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국정원·검찰이 야당보다 힘센 한국, 어떻게 봐야 하나

일취월장7 2016. 10. 2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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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검찰이 야당보다 힘센 한국, 어떻게 봐야 하나

2016.10.20 11:32:06


[투 트랙 민주주의] ① 97년 이후 한국사회와 정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투 트랙 민주주의>(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의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병행접근'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그동안 제도정치 중심적인 민주주의론, 혹은 운동정치 비판론(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에 대한 반 비판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정치의 계급, 국가환원론(손호철 서강대 교수)에 대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정당정치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운동을 정치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그것과 제도정치 간의 긴장과 보완의 측면에서 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전망을 모색한다. 정치학자들이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의 운동정치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사회운동이 초래한 부정적 영향에 주목하는 점을 비판하는 필자의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정치를 곧 계급 혹은 사회적 역학의 직접적인 반영 혹은 그 당위적 문제의식 속에서 헤게모니의 역할, 정당정치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적절하다. 

정치의 범주를 이렇게 이분화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만, 드는 의문은 왜 이 두 영역의 정치만 존재하는가라는 점이다.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의 확대 과정에서 등장한 가장 중요한 정치세력은 사회운동이 아니라 사실상 재벌과 사법부(헌법재판소), 보수언론이 아닌가? 라는 당연한 질문이 제기된다. 즉 시민사회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대기업, 재벌, 로펌은 로비나 압력집단의 형태로 가장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했고, 보수언론은 헤게모니 투쟁의 전면에 부상했다. 거기에다 사법의 정치화 과정은 매우 노골적이었다. 검찰의 활동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기존의 여야 정당의 활동보다 훨씬 더 심대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보수적 시민사회의 정치화, 국가기관의 정치화는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즉 제도정치와 운동정치라는 이분법은 오히려 87년 민주화 전후의 문제의식에 지나치게 갖혀 있는 것이 아닌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경계에 있거나, 그 밖에 있는 생활정치, 특히 지방자치 단체의 운영 과정에서의 지방정부와 지역운동, 지역운동의 지방정부 거버넌스 참여, 노동운동, 노동 시민사회 운동의 지방정부 참여 등은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도 제기된다. 1, 2권의 대부분의 논의는 중앙정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정당과 사회운동 간의 갈등과 긴장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지, 정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주거 생활 공간에서의 민주화 과정, 작업장에서의 권력 각축과 민주주의의 문제 등은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도 이 책은 역시 87년 전후의 문제의식에 여전히 머물러 있으며, 97년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국가나 시민사회에 더 깊이 침투한 이후의 과정에 대한 문제의식이 약하다. 즉 97년 이후 제도정치나 운동정치 양자 모두의 문제해결 능력의 저하, 촛불시위 등 새로운 사회운동의 등장, 지역 생활세계의 식민화, 소비주의 자기개발논리의 강화로 인한 시민사회 단체의 위축 등이 한국의 민주화에 가져온 심대한 변화를 이 두 정치의 개념으로 잘 포착할 수 있을 지는 좀 회의적인 점이 있다. 

저자도 부분적으로 지적하는 점이지만, 정당의 대표성 약화, 제도정치의 한계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계급대표성과 사회적 대표성의 약화, 정치적 무관심, 청년들의 탈정치화, 정당 엘리트에 대한 불신은 지금 미국의 대선, 영국의 브렉시트 사태, 그리스나 스페인의 새 정치세력의 등장, 폴란드에서의 극우세력의 등장 등의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서구민주주의 혹은 대의제 민주주의, 근대 국가의 인민주권론이 갖고 있었던 근본적인 한계가 노정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정치가 사회경제적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형식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인 셈인데, 이것을 포스트민주주의 국면에서의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새로운 각축과 역할의 변화라는 문제의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구성적 각축'이라는 현실진단과 전망은 '제도정치'의 성격변화, '운동정치'의 주체와 성격의 변화, 그리고 이 두 영역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의 '내용'과 역할에 대한 명확한 정립 없이는 너무나 막연한 현실진단으로 머무르고 말 것이다. 

(미국의 경우, 제도정치 일반에 대한 불신이 샌더스와 트럼프 열풍으로 나타났고, 그 열풍은 다시 제도의 힘에 굴복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제도의 혁신, 운동의 재활성화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한반도의 큰 소동으로 끝날 것인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운동정치는 일부 샌더스 지지자들이 추진하는 것처럼 새로운 정당 혹은 정치집단으로 나아가야하는가? 아니면 현재의 정치제도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하는가?)

'정치의 국가화', '정치의 사회화'의 개념은 마치 정치가 선행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국가차원의 헤게모니 각축, 혹은 국가기관의 개입(필자의 표현으로는 '금단'과 '배제')이 진행되고, 다른 편에서 사회적 저항과 동원이 시작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마르크스나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의 '사회 중심성'을 강조하고 베버 등은 '국가 중심성'을 전제한다. 즉 정치가 먼저가 아니라 사회 혹은 국가가 먼저이고, 그 기저에는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치는 결과이자 종속변수인데, 마치 정치가 독립변수이자 원인변수인 것처럼 설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18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전 세계에서 정치는 혁명, 민족 해방 투쟁이었고, 그것은 국가를 전복하거나 국가를 세우는 작업이었다. 즉 국가 다음에 정치가 있는 것이므로 ‘정치의 국가화’가 아니라 국가 안의 정치사회, 혹은 국가를 넘어선 지구정치(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 혹은 1945년 이후 지구적 자본주의와 관련된 지구적인 계급관계)라는 문제의식을 먼저 설정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한미 FTA, 쇠고기 수입문제, 한일 위안부 협상, 사드 배치 문제는 정치사안인가, 국가사안인가? 이 모든 결정은 한국의 여당 정치세력 내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한국의 주권 범위 밖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이런 사안에 대해 야당이 거의 아무런 입장과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은 야당의 무능과 무책임의 결과인가 아니면, 이것이 한국 조건에서 원래 초정치적 사안, 즉 국가사안이기 때문인가? 이것을 반대하는 운동들은 '운동정치'인가 반체제운동인가? 국정원과 검찰의 통진당의 내란음모 사건 제기,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은 정치적 결정인가, 국가적 결정인가? 왜 한국의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에 입각해서 이런 사안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가? 한국의 야당은 정당인가? 아니면 필자가 일부 언급하였듯이 국가의 일부인가? 국가와 정치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필자의 이상과 같은 개념 설정이 갖는 문제점의 원인은 바로 필자가 비판하는 최장집 교수의 정당중심적 설명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정리, 특히 정당정치를 보는 사회중심적 시각(자유주의적인 시각)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의 국가화'의 힘이 언제나 작용한다"라는 설명 만으로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것은 필자가 '전쟁정치'의 문제설정에서 강조한 것처럼, (준)전쟁상태의 국가에서는 정당정치의 자율성은 극도로 위축되고, 국가와 사회운동이 언제나 전면에 부딪치고, 양자의 충돌은 의회가 아닌 법원의 판결로 종결되며, 정당정치는 언제나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일종의 상시적 '비상사태', 모든 피고용자의 비정규직화, 실업자화, 고용 불안 상태라 본다면, 이것은 과거의 전쟁과는 다른 행태로 (경제)전쟁을 만성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도정치를 통한 문제해결의 가능성은 다른 방식으로 축소된다. 그래서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보면 87년 민주화 이전, 혹은 문민정부 과정에서의 각축, 그리고 포스트민주화 국면 등의 시기 구분도 과연 타당한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한국적 사회과학 정립의 문제의식 속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정치사회학"을 정립하려는 매우 야심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이 책 전체의 개념과 이론, 그리고 시기구분과 각 사건에 대한 해석과 설명, 포스트 민주주의의 대안 모색이 어느 정도 한국적인 특수성에 뿌리 내리고 있으며,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는 지금 시점에서 민주주의의 심화 확대라는 보편적인 과제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이 어느 정도 한국에서의 특수한 것이며, 어느 정도 보편적인 것인지에 대한 구분이 필요해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에서의 '정치'라는 장(場)이 갖는 성격(곧 한국에서의 사회, 혹은 국가)에 대한 더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미국, 유럽 국가들과의 유형적인 비교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으로는 일반화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온 경로, 즉 역사에 대한 천착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표면적인 비교에 그칠 것이다. 

본 연구자도 '정치의 장'(저자인 조희연의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영역과 성격에 관한 문제 설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중인데, 기존에 제기했던 '전쟁정치'와 '기업사회'의 개념에 역사의 살을 붙이고 이론으로 일반화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본 연구자의 잠정적인 생각은 한국에서 정치와 사회를 연결시키는 고리는 거의가 차단되어 있다는 점이다. 선거는 개인과 정당 혹은 정치를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고리이고, 선거 외에 개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게 되어있다. 우선 정당원이 되는 것이 어렵다. 공무원 교사 기업체 간부나 심지어 직원들도 정당원이 되는 것이 어렵다. 한국에서 정당원은 오직 자영업자만 가능하다. 

사회적 고리가 차단되어 있다. 노동조합, 지역의 사회조직, 직능단체 등이 정당에 조직적으로 결합하기 어렵다. 여당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야당은 그 고리가 없다. 최근 이화여대와 성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에서 사회는 탈정치성을 선포함으로써 존속할 수 있다. 각종 기부금품 모금법, 선거법은 대단히 엄격하게 되어 있어서 일상의 영역에서 사회구성원, 사회집단이 정치집단과 연계를 갖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여당은 국가정당이며, 야당은 국가정당의 실패를 먹고 살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존재다.

그렇다고 국가 환원론, 자본 환원론으로 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벌, 그리고 국정원과 검찰이 야당 이상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나라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지역정치가 공간이 거의 차단되어 있는 나라에서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병행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의 정치사회를 진단하기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투 트랙 민주주의>(조희연 지음, 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 책 머리 중 


▲ <투 트랙 민주주의>(조희연 지음, 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 ⓒ서강대학교출판부

이 책의 목적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정당체계 기반의 제도정치 혹은 반대로 운동정치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일면적인 분석과 달리, 나는 이 책을 통해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상호 관계 안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 과정을 보다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이를 나는 '투 트랙 민주주의'라고 표현하였다. (중략)

이 책에서 나는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그의 일련의 저작들을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고, 그것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넘어 고자 나름대로 노력했다. (중략)

바라기는, 20~30년 후 한국사회과학도가 현대 한국민주주의를 논의할 때, 최장집도 비판하고 그를 비판적으로 서술하는 나의 저작도 비판하고 하는 식으로 '한국민주주의에 대한 연구의 축적'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그럴 때라야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은 지난 9월 3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책 <투 트랙 민주주의>(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 출판을 기념해 열린 학술토론회 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조희연 교육감과 저자들의 동의를 얻어 두 편을 게재합니다. 




'촛불집회'를 어떻게 정치화할 것인가

2016.10.28 09:53:38



[투 트랙 민주주의] ② '투 트랙 접근'과 한국 민주주의의

             

몇 가지 딜레마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하 조희연)의 <투트랙 민주주의 1, 2>(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는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적 변화과정을 재구성하고 각 시기의 성격을 해석하고자 시도했다.

이 저작은 이론적 기초, 개념화, 역사적 지식, 분석과 종합적 통찰에 이르기까지, 학문적 탐구와 집필에서 부분적으로도 충족시키기 쉽지 않은 모든 덕목을 두루 갖추고 있는 역작이다. 또한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대상과의 독백적 대화에 갇혀 연구를 수행하는 데 비해, 이 저작에서 조희연은 넓게는 한국 민주주의를 진단하고자 시도해 온 많은 선행연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좁게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이하 최장집)와 손호철 서강대 교수(이하 손호철)이라는 한국 진보정치학계의 두 거두와의 치열하고도 겸허한 대결 속에서 쟁점을 포착하고 자신의 주장이 놓인 위치와 그 의미를 명확히 정의내리고 있다. 나아가 이 저작은 서구적 기원을 갖는 추상이론에 의존하거나 그 반대로 한국적 특수성만을 역사기술적으로 부각시키는 두 가지 편향을 극복하고, 한국 현대사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제도정치-운동정치의 상호작용 동학이 함축하고 있는 보편이론적 함의를 성공적으로 규명해내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측면에서 <투트랙 민주주의 1, 2>는 한국 민주주의 연구의 한 획을 긋는 의미심장한 작품이며, 이후의 연구들이 반드시 참조하고 대결해야 할 준거점의 하나가 될 것이다. 아래에서는 이 저작이 기여하고 있는 바와 그 한계, 또는 남겨진 과제를 몇 가지 측면에서 짚어보고자 한다. 

1.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투트랙 민주주의'론의 이론적 출발점은 근대 민주주의의 이중성에 대한 성찰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한편으로 주권의 소재를 소수의 통치자에서 시티즌십(citizen-ship)을 인정받은 모든 시민으로 전환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도민주주의는 그 권력의 원천인 시민들로부터 괴리된 지배기구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양자의 괴리는 완전히 해소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에서 배제된 인민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주체화하고, 제도정치는 그러한 도전을 때로는 억압하고 때로는 흡수하면서 반응한다. 민주주의의 이러한 이중성을 주목하는 조희연은 한편으로 '정치'를 제도정치로 환원시키고 그 외부를 '비정치'로 규정하거나 위험시하는 경향을, 다른 한편으론 제도민주주의가 근대 인민주권의 성취임을 부정하고 그것의 지배기능만을 보는 관점을 모두 비판한다. 민주주의의 이중성 이론에 기초한 역사적, 경험적 분석은 그 이중성에서 유래하는 정치적 역동성을 주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정치/비정치'의 경계는 자신이 유일한 정치의 주체라고 주장하는 지배 집단과,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인민 간의 각축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정치적 투쟁과 협상의 대상이며 역사적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제도정치-운동정치의 이중성과 그 경계를 둘러싼 각축이야말로 조희연이 민주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해석하는 시각이다.

이상의 관점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어느 한 면만을 보는 관점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의미 깊은 이론적 기여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중요한 정치이론상의 질문이 이 이론 틀에서 간과되고 있다.  

첫째, 민주주의 제도가 어떻게 하면 사회 내의 상이한 가치지향과 이해관계를 제도정치의 장으로 반영하고 배제된 사회계층의 목소리를 전달할 것인가? 둘째, 시민사회는 동질적 집단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이 움직이는 장(場)이라고 했을 때, 운동정치가 민주주의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의 양면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첫 번째 질문에서 조희연은 제도정치를 "일종의 '엘리트' 대표자 정치"(44쪽)로 이해하고 그것은 다만 아래로부터의 운동정치에 의해서만 개혁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민주주의 제도의 효율성과 제도정치 행위자들의 역량은 그 자체로서 한 사회의 민주주의의 질을 규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두 번째 질문에서 조희연은 반복해서 '인민'과 '인민 주체의 정치'를 말하고 있으나, 현실에서 데모스(demos)는 단일한 주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개인적, 집단적 행위자들로 구성되며 민주주의론은 그러한 현실로부터 어떻게 집단적인 정치적 의지를 도출해낼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시민사회 내의 어떤 집단이 더 강력하게 정치화되고 제도정치에 영향을 미치느냐, 어떤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장집은 제도정치중심론이라는 추상적 이론을 좇고 있다기보다는 이 두 가지 문제의식, 즉 제도정치가 사회 문제와 사회적 약자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운동정치가 바이마르의 전례처럼 민주주의를 불안정하게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제도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을 찾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봤을 때 조희연이 최장집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상호 작용을 추적하는 것을 넘어서, 어떤 제도정치인가? 어떤 운동정치인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어떤 형태의 결합이 한국 민주주의의 질을 개선하거나 악화시켰는가?'에 대한 대답을 제시해야 할 것 같다. 그로부터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규범적, 전략적 과제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2. 헤게모니, 문화, 자본주의 

조희연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집단적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 과정과 그 구조적 결과를 추적하는 방법론으로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변화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각축의 방법론'을 통해 체계와 구조에 내장되어 있는 잠재성의 자기전개로서 역사를 재구성하는 목적론적 접근, 또는 정치 외부의 구조적 힘에 의해 정치변동을 설명하는 외재적, 결정론적 접근보다 더 성공적으로 구조와 행위의 변증법을 재구성해내고 있다. 나아가 조희연은 그와 같은 각축의 동학을 다원주의적 의미의 상호작용 과정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신그람시주의적 시각"(169쪽)에서 "헤게모니의 구성을 둘러싼 각축과정"(167쪽)에 대한 분석, 그리고 그것의 조건인 동시에 결과인 헤게모니 '지형'(terrain), 즉 "일정 기간 지속되는 '관계의 구조'"(157쪽)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정치에 대한 운동정치의 도전은 대항헤게모니의 실천으로 이해되며, 또한 운동정치에 의한 제도정치의 변화는 헤게모니 지형의 변화로서 이해된다. 조희연은 이러한 접근을 통해 구조결정론의 일면성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제반 정치 행위를 상호주관적 주체형성 과정으로, 행위자간 관계를 특정한 민주주의론적 함의를 갖는 세력관계로 읽어내고 있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을 관통하는 헤게모니 개념이 조희연이 스스로 규정한 바와 같이 '신그람시주의적' 관점을 충실히 관철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첫째, 조희연은 헤게모니 개념이 문화와 정체성, 주체형성에 관련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각축과 경합을 분석하는 데에서 그의 헤게모니 개념은 '권력' 개념과 호환가능하게 보이며, 그의 헤게모니 지형 개념은 '세력관계'와 호환가능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헤게모니 개념은 때로는 현실주의 정치학의 패권 개념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람시에게 헤게모니 개념의 특정한 의의는 경제적 계급위치로 환원될 수 없는 지적, 도덕적 지도력의 문제를 이론과 실천의 중심으로 들여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신그람시주의적 시각에서의 헤게모니 분석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느냐뿐 아니라, 어떤 지적·도덕적 실천과 제도적 장치를 통해 동의의 기반이 창출되거나 위기에 처하게 되는가에 대한 풍부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람시적 관점에서의 두 번째 비판은 헤게모니와 자본주의의 관계, 지적·도덕적 지형과 계급구성 간의 관계가 이 저작에서 적극적으로 다뤄지지 않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람시 사상은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 역사결정론, 대기론을 넘어서고자 했던 당대의 여러 맑스주의적 시도 – 레닌,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등을 포함한 - 의 흐름 속에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헤게모니 개념의 '특정한' 의의, 즉 바로 이 개념을 통해 특별히 예리하게 포착할 수 있는 현실의 측면은 의식과 윤리, 문화와 정체성의 차원이다. 그러나 그람시 헤게모니론은 계급론, 자본주의론, 사회주의 이행의 전망과 분리될 수 없다. 그에게 지적, 도덕적 지도력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두 ‘주요 계급’,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여타의 '부차적 계급'들에 대해 행사하는 영향력을 뜻했다. 그에게 헤게모니 지형, 즉 '세력관계'는 주요 계급과 부차적 계급들 간의 관계를 뜻했다. 물론 오늘날 그와 같은 계급적, 맑스주의적 관점을 확장시키고 다원화시키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조희연의 이 저작은 자본주의 분석과 계급 분석에 충분한 위상을 부여하지 않은, 다소 간 정치주의적 일면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점에서 조희연은 손호철의 일면성을 보완하고는 있지만, 손호철이 이론적으로 목표했으나 충분히 달성하지 못한 사회구성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손호철보다 더 성공적으로 달성했는지는 물음표로 남는다. 

3.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한국 정치와 시민사회
 

이 저작은 한국전쟁 종전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민주주의의 성격변화를 체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극우반공분단체제(53년 체제), 개발독재체체(61년 체제), 민주화체제(87년 체제와 97년 체제), 포스트민주화체제 등 몇 개의 정치레짐을 단계 구분하고 있고, 민주화체제와 포스트민주화체제의 4개의 경합국면을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조희연은 '레짐(legime)'과 '경합'이라는 쌍개념을 손에 쥐고, 이제까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어떤 저술보다도 체계적으로 정치레짐의 지속과 변화를 집단적 경합과 경합결과의 구조화 간의 변증법이라는 형식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이중 조희연이 '포스트 민주화 체제'라고 정의한 레짐 혹은 역사단계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두 가지 특성을 주목할 만한 것 같다. 첫째 제도정치의 측면에서 '결손 민주주의'(Wolfgang Merkel)의 성격과 '포스트 민주주의'(Colin Crouch)의 성격이 공존한다. 즉 한편으론 선거체제 이외의 다른 민주주의 요건들, 예를 들어 수평적 책임성과 시민적 자유 등이 상당한 정도 결핍되어 있거나 심지어 퇴행하는 문제, 나아가 그러한 결손이 하나의 레짐으로서 고착되어 가는 문제가 있다.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의 형식적 제도들은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으나 정치과정의 투입국면에서나 산출국면에서나 사회문제에 대한 실질적 해결능력과 대표성, 정당성은 보장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이처럼 '아직도 민주주의가 덜 된' 측면과 '민주주의지만…'의 측면이 함께 있다는 점, 양자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점이 인지적, 실천적 난점을 유발한다. 실천적으로 이것은 민주주의가 여전히 진보정치의 중요한 과제인지, 아니면 경제적 불평등과 재분배 문제에 집중해야 하는지의 쟁점에 관련된다. 

둘째, 운동정치의 측면에서 시민사회의 조직화가 아직까지 대단히 미흡한 상태에서 미조직, 자생적 운동정치가 고도로 활성화되었다는 양면성이 있다. 시민사회는 결사체의 장이며, 운동정치는 시민사회의 가장 활동적 부위지만 시민사회 자체는 아니다. 몽테스큐가 말한 국가-개인 사이의 두터운 '매개영역', 그람시가 말한 '시민사회의 촘촘한 모세혈관'은 제도정치를 장악한 집단이 사회 전체를 좌우하는 권력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지대다. 오랜 식민지배와 독재시대를 겪은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될 만한 시민사회의 조직적 기반이 아직까지 매우 취약하다.  

그런 가운데 2008년 이명박 정부 집권 직후 폭발한 촛불집회, 그 후에 방송장악반대, 4대강반대운동부터 국정원 비판, 세월호 집회에 이르기까지 '촛불집회'는 미조직된 대중의 자생적, 유동적 집단행동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처럼 되었다. 그것은 조직된 시민사회의 여러 한계를 극복하거나 보완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조직된 시민사회의 두터운 층을 형성해가는 길을 억제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 것인가는 21세기 한국 시민사회와 운동정치의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투 트랙 민주주의>(조희연 지음, 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 책 머리 중

▲ <투 트랙 민주주의>(조희연 지음, 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 ⓒ서강대학교출판부

이 책의 목적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정당체계 기반의 제도정치 혹은 반대로 운동정치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일면적인 분석과 달리, 나는 이 책을 통해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상호 관계 안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 과정을 보다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이를 나는 '투 트랙 민주주의'라고 표현하였다. (중략)

이 책에서 나는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그의 일련의 저작들을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고, 그것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넘어 고자 나름대로 노력했다. (중략)

바라기는, 20~30년 후 한국사회과학도가 현대 한국민주주의를 논의할 때, 최장집도 비판하고 그를 비판적으로 서술하는 나의 저작도 비판하고 하는 식으로 '한국민주주의에 대한 연구의 축적'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그럴 때라야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