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에서 북한 사람 등 밀어줘야 하나요?"
2000년 여름 한 달, 나의 현지 조사는 두만강변 혹은 만주 벌판의 어느 산 속 움막이었다. 그곳에서 탈북 청소년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2006년 가을, 박사 논문을 위한 장기 현지 조사는 단둥의 민박집에서 시작하였다. 북한 아줌마가 옆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나에게 아침밥을 해주었다. 한 달 뒤, 나는 그녀가 파출부 일을 통해서 번 돈을 가지고 구입한 물건을 가지고 신의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는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함께 하는 모임과 술자리에 수시로 동석을 할 수 있었다.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의 관계 맺음과 국경 무역 방식들은 나의 연구 내용이었다. 단둥은 그들의 만남을 일상적으로 참여 관찰할 수 있던 공간이었다.
2015년, 남북이 공존하고 교류하는 단둥은 변하지 않았다. 다시 찾은 민박집에서 압록강 건너 신의주에서 들려오는 아침 노래 방송과 닭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한국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의 아파트 구멍가게에는 "북조선 계란 판매" 문구가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한국 사람은 북한의 대동강 맥주를 마시고 북한 사람은 슈퍼에서 한국 우유를 구입하고 있다. 그들은 삼국의 국기가 걸려있는 식당에서 스스럼없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고, 사우나에서 서로의 벗은 몸을 보면서 때를 미는 곳이 단둥이다.

▲ 단둥에서 한국 사람은 북한의 대동강 맥주를 구입하고 북한 사람은 한국 우유를 마신다(2015년). ⓒ강주원

▲ 단둥에서는 삼국의 국기가 걸려 있는 식당에서 네 집단이 식사를 한다(2013년). ⓒ강주원

▲ 단둥의 구멍가게에서 북한 계란이 판매되고 있다(2015년). ⓒ강주원
북한 노동자와 함께 하는 고기 잔치를 꿈꾸다
단지 단둥의 변화를 하나만 이야기를 한다면, 북한 노동자들이 근무하는 중국 공장(봉제, 수산물, 전기·전자)들이 2010년을 전후해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공장을 운영하는 조선족과 북한 화교는 나에게 북한 노동자의 계약서를 보여주기도 하고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전해준다. 덕분에 나는 그들의 근무 환경 및 식단 메뉴를 수첩에 적었고, 그들이 외출을 하면 주로 어디에 가고 무엇을 구입하는지 알고 있다.
그녀들은 단둥 생활 1년차에는 북한의 부모님과 가족을 위해서 물건을 구입한다. 2년차에는 자신들이 필요한 생필품을 숙소 한 구석에 하나 둘 모으고, 3년차에는 북한에 돌아가 장마당에 팔 수 있는 가전제품 등을 주로 쇼핑한다. 그녀들의 대형 귀국 가방은 최소 2~3개가 필요하다. 그녀들의 가방에 담긴 물건들은 북-중 무역 통계에 대부분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제한적이고 정확하지도 않은 북-중 통계를 통해서 북한 경제를 분석한다.
그들의 계약서에 담긴 인건비 액수는 단둥이 "또 하나의 개성 공단"임을 보여주고, 그들의 월급 사용 방식을 들여다보면 북한 사회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는 개성 공단을 뛰어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단둥의 북한 노동자에 대한 참여 관찰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이를 알기에 내가 단둥에 가면, 조선족과 북한 화교는 함께 공장에 가자고 권유한다.
"오늘 공장에서 5명의 조선(북한) 노동자들을 위해서 생일 잔치가 있는데 가자?", "내일 저녁 때,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공장 마당에서 고기를 구울 계획인데 함께 하지?", "핸드폰 보여줄까, 이 사진은 지난 달 고기 구워 먹는 모습인데 이 친구들이 춤과 노래를 잘해요. 일하는 모습도 봐야지, 자네 인류학자잖아!"
그때마다, 나는 순간 일탈을 고민하지만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한다.
"(5.24 조치가) 해제되면, 바로 단둥에 오겠습니다. 돼지 한 마리를 사 가지고 공장에 가서 북한 노동자와 함께 마음껏 고기 잔치를 합시다. 대신에 오늘은 그동안 있었던 북한 노동자들을 보면서 느낀 점들을 이야기해주세요. 요즘 공장에 하청을 주는 회사는 한국 회사예요, 아니면 미국 회사예요? 북한 여공들이 만든 MADE IN CHINA 옷을 한국에 수출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하나 주세요."
'공장 앞마당에서 북한 노동자와 함께 먹고 마시는 고기 잔치'를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둥에 거주하는 북한 사람에 대한 연구를 중단한 것은 아니다. 단둥에는 공장에만 북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 식당, 호텔, 식당과 술집, 사우나, 무역 상점, 세관과 기차역 주변, 조선족 거리, 도매 시장, 신시가지, 보세 창고 등에서 나는 현지 조사를 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5.24 조치의 굴레에서 벗어나 북한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그들의 삶의 방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참여 관찰 방식이 예전을 생각하면 성에 차지 않는다. 참, 아직 안 가본 곳이 있다. 당구장이다. 한국에서 북한 화교 C에게 전화를 하면, 그는 "당구장에서 북한 사람과 접대 당구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 북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단둥의 비지니스 호텔이 늘어나고 있다(2015년). ⓒ강주원

▲ 단둥의 북한 사람이 애용하는 사우나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에서 북한 사람과 한국 사람은 함께 목욕을 한다(2015년). ⓒ강주원
단둥, 한국 사람보다 북한 사람이 많다
2015년 전 세계에 거주하는 재외 동포가 718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런던 남서쪽에 위치한 뉴몰든은 영국의 대표적인 한인 타운이다. 1000여 명의 탈북 주민도 뉴몰든에 살고 있다." (<미디어오늘> 2015년 11월 10일)
"북한은 약 16개국에 5만∼6만 명의 노동자를 내보낸 것으로 추산된다." (<연합뉴스> 2015년 9월 16일)
이런 내용들을 접할 때마다, 나는 두만강변의 중국 국경 도시들을 포함해서 아프리카, 중동, 러시아의 어느 도시에는 아마도 한국 사람보다 북한 사람이 많을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네 집단의 규모는 2000년대 이래, 북한 사람과 북한 화교가 2000명 이상, 조선족이 8000명 이상, 한국 사람이 2000명 전후로 추산되고 있다. 조선족이 꾸준히 증가하는 것 외에는 약 10년 동안 큰 변동이 없었다.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강주원 지음, 글항아리 펴냄))
하지만, 2010년 전후부터 네 집단 가운데 북한 사람과 한국 사람의 규모에 변화가 있다. 단둥에 거주 혹은 체류하는 기존의 북한 사람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근무하는 중국 공장들이 생기면서, 2000명 이상을 유지하던 북한 사람들이 약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5.24 조치의 여파로, 한국 사람은 2000명 수준에서 1000명 미만으로 줄어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단둥에서 더불어 살아온 역사가 약 20년이 넘었다. 이를 시기별로 정리하면, 2010년 기준으로 전에는 그들의 규모가 비슷한 수준에서 유지 되어 왔다. 이후에는 한국 사람보다 북한 사람이 더 많이 살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가 단둥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 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한 북한에 대해서 "한국 사회가 생각하는 만큼의 폐쇄적 국가, 북한은 아니다"를 설명 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단둥의 한국 사람 규모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2010년 전에 나는 탈북자가 아닌 북한 사람도 단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에 말하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2010년 이후 풀어야할 숙제가 하나 더 생겼다. 단둥 한인회 이희행 회장이 나에게 한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요즘 현실에서 우리들이(단둥의 한국 사람) 사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에는 한계가 있잖아! 그래서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물어보면, 주변의 한국 사람들은 그냥 단둥에 한국 사람의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말을 반복하곤 했지! 그러다보니 한국 사회는 단둥에 한국 사람이 없다고 판단을 하는 것 같아. 대북 사업은 조선족과 북한 화교들의 몫으로만 생각하고, 단둥에 한국 사람이 있는 이유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 그래서 나는 어쩌다 한국에서 한인회를 찾아오는 분들에게 마지막의 한마디를 꼭 해. 단둥에 한국 사람이 있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고!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 밖에 없는 현실이 답답해!"
5.24 조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단둥의 한국 사람이 낯선 한국의 기자와 연구자에게 처음부터 한국 사회 기준으로 위법 행위에 해당되는 "지금도 우리는 단둥에서 대북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할 사람은 없다.
합법적으로 간접적인 대북 사업을 하는 방법도 있다. 그것은 그들만의 사업 노하우에 해당이 된다. 이를 쉽게 언급할 사업가는 없다. 그들의 준비된 단골 답변은 "한국 사람의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말 뿐이다. 이런 정황을 한번쯤 생각했다면, 기사 내용은 다른 내용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하지만 2010년 이후 한국 사람들이 단둥을 떠나거나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보도가 주를 이루고 있다.
2010년 북한과의 교역을 전면 중단시킨 5.24 조치가 나온 지 5년이 돼가면서 많은 한국 사업가들이 단둥을 떠났다. (<국민일보> 2015년 5월 17일)
한 때 단둥 시내 식당과 호텔을 가득 채우던 한국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연합뉴스> 2015년 6월 19일)
틀린 설명은 아니다. 그렇다고 맞는 설명도 아니다. "많은 한국 사람이 단둥을 떠났다"와 "여전히 한국 사람이 단둥에 있다" 가운데 어디에 방점을 두어야할까?
확실한 것은 전자의 내용이 주로 강조되면서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단둥에 왜 지금도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은 채, 국경 무역을 한국 사람이 배제된 북-중 무역으로만 설명하는 기사 내용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 결과 5.24 조치 이후에도 여전히 단둥에서 삼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 사람의 경제 활동을 보지 못하는 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단둥에는 한국 사람보다 북한 사람이 많다"라는 말을 한 뒤, 나는 잊지 않고 "한인회관이 단둥에도 있습니다"라는 추가 설명을 한다. 이처럼 단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기가 필요하다. 단둥에 현지 조사를 갈 때마다. 나는 신영복 선생의 글귀를 다시 읽곤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사실보다는 진실에 주목하고 그 사람과 그 처지를 함께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5.24 조치 이후에도 한국 사람이 단둥에 있다(2013년). ⓒ강주원
"북한 사람에게 500억 원어치 판 장삿꾼, 아이템은?"
늦은 밤, 아내가 "홈쇼핑에서 단둥에 있는 회사가 만든 중국 제품을 판매하네. 예쁜데, 나 하나 구입해도 될까?"라고 묻는다. 직업병이 도진 나는 아내에게 "회사 이름이 뭐지? 저 옷은 정말 중국에서 만들었을까? 아니면 북한에서 만든 것일까?" 또는 "중국 단둥의 북한 여공이 만든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해본다. 아내는 "또 시작이다!"고 말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채널을 돌리니, <잘살아보세>라는 프로그램(채널 A 2015년 11월 28일)에서 한 탈북 여성이 입고 나온 옷이 화제였다. 그녀의 옷은 북한에서도 입었던 것이었다. "남한 옷이래도 믿겠어! 북한의 최신 유행 패션", "보고도 믿기지 않는 북한 옷"이라는 자막과 함께 남한의 남자 연예인은 "이런 옷이 북한에도 있어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저 옷은 한국 제품일까? 중국 제품일까?" "북한 여공이 만들었고 한국에서도 팔렸던 옷일 수 있는데!"라는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한 달 전, 평양에 갔다 온 조선족 H는 서울에 오자마자, 지인에게 "평양에서 아기 옷을 만들기 위해서 한국 원단의 패턴 디자인이 필요한데, 얻을 수 있니? 평양 사람들이 원하네!"라고 부탁을 한다. 한편, 2015년 11월 마지막 날, '한중 FTA 비준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와 관련된 뉴스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남북한 경제 협력 사업의 아이콘인 개성공단이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재도약 기틀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중 FTA가 발효되면 동시에 개성공단에서 생산되는 제품 310개 품목이 특혜 관세를 통해 가격 경쟁력을 더욱 높여 중국 수출길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헤럴드경제> 2015년 11월 19일)
위의 기사처럼, '한중 FTA'와 '남북 교류'는 개성공단 밖에 연결고리가 없는 것일까? 단둥의 압록강 유람선 광고판에는 한국 걸 그룹 소녀시대 뮤직 비디오가 하루 종일 방송되기도 한다. 강 건너편 신의주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한국 노래와 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단둥과 신의주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이다.

▲ 2013년 여름 신의주의 압록강에는 소녀시대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오고 있다(2013년). ⓒ강주원

▲ 단둥의 보세 창고는 3국 무역의 중심에 있다(2014년). ⓒ강주원
단둥의 보세 창고는 3국 무역의 축약판
무역의 방식은 복잡하고 때로는 무역 통계가 모든 것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한국의 전문가들이 '한중 FTA'와 관련되어 "개성공단의 제품을 중국에 수출하는 효과" 즉 미래를 언급할 때, 단둥 사람들은 '한중 FTA'를 북한과 관련된 3국 무역의 확대와 활성화의 계기로 여긴다. '한중 FTA'를 놓고 그들은 다른 생각을 한다.
왜 그럴까? '한-중 무역'과 '북-중 무역'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 단둥의 무역 현장에 가면 보인다. 먼저 단둥에서 펼쳐지는 3국 무역의 현주소를 이해해보자.
단둥에서는 의류 생산과 관련되어 중국의 노동자를 활용하는 방법 이외에, 두 가지 방식이 더 있다. 하나는 평양의 공장에서 생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둥의 공장에서 북한 노동자를 고용해서 생산한다. 둘 다 북한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이점이 있다. 단둥 사업가들은 평양에서 중국 내수용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중국과 한국의 원단을 제공해서 평양에서 만든 제품들은 단둥의 보세 창고를 경유해서 한국을 포함한 제3국으로 수출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이익이 된다. 중국의 관세 혜택이 있기 때문이다.
둘 다, 한국으로 수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둥 사람들은 평양에서 생산된 제품에 'MADE IN CHINA'를 붙여서 한국에 수출하는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제품들이 한국에 수출되었다가, 다시 중국 단둥으로 역수입되고 북한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한국 홈쇼핑에서 팔리는 중국 단둥 회사 제품"과 "방송에 출연한 탈북 여성의 패션"은 남북 교류의 또 다른 장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통계에 보이지 않는 남북 교류가 가능한 것은 단둥에 한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조선족과 북한 화교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국 무역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무역 현장 가운데 하나는 단둥 보세 창고들이다.
5.24 조치 이전, 단둥 보세 창고는 중국을 경유하는 남북 교류의 메카였다. 창고에는 무관세 혜택을 받는 북한의 물건이 한국으로 수출될 날짜를 기다리곤 했다. 예외는 있었지만 보세 창고에 쌓여있는 물건의 모습 그대로가 3국 무역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5.24 조치 이후, 단둥 보세 창고들의 물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보세 창고에 중국 물건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단둥 보세 창고에는 중국 제품들이 쌓여있다.
단둥 사람들은 보세 창고에 있는 'MADE IN CHINA' 물건을 보고, 북한에 생산되었지만 한국으로 수출하는 제품으로 읽는다. 5.24 조치로 금지되어 있지만, 그들은 한국 물건을 단둥 보세 창고로 수입해서 중국이 아닌 북한으로 보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2014년 2월, 보세 창고에 나와 함께 갔던 한국의 연구자가 "내가 며칠 전 (한국의) 백화점에서 구입한 중국 제품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이죠? 이 제품들이 평양에서 만들었다고 설명하셨는데 왜 'MADE IN CHINA' 라벨이 붙어있죠?"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공간이 단둥 보세 창고들이다.
이처럼, 5.24 조치 이후 남북 교류의 무관세 혜택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단둥의 무역은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3국 무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중 FTA' 이후, 한-중 무역의 관세 혜택이 본격적으로 실행되면, 단둥의 3국 무역은 어떻게 될까? 앞의 <헤럴드경제>가 전망한 기사 내용을 단둥의 사업가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다르게 읽을 것이다.
3국 무역의 아이콘인 단둥이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재도약 기틀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중 FTA가 발효되면 동시에 단둥(북한 포함)을 통해서 생산되는 다양한 제품들이 관세를 통해 가격 경쟁력을 더욱 높여 한국 수출길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개성공단과 마찬가지로 단둥은 북한 내 노동력을 활용할 뿐만 아니라 단둥에 거주하는 북한 노동자를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반대로 한국의 물건이 '더 저렴한 가격'에 단둥으로 수입되어, 중국에서 북한으로 수출되는 길이 열릴 것이다. 이는 단둥의 무역 현장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북-중 국경 지역의 중국 국경 도시들은 한반도(한국과 북한)와 연결되어 있다.

▲ 조선족 거리는 점점 더 북한과의 거래를 강조하는 문구들로 채워지고 있다(2015년). ⓒ강주원

▲ 조선족 거리를 살펴보면, 북한 사회에서 유통되는 물건들을 미루어 파악할 수 있다(2015년). ⓒ강주원
조선족 거리에 남북 교류가 녹아 흐른다
5.24 조치와 상관없이, 2010년 이후 단둥의 조선족 거리의 변화는 두 가지이다. 예전에도 '조선(북한)과의 무역을 강조'하는 문구는 조선족 거리를 걷다보면 쉽게 보였다. 하지만 몇 년 사이에 이런 간판이 늘어났다. 그들이 중국 제품만 판매하지는 않는다.
"저희 공사는 액체 및 고체 화공 제품을 경영하는 전문 공사로 조선과 수년간의 수출 거래를 해왔습니다."
"전기 제품들을 조선으로 수출하며 장기간 눅은 가격으로 제공해드리며 품질을 담보하고 빠른 속도로 제품을 제공해드립니다. 품질도 제일 신용도 제일 조선고객님들과의 신용합작을 기대하며 많은 분들의 광림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조선족 거리의 풍경과 역사를 들여다보면, 북-중 무역만의 현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0년 전에도 조선족 거리에는 한국 물건들을 도매로 파는 상점들이 있었다. 여기에서 판매되는 물건들의 최종 도착지는 대부분 북한이었다. 5.24 조치 이후에, 이런 상점들이 줄지 않고 오히려 현지 조사를 갈 때마다, 새로운 가게들이 개업을 하고 있다. 한국의 식료품들을 취급하는 가게에 들어가 보면, 판매 가격이 한국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상점 주인은 "한국의 대형 마트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대형 마트에서 저렴하게 구매하기도 한다. 그보다는 (한국에서) 대형 마트가 생기면 주변의 상권이 무너지고 그 결과 많은 소형 가게들이 문을 닫게 되면 땡처리 물건이 발생하죠. 그런 물건을 구입해서 단둥에 가지고 오면 북한 사람들이 물건을 싸게 구입한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어요"라고 웃으면서 설명하지만, 그의 말 속에 3국 무역의 전형이 담겨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조선족 거리의 대표 히트 상품은 '태양광을 이용해 충전하는 발전기와 제품들'이다. 장사가 잘 되는 한 가게가 북한에 판매한 제품 금액만 한국 돈으로 500억이 넘는다는 말이 돌기도 한다. 그런데 북한 화교 C는 이렇게 말한다.
"북한 사람들의 구매 패턴이 바뀌고 있다. 북한 사람들이 이제 태양광 조명 제품도 한국 것을 찾아!"
단둥 사람들은 북한의 노동력을 이용해서 제품(농수산물 포함)을 생산하고 이를 한국에 수출한다. 그들은 북한에서 인기 있는 제품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있고, 북한 사람들이 한국 제품을 구입하기도 하고 선호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 제품들을 저렴하게 구입해서 북한 사람들에게 판매할 수 있는 방식도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난 20여 년 넘게 삼국 무역의 중심지에서 살아온 단동 사람들은 '한중 FTA' 이후 어떤 사업의 길을 걸어갈까?
분명한 것은 그들이 '5.24 조치'와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는 남북 교류의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한중 FTA 비준 동의안'의 국회 통과는 남북 교류의 길이 하나 더 생겼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한중 FTA'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5.24 조치 해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다.
단둥 사람들의 범주에는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에게 그동안 걸어왔고 앞으로 걸어갈 남북 교류의 길을 묻자!

▲ 5.24 조치 이후에도, 조선족 거리에는 한국 물건을 파는 가게들도 매년 늘어나고 있다(2014년). ⓒ강주원
▲ 단둥에서 북한으로 수출되는 태양광 전기 관련 제품들이다(2015년). ⓒ강주원

▲ 단둥에서 북한으로 수출되는 태양광 전기 관련 제품들이다(2015년). ⓒ강주원
응답하라 1988, 압록강 버전은 따로 있다
다섯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응답하라 1988>이 인기다.
프로그램 홈페이지에는 "우리가 보낸 시간에 관한 이야기", "현재를 살아가고, 견디며, 잘 지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연가"라는 문구와 함께, "누구에게나 내가 살아온 시대는 특별하기에 그날들을 선명히 기억한다"는 설명이 있다. 나는 드라마를 시청 할 때 마다 덕선이 아버지가(성동일) 홍콩을 경유해서 단둥으로 출장을 떠나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렇다면, 한국이 아닌 중국 단둥의 누군가에게 한국 사회와 관련된 어떤 연도와 시대가 특별한 의미로 기억될까? 쌍문동 골목길이 아닌 단둥의 조선족 거리에는 네 집단이 모여 살고 있다. 중국 사람(북한 화교와 조선족 제외)까지 포함하면 다섯 집단이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응답하라' 버전으로 최소 네 편의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네 집단의 사람들은 공식적인 남북 교류의 단절을 상징하는 5.24 조치가 발표된 2010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당 지도부도 '북한 돕기 성금'에 참여했던 '용천 폭발 사건' 당시에 피해 복구 지원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단둥의 2004년, 남북 교류 활성화의 계기가 된 '단둥 페리'가 인천과 단둥을 연결하기 시작한 1998년, 한-중 수교 1992년 전후 그들이 본격적으로 모여 들었던 시절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응답하라 2010, 2004, 1998, 1992' 이외에, 한 편의 드라마를 더 연출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응답하라 1988'이다. 1988년은 네 집단 가운데 특히 단둥의 1세대 한국 사람에게 남북 교류와 관련된 기회를 제공해준 해이다. 그들은 서울 올림픽뿐만 아니라 남북 무역 즉 남북 경협의 계기가 되었던 노태우 대통령의 1988년 '7.7 특별 선언'을 기억한다.
또 그 해 10월에 발표된 대북한 경제 개방 조치인 '남북 물자 교류에 대한 기본 지침서'의 내용이 한국 사람의 삶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들은 단둥에 하나 둘 이사를 오고 그곳에서 북한 사람, 북한 화교, 조선족과 같은 거리의 이웃이 되었다. 아래 내용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27년 전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이고 22년 넘게 남북의 사람들을 만나게 한 정책이다.
민간 상사 북한 물자 교역 허용, 민간 상사 북한 물자 중계 허용, 북한 원산지 표시 상표 부착 허용, 직·간접 교역 물자 관세 미부과, 남북 경제인 상호 접촉·방문 허용, 북한 선적 상용 선박 입항 허용, 남북 경제 교류 관련 법제 보완.
< 응답하라 1988> 드라마 덕분에 복고풍이 유행한다고 한다. 대북 정책에도 복고풍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무리일까? 하지만 1988년부터 단둥의 조선족 거리에도 쌍문동의 '가족 관계도' 처럼 '네 집단의 관계도'가 있고 나름 개성 있는 네 집단을 대표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얽히고설킨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오늘따라 10년 전 단둥 중국어 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17살의 북한 학생과 2007년 한 달에 두세 번 진하게 술을 마셨던 두 명의 북한 아저씨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 내가 그들을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1988년 남북 교류를 허용한 대북 정책이 발판이 되었다.

▲ 단둥의 기차역에 가면 평양발 기차의 도착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2015년). ⓒ강주원

▲ 압록강 오른쪽이 리영희 선생이 유년 시절을 보낸 삭주군이다(2014년). ⓒ강주원
박지원, 손기정, 장준하, 리영희와 대화를 나누다
내친김에 15년 전부터 촬영한 사진과 현지 조사 노트들을 뒤적거렸다. 한국으로 갈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두만강을 건너 북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북한 청소년 두 명의 뒷모습을 찍었던 사진이 그때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단절이 아닌 교류의 중-조(북-중) 국경 모습도 있음을 깨달게 해 준 장면이다.
나는 현지 조사를 할 때 습관이 있다. 때문에 10년 넘게 단둥의 이야기를 담은 노트들에는 마음 속 대화를 나누었던 네 명의 이름이 수시로 등장했다. 박지원, 손기정, 장준하 그리고 리영희이다. 모두가 시기는 다르지만 단둥과 인연이 있다. 종이 모퉁이에 씌어 있는 그들 이름 옆에는 늘 물음표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본 장면과 내용을) 리영희였다면 (어떻게 볼까)?"이다.
약 200년 전 압록강을 건너 그 당시 중국의 국경 역할을 하던 책문으로 향하던 박지원이 현재 나와 함께 압록강변에서 노숙을 한다면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 신의주에서 단둥(그 당시 안동)으로 출근을 하면서 마라톤 연습을 했던 손기정은 내가 지금 걸고 있는 압록강대로에서 무엇을 주목해야한다고 말할까? (…) 신의주가 아닌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지금의 삼국 무역의 현장인 단둥을 어떻게 나에게 설명할까? (…) 압록강 너머 삭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리영희는 압록강의 새들과 단둥과 신의주를 넘나드는 네 집단의 삶의 풍경을 보면서 어떤 해석을 내놓을까?
2014년 겨울 스승과 함께 했던 4박5일의 단둥 현지 조사 노트를 다시 읽었다. 뒷장에 연구 내용과 상관없이 써내려간 글에도 리영희 선생은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현지 조사는 <열하일기>의 책문에서 동네 결혼식 이후 남은 중국술을 공짜로 마시는 것부터 시작했다. 차가운 압록강 강바람을 피부로 느끼면서 보트에서 북녘 땅과 사람을 접한 뒤, 스승은 리영희 선생의 고향 삭주를 건너편에서 바라보면서 추억을 이야기하고, 나는 어느 봉제 공장의 여공들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민박집에서는 남쪽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서로 열심히 찍었다. 북한 식당들을 돌아다니면서 냉면을 섭렵하고, 신의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북한 노동자 10여 명을 호텔 로비에서 지켜보다가 호텔 조식을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먹었다. 신의주를 막 건너온 트럭들이 수속하는 세관의 모퉁이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고, 평양에서 온 국제열차와 사람을 보기 위해서 단둥 기차역에 간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만을 응시했다.
보세 창고에서 북한 물류의 종류와 흐름을 파악한 뒤, 조선족 거리를 구석구석 걸어 다니면서 북한의 변화상을 해석했고, 도매 시장에서는 북한 사람들의 쇼핑패턴을 따라다녔다. 황금평에서는 현재와 미래를 토론했고 이슬비 내리는 압록강변에서 신의주를 응시하면서 밤 산책을 즐겼다. 스승과 함께 했던 이번 답사 내내 리영희 선생도 함께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 압록강 상류의 북한 국경 지역은 변화하고 있다(2015년). ⓒ강주원

▲ 2015년 북한 만포 시에 건설된 새 아파트를 보고 한국 대표 지성 31인은 선전물이라고 단정한다(2015년). ⓒ강주원
압록강대로와 두만강대로가 국경이 되다
2015년 7월, 9박 10일 동안 압록강과 두만강을 바라보면서 써내려간 글에서도 나는 리영희 선생에게 묻고 있었다.
선생님이 보고 경험했던 강변은 어떤 모습인가요? 한국 사회는 압록강변의 북한 지역에 새롭게 건축한 아파트와 집들을 보고 선전물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북한을 직접 가지 못하지만, 분명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양쪽의 사람들은 삶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다만 철조망과 도로가 2006년 전후부터 새로 등장한 풍경입니다. 한국 사회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철조망에 주목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동안 달려왔던 압록강대로와 지금 달리고 있는 두만강대로가 앞으로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더 궁금합니다. 이곳에 국경의 개념이 없던 박지원의 <열하일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불과 10년 전만해도 어디가 중국 땅이고 북한 땅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던 압록강과 두만강변의 지역들이 많았습니다.
2015년 현재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던 두 강의 상류 지역조차도 도로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강을 공유하고 강폭은 계절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중-조 국경은 늘 유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스팔트와 시멘트 도로가 지나는 중국 쪽 강변은 국경이 고정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북한 쪽도 곳곳에 제방과 도로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통일 이후, 우리가 만나게 될 국경은 철조망이 아니고 이 도로들이 될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 자리 잡은 분단의 국경은 언젠가는 허물 수 있고, 중-조 국경의 철조망도 아직은 단절의 국경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건설하고 있는 압록강대로와 두만강대로는 여기까지가 중국 땅임을 무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도로들을 차로 달리면서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한반도와 중국을 구분하는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도로 위에서 한국 사람들은 좌우의 눈이 아닌 한쪽 눈으로만 북한을 바라봅니다.
리영희 선생님,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시각을 가져야 될까요?
2015년 12월 5일 리영희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5년이 되던 날, 우연히 나는 10년 전 일본 오사카에서 리영희 선생과 동행한 추억이 있는 동료들과 술 한 잔을 했다. 나는 내년(2016년) 봄 그들과 함께 삭주 건너편 압록강변에 갈 것을 약속했다.

▲ 압록강에 도로가 생기기 전 풍경은 이 모습이 아닐까(2015년). ⓒ강주원

▲ 같은 장소에서 카메라를 조금만 돌리면 압록강변을 따라 신작로가 보인다(2015년). ⓒ강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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