 청산과정에서 우리는 통진당 해산 문제를 결코 망각하지 말고, 새롭게 접근하고 제기해야 한다. 통진당을 지지하건 아니건, 그것은 헌법 정신을 유린한 권력의 폭거이기 때문이다.  

내란 혐의도 무죄이고, 이른바 혁명 조직 'RO(Revolution Organization)'의 존재도 인정되지 못했음에도 정당 해산을 결정한 헌재는 사실 대통령의 탄핵을 심리할 자격이 없다. 이 사안은 그냥 대충 묻어두고 갈 일이 절대 아니다. 진보 정당의 위법적 파괴를 철저하게 따져 묻는 작업을 비롯해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 세력 내부의 통합 의지도 재점검하고, 통합을 촉구해야 한다. 오늘의 정치권이 이렇게 지리멸렬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보 정당의 왜소화에도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 체제의 적폐는 그 뿌리가 박정희 체제에서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명박 체제의 문제 또한 심각하기 이를 데 없다. 파고 들면, 우리는 MB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친일 세력의 청산을 완결하는데 실패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경험을 재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민혁명의 과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말고 차근차근하게 밟아나가야 한다. 시간이 없다면서 서두를 이유가 없다. 묵직하고 본질적으로 시민혁명의 궤도를 건설해야 한다.

본격적인 혁명을 위하여 

다가올 대선은 바로 이러한 청산 과제를 정확히 제시하고 실행할 수 있는 대선주자와 세력이 선택되어야 마땅하다.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해 어떤 희생과 기여를 할 것인지 모든 것을 걸고 나서는 이를 시민들은 가려볼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우리는 시민혁명이 어느 특정 대선 주자나 지도자가 성패를 결정짓는 것이 아님을 재차 확인해야 할 것이다.

전국 방방곳곳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주역이 되어 '시민 민주주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민주 시민 정치 교육이 이루어지고, 주요 의제가 제기되어 치열하면서도 상호 존중하는 토론 역량이 성숙해질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시민혁명의 구체적인 현장을 탄생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누구나 말한다. "이제부터 진짜"라고. "지금부터 혁명은 본격적"이라고.

그렇다. 혁명 전야는 예상을 뛰어넘어 황홀했다. 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시민혁명의 완성을 위한 정치적 내전은 더욱 뜨거워질 것이다. 그래도 겪어 나가야 한다. 그로써 시민혁명은 보다 견고해질 것이며, 시민들은 보다 위력적이 되어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탄핵 이후, '촛불'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장석준 칼럼] '2017년 봄 광장'의 시대정신은?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2016.12.13 08:13:58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됐다. 다음날 전국 곳곳에서 열린 제7차 촛불 집회는 승리를 자축하는 즐거운 축제였다. 분명 대중의 승리이고 광장의 승리다. 그게 아니고는 새누리당 의원 중 절반이나 저희들이 만든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표를 던지는 광경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승리라고 하기에 흔쾌하지 않은 국면임도 분명하다. 피의자 박 씨가 청와대에서 쫓겨나려면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판결이 아무리 빨리 나와도 내년 봄은 돼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그때까지 촛불 시민은 실은 승리한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물론 그래서 촛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 광장이 닫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데 촛불을 계속 들더라도 박근혜 체제에 맞서 더 확실히 승리의 기세를 다지려면 이제 무엇을 외치고 무엇을 관철할지 고민이 된다. 황교안 내각을 손 봐야 한다거나 재벌 개혁, 검찰 개혁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박근혜의 자진 사퇴냐, 탄핵이냐를 놓고 벌이던 열띤 논란에 비하면 이 고민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다.  

짧아도 내년 봄까지 석 달은 족히 될 시간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고민에 참고가 될 만한 몇몇 역사적 장면들이 있다. 그 장면들을 잠시 훑어보자.

1905년 러시아, 1987년 한국, 2011년 스페인  

장면1. 1905년 러시아  

1905년 러시아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때 러시아는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느라 민중의 생활고가 가중되자 그간 묵혀두던 모순이 폭발하고 말았다.  

1월 22일, 20만 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을 요구하며 황궁으로 행진했다. 차르(황제)의 초상을 들고 평화 행진을 벌이던 시위대에게 정부는 무차별 총격으로 답했다. 분노한 대중은 당장 차르의 초상을 찢어버리고 총파업으로 맞섰다. 그 후 거의 1년 가까이 혁명 상황이 계속됐다.  

사실 1년 동안 매주, 매일 시위와 파업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시민 대다수가 참여한 총파업에 당황한 차르 정부는 2월에 개혁을 약속했다. 의회도 설치하고 헌법도 제정하겠다고 선포했다. 러시아판 '6. 29 선언'이었다. 민중의 승리였지만, 실제 개혁이 추진된 게 아니라 '약속'만 했으니 아직 절반의 승리였다. 어쩌면 지금 우리 상황하고도 닮았다.

이때 러시아 민중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정치적 요구를 내건 시위가 잦아들기는 했다. 민주개혁을 약속했으니 일단 진행 과정을 지켜보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다시 조용해졌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승리의 자신감을 얻은 대중은 일터에서도 크고 작은 승리를 일구려고 집단행동을 쉬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새로 결성했고,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정치' 투쟁에서 '경제' 투쟁으로 옷을 갈아입기는 했지만 투쟁 자체는 멈추지 않은 것이다.  

곳곳에서 승리의 소식이 들려왔다. 봄 햇살이 느껴질 무렵, 대다수 러시아 공장들의 작업 시간은 9시간, 8시간으로 줄었다. 이 무렵 유럽 전체에서 가장 짧은 노동시간이었다. 의회조차 없는 나라의 노동 현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일터의 승리로 더욱더 자신감을 얻은 노동 대중은 민주개혁이 지지부진하자 다시 정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1905년 1월, 한 겨울에 시작된 혁명은 그렇게 또 다른 겨울이 올 때까지 뜨겁게 이어졌다. (당대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놀라운 사건들의 전말을 <대중파업>이라는 저서에 담아 우리에게 전했다.)  

장면2. 1987년 한국  

29년 전 6월 말도 지금과 비슷했다. 6월의 거리에서 시민들은 "군부 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 쟁취"를 외쳤다. 6월 29일 제5공화국의 권력 후계자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다. 역시 아직은 '약속'이었다. 게다가 정권 교체는 개헌 뒤에 다시 선거를 거쳐야 할 일이었다. 이때 다들 6. 29 '항복' 선언이라 하고 시민의 '승리'를 이야기했지만, 돌이켜보면 때 이른 자축이었다.  

한데 이것으로 1987년의 드라마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7월 첫째 주에 울산 현대그룹 사업장에서 '민주'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민주노조 결성 바람은 삽시간에 현대 재벌 산하 대공장 전체로 확산됐다.  

현대만이 아니었다. 바람은 거제의 대우조선으로, 창원의 금속 사업장들로, 전국의 수많은 기업들로 퍼졌고, 중소공장들까지 덮쳤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새로 만들거나 어용노조에 맞서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사측은 탄압 일변도였고, 자연히 파업이 뒤따랐다. 그렇게 해서 9월까지 무려 3천 건이 넘는 쟁의가 폭발했다. 휴가철이라는 8월에 하루 평균 83건의 쟁의가 발생했다.  

민주혁명 와중에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현상이 20세기 말의 한국에서도 반복된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정치 투쟁이 경제 투쟁으로 확산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다시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더 큰 정치 투쟁으로 모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군부 독재는 정리했으되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경제체제는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른바 '87년 체제'가 시작됐다.  

왜 그렇게 됐을까? 노동자대투쟁이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여의도 국회의 닫힌 방 안에서는 원내 보수정당들만의 협의로 새 헌법안이 작성되고 있었다. 창 밖에 여전히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기에 그나마 경제 민주화 조항 등이 담긴 헌법안이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대중의 목소리가 그렇게 '창 밖'의 함성에 그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대중운동과 개헌 과정은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됐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기에 6월의 여진은 노동조합운동의 성장 정도로 마감되고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12월 대통령 선거로 빨려 들어갔다.

장면3. 2011년 스페인  

2011년 초에 지중해 연안은 '아랍의 봄'으로 떠들썩했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이집트 등에서 민주혁명이 승리했다. 혁명의 주역은 하나같이 청년들이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로 무장한 젊은이들한테는 독재 정권의 언론 통제도 속수무책이었다. 조직도 없이 온라인 네트워크만으로 수만 명이 시위에 나섰고, 수도 한 가운데의 광장을 점거한 채 결국 독재 정권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랍의 봄'은 곧바로 지중해 건너편 남유럽에 해일을 몰고 왔다. 마침 남유럽 여러 나라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흔들리고 있었다. 이들 나라의 정부는 좌든 우든 모두 긴축 정책을 실시해 경제위기의 고통을 서민에게 전가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희생양이 됐다. 가뜩이나 학자금 대출과 비정규직 증가로 움츠러들어 있던 청년층은 50%에 가까운 실업률까지 마주해야 했다. 스페인도 이런 나라들 중 하나였다.

스페인 젊은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우리도 아랍 친구들처럼 해보자"고 모의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진짜 민주주의를!"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이 등장했고, 이곳의 논의는 어느새 행동계획으로 발전했다. 5월 15일이 거사일로 정해졌다.

이날 전국 50개 도시에서 총 13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 나선 이들 중 일부는 밤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수도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을 점거해 천막을 쳤다. 경찰이 몇 차례 천막을 철거하고 농성자들을 연행했지만, 그때마다 다른 젊은이들이 다시 광장을 채우고 점거 시위를 이어갔다. 이름도, 조직도 없었지만, 새롭고 결의에 찬 사회운동이었다. 언론은 이들에게 '분노한 자들(indignados)'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의 천막들에서는 스페인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토론이 시작됐다. 거듭된 토론 끝에 표결이 아닌 전원 합의로 다음의 요구들을 결의했다.

- 정치 엘리트의 특권을 폐지하라. 부패를 일소하라.  
- 선거 제도를 개혁하라.  
- 긴축 정책을 철회하라. 
- 실업 문제를 해결하라. 
- 주거권을 보장하라. 
- 교육, 의료, 대중교통 등의 공공 서비스를 개선하라. 
- 은행을 규제하라. 필요하면, 국유화하라. 
- 참여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라. 

점거 시위는 몇 주 뒤에 끝났다. 그러나 '분노한 자들' 운동은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스페인 젊은이들은 광장에서 합의한 개혁 요구를 들고 이후 몇 년 동안 빈번히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어느덧 기성 좌파정당이나 노동조합이 아니라 분노한 자들 운동이 부패 정치와 신자유주의 긴축 정책에 맞서는 사회운동의 중심이 됐다.  

'분노한 자들' 운동도 점차 여진이 약해지는가 싶던 2014년에는 이 운동의 정치세력화를 내건 새 정당 '포데모스'가 출범했다. 포데모스는 작년 12월과 올해 6월, 두 차례 총선을 거치면서 스페인 3대 정당 중 하나로 급성장했다. '분노한 자들' 운동은 포데모스를 통해 계속 스페인 사회의 근본 개혁을 채근하고 있다.  

그리고 2017년 한국의 '최저임금 인상' 운동?  

이런 역사 속 장면들에 지난 7주간의 광장 혁명을 비춰보자. 과연 지금 우리는 어디쯤에 서 있으며, 어디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가? 나는 문득 이런 광경을 떠올려봤다.

장면4. 2017년 한국  

제7차 촛불 집회 이후 집회 참석자 숫자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중에 서울 도심 곳곳에서 '최저임금 1만원으로 인상!'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게릴라 시위가 벌어졌다. 시내에서, 홍대 인근에서, 강남역에서 한 무리의 청년들이 모였다가 흩어졌다가를 반복하며 '최저임금 인상'을 외쳤다. 이런 시위가 처음 등장한 주의 토요일 촛불 집회에서는 최저임금, 비정규직, 청년 주거권 등을 이야기하는 젊은 세대만의 연단이 주목 받았다.  

다음 주부터는 지방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언론은 이 시위의 배후가 누구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느 보수신문은 대학가에 남아 있는 운동권 계보를 다시 들이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언론이 소셜 미디어를 진원지로 지목했다. 탄핵 소추안 가결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 촛불 시위의 미래를 토론하던 가운데 아주 자연스럽게 '최저임금 인상' 운동에 나서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논의는 아주 복잡하고 치열했다. 기본소득 이야기도 나오고 반론도 나오면서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고 한다. 하지만 다들 최저임금 인상이 청년들이 바라는 사회개혁의 출발점이라는 데 동의하면서 '최저임금 시급 1만원!'을 외치는 다양한 행동계획이 제출됐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문제가 청년층의 첫 번째 개혁 요구가 된 것은 최저임금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다. 탄핵 소추안 가결로 승리감을 경험한 젊은이들은 자신의 일상과 직결된 문제에서 또 다른 승리의 경험을 맛보길 원했다.

그런데 최저임금은 모든 원내 야당들이 총선에서 개선을 공약한 사안이었다. 탄핵 소추안 가결에는 2/3가 찬성해야 했지만, 최저임금법 개정에는 과반수의 찬성만 있으면 됐다. 야당들이 탄핵 표결할 때만큼의 의지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야당들에게 바로 이 의지를 촉구하기로 결의했다.  

젊은이들이 이런 구체적인 요구를 들고 나온 덕분에 촛불 집회가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1월부터 10대, 20대를 중심으로 토요일 집회 참석자 수가 다시 늘어났다. 장년층 사이에서도 최저임금 문제가 뜨거운 관심사가 됐다. 날이 풀린 2월부터는 청년들이 국회의 결단을 촉구하며 광화문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마침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 발표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봄바람이 완연한 3월의 첫 주 토요일에 서울의 촛불 집회 인원은 작년 12월 3일의 숫자에 육박했다. 200만 명 가량이 광화문 인근으로 모여들었다.  

이미 열흘 가까이 점거 시위를 벌이던 청년들이 이 인파를 맞이했다. 작년 초겨울과 달리 촛불을 든 시민들의 관심사는 더 이상 피의자 박 씨의 운명만은 아니었다. 최저임금 인상을 시작으로 사회개혁을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게 어느새 2017년 봄 광장의 시대정신이 돼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 속 또 다른 승리의 경험

이것은 단지 하나의 상상일 뿐이다. 혁명적 상황 속에서 한 개인의 전망이나 상상은 대개 현실에 의해 무참히 추월당하곤 한다. 위의 상상 역시 그렇게 몇 달 뒤에 닥칠 현실에 견줘 한낱 웃음거리가 될 수 있고, 나는 진실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탄핵 소추안 가결이라는 잠정 승리를 거둔 뒤에 광장 혁명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 일상 속 또 다른 승리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234표라는 너무나 구체적인 실물로 육박했던 승리가 우리 삶과 직결된 문제들에서도 반복될 수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누구는 이후의 대안으로 '시민의회'를 이야기하고 누구는 '촛불혁명당'을 말하지만, 이런 경험이 없다면 모두 공허한 종이 위 작전에 그치고 말 것이다.

박근혜 퇴진에서부터 내 호주머니 사정의 변화로까지 이어지는 크고 작은 승리의 연쇄 속에서야 비로소 박근혜 체제 전체, 즉 재벌-비선출직 관료-보수언론의 지배 체제에 맞선 도전은 12월 3일에 살아 꿈틀대던 정도의 대중의 의지로 타오를 것이다. 그날 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나는, 아니 우리는 그 불길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