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뭐냐고 아이에게 묻지 말자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사회학을 가르치는 엄기호씨는 한국에서 공부에 대한 개념이 세 번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지금 공부를 하는 목적은 신분 상승이나 자아실현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서 공부를 하는 사회가 돼버렸다.
| [455호] 승인 2016.06.09 17:51:49 |
“진로 강의에 왔지만 나는 진로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폭탄선언’으로 엄기호씨는 강의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장차 ‘노동하는 사람’이 아닌 ‘자아실현 하는 사람’이 될 것인 양 환상을 심어주는 현행 진로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서란다. 강의 제목대로 ‘입시를 견딘 청춘’이 대학에서 길을 잃는 이유도 어쩌면 이것과 관련이 있을 터. 5월17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펼쳐진 두 번째 진로학교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대학 강단에 서다 보면 ‘진로=자아실현’인 양 착각하는 학생들을 흔히 만나게 된다. 그래서 오늘 나는 진로보다 오히려 ‘왜 공부를 하는가’에 대해 묻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한국 사회에서 공부에 대한 개념이 바뀐 계기가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 1990년대 이전까지의 시기다. 이때까지는 왜 공부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 명확했다. 신분상승을 위해서였다. ‘공부가 재미있냐 재미없냐’는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그 시절에는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했다.
심지어 전두환 정부 때는 과외 금지 등 급진적인 조처가 행해진 결과 ‘공부를 통해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다’는 판타지가 횡행했다. 그 덕분에 지독하게 가난했던 나와 내 누이도 이를 악물고 공부해 공장 대신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당시는 입시에 사회자본·문화자본 따위가 끼어들 여지도 별로 없었다. 외국에 살다 와서 영어 발음이 원어민 수준이라도 학력고사에서 통하는 건 오직 <성문종합영어>를 얼마나 열심히 외웠느냐였다. 질기게 공부해 ‘교육자본’을 다져놓으면 이것을 나중에 ‘경제자본’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 여기서 지식의 권위가 생겨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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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엄기호씨는 “자신의 삶을 탁월한 삶, 멋진 삶, 자유로운 삶으로 바꿔낼 수 있는 ‘삶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좀 더 궁극적인 교육의 목표가 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
사실 학력고사는 너무나도 예측 가능한 시험이었다. 학력고사 다음 날이면 일등부터 꼴찌까지 전국 순위가 나오면서 내가 대학에 갈 수 있는지, 간다면 어느 대학에 갈지를 단번에 계산할 수 있었다. 예측 가능성이 작동하던 그 시절, 학교를 지배한 것은 반학교(counter-schooling) 문화였다. 당시 학생들에게는 학교가 곧 세상이었다. 당구장·예배당 정도 말고 ‘학교 밖’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보듯 하다못해 반항을 하기 위해서라도 학교에 가야 했던 시절이다(웃음). 당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아이들은 비난을 받곤 했다. ‘뼈 빠지게 돈 버는 너네 부모님은 생각 안 하냐?’는 식이었다. 이 시기, 한국에는 개인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한국 사회가 급격하게 소비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당대를 상징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청소년에게 던진 메시지는 선명했다.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는 상황을 거부하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는 것이었다. 이 시기, 자기를 욕망의 주체로서 재발견한 청소년들이 신분 상승 대신 눈을 돌린 것은 다름 아닌 자아실현이었다.
더불어 나타난 흐름이 탈학교 문화다. 대안학교·공동육아 등이 이 시기 일제히 등장했다. 전교조·참교육학부모회 등 비판적인 교육단체들도 이때 생겨났다. 이들은 공부를 쓸모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난 앞으로 헤어 디자이너가 될 건데, 뭐하러 미적분을 배워야 해?”라는 식이었다. 그전까지의 공부가 신분 상승을 위한 도구였다면 이때부터 공부는 자아실현의 도구가 된 셈이다. 그 결과 공부에는 치명타가 가해졌다.
요즘 진보적이라는 교사·부모는 “난 네가 좋은 대학을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한 거야”라는 말을 즐겨 한다. 혁신학교 또한 이런 흐름 속에서 만들어졌다. 행복한 교육, 행복한 배움을 표방하는 혁신학교는 기존 학교가 꿈을 묻지 않는다고 비판해왔다. 그러나 나는 혁신학교가 시대적으로 조금 늦게 등장한 듯싶어서 안타깝다.
무슨 말이냐. 한국 사회가 1997년 경제위기와 2007~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전면화된 게 일종의 생존주의다. 공부를 하는 목적 또한 이전처럼 신분상승이나 자아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로 변했다. 이들은 더 이상 “난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데 미적분을 왜 배워야 해요?”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미적분을 배우면 내가 먹고살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
얼마 전 ‘학벌없는사회’라는 시민단체가 해체 선언을 했던데, 몇 년 전부터 지방으로 강의를 다니면서 느낀 게 이미 학벌사회 하부는 완전히 붕괴돼 있다는 사실이다. 상위 극소수 대학을 제외하면 나머지 대학 서열은 거의 무의미해졌다. 이 대학엘 가나, 저 대학엘 가나 어차피 취업이 불가능한 세상이다. 연세대 졸업식 날 붙어 있던 현수막 문구를 다들 기억하실 거다. “연세대 졸업하면 뭐하냐. 백순데…”라고.
‘노오오오력’의 종착역은 소진일 뿐
오늘날의 생존주의가 고약한 것은 생존만이 아니라 성공까지 함께 요구하기 때문이다. 애플 CEO였던 스티브 잡스나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처럼 자아실현과 성공을 모두 이룬 사람들을 멘토라 부르면서 이를 본받으라고 부추긴다. 이게 불가능하다는 걸 아니까 요즘 아이들이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 반에 4~5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공부할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엎드려 잠만 잔다. 그래야 덜 욕먹고 덜 지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무기력은 이 시대의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 생존을 못해 무기력한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무기력을 택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더 문제가 될 것은 무기력한 아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공부를 잘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열심히 노력했지만 좌절하게 된 친구들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자아실현과 성공이 동시에 가능하려면 미친 듯이 살아야 한다. 웬만큼 노력하는 사람은 세상에 쌔고 쌨다. 그러니 ‘노오오오오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말장난일 뿐이다. 인간에게 150%, 200%를 하라고 노력하라는 건 삶을 망가뜨리라는 얘기다. 물론 노력해서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 되는 사람이 훨씬 많다. ‘노오오오력’의 종착역은 소진일 뿐이다. 지금을 유치원생부터 노인까지 번 아웃(burn out)돼 있는 시대라 하지 않나. 해도 안 되면 사람은 패배감·절망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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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제주도 해녀학교(위)에서는 물속에서 자기 숨의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제일 먼저 배운다고 한다. |
그런데도 부모나 교사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난 할 수 있어요(I can do it!)”다. 넌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존재이니 ‘무한한 노력’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꽃피우라는 식이다. 인간이 무한하긴 뭐가 무한한가. “아이 캔 두 잇”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진짜 용기다. 따져보면 “아이 캔 두 잇”이라는 문장에는 주어가 숨어 있다. “넌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한다(You must say)”라고 명령하는 사람이 그것이다. 이는 자본주의나 체제, 문화, 사회일 수도 있고 부모나 교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이 캔 두 잇” 뒤에는 “만약 네가 실패한다면 그건 네 책임이야(If you fail, it’s your fault)”라는 문장 또한 생략돼 있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린 이렇게 모든 짐을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열심히 했는데도 잘 안 된다 싶으면 ‘내 탓’을 하며 우울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 탓’을 하는 사람도 있다. ‘네가 조금만 더 도와주었으면 일이 잘 풀렸을 텐데, 그러지 않아 망했다’는 식으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다’며 아래 세대를 탓하는 사람도 있다. 엄청난 피해망상이다. 그 짝이 과대망상이다. ‘나는 다 할 수 있는데’ 옆에 있는 네가 안 도와줘서 이렇게 됐다는 식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아실현의 이름으로 자아를 파괴하고 있다. 그러니 제발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묻지 마시라. 옛날에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데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방팔방에서 꿈을 묻는 시대다. 부모나 교사가 쿨한 척 꿈을 물어볼수록 아이는 더 괴로워진다. ‘내가 너무 지질한가?’ 싶어서다. 오죽하면 수업시간에 “꿈 같은 거 안 찾으면 안 돼요?”라고 묻는 친구들도 있다.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한다. “안 찾아도 돼. 이번 생에는 안 되나 보지 뭐”(웃음).
입장 바꿔 생각해보시라. 자아를 발견한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여러분은 지금 자아를 발견하셨나? 아마 죽을 때까지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오늘날 자아실현의 프로세스는 나이 열여덟이 되기 전에 자아를 발견하라는 태세로 진행된다. 이게 말이 되나? 부처님도 열여덟 살엔 득도하지 않았다.
진정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면
교육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배려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식의 나르시시즘이나 ‘자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례로 제주도 해녀학교에 가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게 물속에 던져놓고 자기 숨의 길이를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 한계를 알아야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지 않았나.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는 것, 내 한계를 모르는 것이야말로 나를 위험에 빠뜨리는 ‘무지 중의 무지’다.
자기 한계를 알게 된 인간은 한마디로 설치지 않는다. 가식이나 겸양을 떠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 한계가 이것이구나’ ‘내가 모르는 게 이렇게 많구나’ 싶어서 절제할 줄 알게 된 인간은 겸손하게 배우려 든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이렇게 겸손한 인간을 기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는 어떤가? 자신의 무지를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무지한 자가 환대받지 못하는 구조여서다. 그러니 무식함을 드러낼 용기를 낼 수가 없다.
지혜롭고 절제하고 배움을 청하는 용기를 배우는 것. 이 세 가지가 공부의 목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덕을 갖춘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정치공동체(폴리스)의 목적 또한 모두가 훌륭해지는 것이었다. 집단만 훌륭하고 개인은 지질한 게 아니라, 공동체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이 훌륭해지고 노력하는 것을 공공선으로 여겨 그 노력을 공적으로 도와주는 것을 폴리스의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개인이 훌륭해질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사회를 나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삶이라 표현한다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우리는 마치 물속에서 숨을 10분 참는 사람이 훌륭하고 탁월한 양 얘기한다. 그러나 진짜 탁월한 것은 물속에 1분밖에 머물지 못할지라도 그 시간을 충만하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파악하고 이를 선용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 그리하여 자기만의 양식(style)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삶, 탁월한 삶이라고 푸코는 말했다. 이럴 때 비로소 나 자신 또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공부랍시고 학교에서 왜 쓸데없는 것들을 가르치느냐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 쓸모라는 걸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 중심으로 협소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부로써 우린 자유로운 존재가 돼야 한다. 공부를 통해 자신을 배려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덕을 갖춘 존재가 되며, 그 과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공부를 하는 목적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보건 보수건 행복이 교육의 최고 목표인 양 한목소리를 내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삶을 탁월한 삶, 멋진 삶, 자유로운 삶으로 바꿔낼 수 있는 ‘삶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좀 더 궁극적인 교육의 목표가 돼야 한다.
정리·김은남 기자
초등학교에서 왜 남학생들이 더 혼나는 걸까
한국 교육 시스템에서 십대 남자아이들의 삶은 버겁다. 야외 활동을 강조하고 쉬는 시간에 의무적으로 뛰놀게 하는 외국과는 무척 다르다.
초등학교 6학년인 민수(가명)는 이른바 ‘남성성’이 강한 아이다. 움직임이 크고 감정 표현이 직설적이다. ‘교실 밖’에서는 놀랄 만큼 적극적이지만 공부에는 영 흥미가 없다. 토론과 공동작업 중심의 모둠별 협력학습이 특히 힘들다. 민수 생각에 선생님들은 여자아이만 좋아한다. 남자만 혼난다는 피해의식이 가득하다. 핀잔과 잔소리를 퍼부어대는 여자아이에 대한 불만도 깊다. 열은 받지만 말로는 당할 재간이 없으니 욱하다가 된통 당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이런 ‘남자아이’는 넘치고 교사들은 지쳐간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데다 수시로 다툼을 유발하니 남자아이들을 제지하고 꾸중하느라 수업 진행 자체가 어렵다. 지적과 꾸중 빈도에 대한 남녀 비율을 물었더니 대부분의 교사가 8:2 내지 9:1이라고 답한다. 초등학교 교사들이 느끼는 남녀 학생의 특징은 한마디로 ‘손댈 것 없는 여자아이와 손볼 것 넘치는 남자아이’로 요약된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매사에 느리고 충동적인 남자아이 키우기가 힘들다. 담임교사의 전화번호만 떠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아들 둔 죄인’의 마음을 호소하는 부모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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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그림 |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서 대다수 십대 남자아이들의 삶은 버겁다. 격차가 큰 인지와 정서 발달, 뇌 구조와 호르몬의 차이를 감안할 때, 현행 학교와 수업의 형식은 남성성이 강한 아이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다. 청각이 발달한 여자아이들은 묻고 답하는 정적인 학습에 강하지만, 시각 우선인 남자아이들은 직접 만지고 탐색하는 활동을 좋아한다. 무엇에 빠지면 말을 ‘안 듣는’게 아니라 ‘안 들리는’ 경우도 많다. 끊임없이 신체적 발산을 원하는 남자아이들에게 ‘복도에서 뛰거나 장난치지 말아야 하는’ 공간 배치와 규칙, 일과표는 이들을 더욱 열등하거나 제멋대로인 아이들로 보이게 한다.
성장 과정에서 실패와 자존감의 상처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여성에 대한 열등감을 깊이 각인한다. 단층 건물로 야외 활동을 원활하게 하고, 쉬는 시간에는 의무적으로 밖에서 뛰어놀게 하는 외국의 유소년 교육환경과는 사뭇 다르다.
‘알파걸’로 상징되는 여성의 약진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수능 전 영역에서 여학생이 남학생을 앞질렀고, 각종 시험에서 여성 합격자의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여자아이들의 학습 태도와 능력이 우수하고, 수행평가와 수시 입학 전형에서 남학생을 압도한다. 여자아이들에게 주눅 든 십대의 남자아이들은, 2015년 대한민국 ‘성 격차 지수’가 145개국 중 115위라거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 및 기회 평등 정도를 수치화한 ‘유리천장 지수’가 OECD 최하위인 대표적 성차별 국가라는 통계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현실 세계는 여전히 남성 지배 사회다. 성별 임금 격차는 36.6%로 OECD 회원국 평균의 두 배를 훨씬 넘는다. 대부분 영역에서 남성의 권력과 영향력이 우위에 있다.
‘차이와 다름’의 시각에서 학교를 돌아보자
이런 남성 기득권 문화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우월한 능력으로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고 열등감을 자극하는 ‘여자아이’와 ‘여성’은 불편하거나 못마땅한 존재이다. 더욱이 성장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주입받은 ‘사내’ 담론은 공격성을 남성적 기질로 정당화하고, ‘남자는 한 방’ 또는 ‘실력보다 처세’라는 낡은 통념은 허세를 정당화한다. 이는 곧 ‘녀’ 등 온갖 종류의 여성 비하와 혐오 표현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파괴적으로 드러내는 일부 남성의 시선으로 이어질 개연성을 잉태한다. 여성혐오의 씨앗은 이런 데서 싹이 튼다.
‘여자들에게 항상 무시당했다’며 낯선 여성을 살해한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으로 읽히면서 거대한 분노 결집 ‘현상’을 만들고 있다. 성차별과 성혐오 의식을 차단하는 공존과 평등의 교육을 서둘러야 한다. 남녀 간 발달 단계와 특성에 대한 교육은 아이뿐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에게도 필수적이다. 몸을 쓰지 못하고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교육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스포츠 활동을 적극 권장하고 학교의 공간 구성과 배치, 학교 규칙과 일과표, 수업방식도 ‘차이와 다름’을 고려해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각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목소리 속에는 원인과 해법에 대한 구체성이 담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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