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관료주의에 물든 삼성…지금 당장 새 변경을 개척하라

일취월장7 2014. 7. 24. 08:50

사회평론가 복거일의 긴급 제언…과도기 삼성이 나아갈 길

 

한국의 대표 기업, 삼성그룹이 글로벌 산업 판도의 격변 속에서 리더십 전환기를 맞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자유주의 사회평론가이자 작가인 복거일 씨(68·사진)의 특별기고문 ‘변경을 찾아서-과도기의 삼성이 나아갈 길’을 통해 삼성그룹이 처한 현실과 정체성 위기를 진단하고, 새로운 도약의 항로를 찾는 시리즈를 게재한다.

복씨는 “삼성은 내부에만 맡겨두기에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중요하고 공적 특질을 지니게 됐다”며 ‘새로운 시장의 개척자’이자 ‘범지구적 기업’으로서의 정체성에 맞는 목표와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한 과제로 지배구조 정비와 내재적 위협 요인으로서 기업관료주의 타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의 모색’ 등을 제시했다.

 

[사회평론가 복거일 기고문]   관료주의에 물든 삼성…지금 당장 새 변경을 개척하라

입력 2014-07-21 23:03:41
변경을 찾아서 - 과도기의 삼성이 나아갈 길<1부>

한국의 대표적 자유주의 지성이자 작가, 사회평론가인 복거일 선생(68)의 기고문 ‘변경을 찾아서 - 과도기의 삼성이 나아갈 길’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복 선생은 2년 반 전 간암 판정을 받았지만, “글을 쓰는 데 방해된다”며 일체의 항암치료를 거부한 채 치열한 지적 탐색과 왕성한 글쓰기로 병마를 이겨내고 있다. 그런 복 선생이 최근 한국경제신문에 “삼성에 관한 글을 쓰고 싶은데, 게재할 수 있겠느냐”고 타진해 왔다. 전환기에 처한 한국 경제의 본질적인 문제를 한국의 대표기업인 삼성을 통해 짚어보고, 조언을 담겠다고 했다. 본지는 특정 기업에 관한 특정인의 글을 게재하는 것이 타당한지 고민했지만, 그의 경륜과 기업, 시장경제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을 존중해 가필 없이 그가 보내온 원고 그대로 싣기로 했다.

(1) 삼성의 위치

생명체든 사회조직이든 개인적인 조직도 아주 커지면 공적 특질을 지니게 된다


1953년 1월 미국 상원 국방위원회의 청문회장. 국방장관 후보 찰스 윌슨에게 상원의원들이 날 선 질문을 던진다. 윌슨은 오랫동안 GM을 이끌었으므로, 미국의 이익과 GM의 이익이 상충되는 상황에 대한 질문이 나온다. 윌슨은 대꾸한다, “우리나라에 좋은 것은 GM에 좋고, GM에 좋은 것은 우리나라에 좋다고 저는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모두 천진했던 시절이. 이제는 누구도 감히 그런 얘기를 하지 못한다. 미국에서도 기업에 대한 믿음이 거의 다 사라지고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사회에 가득하다.

20세기 중엽에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이었던 GM도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미국은 전 세계 생산의 거의 절반을 책임졌고, GM이 망하면, 포드나 크라이슬러가 이내 그 자리를 메워줄 터였다. 우리나라는 아주 작고, 외부의 충격에 무척 취약해서, 경제가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리고 삼성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몫이 워낙 크므로, 다른 기업들이 대신할 수 없다. 삼성이 흔들리면, 한국 경제가 흔들린다.

일러스트=추덕영기자 choo@hankyung.com

일러스트=추덕영기자 choo@hankyung.com


삼성에 적대적인 세력이 부르짖는 “삼성공화국”이란 말이 아주 그른 것은 아니다. 그들의 뜻과는 다른 뜻에서, 삼성은 한국의 생존과 번영에 결정적인 요소다. “우리나라에 좋은 것은 삼성에 좋고, 삼성에 좋은 것은 우리나라에 좋다”고 누가 감히 말한다면, 그의 얘기는 중공군이 우리를 위협하던 시절 윌슨이 한 얘기보다 훨씬 큰 정당성을 지닐 것이다.

크기는 사물의 구조와 움직임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커지면, 바뀐다. 생명체든 사회조직이든. 그래서 개인적 조직인 기업도 아주 커지면 공적 특질을 띠게 된다. 이제 우리는 삼성에 관해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삼성 계열사들의 단기 실적에 대한 걱정의 수준을 넘어서, 공적 특질을 지니게 된 삼성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워낙 크고 뛰어난 기업이라서 늘 주목을 받은 삼성으로선 반가운 일이 아니겠지만, 삼성이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삼성 자신에게 맡겨두기엔, 삼성은 너무 중요하다.

(2) 삼성이 맞은 과도기

빠른 추종자 전략의 성공은 삼성으로 하여금 개척자로 변신하도록 요구한다


지금 삼성은 과도기를 맞았다. 먼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삼성을 이끌어온 이건희 회장이 실질적으로 물러났고 자식들이 경영 일선에 나섰다. 경영에서의 흔들림은 전혀 없었고 시장도 그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큰 기업의 세대 교체는 긴 과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둘째, 정부가 권장하는 표준적 기업 지배구조에 맞추고 대주주 일가의 상속 과정이 어우러지면서, 삼성의 기업 지배구조에서 갑작스럽게 큰 변화가 나오고 있다. 셋째, 삼성의 무대는 한국에서 온 세계로 빠르게 확장된다. 특히 주력 기업인 삼성전자는 자산, 종업원, 그리고 생산에서 해외의 몫은 이미 국내의 몫을 압도한다.

넷째, 세계 시장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위치에서 근본적 변화가 나온다. 그동안 삼성은 여러 분야에서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 전략을 추구해왔다. 그런 전략의 성공은 삼성을 선두 기업으로 만들었고 삼성으로 하여금 개척자(path-finder)로 변신하도록 요구한다. 이제 삼성은 스스로 새로운 전략과 기술, 시장을 찾아내야 한다. 이런 변신은 불확실하고 오래 걸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계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뀐다. 지난 한 세기는 ‘미국 중심의 평화(Pax Americana)’였다. 모든 일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중요한 결정들은 모두 워싱턴과 뉴욕에서 나왔다. 이제 미국의 힘과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대신 중국이 빠르게 일어선다. 이런 상황은 우리 기업들엔 혼란스러운 환경을 뜻한다.

이처럼 여러 차원에서 과도기를 맞은 삼성으로선 향후 몇 해가 결정적 시기일 수 있다. 걱정스럽게도, 삼성은 자신이 나갈 방향도, 목표도, 전략도 또렷이 보여주지 못한다. 근년에 정보의 이용이 모든 면에서 혁명적으로 발전해서, 정보의 값이 아주 싸지자, 모든 분야에서 판을 뒤흔드는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이 점점 빠르게 나온다. 이런 상황에선 단 몇 해 머뭇거리는 일도 치명적일 수 있다.

(3) 정체성

삼성의 정체성은 범지구적 기업…한국 시장만을 상대할 때보다 창의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한다


갑작스럽게 닥친 과도기를 잘 견뎌내려면, 삼성은 먼저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과도기는 정체성이 흔들리는 시기이므로, 이 얘기는 실질적으로 동어반복이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국가든 정체성은 미래에 자신이 지닐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를 실제로 규정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지만, 그것만으로 정체성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 자신이 설 자리와 할 일을 결정해야, 개인이든 조직이든 국가든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예컨대 모든 면에서 동질적이었던 남북한이 정체성을 달리한 것은, 3년 동안 각기 미국과 소련의 군정을 받으면서 서로 다른 미래를 그렸기 때문이다. 인종과 역사, 언어를 공유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는 것도 공유할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삼성이 지녀야 할 정체성은 범지구적 기업(global firm)이다. 삼성은 한국 시장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그리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한국 기업’에서 ‘한국에 뿌리를 둔 세계 기업’으로 바뀌었다. 이제 삼성은 자신을 범지구적 기업으로 규정하고 그런 정체성에 맞는 목표와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당연히, 삼성은 범지구적 기업에 어울리는 기업 문화를 갖춰야 한다. 한국 시장만을 상대할 때보다 창의적이고 너그럽고 도덕적이어야 한다. 예컨대 법적 문제에 대응하는 부서의 책임자는 지금까지 대체로 검찰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던 인물들이 맡았다. 연고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렸고 ‘전관예우’라 불리는 구조적 부패가 만연한 한국에서 기업들은 법조계 인맥에 속하는 인물들을 중용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범지구적 기업의 법무 책임자라면, 국제적 안목을 지닌 기업법 전문가인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의 기대대로 범지구적 기업으로 변신한다면, 삼성의 한국적 특질은 어쩔 수 없이 옅어질 것이다. 삼성에 대한 우리의 마음엔 늘 고마움과 대견함이 어리겠지만 (1990년대 해외에서 SAMSUNG이란 로고를 보았을 때, 그 로고를 보고 “샘숭”이라 읽는 외국인들을 만났을 때, 문득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던 뜨거운 무엇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이제 삼성을 놓아주어야 한다. 온 세계를 무대로 삼아 활동하도록.

(4) 기업 지배구조

어떤 지배구조가 나은지는 선험적으로 알 수 없고 시장에서 시험돼야 판정이 나온다


오래전부터 한국 기업들은 지배구조를 정부가 권장하는 형태로 바꾸라는 압력을 받아 왔다. ‘순환 출자’ 구조를 지주회사 구조로 바꾸라는 얘기다.

이것은 어리석고 해로운 정책이다. 원래 기업의 지배구조는 기업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사람의 소관이다. 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다.

지주회사가 우리 사회에서 다른 지배구조들보다 낫다는 선험적 근거도 없다. 기업의 모습은 기업이 환경에, 즉 시장에, 적응하면서 다듬어진다. 그런 적응에 성공하면 기업은 자라나고, 실패하면 사라진다. 슘페터가 “창조적 파괴”라 부른 과정이다. 어떤 기업구조가 나은지는 선험적으로 알 수 없고, 실제로 시장에서 시험되어야, 비로소 판정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시장은 진화 과정이 가장 잘 작용하는 곳이다. 시장 상황에 잘 적응하면, 제품과 그것을 만든 기업들은 번창한다. 지배구조에서도, 시장의 상황에 잘 맞는 지배구조를 지닌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그래서 어떤 시점에 존재하는 기업 지배구조는 당시 상황에선 가장 낫거나 버금간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시장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은 역사적 정황에도 맞는다. 어떤 재화가 생산되려면, 먼저 소유권이 확립돼야 한다. 자신이 생산한 것을 자신이 소유한다는 확신이 없으면, 누구도 생산에 착수하지 않는다.

창업자는 자신이 세우려는 기업이 자기 것이 되리라 믿고서 기업을 세운다. 그리고 그 기업을 계속 자신이 소유하려 애쓴다. 기업이 자라나면, 외부 투자가 늘어나므로, 창업자의 지분은 점점 줄어든다. 당연히, 창업자는 줄어든 지분에도 불구하고 경영권을 유지하는 방안을 찾는다. 모든 성공적 지배구조는 이 조건을 충족시킨다.

이렇게 보면, 우리 재벌 총수들의 지분이 아주 작다는 사실은 창업자나 그의 후계자들이 적절한 지배구조를 찾아냈고 덕분에 투자가 꾸준히 이뤄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투자자들은 창업자를 믿고서 자발적으로 투자했고 불만이 있는 투자자들은 주식을 팔고 떠났다. 그런 과정의 어디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기업의 지배구조는 정치체제가 아니며, 기업 총수의 경영권 확보는 전제정치가 아니다.

그렇게 기업이 자라나면서, 소비자들은 삶이 윤택해졌고 종업원들은 일자리를 얻었고 정부는 세금을 점점 많이 거뒀다. 사회가 기업들에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잘 기능하는 기업의 구조를 뜯어고치려 하는가?

불행하게도, 우리 기업들은 정부의 비합리적인 간섭에 맞설 만한 힘이 없다.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과 힘센 관리들의 연합 전선에 밀려, 항의 한 번 못 해보고 지배구조를 바꾸기 시작했다.

떠밀려서 하는 일이니, 오죽하겠는가? 갖가지 부작용들이 나왔고, 기업들은 활동이 위축되었다. 기업의 대주주들은 자신의 경영권을 지킬 길을 찾느라, 경영을 소홀히 하고 투자는 엄두도 못 낸다. 주력 기업이 실질적으로 하나인 금융 기업 집단들에선 필요 없는 지주회사가 생기는 바람에 지주회사와 주력 기업의 경영자가 다투는 일이 잦다.

삼성은 몸집이 크고 해외 투자자가 많아서, 지배구조를 정부가 권장하는 대로 바꾸기 어렵다. 대주주 일가의 상속까지 겹쳐서, 작업이 무척 복잡하다. 물건과는 달리, 사람은 자신의 이해에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원래 사회 조직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삼성의 지배구조 조정은 기업의 내생적 논리보다는 그런 외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대주주 지분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가 이뤄질 경우 거액의 상속세금을 내야 하는 점까지 감안할 때, 대주주 지분이 줄어들면 경영권은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 삼성그룹의 공적기능과 책무를 생각하면 지분은 분산이 아니라 집중되는 것이 맞다.

(5) 내재적 위협 : 관료주의

관료주의는 조직의 크기와 비례…창의성 없어지고 위기를 감지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올해 들어 삼성전자와 협력사들은 수익 충격(earnings shock)을 겪고 있다. 그래서 삼성전자의 단기적 수익 전망에 관해서 논의가 많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삼성의 중장기적 전망도 함께 살피고 삼성에 열린 전략들을 검토해야 한다. 특히 삼성의 성공을 위협하는 요인들을 찾아내서 대비해야 한다.

삼성을 둘러싼 환경은 냉엄하다. 삼성의 터전인 한국은 작은 나라여서, 삼성은 큰 나라의 대기업들보다 원천적으로 불리하다. 게다가 한국은 사회주의적 이념이 큰 영향력을 지녔고 민중주의적 정책들이 경제 활동을 억압하는 사회여서, 삼성처럼 큰 범지구적 기업이 근거로 삼기 좋은 사회가 아니다. 국제 질서의 변화도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삼성으로선 걱정스럽다. 상대적으로 쇠퇴한 미국과 빠르게 부상한 중국은 각기 다른 이유로 자국 기업들에 유리하도록 시장을 조작한다.

이처럼 점점 험난해지는 환경에 적응해서 생존하고 발전하려면, 삼성은 강인한 기백을 지닌 조직이 되어야 한다. 걱정스럽게도, 삼성은 원숙한 대기업이 맞는 문제인 관료주의에 물들었다. 삼성을 오래 관찰한 사람들은 삼성 임직원들의 행태가 점점 관료적이 되어간다고 얘기한다. 외부의 눈길을 두려워해서, 무슨 일이든지 효율이나 효과를 찾기보다 말썽이 나지 않는 방식으로 처리하려 든다. 그런 관료주의가 삼성이 맞은 가장 큰 내재적 위협이다.

관료주의는 조직의 구성원들이 조직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작은 부서의 이익을 앞세우는 행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위험을 회피하고, 되도록 일을 벌이지 않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전가하고, 효율을 위한 개선에 적대적이고, 파벌을 지어 움직인다.

관료주의에 물든 조직은 창의성이 없어서, 활력이 작고, 특히 큰 위기를 감지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관료주의는 조직의 크기와 비례한다. 조직이 커지면, 내부 관계가 점점 복잡해져서, 조직원들의 활동은 내부 관계의 조정에 점점 많이 바쳐진다. 아울러, 조직의 크기는 3차원적이지만 조직이 외부와 접촉하는 면은 2차원적이므로, 조직이 커지면, 외부와의 접촉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자연히, 조직원들은 외부의 상황 변화에 둔감하고 내부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마음을 크게 쓴다.

관료주의에 대비되는 특질은 낭만적이고 모험적인 행태다. 그런 행태는 변경(frontier) 사회의 풍토에서 전형적으로 나온다. 모험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에만 의지해서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변경개척자(frontiersman)는 큰 조직에서 주로 서류를 움직이는 관료와 가장 대척적인 존재다. 정착하면, 어쩔 수 없이 관료주의가 나온다. 자신이 이끄는 기업이 관료주의에 물드는 것을 막으려는 경영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변경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건희 회장이 해 온 일이다. 기억하는가? - “아내와 자식만 빼놓곤, 모든 것들을 바꿔보자!”

개인에게나 조직에게나 인류에게나, 변경은 중요하다. 아서 클라크의 말대로, “문명은 새로운 변경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그것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새로운 변경들을 필요로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새로 개척할 시장이 없다면, 기업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쇠퇴해서 끝내 소멸한다.

페이팔(Paypal)에서 번 돈으로 스페이스X(SpaceX)를 설립해서 우주 사업으로 진출한 엘론 머스크는 화성에 사람들을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화성! 화성에 사람들을 보내는 일은 100년 안쪽엔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을 꿈으로 삼다니! 하긴 꿈은 그런 것이다. 눈길이 변경을 향하지 않으면, 꿈을 얘기할 수 없다.

인류의 마지막 변경(final frontier)이라는 우주를 자신의 시장으로 삼은 기업가가 화성을 얘기하는 것은 오직 자연스럽다. 삼성이 과도기를 맞았다는 얘기는 삼성이 변경을 잃었다는 것을 뜻한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로운 변경이었던 사업들이 이미 정착민들로 바글거리는 도시가 된 것이다. 삼성 임직원들이 관료주의에 물들었다는 평가는 삼성 경영자들이 당장 새로운 변경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삼성의 신수종사업엔 '와우!' 할 만한 스토리가 없다

변경을 찾아서 - 과도기의 삼성이 나아갈 길 <2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6) 새로운 시장의 모색

LED·의료 기기·자동차용 전지…
관료주의에 물든 삼성 사람들의 가슴에서
꿈과 개척정신을 불러낼 만한 변경들은 못 되었다


물론 삼성은 줄곧 새로운 시장들을 찾았다. “10년 뒤에 먹고살 일을 걱정”해온 이건희 회장은 우리 사회에선 가장 멀리 내다보고 대비해온 기업가다. 그런 노력은 ‘신수종사업’이라 불리는 사업 계획을 낳았다. 2010년에 발표된 이 계획은 5년에서 10년 뒤에 수익을 낼 사업들인 발광다이오드(LED), 자동차용 전지, 태양 전지, 의료 기기, 그리고 바이오시밀러를 포함했는데, 뒤에 착용형 기기와 사물인터넷(IoT)이 추가되었다.

사업들의 성과는 당연히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태양전지 사업은 포기되었다. LED, 착용형 기기, 사물인터넷은 주력 기업인 삼성전자로선 기술 혁신 과정에서 당연히 탐색해야 할 사업들이므로 신수종사업이라 할 것도 없고, 그 기술의 진화와 쇠멸도 정상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동차용 전지는 교통 수단에 점점 널리 쓰일 터이므로 유망한 사업이다. 의료 기기는 특수화된 분야지만 삼성전자의 휴대폰 사업과 연관이 있는 한도에선 나름으로 타당성이 있다.

바이오시밀러 사업은 타당성이 작다. 제약 산업은 이미 지식과 명성을 확보하고 국제적 영업망을 구축한 범지구적 제약 기업들과 새로운 지식과 기술로 틈새시장을 확보한 모험기업들로 이루어졌다. 그런 산업에서 특허권이 소멸된 약품들을 대량 생산하겠다는 전략은 성공하기 어렵다. 시장은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시설에 엄청난 투자가 필요한데 이문이 너무 박해서 수지를 맞추기 어렵다. 의료보험의 확대로 정부가 점점 중요한 고객이 되어가는 추세라 이문은 점점 박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삼성이 추종자에서 개척자로 변신한 지금, 남의 지적 산물을 거대한 자본으로 대량 생산해서 수익을 얻겠다는 발상은 퇴행적이고 삼성의 이미지에도 도움이 안 된다.

정작 아쉬운 것은 삼성의 신사업들이 서로 연관되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이 세상을 이야기의 형태로 파악한다. 모든 지식은, 일상적 정보부터 물리법칙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으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보는 이의 마음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도록 하지 않는 사물들은 단순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 진출하겠다는 사업들을 내놓으면 그들 사이의 연관성이 보는 이의 마음에 이야기 형태로 자연스럽게 떠올라야 한다.

아마존이 인터넷으로 책을 파는 기업에서 전자책 킨들(Kindle)을 보급하는 것을 거쳐 이제는 모든 것을 파는 기업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멋진 이야기라서 모두 탄성을 낸다. 바로 그 이야기 때문에 변변치 못한 수익을 내는 아마존을 시장이 높이 평가한다. 구글이 인터넷을 통해 지식의 지도를 제공하는 것에서 실제로 지구의 모든 길의 영상을 제공하는 것을 거쳐 그 정보에 의지해 움직이는 ‘운전자 없는 차(driverless car)’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은 더욱 멋진 이야기다. 구글이 다른 분야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다른 기업들이 구글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애플은 아예 자신이 만드는 모든 제품을 하나의 생태계로 만들겠다고 나섰다. 기업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이야기를 한 셈이다.

보는 이의 마음에 어떤 이야기가 저절로 떠오른다는 것은 사업 확장이 논리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아쉽게도 신수종사업엔 그런 이야기가 없다. 거의 모든 산업에 진출한 재벌이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사업들 사이의 연관이 너무 적다. 그래서 추진력이 약하고 공력효과(synergy)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한번 좌절하면 그 좌절을 경험으로 삼아 다시 일어설 기력이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에너지는, 우리의 몸이 필요로 하는 영양분까지도 궁극적으로 햇빛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태양전지 사업이 궁극적 기술을 찾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궁극적 기술에서 너무 쉽게 물러난 데서 이런 약점을 엿볼 수 있다.

이미 실용적임이 증명되어 5년 내지 10년 안에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술들을 골랐으므로, 원래 신수종사업은 관료주의에 물든 삼성 사람들의 가슴에서 꿈과 개척 정신을 불러낼 만한 변경들은 못 되었다. 삼성은 이미 빠른 추종자에서 개척자의 자리로 나섰는데, 아직 나아갈 변경은 찾지 못한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을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가?

(7) 실수를 잘 하는 길

새 사업 개척 과정서 실수는 필연적
중요한 건 그 실수가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 경험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뛰어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범지구적 기업 삼성을 이끌게 된 이재용 부회장의 처지는 무척 어려울 수밖에 없다. 원래 수성은 창업만큼 어렵다고 했지만, 지금 이 부회장이 진 책임과 거기 따르는 심적 부담은 보통 사람의 상상을 넘을 터이다. 더구나 그동안 우리나라는 기업들에 훨씬 비우호적인 사회로 바뀌었다. 전자산업만 하더라도, 반도체의 가능성을 먼저 인식하고 기업들에게 전자산업에 나서도록 격려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이제는 그런 지도자가 나오지도 않고, 설령 나오더라도 기업을 그렇게 보살필 힘이 없다.

이처럼 어려운 처지에서 이 부회장은 먼 지평을 지닌 변경을 삼성 안팎에 뚜렷이 제시하고 삼성 사람들을 그리로 이끌어야 한다. 그 과정은 당연히 험난할 터이고, 실수와 좌절들이 필연적으로 따를 것이다. 이 부회장이 맞은 어려움은 그런 실수와 좌절들을 견뎌내는 것이다.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이나 아직 세계적 기업이 못 되었던 삼성을 이끈 이건희 회장은 더러 실수를 해도 큰 비난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부회장은 처지가 다르다. 제국을 스스로 세운 사람이 누리는 존경심을 제국을 물려받은 사람은 누리지 못한다. 이 부회장이 저지르는 첫 실수나 좌절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일 반응은 이 부회장 자신에겐 악몽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실수를 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부회장이 어떤 길을 고르든, 실수와 좌절은 필연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실수가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일 뿐 아니라 소중한 경험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애플의 경험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애플은 PDA(personal digital assistant)인 ‘뉴턴(Newton)’을 개발했다. PDA가 중요한 제품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컴퓨터는 거대한 초기 컴퓨터에서 메인프레임(Mainframe), 미니컴퓨터(Minicomputer), PC, 랩톱(laptop), 노트북(notebook)으로 차츰 소형화되고 점점 개인의 일상적 정보처리 수단으로 진화했다. 그런 추세의 마지막은 PDA일 터였다. 그러나 뉴턴은 실패했다.

기술적 문제들도 있었지만 아직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게임기, 휴대폰 및 사진기가 빠르게 똑똑해졌고 마침내 휴대폰이 휴대용 정보처리 장치가 되었다. 애플은 너무 일찍 나와 실패한 뉴턴을 휴대폰에 얹어 아이폰(iPhone)을 만들어서, 스마트폰 시대를 활짝 열었다. 만일 애플이 휴대폰의 진화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뉴턴의 실패에 대해 성찰하지 않았다면, 스마트폰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라기보다 필연적인 실패를 잘 하는 것이다. 멀지만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고 거기로 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실패를 하고 그 실패가 목표에 이르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가 설명하는 것이다. 시장은 어리석지 않다. 그런 태도는 실패가 두려워서 몸을 사리고, 하던 일들만 하는 태도보다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8) 우리 사회가 막은 변경들

금융·농업 등 틈새시장이 있지만 삼성이 변경으로 삼기엔 모두 어렵다
현실적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미성숙 분야에서 변경을 찾아야 한다


삼성은 모든 면에서 뛰어난 기업이다. 그래서 계열사들도 거의 다 자기 분야에서 국내적으로는 가장 앞섰다. 자연히 삼성에 열린 변경도 다양하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금융업으로의 진출이다. 지금 우리 금융업은 지나친 규제와 전투적 노동조합 때문에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이고 혼란스럽다. 그래서 우리 경제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짐이 된다.

삼성이 진출해서 국제적 금융기업을 세운다면 삼성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삼성은 뛰어난 보험회사, 증권회사, 그리고 경제연구소를 거느렸으므로 진출 과정도 수월할 것이다. GE처럼 제조기업이 단숨에 금융업으로 진출해 크게 성공한 사례도 있으니 위험도 적다. 그러나 삼성의 금융업 진출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 대형 은행이 절실히 필요한 우리로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농업도 유망하다. 생명공학과 전자 기술의 발전은 ‘원시적 농업 기계’인 농토에서 ‘현대적 농업 기계’인 공장형 농장으로의 진화를 촉진한다. 삼성과 같은 기업이 우리 농업을 위해서 할 일은 많다. 농업에서 부가가치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종묘회사들이 극심한 불황 속에서 외국 기업으로 넘어갔다는 사실도 삼성처럼 뛰어난 기업의 참여를 호소한다. 그러나 동부그룹의 혁신적인 토마토 농사가 겪은 처참한 좌절이 가리키는 것처럼 막대한 농업보조금은 거대한 기득권 세력을 길렀고, 지금은 어느 정권도 농업시장의 자유화를 시도할 수 없다.

다른 분야에서도 유망한 틈새시장들이 있다. 그러나 삼성이 변경으로 삼기엔 모두 정치적 어려움이 따른다. 현실적으로 삼성은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원숙하지 않은 분야들에서 변경을 찾아야 한다.

(9) 인간의 노후화

무인항공기·무인자동차·무인화물선…
사람이 배제된 기계 기술은 새로 참여하는 생산자들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변경을 찾는 일은 상당히 먼 미래를 조망하는 일이다. 자연히, 인류사회가 보이는 장기적 추세들을 살피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런 추세들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노후화(Obsolescence of Man)’다.

일반적으로 어떤 기계의 작동 환로(loop)에서 사람은 가장 취약한 고리다. 사람은 실수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기계들과 사람 사이의 인터페이스는 복잡해서 사고의 가능성을 높이고 비용도 많이 든다.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사람을 환로에서 배제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기계들은 스스로 작동하는 존재로 빠르게 진화했다. 근년에 크게 발전한 무인항공기(drone)는 전형적이다.

앞으로 사람에 의해 조종되지 않는 기계들은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곧 나올 것이다. 요즈음엔 무인화물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이런 배의 선장은 선교에서 선원들을 지휘하는 대신 육지의 사무실에서 혼자 배를 조종할 것이다. 그런 배들은 물론 ‘유령선(ghost ships)’이라 불린다.

기계가 대치하는 것은 실은 사람의 근육과 일상적 판단만이 아니다. 사람의 중심적 특질이라 할 수 있는 지성까지 기계가 점점 많이 대신한다. 이미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 체계(expert system)라 불리는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사람의 지능을 보완한다. 전문가 체계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고하는 규칙과 자료를 정리해 스스로 판단할 뿐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능력까지 갖춰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다.

이런 추세에서 상징적 사건은 한 세대 전에 나왔다. 위상수학이 초기에 이룬 성과들 가운데 하나는 ‘4색 추측(four color conjecture)’이었다. 맞닿은 지역이 같은 색이 아니도록 지도를 칠하는 데는 네 가지 색깔로 충분하다는 얘기다. 이 추측의 증명은 보기보다 힘들어서 1976년에야 이 문제가 풀렸고, ‘4색 추측’은 마침내 ‘4색 정리 (four color theorem)’가 되었다. 그러나 증명의 과정이 너무 방대해서 사람이 그것을 다 읽는 것은 불가능하며 컴퓨터 프로그램만이 따라갈 수 있다. 즉 컴퓨터는 수학적 증명의 본질적 부분이 되었다.

이처럼 점점 많은 분야에서 사람은 쓸모가 없어진다. 1960년대에 과학소설가 아서 클라크는 이런 현상을 진단하고 ‘인간의 노후화’라 불렀다.

기계의 작동 환로에서 사람이 배제된 기술은 당연히 판을 흔드는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이 될 수밖에 없다. 기계의 작동에서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는 운전자, 선장, 조종사 같은 사람이 빠지면 기계 전체가 새로운 개념으로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자동차에선 계기반이 사라지고 다른 차들과 중앙통제소와의 무선 교신이 중요해질 것이다. 전투기는 조종사를 태우고 보호하기 위한 설비들이 없어지고 조종사의 육체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급속히 기동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전차는 승무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갑이 줄어들고, 쉬지 않고 여러 날 기동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변화는 기존의 생산자들에겐 큰 문제가 되고, 새로 참여하는 생산자들에겐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鳥翼機 산업에 SAMSUNG이 새겨진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변경을 찾아서 - 과도기의 삼성이 나아갈 길 <3부·끝>

< 鳥翼機(조익기) : 새처럼 날개를 퍼덕여서 나는 비행기 >

(10) 전지(battery)의 발전과 내연기관의 쇠퇴

구글이 무인자동차 제작을 결정하고 전세계 지리와 도로를 정보화해서 전략적 이점으로 삼은 것은 미래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고할 만한 추세들 가운데 작은 하나는 전지의 발전이다. 전지가 발전하면, 작은 수송 기계들이 내연기관 대신 전지에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내연기관이 발명되면서, 수송 수단은 거의 다 내연기관에서 추진력을 얻었다. 내연기관은 아주 효율적이어서, 자동차의 경이적 보급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도 전지가 발전하면, 내연기관은 실질적으로 사라지리라는 예측이 이미 반 세기 전부터 나왔다. 차에 연료를 싣고 다니는 것은 위험하고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전지의 발전은 예상보다 훨씬 느렸고, 덕분에 아직도 내연기관은 번창한다. 그러나 근년에 성능이 좋은 전지가 나오면서, 사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기계의 환로(loop)에서 사람이 배제되는 기본적 추세와 전지의 발전으로 전기자동차가 실용적이 되면서, ‘스스로 움직이는 전기자동차’가 실용화될 시기가 성큼 다가왔다. 이 분야에서 선구적이었던 메르세데스-벤츠와 GM을 비롯해 여러 자동차 제조 기업이 이 궁극적 자동차를 개발하고 있다. 최근엔 구글까지 가세했다.

삼성은 원래 이건희 회장의 주도 아래 자동차사업에 진출했었다. 그러나 과도한 초기 투자와 독자적 기술의 부족으로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다. 돌아보면, 참으로 애석한 실패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 회장이 이끄는 삼성은 한국 기업이었고, 그의 애국심은 그로 하여금 자동차사업을 국내에서 시작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기술과 브랜드를 지녔지만 경쟁력을 잃어가는 유럽의 작은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 키웠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었다. 인도의 타타가 인수한 유럽의 자동차 브랜드들의 성공은 이런 방안의 현실성을 입증한다. 아예 기술의 발전이 가리키는 방향을 잘 살펴서 처음부터 ‘스스로 움직이는 전기자동차’를 겨냥했다면, 더욱 나았을 것이다. 그가 “자동차는 실질적으로 전자제품”이라고 일찍이 통찰했으므로, 아쉬움은 더욱 크다.

어쨌든, 이제 삼성이 자동차 제조에 다시 진출하기는 어렵다. 국내 시장이 너무 작고 이미 현대·기아차가 선점한 상황에서, 특별한 이점 없이 나설 수는 없다. 구글이 ‘운전자 없는 자동차’를 만들려고 결정하고서 동시에 전 세계의 지리와 도로를 정보화해 전략적 이점으로 삼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러스트=추덕영기자 choo@hankyung.com

일러스트=추덕영기자 choo@hankyung.com


(11) 공간의 차원과 수송수단의 효율

근거리에선 1차원적인 철도와 지하철 2차원적인 자동차만 있을 뿐…만일 3차원적인 항공이 이용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변경이 될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커지면, 통신과 교통은 빠르게 중요해진다. 당연히, 통신산업과 교통산업이 발전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들을 살피면, 자동차 회사와 통신 회사가 유난히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특히 자동차 회사들이 크고 번창한다. “왜 자동차 회사를 만드셨습니까?”라는 물음에 정주영 회장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돈 잘 버는 회사가 모두 자동차 회사라서”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그 점을 일깨워준다.

삼성과 같은 범지구적 기업으로선 일단 교통산업 분야에서 변경을 찾아보려 시도해야 한다. 이미 꽉 차서 발을 들이밀 구석이 없어 보이는 교통산업에 틈새가 혹시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공간의 특질을 살펴야 한다. 영국의 위대한 천체물리학자이자 과학소설 작가였던 프레드 호일은 교통수단이 이용하는 공간의 차원이 높을수록 효율적이어서 빠르게 발전한다고 지적했다. 궤도를 따라가는 철도는 1차원적이고, 도로나 바다를 따라가는 자동차나 배는 2차원적이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3차원적이다. 그래서 자동차가 먼저 놓인 철도를 앞질렀고 항공 산업이 가장 빠르게 자라났다는 얘기다. 항구나 비행장이 병목이 되므로, 그런 차원이 완전히 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호일의 지적은 참고할 만한 통찰이다.

지금 장거리에선 항공이 압도적이고 철도와 선박이 주로 화물을 나른다. 중거리에선 자동차가 압도적이고 항공과 철도가 뒤따른다. 중거리 이상에선 3개 차원이 다 이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근거리에선 1차원적인 철도와 지하철 그리고 2차원적인 자동차가 있을 뿐, 3차원적 교통 수단이 없다. 헬리콥터가 특수 용도에 이용되지만, 본래 아주 불안정한 비행기여서 대중화되기 어렵고 소음과 바람 때문에 도심에서 운항하기도 어렵다.

만일 근거리에서 항공이 이용된다면, 획기적 사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목표가 가능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충분히 사람들에게 꿈을 보여주는 변경이 될 것이다.

(12) 조익기(鳥翼機)

조익기 추진과정서 실수는 나오겠지만 실패할 위험은 거의 없다
전자산업의 선두 기업인 삼성은 조익기 기술을 이미 확보하고 있다


근거리 비행의 모형은 새다. 날개를 만들어서 탈출에 성공한 다이달로스의 신화는 사람들이 늘 새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음을 말해준다.새처럼 날개를 위아래로 퍼덕여서 나는 비행기는 조익기(ornithopter)라 불린다. 새를 뜻하는 그리스어 ornithos와 날개를 뜻하는 pteron의 합성어다. 조익기의 설계자들은 새 말고도 박쥐나 곤충들을 모형으로 삼는다. 조익기는 조종사의 근육 힘으로 움직이는 것과 기관에서 동력을 얻는 것으로 나뉜다. 전자는 주로 취미 활동에 쓰이고, 후자가 산업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

프랭크 허버트의 과학소설 ‘사구(Dune)’에서 나는 처음으로 조익기를 만났다. 행성 전체가 사막인 환경에서 커다란 조익기들이 소리 없이 날아다니는 모습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여러 해 뒤 대전 세계박람회(EXPO)의 러시아관에 들렀다가, 한쪽에 전시된 모형 비행기들 속에서 조익기 모형을 발견했다. ‘흔들이식 날개를 가진 시험 비행기구의 장식 모델(A Demonstration Model of an Experimental Piloted Flapping Wing Aircraft)’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는데, 실물은 무게가 450㎏, 추진력 80마력, 날개 길이 8.2m로 시속 150㎞까지 낸다고 했다.

그 뒤로 조익기 개발은 다른 진전이 없었다. 2006년에 캐나다 연구자들이 기관으로 추진되고 조종사가 조종하는 조익기를 만들었는데, 이륙과 비행에 제트의 도움이 필요했다. 진정한 조익기는 아직 나오지 않은 셈이다. 실용적 조익기는 조종사 없이 스스로 날아야 한다.

이런 조익기가 나오려면, 적어도 여섯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1)천천히 퍼덕이는 날개로도 뜰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동체 (2)가벼우면서도 튼튼한 날개 (3)적절한 추진 수단 (4)둘레의 물체들을 인식할 수 있는 감지 장치 (5)필요한 정보들을 처리해서 운항할 수 있는 조종 프로그램, 그리고 (6)조익기의 3차원적 성격을 활용할 수 있는 교통통제 체계가 그것이다.

조건 1과 2는 새로운 소재들의 출현으로 이미 충족됐다. 조건 3은 전지의 발전으로 곧 충족될 것이다. 기관과 연료를 싣는 조익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오직 가벼운 전지만이 조익기를 가능하게 할 터인데, 근년에 전지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전기자동차의 보급은 전지를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조건 4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동차의 보급으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물론 조익기가 갖춰야 할 감지 장치는 자동차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하고 정교해야 한다. 특히 돌풍과 도심 빌딩 사이의 난기류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발전을 막을 만한 기술적 어려움은 보이지 않는다.

조건 5는 이미 무인비행기의 발전으로 충족됐다. 조건 6은 아마도 충족하기 가장 어려운 조건일 것이다. 사회 기반 시설이므로, 조익기가 보급된 뒤에야 투자가 가능한데, 그런 투자 없이 조익기가 보급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조익기는 얼마나 위험한 사업인가? 답은 명확하다. 실수와 좌절은 나오겠지만, 실용적 조익기 개발이 실패할 위험은 거의 없다.

새의 날개는 자연이 이미 1억5000만년 전에 발명했다. 곤충의 날개는 그보다 거의 곱절이나 오래되었다. 그처럼 오랜 세월 자연이 다듬어냈으므로, 우리는 새와 곤충의 날개를 그대로 본받으면 된다. 특히 바다를 유유히 나는 앨버트로스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날개는 부양과 추진을 동시에 하므로, 조익기는 아주 효율적이다. 수직 이착륙이 가능하고 기동성이 좋다. 경제적으로도 위험이 없다. 지금은 전혀 이용되지 않는 도심의 3차원적 공간을 교통에 이용하는 것은 매력적 방안이다. 도심의 극심한 교통 체증은 조익기를 자동차를 보완하는 교통 수단으로 만들고 조익기에 대한 투자를 정당화한다.

게다가 조익기는 아름답다. 비행기들도 기계치곤 멋있지만, 100년이 채 못 되는 시간에 사람들이 급히 다듬은 기계라 아득한 세월 동안 자연의 손길이 다듬은 새나 그것을 충실히 본뜬 조익기에 미칠 수 없다. 뭉뚝한 딱정벌레 같은 자동차들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기업들 가운데 삼성과 LG는 조익기에 필요한 기술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전자산업의 선두 기업들인 데다 전지 기술에서도 세계적으로 앞섰다. 조익기는 아직 기업은 주목하지 않고 동호인들이 취미로 연구하는 분야다. 멀리 내다보고 관심을 가진다면, 개척자의 자리에 오른 우리 범지구적 기업들이 세상에 내보일 수 있는 변경이 될 수 있다. 자동차산업에 다임러벤츠(Daimler-Benz)와 포드(Ford)라는 이름이 깊이 새겨진 것처럼, 조익기 산업에 SAMSUNG이나 LG라는 이름이 새겨진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13) 꿈속에서 책임은 비롯한다

삼성은 다시 꿈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룰 책임을 져야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변경을 찾아내 그 길로 과감히 접어들 때다


20여년 전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초일류기업이 되어 21세기에도 살아남는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의 비전을 다룬 ‘꿈과 책임’이라는 글에서 나는 “꿈은 위험한 물건”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미국 시인 델모어 슈워츠의 시구를 인용했다 “꿈속에서 책임은 비롯한다.”

 

20년이 지나지 않아, 삼성은 초일류 기업이 되었다. 이 회장은 자신의 꿈을 완벽하게 이루면서 스스로 진 무거운 책임을 벗었다. 이제 그의 후계자인 이재용 부회장이 자신의 꿈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룰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지려면, 그것에 걸맞은 권한이 있어야 한다. 만일 그가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변경을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꿈으로 보이고 거기 이르는 길로 과감하게 접어든다면, 세상은 그에게 그런 권한을 줄 것이다.