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압박에도 북한 경제는 살아났다
중국이 대북 교섭의 전면에 복귀했다.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의 방북에 김정은 제1비서도 화답의 제스처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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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호] 승인 2015.10.28 03:05:54 |
북한의 당 창건 70주년 기념 기간에 이뤄진 류윈산(劉雲山)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의 방북은 북·중 관계 정상화를 넘어 한반도 전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대북 교섭의 전면에 복귀함으로써 6자회담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관리하고자 했던 미국 국무부와 중국 외교부 사이, 이른바 ‘G2 라인’이 힘을 얻게 됐다. 한국 정부의 6자회담과 남북대화 병행 노선 역시 흐름을 탈 가능성이 있다.
류윈산의 방북 과정은 2013년 6월 캘리포니아 미·중 정상회담의 전후 과정과 매우 닮았다. 당시 중국의 요청을 받은 북한은 최룡해를 보내 6자회담에 대한 의지를 시진핑에게 전했고, 미·중 정상회담 후 중국은 회담 결과를 북측에 전했다. 이번에는 북한이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시늉을 하자 미국이 중국에 북한의 의중 파악을 요청했고, 시진핑 주석이 사전 고위급 파견을 통해 확인한 정보를 토대로 미·중 정상회담에 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이번에는 류윈산이 북측에 전달한 것이다. 특히 장예쑤이(張業遂) 중국 외교부 대미 담당 수석부부장(전 주미 대사)과 쑹타오(宋濤) 중앙외사영도소조 상무 부주임의 동행은 이례적이다. 이들은 방북 하루 전인 10월8일 베이징에서 미국 국무부 차관과 협의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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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nhua 10월9일 류윈산 상무위원(왼쪽)이 김정은 제1비서에게 시진핑 주석의 친서를 전달하고 있다. |
류윈산과의 대화에서 김정은 제1비서는 “경제발전과 인민 생활 향상을 위해 평화롭고 안정된 외부 환경이 필요하다” “남북관계 개선을 원하고 한반도 안정을 위해 노력하겠다”라며 화답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 결과가 6자회담으로 바로 표출될지, ‘선(先)북·미 대화, 후(後)6자회담’으로 나타날지는 미지수다. 다만 중국이 지난 1년간 진행된 ‘일본의 실패’를 딛고 새로운 중재자로 떠올랐음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해 2월에서 4월은 미국 국무부와 중국 외교부 중심의 G2 라인에 굴욕의 시기였다. 6자회담의 불씨를 살리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 역시 허공으로 흩어졌다. 2월14일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방중이 그 시작이었다. 그는 그전 해 연말부터 재개된 북·일 교섭 라인을 견제하고자 6자회담 살리기에 돌입했다. 북·일 교섭의 일본 측 사령탑인 내각관방실은 미국 국무부의 라이벌인 미국 국방부의 핵심 채널이다. 따라서 북·일 교섭의 재개는 국방부를 중심으로 한 미·일 동맹파의 입김 강화로 이어질 소지가 있었다. 케리 장관이 택한 방법은 ‘2·29 합의(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유예와 IAEA 사찰단의 복귀)+알파’로 높아진 6자회담 재개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었다. 즉 김정은 제1비서가 비핵화를 선언하고 북한이 성실하게 회담에 임할 것을 중국이 보증하면 6자회담을 재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과의 교섭으로 경제 보상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된 북한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 결과가 3월17~19일 방북한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6자회담 수석대표에 대한 냉대, 그리고 4월14~18일 우다웨이의 빈손 방미로 이어졌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미국 국무부에 의해 제시된 6자회담 재개 방안은 오바마의 아시아 순방(2014년 4월 말) 일주일 전 열린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국방부의 반대로 폐기 처분되고 말았다(<시사IN> 제353호, ‘북·일 회담, 6자회담 삼켜버리나’ 참조).
G2 라인의 부활은 어떻게 이뤄졌나
G2 라인의 부활은 어떻게 이뤄지게 됐나. 첫 번째가 중국의 대북 자세 변화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중국은 북한의 3차 핵실험과 장성택 처형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 대북 제재에 동참하면 북한을 압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제는 오히려 살아났고, 중국의 외교적 영향력만 위축됐다. 그 빈 공간을 러시아가 파고들었다. 결국 올 1월8일 김정은 비서 생일 때 중국은 ‘16자 방침’(전통계승·미래지향·선린우호·협조강화)을 복원함으로써 대북 자세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시진핑 주석이 북·러 관계에 대해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릴 만큼 북한의 탈중국화에 대한 우려가 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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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nhua 시진핑 주석이 7월16일 동북 3성을 방문했다. 시 주석은 이날 창지투 개발 재개를 특별 지시했다. |
올해 중반 이후에는 중국 경제의 회생을 위해서라도 대북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침체에 빠진 중국 경제를 살리려면 서부 대개발 정도로는 안 되고 동북 3성 개발이 중요한데, 그러려면 항만과 출구를 쥐고 있는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7월16일 시진핑 주석의 동북 3성 방문이야말로 이런 입장 선회의 극적 표현이었다. 이 방문에서 그는 그동안 중단됐던 창지투(장길도) 개발을 재개할 것을 특별 지시했다. 창지투 개발은 창춘·지린·투먼 등 국경 도시와 북한의 나진·선봉을 연계한 개발 계획으로 북·중 관계 정상화를 전제로 한다. 시진핑의 동북 방문 이후 ‘신동북 현상’(과거 중공업 메카로서 동북 3성의 입지를 다시 살리자는 의미)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동북 3성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 이번 류윈산 방북의 한 배경이 된 것이다. 10월8일자 일본 TBS 방송은 시 주석이 지난 7월 단둥을 극비 방문했는데, 이것이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지난 1년간의 북·일 교섭 과정에서 일본이 돌파력을 보여주지 못한 점 또한 주요 요인이다. 특히 납북자 송환의 대가와 관련해 북측 요구를 들어주지 못함으로써 더 이상 협상의 진전을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주선한 북·미 접촉 역시 헛물만 켜는 상황이 계속됐다. 지난해 8월16일의 시드니 사일러 방북, 11월6일의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 국장 방북, 그 연장선에서 이뤄진 올해 1월30일 성 김의 대북 접촉 시도 무산 등이 그것이다.
지난 4월 말 아베 총리 방미 때 이뤄진 미·일 협의를 바탕으로 일본이 몽골을 앞세워 대북 접촉을 재차 시도했으나 이마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다(<시사IN> 제413호 ‘민심 돌려막기엔 북한 카드가 최고지’ 참조). 9월의 비공식 북·일 접촉에서 북한은 ‘인정 납북자 12명 중 4명은 사망, 8명은 북한에 미입국’이라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함으로써 더 이상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중국의 대북 자세 전환과 북한의 대일 접촉 중단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8·25 남북 합의의 국제적 배경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는 미국 역시 북한이 비핵화 선언만 하면 평양에 가서라도 대화할 수 있다는 방침을 밝힘으로써 케리 장관이 추진했던 6자회담 문턱 낮추기 노선으로 회귀한 느낌이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북한을 대화에 끌어들일지는 지켜봐야 한다.
다만 중국이 대북 접근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중국은 이미 선양-단둥 간 고속철도와 지린-투먼-훈춘 간 고속철도를 완공하고 북한과 연결할 채비를 갖췄다. 단둥-신의주 간 제2압록강대교를 조만간 개통하고, 이어서 신의주-평양 간 고속철 사업을 하고자 할 것이다. 황금평, 신의주, 나진·선봉, 나진항 등의 사업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에도 북·중 국경 지대의 8개 다리를 완공하는 등 언제든 국경에 접한 북한 개발구까지 진출할 준비를 갖춰놓았다. 남은 건 남한 측의 입장이다.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신의주-평양 고속철까지 확장될 경우 우리로서는 철도 주권 문제로 두고두고 골치를 썩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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