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독일 교육 부럽다? 해법은 교육 '밖'에 있다

일취월장7 2016. 12. 7. 17:47


독일 교육 부럽다? 해법은 교육 '밖'에 있다

[조성복의 '독일에서 살아보니'] 독일의 교육 ➀ 교육문제의 본질
조성복 독일정치경제연구소 소장     2016.11.25 09:37:26 


독일에서는 대부분 초등학교가 4년제이다. 이곳을 졸업하면 학생들은 상급학교인 하우프트슐레(Hauptschule), 레알슐레(Realschule), 김나지움(Gymnasium) 등으로 나누어 진학하게 된다. 이 학교들은 우리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합쳐놓은 곳으로, 하우프트슐레와 레알슐레는 우리의 실업학교에 해당하고 김나지움은 대학진학을 준비하는 인문학교인데, 그 비중은 각각 절반 정도이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칠 때쯤 교사들은 학생들이 어느 학교로 가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학부모들과 상담을 한다. 부모들은 대체로 교사의 의견에 따라 자기 아이의 진학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교사가 "당신의 아이는 건강하나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니 하우프트슐레로 가서 일찌감치 직업훈련을 받는 것이 좋겠다"라고 조언하면, 부모는 이를 수긍하고 그대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먼저 독일의 부모들이 상급학교 진학문제에서 순순히 담임교사의 의견을 따른다고 하는데, 자기 아이의 장래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만약 위와 같은 대화가 한국에서 있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아마도 그 교사는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 경우 한국 부모의 반응이 어떨지 쉽게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의문은 초등학교 4학년을 대상으로 진학하는 학교를 달리함으로써 그 아이의 미래를 그렇게 조기에 결정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다. 불과 10살 남짓한 나이에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그런데 독일에서 이러한 제도가 시행되어 온 것이 벌써 수십 년째이니 반드시 잘못됐다고만 보기는 곤란하다.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봄으로써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생각해 보겠다.

논의전개의 편의상 먼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보겠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4년 과정이면 학생들의 학습능력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독일 철학자협회가 이 시스템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학습능력이 뛰어난 학생들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 사이에 교육과정을 달리하는 것이 양측 모두에 더 유리하고, 교육의 공정성에 더 맞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과 학습능력에 적합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한 채 오랜 기간 함께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뒤늦게 공부의 필요성을 깨달을 수도 있고, 실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래서 독일에서도 이같은 조기 결정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학교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과 요구들이 계속해서 있어 왔다. 그에 따라 새로운 제도들이 만들어져 보강되고 있지만, 어쨌든 기존의 제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보강된 시스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의하겠다.

상급학교 진학관련 조기 결정 문제는 이렇게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실생활에서도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친구가 한국의 한 초등학교 앞에서 방과 후 공부방을 하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위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데에는 굳이 4년까지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한 달만 같이 공부해보면, 아이가 공부에 관심이 있는지 또는 소질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바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독일식 진로방식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부모들은 교사의 조언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부모들은 그 사실을 외면하고 싶고, 어떻게 해서든지 바꾸고 싶은 것이다. 상급학교 진학의 조기결정 문제는 결국 대학진학의 문제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이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을 알게 되면, 첫 번째 의문에 대한 궁금증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부모가 자기 아이를 무작정 대학에 보내려고 하지 않고, 실업학교를 마치고 직업훈련을 받아서 적절한 직업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경우에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과외나 학원 등의 사교육을 통해서 반드시 대학에 보내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국의 대학졸업자 비율만 보아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독일은 그 비율이 30% 미만이지만, 우리는 70~80%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부모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대학 졸업장이 우리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졸업장 없이도 직업을 얻는데 문제가 없고, 대체로 자신의 직업을 갖게 되면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학벌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숙련기술이나 능력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고, 자기가 속한 회사가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에 따라 급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지켜진다는 말이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사람 구실을 하기 힘들고, 비교적 직업의 귀천이 뚜렷한 편이며, 또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소속이 어디냐에 따라 급여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속을 결정하는데 일반적으로 좋은 학벌이 결정적 요소가 된다. 쉽게 실업학교에 진학하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요인들 외에 우리 사회가 독일과 달리 과도한 교육경쟁을 유발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교육에서의 승자와 패자 사이의 과실 차이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급여차이는 적으면 2~3배에서 많으면 10배까지 이르는 것이 그 증거이다.

독일에서는 공부를 못해서 좋은 직업을 갖지 못하더라도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별로 부족함이 없다. 그만큼 소득분배가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대학 졸업장에 목을 매달 이유가 없다. 그 밖에도 독일에서 극심한 입시경쟁이 일어나지 않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치는 안정된 사회보장제도이다. 우리보다 높은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통해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과도한 격차를 해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의 경우에는 비정규직의 증가, 소득의 양극화 심화 등에 따라 구성원 간 격차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보다 더 극단적인 약육강식의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가운데 우리의 교육제도가 놓여 있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알리고 그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아이가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승자가 될 것인가에만 골몰하고 있다.

매번 새로운 교육부 장관이 들어설 때마다 교육개혁을 말하지만, 수능제도 변경과 같이 대학입시제도를 개선하는 식의 개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서울대가 100미터를 11초 이내에 달리는 학생을 뽑겠다고 하면, 대다수 부모들은 아이가 어렸을때부터 달리기 훈련을 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공정한 입시제도를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소정의 교육을 마친 이후 직업생활에서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급여 수준을 보장하는 것, 즉 지나치게 벌어지고 있는 직업 간 급여나 보상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부모들이 아이들을 굳이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과도한 사교육을 받게 하면서 무한경쟁으로 내몰 필요가 없어지게 될 것이며, 그러면 불필요한 경쟁과 그에 따라 자살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학생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싼 사교육, 인성 문제 등 산적한 우리의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개혁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 본질이 교육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은 후에 이어지는 경제적, 사회적 격차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러한 격차를 줄이는 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교육은 정상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와 같은 무한경쟁의 정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인성 교육이 가능하며, 정직해야 한다든가 자신의 개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교육할 수 있겠는가? 

다음 편부터는 유치원, 초등학교, 실업학교, 인문학교, 대학 등으로 나누어 독일의 교육에 대해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5세 아이가 "모욕하지 마세요" 외치면 당신은?

[조성복의 '독일에서 살아보니'] 독일의 교육 ➁ 유치원과 초등학교  


독일 사람들이 언쟁을 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당신,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거냐(beleidigen)?"이다. 한국 사람들이 싸우다가 말이 막히면 나오는 "당신, 몇 살이야?"와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상대가 저렇게 말할 때, 함부로 그것을 긍정해서는 안 된다. 모욕죄로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독일에 사는 동안 다행히 저 말을 하면서 누구와 다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주로 텔레비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저 말을 대면하여 직접 들은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몇 가지 점에서 상식 밖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유학 초기 집사람이 어학코스에서 '단핑'이라는 중국 여학생을 사귄 것이 그 시작이다. 인연은 이후 도시를 옮겨가면서도 지속됐고, 그 여학생은 자기보다 먼저 유학 와서 공부를 마치고 독일회사에 취직한 중국 남자와 결혼을 하여 뒤셀도르프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부부와 서로의 집들을 오가며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모욕하지 마세요!"란 말을 들은 것은 쾰른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대사관에서 일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이사한 후 단핑이 유치원에 다니는 5살 된 아들인 파스칼(아예 독일식으로 이름을 지음)을 데리고 우리 집을 방문해 열흘가량 머물 때였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단핑이 파스칼에 대해, 중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녀석이 자신이 독일인인 줄 안다는 식으로 약간 흉보는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있었는데, 그 꼬마 녀석이 정색을 하면서 그 말을 하는 것이었다.  

▲ 단핑(왼쪽)가 색칠하고 있는 파스칼을 지켜보고 있다. ⓒ조성복


5살밖에 안 된 파스칼이 "자기를 모욕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그것을 중국 부모가 가르쳤을 것 같지는 않았고, 아마도 유치원에서 배웠을 텐데, 교육이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소중함을 배웠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독일의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우리처럼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 적절한 의사 표현이나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을 배우는 정도이다. 또 아이들끼리 놀다가 긁히거나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러면서 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애들을 대충 방치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산책 중에 종종 공원의 놀이터에서 다친 아이를 위해 구급 헬기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독일 기본법(헌법) 제1조 1항이 "인간의 존엄성은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인데, 5살 아이의 "모욕하지 말라"는 요구가 바로 이것을 지켜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소 과장된 해석일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어려서의 생각과 자세가 평생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자신을 존중할 줄 알아야 남도 존중할 수 있게 되고,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럼 독일의 초등교육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우선 유치원은 1840년 프리드리히 프뢰벨(F. Fröbel)이 독일 중부의 한 작은 도시에 아동시설을 만들고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이라고 명명한 데서 시작됐다. 이는 3~6세의 아동들을 위한 킨더가르텐과 0~3세를 위한 킨더크리페(Kinderkrippe, 탁아소)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사회복지 분야에 속하며, 여기에서는 유아교사, 보육교사, 사회교육자,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전문 인력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이 시설들은 지방자치단체와 민간에 의해 운영되는데, 민간의 주체로는 종교단체, 사회복지기구, 협회, 개인 등이 참여하고 있다. 

아기들을 수용할 수 있는 탁아소 비율은 주(州)별로 차이가 심한데, 2012년 기준으로 시설이 적은 주는 20~30%, 많은 주는 40~50% 정도이다. 반면에 유치원은 거의 모든 주들이 90%를 넘어섰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유치원비는 각 지자체에 의해 결정되며, 지역별로 편차가 심한 편이다. 일부 연방 주들의 몇몇 지자체에서는 특정 연령대의 아동들을 무료로 돌보기도 한다. 유치원비는 아동 수, 아동 연령, 가구 수, 교육 기간, 부모 수입 등의 요인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고 있다.

2010년 100개의 지자체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4살 어린이가 하루 4시간 유치원에 다닐 경우 부모의 연 소득이 4만 5000유로 이하면 한 달 원비는 0~146유로(약 0~19만 원), 부모소득이 8만 유로일 때는 210유로(약 27만 원)였다. 같은 조건에서 아이의 나이가 어릴수록 원비는 더 올라간다. 유럽의 다른 국가에 독일유치원을 차릴 경우 이는 민간시설로 취급되어 부모들이 그 비용을 부담해야 되는데, 원비는 평균 440유로(약 57만 원)이다.

연방통계청에 의하면 이러한 시설들의 3~5세 아이의 1인당 연간비용은 2009년 기준 국공립이 6100유로, 민간이 5900유로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러한 통계들을 살펴보면, 탁아비용의 60~70%를 국고에서 지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의 초등학교는 4년제이다. 예외적으로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2개 주에서는 6년제를 시행하고 있다. 교육제도에 대한 권한이 연방정부가 아닌 주 정부에 있기 때문에 각 주는 그것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초등과정이지만 주별로 교육시간, 교과목의 구성 등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또 우리와 달리 교육감을 별도로 선출하지 않고, 주 정부 내에 교육부 장관이 있어서 관련 업무를 관장한다. 

초등학교의 교과과정은 통일되어 있지 않고 주별로 차별화되어 있다. 모든 주가 공통으로 다루는 주요 과목들은 독일어, 수학, 사회(Sachunterricht) 정도이다. 이 초등과정은 독일에서 같은 연령대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내용을 공부하는 유일한 과정이다. 지난 편(독일 교육 부럽다? 해법은 교육 '밖'에 있다)에서 살펴보았듯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다음에는 각자의 학습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수준의 학교로 나누어 진학하기 때문이다.

독일과 너무 다른 한국 교육의 현실  

독일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살펴보면, 우리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유치원에서 아이들끼리 놀다가 단순히 때렸다는 이유로 양쪽 부모들이 총출동하기도 한다. 무언가 우리의 에너지가 낭비되는 느낌이다.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갖게 하는 것과 같은 소중한 일에는 무관심하면서, 내버려둬도 괜찮을 일에는 서로 핏대를 올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데, 독일 유치원에서 아이가 놀다가 긁혔다고 찾아와서 항의하는 경우는 주로 한국 유학생들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과도하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아이들은 불필요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미래의 경쟁에 앞서기 위해 아이가 편안하게 자랄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러한 선행학습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 초등학교부터, 아니 유치원부터 경쟁이 시작되고 있다. 아침이면 국적불명의 이상한 이름을 단 유치원 차량들이 아파트 사이사이를 누비고 있다. 초등학생들에게는 중학교 과정을 미리 배우게 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정작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자신의 소중함이나 남에 대한 배려는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인지 대학생이 되어서도, 또 군대에 가서도 얼차려나 구타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헤치는 일이 아직도 버젓이 발생하고 있다. 그 누구도, 심지어 공권력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한은 없다. 이러한 문제는 지난 1970~80년대 못살고 가난한 독재시대의 유산인 줄 알았는데, OECD에 가입하고 세계 11~12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 안타까운 현실의 원인은 우리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육이 잘못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인성 교육이나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데, 이는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을 최우선 가치로 주입하다가 뒤늦게 인간성의 회복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교육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언제쯤이나 주변의 꼬마 녀석들이 정색을 하고 "나를 모욕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정유라 학사 농단, 독일에선 불가능한 이유

[조성복의 '독일에서 살아보니'] 독일의 교육 ③ 중학교와 고등학교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생들에게 오로지 좋은 점수나 등수만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학생의 재능이나 취미,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버릇이 없거나 성격이 나쁜 것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좋은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반대로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더라도 입시 결과가 나쁘면 실패한 인생이 된다.

모두들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이를 바꾸자는 말을 못한다.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과제가 단순히 교육만의 문제가 아닌 까닭이다. (☞관련 기사 : 독일 교육 부럽다? 해법은 교육 '밖'에 있다). 

이와 같은 입시 경쟁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무한 경쟁이다. 설령 아무리 우수한 학생들만 모였을지라도 석차를 내어 줄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도 그 대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일부 상위 학생들을 위해 나머지 다수는 불필요한 경쟁에 들러리를 서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 학생들은 자신이 미래에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할 수도 없다.  

이러한 교육 제도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왜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양이 되어야 할까? 바로 여기에 우리 중‧고등학교 개혁의 당위성이 존재한다. 그러면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가? 독일의 사례에서 그 시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독일에서는 교육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데, 1단계가 초등학교, 2단계가 우리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 일부를 합쳐 놓은 것과 유사한 하우프트슐레(Hauptschule), 레알슐레(Realschule), 김나지움(Gymnasium) 과정이고, 3단계는 대학과정이다. 먼저 독일의 초등학교는 4년제이다. 일부에서 6년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관련 기사 : 5세 아이가 "모욕하지 마세요" 외치면 당신은?) 이어서 2단계로 진학한다.

이러한 과정들은 그 기간과 교육 내용 면에서 우리 학제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게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우리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현실을 돌아볼 때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중‧고등학교가 오로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반면, 독일의 2단계 과정은 학생들을 학습 능력에 맞추어 서로 다른 학교에 진학시키고, 직업학교나 대학에 가는데 적절한 교육을 실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은 누구나 자신에 맞는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교사들도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다.

하우프트슐레에는 주로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진학하는데, 학문적 지향이나 이론에 치중하기보다 실습이나 방법론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여 향후 받게 될 직업 교육에 대비한다. 주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개 5~6년 과정으로 2010년 기준 전국에 약 5200개의 학교가 있으며, 학생 수는 65만 명으로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여기를 마칠 경우 교육 기간으로 볼 때 우리의 중학교 졸업과 비슷하다. 졸업한 후에는 4년 가량의 직업교육을 받고 제빵사, 배관공, 미장공 등과 같은 비교적 단순한 직업을 갖게 된다.

이보다 공부를 조금 더 잘하는 학생들이 가는 레알슐레는 6년 과정이며, 약 3000개의 학교에 11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재학 중이다. 여기서는 학문적 지향을 포기하지 않고 자연과학, 공학 또는 사회과학 등 다양한 과목들을 공부하게 된다. 졸업하면 직업전문학교, 전문상위학교 또는 김나지움의 아비투어 코스 등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 역시 3년 정도의 직업교육을 받고 간호사, 샐러리맨 등 좀 더 학력을 필요로 하는 직업 세계로 진출하게 된다.

독일에는 직업교육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학교가 존재한다. 직업준비학교, 직업기초학교, 직업전문학교, 직업발전학교, 직업 김나지움 등 9가지에 이르는 이들 학교는 각각의 특성에 맞는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우프트슐레 졸업장이 없어서 직업교육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은 직업기초학교에서 해당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직업교육 관련 이중 교육 시스템이란 기업과 학교에서 동시에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일주일에 2일은 학교에서, 3일은 회사에서 교육을 받는 식이다. 

반면에 공부를 잘하여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김나지움은 8~9년 과정이다. 9년 과정일 경우에는 우리의 대학 1학년 과정을 마친 것과 유사하다. 약 3000개가 넘는 학교가 있으며, 여기에는 약 240만 명의 학생과 16만 명의 교사가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김나지움을 마치면서 보는 졸업시험을 통해 대학 입학 자격을 얻게 된다. 이를 보통 아비투어(Abitur)라고 하는데, 이 아비투어의 성적이 좋을수록 우선적으로 원하는 대학의 학과에 가게 된다.  

대학 입학 자격(아비투어)을 취득한 학생 수는 2010년 기준으로 약 50만 명에 이르는데, 독일에서도 학생들의 아비투어 취득률은 부모의 학력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나지움 졸업자의 60%는 그 부모들도 아비투어를 가진 반면, 졸업생 가운데 하우프트슐레를 졸업한 부모를 가진 비율은 단지 8%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위 내용들을 종합하여 비교하면, 대학에 갈 학생들만 김나지움에서 입시를 위해 2~4년 더 공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즉 하우프트슐레나 레알슐레 졸업생은 그 입시 준비 기간에 직업 관련 교육을 받음으로써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피할 수 있다. 공부에 관심도 없고 잘 하지도 못하는데 획일적으로 자리를 채워야 하는 우리 중‧고등학교 시스템과는 다른 것이다.  

요약하면 초등학교 4년을 마치고 성적에 따라 하우프트슐레, 레알슐레, 김나지움으로 나누어 진학을 하는데, 이는 우리의 초등학교 상급반 및 중학교 과정에 해당한다. 이곳을 마치면 하우프트슐레와 레알슐레 졸업생은 직업교육을 받는 반면, 김나지움은 대학진학을 준비하는 곳이다. 이 과정이 우리의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한다. 독일에서는 이미 우리의 고등학교 과정에서 직업 준비 등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반면, 우리는 그냥 대학 입시 준비에만 몰두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김나지움에 가지 않았다고 아예 대학에 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정에 따라 어렸을 때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뒤늦게 공부를 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학생들이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이들은 추가적으로 저녁 시간에 운영하는 김나지움 과정을 이수하여 아비투어를 취득하면 된다. 이처럼 누구나 공부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쾰른대학에서 유학할 때 그런 사례를 종종 보았다. 마틴(Martin)이라는 친구는 나이가 꽤 들었는데, 하우프트슐레를 나와서 벽돌 쌓는 미장공으로 일하다가 대학에 온 경우였다. 크리스토프(Christophe)는 남자인데 레알슐레를 마치고 간호사로 일하면서 정치학을 공부한 경우였다. 병원에서 교대 근무를 하면서 학업을 병행한 것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여전히 병원 일을 계속하면서 박사과정을 모색하고 있다. 

세 가지 학교로 나누어 진행하는 독일의 2단계 교육 과정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한다. 첫째, 학교의 공교육이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교육을 받지 않는다. 우리와 같은 사설 학원이나 과외가 없다. 간혹 대학의 교육학과 게시판에 과외교사(Nachhilfe)를 구한다는 게시물이 붙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운 학생을 위한 보충학습 교사를 찾는다는 의미다.  

이처럼 사교육이 불필요한 이유는 학생들을 학업 능력에 따라 적절하게 구분하여 그들에게 맞는 교육을 실시하고, 또 대학별 서열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보다 더 궁극적으로는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의 사교육비 부담은 아예 아이 출산을 포기하게 만들고 있다. 이 사교육은 보충수업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잘하기 위해 또는 선행학습을 위해서다. 그에 따라 학교의 공교육은 그 기능과 역할을 상실해 버렸다. 학교는 단지 잠자는 곳이라는 냉소적 이야기도 들린다. 그 막대한 사교육비를 세금으로 거두어 공교육에 투자한다면, 학생과 교사 모두가 훨씬 더 나은 환경에서 적절한 교육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는 까닭은 우선 한국에서는 대학 입시에 의한 경쟁의 결과가 너무나도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대학 서열이 너무나도 견고하고, 그에 따른 임금 격차 등의 기득권이 너무나 커서 어느 대학을 가느냐가 개개인의 일생을 규정해 버린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기 자식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일류대에 보내고자 한다. 결국 이러한 이기심들이 모여서 우수한 교사들의 자질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교육은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다. 

두 번째는 교육의 공정성이 살아있다는 점이다. 대학 입학 자격을 부여하는 아비투어 시험이 각 주별로 또는 각 김나지움 학교별로 알아서 따로 실시되는데, 그 결과들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특별히 출신 지역이나 학교에 따른 차별이 없다. 이 시험은 필기와 구두시험으로 나뉘어 치러지는데, 필기시험은 대부분 주관식으로 구성되며, 구두시험은 평가 교사에 달려있다. 하지만 부정시험이라든지 성적을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이러한 방식에 대해 교사와 학생 모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독일에서는 최순실, 정유라와 같은 사례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 지난 10월 19일 이화여대 교수들이 1886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총장 사퇴를 위한 집회를 열었다. 최경희 총장은 집회 한 시간여 전 자진 사퇴를 선언했다. 앞서 이화여대 학생들은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문제 및 최순실 딸 정유라 씨 특혜 의혹과 관련 최경희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지난 7월 28일부터 10월 21일까지 본관 점거 농성을 진행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심심찮게 내신 조작을 둘러싼 잡음이 일어나고 있는 현재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 이러한 평가 방식을 도입한다면 아마도 난리가 날 것이다. 주관식 평가도 쉽지 않을 것이고, 구두시험은 온갖 말썽의 온상이 될 확률이 높다.  

이러한 문제가 단순히 정서적,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그 경쟁에 따른 결과의 차이가 과도하게 크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평생을 손해를 보고 살아야 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근본적 원인이다.

세 번째로 독일에서는 한국과 달리 학생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 절대평가로 이루어진다. 애초에 비슷한 학업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문제를 더 맞고 덜 맞았다는 이유로 나누어버리는 것은 대단히 비교육적일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이다. 그러한 상대평가 방식은 불필요한 과잉 경쟁을 초래하여 사회 전반적으로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의 과도한 스펙 쌓기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공교육의 활성화, 교육의 공정성 확보, 절대평가 방식 등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교육 시스템에서 우리 중‧고등학교 개혁의 단초를 마련해야 한다. 여기에는 물론 교육 후에 일어나는 지나치게 과도한 격차를 보이는 보상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 반드시 그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의 시스템을 아무리 독일식으로 바꾸어놓더라고 그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 때 만든 마이스터 고등학교의 실패가 그 사례이다. 졸업생의 대다수가 다시 대학에 간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이스터고의 원래 취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독일에는 '이화여대' 같은 대학이 없다

[조성복의 '독일에서 살아보니'] 독일의 교육 ④ 대학교

1990년대 문민 정부가 실시한 대학 자율화 정책(학과 정원의 자율 결정)에 따라 대학생 수가 급속하게 늘어났으며, 이후 대학 숫자는 그대로인데 학생 수가 감소함에 따라 대학 진학률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30~40%에 불과한 것이 우리는 80%를 넘어서고 있다. 2015년 독일 대학생 수가 약 280만 명인데 반해, 한국은 360만 명에 이르고 있다. 독일 인구가 약 8000만 명, 한국이 약 5000만 명인 것을 비교하면 우리의 숫자가 과도하게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바람직하다고 보지는 않지만, 딱히 그들만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안 하는 잘못된 사회 분위기가 큰 문제이고, 또 상대적 저임금, 승진 시 차별 등 불이익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졸과 고졸, 일류대 출신과 그렇지 않은 출신 사이의 드러나거나 또는 드러나지 않은 격차가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 유난히 큰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무한경쟁에 내몰리고 있으며, 부모들은 과도한 사교육비에 등골이 휘고 있다. 선행 학습을 위해 과외나 학원이 기형적으로 발전하고, 그에 비례하여 학교 교육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이런 와중에 학생들은 공부 기계로 전락하고, 인성은 파괴되어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삭막해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진학률이 증가하여 대학은 커졌지만 대학에서의 교육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대학 교육의 부실은 많은 학생들에게 대학을 왜 다녀야 하는지 하는 자괴감을 주고 있으며, 비싼 등록금은 부모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가난한 대학생들을 장시간 값싼 아르바이트에 내몰고 있다. 그래서 소위 '반값 등록금' 공약이 선거 때마다 정치권의 화두가 되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현재와 같은 대학의 모습으로는 그 호소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학의 모습은 사회적 비효율성과 비용의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대학 숫자를 축소하는 구조 조정과 대학 교육 본연의 역할을 되찾는 것이 매우 시급한 상황이다. 아래에서는 독일 대학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대안을 모색해보겠다.

독일 대학의 역사와 구조 

2016년 현재 독일의 대학은 약 420개에 달하고 있다. 이들은 크게 100여 개의 일반 대학(Universität)과 약 200개 전문 대학(Fachhochschule)으로 구분되고, 그 밖에도 6개의 교육 대학, 17개의 신학 대학, 50여 개의 예술 대학, 29개 행정 전문 대학 등으로 구성된다. 독일의 전문 대학은 우리의 전문 대학과는 차이가 있는데, 일반 대학보다는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기준 학기 수가 동일하고, 졸업하면 똑같은 학위를 받기 때문이다. 다만 실무에 적합하도록 특화되어 있을 뿐이다. 

이들은 또한 국립대와 사립대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대학의 숫자만으로 보면 그 비율이 엇비슷하지만, 사립대는 학생 수가 수십에서 수백 명에 불과한데 비해 국립대는 최소 만 명 이상에서 큰 대학은 3~4만 명이 넘는 규모이다. 따라서 독일 대학들은 대부분 국립이라고 할 수 있으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모두 국립으로 보면 된다.

그래서인지 일류대, 이류대 등과 같은 대학의 서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공 분야별로 어떤 학과는 어디가 유명하다 정도이다. 예를 들어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전통적으로 의학이 유명한 곳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신의 관심 분야 교수가 있는 대학을 희망하는 정도이다. 베를린 대학이 제일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일부 한국 유학생들만의 착각이다.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와도 굳이 어디 출신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쾰른 대학교 정치학 교수들 가운데 쾰른대 출신은 아무도 없었다. 

독일 대학은 1960년대 후반까지는 주로 소수 엘리트를 위한 곳이었다. 이후 이를 탈피하여 1990년대 말까지 대학생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이는 기존 질서에 저항했던 '68 혁명'의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주 정부들의 교육 정책 변화에 따라 대학의 정원 및 전문 대학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교육 문제가 주(州) 정부의 소관이다. 대학들에 대한 법적 근거가 '주 대학법(Landeshochschulgesetz)'에 있고, 이에 따라 각 주는 각각의 대학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통합 과정의 일환으로 교육 분야에서도 그러한 노력이 경주됐는데, 1999년부터 시작된 '볼로냐 프로세스(Bologna-Process)'가 그것이다. 이는 회원국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대학 과정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것이다. 독일에서는 기존의 학위 과정 대신에 학사(Bachelor)와 석사(Master) 학위를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이 볼로냐 프로세스가 도입되기 전에 독일에는 아예 학사 학위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디플롬(Diplom :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의 학위)이나 마기스터(Magister : 인문학 분야의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우리의 석사 학위에 해당했다. 이 학위를 받으면 박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과정은 보통 9학기가 규정 학기였지만, 실제로 이 기간에 학업을 마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 이 학기수를 훨씬 초과하였는데, 평균적으로 13학기 가량 소요되었다. 그래서 대학 졸업생들의 사회 진출 연령이 다른 나라보다 높았다. 현재는 디플롬/마기스터 과정과 학, 석사 과정이 혼용되고 있으나, 점차적으로 일원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학사-석사 과정이 새로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나, 독일 대학은 몇 가지 점에서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 최근에 수정된 대학 규정을 보더라도 학위의 형식은 영미식으로 바뀌었으나, 그 밖의 것들은 여전히 과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유학 경험을 되살려 그 차이점들을 살펴보겠다. 

▲ 독일 뮌스터 대학교 전경. ⓒ위키피디아


독일 대학의 특성 

첫째, 졸업 정원제 문제이다. 우리는 대학 입학에 목을 매고, 입학하면 거의 대부분이 자동적으로 졸업을 하지만, 독일은 그렇지 않다. 먼저 대학 입학부터 차이가 있다. 독일에서는 특별히 대학 입시를 치르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인 아비투어를 통과하면 대학 입학 자격을 얻게 되고, 그것으로 대학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 정유라 학사 농단, 독일에선 불가능한 이유)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 신청서를 내고 허가서를 받으면 대학에 갈 수 있다. 

대학 간 서열이 없기 때문에 특정 대학에 몰리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와 같은 입시 전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의학 등 일부 학과들은 정원 제한이 있고 경쟁이 심해서 아비투어 성적이 좋아야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입학은 어렵지 않지만, 졸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공부를 해나가는 도중에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가차 없이 낙오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외국인 유학생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2008년에서 2015년 사이 특정 학령 인구 전체를 100으로 보았을 때, 대학 진학률은 25~30%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의 고등학교 졸업 이후 통계를 살펴보면, 직업 교육을 받는 비율이 58~62%, 기타 25%, 대학 졸업 이상의 비율은 7~15%에 불과했다. 이것을 보면 졸업 정원제 실시에 따라 대학 입학자 가운데 최소 절반 이상은 졸업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졸 이상 비율의 내역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디플롬 7~13%, 박사 비율이 1.1%이다. 2014년부터는 새로이 학사와 석사 비율이 각각 1.3~1.5%, 0.8~1.0%로 잡히고 있다.

둘째로 강의와 시험이 따로 분리되어 별도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강의에서는 출석을 부르지 않는다. 참석 여부는 자유이다. 또 우리처럼 학기 중간이나 말미에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 시험의 실시는 강의하는 교수가 아니라, 전적으로 대학 당국에 의해 관리된다. 따라서 시험을 보려는 학생은 반드시 학기 초에 미리 신청을 해야만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시험 과목의 수는 우리보다 훨씬 적다. 그러나 한 과목의 내용과 범위는 훨씬 더 방대하다고 할 수 있다. 시험 시간은 보통 2~4시간이다. 필기 시험 이외에도 구두 시험 등 다양한 형태의 방식이 존재한다. 

대개 방학 기간에 실시되는 이러한 시험은 각 과목별로 응시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 대학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2~3회이다. 이 주어진 기회 안에 해당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낙제가 결정된 순간 바로 전공하던 학업을 중단해야만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이 시험 신청을 함부로 하지 못하고, 매우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동시에 입학했더라도 졸업 시기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우리가 늘 따지는 학번이나 학년의 개념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필자가 공부하던 2000년대 초반 쾰른대 사회과학대학에는 경제학, 경영학, 사회과학 등 6개의 학과가 있었는데(유럽에서 가장 큰 단과 대학의 하나), 매 학기마다 약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새로이 들어오고, 약 300명 가량이 디플롬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입학생과 졸업생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사회과학대학에서 도중에 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중도에 탈락되었다고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전공을 바꿔 학업을 계속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독일 내 다른 지역 또는 대학으로 옮겨가더라도 같은 공부를 다시 할 수는 없다. 반드시 다른 전공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과를 구성하는 방식이 우리와 달라서 전과를 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

예를 들어 인문학 분야 마기스터 과정에서 철학, 사회학, 영문학으로 구성된 학과에서 공부하다가 사회학을 낙제했다면, 철학과 영문학은 그대로 유지하며 사회학 대신에 역사학 또는 심리학을 선택하는 학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런 경우 대체로 대학도 옮겨가게 된다. 독일 학생들의 학력을 보면 종종 여러 대학에서 공부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대개 이런 사유 때문일 것이다. 

전공을 바꿔서도 학업을 마치지 못하거나, 첫 낙제에서 대학에서의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할 경우, 즉 대학에서의 학업을 완전히 중단하는 경우 그동안의 학업 결과를 가지고 그에 합당한 적절한 직업 훈련을 받고 취업의 길로 나서게 된다.

셋째, 교육 및 평가 방식이 우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대부분의 평가가 절대 평가라는 점이다. 최저 기준을 넘으면 패스(4점), 만족(3점), 우수(2점), 매우 우수(1점) 등으로 점수를 얻는다. 해당 교수들이 문제를 출제하고 채점을 하겠지만, 시험 및 발표 과정은 학교 당국이 공무원 행정 처리하듯이 관리를 하기 때문에 대단히 엄격하고 냉정하다. 마치 우리의 공무원 시험이나 고시를 치르는 것과 유사하다. 독일이라면 이화여대 정유라 사례는 애당초 상상하기도 힘들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방식은 크게 강의와 세미나로 구분된다. 강의는 주로 정교수가 담당하는데, 출석은 물론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이 없이 강의실을 찾아가 들으면 된다. 일반인도 자유로이 청강이 가능하다. 멋있는 노신사 교수의 강의에는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수강생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기본 과정(Gundstudium)의 경우 수강생이 적게는 수백 명에서 천 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강의는 나중에 시험을 치를 때 도움이 된다.

세미나는 강의보다 훨씬 더 많이 개설되는데, 여기서는 참가자 수를 제한한다. 대개 수강 신청이 필요하며, 참석할 경우에는 강의와 달리 반드시 출석을 해야 한다. 2번 이상 무단 결석할 경우에는 학점(증명서)을 못 받게 된다. 세미나에서는 수강생 모두 돌아가면서 주제 발표를 하고 그에 대해 적극적인 토론을 해야 하며, 학기가 끝나고 방학 기간에 소논문을 작성하여 제출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증명서(Schein)를 받게 되며, 전공에 따라 필요한 증명서의 개수는 달라진다. 

넷째, 독일 대학에는 등록금이 없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사립 대학에는 등록금이 있다. 1990년대 동서독 통일 이후 정부 재정 상황이 악화되자 기민/기사당을 중심으로 등록금을 부과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오랜 논의를 거쳐 2000년대 들어 일부 주들의 대학에서 한 학기에 500유로를 받았었다. 하지만 베를린 등 나머지 주에서는 끝내 도입하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독일에 처음 갔을 때 등록금 도입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유학을 마칠 즈음에서야 쾰른 대학에서도 도입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디플롬을 마치고 박사 과정으로 넘어가서 끝내 등록금을 낼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박사 과정에는 등록금이 없다) 그런데 이 등록금마저 가난한 학생들에게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오래 가지 못했고, 2010년대 초반 다시 모두 폐지되었다.  

독일 대학에 등록금이 없는 까닭은, 즉 대학을 세금으로 운영하는 것을 국민들이 수긍하는 이유는 대학 진학률 30%, 엄격한 졸업 정원제의 실시, 국가 차원의 소수 정예 인재 육성,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일반인 청강 허용이나 대학 도서관의 공동 이용과 같이 대학의 공공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우리 대학의 현실에서 반값 등록금이나 등록금 폐지와 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 쾰른 대학교 내 중세 철학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uns) 동상 앞에서 학교 친구들과 함께 한 필자(왼쪽). ⓒ조성복



서울대 A+ 학점 비결, 독일에선?

[조성복의 '독일에서 살아보니'] 독일의 교육 ⑤ 대학교의 질적 측면
조성복 독일정치경제연구소 소장        
2016.12.07 15:49:48


지난 글에서 독일 대학의 구조적, 형식적 측면을 살펴보았다. 독일에는 대학 간 서열이 없고, 절대평가와 졸업정원제가 실시되고 있으며, 강의와 시험이 구분되어 학사가 엄격하게 관리되고, 일반인 누구나 강의를 듣거나 도서관의 이용이 가능하여 대학의 공공성이 살아있기 때문에 대다수 대학들이 등록금 없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번에는 그 내용적, 질적인 측면에 대하여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겠다.

주입식 교육이 아니다  

먼저 독일에서의 교육은 단순한 주입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독일도 엄격한 주입식 교육을 했다. 이에 따른 표준적 인재 양성은 과거 대량생산 체제에 알맞은 교육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학문의 발전과 정보유통이 활발해지면서, 특히 인터넷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단순한 정보는 그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누구나 언제든지 그와 같은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정보 자체가 힘이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단순한 주입식 교육은 더 이상 의미를 갖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 방식은 여전히 그와 같은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배울 때 보통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등 사실에 대한 정답 찾기나 일정한 해석을 정답으로 정하고 그것과 다른 생각은 모두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그 혁명이 왜 일어났는가?" 또는 "일정한 사건이나 기사가 프랑스 혁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하는 식의 원인 분석이나 개인의 새로운 해석 또는 주장이 중시된다. 

독일의 교실에서는 이처럼 학생들의 창의적 생각을 환영하고 존중한다. 이는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지문을 읽고 문단을 나누는 시험에서, 학생이 원래 교사가 만든 모범 답안과 다르게 문단을 나누었더라도 그렇게 구분한 논리가 명확하다면 똑같이 만점을 준다.

또한 우리처럼 학과 시간에 배운 문제가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드물다. 수업시간에 윤동주의 '서시'를 통해 시를 분석하는 방법을 배웠다면, 시험에서는 똑같은 시를 출제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별 헤는 밤'처럼 다른 시를 주고 분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서울대에서 A+를 받는 학생들의 비결이 교수의 강의 내용을 숨소리까지 그대로 베껴 답안을 작성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충격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방식은 독일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쾰른대 한 교육학과 교수는 학생들에게 시험에서 자기가 강의한 내용은 쓰지 말라고 주문한다. 자신이 말한 것들은 이미 알고 있으니, 학생들 자신의 생각을 쓰라고 당부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쓰다 보니 과거 한국에서의 대학 시절 한 대목이 떠오른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이기 때문에 첫 학기에는 반드시 채플에 참석하고, 교양필수로 '기독교개론'이란 과목을 들어야 했다. 중견 신학 교수의 강의를 듣고 시험을 봤는데, 학점이 F가 나왔다. 항의를 위해 바로 담당교수를 찾았는데, 방학이라고 이미 미국으로 떠난 후였다. 그래서 학점을 수정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후에는 귀찮아 더 이상 찾아가지 않았지만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래전 일이라 그 시험과 관련하여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다. 아마도 신의 존재와 관련한 질문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해 썼던 답안 내용은 지금도 생생하다. 강의시간에 배운 것을 쓰지 않고 당시 종교 관련 고민하던 나름의 생각을 적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조시마 장로 편에 나오는 한 가지 일화를 인용하며 의견을 썼었다.

"러시아의 한 소도시 시장의 이야기이다. 그는 젊었을 때 그 도시에서 불가피하게 살인을 했다. 이후 잘못을 뉘우친 그는 열심히 일하여 성과를 내고 시장에도 당선되었다. 그는 여기서도 일을 잘하여 시민들의 칭송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과거 일에 대해 계속 고민하다가, 자신의 생일 파티에 모인 수백 명의 손님들 앞에서 30년 전 살인사건의 범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손님들은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조차도 믿으려 하지 않는 자신의 과거 잘못에 대해 그 시장은 왜 그렇게 괴로워하며 고백할 수밖에 없는지 궁금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어느 늦은 밤 이 부분을 읽다가 이것은 인간의 감성이나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신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 전율했던 기억이 있다. 

그 사건을 소개하고 앞서 이 같은 해석을 적으면서 나름 훌륭한 답안이라고 만족했다. 내심 좋은 성적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낙제점을 받은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것들, 문제 제기‧근거 있는 주장과 토론‧논문쓰기

독일 대학의 기본과정(Grundstudium, 학사과정)에서는 학술용어의 개념이나 사실관계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후 본과정(Hauptstudium, 석사과정)에서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보다는 현상의 분석, 이론과 실제, 인과관계의 도출 등이 주요 과제가 된다.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제대로 된 질문(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독일어로 '푸라게스텔룽(Fragestellung, 문제 제기)'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일상에서의 질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관련 주제에 대해 정통해야 하고, 해당 분야에 대한 이론적 배경도 갖춰야 한다. 특히 사회과학의 경우에는 문제 제기만 보아도 그 논문의 질을 대충 파악할 수도 있다.

또 제대로 된 토론 문화를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농담하지만, 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논리적이고 근거 있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동시에 남의 주장을 경청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타협과 양보가 가능하고 의미 있는 토론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을 비롯하여 방송이나 학회 등 우리의 토론 문화를 살펴보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곳은 아마도 정치권일 것이다. 이렇게 서로 경청하지 않은 협상의 결과는 적절한 타협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또 다른 문제점은 우리는 타협을 하나의 야합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 독재시대의 산물이라고 본다. 당시에는 일방적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상황에서 타협이란 굴복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권의 힘의 관계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었고, 사회세력들 간 이해관계가 복잡해져 상호 주장하는 바를 주고받는 타협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시민들의 광화문 촛불시위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 또는 탄핵을 추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것은 결국 정치인들의 몫이다. 협상과 타협을 못하는 무능한 대통령과 정치인들 때문에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벌써 여러 차례의 토요일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세미나에서 관심 있는 테마를 골라서 자신만의 문제 제기를 하고 답을 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주제발표를 하고 토론을 한 후에 논문을 작성하는 것이 독일의 대학에서는 필수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학문적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리포트 과제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별다른 문제 제기 없이, 또는 어떤 사실에 대한 요약 내용을 대충 짜깁기해서 제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이런 점들이 나아졌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독일의 대학에서 1번의 기초 세미나와 4번의 주 세미나에서 그와 같은 훈련을 받았다. 기초 세미나에서는 10~15쪽, 주 세미나에서는 20~25쪽의 소논문을 작성하였다. 그중 한번은 인용 문제 등을 이유로 3번이나 논문을 수정하여 제출하고 아주 힘겹게 증명서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훈련은 나중에 디플롬 논문을 쓸 때나 박사 논문을 작성할 때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기본적 컨셉은 매번 같기 때문에 양적으로 또는 질적으로 확대하고 심화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적 경계의 느슨함 

독일 대학에서의 학과 간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느슨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자 한다면, 정치학 교수와 접촉하여 허락을 받으면 가능하다. 이 경우 유일한 전제조건은 디플롬이나 마기스터 학위이다. 볼로냐 프로세스에 따라 이제는 석사(Master) 학위가 조건이 될 것이다. 여기서 그 학위가 경제학이든, 사회학이든, 또는 인문학이나 자연과학, 심지어 공대 출신이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나중에 교수가 될 때도 마찬가지이다. 최초 출신 학과를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성골이네, 진골이네 하면서 지독한 학과 순혈주의에 젖어있다. 대학 간 서열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젊었을 때 한순간에 결정된 학벌이 평생을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세분화한 학과도 그 자체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실제로 한국에서 경제학과를 졸업했던 필자는 유학 후에 정치학과에서 강의 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정치학과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찾아갈 곳도 거의 없었고, 가더라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일 대학에서 교수 되기 

독일 대학에서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 교수자격취득)'을 받아야 한다. 이는 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의 후속 과정으로 보통 4~5년에 걸쳐 진행되는데, 이들은 대개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하빌리타치온 논문을 작성하게 된다. 이 논문은 박사 때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이 과정을 마친 사람을 '프리바트도젠트(Privatdozent)'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흔히 시간 강사로 번역하는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교수보다 더 많은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학위를 받은 후 대학으로부터 부름(Beruf)을 받아야 정식 교수(우리의 정교수)가 될 수 있다. 이 때 학위를 받은 후 부름을 받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약 4년 정도이다. 이 시간이 지난 후에는 대개 '외래교수(außerplanmäßig Professor)'로 남게 된다.

대학에서의 교수 채용은 대단히 신중한 과정을 거친다. 쾰른대 재학 중일 때 정치제도 분야의 교수를 채용하는 과정을 직접 지켜본 적이 있다. 3학기에 걸쳐 3명의 시간 강사가 매번 한 학기씩 강의를 했고, 그 가운데 한 명이 최종적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채용절차는 까다롭지만, 그 이후에는 우리와 달리 교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논문 실적이 저조하다느니, 저서가 너무 적네 등의 이유로 교수의 학문적 활동에 거의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교수의 재량에 따라 연구하고 활동하면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하빌리타치온 과정이 다른 나라에 비해 독일 연구자들의 교수 진입을 너무 늦추게 한다는 비판에 따라 박사 학위자를 바로 조교수(Juniorprofessor) 채용하고 진급시키는 시스템도 병행되고 있다. 

이 정교수의 숫자는 우리보다 적은 듯 보이지만, 그러한 교수직 밑에는 사강사를 포함하여, 다수의 박사, 디플롬/마기스터들이 소속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이들을 통틀어 '도젠트(Dozent)'라고 한다. 강의는 주로 교수가 맡아서 하고, 나머지 도젠트들은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를 맡아서 이끈다. 

이들 도젠트들은 보통 4~5년 정도 거의 준공무원에 해당하는 안정된 신분과 수입을 보장받고 연구실을 배정받아 자신의 학업에 몰두할 수 있다. 물론 이들에 대한 교수의 권위와 결정은 절대적이지만, 그러한 영향력은 철저하게 공적인 범주에 한정된다.

반면에 지도교수의 강아지 미용 심부름까지 해야 했다는 한국 대학원생의 이야기는 독일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강사제도는 독일의 도젠트 제도와 비교할 때 너무도 열악하고 비참한 수준이다. 안정된 신분도 없고, 수입은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으며, 기간의 보장도 없고, 연구실도 주어지지 않는다. 대학 내에서도 철저하게 승자독식이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대학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사례를 참고하여 먼저 대학의 수와 대학생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졸자와 고졸자의 사이의 과도한 임금격차를 줄여 불필요하게 대학에 가는 것을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 그래서 꼭 필요한 사람만 대학을 가도록 해야 하고, 단순한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대학 교육의 질을 올려야 한다.

또 대학의 공공성을 점차적으로 강화하여 등록금을 줄여나감으로써 돈이 없어 공부할 수 없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교육기회의 공정성을 보장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학의 서열화를 폐지해 나가고,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의 관계도 재정립되어야 한다. 끝으로 과도한 격차를 보이는 교수와 강사 사이의 간극을 좁혀 나갈 수 있는 교육계의 보다 전향적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