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양적완화’ 논쟁 들여다보니
박근혜 대통령이 ‘양적완화 긍정 검토’를 언급하면서 ‘한국형 양적완화’ 논란이 일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해결에 필요한 자금을 한국은행의 돈으로 조달하겠다는 것인데, 짚어야 할 대목이 많다.
| [452호] 승인 2016.05.18 16:55:50 |
지난 4·13 총선 당시,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은 돌연 ‘한국형 양적완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새누리당의 총선 참패로 이 공약은 물 건너가는 듯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불을 지폈다. 4월26일, 박 대통령이 직접 “한국판 양적완화 정책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라고 밝힌 것이다. 이를 두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양적완화가 뭔지 모를 것 같다”라고 농담을 했다. 일부 언론은 칼럼을 통해 ‘안철수 대표는 양적완화를 알까’라며 양적완화 논쟁에 뛰어들었다.
정치 지도자들의 경제 지식을 둘러싼 해프닝 같지만, 이 논쟁은 의외로 ‘사태’의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양적완화는 아직 딱 잘라 정의하기 힘든 개념이기 때문이다. 양적완화가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불리는 것은, ‘새롭게 실험 중’이며 ‘아직 검증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런 개념에 ‘한국형’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었으니, 그 정체가 미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개념이 모호한 만큼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기도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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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새누리당이 당초 표명했던 한국형 양적완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해결에 필요한 자금을, 중앙은행인 한국은행(한은)이 ‘새로 발행한 돈’으로 조달하자는 것이다. 이런 일을 추진할 국책 금융기관들이 있다. 기업 구조조정 부문에서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다. 대우조선·현대상선·한진해운 등 부실기업들의 총부채 가운데 60% 정도가 두 국책은행에서 빌린 돈이다. 이 기업들이 제대로 상환하지 못하게 되면 국책은행들은 채권자로서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다. 가계부채 부문에는 주택금융공사가 있다. 이른바 유동화 기법으로, ‘변동금리-일시상환’이라는 위험한 조건의 주택담보대출을 안정적인 ‘고정금리-분할상환’으로 바꿔주는 일을 해왔다. 상환 기간도 크게 늘릴 수 있다.
한국형 양적완화에서, 한은은 국책 금융기관들에 직접 자금을 지원한다. 돈을 찍어내 국책은행들이 발행한 채권(정부가 보증한다면 사실상의 국채)을 바로 매입하면 된다. 한은이 국책은행들에 돈을 빌려준다는 이야기다. 이 돈은 갚아야 하지만 만기는 꽤 길 것이다. 혹은 한은이 국책 금융기관에 빌려주기보다 투자하는 형식(출자)을 취할 수도 있다. 국책 금융기관들 처지에서는 갚을 필요 없이 안정적으로 사용할 돈(자본금)이 늘어난다. 이런 방법으로 조달한 돈을 기업 구조조정이나 가계부채 조정에 사용하면 된다.
언뜻 보면 ‘한국형 양적완화’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중앙은행이 국가적 차원에서 긴급한 공적자금을 정부에 공급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해서 안 되는 일이다. 현대 국가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정부와 중앙은행 사이의 규범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정부도 가계와 마찬가지로 쓸 수 있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돈을 복지나 일자리 창출 등에 마구 투입해 인기를 올릴 수 있다. 가계는 빚을 못 갚으면 파산하지만 정부는 파산할 염려가 없다. 국채라는 ‘종이 쪼가리’를 중앙은행에 건네주고 돈을 발행하라고 명령하면 된다. 그러나 정부가 원할 때마다 돈을 찍어내다 보면, 통화량이 지나치게 증가해서 엄청난 규모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현대 국가에서는 ‘정부로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규범이자 미덕으로 간주된다. 원칙적으로 정부는 세수 및 ‘민간에서 빌린 돈(국채를 중앙은행이 아니라 민간에 팔고 받은 돈)’으로만 공공지출을 하도록 되어 있다.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중앙은행에게 달라고 하면 안 된다. 모든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공공사업을 위해 중앙은행에서 직접 돈을 빌리는, 그러니까 국채를 발행해 바로 중앙은행에 파는 일이 제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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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강봉균 새누리당 선대위원장은 ‘한국형 양적완화’를 총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오른쪽은 이주열 한은 총재. |
한국형 양적완화는, 정부가 공공사업 추진에 필요한 자금을 한은으로부터 직접 조달하려는 정책이다.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명백한 침해다.
더욱이 한국형 양적완화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영국·일본 등이 시행한 양적완화와도 많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들은 정책금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전통적’ 방법으로 통화량을 조절해왔다. 물가인상률이 지나치게 높을 때는 금리를 올려 통화량을 줄이고, 반대로 물가인상률이 낮을 때는 금리를 내려 통화량을 늘리는 식이다.
소비자들은 물가 인하를 선호하지만, 세계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들의 숙원은 물가인상률을 높이는 것이었다.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다. 예컨대 지금 100만원인 피아노가 석 달 뒤쯤에 80만원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비자들이 구입을 늦출 것이다. 피아노 생산 기업의 매출은 악화된다. 모든 경제주체가 이렇게 움직이면 어떤 기업도 상품을 팔지 못하게 되고, 노동자들은 해고되며, 소비는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물가가 정체되거나 심지어 떨어지는 디플레이션 현상이다.
중앙은행들은 디플레이션 위기를 차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물가인상률을 높이려 했다(목표는 겨우 2% 정도였다). 정책금리를 계속 내리다 보니 0%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물가인상률은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책금리를 0% 이하로 내릴 수는 없다. 결국 금리 조절이 아닌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물가 인상에 나서게 된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Bank Of England)의 ‘양적완화 해설’ 자료에 따르면, 비전통적 방법은 ‘돈을 경제에 직접 주입(direct injections of money into the economy)’하는 것이다. 어떻게? 민간은행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국채를 중앙은행이 매입해주는 것이다. 국채 매입 대금은 해당 민간은행이 중앙은행에 개설해둔 계정에 꽂아준다. 민간은행이 가진 ‘보유금(reserve)’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물론 선진국 중앙은행은 민간은행에 대출을 강요할 수 없다. 다만 보유금을 증가시켜주면, 그 돈이 대출 등을 통해 은행 밖으로 넘쳐나 경기회복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낙수효과를 위한 일종의 ‘융단폭격(목표물을 겨냥하지 않고 일정 지역에 폭탄을 무차별 투하)’이다. 유감스럽게도 민간은행들은 보유금을 대출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갖고 있거나 주식 같은 금융자산, 이머징마켓 등에 투자했다. 덕분에 금융자산을 많이 가진 부유층의 소득은 올라갔지만, 일반 시민들의 살림은 여전히 곤궁했다. 양적완화로 엄청난 돈을 풀었는데도 소비·투자는 크게 활성화되지 않았고, 물가인상률도 저조한 채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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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한진해운 본사 로비에 설치된 컨테이너선 조형물. 해운업계는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고 있다. |
이런 ‘선진국형 양적완화’와 대비하면 이른바 한국형 양적완화의 특이성이 드러난다. 우선 한국의 기준금리(정책금리)는 5월 초 현재 1.5%로 0%가 아니다.
또한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매입한 것은 이미 유통 중이던 국채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구입할 국채(정부가 보증하는 국책 금융기관의 채권이므로 사실상의 국채)는 유통 중인 상태가 아니다. 당초부터 한국은행에 매각해서 정책 자금을 확보할 계획으로 발행한 국채다. 발행 즉시 한국은행에 팔게 되어 있다.
한편 한국형 양적완화는 기업 구조조정과 ‘주택담보대출 가구 지원’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조준하고 있다. 선진국형 양적완화가 ‘융단폭격’이었다면 한국형은 ‘조준폭격’을 지향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미국이나 일본처럼 ‘무차별적 양적완화’가 아닌 ‘선별적 양적완화’ 방식이다”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렇게 보면, 한국형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정도가 선진국보다 훨씬 심하다. 한국은행이 정부의 공공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바로 찍어서 바치는 격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양적완화처럼 기껏 찍어낸 돈이 금융기관의 금고 속에 처박혀 있거나 금융자산 매입에만 사용될 위험성은 적다. 그 돈은 기업 구조조정과 주택담보대출 가구 지원을 통해 실물경제로 흘러가게 된다. 한국형 양적완화는 극좌파로 불리는 영국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의 간판 프로젝트인 ‘민중에 대한 양적완화’와 외형상 매우 유사하다(16쪽 상자 기사 참조).
양적완화라기엔 터무니없는 규모
그런데 한국형 양적완화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양적완화라고 부르기에는 그 규모가 어이없을 정도로 작다. 현재 전문가들은 조선업과 해운업 등 기업 구조조정에 필요한 양적완화 규모를 5조~10조원으로 예측한다. 주택담보대출 문제에 투입할 자금을 20조원까지 잡아도 모두 25조~30조원 정도다. 이에 비해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의 총자산은 양적완화 직전인 2008년 10월 9000억 달러에서 양적완화가 종료된 2014년 10월에는 4조5000억 달러로 폭증했다. 연준이 6년 동안 매년 평균 6000억 달러(양적완화 이전 자산 9000억 달러의 67%) 규모의 국채와 다른 채권을 사들였다는 이야기다. 일본은행의 총자산 역시 양적완화에 따라 2012년 말의 156조 엔에서 3년 뒤인 지난해 말의 383조 엔으로 227조엔 증가했다. 이에 비해 한국형 양적완화로 조달할 금액(25조~30조원)은 한국은행 총자산(489조원)의 5~6%에 불과하다.
사실 이 정도의 금액이라면 양적완화 같은 거창한 용어를 갖다 댈 필요도 없다. 이미 박근혜 정부는 2014년 최경환 경제팀 출범 당시 내수활성화를 위해 각종 재정보강책으로 40조원 정도를 푼다고 발표한 바 있다. 지난해 6월에도 메르스 여파로 내수가 위축된다며 11조5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기존 제도를 확대하는 것만으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을 굳이 양적완화로 마련하겠다고 수선을 떤 이유는 무엇일까? 선거운동 국면에서, 모호하기 짝이 없는 양적완화라는 개념으로 ‘장난’친 게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부·여당의 의도가 어떠하든 ‘한국형 양적완화’ 논쟁 과정에서 제시된 방향은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기업 구조조정, 가계부채, 디플레이션 공포 등에 대처하려면, 현재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공적 자금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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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해운·조선업 구조조정이 한국 사회의 큰 현안으로 떠올랐다. 4월27일 관련 업종 노조 관계자들이 금융위원회 앞에서 구조조정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
더불어민주당 홍종학 의원이 경제개혁연대로부터 제공받은 ‘재벌기업 부실 징후’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말 현재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 48개 가운데 23개 그룹의 부채비율이 200%를 초과했다. 그중 10개 그룹은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경제 상황은 이후에도 계속 악화되었다. 대우조선·현대상선·한진해운 이외에도 구조조정 대상 기업이 계속 늘어날 수 있다. 기업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 역시 현재 예상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다. 재정정책(예컨대 증세)만으로 조달하기 힘든 정도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런 우려가 현실화되어 기업들의 부실화가 연쇄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선제적으로 구조조정을 서두를 필요도 있다. 양적완화가 하나의 자금 조달 옵션으로 남는 이유다.
야권에서는 대체로 ‘한국형 양적완화’를 ‘부실기업을 살려 재벌 가문에 이익을 주는 수단’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공적자금을 투입받는 부실기업의 대주주(재벌 가문)에게 정확히 책임을 묻는 ‘시장주의 원칙’만 관철할 수 있다면,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 공적자금을 받아야 할 정도로 기업을 망쳐놓았다면, 대주주의 지분은 대폭 축소되는 것이 마땅하다. 또 대주주의 의지를 반영해온 경영자는 퇴진해야 한다. 기존 대주주가 사라지면, 공적자금을 투입한 국가는 자연스럽게 최대 주주로서 해당 기업의 경영권을 장악하게 된다. 결과적인 국유화다. 유능한 경영자를 새로 선임해서 기업을 살린 뒤 다시 민영화하면 그만이다. 공적자금이 재정이나 양적완화 중 어떤 수단으로 조달되었든 상황은 동일하다.
야권에서는 ‘한국형 양적완화’가 특정 산업의 특정 기업에만 투입된다거나,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공적자금이 긴요한 산업부문에 투입된다는 것은 오히려 장점일 수 있다. 선진국들처럼 ‘융단폭격형’이 아니라 ‘조준폭격형’ 양적완화라면 그 혜택을 금융기관과 부유층뿐 아니라 전 사회(실물경제)에 배분하는 효율적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형 양적완화가 영국 노동당의 ‘민중에 대한 양적완화’처럼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치명적으로 침해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다른 사회적 가치들보다 훨씬 우월한지는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구조조정 자금 얼마나 필요한지 먼저 판단해야
수출 문제도 있다. 한국과 수출 시장에서 경합하는 일본의 중앙은행은 연간 80조 엔 정도의 채권을 사들인다. 그만큼의 엔화가 방출된다는 소리다. 이에 따라 엔화의 가치가 폭락해 한국의 수출경쟁력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물론 금리 인하로 원화 가치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대포’에 ‘물총’으로 대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욱이 양적완화는 국제사회에서 ‘환율 조작’이 아니라 ‘국내 통화정책’으로 통할 수 있다. 일본이 그렇게 해왔다.
지금은 한국형 양적완화 논쟁보다 시급한 과제가 있다. 국내 산업들을 점검해서 어느 정도 규모의 구조조정 자금이 필요한지부터 가급적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일자리를 잃을 노동자들을 위한 일자리 대책과 복지정책, 이에 필요한 자금 규모도 함께 추산해봐야 한다. 그다음에 필요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 고민해도 늦지 않다. 큰돈이 들지 않는다면 재정정책의 틀 안에서 마련하면 된다. 그러나 재정만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돈이 필요하다면, ‘조준폭격형’ 양적완화를 ‘중앙은행의 독립성’ 같은 도그마 때문에 포기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한국 최초 양적완화 주창자, 정부여당 비판
최배근 교수는 한국 최초의 양적완화 주창자다. 그러나 정부·여당의 ‘한국형 양적완화’ 방안에는 비판적이다. 부동산 거품을 조장하고 재벌의 경영 책임을 무마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배근 교수(건국대 경제학)는 요즘 매우 바빠졌다. 그는 2년 전부터 ‘한국판 양적완화’로 가계부채 문제를 돌파하자고 주장해왔다. 한국 최초의 양적완화 주창자인 셈이다. 미국·일본·유럽연합(EU) 같은 경제 대국들이나 시행한다는 양적완화가 한국에서 가능할까? 최 교수의 주장은 ‘소수 의견’으로 남았다.
새누리당이 20대 총선 공약으로 ‘한국형 양적완화’를 내걸었다. 최 교수가 주장해온 가계부채 문제도 양적완화의 과제에 포함시켰다. 여러 언론이 최 교수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배근 교수는 정부·여당의 ‘한국형 양적완화’ 방안에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같은 물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삼키면 독물로 변한다. 양적완화 역시 기업 구조조정이나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할 효율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부동산 거품을 조장하고 재벌 가문의 경영 책임을 무마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도 있다고 최 교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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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최배근 교수는 2년 전부터 양적완화로 가계부채 문제를 돌파하자고 주장해왔다. 소수 의견이었던 최 교수의 의견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한국형 양적완화’를 내걸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
양적완화의 개념 자체가 너무 모호하다. ‘한국형’이란 수식어가 붙으면서 더 복잡해졌다.
사실 양적완화에 대한 통일된 개념은 없다. 나라마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각국에서 아직 실험 상태니, 특정 사례를 양적완화라고 기계적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다. 미국의 양적완화를 기준으로 ‘맞다, 틀리다’라고 해서도 안 된다.
정부·여당의 ‘한국형 양적완화’에 대해 벌써 ‘(정부로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중앙은행의 역사를 봐야 한다. 사실은 (유럽에서 시작된) 중앙은행의 태생 자체가 정부와 무관하지 않다. 당초엔 민간은행이었는데, 정부로부터 ‘이 은행만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는 독점적 권한(발권력)을 얻으면서 중앙은행이 된 것이다. 이렇게 중앙은행이 되면 그 대가로 (화폐를 발행해서) 정부 재정을 지원했다. 발권력과 재정 지원을 맞바꾼 거다.
중앙은행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정부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로 들린다.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물가 안정’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은행이 정부의 공공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화폐를 마구 찍어내 물가를 올리면, 일종의 배임 행위로 간주될 수 있지 않을까.
‘중앙은행의 최대 임무는 물가 안정’이란 명제를 너무 당연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 명제에는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가가 오르면 자산가와 일반 서민 중 어느 쪽의 피해가 클까? 당연히 돈이 많은 자산가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양적완화를 개시할 당시, 보수주의 단체인 티파티가 크게 반발했다. 돈이 풀리면 화폐가치가 떨어져(물가가 인상되어),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준 폐지론’까지 나왔다. 이처럼 자산가와 금융 관련 세력은 물가에 민감하다. 이들이 중앙은행 시스템을 독점하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최대 임무가 물가 안정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그러나 미국 연준의 경우, 물가 안정보다 고용을 더욱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종의 계급 타협이다. 돈을 찍어내는 권력을 독점한 중앙은행이 돈 없는 사람들에겐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통화정책을 운영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중앙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다.
지금까지 주로 가계부채(특히 주택담보대출)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양적완화를 제기해왔다.
한국은행이 양적완화 방식으로 돈을 발행해 주택금융공사에 출자하는 방안이다. 주택금융공사는 이 자금으로 대출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가구 중 희망자의 주택을 매입한다. 희망자 가구는 부채를 정산한 뒤 남는 금액을 가진다. 그리고 살던 집에서 장기임대 조건으로 살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주택들이 매물로 쏟아져 나와 부동산 시장을 경착륙시키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해당 가구 역시 부채 상환 부담에서 벗어나 소비할 여력이 생긴다. 가계 소비가 살아나야 내수가 활성화되고, 기업들 역시 투자하게 된다.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낸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주택금융공사가 발행하는 MBS(주택저당증권)를 한국은행에 인수케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부동산 거품을 만들어 정권을 연장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행이 MBS를 매입한 돈이 금융기관들을 거쳐서 다시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면 집값을 올려놓을 수 있다. 부유층은 물론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 시장에 묶인 중산층의 지지도 끌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욱 악화시키는 방안이다. 더욱이 새누리당 방안은 (지난해 안심전환대출과 비슷하게) ‘변동금리-일시상환’ 대출을 안정적인 ‘고정금리-분할상환’으로 바꿔주는 것인데, 과연 유효할까? 안심전환대출의 경우 112만 가구가 ‘적격자’였다. 그런데 30만 가구만 상환 조건을 갈아탔고, 나머지 80만 가구는 포기했다. 원리금 상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이자와 함께 원금도 갚아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포기한 사람들이, 다시 시행되는 비슷한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을까?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금 규모를 어느 정도로 추산하는가.
현재 원리금 상환 부담 때문에 장기분할 상환으로 갈 수 없는 가구의 주택담보대출금이 모두 200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그렇다면 재원은 20조원 정도면 충분하다. 각종 금융기법을 잘 운용하면 200조원 규모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기업 구조조정에 양적완화를 활용하는 방안은 어떻게 보나.
기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전제 조건이 있다. 정부가 사과해야 한다. 민간은행들은 2010년 이후,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부실기업들로부터 대출금을 회수했다. 그러나 국책은행들은 오히려 지원금을 퍼부었다. 이런 행태는 당시 정부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현 정부와 보수적 경제학자들은 산업은행을 공격하면서 책임을 덮어씌우고 있다. 국책은행 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몰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국가가 양적완화로 조달한 돈이 특정 회사의 구조조정 자금으로 들어가는 경우 해당 기업은 국유화해야 한다. 미국도 지난 금융위기 당시 사실상 그렇게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국가 자금을 투입하면서도 대주주(재벌 가문)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갈 것 같아서 걱정된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조선업과 해운업이라면, 산업 자체를 살릴지 없앨지, 산업 내 기업들을 모두 유지해야 할지 혹은 일부를 청산하거나 합병해야 할지 등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살리는 경우, 불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한동안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살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면, 비로소 자금 투입 방안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금 투입 방법 중 재정지출보다 양적완화가 낫다고 본다.
한국 경제의 앞날을 어떻게 전망하나?
지금은 5대 산업(조선·해운·철강·화학·건설)이 취약 업종으로 불린다. 내가 보기엔 전기·전자 쪽도 위험하다. 앞으로 제조업 부문의 군살 빼기가 진행되면 한국 경제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질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인위적 경기 부양으로 경제성장률 2%대를 유지해왔다. 충격이 현실화되면 성장률이 1%대 초반으로 내려앉을 수 있다. 더욱이 내년부터 부동산 시장의 조정이 올 가능성도 있다. 자칫 장기 불황이라는 끔찍한 상황으로 돌입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들이 현실화되기 전에) 미리 대처해야 한다. 일단 문제가 터져버리면, 이를 해결하는 데 드는 비용이 엄청나게 불어나게 된다.
한국판 양적 완화, '이렇게' 가능하다
[시민정치시평] 위기와 비용의 사회화 대신 소유와 이익의 사회화를 구상하자
"한국 경제, 희망이 소멸 중…늪지형 불황"
현대경제연구원 보고서…"민간 자생력 없다" 진단
2015년 이후 내년까지 2%대 연속 성장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고되고, 현재 재계에는 구조 조정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국내 최대 재벌 삼성그룹에서도 IMF 사태 이후 처음으로 채권단에 구조 조정안을 제출하는 계열사(삼성중공업)가 나오면서 "IMF 전야를 연상시킨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18일 현대경제연구원이 한국 경제의 현 상황을 진단하는 보고서('현 불황기의 다섯 가지 특징과 시사점')를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다. 보고서는 최근 경기 불황의 특징을 ① 늪지형, ② 멀티딥형, ③ 수요충격형, ④ 전방위형, ⑤ 자생력 부족형 등 다섯가지로 정리했다.
'늪지형'은 계곡형(V자형)과 정반대다. 계곡형은 예상치 못한 대규모 충격이 원인이 되어 급격한 경기 하강 이후 빠른 반등세를 보이는 형태로 외환위기 직후와 금융위기 직후 나타난 경기의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반면, 늪지형은 대규모의 경제적 충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회복이 장기간 지연되는 모습을 보인다. 최근 한국 경제가 맞이하고 있는 불황은 글로벌 경제의 회복 지연에 따른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점점 긍정적인 경기 신호가 소멸되는 '늪지형 불황'이다. 보고서는 "이에 따라, 경제 주체들의 피로감이 점증하고 역동성이 고갈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점차 소멸 중"이라고 진단했다.

▲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소비재 내수기업 - 전문 무역상사 수출상담회에서 참석 기업인들이 관련 상담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보고서는 "늪지형이란 심각한 어려움은 없으나 경제 내 모든 부문이 거의 동시에 늪에 빠지면서 천천히 그 침체의 강도가 강화된다"면서 "이에 따라 경제 주체들의 심리가 크게 위축되면서 불황 탈출을 위한 계기 마련이 쉽지 않은 특징을 가진다"고 지적했다.
'늪지형 불황'은 합의된 진단도 쉽지 않아 타개하기가 더 어렵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대부분의 경제 지표들이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지 못하면서 경제 지표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데에 있어 합의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향후 경기를 낙관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경제 내에 좋아지는 부문도 없지만 뚜렷하게 심각하다고 평가되는 부문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경기가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는 반면, 비관적인 입장에서는 뚜렷하게 회복세를 보이면서 경기를 선도하는 경제 지표들이 없다는 점이 더 우려스러우며, 이는 장기 불황의 시작이 될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으로 본다.
이에 따라 IMF 사태 이후처럼 단기간에 경기회복이 되기도 어렵다. 회복되는 듯 하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멀티딥' 현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수요충격형이다. 장기간 경기회복 지연과 성장 견인 부문의 부재에 따른 '소득 환류의 단절'과 '소비·투자 심리 악화'에 따른 수요 부족이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불황은 전방위적이라는 특징도 있다. 경제가 불황기에 진입하였더라도 일반적으로는 호황을 보이는 부문이 존재하면서 경제 전반의 침체 폭이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내수(서비스업) 부문은 어려웠으나 수출(제조업) 부문은 환율 상승 등으로 호조를 보였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제조업 생산 증가율이 장기간 낮은 수준에 머물면서 서비스업의 생산 증가율도 하락 추세를 지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제조업 내 수출 및 내수 출하 증가율이 유사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 수출시장의 부진이 내수시장으로 전이되었다.
자생력도 부족하다. 최근에 들어 특징적인 모습으로 민간 부문이 취약한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공공 부문이 경제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보고서는 "만약 공공 부문(국민계정 상의 정부소비와 정부투자의 직접적인 지출)의 경기 안정화 노력이 없었다면 2015년 실제 경제성장률은 1%대에 그쳤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미시적인 지표를 보면 최근에 들어 민간소비가 낮은 수준을 보이는 가운데 정부소비 지출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소비의 위축을 크게 보완하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정우 "박근혜, 굶어죽을 판인데 분배는 언제 할 건가"
[언론 네트워크] 이정우 교수 "박정희 신화 바로 알아야"
이정우(65) 경북대 명예교수는 17일 저녁 경북대 강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시기의 경제발전은 분배와 복지를 무시한 채 중공업, 대기업 중심의 성장"이었으며, "독재에 의한 경제 발전은 초반에는 급격히 성장할 수 있지만 오래갈 수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또 "수많은 국민들이 서독의 탄광과 중동의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일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다"면서 "하지만 아직도 박정희 표 고속 성장을 맹신하고 있다. 지금도 그의 딸이 '선성장 후분배'를 계승하고 있다. 다 굶어죽을 판인데 분배는 언제 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이날 강연은 '5.18구속부상자회 대구경북지부',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5.18민중항쟁 36주년 대구경북행사위원회'의 공동주최로 5.18광주민주화운동 36주년을 기념해 열렸으며, '박정희-신화와 진실'을 주제로 학생과 시민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시간가량 진행됐다.

▲ 5.18광주민주화운동 36주년 기념 인문학 역사교실에서 이정우(65) 경북대 명예교수가 '박정희-신화와 진실'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2016.5.17. 경북대학교) ⓒ평화뉴스(김지연)
이정우 교수는 "보수 인사들 사이에서 박정희·이승만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이 나왔고, 박 전 대통령의 고향 구미에 가면 그를 반인반신으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아있으면 경제를 살릴 수 있었을 거라고 믿고 있으며 보수언론은 '용인술의 천재'라는 보도를 진리인양 유포시키고 있다"며 "이러한 박정희 신화를 제대로 알고,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지난 2014년 '아시아포럼21' 토론회에서 "광화문에 박정희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종필 전 총리는 광복 70주년 그의 회고록에서 "광화문 세종대왕상 뒤에 이승만, 박정희 동상이 세워지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또 구미시는 해마다 박정희 전 대통령 탄신제와 숭모제를 지내고 있다. 최근에는 탄생 100주년 기념 '박정희 뮤지컬'을 제작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우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의 대표적 업적이라고 평가받는 경제 성장에 대해 "미래 세대를 생각하지 않고 대통령 선거와 인기를 위해 개발에만 집착한 잘못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무리한 토건공사가 오늘날 심각한 불균형과 서민경제 파탄을 불러왔다"면서 "땅값과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공장부지·임대료 부담, 주택난, 임금인상요구 등 한국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추진한 경제 정책은 독일·이탈리아·일본 등 군국주의 모델과 비슷하다"며 "통제를 통한 고성장과 재벌과 결탁은 오래가지 못 한다"고 설명했다. 또 "수출주도 성장은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의 지배전략 일 뿐"이며 "성장과 개발정책 과정에서 분배·복지·정의·환경·인권 등 소중한 가치가 무시됐다"고 비판했다.
또 "박 전 대통령은 일제 때 혈서까지 쓰면서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했고, 독립군을 토벌하는 관동군 소위가 됐다. 해방 후 남로당 활동 경력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몰리자 동료 100여명을 고발했다"며 "그의 일생이 기회주의였다"고 비판했다. 이어 "대통령 재임 당시의 전속 이발사 증언에 따르면 헤진 런닝셔츠를 입고 변기에 벽돌을 넣어 물을 아끼는 검소하게 생활했다고 하지만, 미 의회 청문회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회고록 등을 보면 거액의 부정 자금을 받은 정황이 포착되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 '박정희-신화와 진실'을 주제로 한 이날 강연에는 학생과 시민 150여명이 참석했다.(2016.5.17. 경북대학교) ⓒ평화뉴스(김지연)
박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는 계기가 됐던 5.16에 대해서는 "당시 행정 최고책임자인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의 무능과 기회주의적 태도 때문에 '성공할 수 없고, 성공해선 안 되는 쿠데타'가 너무 쉽게 성공했다"며 "'쿠데타는 실패한다'는 선례를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후 신군부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면서 진리와 정의보다 반칙과 성공이 최고인 사회가 됐다"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친일과 독재의 해악은 여전히 곳곳에 있다"면서 "돈과 성공이면 진실과 정의는 아무것도 아닌 나라가 됐다. 내세울 것은 경제 하나였지만 그 마저도 졸속성장으로 부작용이 많다"고 우려했다. "박 전 대통령 시기처럼 반 복지와 토건국가, 재벌체제로 대표되는 현 정책은 뒷 정권을 어렵게 한다"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토건 공사를 되돌리고, 분배에 신경 쓰면서 중소기업에 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헛된 신화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며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강조했다. "비뚤어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다. 제대로 알고 나면 판단력이 생기게 된다"며 "국가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찾아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우 명예교수는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하버드 대학원에서는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부터 38년간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로 재임하다 지난해 정년퇴임 후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2003년부터 3년간 청와대 정책실장, 정책특보, 정책기획위원장 등을 맡았으며, 2012년 19대 대선에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경제민주화 위원장을 맡아 경제민주화 정책을 책임졌다. 주요 저서로는 <불평등의 경제학>,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노무현이 꿈꾼 나라> 등이 있다.
한국형 양적완화=코빈식 양적완화?
영국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사진)이 주창해온 ‘민중에 대한 양적완화’는 외형적으로 ‘한국형 양적완화’와 비슷하다. ‘조준폭격식 돈 풀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까지의 양적완화는 기껏 시중은행의 현금 보유고만 늘려줬을 뿐이다. 그 돈은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가진 계정 내에 머물러 있거나, 주로 금융시장으로 흘러가 주가를 높이고 부유층만 살찌웠다. 가계·기업 등 실물경제 부문에는 닿지 못했다. ‘민중에 대한 양적완화’는 문자 그대로 중앙은행이 푸는 돈을 민중에게 직접 제공하겠다는 취지의 대안 정책이다.
코빈이 설립하겠다는 ‘국립 산업투자은행(National Investment Bank)’이 그 수단이다. 돈의 흐름은 단순하다. 국립 산업투자은행(이하 산업은행)은 교통 시스템 현대화, 서민용 주택, 초고속 종합정보통신망, 교육시설 등의 건설 프로젝트(사실상 영국 정부의 공공사업)를 기획한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은 현금을 찍어내서, 산업은행이 발행한 채권을 인수한다(양적완화). 산업은행은 이렇게 조달한 돈으로 기획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양적완화로 발행된 돈이 임금이나 중간재 매입 비용 등으로 영국 실물경제에 흘러간다. 완료된 프로젝트들은 영국 경제를 고숙련·하이테크 구조로 바꾸는 데 기여한다. 이전의 양적완화에서 금융권 내에 머물렀던 돈이 ‘바깥세상’으로 용솟음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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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 영국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 |
그런데 노동당이 집권하면 ‘민중에 대한 양적완화’가 실현될 수 있을까?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2009년 발효된 유럽연합의 ‘미니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리스본 조약에 따르면, 각국 중앙은행은 정부의 공공사업에 쓸 돈을 직접 발행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곧바로 중앙은행에 인수시킬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코빈 당 대표, 켄 리빙스턴 전 런던 시장 등 노동당 지도자들은 꿋꿋하다. 특히 켄 리빙스턴은 BBC 방송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BOE는 ‘은행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만 자금을 공급해왔다. 그 돈을 정보통신망이나 교통 시스템 현대화에 쓰면 왜 안 된다는 건가?” 하고 반문한다.
다만 ‘민중에 대한 양적완화’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해친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중앙은행이 아니라 정부가 어느 정도 규모의 돈을 어느 부문에 투입할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노동당 코빈 당 대표에게 ‘민중에 대한 양적완화’ 구상을 설득한 리처드 머피 교수(런던시티 대학)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신화에 불과하다’며 BOE의 간부들을 비웃는다. “BOE 총재가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영국 정부의 소망을 거부한다고? 그러면 집에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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