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학벌은 끝났는가
‘학벌 없는 사회’가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해산 선언문에서 이들은 ‘한국이 자본 앞에서 학벌도 힘을 못 쓰는 사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 [452호] 승인 2016.05.18 02:27:59 |
‘학벌 없는 사회’가 해산하기로 했다고 한다. 한국 사회가 학벌로 뭉친 부패한 사회임을 고발하고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한 단체가 스스로 해산하기로 한 것이다. 해산 선언문에서 이들은 한국은 이제 자본 앞에서는 학벌도 별 힘을 쓰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명문대 나오면 뭐하나, 백수인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학벌보다 집안 배경이 훨씬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는 뜻이다.
과연 학벌은 끝났는가?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나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학벌은 붕괴했다’는 말을 하곤 했다. 학벌이 서울대부터 가장 마지막에 있는 대학까지 일렬로 서열화를 이룬, 강한 구조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런 의미에서의 학벌은 밑에서부터 이미 붕괴되었다고 말이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홍동 국숭세단’으로 대표되는 서울의 대학과 지방의 몇몇 국립대를 제외하고는, 이미 ‘서열’이 무의미해졌다.
몇 년 전부터 지방 고등학교 교사와 지방대생들을 만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교사들도 과연 학생들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회의했다. 대학에 보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방의 많은 대학은 입학생에 비해 졸업생 수가 현저하게 적다. 졸업 앨범을 보면 학생보다 교수가 더 많은 학과도 제법 있다. 서울 소재 대학으로 편입하거나 자퇴해서 학벌 사다리의 아래가 사라져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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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그림 |
무엇보다 ‘대학’ 그 자체가 지녔던 문화적 가치가 생존주의 시대에 큰 의미가 없어졌다. 오히려 4년제 지방대를 나오는 것은 생존에 방해가 되기까지 한다. 그러니 경제 자본이 풍부하지 않은 계층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과거에는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았지만, 지금은 생존과 취업이 더 중요하다. 취업에서의 ‘안정성’과 ‘벌이’가 대학 서열을 압도한다.
중상 계층 이상의 독점물이 되어버린 ‘학벌’
‘대학이 밥 먹여주느냐’는 비판은 문자 그대로 대학이 먹고사는 데 큰 도움이 못 된다는 이야기다. 어지간한 대학을 나와서는 일자리를 구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또한 대학이 밥은 못 먹여줘도 보증해주던 문화 자본, 사회 자본으로서의 가치에 사람들이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대학이 보증하던, 상징적이고 사회적인 ‘위신’이라는 가치도 사라졌다. 의미 있는 것은 경제 자본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의 진실은 여전히 학벌은 강하고 더 강화되리라는 점이다. 하층에서 대학이 의미가 없어질수록 역설적으로 상층에서는 대학이 큰 의미를 가진다. 경제 자본뿐 아니라 문화 자본으로서 가치를 함께 가진다. 과거에 학벌이 그나마 소규모일지라도 사회 이동을 가능하게 한 ‘긍정적’인 기능이 있었다면, 이제 학벌은 중상 이상의 계층에 ‘독점물’로서 가치를 가진다. 이른바 명문대 안에서도 특목고나 자사고 출신이 ‘이너 서클’을 만들어 이런 가치를 독점한다. 학벌이 대학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출신고-대학’으로 더 강화된 현상이 나타난다. 학벌(學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층이 더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형태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최근 학벌 사회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는 ‘학(學)’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이지 ‘벌(閥)’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너진 것은 ‘학’의 사회학적 기능이지 ‘벌’의 폐쇄적이고 신분제적인 성격이 아니다. ‘벌’이 없는 ‘학’은 기껏해야 6두품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따라서 학벌의 신분제 성격은 ‘벌’을 독점하는 계층에 의해 신분제적으로 더 강화되었다. 출신 대학에 따라 사람을 서열화한 학벌 사회의 해체가 아닌 더 강력한 신분제 사회의 출현이다.
엘리트 교육의 불편한 진실
<공부의 배신>/윌리엄 데레저위츠 지음/김선희 옮김/다른 펴냄
| [402호] 승인 2015.06.02 09:2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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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한국 사회에서 자녀 교육의 대미는 명문대학 입학으로 장식된다. ‘좋은 대학’이라고 얼버무리기도 하지만 대학은 철저하게 서열화되어 있고, 자녀 교육의 성공 여부는 어느 대학에 들어갔는지로 판가름된다. 미국의 명문 예일 대학 교수를 지낸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공부의 배신>을 보면 미국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까’라는 것이다. 여러 명문 대학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을 근거로 그는 문제가 자못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똑똑한 양떼’라는 원제가 겨냥하는 것은 미국 엘리트 교육의 실패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 국가들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복지국가 모델을 만들 때 미국은 고등교육의 확장을 통해서 물질적 지원 대신 기회를 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러한 기회의 제공은 대규모 중산층과 새로운 상류층을 낳는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의 대학 교육은 불평등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불평등한 시스템 자체가 되어버렸다. 거액의 대학 등록금도 문제지만 입시 경쟁에 들어가는 비용이 비약적으로 증가해 가정의 경제력이 곧 성적과 직결되는 시대가 되었다. 가령 하버드 대학 학생의 40%는 연소득 상위 6%에 속하는 가정 출신이다. 저자가 보기에 “명문대는 불평등 사회를 역전시키는 데 무기력할 뿐 아니라 도리어 정책적으로 불평등 사회를 적극 조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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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 저자는 기술관료의 전형으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지목한다. |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도 수월성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특목고가 난립하는 양상이지만 그런 엘리트 교육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폐쇄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저자가 직접 겪은 일인데, 어느 날 그가 집수리를 위해 배관공을 불렀다. 한데 배관공이 부엌에서 일할 준비를 하며 머뭇거리는 동안 저자는 그에게 변변하게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교육과정에서 배관공을 만날 일이 없었던 탓이다. 그가 받은 엘리트 교육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대신에 오히려 그런 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엘리트 교육이 ‘실력 사회’를 낳았지만 그 실력 사회의 이면은 진정한 리더십의 부재다. 저자가 현재 미국 지배세력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대목이다. 가령 1988년 이후 주요 대통령 후보자 10명 가운데 대다수가 하버드나 예일 등 명문 사립대학 출신이다. 1948~1984년 대통령 후보자 14명 가운데 단 3명만 명문 사립대에 다녔던 것과 비교되는 수치다. 이들 가운데 명문가 출신이 단 2명이었던 데 비해 그 이후로는 10명 중 6명이 ‘상속자’에 속한다.
학생들에게 ‘실패 이력서’를 쓰게 하면 어떨까
그런 배경을 가진 기술관료의 전형으로 저자는 오바마 현 대통령을 지목한다. “오바마는 자신만의 비전이 있는 척하지만 그의 비전은 기술관료 그 자체다.” 오바마는 잘하지 못하는 과목의 수업은 듣지 않으려 하는 학생처럼 힘겨운 정치적 싸움은 회피하려 든다고 저자는 비꼰다. 하지만 그것은 오바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똑똑하지만 순응적이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한 인재들만 배출해내는 엘리트 교육 시스템의 문제다.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은 아예 회피함으로써 실패할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엘리트 교육이었다.
예상할 수 있는 결론은 물론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최고의 무상 고등교육 이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대학 지원자들에게 성취 목록과 함께 ‘실패 이력서’도 제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아이들이 배움에 대한 애정으로 공부하고 사람들이 일에 대한 애정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가 저자만의 이상향이 아니라면 우리도 충분히 경청해볼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 ‘노오력’ 해야 할까
노력이 성공을 약속하던 시대는 끝났다. 배틀 로열은 시대정신이 되었다. 한국은 한번 격차가 생기면 그 어떤 ‘노오력’으로도 만회할 수 없는 신계급사회다. 과정에 대한 인정이 없는 사회는 시스템을 붕괴시킨다.
| [430호] 승인 2015.12.15 08:10:29 |
한국에선 생소한 그린(Green) IT 분야로 유학을 준비 중인 ㅁ(33·남). 나이 40세가 넘으면 ‘노인’ 취급을 받는 한국 IT 업계가 싫어졌다. 연애할 시간 없이 일만 하다 닭 튀기며 망할 걱정하는 ‘자영업 노동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의 이력은 ‘노오력’의 연속이다. 중학교 시절 열심히 공부해 특목고에 도전했다. 입학 후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서는 점점 뒤처지기만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처음 ‘우리 집의 가난’을 인식했다. 수능시험을 망치고 재수 대신 편입을 결심한 그는, 입시 준비를 하듯 1년간 집-편입학원-대학교를 쳇바퀴처럼 돌다 서울에 있는 대학 전자공학과 편입에 성공했다. 졸업과 동시에 이름이 알려진 IT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5년8개월이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로 몸이 버티지 못했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언제부턴가 월급의 반이 병원비로 나가기 시작했다. (사)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보고서(<사무직 근로자의 근로시간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 연구-IT 업종을 중심으로>, 2013)에 따르면 IT 업계 연평균 노동시간은 대략 3000시간이다. 2014년 한국 전체 평균 근로시간인 2285시간(OECD 1위, OECD 평균은 1770시간)과 비교하면, IT 업계 노동자들은 주당 11시간 이상 더 일한다. 또 다른 실태조사(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 2010)에 따르면 IT 노동자 상당수는 초과근무에 따른 보상을 받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이 만성피로(82.2%), 근골격계 질환(79.2%) 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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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원 그림 |
다른 하나는 능력 있는 선배들을 봐도 좀처럼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ㅁ씨의 경우 한 달 동안 160시간 초과 근무(법정 연장근로 허용시간인 주 12시간의 약 3배)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경우처럼 한국 IT 업계의 무임금 초과노동 관행은 매우 악명 높다. 같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일본 기업들은 3배의 시간을 준다고 한다.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진다는 것은 기업이 부담하는 비용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의미다. 하지만 ‘IT 강국’ 대한민국은 수많은 노동자의 시간과 건강을 갉아먹으며 성장해왔다.
ㅁ은 자기가 ‘노오력’한다고 자기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미 특목고를 다닐 때부터 금수저와 흙수저 사이의 신분은 정해졌고, 그것은 ‘노오력’을 통해 넘어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말처럼 동국대 김낙년 교수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상위 1% 인구가 전체 자산의 26%를 갖고 있는 반면, 전체 자산의 2%를 하위 50% 인구가 나눠 갖고 있다. 그야말로 신계급사회의 출현이다. ‘월급쟁이’ 노릇으로 돈이 돈을 버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더구나 한국은 현재 전체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이 45%이고, 이들의 월급은 정규직의 절반 수준이다. ‘노오력’한다고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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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상의 제공 대한상공회의소 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아빠는 야근 중’(위). 야근하는 직장인들을 찍었다. |
성공이나 자아실현이 아닌 ‘생존’을 위한 노력
근대는 노력에 대한 약속이며 노력의 결과물이다. 중세까지 사람들의 운명은 신분에 의해 결정되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사회는 신분의 벽을 허물고 개인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약속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는 말이 보편적 윤리가 되었다.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보하는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후기 근대사회에서는 자기계발이 이 노력의 계보를 이었다. 노력은 단지 성공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격상되었다. 사람들은 성공을 넘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것을 실현시켜 자신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의무가 생겼다. 노력이 윤리적인 것에서 미학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진 것이다. 자기계발에 힘쓰지 않는 것은 게으름을 넘어 한심한 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노오력’이 그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러나 ‘노오력’은 더 이상 성공이나 자아실현의 차원이 아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것이다. IMF 구제금융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고, 불안정 노동은 상시화되었다. 좋은 일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입시경쟁은 더욱 과열되었으며, 좁아지는 취업문을 뚫기 위한 스펙 경쟁도 과적되었다. 형편없는 단기 투자에만 모두가 몰두하는 형국이다. 개인을 비롯한 크고 작은 기관과 기업, 시장과 국가는 모두 등급화·서열화되었다. 노력은 자기와의 싸움을 넘어서서 누군가를 이기지 않으면 도태되는 ‘배틀 로열’의 경쟁에서 생존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에서 개인들은 각자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당기는 것이 곧 ‘능력’이 되었고, 그 ‘능력’이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능력’ 자체를 서열화하는 경쟁체제에서 한번 생겨난 격차는 어떤 노력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을 파괴하고 있다.
패션 잡화 분야의 유능한 브랜드 매니저인 ㅂ(39·여)은 ‘자는 시간조차 아깝다’면서 자신의 한계를 무한대로 늘려가며 열심히 노력한다. ‘원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는 건 간절히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결과적인 ‘성공’에 집착한다. 그러던 그녀에게 건강상의 불운이 찾아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망막 파열로 실명 위기를 겪고 있다. 그녀는 광화문을 지나다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는 이들에게 ‘바쁜데 여기서 뭐 하는 거냐’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자신은 자기를 극한으로 몰아넣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데, 그들은 별 노력 없이 보상을 받으려는 것 같아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것이다.
모욕적인 관리체제가 자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ㅅ(21·남)은 전자 휴대전화 판매 직원이다. ㅅ의 손가락에 시퍼런 자국이 생겼다. 이유를 묻자 일하다 짜증이 나서 스스로 자해를 했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돈은 많이 안 벌어도 좋은데, 모욕만은 참을 수 없단다. ㅅ의 짜증을 유발한 것은 매출 실적이 낮은 대리점 관리 방식 때문이었다. 매장을 관리·감독하는 본사 본부장이 대리점을 방문하는 날이면 난리 법석이 난다. 유리창이 반짝반짝하게 닦였는지, 본사에서 나눠준 광고 포스터는 잘 보이는 곳에 부착되어 있는지, 직원들 복장은 단정한지 등등 매장 직원들은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다. 직원들 앞에서 대리점 사장은 본사 본부장에게 ‘카디건 쪼가리나 걸치고 있으니 매출이 이 모양이지’라며 야단맞는다. 본부장이 던진 ‘모욕’이 돌고 돌아 ㅅ의 ‘자해’로까지 이어진다.
‘노오력’이 삶을 파괴하는 것은 ‘하류’ 계층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기업에 다니거나 혹은 고위 전문직에 종사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비단 청년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고 경력이 많아질수록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대학 졸업 후 창업해 성공 가도를 달리다 외국 생활이라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해외봉사단으로 해외에 다녀온 ㅇ(41·여)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귀국 직후 공익 재단에 취직했다. 자기계발 담론이 유행하던 시절 20~30대를 보내며 회사 대표이자 창업자에서 계약직 사원이 된 그녀는 자신의 업무에 늘 최선을 다했다. 입사한 첫해 근무평가에서 상위 20~30%에 해당하는 A등급을 받았는데 이듬해엔 새로 바뀐 팀장과 종종 견해 차이로 부딪쳤다. ㅇ은 올 연말평가에서 하위 10%를 간신히 면한 C등급을 받았다. 자기 일에 누구보다 열정적이라 자부심을 느끼던 그녀는 연말 업무 성적표를 받고 나서 허무함을 느꼈다. 마음 터놓던 직장 동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허무감·분노·자괴감을 훌훌 털어내고자 꺼낸 이야기는 오히려 지질한 하소연이 될 뿐이었다.
노력은 더 이상 노력하는 자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에 대한 자기 신뢰(self-confidence)의 영역이 아니다. 노력은 성과를 통해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이 되었다. 뒤집어서 말한다면 성과를 내지 않은 것은 노력하지 않은 것이며, 성과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노력의 척도가 된 것이다. 따라서 성과를 내지 않은 것은 도덕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나아가 생존에 대한 의지 면에서도 부족한 태도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 되었다. 결국 단기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과정에 대한 인정, 즉 실제적인 능력을 키울 시간과 방법이 사라져버렸다. ‘부분 적합’한 인간만을 양성하고 전체적으로 매우 부적합한 사람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시스템 자체의 문제 해결력을 상실하게 된다.
당신만 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면?
근대는 ‘하면 된다’의 노력으로 출발하여, ‘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을 지나, ‘해야 한다’는 ‘노오력’으로 결국 삶을 파괴하는 파국에 도달했다. ‘모든 것을 자기가 다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강박은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우울이나, 제 뜻대로 진행되는 않는 상황에 분노를 터트리며 자기를 파괴하는 망상으로 귀결되고 있다. 성과를 내면서 일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오력할수록 골병이 들거나(ㅁ씨), 자신을 탓하며 자해를 하거나(ㅅ씨), 자기가 노오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는 것을 주체할 수 없게(ㅂ씨) 된다는 것이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일못유)’은 바로 이처럼 무리수를 두며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노오력’에 대한 저항에서 만들어졌다. ‘일못유’ 사람들은 기본값을 설정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없는지를 질문한다. 일 잘하는 사람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면, ‘일 못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처럼 우리 모두는 한계를 가진 존재들이며,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를 사랑하고 보존하는 방법이다. 또한 각자의 한계를 인정해야 서로를 보조하고 받쳐주는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새로운 공공성의 출발점이 열릴 수 있다.
시간도 돈도 내가 더 많이 들였다고?
수능 점수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수시충’이라는 이름을 붙여 선을 긋는다. 수능 등급이 그 사람의 ‘급’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지만 쉽지 않다.
| [419호] 승인 2015.10.05 02:48:45 |
대입 수시 원서접수 철이다. 예체능 실기로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들을 논외로 하면, 학생들이 지원 가능한 전형에는 학생부 교과·학생부 종합·논술 전형이 있다. 하지만 모의고사에서 한 과목 1등급을 받는 학생들이 못해도 전교생의 10%를 차지하는 학교의 재학생들이 수시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이 볼멘소리를 내는 까닭이다.
“대학 탐방에서 만난 지방 애는 정시가 3등급인데, 내신이 1.3등급(교과목 평균을 내면 1.1~1.7까지는 보통 서울에 있는 대학 진학이 가능하다)이라 저랑 같은 대학을 지원한대요. 이게 말이 돼요?” “논술학원에서 다른 학교 애들을 만났거든요? 모의고사 두 과목 합이 5등급이라는데 최저만 겨우 맞춘 거잖아요. 우리는 이렇게 아등바등 내신 치르고 정시 챙기며 생고생해도 수시 떨어지는데 걔네가 더 좋은 대학 쓴다니까 짜증나요.”
올해 ‘in서울’ 대학의 수시 모집 인원은 70%에 달한다. 정시로 들어갈 수 있는 폭이 줄어든 만큼 아이들이 느끼는 압박감은 크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최상위권 아이들의 두꺼운 벽에 막혀 내신 점수도 그만그만하고 정시 등급도 애매해진 아이가, 내신 점수를 잘 관리하면서 최저 등급만 맞춰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를 만났으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아이들의 날선 발언은 특정 집단에 대한 적대감으로 번지기도 한다. “어쨌든 정시 등급이 저보다 낮잖아요?” “‘수시충들’ 덕분에 저희는 수능 특기자 전형으로 입학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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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그림 |
‘남이 기울인 노력의 양을 네가 함부로 측정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해봐야 당장 자신의 상황이 답답하고 초조한 아이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이다. 아이들은 ‘자신보다 실력이 낮은 애가 자기보다 좋은 것을 가져간다’고 생각한다. 수시 모집 때마다 반복되는 이런 일들은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난감하게 만든다. 등급이 낮다는 것이 노력을 덜한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교육에 돈을 쏟아 부으며 만들어낸 너의 점수와, 다시 추가로 자원을 투입해 논술과 자기소개서 준비를 할 수 있는 너의 현재가 누군가에게는 노력으로도 따라올 수 없는 격차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가르쳐주고 싶다. 하지만 이 역시 아이에게는 ‘그들’을 깔보는 근거일 뿐이다.
아이들은 수능 점수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수시충’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선을 긋는다. ‘다름’과 어우러질 가능성은 좀 더 줄어든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수능 등급이 사람의 급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알려주고 싶다. 두 과목의 합이 5등급이어도 그 사람이 5등급짜리 사람은 아니며, ‘충’이라는 말을 붙여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논술·면접·자소서 등 챙길 것이 많은 만큼 수시 전형이 오히려 사교육을 많이 받는 애들에게 유리하다는 말들이 있다. 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진학 성적을 살펴보면 성적으로 서열화되어온 기존 대학은 이 제도 덕분에 다양한 성장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함께하는 곳으로 변화하고 있다. 아이들이 향후에 만나게 될 사회 역시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입시 전형의 다양화는 환영해야 할 일이다.
학벌 하나 획득하기 위해 아등바등 보낸 3년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지균충’ ‘기균충’이라는 용어만 봐도 그렇다. 지역균형 전형, 기회균등 선발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전형은 애초에 정원 쿼터가 다르고, 극소수밖에 들어갈 수 없다. 그들만의 치열한 경쟁이 있지만 그 노력은 용인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더 열심히 살았다고 믿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느낀다. 해소되지 않은 분노가 그들을 향하는 것이다.
‘차라리 정시만으로 대학 가는 게 낫다’는 아이들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학벌 하나를 획득하기 위해 아등바등 3년을 살아온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보이는 적대감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교육의 영향력이 센 지역에서만 높은 학벌을 독점할 수도 없다. 이 당위성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수시 모집 정원 확대에 대한 논란도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일각에서는 가진 애들이 더 대학을 잘 가게 하는 제도라고 비난하지만, 막상 다 가진 애들도 수시 등급에서 밀린다고 벌벌 떨며 수시를 반대하는 목소리에 한몫 보태는 지점 말이다.
청년 실업률 10.9%? 현실은 4명 가운데 1명!
[복지국가SOCIETY] 왜, 자꾸, 언제까지 청년 실업인가?
'10.9%' 라는 숫자가 감추고 있는 현실의 끔찍함
이 이상한 상황은 실업률이라는 지표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업률은 "실업자/(취업자+실업자)”를 말한다. 이 지표에서 말하는 실업자는 단순히 구직 광고를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지난 4주간 구직 업체 방문, 전화, 이력서 제출 등을 통해 일자리를 찾아 구체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한 사람으로서, 일자리가 주어지면 즉시 취업이 가능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취업자는 조사 대상 주간에 1시간이라도 일을 한 사람으로 가족이 경영하는 사업장에서 무급으로 일하거나 일시적으로 직장을 떠나 쉬고 있는 사람까지도 포함된다.
따라서 노량진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약 50만 명의 공시생들은 '원서 접수' 이전까지 '실업자'에 포함되지 않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한다. 시험 접수 기간이 되면 실업률이 반짝 올라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반면, 학원비나 면접 준비 비용을 벌기 위해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임시․일용직들을 전전하며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다른 좋은 일자리를 찾고 있는 주 36시간 미만의 불완전 취업자들은 모두 '취업자'로 분류된다.
즉, 취업 의사를 가지고 스펙을 쌓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은 구직 의사가 없다고 여겨지고 취업 준비하는 동안 생계를 위해 잠깐 잠깐 일하는 학생들은 통계상으로는 엄연한 직장인이 되어버린다. 결과적으로 실업자는 과소 추계되고, 취업자는 과다 추계되면서 실업률이 낮게 나타난다.
이 같은 실업률의 통계상 문제로 인해 고용률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도 많다. 청년 고용률은 15~29세 인구(군인, 외국인, 교도소 수감자 등 제외) 대비 취업자 수로 4월 기준으로 41.8%이다. 청년 10명 중 4명만 일자리를 찾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수 있다.
고용률에는 공시생을 비롯하여 스펙을 쌓느라 여념이 없는 취준생들도 분모에 포함되어 추계된다는 장점이 있으나 여전히 해당 주간에 1시간 이상 일한 '취업자'가 기준이 됨으로써 실질적인 취업자 수를 부풀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추석 연휴가 낀 9월은 임시·일용직 증가로 고용률이 높아진다.
이러한 문제 의식 하에 통계청은 2015년 1월부터 세 유형의 '체감 실업률'을 함께 발표하고 있다. 공식 실업자에 시간 관련 추가 취업 가능자(불완전 취업자로서 추가 취업을 원하는 자), 지난 4주간 구직 활동을 했으나 질병, 가사 등의 사정으로 당장 일을 시작하지 못한 잠재 취업 가능자, 지난 4주간 구직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일할 의사가 있는 잠재 구직자(예를 들어 취준생)를 각각 합한 수치이다. 그러나 연령별로는 공식 추계하지 않고 있는데, 가장 최근 데이터인 <한겨레>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3월 청년층 체감 실업률은 24.1%로 명목 실업률의 2배 이상이었다. (☞관련 기사 : '3월 실업률 11.8% 체감 실업률 24.1%…'숨겨진 청년층 실업자들')
실업자 수 또한 120만9000명으로 공식 실업자 52만 명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3월 실업률 통계(11.8%)를 바탕으로 한 분석이므로 4월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공식 청년 실업률인 10.9%라는 수치가 민망해지기는 매한가지이다. 청년 실업이 사회적 문제라고 외치면서 그나마 실질적으로 와 닿는 청년 체감 실업률은 공식적인 추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느낀 당황스러움은 논외로 하더라도, 사회에서 좌절을 삼키고 있는 청년 절반을 감추어 버린 10.9%의 수치가 주는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 [표 1] 15~64세 실업률 대비 청년 실업률 비율(유진성, <고학력 청년층 체감 실업률 추정과 노동 시장 개혁의 필요성>, 2015년).](http://www.pressian.com/data/photos/20160520/art_1463472451.jpg)
▲ [표 1] 15~64세 실업률 대비 청년 실업률 비율(유진성, <고학력 청년층 체감 실업률 추정과 노동 시장 개혁의 필요성>, 2015년).
국제 비교를 해도 마찬가지이다. 국가마다 경제 활동 연령과 노동 시장 특성이 다르므로 이를 감안하여 각국의 전체 실업률(15~64세) 대비 청년 실업률 배율을 비교해 보면,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평균이 2.0인데 비해 한국은 2.7로 훨씬 높다. 전 세계적으로 청년 실업이 문제시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유난히 더 아프다.
청년 실업은 풀 수 없는 난제일까
어찌되었든 통계상의 기술적 문제를 떠나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는 것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그런데 청년 실업의 원인과 해법을 진단하는 데는 두 가지 상이한 관점이 있다. 20대 청춘들의 좌절을 다룬 <표백>(장강명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이라는 소설에서는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는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고 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짜여 티끌 하나 조차 없는 하얀 세상에서 한 개인이 느끼는 어려움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답을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개인적 실패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청년 실업은 더 부지런하지 못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도전보다는 미리 겁부터 먹는 개인의 잘못으로 비난받는다. 이명박 정부의 '눈높이를 낮춰라, 패기를 가지고 벤처 기업을 창업하라', 박근혜 정부의 '도전과 혁신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라'라는 말들은 '너희들이 조금 더 노력하면 이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다'라는 뜻이었다. 동시에 '네가 지금 현실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라는 질타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존 질서에 대한 적응을 지원하는 정책들, 특히 청년들이 스스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창업을 지원하는 데 수조 원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하다. 통계청의 '기업 생명 행정 통계'에 따르면, 30세 미만 청년이 대표자인 기업의 경우 창업 이후 5년 생존률은 16.6%에 불과했다. 또한 청년들이 눈높이를 낮출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중소기업 청년 인턴제는 1년 이상 근속률이 37% 정도에만 머물러 연평균 청년 고용률 40.2%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터무니없이 낮았다.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임금 격차는 나날이 벌어져 지난해 중소기업 근로자의 평균 임금은 대기업의 62%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혹시나 하고 도전했던 청년들과 눈높이를 낮춘 청년들은 또다시 현실 앞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상황이 이러한데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무능력함을 탓해야 할까. 하얗게 표백된 세상은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완벽한 것일까. 그러나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억울한 점이 많다. '노오오력' 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이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장벽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체감했기 때문이다. 사실, 청년들이 도전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 안전망이 열악한 사회에서 발을 잘못 헛디디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정규직의 대기업 정규직 전환 비율 6.6%,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대기업 정규직 전환비율 2.8%라는 처참한 수치들은 청년들이 눈을 낮춰 중소기업, 비정규직으로 시작해봤자 그 수렁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청년들이 현재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리 노력해봤자 노오오오력이 아닌 이상 얻을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다. 따라서 아무리 취업 준비 기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 등 안정적인 일자리로 모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에서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정답이다.

ⓒ연합뉴스
청년 실업, 정부의 제도적 역할이 중요하다
따라서 청년 실업률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사건건 가로막고 있는 사회적 제도들을 바꾸는 것이 핵심이다. '노오오력'이 아니라 노력이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장벽을 허물어 뜨려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국민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다. 무작정 정부에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일을 하라고 선거 때마다 우리가 다른 후보들보다 특정한 한 사람을 '선택'하고 세금으로 월급을 주면서 우리가 '고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부로 하여금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일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고 이를 감시 감독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정부는 우리에게 선택받아 권력과 각종 자원들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고용주'에 해당하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청년들이 중소기업에 주저하는 것은 중소기업과 대기업간 일자리.임금.노동 환경의 제도적 격차로, 한 개인으로서는 이를 어떻게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이 조성한 공적 재원인 세금을 투여하여 점차 격차를 축소시켜야 한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 대우를 해소해 양질의 일자리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잔업과 야근이 잦은 제조업 부문에서 과다한 노동 시간을 줄이는 것 역시 추가적인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지점이다. 이와 더불어 청년들이 새로운 가능성이 있어서 창업하고자 하면 무작정 등만 떠미는 대출 지원이 아니라, 실패할 경우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튼튼히 조성하는 데 재정을 사용해야 한다.
또한 산업 구조의 변동으로 더 이상 신규 일자리 창출이 힘들다고만 하지 말고 정부 자체도 다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는 사회 서비스 분야에서의 일자리가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 교육.문화.복지.의료.간병 및 가사 지원 등 사회 서비스 부문에서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뜻이다.
3교대로 일하는 간호사 등 노동 강도가 강한 부문에 고용을 늘리면 기존 근로자에게는 저녁이 있는 삶을,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1인당 학생 수가 OECD 평균보다 현저히 많은 현실을 감안하여 정규 교사와 보육 교사 수를 늘리고 인력 부족으로 과로사가 번번이 일어나는 사회 복지 부문 전달 체계의 인원을 늘리면 많은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다. 이러한 일자리를 양질로 만드는 데 재원을 투입해야 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아직도, 왜,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만 할 텐가. 청년 실업이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몇 년째 더 많은 청년들이 좌절하지만 개선은커녕 계속 악화되기만 했다. 당연한 결과다. 표백된 세상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완벽한 척 하기 위해 청년들이 스스로의 무능력함을 탓하도록 암묵적으로 강요해 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고개를 들자. 우리의 탓이 아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역할을 부여한 정부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먼저 꾸짖고 바꾸어야 한다. 하얀 세상이 다양한 색깔로 다채로워질 때가 비로소 완벽한 세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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