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이 왜 앞장섰을까
국정화 논란에서 교육 자체를 고민해봐야 한다. 교육이 중립적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경제위기 때 정부와 보수 언론이 벌이는 교육 논쟁은 실업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고 기업이 원하는 ‘교육 설비의 재편’을 꾀하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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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호] 승인 2015.11.09 00:25:56 |
지난 10월26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네트워크’가 벌이고 있는 ‘국정화 저지 1000만 시민 거리서명’ 현장에 외국인 두 명이 찾아왔다. 거리 서명을 마친 뒤, ‘역사 쿠데타를 멈춰라!’는 ‘몸자보’를 들고 농성에 합세한 외국인은 마이클 애플 미국 위스콘신 대학 석좌교수와 그의 아내이자 위스콘신 대학 동료인 리마 애플 교수다. 마이클 애플은 파울루 프레이리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실천교육 이론가이자 활동가다. 이번이 세 번째 방한인 그는 1989년 첫 방문 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지지하는 발언으로 모든 일정이 취소된 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의해 출국일까지 호텔에 연금되었다. 지난해 번역된 그의 저서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살림터, 2014)에 그때 했던 발언이 나와 있다.
“이 정부는 여러분들이 보존하고 싶어 하는 집단적인 기억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여러분의 꿈을 파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정부는 여러분이 역사를 다시 배우고, 자신들의 실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의 토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비판적인 관점을 획득하는 것을 막기를 원합니다. 이 정부는 또한 한국 교육 시스템이 모든 수준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견고하게 통제되어 여러분의 아이들이 지배자들이 원하는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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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그림 |
박근혜 정권이 국정교과서를 획책하고 있는 지금, 마이클 애플의 책 제목이기도 한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만큼 시의적절한 것도 없다. 교육은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을 떠맡는 바탕이라고 모두들 믿기 때문에, 저 질문은 식상할뿐더러 음흉한 의도마저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이 질문을 식상하고 음흉한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이 정권의 국정교과서 고시(11월5일)를 성토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때마침 주어진 기회에 우리는 교육 자체를 더 고민해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깨어져야 할 것은 교육이 중립적일 것이라는 환상이다. 지은이는 1979년에 출간된 <교육과 이데올로기>(한길사, 1985)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육이 중립적이라는 주장이 옳지 못한 이유는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지식이 사회적으로 선택된 것임을 간과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지식은 우리 사회의 어딘가로부터 나온 문화자본으로서 그것은 보통 우리 사회에서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의 관점과 신념을 반영하고 있다. 지식은 책, 시청각 교재 및 교육 자료와 같은 대중적 경제적 상품으로 생산되고 분배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이해에 따라 계속적으로 선별된다. 우리들은 이러한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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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나 교육제도는 그 자체로 이익을 내는 경제의 일부분이면서, 자본주의 이념과 가치를 심고 나르는 이데올로기의 학습장이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에 영감을 받은 좌파들은 이 사실을 오래전부터 직시하고 있었으나, 신자유주의가 부상한 지난 30~40년 동안 교육이 정치적 정체성의 변화에서 주변부적인 것이 아니라 핵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회변혁의 장소로 그리고 사회변혁의 도구로 학교를 성공적으로 이용”한 것은 보수 우파였다. 마이클 애플의 새 책은, 세계 최대의 유통 기업인 월마트와 미국의 보수 사학(私學) 집단이 서로의 이익과 가치를 공유하면서 학교와 사회 전체에 자본주의 규범을 굳게 다지는 사례를 생생히 보여준다.
지은이가 ‘보수주의 근대화’라고 명명한 거대한 사회·교육적 프로그램을 통해 보수 우파는 자유에 대한 대중의 상식을 차츰 바꾸어왔다. 즉 자유란 정치적인 개념이 아니라 규제받지 않는 시장 기능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납득시킴으로써 “‘사적’ 자본의 축적이야말로 공공선”이라는 것을 오늘의 사회 상식으로 만들어놓았다.
학교는 이렇게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제도가 된다
교육이 신자유주의의 정리(定理)를 수용함으로써 학교는 학생의 ‘사회적 감수성’을 탈취하고 대신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를 배양한다. 그 결과 학교는 학생들에게 개인은 성공할 수 있지만 모두는 성공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을 예습하는 훈련장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는 새로운 세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는 제도가 된다. 마단 사럽의 말대로 “학교는 자본주의의 관리인 역할을 하며,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교육과 국가>(학민사, 1988)를 쓴 마단 사럽은 경제공황이나 불황이 찾아올 때마다 많은 나라는 위기를 만들어낸 경제 엘리트나 금융 부문에 책임을 묻기보다, 유독 학교와 공공 부문의 노동자에게만 그 책임을 추궁한다고 한다. 정부가 경제위기 때 벌이는 교육에 관한 논쟁은 그 원인이 다른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가치 훈련에 등한하며 적대적인 진보주의 방식(좌파)의 교육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위기 때 정부나 보수 언론이 벌이는 교육 논쟁은 “점증하는 실업”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고, 불안에 떠는 대중의 공포를 이용하여 기업의 요구에 맞는 “교육 설비의 재편”을 꾀하려는 시도다. 이런 주장은 국정교과서 파동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에 대한 신원(伸寃)으로만 비판하는 것이 근시안적이라고 가르쳐준다.
서울 마포의 한 빌딩에 입주한 자유경제원의 세 칸짜리 화장실 문 앞에는 각각 ‘사익’ ‘경쟁’ ‘격차’라는 단어가 적혀 있고, 변기 앞 안쪽 문에는 각기 ‘사익이 세상을 발전시킨다’ ‘경쟁이 없다면 선택도 없다’ ‘격차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해설이 새겨져 있다. 이토록 신념에 찬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 가지 신념 가운데 그 어느 것과도 부합하지 않는 단일 국정교과서를 전력 지지하는 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식민지근대화론→개발독재론’으로 일괄 찬양하면서, 좌파로 상징되는 온갖 비판 세력의 기억을 지우는 것. 그리하여 좀 더 기업이 활개 치기 좋은 환경과 고분고분한 노동자를 얻으려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다. 자유기업의 이런 공세는 올해 9월, ‘2015 개정 교육과정’ 공청회에서 교육부가 밝힌 통합사회 교과서 시안에서도 뚜렷이 감지된다. 중·고교를 막론한 사회 교과 전반에서 노동자의 노동권과 노사관계는 빠지고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만 강조됐다. 이런 사실들은 마이클 애플이 제기한 질문에 무척 쓰디쓴 답변을 제공하지만, 이 독후감은 교육에 의한 반동적 사회변화라는 이 책의 한 면만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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