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자는 가장 꼼꼼히 읽는 첫 독자”
다작이 곧 달문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렇더라도 놀라운 수치다. 달문이 아니면 의뢰가 이어질 리도 없다. 올해, 번역가 노승영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만 13권이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로드사이드 MBA> <숲에서 우주를 보다> <만물의 공식> <철학 한입 더> 등 분야를 막론한다. 7년차 번역가인 그는 지금까지 39권을 냈다. 출판계 동료들은 “인문학 전반과 과학 분야에서 일정 이상의 수준으로 번역을 해낼 수 있는 역자는 소수다. 그중에서도 그가 눈에 띈다” “양서를 꾸준히 번역하면서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많은 독자의 호응을 얻었다”라며 그를 올해의 번역가로 추천했다.
배수아·김명남의 이름도 등장했다. 각각 ‘읽는 맛을 살리는 동시에 글의 아름다움까지도 추구한다’는 점, ‘과학 분야에서 저자만큼이나 신뢰할 수 있는 번역가’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명은 경기도 일산 인근에 가까이 산다. 얼마 전에는 함께 모이기도 했다. 일산동구 중산마을 입구, 번역가 노승영의 작업실을 찾았다. 한 달 전쯤 집 앞 상가 건물 2층에 마련한 자리다. ‘허브 다이어트’라고 쓰인 간판이 아직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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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번역가 노승영씨(위)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공부했다.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에서 일하기도 했다. |
올해에만 13권의 책이 나왔다. 어떻게 가능했나?
묵혀놓았던 원고가 올해 나왔을 뿐이다. 보통은 1년에 5권 정도 번역한다. <대중문화 오천년의 역사>는 번역한 지 좀 됐다. 시기를 타는 책들이 아니어서 출판사 일정에 따라 미뤄지는 경우도 있다.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공부했다.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 이력이 특이한데, 번역은 언제부터 관심을 두었나?
중학교 때 (학습)전과 같은 걸 보면 번역문이 나와 있는데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하고 이렇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영문학과에 입학할 때부터 번역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언어학을 부전공했다. 언어학·철학·심리학 등이 다 합쳐진 게 인지과학이다.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서 그쪽을 전공했다. 컴퓨터 회사는 언어학과 선배가 차렸다. 번역 사전을 만들기 위한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했다. 환경에 관심이 있어서 환경운동연합에서 3년 정도 활동가로 일했다.
본격적으로 번역에 뛰어든 계기는?
번역가 강주헌 선생의 수업을 들었다. 번역 작가 양성 과정이다. 전에는 어떻게 번역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 수업을 듣고 출판사랑 연결되었다. 강주헌 선생이 펍헙(pubhub)이라는 번역 그룹을 만들어 거기에 속해서 같이 책도 찾았다. 첫 책은 2007년 출간된 <페이퍼 머니>다.
한 달에 얼마나 번역하는지. 고료는?
200자 원고지로 한 달에 한 800~900장 작업한다. 책 한 권이 대략 2000장짜리라 2~3개월 걸린다. 양이 많은 건 3500장짜리로 5개월 정도 걸린다. 처음 번역하는 이들은 장당 3500원 정도 받는다. 많이 받는 분들은 장당 6000~7000원 정도라고 들었는데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번역가의 하루는 어떤지 궁금하다.
애들이 초등학생이라 아침에 학교 가는 거 도와주고 같이 나온다. 11시까지 일하다가 집에 들어가 청소를 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나와서 일한다. 애들이 태권도나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사무실에 오면 한 시간 정도 있다가 같이 저녁 먹는다. 나와서 일하기 전엔 딱히 시간 구분 없이 일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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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씨는 인문학 전반과 과학 분야의 책을 주로 번역한다. 위는 그가 한국어로 옮긴 책들이다. |
번역한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작업하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건 이매진 출판사에서 나온 <일>이다. 미국의 1960년대 갖가지 직업을 가진 이들의 구술사를 푼 책인데 삶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입말을 그대로 옮긴 거라서 재미있게 작업했다. 좋은 책이다. <대중문화 오천년의 역사>는 내가 골라 출판사에 제안해서 냈다. 잘 몰랐는데 해보니까 예전 고대 수메르어를 영어로 번역한 글들도 있고 라틴어나 고대 영어가 나와서 어렵더라. 굉장히 애먹었다. 번역은 할 때마다 제일 어려운 것 같다. 항상 새롭고 어려운 게 나온다.
외서 출판을 제안하기도 하나?
번역 그룹 펍헙이 저작권 에이전시 역할도 한다. 출판사는 번역 여유 기간을 많이 주지 않는다. 판권 계약을 하면 빨리 책을 내야 하기 때문에 보통 몇 달 안에 끝마쳐야 한다. 정말 탐나는 책을 놓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기획도 같이 하는 게 도움이 된다.
번역의 매력은?
독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책을 만든다는 매력이 있다. 최초의 독자가 되는 거고 가장 꼼꼼히 읽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 강주헌 선생의 경우 굉장히 빨리 한다. 오래 붙들고 있는다고 좋은 번역은 아니다. 생각의 흐름을 글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약간 신들린 것 같은 상태에서 하는 게 좋을 때가 있다.
좋은 번역이란?
번역은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영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원서를 읽을 수는 있다. 그런데 사전 찾아보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문화적인 배경도 알아야 한다. 여러 가지 뜻이 있어서 관련 자료도 찾아봐야 한다. 독자 개개인이 하면 시간 낭비니 번역자가 해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었나?
번역료가 제때 안 들어오던 초창기에 그랬다. 보통 책이 나온 다음에 번역료를 받았다. 몇 년째 못 받는 경우도 봤다. 번역료는 10년 전이나 비슷하다. 지금은 계약금 형태로 먼저 받고 출간 후에 나머지를 받는다.
번역하는 책 말고도 책을 많이 읽나?
다양한 책을 번역하니까 여러 분야 지식을 공부한다. 요즘은 과학이 재미있다. 책에서 좋은 표현들을 배우기도 한다. 번역가는 언어학자가 될 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비교언어학을 매번 하는 거니까. 그리고 두 언어에 대해 성찰하게 되고…. 그런 것들도 재밌더라.
번역에서 중요한 건 무엇인가?
영어를 잘 이해하는 것보다 한국어로 된 책을 읽고 친구들한테 쉽게 설명해주는 능력이 오히려 더 필요한 것 같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게, 번역할 때 단어 대 단어의 의미가 맞는지 생각하는데 책 속에는 저자의 전략이 들어 있다. 설득하고 이해하기 위한 전략을 포착해야 한다. 독자들이 봐도 잘 모른다. 잘 읽히고 이해가 되고 그런 차이가 있다. 기계적 직역이라고 하는데 글자만 한글이지 한국어라 보기 힘든 문장도 있다. 자기가 원서를 제대로 이해하더라도 그걸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다.
번역 일은 외로운 작업일 것 같다.
사람들과 교류를 잘 하지 못하니까 외로운 직업인 건 맞다. 그래서 번역가들이 SNS를 열심히 한다. 온라인상에서 소통을 많이 한다. 나도 번역하다가 언어에 대한 생각, 한국어나 영어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그 단상을 쓴다.
한국에서 번역가로 살아가기는 어떤가?
일반 독자들은 번역을 부차적인 존재로 생각하니까 요구하는 것도 좀 다르다. 작가가 쓴 걸 왜곡하지 말고 전달해달라는 분들이 대다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딱딱하게 쓰지 말고 쉽게 풀어서 쓰라고 한다. 오역 문제가 가장 크다. 아예 없을 수는 없는데 오역하면 요새는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지적당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카뮈 번역 논쟁에 대한 생각은?
내용은 모른다. 다만 태도에서 다른 사람의 번역을 공격하면서 그걸 책의 홍보 수단으로 삼은 건 좀 바람직하지 않다는 느낌이 있다. 당사자에게 공감하는 부분도 있다. 카뮈에 빙의해서 번역한다고 했는데 번역가들은 저자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한국어로 쓰면 어떨까 상상하곤 한다.
번역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책을 많이 읽어라. 번역 시작하고 읽으려면 늦으니까. 나는 이것저것 하지만 자기 분야를 하나쯤 갖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면 편집자와 얘기할 때도 거기에 대해 전문가로서 조언도 해주고 신뢰를 쌓을 수 있다.
정의가 뭐냐고? ‘돈’이지 뭐야
지난 한 해, 자사 책을 되사들이는 사재기와 해외 유명 작품에 대한 과다 선인세 논란으로 홍역을 치른 출판계를 기다린 건 편법 할인이었다. 2014년 1월, ‘초감성 에세이’를 표방한 도서 한 권이 출판계를 달궜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씨가 유럽을 돌아보고 나서 쓴 책이다. “중요한 것은 ‘유럽’이 아니라 ‘여행’ 자체”라는 깨달음을 전하겠다는 의도로 쓴 듯한 이 에세이는 출간되고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목록의 최상단에 올라섰다. 저자의 진의와 필력에 독자들이 감탄했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다른 이유가 큰 것 같다. 해당 도서는 출간과 동시에 인터넷 서점에서 반값에 판매되었다. 1만5800원짜리 책이 7780원 할인된 가격에 팔렸다. 출판사가 이 책을 실용서로 분류해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발행일로부터 18개월이 지나지 않은 책은 19% 이상 할인할 수 없다. 단 실용서는 제외”라는 도서정가제 법에 따른 것이다. 정여울씨의 책만이 아니다. 실용서란 “주로 실무에 관계된 실용적인 내용의 도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도서, 수험 서적” 등을 말한다는 기준으로 볼 때 ‘어째서 이게 실용서지?’ 하고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책들이 출간되자마자 반값 할인으로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중에는 <오즈의 마법사>나 <셜록 홈스> 같은 고전문학도 있었다. 책을 ‘싸게’ 팔려는 출판사들의 ‘노력’에 독자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독자들이 마땅치 않아 했던 건, 책을 싸게 파는 걸 마땅치 않게 보는 나 같은 업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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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도서정가제를 앞두고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진열대에 할인 행사를 알리는 알림판이 세워져 있다. |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출판사들의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출판팀이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을 통해 빅4 출판사(김영사, 문학동네, 민음사, 창비)의 경영 상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빅4 중 3곳의 당기순손실 합계가 약 31억원에 달했다”라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 베스트셀러를 여러 권 만들어낸 대형 출판사들조차 어려움을 맞았다. 단순히 과도기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침체를 반등시킬 만한 계기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불똥은 출판사 직원들에게도 튀었다. 지난 4월, <한겨레>가 단독으로 보도한 “중앙북스, 전체 직원 40% 사직서 쓰게 해, 민음사, 직원 6명 해고했다 논란 일자 철회, 출판편집자 40명 중 절반 이상 해고 경험”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따르면 큰 몸집을 감당하기 힘들어진 출판사들에 본격적으로 감원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 같이 힘을 합치고 지혜를 짜내서 이 위기를 벗어나보자는 사해동포적 마인드 같은 건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손가락질받았을 만한 편법을 동원해가며 제 살길만 찾기 바빴다. 이제는 동종업계 종사자든 언론이든 누가 뭐라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는 분위기 정도가 과거와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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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쌤앤파커스(위)는 사원 성추행 문제로 논란을 빚었다. |
<뫼비우스의 띠지>가 벗겨낸 출판계 추문들
와중에 젊은 출판인들 몇몇이 뜻을 모았다. 그들은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앉아 자신들이 축적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책만 소개하는 다른 팟캐스트와는 달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책을 더 팔아보겠다는 욕망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동지적 안타까움’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출발했다. 올봄부터 궤도에 오른 팟캐스트 <뫼비우스의 띠지>(이하 <뫼띠>)를 누구보다 반긴 건 출판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출판 노동자들은 SNS를 통해 ‘속 시원하다’는 소감을 털어놓았고, 제보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의 반응은 쌤앤파커스 출판사의 성추행 문제가 불거졌을 때 절정에 달했다. 9월, “유명 출판사 상무 성추행 사건 뒤늦게 공개… 여직원 ‘수습 때 오피스텔 데려가 옷 벗으라 요구’라는 기사가 <경향신문>에 단독으로 보도되었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만 거론되던 문제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오해와 불신이 거듭되는 가운데 <뫼띠>는 ‘올바른 정보’를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이를 계기로 책이라는 외피에 가려 술자리에서나 떠돌던 ‘추문’들이 구체적인 정황 설명과 함께 <뫼띠>로 제보되었다. 박태근, 백상웅, 정유민. 세 사람의 입을 통해 드러난 출판계의 성추행 사례들은 하나같이 쌤앤파커스 못지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책을 만드는 인간들은 뭔가 다를 것이라는 환상’의 붕괴였다. 독자들은 기함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해결된 건 없었다. 쌤앤파커스 대표는 “그동안 상식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았던 저와 직원들이 보인 행동들의 이유와 진실은 오래지 않아 밝혀질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출판사를 매각하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한편 개정된 도서정가제의 시행을 앞두고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가뜩이나 안 팔리는 책이 개정된 도서정가제로 인해 더욱 안 팔릴 거라는 전망과 이후로 책값이 비싸질 거라는 낭설이 시행 전부터 나돌더니 급기야 출판사와 독자가 한마음 한뜻으로 책을 팔고 샀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목적을 상실한 ‘판매·구매’처럼 보였다. ‘저들을 믿을 수 없으니 살(팔) 수 있을 때 사(팔)자’라는 것이 전부였다. 독자들 눈에 출판사들은 ‘이익을 위해 담합을 서슴지 않는 이기주의적인 집단’이었고, 출판사들이 보기에 독자들은 ‘싸거나 남들이 사는 책이라면 우르르 몰려가는 몽매한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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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와이즈베리에서 재출간된 <정의란 무엇인가>의 행사 참여를 위해 마이클 샌델(왼쪽) 교수가 방한했다. |
왜 하필 그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였을까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나흘 뒤에는 마치 총체적 난국의 출판계를 상징하는 듯한 사건이 벌어졌다. 김영사가 출간한 밀리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이하 <정의>)를 와이즈베리가 재출간한 것이다. <정의>의 출판권 계약 종료를 앞두고 김영사가 처음 선인세(약 2300만원)의 10배인 20만 달러(약 2억원)를 제시했으나 이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한 와이즈베리가 출판권을 가져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와이즈베리는 보도자료를 통해 “새로운 번역과 감수, 해설을 보완해 재출간한다”라면서 “원문을 독자 수준과 눈높이에 맞춰” (김영사판 <정의>보다 이해하기 쉽게) 번역했음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영사도 이례적으로 반박 보도자료를 내며 “타 출판사가 성공적으로 출판한 책을 거액을 투자해 출판권을 가져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출판사 고유의 메시지와 출판 정신을 담으려고 했는지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라고 비난했다. 하필 이 책의 제목이 <정의란 무엇인가>였다는 점, 해당 저자의 후속작이 와이즈베리에서 출간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섣부른 희망도 먹구름 같은 절망도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이 글을 끼적이는 내내 희망도 절망도 없이 묵묵히 써나갈 뿐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부쩍 자주 머릿속을 맴돌았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묵묵히. 책을 만들고 있는 지금의 내 심정은 그러하다.
‘역사’와 ‘자본’이 읽히는 ‘결정장애’ 사회
말 많고 탈 많은 곳이 어디 출판계뿐일까만, 2014년 출판계는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여러 이슈에 대해 말이 많고, 그 이슈를 책으로 만들려는 열심이 지나쳐 탈이 많았다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롭게 시행된 도서정가제에 파묻힌 출판계는, 그야말로 설왕설래만 하다가 허송세월했다. 그래서일까. 2014년 한국 출판계는 ‘이거다’ 싶은 트렌드를 많이 내놓지 못했다. 책과 출판에 대한 진중한 이야기보다 그것을 둘러싼 주변부 이야기만 가득했던 2014년 출판계. 그래도 곳곳에서 양서는 태어났고, 눈 밝은 독자들도 건재했다. 그렇게 올해도 새로운 출판 트렌드 몇몇이 빛을 보았다.
2014년 출판계의 핵심 키워드를 꼽으라면 단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명량>과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이 일등공신이다. 1800만명에 가까운 관중을 극장가로 불러 모은 영화 <명량>의 열기는 책으로도 이어졌는데, 이순신 관련 책은 다 열거하기조차 벅찰 정도다. <난중일기>가 새롭게 주목받았고, 소설이 서너 편, 리더십 관련 서적도 줄을 이었다. 어린이책과 만화도 제법 여러 권 출간되었고, 이순신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유성룡의 <징비록>도 나름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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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출판계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역사’다. 영화 <명량>(왼쪽)과 드라마 <정도전>의 열기는 책으로도 이어졌다. |
그중 이순신 열풍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작품은 김훈의 <칼의 노래>가 아닐까 싶다.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이 도전장을 냈지만, 문학동네로 출판사를 갈아탄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섬세한 심리묘사를 주무기 삼아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드라마 <정도전>의 선전에 힘입어 정도전에 관한 책도 여럿 출간되었으나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역사에 관한 관심은 의외의 작가들의 작품으로 태어나기도 했다. 그 작가들은 다름 아닌 한강과 성석제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과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특유의 내밀한 문체로 그려냈다. 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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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한강(위)은 <소년이 온다>에서 ‘5월 광주’를 다룬다. |
교 3학년생 동호의 눈에 비친 광주민주화운동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작가는 연민의 시선으로 동호를 바라보면서도, 광주민주화운동이 배태한 오늘의 역사 현실을 고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성석제는 <투명인간>에서 주인공 김만수와 그 가족들의 삶이 해체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가족 해체의 원인은 거센 산업화의 물결이었다. 성석제는 내남없이 가난하던 시절, 온몸으로 삶에 맞서야 했던 무지렁이들의 인생을 통해 역사의 한 자락을 들춰낸다. 그간 한강은 인간 심리의 미묘한 지점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성석제는 살아 숨 쉬는 듯한 이야기의 완결에 천착했던 작가다. 그런 두 사람이 현대사를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과거에도 역사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이 없지는 않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필두로 황석영의 <장길산>, 김주영의 <객주>, 이병주의 <지리산>, 박경리의 <토지>, 홍명희의 <임꺽정> 등 1980년대를 풍미한 대하소설들은 역사 교과서에서는 미처 배우지 못했던 이 땅의 질곡 많은 역사를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교과서였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독자들이 10권 내외의 대하소설을 빼놓지 않고 읽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독재 권력에 대한 민중의 집단적인 저항의식의 발로.” 그러나 대하소설은 민주화의 열기가 잦아들면서 시들해졌다.
‘자본주의를 견디는 법’을 보여준 두 권의 책
비록 대하소설은 아니지만, 역사 문제를 정면에 내세운 소설들이 다시금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사회의 퇴행에서 그 답을 찾아야만 하지 않을까. 정치에는 기대가 없는 요즘이다. 경제라고 속 시원한 구석이 없다. 양극화라는 말은 이제 현실적이지 못하다. ‘대격차’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제는 1대99도 모자라 0.01대99.99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 사회 전반의 퇴행은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독자들은 역사를 배우며 오늘을 살아갈 방법을, 그것을 기반 삼아 내일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2014년 최고 화제의 저자는 당연히 토마 피케티다. <21세기 자본>은 하반기 출판시장의 거의 유일한 활력소였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 열풍을 주도하며 모처럼 베스트셀러의 위용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본래 베스트셀러는 시장 전체를 견인하며 다양한 논쟁과 그 결과물의 출간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21세기 자본>은 그 일을 충실하게 해냈다. 사실 <21세기 자본>은 출간되기 전부터, 즉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문만으로도 화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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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미생>의 선전에 힘입어 원작은 200만 부 이상 판매고를 올렸다. |
선후 인과관계는 따져봐야겠지만, 어쨌든 소문 이후 마르크스의 <자본>을 새롭게 해석한 책들이 줄을 이었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자본론 공부> <오늘 ‘자본’을 읽다> <욕망 자본론> <자본론을 읽다> <자본의 17가지 모순>을 빼고도 <자본>에 관한 책은 올해 차고 넘쳤다.
한때 나라 망치는 사상으로 금서라 탄압받았던 <자본>이 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되살아난 것일까. 문화연구자 이원석은 <기획회의> 제381호(2014년 12월5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지가 2년이 지나도록 살림살이가 나아지기는커녕 더 팍팍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단지 그것 때문에? 이어지는 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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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링북 <비밀의 정원> 돌풍은 수많은 아류작들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
이제야 우리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볼 준비가 된 것이다.”
생각해보자. 삼성가 사람들은 무슨 회사 하나 상장하고 5조원 넘는 돈을 손에 쥐었다. 있는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만, 서민들은 전세 걱정 월세 걱정에 내남없이 하루살이를 근심한다. 누구라도 자본주의의 위기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자본>의 인기는 앞으로도 몇 년, 아니 인간의 탐욕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끝없이 회자될 것이다. 임계점에 도달한 우리 사회가 <자본>을 어떻게 읽고, 어떤 모습으로 활용할지 궁금하다.
< 자본>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을 학구적(?)으로 돌파하는 방편이라면 2014년 하반기 출판시장을 출렁이게 했던 컬러링북 열풍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낸 각박한 사회를 ‘몰입’을 통해 이겨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8월 말 출간된 <비밀의 정원>의 돌풍은 연말까지 이어지면서 수많은 아류작들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컬러링북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몰입’이라는 키워드로 귀결된다.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어 힐링이 된다”라는 것이다. 색을 칠하는 지극히 단순한 행위가 복잡한 세월을 이겨내는 힘인 셈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현대사회의 병폐와 잇닿아 있다. 출판평론가 김성신은 이렇게 말한다.
“현대사회에서의 효율은 대중이 활용할 수 있는 효율이 아니다. 한마디로 지배의 효율일 뿐이다. 이를 배경으로 노동환경은 나날이 더 가혹해져간다. 또한 현대의 노동환경은 근본적으로 개별적 존재에게 성취감을 허용하기 어려운 시스템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순간 잊을 수 있는 몰입과 성취감, 그것에 쉽게 중독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컬러링북은 현실 망각, 현실 도피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기획회의> 제371호, 2014년 12월5일자).
과학책의 진화…과학이 연애·결혼·이혼을 설명한다?
드라마 <미생>의 선전에 힘입어 윤태호의 웹툰 단행본 <미생>이 200만 부 판매고를 올렸다. 고졸, 그것도 검정고시 출신인 장그래의 성장기를 담은 <미생>은 만화의 가치를 다시금 인식하는 기회였다. 그간 만화는 수준 낮은 장르 혹은 학습만화 정도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웹툰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만화를 보는 세간의 시선이 조금씩 변했다. 재미와 함께 감동, 교훈 등을 선사하는 매체가 된 것이다. 감동과 교훈이라곤 하지만 “공자 왈 맹자 왈”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미생>에서 보듯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한, 그야말로 삶이 전쟁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문제는 삶에 기반한 이야기가 웹툰 등을 통해 널리 소개되고 있지만, 우리는 현실을 타개할 어떤 결정권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를 대표하는 책이 <결정장애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무한대로 확장된 선택의 가능성 앞에서 오히려 자기결정권을 포기하고 무력감에 시달리는 ‘메이비족(Generation Maybe)’이 늘어나고 있다. 2012년 독일 일간지 <디 벨트>에 저널리스트 올리버 예게스가 기고한 내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책이 <결정장애 세대>다.
올리버 예게스는 지역을 막론하고 신세대들이 결정장애를 경험한다고 하지만, 실상 현대인들 모두 결정장애를 갖고 있다. 무한하게 확장된 가능성 앞에서 환호하지만, 실제로 그 가능성으로 뛰어들 용기도 없고, 사회적 안전망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젊은이들이 ‘3포 세대’인 까닭은 무엇일까. 단지 용기가 없어서? 아니다. 사회가 이들을 용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정장애는 신세대뿐 아니라 진퇴를 결정해야 할 기성세대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대인 특유의 질환인 결정장애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야말로 2015년 출판의 가장 큰 과제이자 트렌드가 될 것이다.
과학책의 진화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두드러진 트렌드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최고의 과학책 중 한 권이었던 <어메이징 그래비티> 이후 과학책 출간 경향과 흐름이 점차 변했다. 그간의 과학책들은 주변부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대개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알몸으로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유레카’를 연발했다는 사실만 알려주었다. 정작 부력의 원리에 대한 설명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최근 출간되고 있는 과학책들은 과학적 지식을 정확하고 알기 쉽게 전달하고, 그 이후에 재미를 찾는다. 뿌리와이파리의 ‘오파비니아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과학적 지식은 명쾌해지고, 그것을 담아내는 틀거리도 좋아졌다. 최근 출간된 <만물의 공식>도 눈여겨볼 만한 책이다. 컴퓨터에서 단계별로 진행되는 일련의 명령을 뜻하는 알고리즘을 통해 현대사회의 현상학을 풀어낸 재미가 쏠쏠하다. 과학적 지식인 알고리즘을 오락·연애·결혼·이혼·법률·영화·음악과 접목하면서 과학적 지식을 배우는 일이 따분한 것만은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지금 미증유의 길을 걷고 있다. “이제 우리 역사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야 한다”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대변혁의 시기에 우리가 서 있는지도 모른다. 대변혁의 시기가 맞다면, 오늘의 책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까. 단지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장삼이사들의 삶을 변혁시키는, 하여 우리 사회의 지형을 바꾸는 일에 복무해야 하지 않을까. 2014년의 모든 책들이 바로 그 일을 위해 달려왔다면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당장 2015년 한국 출판계가 벼려야 할 새로운 가치를 찾아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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