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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팔았다고? 너희는 나라를 팔았다”

일취월장7 2016. 1. 8. 15:30

 

“몸을 팔았다고? 너희는 나라를 팔았다”

일본이 이전을 요구한 대사관 앞 소녀상은 전쟁에 내몰려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인간’의 피해를 증언하는 기념비다. 우리는 아직도 얼마나 많은 위안부들이 어떤 고통을 겪어왔는지 정확히 모른다.

  조회수 : 8,181  |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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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호] 승인 2016.01.07  22:13:31

<여명의 눈동자>라는 옛날 드라마가 있어. 독립운동가의 딸이었던 여옥이라는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면서 시작돼. 그녀는 호송되는 와중에 일본군 장교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기진맥진한 채 전쟁 공포와 살육으로 눈에 핏발이 선 일본군들의 ‘성노예’로 전락하고 만단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녀는 빛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건 일본군에 끌려온 조선인 청년 대치와의 사랑이었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 청년은 머나먼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돼.

“나 내일 떠나.” “나는요?” “살아 있어. 살아 있으라구. 알겠지? 그 말 하려고 왔어. 살아서 내 애를 낳아줘(극중 여옥은 대치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어).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 그리고 둘은 철조망 사이로 정말로 간절하게 입맞춤을 나눠. 하지만 그건 로맨틱한 ‘프렌치키스’가 아니었어. 흙더미 속에 갇힌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숨구멍을 찾고 물에 빠진 사람들이 수면에 비친 해를 바라보며 자맥질 쳐서 올라가는 것 같은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지.

그런데 여옥이는 왜 그곳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됐을까. 너는 일본놈들 때문이라고 말하며 주먹을 쥐겠지. 맞아. 그런데 아빠는 전쟁이란 이름의 괴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어. 전쟁이 빼앗는 건 사람들의 목숨만이 아니야. 전쟁이란 놈은 인간의 긍지, 존엄,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는 하한선 모두를 무너뜨린단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군인은 한순간의 즐거움에 목숨을 거는 짐승이 되기 마련이야. 전쟁을 벌이는 지도부(라고 쓰고 윗대가리라고 읽어라)는 자신의 명령에 따라 기꺼이 죽어가야 하는 병사의 동물적 본능을 충족시킬 방도를 찾기 위해 분주했고 무슨 비인간적인 상황이 빚어지든 상관하지 않았지.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운데)가 국내 거주자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증언했다.  
ⓒ연합뉴스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운데)가 국내 거주자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증언했다.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고 미국이 참전을 선언하자 징집에 응한 신병들이 떼로 몰려들었어. 대규모 훈련소가 설치되고 그 인근에는 어김없이 ‘군대에 필요한’ 여자들이 몰려들었지. ‘점잖은’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자 미군 장교가 했다는 말은 전쟁의 단면을 마치 수박 속 보듯 드러내준단다. “안 그러면 여러분의 딸들이 다친단 말입니다.” 일부 일본인들은 위안부 문제를 두고 위와 같이 전쟁의 역사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라며 외면하려는 것 같아.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건 일본이었고 자기네 군대의 ‘사기 충전’을 위해 위안소를 운영한 것도 일본 군대였고, 여성들을 ‘공급’받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도 일본 ‘제국’이었어. 북만주와 중국 깊숙이, 그리고 남양군도까지 뻗어 있던 광대한 전선에서 수백만 대군의 욕망 ‘처리’를 위해서는 더욱 많은 여자가 필요했고 “돈 벌러 가자”는 사기와 닥치는 대로의 납치, 폭력 등등 범죄가 동반됐지.

그리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국가는 그 범죄의 수혜자였어. 언젠가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일본 언론인들에게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이렇게 호령했단다. “‘전부 군대 나가는 바람에 생산수단이 없어 사람들이 모자란다. 그래서 여자들이 생산기관에 가서 일하면 돈 벌고 그 돈을 어머니·아버지에게 보낼 수 있고, 좋지 않으냐’ 이렇게 속였다. 이 장면들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렇게 모집한 여성들을 일부는 생산기관에 배치했겠지만 대부분은 즉각 강제로 중국으로 보내가지고 위안부 노릇을 시켰는데. 뭣이 어쩌고 어째.”(<중앙일보> 김종필 회고록)

  <div align=right><font color=blue>ⓒMBC 여명의 눈동자 갈무리</font></div>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 여옥(오른쪽)과 대치. 극 중 여옥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다.  
ⓒMBC 여명의 눈동자 갈무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 여옥(오른쪽)과 대치. 극 중 여옥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다.

1922년생 김학순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어. 그분은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여읜 후 어렵게 살다가 1939년 양아버지에 의해 일본군에 넘겨졌고 ‘위안부’ 생활을 하게 돼. 다시 읽기조차 참혹한 그분의 회고를 잠깐만 들어보자꾸나. “여자란 것은 언제나 생리가 있는데 그때도 가리지 않아요 그 사람들은. 생리고 뭣이고가 없어요. 무슨 짐짝 끌어가듯 자기네 맘대로 쓰고 싶으면 쓰고 고장이 나서 말하자면 병이 나든가 하면 버려버려. 죽여버리고… 강제로 안 당하려고 울면서 막 쫓아나오면 안 놔줘요 붙잡고 안 놔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위안부들이 이런 고통을 겪었는지 정확히 모른단다.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이도 없었어. 이유는 김학순 할머니의 과거를 보면 알아. 조선인 상인의 도움으로 위안소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탈출해 그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 때문에 끊임없이 그 지옥을 되새김질해야 했어. 술만 취하면 그녀를 학대했으니까. “너는 위안소 출신이지. 더러운 년.”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감히 자신의 과거를 밝히고 일본에 사과를 요구할 수 있었겠니.

그런데 1990년 6월의 어느 날, 그녀 가슴의 봉인이 찢겨져 나가게 돼. 일본 정부가 ‘일본군은 군대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은 거야. “정말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어요. 혼자서 이럴 수가 있느냐. 왜 우리는 지나간 일을 이렇게도 모르고 사는지 답답하다. 살아 있는 내가 증인인데 세상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을 하니까….”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14일 광복 46주년을 하루 앞두고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을 찾아가 국내 거주자로서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한단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추악한 빙산의 일각은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에 의해 흉물스럽게 드러났지. 그리고 그로부터 또 25년이 흘렀고, 김학순 할머니는 물론 그분에 이어 위안부의 과거를 폭로한 많은 할머니들이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어.

“당신들은 나라를 팔았잖은가!”

며칠 전 일본이 “일본군의 관여와 정부의 책임을 통감”하는 성명을 낸다고 했을 때 아빠는 어떻게든 이 일이 매조지되었으면 하는 희망으로 그들의 언행을 지켜봤어.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더구나. 역사적 범죄에 대한 사과를 하면서 “다시는 이 얘기 꺼내기 없기!”를 명토 박는 것도 어이가 없는 일이다만, 일본 대사관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소녀상을 이전하라는 요구는 또 한 번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었어.

위안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일 수도 있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일 수도 있었고 무슨 일이든 해서 먹고살아야 했던 가난한 과부일 수도 있었어. 소녀상은 전쟁에 내몰려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그 모두의 기억과 눈물과 아픔의 상징이야. “아저씨 왜 이러는 거예요. 나는 돈 벌러 왔어요.” 울먹이면서 일본군 장교에게 짓밟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이닥치는 전쟁 기계들에게 유린당하고 곳곳의 위안소에서 엄마를 부르며 울었던 모든 ‘여성’ 그전에 ‘인간’의 피해를 증언하는 기념비라고.

그걸 보기 싫다는 일본인들의 사과를 아빠는 하나도 인정할 수 없구나. 만약 정부가 일본 대사관 앞 소녀비를 철거하려 든다면 아빠는 불법으로 처벌받을지언정 공권력에 맞서 주먹을 휘두르게 될지도 모르겠어.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주인공 여옥은 해방 이후 재판정에서 ‘매춘부’로 매도돼. 그때 여옥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해. “우리 정신대는 몸을 팔았다지만 당신들은 나라를 팔았잖아요.” 그래, 우리가 아무리 못나도 역사를 팔아넘길 수는 없지 않겠니.

 

 

위안부 협상에서 미국이 얻은 것

‘12·28 위안부 협상’ 타결 이후 후폭풍이 거세다. 소녀상 철거와 10억 엔 지원이 조건부였다는 일본 측의 폭로가 새해 벽두를 뒤흔들었다. 위안부 협상의 막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한·일 간 역사 문제에 개입했고 일본에 큰 선물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미국은 무엇을 얻었을까?

남문희 대기자  |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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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호] 승인 2016.01.07  16:45:39

“역사는 항상 보복을 수반한다. 보복이 없는 역사는 없다. 그래서 역사를 다룰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한·일 간 위안부 협상에 대해 국내의 한 전문가는 “역사를 국유화·사유화할 수 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오만과 불통이 빚은 참사”라고 규정했다. 소녀상 철거와 10억 엔 지원이 조건부였다는 일본 측의 폭로전이 ‘병신년’ 새해 벽두를 강타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참사’가 한국 사회를 어디로 끌고 갈지는 예측 불허다.

‘앙시앵레짐(구체제)의 내파’라는 얘기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구축한 한국 사회의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1965년 한일협정이 그것에 반대한 6·3세대를 낳았고 그들이 한국의 민주화를 주도하며 1987년 체제를 이끌어냈다는 점을 상기하면 다소 앞선 예측이긴 하지만 터무니없는 얘기만은 아니다. 따라서 ‘12·28 위안부 협상’ 타결 이후 한국의 미래는 앞으로 몰려올 내우외환의 혼란 속에서 6·3세대와 비견할 새롭고 참신한 세력이 등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길원옥 할머니(왼쪽)와 소녀상(오른쪽). 길 할머니의 옆모습과 소녀상 측면을 각각 촬영했다.  
ⓒ시사IN 신선영
길원옥 할머니(왼쪽)와 소녀상(오른쪽). 길 할머니의 옆모습과 소녀상 측면을 각각 촬영했다.

역사는 당사자 해결이 원칙이다. “영토는 국제분쟁이기 때문에 제3자가 관여할 수 있어도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아니다”라는 게 국가 간 역사 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문율이다. 그런데 이를 깨고 미국이 또다시 한·일 간 역사 문제에 깊숙이 발을 들여놨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미 소상히 밝혀졌으나 이번 협상에 대해서는 ‘당연히 개입했을 것이다’라는 수준 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시사IN> 취재 결과 미국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개입했고, 아베 총리와 일본 우익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큼지막한 선물도 줬다. 그 결과 미국은 무엇을 얻었을까. 한국을 ‘역사의 저주’ 속으로 밀어넣은 대가로 한·중 간 역사 공조를 깨고 한·미·일 공조로 고분고분 복귀한 한국을 얻게 되었을까? 협상 과정과 결과를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미국 역시 불안하다. 오히려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후유증이 예상된다. 미국의 앙시앵레짐 역시 흔들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워싱턴의 아베와 서울의 존 케리

위안부 협상의 막후에 미국이 있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지난해 6월12일자 박근혜 대통령의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 기사였다. “위안부 문제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고 현재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라는 박 대통령의 다소 뜬금없는 낙관론이 어디서 나왔을까 출처를 추적하다 보니 미국이라는 존재가 떠올랐다. <워싱턴 포스트>가 박 대통령을 인터뷰한 6월11일 도쿄에서는 한·일 간 국장급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국장급 회담 수준이 ‘상당한 진전’이나 ‘마지막 단계’를 거론할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다른 채널로 얘기를 듣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그 채널이 어딘가에 대해 비슷한 시기 방미 중이던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격려해주는 많은 채널, 다양한 지원들’이라고 얼버무렸으나 한·일 간 외교 채널 말고 별도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이상덕 외교부 동북아국장의 얘기는 좀 더 직설적이다. 위안부 협의의 성격상 보이는 것보다 뒤에서 조정하는 것이 많다는 뜻에서 ‘Behind the scenes(무대 뒤에서)’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지난해 5월18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서울 발언을 상기해보면 박 대통령이나 외교부 당국자들이 낙관론을 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날 오전 윤병세 장관과 회담을 마친 뒤 케리 국무장관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이 성적인 목적에서 여성들을 인신매매한 것과 관련해 미국은 여러 차례 입장을 밝혔다. 이는 끔찍하고 지독한 인권침해다”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 발언은 아베 총리가 3월25일자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를 비롯해 4월27~28일 미국 방문 기간에 쏟아낸 위안부 관련 발언을 정면에서 반박한 것이다. 아베는 당시 위안부에 대해 ‘인신매매의 희생자’라고만 언급함으로써 이들이 민간업자에 의해 인신매매되었을 뿐 일본 정부나 군은 이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을 미국인들의 뇌리 속에 심어주고자 했다.

일본 내에서 이런 시각은 아베의 측근인 에토 세이이치나 하기우다 고이치 등을 비롯한 정권 내 우익 세력들과 ‘일본 회의’ 등 우익 집단의 입장이다. 한국에서도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써서 논란이 돼온 박유하씨나 그를 지지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유포해왔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2015년 12월30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11차 수요집회에는 수많은 시민이 참여해 ‘12·28 위안부 협상’에 대해 항의했다. 참석자들이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사진을 들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2015년 12월30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11차 수요집회에는 수많은 시민이 참여해 ‘12·28 위안부 협상’에 대해 항의했다. 참석자들이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사진을 들고 있다.

이번 협상 결과와 비교하기 위해서라도 아베와 이들 일본 우익의 시각을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위안부의 모집 내지 동원 과정에서 일본 정부나 군은 책임이 없다고 강변하지만, 끌려온 이후의 인권유린이나 강제성에 대해서는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는 만큼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즉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나 우익이 무조건 사과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모집 동원은 (조선 사람들도 많이 관여된) 민간업자가 한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으며 그 뒤에 발생한 인권유린은 사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 정부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은 동원 및 모집 과정에서부터 일본 정부와 군이 깊이 개입했고, 강제성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과와 배상은 그 뒤에 당연히 이어지는 절차다. 일본 내에서도 좌파와 중도 좌파가 이런 입장이고, 1993년 고노 담화를 발표한 고노 전 관방장관 역시 동원 및 모집 과정에서의 포괄적인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아베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말로만 얘기했을 뿐 실제로는 자기가 인정하고 싶은 부분만 하는 편의적 태도를 취해왔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기존 쟁점을 놓고 들여다보면 케리 장관의 발언 맥락이 잡힌다. 그는 분명히 ‘일본군이 성적인 목적으로 여성들을 인신매매’했다고 했고 이것과 관련해 “미국은 여러 차례 입장을 밝혔다”라고 했다. 그가 말한 ‘미국’에는 당연히 오바마 대통령도 포함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정부나 정대협 그리고 할머니들의 주장과 미국의 입장이 비슷했던 셈이다. 박 대통령이나 외교부 당국자들의 낙관론은 이런 배경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박 대통령이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고 한 것은 다분히 지난해 8·15를 겨냥한 것이었다. 당시 아베 총리가 종전 70주년 담화를 준비 중이었는데, 그 전에 위안부 협상이 타결돼야 한다는 것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당시 도쿄의 분위기는 “아베 총리가 여전히 인신매매설을 고수하고 있고, 일본 정부나 군의 책임 문제에 대해 완강하다”는 것이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내주고 반쪽 타협?

위안부 협상이 재점화한 것은 알려졌다시피 2015년 10월16일 박근혜 대통령 방미가 계기였다. 오바마가 박 대통령에게 한·일 관계를 개선하라고 압박하자 박 대통령 본인도 금년 안에 매듭짓기를 원한다며 한국이 받아들일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답변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박 대통령은 미국이 우리와 비슷한 시각이라고 보고, 한·일 관계 개선을 원하면 미국이 아베를 적극 설득해서 연말 안에 답을 가져오라는 식으로 역공을 취한 셈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2015년 12월28일 ‘위안부 협상’ 내용을 발표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왼쪽).  
ⓒ시사IN 이명익
2015년 12월28일 ‘위안부 협상’ 내용을 발표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왼쪽).

이런 정황은 보름 후인 11월2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에게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인 올해(2015년) 안에 조기 타결을 압박하자 아베 총리가 난색을 표명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당시 양측은 목표 시한을 박지 않고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했다”는 모호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외교부의 이상덕 동북아국장은 기자 브리핑에서 바로 이 한·일 정상회담이 “연내 타결의 모멘텀을 마련한 중요한 계기였다”라고 밝혔다.

워싱턴 사정에 밝은 외교 소식통은 미국이 위안부 협상에 적극 개입한 시점을 2015년 11월과 12월이라고 특정했다. 즉 11월2일의 한·일 정상회담 직후부터였다는 얘기다.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분명해진 것처럼 미국의 1차 교섭 대상은 일본이었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 정부와 군의 역할 문제가 핵심 쟁점인 만큼 이 점에서 완강하게 버티는 아베 총리가 핵심 교섭 상대일 수밖에 없고, 그의 뒤에는 일본 우익이 버티고 있었다. 미국의 대일본 교섭은 도쿄에 있는 주일 미국 대사관을 거점으로 전문 협상팀이 꾸려져 총리관저·외무성·자민당 등 모든 채널을 총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일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꺼낸 카드가 바로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앞의 외교 소식통은 “일본이 미국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역할, 특히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에 대해 미국도 책임질 수 없다고 압박을 가했다”라며 안보리 진출 문제가 대일 설득에서 결정적 변수였음을 밝혔다. 안보리 진출 문제는 사실 일본 외무성의 숙원 사업이기도 하다. 따라서 언뜻 보면 미국이 이를 가지고 일본 외무성을 압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 외무성은 재계와 더불어 애초부터 미국과 생각이 비슷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5년 10월16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만난 오바마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왼쪽).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위안부 협상이 재점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2015년 10월16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만난 오바마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왼쪽).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위안부 협상이 재점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와 우익, 그리고 외무성과 일본 재계는 일본이 군사대국화해야 한다는 목표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다. 다만 위안부, 난징 사건 같은 과거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견해가 갈린다. 아베나 그를 뒷받침하는 일본의 우익들은 군사대국이 되려면 일본 국민의 자부심에 상처를 주는 위안부나 난징 학살을 역사에서 지우고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외무성이나 재계는 일본이 과거사에 붙들려 있으면 아시아에서조차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털고 가자는 시각이다. 즉 목표는 같은데 과거사를 지우자는 쪽과 털고 가자는 쪽의 대립이다.

그동안 미국은 위안부 협상에서 한국 쪽 주장을 들어주는 척 생색을 내면서 일본 외무성을 앞세워 아베 총리와 우익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순한 압박이 아니라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라는 구체적인 카드까지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압력 카드지만 한편으로는 선물이기도 하다. 결국 위안부 협상은 미국이 일본 외무성과 뜻을 같이해 안보리 진출 문제를 가지고 아베 총리실을 압박해 협상 골자를 받아내고, 그것을 야치 쇼타로 일본 NSC 사무국장이 청와대 이병기 비서실장과의 채널을 통해 협의한 후 박근혜 대통령이 윤병세 장관에게 지침을 내려 협상을 진행하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난해 12월28일의 합의 내용이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합의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 즉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런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군의 관여’라는 네 글자다. 그동안 일본 정부나 군의 개입을 부인했던 아베나 일본 우익의 완강한 태도를 생각하면 진일보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관여인지가 빠져 있다. 위안부 모집과 동원, 위안소 운영, 위안소 안에서의 비인간적 처우 등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앞에서 아베나 일본 우익들이 ‘위안부로 끌려온 이후의 인권유린이나 강제성에 대해서는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던 만큼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위안부로 끌려온 뒤의 군의 관여’였다는 식으로 물타기를 해버리면 사실상 기본 주장과 다를 바 없는 얘기가 돼버린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책임의 범위가 이렇게 모호하다 보니 그 구절에 이어지는 정부 책임이나 두 번째 아베 총리의 사과도 기존과 달라진 게 아니다. 그리고 세 번째 한국 정부가 재단을 만들고 10억 엔의 기금을 일본 정부가 출연한다는 항목에 대해 우리 외교부는 과거의 안보다 진일보한 해법이라고 자화자찬하지만 이미 소녀상 철거와 맞물리면서 최악의 패착이라는 점이 드러나버렸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투쟁해온 지난 20여 년의 역사를 10억 엔에 팔아치웠다는 원성과 비판이 난무하고 있고 그조차도 소녀상 철거를 조건으로 했다고 하면 과연 박근혜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사진공동취재단</font></div>2015년 12월29일 정대협이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 쉼터로 임성남 외교부 1차관(오른쪽)이 찾아가자 이용수 할머니가 협상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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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29일 정대협이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 쉼터로 임성남 외교부 1차관(오른쪽)이 찾아가자 이용수 할머니가 협상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이번 협상의 대가로 아베와 일본의 우익은 자신들을 짓눌러온 위안부 문제라는 과거사의 족쇄로부터 해방되고, 앞으로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라는 날개까지 달게 됐다. 중국과 북한의 반발이 예상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는 아예 설 자리가 없어졌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의 입지 또한 좁아졌다. 이번 협상이 미국이 안보리 카드라는 상당한 외교 자원까지 동원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베와 일본 우익을 제어하는 데는 사실상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베와 일본 우익의 질주가 과연 여기서 멈출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아베와 일본 우익은 오바마의 미국을 우습게 여기는 눈치다. 일본 자민당이 지난해 11월 아베 총리실 직속으로 ‘전쟁 및 역사 인식 검증위원회’를 설치한 것이 결정적인 근거다. 도쿄 전범재판을 비롯해 미국 등 연합국이 구축한 전후 질서를 재검증해서 뒤집겠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우익 군사 전문가들은 한동안 잠잠하던 핵무장 논의를 다시 꺼내들기 시작했다. 위안부 협상 타결은 결국 한국의 앙시앵레짐뿐 아니라 미국의 전후 앙시앵레짐까지 뒤흔드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