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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청년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을 처음 하게 된 것은 2005~2006년의 어느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특별히 청년 전문가이거나 세대 전문가라서가 아니다. 경제학자로서 여러 자료들을 놓고 분석해볼 때, 당시 전개되는 한국 경제의 흐름이 변하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20대의 문제가 생겨나고 그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파멸적인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현장 조사들을 추가해 <88만 원 세대>(박권일 공저, 레디앙 펴냄)를 발간한 것은 2007년이다. 가장 큰 문제이며 동시에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 한국 경제에서 청년 문제에 대한 내 진단이었다. 내 나이 30대 후반, 그런 고민을 많이 했었다.
경제학자로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책 라인에 합류하게 된 것은, 이래저래 1년 정도 된다. 박영선 비대위원장 시절의 일이다. 그 짧은 시간에도 격랑이 생겨 결국 임명은 문희상 비대위원장에게 받았다. 그 이후 내가 한 일은, 욕 진짜 많이 먹는 이 야당 한 구석에서 정책이 움직일 수 있게 기본적인 구조를 재편하는 일이었다. 1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미흡하다. 지난 1년 동안, 청년의 의미나 청년 정책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금융 정책, 산업 정책, 대기업 정책, 이 당에 비어 있는 정책이 한 두 가지가 아니였고, 그걸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지난 1년을 썼다.
내가 청년에 관해 혹은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내 결정에 대해 공개적으로 글을 쓰는 일은 처음인 것 같다. 이 당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글 쓰고, 책 쓰는 것을 업으로 하고 살아왔던 나에게도 무서운 일이다. 논쟁이 벌어지면, 논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왕따'를 만들고, '옆구리 쑤시고', 그리하여 결국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것이 일상적인 동네다.
그리고 무슨 논쟁을 하든, 언론의 프리즘을 통과하고 나면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계파 논쟁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 과연 그렇게 계파라고 할만한 게 존재하고, 진짜 이 모든 논의들이 계파적으로 결정되는가? 진실은 상관 없다. 많은 것은 친소 관계와 공천과의 연관성으로 분석된다. 그것이 옳거나 아니거나, 그 프레임 안에 우리는 이미 들어가 있다. 거기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무는 것이 상책이다.
지난 1년간, 나 역시 입 다무는 비겁한 선택을 했다. 한 가지의 합리적인 얘기를 위해 아홉 가지의 비겁한 변명을 해야 하는 그 구조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새정치민주연합 이름을 걸고 있는 많은 당직자들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할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는 대체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최소한 '청년'이 몇 살까지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입을 다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편의점에서 만나는 그 삶을 위해서, 더더욱 그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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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바로, 청년은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다. 그 청년이 주로 대학생이냐 아니냐, 그런 게 많은 사람들이 내게 던졌던 비판이라고 이해한다. 나는 대학생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어쨌든 20대 중후반, 그들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그게 내가 생각했던 애초의 청년 문제였다.
법적인 청년의 기준을 잠시 살펴보자. 고용 통계상 청년은 15세에서 29세다. 우리가 흔히 정부 통계를 기준으로 청년 실업을 얘기할 때 그 수치는 29세까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청년 고용 통계는 15세에서 24세까지다. 정말 엄밀하게 국제적 기준을 맞춘다고 하면, 25세부터는 이미 청년이 아니다. 물론 한국과 같은 대학 진학률이 극단적으로 높은 사회는 이 기준에 잘 안 맞는다. 20대 후반은 국제적으로는 이미 중장년으로 분류되는 나이지만 많은 남학생들은 군대에 가고 대학을 다니고 있을 나이다. 여기에 취준생과 공시족까지 고려하면, 한국은 OECD 기준을 적용하기에는 이미 멀어져도 너무 멀어졌다.
그리고 한국에서 현재로서는 법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준인 청년고용촉진법에서의 청년은 15세에서 29세다. 새로운 법이 등장하기 전까지, 청년들의 경제 활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법은 이 법이다. 이번에 박근혜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청년들의 고용 정책이라고 광고하면서 이 연령을 34세로 올리자고 하는 게 큰 변화이다.
반면, 정책만 논의하지 실제로 무슨 지원을 주는 결정을 하지 않는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의 정책 대상은 19세에서 39세까지다. 그냥 떠들 때에는 39세, 뭔가 지원을 해줄 때에는 34세, 현 정부가 가지고 있는 청년의 기준이다.
최근 성남시에서 청년 배당제라는, 변형된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런 걸 할 수 있는 청년 경제와 관한 법령이 없기 때문에 성남시에서는 청소년 기본법을 기준으로 논의하는 중이다. 여기에서의 청소년은 9세에서 24세까지다. 성남시에서 아무리 예산을 확보하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더라도, 성남시에서 청년 배당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나이의 상한선은 24세다.
법적으로는 이렇고, 정당 내에서의 청년의 기준을 한 번 살펴보자.
새누리당은 45세까지다. 세세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들은 그렇게 한다. 그렇지만 미래 세대라는 별도의 기준을 정해서, 실제로 청년 논의는 35세 정도로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진보 정당인 정의당은 35세다. 지난 당 대표 선거에서 진보정치 2세대를 내걸고 돌풍을 일으켰던 조성주가 37세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새정치민주연합의 청년 기준은? 새누리당과 같은 45세다. 정말?
원래는 42세였는데, 지난 번 문재인 후보가 당대표가 되었던 바로 그 2.8 전당 대회에서 45세로 올렸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청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준이 다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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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의 청년 기준이 과연 몇 살이어야 하는가? 20대 취업 준비생과 알바는 연일 힘들다고 고통을 토로하는데, 청년위원회의 나이 기준 같은 것을 얘기하는 게 너무 한가해 보여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이 나이 기준이, 바로 취준생의 취업과 알바의 삶의 질과 바로 관련된 질문이라서, 공개적으로 몇 살이어야 하는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아는 제도적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청년의 나이는 29세, 35세, 39세라는 세 가지 옵션이 있다.
20대 정치, 이렇게 청년 정치를 얘기하면 29세가 맞다. 원래는 그렇다. 그러나 청년들이 워낙 힘들다 보니, 사회에 진출하거나 독립하는 게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 변화된 상황을 고려하면 30대 중반까지 올릴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청년고용촉진법을 고쳐서 이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39세 기준은 몇 가지가 있다. 국제적으로, 청년 기준으로 39세로 쓰는 경우의 대표적인 경우가 농업 분야다. 유럽연합(EU)이나 일본에서, 청년농업직불제, 즉 청년이 농업에 종사하려고 하면 월급을 주는 제도를 운용한다. 원래는 35세였는데, 실제 제도를 운용하다보니까 그렇게 젊은 사람들만 대상으로 해서는 실효성이 없어서 39세로 좀 올렸다. 전세계적으로 고령화의 대표적 영역으로 불리는 농업에서 기준을 그렇게 정했다. 이걸 45세까지 올리자는 논의가 전혀 없지는 않았는데, 사람들의 상식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라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야당의 청년 기준만을 놓고 잠시 살펴보자.
열린우리당 시절에는 39세였다. 청년을 위한 특별한 제도는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무도 기억 못한다. 대통합민주신당 때 이 기준이 55세까지 올라가기도 했지만, 대선 이후 45세로 낮추었다. 그리고 2012년 대선 패배 이후, 시민 사회와 통합을 하면서 42세로 낮추었다. 당시 더 낮추려고 했었는데, 지방에는 청년 당원이 거의 없기 때문에 더 낮추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번 전당대회를 하면서, 45세로 올렸다.
45세 청년, 누가 봐도 이상하다. 이런 기준으로 보자면 당장 내가 청년이던 시절, 청년의 문제에 주목해 <88만 원 세대>를 썼다는 얘기다. 당시 내가 30대였지만, 당사자로서 '내 문제'라고 이 현상을 보지 않았다. 후배들과 다음 세대의 문제라고 생각했지, 그 시절의 내가 '나와 내 또래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45세 청년은, 그걸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라는 얘기이다.
지난 일이지만, 지난 총선에서 청년 비례 대표 선출하는데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이 온 적이 있다. 당시에 나도, 나에게 부탁한 사람들도, 당연히 내가 심사를 하는 게 맞지, 그 비례 대표 선수로 뛰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의 45세 기준이라면, 내가 청년이라고 비례 대표 후보로 나가고, 내가 청년을 대변하겠다고 해도 된다는 얘기다. 상식적으로, 이건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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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는 데, 나도 아주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수 년 동안, 청년들의 '당사자 운동'을 주장하면서 정치 세력화 방안도 같이 주장을 했다. 수가 적더라도 20대~30대 국회의원이 늘어나면 제도적 개선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고, 점차적으로 청년들의 정치적 발언권도 세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실제로 청년 국회의원들이 야당에 생겨났다. 청년 스타는 이준석, 손수조 등 새누리당에서 생겨났지만, 진짜 국회의원은 야당에 생겨났다. 앞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의 혁신위가 얼마나 제도를 더 강화시킬 것인가에 따라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상황으로는 2명 정도의 청년 비례 대표가 다음 총선에서도 생겨날 것이다.
이 비례 대표 2명이 20대 한 명, 30대 한 명이 될 것인가, 아니면 30대 한 명, 40대 한 명이 될 것인가? 이 문제 때문에 죽어라고 제1야당이 청년의 기준을 45세로 고집한다고 많은 사람들은 분석한다. 그 이유가 아니면 20~30대의 지지를 받으며 박근혜 정권의 대항축을 형성하는 이 야당의 청년 기준이 45세로 다시 높아진 이 기이한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40대 비례 대표 한 명을 위해 수많은 20대 청년들과 동떨어진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상식과 같이 30대 중반 그 어디에 청년의 기준을 둘 것인가.
진짜로 알바와 청년들의 문제가 경제적 문제라면, 나는 더 많은 비례 대표를 청년들에게 할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짜 알바들을 대변하고, 취준생을 대변하고, 쪽방이나 반지하에 사는 바로 그 청년들이 국회 본청에서 "당신들이 청년들의 삶을 아느냐?"라고, 눈물 뚝뚝 떨어지는 대정부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40대가 야당의 청년 비례 국회의원이라고 청년을 대변한다는 상황, 너무 이상해 보이지 않는가? 아무리 정당의 일이고, 국회의원 앞에서는 모든 논리가 굴절해간다 하더라도, 나는 45세가 청년이라는 그 논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다음 총선을 바라보며, 청년들에게 왜 이 당에 투표해야 하는지 이유를 만들고, 정책을 만들고, 흐름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20대 초반, 20대 후반, 그들의 삶을 더 면밀히 보고 그들에게 맞춘 정책이 더 필요하다. 독일에 10대 국회의원이 등장한지 이미 한참 지났다. 그런 이유로 독일이 망하거나 위기를 맞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현재 새정치연합 기준으로 보면 주진우 <시사인> 기자도 여전히 청년이다. 그가 국회로 가기 제일 빠른 길은 새정치민주연합에 바로 입당해서 상향식 청년 비례 선거에 나가는 길이다. 주진우 기자가 시민 사회의 많은 것을 대표하기는 하지만, 청년을 대표한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박근혜 정부가 청년고용촉진법에서 청년을 34세까지로 규정했다. 야당이라면, 최소한 이 기준보다 내리면 내려야지, 더 올린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소하지만, 청년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사소하지 않을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해 국민들의 의견을 구하고 싶다. 과연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청년을 몇 살까지로 보아야 하는가?
박근혜 정부, 어쩌면 청년 실업이 반갑다?
좋은 일자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고 한지가 언제며 비정규 노동을 시비한 지가 도대체 얼마인가. 오죽하면 삼포세대니 열정 페이니 하는 노동의 특징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어가 될까.
시대의 불안이 이런 만큼, 정부도 일자리 만들기, 그 중에서도 청년 고용이라는 과제를 외면하기 어렵다. 지난 27일 정부가 '청년 고용 절벽 해소를 위한 민관 합동 대책회의'를 통해 '청년 고용 절벽 해소 종합 대책'을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관련 자료 : 청년 고용 절벽 해소 종합 대책)
정부의 시각으로는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하겠으나 반응은 심드렁하다. 사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일자리 정책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 때마다 내용이 비슷하고 비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절벽'이라는 감성적(?) 언어와 '종합'이라는 덧붙이기로는 역부족이다.
내용이 부실한 것은 당연하다. 일자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인턴과 직업 훈련 등 불안정한 일자리라고 하니, 부실을 넘어 속임수에 가깝다. '강소-중견 기업' 인턴이라는 일자리 7만5000개는 근무 기간 3개월에 월 60만원을 받는 것이란다. 무슨 대책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용도 이상한 것이 많다. 청년을 신규 채용하면 인건비 일부를 지원한다는데, 그 정도 인센티브로 고용을 늘릴까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믿지 않을 것이다. 2만 명을 직업 훈련시킨다고 하지만 어디서 누가 훈련을 시킬 수 있는지도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자리에 보건의료 분야가 빠질 리 없다. '포괄 간호 서비스'를 확대해서 2017년까지 1만 명의 간호 인력을 확충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보도 자료의 참고 자료에는 '야간 전담 간호사' 수가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관련 자료 : 청년 고용 절벽 해소 종합 대책 상세 참고 자료), 논쟁적인 야간 전담 간호 제도의 도입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참고로, 우리는 야간 전담 간호 제도의 도입을 절대 반대한다).
포괄 간호 서비스란 간호에 필요한 모든 입원 서비스를 병원이 제공한다는 것으로, 보호자 없는 병원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겠다. 이제 막 시작하는 정책을 전국에서 시행한다고 못 박은 것도 용감하고, 뜬금없이 공공 부문 일자리라고 주장하는 것도 심상치 않다. 메르스 유행 때문에 간병 문화를 바꾸자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 새로운 기회인가. 본래는 병원의 간병 인력과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논의해야 하는데, 어느새 청년 고용을 늘리는 정책에 종속되게 되었다.
보건의료 부문에서는 고용이 본래 정책의 목표를 왜곡시킨다는 비판이 높다. 게다가 백화점식으로 대책을 모아 놓았으나 고용 정책 그 자체의 효과(고용 증대)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쪽도 찾아보기 어렵다. 매번 부실, 비현실적, 재탕 삼탕이라는 비판을 받는데 이번에도 모양새가 비슷하다. 정부 당국의 무능 때문인가 어떤 구조적 이유가 있는 것인가.

언뜻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현재의 고용 정책이 겉으로만 일자리를 내세울 뿐 실제 목표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제 정책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고용 정책은 사회 경제적 권력관계를 직접 반영하고 따라서 정책의 기술적 측면이 아니라 정치의 구조가 작동한다.
게다가 고용 정책은 현실 정치의 정략에 직접 봉사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결합된 개인의 삶이 걸려있는 만큼, 일자리 정책은 정치 경제의 배후에 있는 권력관계뿐 아니라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를 민감하게 반영한다. 청년 고용 '20만'을 내세우는 이번 대책 역시 청년층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겠다는 정치적 목표가 작동했을 것이다.
결국 고용 정책은 고용 그 자체 또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이며, 고용 정책의 목표는 고용과 경제를 넘어 정치로 이어진다. 목표를 다시 정의하면 정책의 성공과 실패도 전복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말하는 대로 이번 고용 대책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정치의 실패가 아닐 수도 있다. 실패의 가능성 정도가 아니라, 고용 정책으로서는 실패를 각오하고 있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혹시 실패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닐까.
고용의 실패와 정치의 성공. 우리는 자본주의(특히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고용과 일자리가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국가의 통치술(통치 합리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적절한' 규모의 실업과 비정규 노동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심지어)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통치술의 이해관계에 완전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청년들과 대학이 어떻게 스스로를 훈련하고 바꾸는지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각자 '품행'과 능력을 준비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더 이상 국가가 나서서 힘들게 그들의 '일탈'을 처벌하고 훈육할 필요가 없다(취업의 전설로 이야기하는 1980년대와 비교해 보라). 스스로가 내면까지 변화하며 또한 스스로를 탓한다. 이보다 쉽고 효율적인 통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으로 끝이면 더 이상 고용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으나,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노동과 고용은 필시 양면성을 갖는다. 청년 실업과 비정규 노동이 효율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한도 끝도 없이 방치할 수는 없다. 지나친 실업과 비정규 노동이 많은 사람들의 '복리'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를 때가 문제다. 불안과 불만이 커지고 결국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면 국가의 통치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고용 문제는 통치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냥 두면 일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 병리 현상을 드러낼지 모른다. 통치의 효율성 때문에라도 더 이상 안정성을 무시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고용 정책이 곧 정치라고 할 때, 그것의 정치적 원리는 이 지점에서 성립한다. 사회적 불안정의 (부분적) 완화.
사회적 안정성을 높인다면 고용 대책은 국가의 진정한 관심사가 될 수 있지만, 구조적으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택할 가능성은 아직 낮다. 통치의 불안정을 완화할 수 있는 많은 수단이 남았다는 또 하나의 정치. 당장 청년 고용은 정규직의 임금 피크제와 쉬운 해고, 크게는 노동 개혁이라는 정치 또는 정략과 결합하지 않았는가. 일자리 만들기가 아니라 일자리 뺏기(좋게 말해 양보나 나누기)가 정치적 프레임의 핵심 요소다.
거듭 강조하지만, 정치로서의 고용 정책은 청년고용과 비정규 노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일차 목표를 두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는 사회 불안정(통치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을 해소하는 것이 앞선다.
핵심 대책으로 들어간 '포괄 간호 서비스' 확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민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하는 보건의료 정책이 아니라, 사회의 불안정을 완화하는 통치술의 한 가지 방법으로 소비된다. 정책 그 자체의 시민적 의의를 달성하는 것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다.
장담하건대, 앞으로도 고용 정책은 (절반은 의도적으로) 실패를 거듭할 것이다. 이런 사정은 청년 실업과 비정규 노동의 불안정성이(그리고 다른 어떤 통치의 전략이라도) 통치를 위협할 정도로 실질적 힘을 가질 때라야 달라질 수 있다. 여기가 바로 다른 관점의 고용 정책이 출발하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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