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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 - 30대 여성의 욕망 "혼자가 좋다!"

일취월장7 2015. 9. 18. 15:13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

온라인 ‘여성혐오’의 원인은 무엇일까. <시사IN>은 데이터 기반 전략 컨설팅 회사 ‘아르스프락시아’와 함께 일베에서 드러나는 ‘여성혐오 지도’를 그렸다. 게시글 43만 개를 원자료로 삼아 여성 관련 논의를 추출했다. 여성혐오의 탄생지로 ‘연애’와 ‘결혼’이 지목되었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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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호] 승인 2015.09.17  01:05:10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

‘메갈리안’… 여성혐오에 단련된 ‘무서운 언니들’

여성 향한 외침, “왜 넌 날 사랑하지 않는 거니”

 
온라인 공간 일부의 소동처럼 여겨지던 여성혐오의 물결이 이제는 현실 세계를 덮치고 있다. <시사IN>은 2015년 한국 사회의 첨예한 단층선인 여성혐오에 관한 연속 기획을 마련했다. 이번 호(제417호)에서는 여성혐오 담론의 구조와 확산 동력을 입체 해부한다. 다음 호(제418호)에서는 여성혐오의 언어를 그대로 남성들에게 돌려주는 ‘미러링’ 전략을 구사해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는 반(反)여성혐오의 거점 메르스갤러리를 살펴본다.

❶ ‘여성혐오 지도’ -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

2015년은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이 시민권을 획득한 해로 기록될 만하다. 유명 칼럼니스트가 자기 칼럼의 파장으로 진행하던 방송에서 하차하고,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래퍼가 여성혐오 랩을 쏟아내 문제가 되고, 개그맨이 팟캐스트에서 여성혐오 개그를 하다가 사회적인 논란까지 불거져도, 여성혐오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온라인과 현실 세계에 공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남성지 <맥심 코리아> 9월호는 여성 납치 범죄를 연상시키는 표지 사진을 내걸었다가 여성혐오라는 집중포화를 받고도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았다. <맥심 코리아>는 미국 <맥심> 본사가 규탄 메시지를 내는 등 외신으로 문제가 확산되자 9월4일 뒤늦게 사과문을 냈다.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와 같은 극우 커뮤니티만의 문제도 아니다. 대놓고 여성혐오를 과시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김치녀’에 자기 이름을 걸고(페이스북은 실명 계정이 원칙이다)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16만명이다. 한국의 젊은 남성에게 여성혐오는 차라리 시대정신이다. 가부장제의 익숙한 남성 우월주의와는 결이 다른, ‘약자로 전락했다는 분노’가 젊은 세대 남성을 사로잡았다.

그런 걸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여성혐오만큼 희한한 전략도 흔치 않다. 이 ‘전략’을 쓰는 남성은 여성과 데이트할 확률이 극히 떨어지는데, 젊은 남성이 이런 손실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지는 아주 불투명하다. 그러니까 여성혐오란 거의 ‘자해적인 전략’이다. 그런데도 여성혐오의 깃발 아래 갈수록 많은 남성이 줄을 선다.

이 기묘한 현실을 이해하려면 당사자에게 묻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여성혐오 담론을 날것 그대로 전시하는 쇼윈도를 알고 있다. ‘일베’다. 일베는 폭넓게 퍼진 여성혐오 담론 구조의 원형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훌륭한 전시장이다.

STEP 1:데이터가 그려낸 여성혐오 지도

<시사IN>은 데이터 기반 전략 컨설팅 회사 ‘아르스프락시아’와 함께 일베에서 확인되는 ‘여성혐오 지도’를 그렸다. 2011~2014년 3년 동안 일베에 올라온 게시글 43만 개를 원자료 삼아 여성 관련 논의를 추출했다. 그 결과가 아래 <표 1>이다.

우선 깨져나가는 통념이 있다. ‘군대’는 핵심이 아니다. 여성혐오 담론지도에서 군대 문제는 주변부에 고립되어 있고(표 위쪽 회색 블록), 담론지도의 핵심부와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지도 않다. 단어의 등장 빈도로도 732회에 불과해 20위권 밖이다. 분석을 진행한 아르스프락시아 김학준 연구원은 “데이터 분석 결과로 보면 군대는 담론 형성에서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성혐오가 먼저다. 군대는 ‘더 본격적으로 미워하기 위해’ 사후에 가져다 붙인 명분에 가깝다. 군가산점이나 여성부도 핵심이 아니라 사후 명분이라는 점이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담론지도에서 두드러지는 키워드는 ‘김치녀’다. 일베에서 이 말은 사실상 ‘여성’의 대체 단어일 정도로 자주 나온다. ‘여성’(‘여자’ 등 유사 단어 포함)이 1만159차례 등장하는 동안 ‘김치녀’는 8697차례 등장한다. ‘김치녀’는 한국의 여성혐오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일베의 여성혐오 담론지도는 ‘김치녀’가 탄생하는 곳을 정확히 지목한다. 데이트 경험이다. 지도에서 ‘남성’을 둘러싼 키워드들을 보자(표 가운데 초록색 블록). ‘남성’은 여성과의 관계에서 ‘호구’다. 여성은 평소에는 남녀 ‘평등’을 외치다가도 정작 남자를 고를 때는 ‘능력’을 따지는 이기적인 존재다. ‘더치페이’하는 남자는 데이트 상대로 쳐주지도 않는다. 심지어 나랑은 자주지도 않는다(‘섹스’). 데이트의 좌절은 여성혐오의 원체험이다.
 
   

 
데이트의 좌절은 일베가 그리는 가족 판타지와 결정적으로 충돌한다. 담론지도 아래쪽에서 핵심 키워드는 ‘결혼’이다(푸른색 블록). 일베에서 이 키워드는 이중의 의미다. 상대가 ‘김치녀’일 때, 결혼은 재앙이 된다. 일베는 ‘김치녀’를 피해 좋은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만(<시사IN> 제367호 ‘이제 국가 앞에 당당히 선 일베의 청년들’ 기사 참조), 가족 판타지는 언제나 ‘김치녀’의 습격에 결정적으로 취약하다. 일베에서 ‘결혼’을 검색하면, ‘김치녀와 결혼하면 안 되는 이유’나 ‘결혼 상대가 김치녀인지 알아보는 법’을 다룬 글이 끝도 없이 쏟아진다.

일베의 여성혐오 담론지도는 하나의 결론으로 달려간다. 짝짓기 시장, 그러니까 결혼까지 포함해서 ‘연애 시장에서의 환멸’이 여성혐오의 뿌리다. 여성혐오 담론에서 ‘김치녀’란 무엇보다도 ‘연애 시장에서 반칙을 하는 여자’를 뜻한다.

반칙이란 뭘까.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남자의 능력을 따지는 여자’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데이트 비용은 남자에게 물리는 여자’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결혼할 때 집은 남자가 마련해야 한다는 여자’ ‘자기 외모는 성형으로 과대 포장하면서 남자의 능력은 칼같이 따지는 여자’다. 포괄적으로 정의 내리면 이렇다. ‘연애 시장에서 (사람 됨됨이나 사랑이 아니라) 남자가 보유한 자원을 따져서 분수 이상으로 한몫 잡으려는 여자.’ 한국의 젊은 남성을 사로잡은 여성혐오 담론이 내놓는 ‘김치녀’의 원형이다.

이것은 지독한 역설로 이어진다. 담론지도의 ‘남성’과 ‘여성’ 사이 붉은 블록에 낯선 키워드가 있다. ‘사랑’이다. 이 여성혐오자들이 보기에 사랑이야말로 연애 시장에서 유통되어 마땅한 유일한 화폐다. ‘김치녀’는 연애 시장의 화폐를 사랑에서 남자의 경제력으로 바꿔놓는 시장 교란자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개그팀 ‘옹달샘’은 팟캐스트에서 여성혐오 개그를 해 논란이 되자 사과했다.  
ⓒ연합뉴스
개그팀 ‘옹달샘’은 팟캐스트에서 여성혐오 개그를 해 논란이 되자 사과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Mnet <쇼 미 더 머니> 화면 갈무리</font></div>온라인에서 여자를 때리는 ‘상남자 만화(왼쪽)’가 퍼졌고, 래퍼 송민호씨(오른쪽)는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여성혐오 랩을 쏟아내 문제가 되었다.  
ⓒMnet <쇼 미 더 머니> 화면 갈무리
온라인에서 여자를 때리는 ‘상남자 만화(왼쪽)’가 퍼졌고, 래퍼 송민호씨(오른쪽)는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여성혐오 랩을 쏟아내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극적인 가치 전도가 일어난다. 여성혐오는 이 시장 교란자를 단죄하는 정의로운 분노이자, 사랑에 충실한 순수한 남성만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숭고한 경지가 된다. 여기까지 오면 여성혐오는 숨겨야 할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다. 차라리 자긍심의 원천이다. 여성혐오는 연애 시장에서 최하층에 위치하는 ‘루저’의 정서를 뛰어넘어 ‘멀쩡한 젊은 남성’도 공유하는 집단 정서로 진화한다. 이제 페이스북 김치녀 페이지에 실명을 걸고 ‘좋아요’를 누르는 남자들이 탄생한다.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거의 병리적인 자아도취를 드러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질문은, 연애 시장에서 좌절을 느끼고 그 분노를 여성 일반에게 겨누는 남성 집단이 왜 이리도 대규모로 쌓여가고 있는가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우리가 30년도 더 전부터 묻어둔 폭탄을 꺼내야 한다.

STEP 2:연애 시장에 들어온 남성잉여세대

자연 상태에서 신생아의 성비는 남아가 조금 더 많은 수준으로 나온다. 대체로 여아 100명당 남아 비율이 103~107명 사이에서 형성되면 ‘자연 성비’라고 부른다. 남성의 수명이 더 짧고 조기 사망 확률도 조금 더 높기 때문에, 자연 성비 범위에서는 신생아가 성장해갈수록 성비는 1대1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한국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성비 불균형 국가다.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점인 1975년에도 이미 출생 성비는 112.4로 붕괴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인구 억제 정책으로 산아제한을 강력히 추진했는데, 이것이 남아 선호 문화와 만나자 ‘여아만 골라 떼는’ 성감별 낙태의 대유행으로 귀결되었다.

몇 번 들쭉날쭉하던 출생 성비는 1983년 들어 107.3으로 다시 자연 성비 범위를 벗어난다. 이후 성비 왜곡이 그야말로 폭주했다(<표 2>). 2006년까지 무려 24년 연속으로 남아 비율이 자연 성비를 초과한다. 가장 심했던 1990년에는 성비가 116.5까지 치솟았고, 성비가 110을 넘긴 해도 13번이나 된다. 남자 10명 중 1명은 짝이 없는 거대한 남성잉여세대가 탄생했다.
 

 

 
 
   



1983년생은 올해로 32세이다. 남성 평균 초혼연령이 32.4세이니, 이 남성잉여세대의 맏형도 아직 연애 시장에 머물러 있다. 이후로도 4반세기 동안 남성잉여세대가 연애 시장에 진입할 것이고 잉여 남성은 시간이 갈수록 누적된다.

통계청 인구총조사는 2010년판이 최신판이다(올해 총조사가 예정되어 있다). 2010년 조사에서 각 연령대에 5년을 더해보면,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최근 5년 동안의 사망 등이 반영되지 않는다) 대략의 연령대별 잉여 남성 숫자를 알 수 있다. 그 결과가 <표 2-1> 그래프다.
 

   
 


남성잉여세대의 맏형 그룹이 포함된 30~ 34세(2010년 조사에서는 25~29세)에서는 남자가 6만7000명이 남는다. 이 연령대 남성 인구의 3% 정도다. 그다음 세대부터가 본격적인 잉여 축적 세대다. 25~29세에서 남자는 19만5000명이 남는다. 남성 인구의 12%다. 20~24세 그룹에서는 21만4000명, 11.7%가 남는다. 연애 시장의 핵심 연령대인 20~34세에서 잉여 남성 숫자가 47만명이다. 그나마도 이 수치는 과소평가되어 있다. 인구총조사에서는 25~29세 구간에서 남성 인구가 갑자기 줄어드는 현상이 1990년 이후로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인구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이 세대 남성 인구의 이동성이 높아 총조사에 제대로 잡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잉여 남성 인구가 실제로는 47만명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 거주하는 미국인 기자 마라 비슨달은 세계 곳곳의 성비 붕괴를 취재한 논픽션 <남성과잉사회>를 썼다. 이 책에서 비슨달은 상상하기 힘든 곳까지 영향을 주는 성비 붕괴 효과를 소개한다. 얼핏 듣기에 황당한 얘기지만, 성비가 무너지면 저축률이 높아진다. 1자녀 정책을 강제해 성비가 무너진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성비와 저축률은 어떻게 이어질까. 신붓감이 부족해지면, 아들을 둔 부모는 필사적으로 저축을 늘린다. 부모가 물려줄 자산이 클수록 아들이 연애 시장에서 살아남을 확률도 올라가기 때문이다. 성비가 무너지면, 남성의 연애 시장 입장권이 비싸지는 것을 사람들은 경험으로든 직관으로든 알아챈다. 입장권 가격이 오르면 남성이 좌절할 가능성도 따라서 올라간다. 비슨달은 성비가 1% 높아지면 범죄율이 5~6% 올라간다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과 홍콩 중문대학 공동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중국의 젊은 남성이 늘어난 것만으로 전체 범죄 증가의 3분의 1을 설명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더해 ‘문화적 성비 붕괴’ 현상도 관찰된다. 여자보다 남자가 결혼에 더 적극적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전국 결혼 및 출산 동향 조사(2012)에서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와 ‘하는 편이 좋다’를 합친 비율이 남자는 67.5%였던 반면 여자는 57%에 그쳤다. 한국의 연애 시장에서는 생물학적 성비 붕괴 위에 ‘문화적 성비 붕괴’ 10%포인트가 추가로 붙는다.

결혼 회피의 성별 격차를 만들어낸 범인은 가부장제의 압력일 가능성이 높다. ‘시댁 또는 처가 중심의 결혼 생활이 부담스러워서 결혼을 회피한다’라는 설명에 비혼 여성 중 72.2%가 찬성했다. 비혼 남성 중 찬성 비율은 49.4%였다.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이중 공급과잉 상태다.

남성잉여세대의 선배 그룹인 1970년대 이전 출생 세대도 남초 성비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선배 세대들은 상대적으로 여성의 교육 수준이 낮았던 ‘덕’을 보았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결혼을 더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남성잉여세대는 선배들이 겪지 않았던 새로운 환경에 놓여 있다. 오늘날 연애 시장에서 좌절한 남성들은 웹과 모바일이 제공한 초연결사회에 살며 대단히 간편하게 서로를 발견하고, 여성혐오를 배양하고 증폭해낼 공간을 온라인에서 확보했다.


STEP 3:결혼경제학, 연애 시장을 해부하다

시카고학파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게리 베커(1930~2014)는 화폐경제를 넘어 범죄 등 인간 행동 전반에 경제학을 적용하는 시도로 유명했다. 결혼을 경제학으로 해석한 최초의 시도도 그가 1973년에 내놓았다. 이후 경제학자들은 연애 시장에서 남녀의 전략을 예측하는 일련의 모형을 발전시켰다.

‘결혼시장 탐색모형’은 다음과 같은 모델을 제안한다. 구혼하는 성은 남성이고 승낙과 거절을 선택하는 성은 여성이다. 이때 여성은 남성이 가진 자원(대표적으로 소득수준)을 평가해 기준선 이상이면 받아들이고 이하라면 거절한다. 이 모델은 낭만이라고는 없는 데다 지독히 단순하지만 현실을 그럭저럭 보여준 덕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이 모델은 흥미로운 예측을 내놓는다. 설사 소득의 평균값에 변화가 없다고 해도, 소득 불평등이 커질수록 결혼은 줄어든다. 불평등이 커지면 여성이 설정한 ‘기준선’을 넘지 못하는, ‘자원 없는’ 남성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여성의 교육 수준과 경제력이 올라가도 결혼은 줄어든다. 여성이 설정하는 ‘기준선’이 따라 올라가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금융경제연구(2010년 12월)에 실린 논문 ‘저출산·인구고령화의 원인에 관한 연구:결혼 결정의 경제적 요인을 중심으로’(이상호·이상헌)는 남성의 임금 불평등이 증가할수록 여성의 결혼율이 하락한다는 기존 연구가 한국에서도 타당하다는 결론을 낸다. “임시직 비율이 1%포인트 상승하면 결혼율은 15~39세 인구 1000명당 0.23~0.40건 감소하는데, 이는 임시직 비율이 높아지면 소득 불평등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결혼경제학은 한국의 여성혐오 진영에 희소식처럼 들린다. 여성이 남성의 경제력을 평가해 결혼 여부를 선택한다는 결혼경제학의 모델은 ‘순수한 한국 남성 대 계산적인 김치녀’ 구도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데이터도 있다. 전국 결혼 및 출산 동향 조사에서 배우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경제력’을 꼽은 응답자가 남성은 9.8%, 여성은 30.3%였다.

희소식은 여기까지다. 여성이 남성보다 배우자의 경제력에 민감한 경향은 존재한다. 다만 한국 특유의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본성에 더 가깝다. 남성은 여성의 외모에 더 민감하고, 여성은 남성의 자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라고 진화심리학은 예측한다. 두 성의 속성상 번식 전략이 다르게 진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경향성만은 일관되게 관찰된다.

 
   


 
‘정도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면 여전히 여성혐오 담론은 비빌 언덕이 있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한국 여성이 연애 시장에서 유난히 경제적 실리 추구 경향이 강할까? 이런 주장의 근거는 불충분한 반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오히려 탄탄하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성별 임금 격차가 크기로 악명 높다. <표 3>은 남성과 여성의 연령별 임금 곡선을 한데 모아 그린 것이다. 아래의 붉은색이 여성의 생애임금 곡선, 위의 푸른색이 남성의 생애임금 곡선이다. 남성이 40대 후반에 임금곡선 정점에 도달하는 반면, 여성은 30대 후반에 정점을 찍고 이후로 계속 떨어진다. 출산을 전후한 경력 단절의 흔적이다. 정점의 높이도 여성이 남성보다 터무니없이 낮다. 그 결과,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는 계속 벌어져서 50대 전반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1.9배를 더 번다.

연애 시장에 뛰어든 한국 여성의 관점에서 보자. 노동시장에 진입하더라도 기대소득은 남성의 절반 남짓밖에 안 된다. 노동시장 퇴출도 더 빠르다. 반대로 연애 시장에서는 생물학적·문화적 이중 성비 붕괴 덕에 여성이 더 많은 자원을 쥐고 있다. 서로가 쥔 패를 따져보면, 한국 여성이 더 많은 자원을 연애 시장에서 요구하는 전략도 등장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자원 추구형 전략’이 일부 여성의 전략이라 해도 상관없다. 남성혐오 진영에서는 일단 사례가 수집되면 축적되고, 공유되고, 증폭되며, 결국 일반화된 혐오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혐오는 자기강화의 경로에 올라탄다.

이제 결정적인 질문이 남았다. 대기업 입사 경쟁은 경쟁률로 보면 연애 시장에서의 구애 경쟁보다 훨씬 치열하지만, 취업준비생 대부분은 대기업을 혐오하기보다는 선망한다. 연애 시장에서 여성이 더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면, 남성은 왜 ‘더 많은 호의’가 아니라 ‘더 많은 혐오’를 택하나. 여성혐오에 젖은 남자를 데이트 상대로서 매력을 느끼는 여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연애 시장의 논리로 보면 거의 자해 전략인 여성혐오가 어떻게 해서 연애 시장에서 탄생할 수 있을까.

STEP 4:혐오, 절망적인 가격 흥정 전략

진화심리학의 기틀을 다진 연구자로 평가받는 데이비드 버스 교수(텍사스 대학)는 책 <이웃집 살인마>에서 “왜 어떤 남자들은 연인을 학대하는가”라는 독특한 질문을 던진다. 진화심리학의 관점으로 보면, 남성에게 여성 배우자는 대단히 귀중한 자원이다. 그런데도 왜 남성은 배우자를 때리고 모욕하고 특히나 외모를 폄하할까. 더 황당하게도, 적지 않은 여성들이 자신을 학대하는 배우자의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그녀를 도우려던 지인들을 속 터지게 만든다. 이 기묘한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까.
 
  논란이 된 남성지 <맥심 코리아> 9월호의 사진(왼쪽). <맥심 코리아> 측은 외신으로 문제가 확산되자 9월4일 뒤늦게 사과문을 냈다(위).  
논란이 된 남성지 <맥심 코리아> 9월호의 사진(왼쪽). <맥심 코리아> 측은 외신으로 문제가 확산되자 9월4일 뒤늦게 사과문을 냈다(위).
 

버스의 설명은 이렇다. 외모 폄하에서 폭력까지, 남성의 학대는 여성의 자긍심을 손상시킨다. 자긍심이란 연애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재는 도구로, 그러니까 일종의 가격 측정 센서다. 이 자긍심 센서가 망가지면 여성은 자신의 시장가치를 과소평가하게 된다. “남성은 여성에게,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을 테니 자신과 함께 있는 게 다행이라고 주지시키려 하는지 모른다. 강력한 배우자 감시 전략인 학대와 고립은 여성을 손상된 관계에 잡아매는 극악한 기능을 수행한다.”(<이웃집 살인마> 165쪽)

남성이 스스로 선택해서 이런 전략을 고른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이런 전략적 옵션이 진화 과정에서 유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심리에 내장되어 있고, 특정 상황이 되었을 때 무의식중에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주장이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위치가 켜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대란, 자신보다 ‘시장가격’이 높은 여성 배우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가격 흥정 전략이다. 마치 중고차를 고르며 이리저리 트집을 잡고 사고 기록을 따져 묻듯, 학대는 배우자 여성의 가치를 줄여 잡아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도구다. 이 전략은 분명 자기파괴적이고 위험하지만, 자신보다 ‘시장가격’이 높은 여성은 어차피 떠나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배우자보다 뒤처진 남성에게는 이판사판으로 해볼 만한 도박이 된다.

이 논리를 여성혐오에 적용해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연애 시장에서 남성의 시장가치가 주저앉는 메커니즘을 여럿 확인했다. 바꿔 말하면, 여성 집단의 시장가치가 남성 집단보다 올랐다. ‘뒤처진 남성’이 대규모로 축적되는데, 이때 여성혐오는 마치 저강도 학대와 같은 효과를 불특정 다수의 여성에게 가한다. 남성들의 머릿속에는 연애 시장에서 협상력이 딸릴 때에는 여성의 자긍심을 손상시키라는 전략이 내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이것은 절망적인 전략이다. 1대1 관계에서는 학대를 통한 흥정에 성공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라도 있는 반면, 온라인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저강도 학대는 애초에 협상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서 가격 흥정이 될 수가 없다. 1대1 관계에서 써먹으라고 진화가 내장해놓은 전략이 엉뚱한 장면에서 스위치가 켜진다. 더욱이 여성혐오는 연애 시장에서 그 남성의 시장가치를 더 떨어뜨린다. ‘가격 격차’는 더 커질 것이고, 가격 흥정도 따라서 다시 절박해진다. 막다른 골목이다. 남성잉여세대의 맏형들이 이 막다른 골목에 이제 막 들어섰다. 그 뒤로도 25년 동안 동생들이 줄을 서 있다.

 

 

 

‘메갈리안’… 여성혐오에 단련된 ‘무서운 언니들

메르스갤러리는 여성혐오에 대한 독특한 반격이 시작된 곳이다. 메갈리안은 여성혐오를 거울에 비쳐 돌려주는 ‘미러링’ 전략을 택했다. 미러링은 기획된 패러디일까, 혐오의 악순환일까. 개념글에 오른 게시물 전체를 분석해봤다.

천관율 기자

 ‘김치남’ 또는 ‘씹치남’이라고 있다. 이제는 여성혐오 정서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된 ‘김치녀’의 대응 단어다. ‘김치페이’도 있다. “먹을 땐 8대2, 돈은 5대5, 계산은 남자가 해야 가오가 산다는 김칫국식 더치페이”라는 뜻이란다. 역시 원본이 있다. 여성혐오 담론의 본진 격인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에서 ‘더치페이’는 여성혐오를 부르는 도깨비방망이 키워드다. ‘갓양남’은 뭘까. “김치남에 비해 모든 것이 뛰어난 서양남”이라는 의미다. 원본은 ‘스시녀’다. 일베에서 ‘김치녀’와 대조해 일본 여성을 거론할 때 쓴다.

여성혐오 폭발의 원년이라 할 만한 2015년(<시사IN> 제417호 연속기획 ❶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 기사 참조)은, 또한 아주 독특한 반격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디시인사이드 ‘메르스갤러리(메갤)’를 거점 삼아, 여성혐오를 거울에 비쳐 돌려주는 전략을 채택한 여성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남녀의 성 역할과 권력이 뒤바뀐 세상을 묘사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스테디셀러 <이갈리아의 딸들>에 빗대어 자신들을 ‘메갈리안’이라고 부른다(<시사IN> 제410호 ‘메갈리아의 딸들 여성혐오를 말하다’ 기사 참조). 8월에는 같은 이름의 홈페이지도 생겼다.

메갈리안은 등장하자마자 크게 두 가지 논란에 휩싸였다. 첫째, 이것은 ‘미러링’(거울에 비추듯 되돌려주기)인가, 남성혐오인가? 메갈리안이 구사하는 공격적인 언어는 전략적으로 기획된 여성혐오의 패러디인가, 그저 혐오의 악순환인가? 둘째, 설사 그것이 미러링이라고 해도, 혐오의 언어를 그대로 빌려와 혐오에 대응하는 전략은 제대로 작동할까? 구경꾼을 질리게 만드는 역효과는 없을까?

<시사IN>과 데이터 기반 전략컨설팅 회사 아르스프락시아는 메갤 담론 지도를 그렸다. 6월1일부터 8월31일까지 메갤에서 10건 이상의 추천을 받아 ‘개념글’이 된 게시물 전체(2만7888건)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온라인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맞서 여성들이 구축한 ‘역공의 거점’ 메갤을 데이터로 분석한 최초 시도다. 그 결과가 <그림 1>이다.
 

<그림 1> 메르스갤러리 담론 지도
   
<그림 1> 메르스갤러리 담론 지도

 


메갤 담론 지도의 기본 뼈대는 삼각 구도다. 삼각형의 세 꼭짓점은 각각 ‘여성’ ‘남성’ 그리고 ‘씹치남’이다. 일단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왼쪽 위 ‘씹치남’을 중심으로 하는 남색 대륙이다. ‘이중잣대’와 ‘이기야’는 일베의 패러디다. ‘미개’와 ‘클래스’도 패러디 성격이 강하다. 메갤이 주장하는 ‘미러링’이다.

메갈리안이 보기에,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사고체계 근간에는 ‘데이트 비용’ 문제가 있다(왼쪽 아래 푸른색 대륙). 여성이 ‘더치페이’를 하지 않는 것을 여성혐오의 동력으로 삼고, 한국 사회에서 남자가 ‘역차별’을 받는다고 믿으며(역차별의 대표 사례로 ‘군대’가 있다), 여자들이 남자를 고를 때 ‘사랑’이 아니라 ‘능력’을 본다고 믿는 남자. 이것이 메갈리안이 그리는 여성혐오 남성의 원형질이다.

오른쪽 초록색 ‘여성’ 대륙은 이런 현실에서 한국 여성이 처한 상황에 대한 메갈리안의 현실인식이다. 전방위 ‘여성혐오’에 둘러싸인 한국 여성은 ‘처녀’가 아니면 ‘걸레’라는 식의 공격에 시달린다.

삼각형 구도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분석을 진행한 아르스프락시아 김학준 연구원은 오히려 삼각형 내부의 작은 대륙 셋에 주목했다. “흥미롭네요. 셋을 관통하는 일관된 정서가 있습니다.” 일관된 정서란 뭘까. 공포다. 범죄 공포, 결혼 공포, 그리고 시선 공포. 세 축으로 구성되는 공포는 메갤 담론지도의 속살을 이룬다.

<시사IN>과 아르스프락시아는 세 공포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상세 지도를 그려봤다. <그림 2>는 ‘범죄 공포’ 지도다. 여성은 일상적으로 ‘성폭행’ ‘성희롱’ ‘모욕’ ‘데이트 강간’ ‘살인’ 위협에 노출된 존재다(노란색). 이 구도에서 ‘남성’은 범죄 ‘가해자’이거나 ‘성매매’ 구매자로 배치되는 반면(푸른색), 여성은 ‘피해자’이면서도 ‘걸레’라고 ‘비하’되거나 ‘편견’에 시달리며 ‘차별’받는다(붉은색).

 
  <그림 2> 범죄 공포  
<그림 2> 범죄 공포
 

‘안전이별’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이전부터 간간이 쓰였으나 메갤 등장 이후 사용 빈도가 급증했다. 연애 관계를 정리할 때 여성은 스토킹부터 물리적인 위협까지 온갖 위험을 짊어진다고 느끼는데, 이 때문에 ‘이별은 만나서 통보해야 한다’라는 남성이 생각하는 불문율이 전복된다. 문자나 메신저 등으로 이별을 통보하는, 당하는 남성의 관점에서 보면 ‘못 배우고 싸가지 없는’(그래서 여성혐오의 논거로 쓰이는) 행위가, 메갤에서는 무엇보다 안전 이슈다. 뿌리 깊은 범죄 공포는 남성지 <맥심 코리아> 9월호 화보 사건으로 그야말로 폭발했다.

< 그림 3>은 ‘시선 공포’다. 외모로 대상화되는 상황에 대한 공포가 잘 드러난 지도다. ‘여성’은 늘 남성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고, 시선은 ‘골반’ ‘가슴’ ‘얼굴’ ‘몸매’ 식으로 여성의 외모를 마치 부위별로 등급 매기듯 ‘평가’한다(붉은색). 이 구도에서 ‘남성’은 보는 존재다. 이 남성 시선의 극단적인 형태가 ‘몰카’다(푸른색).

 
  <그림 3> 시선 공포  
<그림 3> 시선 공포
 

몰카 이슈는 메갤 초창기 최대의 승전보였다. 6월부터 메갤은 ‘소라넷’ 등 유명 음란 사이트에 들어가 몰카 공유 사례를 확보하는 등 이슈화에 나섰다(온라인 용어로, 소라넷을 ‘털었다’). 몰카 문제는 시선 공포와 범죄 공포의 접점에 있고, 메갈리안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슈를 사회 의제로 띄우는 경험을 공유했다.

<그림 4>는 ‘결혼 공포’다. 로맨스는 온데간데없고 격한 키워드가 ‘결혼’을 둘러싸고 있다. ‘기피’ ‘자살’ ‘이혼’ ‘포기’ ‘독신’ 등이 줄줄이 나온다. 결혼하면 여자가 ‘손해’라는 인식이 확고하고, ‘시댁’은 코앞의 부담으로 다가온다(붉은색). ‘남편’은 도움이 될까? 그럴 리 없다. ‘집안일’과 ‘육아’는 ‘아내’에게 떠넘길 것이다(푸른색). 시댁의 무리하거나 뻔뻔스러운 태도를 응징하는 며느리의 경험담은 메갤에서 단골로 히트하는 인기 콘텐츠다.

 
  <그림 4> 결혼 공포  
<그림 4> 결혼 공포


외모를 평가하는 시선, 범죄의 위협, 그리고 결혼 회피. 담론 지도에서 드러난 공포의 세 축은 메갈리안이라는 ‘무서운 언니들’에게 고유한 이슈가 아니다. 한국 여성 일반이 공유하는 공포에 가깝다. 그러나 메갈리안은 여성혐오의 언어를 비트는 방식으로 이 보편적인 공포에 반격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 그림 1>의 회색 ‘시선 공포’ 대륙을 보자. 메갈리안은 여성의 외모에 점수를 매기는 남자를 끄집어내 역으로 평가 대상으로 세워버린다. 그것도 남자들이 단연 공포를 느끼는 방식으로 돌려준다. 두 키워드가 눈에 띈다. ‘고추’ ‘작다’. 이 ‘무서운 언니들’이 왜 온라인 공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키워드다.

이것은 미러링인가 남성혐오인가? “메갤의 담론 구조가 일베의 그것과 지나칠 정도로 유사하다.” 분석을 진행한 김학준 연구원의 논평이다. ‘지나칠 정도’라니, 무슨 뜻일까. “원본이 존재하고, 그 원본의 맥락을 이해하며, 그에 맞춰 의도적으로 패러디를 한다는 뜻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메갤 이용자들이 원본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이건 자연발생적인 혐오의 분출이라고 보기 힘들다.” 여기서 ‘원본’이란 일베로 대표되는 여성혐오의 기본 문법을 가리킨다.

< 그림 5>는 일베와 메갤에서 추출한 담론의 중심 키워드를 대칭으로 배열한 결과물이다. ‘이기야’(일베 특유의 문장 종결 표현 중 하나. 메갤에서도 널리 쓰인다), ‘삼일한’(여자는/남자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 등의 키워드는 일베와 메갤이 아예 함께 쓴다.

 
   
 


그다음으로는, 분명히 패러디를 노리고 배치한 키워드가 줄줄이 등장한다. 거의 모든 여성혐오 용어에 일대일 대응 용어가 태어나다시피 했다. 특히 상징적인 키워드는 ‘탈김치녀’ 대 ‘코르셋’이다. 일베가 소수의 ‘각성한 여성’을 ‘탈김치녀’로 찬양하는 동안, 메갈리안은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흔히 쓰이는 ‘코르셋’을 일베와는 정반대 의미의 ‘각성한 여성’으로 쓴다.


혐오의 유탄이 미러링 밖으로 튀지 않도록 관리

메갤의 혐오 발화는 일베식 여성혐오의 거울상이라는 목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계산이 따라붙는다. 메갈리안 홈페이지의 용어사전 ‘갓양남’ 항목을 보자. 한껏 ‘김치남’을 조롱한 후에(“김치남에 비해 모든 것이 뛰어난 서양남”) 작성자는 이 단어에서 인종혐오의 혐의는 차단하려 시도한다. “백인만을 뜻하는 개념이 아닌, 흑인과 라틴 계열 등, 서양 국적과 성평등 사상을 가진 남성들을 아우르는 의미.”

하반기에 떠오른 키워드인 ‘맘충’을 메갈리안 용어사전은 “엄마가 없으면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김치남”으로 뒤집는다. 그리고는 덧붙인다. “애비충·파피충 등의 대응어가 등장했으나, 육아는 특정 성의 역할이 아니라 부모의 영역이므로 사용을 부정적으로 본다.” 혐오의 유탄이 미러링 밖으로 튀지 않도록 관리하는 계산이 있다. 자연발생형 혐오에서는 보기 힘든 중요한 차이다.

이 의식적인 계산이야말로 메갈리안의 강점인 동시에 위험 요소가 된다. 미러링이란 여성혐오의 문법에 익숙하고 충분히 갖고 놀 수 있으면서도 과속하지 않는 사람만이 가능한 외줄타기다. ‘탄생 정신’을 공유하지 않는 신규 유입이 이어지고 혐오 발화가 자체로 놀이코드로서 매력을 갖게 된다면(일베가 정확히 이렇다), 그때도 섬세하게 지금 궤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더 중요한 질문도 있다. ‘혐오를 혐오로 돌려주는 방식’은 습관적으로 여성혐오 언어를 써왔던 남성에게는 충격요법으로 먹혀들기도 했다. 하지만 맥락 없이 접해야 하는 온라인 공간의 다수 구경꾼에게 메갤발 혐오 발화는 그저 ‘여자 일베의 등장’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전략은 얼마나 유효할까. 메갈리안에서도 그를 둘러싼 논쟁이 주기적으로 벌어진다.

외부의 시선이야 어떻든, 오랫동안 온라인 공간의 여성혐오에 시달리며 단련된 이 ‘무서운 언니들’은 당분간 충격요법을 유지할 생각이다. 메갈리안 홈페이지의 공지사항에 걸린 한 문답이 위 질문을 다룬다. “좀 더 성숙하게 논리적인 분위기로 바꾸자? 그 짓 10년 넘게 했다. 돌아온 거 없다.”

 

 

 

여성 향한 외침, “왜 넌 날 사랑하지 않는 거니”

일베와 메갤의 데이터 노이즈를 걷어내고 핵심을 보면 남은 것은 혐오보다 연민이었다. 남녀가 서로 대립하는 것 같지만 그들 모두 기존 경제체제와 헤게모니가 제시하는 공허한 평가가치를 대체로 수용한다.

  조회수 : 700  |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요즘 주변에서 “우리가 어쩌다 이 꼴이 됐지?” 하고 자탄하는 소리를 듣는다. 한국 사회가 팍팍해지면서, 남자와 여자들의 언어도 거칠어졌다. 이번 작업에서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와 ‘메르스갤러리(메갤)’의 언어를 들여다보았다. 데이터의 노이즈를 걷어내고 핵심 구조만 바라보니, 남은 것은 혐오보다는 연민이었다.

그간 일베 폭력성의 핵심이 주로 조롱과 조소였다면, ‘여성혐오’ 담론에서는 유독 분노가 두드러졌다. 자못 마초적인 관심사와 인식, 그리고 내재된 폭력성을 걷어내고 나서 마주한, 여성에게 보내는 외마디 외침은 이런 것이었다. “넌 날 왜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니.”

대한민국 수컷의 분노에는 남자의 상향혼을 가로막는 경제 문화적 현실이 배경으로 자리한다(반대로 여자의 계층 내 결혼, 상향혼 선호 경향이 뚜렷하다). 수컷이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격언에 묶여 있을 만큼 용기와 깜냥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 사회의 암컷이 스펙을 위주로 짝짓기를 하는 지대(rent) 추구 게임 플레이어여서 그렇다, 하고 남자들의 텍스트는 말한다.

기성세대는 ‘돈’과 ‘가족’을 넘어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남자와 여자가 만났을 때 섹스만 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남녀가 서로 대립하는 것 같지만, 그들 모두 기존의 교환 게임을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관계로 뛰어들기에는 겁먹고 공허해 보인다. 그 점은 여성주의 담론도 자유롭지 않다. 메르스갤러리에서 살펴본 그들 언어는, 기존 경제체제와 헤게모니가 제시하는 공허한 평가가치를 대체로 수용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기성세대는 돈과 가족을 넘어 남자와 여자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EPA
기성세대는 돈과 가족을 넘어 남자와 여자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남녀 대립 문제가 아닌 사회적 병리의 징후

이론과 경험적 연구는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짝짓기의 피상적이고 의존적인 교환 현상이 크게 두 가지에서 비롯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1)학력과 소득 사이의 불평등과 불균형 2)노동시장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현저한 기회 불평등.

이런 면에서 외견상 남녀 대립은 사회 구성원을 여러 갈래로 갈라놓은 채 개인을 소외시키고 굴종시키는 힘의 작동 원리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혐오 담론과 갈등은 근본적으로 자립 능력을 박탈당한 사람들 간의 상호 혐오이며, 이는 여성-남성의 대립 구도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병리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한편, 컴퓨터가 제대로 분석해내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일베(남자)와 메갤(여자) 모두에서 좀 더 순수한 방식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쉬움의 행간을 읽어낼 수 있었으나, 컴퓨터의 알고리즘은 이를 통계물리학적 기준을 넘지 못한 노이즈로 걸러냈다. 하지만 유능한 데이터 분석가·사회과학자는 버려졌거나 외곽에 소외된 데이터의 잠재적 의미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노이즈로 주변화되어버린 사랑의 가치는 무엇일까. 아이가 곤히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 땅에서 좀 더 나은 아버지로 버텨나갈 길을 고민한다.

 

 

30대 여성의 욕망 "혼자가 좋다!"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③]
이대희 기자 2015.09.18 14:45:33
 
출판업계가 불황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서겠지요.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성인 1인당 연간 독서량이 9.2권, 월 0.76권에 불과했습니다. 다른 즐길 거리가 점차 많아지는 데다, 책을 읽을 삶의 여유가 없다는 점이 원인일 겁니다.

그러나 위기에도 기회는 오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불황을 이긴 베스트셀러는 나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의 출판사에서 좋은 글을 가진 작가와 새로운 아이디어의 편집자, 색다른 시도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디자이너들이 독자에게 멋진 책 한 권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은 이 불황의 시대에 독자의 마음을 훔친 베스트셀러를 이모저모 뜯어보고, 그 성공 원인을 분석하는 새로운 월간 기획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소개합니다.

출판업계에서 내로라하는 베테랑 두 분을 모셨습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전 민음사 대표)와 이홍 출판기획자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들은 민음사, 황금가지, 리더스북 등의 출판사에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직접 만든 출판계의 신화입니다.

이들이 때로는 신랄한 비평가이자 때로는 친절한 컨설턴트로 변신합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이들이 직접 베스트셀러를 선정해 책의 성공 원인과 이후 과제를 짚어봅니다. 현장에서 그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출판사의 편집자, 기획자의 이야기도 직접 들어봅니다. 교보문고가 전국의 판매 데이터를 제공해 분석의 신뢰를 더욱더 높였습니다.

이제 세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에 다룰 책은 최근 무서운 기세로 자기 계발서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는 <혼자 있는 시간의 힘>(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은주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입니다. 대학 재학 시절 실제 외톨이로 지냈다는 사이토 다카시 메이지 대학 교수의 새로운 저작입니다.

이미 국내에도 여러 권의 책으로 잘 알려진 다카시 교수는 이 책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을 충실히 보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설명합니다. 왕따의 폐해가 거론되는 한편 소셜 미디어를 통한 새로운 관계의 확장이 일어나는 현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부족함이 없는 책입니다.

이 책이 다른 베스트셀러 자기 계발서처럼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까요? 이 책이 수십만 부가 팔리는 메가 히트 작품이 될 수 있을까요? 지난 10일 오후 4시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오간 두 사람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 이홍 출판기획자(좌)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우)가 세 번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성공을 이야기하지 않는 자기 계발서

이홍 : 세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에는 자기 계발서를 다룹니다. 최근 빠른 기세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이 책은 출간 40일 만에 4만5000부가량 팔렸습니다. 곧바로 책의 성공 요인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죠.

장은수 : 이 책의 초기 성공 요인으로 두 가지를 꼽아보고 싶습니다. 일단 교보문고와 함께 시작한 '얼리더' 이벤트가 작게나마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벤트의 첫 책이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이었죠. 책 출간 전에 신간 평을 독자에게 맡겨 서평을 받는 기획인데, 여기서 초기 입소문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쪽이 본원적이지만, 저자가 기존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점이 컸다고 봐야겠죠. 사이토 다카시 책이라는 점만으로 독자들이 움직였죠.

그런데 독자들 블로그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 하나가 보입니다. 자기 계발서에 흔히 기대하기 마련인 성공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독자가 반응한 지점은 성공이 아니라 다른 두 가지 요소입니다.

하나는 소셜 미디어 시대, 초연결 시대에 대한 인간적 반발심을 책이 건드려줬다는 점입니다. 소셜 미디어에 자신을 한없이 공개하고 살아가야 하는 요즈음 같은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익명의 온라인 상대에게 노출이 계속되다 보니 진정한 자기 계발 시간은 오히려 부족해집니다. 이 점은 우리 현대인의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만든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진짜 자신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셜 미디어에 쓰는 글이 아니라 자신과 홀로 대면하는 시간이라는 겁니다.

둘째로 '일인분 사회'라는 중요한 사회적 트렌드를 꼽고 싶습니다. 혼자서 방해받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일인 전용 식당이 생길 정도로, 현대 사회에는 원하지 않더라도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회적 트렌드에 아직 많은 사람이 잘 대응하지 못하고 있죠. 혼자 사는 삶을 감당할 방법을 정신적으로 도와주어야 하는데, 이 책이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초연결 시대에 '나답게 살고 싶다'는 욕구와 어쩔 수 없이 일인분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특히 30대 싱글들의 욕구를 이 책은 정확히 건드렸다고 봅니다.

이홍 : 솔직히 저는 책의 내용에는 조금 실망했습니다. 제목이 말하는 '혼자 있는 시간'의 개념에서 정작 혼자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고독, 혹은 혼자 있는 시간에 끊임없이 뭔가를 하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주는 공허함이나 여유와는 조금 다르죠. 굳이 이야기하자면 '혼자 있는 시간에 얼마나 혼자 분주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라고 해야 할까요. (웃음)

앞서 장은수 대표께서는 책에 '성공'이라는 단어가 거론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만, 오히려 이 책의 전체 구성을 보면 독서, 일기, 운동, 사색 등 많은 자기 계발서가 다루는 소재를 '혼자만의 시간'이라는 테마 속에 집어넣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가 성공을 말하고 싶은 의도는 없었어요. 다만 글의 방식이 기존 성공 철학의 요소를 잘 버무려 가져왔다는 느낌입니다.

사소하고 잡다한 주변 지식이나 이야기를 특정한 테마와 결합해 절묘하게 엮어 쓰는 전형적인 일본식 자기 계발서(이 책이 굳이 자기 계발서인가는 별개의 문제)의 내공을 보여준 책입니다. 국내 저자에게 이렇게 쓰라고 한다면 졸렬한 기분이 들어 안 쓸 겁니다. 하지만 결국 독자에 맞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상업적 미덕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장은수 : 맞는 말씀입니다. 이 책의 성공을 통해서 출판의 시장 세분화 개념을 조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지나친 시장 세분화는 독자 자체가 없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합니다만, 자기 계발서와 같이 실용적 책을 만들 때는 오히려 시장을 정확히 세분화하는 게 필요합니다.

책에 나오는 말이지만 사이토 다카시는 작년 한 해에 무려 30권의 책을 일본에서 펴냈습니다. 우리나라 편집자라면 저자의 이러한 움직임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렇게 쓰면 내용이 중복될 수 있습니다. 한 권이라도 제대로 된 책을 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문학이나 인문학과는 달리 자기 계발서와 같은 실용적 영역에서는 독자가 다르면 내용이 비슷해도 상관없습니다. 가령, 수학자가 일반인을 위해 수학책을 쓰는 경우 중학생을 위한 책을 쓸 수도 있고 고령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을 쓸 수도 있습니다. 같은 내용도 독자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신발이 신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크기를 갖추는 것과 비슷합니다. 모든 연령대를 위한 하나의 명작을 만드는 데에만 출판이 집착할 이유는 없습니다.

한국 출판이 같은 내용으로 다양한 책을 펴내지 못하는 것은 독자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다룬다 할지라도 진짜 외로운 사람이 읽는 책과 공부하려는 사람이 읽는 책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편집자들은 하나의 주제를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일본의 편집자들은 독자 그룹마다 다른 책을 원한다고 생각하고 그에 알맞은 책을 펴내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독자 중심 출판을 일본 출판에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홍 : 사이토 다카시 교수는 같은 내용을 여러 권의 책에서 인용합니다.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사이토 다카시 지음, 김효진 옮김, 걷는나무 펴냄)에 사용한 예시가 이 책에도 변형되어 등장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다작이나 내용 중복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저자가 가진 재주라면 재주입니다.

내용뿐만 아니라 마케팅 측면에서도 다양한 독자의 층위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는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 출판의 딜레마는 책 100만 권을 팔아도 100만 명의 독자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출판사가 가진 데이터는 오직 성별과 나이뿐입니다. 이건 독자 층위가 아닙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확보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자기 계발서 사보는 사람은 30대 여성, 왜 모를까?

이홍 :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바로 독자 데이터의 중요성입니다.

저자 사이토 다카시는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무려 300만 명의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는 프로필이 인상적입니다. 이 정도면 흔한 말로 '스쳐도 안타'는 충분할 힘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오근영 옮김, 걷는나무 펴냄), <잡담이 능력이다>(장은주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독서력>(황선종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등의 책을 썼지요.

(같은 저자의) <잡담이 능력이다>를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냈으니, 독자 데이터의 실체가 궁금해집니다. 출판사에 여쭤보겠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낼 때 구체적인 독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초 전략을 짰나요?

위즈덤하우스 : <잡담이 능력이다>와 비슷하게 남성 독자가 절반 이상이 되리라고 봤습니다. 대체로 자기 계발서 분야의 독자는 남성이 더 많으리라는 판단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40대 남성 독자를 주요 대상으로 잡았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 책은 초반부터 여성의 구매가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장은수 : 교보문고 자료를 보면 우리가 자기 계발서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자기 계발서 분야의 성별 독자 비율은 54대 46으로 여성 독자가 더 많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역시 56대 44로 여성 독자 비율이 높습니다. 연령별로 보면 30대 비율이 30% 이상으로 가장 높고요.

자기 계발서 분야는 남성 독자가 관심을 가진다는 생각이 편견인 셈이죠. 우리는 흔히 기업에 다니며 성공을 추구하는 남성이 자기 계발 욕구가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유리 천장(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성차별, 인종 차별 등의 이유로 일정 단계 이상 승진하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하는 용어)을 깨고 싶어 하는 여성의 자기 계발 욕구가 강한 셈입니다.

▲ <혼자 있는 시간의 힘>과 자기 계발서 전체의 남녀 독자 비율. 여성의 비중이 더 큼을 알 수 있다. ⓒ프레시안



이홍 : 출판사에서 주신 답변지와 달리 이 책의 번역 제목(원서 제목은 '고독의 힘')을 보면서 저는 당연히 여성 독자를 좀 더 의식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개인화야말로 세계적인 메가 트렌드"라고 했는데, 이런 개인화와 관련된 주제들에 더 익숙한 독자층이 젊은 여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은수 대표의 이야기에 덧붙여 보면, 우리의 편견과 달리 이미 오래전부터 2030 여성이 자기 계발서를 적극적으로 읽어 왔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출판사에 한 가지를 더 여쭙겠습니다. 여전히 남성층을 더 의식한 초기 기획 의도가 유효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위즈덤하우스 : 처음부터 확실히 구매층을 남녀로 나눈 건 아닙니다. 이 책은 '혼자'를 강조한 기존의 여성적 책보다는 실질적 필요성을 조금 더 강조했습니다.

저희가 처음 고려한 카피는 "무리 지어 다니면서 성공한 사람은 없다"였습니다. '성공'이라는 키워드의 힘이 여전히 조금 있으리라고 봤습니다. 불황 시대고, 사람들은 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시대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성공의 가치를 얻고자 하는 욕구도 있으리라고 봤습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주요 독자 타깃을 40대 남성으로 잡았습니다.

실제로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반응하자, 소셜 미디어를 이용한 바이럴 마케팅(viral marketing, 이메일, 소셜 계정 등을 통해 누리꾼이 자발적으로 그 제품을 홍보하도록 만드는 기법)을 실시할 때 남성과 여성에게 선별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남성을 타깃으로 할 때는 '성공'을, 여성을 대상으로는 '고독'이나 '외로움'의 키워드를 보다 활용해 페이스북 등에 알렸습니다.


이홍 :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죠. 위즈덤하우스에는 주요 독자 데이터가 정리되어 있나요?
위즈덤하우스 : 자체적으로 확보한 높은 수준의 자료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서점 등) 유통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고 후 어떤 경로를 통해서 독자가 책을 샀는지 등의 정보를 수집하고 싶지만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홍: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독자적인 데이터 수집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위즈덤하우스 : 온·오프라인 카페를 운영하고, 출판사 블로그 등을 운영하면서 소수의 독자 데이터는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저희 출판사의 충성 독자이지, 대중적 지표가 되어 주실 독자는 아닙니다.

이분들의 의견을 반영해 책의 제목이나 내용을 만들어보기도 합니다만, 오히려 실패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분들의 의견이 저희와 너무 같습니다. (웃음)


장은수 : 한국 출판사가 서점을 중심으로 한 판매 영업에 집중하기 때문에, 독자 데이터를 얻기 위한 별도 활동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입니다. 위즈덤하우스는 <이동진의 빨간책방> 등의 팟캐스트로 독자와 만나고 있습니다만, 이런 활동만으로는 독자 정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팟캐스트 청자들의 데이터를 가지는 곳은 애플이나 통신사지, 출판사는 아니니까요.

흔히들 소셜 미디어를 독자와의 접점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로는 독자의 구체적인 얼굴을 알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써는 독자를 알고자 할 경우 회원 가입 시 독자에 대한 기초 정보를 확보할 수 있는 온라인 카페를 운영하거나, 잡지와 같은 인쇄 미디어를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독자 엽서라도 책에 끼워 넣어야 하지요.

독자에 대한 기초 데이터 수집 없이는 독자 중심의 기획이나 효과적 마케팅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출판사의 서점 의존도만 더 높아질 뿐이죠. 이는 독자에게도 결국 좋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지니까요.

독자를 모르는 한국 출판사

이홍 : 독자 데이터의 중요성을 거론한 진짜 이유는 이것이 출판 전략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내고자 하는 책을 포지셔닝할 때(차별화할 때) 기초 데이터가 있다면 훨씬 효과적으로 원하는 독자에게 알릴 수 있습니다.

사이토 다카시의 전작들을 보면 가벼운 인문 교양 서적이었지, 자기 계발서는 아니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의 힘> 독자도 기존의 자기 계발서 독자에만 한정되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다소 반복되는 질문입니다만 <잡담이 능력이다>를 구매한 독자 중 <혼자 있는 시간의 힘>도 함께 구매한 독자가 어느 정도 되는지 출판사가 인지하고 계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위즈덤하우스 : 해당 자료는 없습니다. 


이홍 : 막강한 베스트셀러 저자의 책인데도 출판사가 비교 데이터조차 확보하지 못한 셈이군요. 이 경우 어쩔 수 없이 출판사가 포지셔닝을 조금 더 강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 책을 누구에게 던져줄 것이냐에 대한 나침반이 없으니까요.

정답은 아닙니다만, 요즘은 '자기 계발서 배신의 시대'인 것 같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색다른 이야기, 복잡한 테마가 들어와 뒤섞이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늘 하는 이야기인데 이제는 '자기 계발서'라는 말 자체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출판의 기획과 시각이 장르 중심에서 독자 요구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출판사는 여전히 기존의 장르 개념에서 포지셔닝을 이해하려는 관성에 의존합니다.

기존의 장르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해도 어려움은 여전합니다. 자기 계발서 분야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시장이 확대되고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책의 제목을 정하고 카피를 뽑는 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위즈덤하우스 : 기존 자기 계발서의 특성인 성공의 욕구, 발전 욕구를 자극하고자 하는 생각을 쉽게 버리긴 힘듭니다. 그래서 저희는 책의 두 번째 카피로 '혼자 있는 시간에 인생의 기회가 온다'를 뽑았습니다.


▲ 장은수 "저자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책 많이 읽고, 공부 많이 하라는 겁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장은수 : 독자 데이터가 없다면, 출판사는 자신이 내고자 하는 책의 진정한 의미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혼자 있는 시간의 힘>에서 저자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책 많이 읽고, 공부 많이 하라는 겁니다. 진짜 자기 계발이죠. 보통 자기 계발서보다 인문적 충고가 강합니다. 단순한 팁을 알려주기보다 본원적 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저자는 흔히 말하는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다'는 개념, 즉 낭만적 고독에 대해서 드러내놓고 반대합니다. 그보다는 그 시간을 잘 활용하라고 권하죠. 따라서 이 책의 마케팅에서 혼자 있는 시간에 사회적으로 확산 가능한 적극적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성공 신화가 붕괴했습니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허위임을 사람들은 잘 압니다. 이제 독자들은 출세하려고 자기 계발서를 읽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인생을 돌려다오'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기존 성공 모델에 따라 사는 것은 설사 성공하더라도 좋은 삶일 수 없다는 생각이 만연합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혼자 있는 시간에 독자가 이처럼 열광적으로 반응했다면, 그 이유는 혼자서도 버틸 힘을 키우기 위해 적당한 사회적 지위를 얻자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계발서에서 성공의 전통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책이 줄어들었을 뿐, 다른 의미의 바람직한 사회적 삶을 강조하는 책들은 여전히 인기입니다.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 인플루엔셜 펴냄)가 대표적이죠. 자신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힘을 얻고자 하는 사회적 욕구를 보여줍니다.

이홍 : 결국 책을 만드는 사람은 내고자 하는 책이 지향할 최소한의 지점은 규정해야만 합니다. 그게 안 되면 한 권의 책이 가지는 기획과 콘셉트의 균일성이 무너집니다. 물론 자기 계발서의 개념이 변화한다면, 기존 장르적 관습도 함께 깨야 합니다.

위즈덤하우스는 자기 계발서를 잘 만드는 곳입니다. '사이토 다카시의 독자는 누구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시도를 지금부터라도 해봤으면 합니다.

장은수 : 가능하기만 하다면 다음 책을 만들기가 굉장히 쉬울 겁니다. 일본 출판의 장점 중 하나가 '1500명의 독자에게 확실히 팔 수 있는 책을 만든다'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다양한 책을 만들 수 있지요. 한국 출판은 왜 불가능할까요? 독자를 모르니까 책을 만든다 하더라도 판매 여부가 불투명해서일 겁니다.

올해 북엑스포아메리카(BEA)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핵심 이슈가 데이터에 근거한 출판입니다. 앞으로 데이터를 직접 다룰 수 있느냐에 따라 출판의 미래가 좌우될 것입니다. 미국 출판사들은 계속 빅 데이터 전문가를 영입하는 중입니다. 우리 출판사들도 시도 가능한 범위에서라도 데이터를 수집해야 합니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한 세대 위쪽의 선배들은 열심히 독자 데이터를 수집했습니다. 제가 출판계에 입문할 때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출판사가 독자 카드를 받았습니다. 저희 세대에 들어서면서 이를 활용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죠. 해외에서 쉽게 저자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인터넷 서점이 커지면서 시장이 저절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독자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출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출판 성숙기에 해야 할,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일을 건너뛰어 버린 겁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같은 불황기에 들어서자마자 급속도로 매출이 떨어진 출판사가 부지기수입니다.

모범적인 제목의 자기 계발서

이홍 : 이제 책의 제목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저는 제목의 힘을 좋은 판매량의 이유로 꼽고 싶습니다. 한국어판 제목을 누가 지으셨나요?
위즈덤하우스 : 여럿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나온 제목입니다. 


이홍 : 제목을 정말 잘 지으셨습니다. 제가 출판사에 다닐 때 주로 자기 계발 서적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제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자기 계발 서적의 성공 요인에 제목의 힘이 70~80%는 차지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지난 대담에서 <황금방울새>(도나 타르 지음, 허진 옮김, 은행나무 펴냄)를 두고 '올해의 카피상'을 이야기했는데, <혼자 있는 시간의 힘>도 '올해의 제목상'은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저는 좋은 제목은 그 안에 책의 모든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제목 중 하나가 <나는 남자보다 적금 통장이 좋다>(강서재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입니다. 책의 대상은 여성, 특히나 젊은 여성이고, 전달하고자 하는 건 '연애보다 자기 성취'라는 내용이 쉬운 단어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 책 제목도 좋습니다. '혼자'와 '시간'이라는, 우리 시대 사람들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가 함축되어 있지요. 그 결과 혼자 있는 시간이 철학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게 됩니다.

한편으로 이 제목은 '나는 너에게 간섭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나를 건드리지 마'라고 하는 개인 중심적인 의식을 담기도 했습니다. 욕망을 건드리는 단어의 선택이 좋았습니다.

이 책이 만일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책의 제목은 좋은 사례로 인용하고 싶어집니다. 제목과 표지 하단의 카피가 완벽한 교과서입니다. 카피는 제목을 결정적으로 해설하고 있죠. 굳이 따로 돈을 들여 띠지를 두르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출판사 편집자들이 제목이나 카피를 고민할 때 반드시 참고할 만한 책입니다.

▲ 이홍 "좋은 제목은 그 안에 책의 모든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장은수 : 공감합니다. 매우 매력적인 제목입니다. 이홍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제목을 원제의 '고독'이 아니라 '혼자 있는 시간'으로 풀이한 건 훌륭한 편집으로 보입니다. 독자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건드려줬죠.

내용을 풀어가는 방식도 좋습니다. 저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책의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전달됩니다. '당신의 고민을 나도 경험했다'라며 공감을 끌어내는, 상당히 좋은 출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 좋았던 건 동서고금의 문학이나 철학 작품을 가져와서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괴테의 작품이나 선불교의 내관법 등을 인용하죠. 이는 글을 우아하게 만듭니다. 읽는 사람이 '뭔가 중요한 것을 얻었다'는 생각을 품도록 해줍니다.

사고를 우아하게 만드는 건 아주 중요합니다. 한국 자기 계발서의 약점은 읽고 나면 아등바등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심어준다는 겁니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은 '나도 괴테처럼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니 남들에게도 권할 만합니다. '돈 버는 데 장사가 최고'라는 책을 읽고 나서 남한테 권하기는 좀 어렵잖아요? (웃음)

콘텐츠 구조도 잘 짰습니다. 다른 편집자들이 참고할 만합니다. 내용이 가벼워서 설렁설렁 쓴 것 같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독자들이 생각할 법한 일들을 빼먹지 않고 하나씩 잘 챙기고 있고,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짚을 수 있도록 이야기전개도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일본의 고전 문학 작품이 많이 인용됩니다. 이 작품들을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주제와 이어지도록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면서 전체 스토리에 적절히 녹여냈습니다.

이홍 :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책의 주제의식인 '간섭하지 않고, 간섭받지 않는다'는 생각, 곧 내 시간 안에 갇힌다는 개념은 비단 이 책뿐만 아니라 일본 문학에서도 많이 다루는 주제죠.

장은수 : 네, 맞아요. 굉장히 일본적입니다.

이홍 : 이를 고려할 때, 우리나라 사람이 왜 일본 소설을 많이 읽느냐, 왜 일본 자기 계발서가 우리나라에서도 성공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결국, 그런 주제의식이 우리로서 낯설다고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편안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장은수 : 일본은 신도로 통칭하는 불교에 가까운 세계관이 일상을 지배합니다. 전통의 힘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다릅니다. 지난 100년간 너무 빠른 속도로 근대화되면서 우리 정신 문화가 가졌던 내면의 힘이 대부분 고갈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출판사만이 아니라 삼성전자도, 우리 사회 전체도 모두 성숙기에 할 일을 건너뛰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장하느라 지나친 것들을 뒤늦게 메워야 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명문대를 나왔다 해도 단지 점수 기계에 불과할 뿐, 내면을 풍요롭게 채운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 사회 전체가 거대한 공허를 느끼고 망연자실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내관, 즉 내면의 힘이 창조성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도 울림을 준다고 여겨집니다.

이홍 : 정말 내년에는 '혼자'라는 키워드의 책이 쏟아질 수도 있으리라고 보는 이유입니다. 12년 전에 미국 저자가 <혼자 있는 시간의 힘>과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한 책을 낸 적 있습니다. 그 책도 '간섭하지 않고 간섭받지 않는 하나의 개인을 선언하라'고 합니다. 전화기를 끄고, 떠나서, 책을 읽고 사색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과 달리) 안 팔렸습니다. 당시는 그 메시지가 낭만적이지만 비현실적이어서 먹히지 않은 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커졌습니다. 좋은 책이란 이처럼 변화하는 시대의 욕구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장은수 : 지금 한국인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최소의 사회적 단위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면 젊은 층에서는 부부일 겁니다. 우리 둘이서만 잘살고 싶어요, 이런 거겠죠. (웃음)

철저히 혼자이고자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좀 더 넓은 관계, 즉 부모와의 관계는 좀 느슨하게 가져가고 싶다는 욕구가 점차 커지는 중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조직에 완전히 소속되고 싶지 않다기보다, 소속되었더라도 '나를 건드리지 마라'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욕구가 이 책의 판매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 새로운 경향이 될까?

이홍 : 이런 대안적 메시지의 출판은 앞으로도 유망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장은수 : 이를 고려하면 앞으로 자기 계발서가 개인이라는 꿈을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가, 어떻게 자극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로부터 '어떻게 살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이 시도되겠죠.

이홍 : 이제 마지막으로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의 마케팅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서점 MD들에게 이 책을 어떻게 소개했나요?
위즈덤하우스 : 초기 일주일간 독자 반응을 본 후,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팝업 광고를 띄워 홍보했습니다. 띄우자마자 바로 반응이 왔습니다.


이홍 : 이 책의 판매 그래프를 보면 그야말로 급격한 순위 상승세를 보입니다. 이런 폭발력을 불러일으킬 이벤트는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심지어 검색어에 자주 노출된 상태도 아니었고, 초기에는 왕성한 바이럴 마케팅을 한 것도 아닙니다. 신기할 정도입니다.
위즈덤하우스 : 초기에 페이스북을 이용한 바이럴 마케팅을 꾸준히 실시했습니다.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자주 보는 시간대인 밤 10시에 맞춰, 매일 담당자가 관련 이미지를 올렸습니다.

이와 더불어 페이스북 광고 상품을 활용했습니다. 페이스북 내에서 구매하기가 가능해졌죠. 이를 이용하는 독자를 분석해서 8월 둘째, 셋째 주부터 모바일 광고를 집행했습니다. 그리고 8월 둘째 주부터는 JTBC가 운영하는 팟캐스트에 출판물 광고를 시작했습니다.

주요 타깃은 모두 혼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혼자 있을 만한 시간대에 광고를 집중했고, 페이스북에서는 레고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레고 역시 혼자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취미니까요.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은주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프레시안

이홍 :
한편으로는 이 책의 가파른 판매량이 전형적인 일본 베스트셀러의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보통 일본 베스트셀러는 급격한 상승과 절벽 같은 내림세를 보입니다. 이유야 다양하겠죠, 기대만큼 실망이 컸을 수도 있고, 볼 사람이 빨리 소진되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제가 계속 포지셔닝이나 타깃팅을 궁금해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책은 다른 일본 서적은 물론, 저자의 다른 책보다도 훨씬 더 가파른 상승세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두 달 후 어떻게 될 것인가가 궁금해집니다.

장은수 : 저는 출판사의 마케팅만으로는 이 책의 판매에 한계가 뚜렷하다고 봅니다. 내용이 아주 혁신적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트렌드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메가 셀러가 됩니다. 언론 등의 칼럼에서 인용할 만한 강한 내용을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요점은 '책 많이 읽고 공부 열심히 해라' 정도의 평범한 메시지입니다. 이런 메시지로는 확장에 한계가 있습니다.

어쩌면 타깃 독자에게 필요한 만큼의 내용만 담았기에, 일본 책이 쉽게 베스트셀러도 되지만 그만큼 빨리 꺾이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처럼 내용만으로 독자 확산에 한계가 있다면, 출판사가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홍 : 전체 출판 독자 중 얼리 어답터는 3~5% 정도입니다. 그리고 조기 수용자 그룹이 15% 정도죠. 둘을 합쳐 최대 20%가 초기 구매자이고, 중기 수용자는 25%, 후기 수용자는 15% 정도입니다. 결국, 이를 다 합치면 60~65%가 되고, 전체 잠재 독자의 40%는 책을 구매하지 않습니다.

만일 두 달 후 이 책이 더 팔리지 않는다면, 얼리 어답터와 조기 수용자를 다른 책보다 빨리 소진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기에서 후기 수용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하죠. 이 경우 후기 수용자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을 빨리 시행하거나, 아니면 아예 끊어야 합니다.

출판사들이 베스트셀러를 낸 후 오히려 망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책의 독자를 계속 같은 층위에서 바라본 이유입니다. 후기 수용자의 기대치와 초기 수용자의 기대치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문학 마케팅은 이 부분이 쉽습니다. 특별히 출판사가 고민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후기 수용자로 넘어갑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의 힘>과 같은 책은 의식적으로 출판사가 시기에 맞게 책이 담은 메시지를 새로이 알리지 않으면 초기 독자에 갇혀 버립니다.

장은수 : 제 생각에는 결국 '공부'가 다음 단계 마케팅에서 하나의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시민 사회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 가령 독서 모임 등을 하는 사람들이 필독서로 인식할 수 있도록 출판사에서 노력하면 어떨까 합니다.

이홍 : 이런 어려움의 단계를 넘어선 대표적 책이 <아침형 인간>(사이쇼 히로시 지음, 최현숙 옮김, 한스미디어 펴냄)입니다. 출판사가 의식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이 60~70만 부 팔릴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에 에이스 침대 광고가 있습니다. 출판 시장만으로는 이미 다 팔렸는데, 에이스 침대 광고에 아침형 인간 이미지가 차용되면서 새로운 차원의 폭발이 일어났죠. 단순히 '아침형 인간이 성공한다'는 개념을 넘어, 아침형 인간의 품위를 광고가 만들어주면서 후기 수용자 이후로 넘어갔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도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넘어갈 고리를 잡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이 알리는 이야기가 유행이 되어줘야 하는 거죠.

장은수 : 사회적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게 결국 마케팅의 힘일 겁니다. 그러려면 서점을 넘어서는 마케팅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위즈덤하우스 : 책이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한겨레>에 '아이들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희도 욕심이 납니다. 앞서 두 분이 말씀하신 2차 시장, 즉 기업, 공공 도서관에서 혼자 있는 시간의 의미를 고민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책으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장은수 : '아이들을 위한 혼자 있는 시간'이란 제목의 책을 내면 어떨까요? (웃음)

지금은 저자를 초청하는 게 사회적 확산을 위한 가장 유력한 방안이 아닐까 합니다. <미움받을 용기>의 경우도 저자 기시마 이치로를 불러서 대형 강연회를 열고, 이를 통해 시장을 이차로 공략했습니다. 예상되는 판매 한계를 넘어서려면, 그 돌파 지점을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를 출판사에서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이홍 : 이제 세 번째 대담도 끝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통해 자기 계발 서적의 새로운 트렌드와 확장성, 그리고 한계를 들여다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어떤 책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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