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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때문에 박정희가 살아났다"…왜? - 박형기<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일취월장7 2014. 12. 19. 20:08

 

"김재규 때문에 박정희가 살아났다"…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경제 개발, 첫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서어리 기자 2014.12.13 17:31:29

 

프레시안 :
1960∼1970년대에 한국 경제는 말 그대로 도약한다. 

서중석 : 박정희 집권 18년간 한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했다.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변신했고, 배고픔도 해결됐다. 또 경공업 국가에서 중화학 공업 국가로 바뀌었다. 1971년에 37.5퍼센트였던 중화학 공업 비율이 1981년엔 51.1퍼센트가 되면서 고도 산업 국가가 됐다. 이 시기에 포항종합제철과 거대한 중화학 공장들이 들어서고 고속도로도 뚫렸다. 

또 대단한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2∼1966년에는 연평균 7.9퍼센트를 기록했는데, (그다음 시기에 비하면) 그리 높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7∼1971년에는 연평균 9.7퍼센트라는 아주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제조업 성장률이 연평균 21.5퍼센트나 됐다.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72∼1976년에도 9.2퍼센트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고도성장을 했다. 

그러나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77∼1981년에는 5.8퍼센트라는 상당히 저조한 성장을 했다. 유신 체제 말기에 경제가 아주 나빠져서 1980년에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2년 이후 28년 만에 처음으로 규모가 큰 마이너스 성장을 한 데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1960∼1970년대에는 무엇보다도 수출 신장이 그야말로 눈부셨다. 눈부시다는 말이 제일 적절할 것이다. 1962년에 5400만 달러를 수출한 나라가 1970년에는 그 10배가 넘는 8억3500만 달러어치나 수출하게 된다. 1977년에는 다시 그 10배가 넘는 100억 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했다. 정말 경이적인 수출 신장이었다. 1962년에서 1980년까지 한국은 국민총생산(GNP) 연평균 성장률이 8.9퍼센트였고 수출 신장률은 40.7퍼센트였다. 전 세계에서 GNP 성장률이 이렇게 높은 나라는 대만을 빼고는 없었다. 대만과는 어느 시기를 갖고 잡느냐에 따라 1, 2위를 다투게 됐다. 

라디오만 하더라도 1965년에 125만 대였는데 1980년에는 950만 대를 소유하게 됐다. 텔레비전은 1964년에는 3만 대 정도였는데 1975년에 180만 대나 됐다. 이때는 흑백텔레비전이었지만, 어쨌건 굉장히 늘어났다. 1980년대에는 690만 대를 기록해 가구당 흑백텔레비전 한 대씩은 갖게 될 정도로 생활도 많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비약적인 성장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경제 발전은 박정희 대통령 덕분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 시절에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이뤄진 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변화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에 차이가 많은 것 같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평이한 상식 아닌가. 그런데 해방 후 남한이나 북한이나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이뤄진 것처럼 여기는 쏠림 현상 같은 것이 많이 보인다. 

국내외의 여러 조건을 검토해보면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에 경제 발전이 크게 안 됐다면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박정희가 대단한 경제 발전을 하게 만들었다', '박정희에 의해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 이런 생각을 1960~1970년대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아주 어렵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박정희 아니었으면 발전 못했다? 고도성장 없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그건 여러 자료로 입증할 수 있는데,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선거 아니겠나. 1963년 대통령 선거는 지금까지 있었던 대선 중에서 당선자와 차점자의 차이가 가장 적은, 15만여 표 차이밖에 안 난 선거라고들 한다. 서울, 경기도 일대에서 박정희 후보 표가 너무나 적게 나왔다. 그건 5.16쿠데타 세력의 실정, 경제적 무능에 대한 강한 심판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963년에 우리 경제가 참 나빴다. 5.16쿠데타 이후 한 번도 경제가 전망을 보인 적이 없었고, 1963년까지는 좋아질 수 있는 무언가도 없었다. 

1963년과 달리 1967년 대선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큰 차이로 이겼다고는 하는데, 그것도 사실은 경상도 몰표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서울,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남북도에서는 전부 윤보선 후보가 이겼다. 1966년부터 우리 경제가 좋아지지 않나. 1967년은 그다음 해인데, 서쪽 지방에 사는 사람들, 경기도부터 전라남도에 이르는 이 지역 사람들이 '경제가 박정희 덕에 좋아졌다'고 생각했으면 박정희 후보를 많이 찍었을 것이라고 난 본다. 그렇지 않았으니 그런 결과가 나온 것 아니겠느냐고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나.

1971년 선거를 보면 정말 백중지세여서 중앙정보부가 바짝 긴장하고 박정희 후보한테 특별한 공약을 하도록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김대중 후보가 졌지만, 이건 그야말로 경상도 몰표가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었다. 유권자 수준이 제일 높다고들 이야기하고 지역 색깔이 상대적으로 약한 서울에서는 압도적으로 김대중 표가 많이 나왔다. 그만큼 박정희 후보에 대한 불신이 컸다는 걸 이야기한다. 난 1971년 선거에서도, 심지어 경상도에서조차 박정희 후보가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몰표를 던진 것이지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를 잘했다. 경제 대통령을 뽑자', 그렇게 해서 많은 표를 던진 건 아니라고 본다. 아울러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뚫리고 포항종합제철 기공식을 하고 그러면서, 그다음 해 선거를 앞두고 화려한 경제 활동이 있지 않았나. 다 선거와 관련이 있다면 있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사실 경제 성장률이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높았지만) 1970년, 1971년에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리고 1969년에 83개의 대표적인 차관 업체 중 45퍼센트가 부실기업이라고 정부가 발표해버렸다. 차관 업체의 절반 정도가 부실 업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회자된 얘기가 "기업은 빚더미에 올라 안고 기업주는 잘산다", 이것이었다. 돈을 빼돌렸다는 얘기다. 그런 이야기가 많이 돌았다. 이 시기에 김대중 후보는 부정부패를 막 공격하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아주 강렬하게 짚었다. 그것에 대한 호응도가 컸던 것이다. 그 당시 못사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집이 없는 사람도 많아서 1970년 통계로 도시에서 무주택자가 48.5퍼센트였다. 유주택자 중에서도 제대로 된 집, 집다운 집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지 않았나. 하여튼 이 당시 유권자들이 성장의 혜택을 피부로 느끼면서 경제가 잘돼간다는 생각을 안 한 게 분명하다.

프레시안 : 1971년 대선에서 중앙정보부가 특별한 공약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박정희 후보가 "한 번 더 신임해준다면 후계 인물을 육성하겠다"고 한 것을 가리키는 것인가? 당시 김대중 후보가 이번에도 박정희 후보가 승리하면 영구 집권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경고하자, 박정희 후보는 대통령직을 3번만 수행하고 물러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이듬해(1972년)에 박 대통령은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공약을 스스로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린다. 

서중석 : 그렇다. 그것이다. 그 후 유신 시대는 그야말로 박정희 1인 유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총력전 홍보 시기라고 난 본다. 홍보를 참 많이 했다. 유신 시대에 이렇게 대단한 발전이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 당시 TV가 많이 보급되지 않나. 많은 사람이 일하는 시간을 빼놓고는 대부분 TV 앞에 앉아 있던 때다. 그만큼 TV 위력이 컸던 시기인데,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홍보를 많이 해가면서 경제 발전이 엄청나게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유신 제2기로 들어가는 1978년 12월 12일 총선, 유신 체제는 대통령이건 지역구 국회의원이건 임기가 6년이었는데, 어쨌건 이 선거를 보면 민주공화당이 불과 31.7퍼센트밖에 득표를 못하면서 제1야당(신민당)한테도 1퍼센트포인트 넘게 뒤졌다. 그뿐만 아니라, 더 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던 제2야당(민주통일당) 표까지 합치면 야당에 8.5퍼센트포인트나 뒤졌다.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지역구 국회의원과 달리, 박정희 대통령이 지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들의 임기는 3년이었다. '편집자')

세상에 어떻게 유신 체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도 하지만, 그건 '지금 경제 문제 같은 것이 심각하다.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심지어 농민들조차 노풍 피해가 컸기 때문에 박 정권을 그렇게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풍은 통일벼 계열의 신품종으로 1977년에 탄생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신품종을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그러나 1978년 전염병으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노풍 피해가 발생했다. 그해에 78만 명이 농촌을 떠나야 했을 정도로 농민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정부의 성급한 농정이 빚은 참사였다. '편집자') 

▲ 10.26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 전 대통령이 1979년 11월 3일 고 박정희 대통령 국장 영결식에서 영전에 헌화, 분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 10.26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 전 대통령이 1979년 11월 3일 고 박정희 대통령 국장 영결식에서 영전에 헌화, 분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다음 해인 1979년 10월에 일어나는 부마항쟁은 박정희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볼 수 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부산에 가서 실제 상황을 다 듣고 보고 나서, 부산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놀라운 시위가 전국 5대 도시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때 일어난 시위는 그때까지 현대 한국에서 한 번도 없다시피 한 시위였다. 민중, 일반 시민이 대거 참여한 시위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과거에는 그런 시위를 찾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그다음 해(1980년)에 '사북 사태'가 있고 광주항쟁이 일어난 걸 보면 김재규의 예언은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이런 엄청난 서민 항쟁, 시민 항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경제가 전반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 다른 정치적인 것은 하나의 계기가 됐을 뿐이다. 그러니까 1978년 12.12선거 때도 그렇고 1979년을 봐도 이 시기에 경제가 참 잘못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하지만, 일부 연구자는 김재규 때문에 박정희가 살아났다고도 이야기하지 않나. 박정희 대통령이 그 시기에 죽었기 때문에 박 정권 말기에 얼마나 경제가 나빴는가를 제대로 인식할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사람들이 박정희의 죽음에 통곡하게 돼버리는 식으로 전개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10.26과 박정희 부활의 역설 

프레시안 : 김재규의 총탄이 박정희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은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담고 있다. 그런데 장군 출신 대통령들의 정권이 막을 내린 후, 군사 독재의 문을 연 박정희가 되살아나는 일이 벌어진다.

서중석 : 박정희가 인기를 얻는 건 죽은 다음이다. 그것도 1990년대 이후, 더 직접적으로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체포, 구속되던 1995년 말경부터인 것 같다. 1995년경부터 박정희 현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나타나고, 특히 그 2년 후(1997년)에 IMF(국제통화기금) 위기를 맞으면서 절정에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정권 시기에 가장 설움을 받았고 어렵게 살았던 서민이나 빈곤층이 IMF 위기 이후에 특히 박정희를 지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난 강만길 선생님하고 이야기할 때 이따금 농담 비슷한 것을 하는데, "어떻게 선생님 학교에서 60∼70퍼센트의 학생이 박 아무개를 지지하는 현상이 생길 수 있었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바로 그 시기였는데 여론 조사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 선생님은 그냥 웃기만 하셨는데, 하여튼 이 시기 여론 조사에서 중요한 것은 이 학생들이 또 대부분 이민을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뭘 말하는 건가. 그 당시 젊은 층이건 나이 먹은 층이건 한국에 사는 그 자체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쌓이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박정희에 대한 복고주의적 인기가 엄청난 기세로 2000년대 초반까지 나타난다.

프레시안 : IMF 구제금융 위기는 박정희 정권 시기에 기본 틀이 만들어진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IMF 위기가 박정희 신화를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건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다. 박정희 신화는 오늘날에도 널리 퍼져 있다. 

서중석 : 나는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이런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 심지어 '박 대통령이 없었다면 경제 발전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현상에 문제가 많다고 본다. 이 자리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건 박정희 정부 시기의 경제 발전에서 박정희가 맡은 역할은 부분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이 시기에 경제가 발전하게 돼 있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성장 제일주의, 과도한 해외 의존, 재벌 중심의 경제 편성 같은 심각한 문제점을 박정희 정권 시기에 갖고 있었다는 점을 무시해선 안 된다. 그것들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이 돼서 한국 경제를 잘못 가게 하지 않나. 

그리고 1950년대 초 박정희가 이용문(이건개 전 의원의 아버지) 장군하고 같이 품고 있던 군부 쿠데타 구상을 실행에 옮기고 그게 성공해 정권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 시기에 경제 발전이 이뤄졌을까? 이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시기에는 전혀 이뤄질 수 없었다고 본다. 박정희 식으로 경제 발전이 이뤄질 수 없었던 시기다. 또 1960∼1970년대라 하더라도 만약 박정희 같은 사람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 가서 정권을 잡았다고 하면 어땠을까? 당시 이 지역의 권력자들 중엔 군부 출신이 많지 않았나. 박정희 역시 그런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1960∼1970년대 한국(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박정희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전도 안 됐고, 같은 시기라 하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정권을 잡았다면 (1960∼1970년대 한국인들이 이룩한 만큼의 경제 성장은) 안 되게 돼 있었다. 이런 점을 명료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60∼1970년대 한국이었기에 박정희는 성공할 수 있었다 

프레시안 :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해 이뤄낸 성과라는 점에 눈감고 어느 한 사람의 공으로 몰아가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모든 것이 "김일성 수령" 혹은 "김정일 장군"의 은덕이라고 강변하는 북한 같은 곳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서중석 :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엄청난 경제 발전을 하지만, 아무도 한 개인 때문에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만은 한국과 함께 이 시기에 기린아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대단한 경제 발전을 했다. 그런데 2.28사건 50주년이던 1997년에 대만에 갔더니, 장개석(장제스)에 대한 평이 보통 나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인물로, 역사에서 이젠 떠나보내야 할 인물로 여기고 있더라. 그런데 그 무렵 한국에서는 막 박정희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국하고 너무 차이가 나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2.28사건은 1947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권이 수만 명의 시민을 학살한 사건으로, 대만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편집자')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과거사 문제 때문에 스페인에 갔는데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하게 만든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묘지에도 가고 조촐하게 만들어놓은 프랑코 기념관에도 가고 그랬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코 시대를 악몽의 시대로 기억하고 있더라. 경제 발전이 많이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그런 시대가 와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프랑코의 딸, 나이 먹은 분이었는데, 이분이 아버지에 대해 '그 영혼이 안식하기를 바란다. 내가 죽을 때까지 바라는 건 그것이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을 봤다. 그러니까 '프랑코 시대는 영원히 가야 한다. 프랑코는 그렇게 기억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이런 분위기였다. 그런데 박정희라는 분이 인격적으로나 성실성에서나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능력에서 장개석·장경국(장징궈) 부자, 프랑코 총통 같은 사람보다 낫다고 볼 수 있나? 스페인에서 이런저런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프레시안 :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중후반에 다시 도약한다. 그런데 박정희 신화가 만연한 것과 달리 전두환 신화는 접하기 어렵다. 

서중석 : 사실 한국의 경우도 경제 성장만 갖고 이야기한다면 전두환 정권의 어떤 시기에 더 경제 성장이 이뤄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전두환 정권의 어느 시기를 갖고 따지느냐가 논란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어느 시기에 낸 통계인지에 따라 우리나라 통계는 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런 차이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하여튼 2007년에 나온 자료로 따지면 전두환이 집권하고 있던 1983∼1987년 사이에 연평균 9.5퍼센트 성장률을 기록해 1968∼1972년, 그러니까 박정희 집권기 중 성장률이 가장 좋은 편에 들어가는 시기에 기록한 연평균 9.3퍼센트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아무도 전두환이 잘나서, 훌륭해서 이렇게 경제가 성장했다고 하지는 않는다. 전두환 집권 초기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유산 때문에도 굉장히 고생하지 않았나. 1980∼1981년에 참 어려웠다. 1982년부터 경제가 다시 살아나는 건데, 어쨌든 아무도 전두환이 잘났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도 박정희와 형평성을 따질 때 너무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다. 

더군다나 1986∼1988년에 단군 이래 최고의 경제 발전을 했다고 이야기하지 않나. 의식주 생활 전반이 엄청난 변화를 하는 건 오히려 이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고기를 많이 먹게 된 것이라든가 아파트가 보편화하고 좋아진다든가 가정용 연료가 가스 같은 걸로 일반화돼 간다든가 하는 것이 다 이 무렵에 일어난다. 승용차도 1970년대까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치르며 전 세계에 한국이 많이 알려지는 1986∼1988년을 거쳐 1990년대에 가서야 한국이 190만 대 정도의 승용차를 가진 나라로 변한 것으로 돼 있다. 그 후 승용차가 엄청나게 늘어나지 않나. 다시 말하면, 한국에서 또 하나의 급격한 변화는 1986∼1988년에 일어난다. 이와 관련해 <전두환 육성 증언>이라는 책에서 전두환은 이렇게 경제 발전을 많이 했으니 거대한 시위가 안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도 하고 그러는데, 1987년 6월항쟁은 일어났다. 거듭 말하지만, 1986∼1988년 그 호경기에 대해서도 전두환 공로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198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세계적으로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현상이 일어나는데, 전 세계에서 3저 현상으로 제일 덕을 많이 본 나라가 한국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한국은 에너지의 거의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차관 망국론이라는 게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등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차관 때문에 망할 것이다. 빚을 너무 많이 얻어 쓰고 있다'는 우려가 많았는데, 상환해야 할 차관이 저이자하고 저달러 때문에 확 줄어버렸다. 한두 해만 그런 게 아니라 수년간 그랬다. 누가 잘하고 잘못한 것과 상관없이 이런 것들 때문에 한국 경제가 새롭게 엄청난 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전두환 공로라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점도 생각하면서 박정희 시기를 들여다보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는가. 

▲ 1960∼1970년대에 한국의 수출은 경이적으로 증가했다. 사진은 1977년 12월 22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100억 불 수출의 날 기념식 모습. ⓒ연합뉴스

▲ 1960∼1970년대에 한국의 수출은 경이적으로 증가했다. 사진은 1977년 12월 22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100억 불 수출의 날 기념식 모습. ⓒ연합뉴스  

 
 


자본주의 황금기와 박정희, 3저 호황과 전두환 

프레시안 : 1960∼1970년대 세계 경제 상황도 한국에 유리했다. 

서중석 : 구해근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1960년대경부터 1970년대 초반 자본주의 세계 경제는 상승 주기를 탔다. 중심부의 자본가들이 투자에 열정적이었고 유럽 자본을 쉽게 다른 지역에서 공여 받을 수 있었고 이자율도 이 시기에는 낮았다. 그뿐만 아니라 제3세계 공산품에 대한 무역 장벽도 별로 없었고 한국을 추격하는 태국 같은 개발도상국이 이 당시에는 추격할 힘이 없어 별로 추격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만, 한국 등 네 마리 용만 앞장서가는 유리한 점을 이 시기에 갖고 있었다." 

박정희 집권 18년 시기는 인류 역사상 세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부터 전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생산력 증강 시대를 맞이한다. 앙드레 모루아가 쓴 <미국사>를 보면, 난 믿기지 않는데 참 놀라운 기술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1940년대 4∼5년 동안 이뤄진 생산력 발전이 그 이전 100년간 미국이 발전한 것과 맞먹을 정도라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세계 경제의 3분의 1 이상을 미국이 장악했다고 할 정도이지 않았나.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이, 또 프랑스가, 조금 있으면 유럽의 다른 몇 나라가 무서운 속도로 경제 발전을 한다. 일본은 한국전쟁이 나면서 순식간에 경제 발전으로 들어간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이런 데에서 경제 발전이 참 무섭게 일어난다. 이런 지역에서는 인류 역사상 찾기 어려운 대단한 경제 번영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국내에도 있었다. 

서중석 : 원래 한국, 일본, 대만, 중국은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때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전철환 교수가 그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전 교수는 근면하고 노력하는 민족성,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두뇌 활동, 그리고 축적과 성취욕이 강한 상향 의식 등을 한국의 잠재력으로 지적했다. 그런 것에 더해 나는 한국인이 아주 진취적이고 저돌적인 순발력도 대단하다고 본다. 이런 면이 강한데, 이것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잘 먹혀들 수 있었던 여건에 한국이 놓여 있었다는 점을 중요시할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축적된, 역사의 힘이라고 해도 좋고 역사적 역량이라고 해도 좋은데 바로 그것을 한국은 갖고 있었다. 한국만큼 독립 운동, 민주화 운동을 장기간에 걸쳐 진행한 나라가 지구상에 없다. 1910년 나라를 뺏긴 그 순간부터 1945년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 한 해도 쉬지 않고 국내에서건 이역만리에서건 독립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나. 민주화 운동도 1960년 4월혁명 때부터 30여 년이나 계속된다. 이런 것도 그런 역사적 역량을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유럽이라든가 북미권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고 있듯이 한국, 일본, 대만, 중국도 역사적, 문화적으로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역사적 역량, 역사의 힘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국내외의 좋은 여건을 맞으면서 역동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아주 중시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해방 후 근면하고 성취욕이 강한 그리고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한글세대가 방대하게 축적됐다. 그야말로 엄청난 산업예비군이 1945년부터 1950∼1960년대에 걸쳐 형성됐다. 이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런 방대한 산업예비군이 해외 자본과 결합한 것이 한국 경제 발전의 기본적인 힘으로 작용했고, 그것에 여러 요인이 작용하면서 1960년대 후반기부터 경제 발전이 이뤄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참 운이 좋은 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앞으로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에 경제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던 국내외 조건을 두루 살펴봄과 동시에 박정희의 경제 정책이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가를 다각도로 살펴보려 한다. 그와 함께 박정희 집권 시기의 경제 발전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대만과 한국의 경제 발전의 성격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대만과 한국은 역사, 문화면에서 유사성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또 두 나라 다 1950년대에 지독하게 못살았다. 물론 차이점도 있었다. 대만은 1차 산업에서 수출할 게 많았다. 그 반면에 미국 원조는 우리가 대만보다 월등 많이 받았다. 또 대만은 베트남전쟁 특수라는 게 약했다. 그 점에서 한국이 매우 유리한 면도 있었다. 두 나라를 비교해보면 왜 이 시기에 한국과 대만이 그렇게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가, 그러면서도 왜 다른 길을 갔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공탄은 박정희보다 강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경제 개발, 두 번째 마당

프레시안 : 1960∼1970년대 경제 발전에서 박정희가 맡은 역할은 부분적인 것이었다고 지난번에 강조했다. 아울러 당시 국내외 조건 등 역사의 흐름을 큰 틀에서 봐야만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대해, 그런 접근 방식은 박정희 정권의 리더십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서중석 : 박정희 대통령이 18년 집권 기간 동안 어떤 역할을 맡았는가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예가 있다. 바로 산림녹화다. 산림녹화를 다룬 프로그램을 TV에서 여러 번 봤는데, '박정희가 산림녹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 때문에 산림녹화가 됐다. 박 대통령이 노력해서 산림녹화가 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고 놀랐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서 참 놀랐다. 박정희 대통령이 산림녹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것과 박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산림녹화가 안됐을 것이라는 것, 이 두 가지는 엄청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0년대에 산림녹화에 많은 노력을 한 건 사실이다. 산골을 비롯한 시골 마을 부근에서 그런 산림녹화의 흔적을 오늘날에도 쉽게 볼 수 있다. 그 당시 국민학생(오늘날 초등학생)들을 아주 많이 동원했고, 마을 주민들이라든가 중·고등학생들도 동원해서 나무를 심었다. 그때 심은 나무들은 쉽게 구별이 간다. 리기다소나무라든가 낙엽송처럼 빨리빨리 자라는 것들, 그리고 밤나무 같은 유실수를 많이 심었다. 밤나무는 무지하게 흔하지 않나. 

우리나라에는 참 산이 많고 지금 그 산들이 다 울울창창하다. 그런데 이런 것의 거의 대부분은 자연적으로 나무들이 자란 것이다. 가서 보면 '아 저건 나무를 심고 가꾼 부분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하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지 않나. 산속 절 부근 같은 데 나무가 그렇게 좋은 것은 나무를 가꿨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역은 들어가기도 나쁘다. 칡넝쿨이 뒤엉켜 있고 그런다. 그런 지역은 저절로 나무들이 자란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산림녹화가 되게 만드는 데 기본적으로 작용한 게 뭐냐 하면 구공탄이다. 난 구공탄이라고 본다. 박 대통령보다 구공탄의 위력이 월등 컸다. 

▲ 한때 민둥산이 많았던 한국은 20세기 후반 산림녹화에 성공했다. 난방 연료의 변화라는 큰 흐름 속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땀 흘린 결과였다. ⓒ연합뉴스

▲ 한때 민둥산이 많았던 한국은 20세기 후반 산림녹화에 성공했다. 난방 연료의 변화라는 큰 흐름 속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땀 흘린 결과였다. ⓒ연합뉴스  

 
 


난방용 연료의 변화와 산림녹화, 그 뗄 수 없는 관계 

프레시안 : 산림녹화는 역대 정부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박정희 집권기 이전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산림 문제를 굉장히 중시했다. 1958년 선거에서 (여당은 농촌에서, 야당은 도시에서 강세를 보이는)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지만, 그전부터 산림법(산림보호임시조치법)에 의해 농민들이 꼼짝 못하는 걸 볼 수 있다. 산림법에 걸리지 않을 농민들이 그 시기에 거의 없었다. 부자를 빼놓고는 그랬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겨울 추위라는 게 아주 심하지 않나. 그러니 나무를 베어다가 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실 나무를 베어다가 때는 것은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낙엽조차 박박 긁어다가 때지 않으면 당장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엄하게 산림법으로 다스려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 이승만 대통령 담화를 봐라. 그 양반, 아주 엄혹한 말, 심한 말도 많이 쓰지 않나. 나무를 베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그렇게 강하게 이야기를 하고 나무 심는 것도 장려했지만, 될 수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산림녹화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며 여러 차례 강도 높게 지시했다. 예컨대 1958년 1월 7일 국무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 "연탄이란 것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그것을 이용하도록 하라. 내무부 장관은 시내에 반입되는 신탄을 일절 엄금하고 (이를 어기면) 군경을 막론하고 잡아넣도록 하라." 이외에도 "산림 감시를 강화하라", "책임 구역제를 철저히 시행하라", "입산을 금지하라", "낙엽 채취를 금하라" 같은 지시를 거듭 내렸다. '편집자') 

장면 정부 후반기를 보면, 너무 짧은 집권이어서 후반기라 하기도 뭐하지만 하여튼 1961년에 가면 대규모로 국토 개발 사업을 벌인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벌인 국토 개발 사업의 대부분은 산림녹화와 연결된다.

이렇게 집권자들은 민둥산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 아니었나. 다들 총력을 기울여 푸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왜 1960년대 중후반부터 나무가 많이 자라게 됐느냐. 그게 앞에서 이야기한 구공탄의 위력이다. 그 점에서도 박 대통령은 운이 좋았다. 

프레시안 : 구공탄은 5.16쿠데타가 일어나기 훨씬 이전, 즉 한국전쟁이 마무리될 무렵 보급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온돌로 겨울을 지냈다고 이야기하는데, 한국전쟁이 났을 때도 서울에서는 대부분 나무를 가져다 땠다. 그리고 한강물을 길어다 먹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에서 20세기 전반기에) 북청 물장수가 있지 않았나. (20세기 전반기에 상수도 시설이 서울에 들어서긴 했으나 불충분했고 특정 지역에 집중돼 있었다. 그래서 상수도 등장 후에도 물장수가 활동했다. '편집자')

이 시기에 나무꾼이 서울에 참 많았다. 그런데 1952∼1953년경부터 무연탄으로 만든 구공탄이 보급됐다. 구공탄이 그 비싼 나무, 신탄(薪炭)을 때는 것보다 얼마나 유리한 게 많나. 편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서울 사람들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구공탄을 가정에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정부에서 1957년에는 임산 연료의 도시 반입을 금지하고 무연탄 사용을 권장했다. 다시 말해 나무꾼이 서울에 못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들어오면 잡아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1956년 신문을 보면 이미 나무꾼이 서울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나무를 팔려는 사람이 이제는 서울에 안 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전처럼 사지 않으니까. 다른 말로 하면 많은 사람이 이미 구공탄을 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쯤엔 대도시가 대개 그렇게 된다. 1960년대에 가면 이제는 군청 소재지, 읍면 소재지에서도 나무를 때지 않고 구공탄을 사용한다. (1960년대 신문을 보면, 정부가 전국 주요 도시를 임산물 반입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고 주요 도로에 임산물 검문소를 설치해 단속한다는 내용도 나온다. '편집자') 

내가 1970년대 초에 고향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구공탄을 때고 계시더라. 그런 시골에서도 구공탄을 때게 되면서 이제는 산에 나무하러 가는 사람이 없게 된다. 우리나라는 비도 적당히 오고 땅도 그렇게 나쁜 땅이 아니다. 그래서 좋은 나무를 못 심더라도 나무들이 자랄 수 있는 토질을 가진 나라다. 그렇게 산에 나무하러 가는 사람이 점차 사라지면서 1960년대 중후반부터 산림녹화가 이뤄져 1970년대 어느 때부터는 울울창창하게 된다. 나무들이 너무 빽빽하면 좋지 않기 때문에 일부 나무를 베어놓아야 할 때도 있지 않나. 그런데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가 되면 그런 이유로 산에 나무를 베어놓아도 그 나무를 가져가는 사람이 없는 식으로 돼버렸다. 그렇게 우리 사회가 변해간 것이다. 


이승만·김일성은 못 이룬 산림녹화, 박정희 때 성공한 이유 

프레시안 :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산을 지킬 수 없다는 점은 18세기 조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온돌을 오래전부터 썼지만 조선 중기까지는 온돌이 없는 집도 적지 않았으며, 온돌 난방이 보편적으로 이뤄진 건 18세기 무렵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도성을 둘러싼 네 개의 산(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이 점차 황폐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산에서 나무가 대거 사라지면서 개천의 유량이 줄어드는 문제도 발생한다. 온돌이 널리 보급된 것에 더해 도성 및 그 주변 인구가 크게 늘면서 땔감 수요가 폭증한 탓에 생긴 일이다. 이 시기 도성의 인구 증가는 농촌의 계층 분화가 심화되면서 땅을 잃은 가난한 농민이 늘어나고 그중 상당수가 서울 쪽으로 몰려든 것 등과 관련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정은 도성을 둘러싼 네 개의 산에서 소나무 등을 베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힘없는 백성들이라 하더라도 가만있다가 얼어 죽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8세기이건 해방 이후이건 이런 사례들은 산림녹화가 난방용 연료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다시 돌아오면, 북한의 산들이 민둥산으로 변해버린 것과 대비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산림녹화 업적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 

서중석 : 산림녹화가 박정희에 의해 이뤄진 것인가 하는 부분은 북쪽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71년에 남북 적십자사가 교류하고, 그러면서 남북이 왕래하게 되지 않았나. 그때 북한에 처음 갔다 온 사람들이 놀라버렸다. 왜냐하면 개성에서 평양까지 차를 타고 간 모양인데 나무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꼬맹이 때부터 북한은 산이 많고 나무가 많은 지역이라고 배웠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도 평양에 여러 번 가보고 개성과 평양 사이도 가보고 평양에서 묘향산도 여러 번 가고 그랬는데, 나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건 북쪽에 간 사람이 모두 느끼는 것이다. 백두산 근처는 울울창창하고 좋은 나무가 많다지만, 사람들이 사는 데에는 나무가 없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뻔한 것이다. 북한은 유연탄도, 무연탄도 많이 난다. 남쪽보다 석탄이 월등 많이 난다. 그런데 빨리 경제 발전을 시키려고 석탄을 산업용과 수출용으로만 사용한 것이다. 우리처럼 구공탄이라는 아주 쉬운 걸 만들어서 집집마다 사용하게 하는 게 결과적으로 훨씬 좋은 것이었는데, 그걸 북한에서 안 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조금 변형된 형태로 새로운 연료를 개발하고 한 것이다. 그게 북한의 산림을 저렇게 황폐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북한은 지독한 독재 국가라고 배우지 않았나. 물론 남쪽은 독재 국가라고 배우지 않았지만. 그렇다면 북한에선 아무도 나무를 베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얼마나 무섭게 했겠나. 그렇지만 추위 앞에선 아무도 못 견디는 것이다. 앞에서 이승만 때를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저렇게 산림녹화가 된 것은 한두 사람이 호령하고 사람을 동원해 나무 좀 심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엄청난 새로운 힘이라고 할까, 기제가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박정희 경제를 이해하는 데는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196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을 하면서 고층 콘크리트 건물이 점점 늘어난다. 그러면서 이제는 연탄에서 석유로 옮겨가고, 석유를 대량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에 이미 가스가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1970∼1980년대에 가면 가스를 사용하는 주택이나 호텔이 늘어나게 된다. 내가 1980년대 초에 강원도에 갔다가 깊숙한 산골에 있는 집에서 가스로 방을 덥힌 걸 보고 놀란 적도 있다. 이제 우리는 석유와 가스가 없으면 못 사는 나라로 바뀌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렇게 생활을 바꾸게 된 힘들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건, 경제 발전을 하게 한 힘들이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논리 속에서 우리가 찾아나가야 한다고 본다.

 

 

 

 반신반인 박정희? 위인도 못 된다

[프레시안 books] 박형기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김태경 <한겨레> '함께하는 교육' 기자 2014.12.12 17:09:07

 

"하오샹…니부쓰쭝궈런(好像你不是中國人)?" (너, 중국 사람 아닌 것 같은데?)

1994년 2월 춘절(설날)을 3일 앞둔 광저우발 베이징행 열차 딱딱한 침대(硬卧)칸. 전날 오전 10시에 탔는데 다음 날 오전 10시께가 되자 맞은편 40대 초중반 중국 남자가 말을 걸었다. 중국인은 의심이 많다. '1박 2일'을 하며 나를 관찰한 결과 외국인으로 보이니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워쓰한궈런(我是韓國人)." (한국인이에요.)

중간 침대에 누워 우리 대화에 귀 기울이던 50대 후반 아주머니가 한마디 했다. "한궈가 어디 있는 나라죠?"

"한궈쓰난차오시엔(韓國是南朝鮮)." (한국은 남조선이라고요.) 

(1997년 8월, 대선을 앞두고 새정치연합 소속 이석현 국회 부의장(당시는 새정치국민회의)은 해외용 명함에 영어·러시아어와 함께 韓國·南朝鮮이라고 표기했다가 보수 쪽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급기야 탈당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그 무렵만 해도 '한국'을 아는 중국인은 소수 식자층이었다. 라오바이싱(老百姓, 보통 백성들)은 '남조선'은 알아도 '한국'은 금시초문이었다.) 

2시간 정도 잡담했다. 담배를 나눠 피우고 맥주도 몇 잔 했다. 말이 통한다 싶었는지 그는 정치 얘기를 꺼냈다.

"지금 중국은 '乱七八糟다(개판이다)'." 
"왜요? 개혁·개방으로 훨씬 더 잘살게 되지 않았나요?" 
"나는 사업한다. 먹고살 만하다. 하지만 이 나라, 문제 많다고 본다. 열흘 전 새벽에 선전역 부근에서 권총 강도 당했다. 돈 다 털렸고 죽을 뻔했다. 마오 주석(마오쩌둥)이 살아 있을 땐 안 그랬다. 문화대혁명 때 나도 홍위병이었다. 문혁 갖고 말 많지만 그때는 중국인 도덕 수준이 최고였다." 
"엥? 그래요?" 
"문혁 때는 불빛 하나 없는 외진 길을 걸어도 무섭지 않았다. 도둑·강도가 없었다. 길에 떨어진 물건, 아무도 안 주워갔다. 지금은 사람들이 돈만 밝힌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게 중국이다."

덩샤오핑 덕분에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비즈니스'를 분쇄했던 마오쩌둥을 찬양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 박정희 VS 마오쩌둥>(알렙, 2014년 10월 펴냄)을 읽으며 떠오른 옛 기억이다. 이 책은 백성을 먹인 덩보다 굶겼던 마오가 왜 인기 폭발인지 밝힌다. 저자 박형기는 <광주일보> 홍콩 특파원, <머니투데이> 국제부장, 온라인 총괄부장 등을 지냈다. 

필자가 중국 취재 여행을 다닐 때, 중국인들에게 "왜 당신들은 잘살게 해준 덩샤오핑보다 수천만 명을 아사시킨 마오쩌둥을 더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약속이나 한 듯 "덩샤오핑은 우리에게 돈을 벌게 해주었다. '마오주시(毛主席, 그들은 반드시 이렇게 부른다)'는 우리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돈은 언제라도 벌 수 있지만 한번 깎인 체면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는 답을 듣곤 했다. (6쪽) 

여기서 체면에는 개인적 체면은 물론 민족적 체면까지 들어간다. 민족 자존심이다. 민족 자존심이 문턱 하나만 넘으면 중화주의다. 중화주의가 실력 없이 나대면 '중국적 거만함'이고 루신은 <아Q정전>에서 이를 '정신 승리법'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1999년 5월 미국이 유고 베오그라드의 중국 대사관을 폭격해 중국인 3명이 숨졌다. 반미 시위가 격렬했다. 당시 국가주석 장쩌민은 미국을 향한 분노가 반정부 시위로 번질까 두려웠다. 빌 클린턴의 공식 사과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라오바이싱들은 "마오 주석이 살아계셨다면 미국이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갔겠느냐?"고 분개했다. (가끔 '사오정식 행동'으로 조롱받았던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93세까지 장수하지 않았다면 마오의 후계자 화궈펑 꼴이 났을 것이다.) 

중국인들 가슴속에 마오쩌둥이 살아 있는 이유 

ⓒ알렙

ⓒ알렙  

문과적 낭만주의자 마오쩌둥(1893∼1976)과 이과적 테크노라트 덩샤오핑(1904∼1997)은 달랐다. 마오쩌둥의 리더십은 다음과 같다. (분류는 저자가 했지만 바로 뒤 설명은 필자가 했다.) 
 
 
* 정통성 : 마오는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한 12명 가운데 하나였다.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한다'는 중국식 혁명론의 창시자이고 대장정을 이끌었다. '신중국'의 건국자다. 중국 현대사 인물 가운데 마오만한 정통성을 지닌 인물은 '국부' 쑨원뿐이다.
 
 
* 지적 능력 : 마오가 무력은 강했지만 무식했다고 보는 한국인들이 대부분이다. 비적 떼 두목 정도로 안다. '김일성은 가짜였다'라는 설만큼이나 무식한 견해다. 마오는 독서광이었다. (흡연광이기도 했다. 8만5000명이 출발해 10퍼센트만 옌안에 도착한 대장정 때 담배를 구할 수 없어 풀을 말아 피웠던 게 제일 불편했다고 말했을 정도.)
 
 
마오의 <모순론>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위치가 상당하다. 그의 신민주주의론은 제3세계에 큰 영향을 줬다. 레닌이즘은 이제 책 속에서나 볼 수 있지만, 네팔·인도·필리핀에는 여전히, 칼라슈니코프 돌격 소총(AK-47)을 들고 인민 해방을 외치는 마오주의자들이 있다. 

* 자주 : 마오는 56세 때인 1949년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게 처음 외국에 나가본 거였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마오의 평생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 선생(馬克思, 마르크스의 중국어명)과 열 선생(列寧, 레닌의 중국 이름)'의 혁명 이론을 중국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았다. 

아마 세계 역사상 중국 농민만큼 인내심이 강하고(펄 벅의 <대지>에 잘 나와 있다) 혁명성이 강한 농민들은 없을 거다. 중국은 농민 반란으로 왕조가 자주 교체됐다. 진나라 때 진승·오광의 난(BC 209)에서 시작해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1630∼1640년대)으로,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난(1850~1864)으로 무너졌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즐겨 읽고, 북송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을 17번 완독했던 마오쩌둥은 자국 역사에 해박했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농민은 포대 속의 감자와 같다. 감자는 스스로 서지 못한다. 오직 포대 속에 담겨야 설 수 있다"고 야유했지만, 마오쩌둥은 정반대였다. 마오가 도시 노동자 계급 중심의 볼셰비키 혁명 모델을 추종하지 않고, 농민 중심의 혁명 전략을 세운 건 단지 '자주성' 때문이 아니다. 중국 역사에 천착한 '현실감각' 때문이었다. 

* 폭력 : 마오 어록 넘버원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다. 생사를 함께했던 동지들도 거슬리면 처단했다. 류사오치·펑더화이·린뱌오 등 '마오쩌둥 옆에 가면 모두 죽었다.' (249쪽) 

한데 트랙터 수리 공장으로 쫓아냈던 덩샤오핑(당시 65세)만은 살려줬다. "마오가 덩샤오핑을 미워했으나 재능이 너무 아까워 차마 죽이지 못했다"고 말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아무튼 덩샤오핑도 정권 장악 뒤 "마오 주석의 공은 7, 과는 3", "마오 주석의 초상화는 톈안먼 광장에 영원히 걸려 있을 것"이라며 화답했다.

(필자는 문혁 때 쫓겨났던 덩샤오핑이 마오에게 보낸 편지를, 10년 전 중국의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본 적이 있다. 겉은 품위 있었지만 속은 아부의 극치였다.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구구절절 하소연한 뒤 복직만 시켜주시면 충성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위대한 영수 마오쩌둥 동지 만세'로 편지가 끝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천하의 덩샤오핑도 고달프니 어쩔 수 없구나', 쓴웃음이 났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믿음, 덩샤오핑도 마찬가지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는 덩샤오핑과 박정희 리더십의 특징을 이렇게 평한다. (이 책의 뒤표지 날개에 적혀 있는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덩샤오핑 
- 화합 : 정치의 달인인 그는 '친구의 극대화, 적의 극소화'라는 명제를 뼛속 깊이 체화한 인물이었다.
- 권위 : 덩샤오핑은 권력이 아닌 권위로 중국을 통치했다. 
- 유연 : 덩샤오핑은 유연한 발상을 했다. 덩샤오핑은 발상뿐 아니라 정치 리더십도 부드러운 지도자였다.
- 보편 : 덩샤오핑은 평화를 지향했고, 합리적이었다. 그는 특히 세계의 보편적 질서를 존중했다.

박정희 
- 가난 극복 : 박정희의 개인적 가난은 그 자신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우리 국민에게는 행운이었다. 그의 가난 극복 리더십이 경제 발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 실력과 소탈 : 박정희는 탁월한 실력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박정희는 실력과 인격을 겸비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 마이웨이 : 박정희는 반대가 많아도 국익 또는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면 자신의 길을 걸었다.
- 폭력 : 집권 이후 박정희 리더십의 요체는 폭력이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을,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는 빠른 승진을 선물했다. 

날카로운 견해도 보인다. 예를 들어 다음 내용이다. 

만약 20년에 걸친 국공 내전에서 장제스가 이겼더라면 중국은 일본처럼 영원히 미국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2차 대전 후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들어갔다. 그 순간 일본이 세계 최강국이 될 가능성은 사라졌다. 중국도 미국의 핵우산 아래 들어갔다면 제2의 일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마오가 정권을 잡은 중국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로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마저 성공함으로써 중국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발돋움했다. (122∼123쪽) 

그러나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를 읽으면서 필자와 다른 견해도 눈에 띄었다. 우선 저자가 마오쩌둥 리더십의 특징 중 하나로 '폭력'을 꼽으면서 덩샤오핑 리더십에는 이를 넣지 않은 대목이다. 덩샤오핑이 화합형 인물이었고 권력보다는 권위로 중국을 통치한 건 맞다. 그렇다고 덩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를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989년 6.4 톈안먼 학살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빨갱이들'만의 생각은 아니다.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는 톈안먼 학살을 적극 지지했고 덩샤오핑과 친했다. 리콴유는 박정희도 높게 평가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동아시아 전통적 지도자들의 생각 아닐까? 대만 민진당 지지자들 자부심 가운데 하나가 이거다. "우리는 수천 년간 전제 왕조만 있던 중국에서도 민주주의와 직접 선거가 가능하다는 걸 실증했다."

'자주'를 마오쩌둥 리더십의 특징 중 하나로 거론하면서 덩샤오핑 리더십에는 넣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덩샤오핑은 유연했지만 자주성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1982년 9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와 홍콩 반환을 놓고 담판을 벌여 판정승했다. 대처는 홍콩을 중국에 넘겨주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덩과 회담한 뒤 너무 실망해 계단을 내려가다 실족하고 말았다. (271쪽) 


반신반인? 위인 범주에 넣기도 힘든 박정희 

저자가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를 쓰게 된 계기는 지난 2013년 11월 14일 '박정희 대통령 96회 탄신 기념행사'에서 남유진 구미시장이 한 말 때문이다. 남 시장은 "박정희 대통령은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하늘이 내렸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반신반인으로 대우받는데, 과연 박정희가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저자는 박정희의 경제 성과를 인정한다. 그의 의지와 실력도 평가한다. 그러나 저자의 결론은 박정희는 반신반인은커녕 위인도 되기 힘들다는 거다. 

박정희가 대한민국 사회에 남긴 가장 부정적인 유산은 '가치관 전도 현상'일 것이다. 박정희는 반칙을 일삼고도 출세했다. 이후 한국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출세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됐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원칙을 지키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오히려 바보 취급을 받았다. (328쪽)

사실 박정희는 반신반인은 물론 위인의 범주에 넣기도 힘들다. 위인은 보고 배울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위인이라면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리도 없지만.

"앞으로 식민 시대가 다시 온다면 식민 종주국에 충성해라. 앞으로 다시 군부 독재 시절이 온다면 군부 독재에 협력해라. 그리고 반칙을 일삼더라도 무조건 출세해라." (333쪽) 

경제로만 한정해도 '박정희 반신반인론자들'의 기준대로라면 덩샤오핑은 전신(全神)이다. 중국 면적은 남한의 100배, 인구는 27배다. 덩샤오핑이 1978년 권력을 장악했을 때는 '10년 대란'(1966∼1976)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 직후였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제대로 산업화 경험을 겪은 적이 없다. 1911년 신해혁명 뒤에는 군벌 쟁투, 만주사변, 중일전쟁, 22년에 걸친 국공 내전, 한국전쟁 참전(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사실 미국과 중국의 싸움이었다. 중국인들은 이 전쟁에서 미국에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 참전은 중국 지도부 모두 반대했는데 오직 마오의 결단으로 가능했다.),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1978년 개혁·개방 전까지 약 140년간 경제를 제대로 돌볼 틈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해외 화교 자본이 투자했다고 하지만, 이 거대한 땅과 인구를 개혁·개방으로 이끌고, 개혁·개방 36년 만에 G2로 우뚝 서는 기틀을 만든 게 덩샤오핑이다.

중국 역사의 3분의 1은 이민족 지배 역사라지만 그래도 자주파가 승리한 적이 많다. '이민족 지배 다음에 한족 지배'가 되풀이됐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보면 고구려 이후 자주파가 득세한 적이 없다. 민족 배신자(중국에서는 한간漢奸이라 부른다)를 단 한 번도 심판한 적이 없다. 

보수 논객들은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고 대놓고 얘기하지만, 그 영리한 중국인들이 '자존심은 결코 자동으로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걸 몰라 '민족적 체면'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겠는가?

이 책은 세 명(마오쩌둥, 덩샤오핑, 박정희)의 동아시아 지도자를 비교했지만 한국인과 중국인의 '밑바닥 문화 코드'를 드러낸다. 체면은 한두 번 잃을 수도 있다. 한나라 한신도 백정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 '돈은 언제라도 벌 수 있지만 한번 깎인 체면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며 중국인들이 마오를 숭상한다지만, 사실 체면은 10번이라도 깎일 수 있다. 

문제는 체면 깎이는 게 습성이 되는 거다. 깎인 체면을 부끄러워하는 사람과 수치심을 못 느끼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 추신 :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이 경제적 측면에서 그리 재앙이었다면, 개혁·개방을 시도한 지 불과 36년 만에 중국이 G2가 될 수 있었을까? 개방하고 외국 자본이 들어와서? 그렇다면 항상 개방 상태였던 '미국의 위성국가들'은 왜 중국처럼 성장하지 못했을까? 

사막에 물 몇 번 뿌린다고 바로 옥토가 되지 않는다.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